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화원 ㅡ 해가 질 때

단밤이 | 2024.01.17 00:24:40 댓글: 0 조회: 211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40904
The Secret Garden

(비밀의 화원)


해가 질 때

노인의 머리가 보이지 않게 되자, 콜린은 메리를 돌아보았다.
“가서 영감을 데려와.” 콜린이 말했다. 메리는 풀밭 위를 날듯이 가로질러, 담쟁이덩굴 아래 문으로 갔다.
디콘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콜린을 지켜보고 있었다. 콜린은 두 볼이 울긋불긋 물들었는데 그 모습이 몹시 놀라웠지만, 쓰러질 기미 같은 것은 없었다.
“나는 서 있을 수 있어.” 콜린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여전히 머리를 꼿꼿이 든 채, 꽤 당당한 투로 말했다.
“겁내지 않으면 할 수 있다구 했잖어요.” 디콘이 대답했다. “그리구 도련님은 이젠 겁을 내지 않으셔요.”
“그래, 이제는 겁이 안 나.” 콜린이 말했다.
그때 문득 콜린은 메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네가 마법을 일으키는 거니?” 콜린이 물었다.
디콘의 반달 같은 입술 위로 유쾌한 미소가 번졌다.
“마법은 도련님이 일으키구 계시잖어요.” 디콘이 말했다. “그건 이 땅에서 얘들을 피어나게 만든 거하구 같은 마법이여요.” 그러더니 투박한 구둣발로 풀밭에 무리지어 핀 크로커스를 살짝 건드렸다.
콜린은 꽃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구만.” 콜린이 천천히 말했다. “이것보담두 더 큰 마법은 있을 수 없지. 있을 리 없어.”
콜린은 그 어느 때보다 허리를 곧게 폈다.

“저 나무까지 걸어갈 거야.” 콜린이 자기에게서 얼마간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웨더스태프가 이곳에 오면, 계속 서 있을 거야. 쉬고 싶으면, 나무에 기대면 돼. 앉고 싶으면, 앉을 거야. 하지만 그 전에는 절대 앉지 않을 거야. 휠체어에서 무릎 담요를 가져다줘.”
콜린이 그 나무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디콘이 팔을 잡아준 덕이기도 했지만 콜린은 놀랍도록 안정적으로 걸었다. 나무줄기에 기대어 섰을 때는 나무에 기댔다는 사실이 별로 티가 나지도 않았다. 게다가 여전히 꼿꼿하게 서 있었기 때문에 키도 커 보였다.
벤 웨더스태프 영감은 담장에 난 문으로 들어오자마자, 그곳에 서 있는 콜린을 보았다. 메리가 속으로 무슨 말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뭐라구 중얼대냐?” 노인이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호리호리하게 말랐지만 똑바로 서 있는 소년의 모습과 의기양양해하는 얼굴에서 지금은 조금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리는 노인에게 말한 게 아니었다. 메리는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너는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내가 말했잖아! 할 수 있어! 너는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메리가 주문을 걸듯 이렇게 중얼거린 것은, 콜린이 지금처럼 두 발로 똑바로 서 있도록 마법을 일으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벤 웨더스태프가 보는 앞에서 콜린이 포기하는 것만큼은 견딜 수 없었다. 콜린은 포기하지 않았다. 메리는 콜린이 비쩍 말랐지만 몹시 아름다워 보인다는 생각에 감격스러웠다. 콜린은 우스꽝스러워 보일 만큼 오만한 태도로 벤 웨더스태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를 봐!” 콜린이 명령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보라고! 내 등이 굽었나? 내 다리가 구부러졌어?”
벤 웨더스태프 영감은 복받치는 감정을 좀처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얼른 감정을 조금이나마 추스르고 거의 평소와 같은 태도로 대답했다.
“아니구만요.” 벤이 말했다. “전혀 그렇지 않으시오. 대체 지금까지 무얼 허신 거요? 왜 모습을 감추시고 사람들이 도련님 몸이 성치 않구 반쯤 미쳤다구 생각하게 내버려 두셨소?”
“반쯤 미쳤다고?” 콜린이 화가 나 소리쳤다. “누가 그렇게 생각해?”
“수많은 멍청이들이 그런다오.” 벤 영감이 대답했다. “이 세상에는 헛소리만 요란한 멍청이들 천지라오. 그놈들은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니깐. 그동안 뭐 때문에 틀어박혀 계셨소?”
“모두 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지.” 콜린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는 안 죽어!”
콜린이 어찌나 자신만만하게 그 말을 했던지, 벤 영감은 콜린을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몇 번이고 훑어보았다.
“도련님이 죽는다구요!” 노인이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말했다. “절대 그러실 것 같지 않소! 도련님한텐 굳센 의지가 가득허니깐. 도련님이 얼른 다리를 내려놓는 모습을 보자마자 도련님 몸에 아무 문제두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오. 담요 위에 잠시 앉으시구려, 어린 주인님. 그리구 나한테 명령을 내려주시오.”
벤 영감의 태도에는 기민한 이해력과 은근한 상냥함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메리는 ‘긴 산책로’를 걸어 문까지 오는 동안, 그간의 사정을 쏟아내듯 최대한 빨리 들려주었다. 아이가 들려준 이야기에서 특히 명심해야 할 부분은, 콜린이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콜린은 건강해지고 있었다. 정원이 그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아무도 콜린에게 혹이나 죽음을 떠오르게 해서는 안 되었다.
라자가 나무 아래에 펼친 무릎 담요에 앉았다.
“웨더스태프, 당신은 정원에서 무슨 일을 하지?” 콜린이 물었다.
“지시받은 일이라면 뭐든 한다오.” 벤 영감이 대답했다. “호의에 힘입어 계속 일을 했다오. 그분이 날 좋아해주셔서.”
“그분?” 콜린이 물었다.
“도련님의 어머님 말이오.” 벤 웨더스태프가 말했다.
“내 어머니?” 콜린이 말했다. 콜린은 말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이 어머니의 정원이었던 거야, 그렇지?”

“그럼요, 그렇구말구요!” 그러더니 벤 웨더스태프도 주위를 돌아보았다. “마님은 이곳을 젤 좋아하셨다오.”
“이제 이곳은 내 정원이야. 나는 이곳이 좋아. 매일 이곳에 올 거야.” 콜린이 선언하듯 말했다. “하지만 비밀로 해야 해. 내 명령은 이거야. 아무도 우리가 이곳에 온다는 사실을 알아서는 안 돼. 디콘과 내 사촌이 이곳을 가꿔서 되살아나게 했어. 가끔 영감을 불러서 두 사람을 도와주라고 할 거야. 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와야 해.”
벤 웨더스태프가 얼굴이 쪼글쪼글해지도록 선선하게 웃었다.
“실은 아무두 안 볼 때 이곳엘 왔었다오.” 벤 영감이 말했다.
“뭐라고!” 콜린이 소리쳤다. “언제?”
“마지막으루다가 여기에 온 건.” 벤 영감은 턱을 문지르며 주위를 바라보았다. “한 2년 전이었다오.”
“하지만 10년 동안 아무도 여기에 들어온 적이 없었어!” 콜린이 외쳤다. “문이 없었어!”
“나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으니깐.” 벤 영감이 아무런 감정도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난 문으로 들어오지 않았다오. 담장을 넘어서 왔지. 지난 2년 동안은 류머티즘 때문에 올 수가 없었다오.”
“영감님이 오셔가지구 가지를 치셨군요!” 디콘이 소리쳤다. “어떻게 가지가 다듬어져 있는가 영문을 몰랐다니깐요.”
“그분은 여길 정말루 사랑하셨소. 정말이구말구!” 벤 웨더스태프 영감이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정말 아름다운 분이셨다오. 언젠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다오. ‘벤.’ 이러시더니 웃으시는 거예요. ‘혹시라도 내가 아프거나 죽으면 당신이 내 장미들을 돌봐야만 해요.’ 마님이 돌아가시구 아무두 여길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떨어졌소. 허지만 나는 왔지.” 벤 영감은 불퉁하니 고집을 숨기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담장을 넘어서 왔다오. 류머티즘으루다가 오지 못하게 될 때까지. 1년에 한 번, 이곳에서 정원을 조금 손봤다오. 마님이 먼저 그렇게 지시하셨으니깐.”
“영감님이 정원을 안 가꿨으면, 이곳이 지금처럼 근사하지 않을 거여요.” 디콘이 말했다.
“정원을 돌봐줬다니 기뻐, 웨더스태프.” 콜린이 말했다. “영감이라면 비밀을 어떻게 지킬지 알 거야.”
“그럼요, 알다마다요, 주인어른.” 벤 영감이 대답했다. “류머티즘으루 고생하는 사람은 문으루 들어오면 훨씬 수월하다오.”
그 나무 근처 풀밭에 메리가 놓아둔 모종삽이 있었다. 콜린은 손을 뻗어 삽을 집어 들었다. 얼굴에 묘한 표정이 번지나 싶더니, 삽으로 땅을 긁기 시작했다. 콜린의 가냘픈 손은 그 일이 버거울 정도로 약했지만,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모종삽 끝을 땅에 박고 흙을 파 엎었다. 특히 메리는 숨도 쉬지 못한 채 지켜보았다.
“너는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메리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장담해, 너는 할 수 있어!”
디콘은 동그란 두 눈을 강렬한 호기심으로 빛냈지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벤 웨더스태프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콜린은 포기하지 않았다. 모종삽으로 흙을 가득 파서 뒤엎은 후, 의기양양해져서는 능숙한 요크셔 말투로 디콘에게 말했다.
“네가 그랬잖어. 다른 사람들처럼 나두 여길 산책허게 만들겠다구. 그리구 이곳 땅을 일구게 허겠다구 했지. 난 너가 날 기쁘게 해주려구 한 말이라구만 생각했어. 오늘은 내가 여길 산책한 첫날인데, 벌써 땅을 일구구 있어.”
벤 웨더스태프는 콜린의 말을 듣더니, 다시 입을 떡 벌렸다. 그러더니 빙그레 웃기 시작했다.
“어이구!” 벤 영감이 말했다. “말씀을 들으니 도련님 머리두 멀쩡하신 모양이오. 역시 도련님은 요크셔 사람이구만. 그리고 이렇게 땅을 파구 계시구. 혹시 이곳에 뭔가 심어보시겠소? 장미 묘목을 구해올 수 있다오.”
“가서 가져와!” 콜린이 신이 나서 땅을 파며 말했다. “어서! 빨리!”
정말 일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벤 영감은 류머티즘도 잊고 후다닥 달려갔다. 디콘이 자기 삽을 들고, 핏기 없이 가냘픈 손을 지닌 새 일꾼보다 더 깊고 넓은 구멍을 팠다. 메리는 얼른 달려나가, 물뿌리개를 가지고 돌아왔다. 디콘이 구멍을 더 깊이 파자, 콜린은 부드러운 흙을 계속해서 파 엎었다. 조금이라고 해도 낯설고 새로운 운동을 한 덕에, 콜린은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해가 다, 전부 다 넘어가기 전에 꽃을 심고 싶어.” 콜린이 말했다.
메리는 태양이 일부러 몇 분 정도 더 머물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벤 웨더스태프 영감이 화분에 담긴 장미를 온실에서 가져왔다. 절뚝거리면서도 최대한 서둘러 풀밭을 가로질러 왔다. 벤 영감도 슬슬 신이 나기 시작했다. 구멍 옆에 꿇어앉아, 화분에서 묘목을 뽑아냈다.
“여기 있소, 도련님.” 벤 영감은 장미 묘목을 콜린에게 주며 말했다. “임금님이 새 궁전으루 가면 나무를 심듯이, 도련님두 이 땅에 장미를 직접 심어보시구려.”
벤 영감이 흙을 단단하게 다지는 동안 콜린이 장미를 구멍에 넣고 꽉 잡고 있자, 콜린의 희고 가냘픈 두 손은 살짝 떨렸고 상기된 두 볼은 더욱 붉어졌다. 구멍을 흙으로 채우고 꾹꾹 눌러 단단하게 다졌다. 메리는 양손으로 땅을 짚고 몸을 굽힌 채 고개를 쑥 내밀었다. 검댕이가 푸드득 날아오더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려고 다가왔다. 밤과 껍질이 벚나무에서 그 모습을 보며 수다를 떨었다.
“다 심었어!” 마침내 콜린이 말했다. “그리고 태양은 이제 막 지평선으로 미끄러져 갔어. 일어나게 좀 도와줘, 디콘. 해가 지는 동안 서 있고 싶어. 그것도 마법의 일부니까.”
디콘이 콜린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러자 마법인지 혹은 다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뭔가가 콜린에게 힘을 주었다. 그리하여 태양이 지평선으로 넘어가고 그들 모두에게 기묘하고도 아름다웠던 오후가 끝나가는 동안, 콜린은 활짝 웃으며 두 발로 단단하게 땅을 딛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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