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3권 33~34

나단비 | 2024.03.28 16:36:43 댓글: 0 조회: 74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7073
33
20년 길





그로부터 3일 후 앤이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재닛이 울고 있었다. 눈물과 재닛은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앤은 덜컥 겁이 났다.
“무슨 일 있어요?”
앤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나, 나 오늘 마흔 살이 됐어요.”
재닛이 흐느꼈다.
“아, 그래요. 그런데 어제도 거의 마흔 살이었지만 괜찮았잖아요.”
웃지 않으려고 애쓰며 앤은 재닛을 위로했다.
“하지만, 하지만 존이 결혼해달란 말을 안 하잖아요.”
재닛은 눈물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아, 곧 말하겠죠. 시간을 좀 줘보세요, 재닛.”

위로의 말로는 부족했지만 앤은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시간이라고요!”
재닛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 사람에게는 20년이란 시간이 있었어요.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더 필요한 거예요?”
“그럼 존 더글러스 씨와 20년 전부터 교제해왔단 말인가요?”
“그래요, 하지만 한 번도 결혼 비슷한 얘기는 꺼낸 적이 없어요. 그러니 그 사람이 청혼할 거라는 기대는 이제 못 하겠어요. 결혼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어요. 그러니 다른 사람과 이런 얘기라도 하지 않으면 난 정말 미칠 것 같아요. 존 더글러스는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시기도 전부터, 거의 20년이나 나를 만났어요. 그냥 계속 가까운 관계이기만 했죠. 결혼 얘기는 없고 계속 가까워지기만 한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우리가 만난 지 8년이 지났을 때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난 그때쯤이면 그 사람이 결혼 얘기를 꺼낼 줄 알았죠. 이 세상에 나 혼자 남겨졌으니까요. 그 사람은 정말 다정했고 나를 가엾게 여겼어요. 내게 더 이상은 할 수 없을 만큼 잘했죠. 그런데 결혼 얘기는 하지 않았어요.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온 거예요. 사람들은 오히려 나를 비난해요. 그 사람 어머니가 저렇게 아프니까 내가 결혼을 안 하는 거라고 생각하죠. 내가 죽음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귀찮아하는 거라고 말들을 해요. 하지만 난 더글러스 부인을 돌볼 수 있다고요! 그렇지만 사람들이 마음대로 생각하게 놔뒀어요. 사람들이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욕하는 게 나으니까요. 존이 나에게 청혼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끔찍스러운 치욕이에요. 그런데 왜 그가 청혼하지 않는 걸까요? 그 이유만 알아도 이렇게 괴롭진 않을 것 같아요.”
“혹시 아들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더글러스 부인이 싫어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앤이 말했다.
“아, 아니에요. 그의 어머니는 당신의 목숨이 다하기 전에 어서 존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라는 말을 저한테 여러 번 했어요. 존한테도 항상 그렇게 이르고요. 요전 날에도 그렇게 말하는 걸 앤도 직접 들었잖아요.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쥐구멍으로라도 들어가고 싶어요.”
“저는 잘 모르겠는걸요.”
앤은 무기력하게 대답했다. 앤은 루도빅 스피드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틀렸다. 존 더글러스는 루도빅 스피드 같은 종류의 남자가 아니었다.
“그럼 좀 더 강경하게 나가보세요, 미스 재닛. 왜 오래전에 그에게 따져 묻지 않았어요?”
“아니에요, 난 그럴 수 없었어요. 난 존을 많이 좋아해요.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우리 관계가 서먹해질까 봐 두려워요. 난 다른 사람은 원하지 않아요. 그러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요.”
“그럼 존이 더 남자답게 나왔을지도 모르잖아요.”
앤이 몰아세웠다.
“아니, 아마 아니었을 거예요. 어쨌든 난 그런 시도를 하는 게 무서웠어요. 내 말을 진짜로 믿고 그냥 떠나버리면 어떡해요. 난 용기가 없어요. 나도 그런나 자신을 잘 알죠. 그게 내 진짜 모습인 걸, 어쩔 도리가 없잖아요.”
“오, 아니에요, 방법이 있을 거예요. 아직 너무 늦은 건 아니에요. 이제 강경하게 나가세요. 더 이상 그 남자의 우유부단함을 참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실하게 알려주세요. 제가 뒤에서 도울게요.”
“모르겠어요. 내가 그런 말을 할 만큼 용기를 낼 수 있을지. 시간이 너무 부질없이 지나가 버려요. 모두 다 끝나버린 일이 아닌가 싶어요.”
재닛은 무기력하게 말했다.
앤은 존 더글러스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는데, 지금 그에게 큰 실망감을 느꼈다. 20년 동안이나 여자의 마음을 농락할 남자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존 더글러스에게는 어떤 가르침이 분명히 필요했다. 복수심을 느낀 앤은 두 사람 사이의 일을 반드시 지켜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다음 날 밤 기도회에 가면서 재닛이 용기를 내 좀 ‘튕겨보겠다’고 말했을 때 앤은 기뻤다.
“존 더글러스에게 내가 더 이상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거라는 걸 보여주겠어요.”
“그래야죠.”
앤은 힘주어 말했다.
기도회가 끝나자 존 더글러스는 항상 그렇듯 재닛에게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재닛은 순간 겁에 질린 듯 보였으나 곧 단호한 자세를 취했다.
“아니, 괜찮아요. 혼자라면 집까지 가는 길이 더 아름다울 것 같아요. 40년을 다닌 길인데요, 뭐. 저데려다주시느라 고생할 필요 없어요, 더글러스 씨.”
재닛이 톡 쏘듯 말했다.
앤은 존 더글러스를 올려다보았다. 환한 달빛 속에 드러난 존 더글러스의 얼굴은 고문대에서 마지막 형벌을 당하고 있는 사람 꼴이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존은 몸을 돌려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
“잠깐만요, 멈춰요.”
앤이 그를 따라가며 거친 목소리로 불렀다. 멍하게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더글러스 씨! 잠깐만요! 돌아오세요!”
존 더글러스는 멈췄지만 되돌아오지는 않았다. 앤은 길을 따라 쏜살같이 내려가 그의 팔을 붙잡고 재닛에게 끌고 갔다.
“돌아오셔야죠. 이건 모두 제 실수예요, 더글러스 씨. 모두 제 잘못이라고요. 제가 재닛에게 시켰어요. 재닛은 원하지 않았지만요. 하지만 이제 괜찮아요. 그렇죠, 재닛?”
앤이 꾸짖듯 말했다.
한마디 말도 없이 재닛은 존의 팔을 끼고 걷기 시작했다. 앤도 두 사람 뒤를 조용히 따라 걸어 뒷문으로 살짝 들어갔다.
“앤, 정말 잘했어요. 뒤에서 날 잘도 도와주었다고요.”
재닛이 비꼬듯 내뱉었다.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무심히 더글러스 씨의 얼굴을 봤는데 제가 꼭 사람을 죽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쫓아가지 않을 수 없었어요.”
“아, 그렇지만 앤이 그렇게 해줘서 정말 기뻤어요. 존이 돌아서서 가 버리는 걸 보고 난 내 인생에 그나마 남아 있던 모든 기쁨과 행복이 그와 함께 모조리 사라지는 것 같았거든요. 정말 끔찍했어요.”
“더글러스 씨가 왜 그랬느냐고 묻던가요?”
앤이 물었다.
“아뇨,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재닛이 멍하니 대답했다.




34
존 더글러스, 드디어 입을 열다





앤은 조만간 무슨 일이든 일어나리란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존 더글러스는 집으로 찾아와 재닛을 데리고 드라이브를 나가고 산책을 했으며 기도회가 끝나면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지난 20년간 계속해오던 일들의 연속이었고 앞으로도 20년은 너끈히 더 지속될 것 같았다. 여름은 이미 끝나가고 있었다. 그동안 앤은 학생들을 가르쳤고, 편지를 썼으며, 공부도 조금씩 했다. 학교까지 오가는 길은 유쾌했다. 앤은 항상 늪지대를 지나 학교를 오갔는데,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초록의 이끼로 덮인 울퉁불퉁한 늪지대를 가로질러 은빛 개울물이 흐르고, 꼿꼿하게 선 가문비나무는 잿빛과 초록이 섞인 이끼 위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뿌리는 땅 위까지 뻗어 나와 숲 속 나라의 아름다움을 더해주었다.
그런데도 앤은 밸리 로드에서의 생활이 다소 단조롭다고 느꼈다. 그런 와중에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앤은 박하사탕의 주인인 마른 몸의금발 머리샘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우연히 길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긴 했지만. 그런데 어느 더운 8월의 저녁에 그가 나타났다. 샘이 집으로 들어오더니 베란다 옆 통나무 의자 위에 떡하니 걸터앉았다. 일할 때 입는 옷인 여기저기 기운 바지와 팔꿈치가 다해진푸른 진 셔츠 차림으로 앤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계속 송진을 씹었다. 앤은 책을 옆에 내려놓고 한숨을 쉬며 장식용 깔개 뜨던 것을집어 들었다. 샘과 대화를 나눈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앉아 있던 샘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 저기 저 집을 떠나우.”
샘은 손에 들고 있던 지푸라기를 이웃집 쪽으로 흔들면서 말했다.
“아, 그래요?”
앤은 예의 바르게 대꾸했다.
“예.”
“어디로 갈 건가요?”
“글쎄, 내 집을 마련할까 하우. 저기 밀러스빌에 적당한 집이 있다고 해서. 내가 거길 빌리면 여자도 있어야 하는데 말이우.”
“그렇겠죠.”
앤의 대답은 막연했다.
“예.”
그리고 또 한 번의 긴 침묵이 이어졌다. 결국 샘은 지푸라기를 치우고 다시 말을 시작했다.
“나랑 살겠수?”
“네, 뭐, 뭐라구요?”
앤이 숨 가쁘게 소리쳤다.

“나랑 살겠수?”
“저, 결혼 말이에요?”
앤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다시 물었다.
“예.”
“아, 난 당신을 알지도 못해요.”
앤은 화가 나 소리쳤다.
“그럼 결혼하고 알면 되지유.”
앤은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품위를 지켰다.
“분명히말하는 데요, 난 당신과 결혼 안 해요.”
앤은 다소 오만하게 말했다.
“뭐, 더 나쁜 결혼을 할 수도 있을 텐데. 난 훌륭한 일꾼이유. 은행에 돈도 좀 있수.”
샘은 타일렀다.
“그런 얘기 다시는 꺼내지 마세요. 도대체 뭣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됐죠?”
앤은유머 감각으로 겨우 분노를 억눌렀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다.
“아가씨는 얼굴도 보기 좋고 걸음새도 괜찮으니까는. 난 게으른 여자는 딱 질색이라. 어디 한번 생각해보우. 난 이제 갈 테니. 얼마 동안은 생각 안 바꾸고 기다려줄 것이구먼. 어서 가서 소젖을 짜야 해서.”
최근 몇 년 동안 청혼의 환상은 깨질 대로 깨져버려서 이제 더는 앤의 가슴에 남아 있는 환상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도 앤은 마음의 찌꺼기 없이 큰 소리로 웃어넘길 수가 있었다. 이젠 한 줄기 아픔이 가슴을 후비지도 않았다. 그날 밤 앤은 재닛에게 그 불쌍한 샘 흉내를 냈다. 둘은 갑자기 낭만에 빠져버린 샘을 두고 체면이고 뭐고 다 버리고 깔깔거렸다.
어느 날 오후 앤의 밸리 로드 생활이 거의 끝나갈 무렵 알렉 워드가 마차를 몰고 급히 ‘길가 집’으로 찾아왔다.
“더글러스 씨 댁에서 급히 찾아요. 20년 동안 숨이넘어가는척만 하더니 이번엔 정말 더글러스 부인이 돌아가실 것 같아요.”
알렉이 말했다.
재닛은 모자를 가지러뛰어 들어갔다. 앤은 더글러스 부인의 상태가 다른 때보다 더 심각한지 물었다.
“뭐, 예전보다 반도 나쁘진 않은데요, 그게 더 이상해요. 예전 같으면 소리를 지르고 집 안 여기저기를 막 뒹굴었을 텐데 이번엔 조용히 침대에 누워 그냥 가만히 계세요. 더글러스 부인이 가만히 계신다는 건 정말 아프신 거예요, 정말로.”
“더글러스 부인을 싫어하시는군요?”
앤은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난 고양이가 고양이면 좋지만, 고양이가 여자라면 싫더이다.”
알렉의 묘한 답변이 돌아왔다.
재닛이 석양을 등지고 집으로 들어왔다.
“더글러스 부인이 돌아가셨어요. 내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내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씀하셨어요. ‘존과 결혼해야 해, 알았지?’라고. 그 말씀이 내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았어요. 존의 어머님 생각엔 내가 당신 때문에 결혼을 안 했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그 자리에 다른 여자들도 있었어요. 존이 밖으로 나가버린 게 얼마나 다행이던지.”
재닛은 구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앤은 재닛을 달래려고 생강차를 끓였다. 그 당시를 생각해보면 생강을 쓴다는 것이 흰 후추를 쓴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재닛은 그 맛도 분간하지 못했다.
장례식이 있던 날 밤, 장례식장에 다녀온 재닛과 앤은 베란다 계단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은 졸린 듯 소나무 숲 위로 가라앉았고 굴뚝에서 나온 희끄무레한 연기가 북쪽 하늘을 가로질러 흘러갔다. 재닛은 그 모양새 없는 검은 드레스를 입었고 얼굴은 말이 아니게 칙칙했으며 눈과 코는 너무 울어 빨갛게 변해버렸다. 재닛의 기분을 돋우려고 앤이 애쓰는 것이 싫은 듯해 둘은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재닛은 그 서글픈 기분에 그냥 빠져 있고 싶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정원 걸쇠가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존 더글러스가 정원을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는 제라늄 화단을 지나 앤과 재닛 앞으로 곧장 왔다. 재닛이 일어섰다. 앤도 따라 일어섰다. 앤은 키가 컸고 눈에 잘 띄는 하얀 드레스를 입었다. 하지만 더글러스는 그녀를 보지 못했다.
“재닛, 나와 결혼해주겠어?”
존이 물었다.
20년 전부터 간절히 원했던 그 말이 이제야 나온 것이다.

울음으로 더 이상 빨개질 수 없을 만큼 빨개진 재닛의 얼굴은 이제 보라색으로 변했다.
“왜 좀 더 일찍 청혼하지 못했나요?”
재닛이 천천히 물었다.
“그럴 수 없었어. 어머니가 그러지 말라고 했어. 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게 했었다고. 어머니는 19년 전부터 지독한 병을 앓기 시작했어. 모두들 어머니가 병을 이길 수 없으리라 생각했지. 어머니는 내게 당신이 살아 있을 동안은 결혼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달라고 애원하셨어. 난 어머니가 오래 살 수 없다고 해도 그런 약속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았어. 의사는 어머니가 6개월밖에 살 수 없다고 했지. 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애원하셨어, 병으로 고통받으시면서. 난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어머니가 제 어떤 점을 싫어하셨나요?”
재닛은 울먹였다.
“아무것도, 전혀. 어머닌 그저 살아 계신 동안은 또 다른 여자, 어떤 여자든 옆에 두기 싫다고 했어. 내가 약속하지 않으면 어머닌 그 자리에서 돌아가시겠다고, 그럼 나는 살인자가 되는 거라고 말씀하셨어. 그래서 어머니와 약속할 수밖에 없었고.그러곤계속 그 약속을 지키게 하셨어. 물론 난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제발 그 약속을 없었던 걸로 해달라고 간청해보기도 했어.”
“왜 진작 나한테 그 말을 하지 않았어요?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내게 그렇다고 말을 해주지 그랬어요.”
재닛은 목이 멨다.
“어머니는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않겠다는 약속도 하게 했어. 성경에 대고 맹세하라고 하셨지. 재닛, 기다리는 시간이 이렇게 길어질 줄 알았다면 나도 성경에 대고 맹세하진 않았을 거야. 지난 19년간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당신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거야. 물론 내가 당신을 얼마나 고생시켰는지도 잘 알아. 재닛, 이제 나와 결혼해주겠어? 영원히? 당신에게 청혼할 수 있게 되자 이렇게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달려왔어.”
그 순간 멍하니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던 앤이 제정신을 차렸고 그 자리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앤은 조용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다음 날 아침 재닛을 만나 그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잔인하고 야비한 늙은 여우 같으니!”
앤이 소리쳤다.
“쉿, 그분은 돌아가셨잖아요. 살아 계셨으면 정말 그런 분이셨겠지만, 이제 그분을 나쁘게 말하면 안 돼요. 결국 난 행복을 찾았으니까. 다만 그 이유를 알았더라면 이렇게 오래 기다려야 했더라도 덜 괴로웠을 거예요.”
재닛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그럼 결혼식은 언제 하나요?”
“다음 달에요. 물론 조용하게 결혼식을 올릴 거예요. 사람들이 심한 말을 할 것 같아서요. 귀찮은 어머니가 없어지자마자 내가 존을 낚아채는 거라고들 하겠죠. 존은 사람들에게도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했지만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어찌 되었건 당신 어머니이니 이 일은 우리끼리만 알고 있자고 했죠.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어떤 불명예도 끼치지 말자고요. 사람들이뭐라든난 괜찮으니까, 내가 진실을 아니까 괜찮다고 했어요. 진실은 어머니와 함께 땅에 묻어두자고.”
“미스 재닛은 나로선 흉내도 낼 수 없을 만큼 너그러우신 분이군요.”
앤이 뾰로통하게 말했다.
“앤도 내 나이가 되면 여러 면에서 생각이 좀 달라질 거예요. 그런 게 바로 나이 들면서 배우는 것이지요. 용서하는 법 같은 거요, 스무 살 때보다는 마흔이 되면 용서하기도 훨씬 더 쉬워져요.”
재닛이 너그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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