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오강호 1-4

3학년2반 | 2022.03.11 07:11:45 댓글: 0 조회: 497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4630

이때 정일사태는 의림을 찾느라고 항산파의 여승들을 이끌고 서쪽을 향해 수색해가고 있었다. 유정풍은 제자들을 이끌고 동남쪽으로 나갔다.
청성파가 떠나자 군옥원 밖은 목고봉과 임평지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목고봉은 싱글거리며 말했다.

[너는 꼽추가 아닐 뿐만 아니라 알고 보니 퍽 준수하게 생긴 녀석이구나! 이 녀석아, 너는 나를 할아버지라고 부를 것도 없다.
이 꼽추는 네가 마음에 드니 너를 제자로 거두워들이는게 어떨까?]

임평지는 조금 전 두 사람의 상승내력에 의해 전신이 아파 감당할 수 없었고 아직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는 목고봉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이 꼽추의 무공은 우리 아버지보다 열 배나 강하다. 여창해도 이 사람을 퍽 꺼리고 있다. 내가 원한을 갚으려면 그를 사부로 삼아야만 희망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청성파의 제자가 나를 죽이려 할 때는 아무 상관도 하지 않다가 나의 정체를 알게 되자 즉시 손을 써서 여창해와 쟁탈전을 일으켰다. 그가 나를 제자로 거두워들이겠다니 틀림없이 딴 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다.)
목고봉은 그가 망설이는 것을 보자 다시 말했다.

[새북명타의 무공이나 명성을 너는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아직 한 명의 제자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네가 나를 사부로 모신다면 이 사부는 일신의 무공을 모조리 전수해 주겠다. 그때 청성파의 젊은 녀석들은 결코 너의 적수가 될 수 없을 것이고 시일이 흐르게 되면 여창해를 대패시키는 것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이 녀석아, 너는 어째서 절을 하고 나를 사부로 모시려 하지 않느냐?]

그는 갈수록 강렬한 어조로 말을 했다. 임평지는 더욱 의심이 생겼다.

(그가 정말 나를 아끼고 사랑한다면 어찌 조금 전 내 손을 잡고 조금도 거침없이 힘을 주어 잡아당길 수 있었단 말이냐? 여창해라는 악적은 내가 그의 아들을 죽인 원수라는 것을 알고도 나를 죽이려 하지 않았다. 물론 벽사검보 때문이다. 오악검파에는 무공이 고강하고 정직한 인사들이 많다. 내가 명사를 섬기려면 그와 같은 명사를 찾아갈 것이다. 이 꼽추는 심보가 악독하니 무공이 높다 해도 결코 사부로 모실 수 없다.)

목고봉은 그가 여전히 주저하자 속에서 노기가 끓어올랐다. 그러나 여전히 히죽 웃으며 말했다.

[왜 그러느냐? 너는 이 꼽추의 무공이 너무 약해서 사부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느냐?]

임평지는 목고봉의 얼굴에 찰나적으로 흉칙한 빛이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노기는 일순간이고 더욱더 부드러운 얼굴을 짓는 것이 아닌가? 임평지는 지금의 자기 처지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그를 사부로 모시지 않는다면 그가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목 대협, 이 후배를 제자로 삼아 준다는 것은 이 후배로서는 감지덕지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후배가 배운 것은 가전무공(家傳武功)입니다. 달리 명사를 찾으려고 한다면 가친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가법이기도 하고 무림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목고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말은 맞다. 그러나 자네의 재간은 무공이라고 할 수가 없어.
너의 아버지 역시 한계가 있을 것 같다. 오늘 이 어르신께서는 갑자기 흥이 나서 너를 제자로 거두어들이려고 하는 것인데 이후 그와 같은 흥취가 있을런지 알 수 없다. 인연이란 것은 우연히 만나게 돼야지 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란다. 내가 보기엔 네 녀석은 매우 영리한 것 같은데 어찌 그리도 멍청하게 구느냐? 서로 이렇게 하자. 너는 먼저 나를 사부로 모시고 그후에 내가 너의 아버님께 이야기하도록 하자. 그러면 그도 감히 허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임평지는 마음이 움직이는 듯이 기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목 대협, 이 후배의 부모님은 청성파에 잡혀 있으며 생사를 알 수 없읍니다. 목 대협께서 구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이 후배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목 대협의 어떤 분부라해도 받들겠읍니다.]

목 대협은 노해 말했다.

[뭐라고? 너는 나에게 흥정을 하자는 것이냐! 네 녀석이 뭐가 대단하다고 반드시 너를 제자로 삼아야 한단 말이냐? 네가 감히 나에게 조건을 내걸어? 허! 별일 다 보겠군!]

여창해가 모든 사람 앞에서 그를 두 쪽으로 찢어죽이지 않은 것은 달리 꾀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여창해 같은 사람이 속임수에 넘어갈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강호의 소문이 십중팔구 맞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임씨 집안의 벽사검보는 대단할 것이다. 이 녀석을 제자로 삼기만 한다면 무학의 비급은 조만간 자기의 손에 들어올 것이 아니겠는가?
[빨리 절을 해라, 세 번 절을 하면 너는 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제자의 부모를 어찌 사부가 모른 체하랴? 여창해가 나의 제자의 부모를 잡아갔다면 내가 그에게 가서 사람을 내놓으라고 하더라도 명분이 서는 일이니 그가 어찌 사마을 내놓지 않겠느냐?]
임평지는 부모님을 복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부모님께서는 간악한 자의 수중에 떨어져 하루를 일 년처럼 보내고 계실 것이니 어떻게 해서라도 빨리 두 분을 구해내야 한다.
내가 일시 굴욕적인 입장이 되더라도 그를 사부로 모셔서 그가 우리 아버님과 어머님을 구해내기만 한다면 그처럼 좋은 일이 어디 있으랴?)

그는 즉시 무릎을 끓었다. 그리고 절을 하려고 했다. 목고봉은 그가 후회를 할까봐 손을 벋어 그의 머리에 얹고는 앞으로 눌렀다.
임평지는 본래 큰절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힘을 주어 내리 누르자 속으로 반감이 일었다. 다리와 목에 힘을 주어 버텼고 고개를 숙이지 않으려 했다. 목고봉은 노해 부르짖었다.

[감히 절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그리고 손에 힘을 더했다. 임평지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고 복위표국의 소국주로서 한 평생 남에게 떠받들리기만 했을 뿐 굴욕을 당해 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 이미 큰절을 하기로 결심을 했지만 목고봉이 손을 뻗어 내리누르니 오히려 그의 고집스런 본성을 불러일으킨 셈이 되었다.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이 저의 부모님을 구한다고 응낙한다면 저는 당신을 사부로 모시겠읍니다. 지금 나 보고 절을 하라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목고봉은 말했다.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어디 두고 보자. 정말 절대로 있을 수 없는지.]

그리고 더욱 힘을 가했다. 임평지는 허리에 힘을 주어 버티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머리 위에 천 근이나 되는 바위가 내리누르는 것 같아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그는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애써 버티었다. 목고봉은 다시 손에 부쩍 힘을 가했다. 임평지는 자기의 목뼈가 '우두둑' '우두둑' 하며 어긋나는 소리를 들었다. 목고봉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네가 큰절을 하지 않겠다고? 내가 손에 다시 힘을 가하게 된다면 너의 목뼈는 부러지게 될 것이다.]

임평지의 머리는 한 치 한 치 아래로 숙여지게 되었다. 이제는 땅바닥과 한 자도 되지 않는 곳에 이르게 되었다. 임평지는 애써 부르짖었다.

[나는 절을 하지 않겠다! 죽어도 절을 하지 않겠다!]

목고봉은 말했다.

[어디 두도보자!]

그리고 손에 힘을 주었다. 임평지의 이마가 다시 두 치 정도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다.
바로 이때였다. 임평지는 갑자기 등에 은은한 온기를 느꼈다.
부드러운 힘이 몸 안으로 스며들었고 머리 위의 압력이 별안간 가벼웠졌다. 두 손으로 땅바닥을 밀면서 몸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
이렇게 되자 임평지는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목고봉 역시 깜짝 놀라게 되었다. 조금 전 목고봉은 어떤 힘이 자기 손의 내력을 흐트러뜨리는 것을 느꼈다. 그와 같은 힘은 무림에서 명성이 자자한 화산파의 자하공(紫霞功) 같았다. 소문에 듣건데 이 내공(內功)은 노을(霞)과 같이 처음에는 있는 듯 없는 듯 기척을 느낄 수 없으나 거기에 실린 힘은 지극히 강하고 질긴 것이라고 나중에는 하늘을 덮고 땅을 뒤덮어 버리고 그 기세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자하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라고 했다.
목고봉은 놀람과 의아함 속에서 다시 손을 뻗어 임평지의 머리를 잡고 내리누르려고 했다. 그런데 땅과 임평지의 머리가 막 부딪치려 할 때 임평지의 머리 위에서 다시 한 줄기의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내력이 솟아올랐다. 따라서 두 기운이 충돌하게 되었다.
목고봉은 손과 팔이 마비될 것 같았고 가슴도 아파옴을 느꼈다.
그는 두 걸음 물러서며 점점 웃었다.

[하하하, 화산파의 악형이시오? 어째서 담장가에 숨어 이 꼽추를 놀린단 말이오?]

그러자 담장 모퉁이 뒤쪽에서 한 사람이 소리도 없이 그림자처럼 걸어왔다. 청삼(靑衫)을 걸친 서생(書生)이었다. 무릎을 가리는 장포에 보라색 띠를 허리에 질끈 두르고 있었고 손에는 섭선을 들고 한가롭게 흔들고 있었다. 표정은 매우 소탈해보였으며 여유 있어 보였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목형, 몇 년 보지 못했지만 풍채는 여전하구료. 정말 축하할 일이외다.]

목고봉은 그 사람이 바로 화산파의 장문인 군자검 악불군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는 예전부터 악불군을 여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기가 친히 손을 써서 무공이 평범한 녀석을 몰아 세우고 있는 광경을 군자검 악불군에게 발각당하고 악불군이 손을 써서 이 젊은이를 구해내게 되자 그로서는 매우 겸연쩍은 입장이 되었다. 따라서 그는 헤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악형, 갈수록 더 젊어지시는구료. 이 곱추는 정말 그대를 사부님으로 모시고 음양채보(陰陽採補)라는 술법을 배우고 싶구료.]
악불군은 형형한 눈빛이 되어 엄숙히 말했다.

[꼽추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구나. 엣사람끼리 얼굴을 마주치게 되었다면 그간 있었던 일을 인사로 나눌 것이지 어찌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는 것이지? 내가 언제 그와 같은 사악한 무공을 배웠다고 그러는가?]

목고봉은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음양채보의 재간을 모른다고 한다면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그대는 육십이 다 되었는데도 반로환동(返老還童)한 듯이 얼핏 보기에 이 꼽추의 손자처럼 보이냔 말이외다.]

임평지는 목고봉의 손이 풀어지는 순간 즉시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리고 서생을 바라보았다. 그 서생은 검고 윤이 나는 턱수염을 탐스럽게 기르고 있었다. 얼굴은 관옥처럼 빛나고 있었다. 의젓하고 당당한 기상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우러러 보는 마음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 사람이 자기를 구했다고 짐작했다. 그리고 목고봉이 그를 화산파의 악형이라고 부르자 속으로 생각했다.

(이 신선 같은 인물이 바로 화산파의 장문인 악불군이란 말인가? 그러나 겉으로 보기엔 불과 사십여 세밖에 되지 않은 것 같다. 노덕약은 그의 제자인데도 훨씬 늙어 보이지 않느냔 말이다.)
그런데 목고봉이 악불군에게 주안술(주안술)을 익혔다고 칭찬을 하게 되자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어머님이 말씀하신 적이 있었지. 무림고수들은 내공이 상당히 심후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불로장수할 뿐 아니라 진짜로 반로환동하신다고 했지. 그렇다면 이 악선생은 내공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심후하겠구나!)

그는 흠모하는 마음을 억제할수 없었다.
악불군은 횃불같이 형형한 눈동자로 복고봉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만나자마자 좋은 말은 하지 않는군. 이 젊은이는 효자일 뿐 아니라 의협심이 강한 인재로서 그대가 좋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외다. 그가 오늘 여러 가지 화를 입게 된 것은 모두가 당시 복주에서 의협심을 내세워 불초의 딸인 영산(靈珊)을 구햇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오. 따라서 나로서는 구경만 할 수 없으니 당신은 나의 얼굴을 보아서 손을 떼시기 바라오.]

목고봉은 얼굴에 의아한 빛을 띄우며 말했다.

[뭐라고요? 이 녀석의 재간으로 영산을 구했단 말이오? 아마도 그 반대이겠지. 영산이 이 녀석의 반반한 얼굴을 보고 마음이 움직여......]

악불군은 이 꼽추가 거칠고 속되기 이를데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음 말은 좋은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즉시 말을 가로챘다.

[강호에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구원해야 하며 자기 자신이 가루가 되는 한이 있어도 구해야하는 것이오. 결코 무예가 높아야 협사가 되는 것은 아니오. 목형 그대가 이 젊은이를 제자로 삼기로 결심을 했다면 이 젊은이의 부모에게 말씀을 드린 후 다시 그를 귀파의 문하로 끌어들여야 할 것이 아니오?]

목고봉은 악불군이 가운데 끼어드는 것을 보고 이 일은 자기의 뜻대로 되기 어렵다고 짐작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이 꼽추가 일시 흥이 나서 제자로 거둘려고 했으나 지금은 흥미가 없소. 이 녀석이 나에게 만 번 절을 해도 나는 거두어들이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그는 왼발을 살짝 쳐들어 '퍽' 하고 임평지를 걷어차 수장 밖에 나가 떨어지게 했다. 이 한 수는 악불군이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터였고 그가 발을 쳐들어 걷어차리라고는 사전에 조금도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손을 써서 막을 여유가 없었다.
임평지는 나가 떨어진 후 즉시 몸을 일으켰다. 그는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목고봉을 노려보았다.
악불군은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감히 내 앞에서 경거망동을 하다니! 앞으로 조심하시오.]
목고봉은 웃으며 말했다.

[악형, 안심하시오. 이 꼽추에게 하늘과 같이 큰 용기가 있다해도...... 하하하! 나는 당신마저 이 일에 개입할 줄은 몰랐소이다. 우리 다시 만나기로 합시다. 그러나 저러나 화산파가 혁혁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데도 벽사검보에 혈안이 되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소.]

그렇게 말하면서 목고봉은 공손히 예를 하고 뒤로 물러섰다.
악불군은 한 걸음 다가서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이봐, 방금 뭐라고 했는가?]

별안간 그의 얼굴이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노을빛은 삽시간에 사라졌고 하얀 얼굴이 되살아났다.
목고봉은 그의 얼굴에 자색기운이 돌았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말 화산파의 자하공이군! 악불군은 무공이 신비할 뿐 아니라 무시무시한 내공을 연성한 사람이다. 이꼽추는 그의 비위를 거슬릴 수 없지.)

그는 악불군을 향해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 역시 벽사검보가 무엇인지 모르오. 다만 청성파의 여창해가 목숨을 걸고 빼앗으려고 했기에 함부로 주워 섬긴 것이오. 헤헤헤...... 내가 지나친 말을 했다면 헤헤...... 취소하겠읍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나갔다.
악불군은 그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더니 중얼거렸다.

[무림에서 그와 같은 무공을 지닌 사람도 드물다. 그런데 스스로 좋아서......]

그는 '스스로 좋아서 비천하게 군다' 는 말을 하려다가 그만둔 것이었다. 별안간 임평지가 악불군 앞에 무릎을 끓더니 연신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사부님께서 이 제자를 거두어 주십시오. 제자는 가르침을 지키겠읍니다. 문규를 엄히 지키고 결코 사명을 잃는 일은 하지 않겠읍니다.]

악불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너를 제자로 거둬들인다면 목 꼽추가 등 뒤에서 내가 그의 제자를 가로챘다고 헛소문을 퍼뜨릴 것이다.]

임평지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제자는 사부님을 뵙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흠모의 정이 생겼읍니다. 이것은 이 제자가 성심성의로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신 큰절을 올렸다. 악불군은 웃으며 말했다.

[좋다. 내 너를 거두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넌 아직도 부모님에게 알리지도 않았잖느냐. 그리고 그분들이 응낙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임평지는 말했다.

[제자로 거두어 주신다면 저희 부모님은 기뻐했으며 기뻐했지 허락하지 않을 리가 없읍니다. 저희 아버님과 어머님은 청성파의 악적들에게 잡혀 있으니 사부님께서 아무쪼록 그분들을 구해 주십시오.]

악불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거라, 우리는 너희 부모를 찾으러 가자.]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덕약, 산(珊)아 너희들도 나오너라.]

그러자 담장 뒷모퉁이에서 한 떼의 사람들이 걸어나왔다. 바로 화산파의 제자들이었다.
이들은 이미 도달해 있었으나 악불군은 그들에게 목고봉이 떠날 때까지 숨어 있으라고 했던 것이다. 왜냐 하면 사람이 많을수록 목고봉의 체면이 서지 않기 때문이었다. 노덕약은 기뻐하며 축하를 했다.

[사부님께서 새로이 제자를 거두어들이셨군요. 기쁘기 그지없읍니다.]

악불군은 웃으며 말했다.

[평지, 너는 이 몇 분 사형들을 그 조그만 찻집에서 이미 만나 보았을 것이다. 이제 사형들께 인사를 올리도록 해라.]
늙은이는 바로 둘째 사형 노덕약이었다. 체구가 우람한 사람은 세째 사형인 양발(梁發)이었다. 그리고 네재 사형은 시대자(施戴子)였다. 손에 언제나 주판을 들고 있는 사람은 다섯째 사형인 고근명(高根明), 여섯째 사형은 육후아라는 별명을 가진 육대유(六大有)였다. 그들은 잊을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밖에 일곱째 사형 도균, 여덟째 사형 영백나(英白羅)는 젊은 제자였다. 임평지는 일일이 인사를 올렸다.
갑자기 악불군의 등 뒤에서 간들어진 웃음소리와 더불어 곱고 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아버님, 아버님. 저는 사저가 되나요. 사매가 되나요?]
임평지는 어리둥절해졌다. 말하는 음성으로 미루어 보아 화산파의 제자들이 모두 그녀를 소사매라고 부르는 소녀 같았다. 알고 보니 그녀는 사부의 딸이 아닌가? 이때 악불군의 청포자락 뒷쪽에서 희고 고운 얼굴이 반쯤 나타났다. 까맣고 예쁜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며 임평지의 아래 위를 훑어보고는 부끄러운지 악불군의 등 뒤로 사라져 버렸다. 임평지는 생각했다.

(그 소사매라는 소녀는 곰보투성이의 얼굴이었는데 갑자기 미인으로 변했구나! 거 참 이상하다!)

그녀가 고개를 살그머니 내밀었다가 움추린 행동은 빨랐고 달빛이 몽롱하여 똑똑히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소녀의 용모가 아름답다는 것만은 절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곰보처럼 변장을 하고 복주성 밖에서 술을 팔았다고 했으며, 정일사태는 그녀를 왜 그처럼 괴상한 모양을 하고 있느냐고 했다. 그렇다면 그녀의 추악한 모양은 일부러 면장을 한 것일게다. 틀림없다!)

이때 악불군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너보다 입문한 것이 늦다고 해도 모두들 너를 소사매라고 부르지 않느냐? 너는 사매가 되어야 할 운명이니 자연 이번에도 사매가 되는 것이다.]

소녀는 웃으며 말했다.

[안 돼요. 이제부터 저는 사저가 될 거예요. 아버지 임(林) 사제가 나를 사매로 부르게 된다면 이후 아버님이 다시 백 명이나 이백 명의 제자를 거두어들인다 해도 모두들 나를 사매라고 부를 거예요. 그건 너무 억울한 일이예요.]

그녀는 말을 마치자 웃으면서 악불군의 등 뒤에서 걸어나왔다.
달빛 아래 임평지는 어렴풋이 갸름하고 어여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흑백이 분명한 한 쌍의 눈동자는 그의 얼굴을 쏘아보고 있는 게 아닌가? 임평지는 뛰는 가슴을 진정한 후 말했다.

[악사저, 소제는 오늘에야 은사님을 사부로 섬기게 되는 행운을 얻었읍니다. 입문(入門)을 먼저 한 사람이 윗어른이니 소제는 자연히 사제가 되는 것입니다.]

악영산은 크게 기뻐서 부친에게 말했다.

[아버님, 그 스스로 저를 사저라고 불렀어요. 결코 제가 강요한 건 아니예요.]

악불군은 웃으며 말했다.

[이제 나의 문하로 들어왔는데 너는 벌써 '강요' 라는 한 마디의 말을 쓰는구나. 따라서 그가 내 문하의 제자들이 모두 너처럼 아랫사람을 억압한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먼저 겁부터 집어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 말에 모두들 미소를 지었다.
악영산은 말했다.

[아버님, 대사형은 이곳에 숨어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는데 여창해라는 못난 도사에게 일장을 더 맞았으니 지금 매우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을 거예요. 우리 그분을 찾아보도록 해요.]
악불군은 눈쌀을 한번 찌푸리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고근명, 시대자, 너희 두 사람은 가서 대사형을 떠메고 나오너라.]

고근명과 시대자는 일제히 대답을 하고 창문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곧이어 두 사람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사부님, 사형은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방 안엔 아무도 없읍니다!]

곧이어 창문으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두 사람이 촛불에 불을 붙인 것이다.
악불군은 더욱 눈쌀을 찌푸렸다. 그는 기녀원이란 더러운 곳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 노덕약에게 말했다.

[네가 들어가 살펴 보아라.]

노덕약은 대답하고 창문 입구 쪽으로 뛰어갔다.
악영산은 말했다.

[저도 가 보겠어요.]

악불군이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무슨 짓이냐? 저곳이 뭐하는 곳인지 알고나 있느냐?]
악영산은 다급해져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러나 대사형은 몸에 중상을 입고 있어요.
......아마도 그는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요.]

악불군은 나직이 말했다.

[걱정마라. 그는 항산파의 천향단속교를 발랐으니 죽지는 않을 것이다.]

악영산은 놀람과 기쁨에 넘쳐 말했다.

[아버님, 아버님은...... 어떻게 아셨어요?]

악불군은 말했다.

[나직이 말해라. 그리고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라.]

영호충은 중상을 입고 다시 여창해의 장풍에 얻어맞게 되자 상처가 격렬하게 아파왔다. 거기다 몇 모금의 피까지 토한 몸이었다. 그러나 정신은 맑았다. 그는 목고봉과 여창해가 다투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하나 둘씩 물러간 이후 다시 사부가 도달하는 기척을 들었다. 그는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었지만 사부님만은 두려워했다. 사부님과 목고봉이 말하는 소리를 듣자 그는 자기가 너무 터무니없는 행동을 했으니 사부께서 어떤 책벌을 내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상처의 아픔을 잊고 몸을 침대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큰일났소. 나의 사부님이 오셨으니 빨리 도망칩시다.]
그리고 그는 벽을 짚으며 방 밖으로 나갔다.
곡비연은 의림을 끌고 이불 속에서 나와 그의 뒤를 따랐다. 영호충은 신음소리를 내며 때때로 걸음을 멈추었다. 두 사람은 재빨리 부축을 했다. 영호충은 입술을 깨물며 그녀의 부축을 받고 한 곳의 복도를 지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속으로 사부의 이목이 영리하기 이를데 없으니 밖으로 나갔다간 즉시 그에게 발각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보니 오른쪽에 커다란 방이 있었다. 즉시 방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문을......문과 창문을 닫으시오.]

곡비연은 그 말에 따라 문을 닫고 창문도 닫았다. 영호충은 더 지탱할 수 없는 듯 침대 위에 드러누우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에 그를 부르는 음성이 들려왔다.

[대사형은 이 곳에 없나 보다. 우리는 가자.]

영호충은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놓았다.
잠시 후 발걸음을 죽이며 마당을 가로질러 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람은 나직이 불렀다.

[대사형. 대사형.]

바로 육후아였다.
영호충은 생각했다.

(역시 육후아는 나를 가장 많이 생각하는구나!)

그가 대답을 하려고 하자 침대 모기장이 흔들거렸다. 바로 의림이 누가 찾아온 기척을 듣고 떨고 있는 것이었다.
영호충은 생각했다.

(내가 대답을 하게 된다면 저 여승에게 안 좋은 소문이 나겠지?)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육후아가 창 밖을 지나가면서 대사형, 대사형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는 점점 멀어져갔고 잠시 후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곡비연은 침묵을 깨뜨리고 말했다.

[이봐요, 영호충! 그대는 정말 죽게 되나요?]

영호충은 말했다.

[내가 죽을 것 같소? 내가 죽으면 항산파의 명성을 크게 더럽힐 것이니 그 사람들에게 미안한 노릇이 아니겠소?]

곡비연은 의아해서 물었다.

[그것은 어째서죠?]

영호충은 말했다.

[항산파의 영양을 밖으로 바르고 안으론 먹었소. 그런데도 여전히 치료할 수 없다면 이 영호충은 크게...... 항산파의 사매에게 죄를 짓는 꼴이 되지 않겠소?]

곡비연은 웃으며 말했다.

[맞았어요. 그대가 죽는다면 너무 미안한 노릇이예요.]
의림은 그가 무서운 상처를 입고도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을 보고 그의 용기에 탄복하는 한편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영호 오라버니, 또다시 여관주의 일장을 맞았잖아요. 어디 상처 좀 봐요.]

영호충은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곡비연은 말했다.

[호호호..... 새삼스럽게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어요. 누워 계세요.]

영호충은 전신의 기운이 쑥 빠져 그대로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침대 위에 누웠다.
곡비연은 촛불에 불을 당겼다. 의림은 영호충의 옷자락이 모두 선혈로 물들어 있는 것을 보고 즉시 남녀간이 지켜야 할 예의도 버리고 가만히 그의 장포를 들췄다. 그리고 세수대야를 놓는 시렁 위에 걸린 한 조각의 수건을 가져와 상처 주위를 닦아냈다. 그리고 품에 갈무리했던 천향단속교를 모조리 그의 몸 위에 발라 주었다.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이 같은 진귀한 영약을 나의 몸에 모두 낭비하다니 너무 아깝군!]

의림은 말했다.

[영호 오라버니는 저 때문에 이와 같은 중상을 입었으니 그까짓 약은 고사하고 설사...... 설사...... .]

거기까지 말했으나 더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고 한참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저희 사부님께서도 그대는 의협심이 강하고 용감한 젊은 영협이라 했어요. 그와 같은 말 때문에 사부님과 여관주가 언쟁을 벌이기도 했어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칭찬은 필요 없소. 사태 어르신께서 나를 욕하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천지신명께 감사를 드려야 할거요.]

의림은 말했다.

[저희 사부님께서...... 어찌 그대를 욕한단 말이예요? 영호 오라버니, 이곳에서 열두 시진만 정양을 하여 상처가 다시 파열되지만 않는다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녀는 세 알의 백운웅담환을 그에게 먹였다.
곡비연은 갑자기 말했다.

[언니는 이곳에 남아서 나쁜 사람이 다시 나타나 오라버니에게 해를 입히지 않도록 보호하세요. 할아버지께서 저를 기다리고 앴어서 저는 이만 가봐야겠어요.]

의림은 다급히 말했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그대는 가면 안 돼요. 나 혼자...... 어떻게 이곳에 있는단 말이예요?]

곡비연은 웃으며 말했다.

[영호충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멀쩡하게 살아 있잖아요? 어재서 혼자 남는다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등을 돌려 떠나려 했다. 의림은 초조한 나머지 앞으로 나갔다. 그녀는 다급한 김에 항산파의 금나수법을 펼쳐서 그녀의 팔을 거칠게 움켜잡고 말했다.

[가지 말아요!]

곡비연은 웃으며 말했다.

[무공을 쓸 참이예요?]

의림의 얼굴을 붉히며 손을 놓고 부탁했다.

[소저, 제발 나와 함께 있어 줄께요. 영호충이 나쁜 사람도 아닌데 어째서 그대는 그토록 그를 두려워 해요?]

의림은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미안해요. 곡 소저, 내가 아프게 잡진 않았나요?]

곡비연은 말했다.

[아프진 않아요. 그러나 영호충은 매우 아픈 것 같아요.]
의림은 놀라 모기장을 들추고 바라보았다. 영호충은 두 눈을 꼭 감고 조용히 잠이 들어 있지 않은가?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코 앞에 대 보았다. 숨 쉬는 간격이 고르고 평온해 보여 그녀는 마음을 놓았다.
그때 갑자기 곡비연이 킥 웃는 소리가 들리고 창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의림은 급히 몸을 돌렸다. 그녀는 이미 창문으로 나간 후였다.
의림은 대경실색하여 일시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침대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영호 오라버니, 영호 오라버니, 그녀...... 그녀가 갔어요.]
이때는 약기운이 한참 퍼질 때라 영호충은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의림은 전신을 떨며 두려움이 엄습해옴을 느꼈다.
한참 후 그녀는 창문을 닫아 걸고 생각했다.

(내가 빨리 이곳을 떠나야지. 영호 오라버니가 깨어나게 되고 나에게 말을 걸면 난 어떻게 하지?)

그리고 그녀는 다시 생각했다.

(그가 이토록 심한 상처를 입었으니 지금 어린애라고 해도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돌보지 않고 여길 떠난단 말인가?)

어둠 속 멀리 골목길 안에서 간혹 개짖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주위는 조용했다. 기녀원의 사람들이 이미 멀리 도망가고 없었다. 모기장 안의 영호충과 그녀 두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침대 모서리에 앉아 물끄러미 영호충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칼날같은 눈썹과 붉은 입술 때문에 준수하기 이를데 없었다. 의림은 가만히 손가락을 내밀어 그의 입술을 만져 보았다. 그리고 불에 데인 듯 손을 움추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넋을 잃고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어느덧 사방에서 닭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개벽이 가까와 진 것이다. 의림은 정신을 차렸다. 마음이 초조해졌다.

(날이 밝으면 사람들이 모여들게 될 것이다. 그때 난 어떻게 하지?)

그녀는 어려서 출가하여 한 평생 정일사태의 돌봄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이 세상을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저 초조하게 애를 태울 뿐 어떤 방법도 떠올리지 못했다.
갑자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서너 명이 골목길에서 걸어오는 것 같았다. 사방은 적막하고 발걸음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 사람들은 기녀원 문 앞에 이르더니 발을 멈추었다. 이때 한 사람이 말했다.

[너희 두 사람은 동쪽을 수색해. 우리는 서쪽을 수색할테니, 만약 영호충을 만나게 된다면 사로잡아야 해. 그는 부상을 입었으니 항거하지 못할 것이다.]

의림은 그 말을 듣게 되자 놀라고 당황했다. 더우기 그 사람이 영호충을 잡으러 왔다는 말에 번개같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어떻게 하더라도 영호 오라버니를 안전하게 보호해야 한다. 결코 그가 나쁜 자의 손에 들어가도록 방관해서는 안 된다.)
이 같은 생각이 들자 놀람과 두려웠던 마음이 일시에 사라지고 머리도 맑아지게 되었다. 그녀가 침대가로 다가가 요의 천을 틀어 영호충의 몸을 감쌌다. 촛불을 끈 다음 가만히 방문을 나섰다.

이때는 동서남북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저 사람소리가 들려온 곳과 반대쪽으로 재빨리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삽시간에 한 군데 채소밭을 가로질러 뒷문 쪽으로 오게 되었다. 문은 반쯤 닫혀 있었다. 원래 기녀원의 사람이 도망을 치면서 뒷문을 닫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영호충을 비스듬히 안아 들고 뒷문을 나섰다. 그리고 골목길을 따라 달렸다. 얼마 후 성벽가에 이르게 되자 속으로 생각?杉?

(성을 빠져나가야 한다. 형산성 안에는 영호 오라버니의 원수가 너무나 많다.)

그녀는 성벽을 따라 질풍처럼 달렸다. 성문에 도달하게 되자 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단숨에 칠 마장을 달렸다. 그녀는 황량한 산 속을 향해 자꾸만 깊이 들어갔다. 나중에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깊은 계곡에 들어서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심신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숙여 영호충을 바라보았다.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녀는 영호충의 웃음을 보자 당황하??두 손이 떨려 하마터면 그의 몸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녀는 '어머' 하는 소리와 함께 급히 경봉보경(敬棒寶經)의 일 초를 써서 몸을 구부리고 팔을 뻗어 그를 똑바로 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바람에 돌부리를 걷어차게 되고 휘청하며 앞으로 몇 걸음 내달은 후에야 가까스로 몸을 가누고 설 수 있었다.

[미안해요. 상처를 건드리진 않았나요?]

영호충은 빙긋 웃었다.

[이제 괜찮소. 좀 쉬도록 하시구료.]

의림은 조금 전 청성파 제자들의 추격을 피하는 데만 온정신을 쏟고 있었다. 오직2 한마음 한뜻으로 어떻게 해야 영호충이 상대방의 독수에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뿐 자기의 몸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안정이 되자 온몸이 쑤시고 결려 왔으며 뼈마디 마디가 모두 흩어지는 것 같았다. 간신히 영호충을 풀밭 위에 내려놓고는 서 있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달리기에 바빠서 기식을 조절하는 것을 잊었구료. 그것은 무공을 익히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꺼리는 것이오. 그러면...... 쉽게 ?纂낯?입게 되오.]

의림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영호 오라버니의 가르침에 감사 드려요. 사부님께서 가르쳐 주셨는데 마음이 다급해져 잊고 말았어요.]

잠시 후 그녀는 다시 물었다.

[상처는 어떠세요?]

영호충은 말했다.

[이제 아프지 않소. 약간 근질거릴 뿐이오.]

의림은 크게 기뻐했다.

[좋아요! 좋아요! 상처가 근질거리는 것은 치유될 조짐이예요! 이토록 빨리 낫게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영호충은 그녀가 무한히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榴?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 모두가 항산파의 영약 덕분이오.]

그는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증오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애석하게도 내가 중상을 입고 있기에 건달 녀석들에게서 도망을 쳐야 했고 그대가 고생을 하게 되었소. 조금 전 청성파 녀석들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다면 죽는 것은 물론이고 별의별 욕을 다 당하게 되었을 것이오.]

의림은 말했다.

[알고 보니 모두 듣고 계셨군요?]

그녀는 자기가 그를 안고 오랫동안 달렸던 사실과 그가 정신을 차리고 자기를 바라보았다는 2생각이 들자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영호충은 그녀가 갑자기 부끄러워하는 줄도 모르고 너무 빨리 달렸기 때문에 지쳐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했다.

[사매, 타좌(打坐)하여 잠시 쉬도록 하시오. 그리고 귀파의 심법으로 내식을 조절하여 내상을 입지 않도록 하시오.]

의림은 말했다.

[녜.]

대답을 마치고 그녀는 단정히 앉았다. 그리고 사문(師門)의 심법으로 호흡을 조절했다. 그러나 마음이 번거롭고 답답해서 시종 안정을 취할 수가 없었다. 얼마 되지 않아 눈을 ?煞?영호충을 바라보았다. 그의 상처에 변화가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그가 자기를 보고 있지는 없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눈을 들어 바라볼때 마침 영호충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는 깜짝 놀라 급히 눈을 감았다.
영호충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의림은 두 뺨을 붉히며 겸연쩍은 듯 말했다.

[어째서...... 어째서 웃으시나요?]

영호충은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오. 그대는 나이가 어리고 좌식법(坐息法)이 얕아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을 것이니 억지로 하려고 하지 마시오2.
정일사태께서 그대에게 무공을 연마할 때 너무 서두르면 커다란 장해를 일으킨다고 가르쳤을 것이외다. 내식을 조절할 때는 마음을 조용하고 평화롭게 해야 되오.]

그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대는 안심하시오. 나는 원기를 점차 회복하고 있소. 청성파의 그 녀석들이 다시 쫓아온다 해도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소. 나는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엉덩이를 뒤로 한...... .]

의림은 미소했다.

[평사낙안식을 펼치게 하겠다는 것이죠?]

영호충은 웃으며2 말했다.

[맞았소. 정말 잘 대답했소. 그러나 엉덩이를 뒤로 하고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은 품위가 없는 말이라오. 우리는 이후 '우아한 평사낙안식' 이라고 합시다.]

말을 마친 그는 숨이 차서 헐떡거렸다.
의림은 말했다.

[더 말하지 마세요. 한숨 자도록 하세요.]

영호충은 말했다.

[저희 사부님도 유 대협의 장원에 도달하셨을 것이오. 나는 즉시 유 대협의 집으로 가서 구경을 했으면 하오.]

의림은 그의 입술리 말라터지고 다만 눈동자만이 별처럼 빛나는 것을 보고 너무 피를 많2이 흘려서 물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제가 물을 찾아와 마시도록 해 드릴께요. 목이 타시죠?]
영호충은 말했다.

[길을 오다 봤는데 왼쪽 언덕 아래에 수박밭이 있읍디다. 그대는 그 수박을 몇 통 따오도록 하시오.]

의림은 말했다.

[좋아요.]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서 안쪽 주머니를 더듬었다. 그러나 한푼의 돈도 없었다.

[영호 오라버니, 돈 지닌 것 있으세요?]

영호충은 말했다.

[뭘 하려고?]
[수박을 사려고요.]

영호충??웃으며 말했다.

[사기는 뭘 사오? 그저 몇 통 따오면 될 것을! 부근엔 인가도 없고 수박을 심은 사람은 반드시 먼 곳에 살고 있을 텐데 그 누구에게 산다는 말이오?]

의림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돈을 주지 않고 가로챈다는 것은...... 훔치는 것이예요. 이것은 오계(五戒)가운데 두 번째 계율을 어기는 것이니 안 되어요.
돈이 없다면 그들에게 동냥을 해야겠지요. 수박 한 통 달라면 그들도 마다 하지는 않을 거예요.]

영호충은 귀찮아졌다.

[그대는 나이 어린...... .]

그는 ?뻔?나이 어린 멍청이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처럼 힘을 써서 자기를 구한 사실을 상기하고 말을 중도에서 멈추었다.
의림은 그의 얼굴에 불쾌한 빛이 떠오르는 것은 보고 더 말하지 못했다. 그의 말을 따라 왼쪽으로 나아갔다. 이 마장쯤 나갔을 때 아니나 다를까 쾌 넓은 수박밭이 있었는데 수박이 이렁마다 가득 익어 있었다.
나무 위에선 매미가 싱그러운 소리를 내며 울어대고 햇빛은 온누리에 떨어져 내릴 뿐 사방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영호 오라버니는 수박을 먹고 싶어 하신다. 그러나2 이 수박은 주인이 있는 물건인데 어찌 함부로 훔칠 수 있으랴!)

그녀는 재빨리 높은 언덕 위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았다. 사람이라고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원두막이나 농가 한 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부득이 되돌아와 수박밭에 서서 한참 동안 망설였다. 손을 뻗어 수박을 다려다 다시 손을 움추리기를 몇 차례에 걸쳐 반복했다. 사부가 타이르던 말씀이 떠올랐다.

(결코 남의 물건을 훔쳐서는 안 된다.)

그 생각을 하자 수박에 손을 댈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의 뇌리에 영호충의 바짝 2마른 입술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두 손을 합장하고 기도를 올렸다.

(보살님, 굽어 살펴 주옵소서. 제자는 일부러 훔치려는 것이 아니라 영호 오라버니...... 께서 수박을 먹자고 하기에...... .)
그녀가 생각해 볼 때 영호 오라버니가 수박을 먹고자 하는 것은 적당한 이유가 못 되는 것 같았다. 마음이 초조해진 나머지 눈물이 글썽거리게 되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두 손으로 수박을 한 통 따서 위로 들어 올렸다. 수박이 그녀의 품에 안기자 생각했다.

(상대방은 너의 목숨을 2 구하려고 했다. 너는 그를 위해 지옥으로 들어가 영원한 고통을 당한다 해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아니냐? 사람은 자기가 한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 의림이 지은 짓이니 영호 오라버니에겐 잘못이 없어.)

그녀는 수박을 들고 영호충의 곁으로 돌아왔다.
영호충은 세속적인 예의와 규칙 같은 것을 한번도 안중에 둔적이 없었다. 의림이 수박을 얻기 위해 동냥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의림이 철이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그녀가 한 통의 수박을 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마음의 고통을 당해야 했?쩝測?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그녀가 수박을 따서 돌아오자 크게 기뻐 칭찬을 했다.

[정말 착한 사매로군!]

의림은 갑자기 그가 자기를 칭찬하는 말을 듣자 기쁘고 놀란 나머지 수박을 떨어뜨릴 뻔했다. 급히 옷자락으로 수박을 감싸듯 안았다. 영호충은 웃으며 다시 말했다.

[예 그처럼 당황해 하시오? 수박을 훔쳤으니 그 누가 그대를 잡을까봐 두렵소?]

의림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니예요. 날 잡으려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리고 천천히 영호충의 곁에 앉았다.
이때 햇2살은 눈부시게 이 산과 저 산의 푸른 나무들을 찬란히 비춰 주고 있었다. 영호충과 그녀가 앉아 있는 곳은 산 그늘 쪽이라 햇살이 비춰들지 않았다. 온 산의 나무들은 어제 내린 빗물에 씻긴 후라 더욱 푸르러 보였고 산바람이 싱그럽게 불어 왔다.
의림은 허리에서 단검을 뽑아들었다. 부러진 검끝을 보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전백광 그 악인은 무공이 그토록 뛰어나니 그날 만약 영호 오라버니가 목숨을 던져 구해 주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 무사하게 이곳에 앉아 잇을 수 없었을 거야!)

?嫄?바라보니 영호충은 두 눈이 움푹 꺼져 있었고 얼굴은 창백했다. 그녀는 다시 생각했다.

(그를 위해서라면 내가 아무리 큰 죄를 짓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꺼야. 이까짓 수박 하나 훔치는 게 뭐가 대수롭겠어?)
이 같은 생각이 들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녀는 옷자락으로 단검을 깨끗이 닦은 후 수박을 갈랐다. 신선한 과일 냄새가 풍겼다.
영호충은 냄새를 몇 번 맡아보더니 말했다.

[잘 익었는데!]

조금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매, 수박을 보니 한 가지 우스갯소리가 떠오르는군2! 금년 대보름날 우리 사형제와 사매가 모여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이때 사매가 수수께끼를 냈소. 그것은 '왼쪽에 한 마리 작은 개가 있고 오른쪽에 한 개의 오이가 있다' 라는 문제인데 풀이하면 한 글자(一字)가 되는 것이었소. 그날 마침 왼쪽에 앉아 있는 것은 우리 여섯째 사제인 육후아였소. 바로 어젯밤 집안으로 들어와 나를 찾던 그 사제요. 그리고 나는 그녀의 오른쪽에 앉아 있었소.]
의림은 미소했다.

[그녀가 그와 같은 수수께끼를 낸 것은 그대와 육 사형을 조롱하는 것이었군요?]
2
영호충은 말했다.

[맞았소. 그 수수께끼응 어렵지 않았소. 바로 이 영호충의 호(狐)였소. 그녀는 그 우스갯소리를 책에서 보았다고 했소. 그런데 마침 여섯째 사제가 그녀의 왼쪽에 앉아 있었고 내가 오른쪽에 앉아 있었소. 공교롭게도 지금 나의 곁에는 이쪽에 조금만 개 한 마리가 있고 이쪽엔 한 통의 커다란 수박이 놓여 있군요!]
그러면서 그는 수박을 가리키고 다시 그녀를 가리키며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의림은 방금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그대는 말을 돌려 저를 못난 개라고 욕2하는군요.]
그러면서 그녀는 수박을 조각조각 내서 씨를 뽑고 한쪽을 영호충에게 주었다. 영호충은 한 입 깨물었다. 달콤한 맛과 향긋한 냄새가 입 안에 가득 찼다.
의림은 그가 매우 맛있게 먹는 것을 보자 마음이 무척 흐뭇해 졌다.
그의 앞자락에 수박물이 떨어져 얼룩이져 있었다. 그녀는 두째 번의 조각은 조그맣게 잘라서 그에게 건네 주었다. 한 입에 한 조각씩 먹게 된다면 수박물을 옷자락에 흘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그가 손을 뻗어 수박을 받을 때마다 상처를 건드리는 것 같?年? 의림은 마음속으로 안 됐다는 생각이 들어 조그맣게 잘라진 수박을 한 조각씩 그의 입에 대 주었다.
영호충은 수박 반 통을 먹고 나서야 의림이 한 입도 먹지 않은 것을 깨닫고 말했다.

[그대도 들도록 하구료.]

의림은 말했다.

[그대가 다 먹고 난 후 먹을께요.]

영호충은 말했다.

[나는 배가 부르오. 이제 그대가 먹도록 하시오.]

의림도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영호충에게 몇 조각 더 먹인 이후에야 겨우 한 조각의 수박을 입에 넣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영호충은 눈길 한 번2 돌리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부끄러워 몸을 돌렸다.
영호충은 갑자기 칭찬의 말을 했다.

[와! 정말 아름답군!]

그 말 속에는 즐거워하는 빛이 가득했다. 의림은 크게 부끄러웠다. 속으로 자기를 보기 좋다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동시에 몸을 일으켜 도망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야말로 몸둘바를 모를 정도가 되었다. 온몸이 후끈 달아 오르고 부끄러워 목덜미까지 빨갛게 붉어졌다.
영호충은 다시 말했다.

[저것 보시오. 얼마나 아름답소? 어떻소?]

의림은 몸을 2 돌렸다. 그의 손끝을 바라보니 멀리 무지개가 한 그루 나무 뒤에서 뻗어나와 일곱 색깔의 빛을 영롱하게 드러내고 있지 않는가? 그제서야 그녀는 보기 좋다는 것이 바로 무지개를 가리킨 것임을 알았다. 방금 자기가 그 뜻을 오해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다시 부끄러워졌다. 그러면서 웬지 허전하고 그가 얄미웠다. 조금 전 속으로 겸연쩍어 하면서도 기뻐하던 심정과는 퍽 다른 것이었다.
영호충은 말했다.

[자세히 들어보시오. 들리오?]

의림은 귀를 기울이고 들었다. 무지개가 피어오른 2 곳에서 은연중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마 폭포가 있는 것 같군요.]

영호충은 말했다.

[바로 그렇소. 비 때문에 산 속 도처에 폭포를 이루게 되었을 것이오. 우리 따라가 봅시다.]

의림은 말했다.

[그대는...... 그대는 역시 좀더 안정을 취하는 게 좋을 거예요.]
[이곳은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얽혀 있을 뿐 볼만한 것이 없소.
그러니 폭포나 구경하도록 합시다.]

의림은 그 뜻을 거절하기가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망설여지는 바가 있었다.

(나는 두 2번이나 그를 안은 적이 있다. 한 번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안았고 두 번째는 다급해서 도망을 치느라고 그랬다. 이제 그는 중상을 입고 있는 몸이지만 정신이 멀쩡한데 어찌 그를 다시 안고 폭포구경을 갈 수 있으랴? 그가 폭포 쪽으로 가자는 것은 혹시 나에게...... 나에게...... .)

이와 같이 망설이고 있을 때 영호충은 땅바닥에서 부러진 나뭇가지를 집어들더니 나뭇가지에 몸을 지탱해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또 한번 오해를 한 셈이었다.
의림은 재빨리 다가가 손을 뻗어 영호충의 어깨를 부축하여 스스로를 꾸짖었다.

(내가 어떻게 된 것일까? 영호 오라버니는 분명히 정인군자(正人君子)이다. 그런데 오늘 나는 자꾸만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되고 나쁜 생각으로만 기울고 있구나! 내가 홀로 한 남자와 함께 있으니 경계를 하기 때문이다. 그와 전백광은 같은 남자지만 하늘과 땅 차이가 있으니 결코 같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영호충의 발걸음은 온전하지는 못했으나 그런대로 자신의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한동안 걸어가니 커다란 바위가 있었다. 의림은 그를 부축해 바위 곁에 앉히고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여기가 괜찮군요. 그대는 꼭 폭포로 가야 되나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이곳이 좋다면 우리 함께 이곳에서 구경을 하도록 합시다.]

의림은 말했다.

[그렇다면 저쪽으로 가도록 해요. 저쪽은 경치가 좋으니 마음이 기쁠 거예요. 마음이 기쁘면 상처도 빨리 날 거구요.]

영호충은 빙그레 웃고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천천히 산모퉁이를 돌았다. 그때 '우르릉' 소리가 들리고 다시 한 모퉁이를 돌자 물소리가 더욱 우렁차게 들려 왔다. 소나무밭을 가로지르자 한 마리의 백룡과 같은 폭포가 산벽을 타고 쏟아져 내려오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영호충은 기뻐서 말했다.

[우리 화산의 옥녀봉(玉女峯) 옆에도 폭포가 있는데 이곳보다 더 크다오. 그렇지만 형산은 비슷하구료. 나와 영산 사매는 종종 폭포 곁에서 검술을 연마했다오. 그녀는 때때로 짓궂게 폭포 안으로 기어들어가기도 한다오.]

의림은 그가 두 번째로 영산 사매를 들먹이자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그가 중상을 입은 몸인데도 반드시 폭포 옆으로 오자고 한 것은 풍경을 감상하기 보다는 영산 사매를 그리워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찌된 노릇인지 그녀는 가슴이 아팠다. 마치 주먹으로 맞은 것처럼 저려왔다. 이때 영오충이 말했다.

[한번은 폭포가에서 검술을 연마하다가 그녀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게 되었고 하마터면 아래의 깊은 소(沼)속으로 떨어질 뻔 했는데 다행이 내가 그녀를 잡아 주어서 괜찮았소. 그땐 정말 위험했었지.]

의림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그대에겐 많은 사매가 있나요?]

영호충이 말했다.

[우리 화산파에는 일곱 명의 여제자가 있소. 영산 사매는 사부의 딸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모두 그녀를 소사매로 부른다오. 그리고 나머지 여섯 명은 모두 사모님께서 거둬들인 제자이지요.]
의림은 말했다.

[그녀는 악(岳) 사백님의 따님이시군요? 그녀는...... 그녀는...... 그녀는 그대와 상당히 친한가 보죠?]

영호충은 천천히 앉으며 말했다.

[나는 부모 없는 고아인데 십오 년 전 은사와 사모님이 문하제자로 거두어 주었소. 그대 소사매는 나이가 세 살밖에 되지 않았소. 나는 그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종종 그녀를 안고 야산의 열매를 따거나 토끼를 잡으러 다녔소. 나와 그녀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것이오. 사부님과 사모님께선 아들이 없기 때문에 나를 아들처럼 대해 주시고 소사매는 나를 친오빠같이 따른다오.]
의림은 그냥 음 하고 대답했다. 잠시 후 그녀는 말했다.

[저 역시 부모님이 없는 고아예요. 어려서부터 은사께서 거두어 주셨고 어려서 출가하게 되었어요.]

영호충은 말했다.

[애석하오. 애석해!]

의림은 눈에 의문의 빛을 띄우고 그를 바라보았다. 영호충은 말했다.

[그대가 이미 정일 사백의 문하제자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나는 사모님에게 그대를 제자로 받아 주십사 하고 청을 드릴 수 있는 건데...... 애석하게 되었소. 우리 사형제자매들은 사람 수가 많소. 이십여 명이나 되는데 한 자리에 모이게 된다면 매우 떠드는 편이라오. 그리고 공부가 끝나게 되면 각기 짝을 지어 논다오. 사부님과 사모님께서도 별로 관계하지 않는다오. 그대가 나의 소사매를 보게 된다면 그녀를 반드시 좋아하게 되고 그녀와는 좋은 친구가 될 것이오.]

의림은 말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저에겐 그런 복이 없어요. 하지만 백운암의 사부님이나 사저들도 저에게 퍽 잘 대해 주고 있어요. ...... 저 역시 매우 즐거워요.]

영호충은 말했다.

[맞았소. 내가 말을 잘못했소. 또 정일 사백께선 검법(劍法)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했소. 우리 사부님과 사모님께서는 각 문파의 검법을 논하게 되었을 때 그대 사부님에게 대해 퍽 탄복하는 빛을 보였소. 항산파가 어찌 우리 화산파만 못 하겠소?]
의림은 말했다.

[영호 오라버니, 그날 전백광에게 서서 싸우면 전백광이 천하에서 열네 번째 가고 악 사백은 여덟 번째 간다고 했죠? 그러면 우리 사부님은 천하에서 몇째 가나요?]

영호충은 웃기 시작했다.

[나는 전백광을 속인 것이오. 어찌 그런 일이 있겠소? 무공의 강약은 시시각각 변화가 있는 것이오. 어떤 사람은 진보를 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나이가 많아 힘이 줄어들어 퇴보를 하는 것인데 어떻게 천하의 뭇고수들의 서열을 정할 수 있겠소? 전백광 녀석의 무공은 고강하지만 천하에서 천하에서 열네 번째 간다고는 볼 수 없소. 나는 일부러 그를 좀더 높여 말해 그가 흐뭇해지도록 만들려고 했던 것이오.]

의림은 말했다.

[원래 그대는 그를 속인거군요?]

그리고 한참 동안 넋을 잃고 폭포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종종 사람을 속이나요?]

영호충은 빙그레 웃고 말했다.

[그거야 상황에 따라 다르니 종종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
어떤 사람은 속일 수 있으나 어떤 사람은 속일 수 없소. 사부님이나 사모님이 어떤 일에 대해 물었을 때 나는 조금도 거짓말을 할 수가 없소.]

의림은 '음' 하고 말했다.

[그럼 동문의 사형제자매에겐 어때요?]

그녀는 본래 그대의 영산 사매를 속이진 않느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어떻게 된 노릇인지 그처럼 직선적으로 물을 수가 없었다.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상대방이 누구인가, 또 어떤 일인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오. 우리 사형제끼리는 종종 장난을 친다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무슨 재미가 나겠소?]

의림은 끝내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영산 언니에게도 거짓말을 하나요?]

영호충은 한번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 눈쌀을 찌푸리고 한참 생각해 보고 한번도 그녀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지라 말했다.

[중요한 일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소. 같이 놀 때 그녀를 달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 적은 물론 있소.]

의림은 백운암에서 자란 몸이었다. 백운암에선 사부님이 농담을 하지 않았다. 계율도 엄했다. 뭇사저들도 한나같이 차가운 얼굴과 담담한 말투로서 서로를 대했을 뿐이었다. 물론 서로 사랑하고 돌보았지만 우스갯소리를 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다. 더구나 장난을 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정, 정한 두 사백의 문하에는 적지 않은 나이가 젊고 활달한 여제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출가한 동문들과는 좀처럼 우스갯소리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녀는 어린 시절을 냉정하고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보낸 것이다. 무공을 익히는 외에는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해야 했다. 이때 영호충으로부터 화산파의 동문들이 매우 재미있게 논다는 말을 듣자 불현듯 부러운 마음이 생겼다.

(내가 만약에 그를 따라 화산으로 놀러갈 수 있다면 정말 재미있겠구나!)

그러나 그녀는 즉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번 백운암에서 떠나온 이후 이처럼 커다란 풍파를 겪게 되었으니 백운암으로 돌아가면 사부님은 다시는 나에게 외출을 못 하도록 할 것이다. 화산으로 가서 논다는 것은 헛된 망상이 아닌가?)

그녀는 다시 생각했다.

(설사 화산에 간다 해도 그는 온종일 그의 소사매만 상대하느라고 나를 언제 보았느냐 할 것이니 무슨 재미가 있을려구? 아...... !)

갑자기 그녀는 처량한 심사에 사로잡혔다.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영호충은 온정신을 폭포에 쏟고 있어서 그녀의 심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말했다.

[나는 소사매와 한 가지 검법을 연구하고 있소. 그것은 폭포의 물이 쏟아지는 힘을 빌려서 검초를 펼치는 것이오. 사매, 그대는 그 같은 검법이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 아시오?]

의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저는 몰라요.]

그녀의 음성은 잠겨 있었다. 영호충은 여전히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들이 남과 손을 쓰게 되었을 때 만약 상대방의 내공이 심후하다면 상대방의 무기와 권장(卷掌)은 종종 무거운 내력이 실리게 되고 무형중에 형체가 있듯이 우리의 장검을 밀어내는 것이라오. 나와 소사매가 폭포에서 검법을 연마한 것은 물이 힘차게 쏟아지는 것을 적의 내력으로 간주하는 것이라오. 그렇게 되면 적의 내력을 밀어낼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힘을 빌려 상대방을 때릴 수도 있게 된다오.]

의림은 그가 신이 나서 얘기하는 것을 보고 말했다.

[그대들은 연성하게 되었나요?]

영호충은 고개를 돌렸다.

[아니오. 아니오, 아직 못했소. 한 가지 검법을 창조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노릇이오? 더군다나 우리들은 새로운 검초를 창출할 능력이 없다오. 다만 사부님이 전수해 준 본문의 검법을 폭포 가운데서 치고 찌르고 할 뿐이오. 설사 새로운 초식을 펼친다 해도 그것은 장난삼아하는 것이지 정말 적과 싸우게 되었을 때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전백광에게 얻어맞고도 전혀 반격할 힘이 없었겠소?]

그리고 그는 잠시 기다렸다가 손을 뻗어 내어 검을 휘두르는 시늉을 해 보고는 기뻐서 말했다.

[나는 또 일 초를 생각하게 되었소. 상처가 나은 후 돌아가서 소사매와 시험해 봐야겠소!]

의림은 나직이 물었다.

[그대들의 검법은 무엇이라고 하나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주제 넘게 무슨 이름을 붙이느냐고 했으나 사매는 반드시 이름을 지어 주어야 한다고 했소. 그리고 그녀는 충영검법(沖靈劍法)이라고 했소. 왜냐 하면 그것은 나와 그녀 두 사람이 함께 창안해 냈기 때문이라오.]

의림은 나직이 말했다.

[충영검법, 충영검법, 이 검법에는 그대 이름도 있고 그녀 이름도 있군요. 장래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여지면 모든 사람들이 그대들...... 두 분이 합심하여 만들었음을 알겠군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나의 소사매는 어린애와 같은 성질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지만 우리들의 재간과 조예로써 무슨 자격이 있어 검법을 창안하겠소? 그대는 절대로 남에게 말하지 마시오, 남이 알게 된다면 아마 배꼽이 빠지도록 웃을 것이오.]

의림은 말했다.

[저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대가 스스로 검법을 창안했다는 사실을 남들은 이미 알고 있어요.]

영호충은 깜짝 놀라 말했다.

[그렇소? 영산 사매가 남에게 이야기한 것이오?]

의림은 빙그레 웃었다.

[그대 스스로 전백광에게 얘기하지 않았나요? 그대는 스스로 않아서 하늘을 찌르는 검법을 창출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영호충은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것은 내가 그에게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인 것인데 그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구료?]

영호충은 웃는 바람에 상처에 자극을 주었는지 눈쌀을 찌푸렸다.
의림은 말했다.

[어마! 모두가 제 잘못이예요. 저때문에 그대가 상처의 아픔을 느끼게 되었군요. 빨리 말을 멈추고 안정을 취한 후 한숨 자도록 해요.]

영호충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서 말했다.

[나는 이곳의 풍경이 좋다는 것만 생각했소. 그러나 폭포 가까이에 이르고 보니 오히려 무지개를 볼 수 없게 되었구료.]
의림은 말했다.

[폭포는 폭포대로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고 무지개는 무지개대로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영호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이 맞소. 세상에는 완벽한 것이란 있을 수 없소. 한 사람이 천신만고하여 한 가지 물건을 얻으려고 노력하지만 나중에 구했을 땐 별것 아니라고 여기게 될 것이고, 손에 쥐게 된 물건을 오히려 내던질 수도 있을 것이오.]

의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호 오라버니, 그 몇 마디 말엔 은연중 선기(禪機)가 담겨져 있군요. 하지만 저의 조예가 너무 낮아 그 가운데의 도리를 깨우칠 수가 없네요. 사부님께서 들으셨다면 반드시 설명을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영호충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이 선기인지 내가 어찌 알겠소? 아...... 피곤하기만 하군!]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점차 호흡이 낮아지면서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의림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잎이 달린 나뭇가지를 하나 뜯어 그에게 달려드는 벌레들을 쫓아냈다. 한 시진을 그렇게 앉아 있게 되자 그녀 자신도 피곤해졌다. 그리고 몽롱하게 눈을 감고 잠이 들려고 했다. 그 순간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가 깨어나게 됐을 때 배가 고플텐데 먹을 것이 없으니 다시가서 몇 통의 수박을 따와야겠다. 해갈을 할 수도 있고 배를 채울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윽고 그녀는 재빠른 걸음으로 수박밭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두 통의 수박을 땄다. 그녀는 혹시 자기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야수가 영호충을 해칠까봐 겁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마음을 놓고 가볍게 그의 곁에 앉았다.
영호충은 눈을 뜨고 미소지었다.

[나는 그대가 떠난 줄 알았소.]

의림은 의아해 말했다.

[떠나다니요?]

영호충은 말했다.

[그대의 사부와 사저들이 그대를 찾지 않겠소? 그녀들은 매우 걱정을 하고 있을 것이오.]

의림은 줄곧 그와 같은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그 같은 말을 듣자 초초해지기 시작했다.

(내일 사부님을 뵈오면 그 어르신께서는 나를 꾸짖지나 않을지 모르겠구나.)

영호충은 말했다.

[사매, 정말 반나절 동안 나와 함께 있어 준데 대해 고맙게 생각하오. 그리고 나의 목숨도 그대가 살려 준 셈이니 그대는 일찍 돌아가도록 하시오.]

의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예요. 산 속에 그대 혼자 돌볼 사람없이 남겨 둔다는 것은 안 될 말이예요.]

영호충은 말했다.

[그대가 형산성 유 사숙의 집에 가서 나의 사제들에게 은밀히 이야기만 하면 그들이 와서 나를 돌봐 줄 것이오.]

의림은 속이 쓰라렸다.

(원래 그는 그의 소사매와 함께 있고자하는구나. 그래서 내가 비켜 주었으면 하는 거야.)

그녀는 참을 수 없어 눈물을 방울방울 흘렸다.
영호충은 그녀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자 크게 의아했다.

[그대는...... 그대는...... 어째서 울지? 돌아가서 사부님께 꾸지람을 들을까봐 두려운 것이오?]

의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호충은 다시 말했다.

[그렇군! 그대는 길에서 다시 전백광을 만날까봐 두려운 모양이군! 두려워 마시오. 이후부터 그는 그대를 보는 즉시 도망칠 것이며 다시는 감히 그대와 대면하지 못할 것이오.]

의림은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물 방울은 더욱 굵어졌다.
영호충은 그녀가 더욱 눈물이 많아짐을 보고 속으로 의아한 감정을 금할 수 없었다.

[좋소, 좋아! 내가 말을 잘못했다고 합시다. 내가 사과를 하지.
소사매 화를 내지 아오.]

의림은 그의 말이 부드러워지자 마음속의 서러움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생각했다.

(이 몇 마디의 다정한 말은 너무 듣기가 좋구나! 아마도 평소 소사매에게 말하던 버릇이 튀어나왔을 거야. 맞아, 옛날 버릇이 튀어나온 것이겠지.)

별안간 그녀는 '왁' 하니 울음을 터뜨리고 발을 굴렀5다.

[나는 그대의 소사매가 아니예요. 그대는...... 그대는......
그대의 마음속에는 그 소사매 생각뿐이군요!]

이 말을 내뱉은 순간 그녀는 출가인이 어떻게 그와 같이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 분수를 모르는 말 아닌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벌겋게 묽히며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영호충은 눈물이 마르지 않은 그녀가 갑자기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보자 물방울을 머금은 조그만 붉은 꽃처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원래 그녀는 이토5록 잘 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군! 정말 영사 사매보다 뒤지지 않는구나!)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다가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대는 나이가 적소. 우리 오악검파는 한 집안 사람과 다름없으며 모두들 사제이오. 절대 남남이 아니오. 그러니 그대는 자연히 나의 소사매가 되기도 하는 것이오. 내가 어떤 점에서 그대에게 죄를 지었는지 그대가 나에게 이야기해 줄 수 없겠소?]
의림은 승포자락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울먹이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대는 저에게 아무 죄도 지지 않았?楮? 나는 알고 있어요.
그대는 내가 한시 바삐 이곳을 떠났으면 하고 바라고 있어요. 보기만 해도
화가 나고 또 재수없게 만드니 말이예요. 그대가 말하지 않았나요? 영승을 보기만 하면 놀음판에서 반드시...... .]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다시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영호충은 우스꽝스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내가 회안루에서 한 말을 따지는구나. 그것이야말로 정말 사과를 해야할 일이지.)

그래서 그는 말했다.

[이 영호충은 정말 죽을 죄를 지었소. 말을 생각해 보지도 않고 내5뱉었구료. 그날 회안루에서 실 없는 말을 한 것은 항산파의 모든 사람들에게 죄를 지은 것이오. 응당 벌을 받아야지, 벌을 받아야 해!]

그리고 그는 손을 들어 철썩거리며 자기의 뺨을 후려쳤다.
의림은 급히 몸을 돌리며 당황한 음성으로 말했다.

[때리지...... 마세요. ......저는...... 그것을 탓하는 게 아니예요! 저는...... 저는...... 다만 그대에게 누를 끼칠까봐 두려운 거예요!]

영호충은 말했다.

[마땅히 맞아야 해!]

그리고 다시 철썩 하고 자기의 뺨을 때렸다.
의림은 급??말했다.

[저는 화를 내지 않았어요. 오라버니 그대는...... 더 때리지 마세요.]

영호충은 말했다.

[그대는 화를 내지 않겠다고 말했소?]

의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호충은 말했다.

[그대가 웃지 않는 걸 보면 여전히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니겠소?]

의림은 억지로 웃어보였다. 그러다 별안간 설움이 복바치는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는 슬픔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더니 나직이 말했다.
영호충은 그녀가 울음을 그치지 않고 흐느끼자 땅이 꺼져라 탄식을 불어냈다. ?퓔꼭?천천히 눈물을 훔치더니 나직이 말했다.

[그대는...... 왜 한숨을 내쉬나요?]

영호충은 속으로 웃었다.

(역시 그녀는 나이가 어려서 나의 속임수에 넘어가고 마는구나!)

그는 어려서부터 악영산을 벗하여 놀곤 했다. 악영산은 때때로 성질을 부리곤 했는데 화가 나면 그를 상대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면 영호충이 온갖 수단을 다해 달래려고 하지만 좀처럼 악영산은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어떠한 말을 그녀에게 해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면 영호충은 일부러 시5치미를 떼고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시키는 행동을 하여 오히려 그 쪽에서 질문을 해 오도록 만들었다. 그러면 단 한번에 효과가 나타나 영호충의 수작에 말려들고 마는 것이었다. 영호충은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린 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의림은 물었다.

[영호 오라버니 화 나셨어요? 조금 전 제가 잘못했어요. 그대는...... 그대는 마음에 두지 마세요.]

영호충은 말했다.

[아니오. 그대는 나에게 잘못한 적이 없소.]

의림은 그가 여전히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맘年? 그러나 영호충은 속으로 크게 웃고 있었다. 그가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꾸며낸 것이었다. 다급해진 의림이 말했다.

[제가 나빴어요. 제가 나빠서 그대 스스로 자신을 때리게 만들었군요. 저는...... 저는 제 자신을 때려 사과를 드리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손을 들어 철썩하며 오른쪽 뺨을 후려쳤다. 두번째 다시 치려고 할 때 영호충이 급히 몸을 일으켜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러나 힘을 쓰자 다시 상처가 아파왔다. 자기도 모르게 나직이 신음소리를 냈다. 의림은 놀라 부르짖었??

[어마! 빨리...... 빨리 눕도록 하세요! 상처를 아프게 하지 마세요!]

그녀는 그를 부축해 천천히 눕혔다.
그리고 스스로를 원망했다.

[제가 바보예요. 무슨 일이든 제대로 해내는 것이 없군요. 오라버니 그대는...... 그대는 많이 아픈가요?]

영호충의 상처는 사실 무섭도록 아픈 것이었다. 그렇지만 평시였다면 절대 아프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좋은 꾀가 떠올랐다.

(다만 그렇게 함으로써만 그녀의 눈물진 얼굴에 웃음을 띄우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ソ弩?찌푸리며 크게 신음소리를 내었다. 의림은 다급해져 말했다.

[아무쪼록...... 피를 흘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다행히 열은 없었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나직이 물었다.

[아픔이 좀 가라앉았나요?]

영호충은 말했다.

[여전히 매우 아프오.]

의림은 울상을 지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더 크게 신음을 질렀다.

[아...... 정말 아프군! 육 사제...... 육 사제가 이곳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

의림은 말했5다.

[아니 그에게 아픔을 멎게 하는 약이라도 있나요?]

영호충은 말했다.

[그렇소. 그의 입이 바로 상처를 잊게 하는 약이오. 예전에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상처가 매우 아팠소. 여섯째 사제는 우스갯소리를 잘 하기 때문에 난 그의 우스갯소리를 듣고 그만 상처의 아픔도 잊고 말았다오. 그가 여기에 있다면 정말 좋았을 것이오. 아이구...... 어찌 이리 아플까...... 이렇게 아프다니 아이구...... 아이구!]

의림은 난처하기 이를데 없었다. 정일사태의 문하생들은 하나같이 5얼굴을 굳히고 연구를 하거나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내공을 연마하거나 검술을 연마하는데만 신경을 썼다. 백운암에서는 한 달 동안 한두 마디의 우스갯소리도 듣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녀보고 우스갯소리를 하라는 것은 목숨을 달라는 것과 진배없는 일이었다.

(그 육후아 사형이 이곳에 없는데 영호 오라버니는 우스갯소리를 듣고자 하니 내가 그에게 우스갯소리를 할 수밖에 없구나. 하지만...... 하지만...... 나는 한 마디의 우스갯말도 할 줄 모르지 않나?)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5
한 가지 생각이 나서 신이 난 듯 말했다.

[영호 오라버니, 우스갯말을 저는 할 줄 몰라요. 하지만 저는 장경각(藏經閣)에서 한 권의 경서를 본 적이 있는데 퍽 재미있었어요. 이름은 백유경(百喩經)이라고 하는데 오라버니도 본 적이 있나요?]

영호충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소. 나는 책을 읽지 않소. 더욱 불경을 손에 만져 본 적도 없다오.]

의림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저는 정말 바보 같아요. 그와 같은 우둔한 말을 묻다니......
그대는 불문의 제자가 아니니 자5연 그와 같은 경서를 읽을 턱이 없죠.]

그리고 잠시 쉬었다가 계속해 말했다.

[그 백유경은 천축(天竺)의 한 분 고승인 가사나(伽斯那)가 지은 것인데 그 안에는 많은 재미있는 옛 이야기가 실려 있어요.]
영호충은 재빨리 말했다.

[좋았어! 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장 좋아하오. 그대가 몇가지 들려 주구료.]

의림은 미소지었다. 그 백유경에는 많은 이야기를 하겠어요. 옛날에 한 대머리가 있었는데 머리엔 한 가닥의 머리카락도 없었어요. 그는 타고난 대머리였죠. 그 대머리가 어?윰?농사꾼과 어떤 일로 언쟁을 벌이게 되었대요. 그 농사꾼은 소로 밭을 가는 쟁기를 갖고 있었는데 그만 그 쟁기로 대머리를 쳤어요. 그러자 그 대머리가 터져 피를 흘리게 되었죠. 그런데 그 대머리는 잠자코 참을 뿐 피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웃고 있었어요.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지요. 왜 피하지 않으며 오히려 웃기만 할까 하고 말이예요. 그러자 그 대머리는 웃으며 말했어요. '저 농사꾼은 바보외다. 나의 머리에 털이 없는 것을 보고 돌인 줄로 알고 쟁기를 들??나를 밀어친게 아니겠소. 그런데 내가 피하면 그로 하여금 총명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겠소?]

그녀가 거기까지 이야기하자 영호충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정말 훌룡한 이야기군! 그 대머리는 정말 총명하기 이를데 없구만! 설사 그 누구에게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마 피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오.]

의림은 그가 흐뭇하게 웃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무척 기뻐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다시 왕녀(王女)를 치료하는 약을 만들어 왕녀를 크게 한 이야기를 ??드릴께요. 옛날 어느 나라에 국왕이 있었는데 공주를 낳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 국왕은 성질이 매우 급했어요. 갓난아이가 매우 어린 것을 보고 공주가 한시 바삐 자라기를 바랬으며 어의를 불러와 약을 처방하여 공주에게 먹이도록 했어요. 한시 바삐 장성한 공주가 되도록 하라고 명했지요. 그 어의는 말했죠. '영양은 있읍니다만 찾아서 배합하여 약을 만드는 데는 많은 시일이 걸립니다. 이제 소신이 공주를 집에 데리고 가 재빨리 약초를 구해 약을 만들 것이니 페하께선 너무 재촉하시지 마십시오.5' 국왕은 말했어요. '좋아 재촉은 하지 않기로 하지.' 그리하여 어의는 공주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서 매일 국왕에게 영양을 채집하여 약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고 보고했어요. 그리고 십이 년이란 세월이 흘렀죠. 이때 어의는 말했어요. '영양은 만들어졌으며 오늘 공주에게 복용시켰읍니다.' 그리고 공주를 데리고 국왕 앞에 데리고 갔읍니다. 국왕은 과거의 갓난아이가 이미 처녀티가 나는 소녀로 자란 것을 보고 속으로 기뻐했어요. 그리고 어의의 의술이 탁월하다고 칭찬했으며 한 재의 영양으로 정말 5 크게 자라도록 했다면서 좌우의 신하들에게 명을 하여 금은보화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하사하셨대요.]

영호충은 다시 한번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대가 말하는 국왕의 성질이 급하다고 했는데 사실은 조금도 급하지 않소. 그는 십이 년이란 세월을 기다린 게 아니오? 만약 내가 어의라면 하룻만에 갓난아이인 공주를 십칠 팔 세의 자태고운 소녀공주로 만들고 말았을 거요.]

의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대는 무슨 방법으로 그렇게 할 수 있죠?]

영호충은 미소했??

[밖으로 천향단속교를 바르고 안으로는 백운웅담환을 먹이는 것이오.]

의림은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상처를 치료하는 약물인데 어찌 사람이 빨리 자라도록 할 수 있겠어요?]

영호충은 말했다.

[다만 그대가 나를 도와 주기만 하면 되오.]

의림은 의아하여 물었다.

[내게 무슨 도움을 달라는 것이예요?]

영호충은 말했다.

[그렇소. 내가 갓난아기를 데리고 가게 되었을 때 네 명의 재봉사로 하여금...... .]

의림은 더욱 더 의아하여 물었다.

[네 명의 재봉사를5 데려다 무엇에 쓰려고요?]

영호충은 말했다.

[빨리 새 옷을 만드는 것이오. 나는 그들에게 그대의 몸매를 재도록 한 후 공주의 의복 한 벌을 만들 거예요. 그리고 이튿날 그대가 입는 것이외다. 머리엔 영롱한 관을 쓰고 몸에는 수많은 꽃을 수놓은 비단옷을 입고 발에는 금실로 수놓고 구슬로 장식된 신발을 싣는 것이오. 그와 같이 아름다운 옷차림을 하고서 사뿐사뿐 금란전(金?殿) 위로 올라가 세 번 만세를 부르고 허리를 굽힌 다음 이렇게 말하란 말이외다. '아바마마! 저는 어의 영호충이 만??영양을 먹은 후 하룻밤 동안에 이토록 크게 되었읍니다.' 국왕은 이처럼 아름답고 귀여운 공주를 대하게 되면 흐뭇해져 그대에게 진짜 공주냐고 묻지도 않을 것이오. 그러면 이 어의 영호충은 커다란 상을 받는 것은 틀림없지 않겠소?]

의림은 끊임없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났을때도 허리를 구부리며 웃었는데 허리를 펴지 못할 정도였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말햇다.

[그대는 백유경의 어의보다 총명하군요. 그러나 애석하게도 전전...... 이토록 못 나서 전혀 공주를 닮지 ?刻弩릿?어떻게 하죠?]

영호충은 말했다.

[그대가 못났다면 천하에 아름다운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오.
옛날부터 공주는 수천 수만이 있었겠지만 어찌 그대처럼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겠소?]

의림은 그가 자기를 칭찬해 주자 마음이 아주 흐뭇해졌다.

[수천 수만의 공주를 그대는 모두 보았소.]

영호충은 말했다.

[그야 물론이오. 난 꿈 속에서 모두 보았소.]

의림은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어떻게 된 사람이길래 꿈마다 공주를 보게 되나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5[낮에 생각을 하면...... .]

그러나 그는 곧 생각나는 바가 있었다. 의림은 천진무사한 여승이 아닌가? 자기와 더블어 우스갯말을 한다는 것도 사문의 규율을 어기는 것과 같은데 자기가 어찌 그녀를 상대로 헛소리를 마구 지껄여댈 수 있겠는가? 이 같은 생각이 들게 되자 금방 얼굴빛이 엄숙해져 일부러 잠이 온다는 듯 하품을 했다.
의림은 말했다.

[아 영호 오라버니, 피곤하셨군요. 눈을 감고 잠시 주무세요.]
영호충은 말했다.

[좋소. 그대의 우스갯말은 정말 효험이 있구료! 내 상처의 아??
이 말끔히 사라졌소.]
영호충은 의림이 활짝 웃게 되자 뜻을 이룬 셈이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의림은 그의 옆에 앉아 가볍게 나뭇가지를 흔들어 날파리를 쫓았다. 멀리 계곡 안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림은 피곤해졌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졸음이 쏟아졌다. 의림은 천천히 꿈 속으로 빠져들었다.
꿈 속에서 그녀는 공주의 화려한 복장을 하고 화려한 궁전안으로 들어갔다. 그 옆에는 준수하기 이를데 없는 젊은이가 자기의 손을 잡고 들어가는데 영호충 같았다. 곧이어 발밑에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두 사람은 두둥실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말할 수없이 달콤하고 흐뭇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별안간 누군가 눈을 매섭게 부릅뜨고 노해서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바로 자기의 사부였다.
의림이 깜짝 놀랄 때 사부가 호통을 쳤다.

[이 못난 것아! 계율을 지키지 않고 감히 대담하게 공주가 되다니! 거기다 저 떠돌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니 용서할 수 없다.]
그리고 즉시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삽시간에 눈앞이 칠흙같이 어두워지면서 영호충도 보이지 않았고 사부도 보이지 않았다.
자기는 새까만 구름 속에서 끊임없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의림은 놀라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영호 오라버니! 오라버니!]

그러나 전신에 힘이 없어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말을 듣지 않았다.
몇 번 부르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영호충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림은 두 뺨을 붉히며 부끄러운듯 말했다.

[저는...... 저는......]

영호충은 말했다.

[그대는 꿈을 꾸었소?]

의림은 다시 한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꿈인지 아닌지 모르겠네요.]

말을 끝내고 보니 영호충은 얼굴이 매우 이상해 보였다. 억지로 고통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재빨리 물었다.

[그대는...... 그대의 상처가 매우 아픈가 보죠?]

영호충은 말했다.

[아직은 괜찮군요.]

그러나 그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잠시 후 이마에선 비지 같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의림은 매우 당황해서 말했다.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죠?]

그녀는 품 속에서 수건을 꺼내 그의 이마에 맺혀진 땀방울을 닦아 주었다. 손가락이 그의 이마에 닿게 되었을 때 숯불처럼 뜨거웠다. 그녀는 사부에게 들은 적이 있었는데, 사람이 칼이나 검에 상처를 입은 후 열을 내게 된다면 그 증세가 매우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다급한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경을 읽기 시작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수억의 중생들이 고통을 당하게 된다면 관세음보살이란 이름을 불러야 하느니라. 오로지 한 마음으로 그 이름을 부르게 된다면 관세음보살은 즉시 그 음성을 알아듣고 모두를 해탈로 이끌어 주실 것이니라. 만약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있어 커다란 불길 속으로 들어간다면 불은 그를 태울 수 없으리라. 이는 보살의 신력이 높기 때문이라. 만약에 큰 물에 휩쓸리게 되었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즉시 얕은 곳으로 이르게 될 것이니라......]

그녀가 읊는 것은 묘법연화경관세음보문품(妙法蓮華經觀世音普門品)이었다. 처음 소리는 들렸으나 잠시 경을 읽게 되자 심신이 안정되어 갔다.
영호충은 의림의 음이 맑고 고울 뿐 아니라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차분히 안정되는 것을 느끼고 불경에 씌여진 신통력이란 게 있긴 있나보다고 생각했다. 의림은 계속해서 경을 읊었다.

[만약에 누가 해를 입게 되었을 때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면 상대방의 손에 들린 칼과 지팡이가 모조리 토막이 나서 해탈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삼천이나 되는 대천국(大天國)의 땅에 많은 야차와 나찰들이 달려들어 사람을 곤하게 한다면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게 된 악귀들은 감히 나쁜 눈으로 바라보지도 못할 것이니 어찌 해를 입힐 수 있겠는가? 만약에 죄가 있으면 모르되 죄가 없이......]

영호충은 들을수록 우스워져 '홧'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의림은 물었다.

[무엇이...... 무엇이 우스워요?]

영호충은 말했다.

[진작 그런줄 알았으면 무공을 배우지 않았을 것이오. 악인과 원수가 있어 나를 죽이려고 한다면 내가 관세음보살의 이름만 들먹이기만 해도 악인의 칼이 한 토막씩 잘라지게 될 것이니 정말...... 무사할 것이 아니겠소?]

의림은 정색하며 말했다.

[영호 오라버니 보살님을 모독하지 마세요. 마음에 성실이 없으면 경을 읽어도 아무런 도움이 안 돼요.]

그녀는 계속해서 읊었다.

[만약에 흉악한 짐승이 에워싸고 예리한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서 으르렁거린다면 관세음보살의 신통력을 기억하게 되는 순간에 그들은 모조리 멀리 사라지게 될 것이니라. 구렁이나 뱀, 전갈이 독기를 내뿜으며 달려들었을 때 관세음보살의 신통력을 생각하면 그들은 저절로 돌아가게 될 것이니라.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벼락이 쳐도 우박과 큰 비가 쏟아져도 관세음보살의 신통력을 생각하면 때맞춰 구름이 걷히게 될 것이니라. 중생의 고달픔에 시달려 고생은 한없으나 관세음보살의 신통한 지력으로 세상사의 고달픔에서 구원을 받게될 것이니라......]

영호충은 그녀가 읽을수록 경건해져감을 느꼈다. 소리는 나직했으나 오직 한마음으로 관세음보살에게 구원을 받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온마음이 관세음보살에게 쏠려서 애달프게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관세음보살의 신통력을 나타내 자기의 고달픔을 해탈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관세음보살, 제발 영호 오라버니의 고통을 면해 주시고 그의 고통을 나의 몸으로 옮겨오도록 해주소서. 나는 짐승이 되어도 좋고 지옥으로 떨어져도 좋습니다. 다만 보살님께서는 영호 오라버니의 고난을 해탈시켜 주시옵소서......]

나중엔 영호충은 경문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간구하고 비는 소리였으며 진지하고 열렬하다는 것을 알수 있을 뿐이었다. 곧이어 영호충의 눈엔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없었다. 사부님이나 사모님은 그에 대해 많은 은혜를 베풀었지만 궁극적으로 그는 장난이 심해 꾸지람을 받고 벌을 받을 때가 사랑을 받을 때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했었다. 사형제자매간에는 그를 대사형이라 생각하고 존경하며 그의 비위를 거슬리려고 하지 않았다. 영산 사매는 그와 비교적 절친한 편이었으나 그에 대해 이처럼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의림은 세상의 온갖 고통을 자기의 몸으로 옮겨주어 영호충의 평안과 즐거움을 주십사 하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영호충은 가슴에서 끓는 피가 솟아오름을 느꼈다. 의림을 슬쩍 쳐다보자 의림의 온몸에선 은연중 거룩하고 고결한 광채가 빛나는 것 같았다.
의림의 염불소리는 점점 부드러워졌다. 그녀의 눈앞엔 마치 손에 버들가지를 들고 감로(甘露)로 이 세상의 고난에서 사람을 구해내려는 관세음보살이 서 있는 것 같았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한 마디 한 마디가 영호충을 위해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고 있는 성의로 가득 차 있었다.
영호충은 고맙기도 하고 위로도 되었다. 부드럽고 경건한 염불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꿈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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