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15

나단비 | 2024.02.11 14:34:03 댓글: 0 조회: 141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46557
15

학교에서의 소동





앤이 숨을 깊숙이 들이마시며 말했다.

“정말 눈부신 날이야. 이런 날에는 그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않니?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못해 오늘 같은 날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안됐어. 물론 그 사람들한테도 멋진 날은 있겠지만, 오늘은 아니잖아. 그리고 이런 멋진 길을 걸어 학교에 간다는 건 더 기쁜 일이야. 그렇지?”

“큰길로돌아가는 것보다 훨씬 더 근사해. 저 길은 먼지가 너무 많이 나고 덥거든.”

다이애나가 현실적으로 대답하고는 점심 바구니를 들여다보았다. 안에 들어 있는 세 개의 군침 돌게 맛있어 보이는 딸기 파이를 친구 열 명과 나눠 먹으려면 한 사람이 몇 번씩이나 베어 먹을 수 있을까를 머릿속으로 재빨리 계산해보고 있었다.

에이번리 학교의여자아이들은 점심을 서로 나눠 먹게 되어 있었다. 딸기 파이 세 개를 혼자서 먹거나 또는 제일 친한 친구하고만 나눠 먹으면 영원히 ‘치사하고 쩨쩨한’ 아이로 낙인이 찍히게 된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열 명이 나눠 먹으려다 보면 자기가 먹을 파이는 얼마 남지 않아 맛만 보고 말아야 한다.

앤과 다이애나가 학교에 가려고 지나는 길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앤은 다이애나와 함께 걷는 이 길이 너무나 완벽해서 상상력으로도 더 멋지게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큰길로 돌아가는 길은 낭만이라곤 없었지만 ‘연인의 오솔길’과‘버드나무 연못’, ‘제비꽃 골짜기’와 ‘자작나무 길’은 너무나도 낭만적이었다.

‘연인의 오솔길’은‘초록 지붕 집’과수원 아래를 지나 숲을 가로질러 멀리 커스버트네 밭까지 뻗어 있었다. 이 오솔길을 따라 소들을 목장으로 내보내고 겨울에는 땔감을 집으로 운반해왔다.‘연인의 오솔길’이란 이름은 앤이‘초록 지붕 집’에 온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지었다.

“저 길을‘연인의 오솔길’이라고 한 이유는 연인이 걷는 길이라서가 아니에요. 다이애나와 제가 읽은 정말로 멋진 이야기책에 그 이름이 나왔는데 우리도 그런 길을 갖고 싶어서였어요. 정말 예쁜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너무 낭만적이에요! 연인들도 저 길을 좋아할 거예요. 그리고 저곳에서라면 혼자 얘기를 하고 다녀도 사람들이 미쳤다고 생각지 않을 것 같아서 좋아요.”

앤이 마릴라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아침에 앤은 혼자서‘연인의 오솔길’을 걸어 내려가 개울가까지 갔다. 그곳에서 다이애나를 만나 둘이 함께 잎이 무성한 단풍나무가 아치를 이루고 있는 길을 따라 통나무 다리까지 걸어갔다.

“단풍나무는 아주 붙임성이 좋은 나무야. 항상 우리에게 바스락거리며 속삭이잖아.”

앤이 시를 읊듯이 말했다. 둘은 이제 오솔길을 벗어나 배리 씨네 뒷밭과‘버드나무 연못’을 지났다.‘버드나무 연못’너머로는앤드루벨 씨네 큰 숲이 드리운 그림자 안에 초록색으로 움푹 들어가 있는 아담한‘제비꽃 골짜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제비꽃이 피어 있지 않아요. 하지만 다이애나 말로는 봄이 되면 거기에 제비꽃이 수도 없이 피어난대요. 오, 마릴라 아주머니, 제비꽃들이 피어난 모습을 상상할 수 있으세요? 생각만 해도 정말로 숨이 멎는다니까요. 그래서 전 그곳을‘제비꽃 골짜기’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다이애나는 여기저기에 꼭 맞는 이름을 저처럼 잘 생각해내는 애는 처음 봤대요. 무슨 일이건 잘하는 일이 있다는 건 좋은 거죠? 하지만‘자작나무 길’은 다이애나가 지은 이름이에요. 다이애나가 그 길을 그렇게 부르고 싶어 해서 저도 좋다고 했어요. 그렇지만 저라면 평범한‘자작나무 길’이라는 이름보다는 더 시적인 이름을 찾아냈을 거예요. 누구라도 그런 이름은 생각해낼 수 있어요. 하지만‘자작나무 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예요.”

앤이 마릴라에게 말했다.

정말 그랬다. 앤뿐만이 아니라 그 길을 지나는 그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다. 길은 조금 좁고 구불구불 이어지면서 긴 언덕을 감아 내려가 벨 씨의 숲을 가로질렀다. 이 숲으로 흠이라고는 없는 다이아몬드 같은 빛줄기가 수많은 에메랄드 그물망을 통해스며들어왔다. 양쪽 길가로는 하얀나무 기둥에 가지들을 부드럽게 뻗고 있는 어리고 날씬한 자작나무가 길 저 끝까지 줄지어 늘어섰다. 그 길을 따라 고사리와 별꽃, 은방울꽃, 진홍색 열매가 다닥다닥 달려 있는 노루발풀 들이무리 지어자랐다.

공기 중에는 항상 기분 좋은 향기가 감돌고 새들의 노랫소리와 함께 나무에서는 바람의 속살거림과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걷다 보면 이따금씩 토끼가 길을 가로질러 껑충껑충 지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앤과 다이애나도 토끼는 자주 보지 못했다. 골짜기에서 벗어난 오솔길은 큰길로 이어지고 그 길을 따라 가문비나무 언덕을 올라가면 학교가 나온다.

에이번리 학교는 흰색 건물로 처마가 낮고 창문은 넓었다. 안에는 뚜껑을 여닫을 수 있는 편리하고 튼튼한 구식 책상들이 놓였다. 책상 뚜껑에는 삼대에 걸쳐 이 학교에 다닌 아이들의 이름 첫 글자와 비밀 문자들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학교 건물은 길에서 멀찍이 물러나 자리 잡았고, 그 뒤로는 울창한 전나무 숲과 시냇물이 흘러가 아이들이 집에서 가져온 우유병을 점심때까지 시원하고 맛있게 유지하려고 담가놓곤 했다.

9월 첫날, 처음으로 학교로 향하는 앤을 배웅하면서 마릴라는 여러 가지 걱정이 많았다. 너무나 엉뚱한 구석이 많은 아이인데, 어떻게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도대체 공부 시간에 입을 다물고 있을 수나 있을까?

하지만 마릴라의 걱정과는 다르게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날 오후 앤은 매우 기분이 좋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전 여기 학교가 좋아질 거 같아요.”

앤이 말했다.

“선생님은 별로 좋은 것 같지가 않지만요. 계속 콧수염만 만지작거리면서 프리시 앤드루스만 쳐다보잖아요. 프리시는 다 큰 어른이에요. 열여섯 살이나 먹었거든요. 내년에 샬럿타운에 있는 퀸스 전문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려고 공부하고 있어요. 틸리 볼터 말로는 선생님이 프리시한테 완전히 맛이 갔대요. 프리시는 피부도 곱고 머리는 곱슬곱슬한 갈색인데, 우아하게 올리고 다녀요. 항상 맨 뒤에 있는 긴 의자에 앉는데, 선생님도 거의 언제나 프리시 옆에 같이 앉아 있죠. 프리시한테 공부를 가르쳐주기 위해서래요. 하지만 루비 길리스가 보니까 선생님이 프리시의 석판에 뭐라고 써주자 프리시가 그걸 읽고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킥킥거리고 웃더라는 거예요. 루비 길리스는 그 내용이 공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걸 거라고 말했어요.”

“앤 셜리, 선생님을 그런 식으로 말하면 못쓴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라. 네가 선생님 흉이나 보려고학교에 다니는건 아니잖니. 선생님은 너에게 뭔가를 가르쳐주실 거고, 너는 공부를 해야지. 집에 오자마자 선생님 얘기나 이러쿵저러쿵 늘어놓는 건 좋은 버릇이 아니다. 학교에서는 다 잘했는지 모르겠구나.”

마릴라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럼요, 잘했어요. 아주머니가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못되게 굴지 않았다고요.”

앤이 기분 좋게 말했다.

“전 다이애나옆자리에 앉아요. 우리 책상은 바로 창문 옆이어서‘반짝이는 호수’도 내다볼 수 있었어요. 학교에는 괜찮은여자아이들이 아주 많아요. 점심시간에는 재미있는 놀이도 했어요. 같이 놀 수 있는여자아이들이 많아서 너무 신나요. 물론 전 다이애나를 가장 좋아하고 언제나 그럴 거지만요. 전 다이애나를 숭배해요. 전 다른 애들보다 진도가 굉장히 뒤처져 있어요. 모두들 5학년 공부를 하는데 저만 4학년 공부를 해요. 좀 부끄러웠어요. 하지만 우리 반에서 저만큼 뛰어난 상상력을 가진 아이는 보지 못했어요. 오늘은 읽기, 지리, 역사, 그리고 받아쓰기를 했어요. 필립스 선생님은 제 받아쓰기가 너무 형편없다고 하면서 제 석판을 들어 올려 모두에게 보여주었어요. 틀린 부분이 다 표시된 제 석판을요. 전 정말로 끔찍한 기분이었다고요, 마릴라 아주머니. 그 선생님은 처음 온 아이에게는 더 친절하게 대해주어야 한다는 걸 좀 배워야겠어요. 루비 길리스가 제게 사과 하나를 주었고 소피아 슬론은 ‘집에 놀러 가도 되니?’ 라고 쓰여 있는 예쁜 분홍색 카드를 빌려줬어요. 전 그 카드를 내일 돌려줄 거예요. 그리고 틸리 볼터는 오늘 오후 내내 자기 구슬 반지를 끼고 있게 해주었어요. 저도 저 다락방에 있는 낡은 바늘꽂이에서 진주 구슬을 좀 빼내 반지를 만들어도 될까요? 그리고 아, 마릴라 아주머니, 제인 앤드루스가 그랬는데요. 프리시 앤드루스가 제 코가 아주 예쁘다고 사라 길리스한테 하는 소리를 미니 맥퍼슨이 듣고 자기한테 이야기해주었대요. 이건 제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어본 칭찬이에요.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제 코가 정말로 예뻐요, 마릴라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진실을 말씀해주시리라 믿어요.”

“괜찮게 생겼다.”

마릴라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속으로는 앤의 코가 굉장히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말을 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것이 3주 전의 일이었고, 지금까지는 모든 일이 다 순조로웠다. 그리고 지금, 오늘처럼 화창한 9월의 아침, 에이번리에서 가장 행복한 두 소녀인 앤과 다이애나는‘자작나무 길’을 발걸음도 가볍게 지나고 있었다.

“오늘은 길버트 블라이드가 학교에 올지도 몰라. 여름 내내 뉴브런즈윅에 있는 사촌 집에서 지내다가 지난 토요일 밤에 집에 왔다고 하거든. 길버트는 정말로 잘생긴 애야, 앤. 그런데 그 애는여자아이들 골탕 먹이기를 아주 좋아해. 우리를 너무 못살게 군다고.”

다이애나가 말했다.

다이애나의 말이 길버트가 좀 괴롭혀주었으면 좋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길버트 블라이드? 현관 벽에 줄리아 벨 이름과 함께 쓰여 있고 그 위에 크게 주목이라고 쓰여 있는 그 이름 아니니?”

앤이 물었다.

“그래, 하지만 내 생각엔 길버트가 줄리아 벨을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진 않아. 길버트가 줄리아의 주근깨로 구구단 외우는 연습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거든.”

“오, 나한테 주근깨 얘기는 하지 말아줘. 나처럼 주근깨가 많은 사람한테 그런 얘기는 실례야. 어쨌거나 벽에다남자아이와여자아이이름을 함께 써놓는 낙서는 바보 같은 짓이야. 누가 내 이름을남자아이이름과 함께 벽에다 써놓기만 해봐라.”

이렇게 말을 하고 난 앤은 얼른 한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일 누가 하기만 한다면 말이야.”

앤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자기 이름이 벽에 낙서되어 있는 것을 원하지는 않지만 그럴 위험이없다는 것 역시도 모욕적이었다.

“말도 안 돼.”

그 검은 눈과 반질반질 윤기 나는 검은 머리로 에이번리 남학생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다이애나가 말했다. 다이애나의 이름은 현관 벽에 주목이란 말과 함께 여섯 번이나 적혔다.

“그건 단지 장난일 뿐이야. 그리고 네 이름은 안 적힐 거라고 너도 너무 안심하지 마. 찰리 슬론이 너한테 완전히 빠졌잖아. 그 애가 자기 엄마에게 전교생 중에 네가 가장 머리가 좋다고 말했대. 그 말이 예쁘다는 말보다 더 듣기 좋지 않니?”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난 영리한 것보다는 예쁘고 싶어.”

가슴 저 밑바닥까지 너무나 여자다운 감성을 지닌 앤이 말했다.

“난 찰리 슬론 같은 애는 싫어.남자아이눈이 왕방울 같은 건 싫다고. 만일 누가 그 애와 내 이름을 같이 적어놓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다이애나 배리, 하지만 학급에서일 등이라는 건 기분 좋은 일이지?”

“길버트도 너랑 같은 반에 들어갈 거야. 그 애는 항상 반에서일 등이었어. 나이는 거의 열네 살이나 되었지만 아직 4학년이야. 4년 전에 길버트 아버지가 병이 나서 앨버타로 요양을 갔는데 길버트도 따라갔다 와서 그렇대. 거기서 3년이나 살았는데, 학교에는 다니지 못했다나 봐. 앞으로는 1등 하기가 쉽지 않을 거야, 앤.”

다이애나가 말했다.

“잘됐다.”

앤이 얼른 대답했다.

“겨우 아홉 살이나 열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들 중에서일 등을 한 게 별로 떳떳하지 못했거든. 어제 선생님이 ‘비등점’이란 단어의 철자를 말해보라고 했는데 조시 파이가 제일 먼저 손을 들었어. 근데 글쎄 조시가 책을 훔쳐보고 있는 거 있지. 필립스 선생님은 프리시 앤드루스를 보느라고 조시가 그러는 것도 보지 못했어. 하지만 난 보았다고. 내가 치사한 짓 하지 말라고 그 애를 쌀쌀맞게 째려보았더니 그 애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지면서 결국에는 철자도 틀리게 말하고 말았어.”

“파이 집 아이들은 모두 속임수를 잘 써.”

다이애나도 분개해했다. 둘은 큰길의 담을 넘어갔다.

“거티 파이가 어제 시냇물 내 자리에 자기 우유를담가둔 거있지. 그런 애 본 적이 있니? 난 지금도 그 애랑은 말도 안 해.”

필립스 선생님이 뒷자리에 앉아 프리시 앤드루스의 라틴어 공부를 봐주고 있을 때 다이애나가 앤에게 속삭였다.

“앤, 통로 쪽으로해서 바로 네오른쪽에 앉아 있는 애가 길버트 블라이드야. 살짝 봐, 잘생겼다고 생각지 않아?”

앤이 오른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 아이를 살피기에 딱 좋은 기회였다. 다이애나의 말대로 길버트 블라이드는 바로 앞자리에 앉은 루비 길리스의 땋아 내린 노랑 머리채를 핀으로 의자에 고정시키느라 정신을 팔고 있었으니까. 길버트는 밤색 고수머리에 키가 크고 눈 역시도 밤색이었는데, 눈에 장난기가 가득했으며 입가에도 장난스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의 호명을 받은 루비 길리스가 산수 문제를 풀러 가려고 벌떡 일어서다가 자기 머리카락이 뿌리째 뽑히는 줄 알고 꽥 소리를 지르며 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모두가 루비를 바라보았고 필립스 선생님은 루비가 울음을 터트리자 매우 엄한 눈길로 쏘아보았다. 길버트는 핀을 얼른 감추어버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역사책을 읽고 있었다. 소동이 가라앉고 나자 길버트는 앤을 바라보며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윙크를 했다.

“그래, 길버트 블라이드가 잘생기긴 했어. 그렇지만 너무 뻔뻔해. 처음 보는 사람한테 윙크를 하는 건 예의 있는 행동이 아니잖아.”

하지만 정말로 일이 벌어진 건 그날 오후였다.

필립스 선생님이 교실 뒤 구석에서 프리시 앤드루스에게 대수를 가르쳐주느라 바쁘고 나머지 학생들은 제각각 자기 하고 싶은 일에 빠져 있었다. 푸른 사과를 먹거나 서로 속삭이는 아이도 있었고, 석판에 그림을 그리는 아이, 귀뚜라미에 실을 감아 통로에 놓고 잡아당겼다 놓았다 하는 장난을 치는 아이도 있었다. 길버트 블라이드는 앤 셜리가 자기를 쳐다보게 하려고 했지만 계속 실패만 했다. 그 순간 앤은 길버트 블라이드의 존재뿐만이 아니라 에이번리 학교 그 자체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턱을 손으로 받치고 눈은 서쪽 창밖으로 보이는‘반짝이는 호수’의 푸른 수면에 고정시킨 채 멋진꿈나라에서헤매고 있어서 멋진 환상의 세계를 제외하고는 들리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었다.

길버트 블라이드는 지금까지여자아이의 시선을 끄는 일에 어려움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빨간 머리에 턱이 약간 뾰족하고 눈이 커다란 저 아이도 에이번리 학교의 다른여자아이들처럼 자기를 보아야 했다.

길버트는 통로로 팔을 뻗어 앤의길게 땋아 내린빨간 머리채 끝을잡고는신랄하게 속삭였다.

“홍당무! 홍당무!”

그러자 앤이 격렬한 몸짓으로 휙 돌아보았다.

그냥 본 것이 아니었다. 벌떡 일어서 버렸다. 황홀하던 공상은 산산조각이 났고, 길버트를 쏘아보는 눈에는 불꽃이 튀었으며, 너무 분해 눈에는 눈물까지 고였다.

“비겁하고 나쁜 자식!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있지?”

앤이 격앙되어 소리를 질렀다.

그런 다음 앤은 길버트의 머리에다 석판을 내리쳐 뚝! 두 동강 내버리고 말았다. 길버트의 머리가 아니라 석판을.
에이번리 학교 아이들은 항상 이런 구경거리에 열광했다. 하지만 이번 것은 특별히 더 볼만했다. 모두가 같이 “오호!” 환호성을 올렸고 다이애나는 순간 숨을 멈추었으며 히스테리 경향이 좀 있는 루비 길리스는 울음을 터트렸다. 토미 슬론은 입을 떡 벌리고 이 극적인 광경을 구경하느라 자기 귀뚜라미가 모두 탈출해버리는 것도 몰랐다.

필립스 선생님이 통로로 뚜벅뚜벅 걸어와 앤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앤 셜리, 이게 무슨 짓이야?”

선생님이 화가 나서 말했다. 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홍당무라고 불린 마당에 아무리 선생님이라도 너무 많은 걸 요구하고 있었다. 길버트가 대신 용감하게 일어나 입을 열었다.

“필립스 선생님,제가 잘못한 겁니다.제가 앤을 놀렸어요.”

필립스 선생님은 길버트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내 학생이 이렇게 화를 못 참고 앙갚음하는 걸 보아야 하다니 정말 유감이구나. 앤, 오늘 남은 시간 내내 칠판 앞으로 나가 서 있어라.”

엄한 목소리였다. 자기 학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직 작고 미숙한 아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아이의 영혼에서 모든 악의 뿌리를 뽑아내겠다는 말투였다.

앤은 벌로 회초리를 맞는 것이 훨씬 더나을 거란생각이 들었다. 예민한 감수성을지닌앤은 실제로 회초리를 맞고 있기나 한 듯 온몸을 떨었고 얼굴은 창백해져 시키는 대로 했다. 필립스 선생님은 앤 머리 너머로 분필을 들어 칠판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앤 셜리는 성질이 아주 고약하다. 앤 셜리는 화를 참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큰 소리로 읽어 아직 글을 모르는 초급반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앤은 그날 오후 내내 그 글이 쓰인 칠판 아래 서 있었다. 울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가슴속에서 식지 않고 들끓는 분노가 모욕감 속에서도 앤을 지탱해주었다. 눈빛도 분노로 가득하고 볼은 붉어진 채로 분연히 서서 다이애나의 공감한다는 시선과, 찰리 슬론의 격분한 고갯짓과, 조시 파이의 고소해하는 미소를 맞았다. 길버트 블라이드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다시는 길버트를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다! 다시는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학교가 끝나자 앤은 그 붉은 머리를 꼿꼿하게 들고 학교를 나섰다. 길버트 블라이드는 현관에서 앤에게 말을 걸어보려고 애를 썼다.

“앤, 네 머리 색깔 가지고 놀린 거 정말 미안해. 정말이야. 그렇게 계속 화를 내진 말아줘, 응?”

길버트가 정말 후회한다는 듯 속삭였다.

앤은 아주 경멸스럽다는 듯 돌아보지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휙 지나쳐 버렸다.

“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앤?”

다이애나가 길을 내려가며 절반은 비난을 절반은 존경을 담아 말했다. 다이애나는 자기 같으면 절대로 길버트의 사과를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절대로 길버트 블라이드를 용서할 수 없어.”

앤이 단호히 말했다.

“그리고 필립스 선생님은 내 이름 철자에‘e’자도 넣지 않았어. 내 가슴에는 원한이 새겨졌어, 다이애나.”

다이애나는 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도 알 수 없었지만 뭔가 끔찍한 것이라고 느꼈다.

“길버트가 네 머리 색깔 가지고 놀린 걸로 너무 속상해하지 마. 그 애는 모든여자아이들을 놀린다고. 내 머리가 너무 검다고 놀린 적도 있는걸. 나를 까마귀라고 열두 번도 더 놀렸어. 하지만 한 번도 사과를 한 적은 없었어.”

다이애나가 달래듯 말했다.

“까마귀라고 부르는 것하고 홍당무라고 하는 것은 천지 차이거든. 길버트 블라이드는 내 마음을 짓밟아놓았다고, 다이애나.”

앤이 위엄스럽게 말했다.

만일 다른 일이 더 일어나지만 않았더라도 더 이상 짓밟힌 상처 없이 일이 무마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일이 터지려면 언제나 겹쳐서 터지는 법이다.

에이번리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종종 언덕 너머 벨 씨의 넓은 방목장을 지나면 나오는 가문비나무 숲으로 가 송진을 따곤 했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필립스 선생님이 하숙하고 있는 에븐 라이트 씨의 집을 지켜보고 있다가 선생님이 집을 나서는 모습이 보이면 냅다 학교를 향해 달렸다. 하지만 가문비나무 숲은 라이트 씨 집보다 세 배는 더 먼 거리에 있어서 아무리 숨을 헐떡이며 뛰어와도 선생님보다 3분 정도 늦기일쑤였다.
다음 날 필립스 선생은 이런 늦장 사태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하기로마음먹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필립스 선생의 개혁 의지란 것은 일시적인 변덕으로 끝났지 한 번도 제대로 실행된 적은 없었다. 어쨌거나 필립스 선생은 점심시간이 끝나면 모두들 선생님보다 먼저 들어와 제자리에 앉아 있어야 한다고 엄포를 놓고 늦는 사람에게 벌을 주겠다고 을러놓기까지 하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평상시대로 모든남자아이들과 일부여자아이들이 벨 씨의 가문비나무숲으로 갔으나 이번에는 송진을 씹을 수 있을 만큼만 따면 얼른 돌아오겠다고 작정들을 했다. 하지만 가문비 숲은 너무 유혹적이었고 노란 열매의 맛은 거부하기 어려울 만큼 현혹적이었다. 아이들은 송진을 따고 어슬렁거리며 이리저리 흩어져 놀았다. 평상시처럼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는 걸 맨 먼저 알린 아이는 가장 높은 가문비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있던 지미 글로버였다. 지미가 “선생님이다!” 하고 소리를 지른 것과 동시에 지상에 있던여자아이들이 맨 먼저 뛰기 시작했고 간신히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무에서 허겁지겁 내려와 달려야 했던남자아이들은 더 늦게 학교에 도착했다. 앤은 열매를 따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숲 저 끝에서 행복하게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며 놀다 관목 덤불 속에 들어가 혼자서 조용히 노래까지 불렀다. 머리에는 암흑의 요정이나 되는 양 쌀백합 화환을 만들어 쓴 채였다. 당연히 앤이 꼴찌였다. 그러나 앤도 사슴처럼 달려서 현관에서남자아이들을 따라잡았고 필립스 선생님이 모자를 거는 순간남자아이들과 함께 교실로 휩쓸려 들어갔다.

아이들을 바꿔놓겠다는 필립스 선생님의 의지는벌써 식어버려서 그 많은 아이들을 모두 벌주기는 귀찮았다. 그러나 자기가 뱉어놓은 말이 있으니 뭔가를 하긴 해야 했다. 그래서 희생양을 찾았다. 숨을 헐떡거리며 막 자기 자리에 앉은 앤이었다. 머리에 썼던 쌀백합 화환이 한쪽 귀로 흘러내려 더욱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앤 셜리, 너는남자아이들과 노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모양이니 오늘 오후에는 너의 그 취미를 실컷 맛보게 해주마. 머리에서 그 꽃 좀 빼고 길버트 블라이드와 함께 앉아라.”

잔뜩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선생님이 말했다.

소년들이 킥킥거리며 웃었고 다이애나의 얼굴은 앤이 안 되었다는 생각으로 하얗게 질려버렸다. 다이애나가 앤의 머리에서 화환을 빼주고 손을 꼭 잡아주었다. 앤은 돌이 되어버린 것 같은 표정으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내가 하는 얘기를 못 들었니?”

필립스 선생이 엄격하게 물었다.

“네, 들었습니다. 하지만 진심은 아니시겠죠?”

앤이 천천히 말했다.

“진심이 아니면? 당장 내 말대로 해.”

그 비아냥거리는 말투는 모든 아이가, 특히 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었다.

한순간 앤은 선생님 말에 따를 뜻이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그래 보아야별 소용이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자 천천히 몸을 일으켜 통로를 지나 길버트 블라이드옆자리로 가 앉아서는 책상에 팔을 올려놓고 얼굴을 파묻어버렸다. 곁눈질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루비 길리스는 집으로 가는 길에 아이들에게 그런 얼굴은 처음 보았다고 했다. 백지장처럼 하얀 데다 조그만 붉은 점들로 얼굴이 얼룩덜룩했었다는 것이다.

이 일로 앤은 모든 것이 끝장이 나버렸다는 기분을 맛보아야 했다. 똑같이 잘못을 한 열두 명 아이들 중에 혼자만 걸렸다는 것도 충분히 기분이 나쁜데남자아이와 함께 앉으라는 벌은 정말로 참기 어려웠다. 그것도 다른 아이도 아닌 길버트 블라이드와 함께라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모욕이었다. 앤은 아무리 참으려 해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지만 그래 보았자 아무 소용없는 일인 줄도 알았다. 온몸이 수치심과 분노와 모욕감으로 끓어올랐다.
처음에는 다른 아이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속닥거리고 서로 쿡쿡 찔러대며 킬킬거렸다. 하지만 앤이 절대로 고개를 들지 않았고 길버트는 온몸과 마음을 다해 분수 문제를 풀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곧 아이들도 제 할 일을 했고 앤은 곧 잊혀졌다. 필립스 선생님이 역사 공부를 시작했을 때 앤도 같이 그 반에 가 공부를 해야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출석을 부르기 전에 <프리실리아에게>란 시를 적고 있던 필립스 선생님은 어려운 시구를 생각하느라 다행스럽게도 앤에게 관심을 쏟을 겨를이 없었다. 일단 아무도 바라보지 않게 되자 길버트는 책상에서 ‘너는 사랑스러워.’라는 금색 글자가 새겨진 작은 분홍색 하트 모양 사탕을 꺼내 앤의 팔 밑으로 슬그머니 밀어 넣었다. 앤이 몸을 일으키더니 그 분홍색 하트 사탕을 더러운 물건이나 되는 양 손가락 끝으로 집어 올려 마룻바닥에 떨어뜨리고는 발뒤꿈치로 밟아 박살을 내버렸다. 그리고는 길버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원래의 자세로 돌아가 버렸다.

학교가 끝나자 앤은 자기 책상으로 당당하게 돌아가 보란 듯이 책상 안의 모든 물건들을―책과 공책, 연필과 잉크, 성경과 산수책―을 전부 꺼내서 깨져버린 석판 위에 단정하게 쌓았다.

“왜 그 물건들을 다 집으로 가져가려는 거야, 앤?”

다이애나가 길가로 나오자마자 물었다. 전에는 감히 물을 용기도 없었다.

“난 이제 다시는 학교에 나오지 않을 거야.”

앤이 말했다. 다이애나는 숨을 멈추고 앤이 진심인지 알아내려고 바라보았다.

“마릴라 아주머니가 집에 있게 허락하실까?”

다이애나가 물었다.

“그러셔야만 해. 난 절대로 그 사람이 있는 학교에 다시는 가지 않을 거니까.”

앤이 말했다.

“오, 앤!”

다이애나는 울음이라도 터트릴 듯 앤을 바라보았다.

“너, 진심이구나.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필립스 선생님이 나를 그 끔찍한 거티 파이와 앉게 할 텐데. 틀림없어, 그 애가 지금 혼자 앉아 있으니까. 앤, 학교에 계속 나와 줘.”

“다이애나, 너를 위해서라면 난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어. 너를 위해서라면 내 사지를 갈가리 찢어도 좋아. 하지만 이것만은 안 돼. 제발 더 이상 애원하지 말아줘. 그러면 내가 너무 괴로워.”

앤이 슬프게 말했다.

“우리가함께했던그 모든 즐거운 일들을 생각해봐. 우리는 저 개울가에 정말 아름다운새 집도 지을 거고, 다음 주에는 공놀이도 할 거야. 너, 공놀이 해본 적 없지? 앤, 공놀이는 정말 재미있어. 우리는 새 노래도 배울 거야. 제인 앤드루스가 지금 노래를 연습하고 있어. 다음 주에 엘리스 앤드루스가 새 책을 가져와서 우리 모두 시냇가에서 한 장씩 돌려 읽기로 했잖아. 앤, 너는 소리 내서 책 읽는 것도 아주 좋아하잖아.”

다이애나는 앤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어떤 말로도 앤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앤의 마음은 이미 정해졌다. 다시는 필립스 선생님이 있는 학교는 가지 않을 것이다. 집에 당도해서 마릴라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말도 안 된다.”

마릴라가 말했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앤이 마릴라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해를 못 하시겠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전 모욕을 당했다고요.”

“모욕이라니, 당치도 않는 얘기다! 넌 평상시와 같이 내일 학교에 가야 해.”

“오,아니요. 전 절대로 학교에 가지 않을 거예요. 공부는 집에서 할 거예요. 되도록 얌전하게 지내도록 할게요. 가능하다면 말도 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만 학교는 절대로 못 가요, 절대로.”

마릴라는 앤의 조그만 얼굴에서 절대로 꺾이지 않을 고집 같은 것을 읽었고 그것을 이기려면 꽤 힘이 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 같았다.

“오늘 오후에는 레이철한테 가서 조언을 좀 구해야겠어. 지금 앤하고 실랑이를 해보아야 아무런 소용도 없겠어. 지금은 너무 흥분을 한 상태이고, 한 번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아이니까. 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필립스 선생이 문제를 너무 위압적으로 해결한 거 같긴 해. 하지만 그런 말을 아이한테 할 수는 없지.레이철과 얘기를 해봐야겠어.레이철은 아이를 열이나 학교에 보냈으니까 이런 문제에도 뭔가 좀 알 거야. 지금쯤이면레이철도 모든 이야기를 다 들었을걸.”

마릴라가 갔을 때 린드 부인은 평상시처럼 열심히 즐겁게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제가 무슨 일로 왔는지 알고 있죠?”

마릴라가 조금 멋쩍은 듯 말했다.

린드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앤이 학교에서 소동을 일으킨 일을 말하는 모양이로군요. 틸리 볼터가 학교에서 집에 가는 길에 죄다 얘기를 해주고 갔어요.”

“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앤이 학교를 안 가겠다고 해요. 그렇게 화가 나 있는 건 처음 봤어요. 앤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항상 문제를 일으킬까 봐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지금까지는 아주 잘 지내주었는데. 애가 너무 신경이 곤두서 있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레이철?”

“글쎄, 내 생각에는 마릴라.”

린드 부인은 누가 조언을 구하러 오면 매우 좋아했다. 이번에도 신이 나서 아주 다정하게 말했다.

“당분간은 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어요. 나라면 그렇게 하겠어요. 필립스 선생이 분명 잘못했어요. 물론 아이들한테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지만요. 어제 앤이 그렇게 화를 냈을 때라면 벌을 주었어야 했죠. 하지만 오늘은 달라요. 다른 아이들도 늦었는데 앤과 같이 벌을 주었어야지, 그럼. 그리고여자아이를 벌로남자아이와 함께 앉게 한 것도 별로 맘에 들지 않아요. 온당한 벌이 아니에요. 틸리 볼터도 정말 화가 났다고 하더군요. 그 애는 전적으로 앤 편을 들었어요. 모든 아이들이 다 그랬대요. 어쨌거나 앤은 아이들한테 인기가 많은가 봐요. 앤이 아이들과 잘 지내게 되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데 말이에요.”

“그럼 정말로 앤을 집에 있도록 하는 편이 낫다는 말이군요.”

마릴라가 놀라며 말했다.

“그래요, 앤이 스스로 학교에가겠다고 할 때까지는 학교 얘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내 말대로 해요, 마릴라. 한두 주 지나면 화가 가라앉고저 스스로학교에 가겠다고 할 거예요. 만일 마릴라가 지금 당장 학교에 보내려고 애쓴다면 다음에는 더 큰 말썽을 일으키고 또 무슨 떼를 쓸지 모르죠. 그럼 더 큰 문제가 생겨요. 내 생각에는 일이 더 커지지 않았을 때 바로잡는 게 좋아요. 학교가 지금과 같다면 앤이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해서 별로문제 될것도 없을 거예요. 필립스 선생이 좋은 선생님 같지도 않으니까요. 학교에서 하는 행동이 한심스러워요. 퀸스 학교 준비생들만 붙들고 있고 어린아이들한테는 별 신경도 쓰지 않는대요. 그 사람 삼촌이 학교 이사만 아니었어도, 아니 다른 두 명의 이사를 좌지우지하는 사람이니 뭐 혼자 이사회를 떠맡고 있다고 봐야겠죠. 아무튼 삼촌만 아니었으면 그 선생은 학교에서 올해 안에 쫓겨날 사람이에요, 그럼. 이 섬의 교육이 앞으로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어요.”

린드 부인은 자기가 이 지방 교육기관의 책임자라면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인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릴라는 린드 부인의 조언을 받아들여 앤에게 더 이상 학교에 가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앤은 집에서 공부를 했고 마릴라의 일을 도와주기도 했으며 오싹오싹 한기가 느껴지는 자줏빛 가을날의 저녁놀을 받으며 다이애나와 놀았다. 하지만 길에서나 주일 학교에서 길버트 블라이드를 마주치면 차가운 경멸의 눈초리만 보낼 뿐 그냥 지나쳐 버렸고 길버트가 앤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어 하는 눈치를 분명히 보이는데도 전혀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평화의 중재자로 나선 다이애나의 노력조차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앤은 길버트 블라이드를 죽는 날까지 미워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앤이 길버트를 미워하면 할수록 앤은 그 작은 가슴에서 쏟아져 나오는 모든 열정을 다해 다이애나를 사랑했고, 그 미움과 사랑의 강도는 똑같았다. 마릴라가 어느 날 저녁 무렵 과수원에서 바구니에 사과를 따들고 들어와 보니 앤이 동쪽 창가에서 저녁 햇빛을 받으며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이젠 또 무슨 일이냐, 앤?”

마릴라가 물었다.

“다이애나 때문이에요.”

앤이 온몸으로훌쩍거렸다.

“저는 다이애나를 너무나 좋아해요. 다이애나가 없으면 살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마릴라 아주머니, 우리가 어른이 되어서 다이애나가 결혼해 저를 떠나가버리면, 전 어떻게 해야 해요? 전 다이애나의 남편이 미워요. 정말로 미워요. 저는 모든 것을 상상해봤어요. 결혼식이랑 모든 것을요.눈꽃 송이처럼 흰 드레스를 입고 면사포를 쓰고 있는 다이애나는 마치 여왕처럼 아름다웠어요. 그리고 신부 들러리인 저도 퍼프 소매가 달린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죠. 미소를 짓고 있는 제 얼굴 뒤에 감추어진 제 가슴은 찢어질 것 같았어요. 그리고 다이애나는 제게 이별을 고했어요.”

이제 앤은 완전히 무너져 내려 도저히 슬픔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엉엉 울어댔다.

마릴라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감추려고 얼른 몸을 돌려 나오려 했지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만 가까운 의자에 주저앉아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뒤뜰을 지나가던 매슈가 그 웃음소리를 듣고는 무슨 일인지 궁금해 발걸음을 멈추었다. 마릴라가 전에도 저렇게 웃었던 적이 있던가?

“자, 앤 셜리, 그렇게 걱정거리가 필요하면 제발 부탁이니 우리한테 필요한 걱정거리를 찾아보아라. 네 상상력은 정말이지 대단해.”

말할 수 있을 만큼 진정이 되자 마릴라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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