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5권 9~10

나단비 | 2024.04.04 17:40:52 댓글: 0 조회: 62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8673
9
포 윈즈 곶의 저녁






9월 말이 되어서야 앤과 길버트는 약속한 대로 포 윈즈 등대를 방문할 수 있었다. 그전에 여러 번 가보려 했지만 그때마다 일이 생겼다. 짐 선장은 벌써 여러 차례 그들의 작은 보금자리에 들렀다.
“나는 까다롭게 형식을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블라이드 부인. 나는 여기 오는 게 정말 즐겁습니다. 부인이 내가 사는 곳을 찾아주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이 집에 들르는 게 즐겁지 않은 건 아니에요. 요셉을 아는 사람들끼리는 그런 식으로 굴어서는 안 돼요. 내가 올 수 있으면 내가 오고, 부인이 올 수 있을 때는 부인이 오면 됩니다. 그래서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돼요. 어느 집 지붕 아래 있느냐가 중요한 건 아니에요.”
짐 선장이 앤에게 말했다.
짐 선장은 ‘패티네 집’을 지킬 때와 마찬가지로 위엄과 태연자약한 풍모로 앤의 작은 집을 지키는 고그와 매고그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다.
“정말 너무도 귀여운 녀석들 아닙니까?”

짐 선장은 명랑하게 이야기하고는 했다. 그리고 집주인 내외에게 하듯 집에 들어설 때와 나설 때 모두 진지하게 고그와 매고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짐 선장은 이 집을 지키는 범상치 않은 일을 하는 저들에게 공손하게 예를 갖추는 의식을 생략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집을 참 보기 좋게 꾸며놓았군요. 이렇게 멋졌던 적이 없어요. 존 선생 부인도 부인과 취향이 비슷했던 것 같아요. 그 부인도 집을 아주 멋지게 꾸며놨었죠. 하지만 그때는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예쁜 커튼과 그림 그리고 이런 조그마한 장신구 같은 건 없었지요. 엘리자베스가 살 때는, 그 사람은 과거 속에 살았죠. 그런데 부인은 말하자면 여기에 미래를 불러왔어요. 내가 여기 와서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야 한대도 부인이 걸어놓은 그림이나 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을 겁니다. 아름다운 집이에요, 아름다워요.”
짐 선장이 앤에게 말했다
짐 선장은 열정적인 미의 숭배자였다. 아름다운 것을 보거나 들으면 가슴 저 깊이서부터 내면의 기쁨이 샘솟아 온몸으로 퍼져 나왔다. 선장은 자기 용모가 볼품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를 안타까워했다.
한번은 활기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죠. 하지만 난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하느님이 나를 만들 때 성격만 좋게 만들지 말고 그중 절반은 외모를 좋게 만들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요. 하지만 하느님은 알고 있죠. 능력 있는 선장이 갖춰야 할 게 뭔지 말입니다. 못생긴 사람도 있는 법이고, 또 여기 블라이드 부인처럼 예쁜 사람도 있어요. 물론 부인 같은 사람이 드물기는 하지만요.”

어느 날 저녁 드디어 앤과 길버트는 포 윈즈 등대를 방문하려고 길을 나섰다. 그날 아침은 잿빛 구름이 하늘을 덮고 안개까지 끼어 하루가 음산하게 시작되었지만 저녁 무렵이 되자 주홍빛과 황금빛 노을이 장관을 이루었다. 항구 저편 서쪽 언덕 너머 호박색과 수정색깔 하늘 아래로 저녁 해가 붉게 빛났다. 북쪽 하늘은 선홍빛과 황금빛이 섞인 비늘구름으로 뒤덮였고, 종려나무가 울창한 땅, 서쪽 나라로 향하는 배의 하얀 돛에서도 붉은빛이 빛났다.
해협을 미끄러져 가는 배 너머 하얀 모래사장으로도 붉은빛이 쏟아졌다. 빛은 그 오른쪽, 개울 위쪽 버드나무 사이로 보이는 오래된 집으로도 떨어져 창문들이 성당 창문보다도 더 화려하게 빛났다. 빛을 받은 창문들은 어두운 땅거미에 갇혀 있던 영혼이 쏟아지는 빛줄기에 가슴이 두근거리듯 고요하고 음산한 세상 가운데로 찬란한 빛을 뿌렸다.
“저기 개울 위에 있는 집은 언제나 외로워 보여. 저 집으로 사람이 드나드는 걸 본 적이 없어. 물론 윗길에서 저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 집을 드나드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아. 걸어서도 15분밖에 안 되는 곳에 사는 이웃인데 아직까지 한 번도 못 만났다는 게 좀 이상해. 교회에서 봤을 수도 있지만 내가 그 사람들을 모르니 인사를 할 수도 없었고. 그 사람들은 우리한테 유일하게 가까운 이웃인데 너무 비사교적인 사람들인 것 같아 속상해.”
앤이 말했다.
“그 집 사람은 요셉을 아는 종족이 아닌 모양이지. 전에 봤던 그 아름다운 처녀는 누군지 알아냈어?”
길버트가 웃으며 물었다.

“아니, 그 처녀를 물어보는 것도 잊어버렸지 뭐야. 하지만 그때 이후 다른 곳에서는 본 적이 없는 걸 보면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닌가 봐. 아, 이제 막 해가 졌어. 저기 등대 불이 켜졌어.”
땅거미가 짙어지자 커다란 등대의 불빛이 어둠을 뚫고 퍼져 나가 들판, 항구, 모래톱 그리고 바다에 원을 그리며 돌았다.
“왠지 저 불빛이 나를 잡아채서 바다에 처넣을 것 같아.”
불빛이 자기 몸 위로 쏟아지자 앤이 말했다. 그러다 반짝반짝 빛을 내며 회전하는 불빛 안으로 들어서자 다소 안도감이 들었다.
들판을 가로질러 등대가 서 있는 곶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로 들어섰을 때 한 남자가 보였다. 너무도 범상치 않은 모습이었기에 둘 다 잠시 그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잘생긴 남자였다. 넓은 어깨에 키가 컸으며 코는 로마인 같고 눈은 선명한 회색이었다. 차림새는 부유한 농장주의 주일날 복장이었다. 아마 포 윈즈나 글렌 마을에 사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런데 구불구불한 갈색 수염이 그 남자의 가슴을 지나 거의 무릎까지 강물처럼 흘러내렸고, 평범한 펠트 모자 아래로 수염과 비슷한 무성한 갈색 머리카락이 굽이치는 폭포처럼 그의 등을 타고 내려왔다.
그 남자가 멀어지자 길버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앤, 집에서 나오기 바로 전에 나에게 준 레모네이드에 데이비드 큰할아버지가 ‘스코트 법 살짝’4)이라고 부르는 걸 넣은 거 아냐?
“아니, 안 넣었어.”

점점 멀어져 가는 수수께끼 같은 남자에게 들리지 않도록 웃음을 참으며 앤이 말했다.
“대체 저 사람은 누구야?”
“나도 몰라. 하지만 짐 선장님이 계속해서 이 등대에 저런 불가사의한 망령을 둔다면 다음부터 여기 올 땐 주머니에 쇠막대기라고 넣고 와야겠어. 저 사람은 선원도 아냐. 선원이라도 된다면 저렇게 특이한 외모도 용서되겠지만. 항구 저쪽 마을에 사는 사람일 거야. 데이비드 큰할아버지가 거기 괴물 같은 사람이 몇 산다고 하셨거든.”
“데이비드 큰할아버지는 약간 편견을 갖고 계신 것 같아. 글렌 교회에 나오는 항구 저쪽 사람들도 다들 좋아 보이던걸. 아, 길버트, 저기 너무 아름답지 않아?”
포 윈즈 등대는 바다 쪽으로 약간 튀어나온 붉은 사암 절벽 위에 서 있었다. 해협 한쪽으로는 모래톱이 있어 은빛 모래 해안이 펼쳐졌고, 다른 쪽은 자갈이 깔린 해변에서 솟아오른 붉은 사암 절벽이 바다 쪽으로 들쑥날쑥하니 길게 이어졌다. 이 해안은 폭풍과 별의 마법과 신비를 알았다. 이런 해안에는 짙은 고독도 깃들어 있다. 숲에는 절대 고독이 깃들 일이 없다. 숲은 속삭이고 서로 손짓하면서 다정하게 군다. 하지만 강인한 영혼을 가진 바다는 나눌 수 없는 깊디깊은 슬픔을 끝없이 아파하면서도 그 아픔을 제 스스로 삭이고 영원히 침묵한다.
우리는 결코 그 심원한 신비를 꿰뚫을 수 없다. 그저 가장자리에 맴돌며 주문에라도 걸린 듯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궁금해하고 놀라워할 뿐이다. 숲은 백 가지 목소리로 우리를 부르지만 바다는 오직 한 가지 목소리만 낸다. 그 강력한 목소리가 우리 영혼을 바다의 장대한 음악 속으로 빠뜨린다. 숲이 사람과 친하다면 바다는 대천사의 동반자이다.

앤과 길버트가 도착했을 때 짐 선장은 등대 바깥 해변에 앉아 모든 장비를 갖춘 장난감 범선의 마지막 마무리에 한창이었다. 그는 일어서서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자연스럽고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하고는 앤과 길버트를 자기 거처로 맞이했다.
“참 좋은 날입니다, 블라이드 부인. 제일 좋은 때를 골라 드디어 찾아주었군요. 빛이 있는 동안 여기 바깥에 잠시 앉아 있겠어요? 이 장난감 배를 마무리해야 해요. 글렌에 사는 내 조카 손자 조에게 줄 거예요. 조에게 배를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조 에미가 화를 내는 바람에 기분이 좀 언짢았어요. 그 애 엄마는 이게 아이를 부추겨 조가 나중에 바다로 나간다고 할까 봐 걱정이라는 거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난 이미 그 아이에게 약속해버렸는데 아이랑 한 약속을 깨는 건 겁쟁이나 하는 짓이잖아요? 자, 여기로 앉으세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요.”
바람이 바다로 불어 긴 은빛 파도를 일으켰고, 투명한 날개처럼 반짝이는 그림자를 바다를 가로질러 저 멀리 보이는 곶들로 보냈다. 모래 언덕과 갈매기가 떼 지어 모인 곶에는 땅거미가 보랏빛 커튼처럼 드리웠으며 하늘에는 부드러운 안개가 옅게 깔렸고, 구름 선단이 수평선을 따라 닻을 내렸으며 저녁별은 모래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경치가 장관이지요? 시장하고 멀리 떨어져서 참 좋아요, 그렇죠? 여긴 사고팔고, 이윤을 남기고 할 게 없어요. 뭐든 돈을 낼 필요도 없죠. 저기 저 바다, 하늘 다 공짜예요. 값을 따질 수 없는 것이죠. 이제 곧 달도 떠오를 겁니다. 저기 바위, 바다 그리고 항구에 달빛이 비치는 광경은 아무리 봐도 지겹지 않아요. 볼 때마다 놀랍지요.”
짐 선장은 이 모든 것이 자기 것인 양 사랑과 자부심을 가득 담아 말했다.
달이 떠올랐고 그들은 세상일이나 서로를 묻는 일도 없이 조용히 마법처럼 신비로운 월출을 지켜봤다. 그리고 탑으로 올라가 짐 선장은 커다란 등대를 보여주고 등대의 기계적 원리도 설명해주었다. 다음으로 식당으로 들어왔다. 벽난로에서는 유목이 너울너울 타오르면서 형언할 수 없는 오묘한 바다 빛깔 불꽃을 만들어내었다.
“이 벽난로는 내가 직접 놓은 겁니다. 정부는 등대지기에게 이런 사치품을 주지 않지요. 저기 나무가 만들어내는 색깔을 봐요. 집에 불을 땔 때 유목을 쓰고 싶으면 내가 가져다 드리지요. 앉으세요, 블라이드 부인. 차를 내올게요.”
짐 선장이 말했다.
짐 선장이 의자에 앉아 있는 커다란 오렌지색 고양이와 신문을 치우고 앤 앞에 의자를 놓았다.
“이리 내려와, 항해사. 여기 이 소파가 네 자리다. 이 신문은 어디 다른 데 잘 둬야 해요. 거기 실린 이야기를 나중에 마저 읽어야 하거든요. 제목이 ‘열정적인 사랑’인데 뭐,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소설은 아니지만 어디까지 질질 끌지 보려고요. 이제 62장인데 결혼까지 가려면 아직까지도 먼 모양이에요. 조카 손자 조가 오면 해적 모험 이야기도 읽어줘야 해요. 그렇게 조그맣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피 냄새 풍기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 보면 참 이상하지 않아요?”
“제 고향 집에 있는 데이비도 그래요. 그 아이도 살인이나 폭력이 난무하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앤이 말했다.
짐 선장이 내온 차는 넥타처럼 향기로웠다. 앤이 칭찬을 하자 짐 선장은 짐짓 아닌 척했지만 아이처럼 좋아했다.
“크림을 듬뿍 넣는 게 비결이죠.”
짐 선장이 들떠 말했다. 짐 선장이 올리버 웬델 홈스5)를 들어봤을 리는 없지만 ‘대범한 사람은 결코 조그만 크림 단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의 견해에 동의하는 게 틀림없었다.
“여기 들어오는 길에 기이한 모습을 한 사람을 만났어요. 그 사람이 누구죠?”
차를 마시며 길버트가 물었다.
짐 선장이 싱긋 웃었다.
“그 사람은 마셜 엘리엇이에요. 참 대단하고 훌륭한 사람인데 좀 어리석은 면이 있죠. 대체 뭣 때문에 그 사람이 그런 싸구려 구경거리에 나오는 괴물 같은 꼴을 하고 다니는지 궁금하죠?”
“현대판 나사렛인? 아니면 과거를 떠나온 히브리인 예언자인가요?”
앤이 물었다.
“둘 다 아니에요. 그 사람이 저렇게 별나게 구는 이유는 순전히 정치 때문이지요. 엘리엇, 크로퍼드 그리고 맥컬리스터 집안사람들은 모두 정치 골수분자예요. 그 사람들은 그리트당원이나 토리당원으로 태어나서 그리트나 토리로 살다가 또 죽을 때도 그리트나 토리로 죽죠. 죽어서 천국에 가면 대체 뭘 하면서 지낼지 걱정이에요. 거긴 정치 같은 것은 없을 테니까요. 마셜 엘리엣은 그리트로 태어났어요. 나도 그리트당을 지지하지만 난 온건파인데 마셜 이 사람은 중도라는 걸 몰라요 15년 전 선거는 유독 치열했어요. 마셜은 자기 당을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죠. 그리트당이 승리하리라고 철석같이 믿었어요. 그래서 집회에 나와서 그리트당이 집권할 때까지는 절대 면도하지 않을 것이고 머리도 자르지 않겠다고 선언했어요. 그리트당은 계속 집권에 실패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니 오늘 두 분이 그 결과를 직접 목격한 겁니다. 마셜은 자기가 한 말을 지키고 있는 거예요.”
“그분 부인은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앤이 물었다.
“마셜은 독신남이에요. 하지만 아내가 있었다 해도 그 사람이 한 선언을 깨뜨리지는 못했을 거예요. 엘리엇 집안사람들은 고집이 보통이 아니거든요. 마셜의 동생인 알렉산더 엘리엣은 또 어땠는지 알아요? 그 사람이 개를 한 마리 키웠어요. 그런데 그 개가 죽자 묘지에 묻고 싶어 했죠. 그 사람 표현대로 하면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나란히’ 말이죠.
물론 그런 일은 허용되지 않았어요. 그러자 알렉산더는 개를 묘지 담장 바로 바깥에 묻었고 다시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죠. 일요일이 되면 가족을 교회에 데려다 주고 자기는 개의 무덤 옆에 앉아서 예배 시간 내내 성경을 읽었어요.
글쎄 알렉산더는 자기가 죽으면 개 옆에 묻어달라고 부인에게 부탁했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 부인은 순박하고 마음도 약한 사람이지만 그 말을 듣고 불같이 화를 냈대요. 자기는 절대로 개 옆에 묻히지 않겠다고요. 남편이 마지막 안식처를 자기 옆이 아니라 개 옆으로 삼고 싶다면 그건 말리지 않겠다고요.
알렉산더 엘리엇은 고집쟁이지만 아내를 많이 사랑해서 항복하고 이렇게 말했대요. ‘그럼, 뭐 좋아. 당신이 원하는 곳에 날 묻으라고. 하지만 가브리엘 천사의 나팔 소리가 들릴 때 난 우리 개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무덤에서 일어서게 될 거라고 봐. 녀석은 으스대며 걸어 다니는 엘리엇이나 크로퍼드, 맥컬리스터 집안의 그 누구보다 더 기백 있는 놈이니까.’ 그게 마지막 남긴 말이었대요.
우리야 마셜한테 익숙하지만 낯선 사람들은 그 사람의 특이한 외모를 보고 기겁을 하지요. 난 그 친구가 열 살 때부터 그 사람을 봐왔어요. 지금은 아마 쉰 살일 거예요. 난 그 친구를 좋아합니다. 오늘, 같이 대구 낚시를 갔었죠.
내가 지금 즐기는 일이라고는 그게 다예요. 가끔가다 송어나 대구 낚시를 하러 가는 거요. 하지만 내가 언제나 이렇게 살지는 않았지요. 전에는 다른 일도 많이 했어요. 내 인생 일지를 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앤이 그가 살아온 인생을 물어보려 했을 때 일등 항해사가 짐 선장의 무릎 위로 뛰어오르는 바람에 화제를 바꾸게 됐다. 일등 항해사는 아름다운 고양이로 얼굴은 보름달처럼 둥글고 눈은 선명한 초록색에 두 발은 눈처럼 하얬다. 짐 선장이 일등 항해사의 벨벳 같은 등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일등 항해사를 만나기 전에는 고양이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어요.”
항해사가 커다랗게 가르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짐 선장은 말했다. “내가 이 녀석의 생명을 구해줬지요. 무엇이 되었건 생명을 구해줬으면 마땅히 사랑해줘야죠. 그게 생명을 주었으면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이에요. 세상에는 생각이란 걸 전혀 안 하면서 사는 끔찍한 사람들이 있어요, 블라이드 부인. 항구에 여름 별장을 가진 도시 사람들은 생각 없이 너무 잔인한 행동들을 해요. 생각 없이 저지르는 잔인한 행동만큼 잔인한 일도 없을 겁니다. 도대체가 대책이 없는 사람들이죠. 여름에 별장에 와 지내는 동안은 고양이를 키우고 먹이고 하죠. 리본에다 칼라까지 달아주며 치장해 키우다가 가을이 되면 고양이를 그냥 내버려두고 가버려 굶어 죽거나 얼어 죽게 했어요. 난 그런 걸 보면 피가 끓어요, 블라이드 부인. 지난겨울이었어요. 어느 날 불쌍한 어미 고양이 한 마리가 바닷가에 죽어 있는 걸 발견했지요. 옆에는 뼈랑 가죽만 남은 작은 새끼 고양이 세 마리가 있더군요. 새끼들을 보호하려다 죽은 거죠. 그 불쌍한 발로 새끼들을 감싸 안은 채 죽어 있었어요. 세상에, 난 소리를 지르고 욕을 했죠. 그리고 그 불쌍한 새끼들을 집으로 데려와 음식을 먹이고 녀석들을 잘 돌봐줄 집을 찾아줬어요. 난 그 고양이를 버리고 간 여자를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번 여름에 그 여자가 별장에 돌아왔을 때 찾아가서 내 생각을 말했죠. 지나친 참견이었지만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난 참견도 마다하지 않아요.”
“그 여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던가요?”
길버트가 물었다.
“막 소리 지르며 말하기를 자기는 ‘생각을 못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말했죠. ‘당신은 심판의 날에 주님이 그 불쌍한 어미 고양이의 생명에 책임을 물을 때 그런 변명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으려면 도대체 머리는 뒀다 뭐에 쓸 거냐고 하느님이 물으실 거요.”
“일등 항해사도 그렇게 주워온 동물 중 하나였나요?”
앤이 이렇게 물으며 고양이 쪽으로 다가가자 고양이도 감사하다는 몸짓을 보였다.
“네, 일등 항해사도 아주 추운 날 발견했어요. 그 우스꽝스러운 리본 칼라가 나뭇가지에 걸려 옴짝달싹도 못 하고 있었죠. 거의 굶어 죽기 직전이었어요. 만약에 그때 항해사의 눈을 봤다면, 부인! 녀석은 그저 조그만 새끼 고양이였어요. 그런데 그렇게 나무에 매달려 있는 동안 어떻게든 살아서 버텼던 겁니다. 내가 묶인 줄을 풀어주자 녀석은 그 조그만 붉은 혀로 애처롭게 내 손바닥을 핥았어요. 그땐 지금처럼 저렇게 튼튼하고 능력 있는 바다 사나이가 아니었어요. 그저 아기 모세처럼 연약했습니다. 그게 9년 전입니다. 고양이치고는 오래 사는 거죠. 일등 항해사는 내 아주 오랜 좋은 친구예요.
“전 선장님이 개를 키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길버트가 말했다.
짐 선장이 고개를 저었다.
“한때는 개를 길렀죠. 그런데 그 녀석이 죽었어요. 어찌나 그립던지 다른 개가 녀석 자리를 대신한다는 것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그 녀석은 내 친구였어요. 이해하시죠, 블라이드 부인? 이제는 항해사가 유일한 친구예요. 난 항해사가 좋아요. 고양이는 원래 장난기가 많고 가끔 못되게 굴기도 하잖아요. 그래도 더 귀엽죠. 하지만 난 내 개도 사랑했어요.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알렉산더 엘리엇이 자기 개에게 느끼는 감정에 나도 공감을 했죠. 좋은 개에게는 못된 면이 없어요. 그래서 개가 고양이보다 더 사랑스러운 거라고 생각해요. 고양이가 개보다 더 낫다고 한다면 난 아마 화를 낼 거예요. 이런, 내가 또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고 있군, 좀 말려줘요.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기회만 생기면 난 좀 심하게 말이 많아요. 자, 차를 다 마셨으면 이쪽에 부인이 보면 좋아할 만한 몇 가지 작은 것들이 있습니다. 내가 가봤던 낯선 곳 여기저기서 가져온 것들이죠.”
짐 선장이 말하는 ‘몇 가지 작은 것들’은 실은 대단히 멋지고 아름다운 귀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물건마다 모두 놀랄 만한 사연이 얽혀 있었다.
달빛이 쏟아지는 저녁, 열린 창문으로 은빛 바다가 그들을 손짓하고, 파도가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를 내는 가운데 유목이 타오르는 벽난롯가에서 옛날이야기를 즐겁게 듣던 그 시간을 앤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짐 선장은 결코 잘난 척하지 않았지만 그가 얼마나 용감하고 진실하며 재치 있고 정이 많은 사람인지를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 작은 방에 앉아 자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을 위해 눈썹을 치켜 올리고 입술을 비틀면서, 손짓 몸짓을 해가며 이야기의 장면이나 인물을 그려나가 듣는 사람은 그 장면을 실제로 보는 듯했다. 그렇게 짐 선장은 이야기마다 생명력을 불어넣어 들려주었다.
짐 선장의 모험 이야기 중 몇 가지는 너무도 놀라워 앤과 길버트는 도저히 그 이야기를 믿기 어려웠다. 사람 말을 잘 믿는 자신들을 두고 그가 허풍을 치는 것은 아닐까 몰래 의심하기도 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생각이 틀렸다. 짐 선장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모두 사실이었고, 짐 선장은 그야말로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그런 재능으로 듣는 사람들 앞에, 머나먼 과거의 불행한 이야기에 원래 사연에 담긴 통렬함을 그대로 생생하게 불어넣어 이야기를 전했다.
앤과 길버트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부들부들 떨기도 했다. 앤이 운 적도 있었다. 짐 선장은 앤의 그런 눈물을 유쾌하게 바라보았다.
“난 사람들이 그렇게 우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아요. 그건 칭찬이거든요. 하지만 내가 본 것이나 내가 한 일을 제대로 이야기했는지는 모르겠어요. 난 또 그 이야기들을 모두 내 인생 일지에 적어두었어요. 글재주는 별로 없지만요. 내게 적절한 낱말을 찾아 인생 일지를 잘 꿰어 엮을 재주가 있었다면 아마 엄청난 책이 되었을 거예요. 어디 《열광적인 사랑》에 대겠어요. 또 조카 손자 조도 해적 모험담만큼이나 그 이야기를 좋아할 겁니다. 그래요. 내가 모험도 꽤 했어요. 그리고 이렇게 늙고 쓸모없어진 지금도 그런 모험을 하고 싶답니다. 가끔은 견딜 수 없이 바다가 그립고 당장에라도 항해를 떠나고 싶어지는 때가 있어요. 영원히 저 바다로 나아가고 싶은 그런 때가 있답니다.”

“율리시즈처럼 선장님도 아마 ‘죽을 때까지 해 지는 곳을 넘어 모든 서쪽 별들이 물에 잠기는 곳을 넘어 항해하고’6)싶으신가 봐요.”
꿈을 꾸듯 앤이 말했다.
“<율리시즈>요? 아, 나도 읽어봤어요. 맞아요, 딱 그런 느낌이죠. 아마 나같이 나이 든 선원들은 모두 그렇게 느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육지에서 죽겠지요. 아마 그렇게 될 거예요. 예전에 글렌에 윌리엄 포드라는 노인이 살았는데 물에 빠져 죽을까 봐 물가에는 전혀 가지 않았대요. 점쟁이가 그 사람이 그렇게 죽을 거라고 말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어지러워 쓰러졌는데, 그만 마구간에 있는 구유통 물에 얼굴을 박고 쓰려졌더랍니다. 결국은 물에 빠져 죽은 거죠. 이제 가야 하나요? 음, 자주 놀러 오세요. 다음번엔 의사 선생이 이야기를 해요. 선생은 내가 알고 싶어 하는 것들을 많이 알고 있잖아요. 여기 있다 보면 외로울 때가 종종 있어요. 엘리자베스 러셀이 죽은 다음엔 더 그렇군요. 우리는 정말 좋은 친구였어요.”
오랜 친구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며 짐 선장은 늙어가는 것이 너무 비애스럽다고 했다. 아무리 요셉을 아는 종족이라 해도 젊은 세대가 이런 친구들의 자리를 메우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앤과 길버트는 곧 다시 들르겠다고 약속했다.
“참 드문 분이야, 그렇지?”
집으로 걸어가며 길버트가 말했다.
“어떨 땐 저렇게 소박하고 부드러운 분이 그런 격정과 모험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
앤이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요전번 저기 어촌에서 일어난 사건을 봤다면 믿을 거야. 피터 고티에의 배를 타는 선원 하나가 바닷가에 있던 어떤 처녀에게 저속한 말을 했는데 짐 선장님이 눈을 번득이면서 그 형편없는 친구를 제대로 혼내주었거든.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어.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그 말하는 투는 정말! 그 친구 아마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기분이었을 거야. 난 짐 선장님이 누구라도 자기 면전에서 여자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을 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왜 결혼을 안 하셨는지 궁금해. 그랬다면 지금쯤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아들과 무릎에 기어올라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손자들이 있었을 텐데 말이야. 짐 선장님은 딱 그럴 분인데. 고양이 말고는 아무도 그분 곁에 없잖아.”
앤이 말했다.
하지만 앤이 틀렸다. 짐 선장은 더 많이 갖고 있었다. 그에게는 추억이 있었으니까.
4. 스코트 법은 리처드윌리엄 스코트(Richard William Scott)경이 제안한 법으로 캐나다 금주령을 말한다.
5. 올리버 웬델 홈스(Oliver Wendell Homes, 1809~1894): 19세기 미국 시인이며 작가. 원래 직업은 의사이다.
6. 영국의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Lord Tennyson, 1809~1892)의 시 <율리시즈(Ulysses)>에 나오는 구절.



10
레슬리 무어






앤이 10월의 어느 날 저녁 고그와 매고그를 향해 말했다.
“오늘 밤엔 바닷가로 산책 나갈 거야.”
길버트는 항구에 가서 다른 이야기할 사람도 없었다.
앤은 마릴라 커스버트에게 교육받고 자란 사람답게 집을 먼지 하나 없이 말끔히 정리했고, 이제는 개운한 기분이 되어 바닷가로 나서고 싶었다. 지금까지 즐겁게 바닷가 산책을 나간 적은 많았다. 때로는 길버트와, 때로는 짐 선장과, 또 가끔은 혼자서 바닷가로 나가 이제 막 시작한 무지갯빛 삶을 꿈꾸며 톡 쏘는 달콤함에 젖어 걷고는 했다.
앤은 부드러운 안개가 덮인 항구 해변과 바람 불고 은빛 나는 매혹적인 모래 해변을 좋아했지만 뭐니 뭐니 해도 깎아지른 절벽과 동굴, 파도에 닳고 닳은 바위가 층층이 쌓여 있는 바위 해변이 가장 좋았다. 오늘 밤엔 물속으로 자갈들이 반짝이는 후미 바위 해안가에 몸을 숨겨보려 한다.

그동안은 가을 폭풍이 몰아쳐 삼 일 동안이나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다. 거대한 파도가 우레같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바위를 때렸고 거칠고 하얀 파도 거품이 모래사장으로 밀려들며 포 윈즈 항구의 푸른 평화를 깨뜨렸다. 하지만 이제 바다를 깨끗이 씻어놓고 폭풍은 지나갔다. 바람이 멈추고 고요와 평화가 다시 찾아온 바다에는 잔잔한 파도 물결만이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모래와 바위에 부딪혔다.
“아, 폭풍과 긴장의 몇 주를 참고 지낸 보람이 있어.”
절벽 꼭대기에서 멀리 넘실대는 파도를 바라보며 앤이 환호성을 질렀다. 앤은 아래쪽 작은 후미로 향하는 가파른 길을 서둘러 내려갔다. 앤의 모습은 바위와 바다와 하늘에 가려 보이지도 않았다.
“오늘은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춰야지. 여기선 날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설마 갈매기가 보고 소문을 내겠어?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될 거야.”
앤은 혼잣말을 했다.
앤은 치맛자락을 붙잡고 잦아들어가는 파도의 포말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단단한 모래 길을 따라 걸으며 한 발로 빙그르 돌아보기도 했다. 아이같이 소리 내 웃으며 빙글빙글 돌아 바다 후미의 동쪽으로 뻗어 있는 곶 끄트머리에 닿았다. 그런데 어머나, 앤은 순간 얼굴은 붉히며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이 바닷가에 앤 혼자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지금까지 혼자 웃고 춤추고 하는 것을 다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
바다처럼 파란 눈에 금발 머리를 가진 처녀가 튀어나온 바위에 반쯤 가려진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처녀는 궁금증 조금, 동정심 약간, 그리고 아마 부러움도 좀 섞인 것 같은 묘한 표정으로 앤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모자도 쓰지 않은 머리를 주홍색 리본으로 묶었는데, 브라우닝의 시에 나오는 ‘아름다운 뱀’ 이상으로 눈이 부셨다.
옷은 단순한 모양의 어두운 색깔 드레스를 입었지만 허리에 선명한 빨간색 실크로 만든 허리띠를 둘러 멋진 곡선을 이룬 몸매가 드러났다. 두 손은 꼭 쥐어 무릎 위에 올려놓았는데, 일을 많이 해서인지 피부는 갈색이었지만 목과 뺨은 크림처럼 하얬다. 점점 사라져 가는 황혼의 어슴푸레한 빛이 서쪽 하늘 아래 갈라진 구름 틈으로 비집고 나와 처녀의 머리에 떨어졌다. 잠깐이었지만 처녀는 신비, 열정 그리고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매력을 가진 인간으로 변신한 바다의 정령 같아 보였다.
“제가 미쳤다고 생각하죠?”
앤이 말을 더듬었다. 이렇게 아리따운 처녀 앞에서 품위를 지켜야 할 의사 부인이 그렇게 어린애같이 까부는 모습을 보였다니, 정말 최악이었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처녀가 말했다.
처녀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목소리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사람을 멀리하려는 태도가 역력했지만 눈빛만큼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다. 간절히 원하면서도 수줍어하고, 반항적이지만 호소하는 눈빛이랄까. 앤은 원래 계획대로 산책을 계속하지 않고 처녀 옆 바위에 앉았다.
“우리 서로 소개할까요?”
신뢰감과 상냥함을 얻어내는 데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미소를 지으며 앤이 말했다.
“나는 블라이드 부인이에요. 저기 바닷가 위에 있는 하얀 작은 집에 살아요.”

“네, 알고 있어요. 나는 레슬리 무어라고 해요. 딕 무어 부인이죠.”
처녀가 딱딱하게 덧붙였다.
앤은 놀라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전혀 결혼한 여자 같지 않은 이 처녀가 부인이라니, 그렇다면 이 처녀가 바로 앤이 포 윈즈에 사는 평범한 주부로 그렸던 그 이웃? 앤은 이 기막힌 만남에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 그러면 저기 개울 위쪽에 있는 회색 집에 사는 분이에요?”
앤이 말을 더듬었다.
“그래요. 오래전에 댁을 방문했어야 했죠.”
레슬리 무어가 말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앤을 방문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거나 핑계를 달지도 않았다.
“오시지 그랬어요. 가까운 이웃이니 친구로 지내야죠. 이게 포 윈즈의 단점이에요. 이웃이 많지 않다는 거요. 그것만 빼면 완벽한데.”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앤이 말했다.
“포 윈즈를 좋아해요?”
“좋아하다마다요! 이곳을 사랑해요. 지금까지 본 어디보다도 아름다운 곳인걸요.”
“난 별로 가본 데가 없어요. 하지만 여기가 아주 아름다운 곳이라는 생각은 늘 하고 있고, 나도 여기가 좋아요.”
레슬리 무어가 천천히 말했다.

레슬리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처럼 말하는 태도도 수줍은 듯했지만, 뭔가 열정적인 면도 느껴졌다. 앤이 생각하기에 이 낯선 처녀는(아직도 처녀라는 말이 나와 버린다.) 하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말도 술술 잘할 것 같았다.
“난 여기 이 바닷가에 자주 와요.”
레슬리가 말했다.
“나도요. 전에는 왜 만나지 못했는지 궁금하네요.”
“아마 부인이 나보다 이른 시간에 나오기 때문일 거예요. 나는 어두워진 다음에 늦게 나와요. 그리고 이렇게 폭풍이 잦아들고 난 다음이 좋구요. 바다가 너무 차분하고 고요하면 싫어요. 격렬하고 벽력같은 소리를 내는 게 더 좋거든요.”
“난 어떤 분위기든 다 좋아요. 포 윈즈의 바다는 내 고향 집으로 치면 ‘연인의 오솔길’이에요. 오늘 밤은 바다가 길들지 않은 듯 참 자유로워 보이네요. 내 마음에서도 덩달아 뭔가가 깨져 나오는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바닷가를 따라 걸으며 그렇게 미친 듯 춤을 춘 거예요. 누군가가 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물론 미스 코넬리아 브라이언트가 봤다면 젊은 블라이드 부인의 미래에 가엾게도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고 했겠죠.”
앤이 말했다.
“미스 코넬리아를 알아요?”
레슬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기의 웃음처럼 해맑은 미소가 확 피어오른 얼굴이 참으로 예뻤다. 앤도 따라 웃었다.
“아, 그럼요. 내 ‘꿈의 집’에 몇 번 들르셨어요.”

“‘꿈의 집’이라고요?”
“아, 그건 말이죠. 길버트와 내가 우리 집에 붙인 이름이에요. 좀 우습죠? 그냥 우리끼리 부르는 이름인데 말하다 보니 나와 버렸네요.”
“미스 러셀의 하얀 작은 집이 댁의 ‘꿈의 집’이 되었군요.”
경탄하는 어조로 레슬리가 말했다.
“나에게도 한때는 ‘꿈의 집’이 있었는데, 아, 집이 아니라 성이었죠.”
레슬리가 덧붙이며 웃었다. 달콤한 상상이 조롱 섞인 말투로 퇴색되어버렸다.
“아, 나도 전에 성에 사는 꿈을 꿨어요. 아마 여자들은 다 그럴 거예요. 그러다가 8칸짜리 집에 만족하며 정착하는 거죠. 내 왕자님이 있으니 소망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하지만 부인은 정말 성을 꿈꿀 만해요. 이렇게 아름다우니 말이에요. 정말이에요. 감탄이 저절로 나올 지경이에요. 무어 부인, 난 지금까지 부인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앤이 말했다.
“우리가 친구가 되려면 나를 레슬리라고 불러야지요.”
묘하게 격앙된 어조로 레슬리가 말했다.
“물론이죠. 그럴게요. 아, 그리고 내 친구들은 나를 앤이라고 불러요.”

“나도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파도가 격렬하게 몰아치는 바다를 보며 레슬리는 말을 계속했다. “그렇지만 난 내 아름다운 모습이 싫어요. 언제나 저기 어촌에 사는 갈색 머리를 가진 평범한 여자였으면 하고 바라죠. 음, 미스 코넬리아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갑자기 화제를 바꾸자 더 이상은 속내를 털어놓는 대화를 하기가 어려워졌다.
“미스 코넬리아는 정말 좋은 분이에요, 그렇죠? 미스 코넬리아가 지난주에 길버트와 나를 초대해주어 그 댁을 방문했어요.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의 성찬이란 말 들어봤어요?”
앤이 말했다.
“신문에서 결혼식 기사를 읽으며 본 표현 같네요.”
레슬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음, 미스 코넬리아는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음식을 차렸어요. 정말 삐걱거렸다고요. 두 사람을 위해 그렇게 많은 음식을 준비했다니 믿을 수 없을 정도였죠. 레몬 파이만 빼놓고 파이란 파이는 모두 내놓으셨어요. 미스 코넬리아 말로는 10년 전에 샬럿타운 박람회에서 레몬 파이로 상을 탔대요. 그 이후로는 혹시 잘못 만들어 상을 받았던 명성에 금이 갈까 두려워 레몬 파이는 안 만든다고 하더라고요.”
“미스 코넬리아가 흡족해할 만큼 많이 드셨어요?”
“아니요, 난 아니고 길버트가 많이 먹어서 미스 코넬리아가 기뻐했죠.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는 말 안 할래요. 미스 코넬리아는 남자들은 죄다 성경책보다도 파이를 더 좋아한대요. 그렇지 않은 남자는 본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난 미스 코넬리아가 정말 좋아요.”
“나도요. 내 제일 친한 친구예요.”
레슬리가 말했다.
앤은 잠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레슬리 말이 사실이라면 왜 미스 코넬리아가 앤에게 딕 무어 부인을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을까? 미스 코넬리아는 포 윈즈와 부근에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는 사람인데.
“저기 참 아름답지 않아요? 여기 와서 저것만 보고 가도 난 만족해요.”
잠깐 동안 침묵이 흐른 뒤 둘이 앉아 있는 뒤쪽으로 한 줄기 빛이 바위틈을 지나 아래 짙은 녹색 바닷물 속으로 떨어지는 아름다운 광경을 가리키며 레슬리가 말했다.
“여기 해안에서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정말 놀라워요. 내 작은 바느질 방 창문에서 항구가 보여요. 난 그 방 창가에 앉아 눈을 호사시켜주죠. 잠시도 똑같은 색깔이랑 그림자는 없어요.”
앤도 동의했다.
“외롭지 않아요? 혼자 있을 때 외롭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나요?”
갑작스레 레슬리가 물었다.
“아뇨, 난 외롭다는 생각을 별로 해본 적이 없어요. 난 혼자 있을 때도 아주 좋은 친구가 있거든요. 꿈이랑 공상 그리고 다른 사람인 척해보는 거요. 이따금씩은 혼자 뭔가를 생각하고 음미하는 걸 좋아해요. 하지만 우정도 소중하죠.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참 좋아해요. 아, 우리 집에 오시지 않겠어요? 자주 놀러 오세요.”
앤은 웃으면서 한마디 더 덧붙였다.
“나를 알게 되면 아마 나를 좋아하시게 될걸요.”
“부인이 나를 좋아하게 될지 모르겠네요.”
레슬리가 심각하게 말했다. 레슬리는 의례적인 인사치레 같은 것은 하지도 않았다. 저 너머 달빛에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이 만들어낸 화환을 바라보는 레슬리의 눈에는 어두운 그림자만 가득했다.
“좋아하고말고요. 그리고 내가 황혼녘에 바닷가에서 춤을 추었다고 이상한 사람으로 보진 말아주세요. 시간이 조금 지나면 나도 품위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요. 아시겠지만 난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도 처녀 같은 기분이거든요. 가끔은 아이 같은 기분일 때도 있고요.”
“난 결혼한 지 12년이나 됐어요.”
레슬리가 말했다.
이것도 도저히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세상에, 부인은 나보다 나이가 훨씬 어릴 텐데요, 말도 안 돼요! 아주 어릴 때 결혼을 했나 봐요.”
앤이 놀라서 소리쳤다.
“열여섯 살이었어요. 지금은 스물여덟 살이에요. 난 이제 가봐야 돼요.”
옆에 놓인 모자와 겉옷을 집어 들면서 레슬리가 말했다.

“나도 가봐야 해요. 길버트가 아마 지금쯤 집에 와 있을 거예요. 오늘 밤 만나게 돼서 무척 반가웠어요.”
레슬리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앤은 약간 무안했다. 진정으로 우정을 나누자고 했건만 레슬리가 완전히 거절한 것은 아니더라도 그에 걸맞게 정중히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아서였다. 아무 말 없이 둘은 절벽 쪽으로 걸어 올라가 깃털처럼 풀이 자란 목초지를 가로질러 갔다. 풀밭이 달빛 아래 크림색 벨벳처럼 하얗게 빛났다. 해안가 오솔길에 다다르자 레슬리는 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이쪽으로 가요, 블라이드 부인. 나중에 우리 집에 한번 들러주세요. 그럴 거죠?”
“부인이 정말 원한다면 그럴게요.”
앤은 갑작스러운 초청에 약간 냉담하게 대답했다.
“아, 물론이죠. 원하고말고요.”
지금까지 묶여 있던 속박에서 갑작스레 벗어나 진심으로 열망하는 목소리로 레슬리가 소리쳤다.
“그럼 갈게요. 잘 가요, 레슬리.”
“잘 가요, 블라이드 부인.”
앤이 집으로 돌아와 서재에서 길버트에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쏟아냈다.
“그럼 딕 무어 부인은 요셉을 아는 종족의 일원이 아니네?”
길버트가 놀리듯이 말했다.
앤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아니, 완전히 그런 것만은 아니야. 아마 전엔 우리 일족이었던 것 같은데 떠났거나 아니면 추방당했나? 확실히 포 윈즈에 사는 여느 여자들하고는 아주 달랐어. 달걀이나 버터 같은 살림살이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고. 난 딕 무어 부인이 린드 아주머니 같은 사람일 거라고 상상했는데! 길버트, 딕 무어를 본 적 있어?
“아니, 농장 들판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몇 보기는 했는데 누가 누군지를 알아야지.”
“무어 부인은 무어 씨에 관해서 아무 말도 안 했어. 행복하지 않은 거야.”
“지금까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무어 부인은 너무 어려서 결혼해 분별력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어버렸다. 뭐 이런 이야기인가 보지. 비극이지만 종종 일어나는 일이야. 아름다운 여자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기 더 쉽고. 무어 부인도 분명 그런 일로 쓰디쓴 삶을 살면서 적개심을 갖고 있는 거라고.”
“확실히 알게 될 때까지는 그녀를 섣부르게 판단하거나 비평하지 말자. 아무래도 무어 부인의 사연은 그리 간단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당신도 직접 만나 보면 그 부인이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인지 알게 될 거야. 꼭 그 부인의 아름다운 외모를 말하는 게 아니라 뭔가 그런 게 있어. 무어 부인은 원래 넉넉한 성품을 가져 자기 왕국으로 모두를 불러들이는 사람인데 어떤 이유로 지금은 사람들을 모두 거부하고 자기 자신의 가능성마저 모두 안에 가둬버려 꽃피우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 바닷가에서 무어 부인과 헤어지고 나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서 얻은 결론이야. 미스 코넬리아에게 무어 부인에 관해 물어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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