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8권 31~32

나단비 | 2024.04.19 11:23:25 댓글: 0 조회: 742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2384
31
마틸다 피트먼 부인






릴라와 짐스가 타고 있는 열차가 밀워드의 작은 대피선로에 멈춰 섰을 때 둘은 맨 뒤쪽 승강 층계에 서 있었다. 몹시 무더운 8월 저녁 무렵이어서 사람들로 꽉 찬 열차 안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열차가 어째서 밀워드의 대피선로에 멈춰 섰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여기서 사람이 내리거나 타는 일은 없었다. 여기서부터 5킬로미터 내로 집이라고는 단 한 채밖에 없었고, 그 집도 월귤나무 외에는 자라지 않는 넓디넓은 황무지를 지나 가문비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었다. 릴라는 샬럿타운에 사는 친구를 만나 그 집에서 하룻밤 묵고 그다음 날에는 적십자활동에 필요한 물건을 사서 돌아올 생각이었다. 짐스를 데려가는 이유는 수잔이나 어머니에게 수고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지만, 얼마 있지 않으면 짐스를 영원히 떼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전에 되도록이면 함께 있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바로 며칠 전 짐스의 아빠 제임스 앤더슨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는 지금 부상을 당해 병원에 있다고 했다. 다시는 전선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서 가능하면 빨리 와서 짐스를 데려가겠다고 했다.
릴라는 그 편지를 받고 마음이 무겁고 걱정도 되었다. 릴라는 짐스를 끔찍이 사랑하고 있었고, 어떤 이유로나 짐스를 떼어놓게 되면 무척 괴로울 것 같았다. 만일 짐 앤더슨이 다른 사람으로 완전히 변했다면, 그러니까 아기를 키우기 적당한 사람이 되었다면 그나마 좀 안심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짐스를 경제적인 능력도 없고 책임감도 없는 아빠에게 주어야 한다면 짐스의 미래가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릴라는 짐 앤더슨이 착한 사람이라는 것은 의심하지 않았지만 아무리 착하고 마음 좋은 사람이라도 책임감 없는 아빠 밑에 사는 아이의 장래가 밝을 수는 없었다. 짐 앤더슨은 글렌에서 살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은 여기에 아는 사람도 하나 없으니 영국으로 돌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다시는 사랑스러운 짐스를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짐스를 밝고 건강하게 키우려고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데. 그런 아빠 밑에서 자란다면 짐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릴라는 짐스를 자기가 데리고 있게 해달라고 짐 앤더슨에게 부탁할까도 생각해보았지만 짐 앤더슨의 편지 내용으로 보아서는 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다.
릴라는 생각했다. ‘짐스 아빠가 글렌에서 살기만 한다면 내가 짐스 자라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을 텐데. 그러면 자주 짐스를 보게 될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고. 하지만 짐 앤더슨은 그럴 생각이 없는 게 확실해. 그럼 짐스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될 거야. 짐스는 지금 참 밝게 잘 커주고 있는데. 야망도 있는 아이야. 그것을 어디서 얻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다 게으름이나 부리려 드는 일도 없어. 하지만 짐스 아빠는 짐스를 교육도 제대로 시키지 않을지도 몰라. 짐스, 나의 전쟁고아, 네 장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짐스는 지금 자기의 장래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재주라도 부리듯 대피선로 위를 뛰어다니는 얼룩다람쥐를 지켜보느라 온통 정신을 팔고 있었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짐스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다람쥐를 보려고 릴라의 손에서 자기 손을 빼내 버리고 몸을 앞으로 죽 내밀었다. 릴라는 너무 깊이 짐스의 장래에 대한 걱정에만 빠져 있다가 그만 지금 당장 짐스에게 일어나는 일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그 순간 짐스는 균형을 잃고 층계에서 거꾸로 굴러떨어져 버렸다. 짐스는 대피선로 건너편 양치류 덤불 위로 떨어졌다.
릴라는 정신이 번쩍 들면서 비명을 질렀다. 얼른 계단을 내려와 자기도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다행히도 기차는 아직 느린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또한 다행히도 릴라는 기차가 달리는 방향으로 뛰어내릴 만큼은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릴라는 과꽃과 잡초가 가득 나 있는 도랑으로 굴러 우스운 꼴로 도랑에서 기어 나와야 했다.
그 장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기차는 무정하게도 황무지 모퉁이를 돌아 힘차게 달아나 버렸다. 릴라는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다친 데는 없었다. 도랑에서 기어 나오자 짐스가 죽은 것이 아니면 온몸의 뼈가 다 부서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미친 듯이 짐스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짐스는 몇 군데 멍이 들고 몹시 겁을 먹기는 했지만 별로 다친 곳은 없었다. 릴라는 짐스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자 울음을 터뜨렸다.
짐스는 너무 놀라 울지도 못하고 있다가 화가 난다는 듯 말했다.
“심술쟁이 기차!”
거기다 하늘을 향해 얼굴을 찌푸리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
“하느님도 못돼먹었어!”
릴라가 흐느끼다 웃음을 터트렸다. 아빠가 히스테리라고 부르는 상태가 되었지만, 히스테리에 무너지기 전에 정신을 가다듬었다.
“릴라 블라이드, 이게 무슨 꼴이니? 얼른 정신 차려. 짐스, 너 그런 말 하면 안 돼.”
“하느님이 날 기차에서 떨어뜨렸어. 누가 날 밀었다고. 윌라가 날 떨어뜨린 건 아니니까 하느님이 그런 거야.”
짐이 반항적으로 말했다.
“아니야. 아무도 널 밀지 않았어. 네가 몸을 너무 앞으로 많이 내밀어서 떨어진 거야. 그러면 안 된다고 내가 말했잖아. 그러니까 이건 네 잘못이야.”
짐스는 릴라 말이 정말인지 알아보려는 듯 릴라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다음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하느님 미안해요.”
짐스는 봐준다는 듯 사과했다.
릴라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그다지 좋은 인상이 아니었다. 북서쪽 하늘에 무겁게 구름이 드리워진 것이 곧 비라도 내릴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지? 오늘 밤에는 이제 기차도 없다. 9시에 오는 임시 열차는 토요일에만 다녔다. 폭풍우가 닥치기 전에 3킬로미터는 떨어져 있는 한나 브루스터네 집까지 걸어갈 수 있을까? 릴라 혼자라면 얼마든지 갈 수 있지만 짐스가 있으니 문제가 간단치 않았다. 이 작은 다리로 거기까지 갈 수 있을까?
“그래도 최선을 다해봐야지, 뭐. 소나기가 멎을 때까지 이 대피선로에 있어도 되겠지만, 비가 밤새도록 내릴지도 모르고 곧 캄캄해져 버릴 텐데. 한나네 집에 닿기만 하면 하룻밤 머무를 수 있으니까.”

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말했다.
한나 브루스터는 한나 크로퍼드였던 시절 글렌 마을에 살았고 릴라와 같이 학교에 다녔다. 한나가 릴라보다 나이는 세 살이 위였지만 둘은 아주 친하게 지냈다. 한나는 어려서 결혼했고 여기 밀워드에 살고 있었다. 힘들게 일하면서 아이들을 키워야 했고 남편은 잘사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생활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한나는 결혼한 후로 예전에 살던 곳을 방문하는 일도 드물었다. 릴라가 한 번 찾아간 적이 있긴 했지만 그 후로는 몇 년이나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렇지만 릴라와 짐스는 장밋빛 얼굴에, 너그럽고 편안한 성격을 가진 한나가 살고 있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피난처가 되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처음에는 씩씩하게 길을 나섰지만 점점 힘들어졌다.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길은 거칠고 마차 바큇자국만 깊게 패여 있었다. 짐스는 너무 지쳐서 마지막 4분의 1 정도 남았을 때는 릴라가 안고 걸어야 했다. 드디어 브루스터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지쳐서 감사의 한숨을 내쉬며 짐스를 보도에 내려놓았다. 하늘은 검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커다란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천둥소리도 점점 더 커졌다. 그런데 집 안을 보고 릴라는 가슴이 철렁했다. 블라인드가 모두 내려져 있고 문은 잠겨 있었다. 브루스터 가족은 집에 없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릴라는 작은 헛간으로 달려가 보았다. 헛간도 잠겨 있었다. 다른 쉴 만한 곳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황량한 하얀 집은 베란다도 없었다.
밖은 이미 어두워졌고 릴라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창문을 깨고라도 집 안으로 들어가야겠어. 그렇게 했다고 해서 한나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야. 천둥 번개와 폭우를 피해서 자기 집에 왔는데 집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다고 한다면 한나도 나한테 잘했다고 하지 않을 거야.”
릴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릴라가 정말 뭔가를 깨부수고 침입하듯 집 안으로 들어가야 할 일은 면했다. 부엌 창문이 쉽게 열렸기 때문이다. 릴라는 짐스를 안아 올려 안으로 들여놓았고 자기도 기어올랐다. 열린 창문으로 폭우도 같이 쏟아져 들어왔다.
“난 이 집에서 편히 쉬겠어. 한나도 내가 그렇게 하길 원할 거라고. 우선은 짐스랑 내가 요기할 것이 있나 찾아봐야지. 그다음에도 비가 계속 오고 아무도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2층 손님방으로 가서 자야겠어.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는 염치고 체면이고 차릴 것 없다고. 내가 참으로 바보였지 뭐야. 처음에 짐스가 떨어진 것을 봤으면 기차 안으로 달려 들어가 누군가한테 도움을 청하고 기차를 멈추도록 했어야지. 그렇게 했더라면 이런 곤욕을 치르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하지만 이제 일은 이렇게 되어버렸고, 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릴라가 말했다.
두 사람 뒤에서 비바람이 춤추듯 같이 휘몰아치며 따라 들어오는 것을 보고 짐스는 즐거운 듯이 외쳤다.
“오, 저 작은 천둥 조각들 좀 봐!”
릴라는 창문을 닫고 가까스로 램프를 찾아 불을 켰다. 부엌은 작고 아담했다. 부엌 한쪽은 단정하게 잘 꾸며진 응접실로 연결되었고, 다른 쪽은 여러 가지 식료품이 잘 보관된 것으로 보이는 식품저장실이었다.
릴라는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이 집은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좋아 보이는걸. 이렇게 좋은 가구들을 들여놓은 것을 보면. 하긴 그 무렵에는 한나와 테드가 살림을 막 시작했던 때였으니까. 하지만 테드가 그렇게 잘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테드가 훨씬 더 성실한가 봐. 한나를 위해서 잘되었네.’
천둥은 멎었지만 비는 여전히 억수로 퍼부었다. 11시가 되자 릴라는 아무도 집에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짐스는 소파에 깊이 잠들어 있었다. 릴라는 짐스를 손님방으로 안아다 침대에 눕혔다. 그런 다음 릴라도 세면대 서랍장에 있는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졸린 눈을 비비며 기분 좋게 이불에 라벤더 향기가 밴 침대로 들어갔다. 릴라는 그 모든 일을 겪느라 몹시 지쳐 있어서 낯선 곳에 있었지만 자리에 눕자마자 곧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릴라는 이튿날 아침 8시까지 잠에 빠져 있다가 깜짝 놀라 잠을 깼다. 누군가가 거칠고 불쾌한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이봐, 두 사람, 당장 일어나라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릴라는 순식간에 잠이 확 달아났다. 이렇듯 한꺼번에 잠이 확 깬 일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방에는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남자였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검은 턱수염을 더부룩하니 기른 키 큰 남자는 성이 난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여자가 서 있었다. 키가 크고 마른 사람으로 무뚝뚝해 보였고 머리는 진한 붉은색에 아주 이상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 여자는 남자보다도 더 기분 나쁘고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두 사람 뒤에 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몸집이 작고 나이는 적어도 여든 살은 되어 보이는 할머니였다. 이 노부인은 몸집이 자그마해도 굉장히 눈길을 끄는 인상이었다. 온통 까만 옷차림을 했고 머리카락은 눈처럼 희었으며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핏기라고는 없었지만 새까만 눈에는 생기와 활력이 넘쳤다. 그 노부인도 다른 두 사람 못지않게 놀란 모습이었으나 릴라가 보기에 기분은 언짢아 보이지 않았다.
릴라는 뭔가 굉장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아까보다도 더 성난 목소리로 물었다.
“여봐요. 당신은 누구요? 여기에는 무슨 일로 와 있는 거요?”
릴라는 한쪽 팔을 딛고 일어섰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른 채 절망스럽고 바보스러운 기분으로. 맨 뒤에 선 검정 옷에 머리가 하얀 노부인이 소리 죽여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저 할머니는 진짜야. 이것은 꿈이 아니라고.’
릴라는 생각했다. 그리고 소리 내어 말했다.
“여긴 시어도 브루스터 씨 댁이 아닌가요?”
“아니에요. 여기는 우리 집이에요. 작년 가을에 브루스터 씨한테 우리가 샀어요. 그 집 사람들은 그린베일로 이사 갔어요. 우리 성은 채플리예요.”
몸집이 큰 여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가엾은 릴라는 다시 베개에 머리를 묻어버리고 조용히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전, 전 여기가 브루스터 씨 집이라고 생각했어요. 브루스터 씨 부인이 제 친구거든요. 저는 릴라 블라이드예요. 글렌 세인트 메리의 블라이드 의사 딸이죠. 전 아이를 데리고 시내에 가는 길이었는데 그만 도중에 이 아이가 기차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저도 뛰어내렸어요. 우리가 기차에서 떨어진 걸 아무도 못 봤어요. 어젯밤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폭풍우가 금방이라도 몰아칠 것 같아 여기로 왔어요. 그런데 집에 아무도 없어 창문으로 들어와 잤던 거예요.”

“그렇게 된 거로군요.”
여자는 한껏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럴듯한 얘기예요.”
남자도 맞장구쳤다.
“우리가 뭐 엊그제 태어난 갓난애인 줄 아나.”
여자가 덧붙였다.
머리는 하얗고 옷은 검은색과 흰색뿐인 노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그 말을 하자 아까보다도 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손을 공중에 내저으며 웃어댔다.
릴라는 채플리 부부의 불쾌한 태도에 발끈 화가 났다. 평정심마저 잃어버리고 침대에 일어나 앉아 한껏 의연하게 말했다.
“여러분이 언제 태어났는지 또 어디서 태어났는지 제가 알 리는 없지만 그곳에서는 무척이나 특이한 매너를 가르치는 모양이군요. 제가 일어나 옷을 갈아입도록 잠시 제 방에서, 아니 이 방에서 나가주실 정도의 예절을 알고 계신다면 저도 더 이상 남의 집에 들어와서 폐를 끼치는 무례는 범치 않지요. 그리고 어젯밤에 우리가 먹고 머무른 대금은 충분히 갚아드리겠어요.”
흑백 유령처럼 보이는 노부인이 박수를 치면서 웃는 것처럼 보였지만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채플리 씨는 릴라의 쌀쌀한 말투에 겁을 먹었는지, 아니면 돈을 내겠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졌는지는 모르지만 아까보다 정중하게 말했다.
“음, 그것이 공정한 일이겠지요. 보상을 하겠다면 좋아요.”
검은색과 흰색뿐인 노부인이 깜짝 놀랄 정도로 맑고 단호하며 권위가 담긴 목소리로 나무랐다.
“이 아가씨에게 돈을 지불하게 하다니 당치도 않아. 로버트 채플리가 부끄러움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자네의 장모인 내가 자네 대신 부끄러움이라는 걸 안다고. 마틸다 피트먼 부인이 있는 집에서는 어떤 손님에게도 식비나 숙박료를 내게 할 수 없어. 지금 내 형편이 전만 못하더라도 예절까지 고스란히 잊어버린 것은 아니니까. 우리 아멜리아를 자네에게 시집보냈을 때부터 난 자네가 인색한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어. 그런데 이젠 아멜리아까지 인색한 사람으로 만들어놓았어. 하지만 마틸다 피트먼 부인은 오랫동안 이 집안을 이끌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네. 로버트, 자네는 이 아가씨가 옷을 갈아입도록 이 방에서 나가도록 하게. 그리고 아멜리아, 너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아침 식사를 준비해라.”
릴라는 어른이 이렇게 순하게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을 본 일이 없었다. 둘은 말이며 눈초리에 털끝만큼의 반항하는 기색도 없이 방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피트먼 부인은 소리도 내지 않고 몸을 양쪽으로 흔들며 즐겁다는 듯 웃었다.
“우습지 않아요? 대개는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지만 가끔은 고삐를 단단히 죄어주어야 해요. 아주 힘껏 고삐를 당겨야 하지. 감히 나한테 반항하지 못하도록. 내가 제법 많은 돈을 갖고 있어서 저 둘이 나를 화나게 할 생각은 하지 못하거든. 그 돈을 모두 자기들에게 남겨주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걸 내 모르지 않지. 하지만 나야 무슨 걱정이야. 나도 내 재산을 전부 저 둘에게 남겨줄 생각은 없어. 저 둘을 좀 골려주고 싶거든. 그런데 일부를 누구에게 줄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어. 나이가 여든이면 빌려온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아 얼른 정해야 하는데. 자, 이제 천천히 옷을 갈아입어요.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저 못된 것들을 감시해야겠어. 아가씨가 데려온 저 아이는 동생인가? 아주 잘생겼군.”
“아니에요. 아이의 엄마는 세상을 떠났고 아빠는 외국의 전쟁터에 나가 있기 때문에 제가 돌봐주고 있는 전쟁고아예요.”
릴라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전쟁고아라고! 어이구머니나! 저 아이가 깨기 전에 나는 물러나는 것이 좋겠군. 아니면 깨자마자 울고 난리를 칠 거야. 아이들은 날 좋아하지 않지. 아이들이 날 좋아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어린아이가 제 스스로 내게 가까이 온 적도 없어. 내 아이조차도 그랬지. 에밀리아는 내가 낳은 딸은 아니고 양딸이야. 그래서 귀찮은 일을 덜게 되었지. 아이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 나도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아. 그래야 공평한 일이지. 하지만 저 아이는 정말 잘생겼군.”
바로 그 순간 짐스가 깨어났다. 커다란 갈색 눈을 뜨고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마틸다 피트먼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런 다음 얼굴에 예쁜 보조개를 만들면서 부인을 가리키며 진지하게 말했다.
“예쁜 할머니야, 윌라. 예쁜 할머니!”
마틸다 피트만 부인은 미소 지었다. 여든 살을 먹은 부인이라도 가끔씩은 허영심에 빠지는 법이다.
“난 어린아이와 바보는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들었지. 나도 젊었을 때는 예쁘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어. 하지만 나처럼 나이를 먹고 보면 그런 칭찬을 받는 일도 드물지. 그런 말을 들어본 게 몇 년 만인지 몰라. 정말 듣기 좋은 말이야. 나한테 뽀뽀해주지 않으련, 귀여운 녀석!”

노부인이 말했다.
그러자 짐스가 더욱 기가 막히고 놀랄 짓을 했다. 짐스는 원래 자기감정을 잘 표현하는 아이도 아니었고 ‘잉글사이드’ 식구들에게도 입을 맞추어주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데 그런 아이가 그 통통한 작은 몸에 달랑 팬티 하나만 입은 채로 달려가 마틸다 피트먼 부인의 목을 와락 끌어안고 아주 기꺼이 뽀뽀를 했다. 그것도 서너 번씩이나.
“짐스!”
릴라는 짐스의 이런 행동이 버르장머리 없다고 생각하고 야단했다.
“내버려두어요. 난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좋아. 모두가 날 무서워하지. 아가씨는 그런 내색을 하려고 하지 않아도 날 무서워하지 않는구먼. 왜 그렇지? 물론 로버트와 에밀리아는 나를 무서워하지. 내가 일부러 무서워하게 하고 있으니까 당연한 일이야.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내가 아무리 정중하게 대해주어도 언제나 날 무서워해. 아가씨는 앞으로도 계속 이 아이를 데리고 있을 생각인가?”
“아니요. 아이 아빠가 곧 돌아온대요.”
“그 사람이 무슨 능력이 있는 사람인가? 그러니까 그 아빠란 사람 말이야.”
“글쎄요. 아주 친절하고 착한 사람이래요. 하지만 가난하죠. 언제까지나 그 가난을 벗어나지 못할까 봐 걱정이에요.”
릴라가 우물쭈물 말했다.
“그래, 걱정할 것 없어. 내게 생각이 있어. 내게 좋은 생각이 났어. 로버트와 에밀리아를 좀 골려줄 수도 있겠군. 내게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큰 목적이니까. 물론 나는 저 아이가 마음에 들어. 나를 무서워하지 않으니까. 저 아이는 내가 신경을 좀 쓸 가치가 있다고. 자, 이제 얼른 옷을 갈아입어요. 그리고 준비가 되면 내려와서 아침을 먹으라고.”
릴라는 어젯밤 기차에서 뛰어내리고 오래 걸은 탓에 몸이 뻣뻣하고 온몸이 아팠지만 곧 옷을 갈아입고 짐스도 옷을 입힌 다음 부엌으로 내려갔다. 식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따뜻한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채플리 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채플리 부인이 기분이 좋지 않다는 태도로 빵을 자르고 있었다. 마틸다 피트먼 부인은 안락의자에 앉아서 회색 군인용 양말을 짜고 있었다. 부인은 아직도 보닛을 쓰고 있었고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어서 앉아서 아침을 먹어요.”
피트먼 부인이 말했다.
“전 배가 고프지 않아요. 아무것도 먹힐 것 같지도 않구요. 그리고 얼른 역으로 나가야 해요. 아침 열차가 이제 곧 올 시간이거든요. 너무 제멋대로지만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짐스의 것으로 버터 바른 빵 한 조각만 얻어갈게요.”
릴라가 거의 간청하듯 말했다.
피트먼 부인은 장난스럽게 릴라를 향해 뜨개바늘을 흔들며 말했다.
“앉아서 아침 식사를 해요. 피트먼 부인의 명령이야. 누구나 피트먼 부인의 명령에는 복종해야 하지. 로버트와 아멜리아까지도. 그래, 아가씨도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만 해.”

릴라는 부인이 시키는 대로 식탁에 앉았다. 피트먼 부인의 마력에 걸리기라도 했는지 식사도 꽤 많이 했다. 노부인 앞에서 무척 유순해 보이는 아멜리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피트먼 부인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지런히 뜨개질하는 손만 놀리며 혼자서 낄낄거렸다. 릴라가 식사를 끝내자 부인은 짜던 양말을 감아놓았다.
“자, 이제 가고 싶거든 어디든 가도 돼요. 그렇지만 가고 싶지 않으면 여기 그냥 있어도 돼. 아멜리아가 아가씨의 식사도 만들고 시중도 들어줄 거야.”
적십자 소녀단의 한 단원으로부터 잘 뻐기고 대장 노릇하기 좋아한다고 비난을 받을 만큼 독립심 강한 미스 블라이드도 그 말에 완전히 꼬리를 내리고 얌전하게 사양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젠 정말로 가봐야겠어요.”
“좋아. 그럼 타고 갈 것을 준비해주지. 내가 로버트더러 마차로 아가씨를 역까지 바래다주라고 했어. 난 로버트에게 이런저런 심부름 시키는 일을 즐기지. 나한테는 그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야. 난 여든이나 되었고 이제는 로버트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즐거움 외에 다른 즐거움은 없어.”
피트먼 부인이 문을 홱 열어젖히며 말했다.
로버트는 문 앞에 아담한 2개의 좌석이 있고 고무 타이어가 달린 마차를 세우고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도 장모가 한 말을 한 마디 남김없이 들었겠지만 그런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은혜에 보답할 날이 있을 거예요.”
릴라는 마틸다 피트먼 부인의 눈을 바라보며 거의 남아 있지도 않은 용기를 쥐어짜 내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아까도 말하지 않았던가? 마틸다 피트먼 부인은 손님을 대접하고 그 대가를 받는 일은 없을 것이며, 같이 살고 있는 사람도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본성이 욕심이 사나워 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사람이라도 그건 안 될 말이야. 자, 어서 떠나도록 해. 또 다음에 시내에 나가다 이쪽으로 오게 되면 꼭 다시 들르고. 무서워할 것 없어. 아가씨가 무서워했다는 말은 아니지만. 오늘 아침 아가씨가 로버트를 야단친 것으로 봐서는 겁쟁이는 아니야. 요즘 아가씨들은 겁쟁이가 많더구먼. 내가 처녀 적에는 무서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지. 그 아이를 잘 보살펴줘. 그 아인 보통 애가 아니야. 로버트에게 물웅덩이는 잘 피해 지나가라고 해. 새 마차에 온통 흙탕물이 튀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피트먼 부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짐스는 키스를 날려주었다. 마틸다 피트먼 부인도 답례로 짐스에게 양말을 흔들었다. 역까지 가는 도중 로버트는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물웅덩이의 일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대피선로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자 릴라는 정중하게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건넸다. 하지만 로버트 채플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말을 돌려 가버렸다.
릴라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다시 릴라 블라이드로 돌아가야겠군. 오늘 아침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던 것 같은 기분이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범상치 않은 할머니가 만든 어떤 사람이었어. 그 할머니가 내게 최면이라도 걸었던 건가. 이 이야기를 오빠들에게 써 보내면 무척 재미있어 할 거야.’
릴라는 다시 한 번 긴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이제 편지를 쓸 사람은 제리, 케네스, 칼, 그리고 셜리뿐이라는 아픈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젬 오빠는 어디 있을까? 오빠도 마틸다 피트먼 부인 이야기를 들으면 무척 재미있다고 할 텐데.’






32
젬에게서 소식이 오다




1918년 8월 4일

등대에서 댄스파티가 열린 지 오늘로서 4년이 되었고, 전쟁이 시작된 지도 4년이 지났다. 난 4년이 아니라 4년이 세 번은 지난 것만 같다. 그때 열다섯 살이었던 나는 지금 열아홉 살이 되었다. 예전에 난 그 4년을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절이 되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난 전쟁을 겪으며 두려움, 비애, 걱정으로 가득 찼던 세월을 보내고 말았다. 하지만 난 또한 겸손하게 바란다. 내가 좀 더 강해졌고 좀 더 성숙해진 세월이었기를.
오늘 복도를 지나다가 엄마와 아빠가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되었다. 엿들을 생각이 있었던 게 아니라 2층으로 가려고 복도를 지나다가 엄마가 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와 듣게 되었을 뿐이다. 엄마는 나를 칭찬하는 말을 했다. 엄마가 한 말이니 난 그 말을 내 일기장에 적어두고 절망적인 기분이 들 때마다 위로로 삼으려고 한다. 허영심이나 이기심이 생길 때, 아니면 마음이 약해지거나 내 자신에게서 좋은 점은 보이지 않을 때 읽고 힘을 낼 것이다.
“릴라가 지난 4년 동안 아주 훌륭하게 성장했어.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였는데 이제는 아주 듬직하고 여자다운 숙녀가 되어 내가 아주 의지가 돼. 낸과 다이는 어른이 된 다음부터 나한테서 좀 멀어져 버린 느낌이 들거든. 그 애들은 집에 있는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하지만 릴라는 점점 더 나와 가까워지는 느낌이야. 우리는 좋은 동무 같아. 릴라가 없었다면 난 그 끔찍한 세월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정말 몰랐을 거야, 길버트.”
엄마의 말을 듣고 난 기쁘기도 했지만 슬프기도 했다. 그리고 자랑스럽고 겸손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엄마가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하지만 내가 그런 칭찬을 들을 만한 것 같지는 않다. 내가 그만큼 착하고 강하지는 않으니까. 그동안 화가 나고 인내심이 바닥난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참 많았다. 정말이지 한탄스럽고 절망적인 기분이 드는 날도 많았다. 우리 집을 굳건하게 지켜준 사람은 엄마와 수잔 아줌마이다. 하지만 나도 약간은 보탬이 되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전쟁 소식은 계속해서 좋은 소식이 들려온다. 프랑스군과 미군이 계속해서 독일군을 밀어붙이고 있다. 난 그 좋은 소식이 오래가지 않을 것만 같아 두렵다. 4년 동안이나 재앙 같은 소식만 들어오다가 계속해서 승전보가 들어오니 믿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 소식에 떠들썩하게 기뻐하지는 않는다. 수잔 아줌마는 여전히 국기를 내다 걸지만 조용히 하고 있다. 승전보에 들떠 기쁨을 만끽하기에는 그 대가로 치러야 했던 값이 너무나 컸다. 우리는 그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에 그저 감사한다.
우리는 여전히 젬 오빠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고 있다. 소식이 오길 손꼽아 기다릴 뿐이다. 우리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도 그런 희망을 갖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젬 오빠에게서 소식이 끊긴 지 몇 주일이 지나자 그런 생각이 드는 일은 더 많았고, 한 주 한 주가 지나갈 때마다 그런 절망의 시간은 점점 더 잦아졌다. 아마도 영원히 젬 오빠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말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될까 봐 두렵다. 페이스 언니는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모르겠다. 편지로 보면 페이스 언니는 한순간도 희망을 버린 적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견딜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잠기게 되는 순간이 왜 없겠는가.


1918년 8월 20일

캐나다군이 또다시 전투에 나섰다. 오늘 메러디스 목사님에게 칼이 가벼운 부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전보가 왔다. 어디에 부상을 입었는지는 모른다. 보통은 부상당한 곳도 알려주는데 이상한 일이어서 모두들 걱정하고 있다. 요즘은 날마다 새로운 승리 소식이 들어온다.


1918년 8월 30일

오늘 메러디스 목사님 앞으로 칼의 편지가 왔다. 부상은 가볍다고 했다. 하지만 부상당한 오른쪽 눈이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단다.
‘곤충들은 한 눈으로만 봐도 충분해요.’
칼이 보내온 편지는 밝았다. 하지만 우리 모두 상황은 그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일 양쪽 눈을 다 다쳤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칼의 편지를 읽은 후로 오후 내내 울었다. 칼의 그 아름답고 두려움을 모르는 파란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니!
한 가지 위로가 되는 일이 있다. 칼은 전쟁터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퇴원하면 곧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칼은 우리 마을 젊은이들 중에 맨 먼저 돌아오는 귀환병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언제나 돌아올까? 게다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사람도 있다. 돌아온다 해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난 그도 거기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 캐나다 병사들이 돌아올 때 그들과 함께 그림자 군대도 돌아올 것이다. 쓰러진 군대도 마찬가지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그들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1918년 9월 1일

어제 엄마와 함께 샬럿타운으로 <세계의 심장>이라는 영화를 보러 갔다. 그런데 영화관에서 내가 바보짓을 하고 말았다. 아빠는 그 일로 평생 날 놀려댈 것이다. 난 영화에 완전히 심취한 나머지 영화를 현실로 착각해버리고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장면들 말고는 모조리 잊어버렸다. 영화가 클라이맥스에 이르렀을 때 나는 극도로 흥분해 있었다. 여주인공이 무시무시한 독일군 병사에게 잡혀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저항하는 장면이었다. 나는 그 주인공이 칼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위급할 때 쓰려고 감추는 장면이 앞에 나왔었다. 그런데 왜 칼을 꺼내 그 악당을 해치워버리지 않는지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긴장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이 되자 난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 주인공이 칼을 잊어버린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한 짓이란! 내가 벌떡 일어나 목청껏 외쳐버렸다.
“양말 속에 칼을 숨겼잖아. 칼이 양말 속에 있다고!”
당장 소란이 일었다!
그런데 우스웠던 것은 내가 그렇게 외치자마자 주인공이 칼을 빼내어 독일군을 찔러버렸다!
극장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엄마도 배꼽을 움켜잡고 웃었다. 나는 어머니를 잡아 힘껏 흔들어주고 싶었다. 왜 그런 바보짓을 하도록 날 내버려두었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나를 잡아끌어 앉히고 입을 틀어막았어야지. 어머니는 그럴 겨를도 없었다고 변명했다.
다행히도 극장 안은 어두워서 나를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이 분별력 있고 자제심도 갖춘 그야말로 여자다운 여자가 되었다고 믿었는데! 이 일로써 난 아직 멀었다는 게 확실해졌다.


1918년 9월 20일

동쪽에서는 불가리아가 강화 제의를 해왔고, 서쪽에서는 영국군이 힌덴부르크 전선을 궤멸시켰으며, 여기 글렌 세인트 메리에서는 브루스 메러디스가 나를 감동케 만든 훌륭한 일을 했다. 사랑에서 나온 행동이기에 난 그 일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오늘 저녁에 메러디스 아주머니가 오셔서 그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어머니와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고, 수잔 아줌마는 일어서서 스토브 주변을 소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다녔다.
브루스는 언제나 젬 오빠를 무척 따랐고, 지난 4년 동안 젬 오빠를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먼데이가 자기 방식으로 젬 오빠의 충성심을 지켜가고 있던 것처럼, 브루스도 자기 방식으로 젬 오빠의 신의를 지켜가고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젬 오빠가 돌아올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젯밤 브루스가 카터 플래그네 상점에 갔다가 노먼 외삼촌이, 젬 블라이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잉글사이드’ 사람들도 이제 젬이 돌아오기를 포기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브루스는 집에 돌아오자 울면서 잠들었다.
오늘 아침 메러디스 아주머니는 브루스가 뭔가 굉장한 결심을 한 듯 단호하고 슬픈 표정으로 뜰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품에 몹시 귀여워하는 고양이를 안고서.
아주머니는 브루스가 몹시 비극적인 표정을 짓고 돌아올 때까지 별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브루스가 온몸이 덜덜 떨릴 지경으로 울면서 돌아왔단다.
“스트리피를 물에 빠뜨렸어요.”
“왜 그런 짓을 했니?”
메러디스 부인은 놀라 외쳤다.
“젬 형이 돌아오도록요. 난 스트리피를 제물로 바쳤어요. 이제 하느님이 젬 형을 돌려보내 주실 거예요. 그래서 내가 스트리피를 물에 빠뜨렸어요. 오, 엄마. 너무나 힘든 일이었어요. 하지만 이제 하느님이 젬 형을 돌려보내 주시겠죠? 스트리피는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이었거든요. 난 하느님께 내가 스트리피를 줄 테니 젬 형을 돌려보내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이제 젬 형을 돌려보내 주시겠지요? 그렇죠, 엄마?”
브루스는 흐느껴 울었다.
메러디스 아주머니는 그 가여운 아이에게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하지만 브루스의 제물로도 젬 오빠가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말은 차마 못 했다고 했다. 하느님의 역사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냥 그런 일이 당장 일어나길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만 했단다. 젬 오빠가 돌아오려면 아직 더 오래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만 했다.

“그래도 일주일은 걸리지 않겠죠, 엄마? 스트리피는 너무나 귀여운 고양이였어요. 가르랑거리는소리가 얼마나 귀여웠다고요. 젬 형을 돌려줄 만큼 하느님도 스트리피를 좋아하지 않을까요?”
브루스는 애처롭게 말했다.
메러디스 목사님은 브루스가 갖고 있는 잘못된 신앙이 걱정이었고, 메러디스 아주머니는 브루스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봐 걱정이었다. 나도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그것은 너무 갸륵하고 슬프고 아름다운 일이었다. 마음이 참 기특하기도 한 녀석 같으니라고! 브루스는 그 고양이를 무척이나 귀여워했었는데. 만일 이 희생도 많은 희생이 헛되이 끝나고 만 것처럼 헛되이 끝난다면 브루스는 가슴이 찢어지고 말 것이다.
브루스는 하느님이 우리의 기도를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들어주시지도 않고, 내가 소중한 것을 바칠 테니 그 보답을 해달라는 거래 같은 것에 응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다.


1918년 9월 24일

나는 달빛에 물든 창가에 무릎을 꿇고 앉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올렸다. 어젯밤 그리고 오늘의 이 기쁨은 너무나 커서 거의 고통스럽게 느껴질 지경이다. 그 기쁨을 다 담을 수 있을 만큼 우리 가슴은 크지가 못하다.
어젯밤 11시쯤 난 내 방에서 셜리 오빠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외출한 아빠 말고는 모두들 잠자리에 들어있었다. 전화벨이 울려서 엄마가 일어나기 전에 얼른 달려가서 전화를 받았다. 장거리 전화였다. 전화를 받자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샬럿타운 전신국입니다. 블라이드 선생님께 해외에서 전보가 와 있습니다.”
순간 내 머릿속에 셜리 오빠가 떠올랐고, 심장이 멈춰버린 듯했다. 그런 다음 소리가 들렸다.
“네덜란드에서 왔습니다. 전보 내용은 ‘독일군한테서 탈출해 방금 도착했음. 잘 지내고 있음, 제임스 블라이드.’입니다.”
나는 기절하거나, 쓰러지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기쁘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그냥 아무 생각도 없었다. 월터 오빠가 군대에 지원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마비가 되어버린 듯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엄마가 문가에 서 있었다. 아주 오래된 장미꽃 무늬 잠옷을 입고 머리는 하나로 길게 땋아 뒤로 늘어뜨린 채로 눈을 반짝이며 서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어린 아가씨 같았다.
“젬 소식이니?”
엄마가 물었다.
젬 오빠 소식이 온 것인지 어떻게 아셨을까? 수화기에 대고 내가 한 말이라고는 “네, 네, 네!” 소리뿐이었다. 엄마도 자기가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냥 알았다고 했다. 엄마는 잠이 깨었고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으며 그 순간 바로 젬 소식이 온 것을 알았다고 했다.
“오빠가 살아 있어요. 잘 있대요. 오빠는 지금 네덜란드에 있대요.”
내가 말했다.
엄마가 복도로 나오며 말했다.

“아버지한테 전화를 걸어 알려드려야겠다. 아버지는 지금 윗마을에 계셔.”
엄마는 차분하고 조용했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하지만 나 자신도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었으니까. 나는 올리버 선생님과 수잔 아줌마를 깨워 알렸다. 아줌마는 먼저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바로 “내가 먼데이는 알고 있다고 말했지?”, 그리고 세 번째로는 “내려가서 차를 준비해야겠어.” 하고 말했다.
아줌마는 잠옷 바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가 차를 준비해 고 엄마와 올리버 선생님은 차를 마셨다.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창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울었다. 그 멋진 소식이 왔을 때의 올리버 선생님과 똑같았다.
다시 태어난 날 아침의 기분을 나도 알게 되었다.


1918년 10월 4일

오늘 젬 오빠에게서 편지가 왔다. 편지를 받은 지 여섯 시간밖에 안 됐는데 벌써 편지가 너덜너덜해져 버렸다. 여자 우체국장이 온 글렌 마을 사람들에게 젬 오빠에게서 편지가 왔다고 이야기해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우리 집으로 몰려왔다.
젬 오빠는 넓적다리에 중상을 입었고 적군에게 발견되어 포로가 되었다고 했다. 그 뒤로 계속 열에 들떠 신음하며 지내서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또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몇 주일이나 지나서야 의식을 되찾고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 후에 편지를 쓰기는 했지만 집에 배달되어오지 않았다. 포로수용소에서 그리 심한 취급을 받지는 않았다고 했다. 다만 먹을 것이 형편없었다고 했다. 검은 빵 조금과 삶은 순무와 그리고 가끔씩 검정콩이 든 수프를 조금 준 것 말고는 다른 음식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날마다 하루 세 끼 꼬박꼬박 호화로운 식사를 해왔다. 젬 오빠는 집에 편지를 자주 써 보냈지만 답장이 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편지가 가지 않은 모양이라고 짐작했단다. 몸이 회복되자마자 곧 탈출을 시도했지만 붙잡혀 다시 끌려갔고 한 달 뒤에 다른 동료 한 사람과 또다시 탈출을 감행한 끝에 성공해 네덜란드에 가게 되었다고 했다.
젬 오빠는 곧장 돌아올 수 없었다. 전보로 알려온 것만큼 건강하지 못했다. 상처가 완전히 낫지 않아서 영국 병원에서 다시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을 것이며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썼다. 덕분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오늘 짐 앤더슨 씨에게서도 편지가 왔다. 영국 아가씨와 결혼했고 제대를 했으며 지금 신부와 함께 캐나다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그 일이 기쁜지 유감인지도 잘 모르겠다. 이제 모든 것은 짐 앤더슨 씨의 신부가 어떤 사람인지에 달렸다. 그리고 다른 편지도 한 통 받았는데 좀 이상한 말이 쓰여 있었다. 샬럿타운 변호사가 보낸 것으로 ‘고 마틸다 피트먼 부인’의 유산과 관련된 일로 될 수 있으면 빠른 시일 내에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피트먼 부인의 사망 원인은 심장마비라고 했다. 난 그 소식을 2~3주 전에 <엔터프라이즈> 신문에서 읽었다. 이 일은 짐스와 관계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1918년 10월 5일

오늘 아침 시내로 가서 피트먼 부인의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은 체구에 비쩍 마른 남자로 고인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표하는 말을 했다. 이 사람 역시도 로버트나 에밀리아처럼 그 부인이 죽으라면 죽은 시늉까지 하면서 살았던 사람임이 분명해 보였다. 어쨌건 피트먼 부인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유언장을 새로 작성했다. 유산으로 3만 달러를 남겼는데 대부분은 딸인 에밀리아 채플리에게 주었고, 5천 달러를 짐스 몫으로 내게 맡겼다. 이자는 짐스의 교육비며 양육비로 내가 쓰도록 했고, 원금은 짐스가 스무 살이 되는 날 생일에 짐스에게 넘겨주도록 되어 있었다. 짐스는 참 행운을 타고난 아이 같다. 태어나자마자 코너버 할머니 손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내가 구해냈고, 그다음은 디프테리아성 후두염으로 죽어가는 것을 메리 밴스가 구했으며, 또 그다음 기차에서 떨어졌을 때는 그의 행운의 별이 구했다. 짐스는 양치식물 덤불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 멋진 유산 속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마틸다 피트먼 부인이 말한 것처럼, 그리고 내가 언제나 믿는 것처럼 짐스는 분명 평범한 아이가 아니다. 이 아이는 앞으로 비범한 운명을 살아갈 것이다.
어쨌든 짐스에게 재산이 생겼다. 더구나 이 유산은 짐 앤더슨 씨가 쓰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제 새로 들어온 영국인 새어머니가 좋은 사람이기만 하면 내 전쟁고아의 앞날은 완전히 마음을 놓아도 될 터인데.
로버트와 에밀리아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다음에 집을 비울 때는 창문에 못질을 하고 나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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