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5권 27~28

나단비 | 2024.04.05 20:51:36 댓글: 0 조회: 70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8904
27
모래톱에서






그다음 날 아침, 오언 포드는 포 윈즈를 떠났다. 저녁이 되자 앤은 레슬리를 보러 갔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은 잠겨 있었고 불도 꺼져 있었다. 영혼이 떠나간 집처럼 보였다. 레슬리는 그다음 날도 앤의 집에 들르지 않았다. 앤에게는 그게 왠지 좋지 않은 징후로 느껴졌다.
저녁에 길버트는 바다 후미로 낚시를 하러 갈 생각이었고 앤도 같이 마차를 타고 곶으로 가서 짐 선장과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가을 저녁 안갯속을 뚫고 빛을 전달하는 등대는 알렉 보이드가 맡고 있었고 짐 선장은 없었다.
“어떻게 하지? 나랑 같이 가겠어?”
길버트가 물었다.
“바다 후미까지는 가고 싶지 않아. 하지만 해협을 건너가서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난 모래 해변을 산책하고 있을래. 오늘 같은 날엔 바위 해변은 너무 미끄럽고 무시무시해.”

모래톱에서 앤은 혼자 그날 밤의 등골이 오싹해지는 아름다움을 맛보고 있었다. 9월치고는 따뜻했고 오후 늦게는 안개가 아주 짙게 끼었다. 하지만 보름달이 뜨고 부분적으로 안개가 옅어지자 항구와 만(灣) 그리고 그 주변 해안가는 창백한 은빛 안개에 휩싸여 이 세상 같지 않은 환상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다. 모든 것이 마치 유령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감자를 가득 싣고 블루 노우즈 항구를 향해 해협을 빠져나가는 조시아 크로퍼드 선장의 검은 범선이 희미하게 멀어져 갔다. 그 모습이 꼭 해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머나먼 미지의 땅으로 가는 유령선 같았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머리 위에서 울어대는 갈매기 소리는 죽어가는 선원이 외쳐대는 영혼의 소리처럼 들렸고, 작은 소용돌이를 이루며 모래로 몰려드는 파도 거품은 바다 동굴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꼬마 요정 같았다. 커다란 새우등처럼 보이는 모래 언덕은 먼 옛날 북구의 이야기에 나오는 잠자는 거인 같았고, 항구 여기저기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불빛은 요정 나라의 해변에서 비치는 불빛 같았다.
앤은 안갯속을 헤매며 혼자 갖가지 공상에 젖었다. 이렇게 매혹적인 해변을 혼자 거니는 것은 정말 즐겁고 낭만적이며 신비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앤은 혼자가 아니었다. 앤 앞에 안갯속에서 무엇인가가 어렴풋이 나타났다. 형태와 모양을 갖추는가 싶더니 갑자기 파도 무늬가 새겨진 모래를 지나 앤 앞으로 다가왔다.
“레슬리!” 
앤이 놀라서 소리쳤다.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앤은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웃으려고 애쓰며 레슬리가 말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허사였다. 레슬리는 아주 창백하고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레슬리의 선홍색 모자 아래로 내려온 잔 머리칼이 얼굴과 눈에서 작은 금반지처럼 빛나며 곱슬곱슬 굽이쳤다.
“난 길버트를 기다리고 있어요. 후미에 갔거든요. 등대에 있으려 했는데 짐 선장님이 안 계셔서요.”
“난 그냥 걷고, 걷고 또 걷고 싶어서 왔어요. 오늘은 바위 해변에 갈 수가 없었어요. 파도가 너무 높아서 거기 갔다가는 바위에 갇히게 될 것 같아 여기로 왔지요. 난 미친 게 틀림없어요. 짐 선장님의 너벅선을 타고 직접 노를 저어 바다를 건넜어요. 여기 온 지 한 시간 정도 됐죠. 이리 와요, 어서. 같이 걸어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아, 앤!”
차분하지 못한 어조로 레슬리가 말했다.
“레슬리,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 있는지 이미 너무도 잘 알지만 앤은 그렇게 물었다.
“말 못 해요. 그러니 물어보지 말아요. 앤이 알아도 상관없지만, 실은 앤이 알았으면 좋겠지만 난 말 못 해요. 누구한테도 말 못 해요. 난 정말 바보 같았어요, 앤. 아, 이렇게 바보처럼 고통을 당하다니. 이런 고통은 다시는 없을 거예요.”
레슬리는 비통하게 웃었다. 앤이 레슬리에게 팔을 둘렀다.

“레슬리, 포드 씨를 좋아하게 된 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레슬리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
“어떻게 알았어요? 대체 어떻게요? 아, 아마 모두들 알아볼 정도로 내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나 보군요. 그렇게 드러나요?”
“아니, 어떻게 알았는지는 나도 몰라요. 그저 그런 생각이 든 거예요. 레슬리, 날 그렇게 보지 말아요!”
“날 경멸해요? 내가 사악하고 여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아니면 그저 내가 바보 같은가요?”
레슬리는 낮은 목소리로 격렬하게 물었다.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자, 우리 차근차근 이야기해요. 살면서 닥치는 다른 어려움을 이야기하듯이. 문제에 너무 골몰하다 보면 우울한 생각에 빠지게 돼요. 레슬리는 뭐든 잘못 돌아가면 그렇게 생각해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거 자신도 잘 알잖아요. 그러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나랑 약속도 했고요.”
“하지만, 아…… 너무 부끄러워요.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내가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레슬리가 중얼거렸다.
“그건 전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오언을 좋아하게 됐다는 건 참 유감스러운 일이죠. 그러면 레슬리만 더 불행해질 테니까요.”
“난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된 게 아니에요. 그런 거였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막을 수 있었을 거예요. 일주일 전까지 오언이 책을 다 썼고 곧 떠나야 한다고 말했을 때까지 그런 건 꿈도 꾸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때, 난 알았어요. 누군가에게 아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으니까요. 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말을 할 수 없었죠. 하지만 내가 어떻게 보였는지 모르겠어요. 내 얼굴이 날 배신했을까 봐 두려워요. 아, 그 사람이 알았거나 짐작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아요.”
레슬리는 계속 걸으면서 격정적으로 말했다.
앤은 오언과 이야기를 나누며 짐작한 게 있어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저 침묵만 지켰다. 레슬리는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안도감을 찾은 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지난여름 너무도 행복했어요, 앤. 내 인생에서 그보다 더 행복했던 때는 없었을 정도로요. 난 앤과 나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우리의 우정이 꽃피어 내 삶이 다시 한 번 충만해져서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그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죠.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어요. 왜 모든 것이 그렇게 달라 보였는지 이제야 알겠어요. 그리고 이젠 모든 게 끝났죠. 그 사람은 떠났어요. 이젠 어떻게 살죠, 앤? 오언이 떠난 후 오늘 아침 집으로 들어가니 고독이 세차게 내 얼굴을 후려치는 것 같았어요.”
“조금씩 괜찮아질 거예요.”
친구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공감하는 앤으로서는 위로의 말이라도 편안하고 막힘없이 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앤은 슬프고 고통받을 때는 선의가 담긴 위로의 말이라도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아, 점점 더 힘들어질 것만 같아요. 이젠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어요. 아침이 오고 또 오겠지만 그 사람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죠, 절대로요. 다시는 그 사람을 보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면 어느 커다랗고 잔인한 손이 내 가슴속으로 비집고 들어와 내 심장을 비틀어 짜버리는 것 같아요.
오래전, 예전에 사랑을 꿈꿀 때 난 사랑이 아름다운지 알았어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돼버렸네요. 어제 떠날 때 그 사람은 참 차갑고 무심하게 굴었어요. 너무나 차가운 어조로 ‘안녕히 계세요, 무어 부인’ 하고 말했어요. 마치 친구도 아닌, 내가 그 사람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이란 것처럼 말이에요. 나도 알아요. 내가 그 사람에게 의미가 없다는 거. 그 사람이 좋아해주길 바라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아주 조금은 그보다는 친절하게 말해주어도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섭섭해요.”
레슬리가 가련하게 말했다.
‘아, 길버트가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앤은 그렇게 생각했다. 앤은 레슬리를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과 오언과의 약속을 저버릴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했다. 앤은 왜 오언이 그렇게 차갑게 작별 인사를 했는지 알고 있었고, 그동안의 우정에 걸맞은 진심 어린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는지도 잘 알았지만 그걸 레슬리에게 이야기해줄 수는 없었다.
“난 어쩔 수가 없어요, 앤. 정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가엾은 레슬리가 말했다.
“알아요.” 
“날 비난해요?”
“절대 비난하지 않아요.”
“블라이드 선생님에게는 말하지 않을 거죠?”

“레슬리! 내가 그런 말을 길버트에게 할 것 같아요?”
“아, 몰라요. 앤과 길버트 사이에는 비밀이 없잖아요. 어떻게 남편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내게 문제가 있거나 걱정거리가 있다면 숨기지 않죠. 하지만 내 친구의 비밀은 말하지 않아요.”
“블라이드 선생님까지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앤에게 털어놓은 건 잘된 일이에요. 앤에게 이야기하기 부끄러운 게 하나라도 있다면 죄책감을 느낄 거예요. 미스 코넬리아도 몰랐으면 좋겠어요. 가끔 미스 코넬리아의 친절한 갈색 눈이 내 영혼을 읽는 것같이 느껴질 때가 있거든요.
아, 이 안개가 영원히 걷히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여기 이 안갯속에 영원히 머무르며 살아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요. 어떻게 계속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난여름은 너무도 기뻤어요. 잠시도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거든요.
오언이 오기 전에는 무서운 순간들이 있었어요. 앤과 블라이드 선생님과 함께 있다가 내가 떠나야 하는 그런 순간이요. 앤은 둘이 걸을 수 있지만 난 혼자 걸어야 하죠. 하지만 오언이 오고 난 후엔 언제나 그 사람과 함께 집까지 걸어갔죠. 앤이 길버트와 그러하듯 우리도 걸으며 웃고 이야기했어요. 더 이상 외로워하지도 또 시샘할 필요도 없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아, 그래요. 난 바보였어요. 바보 같은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해요. 다시는 이 일로 앤을 재미없게 하지 않을게요.”
“저기 길버트가 와요. 우리와 함께 가요. 우리 배엔 세 명이 탈 공간이 충분해요. 그리고 레슬리 배는 우리 배 뒤에 꼭 묶어두면 돼요.”

이런 날 밤 그런 기분으로 레슬리 혼자 모래톱을 방황하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은 앤이 말했다.
“아, 난 또 혼자가 된 내 자신에게 익숙해져야 해요. 날 용서해줘요, 앤. 내가 정말 끔찍하게 굴죠, 감사를 해야 하는데. 사실 난 늘 앤에게 감사한 마음이에요. 날 세 번째 벗으로 받아들여주는 두 친구에게요. 내가 하는 이 불쾌한 말들은 신경 쓰지 말아요. 너무 심한 고통이 날 휘감고 있어서, 모든 것이 그저 날 아프게 하는 것만 같아서 그래요.”
가엾은 레슬리가 다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레슬리가 오늘 밤엔 너무 조용한 것 같지 않았어? 도대체 레슬리는 혼자 모래톱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집에 도착할 무렵 길버트가 물었다.
“아, 피곤했대. 그리고 딕이 힘들게 구는 날엔 바닷가에 가고 싶어 한다는 거 당신도 알잖아.”
“레슬리는 포드 같은 사람을 만나 결혼했어야 했는데. 그러면 정말 이상적인 한 쌍이 되었을 텐데, 그렇지 않아?”
길버트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제발 중매쟁이 짓 같은 건 하지 말아줘, 길버트. 남자가 그러면 혐오스러워.”
이런 얘기를 계속하다간 어찌하다가 레슬리와 오언의 진실을 말해버릴지 모른다는 우려에 앤이 약간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크, 앤 아가씨, 난 중매쟁이 짓을 하는 게 아냐. 그저 그랬으면 하고 생각해본 거라구.”
앤의 어조에 조금 놀란 길버트가 항변했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마. 시간 낭비니까.”
그러더니 갑자기 앤이 덧붙였다.
“아, 길버트, 모두들 우리처럼 행복했으면 좋겠어.”




28 
포 윈즈의 소소한 일상






미스 코넬리아가 <데일리 엔터프라이즈>를 내려놓고 바느질거리를 집어 들며 말했다.
“부고란을 읽고 있었어요.”
음침한 11월의 하늘 아래 항구 역시 음침하고 음산해 보였다. 젖은 나뭇잎 하나가 창문턱에 달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앤의 작은 집은 벽난로 불빛과 앤이 키우는 양치식물이랑 제라늄 덕분에 봄 같은 분위기를 냈다.
“여긴 언제나 여름 같아요, 앤.”
언젠가 레슬리도 그렇게 말한 적이 있는데 앤의 ‘꿈의 집’에 오는 손님들은 모두 그런 느낌을 받았다.
“<엔터프라이즈>지는 요즘 부고로 넘쳐나요. 부고란 기사가 항상 두세 단은 되게 나요. 난 그걸 한 줄도 빼지 않고 다 읽지요. 부고 기사를 읽는 게 나한테는 낙이에요. 특히 좋은 시가 같이 나와 있을 땐 반드시 읽죠. 여기 내가 고른 걸 하나 읽어봐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그녀는 조물주의 품으로 돌아갔네,
다시는 정처 없이 방황하지 않으리.
그녀에게도 즐겁게 노래하던 시절이 있었다네,
고향의 노래, 다정한 내 집의 노래를.

“대체 누가 이 섬에는 시에 재능 있는 사람이 없대요? 좋은 사람들은 다 세상을 떠나버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앤? 참 애석한 일이에요. 여기 부고란에 난 사람이 열 명인데 모두가 성자에다 귀감이 될 만한 사람들이에요. 남자들까지도 그래요. 피터 스팀슨 노인의 부고 기사를 좀 봐요, ‘떠나기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진 친구를 애도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세상에나, 앤, 이 사람은 나이가 여든이에요. 스팀슨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지난 30년 동안 그 사람이 죽는 날이 오길 기다렸지요. 마음이 울적할 땐 앤도 부고란을 읽어봐요. 잘 아는 사람의 부고 기사를 읽는 게 좋아요. 유머감각이 있다면 이런 기사를 읽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아진다니까요. 내 말을 믿어요! 몇 사람은 내가 직접 부고 기사를 써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부고’라는 말은 끔찍할 정도로 흉하지 않아요? 아까 말한 그 피터라는 사람 생긴 게 딱 그래요. 난 그 사람 얼굴을 볼 적마다 부고라는 말이 떠올랐어요. 부고보다 더 흉한 말이 딱 하나 있죠. ‘미망인’이요. 나는 노처녀라서 다행이에요. 적어도 난 그 어떤 남자의 ‘미망인’도 되지 않을 거 아니에요.”
“흉한 말이지요. 에이번리의 묘지에 가면 ‘누구누구의 추억에 바쳐진, 그 누구누구의 미망인’이라고 쓰인 묘비가 가득해요. 그걸 보면 항상 뭔가 낡아 빠지고 이끼가 잔뜩 낀 물건이 연상돼요. 죽음과 관련된 말은 왜 그렇게 불쾌한 것들이 많을까요? 시신을 ‘유해’라고 부르는 풍습도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장례식에서 장의사가 ‘유해를 보실 분들은 이쪽으로 나와 주세요.’ 하고 말하는 걸 들으면 소름이 돋는다니까요. 식인 잔치 장면을 보게 될 것 같은 끔찍한 인상을 주거든요.”
앤이 웃으며 말했다.
“난 말이죠.”
미스 코넬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죽으면 사람들이 날 ‘이제는 고인이 된 우리의 자매’라고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5년 전에 순회 전도사가 글렌에 와서 설교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 형제, 자매 운운하는 말에 반감을 품게 됐어요.
처음부터 그 사람을 싫어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내 뼛속 깊이 느껴지는 거예요. 그 예감은 맞았어요. 세상에나, 그 사람은 장로교인 행세를 했던 거였어요.
그 사람이 입으로는 ‘장로교인’이라고 했지만 감리교인이면서 그렇게 행세를 한 거지요. 모두가 자기 형제자매라고 하더군요. 흥, 그 사람은 친척이 참 많기도 하지.
하루는 내 손을 꽉 움켜잡고 애원을 하듯, ‘사랑하는 브라이언트 자매님,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하고 묻더군요. 난 잠시 그 사람을 쳐다보다 조용히 대답해줬죠. ‘피스크 씨, 제 하나밖에 없는 동생은 15년 전에 죽어 땅에 묻혔답니다. 그 이후론 형제자매라고는 하나도 없네요.

그리스도인이냐는 질문에는, 댁이 속옷만 입고 바닥을 기어 다닐 때도 그랬고, 그 이후에도 계속 그래 왔다고 믿죠.’ 그러니까 끽소리도 못 하더라고요.
아, 정말이에요! 내가 순회 전도사를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죄인의 마음을 움찔하게 만드는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들도 있죠.
하지만 피스크 전도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날 저녁에 혼자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피스크는 그리스도인은 모두 일어서라고 했지요. 난 일어나지 않았어요. 아, 정말이에요! 난 그런 건 정말 참을 수가 없어요. 하지만 사람들 대부분이 다 일어섰죠. 그러자 이번에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원하는 사람도 모두 일어서라고 하는 거예요. 그 말엔 아무도 반응을 하지 않자, 그 사람이 먼저 목소리를 높여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바로 내 앞에는 가엾은 꼬마 이키 베이커가 밀리손 집안 좌석에 앉아 있었어요. 이키는 열 살 먹은 아이인데 밀리손 집에서 죽도록 일을 시켰죠. 그 불쌍한 꼬마 아이는 언제나 피곤해서 교회에 오거나 어디서든 앉을 기회만 있으면 잠이 들었어요. 그날도 그 아이는 설교 내내 잠을 자고 있었어요. 난 그 가엾은 꼬마가 그렇게라도 쉬는 걸 다행이라고 여기고 감사를 드렸죠.
그런데 피스크의 목소리 톤이 갑자기 올라가고 사람들도 소리를 높여 노래를 불렀어요. 그 소리에 이키가 잠에서 깨어났어요. 그 아이는 평소같이 찬송가를 부르는 시간에는 모두 일어서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래서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거구요. 안 그러면 집회 때 잠이나 잤다고 마리아 밀리손에게 혼이 날 걸 알았으니까요.
피스크가 그 아이를 보고는 노래를 멈추고 소리쳤어요. ‘또 하나의 영혼이 구원받았습니다! 영광, 할렐루야!’ 그때까지 반쯤 잠이 깬 상태에서 하품을 하고 있던 이키가 그 소리에 깜짝 놀랐죠. 그 아인 자기 영혼 같은 건 생각해본 적도 없는 아인데 말이에요. 불쌍하게도 그 아이는 일을 너무 많이 해서 피곤한 작은 몸뚱이 외엔 아무것도 생각할 시간이 없었어요.
레슬리도 그 설교를 들으러 나간 적이 있는데 피스크가 레슬리를 내버려둘 리가 없죠. 그 사람은 특히 아름다운 여자의 영혼을 걱정했거든요. 아, 정말이에요! 하지만 레슬리 감정을 상하게 해서 레슬리가 다시는 그 집회에 가지 않았어요.
그 후 피스크는 사람들 앞에서 매일 밤 기도를 했어요. 주님이 레슬리의 괴팍한 마음을 녹여줄 거라나요. 그래서 난 결국 당시 우리 목사님인 리빗 씨를 찾아가서 피스크를 그만두게 하지 않으면 내가 행동에 나서겠다고 했어요. 그다음 날 밤 설교회에서 피스크가 다시 ‘아름답지만 회개하지 않는 젊은 여성’을 언급하기만 하면 내가 그에게 찬송가를 집어던지겠다고 말했지요. 난 그렇게 했을 거예요. 아, 정말이에요! 리빗 목사는 그렇게 조치했어요. 하지만 피스크는 찰리 더글러스가 나서기 전까지 글렌에서 계속 설교회를 열었어요.
찰리 부인은 겨울 내내 캘리포니아에 가 있었어요. 가을이면 언제나 우울해했거든요. 신앙적인 면에서 우울해했는데 그게 가족 내력이라네요. 그 부인 아버지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다고 믿어 결국은 보호시설에서 죽었거든요.
그래서 로즈 더글러스가 비슷한 증상을 보이자 찰리가 짐을 챙겨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동생네를 다녀오게 한 거예요. 로즈는 완전히 좋아져서 돌아왔죠. 바로 그때 피스크의 부흥 집회가 한창이었어요. 로즈가 글렌에 도착해 기분 좋게 웃으며 기차에서 내렸을 때 맨 처음 눈에 띈 게 뭐였게요. 창고 건물 까만 벽에 커다란 하얀 글씨로 쓰여 있는 질문이었어요. ‘당신은 어디로 가는가? 천국으로 아니면 지옥으로?’ 피스크가 낸 아이디어 중 하나였죠. 그 사람이 헨리 해먼드를 시켜 칠을 했어요.
로즈는 그걸 보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죠. 집으로 옮겨 왔을 때 로즈의 상태는 전보다 더 악화되어버렸지요.
찰리 더글러스는 리빗 목사에게 가서 피스크를 계속 데리고 있으면 더글러스 집안사람들이 모두 교회를 떠날 거라고 했어요. 더글러스 집안에서 목사 월급의 반을 내서 결국 리빗 목사는 그 청을 들어주어야 했죠.
그래서 피스크는 떠났고 우리는 천국에 가는 방법을 알려고 다시 성경책을 열심히 읽어야 했어요. 피스크가 떠난 후 리빗 목사는 그가 실은 감리교도였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굉장히 화를 냈어요. 아, 정말이에요! 리빗 목사는 조금 부족한 면이 있어도 아주 훌륭한 장로교도였거든요.”
“참, 어제 포드 씨에게서 편지가 왔어요. 미스 코넬리아에게 안부 전해달라고 했어요.”
앤이 말했다.
“그 사람 안부 전갈은 필요 없어요.”
미스 코넬리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요? 포드 씨를 좋아했잖아요?”
놀라서 앤이 말했다.
“어떤 면에서는 좋아했죠. 하지만 그 사람이 레슬리에게 한 짓을 난 결코 용서할 수 없어요. 레슬리 가슴을 찢어지게 했잖아요. 더 이상은 고통당할 가슴이 남지도 않은 사람을. 그 사람은 아마 토론토를 쏘다니며 이 일을 떠벌리고 다닐 거예요. 틀림없어요. 평소처럼 즐기며 살고 있을걸요. 사내들 하는 짓이야 뻔하잖아요.”
“아, 미스 코넬리아,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세상에, 앤. 나도 눈이 있어요. 그리고 난 레슬리를 아기 적부터 봐왔어요. 가을 내내 레슬리가 심상치 않게 가슴 아파하는 거 다 알았다고요. 난 어찌 되었든 그 작가 양반과 관계가 있다는 걸 알았죠.
그 사람을 여기로 데려온 사람이 바로 나라니,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어요. 하지만 그 사람이 그럴 줄은 몰랐어요. 그 사람도 레슬리가 하숙을 친 다른 남자들 같을 줄 알았거든요. 거만한 젊은 건달들 말이에요. 레슬리는 그 남자들을 하나같이 다 경멸했어요. 그중 하나가 레슬리에게 치근덕거린 적도 있었는데 레슬리는 아주 냉담하게 대했죠. 꽁꽁 얼어붙어서 다시 녹지 못할 정도로 말이에요. 그래서 난 그럴 염려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미스 코넬리아가 레슬리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내색은 하지 마세요. 그러면 상처받을 거예요.”
앤이 허둥거리며 말했다.
“날 믿어요, 앤. 내가 무슨 철부진 줄 알아요. 아, 남자들은 죄다 빌어먹을 것들이라니까! 하나가 레슬리의 인생을 망치더니 이젠 또 다른 놈이 와서 더 비참하게 했잖아요. 앤, 이 세상은 정말이지 너무 끔찍해요.”
“‘이 세상 잘못된 일은 모두 하나씩 하나씩 풀리리니.’”14)
꿈꾸는 것 같은 모습으로 앤이 읊조렸다.
“그런 일은 남자가 없는 곳에서나 가능해요.”
미스 코넬리아는 우울하게 말했다.

“그럼 남자들은 지금까지 뭘 했죠?”
길버트가 들어오면서 물었다.
“해악, 해악을 끼쳤죠. 그거 이외에 달리 뭘 했겠어요?”
“사과를 먹은 건 이브예요, 미스 코넬리아.”
“이브를 유혹한 피조물은 수컷이었고요.”
미스 코넬리아가 득의양양하게 응수했다.
한 차례 고통의 몸살을 앓고 난 레슬리는 다들 그러하듯 어떤 고난이 닥친다 해도 삶을 계속해 나갈 수는 있었다. 앤의 ‘꿈의 집’에서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는 그런 삶을 순간순간 즐길 수도 있었다. 앤은 레슬리가 오언 포드를 잊기 바랐지만, 오언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레슬리의 눈에서는 어김없이 은밀한 갈망의 빛이 보였다. 레슬리의 그런 마음을 딱하게 여긴 앤은 될 수 있으면 레슬리가 같이 있을 때 짐 선장이나 길버트에게 오언 소식을 전했다. 그럴 때마다 레슬리의 얼굴은 빨개지거나 창백해졌고, 그걸로 그녀를 채우고 있는 감정이 너무도 여실히 드러났다. 하지만 레슬리는 앤에게 한 번도 오언의 이야기나 그날 밤 모래톱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느 날 레슬리가 기르던 늙은 개마저 죽어 레슬리는 슬픔에 잠겼다.
“그 개는 오랫동안 내 친구였어요. 딕이 기르던 개였지요. 딕이 결혼하기 1년 전부터 그 개를 키웠는데 네 자매 호를 타고 바다로 나가면서 그 개는 남겨두고 갔죠.
카를로는 나를 무척 좋아했어요. 엄마가 돌아가시고 혼자되었을 때도 난 카를로 덕분에 그 끔찍한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어요. 딕이 돌아온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카를로가 나를 전같이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운마음마저 들었지요. 하지만 카를로는 그전처럼 딕을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어요. 딕이 그전에 카를로를 무척이나 아꼈는데도. 낯선 사람이라고 여겼는지 딕을 보고 으르렁거렸어요.
난 기뻤어요. 온전히 나만 사랑하는 존재가 있다는 게 참 좋았죠. 그 늙은 개는 정말 나에게 커다란 위안이었어요, 앤. 가을부터 카를로가 많이 약해져서 오래 살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두려웠어요. 하지만 겨우내 내가 잘 보살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오늘 아침엔 참 좋아 보였어요. 불 앞 바닥 깔개에 엎드려 있다가 갑자기 일어서서 내게 기어오더니 머리를 내 무릎에 놓고는 그 커다랗고 부드러운 눈에 사랑을 담아 나를 쳐다봤어요. 그러더니 몸을 부르르 떨고는 죽었어요. 카를로가 많이 그리울 거예요.”
슬픔에 잠긴 레슬리가 앤에게 말했다.
“내가 다른 개를 줄게요, 레슬리. 길버트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예쁜 고든세터 종 개를 주기로 했는데 레슬리에게도 한 마리 줄게요.”
앤이 말했다.
레슬리가 도리질했다.
“지금은 아니에요. 하지만 고마워요, 앤. 아직은 다른 개를 들이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 다른 개를 사랑해줄 여력이 없을 것 같아요. 나중에 때가 되면 한 마리 줘요.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한 마리는 있어야 해요. 하지만 카를로에겐 뭔가 사람 같은 면이 있었어요. 오래된 친구의 자리를 그렇게 황급하게 채우는 건 예의가 아니죠.”

크리스마스가 되기 한 주 전에 앤은 에이번리로 가서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 내내 그곳에 머물렀다. 나중에 길버트도 와서 ‘초록 지붕 집’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배리네, 블라이드네 그리고 라이트 집안사람들이 다 모여 린드 부인과 마릴라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크리스마스 정찬을 즐겼다.
포 윈즈로 돌아와 보니 작은 집은 그해 겨울 세 번째로 불어 닥친 폭풍의 여파로 거의 떠내려갈 지경이 되어 있었다. 항구를 온통 거센 바람이 휩쓸었고 눈도 엄청나게 많이 내려 모든 것이 눈으로 뒤덮였다. 그러나 짐 선장이 집 입구와 길가 눈을 삽으로 치워냈고 미스 코넬리아는 벽난로에 불을 지펴놓았다.
“앤이 돌아와서 기뻐요! 그런데 이렇게 엄청나게 쌓인 눈 봤어요? 2층으로 올라가서 보지 않으면 무어네 집은 보이지도 않아요. 앤이 돌아와서 레슬리도 기뻐할 거예요. 눈 때문에 집 안에서 거의 산 채로 파묻힌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딕이 삽으로 눈을 치울 줄 알고 또 그걸 재미삼아 해서 다행이었지요. 수잔이 내일쯤 올 거라고 전해달래요. 지금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선장님?”
“눈밭을 헤치고라도 글렌 마을 마틴 스트롱네에 잠시 들렀다 와야겠어. 그 사람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외로워하거든. 친구도 많지 않고 친구 사귈 틈도 없이 너무 바쁘게만 살았어. 그래서 돈은 많이 벌었지.”
“하느님과 마몬을 함께 섬길 수는 없으니15), 마몬을 섬기며 사는 쪽을 선택한 사람이에요. 그러니 이제 와서 마몬이 좋은 친구가 돼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면 안 되죠.”
미스 코넬리아가 화통하게 말했다.
짐 선장이 나가다가 뜰에서 뭔가가 기억난 듯 되돌아왔다.
“오언에게서 편지가 왔어요, 블라이드 부인. 인생 일지가 내년 가을에 책으로 출판될 거라고 하네요. 그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뻤어요. 드디어 책이 되어 나온다니…….”
“아무튼 그 책 이야기만 나오면 너무 열광하신다니까. 내가 볼 땐 이 세상엔 이미 책이 너무도 많구먼.”
미스 코넬리아가 안됐다는 듯 말했다.
14.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Lord Tennyson, 1809~1892)의 <방앗간 집 딸(The Miller’s Daughter)>의 구절.
15. 마몬(Mammon)은 마태복음 6장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여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느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는 말씀 중에 나오는 재물의 신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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