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6권 1~2

나단비 | 2024.04.08 18:05:29 댓글: 0 조회: 43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9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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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블라이드가 현관문까지 이어진 다이애나 라이트네 정원 보도를 걸어가며 혼잣말했다.

“오늘 밤은 달빛이 참 하얗기도 하지!”

바다에서 불어온 산들바람에 작은 벚꽃 이파리들이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전에 사랑했던,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는 언덕과 숲을……. 정다운 에이번리! 앤이 글렌 세인트 메리에 둥지를 튼 지도 이미 몇 년이나 지났지만, 에이번리에는 글렌 세인트 메리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어디를 가도 자기의 분신이라도 만난 듯 친근감이 들고, 무심코 거니는 들판도 앤을 반갑게 맞았으며, 그 옛날 달콤했던 순간순간들이 하나도 변치 않고 다가와 안아주었다.

어디를 돌아보아도 아름다운 기억이 함께했다. 지난 세월의 장미꽃들이 여기저기 만발해 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앤은 언제나 고향, 이곳 에이번리가 그리웠다. 지금처럼 슬픈 일로 찾게 되었을 때라도 에이번리는 반갑고 정다웠다.

앤과 길버트는 길버트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에이번리에 왔고 일주일 동안 머물 예정이었다.

마릴라와 린드 부인은 앤이 곧 또 떠난다는 생각을 하면 서운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박공 창이 있는 정겨운 동쪽 방은 앤이 돌아올 때마다 반겨주었다. 방으로 들어서면 린드 부인이 준비해둔 수수한 봄꽃으로 만든 커다란 꽃다발이 앤을 환영했다. 앤은 그 꽃다발 속에 얼굴을 묻고 지난 세월의 향기를 맡았다. 그 꽃다발 속에서 앤은 먼 옛날의 자신을 만났고,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진한 기쁨을 느꼈다. 이 동쪽 방이 팔을 뻗어 자기를 꼭 감싸 안아주는 것 같았다.

앤은 정겨운 눈빛으로 정다운 침대를 바라보았다. 린드 부인이 만든 사과 나뭇잎 이불이 깔렸고, 역시 린드 부인이 코바늘 뜨개질로 만든 아름다운 레이스로 가장자리를 장식한,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한 베개가 놓여 있었다. 바닥에는 마릴라가 끈을 엮어 만든 깔개가 깔렸고, 벽에는 그 옛날 슬픈 고아 아이의 얼굴을 비추었던 거울이 아직도 걸려 있었다. 아주 오래전 눈물을 흘리며 처음으로 이 방에서 잠을 잤던 슬픈 아이의 이마를 비추던 그 거울이다. 앤은 잠시 자기가 지금 다섯 아이를 가진 행복한 엄마라는 사실을 잊었다. 수잔 베이커가 ‘잉글사이드’에서 털양말을 짜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다시 한 번 ‘초록 지붕 집’의 앤으로 돌아갔다.

린드 부인이 깨끗한 수건을 들고 동쪽 방으로 들어왔을 때도 앤은 여전히 꿈에 젖은 눈빛으로 거울을 보고 있었다.

“네가 와서 정말 기쁘구나, 앤, 그럼. 네가 떠난 지도 9년이 지났지만, 마릴라와 나는 아직도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어. 데이비가 결혼한 뒤로는 쓸쓸한 기분이 덜하기는 하다만. 밀리는 정말 귀여운 아이야. 파이 집안 아이라는 게 믿어지질 않아! 줄무늬 다람쥐처럼 호기심이 많아서 무슨 일이든 꼭 알려고 들기는 한다만. 난 항상 앤 너 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고 말했고, 지금도 그렇게 말한단다.”

“아, 하지만 이 거울은 너무나 솔직해요, 린드 아주머니. 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잖아요. ‘당신은 예전의 그 앤이 아니에요.’ 하고 말하고 있어요.”

앤이 말했다.

“그래도 넌 안색이 그리 나빠지지 않았어. 처음부터 좀 창백한 편이어서 별로 나빠질 것도 없긴 하지만.”

린드 부인이 위로의 말을 했다.

“어쨌거나 아직 턱이 두 개가 될 기미 같은 건 보이지 않죠? 그리고 제 방이 절 기억해주는 것 같아요, 린드 아주머니. 그래서 너무 기뻐요. 제가 돌아왔는데 제 방이 날 잊어버린 것 같다면 너무나 큰 상처를 받을 거예요. 그리고 ‘유령의 숲’ 너머로 떠오른 달을 다시 보는 것도 너무 좋아요.”

앤이 다시 명랑하게 말했다.

“그래, 저 달은 꼭 하늘에 커다란 금덩어리가 떠 있는 것 같아.”

마릴라가 들을 일이 없어서 린드 부인도 마음껏 시적인 감상에 젖어 말했다.

“달을 향해 뾰족하게 솟아 있는 저 전나무들을 좀 보세요. 은빛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고 있는 분지의 저 자작나무들도요. 이제 저 자작나무들도 다 어른 나무가 되었네요. 제가 여기 처음 왔을 때는 아주 어린 아기 나무들이었는데……. 저 나무들을 보니 새삼 나이를 먹은 것이 느껴지네요.”

“나무들은 원래 아이들과 똑같아. 잠깐 사이에 금방 훌쩍 자라버리거든. 프레드 라이트 좀 봐라. 아직 열세 살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제 아버지랑 키가 거의 같잖아. 저녁은 뜨거운 닭고기 파이다. 너를 위해 레몬 비스킷도 만들어놨어. 오늘 밤 이 침대에서 자면 아주 쾌적할 거야. 오늘 이불을 바람에 쐬어놨거든. 그런데 마릴라가 내가 한 줄 모르고 또다시 했다지 뭐냐. 거기다 밀리까지 또 이불을 들고 나가 바람을 쐬었단다. 우리 둘이 이미 다 해놓은 줄 모르고 말이야. 메리 마리아 블라이드가 내일 도착했으면 좋겠구나. 그 사람은 장례식을 무척 즐기더구나.”

린드 부인이 말했다.

“메리 마리아 고모님은 아버지의 사촌일 뿐인데 길버트는 항상 메리 마리아 고모라고 불러요. 그분은 저를 애니라고 부르고요. 그리고 그분이 절 처음 봤을 때 뭐라고 한 줄 아세요? ‘길버트가 너를 고르다니 참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길버트는 좋은 여자를 얼마든지 고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랬다고요. 아마 그래서 제가 마리아 고모를 좋아하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분이 좋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건 길버트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그런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죠. 길버트는 자기 친척들을 무척 위하는 사람이니까요.”

앤이 끔찍한 일이라는 듯 말했다.

“길버트는 여기 더 머물 거니?”

“아니요. 내일 밤에는 돌아가야 해요. 아주 위중한 환자가 있거든요.”

“이젠 길버트가 여기 에이번리에 마음을 둘 것도 없구나. 작년에 길버트 어머니가 세상을 떠버렸고, 그 후로 블라이드 노인은 내내 우울해했지. 세상에 살아야 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블라이드 집안사람들이 원래들 그래. 이 세상 것에 너무 애정을 갖고 미련을 많이 둔다고. 에이번리에 블라이드 집안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안 좋구나. 정말로 점잖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런데 슬론 집안사람은 그렇게도 많으니. 그 슬론 집안은 여전히 슬론 기질을 못 버렸어. 슬론은 아마 영원히 슬론으로 남을 거야.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도 말이다, 아멘!”

“이 세상이 슬론으로 넘치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말자구요. 전 저녁 먹고 나서 달빛을 받으며 과수원을 좀 거닐고 싶어요. 그러고는 잠자리에 들어야겠죠. 하지만 달빛이 이렇게 좋은 날엔 잠을 잔다는 게 시간을 허비하는 일 같아요.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유령의 숲’ 위로 희미하게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볼 거예요. 하늘은 산호빛이 될 거고 울새는 즐겁게 지저귀겠죠. 창가에서는 참새가 종종걸음을 칠 테고, 황금빛과 보랏빛 팬지꽃이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을 거예요.”

“토끼들이 백합꽃 화단을 죄다 파놓았다.”

린드 부인이 아래층으로 어기적어기적 내려가며 슬픈 듯이 말했다. 달빛이 어쩌고저쩌고 더 이상 늘어놓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다 생각하면서. 앤은 언제나 좀 달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더군다나 그런 면에서 어른이 되길 바라는 것도 이젠 틀린 일 같았다.

다이애나가 밖까지 나와 앤을 맞아주었다. 달빛 아래서도 다이애나의 머리는 여전히 검게 빛나고 볼은 여전히 분홍빛이며 눈은 초롱초롱했다. 하지만 달빛은 몇 년 전보다 훨씬 더 살이 찐 다이애나의 몸을 감추어주지 못했다. 다이애나는 에이번리 사람들로부터 한 번도 ‘말랐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걱정하지 마, 다이애나. 나 오래 있지는 않을 테니까.”

“내가 마치 네가 와서 난처해하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다이애나가 책망하듯 말했다.

“난 파티에 가는 것보다 오늘 오후를 너와 보내고 싶었다고. 너와 충분히 시간을 보내지도 못했는데 모레면 벌써 가야 한단 말이니? 하지만 프레드의 형 결혼식이라서 꼭 가야만 해.”

“물론 가봐야지. 난 잠깐 들른 것뿐이야. 지금 우리의 옛길들을 돌아보고 있는 중이야. ‘드리아드의 샘’을 지나 ‘유령의 숲’을 가봤고, 나뭇잎이 무성한 너희 집 과수원에도 가봤어. ‘버드나무 연못’도 가봤단다. 우리가 옛날에 하던 대로 물에 거꾸로 비치는 버드나무 가지를 보려고 연못을 들여다보기도 했단다. 그 나무들도 이젠 부쩍 자라버렸더라.”

“그래, 모든 것이 다 자랐어. 우리 프레드를 좀 봐! 우린 모두 변했어. 너만 빼고, 앤. 넌 어쩜 하나도 변하지를 않니. 어떻게 그렇게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거야? 나를 좀 봐!”

다이애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넌 좀 부인다워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중년 부인처럼 펑퍼짐한 건 아니야, 다이애나. 내가 변하지 않았다는 말에는, 글쎄, H. B. 도넬 부인도 너랑 같은 말을 하더라. 그 부인이 장례식 때 나를 보고는 하나도 늙지 않았다고 했어. 하지만 하몬 앤드루스 부인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고 하더라. 그 아주머니가 날더러 뭐라고 했는지 아니?

‘세상에나, 앤, 너 몹시 상했구나!’ 그러더라고. 모든 것이 다 보는 사람 눈이나 양심에 따라 다른 건가 봐. 잡지에 실린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이제는 나이를 먹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제는 주인공 남녀들이 너무 젊다고 느껴지거든. 하지만 우리 그런 일은 신경 쓰지 말자, 다이애나. 우린 내일이면 다시 소녀 시절로 돌아간다고. 난 지금 그 말을 하러 온 거야. 내일 오후에 우리가 옛날에 다니던 곳들을 모두 들러보자. 봄 들판을 걸어보고 고사리가 자라는 숲길도 가보자. 우리가 좋아했던 다정한 것들과 언덕을 모두 돌아보면 다시 젊어진 기분이 될 거야.”

앤이 웃으며 말했다.

“봄에는 무슨 일이든 불가능한 게 없잖아. 우리 엄마로서의 책임감 같은 건 벗어버리고 아이처럼 즐겁게 돌아다녀 보자. 린드 아주머니는 말은 안 해도 속으로는 나를 아직도 어린아이로 여기시는 것 같아. 하지만 언제나 분별력 있게만 산다면 정말 아무런 재미도 없지 않겠니, 다이애나?”

“어머나, 정말 너다운 말이야! 나도 정말 그러고 싶어.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 네가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다 알아. 프레드의 저녁 식사는 누가 챙겨주지 하는 걱정했지?”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앤 코델리아가 아직 열한 살밖에 안 되었어도 나 못지않게 아빠 저녁 식사를 잘 차려주거든.”

다이애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앤 코델리아가 저녁 식사 준비는 할 거야. 나는 원래 부인회에 가려고 했는데 그만두고 너와 함께 나가야겠다. 꼭 꿈이 이루어진 것 같을 거야. 저녁때면 나도 곧잘 혼자 앉아서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꿈을 꾸고는 했거든. 내가 도시락을 준비할게.”

“우리 헤스터 그레이의 정원에 가서 도시락을 먹자. 그런데 헤스터 그레이의 정원이 아직도 거기 있을까?”

“그렇겠지.”

다이애나도 잘 모르겠다는 듯 대꾸했다.

“나도 결혼하고 난 후에는 한 번도 거기 가본 적이 없어. 그렇지만 앤 코델리아는 여기저기 잘도 돌아다녀. 그래서 내가 항상 집에서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지. 숲을 헤매고 다니는 것도 어찌나 좋아하는지. 어느 날인가는 정원에서 혼자 중얼중얼하고 있어서 야단을 쳤더니 자기는 혼잣말하는 게 아니래. 꽃의 정령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거야. 앤 코델리아의 아홉 살 생일 때 네가 보내준 그 작은 분홍색 장미꽃 봉오리 장난감 찻잔 세트 있잖니. 그걸 하나도 깨뜨리지 않고 아직도 그대로 갖고 논단다. 얼마나 조심스럽게 다루는지 몰라. 앤 코델리아는 그걸 초록 인간 세 명이 올 때만 쓴대. 나도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어. 있잖니, 앤, 이 아이는 어떻게 보면 나보다는 너를 훨씬 더 많이 닮은 것 같아.”

“사람 이름에는 셰익스피어가 인정하는 것보다도 더 많은 의미가 담겼는지도 몰라. 앤 코델리아의 공상을 나무라지 말아줘, 다이애나. 난 아이들은 요정 나라에서 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가엾더라.”

“지금 에이번리 학교 선생은 올리버 슬론이야. 올리버는 문학사 학위를 받았지만 자기 어머니 곁에 있고 싶어서 에이번리 학교를 1년간 맡기로 했어. 올리버는 아이들에게 현실감을 키워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단다.”

다이애나는 앤의 말이 미덥지 않다는 듯 말했다.

“세상에나, 다이애나 라이트, 너 언제부터 슬론 기질을 받아들이기로 했니?”

“아니, 그렇지는 않아. 그런 게 아니라고! 나도 슬론을 좋아하는 건 아니야. 올리버도 꼭 슬론 집안사람답게 그 동그랗고 푸른 눈으로 사람을 뻔히 바라보잖아. 그리고 나도 앤 코델리아가 공상을 한다고 해서 나무라는 건 아니야. 그 아이가 꿈꾸는 것들은 예전에 네가 꿈꾸던 것들만큼이나 예쁘기도 하고. 현실감이야 나이가 들면 차차 생기겠지 뭐.”

“그럼 약속한 거야. 내일 2시쯤에 ‘초록 지붕 집’으로 와. 우리 같이 마릴라 아주머니의 붉은 커런트 과실주를 마시자. 아주머니는 목사님이랑 린드 아주머니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가끔씩 과실주를 담그시거든. 우리를 악마 같은 마음에 푹 젖게 하려는 거지.”

“너 그 과실주로 나를 취하게 했었던 일 기억하고나 있는 거니?”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앤의 입에서 나온 ‘악마 같은’이란 말에는 괘념치 않는 다이애나가 낄낄거리며 물었다. 앤이 그런 말을 할 때는 앤이 말하는 방식일 뿐 정말로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란 것을 모두들 안다.

“내일은 정말 실컷 옛날을 추억해보자, 다이애나. 널 더 붙들고 있지는 않을게. 저기 프레드가 마차를 몰고 온다. 드레스가 참 예쁘구나!”

“이번 결혼식에 입으라고 프레드가 한 벌 마련해주었어. 헛간을 새로 지어야 해서 새 옷 마련할 여유는 안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프레드가 다른 사람은 모두 멋지게 옷을 차려입었는데 자기 아내만 초라해 보이는 건 싫다고 하잖니. 꼭 남자다운 말이지?”

“오, 너 꼭 글렌의 엘리엇 부인처럼 말하고 있어. 그런 경향은 조심하지 않으면 안 돼. 남자가 전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앤이 정색하고 말했다.

“그건 끔찍한 일이지.”

다이애나도 인정했다.

“그래, 그래, 프레드, 나 금방 가요. 그럼 내일 보자, 앤.”
앤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깐 ‘드리아드의 샘’가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앤은 그 정다운 개울을 너무도 사랑했다. 그 샘가는 어린 시절의 웃음소리를 간직하고 있어 귀를 기울이면 그 웃음소리를 그대로 들려주었다. 이 맑은 샘은 앤의 오랜 꿈, 그 옛날의 맹세, 속삭임을 그대로 비추어주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 속살거림에 귀 기울이는 이는 ‘유령의 숲’ 가문비나무뿐이었다.






2






다이애나가 말했다.

“꼭 우리를 위해 마련한 것처럼 너무나 아름다운 날이야. 하지만 날씨가 심술을 부리지 않을까 걱정돼. 내일 비가 온다고 했거든.”

“신경 쓰지 말자. 내일 햇살이 모두 거두어진다고 해도 오늘은 오늘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면 된다고. 내일은 우리가 서로 헤어져야 한대도 오늘은 우리의 우정을 즐기자고. 저 기다란 언덕을 좀 봐. 황금빛 섞인 초록빛으로 빛나고 있어. 저 안개 낀 푸른 골짜기도. 저것들이 모두 우리 거야, 다이애나. 저 언덕이 애브너 슬론네 것이라 해도 난 상관하지 않겠어. 오늘만큼은 우리 거야. 아, 서풍이 불어온다. 난 서풍이 불어오면 언제나 모험을 하고 싶어져. 오늘 우리는 완벽한 산책을 즐길 수 있을 거야.”
둘은 정말로 멋진 시간을 보냈다. 예전에 놀던 장소를 다 가보았다.

‘연인의 오솔길’, ‘유령의 숲’, ‘한가한 황야’, ‘제비꽃 골짜기’, ‘자작나무 길’, ‘수정 호수’. 조금씩 변한 곳도 있었다. 오래전에 놀이 집을 짓고 놀았던 ‘한가한 황야’를 빙 둘러서 있던 어린 자작나무들은 이제 모두 자라버렸다. 오랫동안 다녔던 그 ‘자작나무 길’에는 관목덤불이 새로 생겼고, 그 옛날의 ‘수정 호수’는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축축한 이끼만 자라는 웅덩이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제비꽃 골짜기’만은 여전히 제비꽃이 만발한 채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숲 깊숙이에서 길버트가 찾아낸 그 어린 사과나무도 커다란 나무로 변해 가지 끝마다 작고 붉은 꽃봉오리를 가득 매달고 있었다.

둘은 아예 맨발로 걸었다.

앤의 머리카락은 햇빛을 받아 마호가니 가구에 윤을 낸 듯 반짝였고 다이애나의 머리도 여전히 검은색으로 반짝였다. 둘은 진정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아끼는 따뜻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즐겁게 길을 갔다. 가끔씩 입을 다문 채 걷기도 했지만, 앤은 언제나 자기와 다이애나처럼 서로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사이라면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끔씩 둘은 ‘너 그거 기억나니.’ 하는 이야기로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너 토리 길에 있는 코프 자매네 오리집 지붕에 빠졌던 일 기억나니? 너 우리가 조제핀 고모할머니 침대로 뛰어들었던 일 기억나니? 우리의 이야기 클럽 아직도 기억해? 너 모건 부인이 방문했을 때 코에 빨간 약을 바르고 있었던 일 기억나? 우리가 창문에서 촛불로 서로 신호를 보냈던 것 기억해? 미스 라벤더의 결혼식을 준비하던 일, 그리고 샬로타의 그 파란색 나비 리본 때문에 얼마나 웃었는지 기억해? 우리가 마을 개선회 일을 하던 시절 생각나니?

이런 추억들이 담긴 웃음소리가 세월을 타고 둘에게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에이번리 마을 개선회는 앤이 결혼해 마을을 떠나자 곧 흐지부지되어버렸다.

“마을 개선회는 중단되고 말았단다, 앤. 요즘 에이번리 젊은이들은 우리 때와는 달라.”

“우리 시절이 끝난 것처럼 말하지 마, 다이애나. 우리는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고, 우린 영혼이 통하는 친구라고. 공기에 빛이 가득한 게 아니라, 공기 자체가 빛이야. 왜 내 몸에 날개가 돋지 않는 건지 모르겠어.”

“나도 꼭 그런 기분이야. 나도 가끔씩은 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하늘을 날 수 있다면 정말 환상적인 기분이 들 거야.”

다이애나는 그날 아침 체중계 바늘이 68킬로그램이나 가리킨 것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둘을 감싸고 있는 주변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어두운 숲에서도, 인적이 드문 샛길에서도 생각지도 못한 아름다운 색조가 언뜻언뜻 비쳤다. 봄의 햇살은 어린 초록 이파리들 사이사이로 옮겨 다녔고 즐거운 웃음소리가 사방에 퍼져 있었다. 작은 골짜기를 지날 때는 마치 황금 물이 담긴 연못 안에서 목욕하는 기분이 들었으며, 어디를 돌아보아도 봄의 향기가 고개를 내밀었다. 고사리 향기, 전나무에서 풍겨 나오는 수지 향, 이제 막 갈아놓은 밭에서 나는 흙냄새가 여기저기서 풍겨왔다.

산벚나무가 꽃을 활짝 피워 커튼을 드리운 오솔길도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밭에 아주 어린 가문비나무 묘목들이 이제 막 싹을 틔운 모습이 꼭 요정이 풀 사이에 쪼그려 앉아 있는 것 같았고, 너무 넓어서 훌쩍 뛰어 건널 수 없는 개울이 졸졸졸 흘러갔으며, 전나무 아래 자리를 잡은 별꽃이 새치름하게 고개를 내밀었고, 어린 고사리들은 긴 이파리를 고불고불 말고 있었다.

자작나무는 어떤 무지막지한 사람이 군데군데 하얀 껍질을 벗겨가 버려 속살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앤이 그나무를 하도 오래 들여다보자 다이애나가 의아하게 쳐다봤다. 앤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다이애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작나무의 색조는 맑은 크림빛 하얀색에서 신비한 황금 빛깔이 되더니 점점 더 짙어져 가장 깊은 층에서는 더 이상 짙어질 수 없는 멋들어진 갈색이 되어 있었다. 앤은 그것을 보면서 자작나무가 겉모습은 처녀처럼 쌀쌀맞아 보이지만 그 안은 따뜻한 마음을 품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작나무는 가슴에 태초의 불을 품고 있어.”

앤이 속삭였다.

그리고 마침내 독버섯이 잔뜩 나 있는 작은 숲의 계곡을 지나 둘은 헤스터 그레이의 정원에 다다랐다. 거기는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여전히 사랑스러운 꽃들이 만발한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다이애나가 수선화라고 부르는 백합이 여전히 만발해 있었다. 줄줄이 서 있는 벚꽃 나무들은 더 늙었지만 여전히 눈송이 같은 꽃 이파리들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길가 양옆으로는 여전히 장미가 피어 있고 오래된 돌담은 딸기 꽃의 하양과 제비꽃의 남빛, 어린 고사리의 초록으로 물들어 있었다. 둘은 정원 한편으로 라일락꽃이 보랏빛 휘장을 드리운 이끼 낀 돌 위에 앉아 싸온 음식을 먹었다. 해는 낮게 걸렸고 배가 고픈 두 사람은 자기 요리 솜씨에 흡족했다.

“밖에 나와 먹으면 뭐든 너무 맛있어!”

다이애나는 만족스러운 듯 외쳤다.

“앤, 네가 만든 초콜릿 케이크는 입에서 살살 녹는다. 나한테 이 케이크 만드는 법 좀 알려줘. 프레드가 무척 좋아할 것 같아. 프레드는 뭐든 잘 먹으면서도 날씬해. 난 케이크를 먹을 때마다 이걸 먹으면 안 되는데 하고 생각한단다. 해가 갈수록 내 몸무게는 늘어만 가니까. 난 우리 사라 고모할머니처럼 되어버릴까 봐 너무 걱정돼. 너무 뚱뚱해서 앉았다 하면 누가 도와줘야지 일어서지도 못하거든. 하지만 이렇게 맛있는 케이크를 보면 먹지 않고는 도저히 못 참겠어. 어젯밤 결혼식 파티에서도 그랬어. 하긴 내가 먹지 않았으면 모두들 언짢아했을 거야.”

“거기서 즐겁게 보냈니?”

“응, 조금은. 하지만 프레드의 사촌 헨리에터에게 붙잡히고 말았어. 헨리에터는 자기가 받은 수술 이야기며, 수술하는 동안 기분이 어땠는지, 맹장을 잘라내지 않고 조금만 더 내버려두었더라면 터져버렸을 거라는 이야기를 무척 신나서 들려주더라. ‘난 열다섯 바늘이나 꿰맸어. 오, 다이애나,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 하긴 헨리에터는 난 못 받아본 수술을 받으면서 괴로움을 겪었으니 이야기라도 하면서 즐거워해야지. 짐도 아주 웃겼어. 그런 일을 메리 앨리스가 모두 알면 무척 실망할 것 같은데 말이야. 음, 조금만 더 먹을까. 아니, 기왕 먹을 거면 다 먹어버리지, 뭐. 한 조각 더 먹는다고 뭐 큰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닐 텐데. 짐이 그러는데 자기는 결혼식 전날 밤 너무도 두려워서 기선 열차를 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었대. 솔직히 말하면 신랑이라면 모두 그런 기분이 드는 거라나. 하지만 난 길버트와 프레드도 그런 기분을 느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렇지, 앤?”

“절대로 그렇지 않았을 거야.”

“프레드도 그렇게 말했어. 내가 물어봤거든. 프레드가 걱정스러웠던 일은 오로지 내가 로즈 스펜서처럼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꿔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대. 하지만 남자들이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속을 알 수 없더라. 그렇다 해도 지금 그런 걸 걱정할 필요는 없지. 너무 멋지지 않니! 옛날 우리가 누렸던 행복을 죄다 다시 맛본 기분이야. 네가 내일 떠나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앤.”

“다이애나, 올여름에 ‘잉글사이드’에 한번 오지 않을래? 한동안 내가 사람들을 만날 수 없게 되기 전에.”

“나도 그러고 싶긴 한데 여름에는 집을 떠날 수 없을 것 같아. 여름엔 언제나 할 일이 많잖니.”

“드디어 레베카 듀가 온다고 해서 너무 기뻐. 하지만 메리 마리아 고모도 오시지 않을까 싶어. 고모가 길버트에게 그런 뜻을 넌지시 비치더래. 길버트도 그분을 반기지는 않지만 길버트네 친척이니까 언제든 기꺼이 맞아주어야만 한단다.”

“나도 아마 겨울에는 갈 수 있을 거야. 나도 ‘잉글사이드’를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 넌 정말 멋진 집과 멋진 가족을 가졌어, 앤.”

“‘잉글사이드’는 정말 좋은 곳이야. 이제는 나도 그 집을 아주 좋아해. 처음에는 절대로 좋아하지 못할 것 같았지. 괜히 미워하기까지 했었어. 너무 훌륭한 집이라 싫었지. 내 소중한 ‘꿈의 집’을 모욕하는 것 같았거든. ‘꿈의 집’을 떠날 때 길버트에게 ‘우리는 여기서 아주 행복하게 살았어.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다른 데서는 이렇게 행복하지 못할 거야.’ 하고 슬프게 말하기까지 했으니까. 얼마 동안은 실컷 향수에 젖어 살았어. 그러고는 서서히 ‘잉글사이드’를 향해 애정의 뿌리가 뻗어가는 것을 느꼈지. 나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어. 정말이야. 하지만 끝내는 항복해버리고 ‘잉글사이드’를 좋아하게 되었단다. 그 뒤로는 해마다 점점 더 좋아져. 집이 너무 낡지도 않았고. 너무 낡은 집은 슬퍼 보이거든. 그렇다고 너무 새 집도 아니야. 너무 새 집은 좀 품위가 없어 보이잖니. 아주 알맞게 원숙해진 집이야. 난 그 집의 방들 하나하나를 다 좋아해. 방들마다 단점도 있지만 좋은 점도 있어. 다른 방과는 뭔가 차이를 자아내는 특징들을 갖고 있다고. 그리고 잔디밭을 빙 둘러서 있는 커다란 나무들도 너무 근사해. 누가 그 나무들을 심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2층으로 올라갈 때마다 층계참에 멈추어 서서 그 나무들을 바라본단다. 층계참에는 아주 특이하고 예쁜 창문이 나 있단다. 창문이 깊숙이 들어가 있어 창턱에 앉을 수가 있게 돼 있어. 난 거기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하느님, 누가 저 나무들을 심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나무를 심은 사람을 축복해주세요!’ 하고 중얼거린단다. 집 주변으로 서 있는 많은 나무들 중에 어느 한 그루도 소중하지 않은 나무가 없어.”

“너도 프레드랑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프레드도 우리 집 남쪽에 서 있는 커다란 버드나무를 숭배하다시피 하거든. 그 나무 때문에 응접실에서 바깥 풍경이 잘 보이질 않는데도 그래. 내가 아무리 그렇다고 말을 해도 프레드가 하는 말이라고는 ‘겨우 전망을 가린다고 저 아름다운 나무를 베어버리잔 말이야?’ 하는 거야. 그래서 그 버드나무는 살아남게 되었단다. 나무가 아름답긴 하지. 그 나무 덕에 우리 집이 ‘외버드나무 농장’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고. 난 ‘잉글사이드’란 이름도 좋아. 아주 멋지고 소박한 이름이잖아.”

“길버트도 그렇게 말했어. 그 이름을 고르느라 한동안 고심했어. 몇 가지 이름을 생각해봤지만 다른 이름은 우리 집과 어울리지를 않았어. 하지만 ‘잉글사이드’란 이름을 생각해냈을 때는 제대로 골랐다는 느낌이 딱 들더라고. 난 그렇게 넓고 쾌적한 집을 갖게 되어 너무 기뻐. 우리 가족한테는 그런 집이 필요하거든. 아이들도 이 집을 좋아하고. 아이들을 생각하면 집이 너무 좁지.”

다이애나가 슬쩍 케이크를 한 조각 더 자르며 말했다.

“네 아이들은 몹시 귀여워. 우리 아이들도 제법 잘생겼다고 생각하지만 네 아이들은 정말 잘생겼어. 특히 그 쌍둥이 말이야! 나는 그 아이들이 부러워 견딜 수 없어. 난 항상 쌍둥이를 갖고 싶었거든.”

“아, 나는 쌍둥이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는 운명인가봐. 하지만 우리 쌍둥이는 서로 조금도 닮지 않아서 실망스러워. 하기야 낸은 무척 예쁘게 생겼고, 아름다운 갈색 머리와 갈색 눈에 피부 색깔도 무척 보기 좋지만 말이야. 다이는 아빠가 제일로 애지중지하는 아이야. 초록색 눈에 눈부시게 물결치는 빨간 머리를 가졌거든. 수잔은 셜리를 제일 예뻐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래. 그 애가 태어났을 때 내 몸이 오랫동안 좋질 않아서 수잔이 셜리를 키우다시피 했거든. 내 생각엔 수잔이 틀림없이 셜리를 자기 아이로 여기는 것 같아. 수잔은 그 애를 ‘구릿빛 왕자님’이라고 부르면서 어찌나 떠받드는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란다.”

“하지만 셜리는 아직 어리니까 잘 때 방에 들어가 이불도 다시 덮어주고 할 수 있잖니. 잭은 아홉 살이나 되었다고 이제는 내가 이불 덮어주는 일도 싫다고 한단다. 자기는 벌써 다 컸다면서.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해주고 싶은 마음을 포기할 수 없어! 아, 아이들은 왜 그렇게 빨리 자라는 거야, 좀 천천히 자랐으면 좋겠어.”

다이애나가 말했다.

“우리 아이들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젬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후로 마을을 지나가면서는 내 손을 잡지 않으려 한단다.”

앤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젬, 월터, 셜리, 모두 아직은 내가 재워주는 걸 좋아해. 월터는 내가 재워주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할 정도야.”

“넌 아직 아이들이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겠다고 하는 문제로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우리 잭은 크면 군인이 되겠다고 해, 군인 말이야! 그게 말이나 되는 생각이니?”

“나 같으면 벌써부터 그런 일로 걱정하지 않겠어. 잭도 더 멋진 생각을 품게 되면 군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다 잊어버릴 텐데 뭘. 전쟁은 과거의 일이야. 젬은 곧잘 자기가 선원이 되는 상상에 빠진단다. 짐 선장님처럼. 그리고 월터는 시인이 되겠대. 그 애는 다른 아이들이랑은 좀 달라.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모두 나무를 좋아해. 그리고 모두들 ‘골짜기’에서 노는 것도 좋아한단다. 골짜기는 ‘잉글사이드’ 아래에 있는 구불구불한 길과 개울이 흐르는 작고 오목한 분지야. 아주 특별한 곳이지.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골짜기에 불과하지만 이 아이들에게는 그곳이 요정의 나라란다.

우리 아이들도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못되지는 않았어.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이 모두 정이 많아. 내일 밤이면 ‘잉글사이드’로 돌아가 있을 생각을 하니 너무 기쁘다. 내 아기들을 재우면서 이야기책을 읽어주고 수잔에게는 수고했다고 그리고 칼세올라리아와 양치류도 너무 멋있다고 칭찬하는 말을 해주겠지.

양치류 키우는 일이라면 수잔을 따를 사람이 아무도 없어. 아무도 수잔처럼 길러내지 못할 거야. 다이애나, 난 정말 진심으로 수잔의 양치류를 칭송할 수 있어. 하지만 그 칼세올라리아는 좀…… 그게 내게는 전혀 꽃처럼 보이지가 않거든. 하지만 그런 말은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어. 수잔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난 어떻게든 그 상황을 잘 모면했어. 신이 아직까지는 날 한 번도 외면하지 않았지. 수잔은 정말 다정한 사람이야. 난 수잔이 없으면 어찌 살아야 할지 막막할 거야. 그런데도 예전에는 내가 수잔을 ‘외부인’이라고 한 적이 있단다. 어쨌거나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 가슴이 벅차오르면서도 ‘초록 지붕 집’을 떠난다고 생각하면 또 슬퍼져. 여기도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거든. 마릴라 아주머니랑 너도 있고. 너와 나의 우정은 언제나 너무 소중해, 그렇지 다이애나?”

“그래, 우리는 언제나 그랬지. 난 너처럼 그렇게 내 마음을 잘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맹세와 약속을 잘 지켜왔어. 그렇지?”

“그럼, 항상 그랬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야.”

앤이 다이애나의 손을 잡았다. 둘은 그렇게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입을 열면 그렇게 달콤한 순간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풀과 꽃 위로 그리고 저 앞에 보이는 목초지 위로 기다란 저녁 해 그림자가 지더니, 저녁 해가 잿빛 섞인 분홍빛으로 하늘을 물들이며 생각에 잠긴 나무 뒤로 떨어졌다. 이제 아무도 찾지 않는 헤스터 그레이의 정원은 봄의 황혼 속에 풍덩 빠져버렸다. 울새가 공기 중으로 플루트 같은 소리를 흩뿌리는 가운데 커다란 저녁별이 하얀 벚나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첫 별은 언제나 기적 같아.”

앤이 꿈꾸듯 중얼거렸다.

“여기 영원토록 이렇게 앉아 있고 싶어. 여기를 떠나기가 싫다.”

다이애나가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열다섯 소녀인 척해도 우리는 한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주부란 걸 잊을 수는 없지. 저 라일락꽃 향기 너무 좋다! 그런 생각해본 적 있니, 다이애나? 활짝 핀 라일락꽃 향기에서는 뭔가 순결한 품위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아. 길버트는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웃어버린단다. 길버트는 라일락꽃을 무척 좋아하거든. 하지만 난 라일락꽃 향기가 언제나 뭔가 너무 비밀스럽고 달콤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언제나 라일락 꽃나무는 집에 두기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어.”

다이애나가 말하며 초콜릿 케이크가 남아 있는 접시를 들어 올려 먹고 싶은 듯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바구니 속에 넣어버렸다. 그 순간 굉장한 고상함과 인내심 어린 표정이 얼굴에 떠올랐다.

“오늘 우리 너무 즐거웠지, 다이애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연인의 오솔길’을 지나면 옛날의 우리들이 마중하러 나와 있을 것 같지 않니?”

다이애나는 조금 몸을 떨었다.

“아, 아니. 그건 재미없을 것 같아, 앤. 어머나, 벌써 이렇게 어두워졌네. 해가 훤한 낮이라면 그런 공상을 하는 것도 좋지만…….”

둘은 입을 다물고 다정하게 집으로 향했다. 두 사람의 마음에 옛날부터 잊힌 적이 없는 사랑이 타오르듯, 말없이 걷고 있는 두 사람 뒤 언덕 위로 저녁놀이 눈부시게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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