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2권 13~14

나단비 | 2024.03.02 05:48:38 댓글: 0 조회: 66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1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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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소풍





비탈길 과수원으로 향하는 길에 앤은 ‘초록 지붕 집’으로 오고 있던 다이애나를 만났다. ‘유령의 숲’ 아래로 흐르는 개울 위에 놓인 이끼 낀 낡은 나무다리 위에서였다. 둘은 작은 고사리들이, 초록색 고수머리 요정이 막 낮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듯 이파리를 피워내고 있는 ‘드리아드의 샘’ 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번 주 토요일 내 생일 파티 준비를 도와달라고 너한테 부탁하러 가던 길이었어.”
앤이 말했다.
“생일이라고? 네 생일은 3월이잖아!”
“그건 내 탓이 아니야. 만일 우리 부모님이 나와 미리 상의를 해주었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내가 봄에 태어나겠다고 선택했을 테니까. 산사나무 꽃이나 제비꽃과 함께 세상에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기뻤겠니. 그랬더라면 그 꽃들이 언제나 내 자매처럼 느껴졌을 거야. 하지만 난 봄철에 태어나지 못했으니 생일 축하라도 봄에 하려는 거야. 프리실라도 토요일에 오기로 했고, 제인도 주말이니까 집에 올 거야. 우리 넷이서 숲으로 가서 봄을 만끽하며 황금 같은 하루를 만들어보자. 우리는 아직 봄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잖아. 숲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없었던 봄과 만날 수 있을 거야. 난 모든 들판과 인적이 드문 길을 다 탐험해보고 싶어. 지나다니는 사람들 눈에 띈 적은 있지만 눈여겨 잘 살펴보지는 않은 숨겨진 아름다운 장소가 많이 있을 거야. 우리는 바람과 하늘과 태양과 친구가 될 거고 가슴에 봄을 듬뿍 안고 돌아오게 될 거야.”
앤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멋있는 생각이야. 하지만 아직 땅이 질척거리는 곳이 여기저기 있을 텐데?”
앤의 마법 같은 말을 마음속으로는 믿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면서 다이애나가 말했다.
“오, 장화를 신으면 돼.”
다이애나의 현실적인 걱정을 덜어주고 나서 앤이 말을 계속했다.
“토요일 아침 일찍 와서 점심 준비를 도와줘. 가능한 한 최고의 점심을 준비하고 싶으니까. 봄에 어울리는 음식들을 만들겠어. 작은 젤리 파이와레이디핑거9), 그리고 분홍색과 노랑 시럽을 두른 쿠키와 미나리아재비 쿠키 같은 것들 말이야. 샌드위치도 준비해야겠지. 별로 낭만적인 음식은 아니지만.”
토요일은 소풍을 가기에 딱 안성맞춤인 날이었다. 산들바람이 목장과 과수원을 넘어 기분 좋게 불어왔고, 하늘은 푸르렀으며, 날씨는 따뜻하고 화창했다. 햇볕이내리쬐는모든 언덕과 들판은 이제 막 꽃을 피우려는 듯 파란 풀잎들로 가득 덮여 있었다.
쉽사리 감동이 찾아들지 않는 중년의 나이인데도 밭 저 끝에서 밭을 갈고 있던 해리슨 씨에게도 봄의 마법 같은 숨결이 느껴졌다. 네 아가씨가 바구니를 들고 발걸음도 가볍게 자작나무와 전나무가 늘어선 밭 어귀를 지나고 있는 것을 보았고, 이들의 즐거운 재잘거림과 웃음소리가 그의 귀에까지 메아리쳤다.
“오늘 같은 날은 행복해지기도 쉬운 것 같아, 그렇지?”
아주 앤다운 말이었다.
“얘들아, 오늘을 정말로 멋진 날로 만들자. 돌아보면 항상 미소가 떠오르는 그런 날로 말이야. 우리는 아름다움을찾아 나서는거야. 다른 것은 보지 말자고. ‘사라져라, 번거로운 근심이여!’ 제인, 어제 학교에서 있었던 안 좋은 일을 생각하고 있는 거지?”
“어떻게 알았니?”
제인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야 네 표정을 보고 알았지. 나도 자주 그러니까. 하지만 그런 건 머릿속에서 몰아내 버려. 월요일까지 그대로 내버려둬도 어디로 도망가지 않는다고. 그대로 있어주지 않는다면 더욱 고마운 일이고. 어머나, 얘들아, 저것 좀 봐! 제비꽃이 잔뜩 피어 있어! 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추억의 앨범에 간직해두자. 우리가 여든 살이 되었을 때도, 그때까지 살 수 있다면, 눈을 감을 때마다 저 제비꽃이 바로 오늘처럼 생생히 떠오를 거야. 저거야말로 오늘 우리가 받은 첫 번째 선물이야.”
“만일 키스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제비꽃 같은 모습일 거야.”
프리실라가 말했다.
앤의 얼굴이 빛났다.
“프리실라, 네 생각을 속으로만 하지 않고 말해주어 정말 기쁘다. 이렇게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모두 밖으로 표현한다면 이 세상은 훨씬 더 흥미로워질 거야. 물론 지금도 아주 흥미로운 세상이지만.”
“듣기 싫은 소리만 하는 사람도 있어.”
제인이 세상 알 것 다 안다는 투로 말했다.
“그렇기도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 잘못이야. 어쨌거나 오늘 우리들은 우리 생각을 다 말해도 돼. 우리는 아름다운 생각만 할 테니까. 뭔가 머릿속에 떠오는 것이 있으면 다 말하자고. 그것이 대화 아니겠어. 전에는 본 적이 없는 길이다. 한번 가보자.”
그 길은 구불구불하고 너무 좁아서 넷이 한 줄로 늘어서서 가야 했다. 그래도 전나무 가지들이 얼굴을 간질였다. 전나무 아래에는 벨벳 같은 이끼가 푹신하게 깔려 있고 더 나아가자 나무들이 키가 작아지고 수도 적어졌으며 땅에는 여러 가지 초록 식물들이 자라 있었다.
“어머나, 코끼리귀 꽃10)이 잔뜩 피어 있어, 꽃을 꺾어서 커다란 꽃다발을 만들자. 아주 예쁠 거야.”
다이애나가 기뻐 소리를 쳤다.
“이렇게 예쁜 꽃에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이름을 붙였을까?”
프리실라가 물었다.
“처음에 이름을 붙인 사람이 상상력이 아예 없었거나 너무 많았던 탓이겠지. 아, 얘들아, 저것 좀 봐!”
앤이 말했다.
오솔길이 끝나는 곳에 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빈터가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얕은 못이 있었다. 봄이 끝나면 물이 마르고 풀고사리로 덮이게 될 터였지만 지금은 접시처럼 둥근 못이 생겨 수정처럼 맑은 물이 고여 반짝반짝 빛을 냈다. 날씬하고 힘차 보이는 자작나무가 주변을 빙 둘러 서 있고 물가 가장자리에는 풀고사리가 돋아나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울까!”
제인이 감탄의 소리를 냈다.
“숲의 요정처럼 못을 돌며 춤을 추어보자.”
앤이 바구니를 내려놓고 손을 내밀며 외쳤다.
하지만 땅이 너무 질퍽해서 제인의 장화가 벗겨지는 바람에 마음처럼 춤을 추어볼 수는 없었다.
“장화를 신고는 숲 속의 요정이 될 수 없어.”
제인이 말했다.
앤도 제인의 말에 반대 못 하고 단념해야 했지만 곧 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자, 그럼 여기를 떠나기 전에 못에 이름을 지어주자. 우리가 각자 이름을 하나씩 말하고 제비뽑기로 결정하자. 다이애나, 너부터 말해볼래?”
“자작나무 연못.”
다이애나가 재빨리 대답을 했다.
“수정 호수.”
제인도 말했다.
두 사람 뒤에 서 있던 앤은 프리실라에게 그런 흔하디흔한 이름은 제발 더 이상 내놓지 말라고 사정하는 눈길을 보냈다. 프리실라는 알았다는 듯이 ‘반짝이는 거울’이라는 이름을 말했고 앤은 ‘요정의 거울’이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학교 선생님답게 앤이 주머니에서 연필을 꺼내 그 이름을 모두 자작나무 껍질에 적어 모자에 담았다. 그런 다음 프리실라가 눈을 감고 하나를 뽑았다. ‘수정 호수.’ 제인이 의기양양하게 뽑힌 이름을 외쳤다. 그래서 이 못의 이름은 수정 호수로 결정되었다. 앤은 흔해빠진 이름으로 불리게 된 못이 가엾게 여겨졌지만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네 사람은못 너머덤불을 헤치고 나아가 사일러스 슬론 씨네 뒤쪽의 목장으로 나왔다. 목장을 가로질러 가자 숲으로 곧장 이어지는 오솔길이 나와서 그 길도 가보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 길에도 놀랍도록 아름다운 풍경이 계속 이어져 탐험에 나선 보람이 있었다. 우선은 슬론 씨네 목장 언저리를 지나다 아치를 이루고 서 있는 산벚나무들을 만났다. 벚꽃이 만발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모두들 모자를 벗고 크림처럼 부드럽고 보송보송한 꽃으로 화환을 만들어 머리에 썼다. 이 오솔길은 또한 울창하고 어둠침침한 가문비나무 숲으로 곧장 이어지고 있었다. 하늘 한 조각도 보이지 않고 햇빛 한 줄기 비쳐들지 않아 마치 저녁 어스름 속을 걸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는 나쁜 숲의 요정들이 사는 곳이야. 이 요정들은 장난꾸러기에 심술이 사납기는 하지만 우리한테 해를 끼치지는 않지. 봄철에는 나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거든. 요정 하나가 몸을 비틀고 서 있는 저 고목나무 뒤에 숨어서 우리를 훔쳐보고 있어. 우리가 지금 막 지나온 길가에 돋아나 있는 큰 점박이 독버섯 위에올라앉아있는 작은 요정들을 못 봤니? 좋은 요정들은 언제나 햇볕이 잘 비쳐드는 곳에 살지.”

앤이 가만히 속삭였다.
“정말로 요정이란 게 있었으면 좋겠어. 요정이 우리한테 세 가지 소원을 이뤄준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단 한 가지만이라도……. 얘들아, 너희들 소원은 뭐야?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면 뭘 원할 거야? 난 부자가 되고 싶고, 아름다워지고 싶고, 머리도 좋아졌으면 좋겠어.”
“난 키가 커지고 날씬해지고 싶어.”
다이애나가 말했다.
“난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
프리실라가 말했다. 앤은 머리 생각이 났지만 그 생각은 별로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여기고 말했다.
“난 항상 봄이었으면 해. 모든 사람의 가슴과 우리 삶이 모두 봄 같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 소원은 이 세상이 천국과 같았으면 좋겠다는 소원과 같은 말이야.”
프리실라가 말했다.
“천국의 일부와 비슷할 뿐이지. 천국에는 여름과 가을도 있을 테니까. 물론 겨울도 조금은 있겠지. 나는 가끔 천국에도 반짝이는 눈벌판과 하얀 서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넌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제인?”
“난, 난 잘 모르겠어.”
제인이 대답했다. 선량한 아가씨인 제인은 기독교인으로서 양심의 부끄럼 없이 살려고 노력하며 자기가 배운 대로 모든 것을 믿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천국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 미니 메이가 천국에서는 언제나 최고로 좋은 옷만 입고 있어도 되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어.”
다이애나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그래도 된다고 대답해주었니?”
앤이 물었다.
“세상에나, 아니지! 천국에서는 옷 생각 같은 건 전혀 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
“어머나, 조금은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앤이 솔직하게 말했다.
“영원히 산다면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아도 그런 생각을 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천국에서는 모두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살 거라고 믿어. 옷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의상이라는 말이 더 낫겠다. 난 2~3세기 동안은 분홍색 의상만 입을 거야. 분홍색에 싫증이 나려면 그 정도 세월은 걸려야 할 것 같거든. 틀림없어. 난 분홍색을 너무나 좋아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절대로 분홍색 옷을 입을 수가 없으니까.”
가문비나무 숲을 지나자 오솔길은 통나무 다리가 놓여 있고 개울이 흐르는 양지바른 작은 빈터로 이어졌다. 다리를 건너자 햇빛이 찬란하게 빛나는 자작나무 숲이었다. 공기는 황금빛 햇살이내리비친포도주만큼이나 맑았고 나뭇잎도 싱싱한 초록빛이었으며 하늘하늘 춤을 추는 햇빛이 땅 위에 갖가지 무늬를 만들었다. 그곳을 지나자 더 많은 산벚나무와 늘씬한 전나무가 늘어서 있는 야트막한 계곡이 나왔으며 그다음으로는 매우 가파른 언덕이 이어져 모두들 숨이 턱에 닿은 채 언덕을 올라야 했다. 드디어 탁 트인 꼭대기에 다다르자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경치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저 멀리 위쪽 카모디 길까지 여기저기 농가의 뒷밭이 보였다. 그 앞으로는 자작나무며 전나무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 한 면만이 트인 좁은모퉁이가 보였는데 그 안에 정원이 있었다. 아니, 예전에는 정원이었던 곳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너진 돌담이 남아 있고 이끼와 잡초들이 우거져 있었으니까. 동쪽 편으로는 눈이 수북이 쌓인 듯 새하얀 꽃이 피어 있는 벚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예전에 오솔길이 나 있었던 흔적이 아직 남아 있고 정원 한가운데에는장미 덩굴이 두 줄로 심어져 있었다. 그 나머지 공간에는 온통 노란색과 하얀색 수선화가 푸른 풀 위로 고개를 내밀고 고고하게 바람에 흔들거렸다.
“어머나,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울까!”
세 아가씨들이 외쳤으나 앤은 너무나 감격해 말을 잃어버린 듯 바라볼 뿐이었다.
“어떻게 이런 숲 속에 정원이 있지?”
프리실라가 실로 놀라운 일이라는 듯 말했다.
“헤스터 그레이 씨의 정원일 거야. 내가 직접 와본 적은 없지만 어머니가 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어. 설마 이렇게 남아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앤, 너도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 않니?”
다이애나가 말했다.
“아니, 하지만 그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아.”
“아마 묘지에서 봤을 거야. 미루나무 아래구석진 곳에 헤스터 그레이 씨의 무덤이 있으니까.열린문이 조각된 작은 갈색 비석 말이야. ‘헤스터 그레이를 기억하며, 나이 22세’라고 비명이 적혀 있어. 조던 그레이 씨는 헤스터 그레이 씨 바로 옆에 묻혔는데 비석은 없어. 마릴라아줌마가 이야기해주지 않았다니 이상하구나, 앤. 하지만 30년이나 지난 일이니 아마 모두들 잊고 있겠지.”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 이야기가 있다면 우리한테 이야기를 해줘. 여기 수선화 사이에 앉아서 다이애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수선화가 여기저기 많이도 피어 있구나. 이 정원은 달빛과 햇빛이 조화를 이루어 깔려 있는 것 같아. 이건 굉장한 발견이야. 여기서 1.5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6년이나 살면서도 여기를 와보지 못했다니 믿을 수가 없어, 다이애나.”
“오래전에.”
다이애나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농장은 데이비드 그레이 노인네 거였어. 하지만 그 노인이 여기에 살지는 않았고 지금 사일러스 슬론 씨가 살고 있는 곳에 살았지. 조던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해 겨울 보스턴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어. 거기서 헤스터 머레이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고 해. 헤스터는 어떤 가게에서 일했는데 그 일이 몹시 싫었대. 시골에서 자라서 다시 시골에 가서 살게 되기를 원했다나 봐. 조던이 헤스터에게 청혼했을 때 자기를 들판과 나무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 준다면 허락하겠다고 대답했대. 그래서 조던은 헤스터를 에이번리로 데려왔다고 해. 그 일을 두고 린드 부인은 조던이 미국 여자와 결혼을 하다니 참으로 위험한 짓을 했다고 걱정했대. 그 말마따나 헤스터는 몸이 아주 약한 데다 집안일도 할 줄 몰랐다고 해.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헤스터가 예쁘고 상냥해서 조던은 헤스터가 걸은 길이라면 길에다라도 절을 할 정도로 헤스터를 사랑했다고 했어. 그레이 씨가 조던에게 이 농장을 물려주자 조던은 여기에 작은 집을 지어 헤스터와 4년 동안 살았대. 헤스터는 외출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 우리 어머니와 린드 부인 외에는 헤스터를 보러 오는 사람도 없었다고 해. 조던은 헤스터를 위해 정원을 만들어주었대. 물론 헤스터는 몹시 좋아했고 항상 정원에 나와 살다시피 했대. 집안 살림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꽃은 아주 잘 가꾸었나 봐. 그런데 헤스터가 병에 걸리게 되었다는 거야. 우리 어머니 말로는 여기 오기 전부터도 폐병에 걸려 있었다고 해. 완전히 누워 지내지는 않았지만 날이 갈수록 몸은 야위어만 갔대. 조던은 다른 사람에게 병간호를 맡기지 않고 자기 혼자서 마치 여자처럼 자상하고 정성스럽게 헤스터를 돌보았대. 매일매일 헤스터를 숄에 감싸 정원으로 데리고 나와 벤치에 편안하게 누워 있게 해주었다더구나. 사람들 말로는 헤스터가 조던도 같이 자기 옆에 무릎을 꿇게 하고 매일 밤과 아침마다 최후의 시간이 왔을 때 정원에서 죽음을 맡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렸대. 그리고 그 기도는 이루어졌지. 어느 날 조던이 헤스터를 벤치로 데리고 나와 정원에 피어난 장미를 꺾어 몸을 덮어주었대. 헤스터는 조던 곁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가 스르르 눈을 감았지. 그것으로 끝이었대.”
다이애나가 이야기를 끝맺었다.
“아, 정말로 아름다운 이야기로구나.”
앤이 한숨을 내쉬며 눈물을 훔쳤다.
“조던은 어떻게 되었는데?”
프리실라가 물었다.
“보스턴으로 돌아갔대. 자베스 슬론 씨가 그 농장을 사서 작은 집을 길 쪽으로 옮겨버렸고. 그 후 10년쯤 후에 조던도 죽어서 고향으로 돌아와 헤스터 곁에 묻혔대.”
“난 왜 헤스터가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 이런 곳에 살고 싶어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제인이 말했다.
“난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 나는 들이나 숲을 아주 좋아하지만 사람도 좋아해서 언제까지나 이런 곳에서 지내라면 힘들겠지만 헤스터의 기분은 알 수 있어. 큰 도시의 소음이 끔찍이도 싫었을 거야. 끊임없이 오가는 수많은 사람 중에 자기를 생각해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을 거고. 그런 곳을 피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다정하고 푸르른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을 거라고.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룬 거야. 그렇게 자기 소원을 이룬 사람도 아주 드물 거라고 생각해. 죽기 전 4년 동안 아름다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 완벽하게 행복했던 4년 말이야. 그래서 난 헤스터를 불쌍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부러워해야 할 여인이라고 생각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미소를 띠고 지켜보는 가운데 장미꽃에 묻혀 눈을 감았잖아. 아,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야!”
앤이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저 벚나무를 심은 것도 헤스터래. 언젠가 우리 어머니에게 자기는 저 열매를 따먹을 수 있을 때까지 살 수 없겠지만 자기가 심은 나무들은 자기가 죽은 뒤에도 세상을 아름답게 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더구나.”
다이애나가 말했다.
“우리가 이 길로 오기를 너무 잘했지. 오늘이 내 빌려온 생일날이긴 하지만 이 정원과 이 이야기는 내 생일 선물이야. 너희 어머니가 혹시 헤스터 그레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얘기해주지 않았니, 다이애나?”
앤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아니, 그저 아름다운 여자였다고만 했어.”
“그게 더 좋겠다. 그럼 내가 사실에 방해받지 않고 헤스터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잖아. 내 생각에 헤스터는 아주 가냘픈 몸에 키가 작은 여인이었을 것 같아. 검은 머리는 부드럽게곱슬거리고 아름답고 큰 눈은 겁을 먹은 듯 보이면서 작은 얼굴에 창백하고 슬픈 표정을 담고 있을 거야.”
넷은 이어 헤스터의 정원에 바구니를 두고 오후 내내 숲 속과 들판을 거닐며 여러 예쁜 외진 곳과 오솔길들을 찾아냈다. 배가 고파지자 그중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시냇물이 졸졸 흘러가는 개울 옆에 하얀 자작나무들이 서 있고 그 아래로는 기다란 깃털 같은 풀들이 무성한 곳이었다. 넷은 나무 밑에 앉아 앤이정성 들여준비한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신선한 공기와 운동으로 식욕이 왕성해져서 낭만적이지 못한 샌드위치까지도 대환영을 받았다. 앤은 초대한 손님을 위해 컵과 레모네이드를 준비해왔지만 자신은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컵에 차가운 개울물을 떠 마셨다. 잔은 물이 새고 봄철이면 개울물이 으레 그렇듯 물에서 흙냄새가 났지만 앤은 이런 날에는 레모네이드보다 개울물이 훨씬 더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저기 저 시가 보이니?”
앤이 갑자기 손짓을 하며 말했다.
“어디?”
제인과 다이애나가 자작나무에 고대문자로 된 시라도쓰여있나 쳐다보았다.
“저기, 저 시냇물 아래, 오래된 초록색 이끼가 돋은 통나무 위로 부드럽게 물결을 일으키며 마치 빗으로 빗어놓은 듯 졸졸 물이 흐르고 있잖니. 한 줄기 햇빛이 그 위로 떨어져 시냇물 바닥까지 비스듬히 비쳐들고. 아, 저토록 아름다운 시는 본 적이 없어.”
“나 같으면 시라기보다는 그림이라고 하겠어. 시는 행과 연으로 되어 있어야 하잖아.”

제인이 말했다.
“오, 나한테는 아니야. 행과 연은 시의 외적인 장식에 불과해. 네가 입은 옷의 주름이나 장식이 진정한 네가 아닌 것처럼 말이야. 제인, 진짜 시는 그 안에 담긴 영혼이야……. 그리고 저 아름다운 한 편의 시는 글로 쓰이지 않은 영혼의 시지. 영혼은 쉽게 볼 수 없어. 시의 영혼이라 하더라도 말이야.”
앤이 화려한 산벚나무 꽃 화환을 쓴 머리를 양쪽으로 세차게 흔들며 말했다.
“영혼이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 인간의 영혼은 어떻게 생겼을까…….”
프리실라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저런 것일 거라고 나는 생각해.”
앤이 한 그루의 자작나무 위로 쏟아져 내리는 햇빛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물론 형태와 모양이 저럴 거라는 거지. 나는 영혼이 빛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어떤 영혼은 장밋빛으로 떨리듯 파고들지. 그리고 어떤 영혼은 바다를 비춰주는 달빛처럼 부드럽게 빛이 나고, 새벽녘 안개처럼 창백하고 투명한 영혼도 있어.”
“나는 영혼이 꽃과 같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어.”
프리실라가 말했다.
“그럼 네 영혼은 노란 수선화야. 그리고 다이애나의 영혼은 붉디붉은 장미. 제인의 영혼은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분홍색 사과꽃이지.”

앤이 말했다.
“그럼 앤, 네 영혼은 한가운데 보라색 줄무늬가 있는 흰 제비꽃이야.”
프리실라가 앤이 하던 말을 끝맺었다.
제인이 다이애나에게 저 애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속삭였다.
이들은 고요한 황금빛 저녁놀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안고 있는 바구니에는 헤스터의 정원에서 꺾어온 수선화가 가득 담겨 있었다. 다음 날 앤은 그 수선화를 공동묘지에 있는 헤스터의 무덤가에 놓아주었다. 음유시인 울새가 전나무에서 지저귀고 늪에서는 개구리가 노래를 불렀다. 언덕으로 둘러싸인 골짜기마다 연노란 옥빛과 에메랄드 초록빛으로 넘실거렸다.
“오늘 우린 너무 멋진 하루를 보냈어.”
다이애나가 소풍을 떠날 때는 별로 기대하지 못했다는 듯 말했다.
“정말이지 황금 같은 하루였어.”
프리실라도 뿌듯한 마음으로 말했다.
“나도 숲이 정말로 좋았어.”
제인이 말했다.
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저 먼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헤스터 그레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9)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간 손가락 모양의 갸름하고 부드러운 쿠키.
10) 잎이 코끼리 모양으로 생긴 식물. 일명 베고니아.​




14

위험을 모면하다





어느 금요일 저녁 무렵, 우체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앤은 린드 부인을 만났다. 언제나 그렇듯이 린드 부인은 교회와 나라의 걱정거리를 모두 짊어지고 끙끙 앓았다.
“내가 지금티머시코튼네를 다녀오는 길이야. 앨리스 루이스를 며칠 동안 우리 집에 보내줄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지난주에도 우리 집에 와서 일을 도와주었거든. 그 애가 좀 느리기는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하지만 아파서 올 수가 없다더구나.티머시는 앉아서 기침을 해대며 죽겠다고 불평이나 하고 있고. 10년 동안이나 죽는다는 소리를 해왔지만 앞으로도 10년은 더 그 소리만 하게 될 거다. 그런 사람들은 어지간해서는 죽지도 못하는 법이지. 무슨 일이든 제대로 하는 일이 없으니까. 무슨 일이든 끝까지 해내질 못해. 죽는 것까지도 말이다. 그 집 사람들은 끝장이 날 때까지 질기게 아프지도 못하니 정말로 한심하게 게을러빠졌다니까. 도대체 그 집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야. 하느님이나 알는지 원.”
린드 부인은 하느님조차도 그 문제를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듯 한숨을 지었다.

“마릴라가 지난 화요일에 눈을 다시 검사받았다면서? 안과 의사가 뭐라고 하더냐?”
“의사 선생님은 눈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시면서 무척흡족해하셨어요. 완전히 시력을 잃게 될 우려는 없다고 생각하신대요. 하지만 책을 많이 읽거나 눈을 혹사시키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어요. 바자회 준비는 어떻게 돼가고 있나요?”
교회 부인회에서 바자회와 저녁 준비를 맡았고 린드 부인에게 이 행사의 총책임이 맡겨졌다.
“그건 잘되고 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생각나는데, 앨런 부인이 옛날 부엌 식으로간이식당을 만들고 저녁 식사로 구운 콩과 도넛, 파이를 내놓으면 어떻겠느냐고 하신다. 그래 여기저기서 옛날 부엌 용기들을 구하느라 바쁘단다. 심슨 플레처 부인은 자기 어머니가 쓰던 깔개를 빌려주기로 했고, 레비 볼터 부인은 오래된 의자 몇 개를, 그리고 메리 쇼 부인이 유리창이 달린 찬장을 빌려주기로 했다. 마릴라도 그 놋쇠 촛대를빌려주겠지? 그리고 옛날 접시들도 있는 대로빌려주었으면 해. 앨런 부인은 가능하다면 버드나무 문양이 있는 진짜 청화자기 접시를 하나 꼭 쓰고 싶다고 하지만 누가 그걸 갖고 있을까? 앤, 너 혹시 모르니?”
“조제핀배리 할머니가 갖고 있어요. 제가 편지를 써서 혹시빌려주실 수 있는지 알아볼게요.”
앤이 말했다.
“그렇게 해주면 좋겠구나. 바자회 만찬은 2주일 정도 후에 열 예정이야. 에이브 앤드루스 씨가 바로 그때쯤 폭풍우가 몰아칠 거라고 예언했으니까 틀림없이 날씨는 좋을 거라고.”

린드 부인이 말한 이 ‘에이브 씨’는 다른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고장에서는 명성을 별로 얻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상 그의 일기 예보는 맞은 적이 없어서 오히려 모두의 비웃음만 샀다. 이 동네 최고의 재주꾼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엘리샤 라이트 씨는 에이번리 사람은 아무도 날씨를 알아보려고 <샬럿타운> 신문을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에이브 씨에게 내일 날씨가 어떨 것 같으냐고 물어서 반대로 생각하면 되니까 신문을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에이브 씨는 이런 온갖 비웃음에도 굴하지 않고 예언을 계속했다.
“선거가 끝나기 전에 바자회를 열 생각이야. 후보자들이 와서 돈을 많이 쓸 게 확실하니까. 토리당이 여기저기 돈을 뿌리고 다닐 텐데한 번이라도돈을 제대로 쓸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니?”
린드 부인이 말을 계속했다.
앤은 매슈의 영향으로 열렬한 공화당원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마디라도 했다가는 린드 부인의 정치에 대한 식견을 한나절은 들어야 할 판이었다. 앤의 손에는 마릴라 앞으로 온 편지가 들려 있었다. 브리티시컬럼비아소인이 찍힌 편지였다.
“아이들 삼촌이 보낸 편지일 거예요. 오, 마릴라 아주머니, 삼촌이 뭐라고 썼는지 너무 궁금해요.”
집에 도착하자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그럼 봉투를 뜯어서 보면 되겠구나.”
마릴라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마릴라 역시 편지 내용이 몹시 궁금했지만 그 감정을 내보이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터였다.
앤이 봉투를 뜯어 편지를 꺼내 좀 거칠고 단정치 못하게 쓴 편지를 죽 훑어 읽어나갔다.
“올봄에는 아이들을 데려갈 수 없다고 했군요. 겨울철 내내 아팠고 결혼식도 연기했대요. 우리가 아이들을 가을철까지 데리고 있을 수 있는지 알았으면 좋겠고, 아이들은 그 이후로나 데려가도록 애써보겠다고 하네요. 물론 우리가 아이들을 데리고 있어도 되죠?”
“별도리가 없지 않겠니? 데이비도 이제 예전처럼 말썽만 피우고 다니지도 않고, 또 우리도 아이들한테 많이 적응이 되었으니까. 데이비는 정말 많이 좋아졌지.”
마릴라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긴 했으나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요, 데이비의 태도는 정말로 좋아졌어요.”
앤이 데이비의 도덕성에는 뭐라 말하기가 뭣한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제저녁앤이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마릴라는 부인회 모임에 나가고 없었다. 도라는 부엌 소파에서 잠들었고 데이비는 거실 찬장에 보관 중이던 마릴라의 유명한 노란색 자두 절임 단지에 폭 빠져 있었다. 데이비는 그 자두 절임을 ‘손님용 잼’이라 불렀고, 만져서는 안 된다는 마릴라의 엄중한 주의를 들은 터였다. 앤이 데이비에게 달려들어 찬장에서 끌어냈을 때 데이비는 자기 죄를 자각하고 있는 듯 보였다.
“데이비 키스, 너 그 잼을 먹으면 안 되는 것 모르니? 그 찬장 안에 든 것은 아무것도만지지말라고 했잖아.”
“알아, 나도 잘못인 거는 안다고. 하지만 자두 잼은 정말 맛있어, 누나. 난 그냥 들여다보려고만 했는데 너무 맛있어 보여서 아주 조금만 맛을 보려고 손가락으로 찍어서 깨끗하게 핥아먹었어. 그런데 이 잼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맛있었어. 그래서 숟가락을 가져와 막퍼먹었지.”
앤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나왔다.
자두 잼을 훔쳐 먹는 건 잘못이라고 앤이 엄하게 타이르자 데이비도 양심의 가책을 느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앤에게 입을 맞추었다.
“천국에는 잼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괜찮아.”
데이비가 그렇게 말하며 자기를 위안했다.
“아마 있을지도 모르지, 우리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런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니?”
앤이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말했다.
“교리 문답 책에 나와 있어.”
데이비가 말했다.
“어머, 아니야. 교리 문답 책에 그런 건 나와 있지 않아, 데이비.”
“나와 있어. 지난 일요일에 마릴라 아주머니가 나한테 가르쳐준 교리 문답에 있었단 말이야. ‘왜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지?’ 하는 문제의 답이 ‘하느님이 프리저브11)를 만들어서 우리를 구원해주신다.’였다고. 프리저브란 잼을 경건하게 말한 거잖아.”
“잠깐만, 물 좀 한 잔 마시고.”
앤이 급히 말했다. 다시 돌아와서 데이비에게 그 교리 문답의 답에 쉼표가 들어 있어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설명했지만 그런 사실을 이해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어쩐지 너무 좋더라니. 그리고 하느님이 어떻게 잼 만들 시간을 낼 수 있을까도 싶었어. 찬송가 가사에도 천국에는 안식일만 있다고 했는데 말이야. 천국에 가고 싶은 생각도 싹 없어져 버렸네. 천국엔 토요일도 없겠지, 누나?”
데이비가 실망이 너무 큰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아니야, 토요일도 있고 다른 더 좋은 날들도 많아. 그리고 천국에서는 모든 날이 어제보다 더 좋은 날이지, 데이비.”
앤은 데이비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마릴라가 지금 집에 없어 다행이라고 가슴을쓸어내렸다. 옆에 있었다면 충격이 컸을 것이다. 마릴라는 물론 쌍둥이에게 옛날 방식으로 종교 교육을 시키면서 멋대로 추측하고 상상하는 일은 안 된다고 가르쳤다. 데이비와 도라는일요일마다찬송가, 교리 문답, 성경 두 구절씩을 배웠다. 도라는 가르쳐주는 대로 배우면서 이해했고, 흥미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기계처럼 배운 것을 외웠다. 반대로 데이비는 호기심이 아주 많아 질문도 무척 많았다. 데이비가 하는 질문이 어찌나 어이가 없는지 마릴라는 데이비의 장래가 걱정이라며 몸서리를 쳤다.
“체스터 슬론은 천국에 가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얀 드레스를 입고 산책을 하거나 하프 연주를 하면서 살게 된다고 했어. 그래서 늙기 전에는 천국에 가고 싶지 않대. 천국은 늙은 사람들한테나 좋은 곳일 것 같다고 하면서. 그런 드레스를 입어야 하는 것도 싫다고 했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왜 남자 천사들이 바지를 입으면 안 되는 거지, 누나? 체스터 슬론은 그런 문제에 관심이 많아. 왜냐하면 식구들이 체스터를 목사로 만들려고 하니까. 목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대. 체스터네 할머니가 대학 갈 돈을 남겨주기는 했지만 목사가 되기 전까지 그 돈을 써서는 안 된다고 했대. 체스터네 할머니는 가족 중에 목사가 나오면 아주 영광일 거라고 생각한대. 근데 체스터는 목사에 별로 관심이 없어. 목사보다는 대장장이가 되고 싶대. 어차피 목사가 되어야 한다면 목사가 되기 전에 재미있는 일을 모두 다 해봐야겠대. 목사가 되고 나면 할 수가 없잖아. 나도 목사는 되고 싶지 않아. 난 블레어 아저씨처럼 가게 주인이 되고 싶어. 그러면 사탕이랑 바나나를 산처럼 쌓아두고 먹을 수가 있잖아. 하지만 누나가 말하는 천국이라면 가고 싶기도 해. 하프 대신에 하모니카를 불게만 해준다면. 그렇게 해줄까?”
“그래, 그렇게 해줄 거야. 네가 원한다면.”
달리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앤이 말했다.
그날 저녁에는 개선회 모임이 하몬 앤드루스 씨 집에서 열렸는데 의논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어 모든 회원이 참석해야 한다고 했다. 개선회 활동은 활발히 진행 중이며 이미 몇 가지 놀라운 성과도 냈다. 지난봄 일찍이 메이저 스펜서 씨는 자기가 약속한 대로 그의 농장 앞쪽 길에 있는 나무 그루터기를 모두 없애고 길을 고른 다음 잔디를 심었다. 스펜서 씨에 뒤질세라 열 명도 넘는 다른 사람들도 이런 마을 개선 사업에 앞장섰다. 가족 중에 개선회원이 있어 그 성화에 못 이겨 나선 사람도 있긴 했지만. 그 결과 꼴사납게 잡초만 무성하고 덤불로 뒤덮였던 곳이 기다란 벨벳 띠처럼 보이는 부드러운 잔디밭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정리를 하지 않은 농장 앞길은 더욱 흉해 보여 주인들이 내심 수치심을 느끼고 다음 봄에는 꼭 자기 농장앞길도 정리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세 갈래 길이 만나는 삼거리에도 땅을 골라 잔디 씨를 뿌렸고 가운데에 앤이 가꾼 제라늄 꽃밭이 소한테 짓밟히는 일 없이 꽃을 피웠다.
일이 이렇게 잘 돌아가고 있으니 개선회원들이 만족스럽게 여길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레비 볼터 씨만은 고집스럽게 협조를 거부했다. 급기야는 볼터 씨네 밭가운데에 있는 흉가를 철거하려고 개선회원들이 특별위원을 내세워 신중하게 교섭을 시도했다. 하지만 볼터 씨는 그 집에 일체 간섭하지 말아달라고 딱 잘라 거절했다.
이날 특별 모임에서는 학교 운동장에 담을 쳐달라는 간곡한 청원서를 학교 위원회에 제출할 일을 의논하고, 개선회 기금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교회 주변에 나무를 심을 계획도 의논했다. 앤이 말한 것처럼 공회당이 아직 파란색으로 남아 있는 동안은 새로운 모금 기금이 쉽지 않을 것이다. 개선회원들은 앤드루스 집의응접실에 모였고 제인은 이미 교회에 심을 나무가 몇 그루나 필요한지, 비용은 얼마나 들 것인지를 조사해 보고할 위원을 임명하기 위한 절차를 밟았다. 이때 머리를 올리고 잔뜩 치장을 한 거티 파이가 들어섰다. 거티는 언제나 모임에 늦게 나타났다.
“늦게 나타나야 모두의 눈길을 받지.”
말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거티의 지각을 꼬집었다. 사실 그 순간 거티의 등장은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했다. 배우 같은 모습으로 응접실 한가운데에 딱 멈추어 서서는 손을 들어 올리고 모두를 한 바퀴 휘 둘러 보면서 “방금 굉장한 소식을 들었어, 뭔지 아니? 저드슨 파커 씨가 큰길을 따라 세운 농장의 담을 모조리 제약회사 광고용으로빌려주기로 했대.” 하고 외친 것이다.
거티 파이는 생전 처음으로 소원이었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오순도순 앉아 있는 개선회 회원들 사이로 폭탄을 던졌다 한들 이보다 더한 소동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럴 리가 없어.”
앤이 딱 잘라 말했다.

“나도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그렇게 말했어.”
거티가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이 순간을 즐기며 말했다.
“나도 그럴 리가 없다고 말했지. 저드슨 파커 씨가 설마 그런 마음을 가질 리가 없다고 말이야. 하지만 우리 아버지가 오늘 오후 그 아저씨를 만나 물어봤는데 모두 사실이라고 말했대. 생각 좀 해봐! 파커 씨네 농장은 뉴브리지 길가에 있는데 거기에 온갖 약이며 반창고 광고를 덕지덕지 붙인다면 얼마나 보기 흉하겠어, 안 그래?”
물론 개선회원 모두 다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상상력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런 광고로 도배된 담장이 1킬로미터나 되게 늘어선다면 그 꼴이 어떨지 눈앞에 그림이 그려졌다. 교회니 학교 담장이니 하는 생각은 이 새로운 위험 앞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 회의의의사 진행규칙이고 규정이고는 모두 잊어버린 채 모두들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했으며 앤은 회의 내용을 기록하는 것조차 포기해버렸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일제히 떠들어대면서 한동안 소동이 일었다.
“아, 다들 조용히 해봐.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일을 막을 수 있을지 생각 좀 해보자.”
이 일로 누구보다도 더 큰 충격을 받았지만 앤이 나서서 정리를 시작했다.
“우리가 어떻게 파커 씨의 마음을 돌릴 수 있겠니. 모두들 저드슨 파커 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 돈이라면 어떤 일도마다치않을 사람이라고. 공공심이나 심미안 같은 것도 전혀 없고.”
제인이 절망적으로 외쳤다.

해결 방법이 없어 보였다. 저드슨 파커 씨와 그의 누나 외에 에이번리에는 다른 파커 집안사람도 살지 않아 친척 관계를 이용해 손을 써볼 수도 없었다. 마르타 파커 씨는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일을 영 탐탁해 하지 않았고, 특히 개선회 일이라면 사사건건걸고넘어졌다. 저드슨 씨는 성격 좋고 말도 잘하는 사람으로 누구한테나 친절하고 붙임성도 좋은데어찌 된일인지 친구는 거의 없었다. 어쩌면 사업 수단이 너무 좋아서인지도 몰랐다. 원래 그런 류의 사람이 사랑받는 일은 드문 법이다. 그래서 그는 빈틈없고 기회주의자라는 평판도 듣고 있다.
“저드슨 파커 씨는 자기 말마따나 1페니라도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라면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야.”
프레드 라이트도 못을 박았다.
“그 아저씨를 설득할 만한 사람이 없을까?”
앤이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물었다.
“파커 씨가 화이트 샌즈의 루이자 스펜서 씨를 만나는데 그분이라면 파커 씨가 담을 빌려주지 않도록 설득할 수 있을지 몰라.”
“아마 안 될걸. 내가 루이자 스펜서 씨를 잘 아는데, 마을 개선회라는 걸 전혀 신임하지 않는 사람이야. 그 사람이 믿는 거라면 오직 돈뿐이지. 저드슨 씨를 설득하기보다는 오히려 부추길걸.”
길버트가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우리가 해볼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파커 씨한테 가서 항의할 위원을 뽑는 거야. 그리고 여자를 보내야 해. 남자를 보내면 정중하게 대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가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나를 추천할 생각은 말아줘.”
줄리아 벨의 말이었다.
“앤을 혼자 보내는 게 좋겠어.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앤뿐이야.”
올리버 슬론이 말했다.
앤이 항의했다. 앤도 가서 이야기해볼 의향은 있지만 혼자가 아니라 자기의 사기를북돋워줄누군가와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다이애나와 제인이 앤을 도와주려고 같이 가기로 했고 개선회의 모임은 끝이 났다. 모두들 분개해 벌 떼처럼 윙윙거리며 흩어져갔다. 그날 밤 앤은 걱정으로 거의 잠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는데 학교 이사들이 학교 담장을 ‘보라색 알약을 먹어보세요!’ 하는 광고용으로 빌려주자고 하는 꿈을 꾸었다.
다음 날 오후 위원들이 저드슨 파커 씨를 찾아갔다. 앤은 마을을 위해 좋지 못한 생각을 거두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제인과 다이애나도 사력을 다해 앤을 정신적으로 뒷받침해주었다. 저드슨 씨는 말주변 좋은 사람답게 부드럽고 듣기 좋은 소리로 이들에게 해바라기처럼 곱다고 몇 마디 칭찬의 말을 먼저 늘어놓은 다음 이렇게 아름다운 젊은 숙녀들의 청을 거절해야 하니 자기로서는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모르겠지만 사업은 사업이니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그런 감상적인 일로 자기 입장을 물리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내가 이것만은 약속하지.”
그가 크게 뜬 눈을 빛내며 덧붙였다.
“회사 측에 붉은색이나노란색같은 예쁘고 세련된 색깔을 써서 광고해야 한다고 말하겠어. 어떤 경우에도파란색을 써서는 안 된다고 내가 말을 하지.”

위원들은 할 말을 잃고물러 나오기는 했지만 속에서는 차마 말로 옮길 수 없는 생각들이 들끓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다했으니,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지.”
제인이 저도 모르게 린드 부인의 말투와 몸짓을 흉내 내며 말했다.
“앨런 목사님이라면 파커 씨를 설득할 수 있을지 몰라.”
다이애나가 말했다.
앤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목사님을 걱정만 시킬 뿐 소용없는 일이야. 더군다나 지금 목사님 아기가 그렇게 아픈데 괜히 폐만 끼치는 일이라고. 저드슨 씨는 우리한테 그랬던 것처럼 목사님한테도 살살 말로 구슬리면서 빠져나갈 거라고. 지금은 교회에도 잘 나오고 있지만 그것도 루이자 스펜서의 아버지가 교회 장로로 있고 교회 일이라면 까다롭게 구니까 그런 것뿐이야.”
“에이번리에서 담장을 광고용으로 빌려줄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저드슨 파커 씨뿐이야. 아무리 돈만 밝힌다고 하더라도 레비 볼터 씨나 로렌조 화이트 씨도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야. 그 사람들은 최소한 마을 사람들 모두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아니까.”
제인이 분한 듯 말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모두들 저드슨 파커 씨를 비난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태 해결에 무슨 도움이 된 것은 아니었다. 저드슨 씨는 혼자 빙글거리며 다른 사람의 생각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이제는 개선회원들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고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뉴브리지 길의 가장 아름다운 곳이 광고로 흉하게 도배되는 날을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다음 개선회 모임에서 회장에게서 지난번 일의 결과 보고를 하라고 지명을 받은 앤이 조용히 일어나 저드슨 파커 씨가 제약회사에 담을 세놓지 않겠다는 말을 개선회에 전해달라고 했다고 발표했다.
제인과 다이애나는 자기 귀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앤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당장 물어보고 싶었지만 개선회는 회의 진행 중의 규칙이 엄격해서 겨우 참았다가 회의가 끝나자마자 모두들 앤을 에워싸고 설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앤은 별로 설명할 것이 없었다.어제저녁길을 가고 있는데 저드슨 파커 씨가 앤을 뒤따라와 개선회가 제약회사 광고에 이상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그쪽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말했을 뿐이라고 했다. 단지 그뿐이라며 앤은 그 당시에도 그 이후에도 더 이상 아무 설명을 하지 않았다. 확실히 앤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제인 앤드루스는 올리버 슬론에게 앤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저드슨 파커 씨가 갑자기 생각을 바꾼 데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고 말했는데, 그 말도 틀림없었다.
앤은어제저녁무렵에 해안가 길에 있는 폴네 집에 갔다가 지름길을 통해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길은 낮은 바닷가 들판을 지나고 로버트 딕슨 씨네 집 아래에 있는 너도밤나무 숲 속으로 이어졌다. 이 좁은 오솔길은 상상력이 없는 사람들이 ‘배리의 연못’이라고 부르는 ‘반짝이는 호수’ 바로 위로 난 큰길로 나오게 되어 있었다.
이 오솔길로 막 접어드는 길에 두 남자가 말고삐를 놓고 마차 위에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저드슨 파커 씨였고, 다른 사람은 뉴브리지 사람인 제리 코코런 씨였다. 린드 부인의 장황하게 강조한 말에 따르면 뒤로는 구린 짓을 상당히 저지르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그 꼬리가 잡힌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 남자는 농기구 판매상이었지만 정치판에도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인 음모에 이 사람이 관여하지 않은 일이 없다고 말들을 했다. 지금 캐나다는 총선을 앞두고 있어서 제리 코코런 씨는 요즘 자기 당 표를 모으려고 한창 바빴다. 앤이 늘어진 너도밤나무 가지 밑을 빠져나오자마자 코코런 씨가 하는 말이 들렸다.
“만일 파커 당신이에임스배리씨에게 투표만 해준다면, 거 있잖소, 지난봄에 내게서 산 쟁기 대금으로 준 돈을 그냥 돌려드리겠소, 어떻게 생각하시오?”
“글쎄요, 그렇게 말씀을 하신다면, 그렇게 하는 게 좋겠죠. 이렇게 힘든 시절에는 자기에게 득이 될 일이라면 자기가 알아서 챙겨야 하니까요.”
저드슨 씨는 싱글거리며 말을 어물거렸다.
바로 그 순간 두 남자의 시선이 모두 앤에게로 향했고, 대화는 중단되었다. 앤은 싸늘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그곳을 지나쳤다. 평소보다도 더 고개를 갸웃하게 기울인 채로. 그 순간 저드슨 파커 씨가 앤을 붙들었다.
“말을 태워줄까, 앤?”
그가 살갑게 물었다.
“감사합니다만 사양하겠어요.”
앤이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그 어조에는 바늘처럼 날카로운 경멸이 담겨 있어 그 어떤 일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저드슨 파커 씨라 하더라도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이 붉어지면서 화가 난 듯 말고삐를 홱 잡아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신중하게 다시 한 번 계산해본 다음 불안한 표정으로 앤을 바라보았다. 앤은 조금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똑바로 앞만 보고 걸어갔다. ‘코코런이 그렇게 틀림없이 제안했고 나도 너무나 명백하게 승낙하는 말을 해버렸는데, 저 아가씨가 이 거래 내용을 모두 들었을까? 망할 코코런 녀석! 말을 좀 돌려서 할 것이지, 언젠가 틀림없이 크게 당할 날이 올 거야. 이 빨간 머리 여선생은 또 뭐야. 이 숲 속에 무슨 볼일이 있다고 불쑥 튀어나오는 거냐고!’ 앤이 이런 저드슨 씨의 속말을 들었더라면 자기 그릇대로 남을 판단한다고 했을 것이다. 저드슨 파커 씨도 자기 잣대로 앤을 판단해 앤이 이 일을 여기저기 소문내고 다닐 게 틀림없다고 지레짐작한 것이다. 지난 일에서도 보았듯이 저드슨 파커 씨가 아무리 남이뭐라건개의치 않는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이 일과 같이 뇌물을 받았다는 말이 돈다면 이만저만 곤란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만약 이 일이 아이작 스펜서 씨의 귀에라도 들어갈라치면 부유한 농가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루이자 스펜서와의 결혼은 영 물 건너간 일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저드슨 파커 씨는 스펜서 씨가 지금도 자기를 탐탁스러워하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었다. 더 이상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에헴, 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지난번 일로 앤을 만나고 싶었어. 내가 그 회사에 담을 아예 빌려주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거든. 마을 개선회처럼 좋은 목적으로 일하는 모임은 격려해주어야 마땅하니까.”
“감사합니다.”
앤이 태도를 좀 누그러뜨린 채 대꾸했다.
“그리고 말이야, 내가 아까 제리 씨와 나눈 대화 내용을 다른 사람들한테 말할 필요는 없겠지?”
“그 말을 누구한테 할 생각은 없었는걸요.”
돈에 매수되어 투표하는 사람과 거래할 바엔 차라리 에이번리 마을의 담장에 모조리 광고가 나붙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며 앤이 차갑게 말했다.
“암, 그래야지.”
서로 양해가 이루어졌다고 여긴 저드슨 씨가 대꾸했다.
“물론 나도 앤이 그러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 내가 제리 씨를 좀 놀려준 것뿐이라고. 그 사람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제일 잘나고 영리한 줄 안다니까. 난에임스배리에게 투표할 생각은 아예 없었어. 내가 늘 하던 대로 그랜트에게 표를 줄 생각이야. 투표가 끝나면 모두 알게 될 거라고. 난 단지 제리 씨의 마음을 떠보고 싶었을 뿐이야. 자, 이제 담은 걱정하지 말라고. 그 말을 개선회원들에게도 전해줘.”
“모두가 늘 하는 말이지만, 참 별사람들이 다 많아. 아주 가지각색이야. 그중에는 없어도 좋을 사람도 있지. 어쨌거나 이런 불미스러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으니 그 점은 내 양심에 거리낄 것은 없다고. 그나저나 이런 결과가 된 것에 대해 누구에게, 무엇에 감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이런 결과를 만든 것도 아니고, 하느님이 저 뻔뻔스러운 저드슨 파커 씨나 제리 코코런 씨 같은 사람을 이용해서 우리를 도와주었다고 생각할 수도 없고.”
그날 밤 앤은 동쪽 방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말했다.
11) ‘하느님은 우리를 지켜주시고 구원하신다.’라는 말에 쓰인 ‘프리저브(preserve)’라는 단어가 ‘잼’이란 의미로도 쓰여서 오해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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