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5권 3~4

나단비 | 2024.04.03 17:58:59 댓글: 0 조회: 65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8491
3
꿈의 땅에서






열심히 냅킨에 헴스티치1)를 하며 레이철 린드 부인이 물었다.
“결혼식에 누구를 초대할지 결정했니, 앤? 아무리 형식을 따지지 않고 편하게 결혼식을 올린다고 해도 초대장은 보내야 하지 않니?”
“사람들을 많이 초대할 생각은 없어요. 우리 결혼을 정말 축하해주고 싶어 하는 분들만 초대하려고 해요. 길버트 가족들, 앨런 목사님과 부인 그리고 해리슨 씨와 부인이요.”
“해리슨 씨를 친구로 여긴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던 때도 있지 않았니?”
마릴라가 무심히 말했다.
“사실 해리슨 아저씨를 처음 만났을 땐 그랬죠. 하지만 알면 알수록 좋은 분이고 또 해리슨 아주머니도 너무나 다정한 분이잖아요. 아, 그리고 라벤더 부인이랑 폴도 있어요.”
앤은 옛날 생각에 미소를 지었다.

“그 사람들 이번 여름에 섬에 오기로 했니? 유럽에 간다는 줄 알았는데.”
“제가 결혼한다는 편지를 보냈더니 마음을 바꿨대요. 오늘 폴한테 편지를 받았는데 제 결혼식에 꼭 온다고 하네요. 유럽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말이에요.”
“그 아이는 언제나 널 끔찍이도 따르더구나.”
린드 부인이 말했다.
“그 ‘아이’는 이제 열아홉이나 된 젊은이예요, 린드 아주머니.”
“세월이 참 빠르기도 하다!”
린드 부인다운 재치 있는 응수였다.
“샬로타 4세도 올 거예요. 남편이 승낙하면 결혼식에 오겠다고 폴에게 말했대요. 아직도 그 커다란 파란 나비리본을 달았는지, 남편이 샬로타라고 부르는지 아니면 레오노라라고 부르는지 궁금해요. 샬로타가 제 결혼식에 꼭 왔으면 좋겠어요. 오래전에 샬로타랑 전 미스 라벤더의 결혼식을 함께 준비했죠. 아마 다음 주에 ‘메아리 집’으로 올 거예요. 그리고 필이랑 조 목사도 결혼식에 올 거고요.”
“성직자를 그렇게 부르다니 아주 듣기 거북하구나, 앤.”
린드 부인이 나무랐다.
“그분 부인이 그렇게 부르는걸요.”
“그렇다면 그 부인은 좀 더 예를 갖춰 남편을 대해야 한다.”

린드 부인이 대꾸했다.
“아주머니도 목사님을 아주 날카롭게 비난할 때가 있으시잖아요.” 앤은 린드 부인을 놀렸다.
“그래, 그렇긴 해도 나는 정중하게 한다.”
린드 부인의 항변이었다.
“너도 내가 목사님을 별명으로 부르는 걸 들은 적은 없잖니?”
앤은 웃음을 삼켰다.
“아, 그리고 다이애나와 프레드, 꼬마 프레드와 앤 코델리아 그리고 제인 앤드루스도 있어요. 스테이시 선생님과 제임시나 아주머니, 프리실라와 스텔라도 왔으면 좋겠지만 스텔라는 밴쿠버에, 프리실라는 일본에, 그리고 스테이시 선생님은 결혼해서 캘리포니아에, 또 제임시나 아주머니는 그렇게 뱀을 무서워하면서도 딸이 선교 활동을 하는 인도에 가셨으니 올 수가 없죠. 사람들이 이렇게 전 세계에 퍼져 살다니 참 믿기 어려운 일이에요.”
“하느님이 그러라고 하신 건 아니다, 그럼.”
린드 부인이 힘주어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땐 사람들이 자기가 태어난 곳이나, 그 가까운 곳에서 자라 결혼해 살았지. 너는 섬에 남게 되어 다행이야. 길버트가 대학을 졸업하면 혹시라도 너를 끌고 세상 끝으로 가겠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사람들이 다 자기가 태어난 곳에 산다면 모든 곳이 금세 다 꽉 차버릴 거예요, 린드 아주머니.”

“아, 너랑 논쟁하려는 게 아니다, 앤. 난 학사가 아니잖니. 참 결혼식은 몇 시에 올릴 거야?”
“정오에 하기로 했어요. 기자들이 말하는 식으로 정각 12시요. 그러면 저녁 기차를 타고 글렌 세인트 메리로 갈 수 있을 거예요.”
“응접실에서 할 거니?”
“아뇨. 비가 오면 모를까 그럴 생각은 없어요. 전 과수원에서 결혼식을 올릴 거예요. 푸른 하늘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햇살에 둘러싸인 곳에서요. 할 수만 있다면 제가 언제, 어디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은지 아세요? 새벽녘 숲 속이에요. 찬란한 해가 막 떠오르는 유월의 새벽이요. 정원엔 장미가 활짝 피어 있겠죠. 전 집을 살짝 빠져나가 길버트를 만나 둘이 함께 너도밤나무 숲 속으로 들어갈 거예요. 그래서 화려한 성당 같은 숲 속의 초록빛 아치 아래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요.”
마릴라는 꾸짖듯 콧방귀를 뀌었고 린드 부인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이상하잖니, 앤. 전혀 합법적인 것 같지도 않고. 앤드루스 부인은 또 뭐라고 하겠니?”
“그게 바로 문제예요. 앤드루스 부인이 뭐라 할까 두려워서 하지 못하는 일이 너무 많아요. ‘그거 정말이니? 딱하기로 해라. 저럴 수가 있나. 이런, 그게 정말인가 보구나.’ 앤드루스 부인만 아니라면 즐거운 일을 정말 많이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앤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앤, 난 너를 이해할 수가 없어.”

린드 부인이 불평했다.
“앤은 언제나 낭만적이잖아요. 레이철도 알면서.”
마릴라가 변명조로 말했다.
“글쎄요, 결혼해서 살다 보면 아마 그런 낭만병도 고치게 되겠죠.” 이번에는 린드 부인이 격려조로 응수했다.
앤은 웃었다. 그리고 집을 빠져나가 ‘연인의 오솔길’에서 길버트를 만났다. 하지만 길버트와 앤 둘 다 결혼 생활이 그들의 낭만 병을 고쳐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인지 희망인지 모를 생각을 반기는 것 같지 않았다.
그다음 주 ‘메아리 집’ 사람들이 찾아왔고 ‘초록 지붕 집’은 떠들썩해졌다.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3년 전이건만 라벤더 어빙 부인은 하나도 변하지 않아 바로 어젯밤에 보았나 싶었다. 하지만 폴을 보고는 놀랍고 반가워 어쩔 줄을 몰랐다. 이렇게 180센티미터가 넘는 훤칠한 청년이 에이번리 학교에 다니던 그 꼬마 폴이란 말인가?
“널 보니까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게 실감이 난다, 폴. 이렇게 올려다봐야 하잖아!”
“선생님은 절대 나이 들지 않을 거예요. 청춘의 샘물을 찾은 행운아 중 한 명이 바로 선생님이잖아요. 선생님이랑 라벤더 어머니 두 분은 언제나 그래요. 선생님이 결혼을 해도 전 블라이드 부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거예요. 저에겐 언제나 ‘선생님’이에요. 제게 가장 큰 가르침을 준 선생님. 선생님께 보여드릴 게 있어요.”
그 ‘보여줄 것’은 시가 가득 적힌 수첩이었다. 폴은 아름다운 상상을 시로 적어두었다. 원래는 잡지 편집자들도 이런 감상적인 시들을 좋아해야 하건만, 그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시들이었다. 앤은 아름다움과 희망의 약속으로 가득 찬 폴의 시들을 정말 즐겁게 읽었다.

“넌 유명해질 거야, 폴. 난 유명한 제자를 두는 꿈을 꿨어. 그 제자가 대학 총장이 되는 꿈이었지만 위대한 시인이 더 나을 것 같다. 언젠가 내가 그 유명한 폴 어빙을 회초리로 가르쳤다고 자랑할 날이 올 거야. 그런데 실은 내가 너를 회초리로 때린 적은 없지, 폴? 아, 그런 기회를 놓치다니! 그래도 쉬는 시간에 벌쓰게 한 적은 있지?”
“유명해질 사람은 아마 선생님일걸요. 지난 3년간 선생님이 쓴 작품들을 계속 읽었어요.”
“아니, 난 내 능력을 알아. 내가 쓰는 것들은 아이들이나 좋아하고 편집자가 수표를 보낼 만한 예쁘고 공상적인 이야기 정도지, 대단한 것은 못 돼. 내가 이 땅에서 영원히 기억될 기회가 있다면 그건 아마 네 회고록 한 귀퉁이에 적힌 내 이름을 통해서일 거야.”
샬로타 4세는 파란 나비리본은 떼어버렸지만 얼굴에 난 주근깨는 여전했다.
“내가 양키와 결혼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아가씨. 하지만 앞날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결코 모르는 거죠. 그리고 그건 그 사람 잘못이 아니에요. 태생이 그런 거니까요.”
“샬로타도 양키와 결혼했으니 양키잖아.”
“앤 아가씨, 전 아니에요! 제가 양키 한 다스랑 결혼한다 해도 전 양키는 아니라고요! 톰은 다정해요. 그리고 전 너무 뻣뻣하게 굴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그랬다가 다시는 결혼할 기회가 오지 않으면 어째요. 톰은 쉴 틈 없이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술도 안 마시고 투덜거리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전 결과적으로는 만족해요, 앤 아가씨.”
“톰이 레오노라라고 불러?”

앤이 물었다.
“세상에, 아뇨. 그 사람이 그렇게 부른다면 전 다른 사람을 부르는지 알걸요. 아, 물론 결혼식을 올릴 때는 ‘나는 레오노라, 그대를 맞이하여’라고 했지요. 그때도 톰이 다른 사람을 말하는지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결혼 상대자를 잘못 찾은 줄 알았다니까요. 그건 그렇고 이젠 앤 아가씨가 결혼하는군요. 전 언제나 의사와 결혼하고 싶었어요. 그러면 아이들이 홍역이나 후두염에 걸려도 걱정이 없을 테니까요. 톰은 벽돌 쌓는 직공이지만 성격 하나는 좋아요. 제가, ‘톰, 앤 아가씨의 결혼식에 갔다 와도 될까요? 무슨 일이 있어도 갈 거지만 그래도 당신이 승낙해주면 좋겠어요.’ 그러자 톰은 ‘당신 좋을 대로 해, 샬로타. 그러면 당신도 내 뜻을 존중해주겠지.’라고 말하더군요. 정말 좋은 남편이죠, 앤 아가씨?”
필리파와 조 목사는 결혼식 전날 ‘초록 지붕 집’에 도착했다. 앤과 필리파는 너무도 반가워 펄펄 뛸 정도로 기뻐했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간 있었던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쏟아놓았다.
“앤 여왕님,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여왕 같아 보이네. 난 아기를 낳고 나서 너무 말라버려서 보기 싫어졌어. 조는 내가 마른 모습도 좋은가 봐. 우리 사이는 별로 달라진 게 없어. 아, 네가 길버트와 결혼하다니 정말 기막히게 멋진 일이야. 로이 가드너와 결혼했다면 이렇게 멋지지 않았을 거야. 이제야 그걸 알겠어. 그땐 내가 무척 실망했지만. 앤, 너 그때 로이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었어.”
“로이는 회복했어. 무슨 말인지 알지?”
앤이 미소 지었다.
“그래, 맞아. 그 사람도 결혼했지. 아주 사랑스러운 아내와 행복하게 잘살아. 길게 보면 모든 일이 다 좋은 쪽으로 되어가는 거라고 조도 그랬고 성경에도 그렇게 나와 있는데, 다 맞는 말인 것 같아.”
“알렉이랑 알론조도 결혼했니?”
“알렉은 했는데 알론조는 아직이야. 너랑 이야기하다 보니 ‘패티네 집’에서 보냈던 옛날 생각이 난다. 그때 우린 정말 재밌었지!”
“최근에 ‘패티네 집’에 가봤니?”
“그럼, 자주 가지. 미스 패티와 미스 마리아는 여전히 벽난로 옆에 앉아서 뜨개질을 해.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게 있네. 미스 패티와 미스 마리아가 보낸 결혼 선물이 있어. 뭔지 한번 맞춰봐.”
“내가 어떻게 그걸 맞춰. 그런데 그분들은 내가 결혼하는 걸 어떻게 아셨지?”
“아, 내가 지난주에 갔을 때 말씀드렸어. 아주 좋아하시더라. 이틀 전에 나한테 전화 좀 달라는 메모를 남겼어. 그래서 전화했더니 너에게 선물을 전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시더라. ‘패티네 집’에서 가장 가지고 싶은 게 뭐니, 앤?”
“설마, 미스 패티가 도자기 개를 보낸 거니?”
“어서 가봐. 내 트렁크에 있으니까. 그리고 편지도 있어. 잠깐만 기다려, 내가 가져다줄게.”

친애하는 미스 셜리, 곧 혼례를 치른다는 말을 듣고 마리아와 나는 아주 기분이 좋아요. 행복하게 살길 바랄게요. 마리아와 나는 결혼해본 적이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반대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죠. 앤에게 도자기개를 보내요. 유서에 그 인형을 미스 셜리에게 남긴다고 쓸 작정이었어요. 앤이 진심으로 그 인형을 아낀다는 걸 아니까요. 하지만 마리아와 내가 앞으로도 꽤 오래 살 것 같아서 앤이 젊을 때 그 인형을 주기로 결심했어요. 고그는 오른쪽에, 매고그는 왼쪽에 둬야 한다는 걸 잊어버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사랑스러운 인형이 내 ‘꿈의 집’ 벽난롯가에 놓이게 되다니 정말 너무도 멋진 일이야. 이렇게 기쁜 일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앤이 기쁨에 넘쳐 말했다.
그날 저녁 ‘초록 지붕 집’은 그다음 날 준비로 떠들썩했다. 하지만 황혼녘 앤은 조용히 집을 빠져나왔다. 처녀로서의 마지막 날에 앤은 잠시 혼자만의 짧은 순례를 하고 싶었다. 앤은 에이번리 묘지의 작은 미루나무 그늘에 자리한 매슈의 무덤으로 가 옛 추억에 잠겨 영원히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났다.
“매슈 아저씨가 내일 함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아저씨도 아시고 기뻐하실 거야. 그 어느 곳에 계시든. 어느 책에선가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지. ‘우리가 죽은 이들을 잊지 않는 한 그들은 진정 죽은 것이 아니다.’ 매슈 아저씨는 나에겐 영원히 살아 계셔. 난 절대 아저씨를 잊을 수가 없으니까.”
앤이 혼잣말을 했다.
앤은 가져온 꽃을 매슈의 무덤가에 놓고 묘지를 떠나 긴 언덕을 천천히 내려왔다. 불빛과 그림자가 유쾌하게 반짝이는 은혜로운 저녁이었다. 사과색깔 초록빛 긴 줄무늬가 진 서쪽 하늘 사이로 주홍색과 호박색을 띤 비늘구름이 떠 있었다. 그 너머 바다에는 저무는 태양이 빛을 발하고 황갈색 해안에서는 파도 부딪히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앤을 둘러싼 세상, 앤이 언제나 사랑하던 언덕, 들판과 숲이 모두 아름다운 시골의 은은한 정적에 휩싸였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거야.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이 언덕을 걸어 내려갔던 때 생각나, 앤?”
블라이드네 집 대문에서 만난 길버트가 말했다.
“황혼이 내릴 무렵 내가 매슈 아저씨 무덤에 갔다가 오는 길이었는데 네가 이 대문에서 나타났지. 난 해묵은 자존심을 삼키고 너한테 말을 건넸어.”
“그러자 내 앞에 천국의 문이 열렸지. 그때부터 나는 기대에 차 있었어. 그날 밤 문가에서 너랑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갈 때, 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년이었다고. ‘앤이 드디어 날 용서해줬다.’ 하는 생각에.”
길버트가 말했다.
“나는 네가 날 용서했다고 생각해. 난 정말 감사할 줄도 모르는 못된 애였어. 연못에서 네가 날 구해준 후에도 계속 그랬고. 처음엔 너에게 빚을 진 거라는 생각에 얼마나 싫던지! 난 정말 이렇게 행복할 자격이 없어.”
길버트는 웃으며 자기가 준 반지를 끼고 있는 앤의 앳된 손을 더욱 꼭 움켜쥐었다. 앤의 약혼반지는 진주 반지이다. 앤은 다이아몬드 반지는 싫다고 했다.
“다이아몬드가 내가 꿈꾸던 환상적인 보랏빛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다이아몬드는 싫었어. 언제나 그 실망스러운 기분을 상기시킬 테니 말이야.”
“하지만 전설에 따르면 진주는 눈물을 의미한다던데.”
길버트가 말했다.

“그런 말은 겁나지 않아. 그리고 슬플 때뿐만 아니라 기뻐서도 눈물은 흘릴 수 있잖아. 난 제일 행복한 순간에 눈물이 나던걸. 내가 ‘초록 지붕 집’에 살아도 된다는 얘기를 마릴라 아주머니에게 들었을 때, 매슈 아저씨가 처음으로 예쁜 드레스를 주셨을 때, 그리고 네가 장티푸스를 이겨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등 모두 난 눈물이 났어. 그러니 약혼반지를 진주 반지로 해줘, 길버트. 난 삶의 슬픔도 기쁨과 함께 기꺼이 받아들일 거야.”
하지만 오늘 밤 우리의 연인은 슬픔이 아닌 오로지 기쁨만을 생각했다. 그다음 날은 둘의 결혼식이고, 포 윈즈 항구의 자줏빛 해안가에선 ‘꿈의 집’이 둘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1. 천의 씨실을 풀고 날실을 몇 가닥씩 묶어서 만드는 가장자리 장식. 옷, 수건, 이불, 책상보 따위에 많이 쓴다.





4
초록 지붕 집의 첫 신부






결혼식 날 아침, 앤은 동쪽 방에서 잠이 깼다. 햇살이 박공창으로 윙크를 했고 9월의 미풍은 커튼을 붙들고 장난질을 쳤다.
‘저 태양이 나를 비춰줄 걸 생각하니 너무 기뻐.’
생각만으로도 앤은 벌써 행복했다.
앤은 맨 처음 이 작은 방에서 깨어났던 날의 아침을 회상했다. 햇살은 ‘눈꽃 여왕’이 피운 꽃 이파리 사이로 새어 들었지만 전날 쓰디쓴 실망감을 안고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그날 아침 앤은 행복하게 깨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후 이 작은 방은 행복한 어린 시절의 꿈과 처녀 시절의 이상을 간직하고 키워나가는 신성한 장소가 되었고, 얼마 동안 비워두었다가도 기쁨에 차 다시 돌아왔다.
길버트가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이 방 창가에서 앤은 밤새 무릎을 꿇고 고통에 찬 시간을 보냈으며, 약혼을 한 날 밤엔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에 젖은 채 앉아 있었다. 기쁨으로 또 때로는 슬픔에 젖어 잠 못 이루던 많은 날을 보낸 방이었다. 그런데 앤은 오늘 이 방을 영원히 떠나야 한다. 이제 더 이상 이 방의 주인은 앤이 아니었다. 앤이 떠나고 나면 열다섯 살 처녀가 된 도라가 이 방을 물려받기로 했다. 이 방을 다른 용도로 쓸 생각은 나지 않았다. 이 작은 방은 유년 시절과 처녀 시절에 바쳐졌고, 아내로서의 새로운 장이 펼쳐지기 전 오늘이면 닫힐 옛 추억에 바쳐졌다.
그날 오전 ‘초록 지붕 집’은 떠들썩한 기쁨으로 넘쳤다. 다이애나가 결혼식 준비를 도우러 꼬마 프레드와 앤 코델리아를 데리고 일찍 도착했다. ‘초록 지붕 집’의 쌍둥이 남매 데이비와 도라는 얼른 아기들을 데리고 뜰로 나갔다.
“앤 코델리아가 옷을 버리지 않게 조심해야 해.”
다이애나가 걱정스러운 듯 주의를 주었다.
“도라가 데리고 있으면 전혀 걱정할 것 없다. 저 아이는 내가 아는 그 어떤 엄마보다 더 분별력 있고 조심스럽거든. 여러 가지로 날 놀라게 해. 내가 키운 그 말괄량이 누구랑은 아주 다르지.”
마릴라가 말했다.
마릴라가 닭고기 샐러드 너머로 앤을 보며 미소 지었다. 마릴라가 그 누구보다 말괄량이였던 앤을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저 쌍둥이는 정말 착한 아이들이에요. 도라는 참 여성스럽고 모든 일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몰라요. 데이비도 아주 영리하게 커가고 있고. 이젠 예전처럼 심하게 장난을 치지도 않아요.”
아이들이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지자 린드 부인이 말했다.
“데이비가 여기 오고 난 후 처음 6개월 동안은 정말 내 평생 그렇게 심란하고 정신없었던 적이 없었죠. 하지만 그 이후로는 내가 데이비에게 익숙해져 버렸어요. 최근엔 농장 일에 부쩍 관심을 보이더니 내년부터는 자기한테 농장을 맡겨달라고 하네요.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요. 배리 씨가 더 이상은 농장을 빌리지 않겠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알아보아야 했는데 잘됐어요.”
마릴라가 말했다.
“결혼식을 올리기에 참 좋은 날이야, 앤. 이튼 백화점에서 주문을 했어도 이보다 더 좋은 날을 고르진 못했을 거야.”
실크 드레스에 커다란 앞치마를 걸치며 다이애나가 말했다.
“이 섬의 돈은 죄다 이튼으로 들어가고 있어. 이제 그 백화점 전단지는 완전히 에이번리 여자아이들에겐 성경이 돼버렸다고. 일요일이면 아이들이 성경 공부 대신 전단지를 탐독하느라 바빠요.”
린드 부인이 분개하며 말했다. 문어발 조직 같은 백화점에 린드 부인은 할 말이 많았고, 이런 자기 생각을 쏟아낼 기회를 놓친 적도 없었다.
“아이들이 그 전단지 보는 걸 정말 좋아해요. 프레드와 작은 앤도 시간 가는지 모르고 전단지 사진을 보는걸요.”
다이애나가 말했다.
“난 이튼 백화점 전단지 없이도 아이 열 명을 잘 키웠다.”
린드 부인이 날카롭게 말했다.
“자, 백화점 전단지 때문에 다투지들 마세요. 오늘은 저한테 정말 중요한 날이잖아요. 제가 기쁜 만큼 모두들 기뻤으면 해요.”
앤이 유쾌하게 말했다.
“물론 나도 네가 언제나 행복하길 바란다, 얘야.”
린드 부인이 한숨지었다. 부인은 정말 앤이 행복하길 바랐고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누구라도 행복하다는 것을 너무 드러내놓고 과시하면 불행이 찾아오게 마련이라는 생각이 들어 두려웠다. 앤은 스스로를 위해 좀 삼갈 줄 알아야 했다.
그 9월의 정오, 손으로 짠, 오래된 카펫이 깔린 계단을 내려선 신부는 행복해 보였고 아름다웠다. 키가 크고 날씬한 ‘초록 지붕 집’의 첫 신부는 팔에 장미를 한 아름 들고 안개 같은 신부 면사포 안에서 눈빛을 반짝였다.
아래층 복도에서 기다리던 길버트는 경탄의 눈길로 앤을 올려다보았다. 긴 시간 동안 그토록 애를 태우던 앤, 그토록 원했던 사람이 드디어 자기 신부가 된다. 이렇게 아리따운 신부를 얻게 되다니. 너무 과분한 신부 아닌가. 과연 길버트가 앤을 마음껏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만약에 그렇지 못하면, 길버트가 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남편이 된다면? 그때 앤이 손을 내밀었고 둘의 눈이 서로 마주치자 모든 의심은 사라져버렸다. 그들은 서로에게 속했다. 그들 앞에 어떤 삶이 펼쳐진다 해도 그 사실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둘의 행복은 서로가 지켜야 했으나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래된 과수원의 햇살 아래서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친구들의 다정한 시선에 둘러싸여 둘은 결혼식을 올렸다. 앨런 목사가 주례를 섰고 조 목사는 기도를 드렸는데 후에 린드 부인은 자신이 들었던 기도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결혼식 기도였다고 단언했다.

9월에 새들이 노래하는 경우는 드문 일이건만, 새 한 마리가 길버트와 앤이 죽음도 가를 수 없는 맹세를 하는 동안 어느 나뭇가지에 숨어 달콤한 노래를 선사했다.
새의 노랫소리에 앤의 가슴은 뛰었다. 길버트는 이렇게 좋은 날 왜 세상의 모든 새들이 일제히 노래를 부르지 않는지 의아했다. 이 새소리를 듣고 폴은 나중에 시를 썼는데 그 시는 폴의 첫 번째 시집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이 되었다. 샬로타 4세는 새소리가 자신이 흠모하는 미스 셜리에게 행운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새는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쉬지 않고 노랫소리를 들려주다 마지막 부분에 한번 강하게 피리리 지저귀며 끝을 맺었다.
과수원으로 둘러싸인 이 오랜 ‘초록 지붕 집’에서 이보다 더 즐겁고 경쾌한 오후가 펼쳐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 에덴동산에서 치러진 첫 번째 결혼식 이래 결혼식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해묵은 경구나 농담을 사람들은 마치 처음으로 써먹는 것처럼 활기차게 떠들며 즐거워했다. 온통 웃음과 기쁨으로 가득 찼다.
앤과 길버트가 마부로 폴을 대동하고 카모디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려고 떠날 때 쌍둥이는 쌀과 낡은 신발을 준비했고 샬로타 4세와 해리슨 씨는 멋지게 쌀을 던지는 역할을 맡았다. 마릴라는 문가에 서서 미역취 꽃이 피어 있는 긴 비탈길을 따라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져버릴 때까지 하염없이 지켜봤다. 앤이 몸을 돌려 손을 흔들며 마지막으로 안녕을 고했다.
앤이 갔다. 이제 ‘초록 지붕 집’은 더 이상 앤의 집이 아니다. 이제는 떠나고 없지만 앤이 14년을 빛과 생기로 채운 그 집으로 들어가는 마릴라의 얼굴은 아주 어둡고 나이 들어 보였다.
앤이 떠난 첫날 밤, 두 노부인의 외로움을 달래주려고 다이애나와 아이들, 그리고 ‘메아리 집’ 식구와 앨런 목사 가족이 남아 같이 보내주기로 했다. 이들은 모두 탁자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 그날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며 즐겁게 저녁 식사를 했다. 그 사이 앤과 길버트는 글렌 세인트 메리에 도착해 기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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