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5권 35~36

나단비 | 2024.04.07 17:49:51 댓글: 0 조회: 57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9299
35
포 윈즈의 정치 이야기






앤의 몸이 다 회복되었을 때는 캐나다는 물론이고 프린스에드워드 섬도 총선에 앞선 선거 유세가 한창이었다. 맹렬한 보수파인 길버트는 수많은 집회에 불려 다니며 연설을 했다. 미스 코넬리아는 길버트가 그런 식으로 정치에 가담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앤에게도 그렇게 충고했다.
“데이비드 의사는 절대 그런 짓을 안 했어요. 블라이드 선생님도 지금 자기가 실수하고 있다는 걸 곧 깨달을 거예요. 아, 내 말을 믿어요! 정치판은 점잖은 사람이 발을 들여놓을 데가 못 된다고요.”
“그러면 이 나라 정부를 악당의 손아귀에 맡겨두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앤이 물었다.
“그래요. 보수파 악당에게요.”
한풀 꺾이긴 했지만 미스 코넬리아는 여전히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남자나 정치가나 다 똑같은 부류예요. 그리트당원들이 토리당원들보다 더 지저분하긴 하지만. 차이는 그것뿐이에요. 상당히 더 지저분하긴 하죠. 난 보수당이든 자유당이든 블라이드 선생님은 정치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치판에 나다니다 보면 자기가 직접 선거에 출마하게 되고 다음엔 한 반년 정도 오타와에 가 있고 하다 보면 의사 노릇은 종치는 거죠.”
“아, 우리 정치 얘기로 괜히 시끄럽게 굴지 말아요. 그런 이야기는 다투기 쉬워요. 대신 우리 젬 아기나 보아요. 젬이란 이름은 보석이란 의미의 젬이어야 해요. 정말 완벽하게 예쁜 아기 아닌가요? 여기 팔꿈치 움푹 들어간 것 좀 보세요, 미스 코넬리아. 우리 이 아일 훌륭한 보수주의자로 기르자고요.”
앤이 말했다.
“훌륭한 남자로 길러요. 훌륭한 남자는 너무 드물고 귀해요. 그래도 난 저 아이가 그리트당원이 되는 건 싫어요. 선거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앤이나 나나 항구 너머에 살지 않는 걸 감사히 여겨야 해요. 요즘 거기 분위기가 아주 안 좋아요. 엘리엇 집안, 크로퍼드 집안, 맥컬리스터 집안 할 것 없이 모두들 건드리기만 하면 한판 붙을 기세죠. 이쪽은 남자가 적어서 평화롭고 조용하잖아요.
짐 선장은 그리트당원이지만 정치 이야기는 전혀 안 하는 거 보면 내 생각에 그 양반은 자기가 자유당원이라는 걸 부끄럽게 여기는 것 같아요. 보수파가 다시 압승을 거두고 재집권할 거라는 건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미스 코넬리아가 말했다.
하지만 코넬리아가 틀렸다. 선거가 끝난 바로 다음 날 아침, 짐 선장은 앤의 작은 집에 들러 소식을 전했다. 정당 정치라는 세균의 전염성이 얼마나 강한지 짐 선장같이 온화한 노인의 얼굴에조차 홍조가 올라 있고 눈은 그 옛날의 정열로 번득였다.
“블라이드 부인, 그리트당이 압도적으로 다수를 차지했어요. 18년 동안이나 토리당이 엉망으로 운영한 이 나라 국정에 드디어 기회가 온 겁니다.”
“이렇게 당파성 강한 말씀을 하시다니, 전에는 그렇지 않았잖아요. 짐 선장님이 그렇게 깊은 정치적 원한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선거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앤이 웃으며 말했다. 젬이 그날 아침 ‘와~ 가~’ 하고 말을 했다. 주권이니 권력이니, 왕조의 개창이니 몰락이니, 토리가 전복될 것인가 아니면 그리트가 무너질 것인가 따위를 어디 이런 기적 같은 일에 비교한단 말인가?
“꽤 오랫동안 쌓였죠. 난 내가 온건한 그리트당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우리 당이 집권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골수 그리트당원이란 사실을 깨닫게 됐죠.”
좀 봐달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짐 선장이 말했다.
“선장님도 참, 길버트랑 저는 보수파라는 사실을 아시잖아요.”
“아, 그게 부인과 의사 선생님의 유일한 단점이죠. 하하, 코넬리아도 토리당원이에요. 글렌에서 오는 길에 들러서 이 소식을 전해줬어요.”
“아니, 그런 위험한 짓을 했단 말이에요?”
“그럼요. 하지만 도저히 유혹을 떨칠 수 없었어요.”
“미스 코넬리아가 어떻게 받아들이던가요?”
“비교적 차분했어요. 코넬리아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굴욕의 시간이 필요하듯 국가에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긴 모양이에요. 당신네 그리트들은 오랫동안 춥고 배고픈 시간을 보냈죠. 서둘러 몸을 녹이고 주린 배를 채우라고요. 그렇게 오래가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내가 ‘아마 하느님께서 캐나다에 긴 굴욕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야.’ 하고 답해주었죠. 아, 수잔, 소식 들었어? 진보당이 승리했어.”
수잔은 막 부엌에서 나와 거실로 들어왔다. 수잔에게는 언제나 맛있는 요리 냄새가 났다.
“그래요?” 
예의는 갖추었지만 그다지 관심은 없는 태도로 수잔이 말했다.
“흠, 뭐, 그리트당이 집권하건 말건 내가 만드는 빵 반죽이 제대로 부풀어 오르기만 하면 그만이죠. 아, 그리고 이번 주 안에 비가 내리도록 할 수 있는 당이 있다면 난 그 당에 투표할 거예요. 부엌 옆에 있는 저 정원이 말라버리지 않게요. 사모님, 잠깐 나와서 저녁에 쓸 고기가 어떤지 좀 봐주시겠어요? 고기가 좀 질긴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정부도, 우리가 거래하는 정육점도 다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일주일 후 어느 날 저녁, 짐 선장에게 신선한 생선을 얻을까 해서 앤은 등대가 있는 곶으로 나섰다. 아기 젬 곁을 떠나는 게 이번이 처음인데 이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젬이 울기라도 하면 어떡한다, 수잔이 아기를 달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수잔은 침착한 사람이었다.
“나도 사모님만큼 제임스를 봐와서 알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래요. 제임스는 알죠. 하지만 다른 아기들을 모르지요. 내가 어릴 때 세쌍둥이를 돌본 적이 있거든요. 그때 아기들이 울면 난 전혀 당황하지 않고 페퍼민트나 피마자유를 발라주고는 했어요. 그때를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렇게 아기 돌보는 일이나 아기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 모르겠어요.”
“젬이 울면 따뜻한 물주머니를 배에 대줄게요.”
수잔이 말했다.
“너무 뜨거우면 안 된다는 거 알죠? 아, 정말 두고 가도 될까?”
앤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초조해하지 말아요, 사모님. 수잔은 아기에게 화상이나 입히는 여자가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 안 울 거예요.”
결국 앤은 가기로 마음을 먹고 저문 해가 드리우는 긴 그림자를 쫓아 즐겁게 곶을 향해 걸었다. 등대의 거실에는 짐 선장이 아닌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모르는 사람으로 면도를 깨끗이 한 강해 보이는 턱에 잘생긴 중년 남자였다. 그 사람은 앤이 앉자마자 오래전부터 잘 아는 사람처럼 말을 붙였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나 화법에 잘못은 없었지만 앤은 낯선 사람에게 전혀 거리낌 없이 말을 거는 이 사람이 좀 못마땅했다. 그래서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만 차갑게 대꾸해주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몇 분간 더 이야기를 하다가 실례한다며 자리를 비우고 나갔다. 재미있다는 듯 반짝거리는 그 사람 눈이 거슬렸다. 대체 누구일까? 뭔가 좀 익숙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짐 선장님, 방금 여기서 나간 사람이 누구예요?”
짐 선장이 들어오자 앤이 물었다.
“마셜 엘리엇이요.”
짐 선장이 대답했다.
“마셜 엘리엇이라고요?”
앤이 소리쳤다.
“아, 짐 선장님,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없어요. 아 맞아요! 그분 목소리였어요. 어머, 전 못 알아봤어요. 제가 그분을 모욕했어요! 아니, 대체 왜 저한테 말을 안 한 거죠? 내가 못 알아본다는 걸 확실히 알고 있던 것 같던데.”
“그 얘기는 한 마디도 안 하던데, 일부러 부인을 놀린 모양이군요. 마셜을 냉대한 거 마음 쓰지 말아요. 오히려 재미있다고 했을 텐데. 그래요, 드디어 마셜이 수염을 깎았어요. 그 사람이 지지하는 당이 집권했잖아요. 부인도 알죠?
나도 처음에 봤을 땐 못 알아봤어요. 선거 다음 날 글렌 마을 카터 플랙네 가게에 모두들 모여서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렸죠. 12시쯤 전화로 그리트당이 이겼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마셜은 소식을 듣고는 환호하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고 곧바로 일어서서 나갔어요. 다른 사람들을 두고 말이죠. 다른 사람들은 카터네 가게 지붕이 들썩거릴 정도로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가 났었죠. 아, 토리당원들은 모두 레이몬드 러셀네 가게에 모여 있었대요. 거기서야 환호할 일이 전혀 없었겠죠.
마셜은 곧장 어거스터스 팔머의 이발소로 갔어요. 어거스터스는 잠을 자고 있었는데 마셜이 문을 어찌나 소란스럽게 두들겨대는지 무슨 일이 났나 살피러 내려왔죠.
‘어서 가게로 나와 평생 최고의 솜씨를 발휘해보라고, 거스.’ 마셜이 그렇게 말했대요. ‘그리트당이 집권했으니 해가 뜨기 전에 어서 이 충성스러운 그리트당원의 머리를 깎으라고!’
거스는 거의 미친 듯이 팔짝 뛰었대요. 침대에서 끌려나오다시피 해서…… 그런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도 거스는 토리당원이거든요. 밤 12시 이후에는 그 누가 와도 머리를 깎아주지 않겠다고 펄펄 뛰었죠.
‘그래도 내 말을 들어야 해. 안 그러면 내 무릎에 엎어 고 옛날 네 어머니가 하던 대로 볼기짝을 때려줄 테니까.’ 마셜이 그렇게 호통을 쳤대요.
그 친구는 그렇게 했을 거예요. 거스도 그걸 알았고요. 마셜은 황소처럼 힘이 세고 거스는 몸집이 왜소한 꼬마 같거든요. 그래서 거스는 포기하고 마셜을 가게 안으로 들이고 이발을 해줬답니다. ‘네 머리를 깎아주긴 하지. 하지만 내가 머리를 깎는 동안 그리트당 소리를 한 마디라도 하면, 이 칼로 네 목을 딸 줄 알아.’ 그렇게 다짐을 하고요. 부인도 그 순한 거스가 그런 험한 말을 입에 담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일이죠? 정치라는 게 남자들을 어떻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얘기예요.
마셜은 조용히 이발을 하고 수염을 깎고 집으로 갔답니다. 그 사람이 집에 돌아왔을 때 누군가 2층으로 올라오는 소리를 들은 마셜네 가정부가 밖을 살짝 내다봤대요. 마셜인지 아니면 집안일 하는 아인지 보려고요. 그런데 웬 낯선 남자가 손에 초를 들고 집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걸 보고 비명을 지르더니 그만 죽은 듯이 기절해버렸대요. 의사를 불러와 정신을 차리게 했다죠. 그 집 가정부는 그 후로도 며칠 동안이나 마셜을 볼 때마다 덜덜 떨었대요.”

짐 선장에게는 물고기가 없었다. 그해 여름에는 거의 바다에 나가지 않았고 오래 외출하는 일도 없었다. 짐 선장은 대부분의 시간을 바다 쪽으로 난 창가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며 지냈다. 손으로 받치고 있는 머리는 나날이 더 희어졌다. 그날 밤도 짐 선장은 아무 말 없이 추억에 잠겨 있었고, 앤은 그런 짐 선장을 방해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짐 선장은 붓꽃 빛깔의 서쪽을 가리켰다.
“참 아름다워요. 그렇지요, 블라이드 부인? 오늘 아침에 해가 뜨는 광경을 봤어야 하는데. 정말 장관이었어요. 난 바다 위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수도 없이 봤지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광경을 봤지만 여름 아침 바다 위로 해가 떠오르는 광경보다 멋진 것은 보지 못했어요.
사람이 자기가 죽는 시간을 결정할 수는 없죠. 그저 대선장이 마지막 항해를 나가라고 명령하면 바로 떠나야 하는 거예요. 하지만 만약 갈 수 있는 시간을 정할 수 있다면 난 바다 위로 아침 해가 떠오르는 순간에 가고 싶어요.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 위대한 하얀 광명의 세상을 지나 그 너머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는 바다 어느 곳으로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요. 그러면 거기서 잃어버린 마거릿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부인.”
앤에게 잃어버린 마거릿 이야기를 들려준 후론 짐 선장은 자주 그 이야기를 했다. 마거릿을 향한 사랑을 이야기할 때마다 짐 선장의 목소리는 떨렸다. 절대 희미해지지도 잊히지도 않을 그런 사랑이었다.
“때가 되면 빨리 그리고 편안하게 갔으면 좋겠어요. 난 겁쟁이는 아니에요, 블라이드 부인. 바로 눈앞에서 정말 끔찍한 죽음을 목격했을 때도 움찔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오랫동안 고생하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고 무서워요.”
“우릴 떠난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짐 선장님. 선장님이 없으면 우린 어떻게 해요?”
목이 멘 소리로 앤은 짐 선장의 한때 강인했으나 이제는 약해진 갈색 손을 쓰다듬으며 간청했다.
짐 선장은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아, 아주 잘 지낼 거예요. 하지만 이 늙은이를 완전히 잊어버리지는 않을 거죠, 블라이드 부인? 그래요, 절대 잊어버리지는 않을 겁니다. 요셉을 아는 종족은 언제나 서로를 기억하거든요. 그리고 추억이 남을 테니 가슴 아프지도 않을 거예요. 나에 관한 기억 때문에 내 친구들이 마음 아파하는 건 내가 원하지 않아요. 언제나 나를 즐겁게 추억했으면 해요. 그렇게 믿어요.
머지않아 잃어버린 마거릿이 나를 부를 겁니다. 그 부름에 답할 준비는 돼 있어요. 그런데 작은 부탁이 하나 있어요. 여기 우리 가엾은 항해사 말이에요.”
짐 선장은 소파로 손을 뻗어 커다랗고 따뜻한 벨벳 같은 황금빛 공을 쿡 찔렸다. 그러자 일등 항해사가 돌돌 말았던 몸을 풀고 가르랑거리는지 야옹거리는지 모를 소리를 내며 두 발을 공중으로 뻗더니 다시 몸을 뒤집어 동그랗게 말았다.
“내가 항해를 떠나면 이 녀석이 나를 그리워할 거예요. 이 불쌍한 녀석이 전처럼 혼자 남겨져 굶어죽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 나한테 일이 생기면 블라이드 부인이 우리 항해사를 돌봐주겠습니까?”
“꼭 그럴게요.”
“그러면 됐어요. 그게 마음에 걸렸거든요. 젬에게 내가 모은 신기한 것들을 주어요. 내가 그렇게 해두었어요. 자, 이제 그 예쁜 눈에서 눈물을 거둬요, 블라이드 부인. 내가 그렇게 금방 갈 건 아니니까요. 지난겨울 부인이 테니슨의 시를 읽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 암송해줄 수 있으면 다시 듣고 싶군요.”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부드럽고 낭랑한 목소리로 앤은 테니슨의 아름다운 백조의 노래인 <모래톱을 건너며>를 암송했다. 노선장은 거친 손으로 그 시간을 부드럽게 부여잡았다.
“그래요, 블라이드 부인. 바로 그거예요. 그 사람은 선원이 아니었다고 했죠.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선원의 마음을 시로 잘 표현했는지 모르겠어요. 시인은 ‘슬픔’이나 ‘안녕’을 원하지 않아요. 나도 마찬가지고요. 모래톱 너머에서도 모든 것이 나와 함께할 테니까요.”
앤이 암송을 마치자 짐 선장이 말했다.




36
미모 유감






길버트가 물었다.
“앤, ‘초록 지붕 집’에 뭐 새로운 소식 있어?”
“아니, 특별한 소식은 없어.”
마릴라가 보낸 편지를 접으며 앤이 대답했다.
“제이컵 도넬이 지붕을 새로 이고 있대. 제이컵은 이제 목수로 잘나가고 있어. 평생을 두고 할 일을 선택한 것 같아. 그거 기억나? 제이컵 어머니는 제이컵을 대학교수로 만들겠다고 했잖아. 내가 제이컵을 세인트클레어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제이컵 어머니가 학교로 날 쫓아와서 꾸짖었던 일도 있었어.”
“지금도 제이컵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도 없을걸. 제이컵은 대학교수가 될 생각이 아예 없었어. 그 어머니도 이젠 그 꿈을 접었을 거라고. 난 제이컵처럼 턱과 입 모양이 야무진 아이는 자기가 바라는 일을 결국엔 이루어낸다고 믿었어. 다이애나가 그러는데 도라는 나날이 예뻐진대. 생각해봐, 그 아기가 말이야!”

“도라도 이젠 열일곱 살이야. 찰리 슬론과 내가 당신한테 열을 올릴 때도 당신 나이가 열일곱 살이었어.”
길버트가 말했다.
“정말 길버트, 이젠 우리도 나이를 먹었나 봐. 우리가 막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여섯 살배기였던 아이들이 이젠 연인을 될 나이가 되었다니. 도라는 제인의 동생인 랄프 앤드루스와 사귄대. 내가 기억하기로 그 아이는 동그랗고 통통한 얼굴에 금발 머리였고 언제나 반에서 꼴찌였어. 아마 이젠 잘생긴 젊은이로 성장했을 거야.”
반쯤 슬픈 미소를 지으며 앤이 말했다.
“도라는 아마 일찍 결혼할걸. 도라는 샬로타 4세 같은 부류거든. 더 좋은 사람을 찾을 수 없을까 봐 얼른 처음 만난 남자랑 결혼해버리는 사람들 말이야. 음, 도라가 랄프와 결혼한다면 랄프는 자기 형 빌리보다는 좀 더 적극적이었으면 좋겠어.”
앤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예를 들면, 랄프가 직접 도라에게 청혼하길 바란다는 말이지? 만약 빌리가 제인을 시키지 않고 직접 청혼했다면 당신이 빌리랑 결혼했을까?”
길버트가 웃으며 말했다.
“그랬을지도 몰라. 처음으로 받은 청혼에 정신을 잃고 최면에라도 걸린 듯 바보 같은 일을 저질러버렸을지도 모르지. 빌리가 대리인을 시켜 청혼한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앤은 옛날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어제 조지 무어한테서 편지가 왔어요.”
한쪽 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던 레슬리가 말했다.
“아, 그 사람은 어떻게 지낸대요?”
앤은 관심은 있지만 실은 자기가 모르는 사람을 물어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잘 지내고는 있지만 예전에 살던 집이랑 친구들이 다 변해버려 적응하기 힘들다고 하네요. 봄이 되면 다시 항해를 나갈 거래요. 자긴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나서 언제나 바다가 그립대요. 그런데 한 가지 반가운 소식이 있어요. 네 자매 호를 타고 항해를 나가기 전 조지에게 약혼한 여자가 있었대요. 몬트리올에서 그 여자 얘길 한 마디도 안 했는데, 그 여자가 자길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랬대요. 약혼한 일이 조지에겐 엊그제 일만 같은데 현실이 그렇게 변해 있으니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들었겠죠. 그런데 고향에 돌아가 보니 그 여자가 결혼도 안 했고 여전히 조지를 잊지 못하고 있더래요. 그래서 이번 가을에 결혼하기로 했대요. 조지에게 부인을 데리고 한번 오라고 해야겠어요. 조지도 제정신이 아니긴 했지만 오랜 세월을 산 곳이니 다시 한 번 와보고 싶다고 하네요.”
“세상에, 정말 멋진 로맨스네요.”
앤이 말했다. 낭만에 앤의 열정은 영원히 식지 않을 것 같다. 그러고는 자신을 책망하듯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
“생각해보니, 내 고집대로 했더라면 조지 무어는 무덤 같은 삶에서 벗어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영영 모른 채 묻혀버렸을 거예요. 내가 얼마나 길버트 말에 반대했는지 몰라요. 난 벌을 받은 거예요. 다시는 길버트 말에 반대하고 나서지 못할걸요. 그랬다간 이번 일을 들먹이며 나를 끽 소리 못 하게 할 테니!”
“어이구, 겨우 그런 일로 끽 소리도 못 할 것 같으냐고 되레 큰 소리 치는 건 아니고! 아니야, 앤, 제발, 내 메아리는 되지 말아줘. 조금씩 의견 차이가 있는 건 생활의 활력소가 되거든. 난 항구 너머의 존 맥컬리스터의 아내 같은 사람은 원하지 않아. 그 사람 아내는 존 맥컬리스터가 무슨 말을 하든 언제나 힘없이 조그만 목소리로 ‘정말 옳은 말이에요, 존!’ 하는 말밖에는 하지 않아.”
길버트가 조롱 섞인 말을 했다.
앤과 레슬리 모두 웃었다. 앤의 웃음이 은방울 소리라면 레슬리의 웃음은 금방울 소리였다. 그 두 사람의 웃음소리는 화음이 절묘하게 들어맞는 멋진 음악소리였다.
그렇게 웃고 있는데 수잔이 방 안 가득 울리도록 큰 한숨을 쉬며 들어왔다.
“왜 그래요, 수잔, 무슨 일이 있어요?”
길버트가 물었다.
“젬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죠, 수잔?”
앤이 놀라서 물었다.
“아무 문제 없으니 안심하세요, 사모님. 하지만 나한테 문제가 생겼어요. 이번 주는 어째 일이 자꾸만 어긋나는지 모르겠어요. 사모님도 아시다시피 빵을 망치고, 의사 선생님이 제일 아끼는 셔츠도 태워 먹은 데다 커다란 접시도 깨뜨렸잖아요. 그런데 이젠 내 동생 마틸다의 다리가 부러졌다고 나더러 와서 좀 돌봐달라고 하네요.”
“어머, 세상에, 이런, 동생이 그런 사고를 당하다니요.”
앤이 소리쳤다.
“아, 인간이란 고통에 신음할 수밖에 없는 존재잖아요, 사모님. 꼭 성경책에 나오는 말씀 같은데 실은 번스라는 시인이 그렇게 말했다는군요. 그리고 우리 인간이야 언제나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잖아요? 마틸다는 음, 대체 그 애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우리 집안에 다리나 부러뜨리고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요. 하지만 무슨 일을 저질렀든 그 애는 내 동생이고 가서 돌봐주는 게 내 의무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모님이 나에게 2주 정도만 휴가를 준다면 말이에요.”
“물론이죠, 수잔. 수잔이 가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을 구하면 돼요.”
“마틸다의 다리가 어찌 되었든 사모님이 안 된다고 하면 안 갈게요. 다리가 몇 개 부러졌든 결론적으로 사모님과 귀여운 아기를 힘들게 하면 안 되니까요.”
“아, 아니에요. 가서 동생을 돌보세요, 수잔. 마을에서 일을 도와줄 처녀를 하나 데려오면 돼요.”
“앤, 수잔이 가 있는 동안 내가 여기 와서 지내도 될까요? 괜찮다면 그러고 싶어요! 그러면 앤은 나에게 자선을 베푸는 거예요. 저 커다란 헛간 같은 집에서 혼자 지내는 게 너무 외롭거든요. 할 일도 거의 없어요. 그리고 밤에는 더해요. 더 외롭고 문을 잠가도 무섭고 신경 쓰인다니까요. 이틀 전에는 밖에서 누가 터벅터벅 걸어오는 소리도 났어요.”
레슬리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앤은 기꺼이 좋다고 해서 그다음 날 레슬리는 ‘꿈의 집’ 손님방으로 들어왔다. 미스 코넬리아도 그렇게 된 걸 반겼다.
“이건 하느님의 섭리지 뭐예요. 마틸다 클로의 다리가 부러진 거야 안된 일이지만, 어차피 다리가 부러져야 했다면 지금 부러진 게 딱이잖아요. 오언 포드가 포 윈즈에 머무는 동안 레슬리가 여기서 지내면 저기 글렌에 사는 늙은 고양이들이 수군댈 일도 없을 거 아니에요. 레슬리가 저 집에 혼자 있는데 오언이 거길 드나들면 분명히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을 거라고요. 벌써부터 레슬리는 애도 기간도 갖지 않는다는 소리를 해대잖아요.
내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 쏘아줬어요. ‘레슬리가 조지 무어 일로 슬퍼해야 한다고요? 그 사람은 장례식을 치른 게 아니라 다시 살아난 걸로 아는데요. 만일 딕 무어를 말한다면, 13년 전에 죽은 남자 때문에 상복을 입는 건 예법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번거로운 일 아니겠어요!’ 하고요.
그랬더니 루이스 볼드윈은 레슬리가 그 사람이 자기 남편이 아니라는 걸 전혀 몰랐다는 게 참 이상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다시 ‘당신이야말로 평생을 딕 무어의 이웃에 살았잖아요? 그랬으면 레슬리보다 열 배는 더 그 사람이 딕 무어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하고 말해줬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입을 놀리는 걸 완전히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죠. 아무튼 앤, 오언 포드가 레슬리를 만나는 동안 레슬리가 앤 집에 있게 돼서 참 잘됐어요.”
미스 코넬리아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8월의 어느 날 저녁, 오언 포드가 앤의 작은 집에 찾아왔다. 레슬리와 앤은 아기에게 정신을 빼앗겨 그가 온 것도 몰랐다. 오언은 열린 거실 문 앞에 잠자코 서서 안에서 벌어지는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놓고 있었다. 레슬리는 바닥에 앉아 아기를 무릎에 올려놓고 허공을 향해 흔들어대는 그 작고 통통한 손을 만지며 예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아,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기.”
레슬리는 아기의 작은 손에 입을 맞추어대며 중얼거렸다.
“증말 어쩌면 요렇게 쪼끄맣고 이쁜 것이 있으까?”
앤은 의자 팔걸이 아래로 몸을 굽히고 귀여운 아기에게 경탄을 금치 못했다.
“조 쪼그만 손만큼 이쁜 건 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 그러치? 우리 이쁜 강아지.”
아기 젬이 태어나기 몇 달 전 앤은 아기 교육에 관한 책 몇 권을 열심히 탐독했고 그중 <오라클 경의 어린이 양육과 훈육>이라는 책은 정말 맞는 얘기라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읽었다. 오라클 경은 부모에게 제발 아이들에게 ‘아기 말투’를 쓰지 말라고 호소했다. 아기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반드시 바른 언어를 들으면서 자라야만 말을 하게 될 시기에 올바른 말을 배울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오라클 경은 ‘엄마들이 아기에게 말을 할 때 말도 안 되는 표현이나 이상한 발음으로 말을 하면서 아기의 예민한 뇌세포를 자극한다고 주장했다.
엄마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매일 그런 식으로 아기들을 대하고 길들이는데 과연 그 아기가 말을 제대로 배우길 바랄 수 있겠는가? ‘이꾸이꾸, 우리 쪼끄맣고 이쁜 강아지!’라는 말을 끊임없이 듣고 자란 아이가 과연 자기의 존재와 가능성 그리고 운명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고 주장했다.
앤은 오러클 경의 이런 주장에 상당히 수긍하고 길버트에게도 자기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아기에게 ‘아기말투’를 쓰지 않겠다고 엄중히 선언했다. 길버트도 그 생각에 동의했고 서로 그 약속을 지키기로 했지만 아기 젬을 처음 안는 순간 앤은 전혀 부끄러움도 없이 이 약속을 단숨에 깨뜨려버렸다. ‘오, 우리 쪼끄맣고 이쁜 강아지!’ 하고 앤이 소리치더니 그 이후론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아기에게 말을 했다. 길버트는 오라클 경에게 혼날 거라며 앤을 놀렸다.
“그 사람은 자기 자식이 없었잖아, 길버트. 분명히 없었을 거야. 안 그랬으면 그런 쓰레기 같은 책을 쓰지도 않았을걸. 아기에겐 저절로 아기 말투를 쓸 수밖에 없어. 그게 자연스러운 거야. 그게 또 맞는 일이기도 하구. 저렇게 연약하고 벨벳처럼 보드라운 자그마한 생명에게 마치 큰 아이를 대하듯 말하는 건 비인간적인 처사야. 아기들은 사랑해주고 보듬어주고 또 다정한 아기 말투를 될 수 있는 한 많이 써줘야 해. 우리 아기 젬에게는 그렇게 해줄 거야. 저 쪼그만 가슴에 듬뿍 축복의 말을 해줄 거라고.”
“하지만 앤, 당신은 좀 심해. 아기한테 당신처럼 말하는 사람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구.”
엄마가 아닌 아빠의 입장이자 오라클 경의 주장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할 수 없는 길버트가 말했다.
“그래, 보지 못했겠지. 그래도 상관 말라고. 난 채 열한 살이 되기도 전부터 해먼드 부인네 세쌍둥이를 돌본 사람이야. 당신이나 오라클 경은 감정이라고는 없는 이론가일 뿐이야. 아, 길버트, 우리 아기 제임스 좀 봐! 날 보고 웃고 있어. 우리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다 아는 거야. 요 이쁜 내 새끼, 우리 이쁜 애기도 엄마 말이 맞다는 거징. 천사 같은 우리 애기, 어구구.”
“어이구, 엄마들이란! 아무튼 못 말린다니까. 하느님이 당신을 만들 때 대체 뭘 만드는지 알고나 계셨는지 몰라.”

길버트가 둘을 안으면서 말했다.
앤은 아기 젬을 그렇게 많이 얼러주고 안아주며 애정을 담뿍 쏟아 길렀고, 젬은 ‘꿈의 집’ 아이로 무럭무럭 자랐다. 레슬리도 아기 젬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그저 예뻐하기만 했다. 앤과 레슬리는 할 일을 모두 마치고 길버트도 집에 없을 때면 아기에게 완전히 빠져 거의 무아지경에서 헤맸다.
바로 이런 순간을 오언 포드에게 들킨 둘은 깜짝 놀랐다. 레슬리가 먼저 그를 알아봤다. 해 질 녘이라 어두웠지만 레슬리의 아름다운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질리면서 입술과 뺨이 선홍색으로 변하는 게 보였다.
오언이 순간 앤이 거기 있다는 것도 잊고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레슬리!”
오언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가 무어 부인이 아니라 레슬리라고 부르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오언에게 내민 레슬리의 손은 차가웠다. 그날 저녁 내내 길버트와 앤 그리고 오언이 웃으며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레슬리는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그리고 오언이 돌아가기도 전에 레슬리는 실례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명랑했던 오언도 기분이 한풀 꺾이더니 실망한 기색으로 집을 떠났다.
길버트가 앤을 쳐다봤다.
“앤, 대체 무슨 일이야? 뭔가 내가 모르는 일이 있어. 오늘 밤 여기 분위기가 여간 묘한 게 아니었잖아? 뭔가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아. 레슬리는 비극의 여신처럼 앉아 있기만 했고, 오언 포드는 겉으로는 웃으며 농담을 하면서도 실은 온통 레슬리에게 정신을 팔고 있는 게 다 보였다고. 당신은 내내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고. 다 털어놔 봐. 대체 이 남편 몰래 무슨 비밀을 숨기고 있는 거야?”
“바보처럼 굴지 마, 길버트.”
앤의 아내다운 대답이었다.
“레슬리가 바보같이 굴고 있어. 가서 얘기를 좀 해야겠어.”
레슬리는 자기 방 지붕 창가에 앉아 있었다. 조그만 방에는 바다가 전해주는 음악소리 같은 파도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희미한 달빛 속에 아름답게 손을 모으고 앉은 레슬리는 앤에게 나무라는 표정을 지었다.
“앤, 오언 포드가 포 윈즈에 온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레슬리는 낮으면서도 비난조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앤이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그럼 나한테 말해줬어야죠, 앤. 미리 알았으면 난 멀리 가 있었을 거예요. 여기서 그 사람을 마주치지 않게요. 나한테 말을 했어야죠. 이러는 건 잘하는 일이 아니라구요!”
레슬리가 소리쳤다.
레슬리는 입술이 떨리고 감정적이 되어 온몸이 다 긴장되어 보였다. 하지만 앤은 무정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몸을 구부려 원망에 찬 눈으로 앤을 올려다보는 레슬리의 얼굴에 입을 맞추어주었다.

“레슬리는 아름다운 바보예요. 오언 포드가 나를 만나려고 애타는 심정으로 태평양에서 대서양으로 달려왔겠어요? 아니면 미스 코넬리아를 보려고 그렇게 애달아 미친 듯이 이곳으로 왔겠어요? 이젠 그 비극적인 태도는 그만 벗어 치워요. 다시는 필요할 일이 없을 테니까. 어떤 사람들은 맷돌 구멍으로도 모든 일을 꿰뚫어볼 수 있다더군요. 당신은 못 해도 말이에요.
난 예언자는 아니지만 이건 알아요. 이제 당신 삶에서 쓰라린 고통의 시간은 끝났어요. 내가 자신 있게 말하는데 이제 레슬리에게는 기쁨과 희망만이 기다려요. 슬픈 일이 있다 해도 그건 행복한 여자로서 갖는 것들이 될 거예요. 금성의 그림자에 비친 행운의 징조가 레슬리에게 실현된 거예요. 레슬리 생애 최고의 선물을 받은 해라고요. 바로 오언 포드와의 사랑이죠. 자, 이젠 잠자리에 들어 푹 자도록 해요.”
레슬리는 잠자리에 들라는 말엔 고분고분 따랐지만 푹 잘 잤는지는 모를 일이다. 이런 일을 레슬리가 감히 꿈이나 꿀 수 있었을까. 그러기엔 지금까지 그녀의 삶은 너무도 고되고 쓰라렸으며 희망이라고는 가져볼 수 없는 길을 걸어왔기에 스스로에게조차 그래도 미래엔 희망이 있을 거라고 속삭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레슬리는 그 짧은 여름 밤 거대한 등대 불빛이 도는 것을 보며 눈가가 부드러워졌고 생기가 돌았다. 다음 날 레슬리는 오언 포드가 와서 같이 바닷가를 산책하자고 청했을 때도 거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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