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5권 17~18

나단비 | 2024.04.04 17:55:47 댓글: 0 조회: 91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8677
17

포 윈즈의 겨울






새해가 밝자 겨울이 본격적으로 들이닥쳤다. 앤의 작은 집 주변으로도 눈이 많이 쌓였고 창문은 온통 성에로 뒤덮였다. 항구에 언 얼음은 점점 더 딱딱해지고 두꺼워져 포 윈즈 사람들은 여느 때와 같이 얼음 위를 길 삼아 오갔다. 친절하게도 정부에서 나무를 둘러치고 썰매 종을 매달아 딸랑딸랑 소리가 나게 해 안전한 길을 표시해주었다. 달빛이 깃든 밤이면 앤은 ‘꿈의 집’에 앉아 마치 요정의 벨 소리 같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만도 얼어붙었고, 포 윈즈의 등대도 더 이상 반짝이지 않았다. 항해를 하지 않는 몇 달 동안은 짐 선장의 등대도 할 일이 없어진다.

“일등 항해사와 난 따뜻하고 재미있게 지내는 것 외에는 봄이 올 때까지 할 일이 없어요. 지난번 등대지기는 겨울이 오면 언제나 글렌에서 보냈지요. 하지만 난 여기 그대로 있으렵니다. 글렌으로 가면 일등 항해사가 상한 음식을 먹거나 개한테 물릴지도 몰라요. 등대 불빛도 없고 바다도 얼어서 외롭긴 하겠지만 친구들이 가끔씩 찾아와 주면 그럭저럭 지낼 수 있을 거예요.”

짐 선장에게는 빙상 요트가 있어서 길버트와 앤 그리고 레슬리는 짐 선장과 함께 보트를 타고 신나게 항구 주변얼음 위를 지치고 다니고는 했다. 앤과 레슬리는 기다란 눈 신을 신고 같이 들판이나 폭풍이 지나간 후의 바다를 거닐었고, 글렌 너머에 있는 숲까지 가보기도 했다. 그렇게 산책을 하거나 난롯가에서 이야기를 나눌 땐 둘은 서로에게 더없이 좋은 친구였다. 서로에게 무언가를 주기도, 생각을 나누기도 했으며, 때로는 침묵 속에서도 삶이 더욱 풍요롭다고 느꼈다.
둘은 서로의 집을 가르고 있는 하얀 눈벌판을 바라보며 저 너머에 친구가 있다는 생각에 기뻐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앤은 레슬리와의 사이에 뭔가 방해물이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고, 그런 거북한 감정은 영 말끔히 사라지지 않았다.
“왜 레슬리와 좀 더 친해질 수 없는지 알 수가 없어요. 전 레슬리를 정말 좋아해요. 정말 많이 동경해요. 레슬리를 제 마음 가까이 데려오고 싶고, 또 저도 레슬리 마음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요. 그런데 그 장애물을 건널 수가 없어요.”
어느 날 저녁, 앤은 짐 선장에서 말했다.
“블라이드 부인은 평생 행복하게 살았지요. 그래서 레슬리와 영혼의 교감을 나누지 못하는 걸 겁니다. 부인이 장애물이라고 느끼는 것은 레슬리가 겪은 슬픔과 고난이에요. 그건 레슬리나 부인의 책임이 아니죠. 하지만 분명히 그런 것들이 존재하고 레슬리도 부인도 그걸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짐 선장은 생각에 잠겨 말했다.
“‘초록 지붕 집’에 와서 살기 전까지는 제 어린 시절도 그리 행복하지 않았어요.”
앤은 창밖 달빛을 받은 눈밭에 드리워진 앙상한 나무 그림자의 고요하고 슬픈, 활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아름다운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그건 제대로 돌봐줄 사람이 없는 아이가 겪게 되는 일상적인 불행에 불과하죠. 블라이드 부인은 삶에서 비극을 겪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가엾은 레슬리는 비극이란 비극은 죄다 겪었어요.
레슬리는 블라이드 부인이 결코 자기 삶을 이해하지도, 자기 삶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리라 여기는 거예요. 그래서 부인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생각할 땐 그래요. 그래야만 자기가 다치지 않으니까요. 아시다시피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그걸 건드리거나 가까이하지 못하도록 움츠러들지요. 그 상처는 우리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요. 레슬리의 영혼은 상처로 거의 다 까지다시피 했을 거예요. 그러니 그걸 감추려드는 게 너무도 당연하죠.”
“정말 그것뿐이라면, 전 상관없어요, 짐 선장님. 저도 이해해요. 하지만 항상은 아니지만 이따금씩 그럴 때가 있어요. 레슬리가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는 때요. 가끔씩 레슬리의 눈빛에 적의와 혐오 같은 것이 들어 있는 걸 느껴요. 그런 눈빛은 아주 빨리 없어지긴 하지만 전 분명히 봤어요. 그럴 때 전 상처를 입어요. 전 누가 절 미워하면 견디질 못해요. 그리고 전 레슬리의 마음을 얻으려고 무척 애를 썼어요.”
“블라이드 부인은 이미 레슬리의 마음을 얻었어요. 레슬리가 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바보 같은 생각은 하지 말아요. 정말로 레슬리가 부인을 싫어한다면 이렇게 어울리며 이런저런 일을 같이 하지도 않을 겁니다. 확실해요. 제가 그만큼은 레슬리를 알아요.”
“제가 포 윈즈에 오던 날 레슬리는 거위를 몰고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어요. 그때 레슬리는 저를 아까 말씀드린 그런 시선으로 바라봤어요. 제가 레슬리의 아름다움을 경탄할 때도 그런 느낌을 받았고요. 레슬리는 적개심에 찬 눈으로 저를 봤어요. 정말 그랬어요, 짐 선장님.”
앤은 계속 우겼다.
“아마 다른 문제로 기분이 안 좋아 있었던 걸 거예요, 블라이드 부인. 레슬리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부인을 만난 거고요. 레슬리는 이따금씩 그렇게 부루퉁하게 굴 때가 있어요. 딱한 일이죠. 레슬리가 견뎌야 했던 지난날들을 알고 있는 나로선 그런 레슬리를 비난할 수 없어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어요. 의사 선생과 내가 악의 기원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눠봤지만 아직까지 그 정체를 완전히 알아내지 못했어요.
인생에는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너무 많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부인이나 의사 선생 사이처럼 어떤 때는 일이 정말 이치에 맞게 잘 돌아가기도 하죠. 그런데 또 전혀 그렇지가 않을 때가 있어요. 레슬리의 경우가 그래요.
부인은 레슬리처럼 똑똑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여왕같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저기 저 위에 갇혀 있잖아요. 여자로서의 행복은 모두 빼앗겨버린 채 평생을 딕 무어나 보살피며 살아야 해요. 다른 어떤 기대도 할 수 없는 채로 말이에요. 그렇지만 부인, 내 말을 잘 들으세요.
레슬리는 지금의 삶을 스스로 선택했어요. 딕이 떠나기 전 그런 삶이 아닌 지금 이대로의 삶을요. 이 늙은 선원이 참견할 일이 아니지만요. 하지만 부인은 레슬리를 아주 많이 도와줬어요. 부인이 포 윈즈에 오고 나서 레슬리가 아주 많이 변했어요. 부인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같이 나이 든 사람은 그런 차이점을 알아볼 수 있답니다. 요전 미스 코넬리아랑 내가 그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가 의견 일치를 본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그거였어요. 그러니 레슬리가 부인을 싫어한다는 생각은 지워버려요.”

하지만 앤은 레슬리가 자기에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이해할 수 없는 적대감을 품고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떨쳐낼 수 없었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느낌은 아니었고 그저 직감적으로 느끼는 것이어서 말로 내놓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런 생각은 늘 마음에 남았다. 뿐만 아니라 둘이 우정을 나누며 느끼는 기쁨을 간간이 흐려놓기까지 했다. 보통은 거의 잊고 지내는 감정이긴 했지만 레슬리에게 숨겨진 가시가 있고 그 가시가 어느 때고 자기를 찌를 수 있다고 앤은 느꼈다.
레슬리에게 봄이 되면 자기 ‘꿈의 집’에 일어날 일을 말하다가도 잔혹하게 그 가시에 찔렸다고 느꼈다. 레슬리는 적의에 찬 눈으로 사납게 앤을 쳐다봤다.
“그러니까 앤이 그런 걸 모두 가질 거라고요.”
레슬리가 목멘 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말 한 마디 없이 몸을 돌려세우더니 들판을 가로질러 자기 집으로 가버렸다. 앤은 깊이 상처받았다. 그 순간만큼은 다시는 레슬리를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고 레슬리가 다시 앤의 집으로 찾아와 명랑하고 상냥하게 굴면서 솔직하고 재치 넘치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앤은 상처받고 섭섭했던 감정을 풀었다. 하지만 그다음부터는 레슬리에게 자신의 아름다운 꿈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레슬리도 다시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봄이 건네는 말에 늦겨울이 귀 기울이고 있는 것 같은 어느 저녁의 일이었다. 레슬리가 앤의 작은 집에 놀러 왔다. 레슬리는 가면서 작은 하얀 상자를 탁자에 두고 갔다. 레슬리가 가고 나서 상자를 발견한 앤은 궁금해하며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훌륭한 솜씨로 만든 하얀 아기 옷이 들어 있었다. 자수가 섬세하고 단을 시쳐 올린 솜씨도 근사한 정말 예쁜 옷이었다. 바늘 한 땀 한 땀에 공이 많이 들어간 듯 보였다. 목과 소매 부분에 달린 레이스와 작은 프릴은 진짜 발랑시엔 레이스8)였다.

옷 위에는 ‘레슬리가 사랑을 담아’라고 쓴 카드도 놓여 있었다.
“이걸 만드는 데 시간이 무척 많이 걸렸을 텐데. 재료값도 레슬리가 충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들었을 거고. 다정하기도 하지.”
앤이 말했다.
하지만 레슬리는 나중에 앤이 고맙다고 인사했을 때도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게 굴어 앤은 다시 움츠러들고 말았다.
앤의 작은 집에 선물을 두고 간 사람이 레슬리만은 아니었다. 미스 코넬리아도 원치 않고 반갑지도 않은 여덟 번째 아기를 위한 바느질을 당분간 접고 앤 부부가 무척이나 고대하는 첫 번째 아기를 위한 바느질을 시작했다. 물론 이 아기는 더없는 환영을 받는 아기였다. 그리고 필리파 블레이크와 다이애나 라이트도 아주 예쁜 옷을 보내왔다. 린드 아주머니도 몇 벌 보내왔는데 자수나 프릴은 달리지 않았지만 모두 좋은 재료로 꼼꼼하게 바느질해 만든 옷들이었다. 앤 또한 아기에게 기계로 만든 옷이 아닌 사람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들어간 옷을 입히고자 열심히 아기 옷을 지으며 그 겨울을 행복하게 보냈다.
짐 선장은 앤의 작은 집을 방문하는 단골손님이자 가장 환영받는 손님이기도 했다. 날이 갈수록 앤은 점점 더 이 소박하고 진실한 노인을 사랑했다. 짐 선장은 바닷바람처럼 신선하며 아주 오랜 옛날이야기처럼 구수했다. 앤은 짐 선장의 이야기와 그만의 예스러운 풍취가 묻어나는 표현과 설명을 들을 때 지루한 적이 없었고 들으면 들을수록 즐거웠다. 짐 선장은 ‘말을 안 해도 뭔가를 이야기하는’ 진기하면서도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야기 속에는 인간애의 정수와 뱀의 지혜가 아주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었다.

그 어느 것도 짐 선장을 실망시키거나 우울하게 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난 모든 일을 즐기는 게 버릇이 돼버렸어요.”
한번은 앤이 어쩌면 그렇게 변함없이 즐겁게 살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그렇게 대답했다.
“하도 오래 버릇이 되다 보니 이젠 고약한 일도 즐길 지경이에요. 그런 짜증나는 일이 계속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요. 이를테면 ‘고질병 류머티즘’ 같은 게 심할 땐 이렇게 생각하죠. ‘네가 날 언제까지 괴롭히나 두고 보자. 언젠가는 아픈 게 멈추겠지. 나빠지면 나빠질수록 빨리 멈출 거야. 그러면 결국엔 내가 이기는 거야.’”
어느 날 저녁 불 옆에서 앤은 짐 선장의 인생 일지를 읽었다. 짐 선장은 자랑스럽게 인생 일지를 앤에게 건네주어서 그걸 읽게 해 달라 짐 선장을 구슬릴 필요도 없었다.
“꼬마 조에게 남겨주려고 쓴답니다. 내가 인생의 마지막 항해를 떠나고 난 뒤 일생 동안 내가 했거나 보아온 모든 것이 다 잊히는 게 싫어요. 조가 그걸 기억하고 있다가 조의 아이들에게 들려줄 거예요.”
짐 선장의 인생 일지는 낡은 가죽 표지가 달린 노트로 그가 한 항해와 모험 들이 가득했다.
앤은 작가에게는 정말 보물 같은 기록이라고 생각했다. 문장 하나하나가 소중한 자료였다. 글 자체에 문학적 가치는 없었다. 짐 선장의 이야기 실력은 눈부시지만 그걸 펜과 잉크로 옮겨놓는 일에는 실패였다. 중요한 모험과 이야기의 대강만을 간단하게 메모해둔 정도였고 아쉽게도 철자와 문법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재능 있는 작가가 그 용맹스러운 모험의 간단한 기록 사이의 행간을 읽어내 위험에 당당하게 맞서고 남자답게 의무를 행하는 장면들을 그려낸다면 멋진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짐 선장의 인생 일지에 담긴 풍부한 유머와 가슴 두근거리게 만드는 비극은 대가의 손길을 기다렸다. 수천 번의 웃음과 슬픔 그리고 공포로 깨어날 때를 고대하고 있었다.
둘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앤은 길버트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직접 써보지 그래, 앤?”
앤이 도리질했다.
“아니,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그건 내 능력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길버트. 내가 쓸 수 있는 게 뭔지 알잖아? 공상적이고 요정이 나오는 예쁜 이야기. 하지만 짐 선장님의 인생 일지는 힘이 넘치면서도 섬세해야 하고, 심리분석에도 능해야 하면서 타고난 유머감각도 있어야 해. 역시 비극을 쓸 수 있는 재능 있는 작가가 써내야 한다고.”
“이곳으로 와줘. 여기선 노라나 황금 숙녀 아니면 쌍둥이 선원을 찾을 수는 없어. 하지만 나이 든 선장님 한 분이 너에게 기가 막힌 이야기를 해줄 거야.”
앤은 폴에게 편지를 썼다.
하지만 폴은 아쉽게도 그해엔 포 윈즈에 올 수 없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2년 동안 공부하려고 외국으로 갈 계획이었다.
“제가 돌아오면 꼭 포 윈즈에 갈게요, 선생님.”
폴은 그렇게 답장을 보내왔다.

“하지만 짐 선장님은 점점 더 늙어가는데 그분의 인생 일지를 책으로 쓸 사람은 없다니.”
앤은 속이 탔다.

8. 프랑스산의 고급 레이스.





18
봄의 나날






3월의 태양에 얼어붙었던 항구가 녹으면서 점점 흐려지고 검게 변하더니 4월이 되자 푸른 바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 바람결에 하얀 포말을 일으켰다. 이제 포 윈즈 등대도 황혼이면 다시 보석처럼 빛을 냈다.
“다시 저 등대 불빛을 보니 너무 기뻐. 겨우내 저 불빛이 너무도 그리웠었거든. 저 빛이 없을 땐 북서쪽 하늘이 텅 빈 듯 외로워 보였어.”
등대가 다시 빛을 비추기 시작한 첫날 저녁, 앤이 말했다.
대지는 새로 난 황금빛과 초록빛 잎으로 보드라워졌고, 글렌 너머 숲에선 에메랄드빛 연무가 피어났으며, 바다 쪽 계곡은 새벽이면 요정이 나올 것처럼 안개로 자욱했다.
힘찬 바람은 그 숨결에 소금기 섞인 거품을 피워내며 오락가락했다. 바다는 아름답고 요염한 여인처럼 웃고 반짝이며 치장하고 유혹했다. 청어가 떼를 지어 퍼덕였고 어촌도 다시 깨어나 일을 시작했다. 해협에는 하얀 돛이 점점이 수를 놓았고, 항구는 다시 생기를 되찾았으며, 배들이 바다 안팎으로 다시 드나들었다.
“이런 봄날엔 부활의 아침을 맞는 기분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앤이 말했다.
“다시 젊어진다면 시인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봄이면 하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지요. 60년 전에 존 셀윈 선생이 암송했던 시를 나도 한번 외워본답니다. 다른 때는 시를 외워보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나지 않는데 봄이면 바위나 들판 또는 물가에서 그 시들을 외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짐 선장이 말했다.
그날 오후 짐 선장은 앤에게 정원 가꿀 때 쓰라고 조개껍질과 모래 언덕 너머 산책로에서 찾은 달콤한 냄새가 나는 잔디를 한 아름 가져왔다.
“요즘은 이것들도 점점 없어져 갑니다. 내가 어릴 땐 아주 많았는데 이젠 아주 가끔씩만 눈에 띄어요. 꼭 찾으면 보이지도 않다가 그냥 우연히 눈에 띄죠. 이 달콤한 잔디 생각 같은 건 전혀 하지 않고 모래 언덕을 걷다가 갑자기 달콤한 냄새가 나서 발밑을 내려다보면 이게 있어요. 난 이 달콤한 잔디 냄새를 참 좋아합니다. 어머니 생각이 나거든요.”
짐 선장이 말했다.
“어머니가 좋아하셨어요?”
앤이 물었다.
“내가 알기로는 아니에요. 우리 어머니는 이 달콤한 잔디를 본 적이나 있는지 모르겠어요. 어머니가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라 이 냄새가 왠지 어머니를 생각나게 해요. 뭔가 무르익었고 건강하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요. 어머니처럼 말입니다. 존 선생의 부인은 항상 손수건에 이걸 지니고 다녔어요. 부인도 손수건에 조금 넣고 다녀 봐요. 난 가게에서 산 물건 냄새는 좋아하지 않지만 이 달콤한 잔디 냄새가 훅 풍기는 숙녀는 좋아해요.”
앤은 대합 조개껍질로 화단 가장자리를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짐 선장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감사하다며 받긴 받았다. 앤은 원래부터 조개껍질로 화단 장식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처음 그것을 받고는 별로 반기는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짐 선장은 자랑스럽게 하얀 우유빛깔 커다란 조개껍질을 화단마다 빙 둘러 깔았다. 앤은 그렇게 꾸며놓은 화단이 생각지 않게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마을 잔디밭이나 글렌에서도 그런 화단은 볼 수 없었지만 바닷가에 옛날 집처럼 지어진 ‘꿈의 집’ 정원에는 참 잘 어울렸다.
“정말 멋진걸요.”
앤이 진심으로 말했다.
“존 선생의 부인은 언제나 화단을 이 대합 조개껍질로 장식했어요. 꽃을 정말 잘 가꿨지요. 그 부인이 바라보고 손길을 주면 꽃들이 정말 잘 자랐어요. 그런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죠, 왜. 내가 볼 땐 부인도 그런 재능을 타고난 것 같아요.”
짐 선장이 말했다.
“아, 그건 잘 모르겠지만 저도 정원이 좋고 또 정원 일하는 것도 좋아해요. 화초를 심고 그것들이 자라는 것이나, 매일매일 새로운 싹이 나오는 걸 보면 뭔가를 창조해내는 기분이 들거든요. 지금 제 정원은 믿음 같아요.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요.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요.”

“이 작고 주름진 갈색 씨앗을 보면서 그 안에 있을 무지개를 상상해보면 언제나 참 놀라워요. 이 씨앗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하면 다른 세상에도 생명이 존재한다는 걸 믿기 어렵지 않죠. 그런 기적을 보지 않았다면 먼지보다 작은 것들 안에 색깔을 띠거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건 고사하고 생명이 있다는 것도 믿기 어려웠을 거예요, 그렇지요?”
짐 선장이 말했다.
로사리오 묵주의 은구슬을 세듯 날짜를 세고 있던 앤은 지금 등대나 글렌까지 긴 시간을 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미스 코넬리아와 짐 선장이 종종 앤의 작은 집으로 찾아왔다.
미스 코넬리아는 앤과 길버트를 즐겁게 해주었다. 둘은 미스 코넬리아가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야말로 배꼽이 빠져라 웃었다. 짐 선장과 미스 코넬리아가 같이 찾아오면 이야기와 오락거리가 더 풍부했다. 둘은 곧잘 설전을 벌였다. 미스 코넬리아가 공격을 하면 짐 선장이 방어하는 식이었다. 앤이 한번은 미스 코넬리아를 부추긴다고 짐 선장을 책망하기도 했다.
“아, 난 코넬리아를 놀리는 게 재밌어요, 블라이드 부인.”
회개할 줄 모르는 죄인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내 삶에서 가장 큰 즐거움이죠. 코넬리아의 혀는 아마 돌에도 흠집을 낼걸요. 그리고 부인과 의사 선생의 강아지도 나만큼이나 코넬리아의 이야기를 재밌게 듣잖아요.”
짐 선장이 하루는 앤에게 산사나무 꽃을 가지고 왔다. 정원은 온통 촉촉했고 봄날 바닷가 저녁의 향기로 가득했다. 바다에는 이제 막 떠오른 달의 입맞춤을 받은 것처럼 우윳빛 하얀 연무가 끼었고 글렌은 달빛을 받아 은색으로 환했다. 항구 저편에 있는 교회의 종소리가 꿈결처럼 달콤하게 울렸다.
그 부드러운 종소리가 황혼 속을 떠다니다 부드럽게 봄을 앓는 바닷소리와 섞였다. 짐 선장이 가져온 산사나무 꽃이 그 마술 같은 밤을 완벽하게 만들어주었다.
“올봄엔 이 꽃을 보지 못할 줄 알았어요.”
꽃에 얼굴을 묻으며 앤이 말했다.
“여기 포 윈즈 근처에서는 보이지 않죠. 글렌 너머 멀리 황야에서나 볼 수 있어요. 오늘 그 황야에 잠시 다녀왔는데 거기서 이걸 따왔습니다. 거의 다 졌으니 올봄에 볼 수 있는 마지막 꽃일 거예요.”
“어쩌면 이렇게 친절하고 사려 깊으세요, 짐 선장님. 길버트도 이렇진 않은데, 제가 봄이면 언제나 이 산사나무 꽃을 그리워한다는 말을 기억하셨군요.”
감동으로 고개를 흔들며 앤이 말했다.
“다른 볼 일도 좀 있었지요. 하워드 씨를 송어가 많은 곳으로 데려다 주었어요. 그 양반은 가끔 그걸 원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게 하워드 씨가 내게 베푼 친절에 보답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죠.
오후 내내 머물며 하워드 씨와 이야기를 나눴어요. 하워드 씨는 아주 많이 배운 분이고 나는 배운 것 없는 늙은 선원이지만 그분은 나랑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요. 하워드 씨는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견디질 못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 근방에서는 하워드 씨 얘길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글렌 사람들은 하워드 씨가 불신자라며 피해요. 하지만 정확하게 그건 아니에요. 그보다는 이단자라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이단자는 사악하지만 참 흥미롭죠. 그러니까 하느님을 찾기 어렵다고 보고 주님을 찾는 걸 포기한 사람들이에요. 물론 하워드 씨는 결코 그렇진 않지만요. 난 사람들이 하워드 씨에게 실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하워드 씨가 하는 이야기를 듣는다고 내게 크게 해 될 건 없다고 생각하지요. 나는 말이에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어요. 그 덕분에 수많은 성가신 일에서 자유로울 수 있죠. 그리고 그런 믿음 이면에 있는 건, 하느님은 선하시다는 겁니다.
하워드 씨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건 너무 똑똑하다는 거예요. 그 양반은 똑똑한 사람은 그 능력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보통 사람들, 무지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 천국에 가기보다는 천국 길도 새로 개척하는 게 더 현명하다고 믿는 거예요. 아무튼 하워드 씨는 문제없이 천국에 도착할 거고 그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할 거예요.”
“하워드 씨는 처음에는 감리교도였어요.”
감리교도지 이단자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 코넬리아가 말했다.
“코넬리아, 난 내가 장로교도가 아니었다면 아마 감리교도가 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곧잘 해.”
짐 선장이 자못 심각하게 말했다.
“아, 뭐 선장님이 장로교도가 아니었다면 선장님이 어떤 사람이건 무슨 상관이겠어요. 이단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의사 선생님. 요전에 빌려준 책 《영혼의 세계의 자연법칙》9)을 가져왔어요. 3분의 1 정도 읽다가 말았어요. 난 이치에 맞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다 읽을 수 있는데 그 책은 이도저도 아니더군요.”
“좀 이단적인 내용도 들어 있다고 평가되는 책이죠. 하지만 가져가시기 전에 그렇게 말씀드렸는데요, 미스 코넬리아.”
길버트가 시인했다.
“아, 이단적인 부분은 상관없어요. 사악함도 참아줄 수 있지요. 하지만 바보 같은 건 못 참아요.”
미스 코넬리아는 조용히 말했지만 그 태도는 자연법칙에 관한 이야기가 전혀 이야기할 거리도 못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책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드디어 2주 전에 《열광적인 사랑》을 다 읽었어요. 103장까지나 끌더군요. 그 사람들이 결혼하자마자 책이 끝나더군요. 이제 그 사람들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다고 생각해요. 책에서만큼은 모든 일이 좋게 매듭지어지는 게 참 좋지 않아요? 실제 상황에선 그렇지가 않잖아요.”
짐 선장이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전 소설은 절대 안 읽어요. 짐 선장님, 고디 러셀이 오늘 어땠는지 소식 들으셨어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집에 가는 길에 잠시 들렀지. 잘 버티고 있어. 하지만 뭐 언제나처럼 문제 속에서 끙끙 앓고 있지, 가엾은 사람. 그 사람은 문제를 스스로 만들어낸다고. 그래봐야 도움 될 일도 없는데 왜 그런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지.”
“그 사람은 지독한 염세주의자예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아니, 음, 정확하게 염세주의자는 아니야, 코넬리아. 그저 자기에게 맞는 걸 찾지 못한 것뿐이지.”
“그런 게 염세주의자가 아니라고요?”
“아니, 아니야. 염세주의자는 자신에게 맞는 걸 찾을 거라고 절대로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지. 고디는 그 정도는 아니라고.”
“짐 보이드 선장님, 선장님은 악마에게서도 좋은 점을 찾아낼걸요.”
“어떤 할머니가 악마에게도 끈기라는 좋은 점이 있다고 했다지. 그래도 코넬리아, 난 악마를 좋게 말할 생각은 없어.”
“악마를 믿는단 말이에요?”
미스 코넬리아가 심각하게 물었다.
“코넬리아, 내가 얼마나 신실한 장로교도인지 알면서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가 있어? 장로교도가 어떻게 악마와 친해?”
“정말이에요?” 
미스 코넬리아가 집요하게 굴었다.
짐 선장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목사님이 언젠가 ‘악마의 강력하고 사악하며 교묘한 힘이 우주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하신 말씀은 내가 믿지. 그 말은 믿는다고. 코넬리아는 그걸 악마, ‘악의 주범’ 아니면 ‘사탄’, 아니 뭐든 좋은 대로 이름을 붙여 부르겠지. 아무튼 그건 엄연히 존재하는 거야. 그리고 불신자와 이단자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주장을 해도 하느님은 계시듯이 분명 악마도 존재한다고. 악마는 분명히 있어. 활동하고 있지. 하지만 코넬리아, 악마는 결국엔 끝장이 날 거라고.”
그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그렇게 되길 바라죠. 악마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소린데, 빌리 부스는 확실히 악마한테 씐 것 같아요. 요새 빌리가 저지른 일 들어보셨어요?”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은 어조로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아니, 무슨 일을 저질렀는데?”
“그 사람 정신이 완전히 돌아서 자기 부인의 새 갈색 브로드 천으로 만든 양장을 불태워버렸대요. 샬럿타운에서 25달러나 주고 산 건데 말이에요. 부인이 옷을 사고 나서 처음으로 그 옷을 입고 교회에 갔는데 남자들이 너무 흠모하는 눈길로 봤다나요. 사내들 하는 짓이 다 그렇지, 뭐!”
“부스 부인이 예쁘긴 하지. 그리고 갈색이 잘 어울리고.”
짐 선장이 대꾸했다.
“그게 부인의 새 옷을 부엌 화덕에 쑤셔 넣을 만한 합당한 이유예요? 빌리 부스는 질투심에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어요. 그리고 자기 아내 인생을 비참하게 했다고요. 그 사건 이후로 그 부인은 일주일 내내 옷 때문에 울었어요. 아, 나도 앤처럼 글을 쓰면 좋을 텐데, 아, 정말이에요. 그러면 글로 여기 남자들 중 몇 명을 꾸짖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 부스 집안사람들 좀 별나긴 해. 결혼하기 전까지는 빌리가 그중 제일 분별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나마 결혼하고 나서 그렇게 이상하게 굴고 시기하는 습성이 나타났지. 빌리의 동생 대니얼은 항상 이상했고.”

짐 선장이 말했다.
“며칠이 멀다 하고 발끈 화를 내고 침대에 박혀서는 나오질 않았어요. 그 사람 기분이 풀릴 때까지 부인이 헛간 일을 다 해야 했죠. 그 사람이 죽었을 때 사람들은 부인에게 조문 편지를 보냈지만 나 같으면 축하 편지를 보냈을 거예요. 부스 형제의 아버지 아브람 부스 노인은 지독한 주정뱅이였어요. 자기 부인 장례식에서도 취해 있었다니까요. 비틀비틀하면서 연방 딸꾹질을 해대던 꼴이라니. ‘난 그, 그…… 그렇게 많이 마시지 않았는데…… 근데…… 음…… 무진장…… 이…… 이…… 이상해.’ 그 사람이 나한테 가까이 다가왔을 때 내가 우산으로 등을 꾹 찔러버렸어요. 그 덕분에 관이 집 밖으로 나갈 때까지는 말짱하게 깨어 있었어요. 재니 부스가 어제 결혼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그만 유행성 이하선염에 걸렸지 뭐예요. 사내들 하는 짓이 다 그렇지, 뭐.”
재미있다는 듯이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이하선염에 걸려버렸으니 별 수 없었지 뭐, 불쌍한 사람.”
“내가 케이트 스턴이었다면 그 사람이랑은 절대로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 아, 내 말을 믿어요. 어떻게 하다 이하선염에 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결혼식 만찬 준비는 다 되었고 그 사람이 다시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음식을 다 버리게 되었다는 건 내 알지요. 그런 낭비가 어디 있담! 이하선염 같은 건 어릴 때 걸렸어야지.”
“자, 자, 코넬리아. 지금 너무 비이성적으로 나간다고 생각지 않아?”
미스 코넬리아는 그 말에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고 대신에 글렌에 사는, 얼굴은 좀 보기가 뭐하지만 마음씨만은 고운, 나이 든 독신녀 수잔 베이커에게 말을 걸며 화제를 돌렸다. 미스 베이커는 몇 주째 앤의 작은 집에서 집안일을 봐주고 있는 중이었다.
“맨디 할머니는 오늘 밤 어때?”
미스 코넬리아가 물었다.
수잔이 한숨을 쉬었다.
“아주 안 좋아요, 아주 나쁘다구요, 코넬리아. 아무래도 곧 천국으로 갈 것 같아요. 가엾은 사람!”
“아, 아니야. 그게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지!”
미스 코넬리아가 동정의 탄성을 질렀다.
짐 선장과 길버트는 서로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럴 때가 있죠. 저렇게 재미있는 여자 둘을 보고 웃지 않는 건 죄악이에요. 죄악!”
마구 웃다가 짐 선장이 말했다.

9. 《Natural Law in the Spiritual World》(1890). 저자는 헨리 드러먼드(Henry Drummond, 1851~189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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