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오강호 1-5

3학년2반 | 2022.03.11 07:12:42 댓글: 0 조회: 673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4631


악불군은 임평지를 문하생으로 받아들인 이후 제자들을 이끌고 곧장 유씨 저택의 모임으로 갔다. 유정풍은 그가 왔다는 소식을 듣자 놀랍고 반가왔다. 무림에서 명성이 자자한 군자검이 놀랍게도 친히 왕림을 한 것이 아닌가. 재빨리 영접을 하러 나갔다. 그리고 끊임없이 고맙다는 치하를 했다. 악불군은 매우 겸손하고 온화한 얼굴로 웃음을 가득 띄우고 축하를 했다. 그리고 유정풍과 손을 맞잡고 대문을 들어섰다.천문진인, 정일사태, 여창해, 문선생, 하삼칠 등도 처마 아래까지 내려와 그를 맞아들였다.
여창해는 마음속으로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었다.

(화산 장문인이 친히 이곳으로 오다니...... 반드시 나 때문에 온것일게다. 그의 오악검파는 사람도 많고 세력도 강하지만 우리 청성파를 얕볼 수는 없을 것이다. 악불군이 불손한 말을 내뱉는다면 나는 먼저 영호충이 술집에 유숙한 행위를 들고 따지겠다. 만약 얼굴을 붉히고 대어든다면 손을 쓸 수밖에 없지.)

악불군은 여창해를 보자 깊이 읍을 하며 말했다.

[여관주, 몇 년 보지 못한 새에 더욱더 건강해진 모습이구료.]
여창해 역시 읍을 하며 말했다.

[악선생, 그동안 안녕하셨소?]

각자 인사말을 나누었다. 유씨 저택에는 많은 손님들이 들어왔다. 이날을 유정풍이 금대야에 손을 씻는 즉 은퇴를 하는 바로 그날이었다.
유정풍은 곧 내실로 들어가게 되고 문하제자들이 손님을 접대하게 되었다.
오시가 가까워지게 되었을 때 오육백 명이나 되는 원거리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개방의 부방주 장금별(張金?), 사졸을 세 명이나 거느린 정주(鄭州) 육합문(六合門)의 하노권사(夏老拳師), 사천과 호북간에 있는 무산의 신녀봉(神女峯) 철노로(鐵老老), 동해해사방 방주 반후(潘吼), 곡강(曲江), 이우신도(二友神刀), 백극(白克), 신필(神筆) 노서사(盧西思) 등이 차례로 들어왔다. 이 사람들은 서로 알고 있기도 했고 이름만 듣고 앙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한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대청 안은 서로 인사를 하고 담소를 나누느라고 시끌벅적했다.
천문진인과 정일사태는 각기 상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뭇사람과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온 사람중엔 강호에서 명성과 지위가 높은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잡다한 불량배들에 불과하다. 유정풍은 형산파의 고수가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자중할 줄 모르고 이토록 막무가내로 교분을 되었을까. 그러면 오악검파의 명성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악불군의 이름은 불군이라 했지만 매우 친구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내빈들 가운데이름도 없거나 명성이 별로 깨끗하지 못한 자가 있더라도 악불군은 그들과 이야기를 하고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조금도 화산파 장문인의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다.
유씨댁의 제자들은 요리사들과 하인들을 시켜 이백여 석이나 자리를 마련하게 했다. 유정풍의 친척, 문객, 집사, 그리고 유씨문의 제자인 상대년, 미위의 등은 손님들을 자리로 안내했다. 무림의 지위나 명성으로 볼 때 태산파의 천문진인이 상석에 앉아야 하나 오악검파는 결맹을 한 까닭으로 천문진인이나 악불군, 정일사태 등은 반쯤은 주인이 된 셈이어서 웃자리에 앉기가 거북했다.
그리고 선배들과 명숙들도 서로 양보하여 그 누구도 상석에 앉으려고 하지 않았다.
문 밖에서 펑펑하고 폭죽소리가 났다. 곧이어 북소리와 주악을 울리는 소리가 크게 일었다. 그런가 하면 징을 치고 길을 비키라는 소리도 들렸다. 아마도 관가의 사람이 문 밖에 이른 모양이었다. 군웅들은 어리둥절해졌다. 유정풍이 새 비단장포를 걸치고 총총히 내당에서 달려나왔다. 군웅들은 환호소리로 그에게 축하를 했다. 유정풍은 잠시 두 손으로 답례를 한 후 문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그는 공손히 관복을 입은 관원을 데리고 들어왔다. 군웅들은 모두 의아해했다.

(설마하니 저 관원도 무림의 고수인가?)

관원의 옷차림은 당당했으나 두 눈은 침침해 보였다. 그리고 얼굴은 주색에 탐닉한 기색이 역력했다. 틀림없이 무공을 지닌 자는 아니었다. 악불군 등은 생각했다.

(유정풍은 형산성의 큰 유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평소에 관가의 사람들과 내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늘은 뜻깊은 날이기도 하니 관리들이 인사차 온 것에 대해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관원은 가슴을 펴고 곧장 들어오더니 한복판에 우뚝 섰다. 그러자 뒤를 따르던 자가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두 손을 높이 쳐들고 노란 비단을 덮어놓은 쟁반을 쳐들었다. 그 쟁반엔 하나의 두루마리가 놓여 있었다. 이 관원은 허리를 굽히고 두루마리를 받아들며 낭랑히 외쳤다.

[성지가 내렸으니 유정풍은 성지를 받드시오.]

군웅들은 그 말을 듣자 모두 깜짝 놀라게 되었다.

(유정풍은 은퇴하는 날로부터 무림을 떠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고 이는 강호의 일이다. 조정과는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어찌하여 황제가 성지를 내렸을까? 설마 유정풍이 대역무도한 짓을 했다가 조정에 발각되었을까. 아니면 구족을 멸하게 되는 큰 죄를 지은 것일까?)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듯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고 일제히 모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성질이 급한 사람은 지니고 있던 무기를쳐들었다. 그들 생각에는 관원이 성지를 받들라고 한 것을 보면 유씨집 주위가 관병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것이고 한바탕 커다란 싸움을 피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따라서 자기들도 유정풍과 잘 아는 처지이니 결코 구경만 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더군다나 새 둥지가 침입을 당하면 새알이 무사할 수 없듯이 자기들이 유씨 저택의 모임에 참석했으니 역모에 가담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아무리 관계가 없다 해도 변명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들은 유정풍의 안색이 변해서 호통을 내지르면 뭇사람들은 무기를 들고 삽시간에 그 관원을 베어서 피떡을 만들 참이었다.
그런데 유정풍은 침착했다. 두 무릎을 끓고 끓어앉았다. 그리고 그 관원에게 세 번 큰 절을 올리고 낭랑히 말했다.

[미신(微臣) 유정풍이 성지를 받들겠읍니다. 황제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군웅들은 이를 보자 아연해지고 말았다.
관원은 두루마리를 펼치더니 읽어 내려갓다.

[하늘의 뜻을 받아 승운(承運) 황제는 조서를 내리노라. 호남성의 순무가 알려온 바에 의하면 형산성의 서민인 유정풍은 공사에 매우 협조적이고 의협심도 있으며 고향에서 많은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활쏘기나 말타기에 능숙하므로 크게 쓰모가 있는 인재라 하겠다. 따라서 참잔(參將)직을 내리노니 금후로는 조정에 충성을 다하여 짐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유정풍은 다시 큰절을 했다.

[미신 유정풍이 성은에 감사 드립니다. 황제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그리고 몸을 일으켜 관원에게 허리를 굽히고 말했다.

[장(張) 대인께서 거두워 주시고 추천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 관원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했다.

[축하하오. 축하하오. 유 장군 이후 우리는 같은 조정의 신하이니 겸손해 할 것 없소.]

유정풍은 말했다.

[소인은 일개 초야에 묻힌 백성에 지나지 않읍니다. 오늘 조정에서 내린 조서를 받은 것은 황상의 은혜가 넓으신 탓입니다. 소인이 선조들을 빛나게 한 것은 모두 순무와 장대인의 파격적인 안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읍니다.]

그 관원은 웃으며 말했다.

[원 별 말씀을 다하시는구료!]

유정풍은 고개를 돌리고 방천구(方千駒)에게 말했다.

[방아우님, 장대인께 드릴 예물은 어떻게 되었소?]

방천구가 말했다.

[벌써 이곳에 준비해 왔읍니다.]

그리고 그는 몸을 돌려 둥근 쟁반을 꺼내들었다. 그 쟁반 위에는 비단 보따리가 놓여 있었다. 유정풍은 두 손으로 받아들면서 말했다.

[별것아니라서 경의를 표할 수 없읍니다만 장대인께선 웃으면서 받아 주십시오.]

장대인은 웃으며 말했다.

[다 같은 형제인데 유대인은 이토록 예의를 차리시는구료.]
그리고 옆으로 눈짓을 했다. 옆에 있던 관졸이 그 쟁반을 받았다. 그런데 그 쟁반을 받게 되었을 때 팔이 아래로 쑥 떨어졌다.
아마도 쟁반에 놓인 물건의 무게가 상당한 것 같았다. 백은이 아니고 황금인 것 같았다.
장대인은 환히 웃으며 말했다.

[소제는 공무가 바빠 오래 머물지 못하게 도니 술 석 잔을 들어 유 장군이 오늘 관직을 받게 된 것을 축하하고 얼마 후 벼슬길에 올라 황제폐하의 은혜가 넘치기를 빌겠소이다.]

그러자, 좌우에 술을 따라 받쳤다. 장대인은 잇달아 석 잔의 술을 마시더니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한 후 문을 나섰다.
유정풍은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띄우고 그를 대문 밖까지 전송했다. 그러자 징소리가 나고 길을 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유씨 댁에선 곧 폭죽을 터뜨려 전송을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광경은 군웅들에게는 뜻밖이었다. 서로를 얼굴만 쳐다보면 아무 소리도 못했다. 어떤 사람들의 얼굴은 겸연쩍어했고 어떤 자는 의아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유씨 저택에 온 손님들은 결코 흑도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무리들도 아니었다. 그러나 무림에선 각기 명망이 있고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평소 관부에 대해서는 눈여겨보지도 않았는데 유정풍이 아부해서 황제로부터 참장이라는 쥐꼬리만한 무관벼슬에 봉해지자 감격해 할 뿐 아니라 굽신굽신하는 태도를 취하는 한편 공공연히 뇌물까지 바치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그를 업수이 여겼다. 어떤 자들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멸시의 빛을 띄우기도 했다.
나이가 비교적 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생각했다.

(이 사정을 보건대 아마도 그의 벼슬은 금은으로 사들인 모양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썼기에 순무의 주례까지 받게 되었을까? 유정풍은 평소 위인됨이 정직하다. 그런데 어찌 늙으막에 벼슬길에 눈이 어두워 수단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사려는 것일까?)

유정풍은 군웅들 앞으로 나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읍을 하며 자리에 앉기를권했다. 그런데 아무도 수석(首席)에 앉는 사람이 없었다. 그 가운데 의자는 비워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왼쪽에는 연세가 가장 많은 육합문의 하노권사가 앉았고, 오른쪽엔 개방의 부방주 장금별이 앉았다. 장금별의 무공은 대단치 않았다.
그러나 강호의 제일 큰 방파인 개방의 방주 해풍(解風)은 무공과 명성이 대단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그를 삼 푼쯤 존경했다.
군웅들이 자리에 앉게 되자 하인들이 음식을 나르고 술을 따랐다. 곧이어 상대년이 한 개의 차탁자를 내놓았다. 그 위는 비단으로 덮어져 있었다. 상대년은 두 손으로 한 쌍의 금빛이 찬란하고 지름이 한 자나 되는 황금대야를 들고 와 차탁자 위에 놓았다. 대야 안은 맑은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때 문 밖에서 펑펑펑 세 번의 종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꽝꽝꽝 하며 여덟 번의 폭죽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후청과 화청에 앉았던 뭇후배들과 제자들이 모조리 대청으로 달려와 구경을 하게 되었다.
유정풍은 싱글벙글 웃으며 앞으로 나가 포권을 하고 뭇사람에게 읍을 해보엿다. 군웅들은 모두 일어나 반례했다.
유정풍은 낭랑한어조로 입을 열었다.

[무수한 영웅들과 친구분, 그리고 젊은 양반들, 여러분들이 먼 길을 마다않고 이렇게 찾아와 주시니 유정풍으로선 실로 영광된 일이라 고맙게 생각하는 바이외다. 이 형제가 오늘 손을 씻고 이후 강호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원인을 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형제는 조정의 은전을 받아 조그만 벼슬을 하게 된 것입니다. 흔히들 임금의 녹을 먹게 된다면 임금께 충성을 다하라는 말이 있읍니다. 강호에서는 의리를 중시합니다만 나라의 공사에는 반드시 공무를 중시해야 하며 법을 잘 지킴으로써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읍니다. 이 양자에 충돌이 있게 된다면 이 유정풍으로선 난처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따라서 유정풍은 무림에서 물러서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의 문하제자들이 만약 원한다면 다른 문파의 제자가 될 수 있으며 그들 마음대로 하도록 하겠읍니다. 이 유모가 여러분들을 이곳에 모신 것은 여러 친구분들이 공증인이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이후 여러분들이 형산성에 오게 된다면 물론 유모와는 절친한 친구임에 틀림이 없는 일입니다.하지만 무림의 여러 가지 은원과 지위는 미안하지만 이 유모가 다시 묻지 않겠읍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재차 읍을 했다.
군웅들은 그가 그같이 말하리라고 짐작하고 있던터라 하나같이 생각했다.

(그는 오로지 벼슬만 하려고 하는구나. 사람의 길은 각기 뜻하는 바가 다르니 강요할 수 없다. 어찌되었든 그는 나에게 잘못한 것이 없으니 이후부터 무림에 그 같은 인물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면 되겠지.)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 같은 행동은 형산파의 영광에 누를 끼치는 행동이다. 아마도 형산파의 장문인 막대선생은 매우 늙었기 때문에 이곳에 오지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생각했다.

(오악검파는 근년에 이르러 강호에 의협을 떨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런데 유정풍이 이 같은 일을 저지르다니 모든 사람들은 앞에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등 뒤에선 비웃지 않겠는가?)

또 어떤 사람들은 남의 잘못을 꼬집고 있었다.

(오악검파는 협의문파라고? 그러나 벼슬길에 올라 재물을 만지게 되자 관원에게 아부하는구나. 이래 가지고 무슨 협의(俠義)라고 할 수 있겠는가?)

군웅들은 제각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시에 대청 안은 조용해졌다. 이와 같은 상황 안에선 각자 다투어 유정풍에게 축하의 말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를 추켜올려 수복을 누리라느니 과단성 있게 물러서라느니 정말 지혜롭고 용기 있는 행동이라는 등의 찬사를 늘어놓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은 대청에 모였으나, 그 누구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 유정풍은 몸을 문 밖으로 돌리더니 낭랑히 외쳤다.

[제자 유정풍은 은사의 거두심을 받고 무예를 전수받았으나 형산파를 빛내지 못한 점 매우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다행히 본문은 막사형이 이끌어 가고 있고 이 유정풍은 우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 한 사람 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후부터 이 유모는 금대야에 손을 씻고 오직 벼슬길에 오르는 것에만 충실하겠으며 결코 사문에서 전수해 준 무예로써 벼슬길에 오르도록 하지는 않겠읍니다. 그리고 강호의 은원시비나 문파의 쟁탈전에 있어서는 이 유정풍은 더욱 더 간섭하지 않겠읍니다. 만약 이 말을 어기게 되었을 때는 이 검처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른손을 뒤집더니 장포자락 안에서 한 자루의 장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양쪽을 잡고 내려눌렀다. 그러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검날은 두 토막이 되고 말았다. 그는 장검을 부러뜨리고 두 토막의 장검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싹싹 하는 가벼운 음향과 함께 동강이 난 두 토막의 장검이 모두 푸른 벽돌에 박히는 것이 아닌가?
군웅들은 이를 보자 모두 아연해졌다. 두 토막의 단검이 푸른 벽돌을 파고드는 소리로 미루어 볼 때 그 검은 옥을 자르고 무쇠를 동강낼 수 있는 예리한 보검이 틀림없었다. 손으로 강철검을 부러뜨린다는 것은 유정풍과 같은 인물로선 별로 대수롭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보통 장검을 부러뜨린 것이 아니라 전혀 힘을 들이지 않고 한 자루의 보검을 부러뜨린 것이다. 손과 손가락의 재간이 순수하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실로 무림에서 일류 가는 조예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선생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애석하다. 애석해!]

그가 그 보검을 애석하게 여기는지 아니면 유정풍과 같은 고수가 관부에 투신하는 점을 애석하게 여긴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유정풍은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소매자락을 걷어올렸다. 그리고 두 손을 금대야에 집어넣으려 했다. 별안간 대문 밖에서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유정풍은 놀랍다는 듯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자 대문 쪽에서 네명의 황삼을 걸친 사내들이 들어왔다. 이 네 사람은 문 앞으로 들어서자마자 양쪽으로 나누어섰다. 그러자 한 명의 체구가 우람한 황삼의 사내가 네 사람 사이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이 사람의 손에는 한 폭의 오색빛이 영롱한 기가 높이 쳐들려 있었는데 깃폭에는 진주보석이 잔뜩 박혀 있어 한번 흔들 때마다 찬란한 보광이 뻗쳐나오곤 했다. 뭇사람들은 그 기를 알아보고 속으로 흠칫해서 생각했다.

(오악검파 맹주(盟主)의 영기(令旗)가 도달했군!)

그 사람은 유정풍의 앞에 이르더니 깃발을 쳐들고 말했다.

[유 사숙, 오악검파 좌맹주(左盟主)의 명을 받들도록 하십시오.
유 사숙께서 금분세수를 하는 일은 잠시 미루어 주시랍니다.]
유정풍은 허리를 굽히고 말했다.

[맹주께서 명을 내린 것은 무슨 뜻인지?]

대한은 말했다.

[제자는 명을 받들고 행할 뿐 맹주의 뜻을 모릅니다. 유 사숙께선 용서하십시오.]

유정풍은 미소했다.

[겸손해 할 것 없네. 현질은 천장송(天丈松) 사(史)현질이겠지.]

그의 얼굴엔 웃음빛이 감돌았으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이 사건이 느닷없이 일어나 그처럼 많은 풍상을 겪은 사람도 크게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 사내는 바로 숭산파 문하의 제자 천장송 사등달(史登達)이었다. 그는 유정풍이 자기 이름과 호를 알자 속으로 의기양양해져서 허리를 약간 굽혀보였다.

[제자 사등달이 유 사숙께 인사 올립니다.]

그리고 몇 걸음 나서서 재차 천문진인과 악불군, 정일사태 등에게 절을 하고 말했다.

[숭산파 제자가 여러 사백님과 사숙님들께 인사를 드립니다.]
나머지 네 명의 사내들도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정일사태는 무척 기뻐했다. 반례를 하고 말했다.

[그대의 사부가 나서서 이 일을 정지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잘 되었네. 사실 무공을 배우는 사람은 강호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그런데 하필이면 그까짓 벼슬아치를 해야하느냔 말일세.
다만 나는 유 아우님이 모든 것을 안배해 놓은 것을 보고 결코 이 늙은이의 말을 듣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입을 놀리지 않았을 뿐이라네.]

유정풍의 안색은 매우 진지했다.

[과거 우리 오악검파가 결맹을 맺고 공격과 수비에 있어서 서로 돕는다는 약속과 함께 무림의 정의를 지키기로 했소. 따라서 오악검파와 관계되는 일에 부딪치게 된다면 모두들 맹주의 호령을 들어야 할 것이오. 그로 인해 이 영기를 대할 때 맹주를 대하듯 하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외다. 하지만 오늘 불초가 금분세수를 하게 되는 것은 이 유모의 사사로운 일이고, 또 무림의 법칙다에 어긋나지 않으며 오악검파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오. 따라서 오늘은 맹주영기의 제한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오. 사 현질은 존사에게 유모가 기령을 받들 수 없으니 좌 사형께서 용서해주십사 하는 말을 전하도록 하게나.]

그리고 나서 그는 금대야 쪽으로 다가갔다.
사등달은 몸을 흔들더니 금대야 앞을 막고 오른손의 비단기를 높이 쳐들고 말했다.

[유 사숙, 저의 사부님께서는 천번만번 사숙께선 금분세수의 예를 늦추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 오악검파가 한 뿌리를 가진 나뭇가지처럼 모두들 함께 고락을 나누어야 한다고 하셨읍니다. 저의 사부님께서 영기를 전하신 것은 오악검파의 정을 돌보는 동시에 무림의 정의를 지키겠다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유 사숙을 위해서입니다.]

유정풍은 말했다.

[난 알 수가 없군. 이 유모가 금분세수를 하겠다는 초청장을 이미 공손히 숭산에 보냈으며 또 장문의 편지를 써서 좌 사형께 말씀을 드렸다네. 좌 사형께서 정말 호의를 가지고 계셨다면 어째서 사전에 권하여 막지 않고 이제서야 영기를 내려보내 저지를 하느냔 말일세. 이것이야말로 이 유모로 하여금 천하영웅들 앞에서 이랬다 저랬다 하는 소인으로 만들어 강호의 호걸들로부터 웃음을 사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등달은 말했다.

[저희 사부님께서는 유 사숙께서 형산파의 영웅으로서 의기가 구름을 찌르듯 높다고 했읍니다. 그리고 무림의 동도들도 언제나 유 사숙을 심히 존경했으며 저희 사부님 역시 마음속으로 매우 흠모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제자에게 추호도 실례된 행동을 하지 말 것이며 만약 그렇지 않을 때는 엄벌을 내리겠다고 했읍니다. 유 사숙의 대명은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으니 이 점에 관해서 걱정 할 것이 업다고 생각합니다.]

유정풍은 빙그레 웃었다.

[그것은 좌 맹주의 과찬이시지. 이 유모에게 그와 같은 명망이 있겠는가?]

정일사태는 두 사람이 서로 옥신각신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유 아우님, 이 일은 좀 지체시켜도 상관이 없지 않겠나. 오늘 이곳의 분들은 절친한 친구이니 누가 자네를 비웃겠는가? 설사 한두 사람 분수를 모르는 자들이 있어 함부로 비웃고 욕을 한다면 유 아우님을 그를 상대하지 않는다 해도 빈니가 그를 먼저 용서하지 않을 걸일세.]

그리고 그녀는 눈을 들어 여러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매우 도전적인 눈초리였다. 누구든지 담이 있으면 오악검파를 상대로 덤벼봐라 하는 눈빛이었다.
유정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일사태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불초는 금분세수의 일을 내일 오시로 연기하지요. 여러 친구들은 가지 마시고 이 형산에서 하루 더 묵어주시기 바라겠읍니다. 그리고 불초는 숭산파 현질에게 자세한 사정을 듣도록 하겠읍니다.]

바로 이때 갑자기 안채에서 한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이봐요. 이게 무슨 짓이예요. 내가 그 누구와 함께 놀던 당신이 상곤할 게 뭐냔 말이예요.]

군웅들은 어리둥절해졌다. 음성으로 미루어보아 바로 하루전날 여창해와 크게 언쟁을 벌였던 곡비연이었다.
그러자 다시 한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너는 고분고분 앉아 있는게 좋아. 함부로 말하지 말고움직이지도 마라. 이후에 너를 놓아줄 것이다.]

곡비연은 말했다.

[그거! 정말 이상하네요. 이곳이 당신의 집인가요? 나는 유씨 언니와 후원으로 가서 나비를 잡으려고 하는 데 어째서 당신이 막느냔 말이예요!]

그 사람은 말했다.

[좋아, 너는 혼자서 가도록 해. 유 소저는 이곳에서 좀 더 기다려야 한다.]

곡비연은 말했다.

[유 언니는 당신을 보기만 하면 싫증이 난다고 했어요. 그러니 당신은 빨리 멀리 비켜요. 유 언니가 당신을 아는 것도 아닌데 당신은 누굴 믿고 이곳에서귀찮게 구는거냔 말이예요.]

그러자 다른 여인의 말이 들렸다.

[누이 상관할 것 없어. 가자.]

그 남자는 말했다.

[유 소저, 아무쪼록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주시기 바라오.]
유정풍은 들을수록 화가 났다.

(어느 대담한 미친 녀석이 우리집에 와서 소란을 피운담. 감히 나의 청(菁)아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다니!)

유씨 문하의 두 제자인 미위의가 그 소리를 듣고 안채로 달려갔다. 곡비연과 그의 사매가 손을 잡은 채 뜨락에 서 있고 한 황삼의 젊은이가 두 손을 벌린 채 그녀들 두 사람을 막고 있었다. 미위의는 그 사람의 복장을 보고 숭산파의 제자인 것을 보고 화가 났다. 기침을 두 번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이분은 숭산파의 사형이 아니오? 어찌하여 대청으로 가서 앉지 않으시오?]

그 사람은 오만하게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소. 맹주의 명을 받아 유씨 집안의 가족들 가운데 한 사람도 도망치는 사람이 없도록 지키고 있는 중이오.]
이 몇마디 말은 우렁찬 것은 아니었으나 대청의 군웅들은 그와 같은 말을 듣고 모두 안색이 변했다. 유정풍은 대노해 사등달에게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사등달은 말했다.

[만 사제, 이리 나오게. 말을 조심해서 하도록 하게. 유 사숙께선 이미 손을 씻지 않기로 응낙하셨네.]

그러자 안채의 그 사내가 말했다.

[네, 그렇다면 잘 된 일이죠.]

그리고 그는 안채에서 걸어나와 유정풍 앞에 허리를 구부리고 말했다.

[숭산 문하제자인 만대평(萬大平)이 유 사숙께 인사를 드립니다.]

유정풍은 울화가 치미는 듯 몸마저 미미하게 떨며 낭랑히 외쳤다.

[숭산파에선 얼마나 많은 제자가 왔는지 모두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 보시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붕 위에서, 대문 밖에서, 대청 모퉁이에서, 후원에서, 전후좌우에서 수십 명이 일제히 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녜, 숭산파의 제자들이 유 사숙께 인사 드립니다.]

수십 명이 외치는 소리가 동시에 울려퍼지자 소리가 매우 우렁찼다. 거기다 너무 뜻밖이라 군우들은 흠칫 놀랐다. 그러고 보니 지붕 위에는 십여 명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황삼을 걸치고 있었다.
대청의뭇사람들 가운데 있던 숭산파 제자들은 갖가지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이 점으로 볼 때 일찌기 잠입하여 암암리에 유정풍을 감시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이 그러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정일사태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이런...... 이게 무슨 짓인가? 너무 사람을 업신여기는군?]
사등달은 말했다.

[정일 사백님께선 용서하십시오. 저희 사부님께선 명령을 내리시어 어떻게 하더라도 유 사숙에게 권고하여 금분세수를 하지 않도록 막르라고 했읍니다. 혹시나 유 사숙께서 영을 듣지 않을까봐 부득이 이 같은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때 안채에서 십여 명의 사람이 나왔다. 바로 유정풍의 부인과 두 아들 그리고 유씨문중의 칠 명 제자였다. 그리고 그들 뒤에는 한 사람의 숭산파 제자가 손에 비수를 들고 유 부인의 등을 겨누고 있었다.
유정풍은 낭랑히 말했다.

[여러 친구분들, 이 유모가 자기의 뜻만을 고집하자는 것이 아니오. 그런데 오늘 좌 사형이 이토록 위협을 하는데 그 위협에 굴복을 한다면 무슨 면목으로이 세상을 살아가겠소. 좌 사형은 이 유모에게 금분세수를 못 하도록 하고 있으나 허허허, 이 유모는 목이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뜻은 굽힐 수 없다고 생각하오.]
그리고 그는 한걸음 나가 금대야에 두 손을 담그려고 했다.
사등달은 부르짖었다.

[잠깐!]

그리고 영기를 활짝 펼치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순간 유정풍은 왼손을 질풍처럼 뻗어 두 개의 손가락으로 그의 눈을 찌르려고 했다. 사등달은 두 팔을 위로 들었다. 유정풍은 왼손을 움추리며 오른손의 두 손가락으로 다시 그의 두 눈을찌르려고 했다. 사등달은 막을 수가 없자 뒤로 물러섰다. 유정풍은 그가 물러서자 손을 다시 금대야에 담그려 했다. 그 순간 뒤에서 바람소리가 나며 두 사람이 함께 달려들었다. 유정풍은 머리를 돌리지 않은 채 왼다리를 들어 뒤로 걷어찼다. '쿵' 하는 소리와 함게 한 명의 숭산파 제자가 멀리 나가떨어졌다. 그런가 하면 오른손은 다른 한 명 숭산파 제자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제자를 들어 사등달에게 던졌다. 유정풍이 발로 차고 손을 뒤로 돌려 움켜쥐는 행위는 마치 등 뒤에 눈이라도 달린 듯 겨냥한 부위가 정확했고 동작 또한 빨랐다. 확실히 내가고수인지라 뛰어난 것이었다.
숭산파의 제자들은 어리둥절해졌다. 일시 다시 덤벼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유정풍의 등 뒤에서 숭산파 제자가 부르짖었다.

[유 사숙, 손을 머추지 않는다면 나는 그대의 아들을 죽이고 말겠소이다!]

유정풍은 고개를 돌려 아들을 바라보더니 냉랭히 말했다.

[천하영웅들이 오셔 계시니 네가 만약 나의 아들을 건드린다면 너희 수십 명 숭산파 제자들은 모조리 피떡이 되고 말 것이다.]
이 말은 결코 위협만은 아니었다. 숭산파의 제자들이 그의 어린 아들을 해치게 된다면 반드시 공분을 사게 될 것이고 군호들은 일제히 일어나 공격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면 숭산파 제자들은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유정풍은 그 말을 마친 이후 등을 돌려 두 손을 금대야에 담그려고 했다.
이번에는 그 누구도 저지하는 사람이 없는 듯이 보였다. 별안간 은빛 광채가 번쩍하면서 파공성을 내며 날아들었다. 유정풍은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그 암기는 금대야의 가장자리에 적중되었고 그 충격에 금대야는 옆으로 기울어졌으며 땅바닥에 떨어졌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대야는 엎어지고 담겼던 물이 땅바다에 질펀하게 쏟아지게 되었다.
동시에 누런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가운데 지붕 위에서 한 사람이 뛰어들었다. 그리고 오른발을 들어 금대야를 밟았다. 금대야는 밟히자마자 납짝하게 찌그러졌다. 그 사람은 사십여 세 가량에 비쩍 마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입가에 희끗희끗한 쥐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 사람은 두 손을 흔들며 맞잡고 말했다.

[유 사형 맹주의 영을 받들어 그대가 금분세수하는 것을 막은 것이외다.]

유정풍은 이 사람이 숭산파의 장문 좌냉선(左冷禪)의 네째 사제인 비빈(費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비빈은 대숭양수(大崇陽手)라는 무예로 무림에서 혁혁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상황을 미루어 보건대 오늘 유정풍을 상대하기 위해서 삼류의 제자들만이 온 것이 아닌 듯했다. 금대야는 이미 형태가 변했으니 그 기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유정풍은 지금 당장의 일은 온 힘을 다해 일전을 하느냐 아니면 잠시 굴욕을 참느냐는 것이었다. 삽시간에 그의 뇌리에는 번개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숭산파에서는 오악맹기를 쥐고 있기는 하나 이토록 사람을 다그치는 데도 이곳의 천여 명이나 되는 영웅호걸들 가운데 한 사람도 나서서 공평한 말을 하는 사람이 없단 말이냐!)

그는 즉시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공수의 예를 하며 말했다.

[비 사형이 오셨구료. 이곳에 와서 술이라도 드시지 않고 어재서 지붕 위에 숨어서 햇살이 내리쬐이는 따가움을 당하고 계셨소? 숭산파에서는 십중팔구 달리 고수를 보내오신 것 같은데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시기 바라오. 단지 유모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비 사형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하오. 그러나 만약 이곳의 영웅호걸을 상대하려면 숭산파에서는 아마도 좀 부족함을 느끼게 될거요.]
비빈은 빙그레 웃었다.

[유 사형은 왜 그런 말씀을 하시오. 설사 유 사형 한 사람을 상대한다고 하더라도 불초는 조금 전 유 사형이 보여 준 소낙안식(小落雁式) 한 수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외다. 숭산파는 결코 형산파의 비위를 거슬리려는 것이 아니고 이곳의 영웅에게 죄를 짓자는 것도 아니외다. 심지어는 유 사형에 대해서도 죄를 지을 생각은 없소이다. 다만 무림의 수천수백만이나 되는 동도들의 목숨을 위해 유 사형께서 금분세수를 하시면 안 된다고 당부하러 왔소이다.]

그말이 떨어지자 대청의 군웅들은 모두 아연해져 생각했다.

(유정풍이 금분세수를 하고 안 하고가 어째서 무림 수천수백만이나 되는 동도들의 생명과 상관이 있다는 것일까?)

아니나 다를까 유정풍은 그 말을 받아 말했다.

[비 사형은 너무나 소제를 추켜올리는 것이외다. 이 유모는 무공도 보잘 것 없으며 아들딸도 모두 어릴 뿐만 아니라 문하에 팔구 명도 안 되는 제자를 거둬들이고 있을 뿐이니 실로 보잘 것 없다고 할 수 있소이다. 그런데 이 유모의 일거일동이 어찌하여 무림의 수천수백만 동도들이 목숨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오?]
정일사태는 불쑥 입을 열었다.

[그렇소. 유 아우님이 금분세수를 하고 쥐꼬리만한 벼슬을 한다는데는 솔직히 말해 본인 역시 못마땅하게 여기는 바이오. 그러나 사람마다 뜻이 다른 법, 그가 벼슬길에 올라 재물을 모은다 해도 백성을 해치지 않고 무림의 동도들이 저버리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억지로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소? 내가 볼 때 유 아우님은 많은 무림동도를 해칠 만큼 악랄한 사람은 아니예요.]
비빈은 말했다.

[정일사태, 사태는 불문의 인물이니만큼 다른 사람의 교활한 기량을 알지 못할 것이외다. 이 커다란 음모가 만약 성공한다면 비단 무림의 수많은 동도들을 해치게 될 뿐 아니라 선량한 백성들도 모두 크게 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형산파 유 세째 나으리는 강호에서 명성이 쟁쟁한 영웅호걸인데 어찌 스스로 타락의 길로 들어서서 그 더러운 상관의 지시를 받으려고 하겠읍니까? 세째 나으리로 말하면 집안 재산이 만관이나 됩니다. 어찌 벼슬길에 올라 재물을 모을 욕심을 부릴 수 있겠읍니까? 이 가운데는 물론 말할 수 없는 다른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군웅들은 생각했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군. 나도 이상하게 생각했었어. 유정풍 같은 사람이 그 조그만 벼슬을 한다면 실로 우스운 일니지.)
유정풍은 노하기는 커녕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 사형 억울하게 누명을 씌우지 마시오. 더 이상 숨어 있지 말고 숭산파의 다른 사형제들께서도 모두 모습을 나타내도록 하시오.]

그러자 지붕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좋소.]

노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가운데 두 사람이 어느덧 대청 문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이 경신법은 조금 전 비빈이 뛰어내릴 때의 그 수법이었다. 동쪽에 선 사람은 뚱뚱하고 체구가 우람한 편이었다. 정일사태 등은 그를 알아볼 수 있었는데 그는 바로 숭산파 장문인의 둘째 사제인 탁탑수(托塔手) 정면(丁勉)이었다. 서쪽의 그 사람은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사람이었다. 바로 숭산파의 세 번째 선학수(仙鶴手) 육백(陸柏)이었다. 이들 두 사람은 동시에 손을 맞잡고 흔들며 말했다.

[유 세째 나으리, 안녕하시오? 여러 영웅들께서도 안녕하십니까?]

정면과 육백 두 사람은 무림에서 대단한 명성을 누리는 고수들 이었다. 군웅들이 일제히 일어나 반례를 했다. 숭산파의 고수들이 잇달아 도달한 것을 보고 뭇사람들은 속으로 오늘 일이 좋게 해결되기는 어렵고 유정풍이 크게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일사태는 분연히 말했다.

[유 아우님, 걱정할 것 없소. 천하의 일이라는 것은 이치를 따져야 하는 것이 아니겠소? 상대방이 많다고 겁을 낼 필요는 없소.
설마 우리 화산파와 항산파의 친구들이 모두 눈을 멀거니 뜨고 이 일을 방관하겠소?]

유정풍은 웃었다.

[정일사태, 이번 일은 말하자면 부끄럽기 짝이 없소. 본래는 형산파 안의 사사로운 일입니다만 여러 친구들에게 그만 근심을 끼쳐 드리게 되었군요. 유모는 지금에 와서야 똑똑히 알게 되었읍니다. 틀림없이 우리 막사형께서 숭산파 좌 맹주에게 내가 여러모로 잘못했다고 고자질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숭산파의 사형들께서 크게 따지러 온 모양입니다. 좋아요. 유모는 막사형에 대해 예의를 다하지 못했으니 이 몸이 나서서 막사형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드리도록 하죠.]

비빈은 눈을 들어 대청을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한번 훑어보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는데 형형한 안광이 가늘게 뜨여진 눈을 통해 예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내공이 몹시 심후하다는 증거였다. 이때 비빈이 유정풍의 말을 받아 입을 열었다.

[이 일이 어재서 막대선생과 관계가 있단 말이오. 막대선샌께선 이리 나오십시오. 모두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도록 합시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대청 안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잠시 시간이 흘렀으나 막대선생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유정풍은 쓰디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사형제의 불화를 무림 친구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니 제가 솔직이 말씀드리죠. 소제는 윗어른들의 덕택으로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누리는 편이죠. 우리 막사형은 집안이 가난하답니다.
친구들 사이에도 재물을 주고받을 수가 있는데 사형제지간에 더 말할 필요가 있겠소이까. 그러나 막사형은 웬 까닭인지 감정을 품으시고 소제의 문으로 한 발자국도 들여놓은 적이 없소이다. 우리 사형제는 수년간 내왕을 하지 않았고 얼굴을 대하지도 않았으니 막사형이 오늘 이곳에 왕림하지 않은 것도 당연합니다. 불초가 마음속으로 승복할 수 없는 것은, 좌 맹주가 우리 막사형의 말만 듣고 이토록 많은 사형들을 보내 소제를 상대할 뿐만 아니라 이 유모의 처와 자녀들까지도 인질로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이오. 이것이야 말로 조그만 일을 크게 벌리는게 아니겠소?]

비빈은 사등달에게 말했다.

[영기를 들어 올려라.]

사등달은 말했다.

[녜.]

그리고 영기를 높이 쳐들고 비빈의 곁으로 가서 섰다. 비빈은 싸늘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유 사형, 오늘의 이 일은 형산파의 장문인 막대선생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니 그대는 그를 끌어대지 마시오. 좌 맹주께서는 우리에게 진상을 분명히 알아보라는 분부를 내렸소. 유 사형이 마교 교주(魔敎敎主) 동방불패(東方不敗)와 몰래 결탁하고 있지 않은지 분명히 알아내라고 하셨소. 그리고 어떤 음모를 꾸며 우리 오악 검파와 무림의 정파 동도들을 상대하려고 하는지도 밝혀내라고 하셨소이다.]

이 말이 떨어지자 군웅들의 얼굴빛은 즉시 핼쓱하게 변했다. 어떤 사람들은 놀라 '어' 하는 소리를 질렀다. 마교와 백도의 협사들은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다. 쌍방이 원한을 맺은 지 이미 백년이 흘렀으며 서로 끊임없는 싸움을 벌여왔고 상호간에 무수한 사상자를 냈다. 이 대청의 천여 명이나 되는 군웅들 중에서 적어도 반 이상은 마교에게 해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부형(父兄)이 피살되거나 사부(師父)를 잃은 사람이 태반이었다. 따라서 마교라는 말만 들어도 이를 갈고 통한히 여겼다. 오악검파가 결맹을 맺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마교를 상대하기 위함이었다. 마교는 사람도 많고 세력도 강할 뿐 아니라 무공이 고강했다.
명문정파에선 각기 절예를 지니고 있었으나 종종 마교를 이겨내지 못할 때가 많았다. 마교 교주 동방불패로 말하면 고금(古今)을 통틀어 제일가는 고수라고 일컬어질 정도였다. 그의 이름이 불패(不敗)라고 하듯 무예를 익힌 이래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군웅들은 비빈으로부터 유정풍과 마교가 결탁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자 본래 유정풍에 대해 갖고 있던 동정심이 깨끗이 사라지고 말았다.
유정풍은 말했다.

[불초는 아직 한번도 마교의 동방불패는 본 적이 없소이다. 어찌하여 결탁하니 음모니 하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오?]
비빈은 고개를 돌리고 세째 사형 육백을 쳐다보았다. 육백은 조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유 사형, 그대의 그와 같은 말은 솔직하지 못한 것 같구료. 마교 가운데는 한 명의 장로가 있는데 이름은 곡양(曲洋)이라고 하지요. 유 사형은 그 사람을 모르시오?]

유정풍은 침착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곡양이란 이름이 거론되자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정면은 대청으로 들어선 이후 한번도 입을 열지 않았는데 갑자기 날카로운 어조로 다그쳤다.

[당신은 곡양을 모르오?]

그 음성은 우렁차기 이를데 없었다. 그 한마디에 모든 사람들은 귀가 윙윙거리는 것을 느꼈다.
유정풍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주시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후 유정풍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았소. 곡양 형님으로 말하면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나의 유일한 지기이고 가장 절친한 친구요.]

대청 안은 웅웅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군웅들은 술렁거리며 다투어 의견을 주고 받았다. 유정풍의 말은 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비빈은 얼굴에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그대 스스로 인정하니 참 잘 되었소. 사내대장부는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소. 유정풍, 좌 맹주는 두 가지의 길을 제시하고 그대 스스로 선택하라고 말했소.]

유정풍은 비빈의 말을 못 들은 척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술주전자를 들더니 잔에 따라 한자의 술을 천천히 마셨다. 군웅들은 그의 옷소매가 직선으로 아래로 드리워져 있을 뿐 조금도 파동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보고 그의 수양이 대단히 깊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요긴한 때에도 조금도 표정과 행동에 흐트러짐이 없는 것은 무공이 상승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담이 크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 같은 행동을 보고 군웅들은 탄복했다.
비빈은 낭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좌 맹주께선 유정풍이 형산파에서 다시 얻을 수 없는 인재라고 하시며 일시 도적을 잘못 사귀어 나쁜 길로 접어들게 되었으나 만약 깊이 뉘우친다면 우리는 절친한 친구 사이이니 새로운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소이다. 그대가 이 길을 선택하겠다면 한달 안으로 마교장로 곡양을 죽여서 그 머리를 들고 숭산으로 오라고 하셨읍니다. 그러면 과거의 일은 따지지 않겠으며 다시금 옛날같이 사이좋은 형제가 될 것이라고 하셨소.]

군웅들은 생각했다.

(정사(正邪)는 양립할 수 없는 법이다. 마교의 방문좌도(旁門左道)의 무리들은 협의도의 인물들을 만나기만 하면 사생결단을 내려고 한다. 따라서 좌 맹주가 유정풍에게 곡양을 죽여 뜻을 분명히 하라고 한 것은 지나친 요구가 아니다.)

유정풍의 얼굴에 한 가닥 처량한 빛을 띄우며 말했다.

[곡형과 나는 한번 보자마자 의기가 투합하여 친구가 되었소.
그와 나는 십여 차례 잠자리를 같이 하면서 밤중에 이야기를 한적이 있고, 간혹 우연히 문호나 종파에 대한 의견이 나오게 되면 그는 언제나 깊이 탄식하면서 우리들이 싸우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고 했소. 나와 곡형이 사귄 것은 다만 음률을 연구하자는 것에 불과하오. 그는 칠현금(七絃琴)의 명수이고 나는 퉁소를 불기 좋아하오. 우리 두 사람이 만나게 된다면 대부분의 시간을 칠현금과 퉁소를 함께 부는데 소일할 뿐 무공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얘기하지 않소이다.]

거기까지 말한 그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은 믿지 않을런지 모르지만 당금 세상에서 칠현금을 튕기는데 있어서 그 누구도 곡형을 따라갈 수 없소. 그리고 퉁소를 부는데 있어 불초 역시 두 번째 갈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소. 곡형이 비록 마교에 몸을 담고 있긴 하지만 나는 그가 칠현금을 튕기는 가락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성품이 고결하다는 것을 깊이 알게 되었소. 그야말로 가을 하늘처럼 넓고 깨끗한 마음을 지닌 분이오. 유정풍은 그에 대해서 탄복할 뿐 아니라 앙모하고 있소. 이 유모는 일개 필부에 지나지 않으나 그 같은 군자를 해칠 생각은 조금도 없소이다.]

군웅들은 들을수록 어리둥절해졌다. 그와 곡양이 음악으로 사귀게 되었다는 사실은 천만 뜻밖이었다. 그 말을 믿지 않으려고 했으나 유정풍의 말이 너무나 간곡하여 조금도 거짓말을 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강호에는 기이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예로부터 성(聲)과 색(色)은 사람을 홀리게 하지 않았던가? 유정풍이 음악에 탐닉하게 된 것도 크게 신기한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형산파의 내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형산파의 역대 고수들이 몬 음악을 좋아했다는 사실과 특히 당금 장문인 막대선생의 호가 소상야우(瀟湘夜雨)이며 언제나 호금(胡琴)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금중장검, 검발금음(琴中藏劍, 劍發琴音)' 이라는 여덟 자의 외호(外號)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유정풍이 퉁소를 불다가 곡양과 서로 사귀게 된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비빈은 말했다.

[그대와 곡 마두(曲魔頭)가 음률로 사귀었다는 사정을 좌 맹주(左盟主)는 이미 알고 있소. 좌 맹주께서는 마교가 커다란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고 말씀하시었소. 마교에게는 오악검파가 근래 들어 무척 세력을 떨치고 있기 때문에 온갖 방법을 다해서 오악검파끼리의 불화를 심고 이간질을 시키는 등 온갖 음모를 꾸미고 있소.
혹은 재물로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기도 하고 혹은 미색으로 정신을 잃게 만들기도 한다오. 유 사형은 평소 근엄하기때문에 마교에게는 그대가 좋아하는 바를 간파한 후 곡양을 보내 음률로써 친구를 맺도록 계책을 꾸몄던 것이오. 유 사형, 그대는 반드시 머리를 맑게 하고 생각해보시오. 과거 마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해쳤소? 그런데도 그대는 그와 같은 사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단 말입니까?]

정일사태는 말했다.

[그렇지. 비 사제의는 말이 맞아. 마교가 무서운 점은 무공의 음독(陰毒)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역시 여러가지 간계를 쓴다는 데에 있지. 유 사제 그대는 정인군자가 아니오? 한시 바삐 곡양이라는 마두를 일검에 죽이도록 하시오. 그렇다면 모든 일은 깨끗이 처리될 것이오. 오악검파는 한 집안과 다름이 없는 사이 마교의 이간질을 받아 분열되는 불상사를 막아내야 할 것이외다.]
천문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 사제. 잘못이 있으면 서슴없이 고치는 것이 군자의 할 도리라고 했소. 그대가 곡 마두를 죽인다면 협의도를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형산파의 유정풍은 과연 선악을 분명히 가릴 줄 아는 호걸' 이라고 칭찬을 할 것이오. 그렇게 되면 그대의 많은 친구들이 얼마나 기뻐하겠소?]

유정풍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들어 악불군을 한동안 주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악 사형은 시비를 구분할 줄 아는 군자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의 많은 분들이 저 보고 친구를 팔아먹으라고 핍박하고 있는데 악 사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악불군은 말했다.

[아우님, 진정한 친구라면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해도 의리를 지켜야 할 것이오. 그러나 마교의 그 곡가는 웃음 속에 칼을 감추고 있고 입술은 달콤하나 속에는 검을 품고 있는 자로서 온갖 방법을다해 그대의 환심을 사려고 했소. 그자야말로 가장 음독하고 악랄한 우리의 적이라고 할 수 있소. 그는 유 아우님을 패가망신기키고 오악검파를 분열시키려는 악독하기 그지없는 작자란 말이오. 그를 친구로 생각한다면 친구라는 두 글자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겠소? 옛사람들은 대의를 위해서 혈육을 버린다고 했소. 혈육을 죽일 수도 있거늘 어찌 그와 같은 마두를 죽이지 못한단 말이오?]

군웅들은 그가 조금도 거침없이 내뱉는 말을 듣고 다투어 말했다.

[악선생의 그와 같은 말씀은 몹시 명백하게 도리를 밝힌 것이군요! 친구를 위해서는 의리를 지켜야 되겠지만 적이라면 반드시 제거해야 되는 법이오.]

유정풍은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불초와 곡형은 처음 사귈 때부터 오늘과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짐작했었소. 최근의 형세를 살펴본 결과 우리 오악검파와 마교 사이에는 커다란 싸움이 벌어질 것이라고 짐작이 되는군요.
한쪽은 동맹을 맺은 사형제들이고 한편은 절친한 친구이니 불초로서는 어느 한쪽을 도와줄 수 없는 형편이오. 따라서 어쩔 수없이 오늘 금분세수의 예식을 거행함으로써 천하에 이 유모가 무림에서 물러서며 다시는 강호의 은원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을 알리려 했던 것이외다. 그리하여 나는 돈을 주고 쥐꼬리만한 벼슬을 얻어내었고 이를 가지고 다른 사람이 이목을 가지려고 했던 것이오.
그런데 뜻밖에도 신통력이 대단하신 좌 맹주께서 불초의 사정을 환히 알고 계셨구료.]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정풍이 은퇴식을 하는 이유를 알았다는 시늉을 했다. 비빈과 정일, 육백(陸柏)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생각했다.

(만약 좌 맹주께서 유정풍의 간계를 미리 알아차려 방비하지 않았다면 큰일날 뻔했다!)

유정풍은 계속해서 말했다.

[마교와 우리 협의도는 백년이 넘도록 싸워왔으며 서로 죽고 죽이는 원수지간으로 변하고 말았소이다. 따라서 시비를 가리기란 여간 복잡미묘한 게 아니외다. 나는 그저 피비릿내나는 강호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혀 퉁소나 불고 자식들에게 글공부나 가르치면서 여생을 보내고자 했던 것이외다. 이것이 오악검파의 맹약(盟約)을 어긴 행위일까요?]

비빈은 멸시의 웃음을 입가에 담고 말했다.

[세상이 어려울 때 조용히 은거한다는 것은 마교가 세상을 유린하도록 방관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소. 그 곡씨성을 가진 마두는 당신과 친구인데 당신은 강호의 일에서 손을 떼고 곡가는 여전히 마교를 위해 활동하게 된다면 그것은 당신이 마교를 돕는 결과가 되는 것이오.]

유정풍은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곡형은 이미 내 앞에서 맹세를 했소. 마교와 백도가 어떻게 싸우든지 절대로 상관하지 않겠다는 맹세였소. 남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한 절대로 사람을......]

비빈은 냉랭히 말했다.

[흥! 선제공격을 하지 않겠단 말이지?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공격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란 말인가?]

유정풍은 대답했다.

[그는 힘을 다하여 싸움을 막겠다고 했소. 그는 오늘 아침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말했소. 화산의 영호충이 누구에겐가 상처를 입어 새영이 경각에 달렸는데 그가 나서서 구해냈다고 했소.]
그 말이 떨어지자 군웅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악영산이 참지 못하겠다는듯 물었다.

[대사형은 어디에 있나요? 정말 곡씨 선배가 그의 생명을 구해주었나요?]
[곡형의 말이니 거짓은 아니겠지. 이후 영호 현질을 만난다면 네가 친히 물어보려므나.]

비빈은 냉소를 날렸다.

[흥! 마교의 녀석들은 사람을 이간질시키고 또 자기편으로 끌어모으기 위해서는 별별 수단을 다 쓰지. 그러니 온갖 방법을 다해 영호충을 포섭하려는 모양이지. 영호충은 어쩌면 목숨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마교의 부탁을 들어줄지도 모르지. 그렇게 된다면 우리 오악검파는 또 한 명의 반도(叛徒)가 생기게 마련이야.]

유정풍의 눈썹이 꿈틀 뻗쳐 올라갔다.
그는 노한 어조로 말했다.

[비 사형, 그대는 또 한 명의 반도라고 했는데 또 라는 그 한 글자는 무슨 뜻이오?]

비빈은 냉소했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으로 짐작하고 있을 터인데 밝혀 말할 필요가 어디 있겠소?]

유정풍은 말했다.

[흥. 그대는 이 유모가 본문의 반도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 유모가 친구를 사귀는 것은 사사로운 일이니 다른 사람이 관계할 것 없소. 유정풍은 감히 조사나 윗어른들을 기만한 적이 없으며 형산파 본문을 배반한 적도 없소. 그 반도라는 두 글자는 그대로 돌려 드리겠소.]

그는 예의가 깎듯한 편이었다. 군웅들은 그의 처지가 매우 불리한데도 여전히 비빈과 칼날 같은 언사로 맞서서 논쟁할 뿐만 아니라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의 담량이 뛰어난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빈은 말했다.

[그렇다면 유 사형은 첫번째의 길을 가지 않을 것이며 결코 그 대마두 곡양을 죽이지 못하겠다는 것이오?]

유정풍은 말했다.

[좌 맹주께서 명령을 내리셨다면 비 사형은 이대로 손을 써서 우리 유씨 집안의 전가족을 죽이도록 하시구료.]

비빈은 말했다.

[그대는 믿는데가 있는 체 행동하지 마시오. 천하의 영웅호걸들이 그대의 집에 손님으로 있다고 해서 우리 오악검파가 두려워서 문호를 정리하지 못할 줄 아시오?]

그는 손을 뻗어 사등달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 오너라.]

사등달은 대답했다.

[녜.]

그리고 그는 세 걸음 다가섰다. 비빈은 그에게서 오색영기를 받아 높이 쳐들며 말했다.

[유정풍을 들으시오? 좌 맹주께선 영을 내리셨소. 그대가 만약 한달 안으로 곡양을 죽일 것을 응낙하지 않는다면 오악검파는 부득이 후한을 없애기 위해 뿌리째 풀을 잘라 버릴 것이며 결코 용서하지 않겠소. 그대는 다시 생각해 보시오.]

유정풍은 참담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이 유모는 친구를 사귐에 있어 온 정열과 정성을 다했소이다.
그런데 어떻게 친구를 죽여 구차하게 생명을 보존한단 말이오? 그대 숭산파에선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한 모양이구료. 손을 쓰려면 즉시 손을 쓰시오. 언제까지 기다릴 참이오?]

비빈은 영기를 활짝 펼치며 낭랑히 외쳤다.

[태산파의 천문 사형, 화산파의 악 사형, 항산파의 정일사태, 형산파의 사형과 사제들은 좌 맹주의 분부를 들으시오. 자고로 정사는 양립할 수 없으며 마교와 우리 오악검파의 원한은 바다같이 깊소. 유정풍은 도적과 사귀고 원수를 돕고자 하니 우리 오악의 형제들은 함께 손을 써서 주살해야 할 것이오. 자아, 명령을 따를 사람들은 왼쪽에 서시오!]

천문진인은 몸을 일으키더니 성큼성큼 걸어 왼쪽에 가서 섰다.
그는 유정풍에게 일변조차 던지지 않았다. 천문진인의 사부가 과거 마교의 장로에 의해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그는 마교에 대해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갖고 있었다. 그가 왼쪽으로 가자 문하 제자들도 뒤를 따랐다.
악불군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유 아우 그대가 고개만 끄덕인다면 악불군이 책임지고 그대를 위해 곡양의 일을 처리하겠소. 어떠시오? 그대는 사내대장부로서 친구에게 잘못을 저지를 수 없다고 했는데 천하에 곡양 한 사람만 그대의 친구이고 오악검파와 이곳에 많이 모인 호걸들은 그대의 친구가 아니란 말이오? 이곳의 천여 명이나 되는 무림의 동도들이 그대가 금분세수를 한다는 말을 듣고 먼길을 멀다 하지 않고 달려왔으며가슴 가득히 성의를 다해 그대에게 축하를 했으니 진정한 우정을 보인 것이 아니겠소. 그대는 집안의 나이 많은 노인과 어린애와, 오악검파의 사형제들의 의리, 이곳의 수천 명이나 되는 동도들의 우정을 함께 합친다 해도 곡양 한 사람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시오?]

유정풍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악 사형 그대는 선배이니 대장부가 해서는 안 되는 행위가 무엇인지 알고 계실 것이오. 그대의 충고에 이 유모는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그러나 곡양을 살해하라고 강요한다면 절대 들을 수 없소. 그것은 나보고 악 사형을 해치거나 이곳에 계신 한 분을 해치라고 강요했을 때 내가 거절하는 것과 같은 것이오. 이 유모는 전가족이 죽음을 당한다 해도 결코 허락할 수 없는 노릇이외다. 곡형은 나의 절친한 친구입니다.]

그와 같은 말은 지극히 성의에 차 있어서 군웅들은 얼굴빛이 변했다. 무림에선 의리를 가장 중시했다. 유정풍이 곡양과의 교분을 중요시하는데 대해 강호인들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한편 찬탄을 금치 못했다.
악불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 아우님, 그 말은 틀렸소. 유 아우님이 친구와의 의리를 지키는 것은 탄복할 일이지만 정사를 가리지 않고 시비를 가리지 않는 면이 있구료. 마교는 많은 악한 일을 저질렀으며 강호의 정인군자들을, 무고한 백성들을 잔인하게 해쳤소. 유 아우님은 일시적으로 칠현금과 퉁소로써 의기투합한다고 하여 전가족의 목숨을 그 자에게 맡긴다는 것은 의리라는 두 글자를 오해한 것이오.]
유정풍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악 사형, 그대는 음율을 좋아하지 않으니 소제의 뜻을 모를 것이오. 말이나 글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칠현금이나 퉁소의 소리는 마음의 소리라서 결코 가장할 수가 없는 것이외다. 소제와 곡형이 서로 사귀게 된 후 칠현금과 퉁소 소리로 서로 화답하는 가운데 마음과 뜻이 통하게 되었소. 소제는 기꺼이 전가족의 목숨을 걸고 거부하겠소. 곡형은 마교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지만 손톱만큼도 사악한 구석이 없는 사람이외다.]

악불군은 길게 한숨을 쉬고 천문진인 옆으로 갔다. 노더약, 악영산, 육후아 등도 악불군과 같이 행동했다.
정일사태는 유정풍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후 내가 그대를 유 아우님이라 불러야겠소? 아니면 유정풍이라 불러야겠소?]

유정풍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유정풍은 이미 죽고 없을 텐데 부를 일이 있겠소?]

정일사태는 합장하고 말했다.

[아미타불!]

그리고 악불군 곁으로 가더니 말했다.

[마에 깊이 빠졌으니 정말, 죄(罪)가 크도다! 죄가 크도다!]
그녀의 제자들도 그녀를 따라갔다. 비빈은 말했다.

[이것은 유정풍 한 사람의 일로 다른 사람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오. 형산파의 제자들 가운데 반역도를 따르기 싫은 사람은 모두 왼쪽으로 가 서시오.]

대청 안은 잠시 조용했다. 한 명의 젊은 사내가 입을 열었다.

[유 사백부님 제자들은 실례하겠읍니다.]

곧이어 삼십 명이나 되는 형산파의 제자들이 항산파 여승들의 옆으로 가 섰다. 이 사람들은 모두 유정풍의 사질들이었다.
비빈은 다시 말했다.

[유씨문중의 직계제자들도 왼쪽으로 가 서시오.]

상대년이 낭랑히 말했다.

[우리는 사문의 깊은 은혜를 입은 몸으로서 의리로 보더라도 그 은혜를 저버릴 수 없읍니다. 유씨문중의 제자들은 은사님과 생사를 같이 하겠소이다.]

유정풍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좋다, 좋아. 대년, 너는 그 한마디 말로써 이미 사부에게 할바를 다했다. 너희들도 저쪽으로 가거라. 이 사부가 친구를 사귄것이니 너희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미위의는 장검을 뽑아들고 말했다.

[어느 누구든 우리 은사를 해치고자 한다면 나를 먼저 죽이도록 하시오.]

그리고 그는 유정풍의 앞을 막아섰다. 정면이 왼손을 쳐들었다.
쉭 하는 가벼운 음향이 일면서 가느다란 은빛 광채가 번개같이 쏟아졌다. 유정풍이 깜짝 놀라 미위의의 오른쪽 어깨를 밀었다. 내력이 이르는 곳에 미위의는 왼쪽으로 밀려났다. 그러자 그 은빛 광채는 유정풍의 가슴을 향해 날았다. 상대년은 사부님을 보호하겠다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즉시 몸을 날렸 유정풍의 앞을 막아 섰다. 순간 그는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은침은 그의 심장에 적중되었고 그는 즉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유정풍은 왼손으로 그의 시체를 얼싸안고 손을 그의 코 앞으로 가져갔으나 이미 숨은 멈추어져 있었다. 유정풍은 고개를 돌려 정면에게 말했다.

[정노이(丁老二) 그대 숭산파에서 먼저 나의 제자를 죽였다.]
정면은 싸늘히 말했다.

[그렇소. 우리가 먼저 손을 썼소. 어떻게 할 참이오?]
유정풍은 상대년의 시체를 안더니 힘주어 정면에게 던질 자세를 취했다. 정면은 그의 힘을 주려는 자세를 바라보고 형산파의 내공이 매우 독특한 점을 상기했다. 거기다 유정풍은 형산파의 일류고수가 아닌가? 한번 던진다면 그의 기세는 대단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즉시 암암리에 내력을 끌어올리고 시체를 받아들었다가 재차 그에게 던질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유정풍이 시체를 앞으로 내던질 자세를 취하더니 별안간 몸을 비스듬히 날렸다. 그리고 두 손을 조금 구부려서 상대년의 시체를 비빈의 가슴 쪽으로 밀었다.
그 같은 행동은 너무 빨라 비빈은 뜻밖의 일을 당한 셈이었다. 비빈은 두 손을 세우고 힘을 주어 시체를 막으려고 했다. 바로 이때 그는 양쪽의 허리가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유정풍에게 혈도를 집힌 것이다.
유정풍은 일초가 성공하게 되자 왼손으로 비빈의 손에 들려 있는 영기를 낚아챘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검을 뽑아들고 비스듬히 그의 목에 갖다대었다. 그리고 왼쪽 팔굽을 연달아 움직여 그의 등에 있는 세 곳의 혈도를 봉해 버렸다. 손을 쓰느라고 상대년의 시체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이 몇 가지의 행동은 변화가 지극히 빨라 비빈이 제압을 당했다고 생각했을 때는 오악영기가 이미 유정풍의 손으로 넘어간 후였다. 유정풍이 펼친 것은 바로 형산파의 절기로서 백변천환형산운무십삼식(百變千幻衡山雲霧十三式)라고 불려지는 무예였다. 뭇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으나 구경을 하기에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악불군은 과거에 사부에게 들은 말이 있었다. 이 백변천환형산운무십삼식은 형산파 윗대 제일의 고수가 창출한 것이라고 했다.
이 고수는 강호에 돌아다니면서 요술를 부려 생계를 유지했다. 강호에 떠돌아다니면 요술을 부리는 것은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에서 치는 일이며 허허실실 사람의 이목을 속이는 일이었다. 그런데 만년에 이르러 그의 무공이 점차 높아지게 되었고 요술의 기량도 날로 늘게 되자 내가(內家)의 재간을 요술에 섞어서 사용하게 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요술의 재간을 무공에 섞게 되었다.
그리하여 갖가지의 신기한 무공을 잇달아 창안하게 되었다. 이것이 후세에 이르게 되자 형산파의 삼대 절기 중에 하나가 되었다.
다만 이 재간은 변화가 무쌍하기는 했으나 적을 상대로 싸울때 별 쓸모가 없었다. 고수들끼리 싸우게 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은 은밀히 경계를 하고 전신의 문호를 조심스럽게 엄히 지키기 때문에 이처럼 사람의 이목을 속이는 요란스런 초식을 사용할 기회는 적었다. 그래서 형산파에서는 이 무공에 대해 별로 중시하지 않았다.
유정풍은 말이 적고 심기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사부에게 이 재간을 배우게 되었으나 깊이 감추고 한평생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다급해지자 그것을 펼쳐 숭산파의 명성이 쟁쟁한 대숭양수(大崇陽手) 비빈을 제압한 것이었다. 그는 오른손으로 오악검파의 맹기를 쳐들고 왼손의 장검을 비빈의 목에 겨눈 채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정 사형, 육 사형 이 유모는 당돌하게 오악영기를 빼앗았지만 나는 결코 두 분께 위협을 하자는게 아니오. 다만 두 분께 부탁을 드리고 싶은게 있읍니다.]

정면은 육백을 쳐다보고 생각했다.

(비 사제가 그의 암수에 걸렸으니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우선 들어보기로 하자.)

그래서 정면은 말했다.

[무슨 부탁을 하자는 것이오?]

유정풍은 말했다.

[두 분은 좌 맹주에게 이 유모의 전가족이 은거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해주시고 차후로는 무림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말을 전달해 주시오. 이 유모는 곡양과는 두번 다시 만나지 않겠소. 따라서 여러 사형들과 친구분들과도 ......영원히 다시 만나지 않기로 하겠소. 이 유모는 가족과 제자를 데리고 멀리 해외로 떠나 은거하겠으며 살아 생전 다시는 중원 땅에 발을 들여 놓지 않겠소.]

정면은 잠시 망설인 후 말했다.

[이 일은 나와 육 사제로서는 결정할 수 없소. 반드시 돌아가 좌 사형께 말씀을 올리고 그의 분부를 따라야 하오.]

유정풍은 말했다.

[이곳에 태산파 화산 두 장문인이 계시고 항산파의 정일사태도 계시니 정일사태는 그녀의 장문사제를 대신해서 결정할 수 있을 것이오. 그밖에도 영웅호걸들이 증인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뭇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유모는 친구분들에게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이 몸으로 하여금 친구의 의리를 돌보게 하고 가족과 제자들의 안전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정일사태는 외유내강한 성격이었다. 성질이 조급한 편이었지만 심성은 말할 수 없이 인자한 편이었다. 그녀는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는게 좋겠소이다. 그렇게 되면 모두들 감정을 상하지 않을 것이오. 정 사형, 육 사형 우리 유 현제의 청을 들어 주도록 합시다. 그는 다시 마교 사람과 사귀지 않고 또 중원서멀리 떠나게 되니 이는 세상에서 그와 같은 사람이 없어진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그러니 반드시 살생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오.]
천문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은 일이라 생각하오. 악 현제,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오?]

악불군은 말했다.

[유 아우님은 한번 뱉은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그가 그와 같이 말을 한 이상 그를 믿을 수가 잇는 것이죠. 자아, 우리는 싸움을 평화롭게 해결하도록 합시다. 유 아우님은 비 아우님을 놔 주시오. 그리고 모두 함께 화해의 술을한 잔 들도록 합시다. 그리고 내일 일찌기 그대는 가족과 제자를 데리고 형산성에서 떠나 가도록 하시구료.]

이때 육백이 입을 열었다.

[태산과 화산 두 파의 장문인께서 모두 그렇게 말씀 하시고 정일사태께서도 유정풍을 위해 좋은 말씀을 하시니 우리가 어찌 뭇사람들의 뜻을 저버릴 수 있겠소이까? 하지만 사제가 지금 그의 암수에 걸려 있는 몸인데 우리가 만약 그 요구에 응낙을 하게 된다면 강호의 사람들은 반드시 숭산파에서 유정풍의 협박을 받고 부득이 머리를 숙이고 굴복했다고할 것이오. 그와 같은 소문이 퍼지게 된다면 숭산파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소?]

정일사태는 말했다.

[유 아우님은 숭산파에 대해서 사정을 하고 있는 것이지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외다. 그러니 고개를 숙이고 굴복했다고 한다면 유정풍이 굴복한 것이지요. 더군다나 그대들은 이미 유씨문의 제자를 한 명 죽이지 않았소?]

이때 육백이 번쩍 몸을 날렸다. 유정풍의 큰 아들의 등에 칼날을 들이대고 말했다.
육백은 말했다.

[유정풍, 우리를 따라 숭산으로 가 좌 맹주를 보고 친히 사정을 하도록 하시오. 우리는 명을 바꾸어 결정을 할 수가 없소. 그대는 즉시 영기를 바치고 우리 비 사제를 놔 주시오.]

유정풍은 참담한 미소를 짓고 아들을 보며 말했다.

[얘야, 너는 죽음이 두려우냐?]

유 공자는 말했다.

[저는 아버님의 말씀을 따르겠읍니다. 전 두렵지 않읍니다.]
유정풍은 말했다.

[오, 착하다.]

육백이 호통을 쳤다.

[죽어라!]

단검은 유 공자의 등을 뚫고 들어가 그의 심장까지 파고 들었다. 유 공자는 앞으로 쓰러졌으며 그의 등에 난 상처에서 샘처럼 피가 솟아 올랐다.
유 부인은 큰 소리를 내지르며 아들의 시체를 덮었다. 육백은 다시 소리쳤다.

[죽어라!]

그는 다시 검을 찔렀다.
다시 일 검으로 유 부인의 등을 찌른 것이었다.
정일사태는 대노해서 일장을 휙 하고 육백을 후려치며 소리쳤다.

[이 짐승 같은 녀석!]

정면이 다가들며 일 장을 후려쳤다. 쌍 방의 손이 부딪치게 되자 정일사태는 세 걸음 물러서게 되었다. 가슴에서 비릿내가 나면서 한 모금의 선혈이 목구멍에서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호승심이 강했다. 피를 다시 꿀꺽 삼켰다. 정면은 빙그레 웃고 말했다.

[양보해 주셔서 고맙소.]

정일사태는 원래 장력에 장점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방금 이 일 장은 육백을 때리려고 한 것이었지만 그 일 장으로 무리를 쳐죽일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면이 손을 썼는데 정면의 일 장에는 혼신의 공력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하여 두손이 갑자기 마주치게 되었을 때 정면의 장력이 산과 바다처럼 밀어 닥치게 되었고 그만 상처를 입고 피까지 토하게 될 지경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정일사태는 크게 분노하고 말았다.
다시 두 번째로 손을 들고 제이 장을 격출하려고 했다. 그런데 공력을 돋우는 그 순간 단전이 칼로 에이는 듯 아파왔다. 그녀는 자기 상처가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지금 당장 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손을 흔들며 노해 부르짖었다.

[우리는 이 일에서 손을 떼겠다!]

그리고 성큼성큼 문 밖으로 걸어 나갔고 문하의 제자들도 뒤를 따라 나갔다.
육백이 소리쳤다.

[모두 죽여라!]

두 명의 숭산파 제자가 검을 휘둘러 두 명의 유씨문중 제자를 살해했다. 육백은 말했다.

[유씨 문중의 제자는 들어라! 만약 살고 싶다면 땅바닥에 꿇어 앉아 용서를 빌면서 유정풍의 잘못을 꾸짖는다면 살려 주겠다.]
유정풍의 딸 유청은 노해 부르짖었다.

[이흉악한 도적놈! 너희 숭산파는 마교보다도 만 배나 더 잔악하다!]

육백이 소리를 내질렀다.

[죽여라!]

만대평은 장검으 들고 일검을 내리쳤다. 그의 검은 유청의 오른쪽 어깨를 곧장 허리까지 이르도록 베었다. 나머지 숭산파의 제자들도 일검에 한 명씩 이미 혈도를 제압당해 있는 유씨 문중의 직계제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말았다.
대청에 모여 있는 군웅들은 한평생 창과 칼끝에서 살아온 사람들 이었지만 이와 같은 학살을 보고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떤 선배 영웅들은 말로 저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숭산파는 너무나 빨리 손을 썼다. 잠시 망설이는 사이에 대청에는 이미 시체가 이곳저곳에 널려지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은 다시 생각했다.

(자고로 정사는 세불양립이라고 했다. 숭산파에서 이와 같은 거동을 한 것은 결코 유정풍에 대하여 어떤 사사로운 사정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마교를 상대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손을 쓰는데 있어서 잔인하다고 해서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숭산파에서는 이미 상황을 장악하고 있고 항산파의 정일사태까지도 돌아갔으며 천문진인이나 악불군과 같은 고수들도 아무 소리하지 않고 있지 않느냐? 이 일은 형산파의 일인데 다른 사람이 만약 쓸데없이 간섭을 하겠다고 억지로 나섰다가는 살신지화를 면하기 어려운 것이니 자기 몸이나 잘 지키는 것이 낳겠다.)
이때 유씨 가문의 제자들과 자녀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하게 되고 다만 유정풍이 가장 사랑하는 열다섯 살 난 아들 유근(劉芹)만이 남게 되었다. 육백은 사등달에게 말했다.

[저녀석에게 용서를 빌겠느냐 물어봐라. 용서를 빌지 않는다면 그의 코를 자르고 다시 귀를 자른 후 눈깔을 뽑아 고통을 당하도록 해 주어라.]

사등달은 말했다.

[좋읍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리고 유근을 향해 물었다.

[너는 용서를 빌겠느냐?]

유근의 안색은 창백했다. 전신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유정풍은 말했다.

[애야, 너의 형과 누나는 얼마나 꿋꿋하더냐? 죽으면 죽는 것이지 두려워 할 것이 뭐 있겠느냐?]

유근은 약간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나.......아, 아버님 그들은......저의 코를 자르고......
저의 눈알을 뽑아낼려고......]

유정풍은 소리내어 웃었다.

[이제 이 지경에 이른 이상 그들이 우리를 놔 주리라고 생각하느냐?]

유근은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곡 백부님을 죽이겠다고 응낙을 하세요.]

유정풍은 대노하여 호통을 내질렀다.

[닥쳐라! 이 짐승 같은 녀석! 무슨 말을 하느냐?]

사등달은 장검을 들고 끝을 유근의 코앞에 갖다 대고서 흔들흔들해 보이며 말했다.

[오냐, 네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지 않는다면 이 일검으로 코를 잘라 내겠다. 하나......둘......]

그가 미처 셋 하기도 전에 유근은 밑바닥에 꿇어 엎드려서는 애걸을 했다.

[나를......나를 죽이지 말아요. 나는......]

육백은 웃으며 말했다.

[좋다. 너를 용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너는 반드시 천하영웅들 앞에서 유정풍의 잘못을 지적해야 한다.]

유근은 눈으로 자기 부친을 바라보았다. 두 눈에는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
유정풍은 줄곧 침착하기 이를데 없는 태도를 보였다. 처자와 아들딸이 그의 눈 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얼굴 근육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대는 분노를 걷잡을 수 없는 듯 큰 소리로 호통을 내질렀다.

[이 짐승 같은 녀석! 너는 너의 어미에게 미안하다고 생각지도 않느냐?]

유근은 어머니와 형 그리고 누나의 시체가 피바다 속에 잇는 것을 보고 또 사등달이 장검을 들고 끊임없이 얼굴 앞에 대고 흔들고 있는지라 극도의 두려움을 느꼈다.

[살려 줘요! 그리고 저희 아버님을 용서해 주세요!]

육백은 말했다.

[너희 아버지는 마교의 악인과 결탁을 했다. 너는 그가 잘 했다고 생각하느냐?]

유근은 나직이 말했다.

[잘......잘못했어요.]

육백은 말했다.

[그러한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되겠지?]

유근은 고개를 숙이며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육백은 말했다.

[꼬마가 대답하지 않는다면 일검으로 죽여 버려라.]

사등달은 대답했다.

[네.]

그러나 그 말이 정말 죽이라는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칼을 들고 내리치는 시늉만 했다.
유근은 재빨리 말했다.

[죽여야......마땅합니다.]

육백은 말했다.

[잘 대답했다. 이후부터 너는 형산파의 사람도 아니고 유정풍의 아들도 아니다. 내 너의 목숨을 살려 주겠다.]

유근은 땅바닥에 꿇어 앉아서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두 다리에 맥이 빠진듯 일어서지도 못했다.
군웅들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참을 수 없는 수치를 느꼈다.
그들은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바라보지도 않았다.
유정풍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육가야! 네가 이겼다.]

그리고 오른손을 휙휙둘러 오악영기를 육백에게 던졌다. 그리고 왼발을 들어 비빈을 걷어차 쓰러지게 하고는 낭랑히 말했다.

[이 유모는 더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지 않도록 스스로 자결을 하겠다.]

장검을 비켜들고 자기의 목으로 가져 갔다. 바로 그때였다. 처마 쪽에서 별안간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날아들었다. 질풍과 같은 속도였다. 대뜸 손을 뻗쳐 유정풍의 왼쪽 손목을 잡고 말했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은게 아니다! 같이 가세!]
그리고 오른손을 뒤로 향해 하나의 원을 그리더니 유정풍을 끌고 바깥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유정풍은 놀라 말했다.

[곡형, 그대 ......]

군웅들은 그가 곡형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이 흑의인이 바로 마교장로 곡양인 것을 알고는 하나같이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곡양은 부르짖었다.

[말은 하지 말게!]

그리고 발에다 힘을 주었다. 그런데 단 세 걸음을 옮겼을 때 정명과 육백 두 사람이 일제히 양손을 쳐들고 나누어 두 사람의 등을 후려쳤다. 곡양은 유정풍에게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빨리가세!]

그리고 손을 뻗쳐 유정풍의 등을 옆으로 미는 동시에 등에 과격을 돋우고 억지로 정면과 육백 두 고수가 공격한 일격을 받았다.
'펑'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곡양의 몸뚱아리가 바깥쪽으로 날아갔다. 한 모금의 선혈이 그의 입에서 뿜어졌다. 그러나 그는 뒤로 손을 돌려 잇달아 휘둘렀다. 한 줄기의 검은 바늘이 빗살처럼 뒤로 날아갔다.
정면은 부르짖었다.

[흑혈심침(黑血神針)이다! 빨리 피해라!]

그리고 급히 옆으로 피했다. 그들은 한 무더기의 흑침이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마교의 흑혈신침이라는 고함소리를 듣자, 모두 놀라서는 황망히 피하느라고 대뜸 어지러워지고 말았다. 십여 명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대청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고 신침이 많고 빨라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독침에 적중되고 말았던 것이다.
혼란 속에서 곡양과 유정풍은 어느덧 멀리 달아나고 말았다.

영호충이 입은 상처는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항산파의 영약과 깊은 내공(內功) 조예 때문에 폭포 옆에서 이틀을 지내고 나자 상처는 점차 아물어 갔다.
그 동안 그가 먹은 것은 의림이 따온 수박이었다. 그는 의림에게 물고기와 토끼를 잡으라고 했으나 의림은 아무리 말해도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영호충이 죽음에서 목숨을 건지게 된 것은 관세음보살이 보호했기 때문이므로 약 이 년 동안 소채만을 억어 관세음보살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그녀로 하여금 살상까지 하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말을 듣지 않았다. 영호충은 그녀가 매우 진부하다고 보고 비웃었으나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이날도 해는 저물고 두 사람은 나무등걸에 몸을 기대고 풀밭 사이로 오락가락하는 개똥벌레를 바라보고 있었다. 점점이 쏟아지는 별똥같이 개똥벌레는 참으로 보기에 아름다왔다.
영호충은 말했다.

[작년 여름 나는 수천 마리나 되는 개똥벌레를 잡아서는 십여 개의 은사로 만든 주머니 속에 넣어서 방 안에 걸어 놓았지. 정말 재미있더군!]

의림은 그의 노력으로는 결코 십여 개나 되는 주머니를 만들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기고 물었다.

[그대의 소사매가 그대에게 만들어 준 것이지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참으로 총명하구료. 대뜸 알아 맞추는군! 소사매가 나에게 개똥벌레를 넣으라고 만들어 준 걸 어떻게 알았지?]
의림은 미소를 띄웠다.

[그대의 성격이 그토록 급하고 인내심이 없는데 어찌 참을성 있게 수천 마리나 되는 개똥벌레를 잡으려고 했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다시 물었다.

[그후 어떻게 됐어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사매는 주머니를 그녀의 모기장 안에 걸어놓았어. 침대 위에 개똥벌레들이 번쩍번쩍 빛을 발하게 되니 그녀는 마치 하늘의 구름 위에서 잠을 자듯이 눈을 뜨기만 하면 전후 좌우에서 개똥별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무척 기뻐했어.]

의림은 말했다.

[그대의 소사매는 정말 놀기를 좋아하는군요. 그 여자의 사형 역시 비위를 잘 맞춰 주었어요. 만약 그녀가 그대엑 하늘에서 별으 따오라고 하였다면 그대는 별을 따려고 했을 거예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개똥벌레를 잡는 것도 원래는 별을 따는 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오. 그날 밤 나는 그녀와 함께 별을 세면서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 잇었소. 그런데 소사매는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말했소. '잠시 후면 잠을 자러 가야 해요. 저는 정말 밖에서 잠을 자고 싶어요. 방 안에 들어가게 되면 온 하늘에 총총히 박혀있는 별들이 눈을 깜빡이는 모습을보지 못할게 아니예요?' 그래서 나는 말했소. '개똥벌레를 잡아서 그대의 모기장 안에 놔둡시다. 그러면 되지 않겠소?']

의림은 나직이 말했다.

[알고보니 역시 그대의 발상이었군요?]

영호충은 빙그레 웃고 말했다.

[소사매는 말했소. '개똥벌레는 날아다니며 얼굴이나 몸 위에 앉을테니 그거야말로 귀찮은 노릇잉 아니겠어요? 그런데 됐어요.
명주실로 주머니를 만들어 개똥벌레를 그 안에 두면 되겠군요.' 그리하여 그녀는 주머니를 만들게 되었고 나는 개똥벌레를 잡게 되었소. 꼬박 하루 낮 하루밤을 바쁘게 설쳐댔는데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아침 개똥벌레를 모두 죽여 버렸지.]

의림은 몸을 흠칫해서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수천 마리나 되는 개똥벌레를 모두 죽게 만들었어요? 그대는 그대는...... 어쩌면 그럴 수 있어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우리가 잔인하기 이를데 없다는 것이오? 그대는 불문의 제자라서 그런지 마음이 유난히 곱구료. 개똥벌레는 날씨가 차거와지게 되었을 때 모조리 얼어죽고 만다오. 다만 며칠 더 일찍 죽는 것에 불과한데그 무슨 상관이 있겠소.]

의림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기실 세상의 모든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예요. 어떤 사람들은 일찍 죽게 되고 어떤 사람들은 늦게 죽게 되는 것이죠. 일찍 죽거나 늦게 죽거나 죽기는 마찬가지예요. '무상(無常)과 고(苦)' 라고 우리 부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은 생노병사하는 고통을 면할 수 없다고 하셨어요. 그러나 큰 깨달음을 얻고 윤회에서 해탈하는 것이 어디 쉬운가요?]

영호충은 말했다.

[어려우니까 그대 또한 그와 같은 규율이나 규칙을 언제나 머리에 넣어둘 필요가 없오. 죽이면 훔치는 것들에 너무 신경쓸 필요는 없다는 것이오. 보살께서 정말 모든 일을 관계하자면 그야말로 바빠서 몸을 그르치게 되었을 거요.]

의림은 고개를 돌리고 무슨 말로 응수해야 될지 몰랐다. 바로 이때 왼쪽 산 위로 하나의 유성이 날아가며 하늘에 한 줄기 기다란 꽃을 수놓았다. 의림은 말했다.

[의형 사질은 말했어요. 어느 누가 유성을 보게 되었을 때 옷고름으로 매듭을 지으면서 마음속으로 소원을 말하되 그 유성이 사라지기 전에 매듭을 맺게 되고 소원을말하게 된다면 그 소원은 이룰 수 있댔어요. 그게 사실인가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난 정말 모르겠군요. 우리 시험을 해 보지요. 그러나 손이 그토록 빠르기는 힘들거요.]

그리고 그는 허리띠를 잡아들고 허리를 손에 쥐고 말했다.

[허리를 잡을 준비를 해요. 때를 놓치지 말도록 준비해야 되오.]

의림은 허리띠를 잡고서는 멍하니 하늘가를 바라보았다. 여름밤에는 유성이 무척 맣았다. 하나의 유성이 허공을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 유성은 눈깜짝 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의림의 손가락이 움직이려고 할 때 유성은 떨어지고 만 것이다. 의림은 나직이 '아' 하고 안타까와했다. 다시 하나의 유성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길게 꼬리를 끌며 날았다. 의림은 동작도 민첩하게 매듭을 짓게 되었다.
영호충은 기뻐서 말했다.

[좋소, 좋아. 그대는 매듭을 짓게 되었구료. 관세음보살께서 보호하시어 반드시 그대의 소원을 이루도록 해 주실 것이오.]
의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는 매듭을 짓느라고 마음속으론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먼저 생각을 해놓고 몇 번 외워 보도록 해요. 그렇게 되면 매듭을 짓느라고 소원을 말하는 것을 잊지 않게 될 거요.]
의림은 허리띠를 잡고서 웃었다.

[무슨 소원을 아뢰는게 좋을까?]

그리고 영호충을 한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급히 얼굴을 돌렸다. 이때 하늘에는 몇 개의 유성이 잇달아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영호충은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야단을 피웠다.

[저것 좀 봐! 이번 유성은 매우 길게 꼬리를 끄는군! 매듭을 지었소? 아니면 이번에도 늦었소?]

의림은 마음이 착잡하기만 했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 하나의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 있었다. 그러나 그 소원은 혼자만 생각할 뿐이지 감히 관세음보살에게 빌 수가 없었다. 그저 가슴이 두근거리며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그때 영호충은 다시 물었다.

[이제 소원을 생각해냈소?]

이때 하나의 유성이 하늘가를 가로지르며 날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든 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말하지 않는다면 내가 짐작을 해보지요.]

의림은 다급히 말했다.

[아니예요! 그대는 말하지 마세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무슨 상관이 있겠소? 내가 세번 짐작을 해볼테니 어디 맞는가 안 맞는가 보시오!]

의림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더 말한다면 저는 가겠어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하하! 좋소. 그렇다면 말하진 않겠소. 설사 그대가 마음속으로 항산파의 장문인이 되고 싶다고 하더라도 부끄러워 할 것은 없는 것이오.]

의림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항산파의 장문인이 되려고 한다고 짐작을 하고 있었군요.
그러나 나는 그와 같은 일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내가 어떻게 장문인이 되가 수 있겠어요.)

이때 갑자기 멀리서 '쨍쨍'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누가 금(琴)을 퉁기고 있는 것 같았다. 영호충과 의림은 서로 한번 쳐다보고 크게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 누가 이 황량한 산 속에서 금을 퉁길까?)

금의 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매우 우아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퉁소소리가 금의 소리에 섞여서 들려왔다. 금의 소리는 온화했다. 맑고 투명한 퉁소소리가 섞이자 더욱 더 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금의 소리와 퉁소소리는 마치 묻고 대답하는 것 같았으며 별로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영호충은 의림의 귓가에 입을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저 음악 소리는 매우 이상하오. 아마도 우리에게 불길한 일이 생기려나 보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대는 소리를 내지 않도록 하시오.]

의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금의 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그러나 퉁소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퉁소소리는 낮아졌지만은 마치 유사(遊絲)가 바람에 흔들리듯 은은히 이어지고 있어서 더욱 사람의 애간장을 끊게 했다. 바로 이때 산바위 뒤에서 세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때 달은 한 조각 구름에 가려져서 사방은 몽롱하기만 했다. 그러나 어렴풋이 세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은 큰 편이고 한 사람은 키가 작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키가 큰 사람은 두 남자였고 작은 사람은 여자였다. 두 남자는 천천히 걸어 와 커다란 바위 앞에 이르더니 앉았다. 그리고 한 사람은 금을 만졌고 한 사람은 퉁소를 들었다. 그 여자는 금을 퉁기는 사람의 곁에 섰다. 영호충은 석벽 뒤에 몸을 움추린 후 그 세 사람에게 발견이 될까봐 감히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이때 금과 퉁소소리가 그윽하게 울려 퍼지는데 무척 부드러웠으며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다.

(폭포가 바로 곁에 있고 물 흐르는 소리가 우렁찬데도 부드러운 금과 퉁소의 소리를 막지 못하는 구나! 아마도 금을 퉁기고 퉁소를 부는 사람의 내공이 약하지 않은 것 같다. 그렇군! 그들이 이곳에 와서 퉁소를 불고 금을 퉁기는 것은 바로 이곳에 폭포의 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저들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구나.)
그리하여 그는 마음을 놓았다.
별안간 칠현금이 '쩡쩡'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퉁소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흐느적 흐느적했다. 잠시 후 금의 소리도 점차 부드러워졌다. 두 소리는 갑자기 높아졌다가 갑자기 낮아지곤 했다. 그런데 별안간 칠현금과 퉁소소리가 삽시간에 변했다. 마치 여덟 개의 칠현금과 여덟 자루의 퉁소소리가 동시에 음율을 퉁겨내고 있는 것 같았다. 금과 퉁소소리는 복잡하고 변화가 많았으나 그 소리 하나하나에 높고 낮은 음조가 분명해서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고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영호충은 그만 피가 끓어 오르는 것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금과 퉁소소리가 다시 변했다. 이번에는 퉁소소리가 주가 되고 칠현금은 그저 '띵똥땡' 하면서 반주를 했다. 그러나 퉁소소리는 점차 갈수록 높아졌다. 영호충은 자기도 모르게 구슬픈 마음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고 의림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녀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었다. 별안간 '쨍' 하는 소리가 급히 울려 퍼지면서 칠현금의 소리가 멈추어졌고 퉁소소리도 멈추어졌다. 삽시간에 사방은 조용해졌다. 오로지 하늘에 떠 잇는 달과 땅 위에 드리워진 나무 그림자뿐이었다. 이때 한 사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 형제, 내가 오늘 이곳에서 목숨을 잃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운명일쎄. 다만 이 못난 형이 일찌기 손을 쓰지 못하여 그대의 가족과 형제들이 모조리 액난을 당하도록 만들었으니 이 우형은 마음이 실로 불안하기 짝이 없다네.]
[우리 두 사람은 우정으로 맺어진 사이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시오.]

의림은 그의 음성을 듣고 마음에 움직이는 바가 있어서 아직이 말했다.

[유정풍 사숙이예요.]

그들 두 사람은 유정풍의 집에서 일어난 일을 조금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유정풍은 슬픈 어조로 말했다.

[사람은 모두 다 죽는 것이 아니겠소? 한 사람의 친구를 위해서는 죽어도 한이 없소이다.]
[아우, 그대의 퉁소소리에는 그래도 아직 한이 남아 있는 것 같더군. 혹시 아드님이 위급한 경우를 당해서 죽음을 두려워한 것이 그대의 명성에 먹칠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유정풍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곡형의 생각이 옳소이다. 그러나 그 애는 평소 내가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가르침이 모자랐던 것이오. 뜻밖에도 그토록 줏대가 없는 놈인 줄은 몰랐지요.]

곡양은 말했다.

[줏대가 있고 없고간에 죽은 후에는 모두 다 황토로 돌아가는 것인데 또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이 우형은 일찍부터 지붕 위에 엎드려 있었네, 원래는 일찌기 손을 써야 했겠지만은 형제가 나 때문에 검파의 친구분들과의 감정을 상하고 싶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고 또 우형은 형제를 위해서 협의의 사람은 절대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주저하며 손을 쓰지 못했던 것이라네. 그런데 숭산파의 좌 맹주가 그토록 악랄하게 손을 쓰리라고는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유정풍은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와 같은 속인들이 어찌 그대와 나 사이의 고아한 우정을 이해할 수 있겠소. 그들은 그저 상리로써 짐작하고 그대와 나 사이에 사귐이 오악검파의 협의에 크게 불리한 결과를 낳게 되리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오. 아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그들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오. 곡형! 그대는 대추혈(大椎穴)에 상처를 입고 심맥에 충격을 입게 되었소?]

곡양은 말했다.

[바로 그렇다네. 숭산파의 내공은 정말 무섭네. 내가 뒷등으로 그와 같은 일격을 맞받아 내었는데도 내력이 미치는 곳에 그대의 심장까지 충격을 주어 죽게 되었으니 정말 뜻밖일세. 아우까지도 면할 수 없었다는 것을 진작 알았다면 한 무더기의 흑혈신침을 던지지 말았을걸 그랬네. 사람을 더 해친다는 것은 일에 아무런 보탬이 될 수 없지 않겠는가? 다행히 침에는 독을 묻히지 않았지만은]

영호충은 흑혈신침이라는 말을 듣고 속으로 놀랐다.

(저 사람은 나의 목숨을 구했는데 마교의 현재 고수란 말인가? 유 사숙께서는 언제 그와 사귀게 되었지?)

유정풍은 나직이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곡형 그대와 나는 그래서 다시 한 곡을 합주(合奏)하게 되지 않았소. 이후에는 세상은 다시는 이와 같은 금과 퉁소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될 것이외다.]

곡양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옛날 계강이 죽음에 임하여 한 곡을 퉁긴 후 광릉산(廣陵散)이라는 곳이 이제부터 단절되게 되었다고 탄식하였지. 허허허, 광릉산이 정묘하기는 하나 어찌 우리의 소오강호(笑傲江湖)라는 곡(曲)에 미칠 수 있겠는가? 다만 과거 계강의 심정은 지금의 그대와 나의 심정과 똑같았을 것이네.]

유정풍은 웃으며 말했다.

[곡형은 조금 전까지도 무척 달관해 보이시더니 어째서 지금은 그토록 집착을 하시오. 그대와 내가 오늘밤 합주를 하여 소오강호라는 곡을 남김없이 퉁기고 불어내지 않았소? 세상에 이 한곡이 이쎄 되었고 우리가 또 이곡을 합주하게 된 이상 이 세상에 또 무슨 한을 남길 수 있겠소.]

곡양은 가볍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형제의 말씀이 옳으이!]

그리고 잠시 후 그는 깊이 한숨을 내쉈다. 유정풍은 그에게 물었다.

[형은 또 어째서 한숨을 쉬시오. 아마도 비비가 걱정되는 모양이구료.]

의림은 마음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었다.
[비비라니 바로 그 비비인가?]

그러자 곡비연의 음성이 들렸다.

[할아버지, 할아버지와 유공공께서 천천히 상처를치료하신 하 우리는 숭산으로 들어가 그 악당들을 한 사람 남김없이 몰살시켜요. 할머니 등의 원수를 갚도록 해요.]

별안간 산벽 뒷쪽에서 기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가 끊기기 전에 산벽 뒤에서 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푸른 광채가 번뜩이는 가운데 그 사람이 곡양과 유정풍의 앞에 섰다. 손에 장검을 들고 있는데 바로 숭산파의 비빈이었다. 그는 냉소를 하더니 입을 열었다.

[허허허. 계집애의 말투가 엄청나구나. 숭산파를 모조리 몰살 시키겠다고? 세상에 그와 같이마음대로 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유정풍은 몸을 일으키고 말했다.

[비빈 그대는 이미 우리 전가족을 죽였고 유모는 그분 사형의 장력에 적중되어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소. 그런데 또 어쩌자는 것이오?]

비빈은 소리내어 웃더니 요란하게 말했다.

[하하하, 저 계집애는 몰살시키겠다고 했으니 불초도 당신들을 몰살시키려고 하는 것이오. 이 계집애야, 네가 먼저 이리 나와서 죽음을 받도록 해라.]

의림은 영호충에게 말했다.

[그대는 비비와 그녀의 할아버지가 구하신 거예요. 그러니 우리도 어떻게 방법을 강구해서 그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영호충은 이미 어떻게 하면 그들을 구해 그 조손이 자기를 구해준 은덕을 갚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첫째 상대방은 숭산파의 고수였다. 자기가 설사 중상을 입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코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둘째 곡양이 지금 마교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화산파는 언제나 마교와는 원수지간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원수를 구해 주겠는가 하는 문제가 그를 당혹케 했다.
따라서 그는 마음속으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유정풍이 입을 열었다.

[비빈아, 너 역시 명문정파에서 이름이 있고 알려진 사람이다.
곡양과 유정풍이 오늘 너의 손에 걸린 이상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라. 우리가 죽는다 하더라도 조금도 원망하지 않겠다. 그러나 네가 한 나이어린 여아를 못살게 군다면 그것은 영웅호걸이라 할 수 없다. 비비야 너는 빨리 떠나도록 해라.]

비비는 말했다.

[저는 할아버지와 유 할아버님을 모시고 함께 죽겠으며 결코 혼자 살아 남지는 않겠어요.]

유정풍은 말했다.

[떠나라. 빨리 떠나라. 우리 어른들의 일은 너희 아이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느니라.]

곡비연은 말했다.

[저는 떠나지 않겠어요.]

그리고 휙휙 하니 허리께서 수 자루의 단검을 뽑아들고는 유정풍의 앞을 가로막고서는 부르짖었다.

[비빈, 조금 전 유 할아버지께서 그대를 용서해 죽이지 않았는데 그대는 오히려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 하다니 염치가 있어요 없어요.]

비빈은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너 이 계집애야, 너는 우리 숭산파를 몰살시키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나또한 몰살시키고 말테다! 설마하니 너희가 감히 나를 죽이도록 당하고만 있겠느냐? 아니면 고개를 돌리고 도망을 쳐야 한단 말이냐?]

유정풍은 곡비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

[빨리 가거라. 빨리 가!]

그러나 그는 숭산파 내력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심맥이 거의 끊어진 상태였다. 거기다가 조금 전 소오강호라는 곡을 불어냈기 때문에 지칠대로 지쳐 있어 손에 아무런 힘도 없었다. 곡비연이 가볍게 뿌리치자 유정풍의 붙잡은 손이 떨어지게 되었다. 바로 그때에 곡비연의 눈앞에 푸른 광채가 번뜩이는 가운데 비빈의 장검이 어느덧 얼굴 앞으로 찔러왔다. 곡비연은 왼손의 장검을 들어 막았다. 그리고 오른손의 검을 잇달아 디밀었다. 비빈은 싸늘히 냉소를 흘리며 장검으로 원을 그렸다. 그 순간 '팍' 하는 소리가 나면서 그의 장검이 그녀의 오른손의 단검을 후려치게 되었다. 곡비연은 오른팔이 시큰거리고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 아픔을 느꼈다. 따라서 그녀의 단검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비빈의 장검은 비스듬히 흔들거리며 반대 방향으로 옮겨갔다. '캉!' 소리가 나면서 곡비연의 왼쪽 장검 역시 충격을 받고서는 수장 밖으로 날아갔다. 비빈의 장검은 어느덧 그녀의 목을 겨누었다. 비빈은 날카롭게 웃으며 말했다.

[곡 장로, 나는 먼저 당신 손녀의 왼쪽 눈을 찔러 멀게 한 후 그녀의 코를 잘라내고 재차 그녀의 두 귀마저 짤라내겠소.]
곡비연은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몸을 날려 장검에 스스로 부딪치려고 했다. 비빈은 장검을 재빨리 움추리면서 왼손의 식지를 찔러 내었다. 곡비연은 그만 나딩굴어지고 말았다. 비빈은 소리 내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하하! 사마외도의 사람들은 너무나 악한 짓을 많이 저질렀기 때문에 죽인다고 하더라도 그토록 쉽게 죽일 수는 없지! 역시 먼저 네 왼쪽 눈알을 찔러 멀게 한 이후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그리고 장검을 들고서는 곡비연의 왼쪽 눈을 찌르려고 했다.
별안간 등 뒤에서 그 누가 소리쳤다.

[잠깐!]

비빈은 깜짝 놀라 급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검을 들어 자기 자신부터 지켰다. 그는 영호충과 의림이 벌써 산벽 뒤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재간으로는 그 누가 다가오는 기척을 알아 차렸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달빛아래 한 젊은이가 두 손을 허리께에 짚고 서 잇는 것이 보였다.
비빈은 호통쳐 물었다.

[너는 누구냐?]

영호충은 말했다.

[소인은 화산파의 영호충입니다. 비 사숙에게 인사 드립니다.]
그리고 구부리고 절을 했다. 몸을 휘청휘청하는 것이 아직도 제대로 몸을 가누기 힘드는 모양이었다.
비빈(費彬)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현제는 그만두게. 알고보니 악 사형의 대제자였군. 너는 이곳에서 무엇하고 있었지?]

영호충은 말했다.

[소제는 청성파 제자에게 상처를 입어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비 사숙을 뵈옵게 되었읍니다.]

비빈은 커다랗게 코웃음을쳤다.

[마침 잘 왔다. 이 계집애는 마교의 사마외도라 마땅히 주살되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 내가 손을 쓰게 된다면 어른이 어린 사람을 해쳤다는 비난을 듣기가 쉽상이니 네가 이 계집애를 죽이도록 해라.]

그리고 손으로 곡비연을 가르켰다.
영호충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저 소녀의 조부와 형산파의 유 사숙께서 친구로 사귀고 계시니 따지자면 그녀는 저보다 한 항렬 아래입니다. 소질이 만약 그녀를 죽이게 된다면 강호에서는 화산파에서 어른의 신분으로 어린 사람을 해쳤다는 소문이 나게 될 것이고 화산파의 명성은 땅에 떨어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더군다나 저 곡 선배님과 유 사숙께서는 이미 몸에 중상을 입고 계십니다. 그런데 두 분들 앞에서 두분의 아랫사람을 못살게 군다는 것은 결코 영웅호걸의 행동이라 할 수 없읍니다. 이와 같은 일은 우리 화산파에서는 결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 사숙께서는 양해해 주십시오.
그 말 뜻은 명백했다. 화산파가 할 수 없는 일을 숭산파에서 하게 된다면 숭산파가 크게 화산파에 미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비빈은 두 누썹을 곤두세우며 두 눈에 흉칙한 안광을 빛냈다.
그리고 날카롭게 외쳤다.

[알고보니 너도 마교의 요사한 인물들과 원래 결탁을 하고 있었구나! 그러니 조금 전 유정풍은 곡가라는 요사한 인물이 너를 위해 상처를 치료해 주고 너의 목숨을 구했다는 말을 했다. 뜻밖에도 너는 당당한 화산파의 제자가 되어 가지고서 이토록 빨리 마교에 투신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손에 장검을 흔들었다. 검날의 차가운 광채가 번쩍번쩍 빛났다. 금방이라도 영호충을 찔러올 것 같았다.
유정풍은 말했다.

[영호 현질, 자네와 아무 상관이 없으니 이 쓸데없는 일에 뛰어들지 말고 빨리 되돌아 가게 그래야만 장래에 자네의 사부도 난처해지는 것을 면할 수 있을 것이네.]

영호충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 비 사숙, 우리는 협의도의 사람으로 자처하며 사마외도와는 세불양립이라고 떠들고 있으나 이 협의라는 두 글자가 무엇입이까? 몸의 중상을 입은 사람을 욕보는 것이 협의입니까? 조그만 어린 소녀를 참혹하게 죽이는 것이 협의라고 할 수 있읍니까? 만약 이와 같은 일들을 모조리 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사마외도와는 무슨 다른 것이 있겠읍니까?]

곡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와 같은 일은 우리 마교의 사람들도 하지 않는다네. 영호 형제 그대는 스스로 자기 볼일이나 보도록 하게. 숭산파에서 이와 같은 짓을 하기 좋아한다면 실컷 하도록 내버려 두게나.]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불초는 가지 않겠읍니다. 대숭양수는 강호에서 명성이 유명한 사람이며 숭산파에서 첫째나 둘째가는 영웅호걸입니다. 그는 그저 소녀를 놀리려고 몇 마디했을 뿐 어디 정말 그와 같이 염치없는 짓을 하겠읍니까? 비 사숙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리고 그는 두 손으로 팔장을 끼고 한 그루의 소나무에 등을 기댔다.
비빈은 살기가 불쑥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고 흉칙한 미소를 띠었다.

[너는 그와 같은 말로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들어서는 이 세 요사한 인물을 용서하도록 하겠다는 것이겠지? 흐흐흐! 그야말로 잠꼬대도 분수가 있다. 네가 이미 마교에 투신한 이상 이 비모가 세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네 사람을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한 걸음 내딛었다.
영호충은 그의 흉칙한 얼굴을 대하자 그만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속으로 어떻게 하면 이 위기에서 벗어나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전혀 내색도 하지 않고 말했다.

[비 사숙 저마저 죽여 입을 봉하려는 것입니까?]

비빈은 말했다.

[너는 매우 총명하군. 그 한마디 말은 틀림이 없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걸음 다가섯다. 별안간 산바위 뒤에서 한 묘령의 여승이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비 사숙 고해(苦海)는 끝이 없으나, 돌아서게 된다면 언덛가이라 했읍니다. 비 사숙께서는 나쁜 일을 저지르려고만 하는 나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지만은 아직 나쁜 일을 행하지는 않았읍니다.
급히 마음을 돌리신다면 늦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바로 의림이었다. 영호충은 그때 바위 뒤에 숨어서 남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당부했지만 그녀는 영호충이 위태한 처지에 빠지게 되자 더 생각해 볼 여지없이 급히 좋은 말로써 비빈에게 충고하여 손을 쓰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나선 것이었다.
비빈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는 항산파의 제자로구나! 그렇지? 어찌하여 슬그머니 그와 같은 곳에 숨어 있었지?]

의림은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렸다.

[저는......]

곡비연은 혈도가 집혀 땅바닥에 쓰러져서 꼼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입은 움직일 수가 있어 부르짖었다.

[의림 언니! 저는 이미 그대가 영호 오라버니와 함께 있을 거라고 짐작했어요. 정말 그대는 그의 상처를 치료했군요.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애석하게도...... 우리는 모두 죽게 되었어요.]
의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 럿어. 비 사숙께서는 무림에서도 크게 이름이 알려지신 영웅호걸인데 어떻게 몸에 중상을 입은 사람과 그대와 같은 소녀를 해칠 수 있겠어?]

곡비연은 싸늘히 냉소를 흘렸다.

[호호, 그가 정말 대영웅 대호걸일까요?]

의림은 말했다.

[숭산파는 오악검파의 맹주이며 강호 협도의 영도자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 무슨 일을 할 때 자연히 협의를 내세우며 그 정도에서 벗어난 행동은 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이 몇 마디는 실로 진정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비빈인 들을 때 비빈 자신을 비웃는 말로밖에 들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내친 걸음이라 오늘 한 사람이라도 살려 보내게 된다면 이 몸은 명성으 더럽히게 될 것이다. 죽이는 자들이 마교의 요사한 인물이라고 하나 상처를 입은 포로를 주살한다는 것은 영웅호걸의 행위라고 할 수 없으니 반드시 남의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장검을 뻗치며 의림을 가리켰다.

[너는 몸에 중상을 입지 않았고 또한 움직일 수도 없는 처지도 아니니 내가 너만은 얼마든지 죽일 수 있겠지?]

의림은 깜짝 놀라 몇 걸음 물러서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를...... 저를요? 어째서 저를 죽이시려고 하지요?]
비빈은 말했다.

[너는 마교의 요상한 인물과 결탁하고 있으며 서로 언니니 누이니 하는 처지다. 그러니 이미 요사한 인물과 한길을 걷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너를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성큼 다가서며 검을 뻗쳐서는 의림을 찌르려고 했다. 영호충은 급히 달려와 의림의 앞을 가로막으며 부르짖었다.

[사매 빨리 가시오! 가서 사부님에게 우리를 구해 달라고 청을 하시오!]

그는 물론 먼데 물러서서 가가운 곳에 난 불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의림으로 하여금 구원병을 불러오도록 시킨 것은 단지 그녀를 이 자리에서 떠나보내 목숨을 건지도록 하려는 계책에 불과했다.
비빈은 장검을 흔들더니 검을 영호충의 오른쪽으로 공격해왔다.
영호충은 급히 몸을 기울여 피했다. 비빈은 히히히 하며 돌연 삼검을 찔댔다. 이와 같은 공세에 영호충은 연신 아슬아슬한 위기를 당하게 되었다. 의림은 크게 초조한 나머지 재빨리 허리에 찬 장검을 뽑아서는 비빈의 어깨쭉지를 찔러 가며 부르짖었다.

[영호 오라버니! 몸의 상처가 잇으니 빨리 물러서세요!]
비빈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하하하하! 젊은 여승이 속세의 정에 눈 뜨게 되었군. 준수한 젊은이를 대하게 되자 자기 목숨마저도 바치려 하는구나!]
그리고 검을 휘둘러 '창' 하는 소리와 함께 쌍검이 서로 부딛쳤다. 의림의 손에 들린 장검은 대뜸 그녀의 손을 빠져서 날아갔다.
비빈은 장검을 쳐들어 의린의 가슴팍을 겨누었다. 비빈이 당장 죽여야 할 사람이 다섯이나 되었다.하나같이 별로 저항할 힘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만일 실수해서 한 사람이라도 놓치게 된다면 무궁한 후한을 남기게 됨으로 손을 쓰자마자 살수를 펼쳤다.
이때 영호충이 몸을 날려 달려들었다. 왼손의 두 손가락으로 비빈의 왼팔을 찍으려고 했다. 비빈은 두 발로 급히 땅을 차며 뒤로 물러섰다. 곧이어 장검을 걷어 들이는 그 기세를 빌려서는 영호충의 왼팔에 기다란 상처를 내도록 만들었다.
영호충은 목숨을 걸고 달려들어 의림을 구출한 그 순간 이미 숨도 제대로 돌리지 못할 지경으로 헐떡이게 되었다. 그래서 몸을 쓰러질듯 휘청거렸다. 의림은 재빨리 달려들어가 그를 부축하며 목메인 어조로 말했다.

[우리를 함께 주깅세요!]

영호충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대는 빨리 떠나시오......]

곡비연은 웃으며 말했다.

[바보 아직도 상대방의 뜻을 모르겠어요? 그녀는 그대와 함께 죽고자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한 마디가 미처 끝나기 전에 비빈은 장검을 밀어냈다. 어느덧 곡비연의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곡양과 유정풍 그리고 영호충은 물론 의림까지도 일제히 놀라 부르짖었다.
비빈은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영호충과 의림 쪽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검 끝에서는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영호충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그는 정말 소녀를 죽이고 말았구나! 정말 악독하다! 이제 나도 죽게 되었다! 의림 사매는 어찌해서 나와 함께 죽으려고 하는 것일까? 나는 그녀를 구했지만 그녀도 나를 구했으니 이미 내게 진 빚은 갚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전에 그녀와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다만 같은 오악검파의 사남매에 불과했었다.
강호의 도의를 지킨다 하더라도 목숨까지 버리면서 죽음을 함께할 필요는 없다. 정말 항산파의 문하 제자들이 하나같이 이토록 무림의 의림을 돌보고자 할 줄은 몰랐다. 정일사태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다. 이 의림 사매가 나와 함께 죽게 되었구나. 나와 함께 죽는 사람이 영산 사매가 아니라서 유감이로군. 사매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비빈이 흉칙한 얼굴을 하고 점점 다가오는 것을 보고 영호충은 빙그레 웃으며 한숨을 내쉰 후 눈을 감았다.
별아난 그의 귀에 나직한 호금소리가 들려왔다. 호금소리는 매우 처량했다. 탄식하는 것 같기도 하고 흐느끼기도 하는 것 같았다. 호금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는데 잇달아 '수수수' 하는 소리가 띄엄띄엄 들렸다. 그것은 아마 한 방울 한 방울의 비가 풀잎에 떨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영호충은 크게 의아하여 눈을 떴다.
비빈은 흠칫했다.

[소상야우 막대선생이 나타났군!]

그러나 호금소리는 갈수록 처량항 빛을 띄우게 되었으나 막대선생은 시종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빈은 물론 부르짖었다.

[막대선생, 어지하여 몸을 드러내지 않읍니까?]

호금소리가 갑자기 멎으면서 소나무 뒤에서 한 비쩍 마른 사람이 걸어 나왓다. 영호충은 어려서부터 소상야우 막대선생의 이름을 들어온 터였으나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때 달빛 아래 바라보니 그는 앙상하여 뼈마디만 남아 있는것 같았다.
어깨는 우뚝 솟아 잇어서 정말 금방이라도 쓰러져 숨을 거둘 것 같은 폐병쟁이 같았다. 강호에 명성이 쟁쟁한 문파의 장문인이 이토록 초라한 사람이라고는 짐작도 못했던 터였다. 그런데막대선생은 눈길을 허공에 두고 두 손을 잡고서 비빈에게 흔들어 보인 후 말했다.

[비 사형, 좌 맹주께서는 안녕하시오.]

비빈은 그의 악의가 없는 것을 보고 또 그와 유정풍과는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순순히 대답했다.

[염려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사형은 잘 있읍니다. 귀파의 유정풍과 마교의 요사한 인물이 연합하여 우리 오악검파에 불리한 행동을 하려고 했읍니다. 막대선생께서는 마땅히 어떠한 조치를 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막대선생은 유정풍에게 두어 걸음 다가가며 살벌한 어조로 말했다.

[마땅히 죽어야지.]

그 한마디가 들리는 순간 싸늘한 광채가 갑자기 빛났다. 그의 손에는 이미 한 자루의 엷고 폭이 좁은 장검이 쥐어 있었다. 그는 벼락같이 그 검을 뒤로 뻗치며 비빈의 가슴팍을 찌르는 것이 아닌가? 이 한 수는 너무나 빠랐고 또한 아련한 것이 도깨비와 같았다. 그것은 바로 '백병천환형산운무십삼식' 가운데 전초였다. 비빈은 일시에 유정풍의 그와 같은 무공에 당한 적이 있는데 지금 재차 그와 같은 술수에 말려든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깜짝 놀란 나머지 이번엔 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짝' 하는 소리와 함께 가슴팍은 어느덧 예리한 검에 의해 기다란 상처가 나고 말았고 옷자락도 찢어졌다. 가슴팍의 근육이 베어진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상처는 깊지 않으나 이와 같은 상처를 입게 되자 비빈은 놀람과 분노에 얽히게 되었고 그만 예기(銳氣)가 크게 움추려들게 되었다.
비빈은 즉시 검을 휘둘러 반격하려 했다. 그러나 막대선생의 일검이 선기를 먼저 제압하자 뒷수가 끝임없이 잇달아 펼쳐졌다. 한 자루의 엷은 검은 마치 교묘한 뱀처럼 끊임없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비빈은 검의 장막 속에서 이리저리 몸을 날렸으나 그것은 부족해서 부득이 연신 뒤로 물러서야 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을 당해 욕을 할 기회마저 없는 형편이었다.
곡양과 유정풍, 영호충 세 사람은 막대선생의 검초의 변화가 마치 유령처럼 아련하면서도 허깨비를 보는 듯한지라 하나같이 놀람과 정신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유정풍은 그와 한 동문으로서 무공을 익혔을 뿐 아니라 수십 년간 사형제라는 관계에 놓여 있는 처지였으나 그 사형의 검술이 이토록 정묘한 지경에 이르렀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상태였다. 한 방울 두 방울의 피가 두 자루의 장검 사이에서 뿌려졌다. 비빈은 이리 몸을 날리고 저리 몸을 날리면서 힘을 다해 맞받아 내려고 했으나 시종 막대선생이 펼쳐내는 검의 장막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선혈은 점차 두 사람의 주위에 한 붉은 원을 그리게 되었다. 별안간 비빈이 길게 한 소리 비명을 질러내었다. 그리고 높이 뛰어올랐다. 막대선생은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장검을 호금(胡琴)속에다 감추고는 몸을 돌려서 그 자리를 떴다. '소상야우' 라는 곡이 소나무 뒷쪽에서 울려 퍼졌는데 그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비빈은 몸을 허공으로 날렸으나 곧이어 땅바닥에 쓰러졌다. 가슴팍에서 피가 샘물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조금 전 그는 숭산파의 내력을 돋우었던 것인데 가슴팍에 검을 맞은 후에도 그 내력이 해소되지 않아 선혈이 그 상처에서 급히 뿜어진 것이었다. 그야말로 처참하면서도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의림은 영호충의 팔을 붙잡았다. 놀라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나직이 물었다.

[상처를 입지 않았어요?]

곡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유 현질, 그대는 그대의 사형과 화목하지 못한 사이라고 말했는데 뜻밖에도 그는 그대가 위험하게 되었을 때 손을 써서 구원을 해주는군!]

유정풍은 말했다.

[나의 사형의 행동은 괴퍅하여 정말 사람으로 하여금 짐작하기 어려울 때가 있죠. 나와 그는 화목하지 못하기는 하나 결코 빈부의 격차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그저 성격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곡양은 말했다.

[그의 검법(劍法)은 그토록 강맹한데 그가 연주하는 호금(胡琴) 소리는 언제나 처량하기 그지없구나!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만드니 속된 시정(市井)의 음률에서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없네.]

유정풍은 말했다.

[그렇지요. 사형은 언제나 그와 같은 곡만 퉁긴답니다. 그리고 그 곡은 항상 서글프기만 하죠. 좋은 시나 사(詞)는 좋으면서도 음란하지 말하야 하고 슬프면서도 처량한 맛이 없어야 한다고 했읍니다. 따라서 좋은 곡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읍니까? 나는 그의 호금소리를 듣기만 하면 멀리 도망치고 싶은 생각뿐이죠.]
영호충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두 사람은 음악을 좋아하다가 완전히 빠져들었군! 이 생사의 고비길에도 슬프거나 처량하지 말아야 하며 우아해야 하고 서글프지 말아야 한므니 하는 말들을 하고 있을가? 다행히 막대 사백께서 늦지 않게 달려오시어 우리의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곡씨의 소녀는 그만 비빈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구나.)
이때 유정풍은 다시 말했다.

[그러나 검법과 무공에 있어서는 결코 미칠 수가 없읍니다. 나는 전에 그에게 퍽이나 공손하지 못한 점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실로 부끄럽기만 하구료.]

곡양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형산의 장문인은 정말 명불허전이네.]

그리고 고개를 돌리더니 영호충에게 말했다.

[소형제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 주겠는가?]

영호충은 말했다.

[선배께서 분부만 하십시오. 마땅히 받들겠읍니다.]

곡양은 유정풍을 한번 바라 보더니 말했다.

[나와 유 형제는 음률에 깊이 빠지고 말았네. 그리하여 수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공을 들여서는 '소오강호' 라는 한 곡을 지어 내었는데, 이 곡의 기이함은 천고에 없었던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다네. 금후 이 세상에 곡양과 같은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유정풍이라는 사람이 있을 수 없을 것이며, 유정풍이라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곡양이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네. 설사 곡양과 유정풍과 같은 인물이 있다 하더라도 두 사람이 동시에 태어나서 서로 만나게 되어 사귀게 되리라고는 볼 수 없네. 즉 음률에 정통하고 내공에 정통한 두 사람의 뜻이 맛고 성격이 비슷하여 함께 이런 곡을 지어낸다는 것은 실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일세. 이 곡이 단절되게 된다면 나와 유형제는 구천지하에서도 길게 탄식을 불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네.]

이와 같이 말하고는 품 속에서 한 권의 책자를 꺼내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이는 소오강호곡(笑傲江湖曲)의 금과 퉁소의 악보이네. 소형제는 우리 두 사람이 기울인 심혈을 생각해서 이 금과 퉁소의 악보를 세상으로 가져가 전할만한 사람을 찾아주게.]

유정풍은 말했다.

[이 소호강호곡이 이 세상에 퍼지게 된다면 이분 곡형은 죽어 눈을 감을 수 잇을 것이네.]

영호충은 허리를 구부려서 곡양의 손에서 그 악보를 받아 품 속에 갈무리 하고는 말했다.

[두 분께서는 안심하십시오. 이 후배는 온 힘을 다 기울이겠읍니다.]

그는 처음 곡양이 부탁할 것이 있다는 말을 하자 마음속으로 매우 어렵고 위험한 일이 아닐까 걱정을 했다. 더군다나 이 일을 행하다가 문규를 위반하거나종파의 동도들에게 죄를 짓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으로서는 응낙하지 않을래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부탁이라는 것이 이 금과 퉁소를 배울 수 있는 두 사람을 찾아달라는 것이 아닌가? 그는 크게 마음을 놓고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 유정풍이 입을 열었다.

[영호 현질, 이 곡은 우리 두 사람이 필생의 심혈을 기울인 곡일 뿐만 아니라 한 분의 고인(古人)과도 관련이 있다네. 소오강호곡 한 군데의 상당한 부분은 칠현금의 곡을 곡형이 진나라 사람인 계강(稽康) 광릉산(廣陵散)에 의거하여 고쳐 쓴 것이라네.]
곡양은 그것에 대해서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 미소를 띠었다.

[옛부터 전해지기를, 계강이 죽은 이후 광릉산이 단절되었다고 했네. 그런데 내가 어디서 이 곡을 얻게 되었는지 자네는 짐작할 수 있겠는가?]

영호충은 생각했다.

(음율에 대해서 나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당신네 두 사람의 행동은 뭇 사람들과 매우 다른데 내 어찌 짐작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선배님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곡양은 웃으며 말했다.

[계강이라는 사람은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야. 역사서에는 그의 글이 장려하고, 또한 노자 장자를 즐겨 말한며 그 자신은 협사들을 숭배하고 있다고 했네. 그의 성격은 정말 내 마음에 맞는다고 할 수 있네. 종회(鍾會)는 당시 큰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이름을 듣고 그를 방문했다네. 그런데 계강은 그저 무쇠를 달구고 있을 뿐 상대를 하지 않았네. 종회는 냉대를 받고 부득이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계강이 그에게 물었다네. '무엇을 하러 왔으며 무엇을 보고 가는가?' 종회는 말했네.
[듣던 바를 듣고 본 바를 보고 가외다.]
종회라는 녀석은 영님하고 재치가 있는 인사라고 할 수 있지만 애석하게도 그 흉금이 너무 좁다고 할 수 있지. 그는 이 일로 화를 내게 되었고, 사마소(司馬昭)에게 계강을 헐뜯는 말을 하게 되었네. 그리하여 사마소는 계강을 죽이게 되었는데 계강은 형장에 이르러 한 곡을 퉁기는 여유마저 보였지. 정말 의연한 기풍을 보인 셈이라고 할 수 있다네. 그런데 그는 광릉산이 이로써 끊어지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그와 같은 이야기는 후세의 사람은 너무나 잘못 본 것이라 할 수 있네. 그 곡이 그가 지은 것도 아니었지.
그리고 그는 서진(西晋)때의 사람인데 이 곡이 설사 서진때에 실종되었다 하더라도 설마하니 서진 이전에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

영호충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서진 이전이라고요?]

곡양은 말했다.

[그렇다네. 나는 전해오는 말에 승복할 수 없어서 서한(西漢)과 동한(東漢)대의 황제와 대신들의 무덤을 파게 되었는데 잇달아 스물 아홉 채의 오래 된 무덤을 판 뒤에야 끝내 채소(??)의 무덤에서 광릉산의 곡을 발견하게 되었다네.]

말이 끝나고서는 껄껄 웃었다. 매우 자랑스러운 듯했다.
영호충은 속으로 여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선배님이 한 수의 음률을 타는 악보를 위해 잇달아 스물 아홉 채의 무덤을 파헤치다니.)

이때 곡양은 웃음을 거두었다. 그리고 침울한 얼굴빛으로 말했다.

[소형제, 그대는 명문의 대제자이다. 나는 본래 자네에게 부탁을 하지 말았어야 했지만은 일이 다급하게 되어서 자네에게 폐를 끼치게 되었으니 너무 탓하지 말게.]

그리고 그는고개를 돌리고 유정풍에게 말했다.

[유 현제 이제 우리들은 떠나야 되겠네.]

유정풍은 말했다.

[그렇지요.]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두 손을 꼭 마주잡았다. 그리고 일제히 기다란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내력을 돋운 가운데 힘을 주어 심장의 주맥(主脈)을 끊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는 이 세상을 하직했다.
영호충은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선배님! 유 사숙!]

그리고 손을 뻗쳐 그들의 코 앞으로 가져갔다. 이미 숨쉬는 것이 멎어 있었다. 의림은 놀라 부르짖었다.

[그들은 모두 죽었나요?]

영호충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사매, 우리는 빨리 이 네 사람의 시체를 묻어 줍시다. 다른 사람이 찾아와서 또 다른 일이 벌어지기 전에, 비빈인 막대선생에게 죽임을 당한 일을 절대 밖으로 누설해서는 안 되오.]

거기까지 말한 뒤에는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만약 이 일이 누설된다면 막대선생은 과연 우리 두 사람이 말한 것인 줄 알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두 사람은 화를 불러들이게 될거야.]

의림은 말했다.

[예, 그러지요 뭐. 그런데 사부님이 물어보시더라도 말을 하지 않아야 되나요?]

영호충은 말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소. 그대가 말을 하기만 한다면 막대선생은 그대의 사부와 검을 들고 싸우게 될 것이니 야단날 일이 아니겠소.]

의림은 조금 전 막대선생의 검법을 상기했다.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저는 말하지 않겠어요.]

영호충은 천천히 몸을 구부려서는 비빈의 장검을 잡았다. 그리고 다시 일검으로 비빈의 시체 위에다가 십칠 개의 구멍을 뚫었다. 의림은 마음속으로 안 되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영호 오라버니 그는 죽었는데 그토록 미워서 시체마저 망가뜨릴 필요가 어디 있어요?]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막대선생의 검날은 좁고 얇아서 전문가라면 비 사숙의 상처를 한번 보고 누가 손을 쓴 것인지 알게 될 것이오. 그의 시체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몸에 일곱 여덟개의 상처를 내어서 그 누구도 단서를 찾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오.]

의림은 한숨을 내쉬고 속으로 생각했다.

(강호에는 이토록 많은 꾀를 부리고 있구나. 정말 정말 헤쳐나가기가 어렵군.)

그러다가 그녀는 영호충이 장검을 내던지고 돌을 들어서는 비빈의 시체 위에 던지는 것을 보고 재빨리 말했다.

[그대는 움직이지 말고 앉아서 쉬도록 하세요. 네가 할께요.]
그리고 돌을 들어서는 가볍게 비빈의 시체 위에 올려 놓았다.
마치 죽은 시체에 지각이 있어 아파하면 어쩔까 염려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는 돌들을 주어서는 유정풍 등 네 구의 시체를 모조리 묻어 주었다. 그리고 곡비연의 돌무덤을 향해 말했다.

[누이 그대가 만약 나 때문이 아니라면 이와 같은 난을 당하지도 않았을 거야. 아무쪼록 그대는 하늘로 올라가 복을 받도록 하고 내세에는 남자가 되어 많은 공덕을 쌓아서 복을 받도록 하고 끝내는 서방극락세계로 갈 수 있기를 빌겠어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영호충은 바위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런데 곡비연이 자기의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베풀었던 사실을 상기했다. 어린나이에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그만 목숨을 잃다니 하는 생각이 들자 서글퍼지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물론 부처님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참을 수 없어 의림을 따라 몇마디 나무아미타불을 따라 외었다.
잠시 쉰 후 영호충은 상처의 아픔이 약간 가라앉았다. 그리하여 그는 품속에서 소오강호를 꺼내 펼쳐 보았다. 그런데 장마다 괴상하게 생긴 부호들이 쓰여 있었는데 하나도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본래 그가 알고 있는 악보는 얼마되지 않았다. 그리고 칠현금의 악보가 본래는 모두 이상하게 생긴 부호들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저 악보에 실린 문자가 너무나 오래 된 것이고, 어려워서 공부를 하지 못한 그로서는 자연히 읽을 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 책자를 품 속에 다시 집어 넣고는 고개를 쳐들고 길게 한숨을 내뿜고 속으로 생각했다.

[유 사숙은 친구를 사귄 것이 화근이 되어 전가족의 목숨을 잃게 되었구나. 물론 사귀는 사람은 마교의 장로라고 하나 두 사람은 서로 마음이 통했으며, 그야말로 굳굳한 사내들이라고 할 수 있으니 정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흠모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게 만드는구나. 유 사숙께서는 오늘 금분세수의 의식을 행한 후 무림에서 물러서기로 했는데 어떻게 되어 숭산파와 원한을 맺게 되었을까? 정말 이상한 일이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숲 속에서 큰 광채가 번쩍번쩍 몇 번 빛났다. 그리고 검광이 종횡으로 허공을 누비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첫눈에 그 검법이 눈에 매우 익었다. 바로 화산파의 고수가 누구와 싸우고 있는 것 같아서 속으로 흠칫했다.

[소사매 그대는 이곳에서 잠시 나를 기다리도록 하시오. 내 곧 갔다오겠소.]

의림은 여전히 돌무덤을 만들고 있느라고 그 푸른빛 광채를 보지 못했다. 그저 그는 소변을 보러 가는가 보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영호충은 나뭇가지에 몸을 의지하고 십여 걸음을 걸어갔다. 그는 비빈의 장검을 집어서 허리에 차고 푸른 광채가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한참 가게 되었을 때 은연중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잇달아 들려오는 것은 들을 수 있었다. 싸움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가는 듯 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본문의 어느 어른이 남과 싸우는 것일까? 상대방 역시 고수임에 틀림이 없겠군!)

그는 몸을 낮추고 천천히 다가갔다. 무기와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는 얼마되지 않는 곳에서 들려 왔다. 그는 즉시 한 그루의 커다란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살폈다. 달빛 아래 한 유생이 장검을 들고 우뚝 버티고 서 있는데 바로 그의 사부인 악불군이었다. 그리고 왜소한 노인이 그를 따라 번개와 같이 돌아가면서 손에 든 장검을 질풍과 같이 내지르고 있었다. 원을 돌 때마다 십여 검을 찔러댔다.청성파의 장문인 여창해였다. 영호충은 갑자기 사부님이 싸우는 것을 보고 상대방이 청성파의 장문인인 것을 보고 크게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사부는 매우 의젓했다. 여창해가 일검을 찔러 올 때마다 그는 언제나 아무렇게 손을 들어 막는 것 같았다. 여창해가 그의 등뒤로 돌아갔을 때도 그는 몸을 돌리지 않았다. 다만 검을 들어 뒷등을 지킬 뿐이었다. 여창해가 검을 쓰는 것은 갈수록 빨라졌다. 그런데도 악불군은 시종일관 공격을 하지 않았다. 영호충은 속으로 탄복했다.

(사부님은 무림에서 군자검으로 일컬어지고 잇다. 정말 온유하고 의젓하구나. 남과 싸우는데 있어서도 조금도 패도적인 기질을 보이지 않는구나.)

그리고 잠시 주저하다가 다시 생각했다.

(사부님께서 조금도 성을 내지 않는 것은 풍도가 무척 높을 뿐 아니라 무공이 무척 높기 때문일 것이다.)

악불군은 남과 싸우는 때가 드물었다. 영호충은 그가 손쓰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단지 사문과 대련할 때나 문인 제자들에게 시범을 보일 때였다. 물론 그것은 거짓으로 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진짜로 싸우는 것이 그때의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 할 수 있었다. 그는 여창해가 일검을 찔러낼 때마다 검명이 찍 울려퍼지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이로 미루어 그의 검에 실린 힘이 강맹하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영호충은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청성파를 업신여겼다. 그런데 저 왜소한 도사는 저토록 뛰어나구나! 설사 내가 상처를 입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의 적수가 될 수 없다. 다음에 만나게 된다면 조심해야겠다. 그리고 역시 멀찌감치 피하는 것이 낫겠다.)

다시한동안 싸움을 주시했다. 여창해의 돌아가는 속도는 갈수록 빨라졌다. 마치 둥근원을 그리듯 푸른 그림자가 되어 악불군 주위를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쌍검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는 너무나 빨라 앞의 소리와 뒷소리가 하나로 이어져서는 쨍그랑 쨍쨍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는 소리로 화하고 말았다. 영호충은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저 수십 검이 나의 몸에 펼쳐졌더라면 나는 일검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고 전신은 그에게 찔러 수십 군데나 되는 구멍이 생기고 말았을 것이다. 저 여관주는 전백광과 비교할 때 반수 정도는 더 높은 것 같다.)

이때 그의 사부는 여전히 몸을 돌려서 공세를 취하고 있지를 않았다. 이렇게 되자 영호충은 속으로 걱정이 되어 않을 수 없었다.

(저 여도사의 검법이 정말 훌룡하구나. 사부나 찰나적으로 정신을 흐트려뜨렸다간 그의 검아래 지게 된다.)

별안간 쨍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여창해는 한 대의 화살처럼 뒷쪽을 향해 수평으로 수장정도 날아가더니 곧이어 땅위에 바로 내려섰다. 그런데 어느결에 그의 장검은 이미 그의 검집에 들어가 있었다. 영호충은 깜짝놀라 사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사부의 검도 이미 검집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조금 전 일은 너무나 느닷없이 일어났기 때문에 영호충으로서는 도대체 누가 이겼는지 누가 진것인지 그리고 어느 쪽에서 내상을 입은 것인지 짐작할 길이 없었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 우두커니 서있었다. 여창해가 싸늘하니 코웃음쳤다.

[좋소, 다음에 다시 만납시다.]

그리고 몸을 날리더니 곧장 오른쪽으로 달려갔다. 악불군은 큰 소리로 외쳤다.

[여관주, 잠깐만 그 임진남이란 분은 어떻게 되었소?]
그리고 몸을 흔들하더니 뒤쫓아갔다. 그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두 사람의 모습은 이미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영호충은 두 사람의 말투에서 사부가 여창해를 이긴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속으로 기뻐했다. 그러나 중상을 입은 후에 이와 같이 움직이고 정신을 쏟는다는데 대해서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부님은 여창해를 뒤쫓아 가셨다. 그 두 분이 경신법을 일단전개했다면 삽시간에 이미 수마장 밖에 가 있을 것이다.]
그는 나뭇가지에 몸을 지탱하고는 다시 돌아가 의림과 행동을 함께 하려고 했다. 그런데 별안간 왼쪽 숲속에서 또 기다란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음성은 매우 처절했다. 영호충은 깜짝 놀라 숲속으로 몇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나뭇가지 사이로 바라보니 멀리 하나의 누런 담장이 보였다. 그것은 한 채의 절간 같았다.
그는 동문사형사매가 청성파의 제자들과 싸우다가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되어 재빠른 걸음으로 그 누런 담장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절간과는 아직도 수장을 나겨두게 되었을 때 그 절간 안에서 한 늙수구레하고(오타 아님) 또 뾰족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벽사검보는 지금 어디에 있소. 그대가 솔직이 나에게 말한 다면 나는 그대를 대신해서 청성파를 모조리 주살하여 그대 부부의 원한을 갚아 드리겠소.]

영호충은 침대 위에서 창문을 통하여 그 사람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적이 있었다. 그는 그 사람이 바로 새북명타 목고봉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지금 임진남의 행방을 찾고 계신데. 알고 보니 이 두 사람은 다시 목고봉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구나.)
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보시오! 나는 벽사검법이 무엇인지 모르오. 우리 임씨 집안의 벽사검법은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나 모두 다 입으로 전수하는 것이지 검보로 전하는 것이 아니외다.]

영호충은 생각했다.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아마 임평지의 부친인 복위표국 임진남이겠지.)

이때 다시 임진남의 음성이 들려왔다.

[선배가 불초를 위해 원한을 갚아 준다니 정말 고맙기 이를데없읍니다. 청성파의 여창해로 말하면 여러모로 의롭지 못한 행동을 저질렀으니 이후 결코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설사 선배님에게 불행을 당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한 분의 영웅호걸의 칼이나 검 아래 죽게 될 것이 뻔합니다.]

목고봉은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말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새북명타의 소문을 너는 들어보았느냐?]

임진남은 말했다.

[목 선배님! 강호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누가 모르겠읍니까?]

목고봉은 말했다.

[좋아, 좋아. 강호에 위세를 떨친다고는 할 수 없지. 하지만은 이 목가의 수단이 악랄하고 한번도 선심을 쓴적이 없다는 사실도 그대는 들어봤겠지.]

임진남은 말했다.

[목 선배님이 이 임모에게 강제적인 수단을 쓰리라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던 바입니다. 그러나 우리 임씨 집안에는 벽사검보라는 것이 없읍니다. 설사 정말 있다 하더라도 또 어떤 사람이 어떤 위협을 가하고 위력을 보인다 하더라도 결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임모는 청성파에게 사로잡혀 매일 같이 혹독한 고문을 당했소이다. 임모는 무공이얕으나 굳건한 면은 그런대로 지니고 있읍니다.]

목고봉은 말했다.

[그렇지, 바로 그래.]

영호충은 그 말을 듣고서 속으로 생각했다.

(뭐가 그렇지 그렇지야! 아...... 이제보니 원래 그랬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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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강호 제 1 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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