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5권 33~34

나단비 | 2024.04.07 17:48:55 댓글: 0 조회: 51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9298
33
레슬리가 돌아오다






2주가 지난 후 레슬리 무어는 홀로 쓰디쓴 세월을 보냈던 그 낡은 집으로 돌아왔다. 유월의 황혼녘에 레슬리는 들판을 지나 앤의 집으로 향했고, 유령처럼 갑자기 향기로 가득한 정원에 나타났다.
“레슬리!”
앤이 놀라서 소리쳤다.
“어디서 나타난 거예요? 오는 줄 몰랐어요. 왜 편지 안 했어요? 그럼 마중 나갔을 텐데.”
“편지를 쓸 수가 없었어요, 앤. 펜과 잉크로 할 만한 얘기들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조용히 사람들 모르게 돌아오고 싶었죠.”
앤은 레슬리를 안아 입을 맞추어주었고 레슬리도 따뜻하게 앤에게 입맞춤을 했다. 레슬리는 창백했고 피곤해 보였다. 옅은 은빛 황혼 속에 빛나는 황금빛 별 같은 수선화 화단 옆 풀밭에 앉으며 레슬리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돌아왔어요, 레슬리?”

“네. 조지 무어의 누님이 몬트리올로 와서 그 사람을 데려갔어요. 불쌍한 사람, 나랑 헤어지기가 싫은 모양이더라고요. 다시 기억을 찾았을 때 난 그에게 완전히 낯선 사람이었지만요. 깨어나서 처음 며칠 동안은 내게 무척 의지했어요. 모든 일이 전부 어제 일 같기만 한데 엄청나게 변해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죠. 딕이 죽은 게 어제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기도 힘든 모양이더라고요. 나도 할 수 있는 한은 그 사람을 도와줬어요. 그리고 그 사람 누님이 찾아왔을 땐 많이 나아졌죠. 누님을 마지막으로 본 것도 바로 며칠 전 일로 느껴지는 모양이더라고요. 다행히 누님이 변하지 않아서 조지에게는 다행이었어요.”
“참 이상하고도 놀라운 일이에요, 레슬리. 아무도 이 일을 실감하는 사람이 없어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한 시간 전에 집에 들어갔을 때 이게 꿈이지 싶었어요. 예전처럼 딕이 어린애 같은 미소를 지으며 집 안에 있을 것만 같았어요. 나도 아직까지도 정신이 없어요. 하지만 이 일로 기쁘지도 유감스럽지도 않아요. 그저 내 삶에서 갑자기 뭔가가 떨어져 나갔고 무서운 구멍만 남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는데 아직 거기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라고나 할까…… 너무도 외롭고, 놀랍고 그래서 어찌해야 할지 당황스럽기만 해요. 앤을 다시 만나서 기뻐요. 앤은 내 표류하는 영혼이 닻을 내릴 수 있는 자리예요. 아, 앤, 사람들이 놀라며 뒷공론을 해대고 또 마구 질문을 쏟아 부을 걸 생각하니 너무 두려워요. 차라리 집에 오지 않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기차역에서 데이비드 의사 선생님을 만났어요. 그분이 집까지 데려다 주셨죠. 가엾은 분, 오래전에 딕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 걸 너무도 미안해하셨어요. ‘난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 레슬리. 하지만 내 의견만 듣지 말고 그 분야 전문가에게 물어보라고 했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그 긴 세월을 그렇게 힘들게 보내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조지 무어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데이비드 의사 선생님은 내게 항상 친절하게 대해주셨어요. 그분이 이 문제로 근심하는 건 원치 않아요.”
“딕, 그러니까 조지는, 그 사람은 기억이 완전히 회복된 거예요?”
“네, 그래요. 물론 아직 자세한 부분은 잘 기억하지 못해요. 하지만 매일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고 있어요. 딕을 묻어주고 난 후 저녁에 산책을 나갔대요.
조지는 딕의 돈을 갖고 있었고, 내 편지랑 그 돈을 내게 가져다주려고 했대요. 조지가 선원들이 드나드는 곳에 가서 술을 마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다음엔 아무런 생각이 안 난다고 하더군요.
앤, 난 조지가 자기 이름을 기억해내던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분명 정신은 멀쩡한데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봤어요. 내가 ‘나를 알아보겠어요, 딕?’ 하자, 그 사람은 ‘난 당신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당신은 누구요? 그리고 내 이름은 딕이 아닙니다. 난 조지 무어예요. 딕은 어제 황열병으로 죽었어요! 여기가 어딥니까?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하는 거예요. 난 기절할 뻔했어요, 앤. 그때부터 내내 이게 꿈이 아닌가 싶었죠.”
“조금만 있으면 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게 될 거예요. 레슬리는 아직 젊고 앞날이 창창해요. 아름다운 시절을 누리게 될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삶을 그렇게 볼 수 있겠죠. 지금은 미래를 생각하는 게 너무 피곤하고 또 관심도 없어요, 앤. 난, 난 외로워요, 앤. 난 딕이 그리워요. 정말 너무 이상하지 않아요? 그거 알아요? 내가 딕, 아니 조지를 정말 좋아했었다는 거. 나에게 모든 걸 의지하는 무력한 아이를 좋아했던 것처럼 그렇게 조지를 좋아했어요. 그걸 절대 인정하지 않았지만요.
참 부끄러워요. 왜냐하면 딕이 떠나기 전에 난 그 사람을 정말 미워하고 경멸했거든요. 짐 선장님이 그 사람을 집으로 데려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난 딕에게 감정이 여전히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렇지가 않더군요. 물론 그 사람의 예전 모습이 생각나고 여전히 혐오감이 들긴 했지만 막상 집에 데려오자 그저 불쌍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그 불쌍하다는 감정이 나에게 상처와 고통을 줬죠. 그땐 그저 사고로 그 사람이 그렇게 무력해져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거라고 여겼어요.
하지만 지금 보니 전혀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에요. 카를로는 그 사실을 알았어요, 앤. 카를로가 딕을 대하는 태도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는데, 개는 보통 아주 충직한 동물이잖아요. 우리는 몰랐지만 카를로는 돌아온 사람이 자기 주인이 아니라는 걸 알았던 거예요.
난 조지 무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어요. 지금 기억나는 게, 딕이 언젠가 노바스코샤에 자기랑 쌍둥이처럼 닮은 사촌이 있다는 말을 지나가면서 한 번 한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 말은 곧 잊어버렸죠. 그리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 사람이 딕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못했어요. 그 사람 외모가 변한 건 다 그저 사고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아, 앤. 그 4월의 어느 날 밤, 블라이드 선생님이 찾아와 딕이 나을 수도 있다고 말했던 날, 난 그날을 결코 잊을 수 없어요. 난 그동안 끔찍한 고문을 당하며 우리에 갇혀 살다가 풀려난 죄수 같은 기분으로 살았거든요. 여전히 우리에 달린 쇠사슬에 묶여는 있지만 그 안에 갇히지는 않은 채로.
그런데 그날 밤 무자비한 손이 나를 다시 그 우리로, 전보다 더 끔찍한 고문을 가하려고 끌고 들어가는 것 같았어요. 블라이드 선생님을 비난하지는 않았어요. 블라이드 선생님은 옳은 일을 한 것뿐이거든요. 그리고 참 친절하게 대해줬어요. 수술비용이 걱정되거나 불확실한 수술 결과 때문에 고민이 된다면 위험을 감수하지 말라고 했어요.
블라이드 선생님은 나를 전혀 비난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난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도저히 그 문제에 정면으로 맞설 수가 없었어요. 미친 여자처럼 밤새도록 집안을 오락가락하며 문제를 직시하라고 나 자신을 독려했죠. 난 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앤. 동이 틀 무렵 난 이를 악물고 결심했죠. ‘안 할 거다. 그냥 이대로 내버려둘 거야.’ 하고 말이에요. 참 사악한 생각이었어요. 그 결정을 밀고 나갔다면 난 아마 그렇게 사악하게 군 것에 벌을 받았을 거예요. 그날은 내내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오후에 살 것이 있어 글렌에 가야 했어요. 그날은 딕이 얌전히 지내며 졸기만 하던 날이라 집에 그 사람 혼자 남겨뒀어요.
예상보다 외출이 조금 더 길어졌는데, 딕은 내가 그리웠던 모양이더라고요. 외로웠던 거죠. 내가 집에 오자 딕은 어린아이처럼 나에게 달려왔어요. 너무도 기뻐 웃으면서. 그때, 난 포기했어요. 그 사람의 바보 같은 얼굴에 어린 미소를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죠. 마치 성장하고 발전할 기회가 있는 아이를 외면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난 그 사람에게 기회를 줘야 했던 거예요. 그래서 여기 와 블라이드 선생님에게 내 결심을 이야기했어요.
아, 앤, 내가 떠나기 전 몇 주 동안 내가 모두를 원망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단지 난 앞으로 해야 할 일 이외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을 뿐이에요. 그리고 그땐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과 일이 다 그저 그림자같이 느껴졌어요.”
“알아요. 이해해요, 레슬리. 그리고 이제 다 끝났어요. 레슬리를 속박하던 쇠사슬은 끊어졌고 가두고 있던 우리도 없어졌어요.”
“우리는 없지요. 하지만 다른 것도 없는 것 같아요, 앤. 저번에 모래톱에서 내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얘기했던 기억나요? 난 그런 어리석음을 빨리 털고 일어나지도 못해요. 영원히 털어내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있죠. 그런 식으로 어리석게 사는 건 줄에 묶여 사는 개만큼이나 한심한 꼴인데도요.”
레슬리는 멍한 표정으로 그 가느다랗고 그을린 손으로 애꿎은 풀만 뽑으며 말했다.
“지금처럼 피곤하고 혼란스러운 시기를 이겨내고 나면 기분이 달라질 거예요.”
레슬리는 알지 못하는 사실을 알고 있는 앤이 말했다. 하지만 자기가 지나친 연민에 사로잡혀 있다는 건 몰랐다.
레슬리는 자신의 눈부신 황금빛 머리를 앤의 무릎에 뉘었다.
“그래도 내게는 앤이 있어요. 이렇게 좋은 친구가 있는데, 삶이 공허하지만은 않겠죠. 내가 어린아이인 것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어줘요. 잠시 내 엄마가 되어줘요. 내 이 고집 센 혀가 좀 누그러지면 내가 바위 바닷가에서 앤을 만나고 난 이후로 앤과 나누는 우정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말해줄게요.”
레슬리가 말했다.




34
꿈의 배가 항구로 들어오다






황금빛으로 떠오른 해가 바람과 함께 빛줄기를 뿌리며 만을 휘감은 아침이었다. 저녁별의 땅에서 돌아오던 지친 황새 한 마리가 포 윈즈 항구의 모래톱 위를 날고 있었다. 황새는 날개 아래에 졸리지만 별처럼 반짝이는 눈을 가진 작은 생명체를 품었다. 지친 황새는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목적지에 거의 다 왔다는 것은 알았지만 아직 그곳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붉은 사암석 절벽 위에 서 있는 커다란 하얀 등대에 적당해 보이는 장소가 있는 듯도 했지만 벨벳같이 부드러운 이제 막 태어난 아기를 거기 두고 갈 만큼 무정한 황새는 없으리라.
개울이 흐르고 꽃이 만발한 골짜기에 버드나무로 둘러싸인 낡은 회색 집이 더 적당해 보였다. 하지만 거기도 딱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 너머 아주 진한 초록색 집 역시도 아니었다. 그러다 황새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정말 마음에 드는 집이 눈에 들어왔다. 그 집은 커다란 전나무 숲에 안겨 둥지를 틀고 있는 작은 하얀 집이었다. 부엌 굴뚝으로 파란 연기가 나선형을 그리며 솔솔 뿜어져 나왔다. 그 집이야말로 아기에게 딱 적당해 보였다. 황새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부드럽게 지붕 마룻대에 내려앉았다.

30분 후 길버트가 뛰어 내려가 손님방 문을 두드렸다. 잠에서 덜 깬 목소리가 대답하더니 잠시 후 창백하고 겁에 질린 마릴라의 얼굴이 문 뒤에서 나타났다.
“마릴라 아주머니, 어린 신사가 도착했어요. 짐을 많이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여기 머물 거라는군요.”
“세상에! 세상에, 다 끝났다는 건 아니겠지, 길버트. 왜 날 부르지 않았어?”
멍하게 서서 마릴라가 외쳤다.
“앤이 그럴 필요 없는데 괜히 애쓰시게 하지 말라고 했어요. 2시간 전에야 사람들에게 연락하기 시작했어요.”
“저기, 저기, 길버트! 아기는 건강한가?”
“네, 몸무게는 3.5킬로그램 정도고요. 숨소리를 들어보세요. 폐도 아주 건강해요. 간호사가 머리카락이 붉은색이 될 거라고 해서 앤이 화를 냈어요. 전 웃겨서 죽는 줄 알았어요.”
이날 앤의 ‘꿈의 집’에 멋진 일이 있어난 것이다.
“가장 멋진 꿈이 이루어졌어요. 아, 마릴라 아주머니, 지난여름 그 끔찍했던 날을 겪고는 감히 꿈꾸기도 힘든 일이었어요. 그 후로 늘 마음이 아팠었는데 이젠 말끔히 나았어요.”
앤은 창백했지만 들떠 말했다.
“이 아기가 조이의 빈자리를 대신할 거다.”
마릴라가 말했다.

“아, 아니에요, 마릴라 아주머니. 그럴 수는 없어요. 조이의 자리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요, 이 아이에겐 이 아이의 자리가 있어요. 세상에, 남자아이예요. 작은 조이의 자리는 조이만을 위한 거예요. 언제나 그럴 거예요. 조이가 살았다면 이제 한 살이 넘었겠죠. 그 작은 발로 아장아장 걸어 다니고 잘 돌아가지도 않는 혀로 몇 가지 말도 했을 거예요. 네, 그랬을 거예요. 오, 마릴라 아주머니, 짐 선장님 말씀이 맞아요. 다음 세상에서 조이를 만났을 때 내가 조이를 낯선 사람으로 느끼도록 하느님이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던 말씀이요. 지난 1년 동안 그걸 배웠어요. 전 매일 그리고 매주 조이가 자라가는 걸 뒤따랐어요. 언제나 그럴 거예요. 그러면 해가 가도 아이가 얼마나 자라는지 알게 될 거고 그러면 제가 다시 조이를 만나서도 낯선 아이처럼 느끼지 않을 거예요. 오, 마릴라 아주머니, 이 사랑스러운 발가락 좀 보세요! 이렇게 완벽하다니 이상하지 않아요?”
“안 그러면 이상한 거다.”
마릴라가 화통하게 말했다. 이제 모두 일이 안전하게 끝났으니 마릴라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 저도 알아요. 하지만 완전히 다 난 것 같지도 않잖아요. 그리고 저 조그만 발톱이랑 손이요. 저 손 좀 보세요, 마릴라 아주머니.”
“어떻게 봐도 손같이 생겼구나, 뭘.”
마릴라가 마지못해 인정했다.
“제 손가락에 매달리는 것 좀 보세요. 벌써 저를 알아보는 게 틀림없어요. 간호사가 다른 곳으로 데려가면 울거든요. 아, 마릴라 아주머니, 저 아이가 빨간 머리가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죠, 그렇죠?”

“무슨 색깔이든 머리카락은 아직 보이지도 않는구나, 앤. 나 같으면 머리카락이 보일 때까지는 그런 걱정은 안 하겠다.”
마릴라가 말했다.
“머리카락도 났어요. 여기 머리를 덮고 있는 가늘고 부드러운 솜털을 좀 보세요. 간호사가 그러는데 아이 눈은 옅은 갈색이고 이마는 길버트를 꼭 닮았대요.”
“귀도 아주 잘생겼어요, 사모님. 난 맨 처음에 귀부터 봤어요. 머리카락은 종잡을 수 없고 코랑 눈 색깔은 바뀌지만 귀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귀예요. 그리고 또 귀는 어디 붙어 있는지도 잘 알잖아요. 저 생김새 좀 보세요. 저 예쁜 머리에 제대로 자리 잡고 있잖아요. 귀 때문에 부끄러워 할 일은 전혀 없을 거예요, 사모님.”
수잔이 말했다.
앤의 몸은 빨리 회복되었고 행복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새로 태어난 아기를 축복하고 축하했다. 베들레헴의 구유에 왕 중의 왕이 될 아기가 태어나 그 앞에 동방 박사가 경배를 드리고 무릎을 꿇었듯이.
새로운 삶의 환경에 적응하며 천천히 자신을 찾아가고 있던 레슬리는 마치 아름다운 황금 관을 쓴 마돈나처럼 아기 주변을 지켰고, 미스 코넬리아는 이스라엘의 어머니처럼 능숙한 솜씨로 아기를 돌봤다. 짐 선장은 그 커다란 구릿빛 손에 그 작은 생명체를 안고 자기 핏줄로 태어난 아이가 있었더라면 꼭 그리 바라보았을 온화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름을 뭐라고 부를 거예요?”
미스 코넬리아가 물었다.

“앤이 이름을 정했어요.”
길버트가 대답했다.
“제임스 매슈예요. 제가 아는 가장 멋진 두 신사분의 이름에서 따왔지요.”
앤이 말하고는 길버트에게 장난스러운 눈길을 주며 덧붙였다.
“길버트는 제쳐두고 제멋대로 정해버렸어요.”
길버트는 미소를 지었다.
“난 매슈 아저씨는 잘 몰랐어. 너무 수줍음이 많은 분이라 좀처럼 친해질 수가 없었거든. 하느님이 진흙으로 빚어낸 영혼 가운데 짐 선장님이 가장 멋진 분이라는 데는 나도 같은 생각이야. 선장님도 우리 아기에게 자기 이름을 붙인 걸 무척 기뻐하셨고. 이름을 물려줄 다른 아기도 없잖아.”
“음, 제임스 매슈는 세월이 지나도 어색하거나 촌스럽지 않고 기억하기도 쉬운 이름이에요. 요란스럽지도 너무 낭만적인 이름도 아니라서 나중에 저 아이가 할아버지가 됐을 때도 이름 때문에 부끄러워할 일은 없겠어요.
글렌에 윌리엄 드류 부인은 아이 이름을 버티 셰익스피어라고 불렀어요. 이름 한번 기가 막히죠? 또 이름을 못 골라서 시간을 너무 끌지 않은 것도 잘한 일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시간을 너무 끌어요. 스탠리 플랙의 첫아이가 태어났을 때 누구 이름을 따서 아이 이름을 지어야 하는지를 놓고 하도 의견이 분분해서 그 불쌍한 어린것은 이름도 없이 2년을 지냈어요. 그런데 동생이 태어나는 바람에 그냥, ‘큰아기’ ‘작은아기’가 돼버렸죠. 마침내 두 분 할아버지 이름을 따라 큰 아이는 피터, 작은 아이는 아이작으로 짓고 같이 세례를 받게 했어요. 그 둘은 누가 더 크게 우나 내기를 했지요. 글렌에 스코틀랜드 하일랜드 출신의 맥냅 집안 있잖아요? 그 집은 아들을 열둘이나 낳았는데 제일 큰 아이랑 막내 이름을 둘 다 닐이라고 지었어요. 한집안에 큰 닐이랑 작은 닐이 있는 거죠. 음, 아마 지을 이름이 동났었던가 봐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어디선가 이런 말을 읽은 적이 있어요. 첫아이가 시(詩)면 열 번째 아이는 산문이라고요. 아마 맥냅 부인의 열두 번째 아이는 산문 축에도 못 들고 듣고 또 들은 옛날이야기쯤 되는 모양이에요.”
앤이 웃었다.
“대가족은 이야깃거리가 많죠. 그런데 우리 집엔 8년 동안 나 혼자여서 남자든 여자든 형제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어요. 어머니가 동생을 원하면 기도를 하라고 해서 난 기도도 정말 열심히 했어요. 아, 정말이에요! 그런데 하루는 닐 고모가 ‘코넬리아, 저기 2층 엄마 방에 가면 남동생이 있단다. 올라가서 보렴.’ 그러는 거예요. 난 너무도 신나고 기뻐서 날 듯 2층으로 뛰어올라갔어요. 플랙 부인이 아기를 들어 보여줬는데, 세상에, 살면서 그렇게 실망스러웠던 적이 없었어요. 난 나보다 두 살 많은 오빠를 보내달라고 기도했었거든요.”
미스 코넬리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실망감을 극복하는 데 얼마나 걸렸나요?”
웃음을 터뜨리며 앤이 물었다.
“하느님의 섭리에 앙심을 품어서 몇 주 동안 아기를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내가 왜 그랬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내가 말을 안 했거든요. 그런데 동생이 점점 귀여워지더군요. 그 작은 손을 나한테 내밀고 그러는 모습을 보니까 점점 아기가 좋아진 거죠. 그래도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학교 친구가 놀러 와서 동생을 보더니 나이치고는 너무 작다고 하는 거예요. 난 너무 화가 나서 그 친구에게 바싹 다가가 ‘넌 정말 예쁘고 착한 아기를 몰라서 그래. 내 동생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기야.’ 하고 말해줬어요. 그다음부터 난 내 동생을 거의 떠받들다시피 했어요. 그 아이가 세 살이 되기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셔 난 누나이자 엄마 노릇을 해야 했죠. 가엾은 아이, 내 동생은 몸이 약했어요. 결국엔 스무 살도 못 돼서 죽고 말았죠. 동생이 살아 있었다면 난 그 아이에게 뭐든지 다 해줬을 거예요, 앤.”
미스 코넬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길버트는 나갔고 레슬리는 지붕창가에서 작은 제임스 매슈에게 조용히 노래를 불러주다가 아이가 잠들자 밖으로 나갔다. 레슬리가 멀리 나간 걸 확인한 후 미스 코넬리아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모의라도 하듯 조용히 속삭였다.
“앤, 어제 오언 포드에게서 편지가 왔어요. 지금 밴쿠버에 있는데 나중에 한 달 정도 우리 집에서 하숙할 수 있겠냐고 묻더군요.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지요? 음, 부디 우리가 옳은 일을 하는 거였으면 해요.”
“우리랑은 상관없어요. 그 사람이 원해서 포 윈즈에 오는 걸 우리가 막을 수는 없는 일이라구요.”
앤은 재빨리 말했다. 미스 코넬리아가 속삭이는 게 왠지 중매쟁이 노릇을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진 않았지만 곧 그런 생각은 사라졌다.
“그 사람이 여기 올 때까지 레슬리에게 오언이 온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레슬리가 알면 바로 떠나버릴 거예요. 어쨌든 가을이 되면 레슬리는 떠날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요전에 나한테 그랬어요. 몬트리올로 가서 간호학 공부를 시작하고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 좀 해보겠다고.”
앤이 말했다.
“아, 그렇다면 그렇게 되는 거지요. 앤과 나는 우리가 할 역할을 하고 나머지는 주님이 알아서 하시도록 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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