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5권 15~16

나단비 | 2024.04.04 17:51:05 댓글: 0 조회: 76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8676
15

포 윈즈에서의 크리스마스






앤과 길버트는 처음엔 크리스마스를 지내러 에이번리의 고향 집에 다녀올까 했다. 하지만 그냥 포 윈즈에 머물기로 했다. 

“우리의 첫 크리스마스는 우리 집에서 보내고 싶어.”

앤이 말했다.

그리하여 마릴라와 린드 부인 그리고 쌍둥이가 포 윈즈로 와서 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내기로 했다. 마릴라는 섬을 한 바퀴 돌게 되었다. 전에는 집에서 1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은 가본 적이 없고, ‘초록 지붕 집’ 밖에서 크리스마스 정찬을 먹어본 적도 없었지만 말이다.

린드 부인은 자두 푸딩을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왔다. 린드 부인은 대학을 졸업한 젊은 세대가 자두 푸딩을 제대로 만들 수 있다고는 절대로 생각지 않았지만, 그래도 앤의 살림 솜씨는 인정해줬다.

도착한 날 밤 손님방에서 린드 부인은 마릴라에게 말했다.

“앤은 훌륭한 주부예요. 내가 빵 보관 상자와 쓰레기통을 살펴봤거든요. 난 언제나 그 두 가지로 주부를 평가하죠, 그럼. 쓰레기통 안에는 버리면 안 될 것이 들어 있지도 않았고 빵 상자 안에도 곰팡이 난 빵은 없었어요. 아, 물론 앤은 마릴라의 교육을 받고 자랐으니까요. 그러고는 대학에 갔지만, 내가 준 담뱃잎 무늬 이불은 이 침대에 깔아놓고 마릴라가 준 동그란 깔개는 거실 벽난로 앞에 깔아놨더군요. 그렇게 해놓으니 꼭 우리 집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앤이 처음으로 자기 집에서 보낸 크리스마스는 바랐던 대로 아주 즐거웠다. 날씨도 화창하고 좋았다. 크리스마스 전날에는 눈이 소복하게 내려 세상을 아름답게 해놓았고 아직 얼지 않은 항구는 반짝반짝 빛을 냈다.

짐 선장과 미스 코넬리아가 식사를 하러 왔다. 레슬리와 딕도 초대했지만 레슬리는 핑계를 대고 사양했다. 크리스마스엔 언제나 아이작 웨스트 삼촌네에 간다고 했다.
“레슬리는 그렇게 하는 게 나아요. 레슬리는 낯선 사람들이 있는 곳에 딕을 데려가지 못해요. 그래서 크리스마스가 되면 언제나 힘들어하죠. 레슬리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참 즐겁게 크리스마스를 보냈는데.”

미스 코넬리아가 앤에게 말했다.

미스 코넬리아와 레이철 린드 부인은 서로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 둘이 서로 충돌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린드 부인은 앤과 마릴라를 도와 식사 준비를 했고, 길버트에게 짐 선장과 미스 코넬리아를 대접하라는 임무가 맡겨졌는데, 아니 오히려 그 둘이 길버트를 대접했는지도 모를 상황이긴 했지만, 그 오랜 두 친구 사이의 대화와 반목의 열기는 시들 줄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크리스마스 정찬이 있기는 정말 오랜만입니다, 블라이드 부인. 미스 러셀은 크리스마스 때면 언제나 도시에 있는 친구 집에 갔어요. 이 집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정찬이 있었을 때 나도 여기 있었죠. 존 선생의 신부가 요리를 했답니다. 그게 60년 전 오늘의 일이군요. 블라이드 부인, 그날도 오늘 같았어요. 눈이 언덕을 하얗게 덮었지만 항구의 바다는 유월처럼 푸르렀죠. 그때 나는 그저 작은 소년이었고 그전엔 크리스마스 정찬에 초대된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리고 배불리 먹기엔 너무 부끄럼을 탔죠. 지금은 다 극복했지만 말입니다.”

짐 선장이 말했다.

“남자들은 거의가 다 그래요.”

맹렬히 바느질을 하며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코넬리아는 아무리 크리스마스라 해도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가만히 앉아 있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노는 날이라 해도 아기는 태어나는 법이고 아, 당장 글렌 세인트 메리의 가난한 집에 아기가 태어난다지 않는가. 미스 코넬리아는 아기들로 빽빽한 그 집에 음식을 잔뜩 보냈다. 그래야 자기도 편안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알다시피 남자의 마음으로 통하는 길은 위장을 통과하지, 코넬리아.”

짐 선장이 말했다.

“남자도 마음이 있다면 선장님 말을 믿지요. 그 많은 여자들이 요리를 하다가 죽어버리는 이유도 다 그 때문이겠지요. 가엾은 아멜리아 벡스터처럼 말이에요.”

미스 코넬리아가 되받아쳤다.

“아멜리아는 작년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죽었어요. 결혼하고 나서 20명분의 식사를 차려내지 않아도 되는 첫 크리스마스가 되었죠. 아멜리아에겐 정말 필요하고 즐거운 변화였을 거예요. 이제 아멜리아가 죽은 지 일 년이 지났으니 조금 있으면 호레스 벡스터가 다시 여자에게 추파를 보낸다는 소문을 듣게 될 거예요.”

“벌써 들었어.”

길버트에게 윙크를 하며 짐 선장이 말했다.

“그 사람이 요 근래 일요일에 장례식용 검은 상복에 풀을 빳빳하게 먹인 칼라를 달고 집으로 찾아오지 않았나?”

“아니요. 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올 필요도 없어요. 오래전 그 사람이 새것이었을 때라면 몰라도, 난 뭐든 헌것은 싫어요. 아, 정말이에요. 그리고 호레스 벡스터 말이 나와서 하는 소린데, 지난여름 그 사람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경이었을 때 하느님께 기도를 했더니 마침 그 사람 부인이 죽어 생명 보험금을 타게 됐대요. 그 사람 말이 그게 기도의 응답이라는군요. 사내들이 다 그렇지, 뭐.”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어, 코넬리아?”

“감리교회 목사가 그렇게 말했어요. 그것도 증거라고 친다면 말이죠. 로버트 벡스터도 나한테 똑같은 이야기를 했고요. 하지만 난 그건 증거로 치지 않아요. 로버트 벡스터는 말을 있는 그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이런, 이런, 코넬리아! 그 사람도 사실을 말하기는 해. 그런데 자기 생각을 자주 바꾸다 보니 그렇게 들리는 거지.”

“너무 자주 그런다니까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한 사람을 용서하려고 다른 사람을 믿을 수는 없죠. 난 로버트 벡스터는 참아줄 수 없어요. 그 사람은 마거릿과 결혼식을 올리고 난 다음 일요일에 헌금을 거둘 때서야 교회로 들어오다가 성가대가 봉헌 찬송으로 <보라, 신랑이 오네>를 불렀다고 감리교도로 개종해버린 사람이에요. 교회에 지각한 사람한테 딱 맞는 대접을 한 건데 말이에요. 그 사람은 언제나 성가대가 자길 모욕하려고 일부러 그랬다고 우겼어요. 그 사람은 그럴 가치도 없는 사람인데. 그 벡스터 집안은 항상 자기네가 정말 중요한 인물인 걸로 착각하고 살죠. 로버트 벡스터의 형 엘리팔렛은 악마가 항상 자기 가까이에 있다고 여기면서 살았어요. 흥, 아무리 악마라도 그 사람한테 그렇게 많은 시간을 허비하겠어요?”

“글쎄, 잘 모르겠군. 엘리팔렛은 너무 오랫동안 혼자 살았어. 개나 고양이 한 마리도 안 기르고 말이야. 사람이 혼자 사는데 하느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악마랑 함께하기 쉽지. 그 사람은 어느 쪽이든 선택해야 했다고 난 생각해. 악마가 언제나 라이프 벡스터 가까이에 있다면 그건 아마 라이프가 악마를 가까이 두고 싶어서일 거라고.”
짐 선장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남자들이란…….” 

이렇게 말하고 미스 코넬리아는 조용히 복잡한 장식을 해넣는데 열중했다. 그런데 짐 선장이 짐짓 지나가는 말인 듯 말을 던지며 코넬리아의 마음을 헤집어놓았다.
“지난주 일요일 아침에 감리교회에 갔었지.”

“그냥 집에서 성경책이나 읽는 게 나았을 텐데요.”

미스 코넬리아가 응수했다.

“이런, 코넬리아가 나가는 교회에 설교가 없을 때는 감리교회에 나간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잖아. 나는 지금까지 장로교도로 76년을 살았고 이제 와서 개종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고.”

“나쁜 본을 보이는 거예요.”

미스 코넬리아가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장난기가 발동한 짐 선장은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난 진짜 노래를 듣고 싶었다고. 감리교회 성가대가 노래를 잘하거든. 코넬리아도 우리 교회 성가대가 둘로 나뉜 다음부터는 형편없이 노래를 못 부른다는 걸 잘 알잖아?”

“노래가 무슨 상관이에요? 우리 성가대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요. 그리고 하느님은 까마귀 소리건 나이팅게일 소리건 상관하지 않으신다고요.”

“자, 자, 코넬리아, 난 음악에 대한 주님의 안목이 그보다는 더 나은 걸로 알고 있는데.”

짐 선장이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 교회 성가대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요?”

웃음을 참느라 애쓰고 있던 길버트가 물었다.

짐 선장이 대답했다.

“3년 전에 불거진 교회 건축 문제로 거슬러 올라가지요. 새로 교회를 짓는데 장소 문제로 아주 큰 곤욕을 치렀어요. 교회를 새로 지을 자리랑 원래 교회 자리가 서로 200미터도 안 떨어져 있었는데 그 문제로 그렇게 지독하게 싸워댄 걸 생각하면……. 모르는 사람들은 아마 천리는 떨어져 있는 줄 알았을 거예요. 세 개 파로 나뉘었는데, 한 파는 동쪽에, 또 다른 파는 남쪽에, 그리고 나머지 파는 원래 있던 자리에 교회를 짓자고 했죠. 잠자리에 들어서도, 식사를 하면서도, 교회에서도, 시장에서도 어디서든 만나기만 하면 싸워댔어요. 3대 전에 있었던 일까지 죄다 끌어내 가며 싸웠지요. 그 문제 때문에 세 쌍이나 헤어졌어요. 그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회의는 또 얼마나 많이 열었게요! 코넬리아, 루터 번스 노인이 일어나서 연설했던 거 기억나나? 그 양반 엄청난 연설을 늘어놓았지?”

“다 까놓고 이야기하세요. 그 사람 처음부터 끝까지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화만 냈잖아요. 그럴 수밖에요. 능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들만 모여 있었으니. 하긴 남자들이 만든 위원회에 뭘 기대하겠어요? 그 교회 건축 위원회는 스물일곱 번이나 열렸어요. 그러면 뭐 해요? 첫 번째 모임 후에나 마지막 모임 후에나 교회 건축을 시작도 못 하긴 매 한가지였잖아요? 뭐 갑작스럽게 서두르더니 원래 있던 교회를 부셔놓기나 했죠. 그래서 예배드릴 장소도 없었잖아요.”

“감리교인들이 자기네 교회를 쓰라고 해줬잖아, 코넬리아.”

“우리 여자들이 그 문제를 접수하지 않았으면 글렌 세인트 메리 교회는 아직까지도 짓지 못했을 거예요.”

짐 선장의 말은 무시하며 미스 코넬리아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남자들이 죽도록 싸움만 하고 있을 작정이면 우리가 교회를 세울 거라고 나섰죠. 그리고 또 감리교도들이 우릴 두고 비웃는 것도 지겨웠어요. 우린 딱 한 번 모임을 갖고 거기서 바로 위원회를 선출해서는 당장 기부금 모금 운동에 나섰죠. 우리가 해냈다고요.

남자들이 우리한테 시비를 걸어오면 남자들이 교회를 짓겠다면서 2년을 허비했으니 이젠 우리 차례라고 쏘아주었어요. 남자들 입을 아주 꾹 다물게 해버렸지요. 아, 내 말을 믿어요. 그러고는 6개월 뒤에 교회가 완성됐다고요. 우리의 결심이 굳은 걸 알고는 남자들도 싸움을 멈추고 일을 시작했죠. 아, 여자가 설교를 하거나 장로는 될 수 없지만, 교회를 짓고 또 그 자금을 모으는 일은 할 수 있어요.”

“감리교도는 여성도 설교할 수 있어.”

짐 선장이 말했다.

그러자 미스 코넬리아가 쏘아봤다.

“내가 감리교도들이 상식 없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에요, 선장님. 내가 말하려는 건 과연 그 사람들이 정말 신실한지 의심스럽다는 거예요.”

“미스 코넬리아는 여성에게도 참정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죠?”

길버트가 말했다.

“난 투표권에 목말라 하지 않아요. 아, 정말이에요. 그건 남자들 뒤치다꺼리나 해야 하는 일이라구요. 요즘은 남자들이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해결을 못 하겠으면 우리 여자들에게 기꺼이 투표권을 준다며 골치 아픈 문제를 우리에게 떠넘겨요. 그게 남자들 수법이에요. 여자들이 참을성이 있기에 망정이지. 아, 정말이에요!”

미스 코넬리아가 경멸조로 말했다.

“욥은 어떻고?”

짐 선장이 말했다.

“욥이요! 참을성 있는 남자가 하도 귀하다 보니 그런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나오면 절대 잊지 않고 그 얘기를 끝까지 우려먹죠. 그리고 이름이 욥이라고 해서 꼭 참을성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항구 저편에 사는 욥 테일러 노인같이 참을성 없는 사람은 내 보질 못했으니까요.”
미스 코넬리아가 의기양양해하며 응수했다.

“글쎄, 코넬리아, 그 사람은 시험을 너무 많이 당했어. 코넬리아라도 그 사람 부인을 변호할 수는 없을걸. 난 윌리엄 맥컬리스터 노인이 그 부인 장례식에서 한 얘기를 다 기억하고 있다고. ‘이 여자가 기독교인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성질머리는 꼭 악마의 성질머리야.’ 하고 말하지 않았냐고.”

“난 그 부인도 노력은 했다고 생각해요.”

미스 코넬리아가 주저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욥이 자기 아내가 죽었을 때 한 말을 정당화할 수는 없어요. 장례식이 끝나고 욥은 우리 아버지와 함께 묘지에서 집으로 돌아왔어요. 집에 거의 다 올 때까지 말을 한 마디도 안 하다가 갑자기 크게 한숨을 쉬더니 ‘내가 이 말을 해도 믿지 못하시겠지만, 스티븐 씨, 오늘이 내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에요!’ 그러더래요. 사내들 하는 짓이 다 그렇지, 뭐.”

“욥 부인이 욥의 삶을 버겁게 했으니 그렇지.”

곰곰이 생각하며 짐 선장이 말했다.

“그래도 예의라는 게 있잖아요, 안 그래요? 속으로야 마누라가 죽은 게 아무리 좋고 기뻐도 그걸 포 윈즈 사람들이 다 알게 공표할 필요는 없었다고요. 그리고 욥 테일러는 얼마 안 있어 결혼을 했어요. 그 결혼이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시다시피 그 사람 두 번째 부인은 욥을 꼼짝없이 휘어잡고 살았죠. 아 욥의 목덜미를 잡고 끌고 다니다시피 했잖아요. 아, 정말이에요! 그 여자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욥이 자기 첫 번째 부인의 묘비를 세우도록 만든 거였어요. 그리고 자기 이름을 새길 자리도 남겨두게 했죠. 욥에게 자기 묘비를 세우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어요.”

“테일러 집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글렌에 루이스 테일러 부인은 어떤가요, 선생?”

짐 선장이 물었다.

“천천히 나아지고 있긴 하지만, 그 부인은 일을 너무 많이 해요.” 길버트가 대답했다.

“그 남편도 일을 너무 열심히 해요. 돼지를 키워 상을 받으려고요. 그 사람은 돼지 잘 기르기로 유명하죠. 자기 아이들보다 돼지를 훨씬 더 자랑스러워한다니까요. 뭐, 그 사람 돼지가 최고인 건 사실이지만 아이들은 그렇지가 못해요. 아이들 엄마는 원래가 가난한 데다 아이를 가졌을 때도, 기를 때도 잘 먹지를 못했어요. 돼지는 크림을 먹는데 아이들은 우유 찌끼나 먹었죠.”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코넬리아 말이 맞아요, 정말 가슴 아픈 이야기죠. 루이스 테일러는 바로 그런 사람이에요. 아이들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것을 빼앗다니. 그 불쌍하고 가엾은 아이들을 볼 때면 너무 화가 나서 밥이 안 넘어갈 지경이라니까요.”

짐 선장도 말했다.

앤이 손짓을 해서 길버트가 부엌으로 갔다. 앤은 문을 닫고 길버트에게 아내로서 할 수 있는 조언을 했다.

“길버트, 짐 선장님이랑 합세해서 그렇게 미스 코넬리아를 자꾸 골리면 어떡해. 내가 쭉 들었는데, 이제 그만두라고.”

“앤, 미스 코넬리아는 그런 걸 즐긴다고. 당신도 알잖아.”

“그래도 당신이나 짐 선장님이나 미스 코넬리아를 그만 좀 내버려둬야 한다구. 이제 식사 준비는 다 됐어. 그리고 길버트, 레이철 아주머니가 거위 요리를 자르시지 못하게 해. 당신이 제대로 못 할 거라고 생각해서 직접 하시겠다고 할 거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드려.”

“나도 잘할 수 있어. 지난 한 달 동안 도표를 봐가며 고기 자르는 법을 열심히 공부했다고. 자를 때 말만 시키지 마, 앤. 말을 시켜서 차례를 잊어버리면 당신이 전에 기하 공부할 때 선생님이 문자를 바꿔버려 낭패를 봤던 것보다 더한 지경에 이르게 될 거라고.”

길버트가 대답했다.

길버트는 거위 요리를 잘 잘랐다. 린드 아주머니도 인정할 정도였다. 그리고 모두가 거위 요리를 맛있게 먹었다. 앤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 정찬은 멋지게 끝나 주부로서의 자부심이 빛났다. 즐거운 식사가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식사를 끝내고 나서 모두들 빨간 불꽃이 타오르는 벽난로 주변에 모여 붉은 태양이 포 윈즈 항구에 낮게 걸리고, 길가에 쌓인 눈 위로 미루나무의 길고 파란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까지 짐 선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 난 등대로 돌아가야겠어요. 해가 떨어지기 전에 집에 가야죠. 멋진 크리스마스 정찬이었습니다, 블라이드 부인. 집에 돌아가기 전에 데이비를 한번 등대에 데리고 오세요.”

마침내 이야기를 마치며 짐 선장이 말했다.

“돌로 만든 신을 보고 싶어요.”

데이비가 신나서 외쳤다.




16

등대에서의 새해 전야






크리스마스가 지나자 ‘초록 지붕 집’ 식구들은 모두들 집으로 돌아갔다. 마릴라는 봄에 다시 와서 한 달 정도 머무르겠다고 약속했다. 새해가 오기 전에 눈이 더 내렸고 항구는 얼어붙었다. 하지만 하얀 눈에 갇힌 들판 너머 만(灣)은 얼지 않았다. 그해의 마지막 날은 추운 겨울 날씨였지만 눈이 부시게 밝고 찬란해 모두의 입에서 경탄이 터져 나오게 했다. 하지만 사랑을 얻지는 못했다. 하늘은 날이 선 듯 파랬으며 다이아몬드 같은 눈꽃송이들이 쉴 새 없이 반짝거렸고 휑한 나무는 이파리 하나 없이 헐벗었지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태연하게 빛나는 제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눈 덮인 언덕은 햇빛을 반사해 마치 수정으로 만든 창을 쏘아대는 것처럼 눈이 부셨다. 그림자까지도 원래 그런 모습은 아닐 텐데도 날카롭고 경직되어 윤곽이 뚜렷했다. 모든 것이 다 반짝반짝 빛나며 장관을 이루어 모두 원래보다도 열 배는 더 멋져 보였지만, 흉한 것들 또한 평소보다 열 배는 더 흉해 보여 뭐든 멋지든지 흉하든지 둘 중 하나였다. 그 엄중한 화려함에는 두 가지가 부드럽게 섞인다든가 불분명하고 잡히지 않는 안개 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전나무만은 신비로움과 그림자의 나무답게 자기만의 개성을 지키며 자연의 광휘에 묻히지않았다.

하지만 전나무도 시들어갔다. 점점 그 아름다움에 우수가 느껴졌다. 나무 끝이 날카로운 각도를 이루며 반짝이던 것이 무뎌지면서 미광에 녹아 들어갔다. 하얀 항구는 부드러운 회색과 분홍색을 띠었고 멀리 보이는 언덕은 자주색으로 변했다.

“올해가 아름답게 저물어가네.”

앤이 말했다. 앤과 레슬리 그리고 길버트는 짐 선장과 함께 새해를 맞이하려고 포 윈즈 곶 등대로 가고 있었다. 해가 졌고 남서쪽 하늘에 금성이 떠올랐다. 황금 빛깔로 찬란하게 빛나는 저녁별은 자매별인 지구에 그 어느 때보다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는 듯했다.

앤과 길버트는 처음으로 그 눈부신 별이 드리우는 희미하고 신비로운 그림자를 보았다. 하얀 눈에 그 그림자가 드러날 때 외에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그 그림자는 약간 비켜서서 볼 때만 보이고 똑바로 바라보면 금방 사라져버린다.

“그림자의 영혼 같아, 그렇지? 그림자가 옆에 있는 것처럼 보여서 몸을 옆으로 돌려 보면 어느새 없어지고 말잖아.”

앤이 속삭였다.

“금성의 그림자는 일생에 단 한 번만 볼 수 있고 그걸 본 해엔 살면서 가장 놀라운 선물을 받게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레슬리가 말했다. 마치 금성의 그림자도 자기에게는 선물을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 말에 힘이 없었다. 앤은 부드러운 황혼을 뒤로한 채 미소 지었다. 그 신비로운 그림자가 자신에게 약속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앤은 확실히 알았다.

등대에서 마셜 엘리엇을 만났다. 처음에 앤은 이 긴 머리에 긴 수염을 한 기이한 남자가 자기들만의 작고 친밀한 만남을 침범한 것 같다는 느낌에 싫었다. 하지만 마셜 엘리엇은 곧 자신도 당당한 요셉의 종족임을 증명했다. 그는 재치 있고 지적이며 박식한 사람으로 짐 선장 못지않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결국엔 엘리엇이 새해맞이 행사에 동참한 것을 모두 기뻐했다.

짐 선장의 조카 손자 조도 새해를 같이 보내려고 등대에 와 있었다. 지금 아이는 소파에서 잠이 들었고 그 발치에는 일등 항해사가 커다란 황금빛 공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었다.

“정말 사랑스럽지 않습니까?”

짐 선장은 자못 뿌듯해하며 말했다.

“난 아이들 잠든 모습이 참 보기 좋더군요, 블라이드 부인. 내 생각엔 저 모습이 바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광경이 아닌가 싶어요. 조는 여기 와서 자고 가는 걸 좋아해요. 나랑 같이 자니까요. 집에서는 형, 동생이랑 같이 자야 하는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에요. ‘왜 난 아빠랑 자면 안 돼요, 할아버지?’ 이렇게 묻고는 해요.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랑 잠을 자는데.’ 그러면서요.

이 녀석이 질문을 해대면 아마 목사님도 못 당할 겁니다. 나도 그 아이가 질문을 하면 진땀이 나요. ‘짐 할아버지, 내가, 내가 아니면 난 누구예요?’, ‘하느님이 죽으면 어떻게 되죠?’ 오늘도 잠들기 전까지 그 두 가지 질문을 해대더군요.

이 아이는 보는 것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요. 기가 막힌 이야기를 지어내지요. 그럼 이 아이 엄마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한 벌로 요 녀석을 옷장에 가둬버려요. 그러면 거기 앉아서 또 다른 이야기를 지어내서 엄마가 옷장 바깥으로 내보내줄 때 그 이야기를 해요.

오늘 여기 와서도 나한테 이야기를 하나 해줬어요. ‘할아버지.’ 하고 제법 진지하게 말을 꺼내더군요. ‘저 오늘 글렌에서 모험을 했어요.’ ‘어떤 모험을 했는데?’ 뭔가 놀라운 이야기를 기대하며 내가 물었지요.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다르게 엉뚱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거리에서 늑대를 만났어요. 무지무지 큰 늑대였어요. 입은 빨갛고 이빨도 무지무지 길었어요.’ ‘글렌 거리에 늑대가 사는 줄은 몰랐는데?’ 하고 내가 말하자, ‘아, 이 늑대는 아주아주 먼 곳에서 왔어요.’ 하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그 늑대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해서 싸웠어요, 할아버지.’ ‘무서웠니?’ 하고 내가 물었죠. ‘아니요, 나한테는 아주 커다란 총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늑대를 쏴서 죽였어요. 할아버지, 늑대는 정말 죽었어요. 그러고는 천국에 가서 하느님을 앙 하고 물어버렸어요.’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정말 기가 막혀서 할 말이 없었답니다, 블라이드 부인.”

모두들 유목 장작 불가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짐 선장은 이야기를 했고 마셜 엘리엇이 멋진 테너 목소리로 옛 스코틀랜드 민요를 불렀다. 마침내 짐 선장이 벽장에서 오래된 갈색 바이올린을 꺼내 연주를 시작했다. 꽤 들을 만한 솜씨여서 일등 항해사만 빼고 모두들 짐 선장의 연주를 즐겼다. 일등 항해사는 총이라도 맞은 듯 소파에서 펄쩍 뛰어내려 이의라도 제기하는 듯 날카롭게 한 번 야옹하더니 위층으로 쏜살같이 올라가 버렸다.

“저 녀석은 음악 감상하는 법을 절대 배우지 못해요. 듣고 배우고 할 정도로 진득하게 앉아 있질 않아요. 글렌 교회에 오르간을 들여왔을 때 일인데요, 오르간 연주자가 연주를 시작하자마자 장로인 리처드 노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둥지둥 복도를 걸어 교회 밖으로 나가버린 적이 있었죠. 그걸 보니 일등 항해사 생각이 나더라고요. 내가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하면 녀석이 나가버리던 장면이 생각나 생전 처음 교회에서 큰 소리로 웃을 뻔했죠.”

짐 선장이 말했다.

짐 선장이 연주하는 흥겨운 곡에는 전염성이 강했다. 마셜 엘리엇이 음악에 맞춰 발을 움직이며 몸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엘리엇은 젊었을 땐 꽤 이름난 춤꾼이었다. 그가 일어서서 레슬리에게 손을 내밀었고 레슬리도 즉시 이에 화답했다. 벽난로 불빛이 반짝이는 방에서 빙글빙글 리듬에 맞춰 우아하게 돌며 춤을 추는 그들의 모습은 참 아름다웠다. 레슬리는 영감을 받은 사람처럼 춤을 췄다. 격렬하고 달콤한 음악의 흥겨움이 레슬리 안에 들어와 그녀를 사로잡은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매혹된 앤은 경탄의 눈길로 레슬리를 바라보았다. 한 번도 레슬리의 그런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레슬리의 타고난 풍요로움과 멋과 매력이 터져 나와 그녀의 주홍색 뺨과 빛나는 눈 그리고 우아한 몸짓에 넘쳐흐르는 듯했다. 마셜 엘리엇의 긴 수염과 머리카락도 그 그림 같은 장면을 망치진 못했다. 아니, 오히려 풍미를 더했다. 마셜 엘리엇은 마치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딸과 춤을 추는 멋 옛날 북구의 바이킹 같았다.

“아주 멋지고 아름다운 춤이었어요. 내가 젊었을 때는 그렇게 멋진 춤을 좀 봤죠.”

레슬리가 의자에 앉자 짐 선장은 지친 손에서 바이올린 활을 내려놓고 숨은 차지만 즐겁게 웃으며 말했다.

“난 춤추는 걸 좋아해요. 열여섯 살 이후로는 춤을 추어보지 않았지만. 음악이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아서 춤을 출 땐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려요. 내 마음엔 춤추는 즐거움을 계속 느끼고 싶다는 기분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죠. 춤을 출 땐 내 아래 바닥도 없고 나를 둘러싼 벽도 없고 또 내 위로 지붕도 없어요. 별들 사이를 붕붕 떠다니는 기분이 되어요.”

레슬리가 앤에게 말했다.

짐 선장은 바이올린을 원래 있던 자리에 걸었다. 그 옆에는 지폐 몇 장이 들어 있는 커다란 액자가 있었다.

“혹시 아는 사람 중에 저렇게 지폐를 그림 삼아 벽에 걸 정도로 재력 있는 사람 있어요?”

짐 선장이 물었다.

“저기 10달러짜리 지폐가 20장이 있지만 저 유리 값도 안 되죠. 예전 프린스에드워드 섬 은행에서 발행한 지폐예요. 그 은행이 부도났을 때 저렇게 액자에 넣고 벽에 걸어뒀죠. 절대 은행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걸 상기시키고 또 백만장자가 된 기분을 한번 느껴볼 요량으로 저렇게 했답니다. 이봐, 항해사, 겁먹지 마라. 이제 와도 돼. 음악이랑 흥청망청 떠들고 노는 건 다 끝났어. 이제 한 시간 정도만 있으면 새해예요. 저기 만 저편에서 새해가 다가오는 걸 일흔여섯 번이나 봤답니다, 블라이드 부인.”

“백 번째도 보실 겁니다.”

마셜 엘리엇이 말했다.

짐 선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러고 싶지는 않네. 나이가 들면 죽음이 점점 친숙해지지. 누구도 정말 죽기를 바라서 그런다는 건 아니지만 말일세. 마셜, 테니슨이 죽음에 관해 한 말은 진실이야.

글렌에 월레스라는 나이 많은 할머니가 살았는데, 일생을 수많은 역경으로 고생만 했지. 가엾은 영혼이었어. 게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거의 모두 잃어버렸고. 웰레스 부인은 항상 때가 오면 기쁠 거라고 말했어. 더 이상은 이 눈물의 계곡에 머무르고 싶지 않다고 했지. 그런데 막상 그 할머니가 병이 났을 때는 소동이 났지. 마을에서 의사와 숙련된 간호사가 왔어. 개 한 마리를 죽일 만큼 많은 약을 갖고. 그래, 삶은 눈물의 계곡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통곡해야 할 삶이라도 즐기는 사람이 있다고 난 생각하네.”

그들은 불가에 모여 그해의 마지막 시간을 조용히 보냈다. 12시가 되기 몇 분 전 짐 선장이 일어서서 문을 열었다.

“새해가 들어오게 해야지요.”

선장이 말했다.

반짝이는 달빛 리본이 만을 휘감은 청명하고 푸른 밤이었다. 모래톱 안쪽으로 항구는 길에 진주를 깔아놓은 것처럼 빛났다. 그들은 문 앞에 서서 기다렸다. 짐 선장은 무르익은 풍부한 경험을 안고, 마셜 엘리엇은 원기 왕성하지만 공허한 중년의 삶 한가운데서, 앤과 길버트는 소중한 추억과 아름다운 희망에 부풀어, 그리고 레슬리는 빈곤함으로 점철된 세월과 희망 없는 미래를 품고 그렇게 새해를 기다렸다. 벽난로 위 조그만 선반에 있는 시계가 12시를 알리는 종을 치기 시작했다.

“어서 오라, 새해여.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가장 멋진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일이 생기든지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선장이 함께해 멋진 항구에 도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괘종시계 소리가 사라질 때 짐 선장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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