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29~30

나단비 | 2024.02.15 06:23:04 댓글: 0 조회: 130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47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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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일대의 획기적인 사건





앤은 ‘연인의 오솔길’을 따라 집 뒤 목장에서 소를 몰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9월의 어느 저녁이었다. 숲 속의 골짜기와 공터는 붉은 노을로 물들었고, 오솔길의 여기저기도 루비빛으로 흠씬 젖어 있었다. 단풍나무 아래로 대부분의 길은 이미 어둑해졌고 전나무 아래로도 옅은 포도주 빛과 같은 맑은 자줏빛 황혼으로 채워져 있었다. 바람이 나무 위를 스쳐 지나가자, 저녁 무렵 전나무와 바람이 빚어내는 음악만큼 달콤한 소리는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았다.

소들이 여유롭게 건들거리며 오솔길을 걸어가고, 앤은 《마미온》41)에 나오는 ‘전투’ 편을 흥얼거리며 꿈을 꾸듯 그 뒤를 따랐다. 읊고 있는 급박해지는 시의 장면에 앤의 가슴이 뛰었고 화살 부딪치는 소리가 실제로 들리는 것 같았다. 지난겨울 영어 시간에 배웠던 시로 스테이시 선생님이 외우라고 한 것이기도 했다.

창을 든 병사들은 여전히 물러서지 않고
이들의 방벽은 결코 꿰뚫을 수 없는 검은 숲처럼 단단하다.

이 두 행을 암송하면서 감동이 극에 달한 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눈을 감은 채 병사들이 왕을 둘러싸 만들었던 영웅적인 원을 그려보았다. 눈을 뜨자 배리 씨네 밭으로 향한 문을 열고 나오는 다이애나가 눈에 들어왔다. 다이애나의 모습이 너무 진지해 보여 앤은 즉시 다이애나가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리라고 짐작했고 무슨 이야기일지 몹시 궁금했다.

“오늘 저녁은 자줏빛 꿈 같지 않니, 다이애나? 살아 있다는 게 너무 기뻐. 아침에는 언제나 아침이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저녁이 되면 저녁이 훨씬 아름다운 것 같다니까.”

“정말 황홀한 저녁이야. 그런데 멋진 소식이 있어, 앤. 맞춰봐. 세 번 기회를 줄게.”

다이애나가 말했다.

“샬럿 길리스가 결국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있게 되었고 앨런 부인이 우리더러 결혼식장을 장식하라고 했어.”

앤이 소리쳤다.

“아니야. 샬럿의 남자 친구는 교회에서 결혼하는 걸 동의하지 않을 거야. 또 지금껏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 사람이 하나도 없잖아. 샬럿의 남자 친구는 꼭 장례식 같을 거라고 생각한대. 왜 그렇게 고리타분하게 생각할까? 교회 결혼식도 재미있을 텐데. 다시 맞춰봐.”

“그럼 제인의 엄마가 생일파티를 허락해주셨어.”

다이애나가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검은 눈동자가 즐겁게 춤을 추는 듯했다.

“짐작하기 힘들어. 무디 스퍼전 맥퍼슨이 어젯밤 기도회가 끝나고 집에 올 때 널 바래다주기라도 했니?”

앤이 도저히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천만에! 만약에 그 애가 그랬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 일을 자랑삼아 말하겠니? 그 못난 애를!”

다이애나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네가 짐작도 못 할 줄 알았어. 엄마가 오늘조제핀할머니한테 편지를 받았는데, 너와 나한테 다음 주 화요일에 할머니 집으로 오라고 하셨대. 시내로 나가 박람회를구경시켜주신다고!”

“오, 다이애나, 정말이야? 그런데 마릴라 아주머니가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떻게 하지? 아주머니는 싸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으신단 말이야. 지난주에도 제인이 자기네 마차를 타고 화이트 샌즈에서 열리는 미국인 발표회에 가자고 나를 초대했거든. 나는 가고 싶었는데 마릴라 아주머니가 집에서 공부나 하는 게 낫겠다고 말씀하셨어. 제인도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난 너무 실망스러웠어, 다이애나. 가슴이 너무 아파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도 할 수가 없었지. 그렇지만 기도를 안 한 것이 후회가 돼서 한밤중에 다시 일어나 기도를 올리긴 했어.”
앤이 너무 흥분해 단풍나무에 기대야만 할 것 같았다.

“이렇게 해보자.”

다이애나가 말했다.

“우리 엄마한테 부탁해서 마릴라 아주머니에게 대신말씀드려달라고 하는 거야. 그럼 아주머니가 너에게 허락해줄 가능성이 크잖아. 그렇게만 되면 우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앤. 나는 박람회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 그래서 다른 아이들이 박람회를 다녀왔다는 말을 들으면 약 올랐어. 제인이랑 루비는 두 번이나 다녀왔는데 올해에도 또 갈 거래.”

“내가 박람회에 갈 수 있을지 없을지 알게 될 때까지 그 생각은 하지 않을 거야.”

앤이 결심을 굳힌 듯 말했다.

“괜히 미리 좋아했다가 못 가게 되면 실망만 하게 되고 견디기도 힘들거든. 하지만 박람회에 갈 수 있다면 새 코트도 그때쯤 완성될 테니까 참 좋을 거야. 마릴라 아주머니는 내게 새 코트가 필요하다고는 생각지 않으셨어. 지금 코트로도 이번 겨울을 지낼 수 있다고 하셨으니까, 아마 새 코트를 갖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말씀하실 거야. 새 코트는 무척 예뻐, 다이애나. 감청색인데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만들고 있거든. 마릴라 아주머니도 이제는 내 옷을 유행에 맞춰 만들어주셔. 매슈 아저씨가 린드 아주머니에게 내 옷을 부탁하는 걸 좋아하시지 않아서 그래. 난 정말 기뻐. 유행하는 옷을 입으면 착해지기도 훨씬 쉬울 것 같아. 적어도 나한테는 그래. 선천적으로 착한 사람들에게는 큰 차이가 없겠지만. 하지만 매슈 아저씨가 나한테도 새 코트가 필요할 거라고 말씀하셔서, 마릴라 아주머니가 예쁜 감청색 천을 넉넉하게 샀고, 카모디에 있는 진짜 양재사가 지금 내 옷을 만들고 있어. 토요일 저녁이면 옷이 완성된대. 난 새 옷을 입고 새 모자를 쓰고 일요일에 교회 복도를 걸어가는 내 모습을 상상하지 않으려고 애써. 그런 것을 상상하는 건 옳지 않은 일 같거든. 하지만 나도 모르게 그런 상상에 빠져들어. 모자도 무척 예뻐. 우리가 카모디에 갔던 날 매슈 아저씨가 사주신 거야. 요즘 대유행하는 파란색 벨벳 모자로 황금색 띠와 술이 달려 있는 거야. 다이애나, 네 새 모자는 우아하고 너무 잘 어울려. 지난주 일요일에 네가 교회로 들어오는 걸 보고 네가 내 단짝 친구라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뿌듯하고 자랑스럽기도 했어. 우리가 옷에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게 잘못일까? 마릴라 아주머니는 그런 게 죄를 짓는 거라고 하셨거든. 하지만 너무 재미있는 이야깃거리 아니니?”

마릴라는 앤이 시내로 가는 걸 허락해주었다. 배리 씨가 다음 주 화요일에 아이들을 시내에 데려다주기로 했다. 샬럿타운은 에이번리에서 50킬로미터나 떨어져서, 배리 씨는 바로 그날 돌아오기를 원해서 아침 일찍 출발해야만 했다. 그러나 앤은 모든 것이 즐겁게만 생각되어서 화요일 아침에 해가 뜨기도 전에 벌써 일어났다. 창밖을 내다본 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유령의 숲’전나무 뒤로 동쪽 하늘이 은빛처럼 빛나고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아 화창한 날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무들 틈새로 새어든 불빛이 ‘비탈길 과수원집’의 서쪽 방에서 반짝거렸다. 다이애나도 벌써 일어났다는 뜻이었다.

매슈가 불을 지피고 있을 때 앤은 옷을 다 입고 아침 준비를 마쳤다. 마릴라도 내려왔으나 앤은 너무 흥분해서 식사조차 할 수 없었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앤은 멋진 새 모자를 쓰고 새 외투를 입고 서둘러 시내를 건넜고 전나무 숲을 지나 비탈길 과수원집으로 향했다. 배리 씨와 다이애나가 앤을 기다리고 있어, 그들은 곧바로 출발했다.
긴 여행이었지만 앤과 다이애나는 매 순간을 즐겼다. 이른 아침에 마차를 타고 불그스레한 햇살을 받으며 수확을 끝낸 들판을 가로질러 축축이 젖은 길을 덜컹거리며 가는 것도 즐거웠다. 공기는 맑고 상쾌했다. 옅은 잿빛이 감도는 푸른 안개가 골짜기를 피어올라 언덕 위에서 흩어졌다. 때때로 단풍나무가 붉은색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 숲을 지났고, 때로는 다리 위로 강을 건너기도 했다. 그때마다 어린 시절의 두렵고도 즐거운 기억이 되살아났다. 길은 간혹 해안을 따라 항구를 지났고, 비바람에 잿빛으로 변한 낚시용 오두막들을 지났다. 다시 언덕길을 오르자 안개에 싸인 푸른 하늘 위로 굽이진 고지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어디에나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있었다. 거의 정오에 그들은 시내에 도착해서 ‘너도밤나무 저택’으로 향했다. 길에서 쑥 들어가 여전히 초록색을 띤 느릅나무와 가지가 무성한 너도밤나무로 가려진 고풍스러운 멋진 저택이었다.조제핀할머니가 날카로운 검은 눈을 깜빡이면서 현관에서 그들을 맞아주었다.

“마침내 나를 보러 와주었구나, 앤. 세상에, 정말 많이 컸구나! 나보다도 더 크겠다. 얼굴도 훨씬 더 예뻐졌고.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겠지만.”

조제핀배리가 말했다.

“아니요, 몰랐어요. 옛날만큼 주근깨가 많지 않다는 건 알지만, 그래서 무척 다행이라 생각하긴 해요. 하지만 훨씬 더 예뻐지기를 바라지는 못했어요. 제가 예뻐졌다고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조제핀배리 할머니.”

앤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앤이 나중에 마릴라에게 설명할 때조제핀할머니의 집은 ‘엄청나게 화려한’ 가구들이 꽉 차 있었다고 했다.조제핀배리가 저녁 준비가 다 되었는지 살피러 간 동안, 응접실에 남은 두 시골 소녀는 방 안을 쭉 둘러보고는 그 화려함에 완전히 기가 죽었다.

“궁전에 온 것 같지 않니? 나도 전에조제핀할머님 댁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어 이렇게 화려한 줄 몰랐어. 줄리아 벨이 여기에 와 봤어야 하는 건데. 줄리아는 자기 엄마의 응접실을 두고 뽐내잖아.”

다이애나가 속삭였다.

“벨벳 카펫이야. 그리고 이 실크 커튼!”

앤이 황홀함에 취한 듯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난 이런 것들을 꿈꾸었는데. 하지만 이런 것들에둘러싸여 지낸다고 편안할 것 같지는 않아. 이 방에는 물건이 너무 많고 화려하기도 해서 상상할 여지가 없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상상이 하나의 위안이야. 상상할 것이 많잖아.”

앤과 다이애나는 오래전부터 시내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소망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즐거웠다.

수요일에는조제핀배리가 그들을 박람회에 데려가 온종일 박람회에서 보내게 해주었다.

앤이 나중에 마릴라에게 그때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정말 즐거웠어요. 그렇게 재미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가장 재미있었던 게 뭐였는지도 모르겠어요. 말과 꽃, 수예품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 같기는 해요. 조시 파이가 레이스 뜨기에서 1등을 했어요. 그리고 저는 정말 기뻤어요. 조시가 1등을 했다고 제가 기뻐했다는 게 정말 기뻐요. 제가 많이 발전했다는 증거잖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마릴라 아주머니?
하몬 앤드루스 씨도 그라벤스타인 사과42)로 2등을 했고, 그리고 벨 장로님은 돼지 경연 대회에서 1등을 했어요. 다이애나는 주일 학교 장로님이 그런 대회에서 상을 받는 게 이상하대요. 하지만 전 왜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하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아주머니는 아시겠어요?
다이애나는 이제부터 벨 장로님이 엄숙하게 기도를 할 때마다 돼지가 생각날 거라고 말했어요. 클라라 루이스 맥퍼슨은 그림으로 상을 받았고 린드 아주머니는 집에서 만든 버터와 치즈로1등 상을 받았어요. 우리 에이번리 사람들이 무척 잘한 것 같지 않으세요? 린드 아주머니도 그날 거기에 오셨더라고요. 모두 낯선 사람들뿐인 데서 아주머니의 친근한 얼굴을 보니까 얼마나 반갑던지. 제가 린드 아주머니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니까요. 수천 명은 온 것 같았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그래서 제가 하찮게 느껴질 정도였어요.
조제핀할머니는 우리를 특등 관람석에 데려가서 경마하는 걸 보게 해주셨어요. 린드 아주머니는 가시지 않았고요. 경마는 몹시 나쁜 것이라면서, 아주머니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니까 경마 같은 것은 멀리하는 모범을 보이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한다고도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거기에 사람이 워낙 많아서 린드 아주머니가 거기에 계시지 않는다는 게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저도 경마장에 자주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정말 흥미진진하고 너무 현혹적이어서요. 다이애나는 얼마나 흥분했던지 붉은 말이 이기는 데 내게 10센트를 걸자고 했어요. 저는 그 붉은 말이 이길 거라고 믿지 않았지만, 앨런 부인에게 모든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어서 내기를 하지 않았어요. 그 얘기를 사모님에게는 못 할 것 같았거든요. 목사님 부인께 말씀드릴 수 없는 일이라면 나쁜 짓이 틀림없잖아요. 목사님 부인을 친구로 두는 건 양심을 또 하나 갖는 것처럼 좋아요.
그런데 내기를 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어요. 붉은 말이 이겼거든요. 내기를 했더라면 10센트를 잃을 뻔했어요. 그래서 미덕에는 보답이 따른다고 말하는 건가 봐요. 어떤 남자가 기구를 타고 올라가는 것도 봤어요. 저도 기구에 타고 올라가고 싶었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정말 흥미진진할 거예요. 우리는 점치는 사람도 봤어요. 10센트를 내면 작은 새가 손님의 운세가 적힌 종이를 골라줘요.조제핀할머니가 다이애나와 저에게 10센트씩을 주셔서 우리도 운세를 봤어요. 저는 얼굴이 검고 아주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해 바다를 건너가 살게 될 거래요. 그래서 얼굴이 검은 남자들을 주의 깊게 살펴봤지만 누구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어쨌건 그 남자를 찾기엔 제가 아직너무 어린 것같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오, 결코 잊을 수 없는 하루였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전 너무나 피곤해서 밤에 잠도 잘 수 없었어요. 그리고조제핀할머니는 약속하신 대로 우리를 손님방에서 자게 해주셨어요. 우아한 방이었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하지만 손님방에서 잠을 자는 게 제가 생각하던 건 아니었어요. 그래서 어른이 되는 게 무조건 좋은 것 같진 않아요. 그걸 이제 깨닫기 시작했어요. 어렸을 때는 무척 원하던 것이어도 실제로 얻고 나면 절반도 좋은 것 같지 않거든요.”

목요일에 그들은 마차를 타고 공원을 드라이브했고, 저녁에조제핀배리는 그들을 유명한 프리마돈나가 나온다는 음악 콘서트에 데리고 갔다. 그날 저녁 앤은 기쁨에 흠뻑 젖었다.

“오, 마릴라 아주머니,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었어요. 전 너무 흥분해서 말조차 할 수 없었다니까요. 그러니까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시겠죠? 마법에 걸린 것처럼 앉아서 아무 말도 못 했어요. 셀리츠키 부인은 눈부시게 아름다웠어요. 흰 공단 드레스를 입고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었어요. 하지만 부인이 노래를 시작했을 때 저는 다른 것을생각할 수조차 없었어요. 그때 제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요.
하지만 착한 사람이 되는 게 이제는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별을 올려다보았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어요.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행복에 겨운 눈물이었어요.
음악회가 끝났을 때는 정말 아쉬웠어요. 저는조제핀할머니에게 어떻게 다시 평범한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러니까조제핀할머니께서 길 건너편의 식당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진정하는 데도움이 될 거라고 하셨어요. 너무 밋밋하게 들렸지만 놀랍게도 사실이었어요. 아이스크림이 정말로 맛이 있었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게다가 밤 11시에 식당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도 좋았고 서운한 기분을 털어내는 데아주 그만이었어요. 다이애나는 도시에서 살아야 할 것 같다고 말했어요.조제핀할머니가 제 생각은 어떠냐고 물어보셨지만 저는 진지하게 생각을 해봐야 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말씀드릴 수 있을 거라고 대답했어요. 그래서 잠자리에 든 후에 생각을 해봤어요. 그때가 뭔가를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때이거든요. 그리고 도시가 저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래서 기뻤어요.
가끔 밤 11시에 멋진 레스토랑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도 괜찮겠지만, 규칙에 맞춰 11시에는 동쪽 방에서 곤히 잠자는 게 더 나은 것 같으니까요. 또 제가 잠들어도 밖에서는 별들이 반짝이고 바람이 개울 건너 전나무 숲에서 불고 있다는 것을 아니까요. 이튿날 아침에 식사를 하면서조제핀할머니에게 그렇게 말씀을 드렸더니 웃으셨어요.조제핀할머니는 제가 말만 하면 대개 웃으세요. 제가 아주 진지한 얘기를 할 때도요. 제가 웃기려고 한 게 아니어서 별로 좋지는 않았어요. 하지만조제핀할머니는 정말 친절하신 분이시고 우리를 아주 잘 대접해주셨어요.”

금요일은 집에 돌아가는 날이었다. 배리 씨가 두 아이를 데리러 왔다.

“그래, 재미있게 보냈니? 그랬다면 좋겠구나.”

두 사람이 작별 인사를 하자조제핀배리가 물었다.

“그럼요, 아주 재미있었어요.”

다이애나가 말했다.

“앤, 너는?”

“저는 순간순간 즐겁지 않은 때가 없었어요.”

앤은 그렇게 말한 다음 갑자기 노부인의 목을 끌어안고 주름진 뺨에 입을 맞추었다. 감히 한 번도 그런 짓을 해보지 않았던 다이애나는 앤의 자유로운 행동에 좀 놀라 어안이 벙벙한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조제핀배리는 무척 좋아했고, 마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베란다에 서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그 큰 집으로 들어갔다. 그 발랄하던 아이들이 남긴 빈 공간 때문인지조제핀배리는 한층 쓸쓸해 보였다. 솔직히 이 배리 노인은 상당히 자기중심적인 여자여서 자기 이외에 누구에게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또 자기에게 도움이 되거나, 자기를 즐겁게 해주는 사람만을 높이 평가했다. 앤은 미스 배리를 즐겁게 해주어서 이 노인의 귀여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앤의 그 특이한 말투보다 그 생기 넘치는 열정,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면서도 사랑스러운 태도, 예쁜 눈매와 입매에 더 마음이 갔다.

“마릴라 커스버트가 고아원에서여자아이를 입양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무슨 어리석은 짓이냐 여겼지만 결국에는 실수가 아니었군.집 안에 앤 같은 아이가 있으면 나도 더 행복해질 수 있을 텐데.”

앤과 다이애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시내로 나갈 때보다도 더 즐거웠다. 저 끝에 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다. 해 질 무렵이 되자 화이트 샌즈를 지나 해안가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저 멀리 에이번리의 언덕이 자줏빛 하늘을 배경으로 어슴푸레하게 나타났다. 언덕 뒤쪽에서 달이 바다 위로 찬란한 모습을 드러냈고, 달빛을 받은 바다는 환히 빛나며 모습을 바꾸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안쪽 깊숙이까지 쭉 이어진 작은 만에서는 춤을 추듯 출렁이는 잔물결이 아름답게 비쳤다. 파도는 바위에 부딪히며 잔잔히 부서졌고, 짠 바다 냄새가 시원한 대기에 스며들었다.

“아아, 살아 있다는 게 너무 좋아. 그리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도.”

앤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말했다.

앤이 개울 위의 통나무 다리를 건너자‘초록 지붕 집’의 부엌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집에 돌아온 것을 환영하듯 반짝였다.난롯불이 활활 타오르며 열려 있는 문틈으로 싸늘한 가을밤에 따뜻한 열기를 내보냈다. 앤은 즐겁게 언덕길을 달렸고, 따뜻한 저녁이 식탁에 차려져 있는 부엌으로뛰어 들어갔다.

“돌아왔구나, 앤.”

마릴라가뜨개질거리를 접으며 말했다.

“네, 돌아오니 너무 기뻐요. 모든 것에, 심지어 저 시계에다가도 입을 맞추어주고 싶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닭구이! 저를 위해 요리하신 거예요?”

앤이 기쁜 듯 외쳤다.

“그래, 너를 위해 준비한 요리야. 먼 길을 와야 하는데 배가 고플 것 같아 맛있는 것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빨리 옷을 갈아입고 나오너라, 앤. 매슈 아저씨가 들어오시면 바로 식사를 시작하자. 네가 돌아오니까 좋구나. 그동안 너무 쓸쓸했어. 나흘씩이나 집을 떠나 있었던 적은 없었잖니.”

마릴라가 말했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앤은 난로 앞의 매슈와 마릴라 사이에 앉아 시내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전 정말 황홀한 시간을 보냈어요. ‘일생일대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 가장 기쁜 일인 것 같아요.”

앤이 행복해하며 결론을 지었다.




41) <Marmion>: 플로덴 전투를모티프로 스코틀랜드 작가 월터 스콧이 쓴 장편 서사시. 비처럼 쏟아지는 잉글랜드군의 화살로부터 왕 제임스 4세를 지키려고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원을 만들어 왕을 둘러싸고 한 사람 한 사람씩 쓰러지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던 장면.
42) 덴마크 그라벤스타인 지역에서 재배하기 시작한 노란 사과.





30

퀸스 준비반이 결성되다





마릴라는 뜨개질거리를 무릎에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눈이 침침했다. 다음번에 시내에 나가면 안경을 바꾸어야 할 모양이다. 근래에 눈이 자주 침침해졌기 때문이었다.

‘초록 지붕 집’주변으로 11월의 황혼이 내리면서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부엌에서 타오르는 난로 불빛만이 춤을 추듯 붉게 타올랐다.

앤은 벽난로 앞에 깔린 융단에 쪼그리고 앉아, 오래된 여름 햇살처럼 단풍나무 땔감에서 스며 나오며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좀 전까지 읽던 책이 바닥으로 슬며시 떨어졌고, 앤은 입을 살짝 벌린 채 미소 띤 얼굴로 꿈에 젖어들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스페인 성이 안개와 생생한 무지개 같은 환상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동화의 나라에서 아름답고 매혹적인 모험이 앤에게 일어났다. 모두 승리로 끝나는 모험이었고 현실 세계의 모험처럼 앤을 곤경에 빠뜨리지 않는 모험이었다.

마릴라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앤을 바라보았다. 난롯불과 어둠이 적절히 섞인 빛보다 밝은 곳에서는 좀처럼 드러내지 않던 자애로운 눈빛이었다. 사랑은 말로 표현하고 표정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교훈을 마릴라가 배우지 못한 탓이었다. 하지만 마릴라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회색 눈동자의 빼빼 마른 소녀를 누구보다 깊고 뜨겁게 사랑했다. 그렇게 사랑한 까닭에 아이에게 너무 관대해질까 봐 혼자 걱정할 정도였다. 또 앤을 사랑하는 것처럼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죄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까지 있었다. 따라서 앤이 그녀에게 덜 소중한 아이인 것처럼 엄격하고 비판적으로 대하면서 일종의 무의식적인 회개를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당연히 앤은 마릴라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짐작조차 못 했고, 때로는 마릴라에게 동정심이나 이해심이 부족해 기쁘게 해주기 어렵다고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곧 앤은 마릴라가 자기를 위해 얼마나 애써주는지 생각하며 뉘우치는 마음이 되었다.

“앤, 오늘 오후에 네가 다이애나와 밖에서 놀 때 스테이시 선생님이 집에 오셨었다.”

마릴라가 느닷없이 말했다.

앤이 깜짝 놀라 한숨을 내쉬며 현실로 돌아왔다.

“선생님이요? 제가 집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왜 저를 부르지 않으셨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다이애나와 저는 요즘 저기‘유령의 숲’에만 있는데요. 요즘은 숲 속이 아름다워요. 풀고사리, 공단 같은 이파리들, 월귤나무 등 숲 속의 모든 것이 잠들었어요. 누군가 봄이 올 때까지 그것들을 나뭇잎 이불 밑에 쑤셔 넣은 것 같아요. 작은 회색 요정이 무지갯빛 스카프를 두르고 달빛을 빌어 몰래 와서 그렇게 해놓았을 거예요. 하지만 요즘 다이애나는 요정 얘기를 별로 하지 않아요.‘유령의 숲’에서 유령이 나온다고 상상했다가 엄마한테 혼난 것을 아직 잊지 못하나 봐요. 그게 다이애나의 상상력에 아주 나쁜 영향을 미쳤어요. 상상력을 말려버린 거예요. 린드 아주머니는 머틀 벨을 말라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라고 했어요. 그래서 루비 길리스에게 머틀이 왜 말라죽은 것과 똑같냐고 물어봤어요. 루비는 머틀이 애인에게 버림을 받아서 린드 아주머니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라고 말했어요. 루비 길리스는 항상 남자만 생각해요. 나이를 먹으면서 더 심해지는 것 같아요. 남자 얘기를 하는 것도 좋지만 모든 것에 남자를 끌어들이는 건 좋은 게 아니잖아요. 그렇죠? 다이애나와 저는 절대 결혼하지 않고 멋지게 늙으면서 영원히 함께 살아가기로 약속을 할까 진지하게 고민 중이에요. 그런데 다이애나가 아직 결정을 못 했어요. 거칠고 과격하고 고약한 남자와 결혼해서 조금씩 바꿔가는 게 더 보람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나요. 다이애나와 저는 요즘 진지한 문제들에관해많은 이야기를 나눠요. 우리가 옛날보다 많이 컸으니까 유치한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어울리지 않잖아요. 거의 열네 살이 되었다는 건 무척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 같아요. 지난 수요일에 스테이시 선생님이 열세 살을 넘긴여자아이들을 모두 시냇가로 데려가서 그에 관해 말씀해주셨어요. 열세 살이 되면서부터는 어떤 습관을 들이고 어떤 이상을 갖느냐를결정하는 데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고요. 그때부터 스무 살까지 우리 성품이 형성되고, 장래의 삶을 위한 기초를 놓기 때문이랬어요. 그 기초가 약하면 정말로 가치 있는 것을 세울 수 없을 거라고도 하셨어요. 다이애나와 저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문제에관해이야기를 나누면서, 무척 엄숙해지는 기분이었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그래서 우리는 아주 신중하게 행동하고, 좋은 습관을 기르고, 최선을 다해 배우고 분별 있는 사람이 되려고 애써서 스무 살이 되면 훌륭한 성품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결심했어요. 스무 살이 된다고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아요. 굉장히 늙고 어른이 다 된 것처럼 느껴져요. 그런데 왜 스테이시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신 거예요?”

“내가 너한테 그걸 얘기해주려고 했는데, 어디 내가 말할 틈이라도 주었니? 선생님이 네 얘기를 하셨어.”

“저를요?”

앤은 약간 놀란 듯이 말했다. 그런 다음에는 얼굴까지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오, 알겠어요.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아주머니한테 말하려고 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잊어먹고 있었어요. 어제 오후 캐나다 역사를 공부하는 시간에《벤허》를 읽다가 스테이시 선생님한테 걸렸어요. 제인 앤드루스에게 빌린 책이었어요. 점심시간에 그 책을 읽었는데 수업이 시작될 때 하필이면 전차 경주 부분을 읽게 되었어요. 벤허가 이길 거라고 확신하긴 했지만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 미칠 것 같았어요. 여하튼 벤허가 이기지 못하면 시적인 멋이 없잖아요. 그래서 책상에는 역사책을 펼쳐놓고 책상과 제 무릎 사이에《벤허》를 감춰놓고 읽었어요. 그러니까《벤허》를 읽으면서도 캐나다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요. 그런데 책에 푹 빠져서 스테이시 선생님이 다가오는 것도눈치채지 못했어요. 글쎄, 제가 눈을 들어 보니까 스테이시 선생님이 저를 아주 나무라듯이 내려다보고 계시더라고요. 부끄러워서 죽는 줄 알았어요. 특히 조시 파이가 낄낄대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요. 스테이시 선생님이《벤허》를 빼앗아 가시면서 그때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더니 쉬는 시간에 저를 불러 나무라셨어요. 제가 두 가지 점에서 아주 나쁜 짓을 했다고 하셨어요. 첫째는 공부해야 할 시간을 헛되게 낭비한 것이고, 둘째는 소설책을 읽으면서 역사책을 읽는 것처럼 꾸며서 선생님을 속인 거라고요. 마릴라 아주머니, 저는 그제야 제 행동이 누군가를 속인 거라는 걸 깨달았어요. 너무나 큰 충격이어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어요. 울면서 스테이시 선생님께 저를 용서해달라고 빌었어요.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요. 또 일주일 동안《벤허》는 쳐다보지도 않고, 전차 경주가 어떻게 끝나는지도 보지 않는 것으로 잘못을 회개하겠다고 맹세했어요. 스테이시 선생님은 그럴 필요는 없다고 하시면서 저를 너그럽게 용서해주셨어요. 그러고선 집에까지 와서 아주머니에게 그런 얘기를 하시다니 좀 치사한 것 같아요.”

“스테이시 선생님은 나한테 그런 말은 꺼내지도 않았다. 네가 죄책감으로 혼자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런데 학교에 소설책은 갖고 다녀서는 안 된다. 어쨌든 넌 소설책을 너무 많이 읽고 있어. 내가 어렸을 때는 그런 소설책을 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앤이 항의했다.

“오,《벤허》는 그냥 소설책이 아니에요. 얼마나 종교적인 책인데요. 물론 너무 재미있어서도 일요일에 읽기에는 적합하지 않지만요. 그래서 전 이 책을주중에만읽었어요. 그리고 스테이시 선생님이나 앨런 부인이 열세 살을 좀 넘은 아이에게 적합한 책이라고 말한 책이 아니면 어떤 책도 읽지 않아요. 스테이시 선생님하고 그렇게 약속했거든요. 언젠가 선생님이 제가 《무시무시한 유령의 집에 감춰진 미스터리》란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보셨어요. 루비 길리스가 빌려준 책인데 정말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운 책이었어요. 제 핏줄에서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스테이시 선생님은 그런 책은 나쁘고 불건전한 책이라며, 그런 책을 다시 읽지 말라고 당부하셨어요. 그런 책을 다시는 읽지 않겠다고 약속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사건이 어떻게 끝나는지 모르고 책을 돌려줄 때는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하지만 스테이시 선생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시련을 이겨냈어요. 어떤 사람을 즐겁게 해주고 싶을 때 뭔가를 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거예요, 마릴라 아주머니.”

“난 램프에 불을 올리고 일이나 해야겠다. 넌 스테이시 선생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싶지 않은 모양이니. 넌 다른 어떤 것보다도 네 입에서 나오는 소리에만 관심이 있어.”

마릴라가 말했다.

“오, 아니에요, 마릴라 아주머니! 정말 듣고 싶어요.”

앤이 잘못을 뉘우친 듯 소리쳤다.

“이제부터는 입을 꼭 다물고 있을게요. 한마디도 하지 않을게요. 제가 말을 너무 많이 한다는 걸 저도 알아요. 그 버릇을 고치려고 정말 노력하고 있고요. 제가 말을 많이 하지만, 말하고 싶은 게 엄청 많아도 하지 않는다는 걸 아신다면 오히려 제가 안타깝게 여겨지실 거예요. 아주머니, 제발 말해주세요.”

“스테이시 선생님은 퀸스 전문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려는 우수한 아이들로 특별반을 만들려고 하시더라. 수업이 끝나고 나서 한 시간 정도 과외수업을 해주실 생각이더라. 그래서 우리가 너도 그 반에 넣기를 원하는지 물어보러 오셨던 거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앤? 퀸스 학교에 진학해서 교사 자격증을 따고 싶으냐?”

“오, 마릴라 아주머니!”

앤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제 평생의 꿈이었어요. 6개월 전, 그러니까 루비와 제인이 퀸스 학교 입학시험에 대비해 공부한다고 할 때부터 저도 그런 꿈을 꾸었어요.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래 봤자 소용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저도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하지만 돈이 너무 많이 들지 않을까요? 앤드루스 아저씨는 프리시를 졸업시키는데 150달러 정도 들 거라고 하셨어요. 프리시는 기하를 못 하지도 않는데 말예요.”

“네가 돈 걱정까지 할 건 없다. 매슈 아저씨와 내가 너를 기르려고 데려왔을 때 우리 능력이 닿는 데까지 너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좋은 교육도 시켜주기로 결정했었다. 나는 여자도 어떤 식으로든 자기 밥벌이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매슈 아저씨와 내가 살아 있는 한‘초록 지붕 집’은 언제까지나 네 집이지만,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앞날에 어떤 일이 닥칠지 누구도 모르잖니. 철저히 준비를 해둬야지. 그래서 말이다, 앤, 네가 원하면 퀸스 학교 준비반에 들어가도록 해라.”

“오, 마릴라 아주머니, 감사합니다.”

앤은 마릴라의 품에 뛰어들어 진지하게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주머니와 매슈 아저씨, 정말 고마워요. 열심히 공부하고 두 분에게 자랑거리가 되려고 최선을 다하겠어요. 미리 말해두지만 기하에는 많은 기대를 하지 마세요. 하지만 열심히 하면 다른 과목에서는 뒤지지 않을 거예요.”

“그래, 난 네가잘해낼 거라고믿는다. 스테이시 선생님도 네가 똑똑하고 부지런하다고 말씀하시더라. 하지만 너무 책에만 매달릴 필요는 없다. 서두를 것 없어. 입학시험까지는 아직 일 년 반이나 남았잖니. 스테이시 선생님 말씀대로 늦지 않게 시작해서 기초는 다져두는 것이 좋겠지만.”

마릴라는 앤이 자만심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스테이시 선생의 말을 그대로 전해주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제부터는 공부에 더 관심을 가져야겠어요. 인생의 목표가 생겼잖아요. 앨런 목사님은 모두가 목표를 갖고 그 목표를 성실하게 추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그 목표가 반드시 가치 있는 목표여야 한다고도 하셨어요. 스테이시 선생님처럼 선생님이 되는 건 가치 있는 목표일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마릴라 아주머니? 선생님은 무척 숭고한 직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앤이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말했다.

때가 되자 퀸스 준비반이 결성되었다. 길버트 블라이드, 앤 셜리, 루비 길리스, 제인 앤드루스, 조시 파이, 찰리 슬론, 그리고 무디 스퍼전 맥퍼슨이 준비반에 들어갔다. 다이애나 배리는 준비반에 들어오지 않았다. 부모님이 다이애나를 퀸스 학교에 보낼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일은 앤에게 큰 불행이었다. 미니 메이가 후두염에 걸렸던 그날 밤 이후로 앤과 다이애나는 모든 것을 함께했었다. 퀸스 준비반이 과외수업을 위해 학교에 남았던 첫날, 앤은 다이애나가 다른 아이들과 천천히 학교를 빠져나가 혼자서‘자작나무 길’과‘제비꽃 골짜기’를 지나 집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앤은 그저 자리에 앉아, 단짝에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목이 메어오면서 자꾸 눈물이 나와서 라틴어 문법책을 똑바로 세워 눈물이 맺힌 눈을 감추어야 했다. 앤은 죽는 날까지 길버트 블라이드와 조시 파이 앞에서는 눈물짓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 앤이 애처롭게 말했다.

“하지만 마릴라 아주머니, 다이애나가 혼자 나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앨런 목사님이 지난주 일요일 설교에서 말씀하셨듯이 죽음과 같은 고통을 맛보는 기분이었어요. 다이애나도 퀸스 학교에 들어가려고 공부한다면 정말 좋을 거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어요. 하지만 린드 아주머니의 말처럼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완벽한 것을 기대할 수는 없겠죠. 린드 아주머니가 때로 가슴 아픈 말을 하시긴 해도, 진실을 말씀하실 때가 더 많기는 해요. 그런데 저는 퀸스 준비반이 무척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인과 루비는 선생님이 되려고 공부하는 것일 뿐이래요. 그것이 그들에겐 최고의 야망이래요. 루비는 졸업하고 나서 2년만 가르치고, 그 후엔 결혼할 생각이래요. 제인은 평생을 가르치는 데 바치겠다면서 결혼은 절대 하지 않을 거래요. 가르치면 돈을 받지만, 남편은 한 푼도 주지 않으면서 흥청망청 쓰는 돈에서 자기 몫을 달라고 하면 화를 낼 것이기 때문이래요. 제인은 그런 슬픈 경험이 있어서 그렇게 말한 거라고 생각해요. 린드 아주머니가 그러는데, 제인의 아빠는 심술쟁이에다 지독한 구두쇠래요. 조시 파이는 직접 돈을 벌 필요가 없으니까 더 배우려고 퀸스 학교에 가는 거라고 말했어요. 게다가 구호품으로 살아가는 고아들, 그러니까 구걸해야 하는 고아들과는 다르다고도 말했어요. 무디 스퍼전은 목사가 될 생각이래요. 린드 아주머니도 이름만 봐서는 무디 스퍼전이 목사로 살 수밖에 없다고 했어요.43) 마릴라 아주머니, 못된 생각인 줄은 알지만 무디 스퍼전이 목사가 된다고 생각하면 그냥 웃음이 나와요. 크고 펑퍼짐한 얼굴에 눈은 푸르지만 콩알만 하고, 귀는 날개처럼 불쑥 튀어나와서 정말 웃기게 생겼거든요. 하지만 무디 스퍼전도 어른이 되면 훨씬 지적인 모습이 될 거예요. 찰리 슬론은 정치계에 들어가서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린드 아주머니는 찰리가 정치에서 결코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했어요. 요즘 정치계에서 성공하려면 악당이 되어야 하는데 슬론 집안사람들은 모두 너무 정직해서 그렇대요.”

“길버트 블라이드는 뭐라던?”

앤이 《줄리어스 시저》를 펼치는 것을 보면서 마릴라가 물었다.

“전 길버트 블라이드의 야망이무엇인지 몰라요. 그 애가 그런 것을 갖고 있다고 해도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앤이 무시하듯 말했다.

이제 앤과 길버트 사이는 모두에게 알려진경쟁 관계였다. 전에는 경쟁이 일방적인 면을 띠었지만, 언젠가부터 길버트도 앤과 마찬가지로 반에서일 등을 하기로 작심한 것이 명백했다. 길버트는 앤의 상대로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반의 다른 아이들은 그들의 우월성을 암묵적으로 인정해버리고 아무도 이 둘과 겨루려 들지 않았다.

지난번 연못가에서 길버트가 앤에게 용서를 구했지만 거절당한 이후로 길버트는 이 단호한 경쟁 외에는 일체 앤 셜리의 존재를 무시했다. 다른여자아이들과는 같이 장난도 치고 책이나 문제도 서로 바꾸어 보면서 공부나 장례 계획도 즐겁게 이야기했건만, 뿐만 아니라 때로는여자아이들을 기도회나 토론회가 끝나면 집까지 바래다주기도 했지만 앤 셜리만큼은 철저하게 무시했다. 앤은 그렇게 무시당하는 일이 상당히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관하지 않겠다고 자신에게 말하면서 고개를 흔들어 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앤의 변덕스럽고 여자다운 작은 가슴으로는 자기가 이 일에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반짝이는 호수’에서 있었던 일이 다시 찾아온다면 이번에는 다르게 대답할 것만 같았다.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길버트에게 품고 있던 분노가 사라져버렸지만 앤은 어떻게 손을 써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그 분노가 필요한 시점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중요한 사건과 관련된 모든 일들과 감정들을 떠올리며 그 만족스럽던 분노를 느껴보려고 애를 써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그날 연못가에서 느꼈던 분노가 마지막 불꽃이었다. 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일을 용서했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렇게 안타까워하는 앤의 마음이나, 오만하고 밉지 않게 행동했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마음을 길버트는 물론이고 누구도 몰랐다. 심지어 다이애나조차도 몰랐다. 앤은 자기감정을 저 깊이 장막 속에 감추어버리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어서, 길버트가 보복하려고 앤을 경멸하는 태도로 대할 때 앤이 보복을절절히느낀다는 것을 전혀눈치채지 못했다. 길버트가 하나 위안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앤이 찰리 슬론에게도 항상 매정하게 대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일을 제외하고는 그해 겨울은 즐겁게 공부를 하면서 순조롭게 지나갔다. 앤에게는 지나가는 하루하루가 일 년이라는 목걸이에 꿰인 황금 구슬이 하나하나 빠져나가는 것으로 느껴졌다. 앤은 행복했고 매사에 열심이었으며 모든 것에 관심을 가졌다. 배워야 할 것들도 많았고 얻고 싶은 것도 많았다. 즐겁게 책을 읽었고, 주일 학교 성가대에서 새 노래도 연습했다. 토요일 오후에는 주로 앨런 부인과 보냈다. 그리고 앤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초록 지붕 집’에 다시 봄이 찾아왔고 세상은 다시 한 번 온통 꽃들로 가득 찼다.

그러자 공부가 조금 재미없어졌다. 퀸스 준비반 아이들은 수업이 끝난 후에도 남아야 했던 까닭에, 다른 아이들이 초록빛의 오솔길과 푸르른 숲과 목장 지름길로 흩어져 가는 것을 창문 너머로 부럽게 바라보아야 했다. 그럴 때면 열심히 공부하던 겨울과는 다르게 라틴어 동사도, 프랑스어 연습 문제도 모두 생기를 잃어버렸다. 심지어는 앤과 길버트마저도 공부에 점점 흥미를 잃어갔다. 드디어 학기가 끝나고 즐거운 방학이 코앞에 다가오자 선생님도, 아이들도 모두 마음이 들떠 있었다.

“지난 한 해 동안 여러분 모두가 열심히 공부했어요. 이제부터는 즐거운 방학을 보내도 돼요. 밖으로 나가 기운차게 뛰어놀고 건강과 활력을 되찾아 내년에는더욱더큰 포부를 안고 돌아오세요. 입학시험을 치르기 전 마지막 해잖아요. 결전의 해라고요.”

스테이시 선생님이 마지막 날 오후 모두에게 말했다.

“다음 학기에 다시 돌아오시는 거죠, 스테이시 선생님?”
조시 파이가 물었다.

조시 파이는 어떤 질문이든 거리낌 없이 던졌는데 지금은 반 아이들이 모두 이런 조시에게 고마워했다. 모두들 궁금해하던 질문이지만 아무도 감히 나서서 물어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부터 학교에 이상한 소문이 퍼져 있었고 모두들 그 소문이 진짜인지 걱정하고 있던 중이었다. 스테이시 선생님이 고향 마을 학교에서 가르쳐달라는 제의를 받아 내년에는 에이번리 학교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퀸스 준비반 학생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조용히 스테이시 선생님의 대답을 기다렸다.

스테이시 선생님이 말했다.

“네, 돌아올 거예요. 다른 학교로 갈까 생각하긴 했지만 다시 에이번리 학교로 오기로 결정했어요. 솔직히, 여러분과 너무 정이 들어 여러분을 두고 떠날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여기서 계속 지내면서, 여러분을 끝까지 도와주겠어요.”

“와, 만세!”

무디 스퍼전이 소리쳤다.

무디 스퍼전이 전에 그렇게 자기감정을 표현한 적은 한 번도 없어서 무디는 일주일 내내 이 일을 생각하며 혼자 얼굴을 붉혀야 했다.

“오, 저도 너무 기뻐요. 스테이시 선생님, 선생님이 돌아오시지 않는다는 건 생각하기도 싫어요. 정말 끔찍할 거라고요. 다른 선생님이 오신다면 공부를 계속할 마음이 생기지도 않을 거예요.”

앤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날 밤 앤은 집에 돌아와, 모든 책을 다락방의 낡은 트렁크에 차곡차곡 넣었다. 그리고 트렁크의 자물쇠를 채우고는 열쇠를 담요 상자 안에 집어 던져버렸다.

“방학 동안만큼은 학교 교과서는 보지 않을 거예요. 학기 중에 공부는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했고 기하도 열심히 해서 제1권에 나온 명제들은 모두 다 외웠거든요. 문자가 바뀐 것도요. 이제 머리 쓰는 것이라면 뭐든 지긋지긋해요. 이번 여름에는 제 상상력을 마음껏 펼쳐보고 싶어요. 오, 너무 놀라지는 마세요, 마릴라 아주머니. 상상력을 펼치더라도 적당한 한계를 둘 테니까요. 하지만 이번 여름에는 정말 즐겁고 재미있게 보내고 싶어요. 아이로서는 마지막 여름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린드 아주머니가 그러는데 제가 내년에도 올해처럼 키가 크면 더 긴 치마를 입어야 할 거라면서, 제가 다리하고 눈만 크는 것 같대요. 그런데 긴 치마를 입으면 치마에 어울리게 한층 품위 있게 행동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럼 요정이란 걸 생각해서도 안 될 거예요. 그러니까 이번 여름에는 마음껏 요정을 믿어보려고 해요. 전 정말이지 아주 즐거운 방학을 보내고 싶어요. 루비 길리스가 곧 생일 파티를 열 거고, 다음 달에는 주일 학교 소풍도 있고, 선교 발표회도 있어요. 또 배리 아저씨가 언젠가 저녁에 다이애나와 저를 화이트 샌즈 호텔로 데려가 저녁을 사주신다고도 했어요. 화이트 샌즈 호텔에서는 저녁을 정찬으로 먹는대요. 제인 앤드루스가 작년 여름 그곳에 한 번 갔었는데 전등과 꽃들로 눈이 부시고 숙녀들이 아주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대요. 제인은 상류사회 생활을 처음 느껴봤다면서 그걸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거라고 했어요.”
앤이 마릴라에게 말했다.

다음 날 오후 마릴라가 목요일 부인회 모임에 참석하지 않아서 그 이유를 알아보려고 린드 부인이 찾아왔다. 마릴라가 부인회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을 때는‘초록 지붕 집’에 뭔가 나쁜 일이 있다는 걸 모두 다 알았다.

“매슈 오라버니가 목요일에 심장 발작을 일으켰어요. 그래서 오라버니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어요.”

마릴라가 말했다.

“그래요,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그런데 발작이 예전보다 잦아져서 걱정이 돼요. 의사는 오라버니에게 조심하고 흥분하는 걸 피하라고 했어요. 물론 매슈 오라버니야 흥분할 만한 일을 찾아다니지도 않고 그런 일을 하지도 않으니까 흥분하지 않는 건 어렵지 않지만, 너무 힘든 일을 해서도 안 된대요. 하지만 오라버니에게 일을 하지 말라는 건 숨을 쉬지 말라는 것과 같잖아요. 들어와서 옷을 좀 벗으세요,레이철. 차 한잔 하시겠어요?”

“그래요, 마릴라가 그러길 원한다면 그러죠, 뭐.”

차도 마시지 않고 그냥 갈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던 린드 부인이 말했다.레이철과 마릴라가 응접실에 편하게 앉아 있는 동안 앤이 차를 준비하고 뜨거운 비스킷을 만들었다. 비스킷이 너무나 부드럽고 하얗게 잘 만들어져서 린드 부인도 감탄을 했다.

“앤이 정말로 차분하고 현명한 아이로 바뀐 모양이에요. 이제 마릴라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어요.”

마릴라가 석양을 받으며 오솔길 끝까지 배웅해주는 길에레이철이 말했다.

“그래요. 이젠 제법 의젓하고 믿음직해요. 전에는 덤벙대는 버릇을 고치지 못할 거라고 걱정했지만 그 버릇은 완전히 고쳐진 것 같아요. 그래서 아무 걱정 없이 뭐든 안심하고 맡길 수 있어요.”

마릴라가 말했다.

“3년 전에 저 애를 처음 봤을 때는 저렇게 예쁘게 자랄 줄 생각지도 못했어요. 어이구, 세상에나, 발끈해서 화를 내던 모습은 절대 잊지 못할 일이지요. 집에 돌아가서 토머스에게 그랬다니까요. ‘토머스, 내가 장담하지만 마릴라 커스버트가 이제 곧 자기가 한 일을 후회하게 될 거예요.’ 하지만 내가 잘못 본 거예요. 내 생각이 틀려서 정말 다행이에요. 마릴라, 내가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절대로 아니지요. 사실 내가 그런 생각을 한 게 무리도 아니었잖아요. 저 애처럼 별나고 엉뚱한 애는 이 세상에 또 없을 테니까요. 다른 아이들과 같은 기준으로 저 애를 판단한다면 그건 큰일 날 일이지요. 3년 동안 저렇게 변하다니 정말로 믿을 수 없을 정도예요. 특히 외모요. 지금 앤은 정말로 예뻐요. 물론 난 저렇게 피부가 창백하고 눈이 큰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요. 다이애나 배리나 루비 길리스처럼 혈색이 좋은 피부가 더 나아요. 루비 길리스는 정말 보기 좋잖아요. 하지만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앤이 다른 아이들과 있으면 그 아이들보다 예쁘지 않은데도 다른 아이들을 평범해 보이게 만들어버리는 구석이 있어요. 다른 아이들은 너무 꾸며놓은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고나 할까요. 마치 커다란 붉은 작약과 함께 있으면서도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하얀 백합 같이요, 그럼.”

린드 부인이 말했다.

 


43) 무디(D. L. Moody, 1837~1899, 미국)와 스퍼전(C. H. Spurgeon, 1834~1892, 영국)둘 다 유명한 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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