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5권 13~14

나단비 | 2024.04.04 17:50:25 댓글: 0 조회: 88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8675
13
유령이 나오는 저녁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저녁, 앤은 들판을 달려 개울 상류에 있는 레슬리의 집에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바다에서 회색빛 안개가 슬금슬금 기어 나와 항구를 감싸고 계곡과 골짜기를 뒤덮어 가을 목초지에까지 무겁게 내려앉은 해 질 녘이었다. 안갯속에서 바다가 울며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새롭게 보는 이런 포 윈즈의 정경은 신비스러우면서 매혹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조금 외롭다는 생각도 들게 했다. 길버트는 의사 회의에 참석하려고 샬럿타운에 가서 그다음 날에나 돌아올 예정이었다. 앤은 여자 친구들과의 즐거운 시간이 그리웠다. 짐 선장과 미스 코넬리아도 좋은 친구가 되어주지만 젊은 사람에겐 또래끼리 어울릴 시간도 필요한 법이다.
“다이애나나 필 아니면 프리실라나 스텔라가 찾아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정말 유령이 나올 것 같은 밤이야. 수의 같은 저 자욱한 안개를 걷어내면, 포 윈즈에서 출항했다 최후를 맞은 배들이 바다에 빠져 죽은 선원들을 갑판에 싣고 오늘 밤 모두 이 항구로 돌아오는 모습이 보일 것 같아. 저 안갯속에는 수없이 많은 비밀이 숨겨진 것 같아. 포 윈즈에서 살았던 옛 망령들이 모두 저 회색 베일을 뚫고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다고. 이 집에 살았던 여주인들이 다시 찾아온다면 꼭 오늘 밤 같은 날에 찾아올 거야. 여기 계속 앉아 있다간 그 사람들 중 하나가 저기 길버트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 같아. 오늘 밤만큼은 이 집이 너무 으스스해. 고그랑 매고그도 귀를 쫑긋 세우고 눈에 보이지 않는 손님의 발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어. 오래전 ‘유령의 숲’에 유령이 산다고 공상하고선 공포에 빠져버린 것처럼 또 그렇게 되기 전에 얼른 레슬리를 보러 가야지. 내 ‘꿈의 집’은 옛 주인들을 맞이하게 두고 말이야. 환영의 인사로 불은 켜두고 가야겠어. 내가 돌아오기 전에 그들이 떠나면 이 집은 다시 내 집이 될 거야. 오늘 밤엔 과거의 유령이 이 집에 있는 게 틀림없어.”
앤은 혼잣말을 했다.
자기가 만든 공상에 스스로 웃음이 나면서도 여전히 오싹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 채 앤은 손에 입맞춤을 해서 고그와 매고그에게 보내고 레슬리에게 줄 새 잡지를 낀 채 안갯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미스 코넬리아가 이렇게 말했었다.
“레슬리는 책과 잡지라면 미칠 정도로 좋아해요. 하지만 거의 읽지를 못하죠. 책을 사거나 잡지를 구독할 만큼 여유가 없거든요. 정말 너무 가난해요. 농장을 대여해서 나오는 그 얼마 안 되는 수입으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르겠어요. 레슬리는 한 번도 가난 때문에 겪는 어려움에는 불평하거나 그런 내색조차 한 적이 없지만 분명히 힘들 거예요. 평생을 가난에 시달려왔지요.
자유롭고 꿈이 있을 때는 가난도 견딜 만했겠지만 지금은 속이 상할 거예요. 아, 정말이에요, 앤. 앤과 저녁을 같이 보낸 후로 레슬리가 밝고 즐거워 보여서 정말 기뻐요. 짐 선장이 가라고 억지로 모자랑 겉옷을 입혀 문밖으로 내몰다시피 했다고 하더군요. 바로 레슬리를 찾아가 보아요. 시간을 끌면 레슬리는 앤이 딕 때문에 싫어서 안 오는 거라고 여기고 다시 자기 껍질 안으로 기어들어가 버릴지 몰라요.
딕은 덩치만 컸지 아기 같아서 해를 끼치거나 그러지는 않아요. 그 사람이 바보같이 헤죽거리는 모습과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신경 쓰인다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난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아요. 난 지금의 딕 무어가 제정신일 때보다 더 좋아요, 뭐 주님도 아시는 일이지만, 그 사람이 좋다는 건 아니고요. 한번은 그 집 청소를 도와주러 갔다가 내가 도넛을 튀기게 됐어요. 딕은 언제나처럼 도넛을 하나 얻으려고 내 주변을 빙빙 돌았죠. 그런데 내가 허리를 굽히고 있을 때 이 얼간이가 막 튀겨낸 뜨거운 도넛을 집어서 내 뒷목에 떨어뜨려버렸어요. 그러고는 막 웃어대더라고요. 아, 정말이에요, 앤. 팬에 끓고 있는 기름을 그 인간 머리에다 퍼부어버리고 싶었다니까요. 하느님이 주신 자비로 겨우 참았지요.”
앤은 어둠 속에서 속도를 내 걸으며 미스 코넬리아가 펄펄 뛰었던 일을 생각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날 밤은 웃음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버드나무로 에워싸인 레슬리 집에 도착했을 때 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든 것이 너무도 고요했다. 현관 쪽은 어두웠고 인기척도 전혀 없어서 집을 빙 돌아 베란다에서 작은 거실로 통하게 되어 있는 옆문으로 갔다. 거기서 앤은 소리 없이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문은 열려 있었다. 그 너머로 어스름한 불빛 속에 레슬리 무어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두 팔을 탁자에 올려놓고 그 사이에 머리를 묻은 채 레슬리가 서럽게 흐느끼고 있었다. 고통으로 영혼이 찢어지는 듯 낮고 격렬한 울음소리였다.
늙은 검은 개가 무릎에 코를 묻고 레슬리 곁에 앉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커다란 눈에는 동정심과 헌신을 가득 담은 채.

앤은 당황하며 뒤로 주춤했다. 그런 비통함에 끼어들 수 없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동정심이 일어 앤의 가슴이 아파져 왔다. 이대로 들어가면 레슬리는 마음의 문을 영원히 닫아걸어 레슬리에게 도움을 주거나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길이 없어질 것만 같았다. 앤은 본능적으로 저 자존심 세고 비탄에 잠긴 여인이 자포자기 심정으로 울부짖을 때 불쑥 나타난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앤은 소리 없이 베란다를 빠져나와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저 너머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고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대문에서 앤은 두 사람, 각등(角燈)을 들고 있는 짐 선장과 딕 무어가 틀림없다고 생각되는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펑퍼짐한 붉은 얼굴에 눈은 텅 비어 보이고 덩치가 컸다. 어두웠지만 앤은 그 사람 눈이 뭔가 이상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블라이드 부인 맞아요? 이런, 이런 밤에는 혼자 돌아다니면 안 돼요. 안갯속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어요. 내가 딕을 집에 데려다 주고 나올 테니 잠깐만 기다려요. 들판을 건너가도록 불을 밝혀 드리지요. 블라이드 선생이 집에 와서 부인을 찾으러 안갯속에 르폴스 곶을 배회하게 하고 싶지 않거든요. 40년 전에 어떤 여자가 그런 적이 있어요.”
짐 선장이 말했다.
“레슬리를 보러 왔었군요.”
앤에게 다시 돌아온 짐 선장이 말했다.
“들어가지는 않았어요.”
앤은 자기가 본 광경을 짐 선장에게 말했다. 짐 선장은 한숨을 쉬었다.

“가련하고 불쌍한 것! 레슬리는 자주 울지 않아요, 블라이드 부인. 그러기엔 너무 굳세죠. 레슬리가 울면 그건 정말 너무 힘들기 때문이에요. 슬픔을 간직한 가난한 여자에게 이런 날 밤은 너무 힘들죠. 고통스럽고 두려운 모든 것들을 불러내거든요.”
“주변이 온통 유령으로 가득해요. 그래서 저도 여기로 온 거예요. 사람 손을 잡고 싶고 사람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요. 오늘 밤엔 인간이 아닌 것들이 너무 많이 출몰하는 것 같아요. 제 집조차도 유령이 가득한 것 같았거든요. 그들이 저를 이렇게 밖으로 밀어냈어요. 그래서 저와 같은 종족을 찾아 이리로 온 거예요.”
앤은 떨면서 말했다.
“하지만 들어가지 않길 잘했어요, 블라이드 부인. 레슬리가 좋아하지 않았을 겁니다. 내가 부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나도 딕과 함께 들어갔을 텐데 그것도 좋아하지 않았을 겁니다. 내가 딕을 오늘 온종일 데리고 있었어요. 레슬리를 조금이라도 돕고 싶어서 그랬죠.”
“그 사람 눈이 좀 이상하지 않은가요?”
앤이 물었다.
“그걸 봤어요? 그래요. 하나는 푸른색이고 다른 하나는 옅은 갈색이죠. 그 친구 아버지도 그래요. 무어 집안의 특성이죠. 그래서 쿠바에서 내가 딕을 찾았을 때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지요. 그 눈이 아니었으면 수염도 길고 살이 쪄서 아마 알아보지 못했을 거예요. 알고 있겠지만, 내가 딕을 찾아서 데려왔죠.
미스 코넬리아는 항상 내가 괜한 짓을 했다고 해요.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다고요.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일이고 또 그 이외엔 달리 어쩔 수가 없었어요. 내가 그리한 거야 후회하지 않지만 레슬리를 보면 이 늙은이의 가슴이 아파옵니다. 이제 겨우 스물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여든 살은 먹은 여자처럼 눈물 섞인 밥을 먹고 살지요.”
그들은 잠깐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했다. 앤이 다시 말했다.
“짐 선장님, 전 각등을 들고 걷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불빛이 만들어내는 원 바깥을 보면 언제나 이상한 느낌이 들거든요. 어둠의 가장자리 너머 그림자 속에서 적대적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뭔가가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제가 의심스럽고 사악한 것에 둘러싸인 느낌을 받아요.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이유가 뭘까요? 그냥 어둠 속에 있을 때는 그렇지 않은데, 어둠이 제게 가까이 다가올 때는 무서워요.”
“나도 그런 생각을 해요. 어둠이 가까이 있을 땐 친구가 돼줘요. 하지만 우리가 각등 같은 걸로 어둠을 밀어내면 그 순간 적이 되죠. 하지만 이제 안개가 걷히고 있어요. 서풍이 불어와요. 집에 도착할 때쯤에는 별도 볼 수 있을 거예요.”
짐 선장이 말했다.
앤이 다시 ‘꿈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하늘에 별들이 떠 있었다. 난로의 화덕에는 타다 남은 장작이 여전히 붉은 빛을 내고 있었고 집안에 머물던 유령도 모두 사라졌다.




14
11월의 나날






몇 주 동안 포 윈즈 항구의 바닷가를 따라 빛나던 찬란한 가을색이 부드럽게 푸른빛이 감도는 잿빛으로 바래가더니 어느새 늦가을 언덕의 모습을 띠었다. 들판이며 바닷가는 며칠 동안이나 안개 같은 비로 흐릿했고, 밤이면 바닷바람이나 폭풍의 우울한 숨결에 떠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앤은 가끔씩 자다 일어나 거친 북쪽 바다로 밀려가는 배가 없기를 기도했다. 두려움 없이 어둠을 밝혀주는 작지만 충직한 빛이 있어 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달라 기도 올렸다.
“11월이면 다시는 봄이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서리로 흠뻑 젖은 초라한 화분에 속상해하며 앤은 한숨을 쉬었다. 존 선생의 신부가 가꾼 활기찬 작은 정원이 이제는 조금 쓸쓸해 보였고 미루나무와 자작나무는 짐 선장이 말한 것같이 잎이 다 떨어져 헐벗은 기둥만 남았다. 하지만 집 뒤의 전나무는 영원히 초록색으로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11월이나 12월에도 햇빛과 자주색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축복받은 날도 있었다. 그럴 때 항구는 한여름같이 명랑하게 빛났고 만(灣)의 바닷물은 부드러운 푸른색을 띠어 폭풍이나 거친 바람은 오래전에 지나간 꿈처럼만 여겨졌다.
앤과 길버트는 가을 저녁을 등대에서 보내는 일이 많았다. 그곳은 언제나 즐거웠다. 동풍이 우울하게 불고 바다가 죽은 것처럼 회색을 띠어도 곧 햇빛이 나올 거라고 넌지시 알려주는 것 같았다. 이는 아마도 일등 항해사가 황금빛 성장을 한 채 한껏 뽐내며 활보하고 다녔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일등 항해사의 모습이 어찌나 거대하고 눈이 부신지 태양도 아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가르랑거리는 소리도 짐 선장의 벽난로 근처에서 나오는 명랑한 웃음소리와 말소리에 잘 어우러졌다. 짐 선장과 길버트는 고양이나 왕에 관한 식견 외에도 여러 가지 주제에 긴 토론을 벌이고는 했다.
“나는 무엇이나 깊이 생각하는 걸 좋아해요. 그 문제를 다 해결하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죠. 우리 아버지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문제에는 입을 열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지만, 그 말이 정말로 맞는다면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어요. 신이 우리 이야기를 들으며 웃음을 터트리겠죠. 하지만 우리가 신이 아니라 그저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선과 악을 구분할 줄 안다면 그게 무슨 문제겠어요? 난 우리가 그런 문제로 논쟁을 벌인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나 남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러니 오늘 저녁 다시 한 번 왜, 어디서, 그리고 어디로 갈지 한판 벌려봅시다, 의사 선생.”
짐 선장이 말했다.
그들이 ‘한판 벌이는’ 동안 앤은 이야기를 듣거나 공상에 잠겼다. 가끔 레슬리도 등대로 와서 함께 시간을 보냈고 오싹한 기분이 드는 황혼녘엔 앤과 같이 바닷가를 거닐기도 했으며, 등대 밑에 있는 바위에 앉아 있다 어둠에 밀려 유목이 타는 벽난롯가로 돌아왔다. 그러면 짐 선장은 차를 내온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땅과 바다의 이야기,
거기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저 멀리 잊힌 땅의 이야기는 위대하리.’”7)

레슬리는 언제나 등대에서의 모임을 즐겼고 가끔은 재치 있는 말로, 아름다운 웃음으로, 반짝이는 눈빛으로 조용히 그 자리를 빛나게 했다. 레슬리가 있을 때는 대화에 어떤 풍미와 재미가 더해져 레슬리가 없으면 모두들 그리워했다. 레슬리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만 있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번득이는 영감을 주었다. 레슬리가 있으면 짐 선장의 이야기는 더욱 빛났고 길버트의 논쟁이나 응답은 더 빠르고 재치 있게 나왔으며, 앤도 레슬리를 보면 공상과 상상이 퐁퐁 솟아났다.
“레슬리는 포 윈즈하고는 거리가 먼 사교계나 지식인 사회를 이끌어갈 지도자로 태어났어야 할 사람이야. 그런데 여기서 그냥 썩고 있는 게 안타까워.”
어느 날 밤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앤이 길버트에게 말했다.
“요전에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나눌 때 짐 선장님이랑 당신 스스로 한 소리를 제대로 가슴에 새기지 않았군. 창조주는 우리만큼 자신이 만든 우주를 다스리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 ‘무력하게 썩어가는’ 인생이란 없다는 고무적인 결론을 내렸잖아. 일부러 그렇게 믿으며 스스로를 낭비하고 사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물론 레슬리 무어는 그런 사람들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지만. 그리고 당신이야말로 ‘무력하게 썩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 편집자들의 신임을 얻어가던 레드먼드 대학 출신의 학사가 포 윈즈 같은 시골 마을에서 고생하는 신출내기 의사 부인으로 살고 있으니.”
“길버트!”
길버트의 가차 없는 말은 계속 이어졌다.
“만일 당신이 로이 가드너와 결혼했다면, 당신이야말로 포 윈즈하고는 거리가 먼 사교계나 지식인 사회를 이끌어갈 지도자가 되었을 수도 있어.”
“길버트 블라이드!”
“한때 로이 가드너와 사랑에 빠졌었잖아, 앤.”
“길버트, 당신은 지금 미스 코넬리아 말마따나 ‘사내들 하는 짓이 그렇지, 뭐.’ 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고약하게 굴고 있어. 난 로이랑 사랑에 빠진 적이 없다고. 그냥 그렇게 상상한 거야. 난 궁전에서 여왕같이 사는 것보다 우리 ‘꿈의 집’에서 당신 아내로 살며 꿈을 이루길 원한다는 거 알잖아.”
앤의 투정에 길버트가 한 대답은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둘은 가엾은 레슬리가 궁전도 아니고 꿈을 성취할 수 있는 보금자리도 아닌 곳을 향해 홀로 외롭게 들판을 가로질러 가고 있다는 것을 잊은 것이나 아닌지.
슬프고 어두운 바다 위로 달이 떠올라 바다 풍경을 바꾸어놓았다. 달빛이 아직 항구를 비추지는 않아 어두운 항구 저편은 뭔가를 감추고 있는 듯 보였고, 바다 후미 역시도 어둡고 음산한 가운데 달빛만 보석처럼 빛났다.
“저기 저 집들에서 나온 불빛들이 어쩌면 저리도 밝게 빛날까! 항구를 휘감고 있는 저 불빛을 좀 봐. 꼭 목걸이 같아. 아, 그리고 저기 글렌에서 쏟아지는 불빛도 너무 멋지다! 아, 길버트 저기 좀 봐. 우리 집이 보여. 나올 때 집에 불을 켜두길 잘했지? 난 어두운 집에 들어가기싫거든. 우리 집에서 나오는 빛도 보여, 길버트. 너무 예쁘지 않아?”
앤이 말했다.
“지구상에 있는 수백만 채의 집들 중 하나일 뿐이지만, 앤 아가씨, 우리 집이지. 이 ‘험악한 세상’의 등대. 집이 있고 사랑스러운 빨간 머리 아내가 있는 이 남자에게 뭐가 더 필요하겠어?”
“글쎄, 그 남자는 한 가지를 더 원하는지도 모르지. 아, 길버트. 어서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어.”
앤이 행복하게 속삭였다.

7.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1882)의 시 <왜가리 걸기(The Hanging of the Crane)>의 한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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