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8권 13~14

나단비 | 2024.04.18 10:51:55 댓글: 0 조회: 72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1942
13
굴욕의 파이 한 조각






먼데이에게 맛있는 뼈를 갖다 주러 역에 다녀온 수잔이 말했다.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 같아요, 사모님. 아무래도 무슨 끔찍한 일이 난 거라고요. 구레나룻 난 보름달이 샬럿타운에서 오는 기차에서 내렸는데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어요. 난 그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소를 좋은 가격에 팔아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난 아무래도 그 흉악한 독일군들이 또 어디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올까 겁이 나네요.”
수잔이 프라이어 씨의 웃음과 루시타니아 호16)의 침몰을 연관시켜 생각한 것은 좀 지나친 일일지도 모르지만, 바로 한 시간 뒤에 배달되어 온 우편물과 함께 그 소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글렌 마을 젊은이들은 그날 밤 한 덩어리가 되어 일어나 카이저의 행위에 분노한 나머지 프라이어 씨네 집 창문을 모두 깨뜨려버렸다.
그 소식을 들은 수잔은 말했다.
“내가 그 젊은이들이 잘했다는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잘못했다는 말도 못 해요. 나도 돌 몇 개쯤은 던지고 싶은 마음도 들었으니까요. 그 소식이 온 날 구레나룻 난 보름달이 우체국에서 한 말만큼은 분명 문제가 있었어요. 집에 가만히 틀어박혀 있지 않고 싸돌아다니는 인간들은 그런 꼴을 당해도 싸다고 했다나요. 그 말을 직접 들은 사람도 있어요, 사모님.
노먼 더글러스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입에 거품을 물며 화를 냈어요. 악마는 루시타니아 호를 가라앉힌 놈들이나 잡아갈 일이지 뭘 하고 다니느냐면서 그런 일도 하지 않을 거면 악마가 어디 쓸모 있는 것들이냐고 고함을 치더라고요. 어젯밤 카터네 가게에서요. 노먼 더글러스는 자기 말에 반대를 하면 악마에 씌운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런 인간도 일생에 한 번은 옳은 말을 하네요. 브루스 메러디스도 물에 빠져죽은 어린아이들 이야기를 듣고 몹시 마음 아파한대요.
브루스가 지난 금요일 밤에 뭔가 특별한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대요. 그런데 그 소원이 이뤄지지 않아 몹시 불만스러워 했다더군요. 그러던 차에 루시타니아 호 이야기를 듣고는 제 엄마한테 하느님이 왜 자기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았는지 알았다고 하더래요. ‘하느님은 루시타니아 호에서 빠져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보살피느라 바빴던 모양이에요’ 그러더래요. 그 아이의 머리는 제 몸보다 백 살은 더 나이가 들었다니까요. 루시타니아 호 일은 너무나 끔찍한 사건이었어요, 사모님. 그래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이 일로 성명서를 낸다고 하니 우린 아무 걱정도 할 필요 없겠네요. 이런 일에 성명서라니, 참으로 훌륭한 대통령이에요!”
수잔은 화가 나서 못 참겠다는 듯 냄비를 덜거덕거렸다. 우드로 윌슨이 갑자기 수잔의 부엌에서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어느 날 밤 메리 밴스가 ‘잉글사이드’에 들러 지금까지는 밀러 더글러스가 전쟁터에 가겠다는 걸 막아왔지만 이제 더 이상은 반대하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루시타니아 호가 당한 일을 생각하면 나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 카이저가 죄 없는 어린아이들까지 물에 빠뜨려 죽이는데 누군가 그 사람을 말려야 할 때가 왔어요. 반드시 끝장을 내야 할 일이라고요. 그런 생각이 내 마음속으로 천천히 들어와서 내 마음을 적셨어요. 난 이제 단호하게 맞서겠어요. 그래서 내가 일어서서 밀러에게 나가 싸우라고 말했죠. 하지만 알렉 데이비스 부인은 아직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어요. 이 세상 모든 배가 바다 속에 가라앉고 이 세상 모든 아기들이 물에 빠져 죽는다 하더라도 알렉 데이비스 부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밀러를 여기 잡아둔 것은 그 부인이 아니라 나라고 자부하고 있어요. 내가 잘못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요. 이제 곧 알게 되겠죠.”
메리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모두들 알게 되었다. 그다음 주 일요일에 밀러 더글러스는 메리 밴스와 나란히 글렌 교회로 군복을 입은 채 걸어 들어왔다. 메리는 밀러가 자랑스러워서 그 흰 눈이 불타오르듯 반짝였다. 2층 아래 뒤쪽에 앉아 있던 조 밀그레이브는 밀러와 메리를 바라보더니 미란다 프라이어 쪽을 보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조 가까이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그의 괴로움을 이해했다. 월터 블라이드는 한숨을 짓지 않았다. 하지만 월터의 얼굴에 떠오른 어떤 표정에 걱정스럽게 오빠를 바라보던 릴라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다음 주까지도 월터의 표정이 릴라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끊임없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 고통은 얼마 남지 않은 적십자 발표회 걱정까지 겹쳐 릴라를 힘들게 했다. 다행히도 리즈 가족의 감기는 백일해로 발전하지 않아서 문제가 더 심각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해결해야 할 다른 문제들이 생겼다. 발표회 바로 전날에는 채닝 부인이 올 수 없다는 유감스러운 편지를 보내왔다. 아들이 소속된 부대가 지금 킹스포트에 있는데 아들이 폐렴에 걸려 중태라면서 당장 아들을 보러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발표회 단원들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서로 얼굴만 마주 보았다. 도대체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이건 다 우리가 외부의 도움에 너무 의지해서 생긴 문제야.”
올리브 커크가 싫은 소리를 했다.
릴라는 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워 올리브 말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해. 여기저기 채닝 부인이 온다는 광고를 다 내버렸는데.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거라고. 시내에서도 사람들이 단체로 오기로 했어. 그렇잖아도 음악 프로그램이 모자라는데. 누군가 채닝 부인을 대신해서 노래할 사람을 찾아내야만 해.”
릴라가 말했다.
“이렇게 갑자기 대신할 사람을 어떻게 찾아? 아이린 하워드라면 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우리 모임에서 모욕을 당했는데 오려고 하지 않을 거야.”
올리브가 말했다.
“우리가 언제 아이린을 모욕했다는 거니?”
릴라는 자기 입으로 ‘싸늘하고 창백한 말투’라고 한 어조로 물었으나 올리브는 그런 말투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네가 모욕하지 않았니? 아이린이 내게 모두 이야기해주었어. 아이린은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네가 다시는 자기에게 말 걸지 말라고 했다면서? 자기는 너한테 그런 취급을 받을 만한 말을 한 적도 없고 그런 행동을 한일도 없대. 그래서 아이린은 우리 모임에 나오지 않고 로브리지 적십자 소녀단으로 가기로 마음을 정했대. 난 아이린을 이해해. 그래서 나도 그 애에게 자존심 버리고 돌아와 우리를 도와달라고 할 수 없다고.”
올리브가 날카롭게 대답했다.
에이미 매컬리스터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설마 나더러 부탁하라는 말은 아니겠지? 아이린과 나는 말을 하지 않은 지 백 년은 되었거든. 그리고 아이린은 언제나 누구한테 모욕을 당했다고 불평하더라. 그래도 아이린이 노래를 잘한다는 사실은 분명하지. 그건 나도 인정해. 아이린의 노래라면 채닝 부인의 노래하고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야.”
“네가 부탁해도 아무 소용 없을 거야. 우리가 이 발표회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던 4월의 어느 날, 내가 시내에서 아이린을 만나 도와달라고 부탁했거든. 아이린은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야 간절하지만, 릴라 블라이드가 프로그램을 책임지고 있는 한은 그럴 수 없다고 했어. 자기에게 그런 묘한 태도를 보이는데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느냐면서. 이제 이런 결과가 되었으니 우리 발표회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 거야.”
올리브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릴라는 집에 돌아오자 자기 방으로 들어가 혼자 생각에 잠겼다. 마음이 몹시 심란했다. 아이린에게 사과해서 비굴한 기분을 맛보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 일에는 아이린 잘못이 크다. 그런데 아이린은 비겁하게도 여기저기에 마치 릴라만 잘못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다니면서 자기는 마음에 상처를 입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순교자인 척했다. 릴라는 변명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월터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고 다녔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아이린하고는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전부터 아이린을 싫어해서 릴라 편을 들고 있는 몇몇 여자아이들을 빼고는 모두 아이린이 심한 취급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릴라가 그렇게 애쓴 발표회가 실패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채닝 부인이 부르기로 했던 솔로 4곡은 이번 발표회의 하이라이트였다.
“올리버 선생님,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릴라는 절망에 빠져 물었다.
“난 사과해야 할 사람은 아이린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의견이 너희 발표회의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진 않구나.”
미스 올리버가 말했다.
“내가 아이린을 찾아가 고개 숙이고 사과하면 틀림없이 노래를 부를 거예요. 아이린은 남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몹시 좋아하거든요. 그렇지만 아이린은 고약하게 굴 거라고요. 정말 아이린에게 고개 숙이는 것만 빼면 다른 일은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자존심을 버리고 아이린을 찾아가야겠죠. 젬과 제리 오빠는 흉악한 독일군과 맞서 싸우고 있는데 나도 아이린 하워드와 맞서 싸워야 할 것 같아요. 자존심 같은 것은 꿀꺽 삼켜버리고 벨기에 사람들을 도우려는 일에 힘을 보태달라고 부탁하겠어요. 지금은 도저히 그렇게는 못 할 것 같지만 저녁을 먹고 나면 제가 글렌 윗마을로 이어져 있는 ‘무지개 골짜기’를 얌전히 걸어가고 있을 거예요.”
릴라는 한숨을 쉬었다.
릴라의 예감은 맞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릴라는 구슬 장식이 달린 파란색 크레이프 옷을 차려입었다. 허영심은 자존심보다 억누르기 힘든 법이고, 아이린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옷차림에서 흠이나 단점을 잡아내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릴라는 아홉 살 때 엄마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엄마, 옷을 멋있게 입었을 때 점잖게 행동하기가 더 쉬워요.”
릴라는 머리를 멋지게 손질하고 소나기가 내릴 경우를 대비해 기다란 비옷도 입었다. 하지만 릴라의 머릿속은 앞으로의 그 기분 나쁠 만남에 대한 생각뿐 다른 일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릴라는 자기가 할 말을 속으로 계속 연습하면서 이 일이 빨리 끝나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벨기에 돕기 발표회고 뭐고 애초에 열 생각을 말았더라면 좋았을 걸 하며 후회하는 마음뿐이었다. 아이린과 싸운 일까지도 후회스러웠다. 월터를 모욕하는 말을 들었더라도 그냥 경멸해주고 잠자코 있었던 편이 훨씬 좋았을 것이다. 그렇게 발끈 화를 내다니 어리석고 어린아이 같은 짓이었다. 앞으로는 좀 더 현명해지자. 그러나 지금은 굴욕이라는 크고 맛없는 파이 한 조각을 삼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릴라 블라이드는 아무리 가치 있는 일이더라도 그런 파이는 조금도 좋아할 수 없었다.
해 질 무렵 릴라는 하워드 씨네 집 현관에 닿았다. 처마 둘레에 흰 소용돌이무늬 장식이 있고 사방으로 내닫이 창문이 튀어나와 있는 좀 유치하게 화려한 장식이 더덕더덕 붙은 집이었다. 뚱뚱한 체격에 말솜씨 좋은 하워드 부인이 호들갑스럽게 릴라를 맞아주었다. 부인은 릴라를 응접실에서 기다리게 한 다음 아이린을 부르러 갔다. 릴라는 레인코트를 벗고 맨틀피스 위 거울로 자기 모습을 살폈다. 머리도 모자도 옷도 더없이 흡족했다. 아이린에게 흠 잡힐만한 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릴라는 갑자기 아이린이 다른 아이들을 보면서 기분 나쁜 비평을 늘어놓았을 때 자기도 재미있어했던 일을 생각하고 가슴에 사무쳤다. 이제는 릴라 자신이 그런 비평을 들어야 할 차례였다.

곧바로 아이린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려왔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우아하게 차려입고, 옅은 볏짚 색깔 머리는 최신 유행 스타일로 손질했으며, 짙은 향수 냄새까지 풍기고 있었다.
“안녕, 미스 블라이드? 이건 뜻밖의 영광이네.”
아이린이 상냥하게 말했다.
릴라는 아이린의 차가운 손을 마주 잡으려고 일어섰다가 다시 앉으며 무언가를 보고 말았다. 아이린도 자리에 앉으면서 그것을 보았고, 무척 고소하다는 듯 입술에 비웃음이 감돌았다. 그 비웃음은 이야기하는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릴라의 한쪽 발은 날씬한 쇠 장식이 달린 구두와 얇은 파란색 실크 스타킹을 신고 있었고, 다른 발은 좀 낡은 구두에 검은색 무명 양말을 신고 있었던 것이다!
가여운 릴라! 릴라는 옷을 입고 나서 구두와 양말을 갈아 신었다. 이건 머리와 손이 따로 놀았던 탓이었다. 이게 무슨 우스운 꼴이람! 더군다나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닌 아이린 앞에서. 아이린은 여태까지 발이라는 것을 본 적이 없다는 듯 릴라의 발을 쳐다보았다. 전에 릴라는 아이린의 태도가 완벽하다고까지 생각했다. 뜻하지 않았던 비극에 얼어붙어 버린 릴라는 준비해온 말을 고스란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운 나쁜 발을 의자 밑으로 집어넣어 감추려는 헛된 시도를 하며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너한테 부탁할 일이이쩌서왔어, 아이린.”
이런, 또 혀 짧은 소리! 릴라는 조롱당할 경우도 대비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창피스러운 일을 당해도 한계가 있지!

“그래?” 
아이린은 쌀쌀하게 되묻고는 경박하게 생긴 눈에 멸시의 빛을 감추지 않고 릴라의 빨개진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릴라의 초라한 부츠와 화려한 구두에 온 마음을 다 빼앗겨버린 듯 눈을 떼지 못했다.
릴라는 마음을 다잡았다. 혀 짧은 소리를 내면 안 된다. 침착하자.
“채닝 부인이 우리 발표회에 출연할 수 없대. 킹스포트에 있는 아들이 갑자기 병이 나서 거기 가봐야 한대. 난 우리 적십자 소녀단을 대표해 채닝 부인 대신 네기 노래를 불러줬으면 해서 부탁하러 온 거야.”
릴라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무척 또렷하고 조심해서 발음해 꼭 공부한 것을 암기하는 소리로 들렸다.
“좀 어이가 없는 소린걸, 그렇지 않니?”
아이린은 그 기분 나쁜 웃음을 떠올리며 말했다.
“우리가 처음에 발표회를 하자고 했을 때부터 올리브 커크가 네게 부탁했지만 네가 거절했잖아.”
릴라가 말했다.
“세상에,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있었겠어. 다시는 너한테 말도 걸지 말라면서? 그런데 내가 그 일을 하면 우리 사이가 무척 어색해지지 않겠니, 안 그래?”
아이린이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굴욕의 파이를 먹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 말을 한 것은 내가 사과할게, 아이린. 내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어. 난 그 이후로 죽 너한테 미안한 마음이었어. 날 용서해줄 수 있겠니?”
릴라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리고 너희 발표회에서 노래를 불러달란 말이지?”
아이린의 말은 상냥했지만 모욕적으로 들렸다.
“발표회가 아니었으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라면,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몰라. 하지만 난 그 일이 있은 후로 겨울 내내 후회스러운 마음이었다는 것도 사실이야. 난 내 마음을 솔직하게 다 이야기했어. 네가 날 용서해줄 수 없다고 한다면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릴라가 비참한 심정으로 말했다.
“오, 릴라, 그렇게 쌀쌀맞게 말하지 마. 물론 난 널 용서할 거야. 나도 그 일로 무척 속이 상했단다. 내가 얼마나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 넌 모를 거야. 난 그 일로 몇 주일이나 울었어. 그렇지만 난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아이린이 간청하는 투로 말했다.
릴라는 뭐라고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이린과 말싸움을 해봐야 소용도 없는 일이었고, 벨기에 아이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우리 발표회를 도와주면 안 되겠니?”
릴라는 억지로 말을 했다. 아이린이 저런 눈빛으로 내 부츠를 바라보지만 않는다면! 릴라의 귀에 아이린이 올리브 커크에게 자기 신발 얘기를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시간도 주지 않고 그런 부탁을 하면 난 어떻게 하니? 새로운 노래를 연습할 시간도 없잖아.”
아이린이 불평했다.
“넌 글렌 사람들은 아무도 들어보지도 못한 아름다운 노래를 많이 알고 있잖아. 그 노래들은 여기서 다 새로운 노래라고.”
겨울 내내 아이린이 시내로 음악 레슨을 받으러 다닌 일을 알고 있는 릴라가 말했다.
“내가 노래할 때 반주해줄 사람도 없는걸.”
아이린이 항의했다.
“우나 메러디스가 해줄 수 있어.”
릴라가 말했다.
“우나한텐 부탁할 수 없어. 우나와는 지난가을부터 말하지 않았다고. 주일 학교 발표회 때 나한테 아주 못된 행동을 해서 그 애랑 절교할 수밖에 없었어.”
세상에나, 세상에나, 아이린은 모든 사람과 갈등을 겪고 있는 모양이었다. 우나 메러디스는 누구에게 미움 받을 행동을 할 사람도 아닌데. 너무 어이가 없어 릴라는 아이린이 보는 앞에서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올리버 선생님도 피아노를 잘 쳐. 어떤 노래라도 문제없이 반주할 수 있다고. 올리버 선생님이 반주해주실 거야. 내일 저녁 발표회 전에 ‘잉글사이드’로 와서 함께 맞춰봐.”
절박한 심정이 된 릴라는 간청했다.

“그렇지만 입고 갈 옷도 마땅한 것이 없어. 새로 맞춘 이브닝드레스는 샬럿타운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그런 큰 행사에 낡은 옷을 입고 갈 수도 없잖아. 옛날 옷은 모두 낡고 촌스럽거든.”
“우리 발표회는 말이야, 벨기에 아이들을 구해주려는 거야. 그 아이들을 위해 이번 한 번만 초라한 옷을 입을 수는 없겠니, 아이린?”
릴라가 천천히 말했다.
“어머나, 넌 벨기에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믿니? 그건 다 허풍이고 과장된 이야기라고. 20세기에 굶주리는 사람이 있을 리 없잖아. 신문은 언제나 일을 꾸며서 쓰잖니.”
아이린이 말했다.
릴라는 할 만큼은 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었다. 더 이상은 아이린의 비위를 맞추고 싶지 않았다. 발표회를 하건, 하지 못하건.
릴라는 부츠고 뭐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네가 우리를 도와줄 수 없다니 정말 유감이다. 우리끼리 최선을 다할 수밖에.”
이것은 아이린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아이린은 음악회에서 노래 부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마지못해 승낙하는 듯이 보여야 더 돋보이게 될 것이란 계산 때문에 머뭇거린 것뿐이었다. 그리고 속으로는 릴라와 화해하고 싶었다. 릴라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아낌없는 숭배를 받는 것은 참으로 달콤했다. 거기다 무척이나 기분 좋은 집인 ‘잉글사이드’를 방문할 수도 있었다. 지금은 월터같이 잘생긴 대학생도 돌아와 있는데.

아이린은 릴라의 발에서 눈을 떼었다.
“릴라, 그렇게 덤벼들 듯 말하지 마. 될 수만 있다면 나도 정말 돕고 싶어. 자, 앉아서 잘 의논을 해보자.”
“유감스럽지만 난 더 이상 앉아 있을 시간이 없어. 곧 집에 돌아가야 해. 짐스를 재워야 할 시간이야.”
“아, 그래. 네가 책을 보고 키우는 그 아기 말이지. 아기도 싫어하면서 그런 일을 하는 거 보면 넌 정말로 착한 애야. 내가 아기에게 입 맞추었을 때도 넌 정말로 싫어했지. 그런 일은 다 잊고 다시 친구가 되어보자, 응? 그리고 그 발표회도 말이야. 내가 아침 기차로 가서 드레스를 찾아올게. 그러면 발표회에 입고 갈 수 있을 거야. 올리버 선생님한테는 나를 위해 반주해달라고 네가 부탁해줄래? 난 할 수 없어. 그렇게 거만하고 거드름 피우길 좋아하는 사람이 나 같은 하찮은 사람을 위해 손가락 하나라도 꿈쩍한다고 하겠니?”
릴라는 미스 올리버를 변호하려 해봤자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릴라는 갑자기 상냥하고 감상적이 된 아이린에게 차가운 태도로 감사하다고 말하고 집을 나왔다. 이 만남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홀가분할 수 없었다.
이제 릴라는 아이린과 자기가 절대로 예전 같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 상냥하게 대할 수는 있지만 친구가 될 수는 없다. 절대로. 친구가 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지난겨울 내내 잃어버린 친구를 아쉬워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지금 갑자기 그런 마음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아이린은 엘리엇 부인이 말하는 ‘요셉을 아는 사람’은 아닌 것이다.
릴라는 자기가 감히 아이린보다 성숙하다는 말을 할 생각도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더라도 스무 살이나 먹은 아이린보다 이제 열일곱 살도 채 되지 않은 자기가 더 성숙하다니 그건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일축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아이린은 1년 전의 아이린과 똑같았다.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릴라 블라이드는 지난 1년 동안 무척이나 달라지고 성숙했으며 속도 깊은 숙녀가 되었다. 릴라는 아이린의 본성을 정확하게 꿰뚫어본 것이다. 겉으로는 상냥하게 굴고 있지만 그 속은 가볍고 비열하며 거짓되고 천박하다. 아이린은 충실한 숭배자를 영원히 잃었다.
릴라는 글렌 윗마을 거리를 지나 얼룩덜룩한 달그림자만이 고요한 ‘무지개 골짜기’까지 와서야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다. 희끄무레하니 신비로운 흰 꽃이 만발한 큰 서양 자두나무 밑에 걸음을 멈추고 릴라는 크게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중요한 일은 딱 하나밖에 없어. 연합군이 전쟁에서 이기는 일이야. 내가 구두와 양말을 짝짝이로 신고 아이린을 만나러 갔던 것 따위는 하찮은 일이라고. 그러나 나, 베르타 마릴라 블라이드는 저 달을 증인으로 하여 엄숙히 선언하노라.”
릴라는 큰 소리로 외치고 극적인 몸짓으로 달을 향해 한 손을 들어올렸다.
“내 양쪽 발을 조심스럽게 다 살펴보지 않고는 절대로 내 방을 나서지 않겠다!”

16. 1915년 5월 7일 아일랜드 남쪽 바다에서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침몰당한 대서양 항로의 영국 정기 여객선.



14
골짜기에서의 결심






이탈리아가 참전 선언을 하자 수잔은 기쁜 마음에 다음 날 온종일 ‘잉글사이드’에 국기를 내걸었다.
“러시아 전선 상황으로 보면 지금이 딱 알맞아요, 사모님. 러시아군은 믿을 만하지가 못한 데 마침 잘됐다고요. 니콜라이 대공17)도 믿을 수가 없어요. 이탈리아가 올바른 판단을 내려 우리 쪽에 가담하기로 한 것은 이탈리아에게 잘된 일이죠. 하지만 연합군을 위해서도 잘된 일인지는 내가 뭐라고 단정할 수가 없네요. 이탈리아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좀 더 알게 될 때까지는요. 그렇지만 이탈리아 덕분에 저 무뢰한 같은 프란츠 요제프18)인지 뭔지 하는 자도 조금은 생각을 달리하게 될 거예요. 참 대단한 황제예요. 한 발은 관 속에 집어넣은 채로 엄청난 살육을 꾸미고 있으니 말이에요.”
수잔은 만일 프란츠 요제프가 운 나쁘게도 자기 손아귀에 붙잡히는 날엔 그를 때려눕혀 주물러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맹렬하게 빵 반죽을 두드렸다.
월터는 아침 일찍 첫 기차로 시내에 나갔다. 낸이 오늘 하루는 짐스를 돌봐주겠다고 하여 릴라는 자유를 얻었다. 릴라는 글렌 공회당을 꾸미고 여러 가지 발표회 준비를 마무리 짓느라 온종일 바빴다. 그날 저녁은 날씨도 참으로 아름다웠다. 프라이어 씨가 비나 억수로 쏟아졌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아무 이유도 없이 미란다의 개를 발로 걷어찼다는 말이 들려올 정도였다.
릴라는 공회당에서 집으로 뛰어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갔다. 발표회 준비는 마지막까지 아무 일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이린은 아래층에서 미스 올리버와 함께 노래 연습을 하고 있었고, 릴라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전쟁도 모두 잊어버리고 뿌듯하고 행복했다. 몇 주 동안이나 애쓴 보람이 있어 발표회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겠다는 성취감과 승리감을 미리 맛보기까지 했다.
릴라 블라이드가 발표회를 주최할 만큼 능력이나 인내심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없지 않다는 것을 릴라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뭔가를 보여준 것이다! 옷을 입는 릴라의 입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자기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릴라의 동그랗고 하얀 볼이 흥분으로 희미한 분홍빛이 돌면서 몇 개 난 주근깨를 가렸고 머리는 적갈색으로 반짝였다.
릴라는 머리에 야생 사과나무 꽃을 꽂는 게 좋을까, 아니면 작은 진주 장식을 꽂을까 한참 생각하다가 사과나무 꽃을 꽂기로 하고, 왼쪽 귀 뒤에 하얀 꽃송이를 꽂았다. 마지막으로 발을 점검했다. 양쪽 구두를 제대로 다 신고 있었다. 릴라는 잠든 짐스에게 입을 맞추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장밋빛 얼굴이 참으로 귀여웠다. 이제 릴라는 서둘러 언덕을 내려가 공회당으로 향했다. 이미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공회당 안은 곧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차게 될 것이다. 릴라의 발표회가 눈부신 성공을 거두려는 찰나였다.
첫 세 순서가 성공적으로 끝났다. 릴라는 무대 뒤 작은 분장실에서 달빛을 받은 항구를 바라보며 자기가 맡은 낭송 연습을 하고 있었다. 다른 출연자들은 반대편 더 큰 방에 있어서 릴라 혼자였다. 갑자기 두 개의 팔이 허리를 감아왔다. 아이린이 릴라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릴라, 너 오늘 밤 정말 멋지다. 꼭 천사 같아. 넌 정말 용기 있는 아이야. 월터가 군대에 지원해 괴로운 마음일 텐데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으니 말이야. 네 반만이라도 좋으니 나도 그럴 배짱이 있었으면 좋겠다.”
릴라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듯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감정의 세계가 공백이 되어버렸다.
“우리 월터 오빠가 군에 지원했다고?”
릴라는 그렇게 묻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어 일부러 지어낸 듯한 아이린의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난 네가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말하지 않았을 거야. 나는 늘 실수만 한다니까. 그래, 오늘 월터는 그 일로 시내에 간 거야. 오늘 밤 기차에서 내렸을 때 월터가 나한테 그 말을 해줬어. 월터가 그 말을 맨 먼저 해준 사람은 바로 나였다고. 아직 군복은 입지 않았더라. 군복이 다 떨어졌대. 하지만 하루나 이틀이면 군복이 나온대. 나는 월터도 다른 사람 못지않게 용기가 있다고 전부터 말해왔었어. 월터가 그 말을 내게 들려주었을 때 난 정말 월터가 자랑스러웠단다. 어머나, 릭 매컬리스터의 낭송이 끝났다. 나 얼른 가봐야 해. 다음 합창에 나가기로 약속했거든. 앨리스 클로가 심한 두통이 있대.”
아이린이 가버렸다. 아, 고맙게도 아이린은 가버렸다! 다시 혼자가 된 릴라는 달빛을 받아 여전히 꿈처럼 아름다운 포 윈즈를 바라보았다. 다시 감정이 느껴졌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온몸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이렇게 말한 순간 그래도 자기는 이 고통을 견디게 될 거라는 생각과 앞으로도 몇 년이나 괴로움의 세월을 견뎌야 할지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다.
여기서 얼른 나가야 한다. 집으로 달려가야 한다. 릴라는 혼자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행진극에도 나가야 하고 낭송도 해야 하고 대화극에도 참여해야 했다. 지금 가버리면 발표회의 절반은 망쳐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냐. 어떻게 된다 해도 상관없었다. 이렇게 괴로움으로 몸부림치는 릴라 블라이드가 방금 전 그토록 행복했던 그 릴라 블라이드인가? 방 밖에서 들려오는 ‘우리는 절대 우리 국기를 내리지 않겠다.’라는 사중창 노랫소리가 아득하게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그런데 왜 눈물은 나오지 않을까? 젬 오빠가 군에 입대하겠다고 했을 때는 펑펑 울었는데. 지금 눈물이 나와 주면 날 움켜쥐고 옭아매는 이 두려움이 손을 놓아버릴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내 스카프와 코트는 어디 있을까? 여길 빠져나가 치명상을 입은 동물처럼 숨어들어야 한다.
이렇게 달아나는 건 비겁한 사람이나 하는 짓 아니니? 누가 그렇게 묻기라도 한 듯 갑자기 그런 의문이 들었다. 릴라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을 플랑드르 전선을 생각했다. 포화를 맞으며 참호를 지키고 있을 오빠와 친구들을 생각했다. 그들이 지금 이곳에서 자기의 작은 의무를 내던지려는 자기 모습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적십자 활동을 위해 펼치고 있는 이 작은 의무마저 내팽개친다면? 하지만 릴라는 거기 있을 수가 없었다. 정말 그럴 수 없었다. 젬이 떠날 때 엄마는 뭐라고 했던가?
“우리 여자들이 용기를 잃어버린다면 남자들이 어찌 두려움 없이 싸울 수 있겠니?”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건 정말 참기 힘들었다.

릴라는 문 절반쯤 가서 멈춰 섰다가는 다시 창가로 돌아왔다. 아이린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이린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건물 전체에 맑고 달콤하게 울려 퍼졌다. 아이린에게 진실한 것은 그 아름다운 목소리밖에 없었다. 릴라는 다음 차례가 요정 연극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무대로 나가 연극을 할 수 있을까? 이제 머리마저 깨질 듯 아팠고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이린은 왜 그 말을 지금 했단 말인가. 그 말을 지금 내게 해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일인데. 아이린은 너무 잔인하다. 릴라는 그날 엄마가 자기를 바라보는 표정이 이상했다는 생각에 미쳤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한두 차례가 아니라 여러 번이었다. 릴라는 너무 바빠서 그것이 무슨 뜻일까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엄마는 월터가 시내로 나간 이유를 알았지만 발표회가 끝날 때까지는 그 사실을 숨긴 것이었다. 엄마의 정신력과 인내심은 정말 흉내 낼 수도 없다!
“난 여기 끝까지 머무르며 일이 잘 끝나도록 해야 해.”
릴라는 차가운 두 손을 꼭 쥐고 말했다. 그날 오후는 릴라에게 언제나 열에 들뜬 꿈처럼 기억되었다. 릴라의 몸은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정신은 고문실에 홀로 있는 듯했다. 하지만 릴라는 연극을 꿋꿋하게 마쳤고, 낭송도 머뭇거리는 부분 없이 무사히 끝냈다. 이상스러운 아일랜드 노파 옷을 입고 미란다 프라이어가 나오지 못하게 된 대화극에도 출연했다. 그러나 연습 때 했던 것과 같은 재미있는 아일랜드 사투리는 쓰지 않았고, 낭송도 전에 보여주었던 열의와 호소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관객 앞에 선 릴라에게는 단 한 사람의 얼굴밖에 보이지 않았다. 엄마 곁에 앉아 있는 검은 머리의 잘생긴 청년. 그 얼굴이 참호 안에 있는 모습도 보였다. 별 아래 차갑게 죽어 누워 있는 모습도 보였다. 수용소에 갇혀 있는 모습도, 눈에서 빛이 사라져버린 모습도 보였다.

릴라는 글렌 공회당 무대에 서서 수많은 끔찍한 모습을 떠올렸다. 얼굴은 머리에 꽂은 사과꽃보다도 더 창백했다. 무대로 나갈 순서 사이사이에는 분장실을 초조하게 거닐었다. 그날 발표회는 절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발표회는 끝이 났다. 올리브 커크가 달려와 흥분된 목소리로 오늘 백 달러나 벌었다고 떠들었다.
“잘됐다.” 
릴라는 덤덤히 대꾸하고 자리를 물러나왔다. 문가에서 월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월터가 조용히 릴라 어깨로 팔을 둘렀다. 둘은 같이 달빛이 빛나는 길을 내려왔다. 개구리가 습지에서 노래 부르고 몽롱하게 은빛으로 빛나는 들판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봄밤은 아름답고 정겨웠다. 하지만 릴라에게는 그 아름다움이 너무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달빛도 영원히 싫을 것만 같았다.
“알고 있었니?”
월터가 물었다.
“응. 아이린이 말해줬어.”
릴라는 목이 메어 대답했다.
“오늘 저녁 발표회가 끝나기 전까지는 너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어. 난 네가 연극에 나왔을 때부터 얘기를 들었구나 싶었어. 릴라야, 난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루시타니아 호가 침몰당했다는 말을 들은 뒤부터 나는 도저히 내 자신과 타협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 죽은 여자들과 아이들이 무자비하고 차가운 바다 위에 떠다니는 광경이 내 마음에 떠올랐을 때, 그때 처음에는 사는 것에 혐오감이 느껴졌어. 난 그런 잔인한 일이 일어나는 세상을 떠나버리고 싶었어. 내 발에서 그 저주스러운 흙을 영원히 털어버리고 싶더라. 그때 나는 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
“오빠가 아니어도 갈 사람은 많아.”
“내 말은 그런 게 아니야, 릴라, 나의 릴라. 나는 나를 위해 가려는 거야. 내 영혼을 구하려고 가는 거라고. 내가 가지 않으면 내 영혼은 초라하고 비열하고 생명도 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말 거야.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두려워하던 눈을 잃거나 사지를 잘리는 일보다 더 무서운 일이야.”
“오빠는 죽을 수도 있어.”
릴라는 그 말을 입 밖에 내는 것도 싫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약하고 비겁한 일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그날 저녁의 초조했던 긴장감으로 릴라는 할 말 못 할 말 가릴 겨를조차 없었다.
월터가 읊조렸다.

“‘늦게 오든 빨리 오든, 결국은 찾아오는 것이 죽음이라네.’”19)

“내가 전에도 말했듯이 내가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야. 단순히 목숨을 유지하는 데만도 너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해, 릴라. 이 전쟁은 너무 잔인해. 난 가야 해. 이 세상에서 악을 쓸어내 버리는데 나도 보탬이 되어야 한다고. 난 다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려고 싸워야 해, 릴라, 나의 릴라. 이것은 나의 의무야. 이 세상에는 더 고귀한 의무도 있을 거야. 하지만 내 의무는 이거야. 내게는 생명을 지키고 캐나다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

난 그 의무를 다해야만 해. 젬 형이 떠난 후로 난 처음으로 내 자존감을 회복했어. 난 이제 시도 쓸 수 있을 것 같아.”
월터는 웃음을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작년 8월 이후로 나는 시를 한 줄도 쓰지 못했어. 하지만 오늘 밤 내 마음은 시로 넘쳐 있어. 릴라야, 제발 마음을 강하게 먹어줘. 형이 떠났을 때처럼 그렇게 강인한 모습을 보여줘.”
“이번엔 달라.”
릴라는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려고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끊어 할 수밖에 없었다.
“난…… 물론…… 젬 오빠도…… 사랑하지만…… 월터 오빠는…… 내게…… 너무…… 소중해. 그리고…… 젬 오빠가…… 갈 때는…… 전쟁이…… 금방…… 끝날 줄…… 알았다고.”
“나를 도와주어야 해. 릴라, 나의 릴라. 강한 모습을 보여줘. 오늘 밤은 기분이 참 좋다. 내 자신에 대한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어. 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기분이 될 수 없는 시간도 있을 거야. 그땐 네가 날 도와주어야 해.”
“언제…… 갈 거야?”
나쁜 일은 한꺼번에 다 알아두는 게 나았다.
“1주일 후에, 우선은 킹스포트로 가서 훈련을 받을 거야. 해외로 나가는 건 7월 중순경이 될 거야. 하지만 확실한 건 몰라.”
1주일! 월터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1주일밖에 남지 않았다고! 릴라는 그 청춘의 눈으로도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심정이었다.
둘이 ‘잉글사이드’ 대문에 다다르자 월터는 늙은 소나무 그림자 아래서 발걸음을 멈추고 릴라를 꼭 안아주었다.
“릴라, 나의 릴라, 벨기에나 플랑드르에도 너처럼 얼굴도 마음도 곱고 해맑은 아가씨들이 살고 있었어. 너도, 너까지도 그 사람들의 운명이 어찌 되었는지 알잖아. 이 세상에서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선 안 돼. 그러니까 떠나는 나를 도와주어야지, 그렇지 않니?”
“노력해볼게, 오빠. 하지만 자신이 없어.”
릴라는 말했다.
릴라는 월터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매달리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릴라는 그 순간 그 자리에서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월터는 가야만 한다. 아름다운 영혼과 꿈과 이상을 지닌 내 아름다운 오빠는 가야만 한다. 릴라는 무의식적으로 머지않아 이런 일이 닥칠 줄 알고 있었다. 햇볕이 내리쬐는 들판으로 검은 구름 그림자가 피할 수 없이 재빨리 다가오는 것을 보듯 그 일이 서서히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릴라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가슴속 한구석에서는 야릇하게 안도감이 일었다. 겨울 내내 희미하지만 마음 밑바닥에서 넘보던 아픔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 누구도 월터를 병역 기피자라고 말할 수 없다.
그날 밤 릴라는 잠들지 못했다. 짐스 말고는 아마도 ‘잉글사이드’의 그 누구도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몸은 서서히 그리고 꾸준히 성장하지만 마음은 한꺼번에 부쩍 자라버릴 수 있다. 단 한 시간 만에 완전히 성숙에 이를 수도 있다. 바로 그날 밤 릴라 블라이드의 정신은 완전히 성숙한 여자로 자라버렸다. 고통을 겪은 다음 강인하고 참을성도 많아진 여자로.

그날 슬프디슬픈 새벽이 동틀 무렵 눈을 뜬 릴라는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에는 커다란 장밋빛 꽃봉오리를 매단 키 큰 사과나무가 있었다. 몇 년 전 월터가 어렸을 때 심은 것이다. ‘무지개 골짜기’ 너머로 막 떠오르는 해가 일렁이며 흐릿한 아침 하늘을 갈라놓고 있었다. 더 위로는 아직 사라지지 못하고 미적거리는 별들이 차가운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봄 세상이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누군가 다가와 릴라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엄마였다. 창백한 얼굴에 큰 눈의 엄마.
“엄마, 어떻게 견디고 있어요?”
“릴라야, 엄마는 월터가 정말로 가길 원한다는 걸 며칠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현실에 싸우고 화해할 시간을 미리 가졌단다. 우리는 월터를 보내주어야 해. 우리에게는 인간의 사랑보다도 더 크고 거부할 수 없는 소명이 있단다. 월터는 그 소명에 귀를 기울인 거야. 월터의 희생을 더 가슴 아프게 하지 말자.”
엄마는 대범하게 말했다.
“우리의 희생이 오빠의 희생보다 더 커요. 오빠는 자기 한 몸을 바치는 거지만 우리는 오빠들을 다 바치는 거잖아요.”
블라이드 부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수잔이 문을 노크하는 수고 같은 건 할 필요도 없이 문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아침을 이리로 가져올까요, 사모님?”
수잔의 눈도 이상하게 빨개져 있었지만 한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아니, 아니요, 수잔. 우리가 내려가요. 수잔, 월터가 군에 지원한 사실을 알고 있어요?”
“네, 사모님. 어젯밤에 의사 선생님께 들었어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그런 일을 허락하셨다면 무슨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우리는 그 뜻을 따르고 밝은 면만 보도록 애써야 한다고요. 군대에 갔다 오면 적어도 월터의 그 시인 병이 고쳐질지도 모르지요.”
수잔은 여전히 시인을 건달이나 같은 부류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에요. 그리고 감사하게도 셜리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고요.”
수잔은 그 마지막 말은 중얼거리듯 낮게 했다.
“그 말은 지금 다른 어머니의 아들이 셜리를 대신해서 가게 되었으니 감사하다는 뜻이에요?”
블라이드 의사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선생님.”
수잔이 짐스를 안아 일으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짐스는 커다란 검은 눈을 뜨고 포동포동하게 살이 찐 팔다리를 죽 뻗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절대로 그런 뜻은 아니에요. 난 잘 배우지 못한 무지렁이 여자라 선생님과 논쟁을 벌일 수는 없지만 누구든 군대에 가게 된 일로 하느님께 감사하지는 않아요. 내가 아는 건 오로지 카이저에게 정복당하고 싶지 않거든 전쟁터로 나가야 한다는 것뿐이에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먼로주의인지 뭔지 하는 것을 밀고 나가는 한은 우린 기댈 곳이 없으니까요. 그 극악무도한 독일군을 성명서 따위로 벌할 수는 없죠.”
수잔은 야윈 팔에 짐스를 안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결론적으로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울 만큼 울었고, 말도 할 만큼 했으면 이제 남은 일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될 수 있는 대로 밝은 생각만 하는 거예요.”


17. 제1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군을 지휘했던 러시아 황제의 동생.
18. 오스트리아의 황제(1848~1916)로 1914년에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내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몰아넣었다.
19. 스코틀랜드 시인, 소설가 월터 스콧 경(Sir Walter Scott, 1771~1832)의 《마미온(Marmion)》(1808)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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