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6권 5~6

나단비 | 2024.04.08 18:07:51 댓글: 0 조회: 42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9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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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은 뜰로 나가 백합과 수잔이 가꾼 작약꽃을 한 아름 꺾었다. 백합은 침실에, 작약은 길버트의 서재 책상에 꽂아둘 것이다. 우유처럼 하얀 작약꽃 한가운데엔 신이 입맞춤이라도 했는지 피처럼 붉은 색깔로 무늬가 져 있었다. 특히나 더웠던 6월의 한낮이 지나자 공기는 다시금 생기를 되찾았고, 항구는 은빛인지 금빛인지 모를 빛깔이 되어 있었다.
“오늘 저녁 해가 아주 멋있어요, 수잔.”
앤이 부엌을 지나다가 창문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설거지를 다 할 때까지는 저녁 해 같은 것에 감탄할 겨를이 없네요, 사모님.”
수잔이 대꾸했다.
“그때쯤이면 해는 다 지고 말걸요, 수잔. 골짜기 위로 높이 떠오른 저 커다란 뭉게구름을 봐요. 구름 위는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어요. 구름을 타고 날고 싶지 않아요?”
수잔은 손에 행주를 들고 골짜기를 넘어 그 구름 쪽으로 날아가는 자기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다지 마음이 끌리는 광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모님이 마음껏 감상에 젖어 있도록 내버려두어야 했다.
“장미꽃 나무를 갉아먹는 처음 보는 아주 못된 벌레가 있어요. 내일 소독약을 뿌려야겠어요. 오늘 밤에 하고 싶긴 하지만…… 오늘 저녁은 정원 일을 하면 딱 좋을 날인데. 오늘 밤에는 모든 것이 쑥쑥 자라날 것 같아요. 천국에도 뜰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수잔. 우리가 가꾸고, 자랄 수 있도록 보살필 수 있는 정원이요.”
“벌레는 빼고요.”
수잔이 대꾸했다.
“그래요, 나도 그건 원치 않아요. 하지만 너무 완벽한 정원이라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요. 내가 가꿀 필요가 없는 정원이라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내가 풀을 뽑고, 땅을 파고, 옮겨 심고, 이런저런 모양으로 바꾸어보기도 하고, 무얼 심을까 계획도 하고, 가지도 쳐주면서 가꾸어야죠. 천국에도 내가 좋아하는 꽃들이 있으면 좋겠어요. 난 불사의 꽃이라는 아스포델보다 내 팬지꽃이 더 좋아요, 수잔.”
“왜 오늘 밤 그렇게 좋은 정원 일을 하지 않고요?”
사모님이 정말 좀 이상해진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수잔이 말했다.
“길버트가 함께 드라이브를 가자고 해서요. 그 가여운 존 팩스턴 부인을 보러 갈 거래요. 그 부인은 죽어가고 있어요. 더 이상 도와줄 수가 없다고 하네요.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대요. 하여간 오늘 밤 팩스턴 부인이 들러주셨으면 한대요.”
“아, 그래요, 사모님. 이 근처에서는 우리 선생님이 없으면 누구 한 사람 태어날 수도 죽을 수도 없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죠. 드라이브하기 딱 좋은 저녁이네요. 나도 식료품 창고가 비었으니 마을에 다녀와야겠어요. 쌍둥이와 셜리를 재우고 아론 워드 부인에게 비료를 준 다음에요. 이 꽃은 필 때도 지났는데 영 꽃을 피우질 않네요. 메리 마리아 고모님은 두통이 있다면서 발을 옮길 때마다 한숨을 내쉬며 2층으로 올라갔어요. 그러니 적어도 오늘 저녁은 집안이 조용하고 평화로울 거예요.”
“젬이 제시간에 잠자리에 드는지 좀 봐주세요, 수잔. 젬은 오늘 몹시 피곤할 거예요. 하지만 자려 들지 않을 거예요. 월터는 오늘 밤 집에 오지 않을 거구요. 레슬리가 오늘 밤 데리고 자겠다고 했거든요.”
말을 마친 앤은 향기를 담은 컵을 엎지른 것 같은 저녁 공기를 뚫고 나갔다.
젬은 덧문 계단에 앉아 있었다. 맨발을 끌어올려 무릎 위에 걸쳐놓고 모든 것이 다 밉고 싫다는 듯 잔뜩 골이 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특히 글렌 교회의 뾰족탑 위로 떠오른 커다란 달을 노려보았다. 젬은 그렇게 큰 달을 좋아하지 않았다.
“네 얼굴이 저 달처럼 얼어붙지 않도록 조심해라.”
메리 마리아가 젬 곁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젬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낯을 찌푸렸다. 자기 얼굴이 달처럼 얼어붙거나 말거나 상관도 없었다. 아니, 차라리 그렇게 되어버렸으면 좋겠다.
“저리 가버려, 왜 항상 나를 귀찮게 따라 다니냐구!”
엄마 아빠가 나가자 젬을 따라 나온 낸을 향해 소리쳤다.
“심술쟁이!”
낸이 외쳤다. 하지만 낸은 종종거리며 가버리기 전에 젬이 앉아 있는 계단에 빨간색 사자 모양 캔디를 살며시 놓고 갔다.
젬은 캔디를 무시해버렸다. 그걸 보니 더 기분이 상했다. 자기는 제대로 대접받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었다. 모두 젬에게 시비다. 바로 그날 아침만 해도 낸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젬 오빠는 우리들처럼 여기 ‘잉글사이드’에서 태어나지 않았어.”
아까 오후에는 다이가 젬의 초콜릿 토끼를 먹어버렸다. 다이도 그 토끼가 젬 것이란 걸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심지어는 월터까지도 자기를 버렸다. 켄 포드와 퍼시스 포드랑 같이 모래 구덩이를 파고 놀겠다면서 가버리지 않았는가. 거기서 참 재미도 있겠다! 젬은 버티를 따라가 문신 새기는 걸 정말로 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젬이 이보다 더 원했던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젬은 빌 선장네 벽난로 위에 놓인 돛을 모두 활짝 펼친 그 멋진 배를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런데 자기만 못 가다니, 이것은 수치다. 정말 수치다.
수잔이 젬에게 메이플 시럽을 듬뿍 뿌리고 호두까지 얹은 커다란 케이크 조각을 가져다주었지만 젬은 “고맙지만 먹고 싶지 않아요.” 하고 차갑게 거절했다. 왜 수잔은 크림을 얹은 생강 빵을 남겨두지 않았지? 아마 다른 식구들이 다 먹어치워 버렸겠지. 돼지들 같으니라고! 젬은 깊디깊은 우울의 심연으로 한없이 빠져 들어갔다. 아이들은 지금쯤 모두 항구 어귀로 가고 있을 텐데. 그 생각만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젬은 식구들에게 복수해주려면 무슨 일이든 벌려야 했다. 다이의 톱밥을 넣은 기린 인형 배를 갈라 거실 깔개 위에 다 쏟아놓아 버릴까? 그러면 수잔이 화가 나서 펄펄 뛰겠지. 수잔도 참 그렇다. 내가 호두가 든 건 싫어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 내게 호두가 든 케이크를 주다니.
수잔 방에 걸린 달력의 케루빔 천사 그림에 수염을 그려줘 버릴까? 젬은 언제나 미소 짓고 있는 그 통통한 분홍색 케루빔 천사가 싫었다. 학교에서 젬 블라이드가 자기 남자친구라고 다 소문을 내놓은 시시 플래그와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시시 플래그 따위! 그러나 수잔은 그 천사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낸이 좋아하는 인형의 가죽을 벗겨버릴까? 고그나 매고그 중 한 놈 코를 잡아 깨버리는 것은 어때, 아니 둘 모두 그렇게 해버려? 그렇게 해버리면 엄마도 내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되겠지. 다음 봄까지만 기다려보라고! 내가 네 살 때부터 봄마다 엄마한테 산사나무 꽃을 가져다주었는데, 다음 봄에는 가져다주지 않을 거야. 어림도 없어!
익지도 않은 파란 사과를 잔뜩 따 먹고 배탈이나 나버릴까? 그럼 엄마 아빠가 겁을 먹겠지. 이제부턴 절대로 귀 뒤를 씻지 않는 거야. 다음 일요일에 교회에 가면 모든 사람을 다 노려봐 줄까? 메리 마리아 고모할머니 옆에다 송충이를 놔줄까? 줄무늬가 있는 꼬물꼬물 커다란 놈으로. 아니면 항구로 도망쳐서 데이비드 리 선장네 배로 숨어버릴까? 그래서 아침이 되면 항구를 빠져나가 남아메리카로 가버리는 거야. 그럼 식구들이 굉장히 슬퍼하겠지? 그리고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 거야. 브라질로 가서 재규어 사냥이나 하는 거야. 그럼 모두들 슬퍼할까? 아니, 절대로 그러지 않을 것 같아.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거든. 젬의 바지 호주머니에 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걸 기워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글렌의 모든 사람에게 그 구멍을 보여주어야겠어. 그럼 사람들이 다 자기가 얼마나 무시당하며 살고 있는지 알게 될 거야. 젬은 온갖 못된 짓을 다 상상하다 보니 그만 그 생각에 압도당해버렸다.
똑딱, 똑딱, 똑딱,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잉글사이드’로 가져와 복도에 걸어둔 할아버지의 시계가 소리를 냈다. 시간이란 것이 처음으로 생겨났을 때부터 있었지 싶은, 정말로 고물딱지 시계였다. 보통 때는 그 소리가 듣기 좋았지만 지금은 그 소리도 싫었다. 꼭 자기를 비웃는 소리로 들렸다.
“하, 하, 하, 잠잘 시간이 오고 있어. 다른 아이들은 모두 항구 어귀에 갔는데 넌 잠자리에 들어야 해. 하, 하…… 하, 하!”
왜 밤마다 잠을 자야 하는 거지? 왜?
수잔이 글렌 가게에 다녀오려고 집을 나섰다가 잔뜩 골이 나 있는 그 작은 녀석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는 자지 않아도 돼, 우리 귀여운 젬.”
수잔이 너그럽게 말했다.
“난 오늘 밤 절대로 자지 않을 거야! 난 도망쳐 버릴 거야. 난 그럴 작정이라고, 수잔 베이커 할머니. 난 달려가서 저 연못에 풍덩 빠져버릴 테야, 수잔 베이커 할머니.”
젬이 성이 날 대로 나서 소리를 질렀다.
수잔은 젬이 아무리 귀엽다고 해도 자기를 할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반갑지 않았다. 수잔은 잔뜩 인상을 써 보이고 말없이 나가버렸다. 젬은 훈육이 좀 필요해. 수잔을 따라 밖으로 나온 슈림프는 동무가 간절히 필요하다는 듯 젬 앞에 몸을 동글게 말고 앉았다. 제 깐에는 귀여움을 받아보려고 애를 쓴다고 써보았건만 성난 눈 흘김만 당하고 말았다.
“저리 꺼져! 거기 철퍼덕 앉아서 메리 마리아 고모할머니처럼 날 바라보지 마! 꺼져버려! 이게 저리 안 가? 그럼, 이거는 맛이 어떠냐!”
젬은 마침 슈림프 옆에 놓여 있는 셜리의 조그만 양철외바퀴수레를 집어던졌다. 슈림프는 처량하게 울부짖으며 해당화 울타리로 도망쳤다.
‘저것 봐! 우리 집 고양이마저도 나를 깔보잖아. 도대체 살맛이 나질 않는군.’
젬은 사자 캔디를 집어 들었다. 낸이 꼬리와 뒷다리 부분은 먹어버렸지만 그래도 아직 어엿한 사자였다. 이거나 먹어야겠다. 이게 내가 먹는 마지막 사자가 될지도 모르잖아. 젬은 사자를 다 먹고 손가락까지 빨고 나니 무엇을 어찌할지 마음에 결심이 섰다. 사나이가 무엇 하나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는 지경이라면 할 일이라고는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6






길버트와 함께 11시 무렵에 집으로 돌아온 앤이 외쳤다.
“세상에, 왜 이렇게 온 집 안에 불이 훤히 켜져 있지? 손님이라도 왔나.”
급히 집 안으로 들어가 보았지만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집 안에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부엌에도, 거실에도, 서재에도, 식당에도 불만 훤히 켜져 있었다. 수잔의 방도, 2층 복도도 다 불은 밝혀져 있었지만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앤이 말을 시작했지만 곧 전화벨이 울려 앤의 말을 막았다. 길버트가 전화를 받았다.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더니 끔찍한 신음소리를 내고는 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대로 뛰쳐나가 버렸다. 분명 위급한 환자일 것이다. 설명하느라 허비할 시간도 없는.
앤은 이런 일에 이미 적응이 되었다. 생사를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의 아내로서 별도리 없는 일이었다. 앤은 체념한 일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모자와 코트를 벗었다. 앤은 수잔에게 약간 못마땅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이렇게 문을 다 열어놓고 불도 환히 다 밝혀두고 나가버리면 어쩐단 말인가.
“사, 사, 사모님…….”
잠시 후에 들려온 수잔의 목소리는 도무지 수잔 목소리 같지가 않았다. 앤은 영문을 모른 채 수잔을 바라보았다. 수잔이 왜 이렇게 되었지? 모자도 쓰지 않고, 잿빛 머리에는 마른 풀이 잔뜩 붙어 있고, 옷은 또 얼마나 더러운지. 그리고 저 얼굴은 또 뭔가!
“수잔!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수잔!”
“젬이 사라졌어요.”
“사라져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젬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이에요?”
앤이 멍하니 수잔을 바라보았다.
“젬이 정말 사라졌어요. 내가 글렌에 다녀오려고 나갈 때 곁문 계단에 앉아 있었거든요. 난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돌아왔는데 젬이 없었어요. 처음에는 놀라지도 않았죠. 하지만 젬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어요. 집 안을 샅샅이 다 뒤져봤는데도 없더라고요. 젬이 아까 도망쳐버릴 거라고 했어요.”
수잔이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두 손만 주무르며 가까스로 말했다.
“말도 안 돼요! 젬이 그런 짓을 할 리 없어요, 수잔. 쓸데없이 너무 상상하고 있는 거예요, 젬은 집 안 어딘가 분명히 있어요. 어디서 잠이 들었을 거라고요. 어딘가 있을 거예요.”
“내가 다 찾아봤어요, 구석구석 다요. 지하실이고 헛간이고 이 잡듯이 다 뒤져봤다고요. 내 옷을 좀 봐요. 젬이 언젠가 건초 헛간에서 잠을 자면 참 재미있을 것 같다고 해서 거기도 가봤어요. 그런데 구석에 구멍이 나 있었나 봐요. 그만 마구간 구유로 떨어져 달걀 둥지에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지 뭐예요. 내 다리가 부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지요. 젬이 없어진 것보다 뭔들 신의 가호가 아니겠어요.”
앤은 여전히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젬이 기어이 아이들과 함께 항구 어귀에 간 걸까요, 수잔? 전에는 이렇게 엄마 아빠 말을 거스른 적이 없었는데, 하지만…….”
“아니, 젬은 거기 가지 않았어요, 사모님. 그 착한 아이가 어른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굴 리 없어요. 사방을 다 찾아본 다음 내가 드류네 집에 달려가 보았거든요. 버티 셰익스피어는 방금 집에 돌아왔더라고요. 젬은 같이 가지 않았대요. 내가 정신이 나갔지요. 사모님은 나를 믿고 아이를 맡겼는데……. 팩스턴 씨한테 전화를 했더니 두 분이 오셨다가 가셨지만 어디로 가셨는지는 모른다고 하더군요.”
“우린 로브리지 파커 씨네 집에 들렀다 왔어요.”
“사모님이 계실 만한 곳은 어디든 다 전화를 했어요. 그런 다음 마을로 다시 돌아왔죠. 마을 남자들이 지금 수색을 시작했을 거예요.”
“오, 수잔,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었나요?”
“사모님, 난 다 찾아봤어요. 아이가 갈 만한 곳은 다 찾아봤다고요. 오늘 밤에 내가 아주 십 년은 늙어버린 기분이에요! 젬이 연못에 뛰어들어 버리겠다고 했는데…….”
앤은 설마 하면서도 등골에 오싹 한 줄기 전율이 훑고 지나갔다. 물론 젬은 연못으로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연못에는 카터 플래그 씨가 송어 낚시할 때 쓰는 밑이 편평한 낡은 배가 있다. 젬이 반항하는 마음으로 저녁때 그 배를 노 저어 다녔을지는 모른다. 젬은 가끔씩 그 배를 타고 싶다고 졸랐다. 묶인 배를 풀려고 연못에 뛰어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자 앤은 두려움으로 가슴이 떨렸다.
“길버트는 도대체 어디 갔지?”
이제 앤의 마음은 미친 듯 날뛰었다.
“왜 이리 집이 소란해?”
메리 마리아가 갑자기 층계에서 모습을 나타내며 물었다. 용무늬가 수놓아진 가운을 입고 머리는 컬을 만들려고 온통 클립을 감아놓아 후광처럼 빛났다.
“도대체 이 집에서는 밤에도 조용히 잠을 잘 수가 없으니.”
“젬이 없어졌어요. 아이 엄마는 날 믿고 아이를 맡겼는데…….”
너무나 공포에 사로잡혀 메리 마리아의 불평 따위는 귀담아듣지도 않고 수잔이 말했다.
앤이 직접 집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젬은 어딘가에 분명 있을 거야! 젬은 제 방에 없었다. 침대는 올라간 흔적조차도 없었다. 쌍둥이 방에도, 안방에도 없었다. 젬은 집 안 어디에도 없었다. 다락방에서 지하실까지 샅샅이 뒤지고 난 앤은 거의 공황 상태가 되어 거실로 돌아왔다.
“너를 긴장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만, 애니, 빗물을 받아두는 큰 통 안은 들여다봤니? 시내 사는 잭 맥그레거네 아이가 작년에 빗물 받아두는 통에 빠져 죽었잖아.”
메리 마리아가 으스스하게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내, 내가 거기는 봤어요. 내가 막대기로 통 안을 저어봤다고요.” 수잔이 다시 손을 비틀며 말했다.
메리 마리아의 말에 멈추어버렸던 앤의 심장이 수잔의 말을 듣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수잔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비비던 손을 멈추었다. 이제야 사모님 심기가 불편해지면 안 된다는 것이 생각났다.
“자, 모두 마음을 좀 가다듬고 함께 힘을 모아보자고요. 사모님이 말한 것처럼 젬은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거예요. 젬이 녹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리는 없잖아요.”
수잔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석탄 통은 찾아봤어? 그리고 저 시계 안은?”
메리 마리아가 물었다.
수잔이 석탄 통은 찾아보았지만 아무도 시계 속을 찾아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작은 아이가 들어가 숨기에는 충분히 큰 시계였다. 젬이 그 안에 들어가 4시간이나 웅크리고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은 그만두고 앤은 얼른 시계로 달려갔다. 하지만 젬은 그 안에도 없었다.
“아까 잠자리에 들려는데 어쩐지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더라니. 아까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성경을 펼쳤는데 ‘하루 동안 무슨 일이 날지는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2) 하는 구절이 저절로 딱 펼쳐지지 않겠어. 그것이 징조였던 거야. 그러니 항상 최악의 경우도 대비하고 살아야 하는 거야, 애니. 젬이 늪지를 헤매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이럴 때는 블러드하운드 개가 몇 마리 있어야 하는데.”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메리 마리아가 말했다.

앤은 온몸의 힘을 다 쥐어짜 간신히 웃어주었다.
“이 섬에 그 개는 아마 한 마리도 없을 거예요, 고모님. 길버트가 키우던 그 독약을 먹고 죽은 세터개 렉스가 있었다면 금방 젬을 찾아냈을 텐데요. 우린 지금 아무것도 아닌 일로 이렇게 야단을 떨고 있을 거예요.”
“40년 전에 카모디에 살던 토미 스펜서도 연기처럼 사라져버려 찾아내지 못했다. 아니, 찾아냈던가? 아무튼 찾아냈을 때는 그의 해골뿐이었어. 이건 웃을 일이 아니야, 애니. 난 네가 어떻게 그렇게 침착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앤과 수잔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난 못 받겠어요. 난 저 전화를 못 받겠어요, 수잔.”
앤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나도 못 받아요.”
수잔도 못 하겠다고 했다. 메리 마리아 블라이드 앞에서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인 것을 평생 후회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하는 수 없었다. 두 시간 동안이나 공포에 휩싸여 엉뚱한 상상을 하면서 젬을 찾아 돌아다닌 덕분에 수잔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메리 마리아가 얼른 전화기 있는 곳으로 가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수잔은 고통스러운 가운데도 벽에 드리워진 그녀의 머리에 잔뜩 붙은 클립 그림자가 꼭 악마 같다고 생각했다.
“카터 플래그야. 사람들이 여기저기 다 찾아보고 있는데 아직 젬을 찾지 못했다는구나. 연못 한가운데에 배가 떠 있는데 배 안에는 아무도 없대. 사람들이 이제 연못을 찾아볼 작정이래.”
메리 마리아가 차분하게 보고했다.
수잔이 제때 앤을 붙들었다.
“아니, 아니에요. 난 기절하지 않아요, 수잔. 나를 의자로 좀 데려다 주세요. 고마워요. 길버트를 찾아야 해요.”
“만일 젬이 연못에 빠져 죽은 거라면, 애니, 그 아이가 이 험악한 세상의 고통을 면하게 되어 다행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해.”
메리 마리아가 위로랍시고 한 말이었다.
“등불을 가져다가 집 밖을 다시 한 번 더 찾아보겠어요. 수잔이 다 찾아봤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내가 다시 한 번 찾아보게 해줘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어요.”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자 앤이 말했다.
“그럼 스웨터를 하나 더 걸치고 가요, 사모님. 안개가 심해서 공기가 축축하다고요. 내가 빨간 스웨터를 가져다줄게요. 아이들 방 의자에 걸려 있어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수잔은 급히 2층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비명 소리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소리가 ‘잉글사이드’에 울려 퍼졌다. 앤과 메리 마리아가 2층으로 뛰어올라가자, 수잔 베이커가 거의 히스테리를 일으키며 복도에 서 있었다. 웃는지 우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묘한 표정은 전에도 본 적이 없지만, 앞으로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사모님, 있어요. 젬이 저기 있어요. 문 뒤 창문 아래 의자에 잠들어 있어요. 난 저기는 보질 못했어요. 문 뒤에 있어요. 그냥 젬이 침대에 없기에 방에 없는 줄로만 알았죠.”
앤은 안도와 기쁨에 차서 방으로 들어가 창가 의자 옆에 무릎을 꿇었다. 조금 지나면 앤도 수잔도 자기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생각하며 웃을 테지만, 지금은 다만 기쁨의 눈물이 흐를 뿐이었다. 젬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창가 의자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햇볕에 그을린 손에는 낡은 테디 베어 인형이 들렸고, 뭐든 참 용서를 잘하는 슈림프도 젬의 다리를 베게 삼아 자고 있었다. 젬의 붉은 곱슬머리는 쿠션 위에 흐트러져 있고 자면서 즐거운 꿈이라도 꾸는지 얼굴에는 웃음이 피어 있었다. 앤은 젬을 깨우고 싶지 않았지만 젬이 적갈색 별빛 같은 눈을 뜨고 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젬, 아가야, 왜 침대에서 자지 않고? 우리는, 우리는 네가 보이지 않아 걱정했어. 네가 여기서 자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단다.”
“난 여기 누워 있고 싶었어요. 엄마랑 아빠가 집에 오면 문으로 들어오는 게 보이잖아요. 너무 외로워서 침대로 가기 싫었어요.”
앤이 젬을 안아 침대로 데려다 주었다. 엄마가 입을 맞추어주면 기분이 아주 좋았다. 엄마가 다정하게 토닥이면서 이불을 덮어주자 젬은 자기가 아주 소중한 아이고 사랑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뱀 문신 따위는 보지 않아도 상관없다. 엄마란 너무 좋은 거야. 우리 엄마처럼 좋은 엄마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글렌의 모든 사람은 버티 셰익스피어의 엄마를 ‘피도 눈물도 없는 아줌마’라고 불렀다. 그 아주머니는 너무 고약하고 거기다 별것도 아닌 일로 버티의 뺨을 때린 적도 있었다.
“엄마, 다음 봄에도 산사나무 꽃을 가져다드릴게요. 매년 봄마다요. 절 믿어도 돼요.”
젬은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이지, 우리 아들.”
엄마가 말했다.
“자, 자, 이제 조바심치던 일도 다 해결되었으니 다들 안심하고 잠자리로 돌아가도 되겠어.”
메리 마리아가 말했지만 어쩐지 그 목소리에서 심술이 느껴졌다.
“창가 의자를 생각지 못했다니 너무 바보 같았어. 웃음거리가 될 거예요. 우린 이 일로 두고두고 놀림을 당할 거라고요. 길버트는 절대로 우리가 이 일을 잊어버리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수잔, 플래그 씨한테 젬을 찾았다고 전화 좀 해줘요.”
앤이 말했다.
“선생님은 나를 마구 놀려대겠죠.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젬이 무사하기만 하다면요.”
수잔이 기쁜 듯 말했다.
“난 차나 한잔 마셨으면 좋겠는데.”
메리 마리아가 마른 몸에 용무늬 가운을 여미며 애처롭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얼른 차를 준비해드리지요. 우리 모두 차를 한잔 마시면 기운이 날 거예요. 사모님, 카터 플래그 씨는 젬을 찾았다는 말에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던데요. 이제부턴 아무리 물건 값을 비싸게 불러도 다시는 그 사람 욕하는 소리는 말아야겠어요. 그리고 내일 점심에는 닭요리를 먹어야죠, 사모님? 말하자면 축하를 하자는 거죠. 우리 젬에게는 내일 아침에 제일 좋아하는 머핀을 주어야겠어요.”
수잔이 밝게 말했다.
또다시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항구 어귀 마을에 심한 화상을 입은 아이가 있어 시내 병원으로 옮겨야 하기 때문에 아침까지 집에 들어올 수 없다는 길버트의 전화였다.
앤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어 감사한 마음으로 세상을 한번 둘러보았다. 바다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골짜기에서부터 달빛 물든 환희가 나무들을 뚫고 달려들었다. 앤은 이제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 시간 전의 그 두려웠던 마음과 메리 마리아의 터무니없는 생각과 끔찍스러운 기억에 웃음이 나면서도 몸이 떨려왔다.
젬은 무사했다. 길버트는 어딘가에서 다른 아이의 생명을 구하려고 싸우고 있을 것이다. 오, 하느님, 그를 도우소서! 그리고 그 아이의 어머니를 도우소서!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을 도우소서. 우리는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작고 여리고 다정한 마음은 인도와 사랑과 이해가 필요합니다.
다정한 밤의 기운이 ‘잉글사이드’와 그 안의 모든 사람을 감쌌다. 수잔도 아늑하고 조용한 구석으로 기어들어 잠들어버리고 싶었다.


2. 잠언 27장 1절: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 무슨 일이 날지는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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