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26

단차 | 2023.11.23 10:04:10 댓글: 4 조회: 248 추천: 2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20328
26

그 우물 옆에는 폐허로 남은 낡은 돌담이 있었다. 이튿날 저녁,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돌담 위에 걸터앉아 다리를 늘어뜨리고 있는 어린 왕자의 모습이 멀리서부터 눈에 들어왔다. 그가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기억 안 나는 거야? 여기가 딱 그 자리는 아닌데!"
다른 목소리 하나가 그에게 대답한 게 분명했다. 어린 왕자가 이렇게 대꾸했으니 말이다.
"맞아 맞아! 날짜는 맞는데 자리가 여기가 아니라고..."
나는 돌담을 향해 계속 걸어갔다. 여전히 아무도 보이지 않고 아무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린 왕자는 다시 대답했다.
"... 그래. 모래 위에 내 발자국이 어디서 시작됐는지를 살펴 봐 봐. 그리고 거기서 나를 기다리기만 하면 돼. 오늘 밤에 그리로 내가 갈게."
담에서 20미터 거리가 됐는데도 보이는 거라곤 없었다. 어린 왕자가 잠시의 침묵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가진 독은 좋은 거니? 아픈 거 오래가지 않게 해줄 자신 있는 거지?"
심장이 조여와 나는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여전히 무슨 얘기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제 가봐... 나 내려갈래." 그가 말했다.
그제야 담 아래쪽을 내려다본 나는 화들짝 놀랐다. 거기엔 30초면 사람을 저세상으로 보낼 수 있는 노란 뱀 하나가 어린 왕자를 향해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나는 권총을 꺼내려고 주머니를 더듬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는데, 내 발소리를 들은 뱀은 분수의 물줄기가 잦아들 듯 슬그머니 모래 속으로 몸을 낮추더니 서두르는 기색 하나 없이 옅은 금속성 소리를 내며 돌 틈 사이로 미끄러져 사라졌다.
돌담에 다다른 바로 그 순간 나는 눈처럼 창백해진 내 어린 친구를 겨우 품에 받아 안을 수 있었다.
"세상에나 이게 무슨 일이니! 이제는 뱀이랑 얘기를 다 하고!"



나는 그가 늘 두르고 있던 금색 머플러를 풀었다. 관자놀이에 물을 적시고 목을 축여 주었다. 이제 더는 그 무엇도 그에게 물을 수가 없었다.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가 두 팔로 내 목을 감싸 안았다. 그의 심장 고동이 전해져왔다. 총을 맞아 사그라져가는 새의 심장소리 같았다. 그가 내게 말했다.
"어디가 고장이었는지 찾아냈다니 기뻐. 아저씨도 곧 집에 갈 수 있겠네..."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어?"
정말이지 예기치도 못했는데 비행기 수리에 성공하여, 그 소식을 알리러 온 길이었는데 말이다!
그는 내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이렇게 덧붙였다.
"나도 오늘 집으로 돌아가..."
그러더니 우울해져서
"훨씬 더 멀고... 훨씬 더 어려울 거야."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나는 감지했다.
나는 그를 어린 아가 안 듯 내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렇디만 이 아이는 내 품에서 빠져나가 아득한 심연으로 떨어져 내리고, 나는 그 무엇 하나 붙들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했다.
"나한테는 아저씨가 그려준 양이 있어. 양을 위한 상자도 있고, 또 입마개도 있고..."
그리고는 슬픈 웃음을 지었다.
나는 한참을 기다렸다. 그의 몸이 점차 따뜻해져 오는 게 느껴졌다.
"꼬마 친구, 무서웠지..."
무서웠던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그는 조용히 웃었다.
돌이킬 수 없다는 느낌에 또 한 번 내 몸이 얼음처럼 굳어져왔다. 더는 이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내 자신이 감당치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웃음은 내게 사막 속 샘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꼬마 친구. 난 네 웃음소리를 더 듣고 싶은데..."
하지만 그는 내게 말했다.
"오늘 밤이면 일 년이 돼. 작년에 내가 떨어졌던 바로 그 자리 위에 내 별이 오게 돼..."
"꼬마 친구. 뱀 이야기도 약속 이야기도 별 이야기도... 그거 다 나쁜 꿈 아니니?"
그는 내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물론이지..."
"꽃도 마찬가지야. 만약 아저씨가 어느 별에 자라는 한 송이 꽃을 좋아한다면,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질 거야. 모든 별에 꽃이 피어 있을 테니까."
"물론이야..."
"물도 마찬가지야. 아저씨가 내게 마시라고 주었던 물은 음악 같았어. 도르래와 밧줄 덕분에... 아저씨도 기억나지... 참 좋았어."
"물론이야..."
"밤이면 아저씨는 별을 바라볼 거야. 내 별은 어무 작아서 어디 있는지 알려줄 수가 없어. 근데 그편이 더 나아. 내 별은 아저씨에게 수많은 별들 중 하나가 되겠지. 그럼 아저씨는 어느 별이든 별을 바라보는 게 좋아질 거야... 모든 별이 아저씨 친구가 될 거야... 자, 그럼 이제 내가 선물을 하나 줄게."
그가 다시 웃었다.
"아... 꼬마 친구야, 꼬마 친구야. 난 이 웃음소리가 너무 좋은데!"
"바로 이게 내 선물이 될 거야... 전의 그 물처럼 말이야."
"무슨 말이니?"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별을 바라봐. 여행하는 이들에게 별이 길 안내자가 되어주고, 어떤 이들에겐 그저 반짝이는 여런 빛일 뿐이지. 박식한 이들에게는 별이 연구거리일 거고, 전에 내가 만났던 사업가에겐 별은 돈이었어. 근데 그런 별들은 말이 없잖아. 아저씨는 그 누구의 별과도 다른 별을 가지게 될 거야."
"무슨 뜻이니?"
"아저씨가 밤하늘을 올려볼 때면, 수많은 별들 중 한 곳에 내가 살고 있고 그 별들 중 한 곳에서 내가 웃고 있을 테니, 모든 별들이 아저씨를 향해 웃고 있는 듯 느껴질 거야. 아저씨는 웃을 줄 아는 별들을 갖게 되는 거지."
그는 또 웃었다.
"아저씨 속의 슬픈 마음이 잦아들면(슬픔은 언제나 잦아들기 마련이다.) 나를 알았다는 게 기쁘게 여겨질 거야. 아저씨는 언제까지나 내 친구일 거야. 나랑 같이 웃고 싶어질 거고, 그러면 아저씬 이따금 괜히 창문을 열곤 하겠지... 하늘을 바라보며 그렇게 혼자 웃고 있는 아저씨를 발견한 아저씨 친구들은 끔쩍 놀랄 거야. 그러면 아저씨는 이렇게 말하겠지. '그러게. 별들이 날 늘 웃게 만드네!' 친구들은 미쳤나 할 거야. 그럼 내가 아저씨에게 너무 심한 장난을 친 게 되는데..."
그러면서 그는 또 웃었다.
"그렇게 되면 별 대신 웃을 줄 아는 작은 방울을 아저씨에게 가득 안긴 셈이 되겠네."
웃음 짓던 그가 다시금 심각해졌다.
"있잖아... 오늘 밤엔... 오지 마."
"난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내가 아픈 것처럼 보일 거야... 어쩌면 죽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 그렇게 보일 거야. 그러니 보러 오지마. 올 필요 없어..."
"난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는 걱정이었다.
"내가 이렇게 얘기하는 건... 뱀 때문이기도 해. 뱀이 아저씨를 물면 안 되니까... 뱀은 심술궂어. 재미로 물어버릴 수도 있다고..."
"난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그러다가 무언가에 안심이 되었는지
"하긴, 두 번째 물 때는 독이 없다더라..."
그날 밤 나는 그가 떠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소리도 없이 빠져나가 버렸다. 내가 그를 따라잡았을 때 그는 결심에 찬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그는 그저 이렇게 말했다.
"아! 아저씨네..."
그리고는 내 손을 잡았다. 그러나 여전히 염려가 가득했다.
"왜 왔어. 잘못한 거야. 아저씨는. 견디기 힘들 거야. 내가 죽는 것처럼 보일 거야. 근데 정말 그런 건 아니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잖아. 거긴 너무 멀어. 이 몸을 가지고 갈 수는 없어. 너무 무거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낡아서 벗어버린 껍데기 같은 거야. 낡은 껍데기에 슬플 건 없잖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하지만 애써 다시 힘을 내더니
"있지, 아주 좋을 거야. 나 역시 별을 바라볼 거고, 그러면 모든 별들이 녹슨 도르래가 달린 우물이 되어줄 거야. 모든 별들이 내게 마실 물을 줄 거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재밌겠어! 아저씨는 5억 개의 방울을, 나는 5억 개의 우물을 가지게 되니까..."
그리고는 그 역시 말이 없어졌다. 울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저기야. 혼자 한 발짝만 가게 내버려 둬 줘."
그러더니 그는 주저앉았다. 무서웠던 것이다.
그가 다시 말했다.




"알잖아... 내 꽃. 난 그 꽃에 책임이 있어! 너무 연약한 꽃인데, 너무 순진한 꽃인데, 세상에 맞서 자신을 지킬 거라곤 고작 4개의 가시가 다인데..."
더는 서 있을 기운이 없어 나 역시 주저앉았다. 그가 말했다.
"자... 이제 다 됐어..."
그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이내 몸늘 일으켰다. 그가 한 발짝 내디뎠다.
나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의 발목 가까이에서 노란 빛이 반짝했을 뿐이었다. 그는 한순간 미동도 없이 멈춰 있었다. 소리도 지르지 않았다. 그는 나무가 쓰러지듯 천천히 쓰러졌다. 모래 위라서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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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2) 선물 (0명)
IP: ♡.252.♡.103
봄날의토끼님 (♡.65.♡.126) - 2023/11/23 11:33:46

'중요한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너무 슬프네요...저번에 이부분 봤었는데 눈물이 나더라구요.
저도 오늘 밤하늘의 별을 보고싶네요.

단차 (♡.252.♡.103) - 2023/11/23 16:01:29

어제 타자하면서도 마음이 좀 저릿하더라고요. '중요한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몇번을 봐도 마음을 건드리는 말이에요.

뉘썬2뉘썬2 (♡.169.♡.51) - 2023/11/25 06:33:09

어린왕자는 고향별로 돌아가기 위하여 뱀에게 물리나요? 제발돌아가
걱정하던 장미꽃을 잘 챙겨줫음 좋겟네요.

단차 (♡.252.♡.103) - 2023/11/25 06:43:19

네.저는 어린 왕자가 장미에게 잘 돌아갔다고 믿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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