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3권 1~2

나단비 | 2024.03.24 21:08:31 댓글: 2 조회: 128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6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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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그림자





저 멀리 빈 들판을 아련히 바라보며 앤이 읊조렸다.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구나.1)”
앤과 다이애나 배리는 방금 전까지 ‘초록 지붕 집’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다 햇살 밝은 한쪽 구석을 찾아 앉았다. ‘유령의 숲’에 자라는 고사리 향내가 실린 달콤한 여름 바람을 타고 엉겅퀴 꽃술이 날려왔다. 하지만 주변 풍경에서는 이미 가을이 느껴졌다. 저 멀리 바다에서 파도 일렁이는 소리가 들려오고, 추수가 끝난 마른 들판은 노란 미역취 꽃들로 덮였으며,‘초록 지붕 집’아래 골짜기로 흐르는 개울 주변으로는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아름다운 자줏빛 과꽃이 만발했다. ‘반짝이는 호수’는 온통 푸르디푸르렀다. 하지만 변화무쌍한 봄의 파란빛이 아닌, 여름의 희미한 하늘빛도 아닌, 변하지 않을 경건한 느낌의 청명한 푸른빛이었다. 수면은 요동치는 감정에서 비롯된 기분이나 감상을 초월해 변덕스러운 꿈으로도 깨지지 않을 고요 속에 잠겼다.
“멋진 여름이었어. 즐거웠던 여름이 라벤더 아주머니의 결혼식으로 한층 더 절정을 이루었지. 지금쯤 두 사람은 태평양 연안 어딘가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다이애나가 미소를 띤 채 왼손에 새로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난 두 분이 세계 일주라도 떠난 듯 오랫동안 보지 못한 기분이야.”
앤이 한숨을 지었다.
“두 분이 결혼식을 올린 지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게믿어지지 않아.모든 것이 다 변해버렸어. 라벤더 아주머니도, 앨런 목사님 부부도 모두 다 떠났어. 덧문이 굳게 닫힌 목사관이 얼마나 외롭게 보였는지 몰라. 어젯밤에 거길 지나다 보니까 거기 살던 사람들이 모두 죽어버린 듯 황량한 느낌이 들더라.”
“우리 마을에 앨런 목사님만큼 좋은 목사님이 또 오실 순 없을 것 같아. 이번 겨울에도 우리는 여러 명의 목사 후보자를 다 만나게 되겠지. 그래도 한 달이면 보름 정도는 예배도 올리지 못할 거야. 그리고 너랑 길버트도 가버릴 테니, 정말 끔찍할 정도로 지겨운 겨울이 될 거라고.”
다이애나가 우울하게 말했다.
“프레드는 여기 있을 거잖아.”
앤이 슬쩍 다이애나의 속마음을 건드렸다.
“린드 아주머니는 언제 이사 오신대?”
마치 앤의 말을 듣지 못하기라도 한 듯 다이애나가 되물었다.
“내일. 린드 아주머니가‘초록 지붕 집’에 같이 살게 되어 너무 기뻐. 이 역시 또 다른 변화지. 마릴라 아주머니랑 나는 어제 손님방 물건을 모두 치웠어. 그런데 난 그 일이 정말 싫었단다. 바보 같은 소리라는 건 알지만, 난 꼭 우리가 무슨신성 모독죄라도 범하고 있는 기분이었어. 그 방은 언제나 나에겐 신성한 곳이었거든. 내가 어렸을 땐 손님방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방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얼마나 손님방 침대에서 자보고 싶어 했는지 너도 알지? 물론‘초록 지붕 집’의 손님방은 아니야. 그 방에서는 절대로 잠을 잘 수 없지. 너무 엄숙했거든. 그 방에서 잠을 잤다가는 경외심으로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할 거야. 마릴라 아주머니의 심부름으로 그 방에 들어가야 했을 때도 난 방을 제대로 걸어 다니지도 못했어. 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 마치 교회에 들어간 것처럼 숨을 죽이고 까치발을 하고 다니다가 방을 빠져나와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니까. 조지 화이트필드와 웰링턴 공작의 그림이 거울 양쪽으로 나란히 걸려 있었는데, 내가 그 방에 들어갈 때마다 나를 매섭게 노려보는 것 같았어. 특히 내가 거울을 살짝 보려고 할 때면 그런 느낌이 들었지.‘초록 지붕 집’에서 내 얼굴을 찌그러뜨리지 않고 보여주는 거울은 그것뿐이었는데. 난 마릴라 아주머니가 어떻게 감히 그 방에 들어가 청소를 하는지 정말 의아했거든. 이제 그 방은 깨끗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헐벗었어. 조지 화이트필드와 웰링턴 공작의 초상화는 위층으로 추방당했고. ‘세상 영화가 다 무상하여라!’”
앤이 웃으며 조금쯤은 아쉬움을 담아 말을 맺었다. 우리가 오랫동안 신성하게 여겼던 곳을 훼손하는 일은 절대 유쾌한 일이 될 수 없는 것 아니던가. 비록 더 이상 찾지 않게 되었다 하더라도.
“네가 가버리면 난 정말 외로울 것 같아. 바로 다음 주잖아!”
다이애나가 한숨을 백 번은 내쉬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영원히 하나야. 다음 주의 슬픔 때문에 이번 주의 기쁨을 망쳐서야 되겠니. 나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면 정말 싫어. 집과 나는 정말 친한 친구 같았는데. 외로움도 그래, 정말 괴로워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라고. 넌 여기서 다정한 옛 친구들과 함께 지낼 수 있잖아. 거기다 프레드까지! 난 낯선 사람들 틈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있게 될 거야!”
앤은 명랑하게 말했다.
“길버트와 찰리 슬론은 빼고 말이지!”
앤의 과장된 말투를 흉내 내며 다이애나가 비아냥댔다.
“물론 찰리 슬론은 나에게 큰 위안이 되겠지.”
앤이 역시 비아냥거리는 말로 그 말에 응수하면서 둘은 소리 높여 웃음을 터트렸다. 앤이 찰리 슬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이애나는 잘 알고 있지만 이런저런 마음속 이야기가 오고가도 길버트 블라이드에 앤의 마음은 알 길이 없었다. 사실은 앤 스스로도 자기 마음이 어떤지 몰랐다.
“남자들도 킹스포트의 어딘가에서 하숙하겠지, 그게 내가 아는 전부야.”
앤이 말을 이어 나갔다.
“레드먼드에 가게 되다니 정말 기뻐. 시간이 좀 흐르면 레드먼드도 진정으로 좋아하겠지만 처음 몇 주는 힘들 거야. 방학이 되면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 해도 마음에 위로를 얻을 수 없을 거라고. 퀸스에 다닐 때도 크리스마스까지 기다리기가 천 년은 되는 것 같았어.”
“앤, 모든 것은 변해. 또 변할 거고. 아무것도 예전 모습 그대로 남는 것은 없을 거야.”
다이애나가 슬픈 듯이 말했다.

“우린 갈림길에 서 있어. 우린 그것을 받아들여야 해. 그런데 어른이 된다는 것이 우리가 어릴 때 생각했던 것만큼 정말 그렇게 좋은 일일까?”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앤이 말했다.
“잘 모르겠어. 좋은 점도 있겠지, 뭐.”
여전히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살포시 미소를 띤 다이애나가 말했다. 다이애나의 이런 모습은 앤이 거리감을 느끼게 했고 자기는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다이애나 혼자만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아. 가끔 어른이 된다는 생각을 하면 소름이 끼쳐. 그럴 때면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게만 해준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른이 된다는 것에도 곧 익숙해지겠지, 뭐. 시간이 지나면서 예상치 못했던 일도 적어질 거야. 그렇지만 그런 예상치 못한 일이야말로 인생에 짜릿함을 더해주는 것 아닐까? 우린 이제 열여덟이고, 2년만 지나면 스무 살이 돼. 내가 열 살때난 절대로 스무 살이 되지 않을 것처럼 많은 나이라고 생각했어. 앞으로 우리가 눈치채지도 못한 사이에 넌 온화한 중년 부인이 되어버릴 테고, 난 방학이면 네 집이나 방문하는 노처녀가 되어 있겠지. 넌 나를 위해 항상 여분의 자리를 마련해둘 테고, 그렇지 않니, 다이애나? 물론 손님방까지 내어주길 바라진 않을게. 노처녀가 손님방까지 차지하려 들 순 없겠지. 난 유라이어 힙2)처럼 현관 옆이나 응접실 옆에 딸린 작은 방이면 만족이야.”
앤이 활기차게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앤. 너야말로 멋지고 잘생기고 거기다 부자인 남자와 결혼할 텐데, 에이번리의 손님방이 너의 화려함에 어디 가당키나 하겠니. 어린 시절 친구들을 향해 콧대나 세우지 않을지 몰라.”
다이애나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정말 한심한 일이게. 내 코는 뭐 봐줄 만하긴 하지만. 친구들 앞에서 콧대를 세우는 건 내 아름다운 코를 망치는 일이야. 뭐 하나를 망쳐도 좋을 만큼 내 얼굴에 자랑할 만한 구석이 많은 것도 아니니까 내가 그래선 안 되지. 설사 내가 식인종 섬나라 왕과 결혼한다고 해도 네 앞에서 콧대를 세우지는 않겠다고 맹세할게, 다이애나.”
미끈한 콧대를 쓰다듬으며 앤이 말했다.
둘은 또 한 번 까르르 웃음을 터트린 다음 헤어져 다이애나는 ‘비탈길 과수원집’으로 돌아갔고, 앤은 우체국으로 향했다. 우체국에는 편지 한 통이 앤을 기다리고 있었다.‘반짝이는 호수’의 다리에서 길버트를 만났을 때 앤은 편지 내용으로 잔뜩 흥분해 있었다.
“프리실라 그랜트도 레드먼드에 간대.”
앤이 기쁜 듯 소리를 높였다.
“정말 잘되지 않았니? 난 프리실라와 함께 대학에다니고 싶었지만 프리실라 아버지가 보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어쨌든 아버지가 프리실라를 대학에 보내기로 했다니, 이제 우린 같은 집에서 하숙할 거야. 프리실라 같은 옛 친구가 내 곁에 있기만 하면 백만 대군도 대적할 수 있고 무시무시한 결사대 같은 레드먼드의 교수들도 두려울 게 없을 것 같아.”
“우린 모두 킹스포트를 좋아하게 될 거야. 사람들이 그러는데, 킹스포트는 멋진 고성 같은 도시래. 무척 아름다운 공원도 있는데, 그곳 경치는 정말 장관이라더라.”

길버트가 말했다.
“글쎄, 그곳이 여기 에이번리보다 더 아름다울까? 아니,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
앤이 중얼거리며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다른 별에 어떤 환상의 세계가 있더라도 앤에게만은 집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하는 눈빛이었다.
연못 다리에 몸을기대선두 사람은 석양이 흩뿌려놓은 마법 같은 세상을 마음껏 음미했다. 앤이엘레인이 되어 카멜롯으로 떠내려가던 날, 가라앉던 배에서 기어 올라왔던 바로 그 장소였다. 서쪽 하늘은 여전히 아름다운 자줏빛 석양에 물들어 있었지만, 막 떠오른 달빛을 받은 물빛은 거대한 은빛 꿈처럼 달빛 속을 흘러갔다. 추억은 두젊은이에게달콤하고 미묘한 마법을 걸어놓았다.
“왜 말이 없니, 앤?”
마침내 길버트가 입을 열었다.
“말을 하거나 움직이면 이 아름다움이 사라질까 봐 두려워서. 깨져버린 침묵처럼 말이야.”
앤이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길버트가 다리 난간을 짚고 있는 앤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길버트의 갈색 눈동자가 어둠으로 더욱 깊어지고, 아직도 장난꾸러기 같은 입술이 영혼까지 떨리게 한 희망과 꿈을 이야기하려고 살며시 열렸다. 하지만 앤은 낚아채듯 손을 쏙 빼버리고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석양의 마법이 순식간에 깨져버렸다.
“집에 가야겠어.”

앤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고 큰 소리로 말했다.
“마릴라 아주머니가 오늘 오후에 두통을 앓으셨어. 아마 지금쯤 쌍둥이 때문에 무척 힘드실 거야. 내가 이렇게 오래 밖에 나와 있으면 안 되는데.”
앤은‘초록 지붕 집’으로 가는 오솔길로 들어설 때까지 쉴 새 없이 이런저런 말을 지껄여댔다. 안타깝게도 길버트는 앤의 말을 비집고 한 마디도 해볼 기회를 얻지 못했다. 길버트와 헤어지자 앤은 안도감마저 느꼈다. 앤에게는 길버트에 대한 감정이 예전 같지 않다는 자각이 일었다. ‘메아리 집’ 정원에서의 그 짧았던 순간부터였다. 무엇인가 낯선 감정이 오래되고 익숙한 아이 적 우정 속으로 파고들어 망치려 들었다.
‘지금까진 길버트가 가는 걸 보면서 다행이라 여긴 적이 없었는데…….’
반쯤 슬프고 반쯤 화가 난 앤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홀로‘초록 지붕 집’오솔길로 들어섰다.
“길버트가 계속 이렇게 이상하게 굴면 우리 우정을 영원히 망치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안 되는데. 절대 그렇게 되도록 놔둬선 안 돼. 왜 남자들은 좀 더 분별력 있게 행동하지 못하는 거야!”
하지만 앤은 여전히 마음이 개운치 못했다. 자기 손 위로 잠깐 스쳐간 길버트의 그 따스한 손길이 아직도 뚜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느낌이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상스러웠다. 삼 일 전 화이트 샌즈에서 열린 파티에서 찰리와 함께 춤을 추다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스스로도 인정할 수 없는 감정에 앤의 몸에서는 전율이 일었다. 하지만 이렇게 모호한 감정으로 생긴 어지러운 마음은‘초록 지붕 집’의 수수하고 밋밋한 부엌에 들어서자 모두 사라졌다.

부엌에서는 여덟 살 난 아이가 소파에서 구슬피 울고 있었다.
“데이비, 무슨 일이니?”
아이를 한 팔로 감싸 안으며 앤이 물었다.
“마릴라 아주머니와 도라는?”
“아줌마는 도라를 재우고 있어. 도라가 바깥 지하실 계단에서굴러떨어져서 코가 다 까졌어. 그리고…….”
데이비가 훌쩍거렸다.
“괜찮아, 울지 마. 도라가 가여워서 눈물이 나는 거니? 그래도 이렇게 운다고 무슨 도움이 되는 건 아니잖아. 도라는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운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단다, 데이비. 그리고…….”
“도라가 떨어진 것때문에우는 거 아냐.”
데이비는 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달래려는 앤의 다정스러운 말을 쑥 잘라버렸다.
“도라가 떨어지는 걸 못 봐서 우는 거야. 난 재미있는 걸 항상 놓치기만 해.”
“어머, 데이비!”
앤은 점잖지 못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너 지금 도라가 계단에서 떨어져 다친 걸 재미있다고 말하는 거니?”
“많이 안 다쳤거든.”
데이비가 시비조로 대답했다.

“만약 죽었다면 나도 슬펐을 거야, 누나. 그렇지만 우리 키스 집안사람은 그렇게 쉽게 안 죽어. 블루엣네처럼 말이야. 허브 블루엣도 저번 수요일에 건초더미에서 떨어져서 순무가 깔린 비탈길을 데굴데굴 굴러 진짜 무섭고 사나운 말이 있는 마구간까지 굴러갔는데도 살았어. 뼈 세 개밖에 안 부러졌거든. 린드 아주머니가 그러는데, 식칼에 찔려도 안 죽는 사람이 있대. 그런데 린드 아줌마는 정말로 내일 이사 오는 거야?”
“그래, 그렇단다. 아주머니한테 착하고 공손하게 대해야 돼. 알았지?”
“응, 착하고 공손하게. 근데 아줌마가 밤에 날 재워줄까?”
“아마 그렇겠지? 근데 그건 왜?”
“린드 아줌마 앞에서는 누나 앞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기도가 안 나올 것 같아서 그래.”
데이비가 대답했다.
“왜 그런데?”
“모르는 사람 앞에서 하느님께 말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닌 거 같아서. 도라는 할 수 있으면 린드 아줌마 앞에서 기도하라고 그래. 하지만 난 안 할 거야. 아줌마가 방에서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할 거라고. 그래도 되겠지, 누나?”
“그렇게 해. 네가 잊어버리지 않고 기도를 하기만 한다면 괜찮아.”
“절대 안 까먹어. 기도하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누나 앞에서 하는 게 혼자 하는 것보단 훨씬 재미있지만. 누나가 집에 있으면 좋을 텐데. 난 누나가 왜 우리를 놔두고 가려 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가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냐. 그냥 가야 할 것 같은 거지.”
“안 가고 싶으면 안 가면 되잖아. 누나는 다 큰 어른인데. 난 크면 내가 하기 싫은 일은 하나도 안 할 거야.”
“살다 보면 하고 싶지 않은 일도 반드시해야 할때가 있어.”
“아냐, 난 안 그래.”
데이비는 잘라 말했다.
“두고 봐! 지금은 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는 일이 많지만, 안 그러면 마릴라 아줌마나 누나가 날 그냥 내 방으로 보내버릴 테니까. 그렇지만 내가 크면 그럴 수 없지. 그럼 날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근데 누나, 밀티 볼터가 그러는데 누나가 남자들을 이길 수 있는지 보려고 대학에 가는 거라던데. 자기 엄마가 그렇게 말했대. 정말 그래? 궁금해.”
잠깐 동안 앤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볼터 아주머니의 생각 없는 말 때문에 자기가 해를 입을 일은 없지 싶은 생각에 웃어버렸다.
“아냐, 데이비. 그런 게 아니야. 난 가서 공부를 할 거고 더 어른스러워질 거야. 많은 걸 배우기도 해야지.”
“뭐 배울 건데?”

“‘신발과 배와 봉랍
그리고 양배추와 임금님.3)’”

앤이 시를 인용했다.
“그럼 누나가 정말 남자들을 이기고 싶으면 그땐 어떻게 할 거야? 궁금해.”
끈질긴 데이비였다. 아마 여자가 남자를 이긴다는 생각에 꽤나 마음이 끌렸던 모양이었다.
“그럼 볼터 아주머니께 한번 여쭤봐. 볼터 아주머니가 나보다 훨씬 더 잘 아시는 것 같다, 데이비.”
앤이 무심히 대답했다.
“다음번에 그 아줌마 만나면물어봐야지.”
데이비는 결심한 듯 대답했다.
“데이비, 만약 그러기만 하면!”
아차 싶은 앤이 소리쳤다.
“그렇게 하라고 했잖아.”
데이비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제 잠잘 시간이다.”
곤경에서 빠져나오려고 앤이 황급히 말을 끝맺었다.
데이비가 잠자리에 든 후 앤은 홀로 ‘빅토리아 섬’까지 산책을 나가 섬세한 실로 짠 듯한 달빛 커튼이 둘러진 개울가에 앉았다. 시냇물과 바람이 앤의 주위를 맴돌며 이중주로 웃음소리를 냈다. 앤은 항상 이 시냇물을 사랑했다. 앤은 반짝이는 개울물을 보며 수많은 꿈을 꾸었다. 또한 어린 시절 사랑에 굶주린 마음을, 이웃들의 심술궂은 놀림을, 그리고 소녀의 고민거리를 이 시냇물에 떠내려 보냈다. 상상 속에서 앤은 저 멀리 아무도 살지 않는 요정 나라의 빛나는 해변을 씻어 내리는 이야기의 바다를 항해했다. 잃어버린 아틀란티스 섬4)과 엘리시온5)이 있고, 바다를 떠도는 사람에게 길을 안내해주는 저녁별이 반짝이며, 마음속의 이상향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었다. 앤은 현실에서보다 상상의 세계에서 더욱 풍요로움을 느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사라지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1. 예레미아 8장 20절: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2. 찰스 디킨스의 작품 《데이비드 코퍼필드》에 나오는 위선적이고 교활한 성격의 사무원.
3.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 1832~1898)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편 《거울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시 <해마와 목수(The Walrus and The Carpenter)>의 일부. 
4. 지브롤터 서쪽의 대서양 해저에 함몰했다고 플라톤이 말한 전설상의 섬.
5. 축복받은 사람들이 죽은 후에 사는 낙원.




2

가을의 화환





그다음 주는 쏜살같이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도 수없이 많았다. 작별 인사를 하고 또 받기도 해야 했다. 사람들이 건네는 작별 인사 중에는 기분이 좋은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앤의 희망과 생각에 동조해 같이 기뻐해주면 유쾌했지만, 앤의 잔뜩 부푼 마음에서 ‘약간의 바람’을 빼줘야 하는 게 자기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작별 인사에는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에이번리 마을 개선회는 앤과 길버트에게 조시 파이의 집에서 송별 파티를 열어주기로 했다. 파이네 집을 선택한 이유는 집이 크고 편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파이네 집을 빌려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한다면 앞으로 파이네 딸들이 마을 개선회 일에 절대 나서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파티는 즐거웠다. 파이네 딸들도 정중하게 행동했고 파티 분위기를 해칠 어떤 말이나 행동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이 파이네의 평소 모습은 아니었지만 조시도 유별하게 상냥하게 굴었다. 앤에게 이런 말을 다 건넸을 정도였으니까.
“앤, 새 드레스가 너한테 잘 어울리는구나. 그 옷을 입으니까 거의 예쁘게 보여.”
“그렇게 말해주어 고마워.”

앤은 아주 기쁘다는 듯 대꾸했다. 앤의유머 감각도 일취월장했다. 열네 살 적에 그런 말을 들었다면 분명 기분을 망쳤을 텐데 이제는 그냥 웃어넘길 수 있게 되었으니. 조시는 앤이 저 사악한 미소 뒤에서 자기를 비웃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지만 계단을 내려오면서 거티와 앤 험담을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앤 셜리가 대학에 가게 되었다고 콧대가 하늘을 찌를 테니 이제 두고 봐!”
옛 친구들이 모두 파티에 모였다. 모두들 즐겁고 들뜬 기분이었다. 다이애나 배리는 볼우물이 파인 장밋빛 얼굴로 언제나 충성스러운 프레드의 보호를 받으며 다녔다. 단정하고 분별력 있는 제인앤드루스는 수수한 모습이었고, 금발 머리에 빨간 제라늄을 꽂은 루비 길리스는 크림색 블라우스를 입고 그 어느 때보다 더 멋스럽고 산뜻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길버트 블라이드와 찰리 슬론은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니는 앤 옆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캐리 슬론은 안색이 창백하고 기분이 울적해 보였다. 사람들 말로는 캐리 아버지가 올리버킴벌을 파티 근처에 얼씬도 못 하도록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무디 스퍼전 맥퍼슨은 동그란 얼굴과튀어나온 귀가 오늘따라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빌리앤드루스는 주근깨 가득한 크고 동그란 얼굴로 파티 내내 한쪽 구석에 앉아 누군가 말을 걸 때마다 실실 웃어주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면서 앤에게 박힌 눈을 떼지 못했다.
앤은 파티가 열린다는 것은 알았지만, 길버트와 더불어 자기가 에이번리 마을 개선회의 창설자로 칭송의 말과 함께 소개될 줄은 짐작도 못 한 터였다. 소개말에는 존경의 인사마저 담겨 있었다. 공로에 대한 감사 선물로 앤은 셰익스피어 희곡을, 길버트는 만년필을 받았다. 앤은 너무 놀랐고, 무디 스퍼전의 엄숙한 설교조의 찬사에 기분이 너무 좋아 크고 깊은 잿빛 눈동자가 눈물에 젖을 정도였다. 사실 앤은 에이번리 마을 개선회를 위해 성실하게 열심히 일했다. 회원들이 앤의 그런 노력을 알아주었다는 사실에 앤은 가슴이 다 뭉클했다. 회원들 하나하나가 모두 좋은 사람이었고 친절했으며 또 유쾌했다. 심지어 파이네 딸들에게도 좋은 점은 있었고, 이 순간 앤은 세상 모든 것이 다 사랑스러웠다.
그날 저녁 앤은 그렇게 몹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파티가 끝날 무렵, 지금까지의 엄청난 기쁨을 감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달빛을 받으며 베란다에서 저녁을 먹는 동안 길버트가 앤에게 어떤 감상적인 말을 하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길버트를 벌할 생각으로 앤은 그만 찰리 슬론이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청하자 정중한 태도로 허락해버렸다. 하지만 앤은 이런 벌로 상처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길버트가 보란 듯 루비 길리스와 함께 길을 나섰고, 고요하고 상쾌한 가을 공기 속을 거닐며 두 사람이 나누는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앤에게도 다 들려왔다. 두 사람은 분명 최고의 시간을 보내는데, 자기는 찰리 슬론 때문에 끔찍한 지루함에 시달려야 했다. 찰리 슬론은 쉴 새 없이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지만, 들어줄 만한 말은 어쩌다 한두 마디뿐이었다. 앤은 이따금씩 아무 뜻 없이 ‘그래.’, ‘아니.’라고만 대꾸하며 혼자 생각에 잠겼다. 그날 밤 루비는 너무 아름다웠고, 찰리의 왕방울 같은 눈은 햇빛에서보다 달빛에서 보니 더 끔찍했다. 그리고 어쩐 일인지 이 세상이 초저녁 무렵에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멋져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너무 피곤해서 그래. 그뿐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앤은 겨우 자기 방에 혼자 있게 되자 그렇게 말하며 울적한 마음을 달랬다. 앤은 자기가 정말 피곤할 뿐이라고 믿었다.
그런데그다음날 저녁, 길버트가‘유령의 숲’을 빠져나와 빠르고 곧은 발걸음으로 낡은 통나무 다리를 성큼성큼 건너오는 모습이 보이자 앤의 가슴이 뛰었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기쁨의 샘이 앤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는지 갑자기 기쁨이 샘솟았다. 결국 길버트가 마지막 저녁을 루비와 함께 보낼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너, 피곤해 보인다. 앤.”
“좀 피곤해. 하지만 그보다 더 나쁜 건, 내 기분이 좋지 못하다는 거야. 온종일 짐을 싸고 바느질을 하느라 피곤했는데, 작별 인사를 하겠다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여섯 분이나 찾아와 한결같이 나한테 인생의 화려한 빛을 빼앗고 회색의 음울하고 생기 없는 것만 남기고들 갔어. 11월의 아침처럼 우울한 말들만 했다고.”
“심술궂은 늙은 고양이들 같으니!”
길버트의 우아한 평이었다.
“아니야, 그런 분들은 아냐.”
앤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냥 그래서 기분이 좀 언짢아졌다는 것뿐이야. 그분들이 정말 심술궂은 고양이 같은 사람들이었다면 그냥 내가 무시하고 말았겠지. 다들 좋으신 분들이야. 어머니처럼 푸근하고 나를 좋아하고 또 나도 그분들을 좋아해. 그러니까 그 아주머니들이 나를 가르쳐주려고 한 말들이 더 무게감 있게 느껴지는 거야. 내가 대학에 가서 학사학위를 받는 것에만 정신을 쏟지 않나싶으셨대. 그 말을 듣고 나니 내가 정말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피터 슬론 부인은 한숨을 내쉬면서 내가 공부를 끝마칠 때까지 지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어. 그 말씀을 들으니 신경쇠약증에 걸려 회생 가망성이라곤 없는 3학년이 된 내 모습이 그려졌어. 에븐 라이트 부인은 4학년까지 레드먼드에 다니려면 돈이 엄청 들겠다고 했는데, 마릴라 아주머니 돈과 내 돈을 그런 바보 같은 짓에 다쏟아부을걸 생각하니 정말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더라. 재스퍼 벨 부인은 대학이 나를 망치지 않길 바란다고 하셨어. 다른 사람들도 망쳐놓았다고 하시면서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갑자기 4학년 말이 되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며 뻐기고 다니는 아주 밉살스러운 인간이 되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뼛속까지 차올라 왔어. 에이번리 사람을 모두 무시하고 깔보는 그런 사람 말이야. 엘리샤 라이트 부인은 레드먼드에 다니는 여학생들, 특히나 킹스포트에 사는 여학생들은 모두 다 화려하게 차려입고 거드름이나 피우고 다닌대. 그런 아이들 틈에 끼어 있으려면 내 마음이 편치 못할 거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또 내가 잔뜩 주눅이 든 채 조롱이나 당하는 시골뜨기 촌닭으로 보이는 거야. 구릿빛 부츠를 신고 레드먼드의 고풍스러운 복도를 돌아다니는.”
앤의 말에는 웃음과 한숨이 한데 섞여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앤에게 이런 걱정을 담은 말들은 부담이었다. 설사 존경할 수 없는 사람이 한 말이라 하더라도 새겨듣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말을 듣고 있는 동안 인생은 너무나 밋밋하게 느껴졌고, 모든 야망들은 촛불이 꺼지듯 일순간에 사라졌다.
“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마.”
길버트가 힘주어 말했다.
“그 사람들이 보는 인생의 시야가 얼마나 좁은지 너도 잘 알잖아. 신의 멋진 피조물들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한 일을 하는 사람은 모두 아나테마 마라나타6)가 될 거야. 넌 에이번리에서 여자로서는 맨 처음으로 대학에 가는 거잖아. 개척자들은 모두 말도 안 되는 반대로 고통을 받더라.”
“나도 알아.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느끼는 감정은 다르잖아. 내 상식으로도 네 말이 모두 맞아. 하지만 때론 상식이 통하지 않는 때가 있지 않니? 비상식에 점령당해버리는 거지. 엘리샤 부인이 떠난 뒤, 정말이지 짐을 마저 싸고 싶은 마음도 싹 사라져 버렸어.”
“넌 그냥 피곤할 뿐이야, 앤. 다 잊어버리고 나랑 산책이나 나가자. 저 늪지 너머 숲까지 어슬렁거리다 돌아오자.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을 것 같아.”
“있을 것 같아? 거기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단 말이니?”
“응, 몰라. 분명히 있을 것 같긴 하지만. 봄에 봐둔 게 있긴 해. 자, 가보자. 다시 아이로 돌아가서 바람을 따라가 보는 거야.”
두 사람은 활기차게 출발했다. 전날 저녁의 불쾌한 감정을 다 잊은 건 아니지만 앤은 길버트에게 상냥하게 대해주었다. 길버트도 그동안 깨달은 바가 있었던지 어렸을 적 친구와의 우정을 깰 행동은일절 하지않았다. 부엌 창문으로 린드 부인과 마릴라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둘은 언젠가 좋은 짝이 될 거예요.”
린드 부인이 만족스럽다는 듯 말을 꺼냈다.
마릴라의 몸이 약간 움찔거렸다. 그렇게 되길 마음 깊이 바라고야 있었지만, 사실도 험담처럼 말하는 린드 부인의 입을 통해 그 말을 듣고 싶진 않았다.
“아직 애들인데요, 뭐.”
마릴라는 짧게 대답했다.
린드 부인이 사람 좋게 웃었다.
“앤은 열여덟이잖아요. 나는 그 나이 때 결혼을 했는걸요. 우리처럼 늙은 사람들은 말이죠, 마릴라, 애들은 영원히 자라지 않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어버려요, 그럼. 앤도 이제 다 자랐고 길버트도 다 큰 어른이에요. 그리고 길버트는 앤이 밟은 곳이라면 땅에라도 절을 할 거예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이지요. 앤이라고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겠죠. 나야 앤이 레드먼드에서 바보 같은 로맨스나 만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지만요. 난 남녀공학 학교가 탐탁지 않아요. 그런 학교는 좋게 생각해본적이 없어요, 그럼. 그런 학교에다니는 애들이 서로 수작이나 부리는 것 말고 또 무슨 일을 하겠어요.”
린드 부인의 말은 엄숙하기까지 했다.
“공부도 좀 하겠지요.”
마릴라가 미소를 머금으며 응수했다.
“해봤자 얼마나 하겠어요.”
린드 부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렇지만 앤은 공부할 거예요. 앤이야 어디 수작이나 걸고 다니는 아이예요? 하지만 길버트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잖아요, 그럼. 젊은여자아이들이 그렇죠. 찰리 슬론도 앤에게 홀딱 빠져 있어요. 하지만 슬론 집안사람하고결혼하라고 하고 싶진않아요. 슬론 사람들은 착하고 정직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슬론네 사람이니까요.”
마릴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번리 사람이 아니라면 ‘슬론네 사람은 슬론네 사람일 뿐이야.’라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를 것이다. 그러나 어느 마을에나 슬론 집안사람 같은 사람은 꼭 있게 마련이다.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지만그래 봤자슬론네 사람이고 영원히 슬론네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좋게 말해주려고 해도 말이다.
길버트와 앤은 자기들 미래가 린드 부인의 손에 의해 빚어지고 있는 것도 전혀 모른 채‘유령의 숲’을 거닐고 있었다. 숲 너머에는 추수가 끝난 들판이 장밋빛 섞인 연푸른 하늘 아래서 노란빛을 내며 저무는 해를 즐기고 있었다. 저 멀리 가문비나무 숲은 갈색으로 빛나고, 길게 드리운 숲 그림자가 그 너머 목장까지 걸쳐 있었다. 둘을 감싸 안은 바람이 전나무 가지를 흔들며 가을의 선율을 담아 노래를 불렀다.
“이 숲에는 정말 유령이 살고 있어, 내 옛 기억에 따르면 그래.”
끝이 하얗게 반짝이는 가문비나무 잔가지를 주우려고 상체를 기울이며 앤이 말했다.
“어린 다이애나와 내가 여전히 여기서 놀고 있는 것 같아. 황혼이 내릴 무렵 ‘드리아드의샘’ 가에앉아서 유령과 밀회를 즐기지. 난 해거름에는 너무 무서워서 여기를 지나지도 못했어. 다이애나와 내가 만들어낸 유령 중에 정말소름 끼치는유령이 하나 있었거든. 죽임을 당한 아이의 유령이었지. 그 아기 유령이 등 뒤로 살그머니 다가와서는 어깨 위에 차가운 손가락을 올린다고. 고백하자면, 해가 진 후 여기 올 때면 지금까지도 내 등 뒤에서 작고 음흉한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하얀 옷을 입은 여자나 머리 없는 남자나 해골은 무섭지 않은데, 죽은 아기의 유령은 너무 무서워서 실제로 눈앞에 나타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야. 우리의 이런 상상에 마릴라 아주머니와 배리 아주머니는 무척 화를 내셨어.”
회상에 잠긴 듯 미소를 지으며 앤이 말했다.
늪 위쪽으로 펼쳐진 숲은 여기저기 얇은 거미줄이 쳐진 채 저무는 해를 받아 온통 자주색 장관이었다. 단풍나무가 빙 둘러선 황량한 가문비나무 숲을 지나자 햇빛이 잘 드는 계곡이 나왔고 둘은 거기서 길버트가 찾던 것을 발견했다.

“아, 여기 있구나.”
길버트가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사과나무네. 이렇게외딴곳에!”
앤도 기뻐서 환호했다.
“그래, 이것 봐. 진짜 사과가 열렸어. 소나무와 너도밤나무가 우거진 곳에 사과나무가 자라고 있다니. 근처 과수원은 1.5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데. 지난봄 우연히 여기 왔다가 본 거야. 그땐 사과꽃으로 온통 하얗더라고. 그래서 가을에 여기 다시 와서 사과가 열렸는지 보려고 마음먹고 있었지. 자, 봐. 사과가 잔뜩 열렸어. 먹음직스럽다. 진한 붉은색과 황갈색이 나는 사과야. 야생종은 대부분이 녹색이고 별로 먹음직스럽지도 않은데, 이건 달라.”
“씨앗이 몇 년 전에 우연히 땅에 떨어졌나 봐. 전혀 다른 나무들 틈새에서 혼자 어떻게 외톨이로 자라서 사과 열매를 맺었을까. 아주 용감하고 의지가 굳은 나무야!”
앤이 꿈꾸듯 얘기했다.
“쓰러진 나무가 있네. 이끼로 덮여서 푹신해. 여기 앉자, 앤. 숲 속 나라의 왕좌 같다. 내가 나무에 올라가서 사과를 좀 따올게. 너무 높이 열려 있어. 햇빛까지 닿고 싶었나 봐.”
사과는 아주 달콤했다. 황갈색 껍질 속에 희미하게 붉은 혈색이 도는 하얀 과육이 제 속살을 드러냈다. 사과 맛만 제대로일 뿐만 아니라 과수원 사과는 가지지 못한 기분 좋게 톡 쏘는 야생의 맛도 났다.
“에덴동산 금단의 사과도 이런 맛을 내지는 못했을 것 같아.”
앤이 평했다.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이다. 바로 조금 전에는황혼빛이었는데, 이젠 달빛이야. 아름다운 변화의 순간을 영원히 잡아두지 못하는 게 아쉬워. 하지만 이런 순간은 절대로 잡아둘 수 없는 거겠지.”
“그래, 늪지대를 돌아서 ‘연인의 오솔길’로 가자, 어때? 집에서 출발할 때처럼 여전히 기분이 별로니, 앤?”
“아니, 이 사과가 내 배고픈 영혼에 만나7)가 되어주었어. 이제 레드먼드와 레드먼드에서의 근사한 4년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리고 그 멋진 4년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
“글쎄, 그 길의 끝에는 또 다른 길이 이어지겠지. 어떤 길이 펼쳐질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알고 싶은 생각도 없어. 오히려 모르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앤은 가볍게 대답했다.
그날 밤 고요에 젖은‘연인의 오솔길’은 희미하고 신비로운 달빛을 받으며 너무나 달콤한 장소로 변해 있었다. 두 사람은 말이 필요 없는 단짝처럼 기분 좋게 그 어둠 속을 걸어 내려갔다. 두 사람 다 말이 없었다.
‘길버트가 항상 오늘 밤처럼만 행동해준다면 모든 것이 간단하고 좋을 텐데.’
앤은 생각했다. 길버트는 뒤따라 걸어오는 앤을 바라보며 앤의 모습이 마치 하얀 아이리스 같다고 생각했다. 날아갈 듯 아름다운 드레스, 가느다란 몸매의 우아함.
‘앤이 나를 좋아할 날이 올지 모르겠어.’그런 생각이 들자, 한 줄기 고통이 길버트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6. 성경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아나테마(anathema)라는 헬라어 단어는 ‘저주받은 물건이나 사람’을 뜻하며, 마라나타(maranatha)의 의미는 ‘주께서 임하시느니라.’이다.
7.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받은 양식. 출애굽기 16장 14~3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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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비둘기요 (♡.62.♡.41) - 2024/03/25 05:37:05

나단비씨가 이뻐요 나머지 부분 계속 이어서 올린다니 정말로 기쁩니다.잘 볼게요^^

나단비 (♡.252.♡.103) - 2024/03/25 05:41:47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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