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6권 3~4

나단비 | 2024.04.08 18:07:11 댓글: 0 조회: 52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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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즐겁기만 했던 한 주가 다 지났다. 떠날 날 아침이 되자, 앤은 매슈의 무덤가에 꽃을 바친 다음 오후에 카모디로 가서 기차에 올랐다. 한동안은 옛 추억이 깃든 사랑하는 것들을 뒤에 두고 떠나야 하는 아쉬움에 가슴이 먹먹했지만 이제 집에 간다는 생각으로 곧 마음은 벅차올랐다. 언제나 기쁨에 넘치는 자기 집 생각에 내내 마음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집 문턱을 넘어오면 누구나 ‘아, 이런 게 바로 집이야.’ 하고 느끼는 집, 언제나 웃음소리가 들리고, 은 찻잔이며 스냅 사진이며 아이들로 가득한 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곱슬곱슬한 머리와 포동포동한 무릎을 가진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반기고, 집안 구석구석이 다 앤을 환영해줄 것이다.

의자들도 의젓하게 앤을 기다리고 옷장에 든 옷들도 앤이 돌아오길 기다릴 것이다. 다정한 내 집에서는 작은 기념일도 일일이 다 축하하고 서로서로 이런저런 비밀 이야기들을 소곤거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은 너무 행복해.’ 앤은 지갑에서 젬이 보내온 편지 한 통을 꺼냈다. 전날 밤 이 편지를 자랑스럽게 ‘초록 지붕 집’ 사람들에게 읽어주자 모두들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앤이 자기 아이에게서 처음 받아보는 편지이기도 했다. 학교에 다닌 지 1년밖에 안 된 일곱 살 난 아이의 편지치고는 꽤 잘 썼다. 여기저기 단어도 틀리게 적고 한구석에 커다랗게 잉크 얼룩이 지기는 했지만.

“다이는 어젯밤 밤새 울고 또 울었어요. 토미 드류가 다이의 인형을 불태워버릴 거라고 했거든요. 밤에는 수잔 아줌마가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하지만 수잔 아줌마가 엄마는 아니잖아요, 그렇죠, 엄마? 어젯밤에는 수잔아줌마가 바느질하면서 나도 한번 해보게 해주었어요.”

“내가 이 아이들하고 일주일이나 떨어져 있으면서도 행복하게 지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잉글사이드’ 안주인은 자신을 나무라듯 혼잣말했다.

“마중을 나와 주어 너무 기뻐!”

기차가 글렌 세인트 메리에 도착하자 길버트의 품안으로 뛰어들며 앤이 외쳤다. 길버트가 마중 나와 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언제나 누가 죽거나 태어나 길버트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길버트가 마중까지 나와 주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이상 기쁠 수 없을 만큼 기뻤다. 길버트는 새로 지은 옅은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이 프릴이 잔뜩 달린 달걀 껍데기 색깔 블라우스와 갈색 정장을 입길 잘했지. 린드 아주머니는 여행하면서 이런 옷을 입는 건 분별력 있는 행동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지만. 내가 이 옷을 입지 않았다면 저 멋진 길버트와 어울려 보이지 않았을 거야.’

‘잉글사이드’ 베란다에는 예쁜 일본 등불이 훤히 불을 밝히고 있었다. 앤은 수선화가 양쪽으로 피어 있는 보도를 따라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잉글사이드’여, 내가 돌아왔도다!”

앤이 외쳤다.

모두들 앤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웃음소리, 감탄 소리, 기뻐 외치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들 뒤에서 수잔 베이커가 흐뭇한 미소를 짓고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모두 앤을 위해 꽃다발을 준비했다. 심지어는 두 살배기 셜리까지도.

“오, 집에 돌아오니 너무 좋아! ‘잉글사이드’의 모든 것이 행복해 보여. 내 가족들이 나를 보고 반가워하는 일보다 더 멋진 일은 이 세상에 없을 거야.”

“엄마가 또 어디 가면 난 맹장염에 걸려버릴 거야.”

젬이 엄숙하게 선언했다.

“맹장염은 어떻게 걸리는 건데?”

월터가 물었다.

“쉬이이! 그건 어디가 아픈 거야. 난 엄마를 겁줘서 어디 가지 못하게 하려고 그래.”

젬이 월터를 몰래 쿡 찌르며 속삭였다.

앤은 당장 하고 싶은 일이 백 가지는 되었다. 우선 모두를 한 번씩 안아주고 싶었다. 땅거미가 내린 뜰로 달려 나가 ‘잉글사이드’에 지천으로 피어난 팬지꽃도 따고 싶었다. 저 깔개 위에서 뒹구는 인형들도 정리하고 싶고, 모두들 한 가지씩 들려주는 재미난 소문과 소식도 듣고 싶었다. 아빠가 환자를 보러 나가고 없는 사이 낸이 바셀린 튜브를 코에 쑤셔 넣어버려 수잔이 놀라 펄펄 뛰었다고도 했다.

“정말 걱정했다니까요, 사모님.”

그리고 또 주드 팔머네 소는 못을 쉰일곱 개나 집어삼켜서 샬럿타운에서 수의사를 불러와야 했단다. 페너 더글러스 부인은 정신이 얼마나 없었는지 모자도 쓰지 않고 교회에 왔더라는 이야기, 아빠가 잔디밭에서 민들레꽃을 모조리 뽑아내 버린 일 등 이야기는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의사 선생님은 아주 아기들 틈바구니에서 살았어요. 사모님이 없는 동안 선생님이 갓난아기를 여덟이나 받았다니까요.”

톰 플래그 씨가 콧수염을 염색하는 일도 벌어졌다고 했다.

“세상에, 그 사람 부인이 죽은 지 2년밖에 안 되었는데 말이에요.”

항구 어귀에 사는 로즈 맥스웰이 윗마을에 사는 짐 허드슨과 헤어지자고 하자 짐이 그동안 데이트하느라 든 비용을 모두 기록하여 로즈에게 청구했다는 일, 애머사 워렌 부인의 장례식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카터 플래그네 고양이가 제 꼬리께 살을 깨물어버린 일, 셜리가 어떻게 마구간으로 들어갔다 말 다리 밑에 서 있는 것을 찾아낸 일도 있었단다.

“사모님, 나는 정말이지 숨이 딱 멎어버리는 줄 알았어요.”

유감스럽게도 푸른 자두나무가 검은 혹이 생기는 병에 걸린 것 같다는 이야기, 다이가 온종일 ‘우리 모두 함께 노래를, 노래를’이라는 노래를 ‘엄마가 오늘 돌아와, 돌아와’로 가사를 바꾸어 부르고 돌아다닌 일, 조 리즈네 새끼 고양이가 눈을 뜬 채 태어나 사팔뜨기가 된 일, 젬이 바지를 입다가 엉겁결에 파리 잡는 끈끈이 종이 위에 앉아버린 일, 슈림프가 헛간 빗물 받아두는 큰 통에 빠져버린 일도 있었다.

“슈림프가 하마터면 빠져죽을 뻔했어요, 사모님. 다행히도 우리 선생님이 슈림프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아슬아슬한 순간에 뒷다리를 잡아 끌어냈다니까요.”
“아슬아슬한 순간이 뭐예요, 엄마?”
“이제는 완전히 기운을 차린 모양이네.”
앤은 난롯가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기분이 좋은 듯 가르랑거리는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잉글사이드’에서는 의자에 앉기 전에 고양이가 올라앉았는지 아닌지 확인하고 앉아야지 그렇지 않았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었다. 원래 고양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수잔도 이 집에 살자니 하는 수 없이 고양이 좋아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고 했다. 슈림프로 말할 것 같으면 일 년쯤 전에 마을에서 남자아이들이 괴롭히고 있는 말라깽이 새끼 고양이를 낸이 집으로 데려와 길버트가 슈림프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처음에야 이 고양이가 작은 말라깽이 새우 같아서 그 이름이 잘 어울렸지만 이제는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 수잔! 고그와 매고그는 어찌 되었나요? 오, 그것들이 깨지기라도 한 건 아니지요?”
“아, 아니에요, 사모님.”
수잔이 얼굴을 진한 붉은 벽돌 색깔로 물들이며 외치더니 방을 박차고 나갔다. 이어 언제나 ‘잉글사이드’의 벽난롯가를 지키고 섰던 도자기 개 인형을 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사모님이 돌아오기 전에 돌려놓는다는 게 그만 깜박했지 뭐예요. 있잖아요, 사모님. 샬럿타운에 사는 찰스 데이 부인이 사모님이 떠난 날 여기 왔었어요. 그 부인이 모든 일에 얼마나 정확하고 매사에 경우가 바른지 아시죠? 그런데 글쎄 월터가 손님이 왔으니 즐겁게 해주려는 생각으로 저 인형들을 가리키면서 소개를 했죠. ‘얘는 신이구요, 쟤는 나의 신이에요.’1)철부지가 뭘 알고 한 소리였겠어요? 하지만 나는 너무 깜짝 놀라 고개도 들지 못했어요. 데이 부인의 얼굴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말예요. 나는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해명했어요. 그 부인이 이 집안을 하느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집으로 여기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저 개 인형을 사모님이 돌아올 때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두기로 작정을 했죠.”
“엄마, 저녁은 언제 먹어요? 내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요. 그리고 엄마, 오늘은 우리가요, 식구들이 제일 좋아하는 요리를 했어요!” 젬이 애원하듯 말했다.
“우리라니요, 꼭 벼룩의 간만큼만 도와주고선.”
수잔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사모님이 돌아오면 그에 합당하게 축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월터는 어디 있나? 이번 주에는 월터가 식사 시간을 알리는 징을 칠 차례인데.”
저녁 식사는 잔칫날 같았다. 식사가 끝난 뒤 아이들을 모두 잠자리에 들게 하는 일도 무척이나 즐거웠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수잔이 앤에게 셜리를 재우도록 허락해주었다.
“오늘은 다른 평범한 날과는 다르니까요.”
수잔은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오, 수잔, 평범한 날 같은 건 없어요. 모든 날이 다 특별한 날이라고요. 날마다 같은 날은 없잖아요, 안 그래요, 수잔?”
“그 말은 정말로 맞아요, 사모님. 심지어는 지난 금요일처럼 온종일 비가 오고 음침하기만 했던 날도 3년 동안이나 꽃피우길 거부했던 내 커다란 분홍 제라늄이 꽃봉오리를 맺었으니까요. 아, 참, 내 칼세올라리아를 보았나요, 사모님?”
“보았냐구요! 난 평생 그런 칼세올라리아는 본 적이 없어요, 수잔. 어떻게 그렇게 잘 키울 수가 있어요? (어구구,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지만 내 말로 수잔이 행복해졌잖아. 난 순전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니라고. 난 정말로 그런 칼세올라리아는 본 적이 없어. 어머머, 세상에나!)”
“그건 제가 변함없이 관심을 갖고 돌봐준 덕분이죠. 그런데요, 사모님, 꼭 해두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 월터가 요즘 마음에 뭔가 의문을 품고 있는 것 같아요. 글렌 아이들에게서 무슨 말을 들은 거겠죠. 요즘 아이들은 몰라도 될 것까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니까요. 며칠 전에 월터가 생각에 잠겨서는 제게 이렇게 묻지 않았겠어요. ‘아줌마, 아기들은 사치품이야?’ 전 무슨 소린가 어안이 벙벙했죠. 하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어떤 사람들은 아기들이 사치품이라고 여기는 모양이다만 ‘잉글사이드’에서는 아기를 필수품이라고 생각한다.’ 하고 답해주었죠. 내가 지난번에 글렌 가게는 물건을 너무 터무니없이 비싸게만 판다고 큰 소리로 불평을 했던 일이 아차 싶더라고요. 그 소리를 듣고 저 아이가 그런 걱정을 하게 됐나 싶어서요. 그러니까 월터가 사모님한테 와서 또 무슨 소리를 하면 대비를 해두라고요.”
“수잔이 그 상황을 잘 모면했군요. 그리고 아이들도 이제 우리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 때가 되었다고요.”
앤도 진지하게 대꾸했다.
무엇보다도 그날 앤이 가장 가슴 벅차게 행복감을 느꼈던 순간은 길버트가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을 때였다. 앤은 글렌 세인트 메리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침실 창가에 서서 바다에서 슬금슬금 올라온 안개가 달빛어린 모래 언덕과 항구를 지나 마을을 품고 있는 좁고 기다란 골짜기로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된 하루를 보낸 다음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오니 너무 기뻐. 나의 앤 아가씨도 행복해?”
“행복하구말구!”
앤은 꽃병이 놓인 화장대 위로 몸을 구부려 꽃병 가득 꽂힌 사과꽃 향기를 들이마셨다. 젬이 준 것이다. 앤은 온통 사랑에 휩싸여 있는 것을 느꼈다.
“길버트, 일주일 동안 ‘초록 지붕 집’의 앤으로 돌아가 지낸 것도 기뻤지만, ‘잉글사이드’의 앤으로 돌아온 것이 백 배는 더 기뻐.”

1. 발음을 약간 잘못하면 고그(Gog)는 ‘신(God)’으로, 메고그(Megog)는 ‘나의 신(My god)’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에 한 아이의 우스갯소리.



4






젬은 아빠의 이런 말투가 무얼 의미하는지 잘 알았다.
“절대로 안 돼.”
젬은 아빠가 생각을 바꿀 가망도, 엄마가 아빠 생각을 바꾸도록 애써줄 리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이 문제에 아빠와 엄마 모두 같은 생각이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했다.
젬의 갈색 눈은 분노와 실망으로 일그러졌다. 냉정하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엄마 아빠를 가만히 노려보기까지 했다. 아무리 노려보아도 엄마 아빠는 태연하게 저녁 식사만 하고 있어서 젬은 화가 치밀 대로 치밀었다. 마치 나쁜 일이라고는 조금도 없다는 태도였다. 물론 메리 마리아는 젬이 노려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근심이 가득해 보이는 메리 마리아의 연한 푸른색 눈을 피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녀는 이 일이 무척 재미있다는 눈치였다.
그날 오후 버티 셰익스피어 드류가 놀러 와 내내 젬과 같이 놀았다. 월터는 케네스 포드와 퍼시스 포드와 함께 옛날 엄마가 살던 ‘꿈의 집’으로 놀러가고 없었다. 버티 셰익스피어는 젬에게 그날 저녁때 글렌의 남자아이들이 모두 항구 어귀에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오늘 저녁에 빌 테일러 선장이 자기 사촌 조 드류의 팔에 뱀 문신을 해주기로 해서 구경하러 간다는 것이다. 물론 버티 셰익스피어는 자기도 갈 건데 같이 가자고 젬을 꾀었다. 거기 가면 무척이나 재미있을 것 같았다. 젬은 가고 싶어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엄마 아빠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널 보내줄 수 없는 이유는 많지만 그중 하나는 아이들끼리 가기에는 항구 어귀가 너무 멀다는 거야. 다들 늦게야 돌아올 텐데 넌 잠자는 시간이 8시로 정해져 있잖니, 젬.”
아빠가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7시면 잠자리에 들었지.”
메리 마리아가 참견했다.
“저녁에 그렇게 멀리 나가려거든 더 클 때까지 기다려야 해, 젬.”
엄마도 말했다.
“지난주에도 그렇게 말했잖아요. 나 지금은 다 컸어요. 엄마는 내가 아기인 줄 알아요. 버티도 가잖아요. 나도 버티만큼 크단 말이에요.”
젬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지금 홍역이 돌고 있다. 돌아다니다간 홍역에 걸려버릴지도 몰라, 제임스.”
메리 마리아가 무서운 얼굴 표정을 하고 말했다.
젬은 누가 자기를 제임스라고 부르는 게 싫은데 고모할머니는 꼭 제임스라고 불렀다.

“홍역에 걸려버릴 테야.”
젬은 반항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다음 아빠의 눈치를 살피고 일단은 고개를 숙였다. 아빠는 절대로 메리 마리아 고모할머니에게 말대답하는 걸 용서하지 않았다. 젬은 메리 마리아 고모할머니가 싫었다. 다이애나 이모와 마릴라 할머니는 아주 마음씨 좋고 친절하지만 메리 마리아 고모할머니 같은 사람은 진짜 처음 본다.
“좋아요. 나를 사랑하고 싶지 않으면 날 사랑하지 마세요. 하지만 내가 아프리카로 호랑이를 잡으러 가버려도 좋아요?”
젬은 자기가 메리 마리아 고모할머니에게 말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엄마 쪽을 바라보면서 소리쳤다.
“젬, 아프리카에는 호랑이가 없단다.”
엄마는 아주 상냥하게 대꾸했다.
“그럼 사자를 잡으면 되지!”
젬이 외쳤다. 모두들 날 꼼짝 못 하게 하려는 거야. 모두들 나를 비웃으려고 해. 하지만 날 그렇게 우습게보지 못하도록 해주겠어.
“아프리카에 사자가 없다고는 말 못 하겠죠? 아프리카에는 사자가 수백만 마리나 있걸랑요. 사자들 천지라고요!”
엄마와 아빠는 다시 빙그레 웃었고, 메리 마리아 고모할머니는 엄마 아빠가 그렇게 웃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참을성 없이 행동하는 것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이었다.

“자, 젬, 네가 좋아하는 생강 빵에 생크림을 얹어 가져왔다.”
수잔은 귀여운 젬에게 애정과 동정심을 느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수잔 생각에도 젬을 마을 개구쟁이들과 함께 항구 어귀 빌 테일러 선장네 집에 가도록 허락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 노인은 술주정뱅이에다 소문도 나쁘지 않은가.
생크림을 얹은 생강 빵은 젬이 무척 좋아하는 디저트였다. 그러나 오늘 밤은 그 맛있는 디저트마저 젬의 화난 마음을 달래주지 못했다.
“먹고 싶지 않아요!”
젬은 골을 내며 거절하고 식탁에서 일어나 문가까지 걸어가더니 홱 돌아서며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반항하는 말을 던졌다.
“어쨌건 난 오늘 밤 9시 전에는 절대 안 잘 거야. 그리고 어른이 되면 절대로 잠 같은 건 안 잘 거야. 날마다 밤을 꼴딱 새울 거라고요, 매일 밤마다요. 그리고 온몸에다 문신도 새길 거야. 난 아주 못된 짓만 다 골라 해버릴 거라고, 두고 보세요.”
“‘안 잘 거야.’라고 하지 말고 ‘안 잘 거예요.’ 하고 말해야지.”
엄마가 말했다.
엄마 아빠를 약 올릴 수 있는 방법은 도대체 없는 것일까?
“아무도 내 말에는 귀를 기울이려 들지 않겠지만 말이다, 애니. 내가 어렸을 때는 부모에게 그렇게 말대답을 했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만큼 회초리를 맞았다. 요즘에는 자작나무 회초리를 무시하는 집이 많은데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야.”
메리 마리아가 말했다.
“젬을 야단칠 일이 아니에요.”
그 말에 의사 선생 내외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리란 걸 아는 수잔이 대신 한마디 거들었다. 하지만 만일 메리 마리아 블라이드가 이 문제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 수잔도 이렇게 대꾸할 참이었다.
“조 드류가 문신 새기는 걸 구경하면 얼마나 재미가 있겠느냐고 버티 셰익스피어 드류가 젬을 꼬드긴 거예요. 그 아이는 오늘 오후 내내 우리 집에 와 놀면서 몰래 부엌으로 들어와 제일 좋은 알루미늄 냄비를 가져가 버렸어요. 투구로 쓰고 군대놀이를 하려고요. 그다음에는 널빤지를 가져다 보트라며 골짜기의 개울물에 띄우고 놀다가 몸이 흠뻑 다 젖었구요. 그 뒤로는 뜰에서 꼬박 한 시간이나 팔딱팔딱 뛰면서 소름 끼치게 소리를 질러대며 개구리 흉내를 냈지요. 개구리 말이에요! 그러니 젬이 지쳐서 제정신이 아닌 것도 무리가 아니라구요. 젬이 그렇게 피곤해 지치지 않았을 때는, 세상에 그렇게 행동거지가 바르고 얌전한 아이가 없거든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메리 마리아는 더 상황을 악화시킬 말은 하지 않았다. 평상시에도 식사 시간에는 수잔 베이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수잔이 ‘가족도 아니면서’ 가족과 함께 식탁에 앉는 일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일종의 의사 표시였다.
앤과 수잔은 메리 마리아가 오기 전에 이 문제에 관해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자기 분수를 아는 수잔은 ‘잉글사이드’에 손님이 오면 절대로 가족과 함께 앉지도 않았고, 앉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메리 마리아 고모는 손님이 아니에요. 가족이라구요. 그리고 수잔도 우리 식구예요.”
마침내 수잔은 고집을 꺾었지만, 속으로는 자기가 남의집살이를 하더라도 다른 평범한 가정부와는 다르다는 것을 메리 마리아 블라이드도 알겠거니 하는 자부심을 느끼지 않는 바도 아니었다. 수잔은 전에 메리 마리아를 만나본 적이 없었지만 수잔의 조카, 곧 수잔의 동생인 마틸다의 딸이 샬럿타운 메리 마리아 집에서 일한 적이 있어 얘기는 많이 들었다.
“수잔, 나도 메리 마리아 고모가 우리 집에 와 있게 되어 기쁜 척은 하지 않겠어요. 특히 지금 같은 때는요. 하지만 고모님이 길버트에게 편지를 보내와 이삼 주 머물다 가도 되겠느냐고 묻는데 뭐라고 답을 했겠어요.”
앤은 솔직하게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야 당연히 그럴 권리가 있지요. 남자들이야 자기 핏줄 챙기는 일이라면 무엇보다 우선인 사람들이고. 하지만 이삼 주라니……. 글쎄, 사모님, 난 이 일을 그렇게 암울한 쪽으로만 보고 싶진 않습니다만, 내 동생 마틸다의 시누이는 이삼 주만 와서 머문다더니 이십 년째 죽치고 앉아 있거든요.”
“그런 걱정까지는 하지 않아도 돼요, 수잔. 메리 마리아 고모는 샬럿타운에 아주 좋은 집을 갖고 있잖아요. 하지만 재작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집이 너무 크고 외롭게 느껴지신대요. 어머니 연세가 여든다섯이나 되었으니까요. 고모님은 어머니를 무척 좋아했으니 많이 그리울 거예요. 고모님이 우리 집에 와서 편안하게 계시다 가시도록 해드리자구요.”
“나도 최선을 다해볼게요, 사모님. 아이구, 식탁에 판자를 덧대서 좀 더 길게 만들어야겠네요. 어쨌거나 식탁을 더 짧게 만드는 것보다야 더 길게 하는 게 낫겠죠.”
“식탁에 꽃을 장식해서는 안 돼요, 수잔. 꽃가루가 고모님에게 천식을 일으킨대요. 그리고 후추도 기침이 나게 하구요. 후추도 상에 올려선 안 돼요. 그리고 아주 자주 두통을 앓으신다고 하네요. 그래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서도 안 돼요.”
“세상에나 큰일 났네! 글쎄, 사모님이나 의사 선생님이야 큰 소리 내는 건 본 적이 없으니 내가 소리를 지르고 싶으면 저 단풍나무 숲 속으로 가면 되겠지만 저 가여운 어린것들이 메리 마리아 블라이드의 두통 때문에 소리도 내지 않고 지내야 한다고요? 내가 말을 너무 지나치게 했다면 용서하세요, 사모님.”
“이삼 주뿐일걸요, 수잔.”
“그러길 바라죠. 하지만 글쎄요, 세상을 살다 보면 별의별 사람을 다 보면서 사는 거 아니겠어요.”
수잔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렇게 메리 마리아가 당도했고, 불이 날까 봐 무섭다면서 오자마자 근래 굴뚝 청소를 했느냐고 물었다.
“이 집 굴뚝이 별로 높지 않다고 들었어. 그리고 내 침대 이불은 햇볕에 내다 말렸니, 애니? 난 눅눅한 이불은 싫다.”
메리 마리아는 ‘잉글사이드’의 손님방을 차지했다. 또한 수잔 방을 제외하고는 모든 방을 자기 방인 듯 드나들었다. 누구도 그녀를 열광적으로 맞이한 사람은 없었다. 젬은 고모할머니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냅다 부엌으로 달려 나와 숨죽인 채 수잔에게 물었다.
“고모할머니가 와 있는 동안 우리 웃어도 돼요?”

월터는 고모할머니를 보자마자 눈물을 쏟아 얼른 방 밖으로 쫓겨나갔다. 쌍둥이들은 쫓겨나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제 알아서들 방 밖으로 달려 나가버렸다. 심지어는 슈림프마저도 뒷마당으로 나가 발작을 일으켰다고 수잔은 말했다. 오로지 셜리만이 안전한 수잔의 품 안에 안겨 두려움도 없이 동그란 갈색 눈을 두리번거렸다.
메리 마리아는 ‘잉글사이드’ 아이들이 참 버릇도 없이 길러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란 사람은 신문에 글이나 쓰고, 아버지란 사람은 단지 자기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저 아이들이 나무랄 데가 없다고 믿으니 저런 부모를 둔 아이들에게서 무얼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했다. 거기다 이 집 가정부인 수잔 베이커라는 사람은 제 분수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나 본인, 메리 마리아 블라이드는 가여운 사촌오빠 존의 손자들을 위해 ‘잉글사이드’에 머무는 동안 최선을 다해볼 작정이었다.
“조카는 감사기도가 그게 뭔가, 너무 짧잖아. 내가 여기 있는 동안은 내가 감사기도를 올리는 것이 어떤가? 가족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걸세.”
이 집에 와서 처음 식사를 하면서도 그녀는 비난하는 말을 했다.
그렇게 해서 길버트가 메리 마리아에게 대신 감사기도를 올려달라고 하자 수잔은 기겁했다.
“이건 감사기도가 아니라 예배 시간이 되겠군.”
수잔은 밥그릇을 앞에 두고 혀를 찼다. 속으로는 자기 조카딸이 메리 마리아 블라이드를 두고 한 말이 천 번 만 번 옳다고 생각했다.
“수잔 이모, 그분에게서는 고약한 냄새가 나요. 불쾌한 냄새가 아니라 그냥 고약한 냄새요.”
글래디스가 표현 한번 제대로 했군 싶었다. 그러나 수잔처럼 선입견을 갖고 보지 않는 사람에게는 미스 메리 마리아 블라이드가 쉰다섯 살이나 먹은 여자치고는 그렇게 보기 싫은 모습은 아니었다. 자기 스스로 그렇게 믿는 것처럼 겉모습에서는 좀 ‘귀족적인 자태’가 엿보였다. 뾰족하게 하나로 틀어 올린 수잔의 흰 머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잿빛 곱슬머리를 세련되게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다녔고, 옷도 언제나 멋지게 입었다. 귀에는 기다란 검은 구슬 귀걸이를 달고, 길고 가느다란 목에는 요즘 유행하는 위로 높이 올라오는 그물 같은 목깃 장식을 달았다.
‘적어도 옷차림만큼은 남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겠어.’
수잔은 생각했다. 하지만 메리 마리아가 이런 수잔의 마음을 알았다면 어찌 생각했을지는 상상에 맡겨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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