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27~28

나단비 | 2024.02.14 18:32:48 댓글: 2 조회: 476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47208
27

허영심 때문에 당한 마음의 고통





어느 늦은 4월의 저녁 무렵, 부인회 모임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릴라는 젊고 즐거운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늙고 슬픔에 젖은 사람에게도 겨울이 끝나 멀리 떠나고 봄이 어김없이 찾아오는 짜릿한 즐거움을 만끽했다. 마릴라는 자기의 생각이나 느낌을 주관적으로 분석해본 적이 없었다. 그때도 마릴라는 부인회나 헌금 상자, 예배실의 새 양탄자를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런 생각들의 밑에서는 저물어가는 해를 감싼 옅은 안개 속으로 연기를 피워 올리는 붉은 들판, 개울 너머의 초원에 떨어지는 전나무 그림자, 거울처럼 잔잔한 숲 속의 연못 주변에 늘어선 단풍나무들의 진홍빛 새싹, 잿빛의 잔디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생명의 약동 등을 감미롭게 느낄 수 있었다. 봄의 기운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 깊고 원초적인 기쁨 덕분에, 어느덧 중년을 넘어선 마릴라의 발걸음도 한결 가볍고 활기찼다.

마릴라는 애정 어린 눈으로‘초록 지붕 집’을 바라보며, 작은 창문에서 반짝이며 반사되는 햇살을 나무들의 틈새로 지긋이 지켜보았다. 마릴라는 축축이 젖은 오솔길을 따라 한 걸음씩 걸음을 뗄 때마다, 난로에서 장작이 활활 타오르고 식탁에는 깔끔하게 저녁 식사가 차려졌을 집에 간다는 생각에 너무나 흐뭇했다. 앤이 초록 지붕 집에 오기 전까지는 부인회가 유일한 위안거리였는데. 따라서 마릴라가 부엌으로 들어가 난롯불이 꺼져 있는 것을 보고, 앤이 기척조차 없었을 때 실망하고 화가 난 것은 당연했다. 앤에게 5시에 저녁을 준비해두라고 몇 번이나 다짐해두었지만, 어찌 되었건 마릴라는 자신의 옷 중 두 번째로 좋은 옷인 외출복을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매슈가 밭에서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식사 준비를 해야 했다.

“앤이 돌아오면 단단히 혼을 내야겠어요.”

마릴라가 난롯불을 되살리려고 큰 칼로 불쏘시개를 거칠게 깎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매슈는 어느새 들어와 한구석에서 참을성 있게 식사를 기다렸다.

“앤은 다이애나와 어딘가를 쏘다니면서, 이야기를 짓거나 대화극을 연습하거나 암튼 엉뚱한 짓을 하고 있을 거예요. 시간이 어떻게 되고 할 일이 뭔지 까맣게 잊고 말이에요. 그런 짓을 당장 못 하게 하든지 해야지, 원. 앨런 부인은 앤이 영리하고 상냥하다고 말하지만 상관없어요. 앤이 영리하고 상냥할지는 몰라도 머릿속은 생뚱맞은 생각으로 가득해서, 다음에 또 어떤 엉뚱한 짓을 터뜨릴지 모르잖아요. 엉뚱한 짓 하나를 그런대로 해결하고 나면 금세 또 다른 일을 저지르니, 정말 알다가도 모를 애예요! 오늘 부인회에서레이철린드 부인의 말을 듣고 얼마나 화가 났던지.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앨런 부인이 앤 편을 들어줘서 조용히 넘어갔지, 그 자리에서 앤을 두둔해주지 않았더라면 전 오늘 모두가 보는 앞에서 린드 부인에게 심한 소리를 했을 거예요. 앤에게는 결점이 많아요. 나도 그걸 부인하지 않아요. 하지만 앤을 키우는 건 나지 린드 부인이 아니잖아요. 가브리엘 천사라도 에이번리에 산다면 린드 부인에게 결점을 잡혔을 거예요. 하지만 앤이 집을 나가서는 안 됐어요. 내가 오늘 오후엔 집에 붙어서 일을 좀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거든요. 앤에게 결점이 많긴 해도 전에는 말을 듣지 않거나 못 믿을 짓을 한 적은 없었는데. 여하튼 이번에는 크게 실망했어요.”

“글쎄다, 난 잘 모르겠다.”

참을성 많고 현명하지만 지금은 무엇보다도 배가 고픈 매슈가 이렇게 마릴라가 화가 났을 때는 실컷 불만을 토해내도록 하는 게 제일이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쓸데없이 참견을 하고 언쟁을 벌여서 방해만 하지 않으면 이렇게 화가 나 있을 때 마릴라가 일을 훨씬 더 빨리 끝마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마릴라, 네가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앤이 네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게 확실해질 때까지는 믿을 수 없는 애라고는 하지 마라. 뭔가 사정이 있을 거다. 앤은 그런 설명을 잘하잖니.”

“내가 집에 있으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없잖아요. 이번 일은 어떻게 변명해도 내 마음에 차지 않을 거예요. 물론 오라버니가 앤 편을 들 거라는 건 알지만, 앤을 키우는 사람은 나지 매슈 오라버니가 아니라고요.”

마릴라가 반박하듯 말했다.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저녁 준비도 끝났지만,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고 후회하며 통나무 다리 위와‘연인의 오솔길’을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야 할 앤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마릴라는 굳어진 얼굴로 그릇을 닦아 치웠다. 그런 다음 지하실로 내려가려고 언제나 앤의 탁자에 놓인 촛불을 가지러 동쪽 방으로 올라갔다. 불을 켜고 몸을 막 돌린 순간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침대에 누운 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나, 세상에! 너 잠들어 있었니, 앤?”

마릴라가 놀라 외쳤다.

“아니요.”

앤이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대답했다.

“그럼 너 어디 아프니?”

마릴라가 침대로 다가가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앤은 사람들의 눈에서 영원히 숨어버리고 싶은 듯 베개 속에 더욱 얼굴을 깊숙이 파묻었다.

“아니요, 하지만 제발 제 방에서 나가시고 저를 보지 마세요. 전 절망의 늪에 빠져 있어요. 이제 누가 반에서일 등을 하고, 누가 작문을 제일 잘하고, 주일 학교 성가대에서 노래를 하건 안 하건 상관이 없어요. 그런 시시한 것들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요. 전 어디에도 다시 나갈 수가 없을 것 같거든요. 제 인생은 끝났어요. 제발, 마릴라 아주머니, 제 방에서 나가시고 저를 보지 마세요.”

“도대체 무슨 소리냐? 앤 셜리,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당장 일어나 말을 해봐. 자, 무슨 일이니?”

의문에 빠진 마릴라가 다그쳐 물었다.

앤이 결국 바닥에 내려와 앉았다.

“제 머리카락을 보세요, 마릴라 아주머니.”

앤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마릴라가 촛불을 약간 들어 등 뒤로 크게 넘긴 앤의 머리카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분명 매우 해괴한 꼴이었다.

“앤 셜리, 네 머리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초록색이잖아!”

세상에 있는 색이라면 초록색이라 할 수밖에 없었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칙칙한 청동색을 띤 초록색이었다. 게다가 여기저기에 원래의 붉은 가닥이 남아 으스스한 기운을 풍겼다. 마릴라도 지금 앤의 머리 색깔처럼 이상스러운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예, 초록색이에요. 전 붉은 머리 색깔처럼 나쁜 것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이제 초록색 머리가 그보다 열 배는 더 보기 흉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오, 마릴라 아주머니, 제 기분이 얼마나 참담한지 아주머니는 모르실 거예요.”

앤이 신음 소리를 냈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짐작할 수는 있겠다. 어쨌건 부엌으로 내려가자. 여기는 너무 춥구나.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내려가서 얘기하자. 내가 이상한 일이 터질 거라고 예상은 했지. 두 달이나 말썽을 부리지 않았으니, 곧 소동이 벌어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래, 네 머리에 무슨 짓을 한 거니?”
마릴라가 물었다.

“머리에 염색을 했어요.”

“염색을 했어! 머리에 염색을 했다고! 앤 셜리,그게못된 짓이란 걸 몰랐단 말이냐?”

“알았어요, 저도 이게 못된 짓이란 건 알았지만, 붉은 머리를 없애려면 조금 못된 짓이라도 감수할 생각이었어요. 그만한 대가도 예상했고요, 마릴라 아주머니. 착한 짓을 그만큼 많이 해서 이 잘못을 만회하려 했어요.”
“세상에, 머리를 염색하겠다고 결심했다면 적당한 색으로 염색을 했어야지. 나였다면 초록색으로는 절대 염색하지 않았을 거다.”

마릴라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저도 초록색으로 머리를 염색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앤이 낙심한 채 항의했다.

“제가 못된 아이이긴 해도 그런 못된 짓을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고요. 그 아저씨가, 제 머리가 아름다운 검은색으로 바뀔 거라고 말했어요.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요. 제가 어떻게 그 사람 말을 의심할 수 있었겠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전 자기 말을 의심받는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잘 알거든요. 그리고 앨런 부인도 분명한 증거 없이 남의 말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이제 전 증거를 갖게 되었지만요. 이 초록색이 분명한 증거라고요. 하지만 그때는 그렇지 못했고 전 그 아저씨가 하는 말을 전부 다 믿었어요.”

“누가 그랬는데? 그 아저씨란 사람이 누구냐?”

“오늘 오후에 우리 집에 온 행상이요. 그 사람에게 염색약을 샀어요.”

“앤 셜리, 내가 그런 이탈리아 사람을 집에 들이지 말라고 얼마나 자주 말했니? 그런 사람이 우리 집 주변을 얼씬대는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 사람을 집에 들이지는 않았어요. 아주머니 말씀을 제가 똑똑히 기억해서 제가 밖으로 나갔고, 문도 확실히 닫은 다음에 계단에서 물건들을 봤어요. 또 그 아저씨는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었어요. 독일계유대인이었어요. 큰 가방에 아주 재미있는 물건이 많았어요. 독일에 있는 부인과 아이들을 데려오려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했어요. 너무도 뼈에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말을 해서 가슴이 뭉클했어요. 그래서 그 아저씨를 조금이라도 도와주려고 뭐든 사주고 싶었어요. 그때 염색약 병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리고 그 아저씨가 어떤 머리칼이라도 칠흑같이 검은색으로 바꿔주고 색이 빠지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어요. 그 순간, 새까맣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치렁거리는 제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없었어요. 하지만 그 염색약 값이 75센트였는데 제 지갑에서 돈을 꺼내니까 50센트밖에 없었어요. 그는 제 사정을 알고는 염색약을 50센트에 팔겠다며 그냥 주는 거나 똑같다고 말했어요. 저는 무척 친절한 행상이라 생각했죠. 그래서 염색약을 샀어요. 그가 떠나자마자 저는 얼른 올라와서 설명서에 쓰인 대로 낡은 머리빗으로 염색약을 발랐어요. 한 병을 다 썼어요. 그런데 오, 마릴라 아주머니, 하지만 이런 끔찍한 색깔로 변한 머리카락을 봤을 때 제가 못된 짓을 한 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요. 그때부터 계속 후회하고 있는 거예요.”
“세상에, 네 후회가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 눈을 똑바로 뜨고 네 허영심이 너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 좀 보란 말이다, 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선은 머리를 잘 좀 씻어내 보자.”

마릴라가 모질게 말했다.

그래서 앤은 머리를 감고 비누와 물로 힘껏 문질러보았지만, 차라리 원래의 빨간 머리를 씻어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행상의 말이 다른 부분에서는 거짓이었더라도, 색이 빠지지 않는다는 말은 진실이었다.

“오, 마릴라 아주머니, 이제 전 어쩌면 좋아요?”

앤이 눈물을 쏟으며 물었다.

“전 절대로 이렇게는 살 수가 없어요. 다른 실수들, 그러니까 진통제 케이크나 다이애나를 취하게 한 것, 린드아주머니에게 화를 내며 덤벼든 일은 사람들이 잊겠지만, 이 초록색 머리는 결코 잊어버리지 않을 거예요. 제가 몹쓸 아이라고들 생각할 거예요. 오, 마릴라 아주머니, ‘거짓으로 남을 속일 때, 스스로를 옭아맬 거미줄을 짜는 것이다.’37)라는 시구가 있는데 그 말이 맞는 말 같아요. 조시 파이가 알면 절 틀림없이 비웃을 거예요! 마릴라 아주머니, 전 조시 파이와는 얼굴도 맞댈 수 없어요. 제가 이 프린스에드워드 섬에서 가장 불행한 아이일 거예요!”

앤의 불행은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동안 집에서 두문불출하며 매일 머리를 감았다. 외부인으로는 다이애나만이 그 비밀을 알았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이 비밀을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엄숙하게 맹세했고 다이애나가 약속을 지켰다는 것은 여기저기에서 확인되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마릴라가 결심을 굳힌 듯 말했다.

“앤, 아무 소용이 없다. 색이 절대 지워지지 않는 염색약인 것 같다. 머리를 짧게 잘라야겠어. 다른 방법이없다. 이런 꼴로 나갈 수는 없잖니.”

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지만, 마릴라의 말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앤은 울적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가위를 가져왔다.

“당장 잘라주세요, 마릴라 아주머니. 이젠 끝내고 싶어요.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이건 낭만적이지 못한 불행이에요. 책에서는 여자들이 열병에 걸릴 때나, 돈을 벌어 좋은 일을 하려고 머리카락을 팔 때나 머리를 잘랐는데. 저도 반만이라도 그런 이유로 머리를 자르면 좋을 텐데요. 하지만 제 머리칼을 흉측한 색으로 염색한 것 때문에 머리를 잘라야 한다니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아요. 아주머니가 머리를 자르는 내내 전 울 거라고요. 이건 너무 비극적인 일이잖아요.”

그런 다음 앤이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머리를 다 자르고 나서 2층에 올라가 거울을 들여다보았을 때는 절망으로 지쳐버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마릴라는 최대한 짧게 머리카락을 잘라내야 했고, 그 일을 완벽하게 해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그 결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앤은 거울을 벽 쪽으로 휙 돌려버렸다.

“내 머리가 다 자랄 때까지는 절대, 절대 거울을 보지 않을 거야.”

앤이 격하게 외쳤다.

그러나 곧 다시 거울을 똑바로 돌려놓았다.

“아니야, 거울을 보겠어. 못된 짓을 뉘우쳐야 하니까. 방에 들어올 때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얼마나 흉측한지 보겠어. 상상으로도 그 모습을 지워버리려 하지 않겠어. 내 머리칼을 자랑스럽게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이제 깨달았어. 빨간 머리이긴 해도 내 머리는 길고 짙은 데다 곱슬거려서 난 은근히 자랑으로 여겼던 거야. 이런 쓸데없는 허영심에 휘둘리다가 자칫하면 내 코도 남아나지 않을 거라고.”

다음 주 월요일, 짧게 깎인 앤의 머리 때문에 학교가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다행히 그 누구도 앤이 머리를 왜 잘라버렸는지 그 진짜 이유는 짐작하지 못했다. 조시 파이마저도. 하지만 조시 파이는 앤이 꼭 허수아비 같아 보인다고 한 마디 해주는 걸 잊지 않았다.

“조시가 그렇게 말했지만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앤이 그날 저녁때 마릴라에게 말했다. 마릴라는 두통 때문에 소파에 누워 있었다.

“제가 받아야 할 벌이라고 생각해서 꾹 참았어요. 물론 허수아비처럼 보인다는 말을 들어 화가 나서 대꾸해주고 싶기는 했어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요. 그냥 무시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용서해주었어요. 누군가를 용서하면 정말 고결해진 기분이 들어요, 그렇지 않아요? 이제부터 착한 아이가 되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할 거고, 다시는 예뻐지려고 아등바등하지 않겠어요. 물론 착한 사람이 되는 게 더 좋다는 것을 저도 알지만, 그걸 그대로 믿기가 어려워요. 전 정말 아주머니와 앨런 부인, 스테이시 선생님처럼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아주머니가 자랑할 만한 사람으로 크고 싶어요. 다이애나는 제 머리가 자라기 시작하면 검은 벨벳 리본으로 머리를 묶어 한쪽에 매듭을 지으래요. 그럼 무척 어울릴 거라고요. 저는 그것을 스누드38)라고 부를래요. 아주 낭만적으로 들리잖아요. 그런데 제가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있죠, 마릴라 아주머니? 그래서 머리가 아프세요?”

“아니, 머리는 아까보다 좋아졌다. 아까는 정말이지 심하게 아팠어. 내 두통은 날마다 더 나빠져만 가는구나. 의사 선생님께 진찰을 받아보아야 할 모양이야. 네 수다는 괜찮다. 이제는 적응이 되었는걸.”

이것은 마릴라가 앤의 수다가 싫지 않다는 표현이었다.


37) 스코틀랜드 시인이며 소설가인 월터 스콧(Walter Scott, 1771년~1832년)의 서사시 《마미온(Marmion)》의 제4편, 17연.
38) 옛 스코틀랜드, 영국 북부에서 미혼 여성의 표시로 머리에 매던 리본, 댕기.





28

비운의 백합 아가씨





의기소침해진 다이애나가 말했다.

“당연히 네가엘레인이 되어야지, 앤. 난 도저히 저곳까지 물에 떠내려갈 용기가 없어.”

루비 길리스도 몸서리치며 말했다.

“나도 무서워. 그래도 둘이나 셋이 배에 타고 떠내려간다면 괜찮을 거야. 재미있을 거고. 하지만 누워서 죽은 척하는 건 할 수 없어. 무서워서 정말 죽을지도 몰라.”

제인 앤드루스도 못 하겠다고 했다.

“물론 낭만적이긴 하겠지.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순 없을 것 같아. 내가 어디쯤 와 있고, 너무 멀리 떠내려가지 않나 보려고 계속 머리를 들어볼 거야. 그렇게 되면 효과가 없잖아.”

“하지만 빨간 머리와엘레인은 너무 안 어울려.”

앤이 한숨을 내쉬었다.

“난 떠내려가는 것도 무섭지 않고엘레인이 무척 되고 싶기는 해. 그래도 내가엘레인을 할 수는 없어. 루비가 살결이 희고 긴 금발을 갖고 있으니까엘레인을 맡아야 해. 책에서도 ‘엘레인이 내려뜨린 눈부시게 긴 금발이 출렁이며 강물처럼 흘러갔다’고 했잖아. 더구나엘레인은 백합 아가씨야. 빨간 머리가 백합 아가씨가 될 순 없어.”
“네 살결도 루비만큼 하얗고, 네 머리칼도 자르기 전보다는 훨씬 더 검어졌어.”

다이애나가 진지하게 말했다.

“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나도 가끔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할까 봐 누구한테도 물어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적갈색이라고 말할 수 있겠니, 다이애나?” 앤이 기쁨으로 뺨까지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그래, 내 생각엔 정말 예뻐.”

다이애나가 까만 벨벳 리본이 앙증맞게 묶여 있는 앤의 짧고 보드라운 곱슬머리를 부러운 듯 바라보며 말했다.아이들이 놀고 있는 곳은 비탈길 과수원 아래에 있는 연못이었다. 자작나무가 주변을 두른 자그마한 공터가 연못 둑에서 물 쪽으로 돌출됐고, 그 가장자리에는 낚시꾼이나 거위 사냥을 오는 사람들을 위해 작은 나무 선착장이 물 위로 설치되어 있었다.

한여름 오후, 루비와 제인이 다이애나와 놀고 있었고 앤도 이들과 함께 놀려고 온 것이다.

앤과 다이애나는 그해 여름을 거의 언제나 이 연못 주변에서 보냈다.‘한가로운 황야’는 옛일이 되어버렸다. 지난봄에 벨 씨가 자기 방목장에 있는 작은 나무들을 무자비하게 베어냈기 때문이었다. 앤은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눈에는 낭만을 가득 담고 지난날을 생각하며 울기도 했지만 곧 진정되었다. 앤과 다이애나가 말했듯이 열셋을 넘어 열넷을 바라보는 큰아이들이 놀이 집 같은 유치한 것에서 즐거움을 찾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연못 주변에는 훨씬 매혹적인 놀 거리가 많았다. 다리 위에서 송어를 낚는 것도 재미있었고, 두 소녀는 배리 씨가 오리 사냥을 할 때 쓰는 바닥이 평평한 작은 배를 타고 노 젓는 법도 터득했다.

엘레인 연극39)을 해보자고 제안한 것은 앤이었다. 작년 겨울 학교에서 테니슨의 시를 배우고 나서였다. 프린스에드워드 섬의 학교에서는 영어 교육과정에 테니슨의 작품들을 배우도록 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테니슨의 시를 분석하고 문법적으로 설명하면서 공부해서 전체적인 의미는 다 사라져버렸지만 적어도 하얀 피부의 아름다운 백합 처녀와 기사 랜슬롯, 왕비 기네비어, 아서 왕만은 무사히 남았을 뿐 아니라 거의 실존 인물처럼 느끼고 있었다. 앤은 캐멀롯40)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을 남몰래 아쉬워하며, 그때가 지금보다 훨씬 더 낭만적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앤의 제안에 모두가 뜨겁게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여자아이들은 작은 배를 이쪽 선착장에서 힘껏 밀어내면 배가 물길을 타고 다리 밑을 지나, 연못 아래의 돌출부에 닿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은 벌써 몇 번이나 배를 그런 식으로 타보았고,엘레인연극을 하는 데 이곳처럼 안성맞춤인 장소는 없었다.

“좋아, 내가 엘레인역할을 맡겠어.”

앤은 마지못해 승낙을 했다. 주인공 역할을 맡아 기쁘기는 했지만, 앤의 예술적인 감각은 자신이 그 역할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루비가아서 왕이 되고 제인은 기네비어 왕비 그리고 다이애나가랜슬롯경이 되는 거야. 하지만 너희는 그보다엘레인의 아버지와 오빠들 역할을 먼저 해야 해. 배는 한 명이 눕기에도 좁으니 늙은 벙어리 하인은 빼야겠다. 배 전체를 까만 천으로 덮어야 해. 다이애나, 네 엄마의 낡은 검정 숄이 적당할 것 같아.”

검은 숄을 가져오자앤이 그것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고 두 손은 가슴 위에 얌전히 포개 올려놓았다.

“오, 정말로 죽은 사람 같아. 섬뜩한 기분이 들어. 얘들아, 이렇게 놀아도 괜찮을까? 린드 아주머니가 연극은 모두 사악한 짓이라고 하셨잖아.”

루비 길리스가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는 작고 하얀 얼굴 위로 자작나무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보며 초조하게 말했다.

“루비, 린드 아주머니 얘기는 하지도 마. 린드 아주머니가 태어나기 수백 년 전에 일어난 일이라서 아주머니 얘기를 하면 분위기를 망친단 말이야. 제인, 이제부터 네가 알아서 해.엘레인은 죽었는데 말을 하면 웃기잖아.”

앤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제인이 이 연극을 지휘하려고 일어섰다. 덧이불로 쓸 황금 천이 없어 노란색 일본 비단으로 만든 피아노 덮개로 대신했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또 하얀 백합을 구할 수 없는 때여서, 길쭉하고 파란 붓꽃을 포개놓은 앤의 두 손에 올려놓아그럴듯한분위기를 연출했다.

“자, 이제 준비가 끝났어.”

제인이 말했다.

“우리는엘레인의 평온한 이마에 입맞춤을 해야 해. 다이애나, 네가 먼저 ‘나의 누이여, 영원히 안녕’이라고 말해. 루비는 ‘안녕, 사랑하는 누이여’라고 말하고. 최대한 슬프게 말하도록 해. 앤, 제발 조금만 웃어봐. 너도엘레인이 ‘미소 짓는 것처럼 누워 있었다.’는 걸 알잖아. 그래, 그러니까 훨씬 낫다. 이제 배를 밀어.”

그 배가 박혀 있던 낡은 말뚝에부딪혀가며그들은 배를 앞으로 힘껏 떠밀었다. 다이애나와 제인과 루비는 배가 물살을 따라흘러내려 가기시작하자, 다리를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숲을 빠져나가 길을 가로질러 연못 아래쪽의 돌출부를 향해 달려갔다. 거기에서 그들은랜슬롯와기네비어와아서 왕이 되어 백합 아가씨를 맞을 준비를 해야 했다.

한동안 앤은 물살 속으로 천천히 떠내려가면서 낭만적인 상황을 마음껏 즐겼다. 그때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 배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곧바로엘레인은 몸을 일으켜 세우고 황금빛 덧이불과 검은 천을집어 들었다. 그리고 물이 거세게 들어오는배 바닥의 틈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선착장에서 날카로운 말뚝에 부딪히면서 배에 못질해놓은 판자가떨어졌던것이었다. 앤이 그것까지 알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위험에 빠졌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저런 속도로 물이 들어오면 배가 금방 물바다로 변해, 아래쪽 돌출부까지 가기 전에 가라앉을 것 같았다. 노는 어디 있지? 저런, 선착장에 두고 왔잖아!

앤이 놀라 비명 소리를 냈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앤은 입술이 새하얗게 질렸지만 침착하게 행동했다. 방법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하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앤이 앨런 부인에게 말했다.

“전 정말로 무서웠어요. 배가 다리까지 떠내려가는 데도 몇 년은 걸린 것 같았어요. 물이 계속해서 올라왔어요. 사모님, 그땐 정말 간절히 기도했어요. 하지만 기도를 하면서도 눈을 감을 수는 없었어요. 하느님이 저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배를 다리 기둥 옆으로 붙여서 제가 기둥에 올라가게 하는 것이란 걸 알았거든요. 오래된 나무줄기로 만든 기둥이라서 마디도 많고 옹이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기도를 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제가 할 역할도 다했어요. 계속 지켜보다가 기둥에 올라서야 했으니까요. 저는 ‘하느님, 제발 이 배를 다리 기둥 가까이 가게 해주세요. 그 후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하고 거듭해서 기도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화려한 기도를 생각해낼 틈은 없었어요. 하지만 제 기도가 응답을 받았어요. 배가 기둥에 쾅 하고 부딪혔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저는 피아노 덮개와 숄을 어깨에 걸친 다음 기둥에서 옹이를 붙잡고 올라탔어요. 그런데 기둥이 미끄러워 올라가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한 채 매달려 있어야 했어요. 너무 낭만적이지 못한 모습이었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도 못 했어요. 물에서 죽을 뻔했다가 겨우 살아났는데 낭만을 생각할 여유가 있었겠어요? 전 감사의 기도를 다시 드렸고, 온 힘을 다해서 기둥에 바싹 매달려 있었어요. 마른 땅으로 돌아가려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배는 다리 밑을 떠내려가다가 곧 연못 한가운데서 가라앉아 버렸다. 이미 아래쪽 돌출부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루비와 제인과 다이애나는 그들의 눈앞에서 배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고, 앤도 배와 함께 물속으로 가라앉은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 엄청난 비극 앞에서 공포에 질려 얼어붙었고,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 한동안 꼼짝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달렸다. 숲을 지났고, 길을 건너 잠시도 쉬지 않고 다리 쪽으로 달려갔다. 그때 위태위태한 옹이를 발판으로 삼아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던 앤의 눈에도 그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고, 그들의 비명 소리도 들렸다. 곧 도움의 손길이 오겠지만, 앤의 자세는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시간이 무심하게 흘렀다. 단 몇 분이었지만 불운한 백합 아가씨에게는 1분이 1시간처럼 느껴졌다. 왜 아무도 오지 않는 거야? 대체 얘들은 어디로 간 걸까? 만약 그들 모두가 기절을 했다면! 아무도 오지 않으면! 또 내가 지치거나 손에 경련이라도 일어서 더 이상 매달릴 수 없게 된다면! 짙은 초록색의 물 위로 길게 드리운 그림자가 흔들거리는 것을 내려다보던 앤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면서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온갖 끔찍한 상상이 가능성의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괴롭혔다.

이제 더 이상은 팔과 손목의 통증을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길버트 블라이드가 하몬 앤드루스 씨의 배를 타고 다리 밑을 지나가고 있었다.

길버트가 무심코 위를 올려다보자 놀랍게도 잿빛의 커다란 눈에 작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그래도 몹시 쌀쌀한 표정으로 자기를 경멸스럽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앤 셜리! 너 도대체 거기서 뭐 하는 거니?”

길버트가 소리를 질렀다.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기둥 옆으로 배를 저어 와서는 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길을 뿌리칠 도리가 없었다. 앤은 길버트 블라이드의 손에 매달려 배로 엉금엉금 기어 내려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옷은 흙투성이가 됐고 어깨에 걸쳐진 숄과 피아노 덮개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체면을 차리기란 무척 힘들었다.
“도대체 뭘 한 거야, 앤?”

길버트가 노를 잡으며 물었다.

“우리는엘레인연극 놀이를 하고 있었어.”

앤은 자기를 구해준 사람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무뚝뚝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배를 타고 캐멀롯까지 떠내려가야 했어. 그런데 배에 물이 새면서 저 기둥에 매달려 있게 된 거야. 다른 애들은 도움을 청하러 갔고. 괜찮다면 나를 선착장까지데려다줄수 있겠니?”

길버트는 자상하게도 배를 선착장으로 저어갔고, 앤은 모멸감을 느끼며 길버트의 도움을 받아 물가로 훌쩍 뛰어내렸다.

“고마웠어.”

앤이 얼굴을 돌리면서 오만하게 말했다. 그러나 길버트도 보트에서 훌쩍 뛰어내려 앤의 팔을 잡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앤, 잠깐만. 우리 좋은 친구가 될 수 없을까? 그때 내가 네 머릴 놀린 건 정말 미안해. 너를 괴롭힐 생각은 전혀 없었어. 그냥 장난한 거야. 게다가 오래전 일이잖아. 지금은 네 머리가 무척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어, 정말이야. 우리 친구로 지내자.”

잠깐이었지만 앤은 머뭇거렸다. 그토록 자존심이 짓밟혔는데도 그 이면에는, 반쯤은 수줍고 반쯤은 진지해 보이는 길버트의 적갈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무척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야릇한 기분에 앤의 심장이 한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전의 분노가 씁쓸하게 되살아나면서 앤의 흔들리는 마음을 되돌려놓았다. 2년 전의 기억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에 되살아났다. 길버트는 앤을 ‘홍당무’라고 불렀고, 모든 학생 앞에서 앤에게 모욕을 주었다. 다른 학생이나 나이가 든 사람에게는 그런 분노가 그 원인만큼이나 대수롭지 않게 웃고 넘길 일처럼 여겨졌지만, 시간이 지나도 앤의 분노는 누그러지거나 식을 줄 몰랐다. 앤은 길버트 블라이드를 증오했다! 앤은 결코 길버트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너랑은 절대 친구가 될 수 없어, 길버트 블라이드. 난 너랑 친구가 되기 싫어!”

“알았어! 나도 다시는 너에게 친구가 되자는 말 따윈 하지 않겠어, 앤 셜리. 난 상관없으니까!”

길버트도 화가 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배로 뛰어 내려갔다.그러고는 거칠게 노를 저어 가버렸다. 앤은 단풍나무 아래로 풀고사리가 무성하게 자라 있는 비탈길을 올라갔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후회스러운 마음이 밀려왔다. 길버트에게 그렇게 대답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는 후회였다. 물론 길버트가 전에 앤을 모욕하긴 했지만 지금은……! 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실컷 울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놀라기도 했고, 두려움에 떨면서 기둥에 매달려 있던 터라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이기도 했다.

비탈길을 절반 정도 올라갔을 때 앤은 연못 쪽으로 거의 미친 듯이 달려오는 제인과 다이애나를 만났다. 이들은 비탈길 과수원까지 갔지만, 배리 씨와 배리 부인은 모두 외출 중이어서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거기에서 루비 길리스가 발작을 일으켰다. 하지만 혼자서 정신을 차리라고 내버려두고 제인과 다이애나는‘유령의 숲’을 지나 개울을 넘어‘초록 지붕 집’까지 달려갔다. 하지만 마릴라는 카모디에 갔고 매슈는 밭에서 건초를 거두고 있어 거기에서도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오, 앤.”

안도와 기쁨으로 다이애나가 앤의 목을 껴안고 울기 시작했다.

“오, 앤, 우리는…… 네가 물에 빠져 죽은 줄 알았어. 살인자가 된 기분이었다고…… 우리가 너더러엘레인이 되라고 했잖아. 그리고 루비는 넋이 나갔고……. 오, 앤, 너 어떻게 살아 나왔어?”

“난 저 기둥에 매달렸어. 그런데 길버트 블라이드가 앤드루스 씨네 배를 타고 지나가다가 나를 땅에 내려줬어.”

앤이 머뭇머뭇하며 설명했다.

“오, 앤, 길버트는 너무 멋있어! 너무 낭만적이야! 그럼 이제부터 길버트하고 말하고 지내겠구나.”

호흡을 되찾아 겨우 말할 수 있게 되자 제인이 말했다.

“천만에! 근데 이제부터 낭만적이란 단어는 듣기도 싫어, 제인 앤드루스.”

앤은 옛 감정이 되살아나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어쨌든 너희를놀라게해서 정말 미안해. 전적으로 내 잘못이야. 난 불운한 별자리로 태어난 게 확실해. 무슨 일을 하든지 나 자신은 물론이고 내 소중한 친구들까지 곤경에 빠뜨리니 말이야. 그런데 우리가 네 아빠 배를 망가뜨렸어, 다이애나. 우리에게 다시는 연못에서 배를 타고 놀지 못하게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앤의 불길한 예감은 정확히 적중했다. 그날 오후에 있었던 일이 알려지고, 배리 가족과 커스버트 가족이 알게 되었을 때는 난리도 이만저만 난리가 아니었다.

“도대체 너한테도 분별력이라는 것이 생길지 모르겠다, 앤!”

마릴라가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럼요, 저한테도 분별력이 생기고말고요!”

앤이 낙천적으로 말했다. 이미 동쪽 방에서 실컷 울고 나온 터라 마음이 풀렸고 평소의 쾌활함을 되찾은 덕이었다.

“분별력이 생길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커졌어요.”
“나한테는 그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가 않는데도 말이냐?”

마릴라가 말했다.

“글쎄요. 전 오늘 소중한 교훈을 새로 배웠거든요. 제가‘초록 지붕 집’에 온 이후로 많은 실수를 저질렀어요. 하지만 실수를 할 때마다 제 큰 단점을고치는 데도움이 되었어요. 자수정 브로치로 인해 전 제 것이 아닌 물건은 만지질 않게 되었고요.‘유령의 숲’일로는 상상력이 지나치게 내달리지 않도록 조심하게 되었고, 그 진통제 케이크를 만든 실수로는 요리할 때 부주의한 단점을 고쳤어요. 머리 염색 사건으로는 허영심을 고쳤고요. 그래서 지금은 코든 머리든 신경 쓰지 않거든요, 아주 가끔씩은 신경을 쓰기도 하지만요. 그리고 오늘의 실수는 제가 너무 낭만적인 것만 찾지 않도록 해줄 거예요. 에이번리에서는 낭만적이 되려고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거든요. 몇백 년 전 옛날, 탑이 있던 캐멀롯 마을에서라면 모르지만요. 그리고 이제는 낭만에 별 관심도 없어요. 이 문제에 관해서라면 저도 이제 곧 상당히 달라질 거라고 분명히 느껴요, 마릴라 아주머니.”

앤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정말 그러길 빈다.”

마릴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마릴라가 방에서 나가자 늘 정해진 자기의구석 자리에서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던 매슈가 앤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쑥스러운 듯 속삭였다.

“네 낭만을 모두 포기하지는 말거라, 앤. 조금은 괜찮아. 너무 많이는 말고, 조금은 간직하고 있어라, 앤. 조금은 말이다.”




39)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1892)의 장편 서사시 <국왕 목가(Idylls of the King)> 중에서 ‘랜슬롯와엘레인’ 편에 나오는 장면.
40) 영국의 전설적 왕인아서 왕의 궁전이 있었다는 곳.

추천 (1) 선물 (0명)
IP: ♡.252.♡.103
뉘썬2뉘썬2 (♡.169.♡.51) - 2024/03/05 12:42:12

요즘은 아이돌들이 일부러 잿빛렌즈를 많이 착용하던데 저때 앤은 자연잿빛 눈동자엿음
에도 이쁜줄을 몰랏네요.

연극연습을 연못에서 배타고 하다니.앤은정말 겁없는 천덕꾸러기네요.

나단비 (♡.62.♡.175) - 2024/03/05 16:39:15

잿빛 눈동자 신비롭고 예쁘죠.
앤은 참 매력있는 아이에요.

23,512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나단비
2024-04-17
0
47
나단비
2024-04-16
0
74
나단비
2024-04-16
0
122
나단비
2024-04-16
0
75
나단비
2024-04-16
0
73
나단비
2024-04-16
0
60
나단비
2024-04-15
0
78
나단비
2024-04-15
0
58
나단비
2024-04-15
0
98
나단비
2024-04-15
0
64
나단비
2024-04-15
0
57
나단비
2024-04-14
0
71
나단비
2024-04-14
0
176
나단비
2024-04-14
0
81
나단비
2024-04-14
0
65
나단비
2024-04-14
0
54
나단비
2024-04-13
0
42
나단비
2024-04-13
0
38
나단비
2024-04-13
0
44
나단비
2024-04-13
0
46
나단비
2024-04-13
0
70
나단비
2024-04-12
0
42
나단비
2024-04-12
0
47
나단비
2024-04-12
0
50
나단비
2024-04-12
0
43
나단비
2024-04-12
0
43
뉘썬2뉘썬2
2024-04-11
1
76
뉘썬2뉘썬2
2024-04-11
1
127
나단비
2024-04-11
1
96
나단비
2024-04-11
1
128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