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5권 25~26

나단비 | 2024.04.05 20:51:00 댓글: 0 조회: 69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8901
25
책을 쓰기 시작하다






그다음 날 아침 오언 포드는 잔뜩 흥분해서 앤의 작은 집을 찾았다.
“블라이드 부인, 이건 놀라운 이야기예요. 정말 대단합니다. 제가 이걸 소재로 소설을 쓸 수 있다면 대단한 작품이 나올 것 같아요. 짐 선장님이 이걸 책으로 쓰게 해주실까요?”
“그렇고말고요!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어젯밤에 포드 씨가 그걸 가지고 갔을 때 제가 한 생각이 바로 그거였어요. 짐 선장님은 자신의 인생을 책으로 써줄 사람을 찾으셨어요.”
앤이 소리쳤다.
“오늘 저녁 저랑 같이 곶에 가주시겠습니까, 블라이드 부인? 인생 일지에는 제가 직접 짐 선장님께 부탁을 드리겠지만 사랑 이야기를 가미하는 부분에 잃어버린 마거릿 이야기를 써도 될지는 부인이 물어봐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야 인생 일지의 이야기를 멋지게 구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오언 포드가 그 계획을 이야기했을 때 짐 선장은 그 어느 때보다 흥분했다. 드디어 그가 소중히 간직한 꿈이 실현되고 그의 인생 일지가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될 터였다. 게다가 잃어버린 마거릿 이야기를 그 안에 집어넣는다니 짐 선장은 더할 수 없이 기뻤다.
“그렇게 되면 마거릿이 잊히는 일은 없겠지.”
짐 선장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그래서 집어넣으려는 겁니다. 우리 합심해서 작업을 해요. 선장님은 영혼을, 저는 육체를 제공하는 겁니다. 아, 걸작이 나올 겁니다. 짐 선장님, 지금 당장 일을 시작하죠.”
오언이 신이 나서 소리쳤다.
“게다가 내 이야기를 존 셀윈의 손자가 책으로 쓰게 되다니! 이보게, 자네 할아버지는 내 절친한 친구였네. 이 일을 할 사람으로 자네 이상 가는 사람은 없어. 내가 왜 그리도 오랜 시간을 기다렸어야 했는지 이젠 알겠네. 책을 쓸 적임자를 기다렸던 거야. 자네는 이곳에 속한 사람이야. 이 북부 해안의 영혼이 바로 자네 안에 있어. 자네만이 이 책을 쓸 수 있어.”
짐 선장은 환호성을 질렀다.
오언의 작업실은 등대 거실 바로 곁 작은 방에 마련되었다. 오언이 글을 쓸 때 짐 선장이 가까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오언이 잘 모르는 항해나 바닷가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짐 선장에게 묻기 위해서였다.
오언은 그다음 날 아침부터 곧바로 책을 쓰기 시작했고, 자신의 온 마음과 영혼을 그 작업에 고스란히 쏟아 부었다. 그해 여름 짐 선장은 그야말로 행복했다. 오언이 글을 쓰는 성스러운 사원과 같은 그 방을 짐 선장은 말없이 바라보고는 했다. 오언은 모든 것을 짐 선장에게 이야기했지만 원고를 보여주지는 않았다.
“책으로 발간될 때까지 기다리셔야 해요. 그래야 최고의 작품을 만끽할 수 있으니까요.”
오언이 말했다.
오언은 인생 일지라는 보물에 푹 빠져들었고 그 보물을 마음껏 이용했다. 그는 잃어버린 마거릿이 생생하게 자기 마음속에 그려질 때까지 골몰히 생각하고 상상하여 결국에는 살아 숨 쉬는 인물로 만들어냈다. 이야기가 틀을 잡아갈수록 오언은 이야기에 더욱 빠져들어 갔고 정말 열심히 그리고 맹렬히 작업을 해나갔다. 오언은 레슬리와 앤에게 원고를 읽고 평가해달라고 했다. 이 두 비평가는 이 책을 목가적이라고 평했고, 마지막 장은 레슬리의 제안대로 마무리 지었다.
앤은 레슬리의 생각대로 책이 마무리되어 정말 기뻤다.
“난 오언 포드를 봤을 때 그 사람이 바로 그 책을 쓸 적임자라는 걸 알았어. 그 사람 얼굴에서 표현의 예술을 읽었고, 유머와 열정을 보았거든. 바로 그게 짐 선장님 이야기를 책으로 쓰는 데 필요한 것들이야. 린드 아주머니 표현처럼 오언은 바로 그런 일을 할 운명이었던 거야.”
앤은 길버트에게 말했다.
오언 포드는 아침에는 책을 썼다. 그리고 오후에는 대개 블라이드 부부와 시간을 보냈다. 짐 선장이 잠시라도 레슬리를 자유롭게 해주려고 딕을 봐줘서 레슬리도 종종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들은 세 가닥의 물줄기가 항구와 바다로 흘러드는 근처의 아름다운 강에서 보트를 타고, 모래톱에서는 조개를 잡았으며, 바위에 붙은 홍합을 잡고 언덕에서 딸기를 따기도 했다. 짐 선장과 함께 대구 낚시를 가기도 했고, 바닷가 들판에서는 물떼새를, 만(灣) 안의 후미에서는 야생 오리 사냥을 했다. 사실 사냥은 남자들만 했지만. 저녁이면 황금빛 달빛 아래 데이지가 만발해 있는 해안가 들판을 산책하거나, 유목 장작불의 온기 아래 차가운 바닷바람이 녹아드는 작은 집 거실에 앉아 행복하고 열정적이며 똑똑한 젊은이들이 거론할 만한 다양한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다.
앤에게 자기 마음을 고백한 후로 레슬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차갑고 말없는 예전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고 냉소적으로 굴던 태도도 그림자도 없이 사라졌다. 기만당했던 처녀 시절이 여성으로 성숙해져 다시 레슬리에게 찾아온 것 같았다. 레슬리는 불꽃과 향기처럼 피어났다.
그 멋진 여름 황혼을 함께 보내며 레슬리는 그 누구보다 더 재치 있는 모습을 보였고 또 잘 웃었다. 레슬리가 같이하지 못할 땐 대화에 뭔가 세련된 풍미가 부족한 것 같아 모두들 애석해했다. 빨간 등불이 흠집 하나 없는 설화석고 화병을 투과해서 빛나듯 레슬리의 아름다움은 그녀 안에서 깨어난 영혼으로 빛이 났다.
앤은 레슬리가 내는 광휘에 눈이 부셨다. 오언 포드는 자기 책에서 마거릿을 오래전에 실종되어 ‘사라진 아틀란티스에 잠들어 있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요정 같은 얼굴을 한 사람으로 묘사하긴 했지만, 성격은 포드 자신이 포 윈즈에서 평온한 시간을 만끽하며 알게 된 레슬리 무어에게서 빌었다.
무엇보다도 그해 여름은 결코 잊지 못할 시간이었다. 살면서 좀처럼 갖기도 힘들고 지나고 보면 일생 간직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는 시간, 거기에 화창한 날씨, 즐겁고 멋진 친구들과 재미있는 일들이 더해져 거의 완벽에 가까운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렇게 좋은 시간이 곧 끝날 거라고 생각하니 너무 아쉬워.”
바람이 스며들고 만에 바닷물이 한층 더 파랗게 변하며 가을이 올 것을 예고하자 앤은 낮게 한숨을 쉬며 혼잣말을 했다.
그날 저녁 오언 포드는 책을 끝냈으니 휴가도 이젠 끝이 날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기는 해요. 글을 수정하고 다듬는 작업을 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일은 다 끝냈어요. 오늘 아침 마지막 문장을 끝냈답니다. 책을 출판해줄 출판업자를 찾을 수 있다면 내년 여름이나 가을이면 책이 나올 겁니다.”
오언은 출판업자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엄청난 성공을 거둘 대단한 책, 내내 생명력을 이어갈 책을 썼다는 것을 알았고 그 책이 자신에게 부와 영광을 모두 가져다줄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문장을 끝내고는 원고에 머리를 숙이고 오랫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저 엄청난 일을 끝냈다는 생각 때문만은 아니었다.




26
오언 포드의 고백






앤은 뜰 가장자리로 흐르는 작은 개울 옆에 길버트가 만들어놓은 통나무 의자에 앉았고, 오언 포드는 앤 앞 청동 기둥 같은 노란 자작나무에 기대서 있었다.
“길버트가 외출 중이라 유감이에요. 글렌에 사는 알렌 리온 씨가 심각한 사고를 당해 그 댁에 갔어요. 오늘 밤 늦게나 돌아올 거예요. 하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포드 씨가 떠나는 걸 보겠다고 했어요. 너무 속상하네요. 수잔이랑 제가 포드 씨와의 마지막 밤을 유쾌하게 보내려고 파티를 준비하려 했는데 말이에요.”
오언의 얼굴이 무척 창백한 게 그 전날 밤잠을 자지 못한 기색이 역력했다. 앤은 그런 그를 쳐다보며 과연 지난여름 동안 오언 포드가 기력을 되찾은 것인지 의아했다. 책에 너무 힘을 쏟은 건 아닐까? 지난 한 주 동안 계속 좋아 보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길버트 선생이 없는 게 더 잘됐어요. 블라이드 부인만 따로 만나고 싶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꼭 해야만 할 이야기가 있어요. 안 그러면 미칠 것 같거든요. 지난주 내내 이 문제를 정면으로 맞서보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요. 부인은 믿을 수 있고 또 아마 이해해주실거라 생각합니다. 부인 같은 눈을 가진 사람은 이해심이 많거든요. 사람들은 그런 사람에게는 자기 마음을 털어놓아도 된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죠. 블라이드 부인, 전 레슬리를 사랑합니다. 아니, 사랑이라는 말로는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어요!”
오언이 천천히 말했다.
억제되었던 열정이 오언의 목소리에서 갑자기 터져 나왔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자신의 팔에 얼굴을 숨겼다. 그의 온몸이 떨렸다. 앤은 하얗게 질리고 어안이 벙벙한 채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런 경우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니,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걸까? 상황이 이렇게 된 건 지극히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일 아닌가? 앤은 자신이 맹인처럼 그 점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게 이상하기만 했다. 하지만, 하지만 이런 일은 포 윈즈에서 일어난 적이 없었다. 세상의 다른 곳에서야 인간의 열정이란 게 종종 인습과 법에 반하는 행위를 벌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아니었다.
레슬리는 지난 10년 동안 간간이 하숙을 쳤지만 이런 일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아마 다른 때엔 오언 포드 같은 사람이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레슬리도 이번 여름처럼 생기 있게, 살아 있는 인간답게 지낸 게 아니라 예의 그 차갑고 시무룩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리라. 아, 누군가 이런 일이 있어날 수도 있다는 걸 예상했어야 했다! 왜 미스 코넬리아는 이런 일을 생각하지 않았던 거지? 미스 코넬리아는 남자의 문제라면 언제든 경종을 울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인데.
앤은 괜히 터무니없이 미스 코넬리아를 원망하다가 잠시 혼자 안으로 끙끙 신음을 했다. 누굴 원망하든지 간에 이미 불행한 일은 터졌다. 그리고 레슬리, 그렇다면 레슬리는 어떻게 하지? 앤은 레슬리 걱정이 제일 앞섰다.
“레슬리도 이 사실을 아나요, 포드 씨?”

앤이 조용히 물었다.
“아니, 아닙니다. 어림짐작하지 않는 한은 아닙니다. 부인도 제가 그걸 레슬리에게 말할 정도로 불한당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죠? 도저히 레슬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거둘 수는 없었어요. 그게 답니다. 전 지금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비참합니다.”
“레슬리도 포드 씨를 좋아하나요?”
앤이 물었다. 그 질문이 입에서 떨어지는 순간, 앤은 그 말을 한 걸 후회했다. 오언 포드는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아니요. 하지만 레슬리가 자유로운 몸이었다면 제가 그렇게 할 수도 있었어요.”
‘레슬리도 좋아하는 거야. 그리고 이 사람도 그걸 알아.’
이렇게 생각하며 앤은 공감하면서도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레슬리는 그렇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에요, 포드 씨. 포드 씨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떠나는 겁니다. 레슬리는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해요.”
“저도 압니다, 알아요.”
오언이 신음했다. 그는 풀이 돋은 둑에 앉아 그 아래로 흐르는 호박색깔 물을 우울하게 바라봤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거 압니다. 그저 이곳에 처음 올 때 만나리라고 예상했던 부산스럽고 호기심 많은 뚱뚱한 무어 부인에게 하듯이 ‘안녕히 계세요, 무어 부인. 여름내 친절히 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정직하게 하숙비를 지불한 다음 떠나야겠죠. 그래요, 아주 간단해요. 명확하지 않은 것도 곤혹스러울 것도 없어요. 그렇게 인사를 하고 끝으로 곧바로 이어진 길을 따라 가버리는 거예요. 전 그렇게 할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블라이드 부인. 하지만 차라리 시뻘겋게 달군 쟁기 날 위를 걷는 게 그보다 더 쉬울 겁니다.”
앤은 오언의 목소리에 서린 고통에 움찔했다. 그런 상황에서 앤이 할 수 있는 말은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비난 같은 것은 할 수도 없고 조언도 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오언 포드의 피 끓는 고통에는 동정도 소용이 없었다. 그저 연민과 회한의 미로에 선 그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뿐이었다. 앤은 레슬리가 받게 될 고통을 생각하고 가슴이 아팠다. 이런 일이 아니고도 가련한 레슬리는 충분히 고통스러운 세월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레슬리가 행복하다면 두고 떠나는 게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을 겁니다.”
오언이 다시 열정적으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삶을 살고 있는 레슬리를 이대로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는 건 정말 견디기 힘들어요. 전 레슬리를 행복하게 해주려는 것이라면 제 삶을 바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도울 수 있는 일이 없군요. 레슬리는 이렇게 가난하고 피폐한 생활을 계속하면서, 아무런 기대도 없이 공허하고 황폐한 세월 속에 무력하게 늙어갈 수밖에 없어요. 그걸 생각하면 미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 제 삶을 살아야 하죠. 레슬리가 견뎌내야 할 삶이 어떤 것인지 너무도 잘 알면서 다시는 레슬리를 만나지도 못할 거예요. 이건 너무도 끔찍해요!”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우리는 레슬리의 친구이고, 레슬리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살고 있는지 모두 잘 알아요.”
앤이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레슬리는 행복한 인생을 살 자격이 충분해요.”
오언이 반항적으로 말했다.
“레슬리는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건 레슬리가 가진 것 중 제일 보잘것없는 거죠. 전 레슬리보다 아름다운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레슬리의 웃음소리! 여름 내내 레슬리를 웃게 만들려고 별별 수를 다 썼습니다. 그저 그 웃음소리를 듣는 게 좋아서요. 그리고 그녀의 눈, 레슬리의 눈은 바다만큼 깊고 푸르죠. 전 그렇게 시리도록 푸른 눈은 본 적이 없어요. 황금빛 머리칼은 또 어떻고요! 레슬리가 머리를 내린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블라이드 부인?”
“아니요.”
“전 보았어요. 하루는 짐 선장님과 낚시를 하러 바다로 나갔는데,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그냥 돌아왔어요. 레슬리는 그날 오후 혼자 있는 틈을 타서 머리를 감았는지 베란다에 나와 햇볕에 머리를 말리고 있었어요. 살아 있는 황금 분수 같은 머리가 거의 발치까지 내려오더군요.
레슬리는 나를 보자마자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는데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려 온몸을 휘감아 돌았어요. 그 모습이 마치 구름 속에 갇힌 다나에13)같았어요.
그때 전 깨달았습니다. 제가 여기 처음 온 날 어둠 속에서 빛을 내며 베란다에 서 있던 레슬리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를 사랑했다는 걸 말입니다. 하지만 레슬리는 이곳에서 살아야 하죠. 딕을 어르고 돌보면서요. 그저 목숨을 부지하려고 쪼들린 살림을 이리저리 쥐어짜면서요. 전 그저 부질없이 레슬리를 그리워할 겁니다. 친구로서 최소한의 도움마저 줄 수도 없죠.
어젯밤 내내 거의 새벽녘까지 바닷가를 걸으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포 윈즈에 온 걸 후회하지는 않아요. 이 일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요. 그렇다고는 해도 이 세상에 레슬리를 만나지 못하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은 없을 것 같아요. 레슬리를 사랑하면서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너무 가슴이 쓰라리듯 아파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레슬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어요.
제 말이 전부 미친 소리 같지요? 이런 복잡하고 힘든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니 그저 바보 같은 소리로만 들리지요. 이런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그저 느끼고 감내해야만 하죠. 입 밖으로 내지 말았어야 해요. 하지만 이렇게 털어놓고 나니 기분이 조금 나아진 건 사실입니다. 최소한 내일 아침에 괜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떠날 수 있는 힘은 생겼어요. 가끔 저에게 편지로 레슬리 소식을 알려주세요, 블라이드 부인. 그렇게 해주실 거죠?”
“네, 그럴게요. 포드 씨가 떠나신다니 참 섭섭하네요. 우리 모두 포드 씨를 그리워할 거예요. 우리 정말 좋은 친구였는데! 이 일만 아니라면 다시 이곳에 오실 수 있을 거예요. 아직은 아니겠지만 언젠가 이 일을 다 잊으면 말이에요.”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다시는 포 윈즈에 돌아오지 않을 거고요.”
오언이 딱 잘라 말했다.
저녁노을 속의 정원은 조용했다. 멀리서 바다가 부드럽고 단조롭게 모래톱에 찰싹거렸다. 포플러 나뭇가지에 부는 저녁 바람이 슬프고 기이한 주문 소리처럼 들려왔다. 마치 오래된 추억 속에 좌절된 꿈처럼. 앤과 오언 앞에는 아름다운 노란빛과 초록빛 그리고 장밋빛 서쪽 하늘을 배경으로 날씬한 미루나무가 서 있었다. 모든 이파리와 가지가 어둠 속에서 요정처럼 사랑스럽게 흔들거렸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뭔가 할 말을 감추고 있는 듯 오언이 말했다.
“너무 아름다워서 마음이 아파요. 저렇게 완벽한 것을 보면 언제나 마음이 아프죠. 어렸을 땐 그런 느낌을 ‘이상한 통증’이라고 불렀었어요. 완벽함에는 왜 이런 통증이 느껴질까요? 완벽함 뒤에는 퇴보밖에 더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느끼는 듯한…….”
앤이 조용히 말했다.
“아마 그렇겠죠. 눈에 보이는 완벽한 아름다움이 우리 안에 갇힌 영원함을 불러내기 때문일 거예요. 완벽함이란 동족을 부르는 거죠.”
오언이 꿈을 꾸듯 말했다.
“코감기에 걸린 목소리네요. 잠자리에 들 때 코에 수지(獸脂)를 좀 문질러 봐요.”
오언이 마지막 말을 끝냄과 동시에 전나무 사이의 작은 문을 열고 들어온 미스 코넬리아의 말이었다. 미스 코넬리아는 오언을 좋아했지만 남자가 허풍을 떨 때는 반드시 이를 꾸짖어야 했다.
미스 코넬리아는 누구의 비극이라도 한쪽 모퉁이에서 훔쳐보며 희극으로 만들어버리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긴장해 있던 앤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오언도 미소 지었다. 확실히 감정이나 열정도 미스 코넬리아 앞에서는 줄어드는 모양이었다. 희망도 없이 어둡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던 세상이 앤 앞에서 다시 활짝 밝아졌다. 하지만 그날 밤은 도저히 잠들기가 어려웠다.
13.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의 딸. 아크리시오스는 자기 딸이 낳은 자식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는 신탁을 받고 딸을 가둬두지만, 결국은 다나에의 아들 페르세우스가 던진 원반에 맞아 죽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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