拉普拉斯的魔女 3~6

단차 | 2023.11.25 10:03:29 댓글: 6 조회: 285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2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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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자리에서 컵라면을 후룩후룩 빨면서 인터넷 기사를 들여다보던 나카오카 유지는 ‘영상 프로듀서 미즈키 요시로 씨, 온천지에서 사망’이라는 글을 발견하고 하마터면 면발이 목에 턱 걸릴 뻔했다. 깜짝 놀라 서둘러 상세한 내용을 화면에 띄웠다.

  그 기사에 따르면, 미즈키 요시로는 아내와 함께 아카쿠마 온천가에서 근처 산을 산책하던 중 쓰러져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아내가 잠시 물건을 가지러 여관에 다녀온 사이의 일이고, 발견되었을 때 주변에는 황화수소 특유의 냄새가 떠돌았다고 한다. 그 일대는 지하에 황화수소가 발생하는 장소가 몇 군데나 있고 우연히 가스 농도가 높아진 참에 피해자가 그곳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라고 기사는 끝을 맺었다.

  나카오카는 먹던 컵라면을 책상에 내려놓고 서랍을 열었다. 잡다한 물건을 처넣은 탓에 원하는 것이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서류 틈새에서 겨우 편지 하나를 찾아 끄집어냈다. 받는 사람은 ‘아자부기타 경찰서 살인 사건 담당자님’으로 되어 있다. 석 달 전쯤에 경찰서에 도착한 편지인데 우연히 손이 비던 나카오카에게로 일이 떨어졌다. 직속 상사 나리타 계장은 편지를 내밀며 말했다. “필시 노인네의 심심풀이 넋두리겠지만 일단 한번 읽어봐.” 전혀 관심이 없는 표정이었다.

  보낸 사람은 미즈키 미요시라는 인물이었다. 내용을 읽기 전까지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도 힘들었다.

  나카오카는 봉투에서 편지지를 꺼내 펼쳤다. 파란 잉크로 쓴 달필 글자가 빼곡히 이어졌다.

  인사말 다음에 ‘실례를 무릅쓰고 꼭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이렇게 펜을 들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편지글이 이어진다.

 
 저는 올해로 여든여덟 살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지만 별스레 험한 꼴 보는 일 없이 오늘날까지 무사히 잘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그저 고통이 적은 모양새로 이승을 하직할 수 있다면 참으로 다행이겠다고 막연히 생각하면서 하루하루 후회 없이 지내려 하고 있습니다.

  아무 여한도 없는 사람입니다만, 요즘 자꾸 마음에 걸려 견딜 수 없는 일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제 자식의 일입니다. 자식이라고는 해도 육십도 중반을 지나 이제는 노경에 접어든 사람이니 원래는 제 인생은 제가 살 수 있게 놓아두면 될 일이겠지요. 하지만 곁에서 지켜보기가 너무도 걱정스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들은 오랫동안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해왔습니다. 이름은 미즈키 요시로라고 합니다. 경찰에서 일하는 분들이 아실지는 모르겠으나, 그간 작업해온 영화 몇 편은 일본을 대표하는 작품이라는 말도 제법 들었습니다. 나름대로 웬만한 지위는 쌓아 올렸구나 하고, 부모의 욕심이 담긴 시선이겠으나, 내심 흐뭇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요시로는 행복한 가정을 만든다는 점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한 아들이었습니다. 어쩌다 얼굴을 볼 때마다 내게 하는 이야기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소리뿐이었습니다. 어디어디의 외국에 가서 도박으로 몇백만 엔을 잃었다느니, 연예인 여러 명을 제 집으로 불러들여 사흘 밤낮을 진탕 놀았다느니, 현실에 뿌리를 내린 이야기는 털끝만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식이니 결혼을 해도 그리 오래갈 리 없어서 두 번이나 이혼을 경험했습니다. 환갑 나이를 넘어섰을 때는 아무래도 이제는 평생 독신으로 끝낼 각오인 모양이다 싶어서 본인이 그걸로 괜찮다면 어쩔 수 없다고 저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년 전에 갑작스럽게 결혼 얘기를 꺼냈습니다. 이번 상대의 나이를 듣고는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아직 스물여섯 살밖에 안 된 아가씨라는 게 아닙니까. 요시로와는 마흔 살 가까이 나이 차가 납니다. 그래서 나는 반대했습니다. 그런 어린 아가씨가 정말로 요시로의 인간성에 반해 결혼을 원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재산을 노린 것일 터라서 요시로에게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은 그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괜찮다, 나는 그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 아내로서 내 곁에 둘 수만 있다면 돈을 노린 것이든 뭐든 상관없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니저러니 말들이 많겠지만, 떠들고 싶은 놈들은 얼마든지 떠들라고 해라. 어머니도 그런 말에 전혀 신경 쓰시지 마라. 아들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말을 하는데 더 이상 반대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며칠 뒤 그 여자를 만나고 나는 그만 가슴이 쿵쾅거렸습니다. 요시로가 그토록 반한 것도 이해가 될 만큼 미인인 데다 남자의 심기를 어지럽힐 요기妖氣를 풍겼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 때문에 내 아들은 분명코 파멸할 것이다, 나는 당장 그런 예감이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 요양 서비스가 딸린 고령자용 맨션에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몇 달에 한 번씩 아들이 젊은 아내를 데리고 찾아옵니다만, 그 여자를 볼 때마다 불안이 점점 커져갑니다. 겉으로는 고상하게 행동하지만 내 눈에는 요녀의 교묘한 연기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이건 요시로의 어미인 저밖에는 눈치채지 못하는 것인지, 맨션의 관리사무소 직원이나 지인들은 아직 나이도 어린 여자가 야무지고 헌신적이다, 아드님은 나이 들어 참한 아내를 얻었다, 라는 소리들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눈뜬장님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재산을 노린 것이라도 상관없다고 아들은 말했습니다. 나 역시 다소 그런 마음을 가졌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좀 더 무서운 일이 자꾸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재산을 노린 것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그걸 내 것으로 만들려고 드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그 여자는 남편이 어서 죽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지만 요시로는 어려서부터 몸이 건강한 편이라 여태껏 큰 병 한번 앓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서 빨리 죽기를 바란다면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며칠 전 아들에게서 생명보험에 가입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요시로는 예전부터 보험에는 일절 흥미를 보이지 않던 사람입니다. 자신이 죽은 뒤의 일 따위에 신경 써봤자 별 볼 일 없다는 주의였으니까요. 그래서 내가 자세히 물어봤더니 아무래도 며느리가 생명보험 가입을 자꾸 졸라댄 모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가 뭔가 끔찍한 짓을 꾸미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곰곰 생각해볼수록 걱정이 태산입니다. 하지만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이런 얘기를 내놓고 상의할 만한 사람도 없습니다. 고민 끝에 역시 전문가에게 부탁드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는 참입니다. 그쪽 경찰서를 선택한 것은 아들의 거주지 관할 경찰서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혹시 그 경찰서 관할 지역이 아니라면 적합한 경찰서로 전송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부디 꼭 좋은 의견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처음 이 편지를 읽었을 때는, 역시 나리타 계장이 떨떠름한 표정을 보일 만하다고 납득했다.

  흔히 듣는 얘기였다. 한재산 벌어들인 아들이 마흔 살이나 나이 차가 나는 젊은 여자와 결혼했다면 이런 불안감을 갖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앞질러 걱정하는 노파심에 일일이 응해줄 만큼 경찰도 한가하지는 않다.

  그렇기는 해도 이런 장문의 편지를 받아놓고 아무 액션도 취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만에 하나라도 뭔가 일이 터졌을 경우, 사회적으로 엄청난 비난이 떨어질터였다. 전혀 내키지는 않지만 나카오카는 일단 편지를 보낸 할머니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편지 말미에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미즈키 미요시가 사는 노인 요양 맨션은 조후 시에 있었다. 식당이며 대형 목욕탕, 케어센터 같은 시설이 각 동별로 있었지만 그것만 빼면 평범한 맨션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더 고급스러운 편에 속할지도 모른다. 나카오카는 미팅룸이라고 불리는 작은 회의실에서 미즈키 미요시를 만났는데 그녀의 말에 따르면 방은 꽤 널찍한 원룸이라 침대와 테이블과 소파를 넉넉히 놓고 지낼 정도라고 했다. 화장실과 욕실은 물론, 주방도 딸려 있다는 것이다.

  “7년 전에 입주했어요. 우리 아들 요시로가 비용을 다 대줬지요.” 자그마한 몸집에 얼굴도 작디작은 미즈키 미요시는 흐뭇한 듯이 말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분양을 받은 게 아니라 16년분의 임대료를 처음 입주 때 일시불로 낸 것이라고 했다. 나카오카는 머릿속에서 재빨리 계산해보고 이곳이라면 4천만 엔은 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즈키 미요시가 자랑스러운 얼굴을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던 미즈키 미요시는 나카오카가 편지 얘기를 꺼내자 얼굴의 주름이 깊어질 만큼 입을 삐죽거렸다.

  “정말 걱정, 걱정이에요. 머지않아 독약이라도 먹이는 게 아닌지,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실제로 그런 기척을 느낀 사례가 있었습니까?”

  “그야 그 여자를 볼 때마다 늘 아슬아슬하죠. 그건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얼굴이에요.”

  “그런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인 일은 없었습니까? 아드님이 며느리가 해준 음식을 먹고 맛이 이상하다고 했다든가.”

  “그 여자, 요리는 거의 안 한답디다. 노상 외식만 하고, 남편을 위해 정성껏 뭘 차려낼 마음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미즈키 미요시는 치사토라는 이름의 젊은 며느리에 대한 푸념을 길게 길게 늘어놓았다.

  “아드님이 사고를 당할 뻔했다든가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든가, 그런 얘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까?”

  자그마한 할머니는 고개를 외로 꼬면서 낮게 신음했다.

  “그런 얘기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그런 일이 있었더라도 요시로는 나한테 절대 말을 안 한다니까요.”

  한마디로, 모든 게 이 할머니의 상상 속의 일일 뿐이었다. 망상증, 이라는 건 심한 말이겠지만, 그래도 기우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나카오카의 속마음을 눈치챘는지 미즈키 미요시는 손을 맞대며 빌다시피 했다.

  “제발 부탁합니다, 형사님. 그 여자 좀 조사해주세요. 갑자기 생명보험에 가입하라고 졸라대다니, 수상하잖아요. 틀림없이 내 아들을 죽일 작정이에요. 그 여자 계획대로 하지 못하게 감시 좀 해주세요.”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만, 현재로서는 딱히 무슨 일이 생긴 것도 아니고, 저희가 나서기가 좀 어렵습니다.”

  나카오카의 말에 미즈키 미요시의 눈초리가 돌연 험악해졌다. 입가가 홱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이런 세금 도적놈!”이라고 내뱉었다.

  “일이 생겨버리면 그때는 이미 늦는단 말이야! 경찰이 대체 왜 있는 거야? 우리는 평생 세금을 꼬박꼬박 바쳤어. 이런 때 움직여주는 게 당신들 할 일이잖아! 이 밥버러지 같으니라고.”

  너무도 달라져버린 태도에 나카오카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노파는 흥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나카오카는 머리를 긁적였다. 쉽게 그러자고 해서는 안 되지만, 이대로는 언제까지고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순찰 돌 때, 아드님 댁에 특히 주의를 기울이라고 지역과에 말해두지요.”

  그야말로 공무원다운 답변이었지만 경찰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노파의 귀에는 형사가 아들의 안전을 보장해준 것처럼 들린 모양이었다. 나카오카를 마주 보며 단박에 얼굴이 풀어졌다.

  “그래요? 참말로 고맙네요. 잘 부탁합니다.” 몇 번이나 머리를 숙였다. 나카오카가 나올 때는 반지*에 싼 것을 내밀었다. “여기까지 찾아와주시고, 오늘은 수고가 많았어요. 이거, 우리 남편이 가장 좋아하던 거예요. 가는 길에 전차 안에서 먹어봐요.”(* 붓글씨 연습용 종이.)

  열어보니 밤 만주 두 개가 들어 있었다. 단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거절하는 것도 실례인 것 같아서 받았고 실제로 돌아오는 전차 안에서 먹었다.

  미즈키 미요시와의 대화 내용은 곧바로 나리타에게도 보고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시점에서도 상사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카오카가 “생활안전과와 지역과에 말해둘까요?”라고 물어봤는데 “에이, 그럴 거 없어”라는 대답이 돌아왔을 뿐이다.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나 미즈키 미요시가 걱정했던 대로 그녀의 아들은 목숨을 잃었다.

  나카오카는 오랜만에 다시 읽어본 편지를 봉투에 넣었다. 다시 인터넷 화면을 응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 이건 어떻게 보건 단순한 사고다. 괜히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컵라면 용기를 집어 들었다. 나머지를 다시 먹기 시작했지만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결국 그대로 다 남겨버렸다.

  문득 조후 시에서 돌아오는 길에 먹은 밤 만주가 생각났다. 마침맞게 적당한 단맛이었을 텐데 왠지 이제는 씁쓸한 맛만 되살아났다.

 

  4

     

  스님의 독경이 흐르는 가운데 분향 행렬이 이어졌다. 참석자 전원이 향을 피우자면 앞으로 얼마나 더 걸릴까. 분향을 마친 조문객에게 머리를 숙이는 틈틈이 뒤에 선 행렬을 보며 치사토는 내심 지긋지긋해하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친족들만 모인 단출한 장례식으로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오랫동안 신세진 분들께 송구스럽다고 주위에서 단호하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이런 거창한 장례식이 되어버렸다. 내일은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지도 모른다. 그 조문객 한 명 한 명에게 인사해야 하다니, 생각만 해도 우울해졌다.

  무심코 친족석을 쳐다봤다가 맨 앞줄에 앉은 퉁퉁한 중년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매서운 눈빛으로 치사토를 노려보더니 입가를 힘주어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요시로의 사촌 여동생이라고 했다. 치사토와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다. 몇 안 되는 친척 중 한 사람이지만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큰어머님은 안 오실 테니 그런 줄 알아요”라고 독기 어린 말투로 알려주었다. 큰어머님이라는 건 요시로의 모친을 가리키는 것이다.

  “나한테로 연락하셨는데, 아들을 배웅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 아이의 원한을 생각하면 형식뿐인 장례식 따위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하시네? 아이고, 우리 큰어머니, 불쌍해서 어떡하나. 이런 일이 일어날 것 같다고 노상 걱정했더니만 아니나 다를까 꼭 그대로 되어버렸다고 전화기에 대고 꺼이꺼이 우셨다니까.”

  우리는 모두 다 알고 있다, 요시로의 죽음은 네가 꾸민 짓이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기색이었다.

  “그렇습니까. 안타깝네요. 남편은 어머님이 배웅해주시기를 원했을 텐데.” 태연히 대꾸해주었더니 여자는 분하다는 듯 눈을 희번덕거렸다.

 
 요시로와 결혼한 뒤에도 치사토는 그쪽 친척들과는 왕래가 없었지만, 어떤 식으로 험담을 했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자신도 그들 입장이었다면 똑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재산을 노리고 한 결혼, 어차피 남편이 어서 죽기만을 기다릴 것이다. 아니, 어쩌면 뭔가 빈틈이 보이기만 하면 죽이려고 하는 거 아니겠느냐—.

  마음대로 떠들어라, 라고 치사토는 생각했다. 재산을 노리고 결혼한 건 사실이었다. 그건 남편 요시로도 다 알고 있었다. “돈이 아니고서야 이런 나이 든 남자 품에 안길 이유가 없겠지?” 껄껄 웃으면서 자주 말하곤 했다. 그야 물론이죠, 라고 치사토가 대꾸하면 더욱더 웃어젖혔다. “하지만 미리 각오해. 내가 원래부터 튼튼한 사람이거든. 그리 쉽게 덜컥 죽지는 않을 거야.”

  분명 요시로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건강했다. 장수할 듯한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치사토에게는 오산이 아니었다. 아무리 건강해도 백 살까지는 못 살 것이다. 장수한다고 해봤자 앞으로 기껏 20년. 그때까지만 기다리면 전 재산이 내 것.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좀 더 일찍 떠나준다면 더욱더 좋다. 그래서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지 궁리해본 것도 사실이다. 불법 사이트 쪽에 관심을 가진 적도 있었다. 실제로 접속해본 적은 없지만.

  멍하니 그런 생각에 빠져 있던 치사토는 갑자기 장례식장의 분위기가 술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제단 앞으로 쏠려 있었다. 치사토도 그쪽을 보았다.

  바짝 마른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어깨까지 길게 자란 머리, 깊게 파인 뺨은 덥수룩한 수염으로 뒤덮였고 턱이 뾰족했다. 치사토는 순간적으로 예수상과 아귀餓鬼를 동시에 떠올렸다.

  남자는 제단의 영정 사진을 지그시 바라본 뒤, 천천히 향을 피웠다. 그러는 동안에 어느 누구도 말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분향을 마치고 남자가 치사토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말을 건넸다.

  그러자 남자가 작은 소리로 뭔가 중얼거렸다. 얼핏 알아듣지 못해 치사토는 얼굴을 들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불운이었을까.” 남자는 억양 없는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황화수소를 마신 게 정말로 단순한 불운이었을까요.”

  마치 지옥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듯 으스스한 여운이 있었다. 치사토는 등줄기가 오싹하는 것을 느끼며 예에, 라고만 대답했다. 그 밖에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참 딱하게 됐군요.” 남자는 한 차례 머리를 숙이고 자리를 떴다. 그 뒷모습에 요기 같은 것이 감돌아서 치사토는 한참이나 눈을 뗄 수 없었다.

  장례식 후, 별실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조문객을 대접할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상주인 치사토는 물론 젓가락을 들어볼 틈도 없이 한 바퀴 돌면서 관계자에게 인사치레를 하는 데 전념했다. 그래봤자 처음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랫동안 남편 밑에서 일했다는 무라야마라는 남자가 소개하는 역할을 맡아주었다. 무라야마는 오십 대 중반의 키가 작은 남자로, 너구리 같은 풍모 탓에 약아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소심하고 착실한 성품이라고 남편은 늘 말했었다.

  한마디로 영화 관계자라고 해도 다양한 부류가 있다. 프로듀서와 각본가, 연출가뿐만 아니라 연예인도 많았다. 한 사람 한 사람 받아 든 명함으로 치사토의 가방은 불룩해졌다.

  “고생하셨습니다. 대충 이 정도면 될 거예요.” 무라야마가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말했다.

  치사토는 새삼 실내를 둘러보았다. “그분은 안 오신 것 같네요?”

  “그분이라면?”

  “있었잖아요, 머리가 길고 바짝 마른 남자분. 뭔가 좀 특이한 분위기의…….”

  곧바로 누군지 알았는지, 무라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카스 씨 말이군요.”

  “아마카스 씨?”

  “영화감독이에요. 모르십니까? 예전에 유명했던 분인데.”

  무라야마는 자신의 손바닥에 손끝으로 아마카스, 라는 한자를 써 보였다.

  “그럼 아마카스 사이세이?”

  “네, 맞아요. 역시 아시는군요.”

  “이름은 들었죠. 남편이 늘 얘기했었으니까요. 재능이 뛰어난 분이라면서.”

  아마카스 사이세이는 천재가 아니다. 그 녀석은 영화 귀신이다. 자신이 만족할 만한 영상을 찍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양으로 삼는다. 배우의 목숨까지 걸 정도다. 그래서 작품에 혼이 담긴다. 그런 인간은 다시없다. 세상 어디에도—. 남편 요시로의 말이었다.

  “이른바 귀재鬼才로 통하는 인물이죠. 근데 최근 몇 년 동안은 영화를 찍지 않았어요. 공적인 자리에 나타난 것도 아주 오랜만인 것 같은데요? 나도 오래 못 보던 참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전에는 생김새가 그렇지는 않았는데…….”

  “무슨 일 있었어요?”

  무라야마는 얼굴을 찌푸렸다.

  “가족에게 아주 불행한 일이 있었어요. 사고로 부인과 아이들을 잃었죠. 게다가 그 사고라는 게…….” 거기까지 말한 참에 무라야마는 입을 다물었다. “아, 죄송합니다. 남편분의 조문 자리인데 남의 불행한 얘기를 들어봤자 불쾌하기만 하지요.”

  “아뇨, 그렇지도 않은데.”

  “아닙니다, 이런 얘기는 그만두지요. 아무튼 고인께서는 아마카스 씨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셨어요. 바로 얼마 전에도 이제 슬슬 귀신에게 영화를 찍게 해야겠다고 얘기하신 적이 있어요. 귀신이라니, 대체 무슨 말씀이냐고 물었더니 아마카스 사이세이 얘기라고 하시더라고요. 어쩌면 두 분은 연락을 주고받았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분향을 하러 나타난 거겠지요.”

  치사토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마카스가 건넸던 묘한 말을 무라야마에게 말해볼까 하다가 결국 관두기로 했다. 그 으스스한 중얼거림이 어떤 봉인을 풀어버리는 일로 이어질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5
     


  연구소 로비에서 대기하는 동안, 다케오의 큰 즐거움은 종이 신문을 읽는 것이다. 최근에는 그도 집에 신문 배달을 신청하지 않아서 뉴스 기사는 주로 인터넷을 통해 보고 있다. 하지만 종이 신문은 역시나 나름의 맛이 있다. 볼 생각이 전혀 없었던 기사라도 우연히 읽고 있던 기사 바로 옆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새삼 들여다보게 된다. 그것이 인상에 남는 정보일 경우에는 뭔가 큰 이익을 본 듯한 기분이 든다.

  오늘도 그런 기사를 발견했다. 비탕으로 유명한 아카쿠마 온천에서 산책에 나섰던 숙박객이 황화수소 가스에 중독되어 사망했다는 것이다. 딱하게도, 라고 생각했다. 심신의 고단함을 풀기 위해 일부러 먼 온천지까지 갔는데 거기서 목숨을 잃다니.

  우하라 마도카의 경호 업무를 시작한 지도 7개월쯤 되었다. 마도카 주위에서 신기한 일들이 이따금 일어나곤 했지만 그녀의 신상에 위험이 닥치는 일은 없었다. 다케오는 항상 특수 경봉을 소지하고 다니지만 다행스럽게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글쎄 연락은 꼬박꼬박 하겠다잖아요. 근데 왜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 문제가 아니지. 너도 잘 알잖아.”

  복도 안쪽에서 마도카와 기리미야 레이가 뭔가 말씨름을 하면서 나타났다. 두 사람의 그런 모습은 별로 본 적이 없었던 터라 다케오는 당황스러웠다.

  “외출하려고?” 의자에서 일어나 다케오가 물었다.

  마도카는 그를 보고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눈치였지만 테이블 위의 신문이 눈에 들어오자 냉큼 그것부터 집어 들었다. 크게 펼쳐 들고 선 채로 읽기 시작했다. 어떤 기사를 그렇게 열심히 읽는지 다케오가 서 있는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다케오는 기리미야 레이를 보며 무슨 일이냐고 눈짓으로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어깨를 으쓱 치켜들었다.

  이윽고 마도카가 신문을 접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오늘은 어디로?” 다케오가 다시 물었다.

  마도카는 대답 없이 기리미야 레이 쪽을 향했다. “절대 허락해줄 수 없어요?”

  “그게 규칙이니까.”

  “알았어요.” 마도카는 부루퉁한 얼굴로 “아무 데도 안 갈래요”라고 다케오에게 말하고 걸음을 홱 돌려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기리미야 레이는 팔짱을 끼고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혼자 외출하겠다고 조르는 거예요.”

  “그랬군요.”

  “가끔 그런 얘기를 꺼내서 이번에도 또 시작이구나 생각했는데.” 기리미야 레이는 허리를 숙여 테이블에 놓인 신문을 펼쳤다. “왜 갑작스럽게 신문 같은 걸 읽었을까…….”

  다케오로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얘기라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뭐, 좋아요. 늘 하던 대로 잠깐 변덕이 났던 모양이네요. 신경 쓰지 말기로 하죠.” 그렇게 말하고 다케오에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리미야 레이도 복도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다케오는 의자에 앉아 다시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다케오의 눈에는 마도카의 태도가 미묘하게 변한 것처럼 느껴졌다. 원래부터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부쩍 더 말이 없어졌다. 차로 이동 중에는 입을 꾹 다물고 지그시 바깥 풍경만 바라보았다. 표정은 늘 음울해서 좀체 웃는 얼굴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몇 주일이 지났다.

  해가 바뀌고 얼마 안 된 때의 일이다. 다시금 마도카가 외조모의 집에 가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다케오는 약간 우울해졌다. 계속 쌀쌀한 날씨가 이어졌지만 그날은 아침부터 부쩍 더 추웠기 때문이다. 날씨예보에 의하면 눈이 조금 흩뿌릴 것이라고 했다. 가능하면 밖에 나가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항상 하던 대로 기리미야 레이가 운전하는 세단으로 출발했다. 추운 날씨를 생각해서 그런지 마도카는 평소보다 방한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거기에 약간 큼직한 배낭까지 메고 있었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마음에 걸렸지만 물론 물어보지 않았다.

  출발하고 20분쯤 지났을 무렵, 날씨 예보대로 눈이 흩뿌렸다. 하지만 그다음부터는 예보와 크게 다른 날씨로 바뀌었다. 눈이 조금 흩뿌리는 게 아니라 본격적으로 펑펑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잠깐 사이에 가로수가 눈으로 하얗게 뒤덮였다.

  “눈이 꽤 많이 올 거 같은데, 괜찮겠지?” 기리미야 레이가 룸미러를 보며 말했다. 마도카에게 물어보는 모양이었다.

  “네, 괜찮아요.” 마도카가 그렇게 대답했지만 다케오는 이 대화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 뒤에도 눈은 전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주위는 온통 은빛 세계로 변하고 시야는 점점 나빠졌다. 이대로 계속 달리는 건 아무래도 위험하겠다고 생각하는 참에 아니나 다를까, 바로 앞에서 사고가 일어났다. 사거리에서 정지하려던 차가 미끄러지면서 맞은편 차선으로 진입한 것이다. 반대쪽에서 달려오던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양쪽 다 속도를 늦춰서 다행히 큰 사고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아차 하면 다케오 일행의 차도 휘말릴 뻔했다. 기리미야 레이가 브레이크를 밟았을 때 옆으로 스르륵 미끄러지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주변 차량들이 줄줄이 멈춰 서면서 일대가 혼란에 빠졌다. 기리미야 레이는 다시 출발하려고 했다. 하지만 타이어가 미끄러져 앞으로 나가지지 않았다. 그녀는 답답한 듯 두 손으로 핸들을 툭툭 쳤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웬일로 거친 목소리를 낸다. 그 말은 마도카에게 던진 것인 모양이었다.

  “난처하시겠어요.” 마도카가 말했다. 유난히 시들한 말투였다.

  “남의 일처럼 얘기하는구나.”

  “네, 남의 일이거든요.”

  그 말에 다케오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럼 안녕.” 갑자기 인사말을 던지더니 마도카는 뒷좌석 문을 열고 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무슨 일인지 파악하지 못한 채 다케오는 한순간 어리둥절해했다. 왜 이런 데서 내리는 건가.

  아차, 하고 기리미야 레이가 말했다. “어서 쫓아가요!”

  다케오는 안전벨트를 풀고 급히 밖으로 나왔다. 재빨리 주위를 살펴보았다. 사방이 하얗게 변한 가운데 눈은 여전히 펑펑 쏟아졌다. 여기저기서 차들이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 클랙슨이 울리고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도카의 배낭이 눈에 들어왔다. “마도카, 마도카!” 하고 소리쳤다.

  그녀가 발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다케오는 뛰어가려고 했지만 구두 바닥이 미끄러져 마음먹은 대로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 쪽에서 다가왔다.

  미안해요, 라고 마도카가 사과했다. “나 혼자 꼭 가야 할 데가 있어서요.”

  “어딘데?”

  그러자 마도카는 빙긋 웃었다.

  “얘기 못 들으셨어요? 나한테 질문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케오가 입을 꾹 다물자 “자, 그럼 안녕히”라면서 그녀는 몸을 돌렸다. 그대로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다케오는 서둘러 뒤쫓아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발이 미끄러졌다. 눈 쌓인 바닥에 양손을 짚으면서 오른쪽 무릎을 쿵 찧었다.

  마도카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발걸음이 경쾌했다. 자세히 보니 구두에 뭔가 붙어 있었다. 아무래도 아이젠인 것 같다. 마도카는 오늘 폭설이 쏟아질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건가.

  나는 마도카의 보디가드가 아니라 그녀를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하는 역할이었던 게 아닌가—.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며 다케오는 생각했다.

 

  
  6
     
 

  자동 개찰기를 나오자마자 만나기로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초록색 방한복으로 몸을 감싸고 귀마개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현장이 그렇게 추운가, 하고 아오에 슈스케는 적잖이 불안해졌다. 지난번에 이곳을 다녀간 게 벌써 몇 주일 전이다. 본격적인 겨울철로 접어들어서 어제는 수도권에도 큰 눈이 내렸다.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수고가 많으십니다.” 이소베가 두 팔을 옆구리에 착 붙이고 그야말로 공손한 인사를 건네 왔다. 두툼한 렌즈의 안경을 썼고 앞니가 조금 튀어나왔다. 처음 만났을 때도 생각한 것이지만, 예전에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야유의 의미로 그렸던 일본인의 모습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한 외모다.

  “고맙습니다. 일부러 여기까지 나오시고, 미안하군요.”

  아오에의 말에 이소베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손을 홰홰 저었다.

  “아이고, 무슨 말씀을. 교수님을 도쿄에서 이런 시골까지 먼 걸음을 하시게 했으니 저희가 죄송스럽지요.”

  “아뇨, 이것도 제 업무 중 하나인데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참말로 고맙습니다.”

  역 앞에는 상점들이 처마를 맞대고 줄줄이 이어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은 채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 대형 쇼핑몰이 들어오면서 이 지역 사람들이 죄다 그쪽으로 몰리게 됐다는 얘기는 지난번에 들었다. 지방 도시의 상황은 어디든 비슷하다.

  “그 뒤로 좀 어떻습니까?” 차가 출발하고 잠시 지나서 아오에는 물었다. “지난번 전화로는 여전히 규칙성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운전석의 이소베는 앞을 향한 채 고개를 내저었다.

  “예, 그냥 그대로네요. 이따가 데이터를 보면 아시겠지만, 그날그날 제각각이에요.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다들 골머리를 썩이고 있습니다.”

  “거참, 전 구역에 출입금지 조치를 내릴 수도 없고.”

  “예에, 그렇습니다. 그런 조치가 내려졌다가는 우리 읍은 끝장이에요. 완전히 시들어버립니다.” 이소베의 말소리에는 비장감이 담겨 있었다.

   

  아오에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차는 그새 읍내를 빠져나와 전원 풍경 속을 달렸다. 그리고 이제 곧 산길을 달려 올라갈 것이다. 목적지까지는 40여 분쯤 걸릴까.

  아오에의 연구실에 D현 경찰 본부에서 전화가 걸려 온 것은 작년 말의 일이었다. 수사에 협조해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아오에는 당혹스러웠다. 수사라고 하는 걸 보면 뭔가 사건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경찰에 협조해줄 것이 있을 리 없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일개 학자일 뿐이다.

  그러자 상대는 사건이 아니라 사고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을 검증해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 일은 D현의 산속에 있는 아카쿠마 온천지에서 일어났다. 관광을 위해 찾아온 숙박객 중 한 명이 근처의 산을 산책하던 중에 쓰러져 그대로 사망했다. 아마도 화산가스에 의한 중독사로 보이는데, 지금까지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던 터라서 그 원인을 규명해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거라면 연락이 올 만도 하다고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몇 년 전, 그 비슷한 일이 다른 온천지에서도 일어났었다. 눈 밑에 생긴 공동空洞에 황화수소 가스가 가득 고여 있었는데 관광 온 가족이 우연히 그 위를 지나던 참에 공동이 뚫리면서 중독사한 사고였다. 그때 아오에는 현장 조사에 협조하기 위해 나갔었다. 예전에 그 지역의 황화수소 가스 발생 상황을 조사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D현 현경은 이번에 일어난 비극도 그것과 유사한 사고로 보고 일을 의뢰해 온 것이다. 아오에의 전문 분야는 지구화학이다. 학생들에게는 주로 환경 분석화학을 가르친다.

  아오에 자신도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현경의 조사에 협조하기로 했다. 전화를 받은 그다음 날로 현지에 들어갔다.

  사고 현장은 숙박 시설이 밀집한 온천가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산정을 향해 이어진 등산로를 잠시 올라가다가 중간에 좁은 짐승 통로로 들어간다. 이윽고 습한 저지대가 나오는데 그 바로 옆에서 남성 관광객이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발견한 사람은 동행했던 아내였다. 여관을 나와 부부가 함께 그곳까지 갔는데 카메라 배터리를 여관방에 깜빡 잊고 온 것을 알고 아내 혼자 되돌아갔다. 배터리를 들고 다시 그곳에 와보니 남편이 쓰러져 있었다, 라는 얘기였다.

  구급대원이 출동했을 때, 현장 주변에는 황화수소 가스 냄새가 떠돌고 있었다고 했다. 그건 온천물이 솟아나는 지역에서는 딱히 드문 일도 아니다. 지표면의 구멍 등을 통해 화산가스가 새어 나오는 것이다.

  화산가스는 대부분 수증기로, 유독한 황화수소가 몇 퍼센트가량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보통은 대기 중에 확산하기 때문에 치사 농도에 달하는 일은 거의 없다. 실제로 지역 소방대가 현장에서 황화수소 농도를 몇 차례 측정해봤더니 수치는 최고가 0.001퍼센트 정도였다. 이건 눈에 약간 자극을 느낄 정도의 농도다.

  황화수소는 대기보다 무거워 지면의 웅덩이 같은 곳에 고이기 쉽다. 현장 부근은 분명 주위보다 지대가 낮아서 무풍 상태가 일정 시간 지속되었다면 가스가 고였을 가능성은 있다. 피해자는 하필 그런 곳에 우연히 들어갔었다는 얘기가 된다. 황화수소의 농도가 높을 경우, 10초 남짓한 사이에 의식을 잃는다. 그대로 계속 가스를 흡입하게 되면 곧바로 사망에 이른다.

  아오에는 현지에 일주일을 머물면서 지역 소방대와 경찰, 읍사무소 등과 연대하여 조사를 실시했다. 하지만 그 기간으로는 충분한 데이터를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 달여간 데이터를 채집한 상태에서 본격적인 대책을 협의하기로 얘기가 되었다. 그 데이터 채집의 책임자가 이소베였다. 그는 현청의 환경보전과 소속 공무원으로 이번 일 때문에 아카쿠마 온천지에 파견된 것이다.

  구불구불 휘어진 도로를 타고 올라가기를 20여 분, 드디어 작은 동네가 보이기 시작했다.

  시대극을 떠올리게 하는 예스러운 온천가 한복판에 콘크리트로 지은 네모난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주민 회관이다. 화산가스 사고 대책본부가 이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차에서 내려 주민 회관 안으로 들어갔다. 회의용 책상이 실내 한가운데 놓였고 파이프 의자가 옆에 줄줄이 늘어섰다. 주변에 첩첩 쌓인 종이 박스에는 파일이며 서류 더미가 넘쳐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어질러져 있어서.” 그렇게 말하면서 이소베가 두툼한 파일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지금까지 채집한 데이터입니다.”

  “그럼 좀 볼까요.” 아오에는 의자에 앉아 파일을 펼쳤다.

  안에는 착착 접어 넣은 기다란 기록지 여러 장이 클립에 물려 있었다. 자잘한 간격으로 뾰족뾰족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기록지는 모두 합해 다섯 장이다. 사고가 일어난 현장을 포함해 총 다섯 군데에서 스물네 시간 측정한 황화수소 농도였다.

  이소베가 주전자에 끓인 물로 차를 내려 아오에 옆에 챙겨주었다. “어떻습니까?”

  아오에는 기록지를 들여다보며 차를 훌훌 마셨다.

  “순간적으로 0.002퍼센트를 넘는 경우가 있군요. A지점과 D지점에서.”

  그래도 그리 높은 수치는 아니다. 황화수소로 급성중독을 일으키는 기준치는 약 0.07퍼센트였다.

  “네, 하지만 그것도 사고 현장인 X지점은 아닙니다. 그쪽에서는 현재까지 한 번도 0.001퍼센트를 넘은 적이 없었어요. 게다가 A지점도 그렇고 D지점도 그렇고, 0.002는 딱 한 번뿐이고 그다음은 계속 그보다 낮은 수준이었습니다. 그것도 기껏 30초도 안 되는 시간의 일이고 곧바로 안전한 수치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렇다면 그날 그 시간대에만 우연히 X지점에서 농도가 급격히 올라갔다는 얘기가 되겠군요.”

  “예, 그렇지요. 그러니 이것 참 난처하게 됐지 뭡니까. 그쪽 현장에 출입금지 조치를 내리는 건 그나마 감수한다고 쳐도, 그렇다면 다른 곳은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가 생기잖아요.” 이소베의 눈썹 양끝이 여덟팔자로 처졌다.

  “이 기록을 보면 1월 초에 극단적으로 수치가 낮아졌군요. 뭔가 있었습니까?”

  “아, 그건 눈 때문입니다. 그 일대에 엄청나게 쏟아졌거든요.”

  “그렇군요. 화산가스 분출구가 눈에 막혀버린 것이네요.”

  “맞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의 데이터는 별로 신빙성이 없어요.”

  아오에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눈이 녹을 때까지 결론을 미루는 수밖에 없는가. 하지만 화산가스가 발생하는 장소는 지열도 높아서 눈이 녹는 게 빠르다. 쌓인 눈 밑에 고인 가스가 단번에 외부로 배출될 위험성을 생각하면 지금부터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다시 한 번 현장에 가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다시 이소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현장으로 향했다. 혹시나 해서 산소 봄베와 가스마스크, 그리고 핸디타입의 농도계를 가져가기로 했다.

  등산로 입구에 차를 세우고 거기서부터는 걸어서 올라갔다. 입구에 로프를 둘러쳤고 거기에 출입금지 팻말이 걸려 있었다.

  농도계의 수치를 지켜보며 눈 덮인 등산로를 올라갔다. 수치는 거의 제로였다. 코로 공기를 들이쉬었지만 유황 냄새도 나지 않았다.

  잠시 올라가자 길옆에 빨간 러버콘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사고 현장으로 가는 갈림길을 표시해둔 모양이었다. 쌓인 눈 위로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이소베의 뒤를 따라 아오에도 갈림길로 들어섰다. 눈은 그리 높이 쌓인 건 아니지만 역시 산길이라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어졌다.

  지난번에 안내를 받으며 이곳에 왔을 때, 가장 먼저 의아하게 생각했던 점은 왜 피해자들이 이런 곳에 들어왔느냐는 것이었다. 그것에 대해 피해자의 아내는, 남편이 길을 잘못 들었다, 라고 대답한 모양이었다. 어딘가의 폭포를 구경할 생각으로 여관을 나섰는데 길을 찾지 못해 헤매다가 남편의 감에 의지해 이 짐승 통로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하지만 카메라 배터리를 여관방에 잊고 온 것이 생각난 시점에는 두 사람 다 자신들이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다는 의심은 털끝만큼도 하지 못한 채 이 길로 죽 들어가면 분명 폭포가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고 한다.

  불행한 우연이 몇 가지가 겹치면서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잠시 뒤 현장에 도착했다. 큼직한 플라스틱제 상자가 지면에서 1미터 높이로 설치되어 있었다. 안에는 농도계와 기록 기기가 들어 있다. 사고 후에 설치한 것이다.

  아오에는 핸디타입의 농도계를 들여다보았다. 역시 계속해서 제로였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쌓인 눈 때문에 한 달 전에 왔을 때와는 풍경이 사뭇 달라졌다. 하지만 지형이 변한 것도 아니고 근처의 습지도 눈에 파묻히지 않았다.

  이곳은 습지를 따라 주위보다 지대가 낮았다. 스노보드에 하프파이프라는 경기가 있지만, 말하자면 그런 모양새의 지형이다. 그래서 이 근처 어딘가에서 발생한 황화수소가 바람에 의해 이곳으로 밀려드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문제는 고여 있는 시간이었다. 바람이 빠져나가기 쉬운 지형이라서 혹시 가스가 밀려들었더라도 다음 순간에는 죄다 휩쓸려나갈 터였다.

  지극히 느린 속도의 바람을 타고 가스가 밀려왔는데 그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우연히 이곳에 고이게 됐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하필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라고.

  “사고가 난 그 무렵에 이 근처 날씨는 안정적이었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그 무렵에는 비교적 온화했어요.” 이소베가 대답했다.

  아오에는 끄응 신음 소리를 올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것 참, 어렵네요.”

  “참말로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대책회의가 내일 오전 11시부터라고 했던가요?”

  “네, 주민 회관에서 할 겁니다. 출입금지 지역을 결정할 예정입니다만…….” 이소베는 슬쩍 눈치를 보는 듯한 시선을 건네 왔다.

  내일 회의에서는 어떻든 아오에가 전문가로서 의견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일단 주민 회관으로 돌아가지요. 화산가스 발생 포인트를 확인하면서 좀 더 고민해봐야겠어요.”

  “알겠습니다.”

  둘이서 온 길을 되짚어 걸어 나왔다. 등산로까지 나오자 앞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엇, 누구지?” 이소베가 중얼거렸다.

 
 가까이 가보니 웬 젊은 여자인 것 같았다. 후드 달린 방한복을 입고 핑크색 니트 모자를 쓰고 있었다. 딱히 뭘 한다는 것도 없이 그냥 주위의 경치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 여관 손님인 모양이네요.” 아오에가 말했다.

  “아마 그렇겠지요. —이봐요, 학생.” 이소베가 말을 건넸다.

  여자가 두 사람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놀라거나 겁을 내는 기색도 없이 태연했다.

  생각한 것보다 더 어린 여자였다. 아직 십 대일 것이다. 약간 강한 느낌이 드는 얼굴 모습이었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여긴 들어오면 안 돼. 출입금지 지역이라고 적혀 있었지?”

  여학생은 주춤하는 일 없이 차가운 표정으로 이소베와 아오에를 번갈아 보더니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등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사고는 그 뒤쪽에서 난 거예요?” 약간 코에 걸린 목소리로 물었다.

  뜻밖의 질문에 이소베의 대답이 한 박자 늦어졌다.

  “사고 난 것을 알고 있으면 왜 출입이 금지됐는지도 잘 알겠네. 자아, 어서 내려가요, 내려가.” 손을 홰홰 저으며 몰아내는 몸짓을 했다.

  여학생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결국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은 채 등산로를 내려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아오에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대체 왜 이런 곳에…….”

  “그러게 말입니다.” 이소베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고가 난 걸 알면서 굳이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단순한 관광객은 아닌 것 같은데요. 혹시 사망한 사람의 유족인가.”

  “아,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런 거라면 우리한테 미리 말했으면 합당한 대응을 해줬을 텐데 말이에요. 현장까지 안내를 한다든가.”

  “뭔가 사정이 있는 모양이죠. 이소베 씨는 피해자의 부인은 만났다고 했지요? 그 밖에 다른 유족은?”

  “아뇨, 못 봤습니다.” 이소베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본 건 피해자의 부인뿐이에요. 아, 제가 그 얘기를 했던가요? 부인이 아주 젊고 대단한 미인이에요.”

 
 “예, 지난번에 들었어요. 아마 후처일 거라고 하셨는데.”

  “피해자가 예순여섯 살이거든요. 근데 부인은 아무리 봐도 서른 전이에요. 분명 초혼은 아닐 겁니다.” 그렇게 말한 뒤 이소베는 뭔가 깨달은 듯 손을 탁 쳤다. “방금 그 여학생, 혹시 피해자와 전처 사이의 딸이 아닐까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

  “그렇다면 제가 너무 매몰차게 나무랐네요. 아버지 돌아가신 곳을 봐두려고 여기까지 왔을 텐데.”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요. 반드시 피해자의 딸이라고 밝혀진 것도 아니고.”

  “예에, 그렇겠지요?”

  이소베가 다시 앞장서서 걷고 아오에도 그 뒤를 따랐다. 이윽고 조금 전의 여학생을 따라잡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등산로 입구까지 다 내려왔는데도 눈에 띄지 않았다.

  “조금 전 그 여학생, 안 보이네요?”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이소베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동행한 사람이 있었나? 그 사람이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든가.”

  “아하, 그런 모양이네요.” 이소베가 차의 록을 해제하며 대답했다.

  차에 탄 뒤에 아오에는 다시 한 번 등산로 입구를 살펴보았다. 외줄기 길이지만 주위가 온통 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몸을 숨기기로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았다.

  나무 그늘에 숨어 아오에 일행이 떠날 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는 여학생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설령 그렇다 쳐도 그쪽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현재 이곳은 출입금지 조치를 내릴 만큼 위험한 곳도 아니다.

  주민 회관으로 돌아와 몇 가지 데이터를 확인해 따로 복사하고, 이소베와 내일의 회의 절차를 상의했다. 그 뒤, 이소베와 헤어져 아오에는 혼자 오늘 밤에 묵을 여관으로 향했다. 예약해준 곳은 ‘마에야마 여관’, 즉 피해자가 묵었던 숙소였다. 이 온천가에서 가장 큰 여관이다. 지난번 조사 때도 이곳을 이용했었다.

  아오에가 여관 앞에 도착하자 눈에 익은 남자 종업원이 현관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쪽에서도 기억이 나는지 “아,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라면서 머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현관 미닫이문을 열고 안에 알렸다. “주인아주머니, 아오에 교수님이 오셨습니다.”

  아오에가 안에 들어서자 여주인이 웃는 얼굴로 달려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또 신세를 지게 됐군요. 며칠 묵고 싶은데 이번에는 딱 하룻밤이에요.”

  “일이 바쁘셔서 그렇지요. 수고가 많으십니다.” 여주인은 카운터 안으로 돌아가 숙박표를 내밀었다.

  아오에는 카운터로 다가가며 무심코 옆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발을 뚝 멈췄다. 텔레비전을 마주한 소파에 조금 전의 여학생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있었다.

  여학생은 아오에를 보더니 뭔가 거북스러운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빠른 걸음으로 옆의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왜 그러시냐고 여주인이 물었다.

  “아뇨, 저 학생, 여기서 묵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도착했어요.”

  “같이 온 사람이 있겠지요? 가족이라든가.”

  그러자 여주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게요, 혼자 왔더라고요. 대학생인데 혼자 여행을 하고 있다네요.”

  “호오…….”

  대학생이라면 아마도 1학년이나 2학년일 것이다. 스무 살을 넘은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어떻든 여주인의 말투로 보아 피해자의 유족은 아닌 것 같았다.

  “저 여학생의 친구도 전에 우리 여관에 다녀갔어요.”

  “친구?”

  “네, 젊은 남자였어요. 방금 그 여학생이 사진을 보여주더라고요. 이 여관에 다녀가지 않았느냐면서. 얼굴이 눈에 익어서 우리 여관에서 묵었던 손님이라고 대답해줬어요. 아는 사람이냐고 내가 물어봤는데 친구라고 하더라고요.”

  흠, 하고 콧소리를 내며 아오에는 볼펜을 집어 들었다. 숙박표에 이름 등을 써넣으면서 “그나저나 대단하시네요”라고 여주인에게 말했다. “하룻밤 자고 간 손님들의 얼굴을 모두 기억해요?”

  “아이, 설마요. 모두 기억하는 건 어렵죠.” 여주인은 손을 저었다. “그 청년이 기억난 것은 조금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건 무슨……?”

  “우리 여관에 다녀간 그다음 주에 그 청년을 또 봤거든요, 등산로 근처에서.”

  “엇, 그러면 2주 동안 연달아 이 온천가를 찾아온 건가요?”

  “그러게 말이에요. 두 번째 왔을 때는 다른 여관에서 묵은 모양이에요. 게다가 거기서 그 청년을 목격한 바로 그다음 날에 사고가 났었어요.”

  “사고라니, 황화수소의?”

  네, 라고 여주인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으니 그 청년 사진을 보자마자 금세 기억이 났죠.”

  “그렇군요.”

 
 그런 일이 있었다면 분명 기억에 남을 것이라고 아오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은 8시에 일어나 큰 거실에서 아침을 먹었다. 지난번 왔을 때와 비교하면 숙박객이 약간 많아진 것 같았다. 그때는 사고가 보도된 직후여서 예약 취소가 줄을 이었다. 그 뒤로 시간이 조금 지났으니 이제 다시 손님들이 찾아드는지도 모른다.

  아오에의 식사가 끝날 즈음에 그 여학생이 나타났다. 면바지에 트레이너 차림이었다. 화장을 안 해서 그런지 어제 만났을 때보다 더 어리게 보였다.

  그녀는 아오에와 대각선으로 맞은편에 앉았다. 잠깐 시선이 마주쳤지만 아오에 쪽에서 얼른 시선을 돌렸다.

  식사 후, 대욕탕 물에 들어가 몸을 덥히고 방으로 돌아왔다. 테이블 위는 자료로 가득했다. 간밤에는 늦게까지 데이터를 들여다봤지만 결국 묘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 회의에서는 두루뭉수리로 넘어가는 의견밖에 낼 수 없을 것 같다. 이소베의 난처해하는 얼굴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오전 10시가 되자 준비를 하고 방을 나섰다. 1층 카운터에서 여관비 계산을 하고 있으려니 다시 그 여학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배낭을 등에 멘 것을 보니 출발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오에 쪽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 옆 소파에는 아이를 데리고 온천지를 찾아온 가족 세 명이 앉아 있었다. 아이는 아직 초등학교 입학 전인 듯한 사내아이였다. 오른손에 페트병을 들고 있었다.

  여주인이 숙박비 명세서를 내밀었다. 아오에는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 카운터에 놓았다. 그때, 옆에서 앗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라보니 아이 엄마가 급히 페트병을 붙잡는 참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페트병 안의 내용물이 길게 흘렀다. 아마 사내아이가 페트병을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아오에는 그 여학생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테이블에 내려놓은 스마트폰을 20센티미터쯤 옆으로 옮겼다. 딱히 다급해하는 기색도 없었다.

  액체가 테이블에 퍼지고 있었다. 여학생이 앉은 쪽으로도 흘러갔다. 하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으로 텔레비전만 보고 있었다. 저러다가 자칫 스마트폰이 젖어버릴 것 같아 아오에가 도리어 속이 탔다.

  하지만 그 여학생의 스마트폰은 무사했다. 닿기 바로 직전에 액체의 흐름이 멈췄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학생이 미리 조금 옮겨두지 않았다면 분명 젖었을 터였다.

  미안해요, 라고 사과하면서 아이 엄마가 티슈로 테이블을 닦기 시작했다. 수건을 들고 여종업원도 뛰어나와 함께 거들었다. 청소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는지 그제야 여학생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챙겨 들었다.

  “저어, 아오에 교수님?” 여주인이 말을 건네 왔다. 카드 전표가 아오에의 손 옆에 놓여 있었다.

  “아, 미안해요.” 아오에는 서둘러 사인을 했다.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 15분이었다. 회의가 시작되는 11시까지 아직 조금 여유가 있다. 일찌감치 가서 이소베와 최종 상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여주인에게 인사를 건네고 여관을 나왔다. 주민 회관을 향해 걸어가는 도중, 그 여학생의 일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추천 (1) 선물 (0명)
IP: ♡.252.♡.103
뉘썬2뉘썬2 (♡.169.♡.51) - 2023/12/01 05:40:57

저여학생의 남자친구가 기무라가 아닐까요?사고전날 온천가에 나타낫던.

재산을 노리고한 결혼이고 생명보험에 들도록햇고 또 갑작스레 사망햇네
요.그것도 폭포와는 반대방향인 출입금지된 등산로에서.먼가 꿍꿍이가
잇네요.

눈이오면 거리는 아름다우나 운전자들에게는 위험한 날이네요.ㅠ

단차 (♡.252.♡.103) - 2023/12/01 05:45:12

소설은 사실 초반에 내용보면 줄거리는 뻔한데 작가가 글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알면서도 보게 되는 힘이 생기죠.ㅋㅋㅋ

뉘썬2뉘썬2 (♡.169.♡.51) - 2023/12/01 06:19:25

궁금증을 파헤치면서 세부적인 장면에 빠져들기도 하죠.ㅋㅋ

단차 (♡.252.♡.103) - 2023/12/01 06:23:37

저도 어릴때는 소설책 보면 밥 시간도 잊고 시간 가는줄 모르고 봤었어요 ㅋㅋ

뉘썬2뉘썬2 (♡.169.♡.51) - 2023/12/01 07:20:52

나는 몇년전에 밤에 소설책에 빠져 울면서 밧어요.ㅠ

단차 (♡.252.♡.103) - 2023/12/01 07:25:20

밤에 감성이 더 있잖아요. 제가 소설책을 보면서 운건 국화꽃 향기라고 있어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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