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소오강호 2-3

3학년2반 | 2022.03.12 07:31:31 댓글: 0 조회: 561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5068


반개월이라는 세월은 눈깜짝 할 사이에 지나갔다. 악불군 부부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시 벼랑 위로 올라왔다. 동행한 사람은 시대자와 육후아, 악영산이었다. 영호충은 소사매도 함께 올라온 것을 보고 '사부니 사모님' 하고 부를 때 음성이 떨려나왔다.
악 부인은 그의 정신이 말고 안색도 반개월 전보다 많이 다랄진 것을 보고 웃음을머금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산아, 네가 대사형에게 밥을 담아 드려라. 먼저 배부르게 먹은 후 검법을 펼쳐 보이게 하자.]

악영산은 대답했다.

[녜.]

그녀는 밥바구니를 들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 바위 위에 놓고 그릇과 젓가락을 꺼내고 하얀 쌀밥을 한 그릇에 가득 담은 후 웃으며 말했다.

[대사형, 식사하세요.]

영호충은 말했다.

[고...... 고마워.]

악영산은 웃으며 말했다.

[대사형, 아직도 열이 나는가요? 어째서 더듬거리죠?]
영호충은 말했다.

[아...... 열은 이미 식었어.]

그러면서 그는 생각했다.

(이후 아침이면 아침마다 저녁이면 저녁마다 밥을 먹을 때 그녀가 옆에 있어 준다면 이 영호충은 한평생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이때 그는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겨우 두세 숟갈을 떴을 뿐이었다. 악영산은 말했다.

[다시 더 담아 들릴께요.]

영호충은 말했다.

[고맙지만 필요없어. 사부님과 사모님이 밖에서 기다리고 계셔.]

그가 동굴 밖으로 나오니 악불군 부부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할 말이 없었다. 육후아는 눈을 껌벅이고 기쁜 빛을 띄웠다.
영호충은 생각했다.

(육 사제는 무슨 소식을 얻어듣고 저처럼 기뻐할까?)
악불군은 영호충을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말했다.

[근명이 어제 장안에서 돌아왔는데 전백광이 장안에서 몇 가지 가건을 일으켰다고 하더구나.]

영호충은 어리둥절하여 말했다.

[전백광이 장안에 갔다고요? 그러면 십중팔구 나쁜 일을 저질렀을 것입니다.]

악불군은 말했다.

[그야 말할 필요도 없다. 그는 장안성에서 하룻밤 사이에 잇달아 일곱 채의 부자집을 털었다. 그것뿐 아니라 그집 벽에다 '만리독행 전백광 차용' 이라는 아홉 개의 큰 글자까지 남겨 놓았다.]
영호충은 화난 어조로 말했다.

[장안성은 바로 화산의 옆에 있읍니다. 그런데 그가 그 커다란 글자를 남겼다면 바로 우리 화산파를 비웃은 것입니다. 사부님 우리는......]

악불군은 말했다.

[뭐냐?]

영호충은 말했다.

[사부님과 사모님의 신분은 존귀하시니 그 악적을 상대하여 보검을 더럽힐 가치가 없읍니다. 그러나 제자의 재주가 아직도 부족해 그 자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더구나 제자는 죄가 있는 몸으로 벼랑 아래로 내려가 그 악적을 찾아나설 수 없읍니다. 어쨌든 그 악적이 화산의 아래에서 날뛰게 내버려둔다면 정말 울화통이 터지고 말 것입니다.]

악불군은 말했다.

[만약 네가 그 악적을 죽일 자신이 있다면 네가 벼랑을 내려가도록 허락하겠다. 그리하여 공을 세워 죄를 사하도록 해주겠다.
너는 사모님이 전수해준 '무쌍무대 영씨일검' 이란 일초를 펼쳐보여라. 이 반년 동안 아마도 거의 터득했으리라생각한다. 다시 사모님에게 지도를 받게 되면 그 악적을 이기지 못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영호충은 어리둥절해져 생각했다.

(사모님은 그 일검을 전수해 주시지 않으셨는데?)

그는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사모님께서는 그 일검을 펼쳐보였다. 정식으로 나에게 전수하시지는 않으셨지만 나의 조예와 수위로 미루어 자연히 검초 가운데 담긴 요지를 알았으리라 짐작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반년 동안 열심히 연구하고 연마했으니 거의 다 익혔을 것이라고 계산하신 것이다.)

그는 속으로 무쌍무대 영씨일검 하고 뇌까렸다. 그러나 이마엔 자기도 모르게 땀방울이 흘렀다.
그가 처음 벼랑 위에 오르게 되었을 때는 때때로 그 일 검의 정묘한 점을 생각했고, 두번 세번 시험해 보았으나 뒷동굴 석벽에 그려진 그림을 본 이후로는 화산파의 어떤 검초도 남에게 격파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영씨일검이라는 검법은 더욱 참담한 패배를 당하게 된다는 사실마저 알게 되었고, 그 후부터 자연 그 검초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다시 집어삼키곤 했다.

(그 일초는 쓸모가 없읍니다. 상대방에 의해 깨뜨려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시대자와 육후아 앞에서 사모님이 자부하고 있는 일초의 검법을 깎아내릴 수가 없었다.
악불군은 그의 표정이 귿어지자 급히 물었다.

[그 검법을 너는 아직도 연성하지 못했느냐? 그래도 상관없다.
이 검초는 우리 화산파 검법의 극치라 할 수 있다. 너의 내공 조예가 아직 충분하지 않으니만큼 제대로 연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일이 흐르게 되면 모자라는 점을 보충할 수 있다.]
악 부인도 웃으며 말했다.

[충아. 사부님께 고맙다고 인사를 드려라. 너의 사부는 너에게 자하공(紫霞功)의 내공을 전수해 주겠다고 응낙하셨다.]
영호충은 흠칫하며 말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무릎을 끓으려고 했다.
악불군은 손을 뻗어 저지하며 웃었다.

[자하공은 본문의 최고의 내공이다. 내가 가볍게 전수하지 않는 것은 인색해서가 아니다. 다만 이 기공을 연마하려면 마음속에 잡념이 없어야 하고 거침이 없어 앞으로 나가듯 열심히 연마해야 하고 중도에서 지체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무공을 연마하는 사람에게 큰 해를 미치게 되고 주화입마(走火入魔)하게 된다. 충아, 내가 먼저 네가 반년간 무공을 익힌 진도가 어떤지 보고나서 자하공을 전수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하겠다.]

시대자와 육후아 악영산 세 사람은 대사형이 자하공을 전수받게 되었다는 말에 부러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자하공의 위력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옛부터 '화산구공(華山九功) 제일자하(第一紫霞)' 라는 말이 있었다. 그들은 본문의 제자들 가운데 무공이 있어 영호충이 으뜸가기 때문에 이후 반드시 영호충이 사부의 뒤를 이어받아 화산파의 장문인이 되리라고 예상하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사부가 이토록 빨리 화산파의 제일신공을 전수해 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육후아는 말했다.

[대사형은 매우 열심입니다. 제가 밥을 가져오면 언제나 바위에 앉아서 기공을 연마하거나 검법을 연마하고 있었읍니다.]
악영산은 그를 흘겨주며 얼굴을 찡그렸다.

(저 육후아는 대사형을 돕기 위해서 내 앞에서 사부님께 거짓말을 하는구나.)

악 부인은웃으며 말했다.

[추아, 검을 들어라. 우리 사도 세 사람이 전백광을 죽이자구나. 다급해지면 부처님의 발을 밟고 싸움터에서 창날을 간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영호충은 의아하여 물었다.

[사모님 우리 세 사람이 전백광을 상대로 싸우는 것입니까?]
악 부인은 웃으며 말했다.

[겉으로는 네가 도전을 하고 우리는 숨어서 몰래 그를 죽이는거야. 누가 그를 죽이든 모두 네가 죽였다고 할 게 아니냐? 그러면 무림동도의 신분에 어긋났다는 말을 사부님은 듣지 않을 것이다.]
악영산은 손뼉을 치고 웃으며 말했다.

[잘 되었군요. 아버님과 어머님이 도우신다면 저도 전백광에게 도전할 자신이 있어요. 그렇다면 나는 전백광을 죽인 여호걸이 되죠.]

악 부인은 웃으며 말했다.

[너는 너무 명예욕이 강해. 다 된 밥을 네가 지었다고 가로채고 싶은게지? 너의 대사형으로 말하면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전백광과 두 차례에 걸쳐 수백 초나 싸웠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의 허실을 잘 알고 있다. 너의 그까짓 재간으로는 덤비자마자 목이 달아날거다. 더군다나 너는 훌륭한 규수다. 입으로그 악적의 이름을 담는 것조차 삼가해야 하는데 그와 맞서 싸운다는 것은 더욱 있을 수가 없다.]

그러면서 찍 하고 영호충의 가슴을 향해 찔러 왔다.
그녀는 딸에게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허리에서 장검을 뽑아들고 영호충의 요혈을 찔러온 것이다. 영호충의 임기웅변 역시 신기할 정도로 빨라싼. 즉시 검을 뽑아 밀어 붙였다. '창' 하는 소리가 나면서 검이 맞부딪치는 순간 영호충은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악 부인은 '휙휙휙' 하며 잇달아 여섯 검을 찔러 내었고 '창창창' 하는 소리가 여섯번 울려 퍼지는 가운데 영호충은 검을 휘둘러 모두 막아내고 있었다.
악 부인은 호통을 쳤다.

[반격해라!]

그리고 별안간 검법을 바꾸었다. 거믓띵 쳐들고 곧장 내려치는가하면 재빠르기 이를데 없이 내려찍고 베고 하는데 결코 화산파의 검법이 아니었다. 영호충은 즉시 사모님이 전맥광의 쾌도를 펼쳐 그 자신으로 하여금 전백광의 공세를 막아내도록 하려는 속셈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악 부인은 펼치는 초식을 갈수록 빨라졌다. 악 부인의 일초와 일초는이미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펼쳐지고 있었다.
악영산은 부친을 향해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의 저 초식들은 빠르기는 하지만 검법에 불과하지 도법은 아니예요. 아무래도 전백광의 쾌도는 저와 같지 않을거예요.]

악불군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전백광의 무공은 뛰어나다. 그의 도법을 펼치기가 어찌 쉬운 일이겠느냐? 애미 역시 그의 도법을 모방할 수가 없단다. 다만 쾌(快)라는 요결을 극치로 발휘하고자 할 뿐이다. 전백광을 깨뜨림에 있어서는 그의 도법의 신속함을 제압해야하는 것이다. 저것봐라 좋아! 유봉래의(有鳳來儀)!]

그는 영호충이 두 어깨를 살작 내려뜨리며 왼손의 검결지를 비스듬히 이끌어 들이면서 오른팔굽을 슬쩍 움츠리는 즉시 유봉래의 일초르 펼치는 광경을 보았던 것이다. 이 일초르 이때 펼치는 것은 실로 합당했다. 그래서 크게 칭찬의 말을 던진 것이었다.
그런데 영호충은 일검을 비스듬히 힘없이 찔러내는게 아닌가? 그러자 악 부인이 펼쳐놓은 검의 그물을 꿰뚫을 수 없었다. 악불군은 생각했다.

(저런...... 저 검초를 헛 익혔군!)

악 부인은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휙휙휙 잇달아 삼검을 찔러 영호충으로 하여금 손발이 어지러워지도록 만들었다.
악불군은 영호충의 초식이 일정한 법칙이 없이 아무렇게 방어를 하는데 십초 가운데 삼초가 화산파의 검술이 아닌 것을 보고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게 되었다. 그런데 영호충의 검법은 어지럽고 법칙이 없었지만 악 부인의 날카로운 공세를 여유 있게 막아내지 않은가? 이때 영호충은 벼랑까지 물러가게 되었는데 퇴로가 없어 지자 그는 갑자기 반격을 개시했다. 그는 기회를 포착하여 '창송영객' 이라는 일초를 펼쳤다. 검화(劍花)를 허공에 수놓으며 악 부인의 미간과 귀뿌리 쪽으로 검끝을 겨냥하며 번개같이 공격해 갔다.
악 부인은 창하고 일검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급히 검화를 뿌려 몸을 지켰다. 그녀는 이 창송영객이라는 일초가 전개되면 곧이어 몇가지 무서운 초식이 펼쳐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영호충은 이 일초를 평소 익숙하게 연성했기 때문에 정말 자기를 찔러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해도 쉽게 막아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수비할 태세를 취하고 정신을 가다듬고 기다렸다.
뜻밖에도 영호충은 장검을 비스듬히 찔러내는데 그 기세가 느렸고, 검에 실린 기운도 약해지더니 제풀에 검을 거두는 게 아닌가? 악 부인은 호통을 쳤다.

[마음을 써서 초식을 펼쳐야지! 도대체 너는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냐?]

그리고 휙휙휙 하고 잇달아 삼검을 찔러냈다. 그리고 영호충이 몸을 훌쩍 날려 피하는 것을 보고 말했다.

[그 창송영객이라는 일초의 꼴이 뭐냐? 병을 앓고 나서 검법을 모조리 사부님께 되돌려 주었단 말이냐?]

영호충은 말했다.

[녜.]

그리고 얼굴에 부끄러운 빛을 띄우고 재차 검법을 펼쳐 반격했다.
시대자와 육후아는 사부의 얼굴이 점점 불쾌해지는 것을 보고 속으로 똑같이 가슴을 두근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소리가 휙휙 일어나는 가운데 악 부인이 장소가 좁다는듯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에 걸치고 있는 청삼이 한폭의 푸른 그림자로 변했다. 그리고 검의 광채가 번쩍이는 가운데 검초를 다시 분간할 수 엇었다. 영호충의 머리는 어지럽지만 했고 갖가지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했다.

(만약에 야마분치(野馬奔馳)를 펼친다면 상대방의 곤봉을 비껴막는 절묘한 초식에 의해 개뜨려질 것이다. 내가 만약 그 일초를 계속하여 펼친다면 나 자신은 반드시 나중에 중상을 입고 말 것이다.)

그는 매번 화산파의 검법을 펼칠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석벽에서 본 깨뜨리는 방법을 상기하곤 했다. 먼저번 그가 유봉래의와 창송영객을 펼쳤다가 중도에서 그만둔 것은 바로 그 초식을 깨뜨리는 방법을 상기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연 몸이 움츠러들고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악 부인이 쾌검을 펼친 것은 그를 이끌어 무쌍무대 영씨일검을 펼치도록 하여 적을 격파하고 공을 세우도록 하자는데 있었다. 그러나 영호충은 제정신이 아닌 듯했고 전전긍긍하여 혼이 붙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평소 영호충은 간담이 지극히 크며 하늘과 땅이 무서운 줄 모르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처럼 당황해 하는 꼴을 보게 되자 크게 울화가 치밀었다.

[어째서 그 초식을 끝까지 펼치지 않지?]

영호충은 말했다.

[녜.]

그는 검을 들고 곧장 찔러갔다. 내공을 돋우는 방법과 검을 펼치는 초식은 마치 악 부인이 창안해낸 무쌍무대 영씨일검과 같았다.
악 부인은 말했다.

[좋아!]

부인은 이 일초가 날카롭기 이를데 없어 정면으로 대하지 못하고 몸을 비스듬히 날려 피했다. 그리고 검을 돌려 영호충의 검을 쳐내려고 했다.
이때 영호충은 생각했다.

(이 일초는 되지 않는다. 소용없다. 일패도지이다.)

그는 손목에 커다란 힘이 와 닿는 것을 느꼈다. 장검이 붕하고 떠올라 허공을 향해 날아갔다. 그는 깜작 놀라 '아' 하고 소리를 냈다.
악 부인은 검을 뻗어 찔러 내었는데 검광은 무지개처럼 뻗쳤고 '찍찍' 하는 소리가 일었다. 그녀는 무쌍무대 영씨일검을 펼친 것이다.
이때 펼친 위력은 부인이 처음 펼쳤던 날보다 위력이 훨씬 커져 있었다.
그녀는 이 일초를 창안한 후 매우 의기양양했고 매일같이 연구했던 것이다. 어떻게 초식을 펼치면 더욱 빠를까? 어떻게 내공을 더욱 강하게 실을까? 어떻게 일격에 적중시켜 적을 물리칠까 하는 점을 연구한 터였다. 그녀는 영호충의 검이 중도에 이르렀을 때는 호랑이를 그리려다가 고양이를 그려 놓은 격이 되었으며, 위력이 강한 초식이 형편없이 질질 끌려가는게 허수아비가 손짓하는 것과 같자, 화가 나서 자기 스스로가 그 일초를 펼쳤던 것이었다. 그녀는 제자에게 상처를 입힐 생각은 없었으나 검세가 너무 강했다.
검세가 뻗어나며 어느덧 영호충의 전신을 뒤덮어 버리고 말았다.
악불군은 이미 영호충이 피할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반격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악불군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큰일났다!)

그리고 재빨리 딸이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들고 한 걸음 내딛었다. 악 부인의 장검이 다시 반 자 정도만 들이밀어진다면 그는 달려들어 검으로 막을 작정이었다.
사실 그들 부부의 재간은 별 차이가 없었다. 악불군이 조금 낫다해도 악 부인이 승기를 점하고 있으니 정말 악불군이 그녀의 장검을 밀어낼 수 있을지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고 영호충이 상처를 입더라도 가볍기를 바랄 뿐이었다.
전광석화 같은 순간이었다. 영호충은 손이 닿는 대로 허리에 찬 검집을 더듬게 되었고 몸을 움츠리며 허리를 구부리고 끓어 앉는 듯한 시늉을 해보였다. 그리고 검집을 들어 악 부인이 찔러오는 검을 겨냥하고 마주 내밀었다. 이 일초는 바로 뒷동굴 석벽에 그려져 있는 도형의 하나로써 곤봉을 쓰는 자가 상대방이 찔러오는 검을 마주 찔러 나가는 형세였으며 곤봉과 검이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쌍방의 내력이 마주치면 장검이 반드시 부러지는 초식이었다.
영호충은 장검이 손에서 날아가 버렸고 곧이어 사모님이 벼락같이 공격하는지라 그렇지 않아도 혼란되어 있던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이 석벽의 여러가지 초식이었다. 악 부인은 일검에 항거 할 수 없게 되자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연히 석벽의 일초를 펼치게 되었던 것이다.
찔러오는 검도 빨랐지만 그가 내미는 검집도 빨랐다.
이 일초가 펼쳐지자 팔에 실린 내공이 자연적으로 뻗쳐나갔다.
이때 '싹' 하는 소리가 나며 악 부인의 장검이 곧장 그의 검집에 꽂히게 되었다. 영호충은 당황하고 급해서 검집을 거꾸로하지 못하고 잡히는대로 검집을 들어 상대방의 검과 맞서게 되었던 것이다. 찔러오는 검을 겨냥한 것은 바로 검집의 입구였다. 악 부인의 장검에 충격을 주는 대신 그 검이 검집에 꽂히게 되었던 것이다.

악 부인은 깜작 놀랐다. 손아귀가 격렬하게 아파오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장검을 놓치고 말았다. 영호충이 검집을 용해 빼앗은 격이었다. 영호충의 이 일초는 뒤에 몇 수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뻗어나가는 공격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검집을 뻗쳐내면서 악 부인을 향해 찔러갔다. 지금 그녀의 몸에 있는 급소를 겨누는 ?痼?바로 악 부인이 사용했던 장검의 자루였다.
악불군은 놀람과 분노를 함께 느끼며 장검을 휘둘러 영호충의 검집을 후려쳤다. 이때 그는 자하공을 돋우었다. 영호충은 전신이 화끈 달아옴을 느끼고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검집은 장검이 꽂혀 있는 채로 서너 토막이 나서 땅바닥에 떨어졌다. 이때 하얀 광채가 번쩍이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던 장검이 땅바닥에 떨어졌는데 자루가 있는 곳까지 푹 꽂혔다. 시대자와 육후아, 악영산 세 사람은 눈이 어지러워 모두 멍청하게 넋을 잃고 있2었다. 악불군은 영호충의 앞으로 가 철썩철썩하며 잇달아 그의 뱝을 갈기고 노기어린 어조로 호통을 내질렀다.

[이 녀석,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영호충은 머리가 어지러웠고 몸을 휘청거렸다. 그는 땅바닥에 엎드리며 말했다.

[사부님, 사모님. 제자 죽을 죄를 지었읍니다.]

악불군은 분노가 극에 달해 호통쳤다.

[이 반년 동안 너는 사과애에서 무엇을 뉘우쳤으며 무슨 무공을 익혔느냐?]

영호충은 말했다.

[제...... 제자는...... 제자는 아무것도 연마하지 못했읍니다2.]

악불군은 큰 소리로 다그쳐 물었다.

[네가 사모님을 상대로 한 일초는 얼떨결에 생각해낸 것이냐?]
영호충은 말했다.

[제자...... 제자는 위급한 김에 아무렇게나 펼친 것입니다.]
악불군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네가 생각도 없이 아무렇게나 펼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같이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네 자신은 사악한 길로 드어서서 좀처럼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느냐?]

영호충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2
악 부인은 한참 후에야 정신을 가다듬었다. 영호충이 남편에게 따귀를 맞아 두 뺨이 부어 올랐고, 푸른 멍이 들자 가여운 생각이 나서 말했다.

[일어나거라. 이 가운데에 있는 속사정을 너는 본래 모르고 있으니 탓할 수야 없지.]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남편에게 말했다.

[사형, 충아는 자질이 뛰어나고 총명하기 때문에 이 반년간 우리 두 사람을 보지 못하고 무공을 연마하느라고 그만 사악한 길로 접어들었나 봐요. 아직 사악한 길로 들어선 지 얼마되지 않으니 즉시 바로잡아 주면 될 것2이예요.]

악불군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일어나거라.]

영호충은 몸을 일으키고 땅바닥에 세 토막이 나 있는 장검과 검집을 내려다 보며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째서 사부와 사모님이 자기가 무공을 연마하다가 사악한 길로 들어섰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악불군은 시대자 등에게 손짓을 하고 말했다.

[이리 다가오너라.]

시대자, 육후아, 악영산 등은 일제히 말했다.

[녜.]

그리고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악불군은 바위 위에 앉아 천천히 말했다.

[이십 오 년 전의 2일이다. 본문의 무공은 정(正)과 사(邪)로 나누어져 있었다.]

제자들은 모두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화산파의 무공은 화산파의 무공일 뿐인데 어떻게 정과 사로 나누어진단 말인가? 예전엔 왜 그런 말을 들어보지 못했을까?)
악영산은 말했다.

[아버지, 우리가 연마한 것은 당연히 정통 무공이겠죠?]
악불군은 말했다.

[그야 물론이다. 그것이 방문좌도의 무공일 까닭이 있겠느냐? 다만 방문좌도의 어떤 사람들이 스스로 정통이라고 하면서 우리 보고 좌도라고 말했을 뿐이야. 그러나2 세월이 흐르게 되자 정과 사는 저절로 분별이 나게 되고 방문좌도의 파벌은 끝내 구름처럼 연기처럼 사라져 없어졌으며, 이십 오 년 동안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악영산은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보고 듣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군요. 아버지, 그 방문좌도의 일파가 소멸되었다면 더 상관할 것 없잖아요.]
악불군은 말했다.

[네가 무엇을 안다고 그래? 방문좌도라고 해서 모두 사마외도(邪魔外道)가 아니다. 그것 역시 본문의 무공이다. 다만 무공을 연마하는 중점이 다를2 뿐이다. 내가 너희들에게 무공을 가르칠 때 가장 먼저 무엇을 가르치더냐?]

그는 눈을 들어 영호충을 바라보았다.
영호충은 말했다.

[가장 먼저 전수해 주신 것은 내공을 기르는 요결이고 내공을 연마하는 것부터 시작했죠.]

악불군은 말했다.

[그렇다. 화산일파의 무공의 요점은 바로 기(氣)라는 한 글자에 있다. 기는 내공으로서 일단 형성되면 권각법을 펼치건 칼과 검을 휘두르건 상대방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본문의 무공을 연마하는 정도(正途)이다. 그러나 본문의 선2배 가운데 일파의 인물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본문 무공의 요점이 검(劍)에 있다고 주장했다. 검술은 일단 연성하고 내공이 약하다 해도 적을 제압하고 이길 수 있다고 했다. 정사지간(正邪之間)의 차이는 바로 이점에 있다.]

악영산은 말했다.

[아버지, 제가 한 마디 하겠는데 화내지 마세요.]

악불군은 말했다.

[무슨 말이냐?]

악영산은 말했다.

[저는 본문의 무공중 기공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검술 역시 경시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만약 기공이 뛰어나지만 검법을 제대로 연?또舊?않았다면 본문의 무공도 제대로 위풍을 나타낼 수 없다고 생각해요.]

악불군은 코웃음쳤다.

[흥! 누가 검법이 중요하지 않다고 했느냐? 요점은 주종(主從)이 다르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역시 기공이 주가 된다는 것이지.]

악영산은 말했다.

[기공이나 검법 두 가지 다 주가 되는 게 좋겠어요.]
악불군은 노해 말했다.

[그 한마디는 바로 마도(魔道)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두 가지 다 주가 된다면 두 가지 다 주가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소위 강거목장(綱擧目張)이라??무엇이 강(綱)이며 무엇이 목(目)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과거 본문은 정사의 차이로 크게 한마탕 소란이 일었었다. 네가 그 말을 삼십 년전 했더라면 아마 반나절도 되지 않아 목과 몸이 분리되었을 것이다.]

악영산은 혀를 쏙 내밀고 말했다.

[말 한 마디 잘못했다고 목이 떨어지다니, 어찌 그토록 흉악하고 야만적일 수 있나요?]

악불군은 말했다.

[내가 젊었을 때는 본문의 기검양종(氣劍兩宗) 사이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었다. 너의 그 같은 말이 그 당시에 공공연히 내뱉어졌다??기종(氣宗)에서 너를 죽일 뿐만 아니라 검종(劍宗)에서도 너를 죽이려고 했을 것이다. 기공과 검법 두 가지가 다 중요하고 주종을 가늠할 수 없다고 하면 기종에선 자연히 네가 검종의 신분을 높이게 되었다고 할 것이고 검종에선 네가 강과 목을 혼합하고 있으니 대역무도하다고 했을 것이다.]

악영산은 말했다.

[누가 옳고 그른지 다툴 것이 아니라 시합을 해보면 판가름이 날 것 아니예요?]

악불군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삼십 년 전 우리 기종은 소수였으며 검종의 사백부와 사숙들??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검종의 무공은 성취가 빨랐고 빨리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모두 십 년 동안 무공을 연마했다면 반드시 검종이 우세를 차지하게 되고 모두 이십 년을 연마했다면 각기 우열에 있어 승부를 판가름 할 수 없게 되다. 그러나 이십 년 이후가 되면 기종을 연마한 사람이 점차 강해지고 삼십 년을 연마하게 되면 검종을 연마하는 사람은 다시 기종을 따라 올 수 없다. 그러니까 이십 년이 지난 다음에야 진정으로 높고 낮음이 판가름나는데 그 이십 년 간 쌍방이 얼?떨?격렬하게 싸웠는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악영산은 말했다.

[나중에 검종일파는 졌다고 인정했겠죠?]

악불군은 고개를 흔들며 대답하지 않더니 잠시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들은 죽어도 패배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옥녀봉 위에서 크게 싸운 뒤 일패도지하게 되었으나 대다수의...... 검종 사람들은 검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을 했고, 살아 남은 사람들은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강호에 나타나지 않았다.]

영호충을 비롯한 제자들은 '아' 하고 놀랐다.
악영산은 말했다.

[모두가 사형제인데 검술시합의 승패를 그토록 따져 뭐해요? 왜 그처럼 마음 좁게 생각했을까요?]

악불군은 말했다.

[무학의 근본을 따지는 일은 결코 사형제들끼리 무공 시합을 가지는 일과는 다르다. 과거 오악검파에서 맹주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었을 때 인재의 많음과 무공의 고강함에 있어서 본파가 으뜸이었다. 그러나 본파에 내분이 생기자 옥녀봉에서 크게 검술 시합을 가진 후 이십여 명이나 되는 고수들이 죽고 말았다. 검종이 대패하기는 했으나 기종의 고수들도 적지 않게 죽었다. 그랫 맹주의 자리를 숭산파에 빼앗기고 말았다. 그 화근을 따지고 보면 기검(氣劍)의 다툼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자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악불군은 말했다.

[본파가 오악검파의 맹주가 되지 못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 화산파가 위명을 떨치지 못한 일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본파에서 사형제끼리 분쟁이 일어나 스스로 죽고 죽인 것이다. 동문 사형제는 본래 골육처럼 다정했다. 그런데 네가 나를 죽이고 내가 너를 죽이는 참혹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오늘에 이르러서도 과거 옥녀봉에서 전개되었던 처절한 싸움을 회상하며 여전히 두려운 마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구나.]

그는 시선을 들어 부인을 바라보았다.
악 부인은 얼굴에도 공포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아마도 본파 고수가 서로 도살하던 과거의 정경을 되돌이켜 보고 자기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낀 듯했다.
악불군은 천천히 앞섶을 헤치더니 가슴을 내밀었다.
악영산이 부르짖었다.

[어마! 아버님......]

악불군의 가슴에는 비스듬한 두자 길이의 상처가 나 있었다. 그 상처는 왼쪽 어깨에서 비스듬히 오른쪽으로 나 있었는데상처자국은 이미 치유된 지 오래 됫 것 같았지만 여전히 담홍색의 빛을 띄우고 있었다. 과거에 깊은 상처를 입었으며 목숨까지 잃을 뻔 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영호충과 악영산은 어려서부터 악불군 밑에서 자라난 몸이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야 그의 몸에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악불군은 옷자락을 여미고 말했다.

[그날 옥녀봉의 큰 싸움에서 나는 본문의 사숙에게 일검을 맞고 기절하고 말았다. 그는 이미 내가 죽은 줄 알고 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다시 일검을 찔렀다면...... 허허허!]
악영산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되었다면 아버지의 오늘은 없을 것이고 악영산도 없었겠죠?]

악불군은 빙그레 웃었으나 그 웃음은 여전히 침통했다.

[이것은 본문의 커다란 비밀이니 그 누구도 외부에 누설하지 말아라. 다른 파의 인사들은 화산파의 고수들이 하루 아침에 죽거나 상처를 입은 사시에 대하여 참된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 우리는 그저 전염병에 걸렸다고 했지. 본파의 수치스런 일을 다른 파에 알릴 수는 없었다. 그 가운데의 원인이나 결과를 오늘 너희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실로 이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충아가 만약 지금처럼 나간다면 삼 년이 되지 않아 기공보다 검법을 중시하는 마음을 품게 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위험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되면 비단 자신을 망칠 뿐 아니라 과거 무수한 선배들이 목숨처럼 바꾼 본문의 정통무학을 망치게 되고 나아가 화산파는 너 때문에 멸망하고 말 것이다.]

영호충은 그 같은 말을 듣고 전신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제자는 큰 잘못을 저질렀읍니다. 사부님과 사모님은 엄한 벌을 내려 주십시오.]

악불군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고 한 짓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과거 검종의 사숙부님과 사백부님들 역시 하나같이 좋은 마음을 품고 고강한 무학으로 본문을 빛내려고 했다. 하지만 일단 검종이 옳다고 생각하자, 점점 더 깊이 빠져들게 되고 나중에는 그 길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만약 너를 꾸짖지 않았다면 너의 자질과 성질로 볼 때 검종과 같은
길로 들어설 것이고 빠른 성취를 이루어 악한 길로 들어설 것이다.]

영호충은 대답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악 부인은 말했다.

[충아야, 조금 전 네가 나의 장검을 검집으로 받은 것은 어렵게 생각해 낸 것이냐?]

영호충은 부끄러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제자는 사모님의 날카로운 일격을 막으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뜻밖에도......]

악 부인은 말했다.

[바로 그것이다. 기종과 검종의 높고 낮음을 이제 명백하게 알았을 것이다. 너의 그 일초는 교묘했지만 너의 사부의 상승기공에 부딪치자 기묘한초식이었지만 아무런 힘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과거 옥녀봉 위의 혈투에서 검종의 고수들의 검기는 무지개처럼 허공을 뒤집고 검초는 순식간에 천번만번 변화했다. 그러나 너의 사조부께서 연성하신 자하공으로 그들의 변화무쌍한 검법을 이기고 정으로서 동을 제압했단다. 사조부님은 검종의 십여 명이나 되는 고수들을 일격에 격살하시고 본문의 정통무학이 천년이 흘러도 흔들리지 않는 기틀을 세우셨다. 오늘 너희들은 사부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모두들 깊이 생각하고 몸으로 행하도록 해라. 본문의 무공은 기를 체(體)로 하고 검을 용(用)으로 하며 기는 주가 되고 검은 종이 되며 기가 강이면 검은 목이 된다. 기는 제대로 연마하지 않으면 검술이 아무리 강하다해도 결국 쓸모가 없게 되는 것이다.]

영호충과 시대자, 육후아, 악영산은 일제히 허리를 구부리고 가르침을 받았다.
악불군은 말했다.

[충아, 나는 오늘 너에게 자하공의 요결을 전수하고 너를 데리고 산에서 내려가 전백광이라는 그 악적을 죽이려고 했으나 이 일은 연기할 수밖에 없다. 이 두 달 동안 너는 내가 전수한 기공을열심히 연마하도록 하여라. 이후에는 방문좌도의 괴상야릇한 검법을 모조리 잊도록 해라. 내가 나중에 시험하여 네가 정말 진보했는지 두고 보겠다.]

거기까지 말한 그의 표정이 갑자기 엄숙하게 변했다.

[만약 네가 깨닫지 못하고 계속 사악한 검종의 길로 나가게 되어 무거우면 너의 목숨을 빼앗을 것이고 가벼우면 너의 무공을 없애고 본문에서 쫓아낼 것이다. 그때 네가 아무리 빌고 애걸해도 이미 늦은 것이다. 내가 먼저 네게 분명히 알려주지 않았다고 탓하지 말아라.]

영호충은 이마에 식음땀을 흘리며 말했다.

[네 제자는 결코 그 가르침을 잊지 않겠읍니다.]

악불군은 딸에게 몸을 돌리고 말했다.

[산아, 너와 육후아 두 사람은 성질이 매우 급하다. 내가 너의 대사형에게 한 말을 너희 두 사람도 마땅히 기억해 두어라.]
육후아는 말했다.

[녜.]

악영산은 말했다.
[저와 여섯째 사제는 성질이 급하지만 대사형처럼 총명하지 못하니 스스로 검초를 창안하지 못할거예요. 그러니 아버님은 안심하세요.]

악불군은 코웃음쳤다.

[스스로 검초를 창안하지 못한다고? 너와 충아는 충영검법을 창안하지 않았느냐?]

영호충과 악영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영호충은 말했다.

[그것은 제자가 터무니없는 장난을 한번 해보았을 뿐입니다.]
악영산은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오래 전의 일이예요. 그때 저는 어렸고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어요. 장난으로 한 것이예요. 그런데 아버님은 어떻게 아셨죠?]

악불군은 말했다.

[문하제자가 스스로 검법을 창안하고 문파를 세우는 데도 장문인이 모르고 있다면 그처럼 멍청한 사람이 있겠느냐?]

악영산은 아버지의 소맷자락을 잡으며 웃었다.

[아버님은 여전히 저를 놀리시는군요!]

영호충은 사부의 어조와 표정에서 추호도 웃는 빛을 볼 수 없자 마음속으로 흠칫 놀랐다.
악불군은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본문의 무공이 심후한 경지까지 도달한다면 꽃이나 잎을 날려서도 사람을 해칠 수 있다. 다른 사람은 화산파가 검술에 뛰어나다고 하지만 그것은 우리를 너무 작게 본 것이다.]

그는 왼손의 옷자락을 휘둘렀다. 그 세찬 소맷자락의 힘이 이르자, 육후아의 허리에 찬 장검이 검집에서 불쑥 튀어 나왔다. 악불군은 이어 오른쪽 소매도 펼쳐 검신을 후려쳤다. 그러자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장검은 두 토막이 나고 말았다. 영호충은 가슴이 뜨끔해짐을 느꼈다. 악 부인의 남편을 바라보았던 그 눈초리에는 흠모하는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악불군은 말했다.

[가자.]
그리고 부인과 먼저 벼랑 아래로 내려갔다. 악영산과 시대자가 그 뒤를 따랐다.
영호충은 땅바닥에 두 토막이 난 장검을 바라보며 놀람과 기쁨을 함께 느꼈다.

(원래 본문의 무학은 이토록 무서운 것이구나. 어떤 일초라도 사부의 손에서 펼쳐진다면 아무도 깨뜨릴 수 없겠구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뒷동굴 석벽에는 여러가지 도형이 새겨졌고 오악검파의 검초를 모조리 깨뜨리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오악검파는 지금까지 크게 명성을 떨치고 있으며 무림에 우뚝 서 있다. 원래 각 검파는 상승기공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검초에 웅후한 내력이 실려지기 때문에 쉽게 깨뜨려지지 않는 것이구나! 이 도리는 본래 평범한 것인데 나는 너무 깊이 생각한 나머지 외곬으로 빠져들게 되어 그만 망각하게 되었구나. 기실 똑같은 유봉래의라는 일초를 임 사제가 펼치는 것과 사부님이 펼치는 것은 위력이 크게 다르다.
석벽의 곤봉을 쓰는 사람은 임 사제의 유봉래의를 깨뜨릴 수 있지만 사부님의 유봉래의는 깨뜨릴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을 깨닫게 되자 수개월 동안 그를 번거롭게 하던 생각이 씻은 듯 사라졌고, 오늘 사부님으로부터 자하공을 전수받지 못하고 또 악영산은 자기에게 짝지워 주겠다는 언질을 받지 못했지만 그는 조금도 의기소침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산파의 무공에 대하여 믿음을 되찾게 되었다는 사실에 크게 위로를 받았다. 그러나 이 반개월 동안 사부와 사모님이 딸을 자기에게 짝지워 주실 것이라는 헛된 꿈을 꾼데 대해서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이튿날 저녁 무렵 육후아가 밥을 가지고 벼랑 위로 올라왔다.

[대사형, 사부님과 사모님은 오늘 아침 일찍 섬서성 북쪽으로 떠나셨읍니다.]

영호충은 의아해서 물었다.

[섬서성 북쪽이라고? 어째서 장안으로 가지 않으셨지?]
육후아는 말했다.

[전백광 그 녀석이 연안부(延安府)에서 몇가지 사건을 저질렀답니다. 그러니 그 악적은 장안에 없는거죠.]

영호충은 속으로 사부님과 사모님이 출마하게 된다면 전백광은 반드시 주살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애석함을 느꼈다.
전백광은 음란하고 색을 좋아하며 세상에 해를 끼치니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의 무공은 진정 고강한 편이고 자기와 두번이나 싸울 때 보여준 호탕한 성격은 사내대장부의 본색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가 자꾸만 나쁜 짓을 하여 무림의 공적이 된데 대하여 애석하게 생각했다.
그후 이틀 동안 그는 기공을 부지런히 연마했다. 석벽의 도형에 다시는 가 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마음속에 그것이 떠오를 때마다 즉시 그 생각을 쫓아냈으며 그 생각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다행히 사부님께서 호통을 쳐 저지하셨기 때문에 나는 본문의 죄인이 되는 불상사를 면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날 저녁 밥을 먹은 후 한 시간 가량 타좌하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벼랑 위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자국 소리가 매우 미약한 것이 무공이 매우 고강한 인물인 모양이었다.
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이 사람은 본문의 사람이 아니다. 무엇 때문에 벼랑 위로 올라오는 것일까? 혹시 복면의 청포인이 아닐까?)

그는 재빨리 뒷동굴로 달려가 화산파의 장검을 들어 허리에 차고 다시 앞동굴로 돌아왔다.
삽시간에 그 사람은 벼랑 위로 올라와서 큰 소리로 말했다.

[영호형, 옛 사람이 찾아왔소!]

그 소리는 매우 귀에 익었다. 놀랍게도 만리독행 전백광의 음성이었다.
영호충은 생각했다.

(사부님과 사모님께서도 너를 주살하려고 산을 내려가셨는데 너무 대담하게도 화산으로 올라왔구나. 무엇 때문에 올라왔을까?)
이 같은 생각을 하고 그는 동굴 입구로 나가며 웃음을 지었다.

[전형 멀리까지 찾아주시니 정말 뜻밖이외다.]

그런데 전백광은 어깨에 외짝지게를 지고 있었다. 영호충의 말을 듣자 지게를 내려놓고 두 개의 대바구니를 안에서 하나의 커다란 항아리를 꺼내고 웃으며 말했다.

[영호형이 화산 위에 감금되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술을 마시지 못해 입에서 노린내가 날 것이라고 생각해서 소제는 장안 적선주루(謫仙酒樓) 지하실에서 백 삼십 년 묵은 두 항아리의 술을 구해 영호형과 통쾌하게 마셔 보려고 가져왔소이다.]

영호충은 몇 걸음 다가갔다. 달빛이 비치는 아래 커다란 두 항아리에는 과연 적선주루라는 화금빛 글자가 씌인 붉은 바탕의 종이가 눈에 띄었다. 그 종이의 색이 매우 바랜 것으로 보아 최근의 물건은 아니었다. 그는 기쁨을 느끼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백근이나 되는 술을 짊어지고 화산 위를 오르다니 그 의리야말로 굉장한 것이구료. 자자! 우리 술을 마십시다.]

그리고 그는 동굴 안에서 두 새의 대접을 꺼내왔다. 전백광은 항아리를 봉했떤 마개를 뽑아 놓고 있었다. 술향기가 곧장 그들의 코에 스미는데 여간 향기롭지 않았다. 술을 입에 대기도 전에 영호충은 이미 취해오는 기분이었다.
전백광은 술항아리를 꺼꾸로 들어서 대접에 따르더니 말했다.

[그대가 맛보시오. 맛이 어떨지 모르겠구료.]

영호충은 대접의 술을 마신 후 큰 소리로 칭찬의 말을 던졌다.

[정말 좋은 술이오!]

그리고 한 대접의 술을 다 비우고 엄지손가락을 추켜 세웠다.

[천하의 명주로써 세상에서 보기 드문 술이군요!]

전백광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천하에 이름 있는 술이 북쪽의 분주(汾酒)와 남쪽의 소주(紹酒)라고 하는 말을 들었소. 가장 좋은 분주는 산서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안성에 있으며 장안성에서 으뜸가는 술로는 이태백이 때때로 가서 흠뻑 취하게 마셨다는 적선주가 제일이라는 소릴 들었소. 당금 세상에서는 이 두 항아리의 술 외에 다시 이 같은 맛좋은 술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오.]

영호충은 의아하여 물었다.

[설마 적선주루의 지하실에 이 두 항아리밖에 없었단 말이오?]
전백광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두 항아리를 꺼내고도 그곳에는 이백여 개의 항아리가 있었소. 나는 장안성의 벼슬아치나 귀인은 말할 것도 없고 범인이라도 허리에 돈만 있다면 적선루로 올라와 이같이 맛좋은 술을 마실 수 있겠지만 그들은 화산파 영호대협처럼 술을 즐기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오. 명주를 그 따위 인간들이 먹어서야 쓰겠소? 그래서 나는 우직끈 뚝딱 와르르 하고 지하실의 술항아리를 모조리 깨뜨려 술향기가 사방에 넘치고 술이 허리까지 차오도록 만들었다오.]

영호충은 놀랍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아니, 그렇다면 전형은 맛좋은 술을 이백여 항아리나 박살냈단 말이오?]

전백광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천하에 이 두 항아리밖에 없어야만 이 예물이 더욱 귀중하게 보이지 않겠소?]

영호충은 말했다.

[정말 고맙소.]

그리고는 다시 한 대접의 술을 마시고 말했다.

[기실 전형이 두 항아리의 술을 장안성에서 화산까지 긺어지고 온 것은 얼마나 귀찮고 고생스런 것이었겠소? 천하의 명주는 그만두고 두 항아리의 맑은 물을 가지고 왔다 하더라도 영호충은 그대의 정에 감격했을 것이외다.]

전백광은 오른손의 엄지손가락을 내보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역시 영호형은 사내대장부로군요!]

영호충은 물었다.

[전형은 왜 소제를 칭찬하는 것이오?]

전백광은 말했다.

[이 전가는 악이라면 모조리 저지르는 음적이외다. 그리고 한때 그대에게 칼질을 해 중상까지 입혔소. 거기다 화산 밑에서 많은 사건을 저질렀소. 화산의 아래 위를 막론하고 모두 나를 죽여야 시원할 것이오. 그러나 오늘 내가 술을 가져왔을 때 영호형은 태연히 마셨으며 술에 독을 타지 않았는지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소. 그러니 오로지 이처럼 흉금이 큰 사내대장부만이 이 천하명주를 마실 자격이 있다고 할 것이외다.]

영호충은 말했다.

[지나친 칭찬이시오. 소제는 전형과 두번이나 싸우는 동안 전형의 품행이 비록 단정하진 못했지만 본래 사람을 해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소. 더군다나 그대의 무공은 나보다 훨씬 고강하여 나의 목숨을 빼앗고자 한다면 칼을 뽑아 내려치기만 하면 될터인데 뭐가 어렵겠소?]

전백광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영호형의 말씀이 옳소. 그러나 나는 두 항아리의 술을 곧장 장안에서 화산으로 지고 온 것이 아니라오. 나는 백근이나 되는 술을 메고 섬서성 북쪽으로 가서 두 가지의 사건을 저질렀고 다시 섬서성 동쪽으로 가서 다시 두 가지의 사건을 저질렀소. 그런 연후에 화산으로 올라온 것이외다.]

영호충은 깜짝 놀라 생각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잠시 생각한 후 그는 짐작되는 바가 있어 입을 열었다.

[원래 전형이 끊임없이 사건을 저지른 것은 일부러 우리 사부님과 사모님을 유인해 낸 후 소제를 만나려고 한 것이구료? 그러니까 일종의 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를 쓴 것이구료? 그런데 저형이 수고스러움과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그런 것은 무슨 연유요?]

전백광은 웃으며 말했다.

[영호형께서 한번 알아 맞춰 보시구료.]

영호충은 말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구료.]

그리고 한 대접의 술을 따르며 말했다.

[전형, 그대는 화산에 온 손님이오. 황량항 산 속에 드릴 만한 물건이 없으니 꽃을 빌어 부처님에게 바친다고 그대의 술을 빌어 경의를 표하겠소. 천하에서 제일가는 맛 좋은 술을 한 대접 마시구료.]

전백광은 말했다.

[정말 고맙소.]

그리고 한 대접의 술을 비웠다. 영호충도 함께 마셨다. 두 사람은 술대접을 비운 후 껄껄 웃으며 동시에 대접을 내려놓았다. 영호충은 별안간 오른발을 내밀어 퍽퍽하는 소리와 함께 두 항아리의 술을 차서 깊은 골짜기 아래로 떨어뜨렸다. 골짜기 밑에서 둔탁한 소리가 두번 들렸다.
전백광은 놀라 물었다.

[영호형이 술항아리를 차버린 것은 무엇 때문이오?]

영호충은 말했다.

[그대와 나는 길이 다르니 친해질 수 없는 것이오. 전백광, 그대는 많은 죄를 저질렀고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여 무림에서는 모두 이를 갈고 있소. 영호충은 그대가 소탈하여 결코 비영띵하거나 왜소한 잡배가 아니라는 점을 높이 사서 그대와 함께 세 대접의 술을 마셨던 것이오. 얼굴을 맞댄 정은 이로써 다한 셈이오.
이제 두 항아리의 맛 좋은 술은 고사하고 이 천하에서 가장 값진 보물을 모조리 나의 앞에 쌓아 놓는다 해도 이 영호충은 그대의 친구가 될 수 없는 일이오.]

그리고 '휙' 하니 장검을 뽑아들었다.

[전백광, 불초는 오늘 그대의 쾌도로 펼치는 수법을 가르침 받겠소.]

전백광은 고개를 가로저을 뿐 칼을 뽑지 않고 미소지었다.

[영호형, 화산파의 검법은 지극히 고강하오. 그러나 그대는 나이가 아직 젊고 공력이 모자라오. 지금 칼을 쓰거나 검을 휘두른다 해도 역시 이 전모의 적수는 되지 못할 것이오.]

영호충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소. 영호충은 십년 안에는 그대를 죽일 수 없을 것이오.]

그러면서 검을 검집에 꽂았다.
전백광은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상황을 잘 판단하는 자가 호걸이라고 했소.]
영호충은 말했다.

[영호충은 강호의 무명소졸에 불과하오. 전형이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화산까지 온 것은 나의 목을 가져가려는 게 아니었군요.
그대와 나는 적이지 친구는 아니오. 전형이 어떤 녕령을 내리건 불초는 일절 받아들일 수 없소.]

그는 몸을 흔들하더니 벼랑 뒤로 돌아갔다. 그는 상대방이 만리독행이라고 불리며 발걸음이 기이하도록 빠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전백광의 도법이 뛰어난 것도 사실이었다. 뮤에 뛰어난 사람이 많이 있었지만 전백광이 십여 년이 넘도록 악한 짓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도 그를 처치하지 못했다. 그를 포위하여 잡으려고 했지만 시종 그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은 그의 경신법이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영호충은 한발을 내딛자 즉시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그가 빨리 돌아섰으나 전백광은 그보다 훨씬 빨랐다. 영호충이 겨우 수장을 달려갔을 때 전백광이 어느새 앞을 가로막았다. 영호충은 즉시 몸을 돌리고 벼랑 아래 쪽으로 뛰어 내려가려고 했다.
그런데 전백광은 다시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양손을 벌리고 껄껄 웃었다. 영호충은 세 걸음 물러서며 부르짖었다.

[도망치지 못한다면 싸울 수밖에 없는 법, 나는 협조자를 부르겠으니 전형은 너무 탓하지 마시오.]

전백광은 말했다.

[스승이신 악 선생이 만약 이곳에 달려온다면 그땐 이 전모가 발밑에 기름칠을 하고 도망을 쳐야 할 것이오. 그러나 악 선생과 악 부인은 섬서성 동쪽 오백리 밖에 계시니 이리로 달려와 구할 수 없을 것이외다. 영호형의 사제들과 사매들은 수는 많지만 벼랑 위로 올라온다고 해도 여전히 전모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오.
남자들은 오히려 헛되이 목숨을 잃게 되고 여자들은...... 허허허허]

높은 웃음소리는 불칙했다.
영호충은 깜짝 놀라 생각했다.

(사과애는 외따로 떨어져 있는 곳이다. 소리를 아무리 크게 지른다 해도 사제와 사매들은 듣지 못할 것이다. 이 사람은 유명한 채화음적이다. 소사매가 그에게 발견된다면...... 아이쿠, 위험하게 된다. 소사매의 화용월태를 이 채화음적이 보았다면 나는.....
그녀에게 속죄할 길이 없게 된다.)

그는 눈을 껌벅이며 생각했다.

(지금으로선 그와 시간을 끌 수밖에 없다. 힘으로 맞설 수 없다면 지혜로써 맞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부님과 사모님이 산으로 오실 때까지 시간을 끌 수가 있다면 좋으련만......)

생각을 마친 영호충은 말했다.

[좋소. 이 영호충은 그대와 싸워 이길 수도 없고 또 도망칠 수도 없으며 협조자도 불러올 수 없으니......]

그리고 손을 벌려 보았다. 어찌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뜻은 '그대가 어떻게 하려면 해라. 나로선 명으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다' 는 뜻이기도 했다.
전백광은 웃으며 말했다.

[영호형, 그대는 결코 나의 뜻을 오해하지 마시오. 그대는 이 전모가 그대를 난처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 일은 그대에게 크게 좋은 일이외다. 장래 그대는 반드시 나에게 깊이 사례하게 될 것이오.]

영호충은 손을 내저었다.

[그대는 나쁜 일을 많이 하여 명성이 자자하오. 이후 나에게 어떤 좋은 일이 있든간에 이 영호충은 결코 당신과 함께 더러운 짓을 할 수가 없소.]

전백광은 웃으며 말했다.

[이 전모가 명성이 자자한 채화대도이고 영호형은 무림에서 제일 가는 군자(君子) 악 선생의 제자이니 물론 나와 함께 더러운 짓을 할 수 없을 것이오. 오늘 이렇게 된 바에야 애당초 왜 그런 짓을 저질렀소?]

영호충은 말했다.

[무슨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오?]

전백광은 웃으며 말했다.

[형산성 회안루에서 영호형과 이 전모가 함께 탁자에 앉아 술을 마시는 정을 나누었소.]

영호충은 말했다.

[영호충은 너제나 술을 목수보다 좋아하오. 함께 몇 잔의 술을 마셨다고 그게 뭐가 대단하오.?]

전백광은 말했다.

[형산 군옥원에서 영호형은 이 전모와 함께 기녀원에서 잠을 자게 된 풍류를 누리지 않았소?]

영호충은 '퉤' 하고 침을 뱉으며 말했다.

[그때 이 몸은 중상을 입고 남의 도움을 받아 잠시 군옥원에서 상처를 치료를 했을 뿐인데 어찌 기녀와 잤다고 할 수 있겠소?]
전백광은 말했다.

[그러나 군옥원에서 영호형은 두 분의 꽃같이 아름다운 소녀와 한 이불 속에서 즐거움을 나누지 않았소?]

영호충은 속으로 흠칫 했으나 큰 소리로 말했다.

[그대는 입으로 깨끗하지 못한 말로 함부로 하지 마시오! 이 영호충은 깨끗한 몸이고 그 두분 소저로 말하면 더욱 고결한 몸이오. 그대가 그와 같은 더러운 말을 한다면 나는 사정을 두지 않겠소.]

전백광은 웃으며 말했다.

[나에게 사정을 두지 않는다고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대가 화산파의 고결한 명성을 누리고자 했다면 당시 두 소저를 존중했어야 마땅한데 어째서 청성파, 형산파, 항산파 등 뭇영웅들 앞에서 두 소저와 한 이불을 덮었느냔 말이외다.]

영호충은 대노했다. '휙' 하고 주먹을 맹렬히 내질렀다.
전백광은 웃으며 피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 일은 그대가 아무리 억지를 쓴다 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외다. 당일 그대가 만약 침대 위의 이불 속에서 그들 두 소저에게 경박한 짓을 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그녀들이 그대에 대해 그리운 정을 이기지 못해 고통을 받을 까닭이 없을거요.]

영호충은 생각했다.

(이 자는 파렴치한이다. 무슨 말을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자를 상대로 아리송한 말을 계속했다간 듣기 거북한 말을 얼마나 많이 듣게 될런지 모른다. 그날 회안루에서 그는 나의 간계에 빠지게 되었다. 그가 한평생 가장 큰 치욕으로 여기고 있으니 그 일을 꺼내어 그의 입을 막아야겠다.)

그는 생각을 마치고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전형이 천리길을 마다하지 않고 화산에 무엇 때문에 왔는가 했더니 그대의 사부 의림이라는 젊은 여승의 명을 받고 두 항아리의 술을 나에게 보내 내가 그대같이 착한 제자를 만들어 준데 대해 고마움을 표하려고 했던 것이었구료? 하하하!]

전백광은 얼굴을 붉히다가 곧 침착을 되찾고 정색하며 말했다.

[그 두 항아리의 술은 이 전모 스스로 보낸 것이오. 그러나 이 전모가 화산까지 온 것은 확실히 의림 소사부와 관계가 있소.]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사부면 사부이지 어찌하여 대사부 소사부로 나눈단 말이오? 장부일언 중천금인데 설마 그대가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오? 의림 사매는 항산파의 제자요. 그대가 그 같은 사부를 모신다는 것은 운수가 대통한 것이 아니겠소? 하하하.]

전백광은 대노하여 손을 칼자루에 대고 뽑으려고 했다. 그러나 억지로 참으며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영호형, 그대는 손의 재주는 형편 없어도 입으로 씨부렁거리는 재주는 대단하구료.]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칼과 검, 권각법에 있어선 전형의 적수가 되지 못하니 입으로 상대할 수밖에 더 있겠소?]

전백광은 말했다.

[입으로 경박한 말을 논하는데는 이 전백광이 졌음을 시인하겠소. 영호형은 나를 따라갑시다.]

영호충은 말했다.

[가지 않겠소. 나는 죽인다 해도 가지 않겠소.]

전백광은 말했다.

[그대는 내가 그대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지 알기나 하오?]
영호충은 말했다.

[모르오. 하늘로 올라가도 좋고 땅으로 꺼져도 좋소. 전백광이 가는 곳에 이 영호충은 무조건 가지 않을 것이외다.]

전백광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나는 영호형과 함께 의림 소사부를 만나보려고 하는 것이오.]
영호충은 깜짝 놀라 말했다.

[의림 사매가그대의 손에 들어간 것이구료! 그대가 아랫 사람으로서 윗사람을 거역하다니! 감히 자기의 사부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다니!]

전백광은 노해 말했다.

[이 전모에겐 이미 스승이 다로 계셨었오. 그러나 몇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소. 다시는 의림을 소사부를 들먹이지 마시오.]
그리고 다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의림 소사부는 주야로 영호형을 생각하고 있소. 나는 그녀를 친구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녀에게 반푼어치도 실례된 행동을 하지 않았소. 그 일에 대해선 안심하시오. 우리 갑시다.]

영호충은 말했다.

[가지 않겠고. 무조건 가지 않겠소.]

전백광은 빙그레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호충은 말했다.

[그대는 왜 웃소? 그대의 무공이 높다고 해서 강제적으로 나를 끌고가려고 그러오?]

전백광은 말했다.

[전모는 영호형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대에게 죄를 짓고 싶지 않소. 그러나 크게 기뻐 달려왔다가 실망해서 돌아가고 싶진 않소.]

영호충은 말했다.

[전백광, 그대의 도법은 무척 고강하여 나를 죽이기는 쉽겠지요. 그러나 영호충에게 욕을 보이지는 못할 것이오. 그껏해야 목숨을 그대 손에 바치는 것뿐, 나를 잡아 산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전백광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그를 비스듬히 곁눈질하며 말했다.

[나는 남의 부탁을 받아 그대를 의림 소사부에게 모시고 가는 것이지 다른 뜻은 없소. 그런데 그대는 왜 목숨을 걸고 싸우려고 하시오?]

영호충은 말했다.

[내가 하고 싶지 않으면 설사 사부님에나 사모님은 물론 오악 맹주나 황제라고 해도 나를 어쩌지 못할거요. 가지 않겠소. 만번 십만번 말해도 가지 않겠단 말이오.]

전백광은 말했다.

[그대가 그렇게 나온다면 이 전모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구료.]
그리고 칼을 뽑아 들었다.
영호충은 노해 말했다.

[그대가 나를 사로잡겠다고 한 것부터가 이미 죄를 지은 것이오. 이 화산의 사과애는 바로 영호충은 목숨을 버리는 곳이 될 것이오.]

그리고 길게 휘파람을 내불며 검을 뽑아 들었다.
전백광은 한 걸음 물러서며 눈쌀을 찌푸리고 말했다.

[영호형, 그대와 나는 아무 원한이 없는데 목숨을 걸고 싸워야하오? 우리 다시 한번 내기를 합시다.]

영호충은 기뻤다.
(내기라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지. 만약 내가 이긴다면 말도 되지 않는 소리로 억지를 부릴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마친 그는 말했다.

[무슨 내기를 하자는 것이오? 나는 이겨도 가지 않을 것이고 지더라도 가지 않을 것이오.]

전백광은 웃었다.

[화산의 대제자가 전백광의 쾌도를 이토록 무서워하며 삼십 초도 감히 받을 생각을 못하다니 한심하군!]

영호충은 노해 부르짖었다.

[누가 그대를 두려워한다고 했소? 기것해야 그대의 한 칼에 죽기 밖에 더 하겠소?]

전백광은 말했다.

[영호형, 내가 그대를 얕보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그대는 나의 이 쾌도를 삼십 초도 받아내지 못할 것이오. 그대가 나의 쾌도를 삼십 초만 받아낸다면 이 전모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이 자리를 떠나겠으며 다시는 잔소리를 하지 않겠소. 그란 이 전모가 요행히 삼십초 안에 그대를 이긴다면 그대는 부득이 나를 따라 산을 내려가 의림 소사부를 만나야 할 것이오.]

영호충은 전백광의 도법을 생각해 보았다.

(그와 두번 싸운 이후 그의 도법이 가진 여러가지 살수를 나는 이미 수없이 생각해 보았다. 또 사부님과 사모님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내가 나 자신을 지키려고 한다면 설마 삼십 초를 막을 수 없으랴?)

영호충은 호쾌하게 말했다.

[좋소, 내가 그대의 삼십 초를 받아 보지.]

그리고 '휙' 하니 일검을 뽑아드는 즉시 공격해 갔다. 그는 대뜸 화산파의 살수인 유봉래의를 펼쳤다. 검날이 부들부들 떨리는가 하더니 대뜸 전백광의 상반신을 모조리 검과 아래 가두어 버렸다.
전백광은 칭찬의 말을 던졌다.

[좋은 검법이외다!]

그리고 칼을 휘둘러 밀어제치고 물러섰다.
영호충은 호통을 내질렀다.

[일초요!]

그리고 잇달아 창송영객이라는 검초를 펼쳐내자 전백광이 다시 창찬의 말을 했다.

[훌륭한 검법이오!]

그는 이 일초 가운데 뒷수가 많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고 막으려고 하지 않고 비스듬히 걸음을 미끄러뜨려 멀리 물러났다.
영호충은 호통쳤다.

[이초요!]

영호충은 사정을 두지 않고 다시 일초를 공격했다.
그는 잇달아 오초를 공격했다. 전백광은 막거나 피하며 시종 반격하지 않았다. 영호충은 육초째가 되자 장검을 아래서 위로 올려쳤다. 전백광은 일성대갈하며 칼을 들어 곧장 내려쳤다. 다음 순간 칼과 겆이 맞부딪치게 되었다. 영호충의 손에 들려 있던 장검이 아래로 밀렸다. 전백광은 호통을 내질렀다.

[제육초, 제칠초, 제팔초, 제구초, 제십초!]

입으로 헤아리며 손으로 한번씩 칼질을 했다. 다섯 초를 헤아리며 강철칼을 다섯 번이나 내려찍었다. 매 일초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일초일초가 모두 정수리를 향해 내려친 것이었다.
이 몇번의 칼질은일초가 더할수록 무거워졌다. 그리고 여섯 번의 칼질을 내려치게 되었을 때 영호충은 상대방의 칼에서 벋치는 기운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는 애써 검을 들고 맞받아야 했다. 금속성이 커다랗게 울려 퍼지면 칼과 검이 맞부딪쳤다. 손과 팔이 시큰해지며 장검이 땅으로 떨어졌다. 전백광은 다시 칼을 내려치려고 했다. 영호충은 두 눈을 감으며 죽음을 기다렸다.
전백광은 껄껄 웃으며 물었다.

[제 몇초요?]

영호충은 눈을 뜨고 말했다.

[그대의 도법이 나보다 고강하고 팔힘이나 내공에 있어서도 나보다 뛰어나니 이 영호충은 그대의 적수가 못되오.]

전백광은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갑시다.]

영호충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가지 않겠소.]

전백광은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영호형, 전모는 그대를 사내대장부로 알고 있소. 뱉은 말에 신용을 지켜야 하오. 삼십초 안에 영호형은 승복했는데 한 말을 번복하려는 것이오?]

영호충은 말했다.

[나는 본래 그대가 삼십초 안에 승세를 굳히리라고 생각지 않았소. 나는 졌소. 그러나 나는 결코 지게 되었을 때 그대를 따라 간다고 하지는 않았소. 내가 그런 말을 했소?]

전백광이 속으로 생각해보니 그 말은 자기가 한 말이지 영호충이 한 말은 아니었다. 그는 즉시 칼을 흔들며 냉소했다.

[그대의 이름에 호(狐 : 여우)자가 있는데 정말 명실상부한 이름이오. 그대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어쩌자는 거요?]
영호충은 말했다.

[방금 그대에게 진 것은 그대보다 힘이 약해 진 것이므로 항복 할 수 없소.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우리 다시 겨룹시다.]
전백광은 말했다.

[좋소. 그대로 하여금 지더라도 입으로나 마음속으로 승복하게 해주지.]

그는 바위에 앉더니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싱글벙글하며 영호충을 바라보았다.
영호충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악적이 반드시 나를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가려는 것은 어떤 간계가 있는지 모른다. 의림 사매를 만나러 가자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는 의림 사매의 진짜 제자도 아니고 의림 사매는 그를 보기만 하면 놀라서 혼비백산하는데 어찌 그와 사귀겠는가? 다만 내가 그의 손아귀에 붙잡혔으니 어떻게 빠져나가야 옳을까?)

그는 자기에게 잇달아 여섯번 해대던 전백광의 수법을 생각해 보았다. 그 도법은 평법했지만 그 기세가 웅후하여 어떻게 해소기켜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별안간 그는 움직이는 데가 있었다.

(그날 황량한 야밤에 산 속에서 막대선생은 힘을 다해 대숭양수 비빈을 죽였다. 형산검법은 뛰어나기 이를데 없었다. 그 같은 검법으로 전백광을 상대하면 지지 않을 것이다. 뒷동굴 석벽에는 형산검법의 여러가지 검초가 새겨져 있으니 나는 가서 사십초만 보고 와서 전백광과 맞서보자.)

그러나 다시 생각했다.

(형산검법은 정묘하기 이를데 없다. 삽시간에 어떻게 빼울 수 있겠는가? 나의 부질없는 생각에 지나지 않겠지.)

전백광은 그의 얼굴이 수심에 차였다간 웃음을 띄우고 또 다시 우울한 빛을 띄우는 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영호형, 나의 도법을 깨뜨릴 수 있는 간계를 생각해 냈소?]
영호충은 그가 간계라는 말에 특별히 힘을 주는 것을 보고 울화가 치밀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대의 도법을 깨뜨리는데 무슨 간계가 필요하다는 것이오? 당신이 내 앞에서 어른거리니 나의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구료. 나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 잘 생각해 보겠으니 방해 하지 마시오.]

전백광은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애써 생각해 보시오. 내 그대를 시끄럽게 하지는 않으리다.]

영호충은 그가 애써라는 말에 힘을 주자 나직이 욕을 한 마디 해주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영호충은 초에 불을 켜고 뒷동굴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곧장 형산파의 검법이 그려져 있는 도형 앞으로 다가갔다. 그 일초일초의 변화는 무쌍했다. 친히 보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 이토록 기이한 변화가 잇달아 일어나는 검초가 있으리라곤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삽시간에 이 검법을 배운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나는 다만 이중에서 가장 괴상망칙하고 기묘한 초식을 몇 개 보아 두었다가 나가서 그를 상대로 마구잡이식으로 싸우면서 그에게 미처 손쓸 기회를 주지 않는 공세를 펼쳐야겠다.)

그는 도형을 보며 머릿속에 기억했다. 매 일초 형산파의 검법은 적에 의해 깨뜨려지기는 했으나 전백광은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지 못할테니 그 점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기억하는 한편 손으로 연습을 해 보았다. 이십초를 배우는데 이미 반 시진이 흘러갔다. 그러자 전백광의 음성이 동굴 밖에서 들려왔다.

[영호형, 다시 나오지 않는다면 내가 들어가겠소.]

영호충은 그 말을 듣고 달려나가며 부르짖었다.

[좋소! 나는 그대의 삼십초를 다시 받아보리다.]

전백광은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도 영호형이 지게 된다면 그래 어떻게 하시겠소?]
영호충은 말했다.

[그래도 처음 지는 것은 아니지 않소? 한번 더 진다고 무엇이 달라지겠소?]

그 말을 하게 되었을 때 그는 검을 들어 광풍호우처럼 잇달아 칠초의 공격을 펴보였다. 이 칠초는 그가 뒷동굴 석벽에서 본 초식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초식은 많은 변화를 내포하고 있었다.
전백광은 화산파의 검법 가운데 이 같은 변화가 있으리라고 예측하지 못했던터라, 그만 손발이 어지러워 연신 뒤로 물러서야 했다. 그리고 제십초의 공격을 받고 물러서게 되었을 때는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며 칼을 들어 '휙' 하고 반격했다. 그의 칼의 기세는 웅후하기 이를데 없었다. 영호충은 검법의 변화를 좀처럼 쉽게 펼칠 수가 없었다. 십초를 펼치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의 칼과 검은 다시 부딪치게 되었고, 영호충의 칼은 다시 튕겨져 날아가고 말았다.
영호충은 두 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전형은 힘이 셀 뿐이지 도법으로 나를 이긴 것이 아니오. 나는 아직도 승복할 수 없고. 내 다시 삼십초의 검법을 생각해 낸후 재차 그대와 겨루어 보도록 하겠소.]

전백광은 웃으며 말했다.

[영사는 지금도 오백 리 밖에 있을 것이며, 그쪽에서 이 전모의 행적을 찾느라고 한창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오. 열흘이고 반달 안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 영호형의 지연책은 아마도 쓸모가 없을 것이오.]

영호충은 말했다.

[내가 나의 사부를 의지하여 당신을 처치한다면 어찌 영웅호걸이라고 할 수 있겠소? 나는 큰 병을 앓고난 이후라 힘이 부족하여 그대에게 밀리게 된 것이오. 초식으로만 겨룬다면 어찌 그대의 삼십초를 받지 못하겠소?]

전백광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대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소. 도법으로 그대를 이기는 것도 좋고 팔힘으로 이겨도 좋소. 지는 것은 지는 것이고 이기는 것은 이기는 것으로소 입으로 다투어 무엇이 달라지겠소?]
영호충은 말했다.

[좋소. 나를 기다려 주시오. 사내대장부라면 겁을 집어 먹고 그대로 산 아래로 뺑소니치지 않도록 하시오. 이 영호충은 결코 그대를 뒤쫓아가 잡을 생각은 없소.]

전백광은 껄껄 소리내어 웃더니 두 걸음 물러나 바위 위에 앉았다.
영호충은 다시 뒷동굴로 들어가 생각했다.

(전백광은 태산파의 천송도장에게 상처를 입혔고 항산파의 의림 사매를 상대로 싸워 보았으며, 지금은 내가 형산파의 검법으로 그와 싸웠다. 숭산파의 무공은 그로서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숭산파의 도형을 찾아내 십초를 기억하고 생각했다.

(형산파의 검초를 조금 전에 나는 십초도 사용해 보지 못했다.
내가 그를 공격할 때 숭산파의 검법을 섞어 사용하고 재차 본문의 검초를 몇초 별안간 펼쳐낸다면 그의 머리를 어지럽게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그는 전백광이 부르기도 전에 동굴을 나서서 싸웠다.
그의 검초는 갑자기 숭산파의 검초를 펼쳤다가 또다시 형산파의 검초를 펼치는가 하면 화산파의 몇수 검초를 펼치기도 했다.
전백광은 잇달아 부르짖었다.

[이상하군! 이상해!]

그러나 이십초를 싸우게 되었을 때 전백광은 영호충의 목에 칼을 갖다댈 수 있었고 영호충으로 하여금 검을 던지고 졌음을 시인하게 만들 수 있었다.
영호충은 말했다.

[처음엔 나는 그대의 오초밖에 못받았으나 조금 생각해본 후 그대의 십팔초를 받았소.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본 후엔 어느덧 그대의 이십초를 받게 되었으니 전형은 두렵지 않으시오?]

전백광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무엇이 두렵단 말이오?]

영호충은 말했다.

[내가 끊임없이 연구하고 몇번 더 사색하게 되면 그대의 삼십초를 맞받게 될 것이고 몇번 더 생각하면 오히려 지는 싸움에서 이기는 싸움을 벌이게 될 것이오. 그땐 내가 전형을 죽일지도 모르니 야단이 아니겠소?]

전백광은 말했다.

[이 전모가 강호를 떠돌아 다니며 한 평생 만난 적수들 가운데 영호형이 가장 총명하고 지혜가 많소. 그러나 무공에 있어서는 이 전모에게 훨씬 뒤떨어지오. 설사 그대의 진보가 신속하다 해도 몇시진 안으로 이 전모를 이기기는 불가능할 것이오.]

영호충은 말했다.

[영호충이 강호를 떠돌아 다니며 만난 적수 가운데 전형이 가장 대담하고 당돌하오. 영호충이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지는 것을 보고도 여전히 도망치지 않으니 정말보기드문 사람이오. 전형, 이만 실례하겠소. 나는 좀 더 안으로 들어가 생각해 봐야겠소.]
전백광은 웃으며 말했다.

[좋도록 하시구료.]

영호충은 입으로는 전백광과 터무니없는 말을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걱정이 되었다.

(저 악적이 화산까지 온 것은 결코 좋은 마음을 품고 온게 아니다. 그는 사부와 사모님이 주살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 무슨 정으로 나와 한가하게 초식을 겨루겠는가? 나를 제압한 이후 나를 죽이지 않는다 해도 나의 혈도를짚어 꼼짝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데 어째서 한번 더 한번 더 풀어주는 것일까? 도대체 어떤 이유일까?)

전백광이 화산으로 온 것은 실로 공포스럽기 이를데 없는 음모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음모인지 전혀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그가 나를 붙잡고 늘어지는 동안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의 사제와 사매를 처치하려는 것이라면 어째서 빨리 나를 죽이지 않을까? 그것이 훨씬 쉬운 일이 아닌가?)

잠시 생각하다가 몸을 일으키며 다시 생각했다.

(오늘의 일은 우리 화산파가 어려운 일에 부딪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부와 사모님도 산에 안 계시니 이 영호충이 본문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된다. 그러니 이 무거운 짐은 나 혼자 짊어져야 한다. 전백광과 마음과, 지혜를 써서 끝까지 맞서야 될 것이며 기회만 있다면 일검으로 그를 죽여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이 들자 그는 석벽의 도형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번에 그는 가장 악랄한 살수만을 기억해 두었다.
그가 동굴을 나설 때는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영호충은 이미 사람을 죽이려고 마음 먹었으나 얼굴에는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전형, 그대가 화산의 손님인데 소제가 제대로 주인 노릇을 못해 죄송스럽게 생각하오. 이번 시합을 한 후 누가 이기든간에 소제는 전형으로 하여금 이 화산의 토양(土釀)명주를 맛보여 드리고자 하오.]

전백광은 웃으며 말했다.

[정말 감사하오.]

영호충은 말했다.

[그러나 훗날 산 아래로 내려가 만났을 때 나는 그대와 사생결단을 내는 싸움을 할 것이오. 오늘처럼 예의를 다해 초식을 헤아리며 내기를 하지는 않을 것이오.]

전백광은말했다.

[영호형과 같은 친구를 죽이는 것은 매우 아까운 노릇이오. 그대를 죽이지 않는다면 훗날 그대가 무공이 신속하게 정진되어 검법이 나보다 강하게 될 때 그대는 이 채화음적을 용서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오.]

영호충은 말했다.

[그렇소. 오늘과 같이 서로 무공을 겨룬다는 것은 실로 얻기 어려운 기회요. 전형, 소제는 공격을 할테니 아무쪼록 많은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구료.]

전백광은 웃으며 말했다.

[감당할 수 없소. 영호형은 어서 손을 쓰시오.]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소제는 전형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장검을 번개처럼 찔러 갔다.
전백광의 몸 앞 석자 정도에 이르렀을 때 별안간 그는 비스듬히 왼편으로 방향을 바꾸어 맹렬히 되돌려 찔렀다.
전백광은 칼을 들어 막으려 했다. 영호충은 자기의 검날이 칼날에 부딪치기 전에 갑자기 전백광의 사타구니를 걷어 올릴 듯 베어갔다. 이 일초는 음흉하고 악랄했다. 전백광은 깜짝 놀라서 몸을 날려 급히 피했다.
영호충은 그 기세를 빌어 휙휙휙하고 연달아 삼검을 찔렀으며 일검마다 평생의 힘을 쏟아내 전백광의 급소를 다시 노리고 공격해 갔다. 전백광은 당황하여 열세에 몰리게 되었고 칼을 휘둘러 동으로 막고 서로 치곤했다. '쫙' 하는 소리와 함께 영호충이 그의 오른쪽 다리를 찌르자 바지에 구멍이 나게 되었는데, 검세는 기이하도록 빨랐으며 그의 다리에 한 줄기의 혈흔이 내비쳤다.
전백광은 오른소능띵 들어 한 대의 주먹을 내질렀다. '퍽' 하며 영호충이 곤두박질치게 만든 다음 노해 부르짖었다.

[그대는 초식마다 나의 목숨을 놀리고 있는데 이것이 어찌 무공을 겨루는 수법이라 할 수 있겠소?]

영호충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웃었다.

[어찌되었든 내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전형을 죽일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니오. 그대의 왼손 주먹의 힘은 정말 대단하구료.]
전백광은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게 되었소.]

영호충은 싱글벙글 웃으며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무래도 나의 조골이 부러진 것 같소이다.]

그리고 전백광과 가까워지게 되었을 때 별안간 검을 왼손으로 옮기며 냅다 찔러댔다.
이 일검은 불가사의했다. 바로 항산파의 살수(殺手)였다. 전백광은 영호충의 검끝이 그의 아랫배에 몇 치도 되지 않는 곳에 이른 것을 보고 촉망중에 몸을 날려 땅바닥에 뒹굴어 피했다. 영호충은 위에서 아래로 잇달아 사검을 찌르게 되었고 전백광은 낭패하게 되었다. 몇수의 공격을 더하게 된다면 일검에 전백광을 땅바닥에 못박아 놓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전백광은 갑자기 왼발을 들어 영호충의 손목을 찼다. 곧이어 원앙연환으로 오른발을 들어 영호충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영호충은 장검을 놓치고 뒤로 벌렁 나가 떨어졌다.
전백광은 몸을 벌떡 일으키고 달려들며 그의 목에 칼을 갖다대며 냉소했다.

[매우 신속하고 악랄한 검법이군! 이 전모는 하마터면 너의 손에 생명을 잃을 뻔했다. 이번에는 승복하겠지?]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물론 승복할 수 없소. 우리들은 검술을 겨룬다고 했소. 그런데 그대는 잇달아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 대니 이 초식을 어떻게 계산에 넣는단 말이오?]

전백광은 칼을 거두고 냉소를 머금었다.
영호충은 몸을 일으키고 말했다.

[그대가 삼십초 안에 나를 패하게 만든 것은 그대의 무공이 고강하기 때문인데 그게 어쨌단 말이오? 그대가 죽이려면 죽이지 왜 나를 비웃는 것이오? 그대가 웃고 싶으면 웃지 왜 비웃는 거요?]
전백광은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영호형의 꾸지람이 옳소. 이 전모가 잘못했소.]

그리고 포권을 하며 다시 말했다.

[이 전모는 진심으로 사과하는 바이오. 영호형은 용서해 주시구료.]

영호충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승리를 거두고도 오히려 사과하는 것을 보고 그 역시 포권을 하며 반례했다.

[감당할 수 없소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예의를 깍듯이 차릴수록 반드시 큰 음모가 있다. 그가 나를 이토록 반드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도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어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전형, 영호충은 마음속에 한 가지 모르는 일이 있는데 전형께건 솔직이 말해 주실 수 있겠소?]

전백광은 말했다.

[전백광은 남에게 말 못할 일이 없소. 간음이나 약탈, 그리고 살인, 방화 등의 일을 다른 사람들은 속이려고 억지를 쓰지만 이 전백광은 했다면 한 것이오. 어찌 발뺌을 한단 말이오?]
영호충은 말했다.

[그렇다면 전형은 오히려 소탈하고 훌륭한 사내이구료.]
전백광은 말했다.

[훌륭한 사내라는 말은 감당할 수 없소. 하지만 어찌되었든 언행이 일치되도록 행동하는 사람이외다.]

영호충은 말했다.

[허허. 강호에서 정말 전형과 같은 인물은 보기 여려울 것이오.
전형에게 묻겠는데 그대가 계략을 짜 나의 사부를 멀리 유인해 내고 화산으로 달려와 나와 함께 가자고 하는데 도대체 어디로 가자는 것이며 어떤 음모가 있는 것이오?]

전백광은 말했다.

[이 전모는 일찌기 영호형에게 말했소. 그대를 모시고 의림 소사부와 만나 그녀의 그리워 못잊어 하는 고통을 달래 주자는 것이외다.]

영호충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나 이상하오. 이 영호충이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닌데 어떻게 그 말을 믿는단 말이오?]

전백광은 노해 말했다.

[이 전모는 그대를 영웅호걸로 존경하고 있는데 그대는 나를 파렴치한으로알고 있군! 내가 한 말을 그대는 왜 못 믿는 것이오? 내 말이 사람 말이 아니라 개방구같이 들리오? 이 전모가 조금이라도 거짓말을 한다면 개 돼지만도 못한 놈이오.]

영호충은 그의 말이 매우 진지한 것을 모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의아하여 물었다.

[전형이 그 소사부를 사부로 모시게 된 것은 한 마디의 농담에 지나지 않은 것이오. 그대가 그녀를 위해 천리길을 마다 하지 않고 찾아와 나와 함께 산을 내려가자고 하니까 이상하구료.]
전백광은 겸연쩍은 표정을 짓고 말했다.

[이 가운데는 말 못할 사정이 있다오. 그녀의 재간으로 어찌 나의 사부가 될 수 있겠소?]

영호충은 속으로 짐작되는 것이 있었다.

(혹시 전백광이 의림 사매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그의 욕념이 순수한 사랑으로 승화된 것은 아닐까?)

그는 슬쩍 물었다.

[전형은 혹시 의림 소사매에 대해 한번 보자마자 마음이 기울어져서 기꺼이 그의 지휘를 따르게 된 것이 아니오?]

전백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마시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소?]

영호충은 말했다.

[그렇다면 어떤 사정이 있는지 전형이 말해 주시오.]
전백광은 말했다.

[이 일은 전백광이 창피하게 여기는 일인데 왜 그토록 애써 물으시오? 어찌되었든 이 전백광이 그대를 데리고 이 산을 내려가지 못한다면 일개월 동안 참담한 고통을 느끼다가 죽어갈 것이오.]
영호충은 깜짝 놀랐으나 내색을 안 하고 물었다.

[천하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소?]

전백광은 앞자락을 들추고 가슴을 내보였다. 가슴 아래에 있는 옆전만한 두 개의 붉은 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전백광은 어떤 사람에게 이곳의 사혈을 짚히게 되었소. 그리고 독을 복용당해 강제로 이곳으로 와 그대를 데리고 그 소사부를 만나도록 하게 된 것이오. 내가 그대를 모셔가지 못한다면 이 두 붉은 점은 한달 후에 썩어 고름이 나게 되고 그 상처는 점점커져 아무리 손을 써서 치료할 수 없게 되오. 끝내는 온몸이 썩을 것이고 3년 6개월 뒤에는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이오.]

그리고 그는 엄숙한 얼굴을 하고 다시 말했다.

[영호형, 이 전모가 그대에게솔직이 말할 것은 그대의 동정을 받고자함이 아니라 그대가 아무리 반대해도 나는 반드시 그대를 모셔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것이오. 그대가 가지 않는다면 이 전백광은 무슨 짓이든 해낼 수 있소. 나는 평소 어떤 악이라도 저지르는 사람인데 생사의 고비에서 무슨 짓을 못하겠소?]
영호충은 생각했다.

(아마도 이 일은 거짓이 아닐 것 같다. 내가 그를 따라 내려가지 않는다면 한달 후에 그의 몸에 독이 퍼져 이 악적이 죽게 될 것이니 내가 친히 그를 죽일 필요도 없겠구나.)

그리하여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도대체 어느 고수가 짓궂은 장난을 하면서까지 그대에게 어려운 문제를 내놓게 되었소? 전형이 중독된 약은 또 어떤 독약이오? 아무리 무서운 독약이라도 해소시키는 방법은 있기 마련이오.]
전백광은 울화가 치미는 듯 말했다.

[혈도를 찍고 독약을 쓴 사람은 들먹일 필요가 없소. 이 사혈을 풀고 기이한 독을 풀 사람은 손을 쓴 사람외에 천하에는 살인명의(殺人名醫) 평일지(平一指) 한 사람뿐이오. 그러나 그가 어찌 나를 구원해 주겠소?]

영호충은 미소지었다.

[전형이 좋은 말로 부탁하거나 칼로 위협한다면 그가 풀어줄지도 모르지 않소?]

전백광은 말했다.

[쓸데없는 말은 그만 두시오. 어찌되었든 내가 그대를 모셔 가지 못한다면 이 전모가 살지 못하는 것은 물론 그대 역시 평안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영호충은 말했다.

[그야 물론이오. 그러나 전형은 내가 입으로나 마음으로 승복 할 수 있도록 나를 대패시켜야 할 것이오. 그러면 이 영호충은 그 같이 뛰어난 무공을 익히기 어렵다는 점을 생각하고 그대를 따라 산을 내려갈 수도 있을 것이외다. 전형은 잠깐 기다려 주시오. 나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 생각해 보겠소.]

그리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 생각에 잠겼다.

(그날 나는 그와 몇찰례 손을 썼지만 매번 삼십초 가까이 싸웠다. 그런데 어째서 오늘은 삼십초도 받아내지 못했을까?)
그는 잠시 생각한 끝에 그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맞아. 그날 나는 의림 사매를 구하기 위해 그에게 목숨을 걸고 달려들었고 그가 펼치는 것이 삼십초이건 사십초이건 상관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나는 입으로 끊임없이 일초 이초를 헤아리고 있으며 마음속으로 삼십초만 받아내자고 생각하고 있다. 이같이 정신이 헷갈리니 검법은 자연히 크게 약화될 것이 아닌가? 영호충아, 영호충아, 넌 왜 이처럼 멍청하냐?)

이 같은 도리를 깨닫자 그는 새로운 기운이 났다. 그는 다시 석벽의 무공을 연구했다.
이번에 그가 본 것은 태산파의 검법이었다. 태산파의 검초는 웅후하고 무겁고 견실함을 장점으로 삼고 있었다. 일시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진수를 파악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규칙이 엄한 검법은 결코 그가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잠시 바라본 그는 그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런데 도형 가운데 짧은 창으로 태산검법의 초식을 깨뜨리는 수법이 매우 날렵하고 경쾌해 보였다. 그는 볼수록 빠져들어 그만 그 초식을 이해하느라고 시간이 흐르는 것조차 망각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전백광이 기다림에 지쳐 그를 부르게 되었을 때에야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다시 손을 써서 싸우게 되었다.
이번에 영호충은 경미하게 다시는 수를 헤아리지 않았다. 그리고 손을 쓰자마자 검광을 번뜩이며 전백광에게 급촉한 공격을 퍼부었다. 전백광은 그긔 검초가 잇달아 펼쳐질 뿐 아니라 동굴에 한번 들어가 생각하고 나올 때마다 새로운 초식이 마구 펼쳐지는지라 조금도 소홀히 여기지
못하고 맞섰다. 두 사람은 하나같이 속공으로 공격과 수비를 다했다. 순식간에 몇초를 싸웠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별안간, 전백광이 한걸음 내딛으며 손을 번개와 같이 뼉쳐 영호충의 손목을 잡고 그의 팔을 비틀었다. 그리고 검의 끝으로 영호충의 목을 겨누었다. 이렇게 하면 조금 힘을 주어 밀치더라도 장검이 영호충의 목을 관통하게 되는 것이다.
전백광은 호통을 내질렀다.

[그대가 졌소.]

영호충은 손목이 기이하도록 아팠으나 입으로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대가 진 것이오.]

전백광은 말했다.

[어째서 내가 졌소?]

영호충은 말했다.

[제삼십이초요.]

전백광은 말했다.

[삼십이초?]

영호충은 말했다.

[그렇소 삼십이초요.]

전백광은 말했다.

[입으로 헤아리지도 않았잖소?]

영호충은 말했다.

[입으로 헤아리진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헤아리고 있었소. 그리고 명명백백하게 삼십이초였소.]

기실 그는 마음속으로 수를 헤아린 적이 없엇다. 삼십이초 운운한 것은 내키는 대로 내뱉은 말이었다.
전백광은 그의 손목을 놓고 말했다.

[틀렸소. 그대의 일검은 이렇게 공격해 왔소. 그래서 난 이렇게 반격을 했고 그대는 이렇게 맞받았소. 나는 또 이렇게 내려쳤는데 이것이 제이초요.]

그는 일초일식을 펼쳐보이며 조금 전 싸우게 된 초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번 펼쳐 보였다. 손을 뼉쳐 영호충은 손목을 잡을 때까지 소요된 초식은 이십팔초에 불과했다. 영호충은 그의 기억력이 뛰어나 두 사람이 신속하게 주고받은 일초일식을 똑똑히 기억하고 전혀 그 순서가 틀리지 않는 것을 보고 실로 무림에서 보기드문 기재라고 생각하고 자기도 모르게 감탄하는 마음이 일어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전형의 기억력이 대단하구료. 이 소제가 잘못 헤아렸소. 내 다시 생각해 보리다.]

전백광은 말했다.

[잠깐! 이 동굴에 어떤 이상한 점이 있는지 내가 들어가봐야겠소. 동굴 안에 혹시 어떤 무학비급을 숨겨 놓은 것이 아니오? 어째서 그대가 동굴 안으로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많은 기이한 초식들을 펼치게 되는 것이오?]

그러면서 그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영호충은 깜짝 놀라 생각했다.

(만약 그가 석벽의 도형을 보게 되면 큰일난다.)

그는 기쁜 표정을 띄었다가 급히 걱정스런 표정을 지어 보이고 두손을 벌리며 막았다.

[이 동굴 안에 숨겨진 것은 폐파의 무학비급이오. 전형은 우리 화산파의 제자가 아니니 안으로 들어가 살펴볼 수가 없소.]
전백광은 그의 얼굴에 기쁜 빛이 떠올랐다가 근심의 빛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그는 내가 동굴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 어째서 대뜸 기쁜 빛을 띄웠을까? 그리고 그 후에는 근심스런 척 가장했다. 그것은 마음속의 진정을 감추려는 것이고 사실은 내가 동굴 안에 들어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동굴 안에는 반드시 나에게 불리한 물건이 있을 것이다. 십중팔구는 함정이나 그가 기른 독사나 야수가 있을지도 모르니 나는 그의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생각을 마친 그는 말했다.

[원래 동굴 안에는 귀파의 무학비급이 있었구료. 그렇다면 이 전모가 봐서는 안 되겠는걸?]

영호충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매우 실망스런 빛을 띄웠다.
이후 영호충은 몇번이나 동굴 안으로 들어가 또 많은 기이한 초식을 익혔다. 비단 오악검파의 검초뿐만 아니라 오파의 검법을 깨뜨리는 여러가지의 기이한 초식도 적지 않게 깨우쳤다. 그러나 창졸간이라 응용하기가 힘들었다. 전백광은 그가 동굴 안으로 들어가 잠시 생각해 본 후 나오면 기이한 초식이 마구 펼쳐지지만 정묘할 뿐 별로 쓸모가 없으며 자기 자신을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초식의 오묘한 점은 그가 한평생 보지 못하던 것으로서 실로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케 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영호충과 될 수 있으면 오래도록 싸워 불가사의한 검법을 좀더 구경했으며 하고 생각했다.
어느덧 점심 때가 지나게 되었다. 전백광은 다시 영호충을 제압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 그가 펼친 검초는 대부분이 숭산파의 검초같다. 혹시 동굴 안에 고수들이 모여 있는게 아닐까? 그가 동굴 안으로 들어갈 때 고수가 있어서 그에게 약간의 초식을 가르쳐 준 후 그에게 나서서 나와 싸우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경솔히 동굴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다면 내 어찌 오악검파의 뭇고수들과 싸워 이길 수 있겠는가?)

그는 그같이 생각되자 불쑥 물었다.

[그들은 왜 나서지 않소?]

영호충은 말했다.

[누가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오?]

전백광은 말했다.

[동굴 안에서 그대에게 검법을 가르치고 있는 그대의 선배고수들 말이외다.]

영호충은 어리둥절해졌으나 그 뜻을 알아 차리고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하. 그 선배님들은...... 전형과 손쓰기를 원하지 않소.]
전백광은 대노해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흥. 그 사람들은 위선에 차 있소. 자부심만 대단하여 나와 같은 음적 전백광과는 싸우기 싫다는 것이겠지? 그대가 그들 보고 나오도록 하시오. 일대 일이라면 아무리 명성이 대단해도 이 전백광의 적수가 될 수 없을 것이오.]

영호충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만약 전형께서 흥취가 있다면 직접 동굴 안으로 들어가 열한 분의 선배님들에게 가르침을 받도록 하시오. 그들은 전형의 도법을 높이 평가하고 계시오.]

전백광은 코웃음쳤다.

[흥! 뭐가 선배고수들이란 말이오! 모두 헛되이 명성을 얻은자들이겠지. 두번세번 그대에게 여러가지 초식을 전수해 주었는데도 그대가 시종 이 전모의 삼십초를 막을 수 없지 않았소?]
그는 자기의 경신법을 뛰어나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설령 열한 명의 고수가 우루루 몰려나오게 되어도 도망을 치면 된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오악검파의 선배 고수들이라면 자기들의 신분과 체면 때문에 결코 손을 합쳐 자기를 상대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영호충은 정색했다.

[그것은 영호충의 자질이 우둔하고 내력이 약하기 때문에 선배님들의 무공의 정묘한 뜻을 배울 수 없기 때문이라오. 전형은 입을 조심하시오. 그분들의 화를 불러 일으키면 어느 한분의 선배가 나선다 해도 전형은 한달 후에 독이 퍼질 것도 없이 순식간에 이 사과애에서 몸과 목이 따로 떨어지게 될 것이오.]

전백광은 말했다.

[동굴 안에는 도대체 어떤 선배가 계시는지 그대가 말해 보시오.]

영호충은 일부러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몇분 선배님들은 이미 은거한 지 오래 되어 밖의 간섭을 하지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소. 그들이 이곳에 모인 것은 전형과 아무런 상관이 없소. 더군다나 몇분 선배님들의 영호를 외부의 사람에게 누설할 수 없는 것은 고사하고 설사 말을 한다 해도 전형은 알지 못할 것이니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외다.]

전백광은 그의 얼굴이 이상한 것을 보고 애써 감춘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숭산, 태산, 항산, 형산 사파 가운데어쩌면 무공이 고강한 선배고인이 있을지 모르나 귀파에는 어떤 고수도 남아 있지 안띵을 것이오. 그것은 무림에서 다 알고 았는 사실인데 영호형이 멋대로 씨부렁거린다고 해서 누가 믿겠소?]

영호충은 말했다.

[그렇소. 화산파에는 확실히 지금까지 선배고수가 살아 있지 않소. 과거 폐파는 전염병의 침입을 받아 배분 높은 고수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화산파에는 크게 원기를 잃게 되었소. 그렇지 않았다면 전형이 혼자 산 위로 올라와 나를 공격하지는못했을 것이외다. 전형의 말이 옳소. 동굴 안에는 확실히 화산파의 선배고수가 안 계시오.]

전배광은 영호충이 자기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영호충이 동쪽이라고 한다면 사실은 서쪽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화산파의 선배고수가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 반드시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잠시 생각해 본 후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당황한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아! 이제 생각이 났소! 알고 보니 풍청양 풍 노선배님이군!]
영호충은 석벽에 새겨져 있는 풍청양이라는 세 커다란 글자를 기억해내고 자기도 모르게 '어' 하고 놀란 소리를 질렀다. 이번엔 결코 가장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풍 선배님이 아직까지 돌아가시지 않았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재빨리 손을 흔들어 보이고 말했다.

[전형은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풍...... 풍......]

그는 풍청양이란 이름자 가운데 청자가 있는 것을 보면 사부 불(不)자 배분을 지닌 분들보다 배분이 한 항렬 높은 인물일 것으로 생각했다.

[풍 사숙조께서는 은거한 지 오래 되었고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있으며, 어르신이 아직도 이 세상에 살아계신지도 모르고 있는데 어찌 그분이 화산으로 오시겠소? 전형이 믿을 수 없다면 동굴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오. 그러면 모든 진상이 드러날게 아니겠소?]

전백광은 그가 애써 동굴 안으로 들어가라고 할수록 그 속임수에 넘어가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이토록 당황해 하는 것을 보면 나의 짐작이 틀리지 않는군. 소문에 의하면 화산파의 선배님들은 과거 하룻밤 사이에 모조리 급살을 당했지만 오로지 풍청양 한 사람은 산 위에 없었기 때문에 그 같은 액운에서 벗어나 아직도 세상에 살고 있다지 않는가?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 있다 해도 칠팔십 세는 되었을 것이니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 해도 끝내 정력이 이미 쇠퇴해졌을 것이다. 늙어빠진 영감을 내가 두려워할까 보냐?)

전백광은 말했다.

[영호형. 우리는 이미 하루낮 하룻밤을 싸웠소. 다시 싸운다 해도 그대는 끝내 나를 이기지 못할 것이오. 그대의 풍 사숙조가 끊임없이 가르친다고 해도 소용이 없는 일, 그대는 순순히 나를 따라 산을 내려가도록 합시다.]

영호충이 그 말에 대답을 하려고 할 때 등 뒤에서 누군가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만약 몇초만 가르친다면 네 녀석은 패배하고 말 것이다.]
영호충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동굴 입구에는 하얀 수염을 기른 청포노인이 한 사람 서 있었다. 매우 우울한 표정이었고 얼굴빛은 금(金)처럼 노랬다.
영호충은 생각했다.

(이 노선생은 혹시 그날밤 나타났던 복면의 청포인이 아닐까? 나의 등 뒤에 있는데 어째서 나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전백광은 떨리는 음성으로입을 열었다.

[당...... 당신이 바로 풍 노선배님이십니까?]

그 노인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이 세상에 아직도 이 풍소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던가?]
영호충은 생각했다.

(본파에 아직 한 분의 선배님이 계시다는 말을 나는 사부님이나 사모님으로부터 들은 적이 없다. 일이 이처럼 공교롭게 되었다니! 전백광이 풍청양을 들먹이자 정말 풍청양이 나서니 말이다.)
이대 그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영호충이라는 녀석은 정말 그릇이 작아! 하지만 가르쳐 주지.
너는 먼저 백홍관일이라는 일초를 펼치고 곧이어 유봉래의라는 일초를 펼쳐라. 그리고 다시 금안횡공(金雁橫空)을 펼치고 잇달아 재검식(裁劍式)을 쓴다면......]

그는 담숨에 끊임없이 삼십초의 초식 이름을 말해 주었다.
삼십초의 초식은 영호충이 모두 배운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검을 뻗쳐내는 것과 발딛는 방위를 아무리해도 연결시킬 수가 없었다.
노인은 다시 말했다.

[너는 무엇을 주저하고 있는 것이지? 그 삼십초를 단숨에 펼쳐 낸다는 것은 지금 너의 조예로선 확실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한번 먼저 펼쳐보도록 해라.]

그의 목소리는 매우 낮았고 표정도 쓸쓸했다. 마치 무한히 서글픈 일을 당한 듯했다. 그러나 그 어조에는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영호충은 생각했다.

(그 말을 따라 한번 시험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는 즉시 백홍관일이라는 일초를 썼다. 그리고 검의 끝을 허공으로 겨누게 되었다. 그런데 유봉래의를 잇달아 펼칠 수가 없어 머뭇거렸다.
노인은 말했다.

[아! 정말 바보로군! 바보야! 네가 악불군의 제자인 것도 무리가 아니다. 형식에 얽매어 고지식하게 변화를 모르는구나! 검술의 도(道)라는 것은 행운유수와 같아야 하며 임의로 펼칠 수 있어야 한다. 네가 백홍관일을 다 펼칠고 났을 때 검의 끝이 위로 향하게 된다면 너는 그 기세대로는 검을 끌어내릴 수 없다는 것이냐? 검초엔 그 같은 자세가 없지만 너는 스스로 독특한 방법을 생각해내 그 즉시 배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한마디에 영호충은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는 장검을 바삭 당기며 자연스럽게 유봉래의라는 일초를 펼쳤다. 그리고 검초가 변하기 전에 이미 금안횡공이라는 일초를 펼쳐내고 있었다. 장검은 그의 머리 위로 스치듯 지나가며 한쪽으로 뻗쳤다가 한쪽으로 뛰어오르듯 날렵하게 재검식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방향을 바꿀때 전혀 빈틈이 없어 마음속으로 연간 통쾌하고 시원하지가 않았다. 그 노인의 말대로 일초일식을 펼치자 종고제명(鐘鼓齊鳴)의 일초를 펼치고 검을 거두게 되었을 때 바로 삼십초를 꼭 채우는 것이 아닌가? 그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노인의 얼굴엔 전혀 칭찬하는 빛이 없었다.

[맞기는 맞다만 억지가 너무 심하고 너무 둔하다. 고수와 싸우면 안 되겠지만 눈 앞의 이 녀석을 상대하는데 있어서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나가 시험해 보아라.]

영호충은 그가 진정 자기의 사숙조인지 아닌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무학의 고수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는 즉시 장검을 아래로 내려뜨리고 허리를 굽혀 예를 한 후 몸을 돌려 전백광에게 말했다.

[전형 공격하시오.]

전백광은 말했다.

[나는 이미 그대가 삼십초를 쓰는 것을 보았소. 다시 그대와 손을 쓴다고 해서 무슨 재미를 느낄수 있겠소?]

영호충은 말했다.

[전형이 손을 쓰지 않겠다면 그것도 좋소. 그럼 떠나주시오. 불초는 이 노선배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아야 하겠으니 전형을 상대할 여가가 없소이다.]

전백광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대가 나를 따라 산을 내려가지 않는다면 이 전모의 한 목숨이 그대 때문에 끊어지지 않겠소?]

그리고 그는 얼굴을 돌려 노인을 향해 말했다.

[풍 노선배님. 전백광은 후배라 어르신과 싸울 자격이 없읍니다. 어르신게서 손을 쓰신다면 신분에 어긋나게 될 것입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바위 앞으로 가더니 앉았다.
전백광은 크게 마음이 놓이는 듯 큰 소리로 호통쳤다.

[칼 받으시오!]

그리고 영호충을 향해 휘둘러왔다.
영호충은 몸을 날려 피하고 장검으로 찔러갔다. 이번에 펼칠 것은 조금 전 노인이 말한 제사초의 재검식이었다. 그가 이 일검을 펼치는 순간 후수가 끊임엇 펼쳐졌고 검법은 날렵하기 이를데 없었다. 사용되는 초식 가운데 어떤 것은 노인이 들먹인 것이고 어떤 것은 노인이 가르쳐 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행운유수와 같아야 하고 임의로 펼쳐져야 한다는 깊은 뜻을 깨닫게 되어 검술이 갑자기 정진하게 된 것이었다. 검의 광채는 파도가 일렁거리는 듯했고 전백광과 어느덧 일백여 초를 싸우게 되었다. 별안간 전백광은 일성대갈하며 칼을 들어 곧장 내려쳤다. 영호충은 피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자 즉시 손을 펼치며 장검으로 그의 가슴을 겨냥했다. 전백광은 칼을 돌려 검을 옆으로 쳤다. '창' 하는 소리와 함께 칼과 검이 부딪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영호충이 검을 움추리기도 전에 칼을 놓고 몸을 날려서 달려들더니 두손으로 그의 목을 졸랐다. 영호충은 숨이 꽉 막히게 되었고 장검도 놓치고 말았다.
전백광은 호통을 내질렀다.

[네가 나를 따라 산을 내려가지 않는다면 너를 목졸라 죽이고 말겠다.!]

그는 본래 영호충과 형님이니 아우니 하면서 매우 겸손하게 예의를 차렸었다. 그러나 이번 백여 초의 격렬한 싸움을 치르게 되자 성질을 내며 영호충의 목을 조르고 '마음대로 해라' 하는 식으로 나왔다.
영호충은 얼굴이 시뻘개져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백광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일배 초도 좋고 이백 초도 좋다. 내가 이겼다. 그러니 너는 나를 따라가야 된다. 빌어먹을! 삼십초의 약속은 이제 지킬 필요가 없다!]

영호충은 소리내어 껄껄 웃고 싶었다. 그러나 열손가락이 목을 조르고 있는지라 소리내어 웃을 수가 없었다.
별안간 그 노인이 말했다.

[멍청한 것 같으니! 손과 발은 바로 검과 마찬가지다. 금옥만당(金玉滿堂)이라는 초식을 반드시 검이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줄 아는구나!]

영호충은 뇌리에 전광석화같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을 질풍같이 내질렀다. 바로 금옥만당이라는 수법이었다. 중지와 식지가 전백광의 가슴에 있는 전중혈을 찌른 것이다. 전백광은 나직이 신음소리를 내며 맥이 풀어지는 듯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영호충의 목을 조르던 손도 풀렸다.
영호충은 자기가 아무렇게나 찌른 것이 강호에 명성을 떨치는 만리독행 전백광을 단번에 쓰러뜨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터였다.
그는 자기의 목을 만져 보았다. 그러고 보니 전백광이라는 음적은 땅바닥에 움추리고 있었는데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두 눈을 까뒤집고 있었다. 이미 기절을 한 것이다. 그는 놀람과 기쁨을 함께 느꼈다. 삽시간에 노인에 대한 존경심이 극도에 달해 황망히 그의 앞으로 나가 땅바닥에 엎드리고 불렀다.

[사숙조, 이 사손이 무례했던 점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그 노인은 웃으며 말했다.

[너는 내가 가짜라고 의심하고 있겠지?]

영호충은 고개를 숙였다.

[어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읍니까? 이 사손은 다행히 풍 사숙조님을 뵙게 되었으니 기쁘기 짝이 없읍니다.]

노인 풍청양은 말했다.

[일어나거라.]

영호충은 공손히 세번 절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노인의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했으며 초췌하기 이를데 없었다.
영호충은 물었다.

[사숙조, 배가 고프지 않습니까? 저의 동굴에 약간의 건량이 있읍니다.]

그가 가져오려고 하자 풍청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필요없네.]

그리고 실눈을 떠 해를 한번 쳐다보더니 나직이 말했다.

[햇살이 아주 따사롭군. 나는 오랫동안 햇살을 쬐지 않았단다.]
영호충은 매우 이상했으나 감히 묻지 못했다.
풍청양은 땅바닥에 움추리고 있는 전백광을 한번 쳐다 보더니 말했다.

[그는 너에게 전중혈을 찔리고 말았다. 그의 공력이라면 한 시간 후에는 깨어날 것이다. 그때도 여전히 너를 귀찮게 할 것이다.
네가 그를 대패시켜야만 그는 순순히 산을 내려갈 것이다. 너는 그를 제압한 이후 반드시 그에게 강요하여 나에 대해서 한마디라도 누설하지 않는다는 맹세를 하도록 시켜라.]

영호충은 말했다.

[이 사손이 방금 승리를 거둔 것은 그의 의표를 찌른 것으로 요행히 이긴 것입니다. 검법으로는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그를 제압한다는 것은...... 그를 제압한다는 것은......]
풍청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너는 악불군의 제자이다. 나는 본래 너에게 무공아르 전수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과거...... 과거...... 무거운 맹세를 한적이 있다. 살아 생전에 결코 남과 싸우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날 밤 너에게 검법을 펼쳐보인 것은 화산파의 옥녀검십구식을 제대로 펼치기만 한다면 어찌 남과 싸우다가 장검을 손에서 놓치는 일이 있겠느냐 하는 사실을 깨우쳐 주려고 그런 것이다. 그러나 너의 손을 빌리지 않고 전백광으로 하여금 맹세를 하고 비밀을 지키게 할 수가 없구나.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그리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뒷동굴로 들어갔다. 영호충은 그의 뒤를 따랐다.
풍청양은 석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벽에 있는 화산파의 검법의 도형을 너는 이미 보고 외우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펼치게 되었을 때 전혀 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아!]

그러면서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호충은 생각했다.

(내가 이곳에 서서 도형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사숙조께선 이미 알고 계셨구나. 아마도 내가 매번 넋을 잃고 바라보는 바람에 동굴 안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다.
만약에...... 만약에 사숙조께서 적이라면 허허허...... 만약 그가 적이라면 내가 그를 발견하더라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겠는가?)

풍청양은 계속해 말했다.

[악불군이라는 녀석은 정말 앞뒤가 꽉 막힌 녀석이다. 너는 본래 매우 훌륭한 인재였는데 그에게 가르침을 받아 바보 멍청이가 되고 말았다.]

영호충은 그가 은사를 욕하자 속으로 울화가 치밀어 가슴을 편채 말했다.

[사숙조. 저는 사숙조의 가르침을 받지 않겠읍니다. 나는 나가 전백광을 핍박하여 사숙조의 일을 누설치 않도록 맹세는 시키겠읍니다.]

풍청양은 약간 어리둥절해진 표정이었으나 곧 그 이유를 깨달은 듯 담담히 말했다.

[만약 그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너는 그를 죽일 참이냐?]
영호충은 망설이며 대답하지 못했다. 속으로 전백광이 수차례나 이겼으나 시종 자기를 죽이지 않았는데 자기가 어찌 우세를 점 한다고 그를 죽일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풍청양은 말했다.

[내가 너의 사부를 욕한다고 원망하는 모양이구나. 좋다. 이후 나는 다시는 그를 들먹이지 않도록 하겠다. 그가 나를 사숙이라 부르니 내가 그를 녀석이라고 부르는 것은 괜찮겠지?]

영호충은 말했다.

[사숙조께서 저의 은사를 욕하시지만 않는다면 이 사손은 삼가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겠읍니다.]

풍청양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내가 너에게 무공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하는 꼴이 되겠구나?]

영호충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이 사손이 어찌 그럴 수 있겠읍니까? 사숙조께서 용서해 주십시오.]

풍청양느 석벽의 화산도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초식들은 확실히 본파 검법의 검초들이다. 이 가운데 태반은 이미 실전되어서 악...... 악...... 허허허...... 너의 사부마저도 모르고 있다. 다만 초식이 오묘하기는 하지만 일초일초를 나누어 펼치게 된다면 끝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깨뜨려질 것이다.]
영호충은 거기까지 듣고 마음속으로 움직이는 바가 있었다. 은연중 그는 한층 더 깊은 검술의 진리를 깨닫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기쁜 빛을 띄웠다.
풍청양은 말했다.

[너는 무엇을 깨달았느냐? 나에게 이야기해 보아라.]
영호충은 말했다.

[사숙조께서는 각 초식을 한 덩어리처럼 이어놓을 수만 있다면 적이 깨뜨릴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까?]

풍청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척 기뻐했다.

[나는 원래 너의 자질이 괜찮다고 말했었지. 아니나 다를까 이해력이 지극히 좋구나. 옛날 마교의 장교들은......]

그러면서 그는 석벽에 곤봉을 쓰는 인형을 가리켰다.
영호충은 물었다.

[이 자들은 마교의 장로입니까?]

풍청양은 말했다.

[너는 모르느냐? 이 열 구의 해골은 마교의 십장로들이다.]
그리고 그는 땅바닥에 해골을 가리켰다. 영호충은 의아하여 물었다.

[어찌하여 마교의 십장로가 모조리 이곳에서 죽었읍니까?]
풍청양은 말했다.

[한 시진이 지나게 되면 전백광은 깨어나게 된다. 너는 묵은 일들을 묻느라 언제 무공을 배울 수 있겠느냐?]

영호충은 고개를 숙였다.

[녜, 그렇습니다. 사숙조님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풍청양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이 마교의 장로들은 모두 뛰어나게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서 오악검파의 검초를 깨끗하고도 철저하게 깨뜨렸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초식은 무공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음모와 간계, 함정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교묘하게 안배한 함정에 빠지게 된다면 네가 아무리 고명한 초식을 지니고 있다 해도 그것은 저혀 쓸모가 없게 돼......]
그리고 그는 고개를 쳐들었다. 눈빛이 흐린 것으로 보아 아마도 많은 옛날 일들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영호충은 그의 어조가 씁쓸하고 표정에 분개한 빛이 떠오르자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혹시 우리 오악검파는 정말로 무공을 겨뤄 이기지 못하자 몰래 암수를 써서 사람들을 해친 것이 아닐까? 풍 사숙조는 오악검파의 사람이지만 그 비열한 수단에 대해서는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마교의 인물을 상대할 때 음모, 간계를 사용했다고 하여 옳지 않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구나.)

풍청양은 다시 말했다.

[단지 무학을 놓고 논할 때는 이 마교의 장로들 역시 상승무학의 문을 넘보게 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들은 초식이란 죽은 것이고 초식을 펼치는 사람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죽은 초식이 아무리 오묘하게 상대방의 초식을 깨뜨릴 수 있다고 해도 살아 있는 초식을 만나게 된다면 곳곳에서 제압을 당하게 되고 상대방에 의해 도륙을 당할 수밖에 없다. 이 '살아 있다' 는 글자를 너는 똑똑히 기억해 둬라. 초식을 배울 때는 살아 있는 것을 배워야 하고 초식을 펼칠 때는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펼쳐야 한다. 만약 형식에 구애를 받는다면 수천 수만의 초식을 연성한다 해도 참된 고수를 만나게 되었을 때 끝내 상대방에 의해 깨끗이 깨뜨려질 것이다.]

영호충은 크게 기뻐했다. 그는 원래 성격이 활달한 편이었다.
풍청양의 말은 그의 마음에 꼭 드는 것이었다. 그는 잇달아 대답했다.

[녜! 녜! 반드시 산 것을 배우고 산 것을 펼쳐야 하죠!]
풍청양은 말했다.

[오악검파 가운데는 많은 멍청이들이 있다. 그들은 사부가 전수해준 검초를 익숙하게 익히기만 하면 자연히 고수가 되는 줄 알고 있다. 흥! 당시 삼백수를 숙독하게 된다면 시를 읊을 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겠지. 그리고 남의 싯구를 숙독하게 된다면 몇 수의 엉터리시를 지을 수 있겠지. 하지만 자기 스스로 창조해 낼 수 없다면 어떻게 대시인이 될 수 있겠느냐?]

그 같은 말은 악불군마저도 욕하는 짓이었다. 그러나 영호충은 그 말이 첫째로 도리가 있고, 둘째로 그가 직접 악불군을 들먹이지 않았기 때문에 항변을 하지 않았다.
풍청양은 말했다.

[살아 있는 것을 배우고 살아 있는 것을 펼치는 것은 제 일보에 지나지 않는다. 손을 쓰게 되었을 때 초식이 없어야만 진정으로 고수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너는 각 초식이 한 덩어리가 되면 적을 깨뜨릴 수 있게 되리라고 말했는데 그 한 마디는 반쯤밖에 못 맞춘 것이다. 한 덩어리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초식이 없어야 한다. 너의 검초가 아무리 한 덩어리가 되도록 펼쳐도 추호의 빈틈이 있기만 하면 적은 그 틈을 노리고 찔러들어 올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네가 근본적으로 초식이 없을 때 적이 어떻게 너의 초식을 깨뜨릴 수 있겠느냐?]

영호충은 가슴이 쿵쿵 뛰놀기 시작했고 손과 심장이 화끈 달아 올랐다.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근본적으로 초식이 없는데, 어떻게 깨뜨릴 수 있는가? 근본적으로 초식이 없는데, 어떻게 깨뜨릴 수 있는가?]

그의 눈 앞에 한평생 보지도, 꿈에도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천지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풍청양은 말했다.

[고기를 자르려면 어쨌든 자르려고 하는 고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무를 패려고 한다면 팰 나무가 있어야 한다. 적이 너의 검초를 깨뜨리려고 한다면 너는 반드시 상대방을 깨뜨릴 수 있는 검초가 있어야 한다. 무릇 무공을 모르는 범인이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러 댄다면 너의 견문이 아무리 넓더라도 그가 다음번에 어디를 어떻게 찌르거나 내려칠 것인지 짐작할 수 없게 된다. 설사 검술에 지극히 고명한 사람이라도 그의 초식을 깨뜨릴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무공을 모르는 사람은 초식이 없다 해도 상대방에 의 가볍게 얻어 맞아 쓰러지게 된다. 진정으로 상승의 검술이라는 것은 상대방을 제압하되 결코 상대방에 의해 제압당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땅바닥에서 죽은 사람의 다리뼈를 들고 아무렇게나 영호충을 겨누고 말했다.

[너는 나의 이초식을 어떻게 깨뜨리겠느냐?]

영호충은 그가 다음에 펼칠 초식을 알 수가 없어서 말했다.

[그것은 초식이 아니기 때문에 깨뜨릴 수 없읍니다.]
풍청양은 빙그레 웃었다.

[바로 그거다. 무공을 배우는 사람은 무기를 쓰거나 손과 발길질을 하는데 언제나 초식이 있기 마련이다. 너는 그 깨뜨리는 방법을 알기만 한다면 대뜸 제압할 수 있게 된다.]

영호충은 말했다.

[만약 적 역시 초식이 없다면요?]

풍청양은 말했다.

[그렇다면 상대방 역시 일류고수 중의 일류이다. 두 사람의 싸움이 이렇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고강할 수 있고 어쩌면 그가 고강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당금에는 그 같은 고수를 찾기가 매우 힘들다. 요행히 한두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너의 한평생 다시 없는 행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 평생 겨우 세 분을 만나 보았을 뿐이다.]

영호충은 말했다.

[어느 세 분입니까?]

풍청양은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웃었다.

[악불군의 제자 가운데 간섭하기를 좋아하고 알려주는 것도 배우려고 하지 않는 녀석이 있다니 정말 잘 되었다! 잘 되었어!]
영호충은 얼굴을 붉히고 재빨리 말했다.

[제자는 잘못을 알았읍니다.]

풍청양은 웃었다.

[잘못하지 않았다! 잘못하지 않았어! 네 녀석은 심사가 매우 활발해 나의 비위에 맞다. 그러나 지금은 시간이 많지 않다. 너는 화산파의 삼사십초를 융합시켜서 단숨에 이루어지는 것처럼 펼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초식을 모조리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일초도 마음속에 남겨 두지 않도록 해라. 그러면 나중에 아무 초식도 없는 화산검법으로 전백광과 싸우게 될 것이다.]

영호충은 기쁨을 느끼고 말했다.

[녜.]

그리고 정신을 가다듬고 석벽의 도형을 바라보았다.
과거 수개월 동안 그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미 석벽의 검법을 외우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대 그는 더이상 시간을 낭비하면서 배울 필요가 없었다. 그저 많은 검초를 연관시키기만 하면 되었다.
풍청양은 말했다.

[모든 것은 반드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행해지지 않을 수 없도록 행하여야 하고 멈추지 않을 수 없도록 멈추어져야 한다. 만약 하나로 연결시킬 수 없다면 그만 두어라. 어찌되었든 반점이라도 억지를 부려선 안 되느니라.]

영호충은 생각했다.

(다만 자연스럽게 하라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떰든 연결이 교묘하든 졸려하든간에 삼십초의 화산파 검초를 삽시간에 하나로 연결시킬 수 있다. 하지만 한 덩어리로 융합시켜 그 가운데 시작되고 끝나는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는 장검을 오니쪽으로 베고 오른쪽으로 내려쳤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석벽 도형 가운데의 검초를 조금도 생각하려고 하지 않았다. 닮아도 좋았고 닮지 않아도 좋았다. 마음 내키는대로 휘둘렀다. 따로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의기양양해 했다.
그는 사부를 따라 무공을 연마한 지 십여 년이 되었다. 연습을 할 때마다 그는 정신을 똑바로 가다듬고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악불군은 제자들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방법이 지극히 엄했다.
뭇 제자들이 권법을 연마하거나 검을 사용하든 손짓 발짓에서 한 자 한 치가 어긋나도 그는 즉시 멈추게 하고 바로잡았다. 매 초식을 완벽히 연마토록 했고 눈꼽만치도 착오가 나지 않게 되어야 마음이 놓여 고개를 끄덕여 되었다는 시늉을 했다. 영호충은 그의 큰 제자였고, 이 세상에 태아날 때부터 호승심이 대단했다. 그는 사부와 사모님의 칭찬을 받기 위해 초식을 연마할 때 더욱 더 자기 자신을 엄히 다스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풍청양은 전혀 상반된 방법으로 그에게 검도의 이치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멋대로하면 할수록 좋다고 했으며 이야말로 영호충의 마음에 꼭 맞는 일이라서 거믓띵 펼칠 때마다 느끼는 마음속의 유쾌함과 감미로움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수십 년이나 되는 맛 좋은 술을 달게 마시는 것보다도 재미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넋을 잃듯, 취하듯 연마하고 있을 때 갑자기 전백광이 말했다.

[영호형, 이리 나오시오! 우리 다시 겨루어 봅시다.]
영호충은 깜짝 놀라 검을 거두고 풍청양에게 여쭈어 보았다.

[제가 함부로 후려치고 내려치는 검법으로 그의 쾌도(快刀)를 막을 수 있겠읍니까?]

풍청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막을 수 없다. 아직 멀었다.]

영호충은 놀라 물었다.

[막을 수 없다고요?]

풍청양은 말했다.

[막으려면 막을 수 없지. 하지만 네가 왜 막으려고 하느냐?]
영호충은 그 말을 듣고 깨닫는 바가 있어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그렇다. 그는 나를 데리고 산을 내려가려는 것이기 때문에 감히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어떤 초식을 펼치든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스스로 알아서 공격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검을 들고 동굴에서 달려 나왔다.
이때 전백광은 칼을 비껴들고 서서 부르짖었다.

[영호형, 그대는 풍 노선배님으로부터 비결을 지적 받은 이후 검법이 크게 정진되었소. 그러나 조금 전 그대에게 혈도를 찍혀 쓰러지게 된 것은 내가 일시 소홀했기 때문이외다. 이 전모는 승복 할 수 없으니 우리 다시 겨루어 봅시다.]

영호충은 말했다.

[좋소.]

그리고 그는 검을 뻗쳐 비스듬히 찔러가는데 검신이 흔들흔들해서 반푼의 힘도 실리지 않은 것 같았다.
전백광은 크게 의아한 듯 말했다.

[이것은 무슨 검초요?]

그러나 그는 영호충의 장검이 찔러오는 것을 보고 칼을 휘둘러 막으려고 했다. 그런데 영호충은 갑자기 오른손을 뒤로 움추리며 허공을 향해 아무렇게나 찔러댔다. 그리고 검자루를 재빨리 거두어 들이는데 마치 자기의 가슴을 찌를 것 같은 형세였다. 그런데 곧이어 그는 손목을 다시 반대쪽으로 펼쳐냈다. 이렇게 되자 그는 오른쪽 허공을 내찌르게 되었다. 전백광은 더욱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를 향해 가볍게 시험삼아 한 칼을 내려쳤다. 영호충은 피하지 않고 검의 끝을 슬쩍 쳐들더니 비스듬히 전백광의 아랫배를 찔러왔다. 전백광은 부르짖었다.

[이상하다!]

그리고 칼을 돌려서 막으려고 했다.
두 사람은 이와 같이 수초를 싸웠다. 영호충은 석벽에 그려져 있는 화산파의 검초를 수십 초 펼쳤으며 공격만 하고 수비는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자기 혼자서 검술을 연마하는 것 같았다. 전백광은 그의 공격을 받고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그는 소리쳤다.

[나의 이 한 칼을 막지 못한다면 그대의 어깻죽지가 잘려 나갈 것이오! 그때 가서 나를 탓하지 마시오!]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그토록 쉽게 되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면서 '휙휙휙' 하며 삼검을 이상야릇한 방향으로 찔러왔다.
전백광은 눈과 손이 빨라 일일이 막아낼 수 있었다. 반격을 시도하려고 할 때 영호충이 갑자기 장검을 하늘로 내던지고 있었다.
전백광은 고개를 쳐들고 검을 바라보았다. 그때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코를 얻어 맞고 말았다. 대뜸 피가 나왔다.
전백광이 깜짝 놀라고 있는 사이 손을 검으로 삼아 질풍같이 내질렀다. 다시 그의 전중혈을 짚은 것이다. 전잭광은 천천히 쓰러졌는데 얼굴에는 매우 놀랍고 기이하다는 표정과 함께 분노의 빛을 띄웠다.
영호충이 몸을 돌리자 풍청양이 그를 불러 동굴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너는 한시진 반 검술을 연마할 수 있다. 그는 이번에 상처가 깊기 때문에 처음보다는 빠르지 못할 것이고, 다음에 싸울 때는 그가 목숨을 걸고 싸울 수도 있으며, 양보를 하지 않을런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 이제 형산파의 검법을 익히도록 해라.]
영호충은 풍청양의 지시를 받은 후에는 검법에 있어 초식이 있되 초식이 없는 것처럼 휘둘렀으며 초식을 전개했으나 초식이 아닌 상태였다.
형산파의 검법은 원래 변화가 많아서 허개비 같았다. 그렇게 되니 초식의 시작과 끝을 더욱 찾아보기 어려웠다. 전백광은 다시 일어난 후 팔십초를 싸웠으나 그에게 얻어 맞아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어느덧 날이 어두어졌다. 육후아가 밥을 갖다 주려고 벼랑 위로 올라왔다. 영호충은 혈도를 잡힌 전백광을 바위 뒤로 눕혔다. 풍청양은 뒷동굴에서 나오지 않았다.
영호충은 말했다.

[이 며칠간 나의 밥맛이 많이 좋아졌으니 여섯째 사제는 내일 밥과 찬을 많이 가져오도록 하게.]

육후아는 신수가 훤해지고 수개월 동안 우울해하던 영호충이 다른 모습이 된 듯하여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거기다 그의 윗옷이 땀에 젖어 있는 것을 보고 그가 검법을 애써 연마한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했다.

[좋아요. 내일은 커다란 바구니에 밥을 담아오지요.]
육후아가 벼랑 아래로 내려간 후 영호충은 전백광을 품고 그와 풍청양을 한 자리에 모시고 음식을 들게 되었다. 풍청양은 한 그릇의 밥만 먹고 배가 부르다고 수저를 놓았다. 전백광은 화가 나는 듯 연신 불평을 해댔으며 밥맛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한편으론 밥을 입으로 가져가며 한편으론 욕을 마구 해댔다. 그러다가 갑자기 왼손에 주는 힘이 너무 커져서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대접을 십여쪽 나게 만들었고 그릇에 담겼던 밥알들이 그의 몸에 떨어지게 되었다.
영호충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전형은 어찌 밥그릇을 상대로 풀이를 하려고 하시오?]
전백광은 노해 말했다.

[제기랄! 나는 그대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이오! 다만 내가 그대를 죽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술시합 때 그대는 공격만 했디 수비는 안 하느라고 덕을 보게 된 것이오. 그대 스스로 말해 보시오. 이런 시합이 공평하오? 만약 내가 양보하지 않았다면 삼십초 안으로 그대의 머리를 잘라냈을 것이오. 흥흥! 빌어먹을 것! 젊은 여...... 젊은 여......]

그는 의림을 젊은 여승이라고 욕을 하고 싶었으나 어떻게 된 노릇인지 말을 하다말고 그만 두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더니 칼을 뽑아 왼손에 들고 말했다.

[영호충, 다시 싸웁시다.]

영호충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리고 검을 뻗쳐 공격했다.
영호충은 다시 똑같은 방법을 썼다. 전백광의 쾌도를 해소시키려 하지 않고 자신의 교묘한 초식으로 그를 찔러대기만 했다. 그런데 전백광은 이번에는 손 씀씀이가 매우 무서웠다. 이십여초를 싸우게 되었을 때 휙휙하며 두 번의 칼질을 했는데 한 칼은 영호충의 허벅지를 내려찍게 되었고, 한 칼은 영호충의 왼팔에 상처를 내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칼 아래 사정을 두어 상처는 깊지 않은 편이었다. 영호충은 놀랐다. 아픔을 느기며 검법이흩어졌다. 그리하여 수초 후에는 전백광의 발길질에 채여 쓰러지고 말았다.
전백광은 칼날을 그의 목에 갖다대고 말했다.

[그래도 싸우겠소? 다시 싸우면 그대의 몸에 몇번의 칼질을 할 것이오. 설사 그대를 죽이지 않느다 해도 그대의 몸이 성하지 못하게 될 것이오. 피를 모조리 흘리게 될거요.]

영호충은 말했다.

[물론 다시 싸워야 하오. 영호충이 그대를 이기지 못한다 해도 설마 우리 풍 사숙조께서 그대가 날뛰도록 보고만 있을성 싶소?]
전백광은 말했다.

[그는 선배고인이니 나와손을 쓰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는 칼을 거두어 들였으나 속으로는 무척 질리는 듯했다. 영호충을 힘껏 쳐 상처를 입히게 되면 풍청양이 노해 손을 쓸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풍청양이란 노인은 매우 늙은 것은 사실이지만 쭈그렁 영감탱이가 아니었다. 신(神)과 기(氣)가 안으로 갈무리 되어 있으며 눈동자의 영화(英華)역시 은은한 것을 보면 내공이 메우 뛰어난 것은 물론이고 검술이 고강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 같았다. 따라서 풍청양이 검을 휘둘러 사람을 죽일 것도 없이 전백광 자신을 화산에서 쫓아내기만 해도 그로서는 야단이라고 생각했다.
영호충은 옷자락을 찢어 두 곳의 상처를 싸매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고개를 흔들고 쓰디쓴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사숙조. 그 녀석은 책략을 바꾸었읍니다. 나에게 마구 칼질을 했읍니다. 만약 그에게 오른팔을 베게 되었다면 검을 사용할 수 없게 되고 그 후엔 그를 이기기가 어렵게 됩니다.]

풍청양은 말했다.

[날이 이미 어두웠으니 다행이야. 너는 내일 아침 다시 싸우자는 약속을 해라. 그리고 오늘밤 자지 말고 우리는 하룻밤 동안 힘을 다하도록 하자. 나는 오늘밤 네게 삼초의 검법을 전수하겠다.]
영호충은 물었다.

[삼초라고요?]

그리고 속으로 삼초의 검법이라면 하룻밤을 새울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생각했다.
풍청양은 말했다.

[내가 볼 때 너는 꽤 총명하지만 정말 총명한 것인지 가짜로 충명한 것인지 알 수가 없구나. 만약 정말 총명하다면 오늘밤 그 삼초의 검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자질이 뛰어나지 못하고 이해력도 평범하다면 그렇다면...... 그렇다면...... 내일 아침 너는 그와 더 싸울 필요도 없다. 졌음을 시인하고 순순히 그를 딪라 산을 내려가야 한다.]

영호충은 사숙조가 그같이 말하자 이 삼초의 검법이 심상치 않을 것이며 매우 배우기 어렵다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는 크게 호승심이 솟구쳐 가슴을 펴며 늠름히 말했다.

[사숙조, 이 사손이 이 하룻밤 사이에 삼초를 다 배우지 못한다면 차라리 그의 한 칼에 죽었으면 죽었지 결코 투항하거나 그를 따라 산을 내려가지는 않겠읍니다.]

풍청양은 빙그레 웃었다.

[그것도 좋지!]

그리고 고개를 쳐들고 깊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하룻밤 사이에 삼초를 배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을 시키는 것이다. 제이초는 잠시 사용할 필요가 없으니 우리들은 제 일초와 제삼초만 배우기로 하자. 하지만...... 하지만...... 삼초의 많은 변화는 제이초에서 온 것이다. 좋아! 우리는 관계 있는 변화를 모조리 생각한 이후 쓸모가 있는지 두고보기로 하자.]

그리고 혼자 중얼거리더니 잠시 생각한 후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호충은 그가 이토록 거리낌이 많은 것을 보고 마음속이 근질근질해졌다. 무공이 배우기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위력은 강한게 아니던가? 이때 풍청양은 다시 중얼거리듯 말했다.

[제일초에 있는 삼백 육십초의 변화 가운데 만약 한 가지라도 잊게 된다면 제삼초를 펼질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정말 난처하구나!]

영호충은 제일초에 삼백 육십 가지의 변화가 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대 풍청양은 손가락을 접어가며 헤아렸다.

[귀매추무망(歸妹趨無妄) 무망추동인(無妄趨同人) 동인추대유(同人趨大有) 갑전병(甲轉丙) 병전경(丙轉庚) 경전계(庚轉癸) 자축지교(子丑之交) 진사지교(辰巳之交) 오미지교(午未之交) 풍뇌(風雷)가 일변이고 산택(山澤)이 일변이요, 수화(水火)가 일변이다. 따라서 건곤상격(乾坤相激) 진태상격(震兌相激) 이손상격(離巽相激) 삼증이성오(三增而成五) 오증이성구(五增而成九)......]
헤아리면 헤아릴수록 근심의 빛은 더욱 짙어지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충아, 나는 과거 이 일초를 배우는데 석달이라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네가 하룻밤 사이에 이초를 배운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너는 생각해 봐라 귀매추무망......]

거기까지 말하더니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제정신을 잃은 듯 물었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했지?]

영호충은 말했다.

[사숙조께선 방금 귀매추무망 무망추동인 동인추대유라고 했읍니다.]

풍청양은 는썹을 꿈틀했다.

[너의 기억력이 괜찮구나. 그 후에는 어떻게 되었지?]
영호충은 말했다.

[사숙조께선 갑전병 병전갑 경전계......]

그는 줄곧 외워갔다. 놀랍게도 거의 반이나 외우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뒷쪽의 것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풍청양은 크게 의아하여 물었다.

[이 독고구검(獨孤九劍)의 총결(總訣)을 너는 배운 적이 있느냐?]

영호충은 말했다.

[사손은 배운 적이 없읍니다. 그리고 이것이 독고구검이라는 것도 모릅니다.]

풍청양은 말했다.

[너는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외울 줄 아느냐?]

영호충은 말했다.

[저는 방금 사숙조께서 그렇게 읊으시는 것을 들었읍니다.]
풍청양은 얼굴 가득히 기쁜빛을 띄우고 무릎을 '탁'쳤다.

[그렇다면 방법이 있다! 하룻밤 사이에 모조리 다 배울 수는 없지만 억지로 기악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일초는 배울 필요가 없다.
삼초만 그저 약 반초 정도 배우면 되겠다. 잘 기억해 두어라. 귀매추무망 무망추동인 동인추대유......]

그러면서 그는 계속해서 읊어가는데 족히 삼백여 자를 읊고 난 후 말했다.

[네가 한번 시험삼아 외워 보아라.]

영호충은 이미 온 정신을 모아 기억해 두고 있었다. 즉시 따라 외웠다. 그런데 틀린 글자는 십여 자밖에 되지 않았다. 풍청양은 급히 바로잡아 주었다. 영호충은 두번째로 외워 일곱 자가 틀렸으나 세번째에 이르러서는 틀리지 않았다.
풍청양은 매우 기뻐해서 말했다.

[좋아! 매우 좋아!]

그리고 다시 삼백여 자나 되는 구결을 전수했다. 영호충이 외우자 다시 삼백여 자를 전수했다. 그 독고구검의 총결은 삼천여 자나 되었고 내용이 서로 연관되지도 않았다. 아무리 영호충의 기억력이 좋다 해도 앞쪽을 기억하면 뒤쪽을 잊게 되고 뒤쪽을 기억하면 앞쪽을 잊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 시간 남짓 풍청양이 두번 세번 깨우쳐 주어서야 겨우 한 자도 틀리지 않게 외울 수 있었다.
풍청양은 그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세번 외우도록 했다. 그가 확실히 모조리 외우자 말했다.

[이 총결은 독고구검의 근본 관건이 된다. 겨우 기억했지만 속성하기 위해서 억지로 기억한 것이니 그 가운데 도리를 잘 모를 것이고 이후 잊어버리기 쉽상이다. 오늘부터는 반드시 아침 저녁으로 외우도록 해라.]
[녜.]

풍청양은 다시 말했다.

[구검의 제일초는 총결식(總訣式)으로서 여러 가지의 변화가 있는데 이는 몸소 시범을 보여야 하니 지금으로선 서두를 필요가 없다. 제이초는 파검식(破劍式)인데 전문적으로 천하각파의 검법을 깨뜨리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지금은 서둘러 배울 필요가 없다. 제삼초는 파도식(破刀式)인데 전문적으로 칼이나 쌍칼 유엽도(有葉刀) 귀두도(鬼頭刀) 대감도(大?刀) 참마도(斬馬刀) 등 여러가지 도법을 깨뜨리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전백광이 사용하는 것은 한 자루의 칼로 펼치는 쾌도뿐이니 오늘밤 전문적으로 그의 도법을 상대할 수 있는 부분만 배우기로 하자.]

영호충은 독고구검의 제이초로서 천하각파의 검법을 깨뜨릴 수 있고, 제삼초로서는 여러가지 도법을 깨뜨릴 수 있다는 말에 놀람과 기쁨에 넘쳐 말했다.

[이 구검이 그토록 신비하다니! 이 사손은 지금까지 들어보지도 못한 일입니다.]

그는 너무나 흥분돼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었다.
풍청양은 말했다.

[독고구검의 검법은 너의 사부도 구경한 적이 없다. 그러나 이 검법의 명칭은 그가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너희들에게 들먹이지 않았을 것이다.]

영호충은 의아하여 물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풍청양은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제삼초 파도식은 가벼운 것으로 무거운 것을 제어하고 재빠름으로 느림을 제압하는 것이다. 전백광 그 녀석은 정말 빠르다. 그러나 너는 그보다 더 빨라야 한다. 너 같은 젊은이가 그와 더불어 재빠름을 견준다는 것은 가능한 것이다. 다만 지고 이기는데 대해 필승의 자신이 없을 뿐이다. 그리고 나같이 쭈그러진 늙은이가 그보다 더욱 빠르려고 한다면 유일한 방법은 그보다 먼저 초식을 펼치는 것이다. 네가 그가 펼칠 초식을 짐작할 수 있다면 그를 앞지를 수 있다. 적의 손이 쳐들리기 전에 너의 장검은 이미 그의 급소를 찌르게 될 거이니 그가 아무리 빨라도 너만큼 빠를 수가 없다.]

영호충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녜, 녜. 아마도 이것의 요점은 어떻게 하면 적의 기선을 잡아야하는가 하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풍청양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옳아! 너는 정말로 가르칠만한 인재다. 적을 헤아려서 기선을 잡는다는 것은 바로 검법의 정묘한 점이다. 어떤 사람이 일초를 펼칠 때는 반드시어느 정도 조짐을 보이기 마련이다. 그가 한 칼로 너의 왼팔을 내려치려고 할 때는 반드시 너의 왼팔을 쳐다보게 도리 것이다. 그리고 이때 칼이 오른쪽 아래켠에 있다면 자연히 칼을 쳐들고 반원을 그려서 위에서부터 아래로 비스듬히 내려 찍게 될 것이다.]

이윽고 그는 제삼검 가운데 쾌도를 제압하고 깨뜨리는 여러가지의 변화를 한 조목씩 따져가며 분석해 보였다. 영호충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넓어지며 정신이 솟아났다. 한 시골의 소년이 갑자기 황궁에 들어와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모든 것이 신기하기 짝이 없는 것과 같았다.
제삼초는 변화가 복잡하기 이를데 없었다. 영호충이 일시에 터득하게 된 것은 십의 삼에 지나지 않았고 나머지는 억지로 기억해 두었다. 한 사람은 신이 나서 가르쳤고 한 사람은 열심히 배웠다.
그들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전백광이 동굴 밖에서 큰 소리로 불렀다.

[영호형, 날이 밝았소! 아직도 깨어나지 않았소?]

영호충은 어리둥절해져 나직이 말했다.

[어이쿠! 날이 밝았답니다.]

풍청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시간이촉박하니 매우 애석하다. 그러나 너는 매우 빨리 배웠다. 이미 내가 바라던 바를 훨씬 능가했다. 이제 나가서 그와 싸워 보아라.]

영호충은 고개를 숙였다.

[녜.]

그리고 눈을 감고 그날 밤 배운 뜻을 암암리에 기억해 보고 눈을 뜨며 물었다.

[사숙조, 사손은 아직도 모르는 것이 한 가지 있읍니다. 어째서 이 변화는 다 공격하는 하는 초식으로 공격만 했지 수비는 하지 않는지요?]

풍청양은 말했다.

[독고구검은 앞으로 나가는 초식만 있지 뒤로 물러나는 초식은 없다. 초식은 모두 공격하는 것이고 적으로 하여금 부득불 수비를 하도록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검법을 창안한 독고구패(獨孤求敗) 선배님이 이름을 구패라고 한 것은 그 어르신께서 한평생 한번이라도 지고 싶어했으나 질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같이 이름지은 것이다. 이 검법이 펼쳐지면 천하무적인데 지킬 필요가 있겠느냐? 만약에 누가 그 어르신을 공격하여 자신을 지키려고 한다면 그 어르신은 정말 기분이 흐뭇해져 좋아 어쩔줄 모르셨을 것이다.]

영호충은 중얼거렸다.

[독고구패...... 독고구패(獨孤求敗)!]

그는 과거 이 선배님이 검을 들고 강호를 주유하면서 천하무적으로 군림하여, 한 사람의 적수마저 찾을 수 없는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이때 전백광이 다시 부르짖었다.

[빨리 나오시오! 다시 그대의 몸에 두 곳의 상처를 내어주겠소!]

영호충은 부르짖었다.

[나가오!]

풍청양은 눈쌀을 찌푸렸다.

[지금 나가 그와 싸울 때 가장 위험한 것은 그가 처음 한칼로서 너의 오른팔이나 오른 손목을 내려찍어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그러면 너는 그가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고 더욱더 반격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내가 가장 걱정하는 점이다.]

영호충은 크게 호기가 치솟아 늠름히 말했다.

[사손은 진력을 다하겠읍니다. 어떻든 사숙조께서 이 밤을 새워 가르쳐준 은혜를 저버리지 않겠읍니다.]

그리고 검을 들고 동굴을 나섰다.
매우 기운이 없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켠 다음 눈을 비비며 말했다.

[전형, 빨리도 일어났구료. 어젯밤 제대로 주무시지 못했소?]
속으로는 다른 궁리를 하고 있었다.

(내가 이 눈 앞의 난관만 버텨내고 몇 시진만 더 배운다면 나는 영원히 너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전백광은 칼을 들고 말했다.

[영호형, 불초는 실로 그대에게 상처를 입힐 생각은 없소. 그대가 너무 고집스럽게 무슨 말을 해도 나와 함께 산을 내려가려고 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구료. 거기다 이같이 싸운다면 부득이 나는 그대에게 열번이나 스무번 칼질을 하게 되고 그대의 온몸에 상처를 입히게 될지도 모르는 일, 그것이야말로 그대에게 미안한 노릇이 아니겠소?]

영호충은 속으로 생각나는 바가 있어 말했다.

[열번이나 스무번 칼질을 할 필요는 없소. 그대는 단 한칼로 나의 오른팔을 자르거나 그렇지 않을 때 나의 오른손에 상처를 입혀 내가 검을 쓰지 못하게 하면 되는 것이오. 그때 그대가 나를 죽이거나 사로잡으려고 한다면 뜻대로 될 것이 아니겠소?]

전백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그저 승복시키겠다는 것 뿐이외다. 어찌 그대의 팔에 상처를 입히겠소?]

영호충은 크게 기뻤으나 얼굴에는 깊은 우려의 빛을 띄우고 말했다.

[그대는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지만 다급하면 어떤 악독한 수법을 펼칠지 염려스럽군요.]

전백광은 말했다.

[그대는 말로서 나를 자극하지 마시오. 전백광은 첫째로 그대와 아무런 원한이 없고, 둘째는 그대를 뼈있는 사내라고 존경하고 있으며, 세째는 정말 그대에게 심한 상처를 입혔을 때 다른 사람이 나를 그냥 두지 않고 괴롭힐 것이오. 자, 손을 쓰시오!]
영호충은 말했다.

[좋소. 전형이 먼저 공격하시오.]

전백광은 칼을 한번 흔들했다. 그리고 제이도를 곧이어 비스듬히 내려쳐 왔다. 칼이 햇살을 받고 번쩍이는데그 기세가 심히 맹렬했다. 영호충은 독고구검 가운데 제삼검의 변화로서 깨뜨리거나 해소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전백광의 도법은 실로 너무나 빨랐다.
검을 막 뻗어내는 순간 상대방의 도법은 이미 변하고 만 것이다.
끝내 한 걸음 늦은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초조해져 부르짖었다.

(야단났다! 야단났다! 새로 변한 검법을 전혀 사용할 수 없게 되었군! 사숙조께선 반드시 나를 멍청이라고 욕하시겠지?)
그는 다시 몇초를 맞받게 되었는데 너무나 다급해 이마에서 땀방울이 줄줄이 흘러내렸다.
한데 전백광이 볼때 그의 검법은 날카롭기 이를데 없었다. 매 일초가 자기 도법의 극성(?星)이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매우 놀랐다.

(그는 분명히 몇수의 검법으로 나를 죽일 수 있는데 어째서 일부러 한 박자 늦추는 것이지? 그는 손아래 사정을 두고 내가 어려움을 알고 물러서도록 만들려고 하는구나! 그러나 나는 어려움을 무럴설 수 없는 고충이 있다. 그러니 끝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가 이같이 생각하게 되자 칼을 내리치게 될 때 공격을 제대로 돋울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서로 상대방을 꺼려하여 조심스럽게 초식을 주고받았다.
다시 한동안 싸우게 되었다. 전백광의 도법은 점차 빨라지게 되었고 영호충이 독고구검 가운데 제삼검의 변화를 응용하는 것도 점차 익숙해졌다. 칼과 검의 광채가 번쩍이는 가운데 서로 주고 받는 초식은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갑자기 전백광이 대갈을 터뜨리며 오른발을 들어 영호충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영호충은 몸이 뒤로 나가떨어질 때 번개같이 생각을 굴렸다.

(이제 나에게 하루낮 하룻밤의 시간만 있으면 내일 이 무렵쯤이면 반드시 그를 제압할 수 있다.)

그는 즉시 검을 손에서 놓고 두 눈을 꼭감고 호흡을 거의 멈추다시피 하고 혼수상태에 빠진 것처럼 가장했다.
전백광은 그가 정신을 잃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으나 영호충이 교활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감히 몸을 구부리고 살펴보지 못했다. 영호충이 혹시 갑자기 공격해 와 승부를 역전시킬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는 즉시 칼을 비껴들고 앞으로 몇걸음 나서며 큰 소리로 말했다.

[영호형, 어떻게 되었소?]

몇번 불러서야 영호충은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는...... 우리는 다시 싸우도록 합시다.]

그러면서 억지로 몸을 일으켜 버티려고 했다. 그러나 왼다리에 맥이 풀리는 듯 다시 땅바닥에 쓰러졌다.
전백광은 말했다.

[그대는 틀렸소. 차라리 하루쯤 쉬고 내일쯤 나를 따라 산을 내려가도록 합시다.]

영호충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뻗쳐서 땅에 대고 몸을 이르키려고 하며 숨을 몰아 쉴 뿐이었다.
전백광은 더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한 걸음 다가가 팔을 잡고 부축해 주었다. 그러나 그가 한 걸음 내딛게 되었을 때 일부러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영호충의 장검을 밟았고 오른손에는 칼을 든 채 자기 자신을 지켰으며 왼손으론 영호충의 오른팔 혈도를 꽉 잡아 그로 하여금 어떤 간계를 펼치지 못하게 했다. 영호충은 전혀 맥이 빠져 몸을 가눌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면서 불쾌한 듯 버럭 소리쳤다.

[누가 그대보고 나의 비위를 맞춰달라고 했소?]

그는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풍청양은 미소했다.

[그 방법으로 하룻밤 하룻낮을 얻어냈구나. 하지만 약간 비열하고 몰염치하지 않으냐?]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비열하고 몰염치한 사람을 상대할 땐 어쩔 수 없이 비열하고 몰염치한 방법을 써야 되죠.]

풍청양은 정색했다.

[정인군자를 상대한다면?]

영호충은 어리둥절해져 물었다.

[정인군자라니요?]

풍청양은 두 눈을 형형히 뜨고 영호충을 노려보며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정인군자를 상대할 때는 어떻게 하지?]

영호충은 말했다.

[설사 그가 참된 군자라고 해도 만약 나를 죽이려고 한다면 저로서는 그의 손에 죽음을 당할 수 없는 노릇이죠. 부득이할 때는 몰염치하고 비열한 수단을 조금 써보아야 되겠지요.]

풍청양은 크게 기뻐 낭랑히 말했다.

[좋다. 좋아! 네가 그같이 말하는 것을 보면 착한 척하는 위선자는 아니구나. 사내대장부는 행함에 있어 하고 싶은 대로 해야한다. 구름이 떠가고 물이 흐르듯 마음대로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무림의 규칙이나 문파의 계율이라는 것은 모두 개방구 같은 소리다.]

영호충은 빙그레 웃었다. 풍청양의 이 말은 그의 마음에 꼭든는 말이라 듣기에 여간 통쾌하지 않았다. 그러나 평소 사부로부터 목숨을 버릴지언정 절대로 문규를 어겨서는 안 되고 화산파의 명성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았기에 사숙조의 그같은 말에 공공연히 맞장구를 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착한 척하는 위선자 운운하는 말은 바로 사부 군자검의 외호를 빚대어 하는 말 같아 그저 빙그레 웃었을 뿐 그 말에 찬동하지는 않았다.
풍청양은 비쩍 마른 손가락을 뻗어 영호충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미소지었다.

[악불군의 문하에 너 같은 인재가 있는 것을 보면 그 녀석은 안식이 있는 셈이다. 전혀 쓸모없는 녀석이라고는 할 수가 없구나.]
그가 말하는 그 녀석은 물론 악불군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는 영호충의 어깨를 툭툭치고 말했다.

[네 녀석은 정말 내 마음에 든다. 자아, 우리는 독고대협의 제일검과 삼검을 다시 연마해 보도록 하자.]

그는 즉시 독고씨의 제일검을 설명했다. 영호충이 깨우치게 되었을 때 다시 제삼검에 관계있는 변화를 설명하면서 시늉까지 해보이는 등 세심히 가르쳤다. 뒷동굴에는 땅바닥에 뒹굴고 있는 장검들이 무척 많았다. 두 사람은 모두 화산파의 장검을 집어들고 연습했다. 영호충은 열심히 기억을 했으며 모르는 곳에 이르면 질문을 던지곤 했다. 이 날은 시간이 충분해서 검법을 배움에 있어 전날처럼 서두르지 않아도 좋았다. 일검일식을 천천히 펼쳐 보이며 상세히 논할 수 있엇따. 저녁밥을 먹은 후 영호충응 나두 시간을 자고 다시 초식을 배웠다.
이튿날 이른 아침 전백광은 전날 입은 상처가 가볍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소리쳐 싸우자고 하지 않았다.
영호충은 뒷동굴에서 검법을 배우다가 오시 말 미시 초쯤 되었을 때 독고씨의 제삼검의 여러가지 변화를 모조리 터득하기에 이르렀다.
풍청양은 말했다.

[오늘 그를 이기지 못해도 상관이 없다. 하루낮 하루밤을 더 배우게 된다면 어찌되었든 내일은 반드시 이기게 될 것이다.]
영호충은 그 말에 대답하고 화산파의 선배가 남긴 장검을 힘주어 잡고 천천히 동굴 밖으로 나갔다. 전백광은 벼랑가에 서서 멀리 펼쳐져 있는 풍경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영호충은 짐짓 놀란 음성으로 말했다.

[어, 전형은 아직 떠나지 않았소?]

전백광은 말했다.

[불초는 여기서 귀하를 기다리고 있는 참이외다. 어제 입은 부상은? 오늘은 많이 나아지셨소?]

영호충은 말했다.

[뭐 그렇게 나을 것도 없소. 다리에 입은 상처는 아직도 심히 아프다오.]

전백광은 웃었다.

[나는 그대에게 간계가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대가 이 같이 시치미를 떼고 약하게 보이려는 것은 나의 의표를 찌르고 공격하겠다는 것이 아니오? 불초는 그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오.]

영호충은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속았소. 이제 설사 깨우친다해도 때는 이미 늦었소.
전형, 검을 받으시오.]

호통소리와 동시에 그는 검을 뻗쳐 곧장 그의 가슴을 노리고 찔러갔다. 전백광은 급히 칼을 들어 막으려고 했으나 허공을 치고 말았다. 영호충의 제이검이 다시 찔러왔다. 전백광은 칭찬의 말을 던졌다.

[매우 빠르군!]

그리고 칼을 비스듬히 치켜들어 막으려고 했다. 영호충은 제삼검 사검을 번개같이 찔러내면서 입으로 부르짖었다.

[더욱 빠른 것이 있소!]

그러면서 오검 육검을 잇달아 펼쳐냈다. 공세가 하넌 펼쳐지자 놀랍게도 이검이 일검에 이어졌고 이검이 앞의 일검보다 더욱 빨라지면서 면면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독고검법의 정묘한 점을 터득한 것 같았다. 독고구검은 앞으로 나가기만 할 뿐 뒤로 물러서 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매 일검이 모조리 공격하는 초식이었다.
십여검이 펼쳐지자 전백광은 전전긍긍했다. 어떻게 초식을 받아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영호충이 일검을 찌르면 그는 한 걸음 물러서야 했다. 그가 십여 검을 찌를 때 전백광은 이미 벼랑가로 밀려나 있었다. 영호충의 공세는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휙휙휙' 하며 잇달아 사검을 찔러내게 되었는데 모두 급소를 노린 것이었다. 전백광은 힘써 이검을 밀어냈으나 제삼검은 어떻게 밀어낼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왼발을 뒤로 빼려고 했는데 그만 허공을 딛게 되었다. 전백광은 드 뒤가 만장이나 되는 골짜기이고 떨어지면 몸이 박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위기일발의 순간 칼로 맹렬히 땅바닥을 내리쳤다. 그 기세를 빌어 간신히 몸을 가누었다. 영호충의 제사검은 어느덧 전백광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전백광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영호충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검의 끝을 시종 그의 목에 겨누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전백광은 노해 말했다.

[죽이려면 죽이지 왜 우물쭈물 하오?]

영호충은 오른손을 움추리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난 후 말했다.

[전형이 일시 소홀한 틈을 타 소제가 기선을 제압한 것이니 실력으로 이겼다고 할 수 없오. 우리 다시 싸웁시다.]

전백광은 코웃음치고 칼을 휘두르며 폭우와 같은 공격을 펼치며 부르짖었다.

[이번에는 그대가 이득을 볼 수 없게 내가 먼저 공격을 하겠소.]

영호충은 그가 강철칼을 휘두르며 맹렬히 공격해오자 장검으로 비스듬히 그의 아랫배를 찔렀다. 동시에 그 자신은 윗몸을 옆으로 기울여 그의 칼날을 피했다. 전백광은 그의 일검이 빠르게 찔러오는 것을 보고 질풍같이 칼을 되돌려 영호충의 검을 치려고 했다.
자기 자신의 힘이 큰 만큼 영호충의 검과 자기의 칼이 ?琯饗“?된다면 반드시 영호충의 장검을 튕기듯 날려보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호충은 그 일검마다 선기를 제압하고 제이검 제삼검을 끊임없이 펼쳐냈는데 일검마다 무섭고 정확했으며 검의 끝은 시종 상대방의 급소에서 떠나지 않았다. 전백광은 막을 수 없게 되었고 부득이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십여초가 지나게 되었을 때 재차 그는 벼랑가로 몰리게 되었고, 한 걸음만 뒷걸음질 쳐도 만장의 깊은 골짜기로 떨어질 판이었다. 이때 영호충은 장검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베어 내려왔다. 그리하4여 전백광으로 하여금 칼을 들어 상반신을 보호하도록 만들었다. 그 순간 왼손을 뻗쳐내 영호충은 다섯 손가락 끝이 그의 가슴 전중혈에서 두 치도 되지 않는 곳에 이르게 되었다. 그 순간 그는 손가락에 뻗었던 힘을 내쏟지 않고 손을 멈추었다. 전백광은 두번이나 그에게 전중혈을 짚힌 경험이 있엇다. 이번에 다시 짚히게 되면 몸이 쓰러지게 될 때 땅바닥으로 떨어지는게 아니라 깊은 골짜기로 떨어질 판이었다. 그런데 영호충은 그저 손가락으로 그의 전중혈을 겨누고 있을 뿐 손을 쓰지 않는 것으로 4보아 사정을 두고 있는 게 분명했다. 두 사람은 잠시동안 대치해 있었다. 영호충이 뒤로 물러섰다.
전백광은 바위 위에 앉아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는 듯했다.
그런데 그는 한소리 호통을 내지르더니 서둘러 공격을 해왔다. 단숨에 강철칼을 위로 아래로 휘두르는데 그 기세는 몹시 위맹했다.
이번에 그는 방위를 정확하게 겨냥하고 등을 산 쪽으로 향하도록 했다. 마음속으로 설사 영호충에게 공격을 받아 물러서게 된다 해도 동굴 쪽으로 물러나 어떻게 하든 생사의 일전을 결해 보겠다는 생각이었다.4
이때 영호충은 그의 칼이 펼치는 여러가지 변화를 모조리 외울 수 있었다. 그의 강철칼이 내려쳐지면 그는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이면서 장검으로 그의 왼팔을 베어갔다. 전백광은 칼을 돌려 막으려고 했다. 그 순간 영호충의 장검은 방향을 바꿔 왼쪽 허리를 찔러갔다. 전백광은 왼팔과 왼쪽 허리는 간격이 한 자도 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칼을 돌려 허리를 보호하기에는 이미 늦어 있었다. 부득이 오른쪽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영호충은 장검을 쳐들어 올리며 그의 왼쪽 뺨을 찔러갔다. 전백광은 칼4을 들어 막으려고 했으나 검의 끝은 갑자기 그의 왼쪽다리를 향해 찔러오지 않는가? 전백광은 막을 수가 없어서 재차 오른쪽으로 한 걸음 옮겼다.
영호충은 잇달아 일검을 찔러냈는데 모두가 그의 왼쪽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한 걸음 또 한 걸음 오른쪽으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십여 걸음을 옆으로 물러나게 되었을 때 어느덧 전백광을 오른쪽 벼랑가의 막다른 곳까지 몰아세울 수가 있었다.
이곳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어서 뒤로 물러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전백광의 등이 그 바위??닿았다. 전백광은 칼을 마구잡이로 휘둘러대며 영호충의 장검이 어떠한 공격을 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음 순간 그의 귀에 '찍찍' 하는 소리가 잇달아 들렸다. 왼손의 소맷자락과 옷자락 그리고 바지가랭이는 영호충의 장검에 의해 잇달아 여섯번이나 찔리게 되었다. 이 육검은 한결같이 옷자락에 구멍만 내었을 뿐 살갗에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백광은 속으로 환히 내다보고 있었다. 이 육검 가운데 어느 일검이라도 자기의 팔이나 발을 자르기에 충분했을 뿐 아니라 배를 찔러 창자가 ?た윳돈?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삽시간에 좌절감을 느끼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왁' 하고 한 모금의 선혈을 뿜어내게 되었다.
영호충은 잇달아 세번이나 전백광을 제압한 것이다. 수일 전만 하더라도 이 사람의 무공은 자기보다 훨씬 뛰어난 편이었다. 영호충은 얼굴에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있었으나 속으론 미친 듯 기뻐하고 있었다. 거기다 전백광이 입으로 선혈을 토하자 미안한 마음에 이렇게 말했다.

[전형, 승패란 흔히 있는데 그럴 것까지는 없지 않소? 소제 4역시 그대의 손아래 여러번 지지 않았소?]

전백광은 칼을 던지며 고개를 흔들었다.

[풍 선배님의 검술은 이미 신의 경지에 도달했소. 당금 세상에는 대적할 사람이 없을 것이오. 불초는 영원히 그대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오.]

영호충은 그의 칼을 주워 두 손으로 건네주며 말했다.

[전형의 말이 맞소. 소제는 요행으로 이겼을 분이며 풍 사숙조께서 가르쳐 주신 덕택이죠. 그런데 풍 사숙조께선 한가지를 전형에게 부탁했소.]

전백광은 칼을 받지 않고 참담한 어조로 말했다.

[전모의 목숨이 그대의 손에 달려 있는 이상 또 무슨 할 말이 있겠소?]

영호충은 말했다.

[풍 사숙조께선 이미 은거하신 지 오래라 세상 일에 간섭하지 않고 속인들이 번거롭게 구는 것을 좋아하지 않소이다. 전형이 산을 내려간 이후라도 다른 사람에게 그 어르신의 일을 들먹이지 말아 주었으면 고맙겠소이다.]

전백광은 냉랭히 그 말을 받았다.

[일검으로 나를 죽여 입을 봉한다면 더 깨끗하지 않겠소?]
영호충은 뒤로 두 걸음 물러나며 검을 검집에 꽂았다.

[전형의 무공이 나보다 뛰어날 당시 만약 한 칼로 나를 죽였다면 어찌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소? 불초가 전형에게 우리 풍 사숙조의 행적을 누설하지 말라고 한 것은 부탁이지 위협이 아닙니다.]

전백광은 말했다.

[좋소, 내 응락하리다.]

영호충은 급히 읍을 했다.

[전형, 고맙소.]

전백광은 말했다.

[나는 며을 받들어 그대를 모시고 산을 내려가려고 이곳까지 왔소. 그러나 이 일을 전모가 해낼 수 없게 되었지만 일은 끝난 것은 아니오. 싸운다면 나는 한평생 그대를 이길 수 없을 것이나 이대로 손을 떼지는 않을 것이오. 이 전모의 목숨이 붙어있는 한 끝까지 해보겠소. 그러니 그대는 내가 영웅호걸의 행동을 안 한다고 탓하지 마시오. 그럼 영호형, 다시 만납시다.]

전백광은 포권을 하더니 몸을 돌려 떠나갔다.
추천 (0) 선물 (0명)
IP: ♡.221.♡.3
23,499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나단비
2024-04-20
0
15
chillax
2024-04-19
2
69
나단비
2024-04-19
0
45
나단비
2024-04-19
0
27
나단비
2024-04-19
0
24
나단비
2024-04-19
0
31
나단비
2024-04-19
0
27
chillax
2024-04-18
2
76
나단비
2024-04-18
0
21
나단비
2024-04-18
0
28
나단비
2024-04-18
0
34
나단비
2024-04-18
0
28
나단비
2024-04-18
0
32
나단비
2024-04-17
0
48
나단비
2024-04-17
0
33
나단비
2024-04-17
0
25
나단비
2024-04-17
0
40
나단비
2024-04-17
0
30
나단비
2024-04-16
0
53
나단비
2024-04-16
0
88
나단비
2024-04-16
0
53
나단비
2024-04-16
0
47
나단비
2024-04-16
0
39
나단비
2024-04-15
0
61
나단비
2024-04-15
0
42
나단비
2024-04-15
0
74
나단비
2024-04-15
0
47
나단비
2024-04-15
0
42
나단비
2024-04-14
0
60
나단비
2024-04-14
0
156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