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8권 7~8

나단비 | 2024.04.17 15:03:15 댓글: 0 조회: 52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1681
7
전쟁고아와 수프 단지






블라이드 의사는 머리를 흔들었다.
“리에주와 나뮈르, 그리고 이젠 브뤼셀까지 점령당했군! 이럴 수가, 이건 정말 실망스러워.”
“실망하지 말아요, 선생님. 그곳은 다 외국 군인들이 지키는 곳이라 그래요. 독일군과 영국군이 맞붙을 때까지만 기다려요. 그러면 얘기가 달라질 거예요. 내 장담해요.”
수잔이 확신에 차서 말했다.
의사는 다시 한 번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침통한 표정은 아니었다. 아무리 기고만장한 독일군 수백만이 밀려와도 ‘가느다란 잿빛 선’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수잔의 믿음을 아마도 가족들이 전부 무의식적으로 공유하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그 끔찍한 날은 오고야 말았다. 많은 끔찍한 날들 중 하루에 불과하긴 했지만. ‘잉글사이드’ 식구들은 영국군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절망에 빠져 망연히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사실일 리 없어.”
낸이 잠깐이라도 무서운 현실에서 회피하고자 말을 내뱉었다.
“난 오늘 나쁜 소식이 있을 줄 알았어요. 그 고양이 놈이 까닭도 없이 아침부터 하이드 씨로 돌변했거든요. 좋은 조짐이 아니었다고요.”
수잔이 말했다.
“‘우리 군은 격퇴당하고 패했어도 사기는 꺾이지 않았다.’ 영국 육군이 이런 말을 듣게 되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의사는 런던 특보를 읽으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되면 전쟁이 오래가겠어요.”
블라이드 부인은 절망했다.
한순간 침울해 있던 수잔의 얼굴이 다시 되살아나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잊지 말아요, 사모님. 영국 육군은 영국 해군이 아니에요. 그걸 잊으면 안 돼요. 게다가 러시아군도 도와주려고 오고 있대요. 하기야 러시아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지 나는 잘 모르니 확실한 건 알 수 없지만요.”
월터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러시아군도 파리를 구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어요. 파리는 프랑스의 심장이고 파리로 가는 길은 무방비 상태이니까요. 아, 나도…….”
월터는 하던 말을 멈추고 방에서 나가버렸다.

그렇게 허탈감에 빠져 하루를 보냈지만 ‘잉글사이드’ 사람들은 아무리 나쁜 소식이 들려와도 살아갈 수 있음을 알았다. 수잔은 부엌에서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일했고, 길버트는 왕진을 다녔으며, 낸과 다이는 적십자 활동으로 돌아갔다. 블라이드 부인은 샬럿타운에서 열리는 적십자 모임에 참석하려고 나갔다.
릴라는 ‘무지개 골짜기’에서 실컷 울고 난 다음 일기장에 자기감정을 모두 쏟아놓고 자기는 용감하고 영웅적으로 살기로 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겼다. 릴라는 자기가 스스로 나서서 애브너 크로퍼드의 늙은 잿빛 말을 타고 글렌 마을과 포 윈즈를 돌아다니며 예약해둔 적십자 물자를 모아오는 일을 맡는다면 정말로 영웅적인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잉글사이드’의 말[馬]은 쓸 수 없었다. 한 필은 절룩거리고, 나머지 한 필은 아버지가 쓰고 있어서 크로퍼드네 말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 말은 조용하고 서두르지 않는 성격이라 둔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고, 두세 걸음마다 멈춰서는 다리에 달라붙은 파리를 다른 쪽 발로 차서 쫓는 버릇이 있었다. 하지만 릴라는 독일군이 파리에서 겨우 80킬로미터밖에 이르러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굼뜬 말이든 뭐든 가릴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릴라는 꿋꿋하게 이 일에 나서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날 오후 릴라는 마차 가득 상자들을 싣고 풀이 무성하고 마차 바큇자국이 깊숙이 파인 길을 가고 있었다. 항구 바닷가로 이어지는 오솔길 어귀에 이르자 릴라는 앤더슨 부인네 집에 들러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앤더슨네 집은 몹시 가난해서 앤더슨 부인이 내놓을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부인의 남편은 영국에서 태어난 영국 사람으로 킹스포트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나자 집에 돌아오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가장을 대신할 만큼 돈을 보내 주지도 않은 채 곧장 영국으로 건너가 입대해버렸다. 이런 딱한 사정에 있는 앤더슨 부인을 빼놓는다면 부인이 언짢아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한번 들르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나중에 그때 그 집에 들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도 없지 않았지만 결국 릴라는 들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앤더슨네 집은 바닷가 가까운 가문비나무 숲 속에 웅크리고 있는 조그맣고 다 쓰러져가는 낡은 집이었다. 너무 초라한 제 모습을 누구 앞에 드러내기 부끄러워 집이 숨은 것 같은 형상이었다. 릴라는 무너져가는 울타리에 말을 매놓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열려 있었다. 집안 꼴을 본 릴라는 한동안 입을 열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맞은편 작은 침실의 열린 문을 통해 앤더슨 부인이 지저분한 침대에 드러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앤더슨 부인은 죽어 있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반면에 문 가까이에 앉아 유유히 담배를 피우고 있는 크고 뚱뚱한 몸집에 붉은 머리, 붉은 얼굴을 가진 한 늙은 여자는 분명 살아 있었다. 그 여자는 난장판이 된 주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 가운데 놓인 아기 요람만 뚫어질 듯 바라보며 몸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릴라는 이 할머니를 본 적이 있었고 소문도 들어 알고 있었다. 어촌 마을에 사는 코너버 할머니로, 앤더슨 부인의 고모할머니인데 담배를 피우고 술도 마셨다.
릴라는 저도 모르게 뒤로 돌아 달아나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그래선 안 된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아무리 싫은 기분이 들더라도 저 할머니가 도움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으로 보아서는 도움을 필요로 하거나 난처한 지경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들어오너라.”
코너버 할머니는 입에서 파이프를 떼고 시궁쥐 같은 눈으로 릴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앤더슨 부인은 정말 돌아가셨나요?”
릴라가 문턱에 서서 작은 소리로 물었다.
“죽었다. 한 30분쯤 전에 가버렸어. 내가 젠 코너버에게 장의사로 전화 걸어 일할 사람을 데려오라고 했다. 너는 의사 선생님 댁 아가씨 맞지? 좀 앉아라.”
코너버 할머니는 활기차게 말했다.
릴라는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의자에는 하나같이 무언가가 얹어져 있어 그대로 서 있었다.
“갑자기 이렇게 된 건가요?”
“글쎄, 그 몹쓸 놈의 짐이 영국으로 가버렸을 때부터 시름시름했다. 그 사람이 떠나버린 것이 잘못이지. 저 애는 그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죽기로 작정을 한 거라고. 저 어린것이 2주일 전에 태어났는데. 그때부터 조금씩 죽어가다 오늘 아예 가버렸지.”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요?”
릴라는 주저주저하며 물었다.
“고맙지만 별로 그럴 일은 없다. 네가 아기를 볼 줄 아는 재주를 가졌으면 또 몰라도. 난 어린것 돌보는 재주는 없거든. 저 애는 밤이고 낮이고 쉬지도 않고 울어대. 저것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
릴라는 발끝으로 조심조심 걸어 아기 요람으로 다가가서는 더 조심스럽게 더러운 이불을 젖혔다. 아기를 만져볼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 릴라 역시도 아기 보는 재주 같은 건 없었다. 더럽고 낡은 플란넬 천으로 감싸놓은 붉고 뒤틀린 얼굴의 못생긴 아기가 나왔다. 릴라는 지금까지 그렇게 더러운 아기는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갈 곳 없는 고아가 되어버린 아기가 가엽다는 마음이 불쑥 들었다.
“이 아기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릴라가 물었다.
“누군들 알겠어. 얘 엄마 민도 죽기 전에 그 문제로 엄청 걱정을 했지. 아주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내 불쌍한 아기는 이제 어떻게 될까.’ 소리만 해서 내가 신경이 곤두서 죽을 뻔했다. 난 아기는 절대로 못 키워. 내 동생이 남긴 아이를 내가 길렀는데 어찌나 속을 썩이는지 몰라. 써 먹을 만큼 길러놓았더니 늙은 나를 도와주기는커녕 은혜도 모르고. 그래서 내가 민에게도 짐이 아이를 찾으러 올지 말지 알 때까지는 고아원에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민은 그러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안 보내면 어쩔 건데?”
코너버 할머니는 말했다.
“그럼 고아원으로 데려가기 전까지는 누가 돌볼 건가요?”
릴라가 물었다. 아기의 운명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는 내가 돌봐야 하겠지.”
코너버 할머니는 투덜거리듯 말하고는 파이프를 빼어 한쪽으로 놓고 옆 찬장에서 검은색 병을 꺼내더니 수치심도 없이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
“내 생각으로는 이 아이도 오래 못 살 것 같다. 병들어 보이잖아. 민도 몸이 약했으니 아이도 틀림없이 그럴 거라고. 남의 신세를 그리 오래 지지는 않을 테니 잘됐지, 뭐.”

릴라는 아기를 덮은 이불을 좀 더 아래로 내려보았다.
“어머나! 이 아기는 옷도 안 입었어요.”
릴라가 놀라며 소리쳤다.
“아기 옷을 입혀줄 사람이 누가 있겠어. 나는 그럴 틈도 없었다. 민을 간호해야 했으니까. 게다가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아기를 돌볼지 몰라. 아기가 태어났을 때 빌리 크로퍼드 할망구가 와서 아기를 씻기고 그 플란넬 천에다 싸놓은 거야. 그 후에는 젠이 조금 돌봐줬지. 그 아이는 충분히 따뜻해. 이 날씨에는 놋쇠 원숭이도 몸이 녹아버릴 거야.”
코너버 할머니가 말했다.
릴라는 울어대는 아기를 잠자코 내려다보았다. 여태까지 인생의 비극을 맛본 적이 없는 릴라는 이 처량한 아기의 모습에 마음이 몹시 아팠다. 아기 엄마도 저 끔찍한 할머니 손에 아기를 남겨놓은 채 혼자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내려가며 얼마나 걱정했을지 생각하니 너무 가여웠다. 여기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하지만 릴라가 할 수 있는 일이 뭐란 말인가?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릴라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심정이었지만 뭔가를 하긴 해야 했다.
릴라는 아기를 싫어했다. 하지만 아기를 여기 남겨놓은 채 가버릴 수는 없었다. 저 할머니는 술이나 들이켤 줄 알았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여기 더 이상 머무를 순 없어. 크로퍼드 씨가 저녁 때 말을 써야 하니 저녁 먹을 시간까지는 돌아와야 한다고 했다고. 이 일을 어찌 해야 하지?’
릴라는 생각했다.

릴라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지만 자기도 달리 어쩔 수 없다는 결단을 내렸다.
“제가 아기를 데려가겠어요. 그래도 되나요?”
릴라가 물었다.
“그럼,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야. 내가 왜 반대를 하겠어. 데려가, 얼마든지.”
코너버 할머니가 기쁜 듯이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데려가죠? 전 말을 몰아야 해요. 안고 말을 몰다가는 아기를 떨어뜨리고 말 거예요. 아기를 넣을 만한 바구니가 어디 없을까요?”
릴라가 말했다.
“그런 건 없을 거다. 여기엔 아무것도 없어. 민은 짐 같은 주변머리 없는 남편을 만나 아주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다. 저기 서랍을 열면 아기 옷가지가 있을 거야. 그것도 가져가렴.”
릴라는 옷을 꺼냈다. 모두 값싸고 누추한 것들이었지만 가난한 엄마로서는 최선을 다해 마련한 것이리라. 하지만 지금 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기를 어떻게 데려갈지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릴라는 무기력하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머나, 엄마야! 아니면 수잔 아줌마! 서랍장 뒤에 있는 저 엄청나게 커다란 수프 단지!
“저 수프 단지에다 아기를 넣어가도 될까요?”
릴라가 물었다.
“글쎄, 내 것은 아니다만, 가져가도 될 거야. 하지만 저걸 깨뜨리지는 말아다오. 짐이 살아서 돌아오면 야단을 피울지도 모르니까. 짐은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거야. 그래 봐야 별로 쓸모도 없는 인간이긴 하지만. 그 헌 수프 단지는 짐이 영국에서 가져온 거란다. 집안 대대로 내려온 물건이라고 했다. 짐이나 민이나 그것을 쓰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했다만. 그 단지에 담아둘 수프나 어디 있었어? 하지만 짐은 그 수프 단지를 엄청 소중히 여겼지. 짐은 그런 쓸데없는 일에는 아주 세심하게 신경을 쓰면서도 접시에 담을 음식이 없는 일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
생전 처음으로 릴라 블라이드는 갓난아기의 몸에 손을 대었다. 아기를 들어 올려 담요에 싸는데 아기를 떨어뜨릴까, 아기가 부서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 몸이 다 떨렸다. 그러고는 갓난아기를 수프 단지에 넣었다.
“아기가 숨 막혀 죽지는 않을까요?”
릴라가 걱정이 되어 물었다.
“그렇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지.”
코너버 할머니가 말했다.
그 끔찍한 말에 놀란 릴라는 아기 얼굴 근처 담요를 좀 느슨하게 해주었다. 아기가 울음을 그치고 릴라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커다란 검은 눈에 작은 얼굴이 몹시 보기 흉한 아기였다.
“얼굴에 바람이 닿지 않도록 하는 게 좋을 거야. 바람이 숨을 빼앗아가 버린다고.”
코너버 할머니가 주의를 주었다.
릴라는 너덜너덜한 작은 이불로 수프 단지를 잘 감쌌다.
“제가 마차에 올라타면 이것을 제게 올려주시겠어요?”
“그러마.”
코너버 할머니가 신음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그렇게 자기는 아기가 싫다고 고백했던 릴라 블라이드는 앤더슨네 집을 빠져나가면서 수프 단지에 담은 아기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말이 어찌나 느리게 걷는지 릴라는 영원히 ‘잉글사이드’에 닿지 못할 것만 같았다. 수프 단지 속은 기분 나쁘게 조용했다. 아기가 울지 않아 한편으로는 고마웠지만, 가끔씩 꽥꽥 울어주어 살아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면 좋을 텐데 싶었다. 혹시 숨이 막혀버리지는 않았나! 릴라는 감히 담요를 들추어볼 수도 없었다. 만에 하나 허리케인이라도 불어와 아기의 숨을 빼앗아가면 큰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잉글사이드’에 탈 없이 다다랐을 때 릴라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릴라는 수프 단지를 부엌으로 날라다 수잔의 눈앞에서 그것을 탁자에 올려놓고 이불을 벗겼다. 수프 단지를 들여다본 수잔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할 말을 잃었다. 참으로 어이가 없고 기가 찼다.
“이게 도대체 뭐냐?”
블라이드 의사가 부엌으로 들어와 물었다.
릴라가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고는 “전 아기를 데려오지 않을 수 없었어요, 아빠. 아기를 거기 내버려두고 올 수는 없었다고요.” 하는 말로 얘기를 끝맺었다.
“그래서 이젠 어쩔 참이냐?”
아버지가 차분하게 물었다.
릴라는 그런 질문을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당분간은 우리가 여기서 돌보아주어야겠죠. 그다음엔 어디로 보내더라도요.”
릴라가 자기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말을 더듬거렸다.
블라이드 의사는 한동안 부엌을 오락가락했고, 아기는 수프 단지의 하얀 벽만 말똥말똥 바라보았고, 수잔은 이제 제정신을 차린 듯했다.
이윽고 블라이드 의사가 릴라를 마주 보고 섰다.
“갓난아기가 있으면 집안사람들 할 일이 무척 많아지고 힘든 일도 많이 생긴단다. 낸과 다이는 다음 주면 레드먼드로 가고, 지금 상태로는 엄마나 수잔 아줌마에게 그런 수고를 하게 할 수는 없어. 만일 네가 아기를 여기 두고 싶다면 너 스스로 아기를 돌봐줘야만 해.”
“내가요! 어머나, 아빠. 나는…… 나는 못 해요.”
릴라가 절망스럽게 외쳤다.
“너보다 더 어린 여자아이도 갓난아기를 돌볼 수 있어. 나와 수잔 아줌마가 아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가르쳐주마. 네가 할 수 없다면 아기는 메그 코너버 할머니에게로 돌려보내야 해. 그렇게 되면 이 아기는 오래 살지 못하고 말 거다. 이 아기는 아주 허약한 체질로 특별한 보살핌이 필요해 보이거든. 고아원으로 보낸다 해도 마찬가질 거야. 그렇긴 해도 난 네 엄마나 수잔 아줌마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다.”
블라이드 의사는 매우 엄하고 단단한 결심을 한 얼굴로 부엌을 나갔다. 그는 저 수프 단지의 조그만 주인이 ‘잉글사이드’에 남게 될 거라는 걸 알았고, 릴라가 이 일을 훌륭하게 해내도록 만들 작정이었다.
릴라는 넋을 잃고 아기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자기가 아기를 키우게 되다니 생각만 해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아기의 장래를 걱정했다는 그 가여운 어머니와 그 지독한 메그 코너버 할머니를 생각하면 도저히 아기를 돌려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아줌마, 갓난아기는 어떻게 돌보는 거예요?”
릴라는 침울한 얼굴로 물었다.
“아기 몸은 따뜻하게 해주고, 피부는 항상 보송보송하게 말라 있어야 해. 날마다 목욕도 시켜주어야 하고. 물은 너무 뜨거워도 안 되고, 너무 미지근해도 안 돼. 그리고 두 시간마다 우유도 먹여야 하지. 아기가 배가 아파 우는 것 같으면 배에 따뜻한 물주머니를 올려주어야 하고.”
수잔이 네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겠냐는 듯이 말했다.
아기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배가 고픈 모양이에요. 어쨌든 아기에게 우유를 먹여야겠어요. 필요한 게 뭐예요, 아줌마? 내가 만들 테니까요.”
릴라가 필사적이 되어 말했다.
릴라는 수잔이 가르쳐주는 대로 우유와 물을 준비했다. 아버지 진료실에서 젖병도 하나 가져왔다. 그리고 아기를 수프 단지에서 안아 올려 우유를 먹였다. 우유를 다 먹인 다음에는 지붕 밑 방에서 자기가 어렸을 때 썼던 낡은 아기 요람을 가져다 잠든 아기를 눕혔다. 그런 다음 수프 단지를 식품창고에 갖다 치우고는 앉아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기가 잠에서 깨자 그동안 생각해 얻은 결론을 갖고 수잔에게 갔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보겠어요, 아줌마. 저 가여운 아기를 코너버 할머니에게 돌려보낼 마음은 없으니까요. 나한테 아기 목욕시키는 법과 옷 입히는 법을 가르쳐줘요.”
수잔의 감독을 받아가며 릴라는 갓난아기를 목욕시켰다. 수잔은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일러줄 뿐 자기가 직접 나서서 해주지는 않았다. 의사 선생님이 거실에 있어서 언제 느닷없이 들어올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수잔은 의사 선생님이 아까처럼 단호하게 무슨 말을 했을 때는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릴라는 이를 악물고 열심히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세상에나, 아기는 어쩌면 이렇게 주름살투성이고 피부 여기저기가 접혀 있을까. 어디 잡을 만한 곳도 없어. 만일 아기를 물속에 떨어뜨리면 어쩌지? 아기가 너무 미끌미끌하니 말이야. 제발 빽빽 울지나 말아줬으면. 어떻게 이렇게 작은 몸에서 이런 큰 소리가 나오지? 이 날카로운 울음소리는 ‘잉글사이드’ 지하실에서 지붕 밑 방까지 안 들리는 곳이 없겠군.
“내가 아기를 아프게 해서 이러는 걸까요, 아줌마?”
릴라가 처량하게 물었다.
“그런 게 아니야, 릴라. 아기들은 전부 씻기는 것을 아주 싫어해. 너도 처음에는 정말 씻기기 힘들었지. 아기 등을 잘 받치고 있어야 해.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침착성을 잃어서는 안 되고.”
침착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릴라는 모든 땀구멍마다 땀이 퐁퐁 솟아나는 것만 같았다. 아기 몸을 닦아주고 옷을 입히고 우유 한 병을 다시 먹여 잠시 조용하게 하고 나자 릴라는 완전히 기진맥진해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 밤에는 어떻게 해야 해요, 아줌마?”
낮 동안 아기를 돌보는 일도 그렇게 끔찍했는데, 밤에는 또 아기를 어찌 돌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네 침대 곁에 아기 요람을 두고 아기를 잘 덮어줘. 밤에도 한두 번은 아기를 먹여야 할 거야. 그러니까 우유 데우는 기계를 2층으로 올려다 놓는 것이 좋을 거야. 도움이 필요하면 나를 불러라. 네 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말려도 달려가마.”
“하지만 아줌마, 아기가 울면 어떻게 해요?”
하지만 아기는 울지 않았다. 정말 놀랍게도 아기는 얌전히 있어주었다. 아마도 배가 알맞게 불러서 만족한 기분이었던 모양이다. 아기는 밤새 아주 잘 잤지만 릴라는 그렇지 못했다. 아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쩌나 싶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릴라는 결코 수잔을 부르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새벽 3시에 아기에게 먹일 우유를 준비했다. 혹시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역경에 빠져버린 것이 진정 릴라 블라이드인가?
릴라는 독일군이 파리 근처에 와 있건 말건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아니, 파리가 함락당했다고 하더라도 그럴 것이다. 단지 아기가 울거나, 숨이 막히거나, 경련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되었다. 하지만 갓난아기는 경련을 일으키기도 한다. 만에 하나 아기가 경련을 일으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수잔에게 물어봤어야 하는 것을 그만 깜박 잊고 말았다. 릴라는 아빠가 엄마와 수잔의 건강은 그렇게 신경 쓰면서 왜 자기에게는 그렇게 무정하게 대할까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잠도 자지 못하고도 살아남으리라고 생각하실까? 하지만 이제는 절대로 돌아서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저 꼴 보기 싫은 아기가 나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해낼 것이다. 육아 책을 사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해내고 말 것이다. 아빠한테는 절대로 묻지도 않을 것이다. 엄마도 귀찮게 하지 않을 것이다. 수잔에게는 정말 어쩔 수 없이 곤란한 일이 생길 때만 부탁할 것이다. 모두들 두고 보라지.
이틀 뒤에 집으로 돌아온 블라이드 부인은 릴라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수잔이 아무 일도 아닌 듯 차분하게 대답했다.
“2층에서 아기를 재우고 있어요, 사모님.”
블라이드 부인은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 놀랐다.





8
릴라의 결심






가족이건 개인이건 누구나 새로운 문제가 생겨도 곧 받아들이고 살아가게 되어 있다. 1주일쯤 시간이 흐르자 앤더슨네 아기도 처음부터 ‘잉글사이드’에 살았던 것처럼 이 집 일상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를 잡았다. 릴라는 첫 사흘 밤은 잠을 자지 못했지만 이제는 잠도 잘 수 있게 되었고, 아기를 돌보아야 할 시간이 되면 저절로 잠이 깨어 아기를 보살폈다. 릴라는 전부터 해왔던 일처럼 익숙하게 아기를 목욕시키고 우유를 먹이고 옷을 갈아 입혔다. 전보다 아기가 더 좋아졌다거나 아기 돌보는 일이 더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사실 아기를 무슨 작은 도마뱀이나 돌보듯이 아주 조심조심 다루었다. 잘못하다간 금방 부서져 버릴 것처럼. 하지만 아기는 글렌 세인트 메리의 어떤 아기보다도 더 깨끗했고, 더 잘 보살핌을 받았다. 릴라는 날마다 아기 몸무게를 재어 일기장에 적었다. 하지만 가끔씩은 왜 불친절한 운명의 손이 자기를 그 숙명적인 날에 앤더슨네 집으로 향하는 오솔길로 이끌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셜리나 낸, 다이가 엄청 놀려댈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단순히 릴라가 전쟁고아를 데려다 기른다는 사실에 놀란 것 같았다. 아마 아빠의 당부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물론 월터는 어떤 일로도 릴라를 놀리지 않았다. 저번에 월터는 릴라의 용기가 가상하다고 칭찬까지 했다.
“릴라, 나의 릴라, 저 갓난아기를 돌보기로 한 너의 용기는 정말 대단해. 젬 형이 몰려드는 독일군을 맞아 싸우기로 한 용기만큼이나 대단한 일이야. 나도 네 용기의 절반만 있으면 좋을 텐데.”
월터는 생각에 잠겨 말했다.
월터에게 칭찬을 들어서 릴라는 자랑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지만 그날 밤 릴라는 일기장에 비관적인 글을 적었다.

내가 좀 더 저 아이를 좋아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모든 것이 더 쉬워질 텐데. 하지만 난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 사람들은 아기를 돌보다 보면 정이 든다고 한다. 하지만 난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 나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아기는 내가 하는 일을 방해만 한다. 나를 꽁꽁 묶어놓는다. 적십자 소녀단을 발족시키느라 바쁜 때인데 꼼짝도 할 수가 없다.
게다가 어젯밤에는 앨리스 클로의 파티에도 가지 못했다. 몹시 가고 싶었는데. 물론 아빠도 이해심 없는 분은 아니니까 필요하면 저녁때 한두 시간쯤은 내 시간을 갖도록 허락해주실 것이다. 하지만 밤새 나가 있어 수잔 아줌마나 엄마가 아기를 돌보게 만드는 일에는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그렇게 하지 않기를 잘한 것 같다. 아기가 새벽 1시에 울어댔기 때문이다. 배가 아팠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아기가 다리를 차대거나 몸을 뻗대면서 울지는 않은 걸로 보아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어 운 것은 아니었다. 《모건의 육아 책》을 보면 그렇게 나와 있다. 배가 고파서도 아니고 몸에 핀이 찔려서 그런 것도 아니었지만 아기는 울고 또 울어대서 얼굴이 보랏빛으로 변했다.
나는 일어나 따뜻한 물주머니를 만들어 아기 배에다 대주었다. 하지만 아기는 그 가느다란 다리를 모아 움츠리면서 더 크게 악을 쓰며 울었다. 아기를 데게 하였을까 봐 걱정되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그래서 난 하는 수 없이 《모건의 육아 책》에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나와 있었지만 아기를 안고 방 안을 오락가락했다. 난 너무 피곤하고 절망스럽고 화가 났다. 그렇다, 난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이 아기를 마구 흔들어버리고 싶었다. 그래도 될 만큼 크기만 하다면.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아빠는 환자를 보러 나갔고, 엄마는 두통이 있다고 했고, 수잔 아줌마는, 아줌마는 위급한 일이 아니면 부르지 않기로 했다. 아줌마의 의견과 모건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내가 언제나 모건의 의견을 따랐기 때문이다.
드디어 올리버 선생님이 돌아왔다. 선생님은 이제 낸과 같은 방을 쓴다. 나 때문이 아니고 다 아기 때문이다. 난 그 일로 몹시 속이 상했다. 우린 잠자리에 누워서 잠이 들 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었는데. 그때만이 내가 올리버 선생님을 다 차지할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아기가 악쓰고 우는 바람에 선생님이 잠을 깨셨나 생각하니 마음이 언짢았다. 선생님도 지금 마음이 편치 못한데.
약혼자 그랜트 씨도 발카르티에에 가 있어 선생님은 애를 태우고 있다. 하지만 그런 내색도 하지 않고 얼마나 훌륭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지 모른다. 선생님은 그랜트 씨가 다시는 자기 곁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선생님 눈을 보면 내 가슴이 다 찢어질 듯 아프다. 이것은 너무 비극적인 일이다. 선생님은 아기 때문에 잠을 깬 것이 아니라 독일군이 파리에 다가와 있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고는 저 꼴 보기 싫은 아기를 안아 올려 무릎 위에 엎드려 눕히고는 등을 가볍게 두세 번 두드려주었다. 그랬더니 아기는 곧 울음을 그치고 곧바로 잠이 들었다. 밤새 아주 순하게 잘 잤다. 하지만 나는 잠을 잘 수 없었다. 잠을 자기에는 너무 피곤했다.
적십자 소녀단을 발족시키느라 너무 힘든 하루를 보냈다. 베티 미드를 단장으로 삼고 내가 서기가 되는 일에는 성공했으나 회계는 젠 비커스가 뽑혔다. 난 젠을 싫어한다. 젠은 영리하고 예쁘고 뛰어난 사람이다 싶으면 그 사람이 없는 데서는 무시하듯 성을 붙이지 않고 그 사람 이름만 부르는 그런 종류다. 한마디로 아주 교활하고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다.
우나 언니는 누가 회계가 되었건 마음 쓰지 않는다. 우나 언니는 자기가 공식적으로 일을 맡고 있거나 말거나 무슨 일이건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완전히 천사다. 나는 때로는 천사다운 점도 있지만 완전히 악마 같을 때도 많다. 월터 오빠가 우나 언니를 좋아하게 되기를 바라지만, 월터 오빠는 우나 언니를 연인으로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지난번에 월터 오빠가 우나 언니를 월계화 같다고 말했다. 우나 언니는 정말 월계화 같다. 거기다 너무나 상냥하고 무슨 일에건 솔선수범하는 사람이라서 사람들이 이용해 먹는 일도 많다. 하지만 릴라 블라이드는 절대 사람들이 호락호락하게 보지 못한다. 수잔 아줌마 말대로 그건 내가 ‘장담’한다.
예상했던 대로 올리브는 모임 때 식사를 내자고 말했다. 그 일로 물론 말들이 굉장한 많았지만 대부분의 단원들이 식사 내는 일에 반대해서 몇몇은 지금 샐쭉해 있다. 아이린 하워드도 식사를 하자는 쪽이라서 그 뒤로 나를 소원하게 대해서 기분이 좋지 못하다. 난 엄마와 엘리엇 아주머니도 이 활동을 하면서 문제를 겪고 있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문제가 생겨도 조용히 넘어가는 것뿐이겠지. 나도 해나가고 있긴 하지만 조용히는 아니다. 난 화내고 울기도 한다. 하지만 난 화나는 감정을 이 일기장에다 풀면서 삭이고 기어이 해낼 것이다.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일을 모두 끝내고 난 다음에 할 작정이다. 난 절대로 부루퉁해 있지도 않을 것이다. 난 샐쭉해 있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우리는 이 적십자 소녀단을 출범시켰고 일주일에 한 번씩 모임을 갖기로 했다. 우선은 모두 함께 뜨개질하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셜리 오빠와 내가 먼데이를 집으로 데려오려고 역에 다녀왔다. 하지만 데려올 수 없었다. 모든 가족이 전부 나서 보았지만 모두 실패였다. 젬 오빠가 떠난 지 3일 후에 월터 오빠가 가서 먼데이를 강제로 마차에 태워 와서는 3일 동안이나 가두어두었다. 그러자 먼데이는 밥도 먹지 않고 투쟁을 벌이며 밤낮으로 밴시 요정9)처럼 짖어댔다. 우리는 먼데이를 다시 풀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 가두어두었다간 굶어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먼데이를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역 근처의 정육점 주인을 찾아가 먼데이에게 고기와 뼈를 갖다 주도록 해놓았다. 그리고 우리 식구 중 한 사람이 거의 매일 먼데이에게 가서 먹을 것을 주고 온다. 먼데이는 화물 창고에 웅크리고 있다가 기차가 들어올 때마다 승강장으로 달려 나갔다.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달려 나가지만 기차에서 손님이 모두 내리고 기차가 떠나버리고 나면 젬이 이번에도 돌아오지 않은 것을 알고 눈물을 흘렸다.
실망한 눈으로 다시 창고로 돌아가 다음, 기차가 올 때까지 누워 있었다. 역장인 그레이 씨는 그 개가 너무 안돼 보여서 눈물을 참기 힘들었던 때도 여러 날 있었다고 말했다. 어느 날에는 남자아이들이 먼데이에게 돌을 던진 일이 있었다. 그것을 본 조니 미드 할아버지는 여태까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눈여겨본 적도, 무슨 일에 나서본 적도 없었지만 정육점에서 고기 자르는 도끼를 움켜쥐고 달려 나와 남자아이들을 뒤쫓아 온 마을을 뛰어다녔다. 그 일 이후로는 아무도 먼데이를 괴롭히지 못했다.
케네스 포드 오빠는 토론토로 돌아갔다. 이틀 전 저녁에 작별 인사를 하러 들렀지만 나는 집에 없었다. 아기 옷을 만들어야 했는데 메러디스 부인이 도와주기로 해서 목사관에 가야 했다. 그래서 나는 케네스 오빠를 만나지 못했다. 그것이 문제는 아니었다. 낸 언니에게 했다는 말이 문제였다. 거미에게 작별 인사를 대신 해주고 엄마 노릇 하느라고 자기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일은 없도록 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을 무시하는 경박한 말을 전하고 간 것을 보면 그 모래톱에서 보낸 아름다운 한때도 케네스 오빠에게는 아무 뜻이 없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나는 앞으로 케네스 오빠도, 그때 일도 생각하지 않을 작정이다.

프레드 아널드가 마침 목사관에 와 있다 나를 바래다주었다. 프레드는 새로 온 감리교회 목사 아들인데 똑똑하고 꽤 잘생겼다. 코만 빼면. 프레드는 정말 코가 못생겼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그 코로도 별 문제가 없지만 시나 이상적인 이야기를 할 때면 그 코가 생각나 대화를 더 잇는 게 불가능해진다. 비명처럼 웃음소리가 터질 것 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말이지 공평하지 못하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다 멋진데. 만일 케네스 오빠 같은 사람이 그런 말을 했더라면 황홀감에 빠져버렸을 것이다. 눈을 내리깔고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완전히 그의 이야기에 빠져버리게 된다. 하지만 고개를 들고 코를 본 순간 마법은 완전히 깨져버린다. 프레드도 군대에 가고 싶어 하지만 아직 나이가 열일곱 살밖에 되지 않아 자격미달이다.
마을을 지나다 엘리엇 아주머니를 만났다. 무슨 끔찍한 일이라도 본 듯한 아주머니의 눈빛이란! 내가 카이저와 함께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해도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엘리엇 아주머니는 감리교인과 그들이 하는 일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아빠는 그것이 아주머니의 강박관념이라고 했다.

9월 1일이 되자 ‘잉글사이드’와 목사관 아이들이 모두 떠나갔다. 페이스, 낸, 다이 그리고 월터는 레드먼드로 떠났고, 칼은 항구 어귀 학교 선생님으로 임명되었으며, 셜리는 퀸스 학교로 떠났다. 릴라는 ‘잉글사이드’에 혼자 남았으니, 그럴 시간만 있었으면 견디기 힘들게 외로웠을 것이다. 월터가 무척이나 그리웠다. ‘무지개 골짜기’에서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나눈 이후로 둘은 아주 가까워졌고, 릴라는 자기 고민을 다른 사람에게는 털어놓지 않아도 월터와는 꼭 상의했다. 하지만 릴라는 갓난아기와 적십자 활동으로 외로울 틈도 없었다. 가끔씩 침대에 누우면 월터 오빠가 곁에 없다는 생각, 발카르티에에 가 있는 젬 생각, 케네스의 낭만적이지 못한 작별 인사를 생각하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대부분은 눈물이 흘러나오기도 전에 잠에 빠져버렸다.
“아기를 호프타운 고아원으로 보낼 수속을 밟을까?”
아기가 ‘잉글사이드’에 온 지 2주가 지난 어느 날 아빠가 물었다. 한순간 릴라는 “네.” 하고 대답해버릴 뻔했다. 아기는 호프타운 고아원으로 보내도 된다. 고아원에서 아기를 잘 보살펴줄 것이다. 그러면 다시는 아기에게 매여 밤잠을 자지 못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날마다 자유로이 지낼 수 있다. 하지만 그 가여운 젊은 엄마는 자기 아기를 고아원에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릴라는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 아침 아기 몸무게는 250그램이나 늘었다. 릴라는 너무나 뿌듯해 온몸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빠는 아기를 호프타운 고아원에 보내면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했잖아요.”
릴라가 말했다.
“그래. 연약한 갓난아기를 그런 시설에서 보살핀다는 건 아무리 잘 보살핀다 해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볼 수 없지. 하지만 아기를 계속 여기 둬도 되겠니? 그렇게 되면 네가 힘들지 않겠어?”
“제가 2주일 동안이나 아기를 돌봤어요. 몸무게도 250그램이나 늘었고요. 아기 아빠한테 무슨 연락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 아기 아빠도 자기 아기를 고아원에 보내고 싶어 하지 않을지도 모르잖아요.”
릴라는 외쳤다.
블라이드 의사와 블라이드 부인은 살그머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호프타운 이야기는 그 뒤로 다시 나오지 않았다.

그런 다음 아버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독일군은 파리 바로 코앞까지 와 있었다. 신문에는 압제하에 있는 벨기에에서 일어났다는 끔찍한 일들이 실리기 시작했다. ‘잉글사이드’의 어른들은 긴장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우리는 전쟁 소식에 너무 목매달고 사는 것 같아요. 그나저나 영국군이 지형을 잘 살펴 독일군을 쳐부술 작전을 철저하게 세웠지만 파파 조프르10)가 영국의 충고를 듣지 않았어요. 그래서 파리가 함락당하게 생겼어요.”
거트루드 올리버는 웃으려고 했지만 결국 웃음을 짓지도 못하고 메러디스 부인에게 말했다.
“정말 파리가 함락당할까요? 어디서 강력한 군대가 나타나 도와주지 않을까요?”
메러디스 목사가 중얼거렸다.
“전 낮에 제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일이 꼭 꿈속에서 일어난 일 같아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방에 틀어박혀 방 안을 서성거려요. 제가 하도 오락가락해서 낸의 카펫에 길이 다 났어요. 이 전쟁이 우리 생활을 지배하고 있어요.”
올리버 거트루드가 말을 계속했다.
“독일군이 센리스까지 왔어요. 이제는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파리를 구할 수 없어요.”
소피아가 울부짖었다. 소피아는 요즘 하도 신문을 열심히 읽은 탓에 북프랑스 지리에 관해 학교 다니던 시절보다 일흔하나의 나이에 훨씬 많이 알게 되었다. 프랑스 지명의 발음이야 맞건 틀리건.
“나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도, 키치너 경도 다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미국의 번스토프인지 뭔지 하는 사람이 전쟁은 끝났고 독일이 승리했다고 주장한다더군요. 그리고 구레나룻 난 보름달도 똑같은 말을 하면서 잘됐다고 한대요. 난 그 두 사람에게 가르쳐주고 싶어요. 닭이 알을 낳기 전까지는 바로 전날이라 해도 달걀 개수를 미리 세는 건 위험한 일이고, 곰은 가죽을 벗겨 그 가죽이 팔린 다음에야 죽었다고 봐야 한다고요.”
수잔이 고집스럽게 주장했다.
“왜 영국 해군은 더 밀고 들어가지를 못하지요?”
소피아는 안달하듯 말했다.
“아무리 영국 해군이라도 육지로 배를 몰고 들어갈 수는 없다고, 소피아 크로퍼드. 난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어요. 난 절대로 희망을 버리지 않을 거예요. 토마스코니 모베지니 하는 야만적인 이름은 참을 수가 없어요, 사모님. 사모님은 래엠스가 라임스인지, 림스인지, 레임스인지 램스인지 발음할 수 있어요?”
“랭스라고 해야 맞을 거예요, 수잔.”
“아이구, 그놈의 프랑스 이름.”
수잔이 신음했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독일군들이 거기 있는 교회도 다 부숴버렸다고 하더군요. 나는 독일 사람들도 그리스도교인인 줄 알았는데요.”
소피아가 한숨을 쉬었다.
“교회에 한 짓도 나쁘지만 독일군이 벨기에에서 한 짓은 훨씬 더 나빠요. 그놈들이 아이들한테까지 총검을 휘둘렀다는 기사를 의사 선생님이 읽었을 때 저는요, 사모님, ‘아이구, 그놈들이 우리 젬에게 그랬으면 어쩌나!’하는 생각으로 몸서리가 났어요. 수프 냄비를 젓다가 그 생각이 들었는데 그 펄펄 끓는 수프 냄비를 들어 그냥 카이저 면상에 부어버렸으면 속이 후련하겠더군요. 내가 지금 헛소리를 하는 게 아니에요.”
수잔이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내일, 내일이면 독일군이 파리로 들어갔다는 소식이 오겠지요.”
거트루드 올리버가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미스 올리버는 주변 세상의 괴로움에 자기도 같이 허덕이며 마음을 애태우는 성격이었다. 전쟁으로 자기 개인의 이해관계는 제쳐두고라도 미스 올리버는 루뱅을 불태우고 랭스의 아름다운 교회를 파괴한 무자비한 이리 떼의 손에 파리가 함락될 것을 생각하니 자기의 온몸이 찢기는 듯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에는 마른의 기적11)에 관한 소식이 전해졌다. 릴라는 커다란 붉은 표제가 붙은 <엔터프라이즈> 신문을 마구 흔들어대며 우체국에서 정신없이 집으로 뛰어 돌아왔다. 수잔은 달려 나가 떨리는 손으로 국기를 달았다. 블라이드 의사는 “천만다행이야!” 소리를 연신 중얼거리며 서성거렸고, 블라이드 부인은 울었다 웃었다를 반복했다.
“하느님의 손이 그들에게 닿은 거야. ‘여기까지만, 더 이상은 안 돼.’ 하신 거야.”
그날 밤 메러디스 씨는 말했다.
릴라는 2층에서 아기를 재우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파리는 무사했다. 전쟁은 끝났다. 독일군은 패했다. 이제 곧 모든 일이 끝나고 젬과 제리는 돌아올 것이다. 먹구름은 물러갔다.
릴라는 아기를 보며 말했다.

“이렇게 기분 좋은 밤에 악쓰고 울기만 해봐. 울기만 했다간 널 다시 싸서 그 수프 단지에 담아 호프타운으로 보내버릴 거야. 화물로 첫 기차에 실어서 말이야. 넌 참 예쁜 눈을 가졌구나. 그리고 예전처럼 그렇게 빨갛지도 않고, 주름도 많이 펴졌고. 그렇지만 머리는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야? 그리고 손도 좀 조그만 짐승 발 같아. 난 아직 네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어. 하지만 네 가여운 엄마에게 널 보여주고 싶구나. 아늑한 요람에서 배불리 잘 먹고 잘 자라고 있는 네 모습을 보여주면 네 엄마도 안심할 거야. 그 메그 코너버 할머니 손에 있었다면 넌 날마다 말라비틀어져 갔겠지. 네가 여기 온 첫날 아침, 수잔 아줌마가 없을 때 내가 널 물속에 빠뜨려 죽일 뻔했던 일은 네 엄마가 몰랐으면 좋겠다. 넌 왜 그렇게 미끄덩거리니? 아니, 난 너를 좋아하지 않아. 앞으로도 널 좋아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렇지만 난 널 남부럽지 않은 아기로 잘 키워주겠어. 우선은 자존심을 가진 아기로 보일 만큼은 널 통통하게 살찌워야겠어. 난 사람들이 널 무시하는 말을 하는 건 듣고 싶지 않거든. 어제 적십자 모임에서 드류 부인이 ‘릴라 블라이드가 키우는 아기는 얼마나 우습게 생겼는지 몰라.’ 하는 소리는 정말 듣기 싫었다고. 내가 널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너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는 있어야 하지 않겠니?”
9. 가족 중 죽을 사람이 있을 때 소리를 내서 운다는 여자 요정.
10. 제1차 세계대전 중의 프랑스 총사령관, 원래 이름은 조셉 조프르이고 파파 조프르는 그의 별명이다.
11. 조셉 조프르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영국군과 더불어 마른(marne)강변에서 독일군을 무찌른 전투.




추천 (0) 선물 (0명)
IP: ♡.252.♡.103
23,520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더좋은래일
2024-04-30
0
12
chillax
2024-04-30
0
25
더좋은래일
2024-04-29
0
36
더좋은래일
2024-04-29
0
32
chillax
2024-04-29
0
36
chillax
2024-04-29
0
31
chillax
2024-04-29
0
26
더좋은래일
2024-04-28
0
42
더좋은래일
2024-04-27
4
95
더좋은래일
2024-04-26
4
71
더좋은래일
2024-04-25
3
104
chillax
2024-04-25
1
62
더좋은래일
2024-04-24
3
92
더좋은래일
2024-04-24
3
71
더좋은래일
2024-04-24
3
83
chillax
2024-04-24
1
53
더좋은래일
2024-04-23
3
94
chillax
2024-04-23
1
115
더좋은래일
2024-04-22
3
296
chillax
2024-04-22
1
219
더좋은래일
2024-04-21
3
353
나단비
2024-04-20
1
858
chillax
2024-04-19
2
789
나단비
2024-04-19
0
737
나단비
2024-04-19
0
85
나단비
2024-04-19
0
63
나단비
2024-04-19
0
66
나단비
2024-04-19
0
54
chillax
2024-04-18
2
156
나단비
2024-04-18
0
49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