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5권 29~30

나단비 | 2024.04.07 17:41:24 댓글: 0 조회: 53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9296
29
길버트와 앤이 의견을 달리하다






3월의 어느 날 저녁, 길버트는 점점 짙어가는 땅거미에 열심히 보던 묵직한 의학 학술서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생각에 잠겨 창밖을 바라보았다.
초봄, 아마도 일 년 중 세상이 가장 지저분해지는 때일 것이다. 생기 없이 눅눅한 풍경과 얼음이 녹아 시커멓게 변한 항구의 모습은 저녁노을로도 그 지저분한 꼴을 감추지 못했다.
혼자 외로이 시든 들판을 날아가는 커다란 검은 까마귀를 제외하고는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길버트는 멍하니 그 까마귀를 응시했다. 저 까마귀에게도 가족이 있을까? 글렌 너머에 있는 숲에서 예쁜 아내가 저 까마귀를 기다리고 있을까? 연애를 걸어보려는 젊은 멋쟁이 까마귀는 아닐까? 혼자 여행하는 까마귀 중에 자기가 제일 빨리 난다고 생각하는 냉소적인 독신 까마귀인가?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그 까마귀는 곧 어두컴컴한 곳으로 사라져버렸고 길버트는 좀 더 밝고 명랑한 실내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벽난로 불빛에 고그와 매고그가 흰색과 초록색으로 반짝였고, 갈색의 날씬한 세터 종 개가 깔개 위에 앉아 불을 쬐었으며, 벽에는 그림이 걸려 있고, 꽃병에는 정원에서 꺾어 온 수선화가 가득 꽂혔다.
앤은 작은 탁자 옆에 앉아 있었다. 옆에는 바느질거리가 놓여 있고 두 손은 무릎을 꼭 움켜쥔 채 불빛 속에서 펼쳐지는 상상의 풍경을 좇고 있었다.
스페인 성의 망루는 달빛을 받은 구름을 뚫고 하늘 높이 솟아 있고, 해 질 녘의 모래톱에는 희망봉에서 보물을 가득 싣고 항해해 온 배가 포 윈즈 항구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불길한 공포가 밤낮 없이 앤의 꿈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가운데서도 앤은 꿈꾸기를 멈추지 않았다.
길버트는 스스로를 점점 더 스스럼없이 ‘나이 든 유부남’이라고 칭했다. 하지만 의심스러운 연인의 눈으로 앤을 관찰하는 것은 여전했다. 아직까지도 길버트는 앤이 온전히 자기 사람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이 마법 같은 ‘꿈의 집’이 그저 꿈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법이 풀리고 꿈이 사라져버리지 않게 하려는 듯 그의 영혼은 여전히 앤 앞에서는 발뒤꿈치를 들고 다녔다.
“앤, 할 얘기가 있어.”
길버트가 천천히 말했다.
앤이 건너편 길버트를 쳐다봤다. 불빛으로 눈이 부셨다.
“왜? 뭐가 그렇게 심각해, 길버트. 나 오늘은 못된 장난 안 쳤어. 수잔에게 물어봐.”
앤이 명랑하게 말했다.
“당신이나 우리 이야기가 아니야. 딕 무어에 관한 거야.”
“딕 무어? 무슨 얘기? 당신이 딕 무어에 관해 할 이야기가 대체 뭐야?”
재빨리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하는 앤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요즘 들어 그 사람 생각을 많이 했어. 여름에 내가 딕의 목에 난 종기를 치료해준 일 기억해?”
“응, 기억해.”
“그때 그 사람 머리에 난 상처를 꼼꼼히 살펴봤거든. 딕 무어는 의학적 견지에서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환자야. 최근 들어 뇌 수술의 역사와 뇌 수술을 받은 환자 사례를 공부하고 있는데 딕 무어를 좋은 병원에 데려가 두개골 몇 군데를 천공해 수술을 받게 하면 그 사람 기억과 기능을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몰라.”
“길버트!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 아니지?”
앤이 따지듯 물었다.
“진심이야. 레슬리하고 이 일을 의논해봐야겠어.”
“길버트 블라이드, 당신 그러면 안 돼. 아, 절대 그래선 안 돼, 길버트. 그렇게 잔인하게 굴면 안 된다고. 그런 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앤이 격앙되어 소리쳤다.
“아니, 앤 아가씨, 당신이 이런 식으로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이성적으로 굴어.”
“아니, 이성적으로 굴지 않을 거야. 도저히 이성적일 수 없어. 아니, 아니야. 난 이성적으로 굴고 있어. 비이성적인 건 길버트 당신이야. 딕 무어가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게 레슬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봤어? 제발 그런 생각 그만두고 진지하게 생각 좀 해봐. 레슬리는 지금도 불행해. 하지만 딕을 돌보며 사는 게 그 사람 아내로 사는 것보다 천 배는 나아. 난 알아. 안다구!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야. 그 문제에 관여하지 마. 그냥 내버려두라고.”
“딕의 상태에 관해 여러 각도에서 고심해봤어, 앤. 무엇보다도 의사가 할 일은 환자의 몸과 마음을 지키는 신성한 의무를 다해야 하는 거잖아. 수술 결과가 어떻게 나온다 해도,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다면 딕에게도 건강과 정신을 회복하려고 최선을 다 해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딕은 당신 환자가 아니잖아. 레슬리가 먼저 딕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런 생각을 말해주는 게 의사로서의 의무겠지. 하지만 당신이 먼저 간섭할 권리는 없어.”
앤이 다른 방식으로 공격했다.
“난 그걸 간섭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데이비드 큰할아버지가 12년 전에 레슬리에게 딕을 위해 할 수 있는 치료 방법이 없다고 말했어. 레슬리는 당연히 그 말을 믿었지.”
“그게 사실이니까 데이비드 큰할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셨겠지. 그분도 당신만큼 딕의 상태를 알고 계실 거 아냐?”
앤이 득의양양하게 소리쳤다.
“자만하고 주제 넘는 소리같이 들릴 수도 있지만 큰할아버지는 모르고 계셔. 새로 유행하고 있는 ‘자르고 베어내는 수술’에 편견을 갖고 계시다고. 큰할아버지는 심지어 맹장 수술도 반대하시는걸.”
“큰할아버지 말씀이 맞아. 난 당신 같은 요즘 젊은 의사들이 사람 몸을 이용해서 실험하기를 너무 좋아한다고 생각해.”
앤은 여전히 공격적으로 몰아붙였다.
“내가 그런 실험을 두려워했으면 로다 엘론비는 오늘 살아 있지도 못했을 거야. 난 위험을 감수했고 그래서 엘론비 부인의 생명을 구했어.”
길버트가 주장했다.
“로다 엘론비 이야기 듣는 거 정말 지겨워.”
앤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건 길버트에게는 너무도 부당한 처사로, 그가 실험적인 시술로 엘론비 부인의 목숨을 구하고 온 날을 제외하고는 그 부인의 이름을 다시 입 밖에 낸 적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하는 거야 길버트 탓도 아니지 않은가.
이 일로 길버트는 약간 상처를 받았다.
“당신이 그 문제를 그런 식으로 보는지 몰랐어, 앤.”
길버트가 일어서서 진료실 문 쪽으로 걸어가며 좀 무뚝뚝하게 말했다. 앤과 길버트가 처음으로 말다툼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앤이 날 듯 길버트의 뒤를 쫓아 다시 끌고 왔다.
“길버트, 그렇게 화를 내며 가버리면 안 돼. 여기 앉아 내가 아주 정중하게 사과할 테니 내 말을 들어줘.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 하지만, 아, 당신도 알잖아.”
앤은 순간적으로 자신을 제어했다. 아차 했으면 레슬리의 비밀을 밝혀버릴 뻔했다.
“난 여자의 마음을 안다고.”
앤은 불안한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나도 알아. 그 문제를 여러 가지 견지에서 생각해봤는데 레슬리에게 딕이 정상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고 말해주는 게 나의 의무라는 결론을 내렸어. 내가 할 일은 거기까지야. 그다음에 어떻게 할지는 레슬리가 결정해야 하는 거야.”
“난 당신이 레슬리에게 그런 책임감을 지울 권리가 없다고 생각해. 레슬리는 참을 만큼 참았어. 또 가난해. 어떻게 그런 수술비용을 감당할 수 있겠어?”
“그것도 레슬리가 결정할 일이야.”
길버트가 고집스럽게 주장했다.
“당신은 정말로 딕이 나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거야?”
“확신은 못 해. 그런 일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뇌 자체에 상처를 입었거나 뇌에 이상이 있다면 치료가 불가능해. 하지만 내 생각에 딕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기억을 잃어버린 원인은 두개골이 함몰되어 그게 뇌에 압력을 가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 그런 경우라면 고칠 수도 있어.”
“하지만 그저 가능성일 뿐이잖아! 레슬리에게 말해서 그 수술을 시키기로 한다고 가정해 봐. 돈이 무지 많이 들 텐데 그러면 돈을 빌리거나 그 얼마 안 되는 재산인 집을 팔아야 할 거야. 그런데 수술이 실패해서 딕이 여전히 똑같은 상태로 남게 된다면, 빌린 돈은 어떻게 갚을 것이며 또 농장을 팔면 레슬리가 그 덩치만 크고 무력한 사람을 데리고 어떻게 먹고살아?”

“아, 나도 알아, 안다구. 하지만 레슬리에게 말은 해야 해. 그게 내 의무야. 내 신념을 저버릴 수 없어.”
“그래, 블라이드 집안 고집은 알아줘야지. 하지만 혼자 책임지려 하지 말고 데이비드 큰할아버지께 조언을 구해봐.”
앤이 투덜거렸다.
“벌써 말씀드렸어.”
길버트가 주저하며 대답했다.
“뭐라고 하셨는데?”
“간단히 말해서, 당신 생각이랑 비슷해. 그냥 내버려두라고 하셔. 큰할아버지는 새로운 외과 수술 방식에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만 아니라 이 문제를 당신 같은 관점에서 보고 계시거든. ‘하지 마라, 레슬리를 위해서 말이다.’ 이런 식이셨어.”
“그것 봐. 난 당신이 수많은 생명을 구한 노(老) 의사의 판단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저 평범한 청년의 의견보다는 당연히 그분 의견에 더 무게를 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앤이 의기양양해하며 소리쳤다.
“고마워.”
“웃지 마. 아주 심각하단 말이야.”
“그래, 바로 그거야. 이건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 이 남자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짐만 되고 있어. 그런데 그 사람이 제정신을 찾고 인간으로서 제 구실을 하게 될지도 몰라.”

“그 남자는 전에도 아주 쓸모없는 사람이었어.”
앤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그 사람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갖게 될지도 몰라. 그 사람 아내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지만 난 알아. 그러니까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해. 그게 내 결정이야.”
“‘결정’이라는 말은 아직 하지 마, 길버트. 그러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 짐 선장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라고.”
“좋아. 하지만 그분 의견에 따르겠다는 약속은 할 수 없어, 앤. 이건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문제야. 이 문제에 침묵하면 내 양심이 결코 편하지 않을 거야.”
“아, 그래, 당신의 양심! 데이비드 큰할아버지도 양심은 있어, 그렇지?”
앤이 한탄했다.
“그래. 하지만 난 큰할아버지의 양심을 지키는 파수꾼이 아냐. 자, 앤. 이 문제가 레슬리랑 관련된 게 아니라 당신이 잘 모르는 환자였다면 당신도 내 의견에 동의했을 거야. 그렇지?”
“아니. 밤새도록 이 문제로 논쟁해도 좋아, 길버트. 하지만 날 설득하지는 못할 거야. 미스 코넬리아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번 물어봐.”
스스로 그렇다는 걸 믿으려 노력하며 앤이 단언했다.
“미스 코넬리아까지 끌어들이다니, 앤, 정말 마지막까지 몰렸구나. 코넬리아야 ‘사내들 하는 짓이 다 그렇지, 뭐.’ 하면서 불같이 화를 내겠지. 상관없어. 이건 미스 코넬리아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니까. 레슬리가 결정해야 해.”
“레슬리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잘 알잖아? 레슬리도 자기의 의무를 저버리지 못하는 숭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야. 어떻게 그런 책임을 레슬리의 어깨에 지우려는지 난 이해가 안 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거의 눈물을 흘리다시피 하며 앤이 말했다.

“옳은 것이 옳기 때문에 옳을 일을 따르는 것은
그 결과로 멸시를 받는다 해도 지혜로운 일이다.”

길버트가 테니슨의 말을 인용했다.
“지금 시로 설득력 있는 논쟁을 벌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사내들 하는 짓이 다 그렇지.”
앤은 이런 조롱하는 말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말해놓고 앤은 마구 웃었다. 말해놓고 보니 꼭 미스 코넬리아의 메아리같이 들렸다.
“흠, 당신이 테니슨의 권위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그보다 더 위대한 분의 말씀은 믿겠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16)난 이 말씀을 믿어. 진심으로. 이 말이야말로 성경은 물론이고 다른 모든 문헌을 통틀어서 가장 위대하고 가치 있는 말이야. 진실 중에서도 가장 진실한 말이지. 사람은 자기가 진실이라고 알고 있으면 그 말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거라고.”
이렇게 말하는 길버트는 무척이나 심각했다.

“이 경우엔 진리가 가엾은 레슬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할 거야. 결국 레슬리에게 비통함만 더 안겨주고 끝나겠지. 아, 길버트, 난 도저히 당신이 옳다고 생각할 수 없어.”
앤은 한숨을 쉬었다.
16. 요한복음 8장 32절.





30
레슬리의 결심






갑작스럽게 글렌과 어촌 마을에 전염성이 강한 독감이 도는 바람에 길버트는 그 후 2주일 내내 분주했고 그 때문에 약속한 대로 짐 선장을 만나러 갈 시간도 내지 못했다. 앤은 길버트가 딕 무어를 수술해 고칠 생각을 포기하고 잠자는 개를 그냥 내버려두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래서 그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지만 머릿속에는 늘 그 생각이 남아 있었다.
‘레슬리가 오언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길버트에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오언은 레슬리가 자길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해서 레슬리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했는데, 이런 사실을 모두 길버트에게 털어놓으면 딕 무어를 그냥 내버려둘지도 몰라. 그래야 할까? 정말 그래야 하나? 아니, 아냐. 난 못 해. 약속은 신성한 거고 내가 레슬리의 비밀을 발설할 권리는 없어. 하지만 아,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걱정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이런 걱정으로 봄을 망쳐버리고 있어. 모든 걸 망치고 있어.’
앤은 생각했다.
어느 날 저녁, 길버트가 갑작스럽게 짐 선장을 만나러 가자고 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앤은 따라나섰다. 2주 동안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어 까마귀가 날았던 황량한 풍경에 기적을 일으켰다.
언덕과 들판은 건조하고 시들었지만 따뜻한 햇살에 새싹을 틔워 만개할 준비가 되었다. 항구는 다시 웃음으로 가득했고 길고 긴 항구 길은 빛나는 빨간 리본 같았으며 모래 언덕 너머에는 빙어를 잡으러 나온 아이들이 작년 여름에 났던 무성한 마른 잔디를 태우고 있었다.
어두운 바다를 배경으로 그 불꽃은 모래 언덕을 휩싸고 붉은 현수막 같은 장밋빛 연기를 날리며 해협과 어촌 마을을 밝혔다.
다른 때 같았으면 앤의 마음을 즐겁게 해줄 그림 같은 풍경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심정이 아니었다. 길버트라고 다르지 않았다. 아쉽게도 둘은 지금 언제나 돈독했던 동지애나 요셉을 아는 종족의 일원으로 함께 나누던 견해나 취향이 모두 결여된 상태였다.
앤은 도도하게 머리를 꼿꼿이 들고 부자연스럽게 공손한 태도를 보여 자신이 이 문제에 전적으로 반대한다는 의사를 강하게 표시했고, 길버트는 블라이드 집안사람다운 완고함으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지만 눈에는 근심이 서려 있었다. 길버트는 자신이 의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 일로 앤과 이렇게 다투게 되었고 그 대가는 너무 혹독했다.
등대에 도착하자 둘 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는데 그런 반가운 마음에도 마음이 아팠다.
짐 선장은 손질하고 있던 그물을 치우고 반갑게 앤과 길버트를 맞았다. 봄날 저녁 등대의 탐색등 불빛에 비친 짐 선장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머리카락은 더욱 희었고 강인하지만 늙은 손은 약간 떨렸다. 하지만 그의 푸른 눈만큼은 맑고 한결같아 용감하고 두려움 없는 짐 선장의 영혼이 그 눈을 통해 드러났다.
짐 선장은 길버트가 이야기하는 동안 너무 놀라서 아무 말 없이 그저 조용히 듣기만 했다. 짐 선장이 얼마나 레슬리를 아끼는지 잘 알고 있는 앤은 그가 자기편에 설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다고 길버트의 마음이 달라질 거란 기대는 하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짐 선장이 천천히 슬픈 목소리로, 하지만 망설임 없이 길버트와 마찬가지로 레슬리에게 그 일을 알려줘야 한다고 하자 앤은 적잖이 놀랐다.
“아니, 짐 선장님, 선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레슬리에게 해가 될 만한 일은 벌이지 않으실 거라 생각했다고요.”
앤이 비난조로 소리쳤다.
짐 선장이 도리질을 쳤다.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아요. 블라이드 부인이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지 잘 압니다. 나도 그렇게 똑같이 느껴요. 하지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감정을 앞세울 수는 없어요. 그렇게 살면 우린 너무 자주 좌초하게 될 겁니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고 우린 그걸 보며 갈 길을 정하죠. 그게 옳아요. 난 의사 선생 말에 동감합니다. 딕에게 기회가 있다면 레슬리에게 그걸 알려줘야 해요. 이런 중대한 일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어요.”
“좋아요, 그럼 미스 코넬리아가 두 분을 공격하러 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절망에 빠진 앤이 포기하듯 말했다.
“코넬리아는 우릴 질타하고 흔들어대겠죠. 틀림없어요. 여자들은 참 사랑스러운 존재지요. 하지만 논리적이지 못한 면이 있어요. 부인은 교육을 많이 받았고 코넬리아는 그렇지 않지만, 그 점에서는 둘이 똑같잖아요. 부인이 더 심한지도 모르지요. 논리라는 게 때론 무정하고 잔인한 면이 있거든요. 자, 이제 차를 끓일 테니 마시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즐거운 이야기를 하도록 합시다.”
짐 선장이 끓여온 차와 대화로 앤의 마음도 어느 정도 진정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마음먹었던 것만큼 길버트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다. 앤은 더 이상 이 중대한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고, 다른 일로는 싹싹하게 말을 걸기까지 했다. 그래서 길버트는 자신이 마지못해 용서를 받았음을 알게 됐다.
“이번 봄 들어 짐 선장님이 많이 약해지고 허리도 많이 굽은 것 같아. 겨우내 부쩍 나이 드신 게 보여. 곧 잃어버린 마거릿을 찾으러 떠나시는 건 아닌지 걱정돼. 생각만 해도 무서워.”
앤이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짐 선장님이 ‘항해를 떠나면’ 포 윈즈도 예전 같지 않겠지.”
길버트도 동의했다.
그다음 날 저녁, 길버트는 개울 너머 레슬리네 집으로 갔다. 길버트가 돌아올 때까지 앤은 우울하게 이리저리 집 안을 배회했다.
“레슬리가 뭐래?”
길버트가 들어오자 앤은 다그치듯 물었다.
“거의 말이 없었어. 아마 좀 놀란 것 같아.”
“수술을 받게 하겠대?”

“좀 생각해보고 곧 결정을 내리겠대.”
길버트는 피곤한 듯 벽난로 앞의 안락의자에 몸을 던졌다. 피곤해 보였다. 레슬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길버트로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기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를 깨닫는 순간 레슬리의 눈에는 두려움이 어렸다. 그런 레슬리를 보아야 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고 길버트는 자신의 판단과 지혜에 대한 의구심에 휩싸여 괴로웠다.
앤은 가책을 느끼며 길버트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길버트 옆 바닥깔개에 앉아 자신의 윤기 나는 탐스러운 빨간 머리를 그의 팔에 기댔다.
“길버트, 내가 이 문제에 좀 못되게 굴었어. 이젠 안 그럴게. 나를 빨간 머리라고 욕하고 나를 용서해줘.”
길버트도 이해했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러게, 내가 뭐랬어.’라는 말은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래도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피상적으로 볼 때 의무라는 것은 참 명확하지만 그걸 구체적으로 실행할 때는 문제가 달라진다. 그것도 의무를 행해야 할 사람이 한 여자의 피폐해진 눈을 똑바로 보아야 할 경우에는.
직감적으로 앤은 며칠 동안 레슬리를 보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3일 후 저녁때쯤 레슬리가 앤의 집에 찾아와서 길버트에게 마음을 정했다고 말했다. 레슬리는 딕을 몬트리올로 데려가 수술을 시키겠다고 했다.
레슬리는 아주 창백했고 예전처럼 무관심의 껍질로 다시 자신을 감싼 듯 보였다. 하지만 길버트를 괴롭게 했던 눈빛은 사라졌다. 레슬리의 눈은 차갑게 빛났으며 사무적인 태도로 또박또박 자질구레한 일들을 의논해왔다. 레슬리는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얻은 후에 집으로 돌아갔다. 앤은 레슬리를 배웅해주고 싶었다.

“안 그러는 게 좋겠어요. 비가 와서 땅이 질척해요. 잘 있어요.”
레슬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친구를 잃은 걸까? 수술이 성공해서 딕 무어가 원래의 모습을 찾으면 레슬리는 외딴 영혼의 은둔처로 숨어버려 다시는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
앤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마 딕을 떠나겠지.”
길버트가 말했다.
“레슬리는 절대 그러지 않을 거야, 길버트. 의무감이 너무 강하거든. 레슬리 할머니인 웨스트 부인은 어떤 일이든지 책임을 맡으면 그 결과가 무엇이든 절대로 그 책임을 기피해서는 안 된다고 레슬리를 가르쳤대. 바로 그게 레슬리에게는 절대로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의 원칙이야. 너무 구세대적인 발상이지 뭐야.”
“너무 신랄하게 굴지 말라고, 앤 아가씨. 그게 구세대적인 생각이 아니라는 건 당신이 더 잘 알잖아. 당신도 맡은 책임감의 신성함에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래, 그 말이 맞아. 현대인이 겪는 삶의 저주는 바로 그 책임감을 회피하는 데서 나오지. 이 세상에 들끓고 있는 모든 불안과 불만족을 잉태하게 만든 거라고.”
“감동적인 설교군.”
앤은 길버트의 말을 조롱하긴 했지만 그러면서도 실은 길버트의 생각이 맞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레슬리 생각을 하니 마음이 너무도 아려왔다.
한 주가 지난 후 미스 코넬리아가 앤의 작은 집에 쏟아져 내리는 산사태처럼 들이닥쳤다. 길버트는 나가고 없었고 앤 혼자 그 공격을 감수해야 했다.
미스 코넬리아는 모자를 채 벗기도 전에 포문을 열었다.
“앤, 블라이드 선생님이 레슬리에게 딕을 치료할 수 있다고 했고 그래서 레슬리가 딕을 몬트리올로 데려가 수술을 받게 하기로 했다는 거 사실이에요? 하,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처사예요. 난 블라이드 선생님이 점잖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일을 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구요.”
흥분한 미스 코넬리아가 격렬하게 말했다.
앤이 결연하게 대꾸했다.
“길버트는 의사로서 딕이 나을 희망이 있다는 걸 레슬리에게 말해주는 게 의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리고 길버트를 도와주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리고 저도 그 생각에 동의해요.”
“아, 앤이 그래서는 안 돼요. 연민이 뭔지 아는 사람은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어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짐 선장님도 동의하셨어요.”
“그 늙은 영감님 이야기는 하지도 말아요. 그리고 난 누가 그 양반이랑 의견을 같이하든지 상관 안 해요. 이게 그 가엾고 짓밟힌 레슬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해야죠.”
미스 코넬리아가 소리쳤다.

“우리도 생각해요. 하지만 길버트는 의사라면 그 어떤 것보다 환자의 몸과 마음의 안녕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믿어요.”
“사내들이 다 그렇지, 뭐. 하지만 난 앤은 좀 다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분노라기보다는 슬픔을 머금고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그러고는 앤이 길버트를 공격할 때 들먹이던 문제로 앤을 향해 다시 포문을 열었다. 앤은 길버트가 자신을 보호하려고 사용했던 무기로 용감하게 남편을 변호했다. 싸움은 길었지만 마침내 미스 코넬리아도 끝을 냈다.
“이건 정말 간악스러울 정도로 부끄러운 일이야. 정말 너무 사악해. 아, 불쌍한 레슬리!”
미스 코넬리아가 거의 울다시피 하며 단언했다.
“딕의 입장도 조금은 생각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으세요?”
앤이 애원했다.
“딕! 딕 무어! 그 사람은 충분히 행복해요. 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행동거지도 바르고 평판도 좋다고요. 그 사람은 원래 술고래고, 아니, 그보다 더 못한 인간이었어요. 그런 사람을 다시 고쳐서 망나니짓이나 하며 살게 하자는 거예요?”
“변할지도 모르잖아요.”
앤은 밖으로는 적이 되고 안으로는 배반자가 되어 말했다.
“차라리 앤 할머니를 바꾸는 게 나을걸요! 딕 무어는 술 마시고 싸우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그렇게 돼도 싸요. 벌을 받은 거라고요. 난 하느님이 내린 천벌에 의사 선생님이 끼어들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미스 코넬리아가 쏘아붙였다.
“딕이 어떻게 다쳤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미스 코넬리아. 술 마시고 싸우다가 그런 게 아니라 길에서 노상강도를 만나 그렇게 된 건지도 모르잖아요.”
“돼지에게 피리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도 안 되는 얘기예요. 하지만 앤이 내게 지금 하는 말은 이 문제는 이미 결정이 되었고 더 이상 떠들어 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거 아니에요? 그렇다면 나도 잠자코 있지요. 내가 이를 갈아봐야 뾰족한 수도 없을 테니. 일이 그렇게 되는 게 순리라면 나도 따라야지요. 하지만 일이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하는 건지 아닌지는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고요. 자, 그럼 이제 난 힘을 아꼈다가 레슬리를 위로하고 도와주는 데 써야겠어요. 또 알아요, 딕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
미스 코넬리아가 기분을 추스르고 밝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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