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5권 23~24

나단비 | 2024.04.05 20:50:17 댓글: 0 조회: 60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8900
23
오언 포드가 오다






어느 날 저녁, 미스 코넬리아가 전화를 했다.
그 작가 양반이 지금 막 도착했대요. 그 사람을 데리고 지금 앤네 집으로 갈게요. 그러면 앤이 레슬리네 집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줘요. 그게 윗길로 돌아가는 것보다 훨씬 빨라요. 내가 지금 아주 급하거든요. 글렌에 사는 리즈네 아기가 뜨거운 물을 받아둔 양동이에 빠져 아주 심하게 데였다고 빨리 와달라고 해요. 아이에게 화상 입은 피부를 새로 만들어 붙여주기라도 하라는 건지 원. 그 여자는 언제나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요. 그리고 일을 저질러놓고 꼭 그 뒤처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죠. 지금 가도 되죠? 그 사람 짐 가방은 내일 가져갈 거예요.”
“그럼요. 그렇게 하세요. 그 사람 어때요, 미스 코넬리아?”
앤이 물었다.
“어떻게 생겼는지는 내가 데려가면 보게 될 테고 그 사람 속이 어떤지는 주님만이 아시겠죠. 글렌 사람들이 다 수화기를 내려놓기 전까지는 내 더 말하고 싶지 않아요.”

“포드 씨의 외모에 흠잡을 데가 없었던 게 틀림없어요. 그렇지 않았으면 다른 사람들이 듣든 말든 미스 코넬리아가 이야기했을 거라고요. 그러니까 수잔, 포드 씨는 분명히 잘생겼어요.”
앤이 말했다.
“나도 잘생긴 남자를 보는 게 즐겁더라고요. 간식을 좀 준비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입에서 살살 녹는 딸기 파이가 있는데.”
수잔이 명랑하게 말했다.
“아니요. 레슬리가 저녁 식사 준비를 해놓고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뭘. 그리고 그 딸기 파이는 내 가여운 길버트를 위해 남겨놓아야 해요. 아주 늦게 집에 올 테니 파이랑 우유도 한 잔 준비해주세요, 수잔.”
“그러지요, 사모님. 이 수잔이 책임집니다. 그리고 당연히 파이는 낯선 사람이 꿀꺽 삼켜버리게 하는 것보단 우리 의사 선생님께 드리는 편이 낫죠. 아, 그리고 우리 선생님도 아주 잘생겼어요.”
미스 코넬리아가 오언 포드를 끌듯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앤은 그가 역시나 아주 ‘잘생긴’ 남자라고 생각했다.
오언 포드는 키가 크고 어깨도 넓었으며 갈색 머리카락은 숱도 많았다. 거기에 코와 턱도 오뚝하고 잘 다듬어졌으며 눈은 커다랗고 빛나는 어두운 회색이었다.
“그 사람 귀랑 치아도 보셨어요, 사모님?”
나중에 수잔이 물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잘생긴 귀는 처음 봤어요. 난 귀를 주로 살피는데, 어릴 땐 나중에 귀가 늘어진 남자랑 결혼하게 될까 걱정이었지요.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네요. 귀가 이상한 남자든 잘생긴 남자든 아무도 만나보질 못했으니 말이에요.”
앤은 오언 포드의 귀는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그가 진솔하고 친절해 보이는 미소를 지을 때 입술 사이로 드러난 치아는 봤다. 웃지 않을 때 오언의 얼굴은 앤이 소녀 시절 꿈꾸던 우울하고 신비로운 영웅처럼 조금 슬프고 표정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웃는 표정에는 활기와 유머 그리고 매력이 흘러넘쳤다. 오언 포드는 미스 코넬리아 말대로 적어도 겉은 아주 잘생긴 남자였다.
“여기 오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블라이드 부인.”
모든 것이 흥미롭다는 듯 여기저기 둘러보며 오언 포드가 말했다. “마치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가슴이 벅찼어요. 아시다시피 저희 어머니가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내신 집이잖아요. 어머니는 이 집 이야기를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살았던 집처럼 이 집 구석구석을 잘 안답니다. 아, 물론 어머니께서는 이 집을 지을 때 이야기도, 외할아버지가 애타게 로열 윌리엄 호를 기다리던 이야기도 들려주셨어요. 너무 오래된 집이라 오래전에 없어졌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 않았으면 더 일찍 와 봤을 거예요.”
“이렇게 매혹적인 바닷가에서는 아무리 오래된 집이라도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아요. 이곳은 ‘모든 것이 언제나 그대로인 땅’이지요. 거의 거대로요. 존 셀윈의 집은 당시와 별로 변한 게 없어요. 밖에 포드 씨 할아버지가 신부를 위해 심은 장미꽃이 아직도 활짝 피어 있어요.”
앤이 미소 지었다.

“아, 그런 말을 들으니 제 외조부모님이 제 곁에 계신 것만 같습니다. 빨리 여기저기 다 돌아보고 싶어요.”
“우리 집 문은 포드 씨한테는 언제나 열려 있어요. 그리고 포 윈즈 등대를 지키는 나이 든 선장님이 어릴 때부터 존 셀윈과 그의 신부를 알고 있었다는 거 아세요? 제가 세 번째 신부로 이 집에 온 날 밤 그분이 그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앤이 말했다.
“그런 분이 계시다니, 이런 일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분을 꼭 찾아뵈어야겠어요.”
“그럼요. 그래야죠. 우린 모두 짐 선장님과 가깝게 지내요. 포드 씨만큼이나 그분도 포드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실 거예요. 포드 씨 외할머니는 그분 이야기 속에서 별처럼 빛이 난답니다. 하지만 지금은 무어 부인이 포드 씨를 기다리고 있어요. ‘지름길’을 알려드릴게요.”
앤은 오언 포드를 개울 위쪽에 있는 집으로 안내했다. 들판에는 눈처럼 하얀 데이지가 피어 있었다. 건너편 항구에서는 배에 짐을 싣는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별이 빛나는 바다 저 멀리서 바람에 실려 들려오는 희미한 천상의 음악처럼 물 위를 떠다녔다. 커다란 불빛이 반짝이며 길을 인도했다. 오언 포드는 흡족한 듯 주변을 둘러봤다.
“포 윈즈가 이런 곳이군요. 어머니에게 아름다운 곳이란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저 빛깔, 풍경, 어디를 봐도 너무나도 매혹적이군요! 이런 곳에서는 금세 말처럼 건강해질 것 같아요. 그리고 이런 아름다움에서 영감을 받는다면 이곳에서 제 역작이 될 캐나다 배경의 소설을 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가 말했다.
“아직 시작하지 않으셨어요?”
앤이 물었다.
“아아, 네, 아직 시작 못 했습니다. 중심 아이디어를 잡지 못했어요. 그게 저기 숨어 있다가 손짓하며 유혹하다가는 어느새 또 사라져버리거든요. 거의 다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사라져버려요. 이렇게 평화롭고 다정한 곳에서는 뭔가 떠오를 것도 같아요. 미스 코넬리아가 부인도 글을 쓰신다고 하던데요.”
“아, 저는 그저 아이들이 읽는 것들을 쓰죠. 그리고 결혼한 다음에는 많이 쓰지도 않고 있어요. 캐나다가 배경이 될 광대한 소설은 못 쓰죠. 제 능력이 닿지를 않거든요.”
앤이 웃자 오언 포드도 웃었다.
“제 능력으로도 많이 모자랍니다. 언젠가 시간이 나면 꼭 써보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 신문 기자 일을 하다 보면 글 쓸 기회나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요. 단편 소설은 여러 편 써서 잡지에 내기도 했지만 장편 한 권을 쓸 만큼의 시간을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석 달 동안은 자유이니 시작을 해야지요. 하지만 그러려면 뭘 쓸지 주제를 잡아야 해요, 책의 영혼은 주제니까요.”
갑자기 펄쩍 뛸 만큼 좋은 생각이 앤의 머리에 떠올랐다. 하지만 레슬리의 집에 거의 다다라 당장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둘이 마당으로 들어설 때 레슬리는 오기로 한 손님이 오고 있나 살피려 옆문을 통해 베란다로 나와 어둠 속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린 문에서 새어나오는 따뜻한 노란 빛에 휩싸인 레슬리는 값싼 크림색 면 드레스를 입고 허리에는 항상 두르는 진홍색 허리띠를 매고 있었다.
레슬리는 언제나 진홍색이 들어간 것을 걸쳤다. 레슬리는 전에 앤에게 자기는 주변에 하다못해 꽃이라도 빨간색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타오르듯 강렬한 빛깔에 레슬리의 억압되어 있지만 불타오르는 강렬한 성품이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리라.
레슬리의 드레스는 목이 좀 드러났고 소매도 짧았다. 그 아래 드러난 레슬리의 팔은 상앗빛 대리석처럼 빛났다. 몸매의 아름다운 굴곡이 부드러운 어둠 속에 드러났고 머리카락은 불꽃처럼 빛났다. 레슬리가 서 있는 뒤로 자줏빛 하늘에는 온통 별들이 반짝였다.
앤은 동행이 숨을 몰아쉬는 소리를 들었다. 땅거미가 내려 어두웠지만 오언의 얼굴에 서린 놀라움과 경탄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저 아름다운 사람은 대체 누구지요?”
그가 물었다.
“무어 부인이에요. 아름다운 분이죠?”
앤이 대답했다.
“저, 저는 저렇게 아름다운 것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본 적이 없어요.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세상에 대체 누가 하숙집 주인이 여신처럼 아름다우리라고 생각했겠습니까! 바다 빛깔 자주색 드레스를 입고 자수정 색깔의 끈으로 머리를 묶으면 고고한 바다의 여왕처럼 보일 겁니다. 저런 분이 하숙을 치다니!”
약간 멍해진 상태의 오언이 대답했다.
“여신도 먹고는 살아야죠. 그리고 레슬리는 여신이 아니에요. 아주 아름다운 여자지만 우리 같은 인간이에요. 미스 코넬리아가 무어 씨를 이야기하던가요?”
앤이 말했다.
“네, 정신적으로 좀 결함이 있다고 하던데요. 그런가요? 하지만 무어 부인에 관해서는 아무런 말도 안 해서 전 그저 하숙을 해서 성실하게 작은 돈을 모으는 평범하고 활동적인 시골 주부일 거라 생각했어요.”
“네, 그래요. 그게 바로 레슬리가 하는 일이에요. 즐겁지만은 않은 일이죠. 포드 씨가 딕은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 해요. 신경이 쓰이더라도 레슬리는 눈치채지 않도록 해주세요. 안 그러면 무어 부인이 심하게 상처받을 거예요. 딕은 그저 덩치 큰 아기예요. 가끔 좀 귀찮게 구는 아기요.”
앤은 태연하게 이 집 사정을 이야기해주었다.
“아, 전 상관없어요. 식사할 때 빼놓고는 집에 오래 있지 않을 거니까요. 하지만 참 안된 일이군요. 무어 부인의 생활이 아주 힘들겠어요.”
“그래요. 하지만 레슬리는 동정받는 걸 원하지 않아요.”
레슬리는 집 안으로 들어가 앤과 오언을 현관에서 맞이했다. 레슬리는 오언 포드에게 정중하지만 사무적으로 인사를 하고 그가 머물 방을 안내해주고는 저녁이 준비되어 있다고 말했다. 딕이 즐겁게 싱긋 웃으며 여행용 가방을 들고 2층으로 휘청휘청 따라 올라갔다. 그렇게 버드나무 사이의 낡은 집에 오언 포드가 새로운 동거인으로 들어왔다.





24
짐 선장의 인생 일지






앤은 집으로 돌아와 길버트에게 말했다.
“나한테 조그만 갈색 고치만 한 아이디어가 있는데 이게 아주 아름다운 나비로 변신할 수 있을 것 같아.”
길버트는 앤이 예상했던 것보다 일찍 돌아와 파이를 맛있게 먹는 중이었다. 수잔은 조금 엄격하지만 인정 많은 수호천사같이 그 주변을 맴돌며 길버트가 파이를 먹고 있는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아이디언데?”
길버트가 물었다.
“아직은 말할 수 없어. 그걸 구체화시키기 전에는 말 못 해.”
“포드는 어떤 사람이야?
“오, 아주 좋은 사람 같아, 그리고 상당히 잘생겼어.”
“귀가 정말 잘생겼답니다, 선생님.”

수잔이 신이 나서 끼어들었다.
“나이는 아마 서른에서 서른다섯 살쯤 된 것 같고 소설을 쓰려고 생각하고 있대. 목소리는 경쾌하고 미소도 멋져. 옷차림도 멋지고. 그래도 삶이 그렇게 녹록지만은 않은 것으로 보였어.”
오언 포드는 그다음 날 레슬리의 쪽지를 가지고 앤을 찾아왔다. 그들은 해 질 녘을 정원에서 같이 보내고 길버트가 여름에 소풍용으로 마련해둔 작은 보트를 타고 달이 뜬 항구 주변을 돌았다. 둘 다 오언이 무척 마음에 들었고, 마치 오랜 세월을 두고 요셉을 아는 종족의 일원으로 서로 간에 유대를 형성해온 사이 같았다.
“잘생긴 귀만큼이나 멋진 분이에요, 사모님.”
오언이 가자, 수잔이 말했다. 오언은 수잔이 만든 딸기 쇼트케이크처럼 맛있는 건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다며 수잔의 친절한 마음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했다.
‘참 멋진 사람이야. 저런 남자가 결혼을 안 했다니 참 이상하네. 저런 사람이면 어떤 여자든지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뭐, 나 같은가 보지. 아직 자기 짝을 못 만난 거야.’
저녁을 먹은 상을 치우며 수잔은 생각했다.
수잔은 저녁 식사 설거지를 하며 점점 더 낭만적인 상상에 빠져들어 갔다.
이틀 후 앤은 오언 포드를 포 윈즈 곶으로 데려가 짐 선장에게 소개했다. 항구 해안가를 따라 난 클로버 들판이 서풍에 하얗게 반짝였다. 항구 건넛마을에 갔다가 막 돌아온 짐 선장은 멋진 노을을 감상하고 있었다.
“헨리 폴락한테 다녀왔어요. 그 친구에게 그 자신이 죽어간다는 말을 해줘야 했거든요. 다들 그 이야기를 피하기만 했어요. 헨리가 받아들이지 못할 거라고 여겼죠. 헨리는 간절하게 살고 싶어 하고, 또 가을이면 해야겠다고 계획한 일들이 끝도 없이 많았거든요.
그 사람 부인은 헨리가 회복할 수 없는 병에 걸렸다는 말을 본인에게 해줄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했어요.
헨리와 나는 아주 오랜 친구죠. 우리는 몇 년 동안이나 ‘회색 갈매기’ 호를 타고 함께 항해했어요. 내가 헨리를 찾아가 침대 가에 앉아 말했죠. 간단명료하게 말했어요. 언제든 어차피 알려야 할 일이니 빨리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죠.
‘이보게 친구, 자네 이번에 항해를 나가야 할 것 같네.’ 죽음에 전혀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려니 너무 힘들어서 속이 좀 울렁거리더군요. 그런데 말이죠, 헨리가 쭈글쭈글한 얼굴에 밝고 검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짐 보이드, 뭔가 알고 있으면 나에게 말해주게. 나도 안 지 일주일 정도 됐네.’ 난 너무 놀라서 말을 할 수 없었어요. 헨리는 싱긋 웃더니, ‘자네가 여기 와서 묘비같이 엄숙한 얼굴을 하고 손을 배 앞에 맞잡고 앉아 이 우울한 소식을 전하다니! 고양이도 웃을 일이야, 짐 보이드.’ 하고 말하는 거예요. ‘누구한테 들었나?’ 하고 바보같이 내가 묻자, ‘말해준 사람은 없네. 일주일 전 화요일 밤 이렇게 여기 누워 있는데 그냥 알겠더군. 전에는 의심스러웠는데, 이젠 알겠더라고. 아내 때문에 그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던 거야. 헛간이나 마저 짓고 떠나야 할 텐데. 에벤은 절대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 같아서. 자, 그러니 자네도 마음의 부담을 덜게, 짐. 그러면 이제 재미있는 이야기나 좀 해줘.’ 일이 그렇게 됐어요. 헨리에게 어떻게 말하나 그렇게 걱정을 했는데 막상 헨리는 다 알고 있었어요. 자연이 우릴 돌보는 방법이나, 또 때가 되었을 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을 알려주는 방법이 정말 오묘하고 놀랍지 않나요? 내가 낚싯바늘에 헨리 코가 꽸던 이야기를 했던가요, 블라이드 부인?”

“아니요.”
“흠, 오늘 헨리랑 그 이야기를 하며 한바탕 웃었죠. 거의 30년 전에 일어난 일이에요.
하루는 그 친구랑 나 그리고 다른 사람들 몇이 고등어잡이를 나갔어요. 기가 막힌 날이었지요. 내 생전에 그런 고등어 떼는 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다들 흥분해 있었고 헨리도 마찬가지였죠. 그런데 그만 낚싯바늘이 그 친구 한쪽 코를 꿰뚫어버렸어요. 정말이에요. 한바탕 난리가 났죠. 바늘 끝은 갈고리 모양으로 구부러져 있고 다른 쪽에는 커다란 납덩이가 달려 있어 바늘을 뽑아버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헨리를 육지로 데려가려 했지만 헨리의 투지는 대단했어요.
이쯤으로 병이 나봐야 파상풍밖에 더 걸리겠느냐면서 고등어 떼를 두고 돌아간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렸죠. 그래서 그냥 계속 고기를 잡았어요. 헨리는 이따금씩 끙끙 신음소리를 내가며 그물을 끌어당겼죠. 고등어 떼가 다 지나가고 우리도 고기를 가득 잡아 돌아왔어요. 나한테 손톱 줄이 있어서 그걸로 바늘을 잘라보려고 했죠. 가능하면 안 아프게 하려고 했는데 헨리는 소리를 질러댔죠. 부인도 그 고함소리를 들어봤어야 해요. 아니, 아니, 안 듣는 게 낫겠네요. 그때 주변에 여자가 없었던 게 다행이었지.
헨리는 원래 욕 같은 건 안 하는 사람인데 그때는 주워들은 욕이란 욕은 다 끄집어내 내게 퍼부어대더군요. 그 친구의 욕지거리가 바닷가에 어찌나 쩌렁쩌렁 울려댔던지. 결국 헨리가 더 이상은 못 참겠다고 했고, 나도 더 이상은 측은한 마음도 안 들어서 그 친구를 데리고 56킬로미터나 떨어진 샬럿타운에 있는 의사에게 데려갔어요. 그땐 거기 말고 가까운 곳에는 의사가 한 사람도 없었거든요. 그 행운의 바늘은 그때까지도 그 친구 코에서 달랑거리고 있었죠. 크렙 선생은 내가 한 거랑 똑같이 줄 칼로 그 낚싯바늘을 잘라냈어요. 특별히 아프지 않게 자르는 것 같지도 않았어요!”
짐 선장은 옛 친구에게 다녀오며 많은 옛일을 회상하게 됐고 이제는 아예 그 추억에 푸욱 빠졌다.
“헨리가 오늘 나한테 그 옛날 치니키 신부님11)이 알렉산더 맥컬리스터의 배를 축복해준 걸 기억하냐고 물었어요. 이것도 묘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성경말씀처럼 진짜예요. 그때 나도 그 배에 타고 있었어요. 동틀 무렵 나랑 헨리는 알렉산더 맥컬리스터의 배를 타고 나갔어요. 배엔 우리 말고 앤드루 피터스라는 다른 프랑스 사내도 있었는데 물론 가톨릭교도였죠. 부인도 알겠지만 치니키 신부가 신교도로 개종했잖아요. 그래서 가톨릭교도들은 그분을 아주 싫어했어요. 우린 바다로 나가 정오까지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서 일을 했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어요.
우리가 다시 돌아왔을 때 치니키 신부님은 가야 했지요. 그분은 아주 공손하게, ‘죄송하지만 맥컬리스터 씨, 오후엔 같이 배를 타고 나가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대신 제가 축복을 해드리겠습니다. 오늘 오후에 고기를 천 마리는 잡으실 겁니다.’
그날 천 마리는 아니지만 정확하게 999마리를 잡았어요. 작은 배가 잡은 걸로는 그해 여름 북쪽 해안을 통틀어 최고였을 거예요. 참 신기하죠? 알렉산더 맥컬리스터가 앤드루에게 물었죠. ‘자, 이젠 치니키 신부를 어떻게 생각하나?’ 앤드루는 투덜거리며 ‘흠, 그 늙은 악당이 축복을 일부러 조금만 해주고 남겨둔 모양이야.’ 하고 대답하더군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오늘 헨리가 얼마나 웃어대던지!”
“포드 씨가 누군지 아세요, 짐 선장님?”
짐 선장의 추억담이 당장은 다 떨어진 듯해 앤이 물었다.

짐 선장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난 알아맞히기엔 전혀 소질이 없어요, 블라이드 부인. 하지만 들어오면서 전에 저 눈을 어디에서 봤는데, 분명히 어디서 봤는데 하는 생각은 했어요.”
“아주 오래전 9월의 아침을 생각해보세요. 절망하며 오랫동안 기다리던 배가 항구로 들어오던 때, 로열 윌리엄 호가 들어오던 날 존 선생의 신부를 처음 봤던 순간을 기억해보세요.”
앤이 부드럽게 말했다.
짐 선장이 벌떡 일어섰다.
“퍼시스 셀윈의 눈이야. 퍼시스의 아들일 리는 없고 그렇다면…….”
짐 선장은 거의 외치다시피 했다.
“손자입니다. 네 저는 앨리스 셀윈의 아들입니다.”
짐 선장은 오언 포드에게 반갑게 다가가 손을 잡고 다시 악수했다.
“앨리스 셀윈의 아들이라니! 세상에, 진심으로 환영하네. 존의 자손들이 어디서 살고 있는지 궁금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이 섬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걸로 알았거든. 앨리스, 앨리스는 이 작은 집에서 태어난 첫 번째 아기였지. 그 아기만큼 기쁨을 안겨다 준 아기도 없었지! 내가 한 백 번쯤은 안아서 얼러주었어. 그 아이가 처음으로 혼자 걸음마를 한 것도 내 무릎에서였지. 그 애 엄마가 앨리스를 바라보던 얼굴이 보이는 것 같구먼……. 거의 60년 전 일이군. 그런데 앨리스는 아직 살아 있나?”

“아니요. 어머니는 제가 어릴 때 돌아가셨습니다.”
“아, 내가 이 나이까지 살아서 그런 소식을 듣게 되니 뭔가 잘못된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짐 선장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자넬 만나서 정말 반갑네. 잠시라도 다시 젊어진 기분이 들어. 그게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지 아마 모를 걸세. 여기 블라이드 부인이 그 요령을 알지. 나를 위해 종종 그렇게 해준다네.”
짐 선장은 오언 포드가 짐 선장 표현대로 ‘진짜 소설가’라는 걸 알게 되자 더욱 흥분했다. 짐 선장은 뛰어난 천재라도 보듯 오언을 바라봤다.
짐 선장은 앤이 글을 쓴다는 것도 알지만 그 일은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짐 선장은 여자를 유쾌한 피조물로 여겼다. 짐 선장은 원한다면 여자에게도 선거권이든 뭐든 다 주어야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여자가 글을 쓸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열광적인 사랑》을 좀 봐요. 여자가 그 소설을 썼는데 보라고요. 10장이면 다 쓸 수 있는 이야기를 103장에 걸쳐 썼어요. 여자들은 대체 언제 끝을 내야 할지를 몰라요. 그게 바로 문제지요. 언제 끝을 낼지 아는 게 좋은 글이에요.”
짐 선장이 주장했다.
“포드 씨는 선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해요. 미쳐서 자기가 플라잉 더치맨12)이라고 상상했던 선장 이야기 좀 해주세요.”
앤이 졸랐다.

이 이야기는 짐 선장의 이야기 중 최고였다. 공포와 유머가 섞인 이야기로 앤은 벌써 몇 번을 들었지만 포드 씨와 또다시 들으며 재미있어 웃고 또 공포에 떨기도 했다. 짐 선장이 좋아하는 청중들이라서 다른 이야기도 계속 나왔다.
그는 자기 배가 증기선과 충돌해서 전복되었던 이야기, 말레이 해적들에게 납치되었던 이야기, 배에 불이 붙었던 사건,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탈출한 정치범을 도운 이야기, 가을에 배가 난파되어 겨울 내내 막달레나회 갱생 시설에 갇혀 지낸 이야기, 배에서 우리에 가둬놓았던 호랑이가 풀려나와 벌어졌던 소동, 배의 선원들이 선상 반란을 일으켜 짐 선장을 외딴 섬에 버렸던 이야기. 그 외에도 짐 선장과 관련된 비극적이고 해학적이며 기괴한 이야기들이 수도 없이 나왔다. 신비로운 바다, 매혹적인 머나먼 나라, 모험의 매력, 재미있는 세상 이야기를 짐 선장의 청중은 온몸으로 느꼈다.
오언 포드는 손을 머리에 얹고 이야기를 들었고 일등 항해사는 그의 무릎에 앉아 가르랑거리며 들었다. 오언의 반짝이는 눈은 억세고 표현이 풍부한 짐 선장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포드 씨에게 선장님의 인생 일지를 보여주지 않으시겠어요?”
짐 선장이 드디어 그날의 이야기를 끝내겠다고 선언하자 앤이 물었다.
“아,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보고 싶어 하겠어요.”
실은 보여주고 싶어 온몸이 간질거리는 짐 선장이 말했다.
“정말 보고 싶습니다, 보이드 선장님. 선장님이 들려주신 이야기의 반만큼이라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담겼다면 꼭 보아야죠.”
오언이 말했다.
주저하는 척하면서 짐 선장이 오래된 상자에서 자신의 인생 일지를 꺼내 오언에게 건네줬다.
“내 필체를 알아보려면 힘들 텐데, 난 학교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어. 그저 내 조카 손자 조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 해서 써 둔 거지. 그 아이는 언제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거든. 어제도 내가 9킬로그램이나 나가는 대구를 배에서 들어내고 있는데 원망 섞인 목소리로, ‘할아버지, 대구는 말 못 하는 짐승 아니에요?’ 하는 거야. 내가 그 아이에게 말 못 하는 짐승에겐 언제나 잘해주고 절대 해쳐서는 안 된다고 했거든요. 나는 대구는 말을 못 하지만 짐승이 아니라고 말해서 위기를 모면했지만 조는 만족하는 것 같지 않았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지. 조그만 녀석들에게 말할 땐 조심해야 해. 아이들은 어른을 꿰뚫어볼 수 있거든.”
이야기를 하며 짐 선장은 오언이 인생 일지를 찬찬히 보고 있는 모습을 곁눈질하며 봤다. 그의 손님은 지금 책 속에 푹 빠져버린 것 같았다. 짐 선장은 웃는 얼굴로 돌아서 찬장으로 가 차를 준비했다. 구두쇠가 자기 금에서 멀어지기 싫어 움찔거리듯 오언은 주저하며 잠시 책에서 눈을 떼어 차를 마시고 다시 서둘러 책으로 돌아갔다.
“아, 원한다면 가져가서 봐도 괜찮네. 난 내려가서 배를 좀 조여 두어야겠어. 바람이 불거든. 오늘 밤 하늘 봤나?”
그 ‘물건’이 자신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듯 짐 선장이 말했다.

“비늘구름과 말꼬리 구름이 끼면
대형 범선은 돛을 낮게 단다.”

오언 포드는 인생 일지를 가져가서 보라는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앤은 오언에게 잃어버린 마거릿 이야기를 해줬다.
“저 노선장님은 정말 놀라운 분이에요. 어쩌면 그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사셨을까요. 저분이 일주일 동안 한 모험이 우리가 일생에 거쳐 할 모험보다 더 많아요. 저분 이야기가 다 진짜라고 생각하시나요?”
오언이 물었다.
“물론이죠. 짐 선장님은 거짓말을 못 하는 분이에요. 그리고 여기 사람들은 다들 짐 선장님이 하는 이야기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얘기해요. 예전에는 같이 항해하던 동료들이 많이 있어서 짐 선장님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걸 입증해줬는데 이젠 거의 다 돌아가셨죠. 짐 선장님은 프린스에드워드 섬에 몇 분 안 남은 그 옛날의 선장님이시죠.”
11. 치니키(Charles P. Chiniquy, 1809~1899): 기독교도로 개종한 캐나다인 가톨릭 신부. 개종 후 가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저술과 설교를 함.
12.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또는 전설에 나오는 유령선의 이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영원히 대양을 항해할 운명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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