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5권 19~20

나단비 | 2024.04.05 20:48:54 댓글: 0 조회: 82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8898
19
황혼 그리고 새벽






유월 초라 분홍 들장미가 언덕을 아름답게 수놓았고, 글렌 마을에는 활짝 핀 사과 꽃향기로 가득했다. 마릴라는 ‘초록 지붕 집’ 다락방에 반세기 동안이나 잠들어 있던 놋쇠 못 장식이 들어간 검은색 말총 가방을 들고 앤의 작은 집을 찾았다. 처음에 수잔 베이커는 마릴라를 약간 질투심에 찬 눈으로 흘겨보았다. 앤의 작은 집에 온 지 몇 주밖에 안 된 수잔은 앤을 ‘젊은 의사 사모님’이라고 부르며 맹목적으로 떠받들던 차였다. 하지만 마릴라가 부엌일에 관여할 생각도 없고 수잔이 젊은 의사 사모님을 보살피는 것을 방해할 마음도 없다는 것을 알자 안심하고 글렌에 있는 친구들에게 미스 커스버트는 고상하게 늙은 숙녀로 자신이 설 자리를 잘 안다고 말했다.
맑은 하늘에 붉은 노을이 퍼지고, 울새가 황금빛 노을에 가슴을 울렁이며 저녁별을 향해 즐겁게 노래할 무렵이 되자 ‘꿈의 집’이 갑작스럽게 분주해졌다. 급히 글렌으로 전화 연락이 갔고 데이비드 의사와 하얀 모자를 쓴 간호사가 황급히 달려왔다. 마릴라는 대합 조개껍질로 장식된 화단 사이를 오가며 기도를 올렸고, 수잔은 솜으로 귀를 틀어막고 앞치마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채 부엌에 앉아 있었다.

개울 위쪽 집에서 창밖으로 작은 집을 지켜보던 레슬리도 밤새 앤네 집에 불이 꺼지지 않는 걸 보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유월의 밤은 짧았지만 기다리고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아, 언제나 끝나려나?”
마릴라가 말했다. 하지만 데이비드 의사와 간호사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는 차마 아무것도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만약에 앤이…… 마릴라는 만약을 상상할 수 없었다.
“제발, 하느님이 잔인하게 우리가 이토록 사랑하는 우리의 사랑스러운 어린 양을 데려갈 수 있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수심이 가득한 마릴라의 눈을 보며 수잔이 격하게 말했다.
“그분은 이전에도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데려가셨다오.”
마릴라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새벽이 되자 떠오르는 태양이 모래톱 위에 걸렸던 연무를 가르고 무지개를 만들었다. 드디어 작은 집에 기쁨이 찾아왔다. 앤은 무사했고, 엄마의 커다란 눈을 쏙 빼닮은 조그맣고 새하얀 숙녀가 엄마 곁에 누워 있었다. 지난밤 근심으로 수척해진 길버트는 잿빛이 된 얼굴로 마릴라와 수잔에게 왔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마릴라는 벌벌 떨었다.

수잔은 일어서서 귀에 틀어막았던 솜을 뺐다.
“자, 이제 아침 식사를 해야죠. 모두 기쁜 마음으로 아침 식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모님에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이 수잔이 다 책임질 테니. 그저 자기 몸이랑 아기 걱정만 하라고 하세요.”
수잔은 활기차게 말했다.
앤에게 돌아가는 길버트의 모습이 왠지 약간 슬퍼 보였다. 출산의 고통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눈만큼은 모성애의 신성한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앤에게 아기 걱정 외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은 사실 할 필요도 없었다. 앤은 이미 오로지 아기 생각뿐이었으니까. 몇 시간 동안 앤이 맛본 행복감이 너무도 소중하고 귀해서 혹시 천사가 시샘하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조이스, 여자아이면 조이스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좋은 이름이 너무 많아서 고르기가 힘들었죠. 줄여서 조이라고 부를 거예요. 아기에게 너무 잘 어울리는 이름이에요. 아, 마릴라 아주머니, 전 전에도 제가 행복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 그건 그저 즐겁게 행복한 꿈을 꾼 것뿐이었나 봐요. 지금은 꿈이 아니에요.”
마릴라가 아기를 보러 들어왔을 때 앤이 중얼거렸다.
“말을 하면 안 된다, 앤. 몸이 더 나아질 때까지 기다려야 해.”
마릴라가 나무라듯 말했다.
“지금 이런 감정을 마음에 담아두고만 있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시잖아요.”
앤이 미소 지었다.

처음에 앤은 너무 힘이 없고 기뻐서 길버트와 간호사가 얼마나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고, 마릴라가 얼마나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다 바다 안개가 육지를 훔치듯 희미하고 차갑게 퍼질 때쯤 무자비한 공포감이 앤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왜 길버트가 기뻐하지 않지? 왜 아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걸까? 몇 시간 동안 천국에 있는 듯 기쁨을 맛본 다음부터는 아기를 내게 데려오지도 않잖아. 무슨 일이지?
“길버트, 아기는 괜찮은 거지, 그렇지? 말해줘.”
앤은 애원하듯 속삭였다.
길버트가 앤을 향해 돌아서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앤을 향해 몸을 굽혀 눈을 바라보았다. 두려움에 휩싸인 채 마릴라는 문밖에서 이야기를 듣다 가슴을 치는 비참한 신음소리를 듣고는 수잔이 울고 있는 부엌으로 달려갔다.
“아, 가엾은 어린 양, 불쌍한 어린 양! 이 일을 어떻게 견뎌내죠, 미스 커스버트? 사모님이 죽을까 봐 무서워요. 그렇게도 행복해하며 아기를 생각하고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까요?”
“안됐지만 없어요, 수잔. 길버트가 희망이 없다고 말했어. 길버트는 처음부터 아기가 살 수 없다는 걸 알았대.”
“정말 예쁜 아기였는데. 난 그렇게 하얀 아기는 처음 봤어요. 대개 처음 태어난 아기들은 빨갛거나 노랗거든요. 그리고 태어난 지 몇 달이나 된 아기처럼 눈을 크게 떴어요. 아, 그 작디작은 것. 아, 가엾은 사모님!”
수잔은 흐느껴 울었다.
새벽에 찾아온 그 작은 영혼은 해 질 녘 다시 떠났다. 모두의 가슴을 무너뜨리고 그렇게 갔다. 미스 코넬리아가 친절하지만 낯선 간호사의 손에서 작고 하얀 꼬마 숙녀를 받아 안고 레슬리가 만들어준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혔다. 레슬리가 코넬리아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고는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슬픔에 잠긴 가련하고 비통한 엄마 옆에 아기를 뉘었다.
“주님이 주시고는 주님이 다시 데려가셨어요, 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받기를.”
미스 코넬리아도 울면서 말했다.
앤과 길버트와 숨을 거둔 아기만 남기고 모두들 자리를 떠났다.
그다음 날, 작고 하얀 조이는 레슬리가 사과 꽃으로 장식한 벨벳 관에 누워 항구 너머 교회 묘지로갔다. 미스 코넬리아와 마릴라는 사랑을 담아 정성껏 만든 아기 옷들을 치웠고, 그 통통한 팔다리와 솜털 같은 머리를 가진 아기를 위해 만든 프릴과 레이스 장식이 달린 아기 침대도 치웠다. 작은 조이는 그 어여쁜 아기 요람에서 잠들지 못하고 차갑고 좁은 침대에 누워 떠났다.
“정말 너무도 실망스럽군요. 이 집에 아기가 태어나는 걸 무척 고대했는데. 그리고 여자아이이길 바랐지요.”
미스 코넬리아가 한숨을 지었다.
“난 그저 앤이 생명을 건진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마릴라는 자신이 사랑하는 아이가 죽음의 계곡을 지나던 그 암흑 같은 시간을 회상하고는 몸을 떨며 말했다.
“불쌍하고 가엾은 어린 양! 사모님의 가슴은 무너졌어요.”

수잔이 말했다.
“난 앤을 시기했어요. 앤이 죽었다고 해도 난 그것도 질투했을 거예요! 앤은 하루였지만 그래도 하루 동안이라도 엄마가 되어보았잖아요. 내게도 그럴 기회가 온다면 난 기꺼이 내 생명을 바치고 말겠어요!”
레슬리가 갑자기 격렬하게 말했다.
“나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겠어, 레슬리.”
꾸짖는 어조로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기품 있는 미스 커스버트가 레슬리를 끔찍한 사람으로 여길까 봐 두려웠다.
앤이 병석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어디를 보아도 다 비참한 기분이었다. 포 윈즈의 꽃과 햇살마저도 잔인하리만치 불쾌했다.
무섭게 비가 쏟아질 때면 항구 너머에 있는 작은 무덤에 세차게 비가 퍼붓는 장면이 그려졌고, 처마에 바람이 불 때는 그 속에서 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는 구슬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로해주려고 찾아온 이들이 자식을 잃은 상처를 어루만져주려는 선의에도, 상투적인 인사말에도 앤은 상처를 받았다. 필 블레이크가 보낸 편지는 앤의 상처를 더 아프게 후벼 팠다. 필은 아기가 태어났다는 소식만 듣고 그다음 소식은 듣지 못해서 그만 명랑하고 즐거운 축하 편지를 보냈고 ,그 때문에 앤은 끔찍하게 상처를 받은 것이다.
“아기가 있었다면 아마 그냥 웃어넘겼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정말 너무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잔인하게 느껴져요. 물론 필이 제게 상처를 주려고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는 것도 알아요. 아, 마릴라 아주머니, 전 다시는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아요. 남은 생애 동안 전 모든 것에 상처를 받을 것만 같아요.”
앤이 마릴라를 보고 흐느끼며 말했다.
“시간이 가면 나아질 거다.”
앤의 아픔을 절절히 공감하면서도 케케묵은 말 외에는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마릴라가 말했다.
“공평하지 않아요. 태어나더라도 부모가 원하지 않고, 돌보아 주지 않는 아이도 있어요. 아무런 희망도 기회도 없는 곳에서 살아야 하는 아기들도요. 하지만 전 제 아기를 사랑하고 소중히 아껴주고 또 가능한 모든 것을 주고 싶었는데, 전 아기를 빼앗기고 말았어요.”
앤이 반항적으로 말했다.
“하느님의 뜻이다, 앤.”
부당한 고통을 당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 우주의 수수께끼 앞에 무력해하며 마릴라가 말했다.
“전 그 말을 믿을 수 없어요.”
앤이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충격을 받은 마릴라를 쳐다보며 앤은 말을 이어갔다.
“그럼 왜 그 아이가 태어났는데요. 죽는 게 더 낫다면 대체 왜 태어났느냔 말이에요. 생명이 다할 때까지,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즐거워하고 고통받기도 하면서, 평생 자기를 가꾸고 사는 것이지 태어나자마자 죽는 게 낫다는 말을 난 안 믿어요. 그리고 그게 하느님의 뜻이란 걸 마릴라 아주머니는 어떻게 알아요? 악마가 그분의 목적을 훼방 놓는 것인지도 모르잖아요. 그런 식으로 무력하게 포기해버릴 수 없어요.”

“아, 앤, 그렇게 말하지 마라.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믿음을 가져야 한다. 결국엔 잘되고 제일 좋은 결과를 얻으려고 모든 일이 일어나는 거라고 믿어야만 해. 나도 네가 그렇게 생각하기 어렵다는 건 안다. 하지만 담대해지려고 노력해라. 길버트를 위해서라도 그래야 해. 길버트가 네 걱정을 많이 하고 있어. 어서 빨리 강해져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지.”
마릴라는 앤이 자칫 깊고 위험한 암흑 속에 빠져 표류하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아, 저도 알아요. 제가 너무 이기적으로 굴었어요. 그 어느 때보다 길버트를 사랑해요. 그리고 그를 위해 살고 싶어요. 하지만 제 한 부분이 저기 항구 너머 작은 무덤에 묻힌 것만 같아요. 너무 아파서 살기가 무서울 지경이에요.”
앤이 한숨을 쉬었다.
“언젠가는 그렇게 아파하지 않아도 될 날이 올 거야, 앤.”
“언젠가는 아파하지 않게 될 날이 올 거라는 생각이 그 무엇보다도 상처가 돼요, 마릴라 아주머니.”
“그래, 나도 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 하지만 우리 모두는 널 사랑한단다, 앤. 짐 선장님이 매일 와서 네 안부를 묻고, 무어 부인도 그래. 또 미스 코넬리아는 너를 위해 요리하느라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고 있어.수잔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말이야. 수잔은 자기도 미스 코넬리아만큼은 요리할 수 있는데 그런다더라.”
“다정한 수잔! 아, 모두들 너무 다정한 사람들이고 절 아껴줘요, 마릴라 아주머니. 전 감사할 줄을 몰라요. 이 끔찍한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 가면, 저도 다시 살아갈 수 있겠죠.”





20
잃어버린 마거릿






앤은 다시 살아갈 수 있었다. 미스 코넬리아가 들려주는 말에 미소 짓는 날도 왔다. 하지만 그 미소에는 전엔 없던 뭔가가 있었으며 이제 그것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앤이 외출할 수 있게 되자 길버트는 앤을 포 윈즈 곶에 데려다 주고 해협 건너편 어촌에 환자를 보러 갈 동안 그곳에 머물게 했다. 항구와 모래 언덕으로 장난기 많은 바람이 불어왔고, 파도는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바닷가 모래사장에 생기는 긴 은빛 선을 쓸어내렸다.
“다시 만나게 돼서 정말 기뻐요, 블라이드 부인. 앉아요. 오늘은 먼지가 좀 많지 않나 싶어 미안하지만 저런 광경을 두고 먼지 같은 건 볼 필요 없죠, 그렇지 않아요?”
짐 선장이 말했다.
“먼지는 괜찮지만 길버트는 제가 바깥바람을 좀 쏘여야 한대요. 저기 아래 바위로 내려가 앉아 있고 싶네요.”

앤이 말했다.
“같이 있어드릴까요, 아니면 혼자 있겠어요?”
“선장님이 동무해주신다면 혼자 있는 것보다 훨씬 좋죠.”
앤이 미소 지으며 말하더니 한숨을 쉬었다. 전에는 혼자 있어도 아무렇지 않았지만 이젠 혼자 있는 게 싫었다. 이젠 혼자 있으면 사무치게 외로웠다.
“여기 바람을 막아줄 좋은 장소가 있어요. 난 여기에 자주 와요. 그저 앉아서 꿈꾸기엔 최고의 장소예요.”
바위에 닿자 짐 선장이 말했다.
“아, 꿈!”
앤이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꿈을 꿀 수 없어요, 짐 선장님. 꿈꾸는 건 끝났어요.”
“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블라이드 부인.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지금이야 기분이 그렇겠지만 계속 살아가다 보면 다시 즐거워지고 꿈도 꿀 수 있게 돼요. 그러면 하느님께 감사하세요! 꿈이 없으면 죽어 파묻힌 거나 다름없죠. 영원히 꿈을 꿀 수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삶을 지탱해 나갈 수 있겠어요? 그리고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거예요, 블라이드 부인. 언젠가 부인의 작은 조이스를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짐 선장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하지만 그때면 조이스는 제 아기가 아닐 거예요. 그래요, 그럴 수도 있죠. 롱펠로의 시에 나오는 ‘천상의 우아한 옷을 입은 아름다운 아가씨’ 같겠지만 저에게는 낯설 거예요.”
떨리는 입술로 앤이 말했다.
“하느님이 다 알아서 해주실 거라고 난 믿어요.”
짐 선장이 말했다.
둘은 잠깐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짐 선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블라이드 부인, 내가 잃어버린 마거릿 이야기를 해드릴까요?”
“네, 그러세요.”
앤이 다정하게 말했다. 앤은 ‘잃어버린 마거릿’이 누군지 몰랐지만 짐 선장의 삶의 로맨스를 듣게 될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전부터 마거릿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짐 선장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왜 그런지 알아요, 블라이드 부인? 내가 간 다음에도 누군가 마거릿을 기억해줬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에요. 마거릿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어요. 지금도 나 말고는 아무도 마거릿을 기억하지 못해요.”
짐 선장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50년이나 지난 아주 오래되고 잊힌 이야기였다.
어느 날 마거릿은 자기 아버지의 작은 어선에서 잠이 들었다가 그대로 바다 한가운데로 떠내려가 버렸다. 아니, 그랬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짐작했다. 그 후 마거릿이 어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름날 오후 모래톱 너머 바다로 나갔다가 갑자기 몰아닥친 천둥을 동반한 시커먼 폭우에 휩쓸려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짐 선장에게는 그 50년이라는 세월이 그저 어제 일만 같았다.
짐 선장이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일이 일어난 후 난 몇 달 동안이나 바닷가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리운 마거릿을 찾아서요. 하지만 바다는 마거릿을 돌려주지 않았어요. 그러나 언젠가는 마거릿을 찾을 거예요, 블라이드 부인. 꼭 그럴 겁니다. 마거릿은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 마거릿이 어떻게 생겼는지 부인에게 말해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군요.
해가 떠오를 때 모래톱 너머에 걸린 고운 은빛 연무를 보면 그게 꼭 마거릿 같아요. 저 너머 숲에 하얀 자작나무를 보아도 마거릿 같고요. 마거릿은 엷은 갈색 머리에 작고 하얀 얼굴을 가진 게 참 예뻤어요. 손가락은 부인처럼 길고 가느다랬지요. 바닷가에 살아 손이 더 그을리긴 했지만요.
가끔 밤에 잠에서 깨면 예전처럼 바다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요. 그럴 땐 마치 사라진 마거릿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아요. 폭풍이 몰아치고 파도가 울며 신음할 땐 그 안에서 마거릿이 애통해하는 소리가 들리지요. 화창한 날 파도가 웃을 땐 그게 바로 마거릿의 웃음소리고요. 잃어버린 마거릿이 달콤하고 귀엽게 웃는 소리지요. 바다가 내게서 마거릿을 빼앗아갔지만 언젠가는 찾을 겁니다, 블라이드 부인. 우릴 영원히 갈라놓지 못할 겁니다.”
“저에게 마거릿 이야기를 해주셔서 기뻐요. 선장님이 왜 평생을 홀로 지내셨는지 궁금할 때가 종종 있었거든요.”

앤이 말했다.
“다른 사람은 생각할 수가 없었어요. 마거릿이 사라지면서 저 먼 곳으로 내 마음도 가져갔거든요. 너무 마거릿 얘기만 많이 해서 블라이드 부인이 언짢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나야 즐겁지만. 마거릿에 관한 기억 중 고통은 오래전에 다 잊어버리고 추억의 축복만 남았답니다. 마거릿을 영원히 기억해주세요. 세월이 흘러서 부인이 아이를 낳으면 나중에 그 아이들에게도 마거릿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약속해주겠어요? 그러면 마거릿의 이름이 잊히지 않을 테니까요.”
바다 속에 잠겨버린 애인에게 50년 동안 충절을 지킨 나이 든 연인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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