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3권 25~26

나단비 | 2024.03.27 17:54:00 댓글: 0 조회: 71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6868
25
백마 탄 왕자님





패티네 집 창가에 서서 저 멀리 공원의 소나무들을 바라보며 앤이 말했다.
“오늘은 집 안에서 보낼까요, 밖으로 나갈까요?”
“제임시나 아주머니, 오늘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오후를 보낼 작정이에요. 맛있는 사과를 먹으며 저 귀여운 고양이 세 마리와 두 마리 도자기 개와 함께 난로가 피워져 있는 이 아늑한 거실에서 보낼까요? 아니면 공원으로 나가 잿빛 숲과 바윗돌에 철썩거리는 회색빛 파도의 유혹에 빠져볼까요?”
“내가 너처럼 젊다면 공원의 아름다움 쪽을 택하겠다.”
조지프의 누런 귀를 뜨개바늘로 간질이며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대답했다.
“아주머니도 우리만큼 젊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요.”
앤이 놀리는 소리를 했다.
“물론 정신적으로야 그렇지. 하지만 내 다리는 너희들만큼 젊지 않다는 것도 인정해야 해. 앤, 나가서 바람이라도 좀 쐬고 와라. 요즘 좀 창백해 보인다.”
“네, 공원에 갔다 올게요. 저도 오늘은 집 안의 조용한 즐거움은 사양하고 싶네요. 혼자서 마음껏 자유로움을 느껴보고 싶어요. 공원엔 아무도 없겠죠, 사람들은 다 축구 경기를 보러 갔을 테니까요.”
앤이 좀 수선스럽게 말했다.
“넌 왜 안 갔니?”
“아무도 저한테 가자는 말을 안 했어요. 저 조그맣고 끔찍하게 생긴 댄 레인저만 빼놓고는. 그 애랑은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그 애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진 않아서 그냥 가고 싶지 않다고만 했어요. 별로 상관없어요. 어쨌든 오늘은축구 경기를 볼 기분이 아니니까요.”
“그래,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오너라.”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우산은 가지고 나가라. 오늘은 비가 올 것 같다. 다리가 쑤시는 걸 보니 그래.”
“류머티즘은 노인들만 걸리나요, 아주머니?”
“누구나 류머티즘에 걸릴 수 있지. 하지만 늙은이들은마음마저류머티즘에 걸리는 거란다. 감사하게도 난 아직은 아니야. 정신까지 류머티즘에 걸렸다 싶으면 어서 가서 관을 골라두어야지.”
11월이었다. 붉은 노을이 지고, 새들은 떠나고, 바다는 깊고도 슬픈 찬가를 부르고, 소나무가 온몸으로 바람의 노래를 하는 달. 앤은 공원의 소나무 길을 따라 정처 없이 걸었다. 장엄하게 휘몰아치는 바람이 영혼의 안개까지 걷어가 주길 앤은 바랐다. 안개 낀 영혼으로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앤은 3학년을 시작하러 레드먼드에 돌아온 뒤로 계속, 지금까지 영혼을 톡톡 쏘던 인생의 명료함이 퇴색해버린 느낌이 들었다.
겉으로 보기엔‘패티네 집’에서의 삶은 예전과 다름없이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해야 할 일도 많고 학교 공부도 바빴으며, 모두가 함께 즐기는 금요일 밤이면 불이 훤히 켜진 커다란 거실이 사람들로 북적이며 농담과 웃음소리가 끝없이 울려 퍼졌다. 필리파의 편지 속 조너스도 종종 세인트컬럼비아에서 이른 기차를 타고 방문했다가 밤늦게 돌아가곤 했다. 조너스는‘패티네 집’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제임시나 아주머니만큼은 신학생들이 예전 같지 않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너스는 꽤 괜찮은 사람 같다. 하지만 목사라면 좀 더 진지하고 위엄이 있어야지.”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필리파에게 말했다.
“위엄이 없는 남자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는 말씀이세요?”
필리파가 따져 물었다.
“남자? 나는 지금 목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넌 블레이크를 장난삼아 사귀면 안 된다. 정말 그래선 안 돼.”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야단치듯 말했다.
“장난이 아니라고요.”
필리파가 반박했다.
하지만 앤을 제외한 누구도 그 말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필리파가 전과 다름없이 그저 연애를 즐기고 있다고 생각했고, 지금 필리파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에둘러 말하곤 했다.
“블레이크 씨는 알렉이나 알론조 같은 타입은 아니잖아. 그는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야. 그러니 그 사람이 상처받을지도 몰라.”
스텔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정말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나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필리파 고든! 난 네가 냉혹한 인간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 그런데 한 남자에게 상처를 줬으면 한다니!”
“그렇게 말한 적 없어. 내 말을 바로 들어줘. 난 내가 그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좋겠다고 말했을 뿐이야. 내가 그럴 힘이나 가졌으면 좋겠다는 말이라고.”
“이해가 안 간다, 필. 너 그 남자를 고의적으로 조종하는 거 아니었니? 그 외에 다른 목적은 없잖아.”
“난 그가 나에게 청혼하게 하고 싶어, 할 수만 있다면 말이야.”
필리파는 침착하게 말했다.
“필,어쩌면 좋니. 너에게는 두 손 들었다.”
스텔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길버트도 금요일 밤이면 가끔씩 찾아왔다. 항상 유쾌하게 농담도 하고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줄 이야깃거리를 내놓았다. 하지만 앤을 찾지도, 그렇다고 앤을 피하지도 않았다. 우연히 앤과 이야기할 상황이 되면 즐겁고 예의 바르게 얘기했다. 두 사람은 마치 만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처럼 서로를 대했다. 오래된 우정이란 말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 버렸다. 앤은 꼭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길버트가 자기 때문에 받은 실망과 상처를 완전히 극복한 것이 기쁘고 감사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4월의 그날 밤 과수원에서 앤은 길버트에게 큰 상처를 안겼고 길버트가 받은 상처가 치유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걱정했다. 하지만 앤은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사람은 죽어 땅에 묻히고 벌레들은 그 몸을 먹어 치우지만 사랑 때문은 아니다. 길버트가 곧 절망해 파멸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삶을 즐겼으며 야망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앤의 태도가 너무나 분명하고 차가운데 길버트가 절망해본들 무슨 소용이랴. 하지만 앤은 필리파와 농담을 주고받고 있는 길버트의 얼굴에서 그날저녁때본, 절대로 길버트를 사랑할 수 없다고 말했던 그 순간에 본 길버트 표정을 다시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상상이었는지 확실히 그 표정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길버트의 빈자리로 들어서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앤은 그런 사람을 두려워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았다. 만약 진짜 백마 탄 왕자가 찾아와 주지 않는다면 앤은 아마 평생 혼자일 것이다. 그 흐린 날 오후 바람 부는 공원에서 앤은 그렇게 굳게 마음먹었다.
갑자기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말한 대로 비가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앤은 서둘러 우산을 펴고 내리막길을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항구로 향하는 길에 다다르자 한바탕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고 그 바람에 우산이 거꾸로 뒤집혀버렸다. 앤은 필사적으로 우산을 움켜쥐었다. 그때 갑자기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제 우산을 씌워드려도 되겠습니까?”
앤이 올려다보니 키가 크고 눈에 띄게 잘생긴 남자가 눈 깜짝할 사이에 앤의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우수에 어린 검은 눈, 부드럽고 음악 소리 같은 감미로운 목소리, 앤이 꿈속에서 그리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설사 주문해서 만들었다 해도 상상 속의 주인공과 이렇게 똑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앤은 혼이 다 빠져나가 버린 것 같았다.
“저기 정자로 좀 서둘러 가는 게 좋겠군요. 소나기가 멈출 때까지 저기서 기다려야겠어요. 비가 그리 오래 내릴 것 같진 않군요.”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그 남자가 말했다. 남자의 말은 평범했다. 하지만 오, 그 억양이라니! 또 그 미소는! 앤은 심장이 이상스럽게 요동쳤다.
두 사람은 함께 정자까지 뛰어가 아늑해 보이는 지붕 아래 앉아 가쁜 숨을 골랐다. 앤은 거꾸로 뒤집힌 우산을 들고 웃었다.
“우산이 뒤집히니까 무생물이란 얼마나하잘것없는지 알게 되네요.”
앤이 명랑하게 말했다.
빗방울이 앤의 빛나는 머리카락 위에서 반짝였다. 물방울이 머리카락과 이마를 따라 흘러내렸다. 앤의 볼은 붉게 물들었고 커다란 눈 속에서 별들이 반짝였다. 남자는 앤을 찬사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앤은 남자의 시선 때문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 남자는 누구일까? 아, 코트 깃에 레드먼드의 상징인 붉은색과 흰색의 핀이 꽂혀 있었다. 하지만 1학년을 제외한 레드먼드의 모든 학생들을 얼굴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예의 바른 청년은 신입생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우리는 학교 동창인 것 같군요,”

남자가 앤의 핀 색깔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충분한 소개가 된 것 같네요. 난 로열 가드너라고 합니다. 그리고 당신은지난밤도서관에서 테니슨 논문을 읽고 있던 미스 셜리가 아닌가요?”
“네, 하지만 난 가드너 씨를 못 봤는데요. 전혀. 몇 학년인가요?”
앤이 말했다.
“아직 어느 학년에도 속하지 못한 기분이에요. 2년 전 레드먼드에서 2학년까지 다녔는데 그 이후론 유럽에 있었습니다. 공부를 마치려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려고요.”
“저도 올해 3학년이에요.”
“그럼 우린 학교 동창일 뿐 아니라 동급생이네요. 그럼 메뚜기가 먹어치운 지난 2년도 충분히 보상받은 거지요.”
그렇게 멋진 눈으로, 남자는 뭔가 뜻이 담긴 말을 했다.
비는 한 시간 만에 천천히 잦아들었다. 하지만 시간은 정말 빨리도 흘러갔다. 구름이 걷히고 희미한 11월의 햇살이 항구와 소나무 숲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 앤과 이 낯선 남자는 함께 집을 향해 걸었다.‘패티네 집’입구에 다다르자 남자는 가끔 방문해도 되겠냐는 허락을 구했고, 앤은 허락했다. 볼은 붉게 물들었고 심장이 손톱 끝까지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앤은 현관을 들어섰다. 항상 무릎에 올라와 앤에게 입을 맞추려고 들던 러스티도 앤이 뭔가딴생각에 빠져 있다는 걸알아차렸다. 앤은 지금 온몸이 낭만의 전율로 짜릿한 마당인데 귀 잘린 고양이에게 관심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날 밤‘패티네 집’의 미스 셜리 앞으로 작은 꾸러미 하나가 배달되었다. 열두 송이의 아름다운 장미가 담긴 상자였다. 필리파는 상자에서 떨어진 카드를 다급하게 주워서 봉투를 열고 안에 쓰인 이름과 시를 인용해 쓴 글을 읽어 내려갔다.
“로열 가드너! 앤, 난 네가 로열 가드너와 알고 지내는 사이인 줄 몰랐어.”
필리파가 소리쳤다.
“오늘 오후에 비 내리는 공원에서 만났어. 내 우산이 뒤집혀서 그 사람이 도와줬어.”
앤은 다급하게 설명했다.
“어머나! 어디서나 흔히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사건 때문에 로열 가드너가 긴 줄기 달린 멋진 장미를 열두 송이나, 그것도 낭만적인 시와 함께 보내오다니? 게다가 천하의 앤 셜리가 카드를 보고 신성한 장미처럼 얼굴을 붉힐까? 앤, 네 얼굴도 불게 물들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필. 너, 가드너 씨를 알아?”
“가드너 씨 여동생 두 명을 만난 적이 있어. 그리고 가드너 씨를 알지. 여기 킹스포트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걸. 그 사람이 가장 부자니까. 가드너 집안은 가장 부자에 가장 보수적인 집안이고 또 가장 청교도적인 사람들이잖아. 로이는 정말 멋있고 똑똑하지. 2년 전에 그 사람 어머니 건강이 나빠져서 로이가 학교를 쉬고 어머니를 따라 유럽으로 가야 했잖니. 아버지가 안 계시니까. 공부를 포기해야 했으니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거야. 하지만 사람들 말로는 로이가 내색하지 않고 즐겁게 잘 넘겼대. 피, 파이, 포, 펌.33)로맨스 냄새가 난다, 앤. 나, 정말 네가 부러워지려고 해. 하지만 그래도 로이 가드너가 조너스는 될 수 없어.”
“어휴! 못 말려.”
앤이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밤 앤은 밤이 늦도록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잠이 들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꿈같은 일이 현실로 나타난 지금 진짜로 꾸는 꿈이 이보다 더 매혹적일 수는 없으리라. 이제 진정한 왕자님이 찾아온 것일까? 자기 마음속 깊은 곳까지 꿰뚫어볼 듯 깊디깊은 검은 눈동자를 생각하며 앤은 로이 가드너야말로 드디어 자기를 찾아온 진정한 왕자님이라고 생각했다.
33. 《잭과 콩나무》에서 잭이 거인의 집에 숨어 있자 집에 들어온 거인이 냄새를 맡고 외치는 소리.




26
크리스틴





2월에는 3학년이 4학년을 위해 마련한 파티가 있었다. ‘패티네 집’의 여학생들도 그 파티에 참석하려고 준비에 바빴다. 앤은 파란 방의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바라보며 만족감에 사로잡혔다. 오늘은 특별히 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었다. 원래 이 드레스는 크림색의 간단하고 얇은 안감 위에 겉감은 시폰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필리파가 크리스마스 방학 동안 집으로 가져가 시폰 겉감 위에 작은 장미꽃 봉오리 장식을 달아가지고 왔다. 필리파의 멋진 손재주로 다시 탄생한 드레스는 레드먼드 모든 여학생의 부러움을 사는 드레스가 되었다. 심지어 파리에서 사 온다는 드레스를 입은 앨리 분조차 앤이 장미꽃 봉오리 드레스를 입고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앤은 머리에 꽂은 흰 난초가 과연 자기에게 어울리는지 살폈다. 로이 가드너가 파티를 위해 앤에게 보내준 것이었다. 앤은 레드먼드의 어느 여학생도오늘 밤이 꽃을 꽂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필리파가 다가와 부러움의 눈길을 보냈다.
“앤, 오늘은 정말 너만을 위한 밤이다. 너무 근사해. 열 번 중 아홉 번은 내 아름다움의 그늘이 너를 가렸는데 마지막 열 번째는 갑자기 피어난 너의 아름다움이 나를 완전히 가려버렸어. 도대체 어떻게 된 거니?”
“드레스 때문이야, 필. 아름다운 이 드레스 때문이라고.”
“아니야. 지난번 네가 눈부시게 아름답던 날도 너는 린드 아주머니가 만들어준 그 낡은 파란색 플란넬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잖니. 만일 로이가 아직 너한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게 아니라면오늘 밤에는 틀림없이 너에게 폭 빠지고 말 거야. 하지만 머리 위에 꽂은 난초는 너랑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아니, 이건 널 시기해서가 아냐. 난초는 너랑 어울리지 않는 꽃이야. 너무 이국적이라고. 너무 정열적이고 너무 오만하다고 해야 할까. 제발 그 꽃은 꽂지 말아줘.”
“알았어, 꽂지 않을게. 나도 사실 난초를 좋아하진 않아. 내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어. 로이도 이 꽃을 자주 보내는 건 아니야. 내가 나와 어울리는 꽃을 좋아한다는 걸 그도 알고 있어. 난초는 그냥 가끔씩 보면 좋은 꽃이지.”
“조너스는오늘 밤을 위해 봉오리가 맺힌 빨간 장미꽃을 보내왔어. 하지만 조너스는 오지 않을 거야. 빈민가에서 기도 모임을 열어야 한대. 사실 조너스도 여기 참석하기 싫었을 거야. 앤, 조너스가 날 좋아하지 않을까 봐 나 정말 두려워. 조너스를 그리워하다 죽을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열심히 공부해 대학을 졸업하고 학사를 따서 좀 더 분별력 있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될 것인지 결정을 내려야 해.”
“이보다 어떻게 더 분별력 있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니, 필? 그러니 차라리 조너스를 그리워하다 죽는 게 낫겠다.”
앤의 말은 잔인하게 들렸다.

“비정한 앤!”
“바보 필! 조너스가 널 사랑하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그래!”
“하지만 나한테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그렇다고 내가 시킬 순 없는 일이잖아. 하지만 그렇게 보이긴 해. 그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진심을 담은 눈으로 이야기했다고 진짜로 침구를 만들고 냅킨에 레이스를 달 순 없잖아. 난 정말 약혼한 다음에 그런 일을 준비하고 싶어. 너무 달콤한 운명이 되겠지?”
“블레이크 씨도 자기랑 결혼해달라고 너한테 말하는 게 두려울 거야, 필. 그는 가난하고 네가 항상 꿈꿔왔던 그런 집을 줄 수 없잖아. 그러니 그가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거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필리파는 슬픈 목소리로 동의했다.
“자, 기분전환 좀 해야겠다. 만약 조너스가 청혼하지 않는다면 내가 할 거야. 그럼 되잖아. 그럼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가는 거지. 나, 걱정 안 할래. 그런데 길버트 블라이드는 계속 크리스틴 스튜어트랑 만난다고 하던데. 알고 있었니?”
순간 목걸이를 걸던 앤의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아니, 내 손가락이 왜 이러지.
“아니, 몰랐어.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누구야?”
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물었다.
“로널드 스튜어트의 동생. 이번 겨울에 킹스포트에 왔어. 음악 공부하러. 아직 보진 못했지만 사람들이 그러는데 굉장히 예쁘대. 길버트 블라이드가 완전히 빠졌다고 그러더라. 난 네가 길버트를 거절한 게 너무 화가 나. 하지만 로이 가드너가 네 운명의 상대니까. 이제 알겠어. 어쨌든 앤, 네가 옳았어.”
친구들이 앤과 로이 가드너는 결혼하기로 운명지어진 짝이라고 할 때마다 얼굴을 붉히던 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갑자기 앤은 모든 것이 심드렁했다. 필리파의 수다도 귀찮았고 환영 파티도 시시하게 느껴졌다. 앤은 손으로 애꿎은 러스티의 귀만 못살게 굴었다.
“당장 그 쿠션에서 내려와, 이 고양이야. 네 자리로 가란 말이야!”
앤은 난초를집어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제임시나 아주머니는 벽난로 앞에 코트를 한 줄로 나란히 걸어놓고 옷을 따뜻하게 하는 중이고 로이 가드너는 고양이 사라와 장난치며 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라는 로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로이만 오면 항상 등을 돌려버렸다. 하지만‘패티네 집’의 다른 사람들은 로이를 너무 좋아했다. 제임시나 아주머니는 로이의 예의 바르고 깍듯한 태도와 호소력 있는 목소리에 반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로이를 칭찬했다. 로이야말로 자기가 만나본 최고의 남자라며 앤은 정말 행운아라고 단정 지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로이의 구애를 받는 일은 여자라면 누구나 원하는 낭만적인 일이었지만, 제임시나 아주머니나 다른 여자들이 너무 그런 식으로만 생각해주지 않았으면 싶었다. 앤이 코트를 입을 때 로이가 옆에서 거들어주며 시를 인용해 칭찬의 말을 중얼거려도 앤은 예전처럼 얼굴이 붉어지거나 낭만적인 기분이 들지 않았다. 레드먼드까지 걸으며 로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앤이 오늘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레스 룸을 나온 앤이 약간 창백해 보였지만 파티장에 들어서자 앤은 예전의 혈색과 광채를 되찾았다. 앤은 전과 다름없는 밝은 표정으로 로이에게 돌아왔다. 로이도 필리파가 말한 것처럼 ‘깊고 검은 벨벳 같은 미소’로 앤을 맞아주었다. 하지만 앤은 로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파티장 저 건너편 종려나무 밑에 서 있는 길버트를 보고 있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임에 틀림없는 여학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길버트를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었다.
크리스틴은 무척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중년이 되면 그 아름다움이 더욱더 빛날 것 같았다. 키가 크고 커다란 검푸른 눈동자에 상아색 피부, 검게 빛나는 부드러운 머리카락.
‘내가 항상 상상하던 모습이야.’
그런 생각이 들자 앤은 비참한 기분에 빠졌다.
‘장미꽃잎 같은 발그레한 볼, 반짝이는 자줏빛 눈, 칠흑 같은 검은 머리. 내가 꿈꾸던 바로 그 모습이야. 저 애의 이름이 코델리아 피츠제럴드가 아닌 것이 이상할 정도야. 하지만 크리스틴이 모든 면에서 나보다 예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래. 적어도 코만큼은 아니야.’
앤은 이런 결론을 내리고 나서야 조금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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