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2권 21~22

나단비 | 2024.03.04 12:41:25 댓글: 2 조회: 511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1518
21

상냥한 라벤더





학교가 다시 개학했다. 앤은 이제 교육이론보다는 더 많은 경험으로 무장하고 교단에 섰다. 학교에 새로 입학한 신입생도 몇 있었다. 궁금해하던 세계로 이제 막 발을 들여놓은 여섯 살이나 일곱 살짜리 아이들이었다. 이들 신입생 중에는 데이비와 도라도 끼어 있었다. 데이비의 짝은 밀티 볼터로 이미 1년 전에 학교에 입학해 뭔가를 꽤 알고 있는 아이였다. 도라는 지난주 주일 학교에서 릴리 슬론과 함께 앉기로 약속했지만 릴리 슬론이 첫날부터 결석해버리는 바람에 오늘은 미라벨 코튼과 앉게 되었다. 미라벨은 열 살이나 먹은 아이로 도라 눈에는 굉장히 큰 언니로 보였다.
그날 저녁 데이비가 집으로 돌아와서 마릴라에게 말했다.
“학교는 아주 재미있는 곳이에요.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기 힘들 거라고 했지, 정말 그랬어요. 아주머니 말은 언제나 맞아요. 하지만 책상 밑에서 다리를 꼼지락거리니까 견딜 만했어요. 같이 놀남자아이들이 많아서 너무 좋아요. 나는 밀티 볼터와 같이 앉는데 아주 좋은 애거든. 나보다 키는 크지만 몸은 내가 더 넓어요. 뒷자리에 앉으면 더 재미있겠지만 발이 바닥에 닿아야 뒤에 앉을 수 있대요. 밀티가 석판에다 앤 누나의 얼굴을 굉장히 보기 싫게 그려서 내가 앤 누나의 얼굴을 그렇게 그리면 쉬는 시간에 갈겨주겠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밀티를 그려놓고 뿔이랑 꼬리를 붙여줄까 하다가 밀티 기분이 상할까 봐그만뒀어요. 앤 누나가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안 된다고 했거든요.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건 좋지 않은 일이래요. 보복해주어야 한다면 기분 나쁜 말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대 때려주는 게 낫다고. 밀티는 내가 하나도 무섭지는 않지만 그냥 다른 사람으로 해주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앤 누나의 이름을 지워버리고바버라쇼라고 썼어요. 밀티는바버라를 좋아하지 않아요.바버라가 저번에 밀티더러 귀여운 아기라고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대요.”
도라도 학교가 좋다고 얌전하게 말했다. 하지만 너무 조용해서 아무리 얌전한 도라라 하더라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녁이 되어 2층으로 올라가 자라고 하자 도라가멈칫멈칫하더니급기야는 울음을 터트렸다.
“난, 난 무서워요. 어두운데 혼자서 2층에 가기 싫단 말이야.”
“도라, 도대체 왜 그러니? 전에는 무서워하지 않고 혼자 잘 자러 갔잖아.”
마릴라가 다그쳤다.
도라가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않자 앤이 도라를 안아 다정하게 다독여주며 속삭였다.
“나한테 다 얘기해봐. 우리 착한 아기, 왜 무섭지?”
도라가 훌쩍거리며 말했다.
“미라벨 코튼의 삼촌. 미라벨 코튼이 오늘 학교에서 자기 가족 이야기를 전부 해주었어. 자기 가족은 거의 다 죽었대.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많은 삼촌과 고모들 모두. 미라벨 말로는 자기네 가족들이 모두 빨리 죽는 편이래. 미라벨은 그 죽은 친척들을 무척 자랑스러워하며 그 사람들이 무슨 병으로 죽었는지, 죽을 때 무슨 말을 했는지, 묻힐 때의 모습은 어땠는지 다 얘기해주었어. 미라벨이 그러는데 죽은 삼촌 하나는땅속에 묻힌 다음에도 집 주위를 돌아다닌대. 미라벨 엄마가 그걸 봤대. 다른 건 다 괜찮은데 그 삼촌이 자꾸만 생각나.”
앤이 도라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가 도라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주었다. 앤은 다음 날 쉬는 시간에 미라벨 코튼을 불러 부드럽지만 분명하게, 무덤 속에 묻힌 뒤에도 집 주위를 돌아다니는 삼촌을 두어 참 안됐지만 그런 엉뚱한 이야기를 옆자리의 나이 어린 아이에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타일렀다. 미라벨은 이 일로 앤에게 섭섭한 마음을 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코튼 집안은 자랑거리라곤 없었다. 가족 유령이라는 단 한 가지 자랑거리를 내세우지 못한다면 앞으로는 학교 친구들 앞에서 뻐길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어느덧 9월도 10월의 황금빛과 진홍빛 은혜로움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어느 금요일 저녁, 다이애나가 앤을 찾아왔다.
“오늘 엘라킴벌한테 편지를 받았는데, 앤, 내일 오후에 사촌 동생 아이린 트린트가 시내에서 온다고 차를 마시러 오래. 하지만 우리 집 말은 모두 내일 쓰기로 되어 있고, 네 조랑말도 아프잖아. 우린 못 갈 것 같다.”
“걸어가도 되지 않을까? 숲 속 지름길로 곧장 가면 웨스트 그래프턴에 닿을 수 있고 거기서킴벌네까지는 얼마 되지 않아. 지난겨울에 그 길로 가봐서 내가 길도 아는데 6킬로미터 정도만 가면 될 거야. 그리고 올 때는 걸어오지 않아도 돼. 올리버킴벌이 우리를 태워다줄 테니까. 그런 구실을 주면 오히려 고맙다고 할걸. 캐리 슬론을 보러 가고 싶은데 그 애 아버지가 말을 거의 내주지 않는다고 하거든.”

앤이 말했다.
따라서 둘은 걸어가기로 했고, 다음 날 오후가 되자 길을 나섰다. 커스버트 농장 끝까지는‘연인의 오솔길’을 따라가고, 이어서 드넓게 펼쳐져 있는 너도밤나무와 단풍나무 숲 가운데로 나 있는 길로 들어섰다. 숲은 숭고한 자줏빛의 고요와 평화가 깃든 가운데 장엄한 빛의 광채와 황금빛 빛줄기가 여기저기 흩뿌려 있었다.
“부드러운 빛이 드리운 거대한 성당 안에서 시간이 멈추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 같아, 그렇지 않니?”
앤이 꿈꾸듯 말했다.
“이 길을 가면서 서두르는 건 옳은 일이 아닌 것 같아, 그렇지? 교회 안에서 뛰어다니는 것처럼 불경스러운 일로 느껴져.”
“하지만 우린 서둘러야 해. 시간이 별로 없다고.”
다이애나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그래, 빨리 걷기는 할게. 하지만 나한테 말은 시키지 마. 난 그저 오늘 이 숲의 이 숭고함을들이마시고싶어. 누군가가 공기로 만든 포도주를 내 입술에 대주고 있는 것 같아. 걸을 때마다 한 모금씩마시며 갈거야.”
아마도 앤이 너무 ‘들이마시기’에 몰두하고 있었는지 둘이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 앤은 오른쪽 길로 가야 할 걸 그만 왼쪽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그 후 앤은 그 일을 자기 생애 가장 큰 행운을가져다준실수였다고 생각했다. 둘이 다다른 길은 인적이라곤 전혀 없고 풀만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그 길을 따라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오로지 울창한 어린 가문비나무뿐이었다.

“어머나, 우리 길을 잃은 거야? 이건 웨스트 그래프턴 길이 아니잖아.”
다이애나가 당황해 소리를 질렀다.
“그래, 이건 미들 그래프턴 길이야.”
앤이 다소 멋쩍은 듯 말했다.
“아까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었나 봐. 나도 정확하게 지금 우리가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아직킴벌네 집까지 가려면 4킬로미터는 남았을 거야.”
“그럼 거기 5시까지 도착하지 못해.지금이 4시 반이거든. 다들 차를 마신 후에나도착하겠어. 다시 우리 차를 준비하느라 번거로울 거야.”
다이애나가 절망스럽게 시계를보면서말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
앤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말했으나 다이애나는 생각을 좀 해본 후에 이 의견을 거부했다.
“안 돼, 그냥 가서 저녁을 거기서 보내는 게 좋겠어. 이렇게 멀리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고.”
몇 미터 앞에서 다시 갈림길이 나왔다.
“이제는 어느 길로 가야 하지?”
다이애나가 물었다.
앤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어. 이제는 더 이상 길을 잘못 들어서면안 돼. 저기 문이 보이네. 숲 속으로 곧장 나 있는 오솔길끝에 집이 있는 모양이야. 거기 가서 길을 물어보자.”
“이 오솔길은 정말 낭만적이면서도 고풍스러운 분위기야.”
둘이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으며 다이애나가 말했다. 커다란 늙은 전나무 가지들이 맞닿아 햇빛을 가려 영구히 음지를만드는 곳아래로는 이끼밖에 없었고 갈색으로 변한 길 양편 숲으로는 눈부신 햇살이 비쳐들었다. 인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 모든 것이쥐 죽은듯 고요했고, 이런 곳에서라면 세상의 근심 걱정이 모두 먼 이야기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어쩐지 마법에 걸린 숲을 걸어가고 있는 느낌이야.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다이애나? 이제 곧 마법에 걸린 공주님이 사는 성이 나타날 것 같지 않니?”
앤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다음 모퉁이를 돌자 궁전이 아니라 작은 집이 눈에 들어왔다. 궁전을 본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이 지방에는 어느 농가나 모두 똑같이 생겨 마치 한 씨앗에서 태어나 자라난 집들 같았다. 앤은 즉시 걸음을 멈추었고 다이애나가 탄성을 질렀다.
“아, 우리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겠어. 여기는 라벤더 아주머니가 살고 있는 그 작은 돌집이야. 라벤더 아주머니는 그 집을‘메아리 집’이라고 부른다지. 그 말은 여러 번 들었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었는데, 여긴 너무나 낭만적인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니?”
“여기는 내가 보고 상상한 곳 중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곳이야. 꼭 이야기책이나 꿈속의 한 장면 같아.”
앤도 기쁨에 넘쳐 말했다.

그 집은 추녀가 낮았고 이 섬에서 나오는 거친 붉은 사암으로 지어져 있었다. 좀 뾰족한 편인 지붕에 두 개의 돌출된지붕 창이 나 있어 이상하게 생긴목제 뚜껑으로 덮어놓았고 두 개의 커다란 굴뚝도 있었다. 무성하게 자라난 담쟁이덩굴이 집 전체를 덮었으며, 이파리들은 가을 서리에 아름다운 청동색과 포도주빛 색깔로 물들어 있었다.
집 앞에 네모난 정원이 있고, 두 사람이 서 있는 대문에서 좁은 길이 집까지 이어졌다. 집이 한쪽에 자리 잡고 나머지 삼면은 낡은 돌담이 둘러쌓는데 담에는 이끼며 풀이며 풀고사리로 무성해 높다란 푸른 둑처럼 보였다. 양옆으로는 키가 크고 어두운 색깔의 가문비나무가 돌담 위로 종려나무 잎 같은 가지를 드리웠다. 그 아래로는 클로버로 덮인 작은 목장이 완만한 비탈을 이루면서 그래프턴 강까지 이어졌다. 그 외에 보이는 것이라곤 언덕과 어린 전나무로 뒤덮인 골짜기뿐 다른 집도 들판도 보이지 않았다.
“라벤더 루이스 아주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아주 특이한 사람이라고들 하던데.”
대문을 열고 뜰 안으로 들어서며 다이애나가 말했다.
“그렇다면 아주 흥미로운 사람일 거야. 특이한 사람은 다른 건 몰라도 흥미로운 것만큼은 확실하니까. 내가 마법에 걸린 성이 나올 거라고 말했지? 꼬마 요정들이 그 오솔길에 괜히 마술을 걸어놓았을 리 없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라벤더 루이스 아주머니가 마법에 걸린 공주는 아닐 것 같은데. 노처녀니까. 내가 듣기로는 나이가 마흔다섯이라니까 머리도 하얄 거야.”
“아니, 그건 마법에 걸려서 그런 거야. 라벤더 아주머니의 마음은 여전히 젊고 아름다울걸. 우리가 그 마법을 어떻게 풀 수 있을지 그 방법만 안다면 다시 젊고 눈부신 아름다움을 찾게 될 거야. 하지만 우리는 그 방법을 모르잖아. 그 방법은 언제나 왕자님만이 알고 있지. 라벤더 아주머니의 왕자님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어. 아마 왕자님도 심각한 곤경에 처해 있을 거야. 그렇게 되면 모든 요정 이야기의 결말과는 다르긴 하지만.”
“왕자님이 오래전에 왔다가 가버린 건 아닐까. 스티븐 어빙 씨와 약혼을 했었다고 하잖아. 폴네 아빠 말이야. 두 사람이 젊었을 때. 하지만 서로 다투고는 헤어져버렸대.”
“쉿, 문이 열려 있다.”
앤이 주의를 주었다.
두 사람이 담쟁이덩굴이 늘어진 현관 입구에 서서 열려 있는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좀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한 작은여자아이가 몸을 내밀었다. 열네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로 얼굴은 주근깨로 가득 덮여 있고 들창코에 입이 무척 커서 입이 한쪽 귀에서 다른 쪽 귀까지 걸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금발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커다란 파란색 리본으로 묶었다.
“루이스 아주머니는 집에 계시나요?”
다이애나가 물었다.
“네, 계세요. 들어오세요. 라벤더 마님에게 아가씨들이 왔다고 전해드릴게요. 2층에 계시거든요.”
그 작은 아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두 사람은 잔뜩 기대에 부푼 눈으로 집을 둘러보았다. 이 작은 집의 내부도 바깥만큼이나 흥미로웠다.

방 안의 천장은 낮고 두 개의 네모지고 작은 창문에는 주름 잡힌 모슬린 커튼이 걸려 있었다. 가구들은 전부 옛날 것이었지만 잘 손질되어 보기 좋았다. 그중에서도 가을 공기 속에서 6킬로미터나 걸어온 둘의 눈길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연한 푸른색 도자기 접시에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차려진 식탁이었다. 식탁은 황금 빛깔이 물든 작은 고사리들로 장식되어 앤의 말을 빌자면 ‘성찬 분위기’까지 났다.
“라벤더 아주머니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야. 여섯 사람분의 접시가 놓여 있어. 그런데 저 아이는 좀 우습게 생겼어. 꼭요정 나라에서 온 심부름꾼 같지 않니? 저 아이에게 길을 물어봐도 되겠지만 난 라벤더 아주머니에게 물어보고 싶어. 쉬이! 온다.”
앤이 속삭였다.
라벤더 루이스가 문가에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두 사람은 너무 놀라 인사하는 것도 잊은 채 그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두 사람 다 무의식중에 자기들이 늘 보아오던 노처녀가 나타날 것으로 생각했다. 다소 마른 몸매에 단정한 흰 머리와 안경……. 그러나 라벤더의 모습은 상상 속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몸은 작았고 눈처럼 하얀 머리를곱슬거리도록 말아정성 들여손질한 머리도 무척 아름다웠으며 거의 아가씨 같은 분홍빛 뺨, 귀여운 입매, 크고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에 보조개도 있었다. 틀림없는 보조개였다. 크림색 모슬린에 연한 장미꽃 무늬가 있는 드레스를 입었는데 같은 나이의 다른 부인이 입었더라면 아가씨 취향의 옷을 입었다고 비웃음을 샀겠지만 라벤더에게는 아주 잘 어울렸다.
“샬로타 4세가 아가씨들이 나를 만나러 왔다고 하던데요.”
목소리도 외모와 잘 어울렸다.

“우리는 웨스트 그래프턴으로 가는 길이 어딘지 물으러 왔어요.킴벌댁에서 초대를 받았는데 숲 속에서 길을 잘못 들어 웨스트 그래프턴 길이 아니라 가운뎃길로 나와버렸어요. 여기 대문에서 갈라지는 길에서는 왼쪽 길인가요, 오른쪽 길인가요?”
다이애나가 물었다.
“왼쪽 길이에요.”
라벤더가 잠시 식탁 쪽으로 주저하는 눈길을 보내더니 갑자기 결심을 한 듯 덧붙였다.
“여기서 나와 함께 차를 마시지 않을래요? 그렇게 해주세요.킴벌댁에 도착하면 이미 차를 다 마신 후일 텐데. 여기서 나와 함께 차를 마셔준다면 샬로타 4세도 나도 아주 기쁠 거예요.”
다이애나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앤을 돌아보았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기꺼이요. 손님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 아닌가요?”
앤은 라벤더를 좀 더 알고 싶은 마음이라서 즉각 대답했다.
라벤더가 다시 한 번 식탁을 바라보더니 얼굴을 붉혔다.
“나를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죠? 그래요, 난 바보 같아요. 그래서 나도 들키면 부끄럽답니다. 하지만 들키지만 않으면 아무렇지도 않아요. 난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그런 척하고 있을 뿐이에요. 내가 너무 외롭거든요. 누군가 얘기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랑 잘 맞는 사람이요. 하지만 여기는 너무 외져 있어서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샬로타 4세도 외로워하죠. 그래서 티 파티를 여는 척하고 있었어요. 티 파티를 위해 요리도 하고 식탁도 장식했어요. 우리 어머니 결혼식에 썼던 도자기도 꺼냈고, 이렇게 옷도차려입었다니까요.”
다이애나는 속으로 역시 라벤더가 이상한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마흔다섯 살이나 먹은 여자가 꼬마여자아이처럼 티 파티 놀이를 한다니! 하지만 앤은 눈을 빛내며 외쳤다.
“어머나, 그럼 라벤더 아주머니도 상상을 할 줄 아시는군요!”
라벤더 역시 마음이 통하는 친구임이 밝혀진 것이다.
“네, 그래요. 물론 이 나이에 어리석은 일인 줄은 알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면 이 나이가 되도록 혼자 사는 의미가 뭐겠어요. 그런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해가 되는 일도 아니잖아요? 사람은 누구나 부족한 것을 대신할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 해요. 가끔씩은 이렇게 공상을 하면서 진짜인 척하면서라도 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거든요. 다른 사람에게 들킨 적도 별로 없어요. 샬로타 4세는 절대로 소문 같은 건 내지 않거든요. 하지만 오늘은 들키게 돼서 정말 기뻐요. 이렇게 정말로 나와 차를 마셔줄 사람이 와주었잖아요.손님방으로 가서 모자를 벗으세요. 계단으로 올라가면 바로 옆에 있는 문이 하얀 방이에요. 난 부엌으로 가서 샬로타 4세가 차를 끓어 넘치게 하고 있지나 않은지 봐야겠어요. 샬로타 4세는 아주 착한 아이지만 곧잘 차가 끓어 넘치도록 놔두거든요.”
라벤더는 접대 준비하려고 부엌으로 갔고 두 사람은 2층으로 올라갔다.손님방은 문과 마찬가지로 안도 모두 하얀색이었으며 담쟁이덩굴이 드리워진 창문으로 비쳐드는 빛을 받아 앤의 말대로 저절로 행복한 꿈을 꿀 수 있을 것만 같은 방이었다.

“오늘 정말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니? 라벤더 아주머니는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정말 예쁜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도 노처녀 같지가 않아.”
다이애나가 말했다.
“라벤더 아주머니는 음악 같은 분이야.”
앤이 대답했다.
둘이 내려가자 라벤더도 주전자를 들고 돌아왔다. 아주 기쁜 표정의 샬로타 4세가 따뜻한 비스킷이 담긴 접시를 들고 뒤따라왔다.
“이제 두 사람 이름을 말해 봐요. 젊은 아가씨들이어서 너무 기뻐요. 나는 젊은 아가씨를 좋아하거든요. 젊은 아가씨와 함께 있으면 나도 젊어지는 기분이에요. 나는 나이 먹었다고 생각이들 때가 가장 싫거든요.”
라벤더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 이름이 다이애나 배리? 그리고 앤 셜리? 우리, 백 년 전부터 알고 있는 사이라고 치고 이제부터 말을 낮춰도 될까요?”
“그럼요.”
둘이 합창이라도 하듯 대답했다.
“자, 그럼 편히 앉아서 마음껏들 들어.”
라벤더가 몹시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샬로타, 너도 상머리에 앉아서 닭고기를 좀 잘라라. 스펀지케이크와 도넛을 만들어놓아 다행이야. 실제로는 오지도 않는 손님이 온다고 여기면서 그런 걸 만들다니 우스운 일이지. 샬로타 4세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렇지, 샬로타? 하지만 이렇게 좋은 일이 생겼잖니? 어쨌든 음식을 낭비할 일은 없어. 샬로타와 둘이서 며칠 동안 먹으면 되니까. 스펀지케이크는 오래 둘수록 맛이 없어지긴 하지만.”
즐겁고 기억에 남을 만한 식사였다. 식사가 끝나자 모두들 해가 저물어가는 정원으로 나갔다.
“여긴 정말 아름다운 곳이에요.”
다이애나가 황홀한 듯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데 왜 이 집을‘메아리 집’이라 부르나요?”
앤이 물었다.
“샬로타, 안으로 들어가 시계 선반에놓인 조그만 호른, 그것 좀가져오렴.”
라벤더가 말했다.
샬로타 4세가 얼른 집으로 뛰어 들어가 호른을 가지고 나왔다.
“불어봐, 샬로타.”
샬로타가 라벤더의 말에 따라 호른을 불자 좀 시끄럽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호른 소리가 멎자 한동안 주변에 고요가 퍼졌고…… 그런 다음 강 건너 숲 속에서 마치 ‘요정 나라의 호른’들이 모두 한꺼번에 저녁놀 물든 하늘을 향해 울려 퍼지듯 아름다운 은방울 소리 같은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자, 웃어봐, 샬로타. 크게 웃어봐.”
라벤더의 말이라면 물구나무서기라도마다치않을 것 같은 샬로타가 돌 벤치에 올라가 크고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자 노을에 물든 자줏빛 숲에서도 울창한 전나무 꼭대기에서도 많은 요정들이 웃음소리를 흉내라도 내듯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여기 메아리를 들으면 모두들 감탄해.”
라벤더는 마치 메아리가 자기 것이라도 되는 양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도 이 메아리를 아주 좋아하고. 약간만 공상을 보태면 아주 좋은 친구가 되어주거든. 고요한 저녁이면 샬로타 4세와 나는 여기로 나와 앉아 메아리와 놀아. 샬로타, 호른을 도로 갖다 제자리에 잘 두어라.”
“왜 저 아이의 이름은 샬로타 4세예요?”
그것이 아까부터 궁금하던 다이애나가 물었다.
“내 머릿속에서 다른 샬로타와 헛갈리지 않기 위해서지.”
라벤더가 아주 진지하게 대답했다.
“모두들 너무 비슷해서 구별하기가 힘들거든. 저 아이의 원래 이름은 샬로타가 아니라, 가만, 뭐더라, 레오노라였던가, 맞아. 레오노라야. 10년 전 우리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로 난 이곳에서 혼자 살아야 했어. 하지만 혼자 살기엔 너무 외로운 곳이지. 그렇다고 가정부를 둘 형편도 아니었어. 그래서 샬로타 보먼이라는 아이에게 식사와 옷밖엔 줄 수 없지만 여기 와 있어달라고 했지. 그 아이의 이름이 진짜 샬로타였으니 샬로타 1세인 셈이지. 그때 나이가 13살이었던 그 아이는 16살까지 3년 동안 여기 있다가 더 나은 자리를 찾아 보스턴으로 가버렸어. 그 뒤로 그 아이 동생인 줄리에타라는 아이가 왔는데 언니와 너무 닮아서 나는 그 아이를 샬로타라고 불렀어. 줄리에타도 그 이름을 싫어하지 않아서 그 아이의 원래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그냥 샬로타 2세라고 불렀어. 그 아이가 가버리고 다음에 온 아이는 에블리너였는데 그 애가 샬로타 3세지. 지금 있는 저 아이는 샬로타 4세야. 저 아이도 16살이 되면 또 보스턴으로 가고 싶어 할 텐데 어찌해야 좋을지 지금부터 걱정이야. 샬로타 4세는 보먼네 딸들 중 막내인데 가장 착하기도 하지. 다른 샬로타 아이들은 내가 공상을 하면서 진짜인 척하고 있으면 나를 바보로 여겼어. 그런 생각을 감추려 들지도 않았지. 하지만 샬로타 4세는 절대로 그러지 않았어.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든 말이지. 나는 누가 내 일을 어떻게 생각하든 겉으로 나타내지만 않으면 조금도 상관없거든.”
“자, 이젠 어두워지기 전에킴벌씨 집에 도착해야 하니까 그만 가봐야겠어요.”
다이애나가 지는 해가 아쉽다는 듯 작별을 고했다.
“또다시 와줄 수 있어?”
라벤더가 부탁하듯 말했다.
키가 큰 앤이 라벤더의 작은 몸을 안으며 말했다.
“그럼요. 꼭 다시 오겠어요. 이렇게 찾아냈으니 귀찮아할 만큼 자주 찾아오겠어요. 폴 어빙이‘초록 지붕 집’에 왔다 갈 때마다 하는 말처럼 ‘가슴이 찢어질 것’ 같지만 이제 가봐야 해요.”
앤이 약속했다.
“폴 어빙이라고? 그게 누구지? 에이번리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는 걸로 아는데.”
라벤더의 목소리가 약간 변했다.
앤은 자기의 경솔함에 화가 났다. 라벤더의 그 옛날 로맨스를 금세 잊어버리고 폴의 이름을 입 밖에 내버렸으니.
“폴은 제가 가르치는 아이 이름이에요. 작년에 해안가에 살고 있는 어빙 할머니와 살려고 보스턴에서 왔죠.”
앤이 천천히 설명했다.

“그럼 스티븐 어빙의 아들인가?”

라벤더가 자기와 같은 이름의 라벤더화단 가로 고개를 숙이며 물어서 그 순간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네.”

“둘에게 라벤더를 한 다발씩 선물할게.”

라벤더는 앤의 대답을 듣지 못한 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향기가 아주 좋지? 우리 어머니도 이 향기를 무척 좋아하셨어. 오래전에 이화단 가에 라벤더를 심은 것도 어머니였고. 아버지도 라벤더를 좋아해서 내 이름도 라벤더라고 지으셨지. 아버지가 어머니를 처음 만난 건 어머니의 오빠를 만나려고 이스트 그래프턴의 어머니 집을 방문했을 때였다고 해. 아버지는 첫눈에 어머니에게 반하셨대. 그날 밤손님방침대 시트에서는 라벤더 향기가 풍겼고 아버지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 어머니 생각만하셨다지. 그다음부터 라벤더 향기를 아주 좋아하게 되었고, 내 이름도 그렇게 지으셨대. 잊지 말고 꼭 다시놀러 와줘. 샬로타 4세와 나는 두 사람을 기다리겠어.”

라벤더가 전나무 밑의 대문을 열어주었다.

라벤더는 갑자기 나이를 먹은 듯 지쳐 보였다. 얼굴에서 빛이 사라졌고 작별의 미소는 잊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웠지만 길모퉁이에서 돌아보니 뜰 한가운데 있는 은빛 미루나무 밑 돌 벤치에 앉아 기운 없이 한 손으로 머리를 짚고 있었다.

“외로워 보인다. 자주 와야겠어.”

다이애나가 가만히 말했다.

“라벤더 아주머니의 부모님이 더 이상 어울릴 수 없을 만큼 아주 제격인 이름을 지어주셨어. 부모님이 감각이 없어 엘리자베스나 넬리, 아니면 뮤리엘과 같은 이름으로 지으셨다 하더라도 저분을 라벤더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 같아. 아름답고 고전적인 우아함이랄까 실크 드레스를 연상시키는 이름이야. 내 이름은 버터 바른 빵이나 바느질, 아니면 집안일과 같은 느낌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앤이라는 이름에는 정말로 위엄 있는 여왕 같은 느낌이 나. 비록 네 이름이 케런허퍼치라고 해도 난 역시 그 이름도 좋아했을 거야. 자신의 이름을 멋있게 하는 것도 나쁘게 하는 것도 모두 그 사람한테 달린 일 아닐까. 나는 지금은 조지나 거티라는 이름을 듣기만 해도 싫지만 그 아이들을 알기 전에는 굉장히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했어.”

“정말 멋진 생각이야, 다이애나. 자기 이름을 아름답게 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거지. 비록 그 이름이 처음에는 아름답지 않았다 해도 그 이름을 들었을 때 사람들 마음에 아름답고 유쾌한 생각이 떠오르도록 말이야. 고마워, 다이애나.”

앤은 진심으로 감격했다.




22

이런저런 이야기





다음 날 아침 식탁에서 마릴라가 말했다.
“그래, 그 돌집에서 라벤더 루이스와 차를 마셨단 말이냐? 라벤더는 잘 지내고 있던? 라벤더를 마지막으로 본 지가 15년이 넘었구나. 언젠가 일요일에 그래프턴 교회에서였지. 많이 변했겠지? 데이비 키스, 손이 닿지 않는 것이 먹고 싶을 때는 집어달라고 해야지, 그렇게 온몸을 식탁 위로 길게 뻗으면 어떻게 하니. 폴 어빙이 우리 집에 와서 식사할 때 어떻게 행동했는지 보지도 못했니?”
“하지만 폴의 팔이 내 것보다 더 길단 말이에요. 폴의 팔은 11년이나 자랐고 내 팔은 7년밖에 못 자랐는데. 그리고 나는 집어달라고 말했거든요. 누나랑 아주머니가 얘기하느라 바빠서 내 말에 관심도 없었을 뿐이지. 그리고 폴이 여기 와서 아침밥을 먹은 적도 없거든요. 저녁을 같이 먹었을 뿐이지. 아침밥 먹을 때보다는 저녁밥 먹을 때 예의 차리기가 더 쉬워요. 배가 반밖에 고프지 않으니까요. 저녁을 먹고 아침 식사 시간까지는 얼마나 긴데요. 그리고 누나, 이 숟가락은 작년보다 커지지 않았지만 난 많이 컸거든.”

데이비가 투덜거렸다. 

“전 라벤더 아주머니가 전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많이 변한 것 같지 않아요.”
앤이 데이비가 만족할 수 있도록 메이플 시럽을 두 숟가락이나 퍼준 후 말을 이었다.
“머리는 하얀색이지만 얼굴은 생기가 넘치고 거의 소녀 같았어요. 그리고 정말 예쁜 갈색 눈은 나무 색깔과 황금색이 섞여 반짝거렸고 목소리는 하얀비단옷이 스치는 소리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요정의방울 소리를 모두 섞어놓은 것 같았어요.”
“젊었을 때는 굉장한 미인으로 소문이 났었다. 난 라벤더를 잘은 몰랐지만 볼 때마다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어. 어떤 사람들은 그때도 좀 특이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데이비, 다시 한 번만 그런 짓을 하다가 걸리면 다른 사람 식사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혼자 먹도록 할 거야. 프랑스 아이처럼 말이다.”
마릴라가 말했다.
쌍둥이가 함께 있을 때 앤과 마릴라의 대화는 이렇게 데이비를 꾸지람하느라 자주 중단되었다. 지금도 데이비가 숟가락으로 시럽을 바닥까지 다 퍼먹을 수 없자 접시를 들어 입에 대고 그 조그만 분홍 혀로 핥아먹었다. 앤이 그런 데이비에게 무서운 표정을 짓자 이 꼬마 죄인이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절반은 부끄러운 듯 절반은 반항하듯.
“그렇게 하면 끝까지 다 먹을 수 있다고.”
“다른 사람과 다르면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해요. 라벤더 아주머니는 분명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르기는 하지만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라벤더 아주머니가 늙지 않는 사람이라서 아닐까요.”

앤이 말했다.
“다른 사람이 모두 늙으면 같이 늙는 게 당연하지. 자기만 늙지 않으면 어디를 가도 어울리기가 힘들어. 라벤더 루이스만 보더라도 세상에서 멀어져 모두들 잊어버릴 때까지 그런외딴곳에 살고 있잖니. 그 돌집은 이 섬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야. 돌아가신 루이스 씨가 80년 전에 영국에서 여기로 건너와서 그 집을 지었으니까. 데이비, 도라 팔꿈치 좀 그만 밀어라. 이런, 내가 다 봤어! 그렇게 넌 모르는 일이라는 듯 시치미 떼지 말라고. 도대체 오늘 아침에는 왜 그러니?”
마릴라가 나무랐다.
“오늘 아침 침대에서 내려올 때 나쁜 쪽에서 내려온 모양이죠. 밀티 볼터가 침대에서 내려올 때 나쁜 쪽에서 내려오면 온종일 되는 일이 없다고 했어요. 그 애 할머니가 그랬대. 하지만 그럼 어느 쪽이 똑바른 쪽인데요? 침대가 벽에 붙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궁금해.”
데이비가 말했다.
“나는 항상 스티븐 어빙과 라벤더 루이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마릴라가 데이비의 말을 무시해버리고 말을 계속했다.
“둘은 25년 전에 약혼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헤어져 버렸어. 무엇 때문이었는지 그 이유야 모르지만 뭔가 큰 문제가 있었던가 보더라. 스티븐이 미국으로 가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뭔가 아주 심각한 일은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살다 보면 큰일보다 하찮은 일이 오히려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더 많거든요.”

앤이 경험이 많다고 인생에 대한 통찰력이 더 커지는 것은 아니란 듯 말했다.

“마릴라 아주머니, 린드 아주머니한테는 제가 라벤더 아주머니한테 다녀왔다는 말 하지 마세요. 아주머니가 알게 되면 숨도 쉴 수 없게 질문을 해댈 거예요. 어쩐지 그 일은 별로 얘기하고 싶지도 않고, 라벤더 아주머니도 원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궁금하긴하겠지만,레이철이 전처럼 남의 일에 참견하고 다닐 틈이 없단다. 지금은 토머스 씨가 아파서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거든. 무척 낙심하고 있어.레이철도 토머스 씨가 나아질 거란 희망을 버리기 시작한 모양이더라. 토머스 씨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레이철이 무척 외로워할 텐데. 자식들은 전부 서부로 나가서 살고 있고, 엘리자 혼자만 시내에 사니, 거기다 엘리자는 자기 남편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말이다.”

마릴라의 그 말은 엘리자를 중상 모략하는 말이었다. 사실 엘리자는 자기 남편을 아주 좋아했다.

“레이철의 말로는 토머스 씨가 너무 의지가 약하대. 나으려는 의지만 강하다면 일어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뼈도 없는 해파리더러 똑바로 앉으라면 앉을 수 있겠니? 토머스 린드 씨는 지금까지 한 번도 스스로 뭔가 해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이거든. 결혼 전에는 늘 어머니 뜻대로만 했고, 그 뒤로는 아내인레이철뜻에만 따랐으니레이철허락 없이 병에 걸린 것도 이상한 일이지. 하지만 나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아니지.레이철은 토머스 씨에게 좋은 아내였어. 토머스 씨는레이철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고. 그 점이야 누구도 아니라고 못 할 거다. 천성적으로 남이 시키는 일이나 할 사람이었으니까.레이철처럼 영리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만난 게 다행이지. 토머스 씨는레이철이 하는 일에 이러쿵저러쿵하지도 않았어. 자기가 결정을 내리지 않아도 되니까 오히려 좋아했지. 데이비, 뱀장어처럼 몸 좀 꼼지락거리지 말고 가만히 있어.”

“그럼 할 일이 없단 말이에요. 밥도 다 먹었고, 아주머니랑 누나가 먹는 걸 보는 것도 재미없어요.”
데이비가 말대답을 했다.

“그럼 도라랑 나가서 닭 모이나 주도록 해라. 하얀 수탉 깃털은 더 이상 뽑지 말고.”

마릴라가 말했다.

“깃털로 인디언 머리띠를 만들고 싶단 말이에요. 밀티 볼터는 정말 멋진 머리띠를 갖고 있어요.게네엄마가 흰 수컷 칠면조 잡을 때 뽑아줬대요. 나도 조금만 뽑으면 안 돼요? 저 수탉은 깃털을 그렇게 많이 달고 있는데.”

데이비가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다락방에 있는 헌 깃털 먼지떨이를 줄게. 나중에 녹색, 빨강, 노랑으로 염색도 해줄게.”

앤이 말했다.

“넌 저 아이 응석을 너무 많이 받아줘.”

데이비가 얼굴을 빛내며 얌전한 도라의 뒤를 따라 나가는데 마릴라가 말했다. 마릴라의 교육관은 지난 6년 동안 눈부시게 진보되었지만 아직도 아이들이 원한다고 뭐든지 들어주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자기 반남자아이들이 모두 인디언 머리띠를 갖고 있으니까 데이비도 갖고 싶은 거죠. 전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어요. 다른여자아이들이 모두 퍼프 소매 옷을 입고 있을 때 저도 얼마나 입고 싶었는지 그때 기분은 지금도 잊을 수 없거든요. 그리고 데이비 버릇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날마다 좋아지고 있는걸요. 일 년 전 여기 처음 왔을 때와는 너무나 많이 달라졌잖아요.”
앤이 말했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확실히 말썽을 덜 부리는 것 같기는 해. 다른남자아이들과 노니까 말썽을 덜 부리는 거겠지.”

마릴라도 인정했다.

“그건 그렇고 리처드 키스한테서는 연락이 없구나. 지난 5월 이후로 통 소식이 없다.”

“전 편지가 올까 봐 겁이 나는걸요. 편지가 와서 쌍둥이를 보내라고 할까 봐 편지를 뜯을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아요.”

앤이 식탁을 치우기 시작하며 말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편지가 왔다. 하지만 리처드 키스로부터가 아니었다. 그의 친구가 리처드 키스는 2주 전에 폐병으로 죽었다는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편지를 쓴 사람은 고인의 유언 집행인으로 키스의 유언에 따라 2천 달러를 데이비와 도라에게 남긴다고 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거나 결혼을 하면 쓰도록 둘을 양육하고 있는 마릴라에게 보관하도록 했고 돈의 이자는 아이들 양육을 위해 쓰도록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죽은 일로 기뻐할 일이 생기다니 너무나 끔찍한 일이에요. 키스 씨가 돌아가신 것은 정말 안됐지만 쌍둥이를 계속 키울 수 있게 되어 기뻐요.”

앤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돈을 남겨주다니 정말 다행이야. 나도 저 애들을 키우고 싶었지만 양육비가 걱정이었거든. 애들이 커가면서 돈이 점점 더 많이 필요할 텐데. 농장 임대료로는 이 집을 유지해 나가기밖에 더 하겠니. 네가 버는 돈은 쌍둥이를키우는 데 써서는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지금도 너는 아이들에게 너무 잘해주고 있어. 네가 도라에게 새 모자를 사주었지만 고양이에게 꼬리가 둘씩이나 필요하지 않은 게 당연하듯이 그 모자는 필요 없었다. 이제는 아이들 양육비가 생겼으니 돈 문제는 한시름 놓아도 되겠구나.”
마릴라가 현실적인 문제를 들먹였다.

데이비와 도라도‘초록 지붕 집’에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몹시 기뻐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삼촌의 죽음이 아이들 마음에 전혀 혼란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도라에게는 한 가지 걱정이 생겼다.

“리처드 삼촌은 땅에 묻히셨나요?”

도라가 앤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그래, 물론이지. 우리 착한 도라.”

“하지만, 하지만……. 삼촌은 미라벨 코튼네 삼촌 같지는 않겠죠?”

잠깐 말을 멈추었다 다시 불안한 듯 속삭였다.

“무덤에서 나와 집 주변을 걸어 다니지는 않겠죠, 언니?”


추천 (1) 선물 (0명)
IP: ♡.252.♡.103
뉘썬2뉘썬2 (♡.169.♡.51) - 2024/03/07 00:10:08

나무이름이 웃기네요.나도밤나무가 아니라 너도밤나무.ㅋㅋ 당시 유일한 교통수단이
말이고 그마저도 없으면 6키로나 걸어야 되는군요.숲속에서 길을잃어도 네비게이션도
없고.라벤더 아주머니가 외로워한다고 자주찾아온다고 약속하는 앤이 너무착하네요.

공이상.상이공.라벤더 아주머니도 앤처럼 상상을 잘하는 음악같은 사람이군요.아름다
운 라벤더 아주머니는 나랑 동갑이네요.나도 라벤더향기를 좋아해요.

나단비 (♡.252.♡.103) - 2024/03/07 09:20:53

라벤더향기가 자연스러우면서도 향이 진해서 끌리는 향기에요. 상상력이 커서도 좋을 수 있다는게 신기하죠. 라벤더 아가씨 일땐 앤과 같았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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