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6권 11~12

나단비 | 2024.04.09 23:26:36 댓글: 0 조회: 57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9780
11






8월 말이 되자, 앤의 몸도 회복되어 행복한 가을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베르타 마릴라 아가는 언니와 오빠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나날이 예쁘게 무럭무럭 자랐다.
“난 아가들은 날마다 악쓰고 울기만 하는 줄 알았어. 버티 셰익스피어 드류가 그렇다고 했거든.”
젬이 그 고물고물한 손으로 자기 손을 잡으려 드는 아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버티네 아기라면 일 년 내내 울기만 할 거야, 젬. 드류 집안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눈물이 나올 만도 하잖아. 하지만 베르타 마릴라는 ‘잉글사이드’ 아기니까 울지 않아.”
수잔이 말했다.
“나도 ‘잉글사이드’에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걸, 아줌마.”
젬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젬은 언제나 자기가 이 집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유감이었다. 다이가 종종 그 문제를 꺼내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넌 여기 사는 게 좀 지루하지 않니?”

언젠가 샬럿타운에 사는 퀸스 학교 시절 친구가 찾아와 앤에게 그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지루하냐고!” 
앤은 손님의 면전에서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잉글사이드’에서의 생활이 지루하다니! 날이면 날마다 저 어여쁜 아이들이 생각지도 못한 놀랄 일을 만들어내고, 다이애나와 꼬마 엘리자베스, 그리고 레베카 듀가 찾아오기로 되어 있고, 길버트가 돌보고 있는 윗마을의 샘 엘리슨 부인은 전 세계에서 세 사람밖에 걸린 일이 없다는 희귀병을 앓고 있으며, 월터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낸은 엄마 화장대에 놓인 향수 한 병을 다 마셔버렸는데도 멀쩡하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모두들 낸이 죽을 거라고 야단이 났었다. 게다가 낯선 검은 고양이가 뒤 베란다에다 새끼고양이를 열 마리나 낳아놓았다. 고양이가 새끼를 그렇게 많이 낳을 수 있다니, 그런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그뿐인가, 셜리는 욕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는 문을 열 줄 몰라 갇혀버렸고, 슈림프는 파리 잡는 끈끈이 종이 위에 나뒹굴어버렸으며, 메리 마리아는 한밤중에 촛불을 들고 돌아다니다 커튼에 불이 붙어버렸다. 그러고는 놀라 어찌나 끔찍한 비명을 질렀는지 온 집안 식구가 다 일어났다. 이런 생활이 지루하다니!
메리 마리아는 여전히 ‘잉글사이드’에 살고 있다. 그녀는 때때로 “나랑 같이 사는 게 싫으면 언제든 말하려무나. 난 나 스스로를 돌보며 사는 일엔 익숙해.” 하고 말했다. 그 말에 물론 길버트는 언제나 한결같은 대답을 해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길버트도 처음처럼 진심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길버트의 ‘자기 친척을 싸고도는’ 마음도 좀 식어가기 시작했다. 메리 마리아가 이 집안에서 좀 귀찮은 사람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깨닫고 있는 것이었다.
미스 코넬리아가 알았다면 ‘사내들이 다 그렇지, 뭐!’하고 코웃음을 쳤을 테지만. 어느 날엔가는 집이란 사람이 살지 않으면 못 쓰게 돼버리는 것이라고 은근히 그녀를 떠보는 말을 해보기도 했다. 그랬더니 메리 마리아도 길버트 말에 얼씨구나 찬성하고 나섰다. 그래서 샬럿타운의 자기 집을 팔려고 생각한다나.
“좋은 생각이네요. 마침 시내에 팔려고 내놓은 아담한 집이 있습니다. 제 친구가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가려고 하거든요. 고모님이 좋아하는 사라 뉴먼 부인의 집과 아주 비슷한 집이에요.”
길버트는 부추겼다.
“하지만 혼자서 살아야 한다면…….”
메리 마리아는 한숨을 쉬었다.
“그분은 혼자 사는 것도 좋다던데요.”
앤은 이 일이 잘 매듭지어지기를 바라며 말했다.
“혼자 사는 것이 좋다는 사람에게는 뭔가 문제가 있는 거야, 애니.”
메리 마리아가 말했다.
수잔은 신음소리가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9월이 되자 다이애나가 찾아와 일주일 동안 머물렀다. 그런 다음에는 꼬마 엘리자베스가 찾아왔다. 엘리자베스는 이제 더 이상 꼬마가 아니었다. 키도 크고 날씬하니 무척이나 아름다운 아가씨가 되어 있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금발 머리에 생각에 잠긴 듯 미소 띤 얼굴이었다. 아버지가 파리 지사로 돌아가게 되어 엘리자베스도 함께 파리로 간다고 했다. 앤과 엘리자베스는 함께 해안과 항구를 오랫동안 거닐었고, 둘을 지켜보는 가을 별빛을 이고 말없이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둘은 ‘윈디 포플러’에 살던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엘리자베스가 아직도 지니고 있는 요정 나라 지도에 나온 것들을 따라가 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는 이 지도를 평생 간직할 것이라고 했다.
“어디를 가든지 제 방 벽에 걸어둘 거예요.”
어느 날 ‘잉글사이드’ 뜰로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갔다. 처음 불어오는 가을바람이었다. 그날 밤에는 장밋빛 저녁놀도 좀 엄숙해 보였다. 별안간에 여름이 늙어버렸고, 계절의 변화가 느껴졌다.
“가을이 너무 빨리 왔어.”
메리 마리아는 마치 가을이 자기를 모욕이라도 하는 듯 투덜거렸다.
하지만 가을 역시도 아름다웠다. 짙푸른 만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즐거운 듯했고, 추수의 계절에 덩그렇게 떠오른 보름달도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골짜기에는 서정미 넘치는 국화가 피어났고,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 과수원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왔다. 윗마을 높은 언덕 목장 위로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저녁 풍경이 펼쳐졌고, 비늘구름이 덮인 하늘에는 새가 날았다. 해가 짧아지면서 잿빛 안개가 모래 언덕을 슬금슬금 넘어 항구로 올라왔다.
낙엽이 떨어질 무렵 레베카 듀가 ‘잉글사이드’로 찾아왔다. 벌써 몇 년 전부터 한번 방문하겠다던 약속을 지킨 것이다. 1주일을 머물 예정으로 왔는데, 이곳 사람들 만류에 못 이겨 2주일 동안 지내다 갔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붙잡은 사람은 수잔이었다. 수잔과 레베카 듀는 첫눈에 서로가 영혼이 통하는 친구임을 알아보았다. 아마 두 사람 다 앤을 사랑하고, 두 사람 다 메리 마리아를 싫어한 까닭인지도 모를 일이다.

떨어진 나뭇잎 위로 부슬비가 내리고, 바람이 ‘잉글사이드’의 처마 밑과 집 구석구석으로 몰아치는 어느 날 저녁 무렵, 두 사람은 부엌에서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수잔은 자기 말에 온 마음을 다해 귀 기울여주는 레베카 듀를 향해 온갖 불만을 다 토로하는 중이었다. 의사 내외는 외출 중이었고, 이 집의 어린것들은 모두 아늑한 침대에 들었으며, 다행스럽게도 메리 마리아는 두통이 있다면서 신음을 하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내 머릿속에서 쇠망치를 두드려대는 것 같아.”
“누군들 머리가 안 아프겠어요.”
레베카 듀가 아궁이 문을 열고 편안하게 안으로 발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저녁 식사 때 고등어튀김을 그 양반처럼 많이 먹으면 두통이 나는 게 당연해요. 나도 내 몫은 먹었지만 말예요. 아무튼 미스 베이커처럼 고등어튀김을 잘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나는 네 토막이나 먹지는 않았다고요.”
“미스 듀, 있잖아요.”
수잔이 뜨개질거리를 내려놓고 레베카의 작고 검은 눈을 간청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미스 듀도 여기서 지내면서 메리 마리아 블라이드가 하는 짓거리들을 다 보았잖아요. 하지만 그건 절반밖에 모르는 거라고요. 아니, 절반에 절반도 아니에요. 있잖아요, 미스 듀, 난 미스 듀에게는 어쩐지 신뢰가 가요. 내 마음을 솔직하게 다 털어놓아도 될까요?”
“그럼요, 미스 베이커.”

“저 여자는 지난 6월에 여기로 왔어요. 내 생각엔 저 여자가 평생 여기 살 작정인 거예요. 이 집에 사는 사람은 모두 저 여자를 아주 싫어해요. 심지어는 의사 선생님까지요. 그런 자기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지만 다 알 수 있다고요. 하지만 의사 선생님은 자기 가족이라면 끔찍하게 생각하고 자기 아버지 사촌이 이 집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죠. 나는 간청하다시피 했어요. 내가 사모님에게 마음 독하게 먹고 메리 마리아 블라이드를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하라고 간청했다니까요. 하지만 사모님이 인정 많은 사람이잖아요. 그러니 우리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죠. 미스 듀, 우리는 정말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요.”
수잔은 자기가 마치 무릎을 꿇고 빌어보기라도 했다는 어조로 말했다.
“내가 이 일을 어찌해볼 수 있는 처지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럼 내가 이 일을 아주 분명하게 해결해버릴 텐데. 하지만 미스 베이커, 우리는 이 집안의 신성한 손님 대접 예법을 깨뜨리면 안 되죠.”
메리 마리아가 한 말로 크게 마음이 상했던 레베카 듀가 말했다.
“나도 내 분수를 생각지 않는다면 그 여자를 어찌해 볼 수는 있어요, 미스 듀. 그렇지만 내가 이 집 안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니까 가만히 있는 거죠. 그렇지만 가끔씩은 있잖아요, 미스 듀. 나도 내 자신에게 진지하게 묻는 답니다. ‘수잔 베이커, 넌 저 현관에 깔린 신발털이냐?’ 하고요. 그래도 내가 뭐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잖아요.
내가 사모님의 뜻을 모른 체하고 메리 마리아 블라이드와 분란이나 일으켜 일을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니 난 죽으라고 내 할 일이나 할 수밖에요. 난 우리 의사선생님이나 사모님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어요. 저 여자가 오기 전에 우린 정말로 행복한 가족이었어요, 미스 듀. 그런데 저 여자가 우리 생활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있다고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내가 예언자가 아니니 뭐라 말할 수 없죠, 미스 듀. 아니, 알죠. 우리 모두 미쳐버려 정신병원에 들어가고 말 거예요. 나쁜 일이 그것 하나만은 아니죠, 미스 듀. 많아요, 수백 가지예요, 미스 듀. 모기도 한 마리라면 참을 수 있죠, 미스 듀. 하지만 수백 마리라고 생각해보세요.”
수잔이 무척이나 진지하게 말했다.
레베카 듀는 수백 마리의 모기를 생각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모님에게도 언제나 잔소리를 해대요. 집안 살림하는 방식이며, 심지어 입는 옷에 이러쿵저러쿵 말이 어찌나 많은지 몰라요. 나도 줄곧 감시하고요. 그리고 이렇게 싸움질을 잘하는 아이들은 본 일이 없다느니 하는 말을 하죠. 미스 듀, 우리 집 아이들이 싸우는 것 봤나요? 우리 애들은 절대로 싸우는 법이 없는 아이들이라고요.”
“난 여태 이렇게 착하고 귀여운 아이들은 본 적이 없는걸요, 미스 베이커.”
“공연히 참견하고 다니며 트집이나 잡는 거라고요.”
“나도 내 눈으로 그러는 걸 직접 봤어요, 미스 베이커.”
“무슨 일에든 항상 기분이 상하고 슬프다고 탄식을 하면서도 화가 나서 나가버리지는 않아요. 냉대를 받아 슬프다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어 사모님을 어쩔 줄 모르게 해버리죠. 무슨 일이건 마음에 드는 일이 하나도 없어요. 창문이 하나라도 열려 있으면 찬바람이 들어온다고 불평이고, 창문이 모두 닫혀 있으면 신선한 공기를 들어오게 해야 한다고 야단이죠. 양파도 싫어해요. 그 냄새를 견딜 수 없다나요. 그래서 사모님은 양파를 쓰지 말라고 해요.”
수잔은 지금까지 한 얘기에 이렇게 덧붙이며 아주 당당하게 가슴을 펴보였다.
“양파는 어느 집에서나 먹는 거잖아요. 하지만 미스 듀, 글쎄 ‘잉글사이드’에서는 양파를 먹는 게 죄가 된답니다.”
“양파는 나도 아주 좋아해요.”
레베카 듀도 인정했다.
“글쎄, 고양이도 싫어해요. 고양이를 보면 소름이 돋는다나요. 고양이가 눈에 보이고 안 보이고가 문제가 아니라 집에서 고양이를 기른다는 생각만으로도 싫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 가여운 슈림프는 감히 집 안에 얼굴도 내밀지 못하죠. 나도 고양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미스 듀, 고양이도 제 꼬리를 흔들 권리야 있지 않겠어요. 그리고 이런 말들이나 늘어놔요. ‘수잔, 난 계란을 못 먹는다는 걸 결코 잊지 말아요.’, ‘수잔, 난 식어빠진 토스트는 안 먹는다는 걸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어?’, ‘수잔, 어떤 사람은 졸아붙은 차를 마실 수 있는지 모르지만, 운 나쁘게도 난 그런 건 못 마셔요.’ 미스 듀, 졸아붙은 차래요. 마치 내가 졸아붙은 차를 내놓는 사람인 것처럼요.”
“아무도 미스 베이커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이 사람은 물어도 될 일인지 아닌지 가리지 않고 되는 대로 다 물어요. 선생님이 무슨 이야기를 자기보다 사모님에게 먼저 해준다고 질투를 다 한다니까요. 그리고 환자들 일로도 뭐든 캐내려고 들어요. 선생님은 그런 걸 물으면 싫어하거든요, 미스 듀. 모든 사람이 다 알다시피 의사란 모름지기 입이 무거워야 하는 거잖아요.
또 언제나 ‘불! 불!’ 해요. ‘수잔 베이커, 석유로 불이나 내지 않으면 좋겠는데.’, ‘기름 묻은 수건을 아무 데나 두어선 안 돼, 수잔. 기름 묻은 수건은 한 시간도 안 되어 저절로 불이 붙어버린다고. 이 집이 불타버리면 좋겠어? 수잔 잘못으로 불이 난 건지 뻔히 알면서 불타는 집을 바라보면 심정이 어떻겠느냐고?’ 하는 말들을 늘어놔요.
미스 듀, 있잖아요. 난 그런 말을 들으면 속으로 비웃어줘요. 그런데 그 여자가 바로 그 말을 한 날 자기 방 커튼에 불이 붙게 했어요. 아직도 내 귀에 그 비명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아요. 그날 밤 우리 가여운 의사 선생님은 이틀 밤이나 꼴딱 새우고 잠이 든 지 한 시간도 채 안 되었다고요.
그리고 내가 가장 화나는 일이 뭔지 알아요, 미스 듀? 이 사람은 글쎄 외출을 하기 전에 꼭 부엌으로 와서 달걀을 세어봐요. ‘왜 숟가락도 세어보지 않나요?’ 하고 말해주고 싶은 것을 참으려면 온갖 교양과 인내심을 다 동원해야 해요. 물론 아이들도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요. 사모님은 아이들이 그런 내색을 하지 않게 하려고 아주 애를 먹고 있어요. 그 여자가 말이에요, 한번은 의사 선생님이랑 사모님이 없을 때 낸의 따귀를 때린 일도 있어요. 따귀를 말예요. 개구쟁이 아이인 켄 포드의 흉내를 내어 낸이 그 사람한테 ‘메퓨살레 부인’이라고 불렀다고 그런 짓을 했어요.”
“내가 봤으면 나도 그 여자 따귀를 갈겨주었을 거예요.”
레베카 듀가 불같이 화를 냈다.

“나도 다시 한 번만 그런 짓을 하면 당신 따귀를 갈겨주겠다고 쏘아줬어요. ‘잉글사이드’에서는 가끔 볼기를 때려주는 일은 있어도 따귀 때리는 일은 절대로 없다고 해주었답니다. 그랬더니 일주일 동안 샐쭉해서는 지내더라고요. 어쨌거나 그 일 이후로는 다시는 애들에게 손가락 하나 못 대죠. 애들이 혼나면 또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어느 날 저녁에는 젬에게 ‘내가 네 엄마라면’ 하고 말을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이 아이가 ‘오, 고모할머니가 누구의 엄마가 될 리가 없지요.’ 하고 말대꾸를 해버렸지요. 젬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어요. 정말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요. 그런데 의사 선생님은 젬을 저녁도 먹이지 않고 제 방으로 보내버렸어요. 하지만 미스 듀, 누가 나중에 몰래 젬 방으로 먹을 걸 갖다 주었게요?”
“오, 누구일까요?”
얘기에 한참 재미를 느낀 레베카 듀가 낄낄거리며 되물었다.
“그날 밤 젬이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다면 미스 듀도 가슴이 무너졌을 거예요. 젬이 스스로 그렇게 기도를 올렸어요. ‘오, 하느님, 저를 용서해주세요. 메리 마리아 고모할머니에게 건방지게 군 걸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오, 하느님, 제가 언제나 메리 마리아 고모할머니에게 예의 바르게 굴 수 있도록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그 기도 소리를 듣고 난 눈물이 다 났어요. 난 아이가 어른에게 실례되는 말을 하거나 제멋대로 구는 건 용납하지 않지만요, 미스 듀.
언젠가 버티 셰익스피어 드류가 공처럼 만든 종이 뭉치를 고모할머니에게 던진 일이 있지요. 아, 그것이 메리 마리아 코에 맞을 뻔했는데 조금 빗나가고 말았어요, 미스 듀.

나는 대문에 서 있다가 집에 가려는 버티를 붙들어 도넛 한 봉지를 주었어요. 물론 그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지요. 버티는 신이 났지요. 도넛이 저절로 나무에 열리는 물건은 아니니까요. ‘피도 눈물도 없는 아줌마’인 그 애 엄마는 아이들에게 도넛 같은 건 절대로 만들어주지 않거든요. 그리고 낸과 다이는 있잖아요…….
이 이야기는 미스 듀 말고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어요. 선생님도 사모님도 꿈에도 모르는 일이에요. 알게 되면 못 하게 야단을 치겠지요. 그 애들은 머리가 깨진 사기 인형에 메리 마리아 고모할머니란 이름을 붙였어요. 그리고 고모할머니가 자기들을 꾸중하는 소리를 하기만 하면 그 도자기 인형을 들고 나가 그 여자를, 아니 그 인형을 빗물받이 통에 거꾸로 처박아준답니다. 벌써 몇 번이나 아주 재밌어라 하면서 거꾸로 처박았지요. 그런데 지난밤에 그 사람이 또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요, 미스 듀도 아마 기가 막힐 일이라고 할 거예요.”
“그 사람 하는 짓 중에 기막히지 않은 일이 어디 있나요, 미스 베이커.”
“메리 마리아가 무슨 일로 기분이 상해서는 저녁을 한 입도 먹지 않았어요. 그런데 자기 전에 부엌으로 내려와서는 의사 선생님에게 주려고 남겨둔 밤참을 남김없이 먹어 치워버린 거예요. 미스 듀,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날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지는 말아요. 하지만 난 왜 하느님이 그런 사람을 봐주는지 잘 모르겠어요.”
“유머감각을 잃어서는 안 돼요, 미스 베이커.”
레베카 듀가 확고하게 말했다.
“오, 나도 모든 박해받는 사람에게서도 웃을 일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미스 듀. 하지만 그 박해받는 당사자도 그것을 알겠느냐는 거예요. 내가 이런 말을 늘어놓아서 미스 듀를 귀찮게 했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난 덕분에 속이 후련해졌어요. 이런 말을 사모님에게 늘어놓을 수도 없잖아요. 그리고 요즘 기분이 그랬어요. 뭔가 내 마음을 털어놓을 출구를 찾지 못하면 터져버릴 것 같았다고요.”
“나도 그 기분 잘 알아요, 미스 베이커.”
“그럼 미스 듀, 자기 전에 차 한 잔 들겠어요? 그리고 찬 닭다리 고기는 어때요, 미스 듀?”
수잔은 기분 좋게 일어나며 물었다.
“인생의 보다 높은 것을 잊어서는 안 되지만, 맛있는 음식도 상당히 좋은 것이라는 걸 나는 부인한 적이 없어요.”
레베카 듀는 아궁이에서 따뜻해진 다리를 빼며 말했다.




12







길버트는 노바스코샤로 가서 2주 동안 도요새 사냥을 하며 지내다 왔다. 아무리 앤이라도 한 달 동안 쉬라고 설득할 수는 없었다. 11월도 끝나갔다. 해 질 녘 어스름이면 시커먼 언덕에 위엄 있게 무리지어 서 있는 가문비나무가 언덕보다도 더 시커멓게 보였고, 대서양에서는 바람이 슬픈 노래를 부르며 불어 닥쳤지만, ‘잉글사이드’는 난로 불빛과 웃음으로 환하기만 했다.
“왜 바람은 행복하지 않아요?”
어느 날 밤 월터가 물었다.
“바람은 이 세상이 시작된 순간부터 생겨난 슬픔을 모두 기억하고 있어서 그렇단다.”
앤이 대답해주었다.
“공기가 너무 습해서 그래. 그래서 내 허리도 이렇게 아픈 거고.” 메리 마리아가 헛소리 말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어떤 날은 바람이 은회색 단풍나무 숲으로 즐겁게 불어왔고, 또 어떤 날은 전혀 바람이 불지 않고 마치 봄날처럼 햇볕마저 따뜻하여 잎을 떨어뜨린 나무들이 잔디밭 가득 조용히 그림자를 드리우다가 해 질 녘이 되어서야 차가운 고요함이 감돌았다.
“저 구석에 서 있는 미루나무 위로 나온 하얀 저녁별 좀 보렴. 난 저렇게 아름다운 것을 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게 너무 기쁘단다.”
앤이 말했다.
“넌 참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애니. 프린스에드워드 섬에서 별은 흔하디흔한 거잖니.”
메리 마리아가 그렇게 말을 하고는 혼자 생각했다.
‘별이라니, 정말이지! 마치 별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말을 하잖아. 도대체 애니는 수잔이 날마다 부엌에서 얼마나 낭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야. 수잔 베이커는 계란도 함부로 써대고, 라드 기름4)도 줄줄 흘러내릴 때까지 쓰는 것을 모르고 살잖아. 아니, 알면서도 신경을 안 쓰는 걸까? 길버트도 참 가엾어! 길버트가 그렇게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11월은 잿빛과 갈색 옷을 입고 떠났다. 아침이 되자 눈이 하얀 마법을 부려 젬은 환성을 지르며 달려 내려왔다.
“아, 엄마, 이제 곧 크리스마스가 되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찾아오는 거죠?”
“넌 아직도 산타클로스를 믿는 거니?”
메리 마리아가 핀잔을 주었다.
앤은 얼른 길버트에게 눈짓을 했다.
“저희는 아이들에게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요정 나라의 꿈을 간직하도록 해주고 싶습니다, 고모님.”

길버트가 진지하게 말했다.
다행히도 젬은 메리 마리아 고모할머니가 한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젬과 월터는 겨울이 제 스스로 아름답게 치장한 세상으로 달려 나가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앤은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세상에 발자국을 찍어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보랏빛 언덕 사이 하얀 골짜기 위로 펼쳐진 서쪽 하늘은 불길처럼 붉게 타올랐다.
앤은 단풍나무 장작을 태우고 있는 거실 난로 앞에 앉아 있었다. 난로 불빛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불꽃이 장난치듯 까불거리면서 생각지도 못한 모양을 만들어낸다. 불빛에 방 한 부분이 밝아졌다 곧 다시 사라져버리기도 하고 어떤 그림이 떠올랐다가 또 꺼져버린다. 그림자가 숨어서 엿보기만 하다 갑자기 통통 튀어 오르기도 했다. 아무것도 가린 것이 없는 커다란 창문을 통해 거실의 모든 장면이 잔디밭에 요괴스러운 그림자로 비쳐졌다.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는 메리 마리아의 그림자는 스코틀랜드 소나무 아래 드리워졌다. 메리 마리아는 ‘맥없이’ 기대앉거나 하는 법이 없었다.
길버트는 소파에 ‘맥없이’ 기대앉아 그날 폐렴으로 숨을 거둔 환자 생각을 잊으려 애쓰고 있었다.
아기 릴라는 요람 속에서 자기의 분홍빛 주먹을 입에 넣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고, 슈림프는 메리 마리아가 못마땅해하거나 말거나 하얀 앞발을 가슴 아래 감추고 난로 앞 깔개에 앉아 가르랑거렸다.
“고양이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아무도 고양이 때문에 불평을 하지 않지만 말이다. 어젯밤에 글렌 고양이들은 모두 여기로 모인 모양이더라. 그렇게 고양이들이 울어대는데도 어떻게 잠을 자는지 모르겠어. 나는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물론 내 방은 뒤뜰 쪽에 있어 무료음악회를 더 잘 감상했겠지만 말이다.”
메리 마리아가 측은하게 말했다.
누구도 그 말에 대답할 겨를도 없이 수잔이 들어와 카터 플래그네 상점에서 엘리엇 부인을 만났는데, 장을 본 후에 잠시 들르겠다고 했다는 말을 전했다. 수잔은 미스 코넬리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블라이드 부인에게 무슨 일이 있어, 수잔? 지난 일요일 교회에서 만났을 때 얼굴이 몹시 안 좋아 보이는 게 무슨 걱정이 있는 것 같았어. 전에는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하더란 말까지는 전하지 않았다.
“블라이드 부인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내가 말해드리지요. 우리 사모님은 메리 마리아 고모 때문에 죽을 지경이라고요. 그런데 우리 의사 선생님은 그걸 알지도 못하는 것 같아요. 사모님이 밟은 땅이면 땅에다라도 절을 할 분인데도요.”
수잔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사내들이 다 그렇지요, 뭐.”
미스 코넬리아는 말했다.
“정말 잘됐네요. 미스 코넬리아를 본 지도 한참이나 됐는데. 할 얘기가 무척 많을 거예요.”
앤이 램프에 불을 밝히며 말했다.
“그렇지.” 
길버트가 무심하게 말했다.
“그 여자는 아주 사악한 말을 많이 해.”

메리 마리아가 매정하게 말했다.
수잔은 평생 처음으로 미스 코넬리아를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세상에나, 사모님,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거예요? 이 수잔 베이커는 엘리엇 부인이 틀린 소리 하는 걸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사악한 마음이라니요! 사악하다고 했어요, 그 말 들었어요, 사모님? 똥 묻은 겨가 재 묻은 겨를 흉본다고 하더니, 나 원.”
“수잔…… 수잔.”
앤이 간청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죄송하게 되었네요, 사모님. 내가 분수도 모르고 함부로 끼어들었어요. 하지만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라고요.”
그러고는 ‘잉글사이드’에서는 좀처럼 들어볼 수 없는 세차게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있잖니, 애니, 네가 집안사람 단속을 못 하면 다른 사람이야 속수무책이다.”
메리 마리아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길버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일에 지친 남자가 얼마간의 휴식을 찾을 수 있는 서재로 갔고, 미스 코넬리아를 좋아하지 않는 메리 마리아는 잠을 잔다면서 물러났다. 마침내 미스 코넬리아가 왔을 때 앤은 혼자 힘없이 아기 요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미스 코넬리아는 언제나처럼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기 전에 먼저 시장 보따리를 옆에 내려놓고 앤 곁으로 와서 앤의 손을 꼭 잡았다.

“앤, 무슨 걱정거리 있어요? 분명 뭔가 있어요. 저 철딱서니 없는 메리 마리아 할망구 때문에 신경 쓰여 죽을 지경인 거죠?”
앤은 미소를 지어보려 했다.
“오, 미스 코넬리아, 저도 그 일로 이렇게 신경을 쓰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고모님을 견딜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 종종 있어요. 고모님은 우리 모두의 생활을 망치고 있어요.”
“그럼 그만 가라고 말하지 그래요?”
“우린 그럴 수 없어요, 미스 코넬리아. 적어도 나는 그럴 수가 없고, 길버트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거예요. 자기 손으로 자기 핏줄을 내쫓고 나면 다시는 자기 얼굴을 똑바로 보고 살 수 없을 거라고 했거든요.”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소리예요. 그 사람은 돈도 많겠다, 좋은 집도 있겠다, 자기 집에 가서 사는 게 더 좋겠다는 게 왜 내쫓는 거예요?”
미스 코넬리아가 웅변적으로 말했다.
“저도 알아요. 하지만 길버트가, 길버트는 모든 일을 다 알지는 못해요. 항상 밖에 나가 있잖아요. 그리고 사실은, 모든 것이 그 자체만 보면 별일도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이런 마음이 드는 게 더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해해요. 그런 문제는 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당하는 사람한테는 큰 문제인 법이에요. 물론 남자들이야 이런 일을 잘 모르죠. 내가 메리 마리아를 잘 안다는 샬럿타운에 사는 한 부인을 아는데요, 그 부인이 하는 말로는 메리 마리아 블라이드는 평생 친구라고는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이름을 블라이드가 아니라 블라이트5)라고 불러야 한다고 했다니까요. 지금 앤이 해야 할 일은 마음 단단히 먹고 이제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고 말하는 거예요.”
“제 기분이 어떤 줄 아세요? 아무리 달리려고 해도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다리를 질질 끌어야 하는 꿈을 꾸는 것 같아요. 가끔씩 당하는 일이라면 몰라도 날마다 그래요. 이제는 식사 시간이 오면 끔찍한 기분이 들어요. 길버트는 이제 고기도 못 자르겠대요.”
앤이 슬프게 말했다.
“의사 선생님도 다 아는 거예요.”
미스 코넬리아는 경멸하듯 말했다.
“식사 시간에 마음 터놓고 대화를 나누어본 지도 오래됐어요. 누가 무슨 말만 하면 꼭 불쾌한 소리를 하거든요. 아이들 태도가 어떻다느니 하면서 언제나 잔소리를 하고, 손님이 있어도 아이들의 결점을 지적하고 나무라요. 전에는 식사 시간이 참 즐거웠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가 못하죠.
고모님은 웃는 것을 싫어해요. 우리는 사소한 일로도 언제나 웃고는 했는데 말이에요. 늘 누군가가 우스운 일을 찾아내 얘기하고는 했어요. 거기다 고모님은 무슨 일이고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요. 오늘은 뭐라고 한 줄 아세요? ‘길버트, 그렇게 부루퉁해 있지 말게. 애니와 싸웠나?’ 우리는 그저 조용히 있었을 뿐이에요.
길버트는 꼭 살리고 싶은 환자를 살려내지 못했을 땐 좀 우울해하거든요. 그러고는 우리더러 어리석다고 설교를 늘어놓고 화난 마음으로 해가 지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더라고요. 모두 나중에 생각해보면 웃음이 날 일이죠. 하지만 당시는 웃는 게 다 뭐예요!

고모님은 수잔과도 잘 지내지 못해요. 그렇다고 우리는 수잔이 얼굴을 돌리고 투덜거리는 것까지 예의에 벗어난다고 말릴 수도 없어요. 고모님이 월터 같은 거짓말쟁이는 처음 본다고 했을 때는 수잔이 그냥 중얼거렸다고만은 말할 수 없지만요.
월터가 달에서 어떤 남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고 다이에게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걸 메리 마리아 고모님이 들은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꾸며냈다고 글쎄 월터의 입을 비눗물로 박박 씻어주어야 한다고 해서 수잔과 크게 말다툼이 났죠.
게다가 고모님은 아이들의 마음에 끔찍하고 이상한 생각을 심어주어요. 낸에게는 말썽부리는 아이는 자다가 그대로 죽는다고 겁을 주어서 그 얘기를 들은 다음부터 낸이 잠자는 걸 무서워해요.
다이에게는 늘 착하게 행동을 하면 네 머리가 빨간 머리라도 아빠와 엄마가 너도 낸만큼 사랑해줄 거라고 했대요. 그 이야기를 듣고는 길버트도 정말로 화가 나서 고모님에게 좀 뼈가 있는 말을 했어요. 그땐 저도 속으로 고모님이 그 말에 기분이 상해서 집으로 가겠다고 해주길 바랐죠. 어떤 사람이든 화를 내고 우리 집에서 나가는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니지만요.
그런데 고모님은 그 커다란 푸른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고 사과를 하더라고요. 쌍둥이라고 해서 언제나 공평하게 사랑받을 수는 없는데, 우리가 낸을 더 사랑하는 것을 다이가 가엾게도 다 알고 있다 싶어서 그런 말을 한 것뿐이라나요.”
“어이구, 세상에나.”
미스 코넬리아가 한탄을 했다.
“오, 내가 이런 말을 늘어놓는 것이 아닌데 그랬어요, 미스 코넬리아. 내가 누리고 있는 축복을 생각해서라도 이런 것들에 마음을 쓰면 안 되는데. 고모님 때문에 생활이 좀 덜 즐겁다 해도요. 그리고 고모님이 언제나 그렇게 싫게만 행동하는 것도 아니에요. 때로 상냥할 때도 있어요.”
“그런 말이 나와요?”
미스 코넬리아가 아주 빈정거리듯 말했다.
“정말이에요. 상냥할 때도 있다고요. 제가 오후 차 시간에 쓸 다기를 갖고 싶다는 말을 듣고는 토론토에다 그걸 주문해주셨어요. 미스 코넬리아, 그런데 그게 말이에요, 받고 보니 아주 보기 흉하게 생겼더라고요.”
앤은 웃다가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다시 웃었다.
“이제 메리 마리아 고모 이야기는 그만두어요. 모두 쏟아놓고 보니 이게 그렇게 나쁜 일도 아닌 것 같네요. 우리 릴라를 좀 보세요, 미스 코넬리아. 자고 있을 때 보면 속눈썹이 무척 길고 예쁘죠? 자, 이젠 기분 좋은 이야기를 나누어요.”
미스 코넬리아가 가고 나자 앤은 다시 혼자가 되어 불가에 한참 동안이나 생각에 잠겨 앉아 있었다. 미스 코넬리아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다한 것도 아니었다. 길버트에게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못했다. 하찮은 일이라도 속상한 일이 너무나 많았지만.
‘너무나 하찮은 일이라 불평할 수도 없어. 그렇지만…… 그런 하찮은 일들이 내 인생을 갉아먹고 있어. 좀이 옷에 구멍을 뚫어놓듯이.’
앤은 생각했다.
메리 마리아는 이 집의 여주인처럼 행세했다. 손님을 초대해놓고 손님이 집에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이 탁자는 서재보다 여기에 더 필요할 것 같아서 내가 옮겨놓았는데 괜찮겠지, 애니?” 하면서 앤이 외출하고 없는 사이에 가구를 옮겨놓기도 했다.
메리 마리아는 앤이 이 집 주인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메리 마리아는 꼭 어린아이처럼 호기심이 많아서 만족할 줄을 모르고 아주 사적인 일에까지 다 참견했다. 언제나 노크도 하지 않고 방에 불쑥불쑥 들어오고, 언제나 연기 냄새가 난다면서 킁킁대고 다녔다.
앤이 납작하게 눌러놓은 쿠션을 부풀려놓고, 수잔과 수다나 떨어댄다며 언제나 싫은 말을 했다. 그리고 항상 아이들의 결점을 들추고 다녔다. 물론 아이들의 행동거지를 살펴 예절 바르게 키워야 하지만, 언제나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심술쟁이 메리미아 고모할머니.”
어느 운 나쁜 날 셜리가 분명히 그렇게 외쳐버렸다. 길버트가 벌로 셜리 궁둥이를 때려주려고 했지만 수잔이 분노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말렸다.
‘우리는 위협을 당하며 살고 있어. 이 집은 이 일을 하면 메리 마리아 고모가 싫어하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인정하기 싫지만 그 말은 사실이야. 고모가 고상하게 눈물을 훔치지 않도록 할 일만 해야 한다고.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는 없어.’
앤은 생각했다.
그때 앤은 메리 마리아 블라이드에게는 친구가 하나도 없다고 했던 미스 코넬리아의 말이 생각났다. 얼마나 끔찍한 일이야! 친구가 무척이나 많은 앤의 마음에 친구를 가져본 적이 없다는 여인에게 동정심이 밀려들었다. 이 늙은 여인 앞에는 외로움과 불안한 삶이 기다릴 뿐이었다. 마음을 다독여주고 안식처가 되어줄 이가 아무도 없고, 희망과 도움, 사랑과 따뜻한 마음을 나누려고 다가올 사람도 없다. 우리가 이 여인을 참아주어야 한다. 이런 불편함은 사실 별일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 일로 우리 삶의 샘에 독이 퍼지는 것도 아닌걸 뭐.
‘단지 잠깐 내 자신이 끔찍이도 가엾다는 생각이 한번 들었을 뿐이야. 그뿐이라고. 이젠 괜찮아. 그런 생각을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
앤이 아기 요람에서 릴라를 안아 올려 그 부드러운 볼에 자기 볼을 비비며 생각했다.

4. 돼지 지방으로 만든 기름.
5. 블라이트(blight): 마름병, 충해, 사기·희망 등을 꺾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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