飛狐外傳 비호외전 6

3학년2반 | 2022.03.10 06:27:41 댓글: 0 조회: 519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4323
사랑과 연민
호비는 한바탕 울고 나자 울적하고 답답했던 가슴이 한결 후련
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때는 벌써 새벽빛이 뿌옇게 대지
를 감싸고 있었다. 그는 길을 재촉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몸을 일으
키려다 갑자기 '아이쿠!'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너무 흥분한 까닭에 항상 몸에 지니고 있던 보따리를 그만 놓아
두고 온 것이었다. 물론 돌아가서 찾아오면 되겠지만 묘인봉과 다
시 얼굴을 마주친다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정영소는 나직이 말했다.
[다른 물건은 없어져도 그만이겠지만 그 옥봉황만큼은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인데.......]
호비는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는 말인 것 같아 얼굴
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도록 하오. 내 달려가서 보따리를 가져오
리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오늘 밥을 먹고 객점에 묵을 은자마
저도 없다오.]
정영소는 그 말을 받았다.
[나에게 은자는 있어요. 그리고 금도 가진 것이 있다구요.]
그러면서 그녀는 품 속에서 조그마한 황금 두 덩이를 꺼냈다.
호비는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그도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
오는 권경도보인데 그것은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물건이라
오.]
그러자 정영소는 품안으로 다시 손을 집어넣더니 그의 권경도보
를 꺼내며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바로 이 책이 아닌가요?]
호비는 놀람과 기쁨으로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꼼꼼하구려. 무엇이든지 모두 나를 위해서 이렇게
세심한 배려를 하시는구려.]
정영소는 그 말을 듣고도 무표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길을 오다가 그만 그 옥봉황을 잃어버
렸어요. 정말 미안해요.]
호비는 그녀가 진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농담을 하는 것같지
않은지라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되돌아가서 찾아보리다. 이른 새벽이니 어쩌면 찾을 수 있
을지도 모르오!]
그는 황급히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정영소가 갑
자기 입을 열었다.
[어머나! 저기 반짝거리는 물건이 무엇이지요?]
그리고는 그녀는 숲 속에서 노리개를 하나 집어들었다.
찬연한 빛을 발하는 것이 바로 원자의가 준 그 옥봉황이 아닌
가?
호비는 기뻐하며 칭찬의 말을 했다.
[당신이야말로 여자 제갈량이고, 나이 어린 장량(張良)이라 불
초는 두 손 들었습니다.]
정영소는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히 말했다.
[이 옥봉황을 보니 당신은 정말 기뻐하시는군요. 자, 돌려드리
죠.]
옥봉황을 건네주며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호 오라버니, 우리 다음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래요.]
호비는 어리둥절했다.
[당신 화가 났소?]
[내가 왜 화를 내겠어요.]
그러나 그녀는 눈가를 붉히며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다...... 당신 어디로 가려는 거요?]
정영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몰라요.]
[모르다니요.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부모님도 안계시고 사부님마저 돌아가셨어요. 더우기 나
에게 옥봉황이나 옥기린(玉麒麟)을 선물할 사람도 없어요. 나는,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라요.]
그녀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끝내는 고개를 숙이고 흐느꼈다.
호비는 그녀와 알게 된 이래로 그녀의 마음이나 생각이 꼼꼼하
면서도 치밀하여 여러모로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을 했다. 또
한 그녀는 어떠한 어려운 일에 부딪히더라도 칼로 무우를 베듯이
단호하고도 쉽게 해결하는 것을 보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차가운 새벽 바람을 맞으며 애처롭게 흐
느끼고 있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어깨를 들썩이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니 어찌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호비는 연민의 정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영소저, 내가 잠시 동안 바래다 드리리다.]
정영소는 등을 돌린 채 옷소매에 눈물을 닦으며 넌즈시 입을 열
었다.
[나는 어디로 가야할 지도 모르는데 당신이 무엇 때문에 바래다
준다는 거예요? 당신이 묘인봉의 눈을 치료해달라는 부탁을 나는
이미 들어주었으니 더 이상.......]
호비는 그녀를 즐겁게 해주려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 한 가지 일이 더 남아 있소이다.]
정영소는 몸을 돌리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내가 당신에게 묘인봉의 눈을 치료해 달라고 부탁할 때, 당신
도 나에게 한 가지 일을 부탁하겠다고 하지 않았소? 무슨 일인지
당신이 아직 나에게 말하지 않았소이다.]
정영소 역시 나이 어린 발랄한 처녀인지라 갑자기 눈물진 얼굴
에 웃음을 띠우고 입을 열었다.
[당신이 들먹이지 않았더라면 나는 까맣게 잊어버릴뻔 했어요.
이거야 말로 스스로 죄를 짓고는 못산다는 말과 같네요. 좋아요,
당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던 당신은 모두 응낙하겠다고 말했죠?]
호비는 진심으로 그녀를 위해서 기꺼이 어떤 일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는 가슴을 펴며 즉시 그 말을 받았다.
[나의 힘이 닿는한 명을 저버리지 않겠소이다.]
정영소는 손을 내밀고 말했다.
[좋아요, 그렇다면 그 옥봉황을 나에게 주세요.]
호비는 순간 어리둥절하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찌
하겠는가? 그는 자기가 한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인지라 즉시
옥봉황을 내밀었다. 정영소는 그 옥봉황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말했다.
[내가 그것을 가져서 무엇을 하겠어요? 나는 당신이 그 옥봉황
을 박살나도록 땅바닥에 내팽개쳐 깨뜨리기를 바래요.]
호비는 이 일만은 절대로 할 수가 없어 그만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정영소의 얼굴과 옥봉황을 번갈아 바라보며 어찌해야 할 지
몰랐다. 원자의의 아리땁고 간드러진 미소와 날씬한 몸매가 몇 번
이나 머리 속을 오락가락 하는 것이 아닌가?
정영소는 천천히 그의 곁에 다가오더니 옥봉황을 받아들고 그의
품안에 다시 넣어주며 미소를 띠었다.
[그러니 앞으로는 절대로 가볍게 남의 부탁을 들어준다는 말을
하지 마세요. 세상의 일들 중에는 입으로는 쉽게 응낙을 할 수 있
지만 실제로 행할 수 없을 때가 있는 거예요. 됐어요. 자, 우리
가요!]
호비는 허전함이 밀려오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고 뭐라고 말 할
수 없는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그는 묵묵히 그녀의 칠심해당 화
분을 들고 뒤를 따라갔다.
정오가 다 될 무렵, 그들은 커다란 고을에 이르게 되었다.
호비는 입을 열었다.
[객점으로 가서 일단 식사를 하고 두 필의 말을 사도록 합시
다.]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비단 장포를 걸친 상인 차림의 중
년 사내가 앞으로 다가오더니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혹시 호 나으리가 아니신지요?]
호비는 이 사람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지라 답례를 하면서 물었
다.
[예 맞소이다. 실례하지만 귀하는 성씨가 어떻게 되시며 불초를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구려.]
그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인은 주인 나으리의 명을 받들어 이곳에서 삼가 기다린지 오
래 되었지요. 일단 저쪽으로 가시어 초라하나마 요기라도 하시지
요?]
그는 공손히 두 사람을 어느 주루로 안내를 하는 것이었다.
주루의 사환은 그 사람이 분부를 하기 전에 즉시 술과 음식을
차려왔다. 말로야 조촐한 음식이라고 했지만 매우 푸짐하고 정성
스러운 술자리라고 할 수 있었다.
호비와 정영소는 모두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그 상인이 아래쪽에
앉아서 시중을 들며 어떤 사람의 분부로 이렇게 한턱 쓰는 것인지
도무지 말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역시 캐묻지 않고 마음껏 음식
을 먹었다.
이윽고 술과 식사가 끝나자 상인은 입을 열었다.
[저쪽으로 자리를 옮기시고 편히 쉬도록 하시지요.]
주루에서 내려와 보니 어느새 밖에는 하인인 듯한 사람이 커다
란 말 세 필을 끌고 대기하고 있었다. 세 사람이 말에 올라타자
그 상인이 앞에서 길을 안내했다.
고을에서 벗어나 오륙 마장을 나아가자 커다란 장원 앞에 이르
렀다.
수양버들이 곧게 뻗어 저택에 늘어져 있었고, 흰 담장에 검은
칠을 한 대문 등, 보기만 해도 예사로운 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원 문 육칠 명의 장정들이 도열하고 있다가 그 상인이 오는
것을 보고 일제히 손을 앞에 모으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영접을
했다.
그 상인은 호비와 정영소를 대청으로 모시더니 차와 과일을 차
려왔다.
호비는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내가 저 사람에게 왜 이런 융숭한 대접을 하느냐고 물어본다
해도 그는 틀림없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일단 그가 하는
대로 두고보며 임기응변으로 대처해야 하겠구나.)
그리고는 즉시 정영소와 길을 오면서 보았던 연도의 풍물이나
경치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그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상인은 공손히 접대만 할 뿐 두 사람이 주고 받는 이
야기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다과를 들며 한참 이야기를 주고 받자 이윽고 상인이
입을 열었다.
[호 나으리와 소저께서는 길을 오시느라고 피곤하실 터이니 내
실로 들어가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도록 하시지요.]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의 말투를 미루어 볼 때 정소저의 내력을 잘 모르는 것 같구
나. 그렇다면 잘 된 일이다. 만약 이들이 감히 독수약왕의 제자
앞에서 독을 쓰려고 한다면 그야말로 도끼로 자기 발등을 찍는 꼴
이 될 것이다.)
호비는 즉시 가정을 따라 내당(內堂)으로 들어갔다. 다른 하녀
들이 와서 정영소를 후원으로 가서 목욕할 것을 권유했다.
두 사람은 잠깐 휴식을 취한 후 다시 대청으로 돌아왔다. 서로
를 쳐다보니 상대방의 의복과 신발이 모두 새 것임을 알 수 있었
다.
정영소는 나직이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호 오라버니, 설 쇠러 이곳에 오셨어요? 어쩜 그렇게 곱게 단
장을 하셨어요?]
호비는 그녀가 얼굴에 옅은 화장을 하여 청순한 얼굴에 약간 교
태어린 화사함이 느껴져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꼭 새색시 같구려.]
정영소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린 채 아랑곳하지 않았다. 순
간 호비는 자기가 실언을 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을
몰래 훔쳐보니 그녀는 노기를 띤 얼굴이 아니라 짓궂음을 책망하
는 듯한 수줍은 눈빛만 볼 수 있었다.
이 무렵 대청에는 다시 산해진미가 모두 갖추어진 풍성한 술상
이 차려져 있었다. 그 상인은 호비에게 석 잔의 술로서 경의를 표
한 이후 안으로 들어가더니 손에 목판을 들고 나왔다.
그 목판 위에는 붉은 베로 싼 보따리가 놓여 있었다. 보따리를
펼치자 그 안에는 금사를 박아서 도금을 한 장부가 있었고 겉장에
는 '삼가 호비 나으리께서 웃으며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두 손으로 장부를 들고 호비에게 내
밀며 입을 열었다.
[소인은 주인님의 명을 받아 이 보잘 것없는 선물을 호 대야님
께 바치는 바입니다.]
호비는 그 장부를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되물었다.
[귀장의 주인은 누구시지요? 어째서 불초에게 이러한 예물을 건
네주는 것입니까?]
상인은 말했다.
[저의 주인님께서 분부하시기를 절대로 주인님의 신분을 밝히시
지 말라고 하실 뿐 차후 호 대야께서 자연히 알게 될 것이라고만
말씀을 하셨지요.]
호비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그 장부를 받아 들쳐보았다.
그 장부의 첫 장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상등의 논 사백 열다섯 마지기 칠푼.>
그리고 그 아래에는 논의 주변과 위치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었
으며, 소작인이 누구이며 조곡은 얼마인지 일일이 적혀있었다.
호비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내가 이 사백여 마지기의 논을 가지고 어쩌라는 것일까?)
다시 두번째 장을 넘기니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었다.
<오진(五進)으로 이루어진 장원 한 채, 누방(樓房) 열 두 칸,
방 일흔 세 칸.>
그리고 그 아래에는 역시 작은 글씨로 상세히 장원의 사방을 설
명하고 몇 자 방에 명칭과 화원, 대청, 상방, 아궁이, 나무를 보
관하는 창고, 마굿간 등등 모든 것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다시 책장을 넘기니 장원의 하녀와 하인들의 이름과 하루에 소
요되는 돈과 양식, 가축, 수레와 가마, 가구, 옷가지 등등이 어떻
게 갖추어져 있는지 분명하게 기록해 놓고 있었다.
호비는 한번 뚫어보고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며 장부를 정영소에
게 넘겨주며 말했다.
[당신도 한번 보시구려.]
정영소는 호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무슨 의도인지 알아
차릴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부자가 되신 것을 축하해요!]
그 상인이 끼어들며 말했다.
[저의 주인님께서는 창졸지간(倉卒之間)에 모든 것이 골고루 갖
추어지도록 준비를 하지 못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하셨소이
다.]
그리고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나중에 소인이 호 대야님을 모시고 집안을 두루 구경시켜 드리
겠습니다.]
호비는 물었다.
[당신의 존성은 어떻게 되시오?]
[소인의 성은 장씨이외다. 이곳의 전답과 집들은 잠시 호 대야
님을 대신해서 관리를 하고 있는 중이지요. 호 대야님이 보시기에
마땅치 못한 것이 있으시면 소인에게 분부만 내리십시요. 그러면
알아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논밭과 가옥에 대한 문서들
은 모두 여기에 있으니 호 대야님께서 보관하십시요.]
그러면서 다시 한 뭉치의 문서를 올려 바쳤다.
호비는 담담히 말했다.
[당신이 당분간 가지고 계십시요. 옛말에 이르기를 공이 없으면
녹(祿)을 받지 않는다고 했소이다. 나는 이토록 후한 예물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 같구려.]
호비는 어려서부터 강호를 떠돌아다니고 이상야릇한 일들을 많
이 겪어왔지만 갑자기 이러한 후한 예물을 받아본 적이 없었고,
또한 예물을 준 사람이 대면하기를 피한다는 말은 겪어보기는 커
녕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 장가라는 사나이의 행동거지로 보아 그는 무공을 전혀 모르
는 사람 같았고, 말투를 들어보아도 무림에 몸담고 있는 사람의
냄새를 전혀 풍기지 않았다. 다만 그는 주인의 명을 받고 일처리
를 할 뿐,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술과 식사가 끝나자 호비와 정영소는 서재로 가서 휴식을 취했
다. 서재의 사방은 모두 책으로 꽉 차 있었고 탁자와 바둑판이 놓
여 있었으며 책장 위에는 거문고가 진열되어 있는 것이 무척 우아
하고 운치가 있었다. 서동이 차를 날라주고 물러나자 서재에는 호
비와 정영소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정영소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호원외(胡員外)님, 당신이 이곳에서 나으리가 되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호비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지만 곧 바
로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엔 선물은 보낸 사람은 틀림없이 나쁜 뜻을 품고 있
는 것 같소.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군요.
이렇게 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정말 모르겠구려.]
정영소는 말했다.
[혹시 묘인봉이 아닐까요?]
호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사람은 나와 불구대천의 원수이지만 내가 보기에 광명정대
한 사람이고 보기드문 호걸이외다. 그러니 이러한 치사한 노릇을
하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당신은 그를 도와 적을 물리쳤으니 그가 예물을 보내 사의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또한 원한에 대한 화해를 바라고 있
는지도 모르니 이렇게 하는 것이 참다운 도리라고 생각하지 않으
세요?]
호비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 호가가 어찌 금은 전답에 눈이 어두워 부모의 커다란 원한
을 잊을 수 있겠소이까? 아니오, 아니오! 묘인봉은 이렇게까지 나
를 얕보지는 않을 것이오.]
정영소는 혀를 내밀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오히려 당신을 과소평가한 것이군요?]
두 사람은 반나절 동안이나 상의를 했으나 어떤 실마리도 찾아
낼 수 없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조그마한 단서라
도 알아내야겠다고 결심했다.
밤이 되자 호비는 후당에 있는 큰 방에서 잠을 잤고, 정영소는
화원 옆에 있는 규방에서 잠자리를 마련했다. 호비는 한 평생 이
와 같은 화려한 집에서 지내본 적이 없었고 더구나 이것이 자기
집이라고 하니 더욱 불가사의했다.
호비는 이경 무렵이 되자 자리에서 일어나 살며시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지붕 위로 올라가서 몸을 엎드리고 살펴보니 서쪽
후원의 등불이 아직도 꺼지지 않은 것을 보고 경신법을 펼쳐 그쪽
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처마끝에 발을 갈고리처럼 걸고 도권주
렴(倒捲珠簾)의 신법을 구사하여 창문 틈으로 안을 살폈다.
그 장가라는 상인 차림의 사나이는 달그락거리며 주판을 튕겨가
며 계산을 하고 있었고, 한 늙은 하인이 그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 장가는 장부에다 몇 자를 끌쩍거리더니 그 하인과 몇
마디를 주고 받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다 일삯과 나무, 쌀
등 자질구레한 집안 일들에 관한 것이었다.
호비는 한참동안 듣고 있었으나 아무런 단서를 잡지 못한 채 막
돌아가려는 찰나 갑자기 동쪽 지붕에서 가벼운 기척이 들려왔다.
몸을 숙이고 칼자루를 쥐며 자세히 바라보니 나타난 사람은 뜻밖
에도 정영소였다. 그녀는 호비에게 다가오라고 손짓을 했다.
호비가 달려가자 정영소는 나직이 말했다.
[제가 앞뒤를 모두 살펴보았지만 전혀 수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어요. 당신은 뭔가 발견한 게 있나요?]
호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 수 없이 두 사람은 각기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으나 경계를 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고 제
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자 동자와 하인들이 삼탕과 제비
집으로 끓인 차를 바치더니 곧이어 국수와 만두 등 간단한 요기거
리를 날라왔다. 호비에게는 따로 장원홍(狀元紅)이라는 맛좋은 술
을 한 주전자 추가했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영소저가 있어 말친구가 되어주니 그런대로 쓸쓸하지는 않구
나. 여기에서 그냥 산다면 아무 근심 걱정 없이 편안한 생활을 누
릴 수 있을 것 같군.)
그런데 갑자기 다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 봉가라는 흉악한 놈이 종아사 일가를 몰살했는데, 내가 그
억울한 한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는가?)
막상 그 일이 생각나자 가슴에는 뜨거운 피가 용솟음쳐 올라 즉
시 정영소에게 말했다.
[우리 이만 떠나는 것이 어떻소?]
정영소는 어디로 가느냐는 말도 묻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좋아요. 이제 출발할 때가 되었네요.]
두 사람은 각기 침실로 돌아가 원래 입었던 낡은 옷으로 갈아입
었다. 호비는 장가라는 상인에게 말했다.
[우리는 가겠소.]
이 한 마디를 하고나서 바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자 장가라는
자는 몹시 어리둥절하여 말했다.
[아니...... 아니...... 이렇게 빨리 떠나시는 겁니까? 호
대...... 호 대야님, 소인이 가서 노자돈을 준비할 터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요.]
그가 안으로 들어가 커다란 목판 위에 금덩이와 은덩이를 가지
고 나왔을 때는 이미 두 사람이 멀리 떠난 후였다.
두 사람은 큰 걸음으로 북쪽을 향해 나아갔다.
정오 무렵에 그들은 한 고을에 이르렀다. 그들이 어젯밤 묵은
곳을 수소문해서 알아보니 그곳은 의당진(義堂鎭)이라는 곳이었
다.
호비는 은자를 꺼내 두 필의 말을 사서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이제까지 겪었던 이상한 일에 대해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정영소가 말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잠까지 잤는데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않은
것을 보면 그 주인은 결코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
군요.]
하지만 호비는 꺼림찍한 표정으로 그 말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이 아무래도 모종의 꽁꽁이 속이 있는 것 같
은 느낌이 드는구려.]
정영소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오히려 그러한 요상한 일들을 자주 당했으면 하는 바램인
걸요. 그런데 이봐요, 호 대야님. 당신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
지요?]
[나는 북경으로 가고자 하오. 당신도 함께 가서 구경이나 하는
것이 어떻겠소?]
[나쁠 것은 없지요. 하지만 당신이 불편하지 않을까요?]
호비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 뭐가 불편하다는 것이오?]
정영소는 웃으며 넌즈시 입을 열었다.
[호 대야님께서 그 옥봉황을 준 소저를 만나러 가시는 길에 잔
심부름을 시킬 이 하녀를 반드시 데리고 가야 속이 시원하시겠어
요?]
호비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오? 나는 원수를 죽이러 가는 것이오. 그 자의 무
공은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지만 주변 사람이 많고, 교활하기 때
문에 영소저가 나를 도와주시기를 바라고 있던 참이라오.]
이윽고 그는 불산진에서 봉천남이 어떻게 종아사의 전 가족을
몰살했으며 또 이런저런 사정으로 사당에서 비를 피하다가 서로
마주치게 되었고 그가 다시 도망치게 된 상황을 일일이 다 설명해
주었다.
정영소는 그가 봉천남과 사당에서 어떤 연유에서 마주치게 되었
고 도망을 쳤는지 말하면서 약간 얼버무리듯 말을 하자 대뜸 입을
열었다.
[그 옥봉황을 준 소저 역시 그 사당에 있었겠지요. 그렇지 않나
요?]
호비는 어리둥절했다.
(이 아가씨는 총명하기 이를데 없다. 하지만 나는 양심에 어긋
나는 일을 한 것이 아니니 이 아가씨에게 구태여 속일 필요는 없
을 것이다.)
이윽고 그는 어떻게 원자의를 알게 되었으며, 또 그녀가 세파의
장문인 자리를 빼앗았고, 또 어떻게 봉천남을 구해주었는가 하는
모든 이야기를 하나도 빼지 않고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정영소는 다시 물었다.
[그 원소저라는 분은 물론 미인이겠죠. 그렇죠?]
호비는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말했
다.
[상당한 미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처럼 못난 계집애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겠지요?]
호비는 그녀가 이토록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해오리라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몹시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누가 당신보고 못난 계집애라고 말합디까? 원소저는 당신보다
도 나이가 몇 살 더 많으니 자연히 키가 더 클 것이 아니겠소?]
정영소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여덟 살때 엄마의 거울을 가지고 놀고 있었는데 언니가
말하기를 '이 못난아. 비춰볼 필요도 없다! 비춰본다고 추팔괴(醜
八怪)가 어디가냐?'하고 말을 했지요. 그러나 나는 '흥!' 하고 아
랑곳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 당신은 짐작
할 수 있겠어요?]
순간 호비는 섬칫한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언니를 독살하지 않았다면 좋겠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딴청을 피우며 말했으나 떨리는 음성을
억제하지는 못했다.
[나는 모르겠구려.]
정영소는 그의 음성이 약간 떨리고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그
의 생각을 짐작이라도 하는듯 넌즈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가 우리 언니를 독살했을까 두려워하는 것인가요? 그
때 나는 겨우 여덟 살이었어요. 음...... 이튿날 집안에 있는 거
울이 모조리 사라지고 말았지요.]
호비는 전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군요.]
정영소는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설명을 했다.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어요. 내가 전부 우물 속에 던져버렸으
니까요.]
그리고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말했다.
[그러나 내가 거울을 모조리 내다버리고 난 뒤에 곧 깨닫는 것
이 있었어요. 태어날 때부터 못생긴 사람은 설사 거울이 없다 하
더라도 못생긴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을 말이죠. 그 우물에 내 얼
굴이 비추게 되었을 때 나는 정말 우물에 빠져 죽고 싶었어요.]
거기까지 말하더니 그녀는 갑자기 채찍을 들어 말엉덩이를 미친
듯 후려치며 앞으로 급히 달려가도록 만들었다.
호비도 말을 몰아 그 뒤를 따랐다. 단숨에 십여 리 길을 달려가
더니 정영소는 말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멈추었다.
호비는 그녀의 눈시울이 불그레한 것을 보고 틀림없이 조금전에
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속
으로 생각했다.
(당신은 비록 원소저 만큼 아름답지는 않지만 결코 못난이는 아
니라오. 더군다나 사람이란 품성이 제일이고, 재주와 지혜가 둘째
이외다. 얼굴이 잘 생기고 못 생긴 것은 천성적으로 타고 난 것인
데 어찌 그것 때문에 상심하고 슬퍼하십니까? 당신은 모든 일을
지혜롭게 대처하는데 어째서 이 문제만큼은 그토록 속 좁게 생각
하고 계십니까?)
그녀의 수척한 옆모습을 보니 자기도 모르게 연민의 정이 우러
나오는 것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나는 한가지 당신에게 부탁할 일이 있는데 응낙하실지 모르겠
구려. 혹시 내가 너무 높이 뻗쳐 있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닐런지 모르겠구려.]
정영소는 몸을 약간 움찔하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 당신은 무슨 말씀을 하려는 거예요?]
그녀의 뒷편에 서 있던 호비는 그녀의 귀밑뿌리와 얼굴이 발그
스레해진 것을 보고 천천히 말했다.
[당신이나 나나 모두 부모나 친지들이 없는 사람이외다. 나는
당신과 의남매를 맺고 싶은데 당신 생각은 어떠시오?]
정영소는 삽시간에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더니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그거야 안될 것이 없죠. 나에게 이러한 오라버니가 있
다는 것은 그야말로 바라마지 않던 일이지요.]
호비는 그녀의 말속에 약간 비꼬는 투가 서려있음을 깨닫고 어
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진심으로 말씀드리는 것이오.]
[그럼 나는 뭐 거짓으로 응낙한 줄 아세요?]
그리고는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길 옆에서 흙을 모아 향을 대신
하여 무릎을 구부리고 땅에 꿇어앉는 것이었다.
호비는 그녀가 그토록 시원시원하게 나오는 것을 보자 덩달아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몇 번 절을 하고, 서로 마주보며 절을
했다.
정영소가 말했다.
[사람들이 모두 팔배지교(八拜之交)라고 말을 하는데 우리도 여
덟 번 절을 하도록 해요. 하나, 둘, 셋, 넷...... 일곱, 여
덟...... 음, 나는 누이 동생이니 두 번 더 절을 해야죠?]
그러더니 그녀는 두 번 더 절을 하고나서 일어났다.
호비는 그녀의 언행이 갑자기 이상해지는 것을 보자 약간 어색
한 기분이 들어 넌즈시 입을 열었다.
[나는 오늘부터 당신을 둘째 누이라고 부르겠소.]
[맞아요. 당신은 저의 큰 오라버니예요. 그런데 우리는 어째서
'복이 있으면 함께 나누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서로 힘을 합한
다'는 등의 맹세를 하지 않나요?]
호비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의를 맺는다는 것은 마음으로 맹세를 하는 것이지 말로 하나
속으로 하나 마찬가지이외다.]
정영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알고보니 그렇군요.]
그리고 그들은 다시 말등에 올라탔다.
황혼 빛이 서녘 하늘을 물들일 때까지 그녀는 시종 호비에게 말
을 걸지 않았다.


괴이한 도적(盜賊)
해질 무렵 호비와 정영소는 안륙(安陸)에 이르렀다. 두 사람이
말을 몰아 거리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점소이 한 명이 다가와서
말고삐를 잡으며 말했다.
[혹시 호 대야님이 아니신지요? 어서 이리로 오시지요.]
호비는 이상하여 물었다.
[당신이 어떻게 나를 아는가?]
점소이는 웃으며 말했다.
[소인은 이곳에서 대야님을 반나절이나 기다렸답니다.]
막무가내로 그는 말고삐를 끌고 앞장서서 안내를 하더니 지붕이
높고 탁 트인 객점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미리 마련을 해 놓은듯
호화로운 상방(上房)으로 호비 일행을 안내하였다. 그리고는 주문
하지도 않았는데 차와 음식을 줄줄이 가지고 들어왔다.
호비는 그 점소이에게 누가 이토록 접대를 하라고 시켰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점소이는 웃으며 말했다.
[의당진의 호 대야님을 어찌 몰라뵙겠습니까?]
그는 그렇게만 말할 뿐 더 이상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계산을 하려고 하자 주인은 연신 허리를 구부리며
이미 지불되었다고 사양했으며, 그저 점소이만이 몇 푼의 은자를
사례비로 받을 뿐이었다.
그들은 며칠 동안 여행하는 도중에 객점에 들를 때마다 번번이
이러한 대접을 받았다.
호비와 정영소는 모두 누구보다도 총명한 사람이었지만 나이가
젊고 경력이 짧아서인지 도통 이것이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
다.
나흘째 되던 날, 길을 떠나며 정영소는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제가 계속해서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우리의 앞뒤로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렇다면 틀림없이 누군가 한발 앞서
서 오라버니의 용모나 옷차림을 말하고 사람을 시켜 지키도록 한
걸 거예요. 우리가 변장을 하고 옷차림을 바꾼 연후에 옆에서 살
펴본다면 혹 진상을 알 수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호비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그것 참 묘책이구려.]
두 사람은 장터에서 옷과 신발, 모자를 구입해서 교외로 나가
인적이 드문 숲속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변장을 했다.
정영소는 머리카락을 잘라 가짜 수염을 만들어 호비에게 붙여
그를 사십 대의 중년 남자로 분장을 하도록 했으며, 자신은 장삼
을 걸치고 머리에 작은 모자를 써서 왜소한 젊은이로 변장을 하였
다.
두 사람은 서로 쳐다보며 한바탕 소리내어 웃었다.
그들은 시내로 들어가서 타고 있던 말을 당나귀로 바꾸었다. 호
비는 칼을 보따리 안에 넣고 곰방대를 사서 몇 모금 들이마셨다가
연기를 내뿜었다. 그의 이와 같은 모습은 제아무리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았다.
이 날 해질 무렵에 그들은 광수(廣水)에 당도하였다.
큰 길가에 두 명의 사환이 목을 길게 빼고 사방을 이리저리 두
리번거리고 있었다. 호비는 그들이 바로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다
는 것을 알고 속으로 웃으며 곧장 객점에 투숙했다.
객점 주인은 두 사람의 몰골이 초라한 것을 보고 별로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그들을 맞으면서 외진 방을 두 개 내주었다.
길거리에서 기다리던 두 사환은 겨우 날이 어두워져서야 맥없이
돌아왔다. 호비는 그 중 한 사람을 불러 그와 이러쿵 저러쿵 수작
을 벌여 그에게 어떤 단서를 캐내려고 했다. 몇 마디 잡담을 나누
고 있는데 갑자기 큰 길 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소
리로 미루어 보아 여러 필의 말인 것 같았다.
그 사환은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호 대야님께서 오신 모양이군.]
그리고는 잽싸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호비는 속으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호 대야님은 이미 도착하시어 너와 한동안 말을 했는데 넌 아
직도 모르고 있구나.)
호비는 어떤 사람들이 들이닥치는가 구경을 하려고 객당으로 나
갔다.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가운데 그 사환이 큰 소리로 말
했다.
[호 대야님이 아니고, 표국의 나으리들이올씨다!]
곧이어 당자수( 子手)가 걸어들어오며 손에 들고 있던 표기를
객점 밖의 대나무 통에 꽂았다.
호비는 그 표기를 보고 어리둥절했다. 그 표기는 황색 바탕에
검은 실로 등에 날개가 달린 한 필의 준마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
것은 과거 상가보에서 본 적이 있는 비마표국의 깃발이었던 것이
다. 그러자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이 표국의 주인인 백승신권 마행공은 이미 상가보에서 불에 타
죽었는데 지금은 어떤 사람이 표두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구나. 표
기가 휘어지고 색이 바랜 것이 이미 여러 해 동안 바꾸지 않은 것
같고, 당자수 역시 늙고 쇠약하여 정신이 맑지 않을 것 같으니 아
무래도 비마표국의 요즈음 상황이 별로 좋은 것 같지는 않구나.)
곧이어 표두가 들어왔다. 그는 어깨가 딱 벌어지고 기세가 좋게
생긴 사내였다. 얼굴에 얽은 자국이 많이 있어 호비는 그가 바로
마행공의 제자인 서쟁인 것을 알아보았다. 그의 등 뒤로는 경장
차림의 젊은 아낙이 양 손에 각각 남자 아이를 한 명씩 잡고 서
있었는데 바로 마행공의 딸인 마춘화였다.
호비는 그녀와 헤어진지 이미 수 년이 지났다. 그녀의 용모는
여전히 수려해 보였지만 모진 풍상에 초췌해진 모습을 감출길이
없었다.
두 남자 아이는 네 살 정도 였고, 살결이 희고 토실토실한 것이
매우 귀여웠다. 게다가 생김새가 똑같은 것으로 보아 쌍둥이 같았
다.
마침 한 어린애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나 배고파. 국수 먹고 싶어.]
마춘화는 고개를 숙이고 아이를 보며 말했다.
[그래, 아빠가 세수를 한 다음에 모두 함께 먹도록 하자. 응!]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들 사남매(師男妹)는 이미 결혼을 해서 아이를 둘이나 낳았
구나.)
호비는 과거 상가보에서 상노태(商老太)에게 잡혀 상보진에게
채찍으로 얻어맞은 일이 떠올랐다. 마춘화는 애써 그에게 용서해
줄 것을 사정하며 자비를 베풀었던 것이다. 호비는 그 일을 언제
나 마음 속에 접어두고 있었다.
객지에서 이렇게 우연히 만나, 오늘 만약 자신이 남에게 얼굴을
감추고 있어야 할 입장이 아니었다면 벌써 다가가서 아는 체를 하
면서 지난 날의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객점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표국 사람들에게 고분고분하
며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했다. 따라서 비마표국의 표차가 단
한 대 뿐이고, 사람도 적고 옷차림도 남루한 것이 별로 신통치 않
은 표국인 줄 알면서도 주인은 여전히 앞으로 나가 공손히 접대를
했다.
서쟁은 상방이 없다는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리며 뭐라고 불평
을 늘어놓으려는 차에 당자수가 안을 둘러보고 나오며 입을 열었
다.
[남쪽에 있는 상방 두 칸은 분명히 비어 있지 않소? 그런데도
어째서 없다는 것이오?]
주인은 웃음을 띠우며 입을 열었다.
[표국 나으리, 양해를 해주십시요. 그 방은 그저께 이미 예약이
되었습니다. 오늘 밤에 손님이 오신다고 선불까지 받았습죠.]
서쟁은 근년에 이르러 운수가 사나와서 종종 표화물을 잃어버리
는 일이 있었던 관계로 항상 가슴 속에는 울분이 쌓여 있었다.
그와 같은 말을 듣자 성질을 벌컥 내며 계산대를 후려치려고 했
으나 마춘화가 그의 소맷자락을 재빨리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만 두세요. 아무렇게나 하룻밤을 지내면 어때요.]
서쟁은 마누라의 말을 잘 듣는 편인듯 주인을 매섭게 노려보더
니 서쪽에 있는 조그만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춘화는 두 어린애를 잡아끌며 서쟁의 등 뒤를 향해 나직이 말
했다.
이번에는 표차가 하나 뿐이라 보수가 너무 적어 돈을 아껴쓰지
않는다면 손해를 볼지도 몰라요. 그러니 상방에 머무르지 않고 은
자를 몇 푼 아끼는 것도 좋은 일이예요.]
서쟁은 그 말을 받았다.
[말은 그럴싸하게 하면서도 사람을 깔보는 녀석들은 보기만 해
도 패주고 싶을 정도로 울화가 치민다오.]
마행공이 죽은 이후 서쟁과 마춘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혼례를
올리고 비마표국을 인수했다. 그러나 서쟁의 무공이나 위명이 사
부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고지식한 성격이라 강
호에서의 교분이 별로 좋지 못했다. 그리하며 삼 사년 간 잇따라
몇 번이나 실패를 맛보았다. 매번 마춘화가 나서서 해결을 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되고 보니 비마표국의 장사는 갈수록 형편없어지게
되었다.
이번 일은 소금장수가 은자를 북직예(北直隸)의 보정부(保定府)
로 운반해 주는 일이었다. 하지만 액수가 겨우 구천 냥해 불과해
큰 표국에 위탁을 하면 보수가 비싸기 때문에 비마표국에 맡기게
된 것이다.
서쟁 부부는 언제나 함께 표화물을 호송했고, 마춘화는 집안에
믿을 만한 친척이 없기 때문에 아이들을 함께 데리고 왔던 것이
다. 더구나 액수가 고작 구천 냥에 지나지 않으니 도중에서 이 정
도의 표화물을 노릴 큰 도적은 없으리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호비는 표차를 한번 바라보고 정영소의 방으로 들어가서 말했
다.
[둘째 누이, 저 표두 부부는 내가 옛날부터 서로 잘 아는 사람
이외다.]
그는 상가보에서 그들과 만났던 일을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정영소는 물었다.
[호 오라버니는 그들에게 아는 척을 하실 거예요?]
[내일 길을 가다가 황량하고 인적이 없는 곳에 이르면 아는체를
하려고 하오.]
정영소는 웃으며 말했다.
[황량하고 인적이 드문 곳이라구요? 아, 그것 참 야단났네요.
그들이 당신을 표화물을 강탈하려는 수염쟁이 강도로 보지 않는다
는 보장이 있어요?]
호비도 그 말에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까짓 표화물이야 이 호 대채주께서 손을 쓸 가치가 없지. 정
둘째 채주, 당신은 어떻게 보는가?]
정영소는 웃으면서 응수했다.
[그 표국주는 돈도 몇 푼 없고 행색이 초라하니, 도둑질에도 도
(道)가 있다는 말이 있듯이 이 형제는 그들에게 금 몇 덩이라도
선물을 해야겠네요.]
호비는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는 정말 금을 조금 주고 싶다
는 생각이 없지 않아 있었다. 다만 적절한 방법을 강구하여 상대
방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전달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저녁 밥을 먹고나자 호비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잠
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한밤 중에 갑자기 지봉 위에서 '부스럭!'
하는 작은 음향이 들려왔다. 비록 곤한 잠에 빠져 있었지만 경각
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알아차리고 몸을 벌떡 일으
키며 귀를 기울였다.
지붕 위에 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은 가볍게 손뻑을 치더니 곧 지붕 위에서 뛰어내렸다.
호비는 창가로 다가가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 두 사람은 뭘 믿고 저리 대담하고 방약무인한 태도를 취하
는 것일까?)
그는 손가락으로 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바깥을 살폈다. 두 사람
은 모두 장삼을 걸치고 있었고 손에 들린 무기는 없었다. 그들은
남쪽에 있는 상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곧이어 그 방에 등불이
밝혀졌다.
순간 호비는 나름대로 짐작해 보았다.
(저 두 사람은 이 객점의 주인과 아는 사람인 모양이니 아마 나
쁜 사람은 아닐 것 같군.)
그리하여 다시 침대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신발 끄는 소
리가 들리더니 객점의 사환이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어째서 야밤 삼경에 대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이렇게
멋대로 뛰어드는 게냐!]
그는 호통을 치며 상방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막 한발을 내딛는 순간 '어이쿠!' 하는 비명을 질렀다. 곧이어 다
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점소이가 외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아이쿠, 사람 잡네!]
비명 소리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마당으로 내던져져 땅바닥으로
나컬구는 모양이었다.
이런 소란이 벌어지자 객점에 투숙하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깨
어나게 되었다. 그러자 두 장삼객(長衫客) 중의 한 사람이 상방의
문 입구에 서서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계공산(鷄公山) 왕 대채주님의 명을 받고 오늘 밤 표은
을 손에 넣고자 정탐을 나온 길이오. 그러니 이 일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은 쓸데없이 참견하지 말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편히 잠을
주무시도록 하시구려. 그래야만 무고한 인명 피해가 없을 것이외
다.]
서쟁과 마춘화는 이미 깨어 있었다. 그 자가 노골적으로 도전을
하자 서쟁은 놀람과 분노를 느끼며 생각했다.
(아무리 무서운 대도적이라 하더라도 결코 객점까지 쳐들어오는
사례는 없었다. 이 광수(廣水)라는 고을 또한 작은 고을이 아닐
뿐더러 이토록 안하무인격으로 행동을 취하는 것은 일찌기 본 적
이 없구나.)
서쟁은 큰소리로 응수를 했다.
[이 서아무개는 이곳에 있으니 두 분께서는 신분을 밝히도록 하
시오!]
그러자 그 자는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구천 냥의 은자와 표기를 두 손으로 이 나으리에게 공손히 바
치면 되는 것이지 굳이 이 나으리의 이름을 물어서 어쩌겠다는 것
이냐? 잠시 후에 내 공물을 받으로 다시 오도록 하겠다.]
그러더니 두 사람은 손뼉을 두 번 치며 몸을 날려 지붕으로 올
라섰다.
순간 서쟁은 오른손을 번쩍 쳐들며 두 대의 강표(鋼 )를 쏜살같
이 내쏘았다. 그러자 지붕 위에 서 있던 자들은 돌아보지도 않고
손을 뒤로 내밀며 대뜸 두 대의 강표를 낚아채더니 다시 아래로
내던졌다. '창!'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며 불꽃이 사방으로 튀면서
일제히 서쟁이 있는 곳에서 한 자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청석판
(靑石板) 위에 꽃혔다. 그가 보여준 이 한 수는 세찬 힘이 실려있
어 서쟁으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였다.
두 사람은 지붕 위에서 껄껄 소리내어 웃고는 곧이어 말발굽 소
리를 울리며 북쪽으로 사라졌다.
객점 안의 사환들과 손님들은 난폭한 두 불청객이 떠나자 그제
서야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기 시작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빨리
관가에 알리라고 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서쟁이 그들을 피해서 딴
길을 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를 하기도 했다.
서쟁은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대의 강표를 뽑아 들고
방으로 돌아갔다. 강표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윽고 부부 두 사람은 나직이 상의를 하였다. 그들 두 사람의
무공이 비범한 것을 보면 필시 무림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인물
같은 데 어찌해서 이 작은 액수의 표화물을 노리는지 도무지 이해
가 되지 않았다.
비록 앞길이 불길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표화물을
싣고 나선 이상 뒤로 물러설 수가 없는 것이 표국을 운영하는 사
람들의 규칙이었다. 또한 표화물을 원주인에게 다시 돌려준다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만약 후퇴를 하게 된다면 그것
은 자기 스스로 밥줄을 끊는 꼴이 되는 것이었다.
서쟁은 울분을 가라앉힐 수 없는 듯 씩씩거리며 말했다.
[흑도의 친구들은 갈수록 사람을 업수이 여기는군! 이러다가 우
리들은 이짓거리로는 밥을 빌어 먹을 수도 없겠구려. 내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과 맞설 수밖에 없을 것 같구려. 하지
만 이 두 얘들은......]
마춘화는 재빨리 그 말을 받았다.
[우리는 흑도의 사람들과는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으니 기껏해
야 은자를 가져갈 뿐이지 인명을 살상하는 일은 하지 않을 거예
요.]
그러나 그녀는 속으로 매우 후회하고 있었다. 안일하게 두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나와 강호의 갖은 풍상과 위험을 겪게 할 지경에
처했으니......
호비와 정영소는 창문을 통하여 이러한 광경을 똑똑히 보고 있
었으며, 그들 역시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번 여행 중에는
너무나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차림과 얼굴을 변장하여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뜻밖에도 첫날 비마표국의 이러한 곤
경을 목격하게 된 것이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서쟁 일행은 표화물차를 끌고 길을 떠났다.
호비와 정영소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뒤를 따라갔다. 서쟁은 그
들 두 사람이 뒤따라오는 것을 보자 그들도 틀림없이 도적의 패거
리라는 생각이 드는지 연신 고개를 돌리고 노기띤 눈초리로 쳐다
보곤 했다. 그러나 호비와 정영소 두 사람은 서쟁의 그러한 태도
를 모르는 척 하였다.
정오 무렵 호비와 정영소는 비마표국 사람들과 같은 식당으로
들어가 쇠고기 면병(麵餠)을 먹었다. 이윽고 해질 무렵이 되자 무
승관(武勝關)과는 약 사십여 리 떨어진 곳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지며 두 필의 말이 맞은 편에
서 나는듯이 달려왔다.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잿빛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들은 표화물차 옆을 스칠듯 지나치더니 곧장 호
비와 정영소마저도 지나치고 나서야 비로소 말의 속도를 줄이고
둘이서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달려가며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것
이었다.
웃음소리를 들어 보니 그들은 바로 어젯밤의 그 불청객들이었
다.
호비는 정영소에게 나직이 말했다.
[그들이 다시 뒤에서 쫓아온다면 몇 마장 가지 않아 손을 쓰게
될 것 같군.]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다시 앞쪽에서 말발굽 소리
가 울려퍼지며 두 필의 말이 달려왔으며 그들의 곁을 스칠듯이 지
나갔다. 말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몸놀림이 매우 민첩한 것으로
보아 강호의 인물임이 틀림없었다. 호비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상해......]
다시 한 마장을 채 못가서 또 다시 두 필의 말이 달려왔으며,
그 뒤에는 두 필의 말이 더 달려오고 있었다.
서쟁은 이와 같이 엄청난 기세를 보자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듯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사매, 사부님 말씀에 의하면 녹림 도상에서 으뜸가는 대 채주
는 일류급 표화물을 약탈할 경우에는 졸개들을 모두 동원하기 전
에 여섯 명의 고수들을 정탐꾼으로 미리 내보낸다고 하더니 오늘
은 놀랍게도 여덟 명의 고인을 파견하였고, 더군다나 그들 중 두
사람은 우리들을 찰거머리처럼 따라붙고 있으니 아마 우리가 이번
에 운반하는 은자는 구천 냥이 아니라 구백 만, 아니 구천만 냥인
것 같소이다!]
마춘화도 사실 무슨 연유로 이처럼 기세를 과시하며 이 보잘것
없는 조그만 표화물을 상대하려고 하는지 도저히 그 의도를 알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의심이 일면 일수록 더욱 걱정이 되어
서쟁과 당자수에게 말했다.
[나중에 일이 어렵게 되다면 애들을 데리고 도망을 치는 것이
상책일 거예요. 이 구천 냥의 은자는 액수가 그리 많지 않으니 무
슨 수를 써서라도 배상은 할 수가 있을 거예요.]
서쟁은 가슴을 펴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사부님께서 한평생 쌓아올린 영명(英名)을 이 못난 제자의 손
으로 더럽힐 수는 없소!]
마춘화는 달래듯 나직이 말했다.
[하지만 애들을 봐서라도 참아야 하지요. 앞으로 우리는 땅을
갈아 땀에 절은 밥을 먹을지언정 칼을 휘두르고 목숨을 거는 짓은
이제 그만 두도록 해요......]
두 부부가 설왕설래하던 차에 갑자기 등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흙먼지가 자욱히 피어오르는 가
운데 여덟 필의 말들이 일제히 고삐를 당기고 멈춰서며 표국 사람
들과 호비와 정영소 두 사람을 에워쌓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서쟁은 훌쩍 말에서 뛰어내리며 칼을 뽑
아들고는 포권을 하며 말했다.
[불초 서......]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앞쪽의 여덟 필의 말 가운데 한 노
인이 갑자기 달려나오더니 서쟁 앞으로 몸을 날리며 다짜고짜 손
에 들린 괴이한 무기로 서쟁의 얼굴을 찍으려 들었다.
호비와 정영소는 할 수 없이 말고삐를 잡아당기고 한편에 서 있
었다. 그 노인의 손에 들린 무기는 매우 이상했다. 앞쪽에는 횡으
로 걸쳐진 쇠조각이 하나 붙어 있었고, 구불구불한 것이 뱀을 닮
았는데 그 쇳조각 뒤에는 정(丁)자 모양의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옆으로 뻗쳐난 조각의 양쪽 끝이 뾰쪽하고 예리하여 마치
형태가 변한 학의 부리와 같이 생긴 곡괭이 모양이었다.
호비는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가 없어 정영소에게 물었
다.
[저게 뭐지?]
정영소가 미처 대답을 하기 전에 등 뒤에 있던 한 명의 도적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 영감탱이야! 내가 자네에게 알려주지. 저건 뇌진당(雷震 )
이라는 거야!]
정영소는 그 말을 받았다.
[뇌진당은 섬전추(閃電錐)를 병행하여 펼치지 않는다면 별로 대
수롭지 않아요.]
정영소의 말에 그 도적은 어리둥절해 하며 아무 말도 하지못했
다. 그는 곁눈질로 정영소를 바라보는 것이 '이 삐쩍 마르고 왜소
한 녀석이 꼴에 섬전추라는 것도 알고 있구나' 하고 놀라움을 금
치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정영소를 아래 위
로 훑어내렸다.
서쟁에게 손을 쓴 노인은 그의 사형이었고, 이 도적이 사용하는
것이 바로 섬전추였다.
원래 그들 두 사람의 사부는 오른 손으로는 섬전추를 사용했고,
왼손으로는 뇌진당을 사용했다. 하나는 공격에 사용하는 것이었
고, 다른 하나는 수비만 취하는 무기로서 지극히 변화가 기묘했
다. 그러나 이 두가지 무기는 하나는 짧고 하나는 길어 양 손에
들고 사용하였을 때는 서로 상부상조하게 되어 위력이 매우 강맹
하게 되었지만 숙련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따라서 그들 사형제는
각기 사부에게 한쪽 손의 기법만을 전수받았을 뿐, 아직 두 가지
를 함께 사용하는 법은 익히지 못한 형편이었다.
그들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새외(塞外 : 변경지방)에서 활약을
하였으며, 중원에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았고 더구나 섬전추는 소
맷자락에 숨겨놓고 웬만하면 꺼내지를 않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정영소가 한마디로 그 내력을 갈파하자 그는 놀람과 의아함에 사
로잡히게 되었다.
그는 정영소의 사부가 독수약왕인 무진대사이고, 그의 박식한
견식으로 평소에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어린 제자에게 각문각파의
무공을 상세히 이야기해 주었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을 할 수가 없
었을 것이다.
정영소는 뇌진당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그 모양새를 보고
그 이름이 섬전추일 것이라고 짐작을 했던 것이다.
그 노인이 무기를 휘두르자 우르릉! 우르릉! 하는 소리가 일어
그야말로 뇌성벽력이 진동하는 위세를 떨쳐냈다. 서쟁의 무공 역
시 약하지 않은 편이었으나 그러한 뇌진당의 기세를 대하게 되자
제대로 칼을 휘두를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앞뒤에 있던 십 오 명의 도적들은 중구난방
으로 떠들어 대며 비아냥거렸다.
[무엇이 얼어죽을 놈의 비마표국이냐? 과거 마 노표국주가 표화
물을 호송할 때야 '비마'라는 두 글자를 붙이는 것이 적절했지만,
저 서가의 손에 이르러서는 일찌감치 구파표국(狗爬 局)으로 고쳐
야 했지!]
[저 녀석은 한 두 수 보잘 것 없는 무공을 배웠답시고 보라는
애들은 안보고 이렇게 밖으로 나와 창피한 꼴을 당하는군.]
[이봐 서가야! 빨리 무릎을 꿇고 큰절을 세 번 올려라! 그래야
우리 큰 형님께서 너의 개같은 목숨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
[표화물을 호송하여 밥을 빌어먹고 살면서도 이까짓 구천 냥의
은자도 지키지 못하다니, 차라리 두부나 한 조각 사서 머리를 박
고 죽는 것이 낫겠다.]
[신권무적 마 노표국주는 과거 혁혁한 위명을 떨쳐 무림에서는
승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저 멍청이 같은 녀석은 도리어
사부님의 얼굴에 흙칠을 하는군.]
[내가 보기에 그 부인이 저 녀석보다는 열 배나 낫겠다. 정말
한 승이 어여쁜 꽃이 쇠똥에 꽂히는 격이니 보면 볼수록 울화가
치밀어 견디지 못하겠군!]
호비는 여러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자 이 도적들이 서쟁의
내력을 잘 파악하고 있으며, 더구나 그의 사문의 내력은 물론이고
그가 어느 정도의 표은을 호송하고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서쟁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을 정
도의 무례한 말을 하며 각박한 욕을 하고 있지만, 마춘화나 그녀
의 부친에 대해서는 조금도 비위에 거스르는 말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상당히 존경하고 있다는 투로 말을 하는 것이었다.
호비는 이러한 정황을 바라보며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호비
는 뇌진당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지만 그 노인의 공력이 약하
지 않고 더우기 손씀씀이가 매섭고 정확하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
차렸다.
호비는 놀라며 내심 생각했다.
(저 늙은이는 강호의 일류고수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저 정도의
무공이라면 필시 신분이 있는 유명한 인물일 것이다. 더구나 이
패거리들의 행동거지로 볼 때 결코 구천 냥의 하찮은 은자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만약 전귀농이 이 자들을 사주하여 나를
괴롭히려고 했다면 이토록 강맹한 기세를 보이며 상대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춘화는 이러한 광경을 보고 매우 초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남편이 상대방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
었으나 자기가 앞으로 나가 돕는다 하더라도 그저저쪽 편 상대를
한 명 더 불러내게 될 뿐, 일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
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설사 죽기를 각오하고 그렇게 한다 하더라
도 두 아들을 돌볼 사람이 없으니 아이들은 그들의 수중에 떨어지
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두 눈을 멀거니 뜬 채로 남편이 궁지에 몰리고 있는 상
황을 지켜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그 노인이 뱀처럼 생긴 무기를 재빨리 앞으로 뻗쳐내더
니 한 바퀴 빙글 돌리며 뒤로 잡아당겼다. 순간 서쟁의 칼은 그의
손을 떠나 허공으로 솟구치는 게 아닌가? 마춘화는 자신도 모르게
'아!'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이어 그 노인은 왼발을 들어 옆으로 쓸듯이 걷어차 왔다. 서쟁
은 급히 몸을 날려 피했다. 하늘로 솟구쳤던 서쟁의 칼이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도적의 무리 속에서 한 사람이 뛰쳐나오며 장검을
들어 그 칼을 후려쳤다. 그 강철 칼은 대뜸 두 도막이 나고 말았
다. 그는 몸을 내리깔며 칼 토막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다시 한번
칼을 휘둘렀다. 그러자 두 토막의 칼은 네 동강이 나고 말았다.
그의 수중에 들린 것은 물론 지극히 예리한 보검임이 틀림없었
고, 그 자의 동작 또한 민첩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 눈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뭇 도적들은 일제히 갈채를 보냈다.
이와 같은 형세를 보면 그들은 결코 표화물을 약탈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서쟁을 희롱하려는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손에
장검을 든 도적 한 사람만 하더라도 서쟁 부부를 이기기에는 충분
했으며 더군다나 같은 패거리들이 모두 열 여섯 명이나 되었고,
그들도 모두 빼어난 고수인 것 같았다.
그들은 호탕하게 웃으며 태연자약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마치
열 여섯 마리의 영활한 고양이들이 한 마리의 생쥐를 가운데 놓고
실컷 희롱을 하다가 갈기갈기 찢어 잡아먹으려는 것과 같은 형국
이었다.
서쟁은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양 팔을 마구 휘두르며 달려
들었다. 매 일초마다 모두 목숨을 건 주먹이었다. 그러나 그 노인
이 지닌 뇌진당이란 무기는 손잡이가 넉 자나 되었기 때문에 도저
히 가까이 다가들 수가 없었다. 몇 초가 지나자 '쫙!' 하는 소리
가 나면서 뇌진당의 뾰쪽한 끝이 서쟁의 바짓가랭이를 찢었고, 그
의 넙적다리에서는 선혈이 길게 흘러내렸다. 다시 한번 '푹!' 하
는 소리가 울려퍼지며 서쟁의 왼쪽 엉덩이가 다시 뇌진당에 찔리
게 되었다.
노인은 다리를 들어 서쟁을 걷어차 땅바닥에 나뒹굴게 만들고
다리를 들어 그의 가슴을 짓밟은 채 냉소를 하며 입을 열었다.
[나는 너의 목숨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박혀만 있을
뿐 어르신네를 알아볼 줄 모르고 멍청한 짓을 계속하는 너의 두
눈을 뽑아줄 것이다. 이는 오히려 너에게 도움이 되는 일일 것이
니 잠자코 있거라!]
서쟁은 무섭기도 했지만 울화가 치밀어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
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만 멍하니 벌리고 '어! 어!'
하고 있었다.
그러자 마춘화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여러 친구분들, 만약 당신들이 표은을 갖고 싶다면 가져가도록
하세요. 우리들은 과거에 아무런 원한도 없었고, 최근까지도 서로
충돌을 한 적이 없는데 어찌 이토록 사람을 막다른 골목으로 모는
거예요?]
그러자 장검을 썼던 도적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소저, 당신을 핍박할 뜻은 없으니 쓸데없는 일에 상관하지
마시구려.]
마춘화는 반박하듯 말했다.
[뭐가 쓸데없는 일에 간섭을 한다는 거예요? 그는 내 남편이예
요!]
뇌진당을 쓰는 노인이 그 말을 받아 말했다.
[우리들은 저 멍청한 놈이 재모(才貌)를 겸비한 마소저의 품격
을 떨어뜨리고 있기에 비문강개하여 천리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이렇게 달려와 이 불공평한 일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외다.]
호비와 정영소는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 도적 패거리들은 남의 부부의 사사로운 일을 간섭하면서 제
깐에는 불공평한 일을 처리해 주러왔다니 정말 가소롭구나.)
두 사람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로 바라보았다.
바로 이때 그 노인은 뇌진당을 쳐들어 그 뾰족한 끝으로 서쟁의
오른쪽 눈을 겨냥하며 찌르려고 했다. 남편을 구하려고 마춘화가
대갈일성을 하며 달려들었다. 순간 히익! 하는 소리와 함께 마상
에 있는 한 도적이 손에 들고 있던 화창(花槍)을 내뻗어 그녀를
가로막았다.
두 아이들은 일제히 부르짖었다.
[아빠!]
그리고는 아버지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왜권유적(歪拳有敵) 우경전(牛耕田)
도적들이 차마 아이들에게 손을 쓰지 못하고 멈칫하는 순간, 별
안간 잿빛 그림자가 번뜩하더니 그 노인은 손목이 져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급히 뇌진당을 돌리며 적을 맞으려고 했으나 순간
손이 허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손에 든 무기가 홀연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노인이 놀람과 분노에 얽혀 고개를 쳐드는 순간 그 잿빛 그림자
는 어느덧 말위에 앉아 자기 독문(獨門)의 뇌진당을 빙글빙글 돌
리며 둥근 빛무리를 만들며 싱글싱글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에 말을 오르내리며 뇌진당을 빼앗은 사람은 바로 호비였
다.
뭇 도적들은 질겁을 하여 입을 벌린 채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
다. 방금 눈 앞에서 벌어진 일에 대하여 너무나 놀란 나머지 말을
잃은 채 모두 넋이 빠져 있었다.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사람들은 호통을
내지르며 각자 무기를 쳐들고 호비에게 달려들었다.
호비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자, 동지들이여! 위험하니 빨리 토낍시다! 지금 이리로 화류계
의 여자들이 치마를 들고 다리를 벌린 채 들이닥치고 있소! 더우
기 칼을 든 세 마리 토끼 나으리가 바삐 떠나갔으며, 우리의 수염
에 구멍이 나서 재신보살(財神菩薩)마저 산으로 올라가 버렸소!]
순간 뭇 도적들은 또 다시 어리둥절해졌다. 그가 말하는 것은
흑도에서 쓰는 은어 같지도 않았으며, 그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뇌진당을 빼앗긴 노인이 노해 부르짖었다.
[친구, 당신은 어디에서 왔소? 어째서 이렇듯 남의 일에 끼어드
는 것이오?]
호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형제는 전문적으로 밑천을 안들이고 장사를 하는 사람이외
다. 이제 겨우 비마표국의 구천 냥의 은자를 손에 넣는가 했더니
뜻밖에도 열 여섯 명의 정요금(程咬金 : 노상 강도)이 나타나 다
시 덮치는구려. 여러분들까지 한 몫씩 나누어달라고 하니 정말 가
슴을 아프게 만드는구려.]
그 노인은 냉소를 했다.
[친구, 시치미떼지 말고 일찌감치 이름을 밝히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이오.]
서쟁은 위기일발의 순간에 목숨을 건지게 되자 두 아들을 얼싸
안았다. 마춘화는 그 옆에 서서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비
를 바라보며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호비와 정영소 역시 도적과 한 패거리라고 알고 있었는
데 뜻밖에도 그 늙은이와 다투는 것이 아닌가?
호비는 입술에 있는 쥐꼬리 수염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담뱃대를
입에 물고 말했다.
[좋소, 내 솔직하게 당신들에게 말하지! 신권무적 마행공은 나
의 사제요. 사질의 일을 이 어르신네가 어찌 모르는 척 할 수 있
겠소?]
마춘화는 호비의 그 한마디를 듣자 깜짝 놀라며 속으로 생각을
했다.
(어디서 갑자기 저와 같은 사백부가 나타난 것일까? 나는 아버
님께 한번도 사백부가 계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더구나 저 사람은 아버지보다 나이가 훨씬 적은 것 같은데 어째서
사백부라고 말을 하는 것일까?)
정영소는 옆에서 호비가 시치미를 뚝 떼고 태연하게 말하는 것
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적에게 포위가 되
어있는 상태인데도 아무렇지도 않은듯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호비
를 보자 그의 담력에 탄복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노인은 반신반의하며 '흠!'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귀하가 바로 마 노표국주의 사형이란 말이오? 나이도 그보다
한참 아래인 것 같은데...... 게다가 우리들은 마 노표국주에게
사형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소.]
호비는 넌즈시 입을 열었다.
[우리 문중에서는 입문의 선후를 따질 뿐, 나이가 많고 적음은
상관하지 않는다오. 그리고 마행공이 무슨 대단한 인물이나 되오?
내가 그의 사형이라고 사칭을 해서 얻을 것이 무엇이 있겠소?]
사문에 먼저 들어온 사람이 윗사람이 된다는 규칙은 무림의 많
은 문파들이 채택하는 규범이었다. 그 노인은 마춘화를 힐끗 바라
보며 그녀의 안색을 살피더니 호비에게 다시 물었다.
[아직까지 귀하의 함자를 가르침받지 못했구려.]
호비는 고개를 쳐들도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의 사제는 신권무적(神拳無敵) 마행공(馬行空)이라 하며, 보
잘 것 없는 불초는 왜권유적(歪拳有敵) 우경전(牛耕田)이라 하
오.]
뭇 도적들은 그 말을 듣고 참지를 못하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
뜨렸다. 이 말은 분명히 사람을 우롱하려고 하는 거짓말이라는 것
을 알았지만, '날아오르는 말'이라는 마행공의 명호와 함께 '밭을
가는 소'라는 우경전이란 명호를 듣고는 실소를 금치 못했던 것이
다.
그 노인은 그가 맨손으로 자기의 무기를 빼앗았기 때문에 상대
를 얕보지 못하고 그의 내력을 알아보고자 한동안 말을 주고 받았
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벌써 손을 쓰고도 남은 인물이었다.
그 노인은 원래 불같은 성격이었는데, 자신의 곡괭이처럼 생긴
뇌진당을 빼앗아 들고 호비가 '우경전'이라고 자기 이름을 대자
더이상 참지를 못하고 호통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호비는 말고삐를 잡아당겨 옆으로 피하며 뇌진당을 한번 흔들했
다. 순간 그 노인의 손에는 홀연 하나의 물건이 들려있었다. 손을
쳐들고 바라보니 자신의 뇌진당이 아닌가?
본래 주인이 잃었던 물건을 되찾았다면 기뻐하며 잔치라도 열
판인데, 이 무기는 결코 자신이 스스로 빼앗은 것이 아니고 상대
방이 자기의 손에 쥐어준 것이라 놀라며 당황해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제대로 보지도 못한 사이에 아리송하게 무기가 되
돌아 오다니 그의 놀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뭇 도적들은 남의 속도 모르고 일제히 갈채를 보내며 환호성을
질렀다.
[저(猪)대형의 재간은 정말 비상하십니다!]
그들은 모두 그가 공수입백(空手入百刃)의 무공으로 되빼앗아온
줄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저가라는 늙은이는 벙어리 냉가슴않
듯 자기의 고충을 말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는 약간 머뭇거리더
니 입을 열었다.
[귀하가 이번 일에 상관하는 의도는 도대체 무엇 때문이오?]
호비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노형이 먼저 말씀해 보시구려. 나의 이 두 사질은 금슬이 좋은
한쌍의 부부인데 여러분들이 무슨 자격으로 공평, 불공평을 운운
하며 나서는 것이오.]
그러나 늙은이는 그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충고하듯 말했다.
[쓸데없는 일에 간섭하는 것은 귀하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오. 내 좋은 말로 권하는데 빨리 제각기 갈 길로 가도록 하시오.]
뭇 도적들은 하나같이 이상하게 생각했다.
(평소에 뇌성벽력과 같은 저 대형의 성격이 오늘은 어째서 저토
록 참을성이 있는 것일까?)
호비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당신 말이 정말 옳구려. 쓸데없는 일에 간섭을 한다는 것은 무
익한 일이니 우리 모두들 각자 갈 길을 가도록 합시다. 자, 자!]
그 늙은이는 뒤로 세 걸음 물러서더니 호통을 내질렀다.
[당신이 좋은 말을 할 때 듣지 않는다면 불초로서는 부득이 당
신의 절묘한 초식을 가르침받아야겠소!]
그리고는 뇌진당을 들고 자기의 가슴을 보호하며 대적할 자세를
취했다.
호비는 입을 열었다.
[일대 일로 싸운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소? 그러나 사람이 너무
많아도 시끌벅적하니 불편할 것이오. 그러니 이렇게 합시다. 이
우경전 한 사람이 당신네들 세 분을 상대로 싸워보지.]
그리고 담뱃대로 장검을 쓰는 사람에게 나오라고 손가락질하고,
다시 그 늙은이의 사제를 가리켰다. 그 검을 쓰는 사람은 얼굴 모
습이 상당히 준수한 편이고 표정도 오만했다. 그 자는 그 말을 듣
더니 앙천대소를 하면서 입을 열었다.
[하하하, 이 건방진 영감탱이가 정말 환장을 했군!]
그러나 저가 성의 늙은이는 호비가 결코 녹록한 인물이 아니라
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일대 일의 대결에는 정말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스스로 세 사람에게 덤비라고 말하는 것을 보자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섭(攝) 현제(賢第), 상관(上官) 사제(師第), 그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니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못할 것이네. 우리 세 사
람이 함께 그를 상대로 한번 놀아보세.]
그러나 섭씨 성을 가진 자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 말했다.
[저 늙은 녀석이 어찌 저(猪)형의 적수가 되겠소? 혼자서 싫다
면 당신네들 두 사형제가 나서서 여러 사람들에게 새외(塞外)의 '
뇌전교작(雷電交作)'이라는 절기를 구경하도록 해 주구려!]
뭇 도적들은 우렁차게 좋다는 소리를 내질렀다.
호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나이가 젊은 것이 저렇게 뱃보가 작아서 큰 싸움판에는 뛰어들
생각을 못하니...... 요새 젊은 놈들이란 쯧쯧!]
이 말을 들은 섭씨 성을 가진 자는 두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말
에서 뛰어내리더니 그 노인에게 나직이 말했다.
[저형, 한걸음 양보해 주시오. 소제가 혼자서 이 건방진 녀석의
버릇을 고쳐놓겠소.]
호비는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이 왜권유적 우경전의 버릇을 가르쳐 주는 것도 괜찮은
노릇이지. 그러나 우리 형제 두 사람이 미리 말해 두겠는데, 만약
이 우경전이 지게 된다면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처리해도 좋소.
하지만 만약 소형제 당신이 혹시 실수하여 진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소?]
섭가라는 자는 냉소를 하며 말했다.
[그것은 당신의 헛된 꿈이겠지!]
호비는 웃으며 말했다.
[어쩌면 하늘이 나를 보호하시어 소형제 당신에게 어떤 변고가
있을 수도 있고, 잘못하여 나한테 한 대 얻어맞고 제정신이 돌아
오게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섭가는 호통을 내질렀다.
[누가 당신하고 쓸데없는 농담을 하자는 게요? 만약에 내가 진
다면 영감탱이 마음대로 처리하구려!]
호비는 능청을 떨었다.
[이 영감탱이 마음대로 처리하라니 그것은 감당할 수가 없구려.
다만 여러분들은 넓은 아량을 베푸시어 다시는 우리 사질부부의
가정사에 상관말아 주시오. 그와 같이 불공평한 일을 보고 괜히
정의감에 불타서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외다.]
섭가는 귀찮다는 듯 장검을 뽑아들더니 한 가닥의 찬란한 광채
를 뿌리며 소리를 내질렀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호비는 뭇 도적들을 쓸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 섭씨 집안 소형제의 말을 믿어도 되겠소? 만약 그가 지더라
도 당신네들 여러 나으리들께서는 계속 쓸데없는 정의심을 내세우
시겠소?]
정영소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끝내 '훗!' 하고 웃음소리를 내
었다. 사실 호비가 젊은 나이에도 말끝마다 상대방을 '소형제, 소
형제'하고 부르는 것도 그렇거니와, 신선한 꽃이 쇠똥 위에 꽃혔
답시고 여러 사람이 나서서 블공평한 일을 처리하겠다고 나불대는
일도 매우 우스꽝스러웠다. 더우기 호비가 쥐뿔도 가진 것 없으면
서도 불쑥 나서서 도리어 그들에게 불공평한 일에 나서서 싸움에
끼어들지 말라고 훈계하는 것은 더 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
었다.
뭇 도적들은 평소부터 그 섭가의 검술이 정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보검은 무쇠를 무우 자르듯 하는 무기인
지라 저 시골뜨기 콧수염 영감쟁이를 상대로 손을 쓴다면 결코 지
자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뭇 도적들은 그렇지 않아도 이번 일을 따분하게 여기고 있던 차
에 돌발적인 사태가 발생하자 좋은 구경거리가 나타났다고 생각하
고는 모두 히히덕거리며 다투어 말했다.
[당신 쭈그렁뱅이 수염쟁이가 만약 일조 반식이라도 이긴다면
우리 모두들 엉덩이를 툭툭 털고 떠나겠으며, 이번 일을 포기하겠
소.]
호비는 말했다.
[여러분들이 말하는 것은 사람의 말이니 믿도록 하겠소. 이번
불공평한 일에 나서서 싸움을 하고 안하고는 이 짧은 코수염쟁이
의 재간이 되먹었느냐 되먹지 못했느냐에 달려 있겠구려. 자, 조
심하시오!]
그리고는 맹렬히 담뱃대를 쳐들었다가 자기의 어깨로 쑥 꽂고
말에서 뛰어 내렸다. 순간 취청 하더니 하마터면 쓰러질뻔 하였
다.
뭇 사람들은 그가 '자, 조심하시오!'라고 호통을 치며 담뱃대를
쳐들자 담뱃대로 무기를 삼으려는가 보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뜻밖에도 담뱃대를 자기 어깨에 꽂았고, 말에서 내리는 신법 역시
둔할 뿐만 아니라 낭패한 꼴을 보이자 옆에서 구경하던 열 다섯
명의 도적들 가운데 대부분은 그만 실소를 터뜨렸다.
이를 지켜 보고 있던 섭가는 버럭 호통을 내지르며 말했다.
[당신은 무슨 무기를 사용할 작정인지 어서 꺼내보시지!]
호비는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황소가 밭갈이를 할 때는 쟁기를 사용하는 것이오. 저 대채주,
당신의 손에 들린 것이 매우 쟁기와 닮았으니 좀 빌려 씁시다.]
그리고는 손을 뻗쳐 저가라는 늙은이에게서 뇌진당을 빌리려고
했다. 늙은이는 그를 상대해 보았기 때문에 매우 꺼리는 눈치를
보이며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며 노해서 말했다.
[싫소. 더우기 내 독문의 무기를 당신이 어떻게 사용한단 말이
오!]
호비는 오른손을 쳐들고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도록 하여 마치
거렁뱅이가 '한푼 줍쇼!'하고 구걸하는 자세를 취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좀 빌려준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겠소?]
그러다 갑자기 손과 팔을 한번 뻗쳤다가 휘감아 들었다. 순간
그 노인은 뇌진당을 들어 막으려고 했으나 어찌 된 노릇인지 손에
들린 것이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다. 그 뇌진당은 놀랍게도 또 다
시 호비의 손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가?
노인은 깜짝 놀라 일 장 뒤로 몸을 날리며 물러섰다. 얼굴을 움
찔움찔하는 것이 마치 귀신을 본 사람 같았다.
사실 호비의 이 공수입백인이라는 재간은 바로 그의 조상인 비
천호리가 심혈을 기울여 연구해낸 절기라 할 수 있었다.
과거 비천호리는 츰왕(闖王) 이자성(季自成)이 민중을 일으켜
세워 천하를 제패하려고 했을때, 이 한 수의 재간으로 얼마나 많
은 영웅호걸들의 손에 들린 무기를 빼앗았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
야말로 바람과 구름을 타고 다니듯 신출귀몰하였고, 그 오묘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비천호리'라는 네 글자의 별호도 절반은
이로 인해서 얻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섭가라는 사내는 호비의 손에 무기가 들린 것을 보자 장검을 쳐
들고 그의 등을 노리고 찔러왔다. 호비는 몸을 비스듬히 날려 피
하며 뇌진당을 돌려잡고 잽싸게 왼쪽으로 달려들며 상대의 옆구리
를 찔렀다.
저씨 성을 가진 노인은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다물지를 못했다.
호비가 펼치는 초식은 바로 그의 사부가 친히 전수한 육십사로굉
천뇌진당법(六十四路轟天雷震 法)과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았다.
상관이라는 성을 가진 사제 역시 더더욱 이상하게 생각했다. 호
비가 뇌진당이라는 이름조차 알지 못했는데 펼쳐내는 것이 모두
정통 뇌진당의 수법으로 자기 사형의 수법과 완전히 일치하자 어
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호비의 무공 기초가 워낙 탄탄하고, 총명하기 이를데 없었기때
문에 저씨 성의 노인이 서쟁과 겨루는 것을 보고 그 초식을 암암
리에 기억했다가 손을 쓰고 있다는 것을 그들 두 사람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펼치는 초식의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그 가
운데 힘을 운용하는 것과 변화의 수법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때야 비로소 섭가 역시 상대방의 무서움을 알아차리고 감히
더이상 방심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민첩한 몸놀림으로 칼을 휘둘
렀다.
호비가 사용하는 무기는 전혀 손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일부러 사람들의 이목을 교란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기때문에 초식
마다 그 저씨 늙은이의 무공의 법문에 따라 펼쳤다. 따라서 제 실
력을 발휘하기에는 많은 구속을 받고 있었다. 더우기 상대가 장검
을 펼쳐내자 현란한 광채가 번쩍이는 것이 실로 비범하기 이를데
없는 검법이었다.
상대방의 공격을 막으면서 호비는 내심 생각해 보았다.
(이 열여섯 명은 모두 고수임에 틀림없다. 만약에 한꺼번에 우
루루 덮쳐든다면 나와 둘째 누이는 설사 빠져나간다 할지라도 서
쟁의 일가족 네 식구는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직 이 자를
대패시켜 낭패하도록 만들어야만 그들이 손을 쓰지 못할 것이다.
이것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겠구나.)
별안간 상대방이 장검을 아래로 내려뜨리며 자세를 취하는 것을
보자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재빨리 초식을 바꾸려
는 순간 창! 하는 소리가 나면서 뇌진당의 옆으로 뻗쳐 있는 한
모서리가 어느덧 예리한 검에 의해 잘려져 나갔다.
뭇 도적들은 호비의 행동거지가 매우 괴상한 것을 보고 내심 모
두 불안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섭가가 호비의 무기를 동강내
자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섭가 성을 가진 자는 자신감을 얻은듯 걸음마다 매서운 공세를
취했다.
호비는 저씨 성의 노인에게 배운 몇 수의 뇌진당 수법을 이미
다 써먹었으므로 더 이런 식으로 싸우다가는 낭패를 당할 판이었
다. 그런 차에 뇌진당의 한쪽 끝이 잘려져 나가자 마음속으로 움
직이는 바가 있어 뇌진당으로 비스듬히 내려찍었다.
그러자 상대는 장검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더니 다시 창! 하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뻗은 나머지 한조각의 끝마저 잘라버렸다.
호비는 부르짖었다.
[잘하는 짓이오! 당신은 저 나으리의 체면을 전혀 생각하지 않
다니. 그가 명성을 떨치고 있는 무기를 이렇게 망가뜨리다니 정말
의리 없는 친구군!]
섭가는 어리둥절하며 그 말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런데 그 순간 창! 하는 소리가 다시 나면서 호비는 놀랍게도 반
토막이 된 뇌진당의 자루로 그의 검날을 맞받아치는 바람에 뇌진
당은 겨우 한 자 남짓한 조그만 토막만 남게 되었다.
호비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내가 뇌진당만 사용하고 섬전추를 쓰지 않으니 역시 위력이 형
편없군!]
그러면서 그는 조그맣게 토막난 뇌진당 자루를 앞으로 내밀며
마치 파갑추(破甲錐)처럼 사용했다.
상관의 성을 가진 도적은 호비가 섬전추라는 말을 들먹이자 몹
시 놀랐다. 그러나 그의 섬전추 수법이 옆으로 찍어내리고, 바로
찌르려고 하는 등 수법이 완전히 엉터리라는 것을 알고서 그제서
야 안심을 하고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그건 어느 문파의 섬전추 수법이냐?]
호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당신이 배운 것은 모두 엉터리이고, 이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것이다.]
그리고는 연신 찌르고 급히 찍으려 들었다. 사실 호비는 칼만
사용할 줄 알았지 다른 무기는 전혀 사용할 줄을 몰랐다. 이 섬전
추의 수법 역시 그저 흉내를 내는 정도였고, 실제로 무서움은 그
의 왼손에 있었다. 몸 가까이 짓쳐들면서 왼손으로 걸고 때리고
봉쇄하고 낙아채려는 등, 정말 '한치가 짧으면, 한치가 위험하다'
는 말과 꼭 맞아떨어졌다.
그 섭가는 손에 비록 예리한 검을 쥐고 있었으나 호비의 공격을
막지를 못하고 연신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별안간 악!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며 두 사람은 동시에 뒤로 몸
을 솟구쳤다. 순간 호비의 몸 앞에는 수정과 같은 빛이 번득거리
는 것이 보였다. 그 보검이 어느덧 호비의 손에 들려 있었던 것이
다.
호비는 왼쪽 무릎을 꿇더니 큰 길가에 있는 이십 근이나 되는
바위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장검을 땅바닥
에 누이고 왼손으로 바윗돌을 높이 쳐들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입을 열었다.
[이 보검은 예리하기 이를데 없는 것 같은데 둘 중에 어느 것이
먼저 부러지는지 시험을 해 봐야겠군.]
그러면서 커다란 바윗돌로 검신을 내려치려는 자세를 취했다.
아무리 천하 제일의 예리한 보검이라 할지라도 커다란 바윗돌로
옆으로 누워있는 검신을 때린다면 한 번에 부러질 것은 자명한 사
실이었다.
섭가라는 자는 이 보검을 자기의 생명처럼 아끼고 있었던터라
그러한 참혹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안색이 창백해져서는 부르짖
었다.
[불초가 졌음을 시인하리다.]
호비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보기엔 이 검은 훌륭해서 단 한번 찍어서는 부러지지 않
을 것 같구려.]
그러면서 그는 다시 바윗돌을 더 높이 쳐들었다.
섭가 성을 가진 자는 부르짖었다.
[귀하의 맘에 든다면 그냥 가져가도록 하시구려. 구태여 보물을
손상시킬 필요가 있습니까?]
호비는 속으로 이 사람은 정말 보검을 아끼는 마음에 검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망가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비는 정색을 하며 두 손으로 보검을 받쳐들고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소제가 무례하게 여러모로 죄를 많이 지었구려.]
그 사람에게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호비가 설사 검
을 망가뜨리지 않더라도 반드시 가져가리라 생각했다. 사실 이러
한 보검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것이었다. 이와 같은 검을 한 자루
만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무공은 배 이상이나 높아질 수 있을테니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치고 누가 이 검을 탐내지 않겠는가?
그는 즉시 두 손을 뻗쳐 받아들며 말했다.
[정말 고맙소, 정말 고맙소!]
황송해 하는 그의 표정에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빛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호비는 밤이 길면 꿈이 많은 법이니 더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
하고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타더니 뭇 도적들에게 두 손을 마주잡아
보였다.
[고귀한 손길을 거두어주시니 이 형제는 진심으로 사의를 표하
는 바이오.]
그 말은 무척 성실하고 간곡했다. 그리고 그는 이어 서쟁과 마
춘화에게 말했다.
[가시오!]
서쟁 부부는 놀란 가슴이 아직 진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엉겁결
에 표차를 몰고 그 자리를 떠나갔다.
호비와 정영소는 뒤에서 그들을 호위하며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뒤를 다시 돌아보면 또 다른 사건이 빚어질까봐 두려웠던
것이었다. 귓전으로 나직이 뭇 도적들이 의논하는 소리가 들리긴
했으나 말을 달려 쫓아오는 기척은 없었다.
네 사람은 단숨에 십여 리를 달려갔다. 시종 도적떼들이 뒤쫓아
오는 것은 볼 수가 없었다.
서쟁은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세우더니 입을 열었다.
[귀하가 손을 써서 구해 준 것에 대해서 불초는 정말 고맙게 생
각하오이다. 그런데 어째서 당신은 불초의 사백부로 사칭하는 것
이오?]
호비는 그의 어조에 심히 불만이 있음을 알고 미소를 지으며 말
했다.
[그저 나오는 대로 씨부린 것이니 형제는 너무 탓하지 마시오.]
서쟁은 여전히 불만섞인 어조로 그 말을 받았다.
[귀하가 두 가닥의 수염을 붙였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형제! 형
제!'하고 부르는 것은 너무나 천하의 사람들을 무시하는 태도가
아니오?]
호비는 순간 어리둥절해지며 이 멧돼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자
기가 변장한 것을 알아보았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정영소가 옆에서 나직이 말했다.
[틀림없이 그의 처가 변장한 것을 눈치챈 거예요.]
호비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마춘화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기의 수염이 가짜라는 것을 알아볼 수는 있겠지만, 자기가 누구
인가를 알아보지는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쟁은 호비의 표정을 보자 자기의 처가 반반하게 생겨 그가 흑
심을 품고 계속 자기를 뒤따라 온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도적의 패거리들에게 실컷 희롱을 당하고 모
욕을 당했기 때문에 이미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몸이었다. 따라
서 원래 급한 성격에다가 냉정함을 잃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적처럼 느껴져 큰 소리로 호통을 내질렀다.
[귀하의 무예가 고강한데 당신이 나를 죽이겠다면 즉시 손을 쓰
도록 하시오.]
그리고 허리를 구부려 당자수의 허리에서 칼을 뽑아 비껴든 채
매서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호비는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해명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뒷쪽에서 말발굽소리가 급하게 들려오면서 한필의 쾌
마가 미친듯 달려왔다. 그 말은 원자의의 백마처럼 신준(神駿)하
지 않았지만 보기 드문 명마였다. 그 말은 삽시간에 표화물차 옆
을 스칠듯이 지나쳐가는 것이었다.
호비가 힐끗 보니 마상에 타고 있는 사람은 열여섯 명의 도적들
가운데 한 사람인 것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정영소는 입을 열었다.
[우리 가도록 해요. 쓸데없는 일에 나서서 불공평한 일을 보고
주제넘게 해결하겠다고 싸움을 할 것까지는 없어요.]
그녀의 이와 같은 말은 서쟁이 도적들에게 조롱삼아 들었던 말
이라 서쟁의 비위는 더욱 뒤집혔다. 그는 두 눈에 불을 토해 낼
듯하면서 말을 몰아 앞으로 덮쳐 들려고 했다. 그러자 마춘화가
급히 부르짖었다.
[사형, 당신은 또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려고 하는군요.]
순간 서쟁은 그만 주춤하며 어리둥절해졌다.
정영소는 재빨리 말고삐를 늦추고 채찍으로 호비가 타고 있는
말 엉덩이를 후려쳤다. 그러자 두 필의 말은 곧장 북쪽을 향해 급
히 달려갔다.
호비는 뒤를 돌아보며 부르짖었다.
[마소저! 상가보를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오?]
마춘화는 별안간 얼굴이 새빨개지며 혼자 중얼거렸다.
[상가보, 상가보! 아...... 내가 어찌 잊을 수 있겠어요.]
그녀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아련히 과거를 회상했다. 그러나 그
녀의 뇌리에는 반푼 어치도 호비의 그림자를 떠올릴 수 없었다.
그녀는 전혀 다른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화사하고 고귀하게
생겼으며 온화하고 우아하던 공자 나으리였으니.......
두 사람이 말을 내리달려 삼 사 마장을 나아가자 정영소가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불공평하다고 투덜거리던 사람들이 또 쫓아왔어요.]
호비는 이미 말발굽소리가 잡다하게 일어나며 십여 필의 말들이
달려온다는 기척을 듣고 있었던지라 천천히 말했다.
[정말 손을 쓰게 된다면 중과부적이 될텐데....... 저 사람들이
어떤 내력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가 없구려.]
[내가 보기에 그 사람들은 진짜 강도들 같지는 않군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는 필시 무슨 속셈이 있는데 알아차릴 수가 없구려.]
이때 한차례 서풍이 불어오면서 왔던 길 쪽에서 무기와 무기가
서로 엇갈리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비는 놀라 말했다.
[그들은 뒤쫓아온 사람들에게 결국 잡히고 말았군.]
정영소는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에 그 사람들은 결코 마소저를 해칠 의향은 없는 것
같았어요. 또한 서 나으리에게도 목숨은 해치지 않고 그저 쓴맛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더군요.]
호비는 곰곰히 생각하는듯 눈살을 찌푸린 채 말했다.
[나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구려.]
이때 말발굽소리가 갑자기 멀어지며 서북쪽으로 달려가는 기척
이 들려왔다. 멀리서 한 여인의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호비는 말을 몰아 길 옆에 있는 조그만 언덕 위로 올라가 살펴
보니 두 명의 도적이 각기 한 필의 쾌마를 타고 팔에는 어린애를
하나씩 안고 달려가고 있었다.
마춘화는 머리카락을 산산이 흐트린 채 뒤쫓고 있는 것이 마치
'내 아이를 돌려줘요, 내 아이를 돌려줘요'하고 부르짖는 것같았
지만 너무나 거리가 떨어져 있어 똑똑히 들리지는 않았다. 그들
두 도적들은 무기를 쳐들더니 갑자기 좌우로 나누어 말을 몰아갔
다. 순간 마춘화는 주춤거렸다. 두 아이가 모두 똑같이 자기 가슴
속의 살덩이와 같은지라 어느 쪽을 뒤쫓아가야 할지 모르고 허둥
대고 있었던 것이다.
호비는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크게 노해서 생각했다.
(저 도적들은 정말 못된 짓을 마구 하는구나.)
그리고는 정영소에게 부르짖었다.
[둘째 누이, 빨리 오시오!]
그는 중과부적이라 만약에 이번 일에 끼어들게 된다면 지극히
위험한 처지에 놓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와 같이 불공평
한 일을 보고도 못본 체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호비는 말을 몰아 쫓아갔지만 워낙 거리가 떨어져 있었고, 또한
타고 있는 말이 도적들의 말보다 빠르지 못했기 때문에 마춘화의
곁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두 도적들은 아이를 안고 사라진 후였
다.
마춘화는 멍청히 서 있을 뿐 울지도 않았다.
호비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마소저, 걱정마시오. 내 틀림없이 당신의 아이들을 되찾아 오
리다!]
사실 이때 '마소저'는 이미 '서부인'이 되어 있었으나 호비는
마음 속에는 아직도 마소저로만 있었기 때문에 불쑥 그 말이 튀어
나온 것이다.
마춘화는 그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나는지 무릎을 꿇으려고 했
다. 호비는 재빨리 말했다.
[너무 예의를 차리지 마시오. 서형은 어떻게 되었소?]
마춘화는 말했다.
[나는 아이들을 쫓는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모양
이예요.]
정영소는 말을 몰아 호비 곁으로 다가오더니 말했다.
[북쪽에도 적이 있어요.]
호비가 북쪽을 바라보니 과연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며 다
시 여덟 아홉필의 말이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호비는 무거운 어조로 급히 입을 열었다.
[적이 타고 있는 말은 모두 훌륭한 말이니, 우리는 멀리 도망치
지 못할 것 같구려. 그러니 으슥한 곳을 찾아 잠시 피하도록 합시
다.]
사방을 바라보았으나 텅 빈 들판만 보일 뿐 달리 몸을 숨길만한
곳이 없었다. 단지 서북쪽에 조그만 숲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
다.
정영소는 채찍으로 숲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지요.]
그리고 그녀는 마춘화에게 말했다.
[말에 타세요.]
[소저,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는 말 등에 올라타서 그녀에게 바짝 다가 앉으며 허리를
끌어 안았다.
정영소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눈썰미는 정말 날카롭군요. 그토록 위급한데도 내가 남
장을 한 여자인 줄은 알아보시니 말이예요.]
세 사람은 두 필의 말을 나눠타고 숲으로 달려갔다.

우문현답(愚問賢答)
겨우 한 마장 정도 달려가자 도적들은 이미 그들은 발견한 듯
휘--휘-- 휘파람을 마구 불어대며 남북 양쪽에서 에워싸듯 각기
십여필의 말을 몰아 들이닥치고 있었다.
호비가 앞장서서 숲속으로 뛰어들어가자 숲 뒷쪽에 모두 예닐곱
칸 되어 보이는 조그만 집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는 속으로 더
이상 도망가다가는 반드시 잡히게 될 것이니 저 집에서 잠시 피하
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집에 이르러 집을 살펴 보았다. 그 집은 비교적 큰 석옥
(石屋)이 있고 양쪽에는 모두 초가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가
손을 뻗쳐서 석옥의 판자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그 안에는 한 노
부인이 침대 위에 누워 있다가 호비를 보고는 놀라서 깜짝 놀라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아,아 하는 소리를 나직이 부르짖었다.
뒤따라 이르른 정영소는 그 초가집들이 모두 사립문으로 꼭 닫
혀져 있을 뿐만아니라 사면의 벽에 또한 창문이나 구멍이 없는 것
으로 미루어 아무래도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닌것 같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발길로 판자문을 걷어 차고 바라보니 많은 돌들이 쌓여 있
었다. 원래 이 집들은 석회요로서 석회석과 나무, 건조를 저장하
는 곳이었던 것이다.
정영소는 부싯돌을 꺼내서 양쪽 초가집의 건초에 불을 당기고
마춘화를 끌고 석옥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빗장을 질렀
다.
그 몇 칸의 초가집들은 석옥과 약 삼 사 마장 정도의 간격을 두
고 있었으나 나무와 풀에 불이 붙게 되자 석옥 안에서조차 더위를
느꼈다. 그러나 적을 일시적으로라도 막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았다. 동시에 석옥 옆의 초가집들이 모조리 타버린다면 적이
몸을 숨기고 공격해 올 수 없을 것이니 일거양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춘화는 그녀가 초가집을 보자마자 조금도 여유를 두고 생각해
보지 않고 불을 지르는 것을 보자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석옥으
로 들어간 이후 잠시 동안 생각해 본 끝에 겨우 그녀의 뜻을 알아
차리게 되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소저, 당신은 정말 총명하구려.]
초가집에서 불길이 일자 이미 다투어 숲속으로 들어선 뭇 도적
들은 멈칫하고 말았다. 말들이 불빛을 보자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앞발을 치켜들며 흥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그들은
사방에서 석옥을 겹겹이 에워싼 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마춘화는 석옥으로 들어간 이후에야 놀란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
시킬 수 있었지만 도적의 수중에 떨어진 아들들이 지금쯤은 죽었
는지 살았는지 모르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그녀는 유명한 권사(拳
師)의 딸로서 일찍부터 부친을 따라 강호에서 떠돌아다녔기 때문
에 많은 풍상을 겪어 왔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이들이 사로잡힌
이 마당에는 그만 참을 수 없다는 듯 눈물을 글썽였다. 그녀는 옷
소매로 눈물을 훔치더니 정영소에게 말했다.
[이봐요, 누이, 당신과 나는 면식이 없는 사이인데 어째서 당신
은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를 구해주었죠?]
이 한마디는 정말 일찌기 물어봤어야 마땅한 말이었다.
사실 이 도적들은 하나같이 무예가 고강하고 사람의 수도 많아
서 설사 그녀의 부친 신권무적 마행공이 살아있다 하더라도 결코
감당해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이들 두 사람은 자기의 일
처럼 여기고 도맡고 나섰으니 이야말로 스스로 목숨을 바치는 꼴
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호비가 스스로 '왜권유적 우경전'이라고
자칭한 것은 뭇 도적들을 희롱하는 말임을 알 수가 있었다. 사실
그녀 부친의 무공은 조부로부터 전수받은 것이고 결코 동문의 형
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정영소는 미미하게 웃으며 호비의 등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은 저 사람을 모르세요? 저 사람은 당신을 아는것 같던
데......]
호비는 석옥의 창구멍으로 바깥을 살피고 있다가 정영소의 말을
듣고 뒤로 고개를 돌리고 씩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잽싸게 몸을 돌려 정확하게 창문 틈으로 날라드
는 한자루의 강표와 한자루의 수전(手箭)을 나꿔채 땅바닥에 내던
지며 말했다.
[우리들은 암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 부득이 남의 암기를 빌려
쓸 수밖에 없구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이
남쪽에는 모두 여섯 사람이구려.]
그리고 다른 한쪽의 창문 구멍으로 두리번거리더니 말했다.
[하나, 둘, 셋...... 북쪽은 전부 일곱 사람인데 애석하게도 동
서 양쪽은 볼 수가 없구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집안을 살피다가 한모퉁이에 돌아궁이 위에
솥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었다. 그
는 아궁이 위에 놓인 쇠솥을 들어내어 오른손으로 솥의 귀를 잡고
왼손으로 솥뚜껑을 쥔 채 갑자기 창구멍으로 몸을 내밀어 동쪽과
서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렇게 되자 그의 상반신은 노출되었
지만 그 쇠솥과 솥뚜껑이 두개의 방패처럼 그의 좌우를 지켜주었
다. 아니나 다를까 순간적으로 청청, 창창,딱딱, 똑똑 한차례 요
란한 소리가 울려퍼지며 온갖 암기들이 솥을 향해 날아왔다. 곧이
어 그는 몸을 움츠리고 창문에서 몸을 뽑더니 씩!보고 웃었다.
이미 솥뚜껑에는 너댓가지의 암기가 박혀 있었고 쇠솥 안에는
철연자(鐵蓮子)니 수전(袖箭)이니 비추(飛錐)니 상문정(喪門釘)이
니 하는 대여섯 개의 암기들이 들어가 있었다. 솥 주둥이는 한쪽
이 커다랗게 잘려져 나있었으니, 이 방패가 없었다면 호비는 틀림
없이 고습도치가 되었으리라. 호비는 그 흔적을 유심히 바라보다
가 그것은 바로 한 조각의 비황석(飛蝗石)에 맞아 문드러진 것임
을 알아 보았다.
호비는 설명하며 말했다.
[전후좌우 전부 스물한 명이외다. 나는 서형과 두 아이를 보지
못했지만 짐작해 볼 때 아직도 두 사람이 남아서 서형을 상대하고
있을 것이고 다른 두 사람이 어린애를 안고 있을 것이니 상대방은
모두 스물다섯 사람이나 되는 것 같구려.]
정영소는 말했다.
[스물다섯이 만약 평범한 도적들이라면 물론 걱정이 없지
만......]
호비는 그 말을 즉시 이어받았다.
[둘째 누이, 당신은 뇌진당을 쓰는 사람이 어떤 내력을 가지고
있는지 아시오?]
정영소는 대답했다.
[저희 사부님께서 그와같은 외문(外門)의 무기에 관해서 말씀하
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뇌진당과 섬전추를 잘 쓰는 사람은
모두다 새북(塞北) 백가보(白家堡) 일파라더군요. 그러나 그 보검
을 쓰던 사람은 검술에 있어서 분명히 절동(浙東)의 기가검(祁家
劍)이예요. 한 사람은 새북이고 한 사람은 절동이니 오라버니는
그들의 말투가 어떤지 들어보셨지요?]
마춘화는 그 말을 받았다.
[그래요. 어떤 사람들은 광동 말씨를 쓰고 어떤 사람들은 호남
호북의 말씨를 쓰며 어떤 사람들은 산동과 산서의 말을 쓰는 사람
도 있어요.]
정영소는 힘주어 말했다.
[천하에는 이와같이 사면팔방에서 모여든 고수로 한무리를 지은
도적들 패거리가 그까짓 구천냥의 은자를 강탈하려고 하다니 정말
믿기 어렵군요.]
마춘화는 '그까짓 구천 냥의 은자'라는 말에 얼굴이 살짝 붉어
졌다. 비마표국이 세워진 이래 정말 한번도 그와같은 적은 액수의
표화물을 받고 호송한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호비는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서는 반드시 먼저 적이 찾아온 뜻을 조사해 알아내야
할 것이외다. 도대체가 우리 남매들을 노리고 온 것인지 아니면
마소저를 노리고 온 것인지 분명히 알아봐야 한단 말이외다.]
그는 처음에 도적들이 틀림없이 전귀농의 한 패거리라고 생각했
지만 도적들이 수작과 소행이 전적으로 서쟁과 마춘화 부부를 상
대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고서는 묘인봉이나 전귀농 일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마춘화는 말했다.
[그야 물론 우리 비마표국을 노리고 온 거예요. 그런데 이분의
존성이 어떻게 되죠? 실례지만 소매(小妹)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
을 용서하세요.]
호비는 손을 뻗쳐서 입술 위에 붙였던 수염을 떼고 웃으면서 입
을 열었다.
[마소저, 당신은 나를 몰라보시겠소이까?]
마춘화는 그 건장하면서도 약간 치기(稚氣)어린 얼굴을 뚫어지
게 바라보았다. 나이가 매우 젊어보이긴 했으나 어디서 본 적이
있는지 생각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호비는 웃으면서 흉내를 내듯 말했다.
[상도련님, 아무쪼록 당신은 아비를 놔주고 그를 더 괴롭히지
말아요.]
마춘화는 어리둥절해졌으며 앵두같은 입술을 살짝 벌리더니 아
무 말을 하지 않았다.
호비는 다시 말했다.
[아비가 당신 애기에 매달려 있으니 얼마나 불쌍해요? 당신은
먼저 그를 놓아주세요. 그러면 나는 다시 당신이 잠시 동안 만지
도록 해주겠어요. 좋지요?]
과거 호비가 상가보에서 상보진에게 매달려서 매를 맞게 되었을
때 마춘화는 그 참혹함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풀어주기를 간청하
였던 것이었다. 상보진은 비록 호비를 미워했으나 그녀에 대해서
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차에 그녀
의 손을 한번 잡아보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던 것인데 마춘화 이
토록 쉽게 응낙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그때 호
비는 이미 스스로 그 자신을 묶었던 밧줄을 풀었지만 마춘화가 그
를 위해 간청하던 말을 자자구구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그
당시 어린 심정에도 무척 깊은 감격을 간직하게 되었고 지금에 이
르도록 그 감격은 여전히 반푼어치도 사그러지거나 감소되지 않은
것이었다.
과거 그는 설사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가 들었
던 그 두마디 청원에 보답하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처럼 보은할 기회가 왔으니 몸은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나
마음 속으로는 도리어 여간 기쁜 것이 아니었다. 과거 가장 비참
하고 고통스러운 시절에 꽃다운 아가씨가 자신을 위해 사정하고
비는 말까지 했으니 지금에 이르러서 자기가 그 위기와 곤란한 처
지에 놓인 아가씨를 위해 성의를 다해서 보답을 할 기회가 왔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마춘화는 그와같은 두마디 말을 듣자 그만 온 얼굴이 빨개져서
부르짖듯 말했다.
[아, 당신은 아비, 상가보에 있던 아비로군요!]
그리고 잠시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호대협 호일도의 아들이며 호비라는 이름을 가진 호형
제였군요.]
호비는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자기 부
친의 이름을 들먹이는 소리를 듣자 다시 어린 시절의 일이 떠올라
그만 가슴속이 시큰해졌다.
마춘화는 재차 입을 열었다.
[호형제, 당신은...... 당신은...... 제발 우리 아이를 구해주
세요.]
호비는 무겁게 말했다.
[소제는 물론 당연히 힘을 다해야지요.]
그리고 몸을 약간 살짝 틀면서 다시 말했다.
[이사람은 소제와 의로써 맺어진 누이동생으로 정영소라고 한답
니다.]
마춘화가 막 '정소저'하고 한마디 부르려는 순간 갑자기 펑! 하
는 소리가 울려퍼지며 석옥의 판자문이 어떤 커다란 물체에 부딪
치는 소리가 났다. 이어 지붕에서는 곧장 흙먼지가 우수수하니 떨
어졌다. 다행히 판자문이 견고하고 두터웠으며 빗장도 굵직하여
문이 부숴지는 않았다.
호비는 깜짝놀라 창구멍으로 바깥을 살펴보니 네 명의 도적이
말 위에 올라 타고 밧줄로 한 토막의 나무 등걸을 감아 끌면서 멀
리서부터 달려와 판자문을 향해 부딪치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문이 열려서 뭇 도적들이 와락 몰려 들어오게 된다면 그
야말로 감당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는 즉시 손에 한대의 상문정과 한자루의 수전을 쥐고서 그 네
명의 도적들이 말을 몰아 저만치 물러 갔다가 다시 되돌아 달려올
때를 기다려 큰 소리로 호통을 내질렀다.
[이 나으리께서는 사정을 봐주어 말을 쏘되 목숨만은 건드리지
않겠다.]
네 필의 말이 삼 사 마장쯤 되는 곳에 이르자 그는 오른손을 쳐
들어 두 대의 암기를 번개같이 쏘아냈다. 두 대의 암기는 휙!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앞장선 두 필의 말의 정수리에 정확하게 꽂혔
다. 두 필의 말은 한번 소리내어 부르짖지도 못하고 즉시 앞 무릎
을 꿇으며 쓰러졌고 말등에 타고 있던 두명의 도적이 안장에서 굴
러 떨어졌다. 뒤따르던 두 필의 말 역시 나무등걸에 걸려서 그만
덩달아 쓰러지자 말에 탄 사람들은 간신히 몸을 솟구쳐 말에 깔리
는 것을 면할 수가 있었다.
뒤에서 구경하던 있던 뭇 도적들은 일제히 놀란 소리를 내지르
며 달려와 살펴보았다. 적중된 두 대의 암기는 말의 골수에 깊이
박혀 있었고 암기가 쏘아져 들어간 곳에는 그저 하나의 구멍만 남
아 있을 뿐 수전의 꼬리조차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뭇 도적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상대하고 있는 사람이 손에 사
정을 둔 것임을 깨달았다. 이 두 암기가 사람의 머리나 가슴팍 또
는 배 어떠한 곳을 겨눈다 하더라도 목숨을 건지기가 어렵다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뭇 도적들은 그만 어리벙벙해져서 서로 얼굴을 쳐다보더니 재빨
리 십 여 장 밖으로 줄행랑를 쳤다. 상대방의 암기가 결코 도달하
지 못할 곳에 이르러서야 겨우 함께 모여서 나직이 상의했다.
호비가 조금 전 도적들의 의표를 찌르며 암기를 발출했을 때 만
약 사람의 몸을 겨냥했더라면 뭇 도적들 가운데 적어도 서너 명은
살상을 입었을 것이고 형세는 자연히 완화되었으리라.
그러나 호비는 상대방의 내력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경솔하게
인명에 살상을 입히고 끝내 풀 수 없는 원한을 만드는 것을 원하
지 않았다. 더군다나 마춘화의 두 아들이 적의 손에 들어가 있고
서쟁의 행방이 또한 불분명하지 않은가? 만약 쌍방이 좋게 해결할
수 있으면 그야말로 상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뭇 도적들이 물러서자 호비는 몸을 돌려 판자문은 살펴보니 거
기에는 이미 커다란 틈이 생겨 있었고 한 두 번만 더 나무등걸로
공격한다면 적의 침입을 막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마춘화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초조하게 입을 열었다.
[호형제, 그리고 정씨 누이, 그대들은 어떻게 할 것이지 얘기해
봐요.]
호비는 눈쌀을 찌푸렸다.
[이 도적들 가운데 당신은 한 사람도 모르나요?]
마춘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몰라요.]
호비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로 보아 영존께 대해서 무척 받들고 있으니
영존께서 과거에 맺은 원수들이라고 보기에는 어렵군요. 만약에
일부러 당신을 괴롭히려고 두 아이를 데리고 가려 했다면 첫째 당
신이 한 사람도 알아 보지 못할 리가 없고, 둘째 그들이 당신에
대해서 반마디의 불경스러운 말조차 삼가고 있는 점을 볼 때 또
이상한 일이지요. 그리고 서형에 대해서만큼은 확실히 매우 무례
하지만 서형과 감정이 있다고 해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들이닥칠 리가 없지 않겠소이까?]
마춘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요. 뭇 도적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두다
무공이 나의 사형보다 더 뛰어나요. 다만 한 두 사람만 나서더라
도 승부는 충분한 거라고 볼 수 있지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은 정말 이상야릇하구려. 그러나 마소저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들이 하는 짓을 볼 때 결코 사람을 해칠 뜻은 없는 것
같고 마치 서형을 조롱하려는 것 같았소.]
마춘화는 호비의 말에 '한송이 아름다운 꽃이 쇠똥에 꽂혔다'는
속담을 상기하고는 다시 한번 얼굴을 살짝 붉혀야 했다.
두 사람이 말하고 있는 동안 정영소는 어느덧 석옥의 침대위에
누워있던 노파를 위로하여 안정시키고 무쇠솥에 밥을 짓기 시작했
다.
잠시 후 세 사람이 배불리 끼니를 채우고 난 후 창구멍으로 내
다보았다. 뭇 도족들은 집 주위를 오락가락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
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주위의 나무숲에 가려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호비와 정영소는 나직이 한동안 의견을 주고 받았으나 서로 해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정영소는 천천히 말했다.
[이 일은 당신 호 큰나으리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호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로서는 조금도 모를 일이외다.]
그리고 잠시 있다가 다시 말했다.
[차라리 이대로 궁리만 하고 있느니보다는 본래의 참모습을 드
러내 보이도록 합시다. 만약 이 일이 우리와 어떤 관련이 있다면
우리들이 마땅히 상대를 해야할 것이고 마소저의 남편이나 아이들
이 무단히 재앙을 입지 않도록 해야 할 것 아니겠소?]
정영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비는 조그만 수염을 갖다 붙이고 정영소와 함께 문가로 가서
는 판자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뭇 도적들은 사람이 나서는 것을 보자 그들이 포위망을 뚫고 달
아날까봐 급히 말을 몰아 사방을 에워싼 채 집앞으로 다가왔다.
호비는 부르짖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 호가를 노리고 온 것이라면 이 호비와
의누이인 정영소는 바로 이곳에 있으니 애꿎은 사람들을 관련시킬
것이 없소이다.]
그리고 나서 호비는 담뱃대를 두 토막으로 분질러버리고 윗입술
의 콧수염을 뜯어낸 다음 얼굴의 화장을 모조리 지웠다.
정영소 역시 모자를 벗고서 검은 머리카락을 느려뜨려서 여자의
몸이라는 것을 완전히 드러냈다.
뭇 도적들은 얼굴에 하나같이 놀라운 빛을 띠웠다. 이 사람의
무공이 그토록 훌륭한데 겨우 이십 세도 채 되지 못한 젊은이라고
는 결코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던 것이다. 뭇 도적들은 서로 쳐다
보고 있을 뿐 일시에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한 사람이 뭇 사람들을 헤치고 나섰다. 그는 바로 검을
쓰는 섭가 성을 가진 도적이었다. 그는 호비에게 포권을 해보이고
말했다.
[귀하가 검을 되돌려준 은덕에 대해서 불초는 한평생 잊지못할
것이오. 우리들의 일은 두 분과 절대 관련이 없으니 두 분은 얼마
든지 편한대로 하시구려. 불초는 이곳에서 공손히 전송을 하리
다.]
그러면서 그는 말에서 내리더니 말 엉덩이를 가볍게 한 번 쳤
다. 그러자 그 말은 호비 앞으로 다가와서는 멈추었다.
그 도적은 호비가 만약 떠나려한다면 자기가 타고 있는 말까지
도 선물할 모양이었다. 호비는 포권을 하고 환례하며 말했다.
[마소저는 어떻게 되는 거지요? 당신네들은 차후 이처럼 불공평
한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소이까?]
섭가는 대답했다.
[우리는 전혀 싸움을 일으키려는 의도는 없소. 우리 형제들은
다만 마소저를 북쪽으로 모시고 갈 참이며 결코 마소저의 털끝 하
나 손상시키지 않을 것이외다.]
호비는 웃었다.
[만약에 호의로 초청을 하는 것이라면 이토록 일을 크게 벌일
필요가 어디 있소이까?]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리고 외쳤다.
[마소저, 상대방에서는 당신을 손님으로 모시겠다는데 당신은
따라 가시겠소이까?]
마춘화는 문밖으로 나가서 말했다.
[나는 여러분들과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 왜 나를 초청하는 거지
요?]
뭇 도적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형제들은 물론 마소저를 잘 모르지요. 그러나 당신을 청
한 사람이 있다오.]
마춘화는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 애들은 어떻게 됐지요? 빨리 내 아이들을 되돌려 줘요.]
그 섭가는 말했다.
[두 분 아드님은 편안하고 무사하니 마소저는 안심하도록 하시
구려. 우리가 전력을 다해서 보호하고 있는데 어찌 실수를 하여
두 분의 만금지체(萬金之體)인 소공자(小公子)를 놀라게 할 수 있
사오리까?]
정영소는 호비를 한번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강도들은 갈수록 말하는 것이 가관이로군. 서쟁은 기껏해
봤자 하나의 표국주나 표국사에 지나지 않는데 그의 아들들을 어
찌해서 만금지체라고 부르는 것일까?)
마춘화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나는 가지 않겠어요. 빨리 우리 애들을 되돌려 줘요!]
그리고는 뭇 도적들이 대답을 하기 전에 곧장 석옥으로 되돌아
들어가 버렸다.
호비는 마춘화의 행동이 기이하고 특이한 것을 보고 의심이 더
욱더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마춘화는 불초와의 교문이 매우 두터운 편이외다. 따라서 어떤
일이든 간에 불초는 결코 마소저 일에 수수방관할 수가 없소이
다.]
섭씨 성을 쓴 자가 말했다.
[귀하의 무공이 강하다고는 하나 두 주먹으로 네 손을 대항하기
가 힘들 것이외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스물다섯 명이나 되며 밤
이 되는데 더욱더 강력한 응원군이 도달하게 될 것이외다.]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이 말하는 사람의 수가 내가 짐작했던 바와 조금도 틀
림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어찌 되었든 나를 속이지는 않는 것이로
군. 그들의 강력한 조력자들이 누구인지 간에 내가 어찌 마소저를
버리고 떠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둘째 누이는 무단히 이곳에서
곤경에 처하게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윽고 그는 나직이 말했다.
[둘째 누이는 먼저 이 말을 타고 포위망을 뚫고서 떠나도록 해
요. 차라리 내 혼자 마소저를 보호한다면 그게 훨씬 수월한 노릇
이 될 것외다.]
정영소는 그가 자기를 생각해서 그러다는 것을 알고 말했다.
[우리가 의자매를 맺으면서 맹세한 것이 여러 명이 덤비면 함께
막자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먼저 도망을 치자고 하는 것인가
요?]
호비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변명하듯 그 말을 받았다.
[둘째 누이와 마소저는 일면식도 없는데 그녀를 위해서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어디에 있소? 그러나 나는 약간 문제가 다르지 않
소?]
정영소는 눈길을 시종 그에게 던지지 않고 말했다.
[맞아요. 어째서 내가 그녀를 위해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있겠
어요? 그러나 나와 당신 역시 설마하니 일면식도 없었던 사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요?]
호비는 속으로 매우 감격했다. 그는 스스로 한 평생에 사긍사람
중에서 기꺼이 자기와 함께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평사숙이
그럴 것이고 조반산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 깜짝할 사이지만 이상하게스리 묘인봉도 그럴 수 있으
리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데 오늘날 또 한명의 방년의 소녀가 자기 옆에 서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살겠다면 우리 함께 같이 살기로 하고, 죽겠다면 우리 함께 죽
기로 해요!>
이때 섭가라는 도적은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형제들은 결코 마소저를 반푼어치도 감히 손상입히지 못
할 것이니 두 분은 결코 걱정할 필요가 없소이다. 그러니 두분이
무단히 스스로 곤경을 자초하지 마시기 바라오. 귀하가 일을 처리
하는 행동이 공명정대한데 대해서는 나도 무척 탄복하고 있소이
다. 우리는 다음날 만날 기약을 하고 오늘은 이곳에서 작별을 고
하는 것이 어떻겠소?]
호비는 물었다.
[당신들은 도대체 마소저를 놓아줄 것이오. 놓아주지 않을 것이
오?]
그 섭가라는 사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뭐라고 다시 말을 하려
고 했으나 갑자기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부르짖었다.
[그 녀석은 좋고 나쁜 것을 모르는구려. 섭 형, 그와 쓸데없이
입씨름을 할 것 없소이다.]
[이것이야말로 천당에는 길이 있는데도 가지 않고 문이 없는 지
옥으로 스스로 들어오려는 격이 아니오?]
[바보같은 녀석 네 혼자 힘으로 정말 하늘만큼 큰 재간을 가지
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당해 낼 수 있으리라고 보느냐?]
별안간 하얀 광채가 번쩍 하더니 하나의 암기가 호비를 향해 질
풍같이 쏘아져 왔다. 그 섭가라는 도적은 깜짝 놀라 몸을 솟구쳐
서 대뜸 암기를 낚아채더니 땅바닥에 팽겨치고는 동료들을 쏘아보
았다. 그것은 한자루의 비도였다.
호비는 천천히 말했다.
[귀하의 호의는 이 형제가 마음 속으로 새겨두겠소이다. 이제부
터 우리들은 서로 그 누구에게 빛을 지지 않은 셈이 되었소이다.]
말을 마치자 그는 정영소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려 석옥으로 들어
갔다.
순간 등 뒤에서 연속적으로 바람소리가 휙!휙!일었다. 분명 등
뒤로 암기가 쏘아져 오는 것임을 눈치채고 그는 재빨리 문을 확
닫자 탁!탁!탁!하는 소리가 들리며 암기들은 모두 다 문짝에 박혀
버렸다. 순간 뭇 도적들은 크게 휘파람 소리를 내지르며 문 앞으
로 달려들었다.
호비는 서둘러 창구멍으로 달려가서 탁자위에서 강표를 집어들
고 가장 선두에 서서 공격해오는 도적들 향해 던졌다. 그러나 호
비는 여전히 살수를 펼치고 싶지 않아 그 강표는 상대방의 어깨쭉
지를 노렸을 뿐이었다.
그 도적은 악!하더니 어깨를 감쌌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며
조금도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고 부르짖었다.
[여러 형제들, 오늘 애숭이 한 녀석도 처치하지 못한다면 우리
가 무슨 낯으로 돌아갈 수 있겠소?]
이 말에 뭇 도적들은 일제히 호통을 내지르며 사면에서 달려들
었다. 그러자 동쪽과 서쪽의 석벽에서 동시에 무엇이 둔탁하게 부
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양쪽에는 창구멍이 없었기 때문에 뭇 도
적들은 호비가 암기를 던질 수 없음을 알고서 마음놓고 벽을 허물
려는 생각인 것이 분명했다.
호비는 창문을 통해 연신 암기를 던졌으며 남북 양쪽의 뭇 도적
들은 뒤로 퇴각했으나 동서 양쪽에서 석벽을 두드리는 소리는 조
금도 멈추지를 않았다.
정영소는 칠심해당으로 만들어진 초를 꺼냈다. 그리고 해약을
호비와 마춘화, 그리고 침대에 쓰러져 있는 노파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에게 그 약을 입에 물도록 하였다. 일단 적이 공격해 들어오
게 되면 촛불을 켜서 적을 질식시켜 쓰러뜨릴 작정을 한 것이었
다.
그러나 정영소의 독약은 소수의 적을 상대하는 데는 그야말로
귀신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었지만 적이 대거 공격을 해오게 되
었을 때에는 사용해보았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고 있었다. 따라서 칠심해당을 준비하는 것은 그리 전력을 다해서
한명이라도 더 상해를 입혀서 조금이라도 적의 기세를 약화시키겠
다는 생각이었을 뿐, 겹겹이 에워싼 포위망을 뚫고 달아날 수 있
을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실로 조금도 자신이 없었다.
바로 이때 퍽하는 소리가 나면서 서쪽의 석벽에 어느덧 하나의
구멍이 뻥 뚫렸다. 그러나 뭇 도적들은 호비의 반격을 두려워해서
그 누구도 감히 앞서서 기어들어오려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미
깨어진 석벽은 갈수록 점점 더 구멍을 내게 될 것이고 끝내는 뭇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 들어오게 되리라.
호비는 정세가 긴박함을 느꼈으나 이미 암기도 다 떨어질 지경
이었다. 그는 석옥 안에서 사방을 살피며 적에게 던져 상해를 입
힐 수 있는 물건을 찾아 보았다.
정영소는 부르짖었다.
[오라버니, 저 물건이 가장 좋을 것 같네요.]
그러면서 그녀는 누워 있는 노파의 침대로 다가가 손을 뻗쳐 바
닥을 더듬더니 두 손에는 허연 석회를 움켜쥐었다. 원래 이곳은
석회요였기 때문에 석옥에는 적지 않은 양의 석회가 쌓여 있었다.
호비는 부르짖었다.
[정말 절묘한 생각이군!]
그리고는 짝하니 장포의 한조각의 자락을 찢어서 석회를 긁어모
아 싸고는 몸을 움츠렸다가 갑자기 벽에 뚫린 구멍으로 머리와 손
을 내밀고 눈을 감은 채 거의 한 보따리가 되다시피 한석회를 흩
뿌렸다.
뭇 도적들은 마침 어떻게 석옥으로 공격해 들어가느냐 하는 것
을 놓고 계책을 세우고 있던 중이었다. 문제는 그 구멍으로 달려
들어가되 어떻게 호비에게 암습을 당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을 걱
정하던 차에 뜻밖에도 호비가 도리어 구멍으로 상반신을 밀어 내
리라고는 그 누가 생각이라도 했겠는가.
그 한 보따리나 되는 석회는 갑자기 사방으로 휘날리면서 희뿌
연 안개처럼 사방을 뒤덮었다. 그 바람에 가장 가까이 있던 세 명
의 도적은 그만 석회 벼락을 맞고 눈에 석회가 들어가서 눈을 비
비며 아픔을 느끼고 일제히 비명을 내질렀다.
호비의 급습에 성공하게 되자 정영소는 다시 두개의 석회봉지를
그에게 내밀었다.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리고는 돌로 만든 아궁이 위에서 커다란 돌멩이를 왼손으로
치켜든 채로 몸을 날려 위로 솟구쳤다. 순간 우르릉 쾅!하는 소리
가 나면서 천정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재차 몸을 날려 시도하자 그 구멍은 사람이 기어나
올 정도로 크기로 넓혀졌다. 호비는 즉시 구멍을 통해 지붕 위로
기어올라가 동쪽 벽에 모여있던 도적을 향해 두 봉지의 석회를
확! 뿌렸다. 이번에 역시 뭇 도적들 중 몇 사람이 석회 벼락을 맞
고 눈을 뜨지 못한 채 비명을 질렀다.
정영소는 잇따라 몇 개의 석회봉지를 쇠솥 안에 넣어서 지붕위
로 디밀었고 호비는 동서남북에 한 차례씩 석회벼락을 안겼다. 뭇
도적들은 소리치고 욕을 하면서 앞을 다투어 숲 속으로 물러갔다.
이 반격으로 뭇 도적들 가운데 칠 팔명이 눈을 상하게 되자 그
들은 당분간 감히 석옥에 접근하지를 못했다.
뭇 도적들도 감히 다가들지 못하고 호비 등도 감히 달려나가 공
격하지 못하는 대치 상태가 흘러갔다. 호비는 마치 최후의 보루처
럼 의지하고 있는 석옥을 잃게 된다면 그때는 적은 수의 사람으로
저 많은 수의 사람을 대항해 낼 수가 없게 될 것이 뻔 했다.
호비와 정영소는 요 며칠 동안 희노애락을 같이 나누다가 똑같
이 이 지경까지 처하게 되자 급속히 친밀해지게 되었다. 둘은 서
로를 쳐다보며 연신 서로의 걱정을 해주고 있었다.
마춘화는 약간 제정신이 아닌 듯 그저 고개를 푹 숙인채 묵묵히
깊은 생각에 빠져서 적을 바라보지도 않고 호비와 정영소 두 사람
이 말하는 소리조차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호비는 말했다.
[우리가 밤까지 버틴다면 어쩌면 어둠을 틈타서 도망칠 수도있
을지 모르겠구려. 오늘 밤 만약에 도망치지 못한다면 둘째 누이는
이번 일로 꽃다운 목숨을 헛되이 잃게 될지도 모르겠구려. 나야
뭐 왜권유적 우경전이라고 했으니 살만큼 산 늙은이지만.......]
그리고 나서 그는 손가락을 뻗쳐 윗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웃으며
말했다.
[진작 이번 일이 우리와 관계가 없는 것을 알았다면 그 콧수염
을 떼어 버리지는 않았을텐데.]
정영소는 미미하게 웃으며 나직이 물었다.
[오라버니, 나중에 도망치지 못하게 되면, 오라버니는 나를 구
하겠어요, 아니면 마소저를 구하겠어요?]
호비는 대답했다.
[두 사람 다 모두 구할 것이오.]
정영소는 다시 물었다.
[나는 오라버니에게 만약 한 사람만 구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된다면 누구를 구하겠느냐고 묻는 거예요.]
호비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침울하게 말했다.
[나는 마소저를 구하고, 둘째 누이와는 함께 죽기로 하
지......]
정영소는 고개를 돌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나직이 불렀다.
[큰오라버니......]
그러면서 그녀는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호비는 속으로 움찔
해지는 것을 느꼈다.
(둘째 누이가 나를 사모하는 정이 이렇게 깊을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구나!)
그는 문득 대장장이 왕가가 부르던 연가가 떠올랐다.
순간 갑자기 석옥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호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창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다가는 부르
짖었다.
[어이구, 야단났군!]

남편과 연인
뭇 도적들은 다투어 숲속에서 나뭇가지와 풀들을 긁어 모아서는
끊임없이 석옥 주위에 던지고 있었다. 상황을 미루어 볼때 틀림없
이 불로 공격해 올 것 같았다.
호비와 정영소는 손을 맞잡고 서로 한번 쳐다보았으며 상대방의
눈빛에서 두 사람은 자기네들의 처지가 전혀 희망을 기대할 수가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춘화는 갑자기 창문 입구에 서더
니 부르짖었다.
[이봐요! 당신네들의 우두머리는 누구예요? 나는 그 사람에게
할 말이 있어요.]
뭇 도적들 가운데 비쩍 마르고 왜소한 늙은이가 나서더니 입을
열었다.
[마소저, 하실 말씀이 있다면 이 소인에게 분부를 내리시구려.]
마춘화는 말했다.
[내가 나가서 직접 당신에게 말씀드리겠어요. 그러나 당신은 절
대로 나를 막고서 놓아주지 않는 일은 없어야 할 거예요.]
그 노인은 말했다.
[그 누가 감히 마소저의 길을 막겠소?]
마춘화는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나직이 말했다.
[호형제, 그리고 정 누이. 나는 나가서 그들과 몇마디 말을 하
고서 다시 돌아오겠어요.]
호비는 그 말을 반박하듯 말했다.
[안되오. 개뼉다귀 같은 강도들이 신의를 지키겠소? 마소저, 당
신은 그야말로 스스로 호랑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 아니겠소?]
마춘화는 말했다.
[이곳에 갇혀 있는 이상 이 일은 해결이 나지 않을 것 아녜요?
두 분의 높으신 의리에 대해서는 나는 한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일을 혼자서 책임지려 하고 있구나. 우리 두 사람이 연
루되지 않도록 하려고 하는 것이겠지. 그녀가 혼자 가게 된다면
자연히 흉한 일은 많고 좋은 일은 적을 것인데 사람을 구하려면
철저하게 해야지 그렇지 않다면 어찌 대장부의 소행이라 할 수 있
겠는가?)
그러나 마춘화의 뜻이 무척 꿋꿋한 것을 보고 어느덧 손을 뻗쳐
서 빗장을 뽑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함께 가도록 하지요.]
마춘화는 얼굴을 다시 한번 붉히며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정영소는 정말로 어찌해서 왜 마춘화가 몇 번이나 얼굴을 붉히
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설마하니 그녀가 호 오라버니에 대해서
연정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까지 갖게 되었다.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그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호비는 느릿하고도 힘찬 어조로 입을 열었다.
[좋소, 그렇다면 내가 가서 한 사람을 인질로 삼겠소.]
마춘화는 말했다.
[호형제, 그럴 필요가......]
그러나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호비는 어느덧 오른손으로
단도를 들고 왼손으로 대문을 와락 밀어젖히고서는 맹렬히 달려나
갔다.
호비는 경공법을 펼쳐서 화살처럼 쏘아 나갔고 뭇 도적들은 일
제히 부르짖었다.
[녀석이 도망치려 한다!]
[석옥에도 사람이 있으니 사방에서 막아라.]
[조심하게. 그 녀석이 암기를 펼치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
네.]
호통소리, 고함소리 가운데 호비의 그림자는 마치 한가닥의 잿
빛 연기처럼 뭇 도적들 안으로 뛰어들었다.
두 명의 도적이 칼을 휘둘러 막으려 하였으나 호비는 오히려 고
개를 숙이고 두 자루 큰 칼 아래를 파고 들어가 왼손으로 왼쪽 사
람의 손목을 낚아채려 들었다. 그러나 그 사람 역시 예사 인물이
아닌듯 교묘하게 칼을 옆으로 쓸듯이 베어오는 것이 아닌가?
호비는 부득이 손목을 잡는 것을 포기하고 칼을 들어 막았다.
호비의 공세가 약간 늦추어지자 두 도적은 강편을 들고, 한 사람
은 연자창을 휘두르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호비를 에워쌌다.
호비는 대갈일성을 하며 칼을 들고 맹렬히 내리쳤다. 순간 창창
창! 하는 커다란 음향이 울려퍼지며 강철 채찍은 땅바닥에 떨어지
고, 연자창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칼을 휘두르는 기세가 지극
히 맹렬하여 적의 무기를 모두 막아내기는 했지만 호비의 칼 역시
날이 무뎌져 다시 쓸 수가 없게 되었다.
뭇 도적들은 그의 늠름한 모습을 보고 흠칫하며 양쪽으로 물러
섰다. 그러자 그 노인이 호통을 내질렀다.
[내가 나서서 영웅호걸을 한번 상대해 보지!]
그는 맨손으로 몸을 가볍게 날리며 달려들었다. 호비는 그 모습
을 보고 놀라며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의 신법이 착실하고 온건한 것을 보니 대단한 인물인
것 같구나.)
이윽고 호비는 왼손을 쳐들며 부르짖었다.
[좋소! 자, 받으시오!]
그의 말이 떨어지자 노인은 발걸음을 멈추고 정신을 가다듬고
강표가 날아올 것을 대비했다. 하지만 호비의 그 한 수는 허초에
지나지 않았다. 호비는 왼발로 땅을 가볍게 딛으며 몸을 벼락같이
솟구쳤다. 순식간에 두 도적의 머리 위를 지나치며 팔을 뻗어 마
상의 한 도적을 끌어당겨 그의 영문혈( 門穴)을 움켜잡아 제압하
지 못하게 만들고 번개같이 그 도적의 말 위로 올라 말의 배를 힘
껏 걷어찼다.
그 말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앞발을 번쩍 쳐들고 사람
들 사이를 정면으로 뚫고 나갔다. 뭇 도적들은 호통소리와 욕지거
리를 하며, 어떤 자들은 말을 타고 어떤 자들은 줄달음을 쳐서 호
비의 뒤를 쫓아왔다. 몇 마장 쯤 나아가자 호비는 뒤에서 파공성
이 이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두 대의 철추(鐵錐)가 머리
위를 스칠듯이 지나갔다. 그 기세가 맹렬한 것으로 보아 발출한
고수의 솜씨를 알아 볼 수 있었다.
호비는 마상에서 몸을 돌려 뒤를 향해 앉으며 혈도를 움켜잡은
도적을 가슴 앞으로 세워 막으며 부르짖었다.
[어디 한번 고명한 솜씨를 다시 한번 가르침 받아볼까?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영문혈을 움켜잡힌 도적은 완전히 고개를 떨구고 축 늘어져 있
었다. 호비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다시 말배를 걷어찼다. 순간
말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이 아닌가?
원래 그가 몸을 돌리기 전에 이미 한 대의 철추가 말의 엉덩이
가죽을 뚫고 뱃속으로 파고든 것인데 그가 한번 걷어차자 뱃속의
철추가 뱃가죽을 파고 나와 그대로 앞으로 넘어진 것이었다.
호비는 즉시 낙지춘생(落地椿生)의 신법을 펼쳐 내려서며 그 도
적을 방패막이로 삼아 뒷걸음질을 치며 석옥 안으로 들어갔다.
뭇 도적들은 그가 자기 동료를 인질로 삼자 자칫 동료를 해치지
않을까 두려워 감히 덤벼들지 못했다. 호비가 단신의 몸으로 좌충
우돌하며 도적들 사이를 누렸지만 그들은 털끝하나도 건드리지 못
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한 사람이 잡혀가는 꼴이 되었다.
뭇 도적들은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물론 그
들의 가슴은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내심 호비의 당찬 배짱과 날
렵한 재주에 탄복을 하며 감히 그에게 손을 쓸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었다.
마춘화는 갈채를 보냈다.
[정말 훌륭한 솜씨예요. 정말 훌륭해요!]
그리고는 아무런 무기도 손에 들지 않은 채 석옥에서 나와 도적
들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도적들은 그녀가 가까이 다가서자 다투어 말에서 내려 양쪽으로
물러섰다. 마춘화는 계속 앞으로 걸어가더니 석옥과 십여장쯤 떨
어진 숲 가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호비와 정영소는 창문을 통해 바라보고 있었다. 마춘화는 석옥
을 등지고 그 노인과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정영소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큰 오라버니, 그녀가 왜 저렇게 멀찌감치 가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만약 어떤 변고가 생긴다면 우리들이 도와줄 수가 없는
지 뻔히 알고 있을텐데 말이예요.]
호비는 '음!' 소리만 했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정
영소가 묻고 있는 것에 대한 해답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아무 대
꾸도 하지 않았다.
정영소는 호비에게 다시 묻는듯 넌즈시 말했다.
[그녀는 도적들에게 하는 소리를 우리가 듣기를 원하지 않고 있
는 모양이예요.]
호비는 또 다시 '음!'했을 뿐이었다. 그는 정영소의 짐작이 옳
다는 것은 알았지만 무엇 때문에 마춘화가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호비와 정영소는 마춘화가 도적의 괴수와 주고 받는 말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표정은 어럼풋이 읽을 수가 있었다.
정영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큰 오라버니, 저 도적의 괴수는 마소저에게 매우 공손한 태도
로 말을 하는 것 같네요. 오만한 태도가 완전히 사라졌어요.]
호비는 그 말을 받았다.
[맞았소. 저 도적은 수양이 깊어 자기를 절제할 줄 아는 강적임
이 틀림없소이다.]
정영소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수양을 쌓아서라기 보다는 마치 하인이 마나님
에게 보고를 하는 태도 같군요.]
호비 역시 그러한 점을 느끼며 속으로 뭔가 짚히는 것이 있었
다. 하지만 방금 전 손을 잡았던 정영소에게 그 말을 하기는 겸연
쩍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정영소는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마소저는 여전히 고개를 흔들고 있어요. 그녀는 틀림없이 그
도적 괴수를 따라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군요. 그런데 그녀는
어째서......]
말을 하다가 그녀는 갑자기 호비를 돌아보더니 느끼는 바가 있
는지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호비는 넌지시 입을 열었다.
[둘째 누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소? '그녀는 어째서......' 하
더니 왜 말을 멈추는 것이오?]
[오라버니에게 여쭈어 봐도 될런지 잘 모르겠네요. 물어보면 오
라버니가 성을 낼까봐 두려워요.]
호비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둘째 누이, 당신은 나와 생사를 함께 하기로 한 사이인데 못할
말이 뭐 있겠소? 나는 어떤 일이라도 둘째 누이에게 감 출 생각은
없소이다.]
이윽고 정영소는 작정을 한듯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좋아요. 마소저가 저 도적 괴수와 말을 하면서도 어째서 화를
내는 모습을 볼 수가 없죠? 더욱더 이상한 것은 어째서 오라버니
도 얼굴을 붉히느냐 하는 거예요.]
호비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나는 한 가지 의심나는 일이 있는데 아직 확실한 증거가 없어
지금으로서는 분명하게 말하기가 거북하구려. 둘째 누이, 이 오라
비는 광명정대하여 남들 앞에서도 떳떳하다는 것을 믿어주겠소?]
정영소는 그가 간곡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기뻐
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큰 오라버니는 그녀의 사연을 알고 얼굴을 붉히는 것
이로군요. 다른 사람의 일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예요. 나는 오
라버니가 좋다면 나도 좋은 거예요.]
호비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열었다.
[내가 처음 마소저를 알게 된 때는 겨우 열 서너 살의 코흘리개
꼬마였소. 그녀는 나의 불쌍한 처지를 보고 안타깝게 여겨 간청
을......]
그러더니 그는 물끄러미 고개를 들고 저녁 노을이 붉게 타오르
는 먼 하늘을 아련히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내 짐작이 옳을런지 확실치는 않지만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믿소. 그녀는 심성이 고운 사람이오.]
이때 갑자기 혈도를 짚힌 도적이 뒤에서 나직이 신음소리를 냈
다. 필시 혈도가 봉쇄되어 고통을 참지 못하는 것 같았다. 호비는
몸을 돌려 그의 장문혈(章門穴)을 한번 지그시 누르고 이내 그의
천지혈(天池穴)을 몇 번 주물러 그의 혈도를 풀어주며 말했다.
[부득이한 노릇이라 실례가 많았사오니 양해해 주시오. 그런데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오?]
그 도적은 짙은 눈썹에 커다란 눈망울을 가지고 있었고 체구도
우람했다. 그는 노기띤 눈초리로 호비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말했
다.
[내 재주가 이것 밖에 되지 못해 당신에게 잡혀왔으니 처죽이든
갈기갈기 찢어 죽이든 빨리 손을 쓸 것이지 사내 대장부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소?]
호비는 그가 굴하지 않고 도리어 호통을 치는 모습을 보자 그의
사내다운 기게에 탄복을 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귀하와 나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아무 원한도 없는데 어찌
해를 끼칠 수가 있겠소? 다만 오늘의 일이 여러모로 이상하여 불
초로서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는 입장이니 노형께서 약간 깨우
쳐 주실 수 없겠소?]
그 도적은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이 왕철악이 비열한 소인배인 줄 아시오? 당신이 아무
리 꿀처럼 달콤한 말을 한다 하더라도 내 입에서 어떤 공초를 받
아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마시오.]
정영소는 혀를 낼름 내밀어 보이고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자신의 존함을 말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말을 한 것이
아닌가요? 원래 왕철악 왕나으리였군요. 익히 말씀을 들었어요.]
왕철악은 '퉤!'하고 침을 뱉더니 꾸짖듯 말했다.
[계집애가 무엇을 안다고 나서는게냐?]
정영소는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호비에게 말했다.
[큰 오라버니, 이 사람은 멍청하네요. 하지만 그는 응조안행문
(鷹爪雁行門) 출신이며 소매와는 약간 교분이 있는 편이예요. 주
철초(周鐵 ), 증철구(會鐵鷗)는 나를 보면 모두 공손한 태도를 취
해요. 그러니 오라버니는 이 자를 괴롭히지 말도록 하세요.]
그러면서 그녀는 호비에게 눈을 깜박여 보였다.
왕철악은 매우 이상한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당신이 나의 대사형과 둘째 사형을 안단 말이오?]
그의 말투는 대뜸 공손해졌다. 정영소는 대수롭지 않다는듯 말
했다.
[어찌 내가 모르겠어요? 보아하니 당신은 응조공(鷹爪功)이건
안행도(雁行刀)이건 모두 제대로 배운 것이 없는 것 같군요.]
왕철악은 대답했다.
[그렇소.]
그러면서 고개를 숙이는 것이 퍽이나 부끄러워하는 눈치였다.
본래 응조안행문은 북방 무림의 저명한 대문파였다. 문중의 대
제자인 주철초와 둘째 제자 증철구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강호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정영소는 사부에게서 그들 문파의 일대(一
代) 제자들은 이름을 지을 때 마지막 세번째 글자에는 대체로 새
조(鳥)자를 많이 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따라서 왕철악이
자기의 이름을 들먹이고 또 그가 사용하는 것이 안령도(雁翎刀)였
기 때문에 그의 내력을 금방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왕철악
이 그들 문파의 무공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였다고 말을 한 것은
뻔한 이치였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찌 호비에게 사로잡혀
왔겠는가?
그러나 왕철악은 머리가 총명한 편이 못되고 고지식한 편이라서
정영소의 말이 모두 옳은 것을 느끼고 완전히 정영소의 말에 의심
을 하지 않았다.
정영소는 차분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의 두 분 사형은 어째서 함께 오지 않았지요? 아무리 찾아
봐도 그들을 볼 수가 없더군요.]
사실 그녀는 주철초와 증철구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위명이 높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만약 도적들 틈에 있었다면 틀
림없이 우두머리 격인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하였다. 그러
나 비쩍 마른 노인과 나머지 몇 명의 우두머리 격인 도적들 가운
데 칼은 쓰는 자들이 없었기 때문에 주철초와 증철구 두 사람이
그들 속에 없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였던 것이다. 과연 이번에도
제대로 알아맞춘 격이 되어 왕철악은 순순히 말했다.
[주 사형과 증 사형은 모두 북경에 남아 있소이다. 이러한 사소
한 일에 어찌 그들 두 분의 귀하신 몸을 피곤하게 만들 수 있겠소
이까?]
그의 말투는 무척 득의양양한 빛이 서려 있었다.
정영소는 속으로 생각을 했다.
(그들 두 사람이 북경에 남아 있다면 설마하니 이 패거리들이
정말 북경에서 왔단 말인가? 다시 한번 속여봐야지!)
이윽고 그녀는 가볍게 물었다.
[천하장문인 대회가 얼마 후에 열리게 돼요. 당신들의 응조안행
문은 틀림없이 그 모임에서 크게 체면을 세우게 될 거예요. 당신
도 북경으로 돌아가서 구경을 하겠군요?]
왕철악은 그 말을 받았다.
[그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소? 이번 공무(公務)를 마치면 모
두들 돌아가게 될 것이외다.]
호비와 정영소는 모두 어리둥절했다.
(아니 공무라니? 무슨 공무일까?)
정영소는 넌즈시 물었다.
[귀채의 뭇 두령들이 초안(招安)을 받아 황상을 위해 애쓰는 것
은 그야말로 가문과 조상을 빛내는 일이지요.]
그러나 뜻밖에도 이 지적은 틀리고 말았다. 정영소는 그들이 모
두다 도적들인데 공무를 집행하고 있는 중이라면 이것은 초안을
받드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왕
철악은 커다란 눈망울을 가늘게 뜨고 눈알을 부라리며 말했다.
[초안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당신은 우리들이 정말 도적인
줄 아시오?]
정영소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아이쿠! 야단났구나!)
그러나 그녀는 미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네들이 흑도에서 밥을 빌어먹고 있는 친구들처럼 행세를
하고 있으니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치미를 떼는 마당에
굳이 들먹일 필요는 없겠죠?]
그녀는 시치미를 떼고 대충 말을 얼버무리려고 했으나 왕철악은
의심을 일으킨듯 정영소가 다른 말로 마음을 돌리려고 해도 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호비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둘째 누이, 누이가 이 왕형의 사형들을 알고 있다면 우리들은
더 더욱 왕형을 붙잡아 둘 수가 없구려. 왕형 당신은 돌아가시
오.]
왕철악은 어리둥절하며 몸을 일으켰다. 호비는 석옥의 나무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본의 아니게 실례를 한 점을 양해해 주시구려. 다음에 다시 만
납시다.]
왕철악은 그가 또 어떤 간계를 쓰는지 몰라 감히 발을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정영소는 호비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계속 눈짓
을 했다. 호비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제 호비와 우리 누이동생 정영소가 주형과 증형 두 분 무사
에게 안부를 전하더라고 말씀 좀 전해주십시요.]
그는 가볍게 왕철악의 등을 밀어 문 밖으로 나가게 만들었다.
왕철악은 문을 나섰지만 의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머뭇거
리며 걸음을 떼지 못했다. 잠시 후 뒤를 돌아보니 나무문이 이미
닫혀. 있는 것을 보자 그제서여 앞으로 몇 걸음 내딛더니 뒤로 돌
아서서 뒷걸음질을 하며 호비가 자기에게 암기를 던지지 않을까
경계를 하였다. 오륙 마장 물러나도 석옥에서는 아무런 동정이 보
이지 않자 그제서야 몸을 돌리고 나는듯이 숲 속으로 달려들어갔
다.
정영소가 입을 열었다.
[큰오라버니, 나는 되는대로 말한 것이지 그의 사형이 주철닭
(周鐵鷄)인지 증철오리(會鐵鴨)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데 어째서
오라버니는 정말로 믿고 그를 놓아주는 거죠?]
호비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내가 보기에 저 사람들은 마소저에게 결코 상해를 입힐 뜻이
없는 것 같소. 더군다나 왕청악은 미련한 사람같으니 저들 도적
패거리들은 그를 별로 상관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소?
그들이 정말로 마소저를 해칠 뜻이 있다면 결코 저 멍청한 사람을
돌보지는 않을 것이외다.]
정영소는 칭찬하며 말했다.
[오라버니 말이 정말......]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창구멍으로 마춘화가 천천히 돌아
오는 것이 보였다. 뭇 도적들은 공손히 숲 가까지 전송을 했을 뿐
더 나오지 않고 그녀가 석옥으로 돌아오도록 내버려 두었다.
호비와 정영소는 의아한 빛을 띠운 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춘
화가 말했다.
[그들은 모두 호형제의 무공이 지극히 고강할 뿐 아니라 인정이
많고 의리가 두터워 정말로 젊은 영웅호걸이라고 칭찬이 대단하더
군요.]
호비는 겸손의 말을 한마디 하고 그녀가 멍하니 넋을 잃고 다음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을 보며 더 묻기가 거북하여 잠자코 있었다.
잠시후 마춘화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형제, 정 누이, 당신들은 떠나도록 해요. 나의 일에...... 당
신 두 분이 도움이 될 수는 없어요.]
호비는 물었다.
[당신이 어려운 처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는데 내가 어찌 그
냥 떠날 수가 있겠소이까?]
마춘화는 그 말을 받았다.
[나는 여기 있더라도 아무 위험이 없어요. 그들은 감히 나를 어
떻게 할 수가 없을 거예요.]
호비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말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홀로 이곳에
남겨두고 떠난다면 어찌 내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순간 그녀의 얼굴은 붉어졌다가 다시 창백해졌으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울상을 짓다가 갑자기 입가에 미소를 띠우기
도 했다. 호비와 정영소는 어리둥절해서 서로 쳐다보았다. 석옥
안팍은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호비는 정영소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창 가로 끌고 가서
바깥을 내다보며 어색한 분위기를 피했다. 호비는 나직이 입을 열
었다.
[둘째 누이,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인정이 많고 의리가 두터우신 젊은 영웅호걸 나으리께서 어떻
게 하자고 말씀을 하셔야지요. 이 젖비린내 나는 계집애가 어떻게
할 수가 있겠어요?]
호비는 나직이 말했다.
[의심가는 일이 한 가지 있기는 하지만 직접 물어보기는 거북하
구려. 이렇게 막연히 대치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바람직한 해
결책이 아닌 것 같소이다.]
정영소는 호비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한 번 알아맞춰 볼까요? 오라버니는 상가라는 사람이 과
거에 그녀에게 춘정을 품고 있었다고 했지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둘째 누이는 정말 총명하구려. 나 역시 이 사람들이
상보진의 부탁을 받고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구려. 그
렇기 때문에 마소저에게는 무척 공손하면서도 그녀의 남편에게는
야박할 정도로 조롱을 하고 모욕을 주는 것 같소.]
정영소는 말했다.
[내가 보기에 마소저는 아직도 그 상가에 대해서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 같네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것이오.]
두 사람은 이 말을 주고 받을 때는 서로 바라보지 않고 입술만
가볍게 움직이고 있었고, 마춘화는 석옥의 모퉁이에 앉아 있어 그
말을 들을 수는 없었다.
차츰 저녁 노을이 엷어지면서 점차 어두워지려고 할 때, 갑자기
서쪽에서 잇달아 호각소리가 울려퍼지며 몇 필의 말이 달려왔다.
정영소가 나직이 말했다.
[또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이 온 모양이군요.]
호비는 귀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한 사람은 걸어오고 있을까?]
과연 얼마 후에 한 사람이 바쁜 걸음으로 달려왔고 그 뒤에는
네 필의 말이 부째꼴 모양으로 흩어져 뒤쫓고 있었다. 그러나 마
상에 있는 사람들은 장난을 치듯 말을 재촉하지 않고 그저 입으로
만 호통소리와 휘바람을 불며 앞서 가는 사람과는 이 삼 장의 거
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앞에서 도망치는 사람은 머리를 산산이 흐트린 채 발걸음이 휘
청거리는 것이 이미 지칠대로 지쳐 있는 것 같았다.
호비는 그 사람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게 되자 부르짖었다.
[서형! 이쪽으로 오십시요!]
그러면서 나무문을 열고 달려가 그를 맞이하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네 필의 말이 옆으로 돌아 달려오더니 서쟁의
앞을 가로 막았고 숲속에서도 역시 도적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호비는 만약 자기가 달려나간다면 아무래도 도적들은 그 기회를
틈타 석옥으로 뛰어들어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된다
면 정영소와 마춘화가 당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부득이 그는 서쟁
이 도적들에게 포위되는 것을 그대로 두고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
나 잠자코만 있을 수만은 없어 큰 소리로 외쳤다.
[사람 수가 많은 것으로 이기려고 한다며 어찌 영웅호걸이라 할
수 있겠소!]
말을 몰아 쫓아온 네 명의 사나이 가운데 한 사람이 부르짖었
다.
[맞았소! 그렇지 않아도 나는 신권무적의 고제자이시며, 그 쟁
쟁한 비마표국의 서 대표국주와 일대일로 한번 겨루어 볼 참이
오!]
호비는 그의 음성이 매우 귀에 익은 것을 느끼며 가늘게 눈을
뜨고 바라보더니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상보진이로군!]
정영소는 그 말을 받아 말했다.
[정말 그 상가라는 사람이 왔군요!]
정영소가 보기에도 상보진이라는 사람은 몸이 미끈하게 빠졌고,
얼굴도 희고 깨끗하여 온 얼굴이 얽은 자국으로 뒤덮여 있는 서쟁
과 비교한다며 열 배나 준수하다고 생각되었다. 게다가 말에서 훌
쩍 몸을 날려 뛰어내리는 신법 또한 날렵하고 깨끗하기 이를데 없
어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과 마소저는 정말 어울리는 한 쌍이라 할 수 있구나.
저 도적들이 불공평한 일에 나선 것이며 아름다운 꽃이 쇠똥에 꽃
혀있다고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구나.)
그러나 그녀 역시 한창 때의 젊은 낭자인지라 참을 수 없는 듯
입을 열었다.
[마 언니, 그 상가가 왔어요!]
마춘화는 제 생각에 빠져 정영소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
듣지를 못한듯 무심결에 '응!'하고 대꾸를 할 뿐이었다.
이때 뭇 도적들은 이미 커다란 원을 그리듯 하면서 석옥의 창문
에서 내다보는 사람들을 살폈다. 정영소가 입을 열었다.
[큰 오라버니, 이곳에서는 똑똑히 볼 수 없으니 우리 지붕 위로
올라가도록 해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윽고 두 사람은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서쟁과 상
보진은 두 눈을 부릅뜨고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상보진은 등이
두텁고 날이 엷은 칼을 한자루 들고 있었고 서쟁은 맨손이었다.
정영소가 나직이 말했다.
[이건 불공평하네요.]
호비가 대답도 하기 전에 상보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
[서 나으리, 이 상 아무개가 당신과 손을 쓰면서 사람 수로 이
기려고 할 필요도 없고, 또한 당신이 무기가 없는 틈을 빌어 공격
을 하지도 않겠소. 당신이 칼을 쓰고 나는 맨손으로 상대를 하겠
소. 그렇게 된다면 어쨌든 당신은 손해보는 것은 아닐 것이오.]
그리고는 칼자루를 앞으로 하여 서쟁에게 칼을 던졌다. 서쟁은
손을 뻗쳐 잡아쥐더니 가뿐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상가보에서 당신이 나의 사매에게 음흉한 태도를 취한 것을 내
가 눈이 없어 못 본 줄 아시오? 당신이 오늘까지 이렇게 떼를 지
어 달려온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 묻기도 싫소. 상보진, 칼을
드시지!]
상보진은 소리높여 말했다.
[나는 맨손으로 당신의 칼을 상대하겠소. 여러 형님들, 만약 내
가 그의 칼에 상처를 입는다 하더라도 나의 오만함만 탓할 뿐 도
와 주지는 마시구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정영소가 입을 열었다.
[그는 왜 저렇게 큰 소리를 칠까요? 아마 마소저가 들으라고 그
러는 게 분명해요. 맨손으로 대적해서 사람들 앞에서 자기 솜씨를
뽑내고 더구나 마춘화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의도이겠지요?]
호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영소는 다시 입을 열었다.
[큰오라버니, 마소저는 누가 이기기를 바랄까요?]
호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나도 모르겠소.]
정영소는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한 사람은 남편이고 한 사람은 애인인데, 두 사람이 그녀때문
에 목숨을 걸고 싸우려고 하는데 그녀는 집안에 틀여박혀 아랑곳
하지 않는군요. 마소저의 욕심으로 볼 때 나는 아무래도 그녀가
상 나으리가 이겨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생각되네요.]
호비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소.]
서쟁은 상보진이 한사코 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하자 칼을
비껴들고 말했다.
[좌우지간 이 서가가 포위되어 있는 상태이니 살아서 돌아갈 생
각은 하지 않겠소.]
그리고는 휙!하니 칼을 들어 상보진을 향해 내리찍었다. 상보진
의 무공은 그보다 훨씬 뛰어난 편이었다. 과거 상가보에서 스승에
게 권각법을 가르침 받은 것은 자신의 무공을 숨기고 있는 것에
불과했고, 더우기 이 몇 년 동안 팔괘문의 사백부인 왕씨 형제들
을 따르면서 무공을 꾸준히 연마했기 때문에 팔괘도와 팔괘장의
수법은 더욱 증진되어 있었다.
서쟁은 이미 반나절 동안이나 쫓겨다녔기 때문에 기력이 쇠할대
로 쇠해 손에 칼을 들고 있었지만 상보진의 팔괘장을 몇초 받아내
지도 못라고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호비는 눈쌀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 상가 녀석은 매우 교활하군.......]
정영소는 넌즈시 물었다.
[오리버니가 나서서 손을 쓰시지 그러세요.]
호비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나는 마소저를 도우러 왔을 뿐이오. 하지만...... 하지
만...... 나로서는 그녀의 심정을 알지 못하겠구려.]
정영소는 마춘화에게 심해 불만이 있는듯한 투로 말했다.
[마소저는 절대로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을 거예요. 오라버니가
선의를 가지고 도와준다 하더라도 그녀는 오라버니를 고맙게 생각
한다고는 볼 수 없을 거예요. 차라리 우리 이 자리를 떠나도록 해
요.]
호비는 서쟁이 칼로 상보진을 내리친다고 하더라도 그의 장력에
밀려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면서 전혀 조식을 제대로 펼쳐내는 것
을 보지 못하고 참담한 마음이 들어 말했다.
[누이 말이 옳은 것 같구려. 이번 일은 우리가 상관할 수가 없
을 것 같소.]
그들은 지붕 위에서 내려와 다시 석옥으로 들어갔다. 호비가 말
했다.
[마소저, 서형은 더이상 지탱을 할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소.
상가가 독수를 쓸 것 같아 걱정이 되는구려.]
마춘화는 멍하니 넋을 잃고 그저 '응!'하고 다른 말이 없었다.
호비는 노기가 끓어올라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정영소에게 말했
다.
[둘째 누이, 갑시다!]
마춘화는 그 말을 듣더니 갑자기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물었다.
[당신들이 떠난다구요? 어디로 갈 건가요?]
호비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마소저, 당신이 옛날 나를 위해 애원을 했을 때 나는 정말 고
맙게 생가해 왔소이다. 그런데 당신이 서형에게 이토록......]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멀리서 처참한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바로 서쟁의 비명소리였다. 곧이어 상보진이 껄껄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 소리에는 득의양양한 기색이
역력했다. 뭇 도적들은 일제히 갈채를 보내며 우렁찬 소리로 말했
다.
[정말 보기드문 팔괘장이로군!]
마춘화는 깜짝 놀라 부르짖으며 뛰쳐나갔다.
[사형!]
호비는 개탄스러운 듯이 말했다.
[애인이 남편을 때려죽였으니 원을 푼 셈이군.]
정영소는 그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당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것
을 보자 부드러운 어조로 위로를 하듯 말했다.
[이런 일에는 오라버니가 설사 하늘같은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할 도리가 없는 거예요.]
호비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녀가 자기 사형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째서 그와 혼례를 올
렸단 말이오?]
정영소가 부드러운 눈길로 말했다.
[부친의 명을 어길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호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오. 그녀의 부친은 그때 상가보에서 불에 타 죽었소. 설사
혼약이 있었다 하더라도 부친이 돌아가신 이상 이미 깨진것이나
다름 없었는데 차라리 그랬더라면 이러한 지경에 이르는 것보다는
낳았을 것이오.]
그러던 차에 갑자기 사람들 틈에서 서쟁의 신음소리가 들려왔
다. 호비는 기뻐하며 말했다.
[서형이 아직 죽지 않은 모양이구려. 우리 나가 봅시다.]
그는 정영소의 손을 끌고 석옥을 나와 재빨리 도적들 속으로 파
고 들어갔다.
이상하게도 뭇 도적들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호비와 싸우고 대
치를 하고 있었지만 이때는 그저 마춘화와 상보진, 서쟁 세사람만
을 주시했을 뿐, 그들 둘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호비는 고개를 숙이고 서쟁을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에는 선혈
이 낭자했고, 숨소리도 가늘었다. 필시 상보진의 장력에 내장에
손상을 입은 것이 분명해 보였고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마춘
화는 그의 앞에 멍하니 서서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있었다.
호비는 허리를 구부리고 서쟁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가서 나직이
말했다.
[서형, 아직까지 해결을 하지 못한 일이 있다면 이 형제가 당신
을 위해 처리해 주겠소.]
서쟁은 아내를 바라보고 나서 상보진을 바라보더니 씁쓰레한 미
소를 지으며 나직이 말했다.
[없소.]
호비는 침착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두 아이를 찾아 훌륭하게 키워주겠소.]
물론 호비는 서쟁과 아무런 교분도 없었지만 그가 이토록 비참
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을 보자 의분을 참지 못하고 나서게 된 것
이었다.
서쟁은 다시 씁쓸하게 웃더니 나지막히 한 마디를 했으나 너무
목소리가 가늘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호비는 귀를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 그러자 그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떠듬떠듬 말했다.
[아이...... 아이들은...... 시집오기 전에...... 벌써 있었다
네...... 내 애들이 아니야......]
이윽고 숨을 한번 내쉬더니 다시 숨을 들이쉬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떨구었다.
호비는 홀연 깨닫는 바가 있었다.
(마소저가 그와 혼례를 올리게 된 것은 상가보가 불타고 난 후
상보진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는 없고, 배는 불러오니 할 수 없
이 그에게 시집을 가게 된 것이구나. 그래서 두 아이들은 옥을 깍
아놓은 것처럼 귀여웠으며 서형은 하나도 닮지 않았었구나.)
그는 허리를 펴고 몸을 일으켰으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
때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지며 다시 두 필의 말이 달려왔다. 말을
타고온 자들의 품에는 각기 마춘화의 아이가 한 명씩 안겨져 있었
다.
마춘화는 서쟁의 시신을 한번 바라보더니 상보진에게 고개를 돌
리고 말했다.
[상 도련님, 우리 바깥 양반을 당신이 죽인 건가요?]
상보진은 말했다.
[칼은 아직도 그의 손에 쥐어져 있소. 그가 더 유리한 형세였
소.]
마춘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쟁의 오른 손에서 칼을 뽑으며 말
했다.
[이것은 당신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팔괘도이군요. 전에 상가보
에서 본 적이 있지요.]
상보진은 엷게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로 기억력이 좋군요. 당신이 아직도 기억하다니 천
만다행이외다.]
마춘화는 말했다.
[내가 어찌 잊을 수 있겠어요? 상가보에서 있었던 일은 바로 어
제 일처럼 느껴지는 데요.]
정영소는 옆눈으로 호비를 바라보았다. 호비는 온 얼굴을 시뻘
겋게 붉힌 채 가슴이 들락날락 하며 억지로 노기를 참고 있었다.
마춘화는 팔괘도를 들고 칭찬의 말을 했다.
[훌륭한 칼이로군요!]
그리고 천천히 상보진 앞으로 다가갔다. 상보진은 입가에 미소
를 머금고 정이 담북 담긴 시선으로 손을 뻗치며 칼을 받으려고
했다. 마춘화는 칼날을 돌려 칼자루를 그에게 내미는 순간 별안간
허연 광채가 번쩍하며 칼날이 벼락같이 돌려지며 팍!하는 가벼운
음향과 함께 상보진의 허리를 찔렀다.
상보진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일장을 후려쳐 마춘화를 물러
서도록 만들고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했다.
[당신...... 당신...... 당신...... 어째서......]
그 말을 미처 끝내지도 못하고 앞으로 푹 고꾸라지더니 그만 숨
을 거두고 말았다.
너무나 의외의 일이라 사람들은 모두 놀라 멍하니 서 있었다.
본래 상보진이 서쟁을 죽였으니 마춘화가 남편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은 그 누구라도 마땅히 헤아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마춘
화는 서쟁의 죽음에 대해서 전혀 상심한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고
또한 상보진과 일문일답을 하면서도 마치 전부터 잘 알고 있던 사
람을 만나 인사말을 나누는듯 했는데 갑자기 허연 광채를 일으키
며 상보진을 찔러버린 것이었다.
뭇 도적들이 어리벙벙하여 넋이 빠진 사이에 호비는 정영소의
등을 가볍게 밀고, 마춘화의 손을 잡아끌면서 급히 석옥으로 물러
났다. 도적들은 깜짝 놀라 저지를 하려고 했으나 한 걸음 늦고 말
았다. 조금 전의 일은 너무도 느닷없이 일어난 일이라 도적들은
의논을 하려는듯 즉시 공격을 하지 않고 오히려 뒤로 물러났다.
호비는 한숨을 내쉬며 마춘화에게 말했다.
[내가 당신을 오해했었구려.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말입니다.]
마춘화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혼자 멍하니 석옥의 모퉁이에
앉아 있었다. 정영소는 그녀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부드러운 어조
로 그녀에게 몇 마디 위로의 말을 했다. 마춘화는 물끄러미 앞을
바라본 채 응! 하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호비는 정영소에게 눈짓을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
히 하고 다시 창문 가에 섰다. 호비는 말했다.
[마소저는 손을 쓸 틈도 없이 부군의 원수를 갚았구려. 하지만
이렇게 되니 더욱 이해할 수가 없구려.]
정영소 역시 의혹만 더 커졌을 뿐이었다. 본래 상보진이 당도하
게 되면서 모든 일의 진상이 밝혀지는가 했더니 그것은 더욱 이상
야릇하게 변하고 만 셈이었다. 마춘화가 상보진을 손수죽인 것은
그녀가 참담한 남편의 죽음을 보고 갑자기 양심이 살아나게 된 것
일까? 만약 도적들을 정말로 상보진이 이끌고 온 것이라면 그가
죽은 이상 도적들은 앞을 다투어 공격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으니 어찌 된 노릇일까?
호비는 곰곰히 생각해고는 입을 열었다.
[둘째 누이, 이 일은 이해할수 없는 점이 너무나 많구려. 우리
가 너무 경솔하게 뛰어들어 도리어 사람을 해치게 되었는지도 모
르겠소. 마소저는 일의 전후를 분명히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니 내
가 직접 저 도적 괴수에게 물어보겠소.]
정영소가 물었다.
[그가 그런 말을 해주겠어요?]
호비는 담담히 말했다.
[내가 가서 한 번 시험을 해보리다.]
[부디 조심하세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소.]
이윽고 호비는 석옥의 문을 열고 천천히 걸어나가 뭇 도적들에
게로 걸어갔다. 도적들은 그가 맨손으로 혼자 걸어나오는 것을 보
고 의아한 빛을 띠고 있었다.
청년 영웅
호비는 도적들과 예닐곱 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불초는 여러분들의 수령에게 긴밀히 드릴 말이 있소이다.]
그런 후에 그는 몸을 두드리며 무기를 휴대하지 않았다는 표시
를 했다. 도적 중에서 거칠게 생긴 사내가 호통을 쳤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절친한 형제들이니 할 말이 있다면
상관말고 말하시오. 그까짓 것을 가지고 궁싯거릴 필요가 뭐 있
소?]
호비는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들은 모두 영웅호걸이시니 우두머리 격인 분은 필시 대
단한 인물이시라 내가 그 분에게 한마디 할 자격도 없다는 것이
오?]
수척한 노인이 오른 손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대단한 인물이라니 감당할 수가 없소이다. 내가 보기에는 오히
려 소형제가 젊은 영웅호걸이라 할 수 있으니 과연 영웅은 젊은이
가운데서 나온다는 말이 있듯이 후배분은 정말 두려운 인물인 것
같소이다.]
그는 호비를 칭찬하면서도 짐짓 의젓한 표정을 지어 자기가 나
이가 더 많음을 은연중에 드러내려고 했다. 호비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말했다.
[나으리, 드릴 말씀이 있으니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소이
까?]
그리고는 숲속의 빈터로 걸어갔다.
그 노인은 곁눈질로 슬쩍 쳐다보았다. 방금 전 마춘화가 상보진
을 죽인 일이 아직도 눈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는 마
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호비가 암암리에 독계를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워 감히 따라가지 못하고 우물
쭈물했다. 그러나 겁을 집어먹고 따라가지 않는다면 많은 동료들
이 보는 가운데 체면을 깍는 일이라 즉시 전신에 경계를 돋구고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다.
호비는 포권을 하며 말했다.
[소인의 성은 호이며, 이름은 비라고 하지요. 나으리의 존성대
명은 어떻게 되는지요?]
노인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다짜고짜 물었다.
[귀하는 무슨 할 말이 있소?]
호비는 웃으며 말했다.
[별 것은 아니외다. 나는 나리에게 몇 수의 권각법을 가르침 받
고자 하오이다.]
그 노인은 그의 그러한 말을 전혀 예상치 못한듯 갑자기 안색이
변하며 말했다.
[이런 몹쓸 짓이 있나! 나를 이쪽으로 오라고 해놓고 겨우 한다
는 말이 그 한마디인가?]
호비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나으리, 너무 화를 내지 마시구려. 나는 당신과 한번 내기를
걸고 싶소이다.]
그러나 그 노인은 흥! 하고 코웃음치더니 몸을 돌려 떠나가려고
했다. 호비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당신에게 그럴 용기가 없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소
이다. 설사 내가 이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당신
은 나를 이기지 못할 것이외다.]
노인은 노해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방금 뭐라고 했지!]
호비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나는 두 발을 땅에서 떼지않을테니 당신은 마음대로 움직이면
서 한번 권각법을 겨루어 보자는 것이외다. 이렇게 하고 누가 이
기는지 내기를 하자는 것이외다.]
그 노인은 호비가 희한한 재간을 펼쳐 뇌진당을 빼앗고 왕철악
을 사로잡는 것을 보았고, 또한 검이나 암기를 자유자재로 받고
빼앗고 되돌려주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일은 자신의 눈을 어지럽
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일대일로 싸우기에는 겁이 나는 존재라
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두 발을 움직이지 않은 채 자기와
싸우겠다고 하니 이렇게 겨루는 일이 있다는 것은 강호에 들어본
적도 없었지만 허풍을 떠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하남(河南) 개봉부(開封府) 팔극권(八極拳)의 장문인으로
서 위인됨이 침착하고 무공 또한 고강한 편이었다. 따라서 그는
삼십 여 명의 우두머리로서 이 일에 나선 것이었다.
그 노인은 호비가 두 발을 움직이지 않겠다고 약속한 이상 자기
가 패할 리는 없고 이미 우세를 차지한 셈이라 그러한 제안에 손
해볼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곧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웃으며
말했다.
[소형제가 그러한 새로운 수법으로 이 늙은이를 시험해 보겠다
는 것인가? 좋아, 이 몇가닥 안되는 늙은 뼈다귀를 아까워 하지
않고 자네를 따라 한 번 겨루어 보도록하지. 그렇지만 암기를 사
용하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호비는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무공으로 친구를 사귀자는 것인데 어찌 암기를 사용할 수 있겠
습니까?]
노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이기지 못한다 치더라도 세 걸음만 물러선다면 제 아무리
팔이 길다 하더라도 나를 잡을 수는 없겠지. 이 싸움은 기껏해야
무승부가 될 것이다.)
이윽고 그는 흔쾌히 말했다.
[좋아!]
호비는 낭랑한 어조로 말했다.
[이 후배는 나으리와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 이번 일에 쓸데없이
끼어들어 무례하게 소란을 피운 격이니 실로 면목이 없소이다. 이
후배가 일초 반식이라도 지게 된다면 나와 우리 누이 두 사람은
즉시 떠나겠소이다.]
그 노인은 다시 속으로 가늠을 해보았다.
(만약 그가 계속 마소저를 감싸고 돈다면 이 일은 해결이 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이 사람 수를 믿고 강공을 펼친다면 필시 많
은 사람들이 다치게 될 것이고, 더우기 자칫 마소저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면 더욱 큰일이다. 역시 좋게 해결하는 편이 나을 것
이다.)
마음 속으로 결정을 내린듯 그 노인은 말했다.
[그렇군! 이번 일은 원래 다른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
이라오. 마소저는 이후에 부귀영화를 누리고 신분이 구름같이 높
이 올라갈 처지이니 소형제가 그녀와 교분이 있다면 그녀를 대신
해서 기뻐해야 할 것이외다.]
호비는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불초로서는 바로 그 점을 이해할 수가 없었소이다. 나으리께서
만약 일초라도 양보하신다면 이 후배는 나으리에게 그 사정 이야
기를 청하는 바이외이다.]
노인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좋아, 그렇게 하지!]
호비는 두 발을 한자 여덟 치 정도 벌리고 우뚝 서 있었다. 마
치 태산이 우뚝 버티고 서 있는듯 침착하고 온건한지라 그는 속으
로 움직이는 바가 있었다.
(어쩌면 정말 이 젊은이에게 질런지도 모르겠구나.)
그는 넌즈시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내가 만약에 진다면 부득이 말을 하겠지만 소
형제는 결코 다른 사람에게 발설을 해서는 안될 것이네.]
호비는 그 말을 받았다.
[그래도 제 의누이에게는 분명히 말을 해줘야 하지요.]
그 노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마른 장작은 밥짓기에 좋고, 의오라비와 의누이는 부부가 되기
쉬운 법이지. 너희 두 의남매가 얼마나 다정하냐? 네가 설사 말하
지 않겠다고 입으로는 다짐을 할런지 모르지만 네가 어찌 정겹게
달려드는 의누이에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윽고 그는 입을 열었다.
[그러면 그 밖에 제 삼자에게는 절대로 말해서는 안되네.]
호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이다. 그렇게 합시다. 하지만 내 어찌 노인장을 이길 수
있겠소이까?]
노인은 몸을 솟구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실례하겠네.]
그리고는 왼손으로 장력을 휘둘러 쏘아내며 오른 손을 갈고리처
럼 만들었다. 이것은 바로 팔극권의 가운데 추산식(推山式)이라는
일초였다.
호비는 슬쩍 옆으로 빗겨내며 그의 장력이 웅후하다는 것을 느
끼고 말했다.
[나으리의 장력은 정말 훌륭하구려.]
뭇 도적들은 두 사람이 자세를 취하고 손을 쓰자 다투어 달려왔
으나 두 사람 모두 얼굴에 미소를 띠우고 있는 것을 보고 주위에
늘어서서 구경을 했다.
팔극권의 팔극이란 바로 번수, 설완, 촌간, 두전이며, 모두 누,
타, 등, 봉, 척, 등, 소, 괘 팔식으로 나눌 수 있으며, 동작의 매
서움과 민첩함을 중시했다. 노인은 초식을 펼치자 마자 번수의 영
민함과 설완의 교묘함, 촌간의 정교함, 두전의 신속함을 그대로
펼쳐냈으며 가히 명가의 고수다운 풍모를 엿볼 수 있었다.
뭇 도적들은 그가 팔극권으로 대강 남북에서 위세를 떨쳐왔으며
또한 명성을 떨친지 삼십 여 년이나 지난 만큼 과연 대단한 실력
을 가지고 있다고 암암리에 탄복을 하고 있었다.
그 노인은 일보삼환(一步三環), 삼보구전(三步九轉), 십이연환
(十二連環)을 펼치더니, 이어 대식변소식(大式變小式), 소식변중
반(小式變中盤)으로 변화시키며 기마식(騎馬式), 어린식(魚隣式),
궁보식(弓步式), 마슬식(磨膝式) 등을 펼치며 호비의 주위에서 이
리저리 몸을 날렸으며 가면 갈수록 점점 주먹과 발길질이 빨라지
게 되었다.
호비는 온건한 자세로 수비를 하여 매 조식을 해소시켜 나갔는
데 과연 두 발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한동안 싸우게 되자 그
노인은 주먹과 손을 펼쳐내기가 더욱 거북해졌다. 마치 끈질긴 힘
이 암암리에 그의 공격을 저지하는 것 같아 속으로 부르짖었다.
(야단났구나!)
순간 더이상 공격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고는 상대방이 발을
뗄 수 없으니 최소한 무승부라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
면서 왼손을 거두어 들이는 순간 호비의 오른 손이 그의 오른 손
을 잡았으며, 동시에 왼손으로는 주먹을 쥐고 그의 오른쪽 팔꿈치
를 가볍게 눌렀다.
노인은 깜짝 놀라며 공력을 돋구어 팔을 뽑으려 했으나, 그 기
세가 엄청나서 만약 뽑으려 한다면 자기 팔이 부러질 것이라는 생
각이 들어 모골이 송연해졌다. 순간 호비는 갑자기 손을 놓고 뒤
로 물러 서며 발걸음을 한번 휘청거리며 말했다.
[나으리의 웅후한 장력에 정말 탄복했소이다. 정말 탄복했소이
다.]
노인은 그 뜻을 훤히 알고 있는지라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었
다. 상대방은 자기 팔을 부러뜨릴 수도 있었는데 일부러 발걸음을
휘청거려 무승부인 것처럼 연극을 했던 것이다. 이것은 여러 형제
들 앞에서 체면을 잃지 않도록 배려한 것일 뿐 아니라 자기가 한
평생 쌓아올린 영명을 보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실로 형
언할 수 없이 고마운 것이었다.
이윽고 그는 호비에게 다가와 손을 잡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소형제는 정말 뛰어난 영웅호걸이구려. 저쪽으로 가서 말씀을
해드리지요.]
두 사람은 숲 속 깊숙히 들어갔다. 호비는 사방을 둘러 보아도
사람을 찾아볼 수 없게 되자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노인은 훌쩍 몸을 날려 나무 위로 오르더니 호비에게
손짓을 했다. 호비가 따라 올라가 나뭇가지 위에 앉자 노인은 말
했다.
[이곳이 좀더 조용하니 말하기가 좋을 걸세.]
호비는 그 말을 받았다.
[네, 그렇군요.]
노인은 얼굴에 미소를 띠우고 말했다.
[앞서 귀하가 스스로 존성대명을 들먹이는 것을 들었는데 성이
호씨이고, 이름은 비라고 하셨소이까? 그런데 그 비자가 문채날
비(斐)자인지, 하늘로 날아 솟구친다는 비(飛)자인지, 아니면 시
비를 분명히 가린다는 뜻으로 쓸 때의 비(非)자인지 어느 것인지
잘 모르겠구려.]
호비는 그의 말솜씨가 점잖은 것을 보고 말했다.
[저의 이름자는 글월 문자 위에 시시비비할 때의 비자를 덧씌운
것으로 문채날 비자이지요.]
노인은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불초는 진씨이며, 이름자는 내지(耐之)라고 하오. 한평생 강호
를 떠돌아 다니면서 대 영웅호걸을 적지 않게 만나보았지만 귀하
처럼 젊은 나이에 무공의 조예가 이토록 뛰어난 경지에 이른 사람
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바이외다.]
그리고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귀하의 마음이 중후하고 식견이 비범하여 더욱 이 무림에서는
지극히 보기 드문 분이라고 할 수 있구려. 소형제, 이 늙은이는
정말 당신에게 승복했소.]
호비는 정중히 입을 열었다.
[진 나으리, 이 후배는 한가지 가르침을 받을 일이 있소이다.]
진내지는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너무나 겸손해 하시는구려. 자, 이렇게 합시다. 내가
당신보다 몇 살 더 많으니 당신을 형제라고 부르겠으니 당신은 나
를 진형이라 불러주시오. 당신이 손에 사정을 두어 이 늙은이의
체면을 세워주었으니 당신이 어떤 말을 묻더라도 나는 대답해 주
겠소.]
호비는 재빨리 말했다.
[정말 감당할 수가 없군요. 이 형제가 보니까 진형이 한 수를
펼칠 때 뒤로 몸을 약간 젖히고 상반신을 짐짓 온전하지 못한 것
처럼 하면서 왼팔을 오른팔 위에 놓고 교차하여 휘둘러대 양권(陽
拳)으로 뒤집으면서 다시 음권(陰拳)으로 뻗쳐내더군요. 그 일초
의 변화는 지극히 정묘하여 이 형제는 하마터면 막아낼 수 없을
뻔하여 속으로 무척 우러러 보았소이다.]
진내지는 속으로 기뻤다. 그리고 그는 권각법에서 졌으니까 약
속대로 이번의 참된 사정을 모조리 털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호비가 꼭 그 일에 대해서 질문하리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호비
가 스스로 자부하는 무공에 관심을 갖고자 하는 듯 질문을 해온
것이 아닌가?. 그 일초는 바로 그가 명성을 떨칠 수있게 된 팔극
권 가운데 팔대절초의 하나인 것을 듣고는 미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은 폐파무공에서 비교적 쓸모있는 일초로서 쌍타기문(雙打
奇門)이라고 한다오.]
이윽고 그는 그 일초 가운데 정묘하고도 미세한 점을 설명했다.
호비는 본래 성격이 무공을 좋아하는지라 흥미진진하게 그 설명
을 들었으며 곧이어 다시 몇가지 잘 모르는 의문점을 가르침받고
자 했다.
무림에서는 어느 가문이고 어느 문파이건간에 제자를 거두어들
이고 무예를 전수했다 하면 엄연히 한 집안을 이루게 되는 만큼
어찌되었든 간에 그 독특한 성취가 있었다.
그 팔극권은 청(淸)나라 옹건연간(雍乾年間) 무림에서 명성이
무척 굉장했으며 그 기세는 태극과 팔괘 등 여러 문파에 버금갈
정도였다. 호비가 진내지를 상대로 초식을 겨루게 되었을 때 그의
권초와 장법을 유의하였다가 이제서야 질문을 한 것이었고, 이는
모두 다 팔극권의 절묘한 초식들이었다.
진내지는 처음 본문의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는 것이 아
닌가 생각하고 십 푼 가운데 겨우 칠 푼 정도만 이야기 했지만 상
대방의 질문하는 소리를 들으니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다 가려
운 곳을 긁는 듯 했고, 그 표정과 태도 또한 지극히 공손한지라
더이상 참지 못하고 아는 바를 모조리 실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어찌됐든 호비의 무공이 자기보다 강하니 자기의
권법을 배워간다 하더라도 별 대수로운 일이 있겠는가 생각했다.
따라서 호비는 때로 자기의 의견을 슬쩍 비추곤 했는데 이 또한
팔극권의 장점에 대해서 금상첨화격인 오묘함을 더해주곤 했다.
두 사람은 이와같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여 반 시진이 넘도
록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다. 뭇 도적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
지만 노인이 두 손으로 시늉을 하면서 그가 자랑하는 권초를 펼치
고 있는 호비도 때로는 손을 써서 공격의 초식을 보이는가 하면
두 사람이 웃고 떠드는 것이 무척 다정한 것이 권술무공을 연구하
는 것이 틀림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뭇 사람들은 반나절 동안 그
들을 살피기는 했으나 두 사람의 주고받는 말소리를 들을 수 없었
기 때문에 비록 의아하게 여겼지만 다시는 더 신경쓰지 않게 되었
다.
또 한참 동안을 이야기 한 이후에 진내지는 입을 열었다.
[호형제, 팔극권의 권초는 매우 대단한 것이라네. 그러나 애석
하게도 나는 제대로 배우지를 못해 자네 손에 꺾이게 된 것이라
오.]
호비는 그 말을 받았다.
[진형께서는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우리가 다시 정말 싸우게
된다면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지요. 이 형제
는 귀파의 무공에 대해서 매우 탄복했습니다. 오늘은 날이 이미
어두워졌고 일시에 많은 것을 가르침을 받을 수도 없고 하니 이후
이 형제가 북경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틀림없이 일부러 찾아뵙
고 며칠간이라도 길게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지
금은 이만 작별을 고할까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두 손을 마주잡아 보이고 나무에서 내려서려
고 했다.
진내지는 어리둥절해져서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들은 미리 약속을 한 바 있지만 나는 분명히 이번 일의 사
정을 말하기로 되었는데, 그러나 그는 그저 나와 한차례 무공을
논하고 작별을 고하다니 천하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말인가?
그렇다. 이 젊은이가 나에게 체면을 세워주고 또한 교분을 따지는
데 내 어찌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넌즈시 입을 열었다.
[형제, 잠깐만, 우리 형제 두 사람은 '그야말로 싸움이 없었다
면 알게 되지 못했다'는 말이 있듯이 이번의 일에 대해서 이 기회
를 빌어 분명히 설명을 해야만이 일에 매듭을 짓게 되는 것이 아
니겠는가?]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습니다. 이 형제는 그 상보진 상형과도 아는 사이였지요.
그런데 뜻밖에도 마소저가 갑자가 손을 써서 남편의 원한을 갚으
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요.]
이윽고 그는 상가보에서 어떻게 마소저와 상보진을 알게 되었는
가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했다.
진내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잘한다.나는 아직 말을 하지 않았는데 네가 먼저 말을 하는구
나. 이 젊은이는 일을 행함에 있어서 여러모로 사람으로 하여금
승복케 하는구나.)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옛사람들은 밥 한끼를 얻어먹는 은혜를 입었다면 천금으로 갚
았다고 하네. 마소저가 호형제를 위해서 사정을 한 은덕을 소형제
는 오랜 시일이 지나도 잊지 않았으니 이야말로 대장부의 본색이
아니겠는가, 소형제는 어째서 마소저가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상보진을 죽여버렸는지 모를 것일세. 그리고 혹시나 그가 그 두
애의 애비가 아닌가 생각하겠지?]
호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는 서쟁이 죽을 때에 그 두 애가 자기 친아들이 아니라고 하
는 말을 들을 수가 있었지요.]
진내지는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원래 그는 결코 바보가 아니었군.]
호비는 일시에 오리무중에 빠져드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진내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소형제, 소형제가 상가보에 있을 때 혹시 한 분의 귀공자를 본
적이 있는가?]
호비는 그 말을 듣자 꿈에서 깨어난 듯했다. 다만 그날 저녁무
렵 그는 친히 상보진과 마소저가 나무 아래서 손을 잡고 얘기를
주고받던 광경을 목격하고서 두 사람이 서로 정이 있는가 보다 생
각했을 뿐, 마소저와 그 귀공자가 서로 첫눈에 반해서 인연을 맺
게 된 것을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불이
나서 상가보를 태우게 되었을 때에도 마소저와 그 귀공자가 교외
에서 서로 기댄 채 말을 주고 받으며 눈과 눈으로 깊은 정을 주고
받던 사실을 그도 눈으로 보기는 했으나 어린 나이에 조금도 그
가운데 서려 있는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종 그 귀공자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제서야 진노인이 깨우쳐 겨우 황연
히 깨닫는 바가 있었다. 따라서 그는 기억을 되살리며 말했다.
[그 팔괘문의 왕씨 형제들은......]
진노인은 그 말을 받았다.
[맞았네. 그때 팔괘문의 왕씨 형제들은 복공자를 따라서 상가보
로 간 것이라네.]
호비는 마음속으로 복공자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매우 담담
하고 무관심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별 뚜렷한 기억이 없었지만 왕
씨 형제들의 괄괘도와 팔괘장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일초 일식
도 똑똑히 기억하고서는 입을 열고 말했다.
[복공자, 복공자...... 그 복공자의 모습이 매우 청순하면서도
우아했으며 정말 그 두 어린애와 약간 닮은 데가 있군요.]
진내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복공자는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으로 권세를 말하자면 당금
황상을 제외하고는 바로 그 분일세. 사실 아무리 커다란 청이라도
그가 요구하는 대로 황상께서는 내려주신다네. 그런데 그는 중년
에 이르러 한 가지 크게 부족한 것을 느끼는 것은 슬하에 아들이
없다는 것일세.]
호비는 그 복공자를 그토록 위세 있는 사람으로 설명하는 말을
듣게 되자 속으로 충격을 받고 물었다.
[그 복공자가 바로 복강안(福康安)입니까?]
진내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아니면 또 누구이겠는가? 바로 평금천(乎金川) 대수로서
정백기 만주도통(正白旗滿洲都統), 성경장군(盛京將軍), 운귀총독
(雲貴總督), 사천총독(四川總督)을 역임한 바 있으며 현재는 태자
태보(太子太保)이외에 병부상서(兵部尙書)로서 내무부(內務府)를
총관하는 대신인 복공자, 복대수(福大帥)일세!]
호비는 물었다.
[그러면 그 두 명의 어린애는 복공자의 친혈육이기 때문에 그가
당신네들을 보내서 그 애들을 데려가려는 것이군요?]
진내지는 설명하듯 말했다.
[복대수께서는 아직도 자기에게 두 어린애가 있는 줄 모르고 있
다네. 우리들도 바로 조금 전 마소저의 말을 듣고서야 겨우 안 것
이 라네.]
호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마소저가 말을 할때에 얼굴을 붉힌 것은 바로 그것 때문
이었구나. 그가 진실을 토로한 까닭은 그들에게 그 아이들을 해치
지 말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녀가 아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한 터이니 그 일을 그렇게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없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지.)
이때 진내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복대수는 그저 우리들에게 마소저의 근황을 살펴보고
오라고만 분부하셨다네. 그러나 우리들은 대수(大帥)의 뜻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서 마소저를 영접하여 경사로 떠나가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니 이제와서 마소저는 이미 남편도 의지할
사람도 없으니 차라리 경사로 가서 복대수와 함께 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녀의 두 아들은 부자 상봉을 하게 된다면 이후부터는
그야말로 표국에서 남의 명령만 받으며 빌어먹는 것보다 훨씬 낫
지 않겠는가? 호형제, 자네는 마소저를 좀 설득해 주게.]
호비는 마음속이 매우 어지러웠으며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으나 그 가운데 자꾸만 어떤 점이 못
마땅한 것처럼 느꼈다. 그러나 도대체 어떤 점이 못마땅한지는 일
시에 꼬집어서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생각해보고 물었다.
[상보진은 어떻게 된거죠? 어쩌다가 당신들과 함께 있게 된거
죠?]
진내지는 대답했다.
[상보진은 왕씨 형제가 천거하게 되어 역시 복대수부(福大帥府)
에서 일을 맡고 있다네. 그가 마소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함께 남쪽으로 내려온 것이라네.]
호비는 안색을 굳히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서쟁 서형을 때려죽인 것은 복대수의 뜻을 받든
것인지요?]
진내지는 재빨리 말했다.
[그건 그렇지 않다네. 복대수는 귀하시고 바쁘신 몸이라 어찌
마소저가 이미 서가와 혼사를 치렀다는 것을 알겠는가? 그는 그저
문득 옛정을 떠올리게 되고 몇 명의 사람들을 남쪽으로 내려보내
한 번 소식을 알아보도록 한 것일세. 이제 이미 두명의 형제가 나
는 듯 말을 달려 경사로 달려가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될 것이 복대
수께서는 일단 자기에게 두 분의 공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기쁨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
이와같은 말을 듣게 되자 호비는 마음속에 많은 의문점이 일시
에 풀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번 일에 대해서는 마춘화를 원망할 수도 없고 그렇다
고 복강안을 원망할 수도 없으며 상보진이 서쟁을 죽인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만 그가 이미 한목숨을 바쳐 보상한 셈이니 더
말할 꺼리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서쟁이 한평생 중후하고 성
실하게 살아온 점과 두 아들이 결코 자기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
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시종 참고 말하지 않고 있다가 최후에 그
와같은 결말을 맞지 않았던가? 이처럼 생각하니 무척이나 동정심
이 가는 일인지라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진대협, 이미 명백하게 밝혀진 셈이군요. 이 소제가 쓸데없는
일에 상관한 것이라고 해두죠.]
그리고 가볍게 몸을 날려서 땅위로 내려섰다.
진내지는 그가 땅으로 뛰어내렸으나 전혀 나뭇가지가 흔들리지
않는 것을 보고 그의 경신법은 실로 심오하다고 느꼈다. 자기가
다시 십년을 더 연마한다 하더라도 결코 그와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생각과 더불어 호비와 같이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토록
뛰어난 경지에까지 연승할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
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놀라움과 의아함에 사로 잡혔고, 또 한편
으로는 의기소침함을 느꼈으나, 그가 땅바닥에 내려섰을때는 호비
는 이미 석옥으로 들어간 이후였다.
정영소는 창문앞에서 오랫동안 호비가 돌아오지 않자 이미 초조
해질 대로 초조해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서
반갑기가 이를데 없었으나, 그의 안색이 침울한 것이 매우 괴로운
듯한 표정이라 그가 말할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얼마 이후에 왕철악이 두 개의 솥에 밥과 홍소육(紅燒肉)을 들
고 들어 왔는데 술 세 병도 곁들여 있었다. 호비는 술을 마시려고
했다. 정영소는 은침을 꺼내 술과 음식속에 독이 있는지 시험해
보았다.
호비는 그녀를 보고 말했다.
[마소저가 이곳에 있는 이상 그들이 어찌 감히 독을 쓰겠소?]
이 말을 듣고 마춘화는 얼굴을 붉히며 밥을 먹으려고 하지 않았
다.
호비도 더 권하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홍소육을 안주
삼아 혼자서 세 병의 소주를 한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셨다. 그
는 밥은 거들떠 보지 않고 빈속에 술만 퍼붓고는 거나해져서 탁자
위에 의지하여 고개를 떨구고 잠에 빠졌다.
호비가 이튿날 깨어나자 자기의 등에 하나의 장포가 덮여진 것
을 보고 정영소가 밤중에 덮어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보
니 창문입구에 서 있는 정영소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귀밑머
리는 아침의 신선한 바람에 미미하게 흔들리며 예전에 느끼지 못
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호비는 그녀의 날씬한 뒷모습을 보고 속으로 고마움과 함께 정
이 뒤섞인 감정을 느끼고 불렀다.
[둘째 누이!]
정영소는 '응'하더니 몸을 돌렸다. 호비는 그녀의 눈꺼풀이 무
거운 듯 해보이고 매우 피곤한 기색이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룻밤을 꼬박 세웠구려. 내가 둘째 누이에게 말한다는 것을
잊었구만. 마소저가 이곳에 있는 이상 그들은 우리들을 어떻게 하
지 않을 것이오.]
정영소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마소저는 야밤에 살그머니 석옥에서 나갔으며 지금까지 돌아오
지 않고 있어요. 그녀가 나갈 때 발소리를 죽이는 것을 보고 혹시
나 오라버니를 깨우게 될까봐 염려하나 보다 했어요. 그래서 나도
잠이 들은 척 했지요.]
호비는 약간 놀라서 몸을 돌리고 보니 아니나 다를까 마춘화가
앉았던 곳에 그저 하나의 빈 걸상만이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석옥의 문을 열고 걸어나갔다. 숲 속에는 놀랍게도
조용하니 아무도 없었고 수십 필의 말들과 그 말들을 타고 온 사
람들은 어둠 속에서 깨끗이 물러간 이후였다. 다만 나무에 두 필
의 말이 묵여 있었는데 이는 물론 호비와 정영소 두 사람에게 남
긴 듯 싶었다.
다시 몇 마장 걸어나가자 숲 속에 두 개의 새 무덤이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덤 앞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어 그 어
느 것이 서쟁의 무덤이고 또 어느 것이 상보진의 무덤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으나 간 밤의 희생자들의 무덤임이 분명했다. 호비는 속
으로 생각했다.
(비록 한 사람은 남편이고 한 사람은 남편을 죽인 원수이겠지만
마소저의 심정에는 아마도 두 사람이 별 커다란 차이는 없을 것이
다. 모두 다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가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이고
또한 그녀 때문에 목숨을 잃었으니 참으로 불행한 사람들이로구
나!)
생각이 여기에 미치게 되자 긴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고
또 진내지가 말한 바를 모두 정영소에게 들려주지 않을 수 없었
다.
정영소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한참 이후에야 입을 열었다.
[원래 그 비쩍 마른 늙은이가 팔극권의 장문인 진내지였군요.
그에게 별호가 있는데 팔비나타라고 하지요. 그와 같은 사람은 권
세있는 집안의 문하에서 마나님 노릇이나 하는 사람이니 우리는
이후 그를 아랑곳할 필요가 없어요.]
[옳은 말이오.]
정영소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마소저가 마음 속으로 복공자를 좋아한다면 서쟁이 설사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저 부질없이 고민만 하게 될 거예요. 그와 같
이 별볼일 없고 불운한 표국주가 어찌 병부상서나 토병대 원수와
다툴 수가 있겠어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소. 역시 죽어버리는 것이 깨끗하겠지.]
이윽고 두 무덤 앞에서 몇 번 절을 한 이후 호비는 다시 입을
열고 타이르듯 두 무덤을 향해 말했다.
[서형, 그리고 상공자! 당신네들은 생전에 나와 은덕이 있든 원
한이 있든 간에 죽었으니 이제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합시다. 마
소저는 이제부터 끝없는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니 당신네들
두 분이 죽어서도 서로 만난다면 그녀를 사이에 두고 다툴 필요가
없을 것 같소이다.]
호비는 물끄러미 먼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3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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