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6권 9~10

나단비 | 2024.04.09 23:26:01 댓글: 0 조회: 47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9779
9






어둠 속에 혼자 남겨진 월터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얼마 살진 않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혼자 자본 일이 없었다. 언제나 젬이나 낸이 따뜻하고 기분 좋게 옆에 같이 있어주었다.
희미한 달빛이 비쳐들어 조그만 방이 흐릿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지만 어두울 때보다도 기분을 더 으스스하게 만들었다. 침대 발치 쪽 벽에 걸린 그림이 월터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림이란 원래 달빛이 비쳐들면 전혀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대낮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기다란 레이스 커튼은 키가 크고 마른 여자가 창문 한쪽에 서서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집 안 여기저기에서 이상한 소리들도 들려온다. 끽끽대는 소리, 한숨짓는 소리, 소곤거리는 소리 등등.
벽지 그림의 저 작은 새들이 살아나 내 눈을 쪼아대면 어떻게 하지? 별안간 월터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러나 곧 더욱 커다란 공포가 다른 두려움을 모두 쫓아버렸다. 엄마가 아프다. 오펄이 사실이라고 말했으니 그 말을 믿어야만 했다. 아마 엄마는 죽어가고 있을지도 몰라! 아마 엄마는 죽어버렸을지도 몰라! 집에 돌아가도 엄마는 없을지 모른다. 월터의 눈에 엄마 없는 ‘잉글사이드’가 그려졌다.

갑자기 월터는 그런 생각을 참을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지금 곧, 당장. 엄마를 만나야만 한다. 엄마가 죽기 전에. 메리 마리아가 한 말도 바로 이런 일이었다. 고모할머니는 엄마가 죽는다는 걸 알았다. 누군가를 깨워서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해 봐야 헛일이다. 아무도 데려다주지 않고 비웃기만 할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굉장히 멀지만 밤을 새워서라도 걸어가야지.
월터는 아주 조용히 침대를 빠져나와 옷을 입고 한 손에 구두를 들었다. 파커 부인이 모자를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모자는 쓰지 않아도 상관없다. 소리를 내서는 안 되었다. 조용히 빠져나가 엄마한테 달려가야 한다. 앨리스에게 작별 인사를 못 하고 가는 것이 아쉬웠다. 앨리스라면 이해해줄 텐데. 캄캄한 복도를 지나 층계를 내려갔다. 한 발짝, 또 한 발짝, 숨을 죽이고. 이 층계는 끝도 없나? 저 가구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 오, 오!
구두 한 짝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구두는 층계를 데굴데굴 굴러가 월터의 귀가 멍해질 만큼 커다란 소리를 내며 현관문에 부딪혀서야 멈췄다.
월터는 절망스럽게 층계 난간을 붙들었다. 모두들 저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이제 모두들 밖으로 뛰쳐나올 것이고, 그럼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절망스러운 흐느낌으로 숨통이 죄어들었다.
월터는 아무도 잠을 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몇 시간이나 흐른 것 같았다. 다시 조심조심 층계를 내려갔다. 마침내 층계를 다 내려와 구두를 집어 들고 살짝 현관문 손잡이를 돌렸다. 파커 집은 현관문을 잠그는 법이 없었다. 파커 부인은 집 안에 아이들 외에 훔쳐갈 만한 물건도 없고, 아이들이야 누가 원하기나 하겠느냐고 했다.

월터는 집 밖으로 나와 등 뒤에서 문을 닫았다. 얼른 구두를 신고 발소리를 죽여 거리로 나섰다. 파커 저택은 마을 끝에 있어서 월터는 곧 큰길로 나왔다. 한순간 공포감이 월터의 작은 몸을 휘감았다. 붙잡혀 다시 끌려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시자, 이제는 어둠 속에 혼자 있다는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밤에 혼자 밖으로 나와 보기는 처음이었다. 월터는 세상이 무서웠다. 세상은 너무나 큰데 자기는 너무 작은 것 같았다. 동쪽에서 불어오는 차갑고 거친 바람마저도 월터를 밀어 되돌려 보내려는 듯 얼굴을 때렸다.
엄마가 죽어가고 있어! 월터는 밀려드는 눈물을 꾹 참고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용감하게 맞서 싸우며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달빛이 훤했지만 달빛 아래 드러난 것들 중에 지금 월터 눈에 익숙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일전에 아빠와 함께 나왔을 때는 달빛을 받은 나무가 그림자를 길게 떨어뜨리고 있는 길이 무척 예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림자가 너무 검고 날카로워서 금방이라도 월터에게 덤벼들 것만 같았다.
들판도 낯설게 변했다. 나무들도 정겹지 않았다. 나무들이 꼭 월터의 앞뒤에 몰려서서 자기를 감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랑에서도 이글거리는 눈 두 개가 월터 쪽을 보는가 싶더니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빨리 길 저쪽으로 달아나 버렸다. 몸집이 무척 큰 검은 고양이였다. 저게 정말 고양이였을까? 아니면 혹시……? 무척이나 추운 밤이었다. 얇은 옷밖에 입지 않은 월터는 몸을 떨었다. 하지만 추운 것은 참을 수 있었다. 단지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것이 무서운 기분만 떨쳐버릴 수 있다면. 저 그림자며, 은밀하게 소곤대는 소리며, 저 숲 속에서 서성거리는 뭔지 모를 여러 가지 것들이 모두 무서웠다. 월터는 아무것도 무서운 것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젬처럼 말이다.

“난 아무것도 무섭지 않은 척할 거야.”
월터는 혼자 큰 소리로 말해보았다. 그렇지만 이 거대한 밤 속으로 울려 퍼지는 자기 목소리에 다시 한 번 놀라 몸을 떨어야 했다.
하지만 월터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엄마가 죽어가고 있으니 계속 가야만 했다. 한번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무릎이 멍들고 피부가 다 까지기까지 했다. 한번은 뒤에서 마차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와 나무 뒤에 숨어 마차가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월터가 없어진 것을 알고 파커 의사가 뒤쫓아 온 게 아닐까 싶어서였다. 길가에 시커먼 털이 난 것이 앉아 있는 걸 보고 덜컥 겁이 나 그 자리에 우뚝 서버리기도 했다. 그 옆을 지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도저히 지나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곳도 지났다. 커다란 검정 개였다. 정말 개였을까? 그러나 월터는 지나갔다. 그것이 쫓아올까 두려워 감히 달릴 수는 없었다. 월터는 공포에 질려 어깨너머로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개는 일어서더니 반대 방향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월터는 그 조그만 햇볕에 그을린 손을 이마에 대보았다.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저 멀리 하늘에서 별 하나가 불꽃을 흩뜨리며 떨어졌다. 별이 떨어졌을 때에는 누군가가 죽은 것이라고 키티 할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엄마일까? 한 발짝도 더는 걸을 수 없을 것 같던 기분이었지만 그런 생각이 들자 저도 모르게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게 되었다. 이제는 너무 추워서 무섭다는 생각도 잊어버렸다. 집에 가지 못하면 어쩌지? 로브리지를 떠난 지 틀림없이 몇 시간은 지났을 것이다.
세 시간이 지났다. 파커 저택을 몰래 나온 시간이 11시였는데 지금은 새벽 2시였다. 월터는 자기가 지금 글렌 마을로 가는 비탈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알자 마음이 놓인 나머지 흑흑 울음이 쏟아졌다. 넘어질 듯 비틀거리며 마을을 지나가는데 잠에 빠진 집들이 모두 아주 먼 곳에 있는 듯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집들이 다 자기를 잊어버린 듯 여겨졌다. 별안간 울타리 너머에서 소가 음매 하고 우는 소리가 들리자, 조 리즈 씨가 성질 사나운 황소를 기르고 있다는 생각이 번쩍 났다. 너무 무서워서 정신없이 달리고 언덕을 뛰어올라 어느새 ‘잉글사이드’ 대문 앞까지 와 있었다. 월터는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오, 집에 왔다!
그러나 빈집처럼 캄캄해서 잠시 몸을 떨며 그대로 멈추어 서버렸다. 월터는 따뜻하고 다정하게 불이 밝혀진 집을 기대했었다. 불이 켜지지 않은 ‘잉글사이드’라니!
하지만 잘 보았더라면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집 뒤쪽 방 하나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간호사가 이제 막 태어난 아기 옆에 함께 잠들어 있는 방이었다. 하지만 가슴이 무너져 내릴 대로 내린 월터의 마음에는 ‘잉글사이드’가 거의 버려진 집처럼 어두워 보이기만 했다. 월터는 아무리 밤이라도 어둠에 휩싸인 ‘잉글사이드’는 본 적도, 상상한 적도 없었다.
이 어둠은 엄마가 죽어버렸다는 뜻이다!
월터는 비틀거리며 집으로 이어지는 길을 걸어 들어갔다. 잔디밭에 드리워진 불길한 집의 검은 그림자를 밟고 현관으로 갔다. 문은 잠겨 있었다. 월터는 힘없이 문을 두드렸다. 문 두드리는 고리쇠가 있는 데까지 손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월터는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아도 집 안에서는 살아 있는 것의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엄마는 죽었고 모두가 집을 떠난 것이다.
이제는 온몸이 얼어붙고 힘이 다 빠져버려 울 수도 없었다. 월터는 헛간을 빙 돌아 사다리를 밟고 건초 더미 위로 올라갔다. 무서운 마음도 다 잊어버렸다. 다만 바람이 불지 않는 곳으로 가서 아침까지 누워 있고 싶었다. 내일 아침이면 죽은 엄마를 묻고 누군가가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누군가가 아빠한테 준 작고 날씬한 호랑이처럼 생긴 고양이가 월터 곁으로 와서 가르랑거렸다. 마른 클로버 풀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 월터는 반가운 마음에 고양이를 끌어안았다. 살아 있는 따뜻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닥을 쪼르르 달려가는 생쥐 소리가 나자 고양이는 가만히 있으려 들지를 않았다. 달이 거미줄 낀 창문을 통해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멀리 있고, 차갑기만 하고 동정심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달에서는 위안을 찾을 수 없었다. 글렌 마을 저 아래 외딴집에 켜져 있는 등불이 훨씬 더 친구 같았다. 저 불빛이 반짝이는 한 월터는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무릎이 몹시 아프고 추웠다. 배 속에서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나도 죽어가는지 모른다. 월터는 모든 사람이 죽었거나 사라졌다면 자기도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이 밤에 끝이 있을까? 다른 밤들은 항상 끝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오늘 밤만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항구 어귀 마을의 잭 플래그 선장이 해준 끔찍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자기는 정말로 화가 나면 아침이 와도 해가 떠오르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잭 선장이 정말로 화를 낸 거라면 어떻게 하지?
그러자 글렌 마을의 불빛마저 사라져버렸고, 월터는 이제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월터는 입에서 절망의 울음소리가 새어나오자마자 아침이 밝아온 것을 깨달았다.





10






월터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밖으로 나왔다. ‘잉글사이드’는 시간을 잊은 듯한 모습으로 첫 새벽빛 아래 신비롭게 서 있었다. 골짜기 자작나무 위 하늘이 희미한 은빛 어린 분홍빛으로 빛났다. 곁문으로는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빠가 들어올 수 있도록 수잔이 가끔 문을 열어놓은 채로 두니까.
곁문은 열려 있었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월터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아직 어두웠다. 월터는 가만가만 2층으로 올라갔다. 침대로 가고 싶었다. 내 침대로. 집에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도 거기서 죽어 천국으로 가 엄마를 찾으리라. 그런데 오펄이 천국은 여기서 아주 멀리 있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 또다시 절망감이 밀려들어 월터는 그만 발밑을 조심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 통에 층계 한 귀퉁이에 잠들어 있던 슈림프의 꼬리를 밟아버렸다. 깜짝 놀란 슈림프의 비명 소리가 온 집 안에 울려 퍼졌다.
방금 잠에 빠져들었던 수잔은 그 끔찍한 비명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수잔은 어제 오후와 밤 내내 일을 해서 완전히 지친 상태로 12시가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메리 마리아 블라이드는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른 참에 옆구리가 아프다고 불평해 그렇지 않아도 힘든 수잔을 더 힘들게 했다. 뜨거운 물주머니를 대령해야 했고 약도 발라주어야 했다. 거기다 ‘지병인 두통’이 생겼다면서 이마에 물수건까지 얹어달라고 했다.
수잔은 새벽 3시에 누군가 자기를 부르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다시 잠에서 깨어났다. 살며시 잠자리에서 일어나 밭끝으로 살살 걸어 블라이드 부인 방문 앞까지 가보았지만 방은 아주 조용했고 사모님의 부드럽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집을 한 바퀴 둘러본 다음 악몽을 꾸고 난 탓에 그런 묘한 기분이 들었거니 하며 잠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뒤로 죽을 때까지 수잔은 그날 밤 자기가 ‘심령 현상’을 체험한 것이라고 믿었다. 평상시 경멸해 마지않던 ‘심령술’에 빠진 애비 플래그의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었다.
‘월터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어.’
수잔은 확신했다.
수잔은 그날 밤 ‘잉글사이드’가 정말로 뭔가에 씐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잠자리에서 일어나 나왔다. 입고 있는 옷이라고는 잦은 세탁으로 줄어들어 앙상한 발목이 다 드러난 플란넬 잠옷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수잔의 모습은 계단참에 몸을 덜덜 떨며 서 있는 아이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월터는 얼굴이 창백했지만 기쁨에 찬 눈빛으로 수잔을 올려다보았다.
“월터 블라이드!”
단 두 걸음에 수잔이 달려와 그 듬직하고 다정한 품에 월터를 끌어안았다.
“아줌마, 엄마는 죽었어?”
월터가 물었다.
일순간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월터는 침대에 뉘어졌고 몸도 따뜻해졌다. 먹을 것을 먹고, 위로를 받았다. 수잔이 급히 불을 피우고, 뜨거운 우유와 알맞게 구운 토스트와 큰 접시에 월터가 아주 좋아하는 ‘원숭이 얼굴’ 쿠키를 가져왔다. 침대 발치에 뜨거운 물주머니까지 넣어주고 월터의 상처 난 작은 무릎에 입을 맞추고는 약을 발라주었다. 누군가가 자기를 돌봐주고, 자기를 필요한 존재로 인정해주고, 자기가 소중한 사람임을 깨닫는 것은 무척 기분 좋은 일이었다.
“아줌마, 엄마는 정말 죽지 않았지?”
“엄마는 곤히 아주 행복하게 잘 주무시고 계셔, 우리 어린것.”
“하나도 안 아팠어?”
오펄이 아프다고 했는데.
“글쎄, 엄마가 어제 좀 몸이 안 좋기는 했지만, 이제 다 끝났단다. 지금은 전혀 아프지 않아. 넌 이제 좀 자거라. 자고 일어나면 엄마를 볼 수 있어. 그리고 보여줄 게 또 있단다. 로브리지의 그 작은 악마들이 여기 있었다면, 아주 그냥! 정말 믿을 수가 없는 일이야. 로브리지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다니. 10킬로미터나! 그것도 이렇게 추운 날 밤에.”
“너무 무서웠어, 아줌마.”
월터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이제 다 끝났다. 이제는 안전하고 행복하다.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 집에 있다.
월터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월터가 눈을 떴을 때는 정오가 다 되었고, 방 창문으로는 햇빛이 찬란하게 비쳐들었다. 월터는 절뚝거리며 엄마를 보러 나갔다. 월터는 자기가 너무 어리석게 로브리지에서 도망쳐 왔으니 엄마가 혼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엄마는 한 손을 월터에게 뻗어 꽉 끌어안았을 뿐이었다. 수잔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은 앤은 파커 부인에게 몇 마디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 엄마, 엄마는 죽지 않은 거지? 그리고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 거지, 그렇지?”
“월터, 엄마는 죽지 않아. 그리고 너를 너무 사랑해서 가슴이 아플 정도란다. 밤중에 로브리지에서 그 먼 길을 걸어오다니, 어쩜!”
“배까지 쫄쫄 굶고요. 이 아이가 살아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게 기적이에요. 기적의 시대는 분명 아직 지나가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수잔이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작은 녀석이 용기도 있지.”
셜리를 어깨에 태우고 들어온 아빠가 웃으며 월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월터는 아빠의 손을 잡고 꼭 안았다. 이 세상에 아빠처럼 좋은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월터가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기분이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 이제 다른 데 가지 않아도 돼요, 엄마?”
“네가 가고 싶다고 할 때까지는 아무 데도 보내지 않을게.”
엄마가 약속했다.
“나는 이제 절대로…….”
말을 시작하다 월터는 그만두었다. 앨리스를 만나러 가는 것까지도 싫지는 않으니까.

“여기 좀 봐라, 월터.”
수잔이 흰 아기 옷을 입고 모자를 쓴 장밋빛 뺨의 아가가 누워 있는 요람을 들고 왔다.
월터는 바라보았다. 아가다! 부드럽고 촉촉한 곱슬머리가 머리를 덥고 있고 조그맣고 귀여운 손을 가진 포동포동한 갓난아기였다.
“예쁘지? 아기 속눈썹을 좀 봐. 난 갓난아기 속눈썹이 이렇게 긴 건 처음 봤어. 그리고 이 귀여운 작은 귀! 난 언제나 귀를 제일 먼저 본단다.”
수잔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기가 참 예뻐요, 아줌마. 저 귀여운 발가락 좀 봐요. 그런데 아기가 너무 작지 않나요?”
수잔이 웃었다.
“3.5킬로그램이면 작은 아기가 아니란다. 아기가 벌써부터 사람을 알아보는 것 같아. 태어난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벌써 머리를 쳐들고 의사 선생님을 보더라고. 난 아기가 그러는 건 평생 처음 본다.”
“아기 머리는 빨간색이 될 거야. 엄마를 닮아 아주 아름다운 붉은빛을 띤 금발이 될 거라고.”
블라이드 의사는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리고 눈은 아빠 눈을 닮은 갈색 눈이 될 거예요.”
앤도 기쁨에 넘쳐 말했다.
“왜 우리 식구 중엔 노란 머리가 없을까.”

앨리스를 생각하며 월터가 꿈꾸듯 중얼거렸다
“노란 머리! 드류 집안사람처럼 말이냐?”
수잔이 한없는 경멸을 담아 말했다.
“잠들어 있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요. 아기가 잠들었을 때 눈이 이렇게 귀엽게 주름진 아기는 처음 본다니까요.”
간호사도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말투로 말했다.
“기적 같은 아이예요. 우리 아기들은 모두 예뻤지만, 길버트, 이 아기가 제일 귀여운 것 같지 않아?”
앤이 말했다.
“넌 아기를 그렇게 많이 낳고도 그런 말이 나오니?”
메리 마리아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이 아기는 세상에 처음 나온 거잖아요, 메리 마리아 고모할머니.”
월터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수잔 아줌마, 아기한테 뽀뽀해줘도 돼요? 한 번만요, 제발, 응?”
월터가 묻자 수잔은 뒤돌아서 가는 메리 마리아의 등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럼, 되고말고. 난 이제 내려가서 점심에 먹을 체리 파이나 만들어야겠다. 메리 마리아 고모가 어제 오후에 체리 파이를 만들기는 했는데, 내 참, 사모님한테 한번 보여주고 싶다니까요. 그게 꼭 고양이가 어디서 끌어다놓은 물건 같아요. 버리기 아까워서 먹어보려고 했지만 내가 건강하고 힘이 있는 한은 그런 파이를 의사 선생님 앞에 내놓을 수 없는 일이에요. 정말이라고요.”
“파이 만드는 솜씨야 수잔을 따를 사람이 없지요.”
앤이 말했다.
“엄마, 우리는 아주 좋은 가족이지요, 그렇죠?”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수잔이 문을 닫고 나가자 월터가 말했다.
아주 좋은 가족! 앤은 아기 옆에 누우며 행복한 생각에 잠겼다. 곧 다시 일어나 가족과 함께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 안을 돌아다닐 것이며, 아이들을 사랑하고, 가르치고, 위로해줄 것이다. 아이들은 저마다 작은 기쁨과 슬픔, 피어나는 희망, 새로 알게 된 공포, 작은 아이들로서는 너무나 큰 문제로 여겨질 테지만 사실은 하찮은 문제, 역시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괴롭게 여겨질 테지만 사실은 별것 아닌 마음의 상처를 갖고 앤에게 다가올 것이다.
앤은 다시 ‘잉글사이드’의 삶을 엮어갈 실타래를 자기 손안에 쥐고 아름다운 태피스트리를 짜나갈 것이다. 그리고 메리 마리아가 이틀 전에 길버트를 보며 “몹시 지쳐 보여. 도대체 우리 조카는 아껴주는 사람도 없는 거야?” 하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젠 길버트가 그런 소리를 듣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래층에서는 메리 마리아가 낙심해서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갓 태어난 아기 다리는 다 좀 구부러져 있다는 건 알지만, 수잔, 저 아기 다리는 너무 심하게 휜 것 같지 않아? 물론 이런 말을 저 가여운 애니에게 해서는 안 되겠지. 애니에게는 절대로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수잔.”
수잔은 다시 한 번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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