查拉图斯特拉如是说 10 (1)

단차 | 2023.11.30 20:11:56 댓글: 2 조회: 173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23384
10



차라투스트라가 마음속으로 이 말을 했을 때,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그때 그는 무슨 일인가 하고 하늘을 쳐다보았다.―――머리 위에서 날카로운 새 울음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라! 독수리 한 마리가 크게 원을 그리며 공중을 날고 있었고, 독수리 몸에는 한 마리 뱀이 먹이가 아니라 친구처럼 걸려 있었다. 뱀이 독수리의 목을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짐승들이로구나!” 차라투스트라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태양 아래 가장 자부심 강한 짐승과 태양 아래 가장 영리한 짐승이 무언가를 살펴보러 나왔구나.

차라투스트라가 아직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는 거야. 정말 내가 아직 살아 있나?

짐승들 사이에 있는 것보다 인간들 사이에 있는 게 더 위험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위험한 길을 가는 거야. 나의 짐승들이여, 나를 인도해 다오!”

차라투스트라는 숲 속에 사는 성자의 말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말했다.

나는 좀 더 영리해지고 싶다! 나의 뱀처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영리해지고 싶다!

하지만 나는 불가능한 일을 바라고 있다. 그러므로 언제나 나의 자부심이 나의 영리함과 함께하기를 간청하노라!

나의 영리함이 언젠가 나를 저버린다면―――아, 그것은 달아나기를 좋아하는구나!―――그때는 나의 자부심이 나의 어리석음과 함께 날아가 버리기를 바라노라!

차라투스트라의 내려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


세 단계 변화에 대하여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단계 변화를 설명할 것이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13)가 어떻게 사자가 되며, 마지막으로 사자가 어떻게 아이가 되는지를.

내면에 외경심이 깃들어 있는, 강하고 참을성 있는 정신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정신의 강함은 무거운 것과 가장 무거운 것을 갈망한다.

가장 무거운 것이란 무엇인가? 참을성 있는 정신은 이렇게 물으며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무거운 짐을 싣기를 바란다.

그대 영웅들이여, 내가 짊어짐으로써 나의 강함을 기뻐할 수 있을 만큼 가장 무거운 것은 무엇인가? 참을성 있는 정신이 묻는다.

가장 무거운 것이란 정신의 오만함에 고통을 주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 아닌가? 정신의 지혜를 비웃기 위해 정신의 우둔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또는 뜻한 바를 이루어 승리를 축하하고 있을 때, 우리의 대의명분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아닌가? 유혹하는 자를 시험하기 위해 높은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깨달음의 도토리와 풀을 먹고 살며, 진리 때문에 영혼의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이 아닌가?

병든 그대를 위로하러 온 자들을 돌려보내고, 그대가 바라는 것을 조금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와 우정을 맺는 것이 아닌가?

진리의 물이라면 더러운 물속이라도 들어가고, 차가운 개구리든 뜨거운 두꺼비든 쫓아내지 않는 것이 아닌가?

우리를 경멸하는 자들을 사랑하고, 우리에게 공포를 자아내려는 유령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이 아닌가?

참을성 있는 정신은 이 모든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자 한다. 그러므로 무거운 짐을 지고 총총히 사막으로 들어가는 낙타처럼, 정신은 자신의 사막으로 총총히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쓸쓸하기 짝이 없는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이곳에서 정신은 사자가 되고, 자유를 쟁취하여 사막의 주인이 되려고 한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마지막 주인을 찾는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주인, 마지막 신과 대적하고자 한다. 그는 승리를 얻기 위해 거대한 용과 싸우고자 한다.

정신이 더 이상 주인이나 신으로 섬기려고 하지 않는 거대한 용의 이름은 무엇인가? 거대한 용은 ‘너는 해야 한다.’를 뜻한다. 하지만 사자의 정신은 “나는 하려고 한다.”라고 말한다.

‘너는 해야 한다.’는 금빛 비늘을 번쩍이며, 정신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용의 비늘마다 ‘너는 해야 한다.’라는 글자가 금빛으로 빛난다.

이 비늘에서는 천년을 지탱해 온 가치가 번쩍인다. 모든 용들 중에 가장 힘센 용이 말한다. “사물의 모든 가치는 나에게서 번쩍인다.”

또 다시 용이 말한다. “모든 가치는 이미 창조되었고, 창조된 모든 가치는 바로 나다. 진실로 ‘나는 하려고 한다.’는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된다.”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정신에 사자가 왜 필요한가? 체념과 경외를 아는, 짐을 지는 낙타로는 왜 만족하지 않는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일,―――사자도 아직 이루지 못했지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 스스로 자유를 창조하는 일―――그것은 오직 사자의 힘으로 가능하다.

스스로 자유를 창조하고, 의무를 신성하게 부정하기 위해서는 사자가 필요하다.

새로운 가치의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는 참을성 있고 경외를 아는 정신에게는 아주 끔찍한 일이다. 진실로, 이는 정신에게 강탈이고, 먹이를 약탈하는 맹수가 하는 짓이다.

정신은 일찍이 ‘너는 해야 한다.’를 가장 신성한 것으로 사랑했다. 그런데 이 정신이 자신의 사랑으로부터 자유를 빼앗기 위해, 가장 신성한 것에서도 망상과 자의(恣意)를 찾아야 한다. 이렇게 빼앗기 위해 사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나의 형제들이여, 사자도 할 수 없는 일을 아이가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강탈하는 사자가 어떻게 아이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아이는 순진함이자 망각이고, 새로운 시작이자 유희다. 저절로 굴러가는 바퀴이고, 최초의 움직임이며, 신성한 긍정이다.

그렇다. 나의 형제들이여, 창조의 유희를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속세를 등진 정신은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단계 변화를 설명했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어떻게 사자가 되며, 마지막으로 사자가 어떻게 아이가 되는지를.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그때 그는 ‘얼룩소’라고 불리는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


덕을 가르치는 강의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잠14)과 덕을 잘 가르친다고 명성이 자자한 현자를 찾았다. 그는 높은 보수를 받으며, 수많은 젊은이들이 가르침을 듣기 위해 몰려드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를 찾아가 젊은이들과 함께 그의 가르침을 들었다. 현자가 말했다.

잠을 존중하고 부끄러워하라!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깨어 있는 자들을 멀리하라!

도둑은 잠을 부끄러워한다. 도둑은 밤이 되면 언제나 살금살금 돌아다닌다. 그러나 야경꾼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뻔뻔스럽게 호루라기를 불고 다닌다.

잠을 자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려면 온종일 깨어 있어야 한다.

낮에 그대는 적어도 열 번은 자신을 극복해야 한다. 그것은 영혼의 양귀비이자 심한 피로를 안겨 줄 것이다.

그대는 적어도 열 번은 자기 자신과 화해해야 한다. 극복하기란 쓰라린 일이라서, 화해하지 않은 자는 잠을 이루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대는 낮에 열 가지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 그대의 영혼이 굶주려 있으므로,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밤에도 진리를 찾게 될 것이다.

그대는 낮에 열 번을 웃어야 하고 쾌활하게 지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괴로움의 아버지인 위가 밤에 그대를 방해하게 될 것이다.

잠을 잘 자려면 온갖 덕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이를 아는 자는 별로 없다. 내가 위증을 하기라도 한다면? 내가 간통을 하기라도 한다면?

내가 이웃집 하녀에게 욕정을 품기라도 한다면? 이 모든 일은 순조로운 잠을 방해할 것이다.

온갖 덕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한 가지 사실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즉 덕조차도 제때에 잠들게 해주는 것이다.

귀여운 여자들이 서로 다투지 않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 불행한 그대를 두고 말이다!

신과 이웃에 화목하게 지내라! 그래야 잠을 잘 이룰 수 있다. 그리고 이웃의 악마와도 화목하게 지내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집에 악마가 나타날 것이다.

권력에 경의를 표하고 복종하라. 그것이 설령 잘못된 것일지라도! 그래야 잠을 잘 이룰 수 있다. 권력이 굽은 다리로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데 난들 어떡하겠는가?

나는 자신의 양 떼를 가장 푸른 초원으로 이끌고 가는 자를 항상 최고의 목자라고 부른다. 그래야 편히 잠을 이룰 수 있다.

나는 큰 명예도 막대한 재물도 바라지 않는다. 간만 붓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당한 명성과 어느 정도의 재물이 없으면 잠을 이루기 어렵다.

나는 나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한두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이런 만남도 때맞춰 시작했다가 끝내야 한다. 그래야 편히 잠을 이룰 수 있다.

나는 마음이 가난한 자들을 무척 좋아한다. 그들은 잠을 잘 이루게 해준다. 특히 그들이 옳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면 그들은 복 받은 자들이다.

덕이 있는 사람의 낮은 이렇게 지나간다. 이제 밤이 되면 나는 잠을 부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덕의 주인인 밤은 부르는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는 낮에 한 일과 생각한 일을 되새겨 본다. 암소처럼 참을성 있게 반추하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네가 극복한 열 가지 일이 무엇인가?

그리고 내 마음을 흐뭇하게 만든 열 가지 화해와 열 가지 진리, 열 가지 웃음이 무엇인가?

이런저런 마흔 가지의 생각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면, 덕의 주인은 부르지 않았는데도 어느새 찾아온다.

잠이 눈꺼풀을 두드리면 나의 눈꺼풀은 감긴다. 잠이 입술을 어루만지면 나의 입술은 벌어진다.

참으로, 도둑 중에 가장 사랑스런 도둑인 잠이 발소리를 죽인 채 나에게 다가와, 나의 생각을 훔쳐간다. 나는 이 의자처럼 멍하니 서 있다.

하지만 나는 마냥 그렇게 있지 않고 이내 눕는다.

현자의 말을 들으며 차라투스트라는 마음속으로 웃었다.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마흔 가지의 생각을 지닌 이 현자는 바보에 지나지 않지만, 잠을 이루는 문제는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현자 곁에서 사는 자는 그것만으로 이미 행복한 일이다! 그런 잠은 전염성이 강해서, 두꺼운 벽이라도 뚫을 수 있다.

그의 가르침에는 어떤 마력이 들어 있다. 젊은이들이 잠의 설교자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아니었다.

그의 지혜는 잠을 잘 이루기 위해 주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삶이 의미가 없고, 내가 무의미를 선택해야 한다면, 이는 나에게도 가장 선택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무의미일 것이다.

이제 나는 사람들이 덕의 스승을 찾아와, 무엇을 얻으려고 했는지 알겠다. 그들은 잠을 잘 자는 것과 양귀비꽃 같은 덕을 원했던 것이다!

세인의 찬사를 받는 현자의 가르침에서 지혜란 꿈을 꾸지 않고 자는 것이다. 이들은 삶의 보다 나은 의미를 알지 못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덕의 설교자 같은 자들이 더러 있다. 하지만 항상 그렇게 정직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시간은 이미 지나갔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서 있지 못하고, 어느덧 자리에 누워 있다.

졸음에 겨운 자들은 행복하다. 곧 잠에 곯아떨어질 테니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저편의 세계를 믿는 자들에 대하여


일찍이 차라투스트라도 저편의 세계를 믿는 모든 인간들처럼 피안의 망상에 사로잡혔던 때가 있었다. 그때 세계는 고뇌와 번민에 찬 신15)의 작품이었다.

그때 세계는 꿈이자 신의 시문학 작품이었다. 신에 불만을 가진 자들의 눈앞에 피어오른 알록달록한 연기와도 같았다.

선과 악, 쾌락과 고통, 나와 너―――이런 것들은 창조자의 눈에 알록달록한 연기처럼 보였을 것이다. 창조자는 자신에게서 눈길을 돌리려는 생각으로 세계를 창조했다.

고통에 시달리는 자에게는 자신의 고통에서 눈을 돌리고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도취적인 쾌락이다. 도취적인 쾌락과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은 한때 내가 생각한 세계였다.

영원히 불완전한 이러한 세계, 영원한 모순의 모사(模寫)이자 불완전한 모사―――이러한 세계를 만든 불완전한 창조자에게는 도취적인 쾌락―――이것이 한때 내가 생각한 세계였다.

그러므로 나도 한때는 저편의 세계를 믿는 인간들처럼 피안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피안이었을까?

아, 형제들이여, 내가 만들어낸 이러한 신은 모든 신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작품이자 망상이다.

그는 인간이고, 인간과 자아(Ego)의 가련한 한 조각에 불과하다. 이 유령은 참으로 내 자신이 타고 남은 재와 불에서 나온 것이지, 피안에서 온 것이 아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나는 자신을, 고뇌하는 자신을 극복했고, 타고 남은 재를 산으로 가져가서 보다 환한 불꽃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보라! 이제 유령들이 나를 피해 달아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유령을 믿는 것은 지금 건강을 회복하고 있는 나에게 고뇌와 고통이 될지도 모른다. 지금 나에게 고뇌이자 굴욕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저편의 세계를 믿는 자들에게 말하노라.

고뇌와 무능력, 이것이 저편의 세계를 믿는 사람들을 만들어냈고, 더없이 괴로운 사람만이 경험하는 행복이라는 저 짧은 망상이 그런 세계를 만들어냈다.

목숨을 걸고 뛰어올라 단숨에 궁극적인 것에 이르려는 데서 오는 피로감, 이제 더는 아무것도 바라지 못하는 가련하고 무지한 피로감, 이것이 온갖 신들과 저편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나의 형제들이여, 내 말을 믿어라! 몸에 절망한 것은 바로 몸이었다. 그 몸이 우롱당한 정신의 손가락으로 궁극의 벽을 더듬은 것이다.

나의 형제들이여, 내 말을 믿어라! 대지에 절망한 것은 바로 몸이었다. 존재의 배가 자신에게 하는 말을 들은 것은 그 몸이었다.

그때 몸은 머리를 써서, 단지 머리만 쓴 것은 아니지만, 궁극의 벽을 뚫고 ‘저 세계’로 넘어가고자 했다.

그런데 ‘저 세계’는 인간에게 감추어져 있다. 인간다움을 잃은 저 비인간적인 세계는 천상의 무(無)다. 그리고 존재의 배는 인간적인 모습이 아니라면, 결코 인간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참으로 모든 존재는 증명하기도 어렵고, 입을 열게 하기도 힘들다. 그대 형제들이여, 나에게 말해 다오.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는 일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닌가?

그렇다. 이러한 자아의 모순과 혼란이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가장 솔직하게 말해 준다. 창조하고 노력하며 평가하는 이러한 자아야말로 사물의 척도이자 가치인 것이다.

이 가장 솔직한 존재, 자아―――그것은 몸을 말하고, 몸을 원한다. 꾸며대고 몽상하며 부서진 날개로 파닥거릴 때조차도.

자아는 점점 더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자아는 몸과 대지를 위한 말을 보다 많이 발견하고 경의를 표한다.

나의 자아는 나에게 새로운 자부심을 가르쳤고, 나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친다. 더 이상 천상의 모래밭에 머리를 처박는 것이 아니라, 대지에 의미를 부여하는 대지의 머리를 자유롭게 쳐들라고!

나는 인간들에게 새로운 의지를 가르친다. 인간이 맹목적으로 걸어온 이 길을 원하고, 이 길을 받아들이며, 병자와 죽어가는 자들처럼 더 이상 길에서 벗어나 몰래 달아나지 말라고!

병자와 죽어가는 자들이야말로 몸과 대지를 경멸하고, 하늘나라와 구원의 핏방울을 꾸며낸 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러한 달콤하고 음산한 독조차도 대지와 몸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불행에서 달아나려고 하지만, 별은 이들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이들은 탄식한다. “오, 다른 존재와 행복으로 살그머니 들어갈 수 있는 천사의 길이 있으면 좋으련만!”―――그래서 이들은 샛길과 핏빛 음료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 배은망덕한 자들은 이제 자신의 몸과 이 대지로부터 벗어났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벗어났다는 기쁨과 희열은 누구 덕분인가? 자신의 몸과 이 대지의 덕이 아니던가.

차라투스트라는 병자에게 상냥하다. 참으로 그는 이들 나름대로의 위안과 배은망덕에 화내지 않는다. 이들은 병이 나아 극복하는 자가 되고, 보다 고귀한 몸을 갖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건강을 회복하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망상에 연연하고, 한밤중에 자신이 섬기는 신의 무덤 주위를 배회하더라도 화내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눈물은 아직 병이고 병든 몸이다.

꾸며대며 신을 애타게 갈구하는 자들 중에 언제나 병든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인식하는 자들을 격렬하게 미워하고, 덕 중에 가장 새로운 덕인 솔직함을 몹시 미워한다.

이들은 언제나 까마득한 옛날을 되돌아본다. 물론 그때는 망상과 믿음이 지금과 달랐다. 이성의 광기는 신과 닮아 있었고, 의심은 죄악이었다.

나는 신과 닮은 자들을 잘 알고 있다. 이들은 사람들이 자신을 믿기를 바라며, 의심은 죄악이라고 말한다. 또한 나는 이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참으로 이들이 믿는 것은 저편의 세계와 구원의 핏방울이 아니라 몸이며, 이들에게는 자신의 몸이 물(物) 자체다.

하지만 이들에게 몸은 병든 것이고, 어떻게든 몸이라는 피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 때문에 이들은 죽음의 설교자 말에 귀 기울이고, 스스로 저편의 세계를 설교하는 것이다.

나의 형제들이여, 오히려 건강한 몸의 음성에 귀 기울여라! 이것이야말로 보다 솔직하고 순수한 음성이다.

건강한 몸, 완전하고 반듯한 몸은 보다 솔직하고 순수하게 말한다. 그리고 그 몸은 대지의 의미를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몸을 경멸하는 자 16) 들에 대하여


나는 몸을 경멸하는 자들에게 말한다. 그들에게 다시 배우고 다시 가르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몸에 작별을 고하고 침묵을 지키라는 것이다.

“나는 몸이고 영혼이다.”―――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아이들처럼 말하지 못하는가?

하지만 선각자와 선지자는 말한다. “나는 전적으로 몸이고,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영혼은 몸에 달린 무언가를 표현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몸은 하나의 커다란 이성이자,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다. 전쟁이자 평화며, 가축의 무리이자 목자다.

나의 형제여, 그대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그대의 하찮은 이성도 그대 몸의 도구고, 그대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장난감이다.

그대는 ‘자아’라고 말하며, 이 말에 자부심을 느낀다. 하지만 보다 위대한 것은―――그대가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그대의 몸이고 그 몸이라는 커다란 이성이다. 이 커다란 이성은 자아를 말하지 않고 자아를 행한다.

감각이 느끼는 것, 정신이 인식하는 것, 그것은 그 스스로 결코 자신의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감각과 정신은 자신들이 모든 사물의 목적이라고 그대에게 설득하고 싶어 한다. 그것들은 이처럼 허영심이 강하다.

감각과 정신은 도구이자 장난감이다. 그것들 뒤에는 아직 자기17)가 있다. 자기는 감각의 눈으로 찾고, 정신의 귀로 듣는다.

자기는 언제나 듣고 찾는다. 그것은 비교하고 억압하며 정복하고 파괴한다. 그것은 자기를 지배하며, 자아를 지배하는 자이다.

나의 형제여, 그대의 사상과 감정의 배후에는 강력한 지배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자기다. 그것은 그대의 몸 안에 살고 있고, 그대의 몸이 바로 그것이다.

그대의 몸에는 그대의 가장 뛰어난 지혜 속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이성이 들어 있다. 그런데 그대의 몸이 무엇 때문에 바로 그대의 가장 뛰어난 지혜를 필요로 하는지 대체 누가 알겠는가?

그대의 자기는 그대의 자아와 그 자아의 자랑스러운 도약을 비웃는다. “사상의 이러한 도약과 비상(飛翔)은 나에게 무엇이란 말인가?” 자기가 스스로에게 말한다. “나의 목적에 이르는 우회로다. 나는 자아를 이끄는 끈이고, 자아의 개념들을 귓속말로 알려 주는 자다.”

자기가 자아에게 말한다. “여기서 고통을 느껴라!” 그러면 자아는 괴로워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을지 곰곰 생각한다.―――바로 그 때문에 자아는 사유해야 한다.

자기가 자아에게 말한다. “여기서 쾌락을 느껴라!” 그러면 자아는 기뻐하면서, 어떻게 하면 자주 기뻐할 수 있을지 곰곰 생각한다. 바로 그 때문에 자아는 사유해야 한다.”

나는 몸을 경멸하는 자들에게 한마디 하고자 한다. 그들이 경멸하는 것은 사실 존중하기 때문이다. 존중과 경멸, 가치와 의지를 창조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창조하는 자기가 존중과 경멸, 쾌락과 고통을 창조했다. 창조하는 몸은 자신의 의지로 정신을 창조했다.

몸을 경멸하는 그대들이여, 그대들이 어리석음과 경멸에 빠져 있을 때도 그대들은 그대들의 자기에 봉사하고 있다. 그대들에게 말하노라. 그대들의 자기는 스스로 죽음을 바라고, 삶을 외면하고 있다.

그대들의 자기는 그것이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일, 즉 자기 자신을 넘어 창조하는 일을 더는 할 수 없다. 자기가 가장 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넘어 창조하는 일이며, 자기가 열정을 다해 하고자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그 일을 성취하기에는 이제 너무 늦어버렸다. 그래서 그대들의 자기는 몰락하려고 한다. 몸을 경멸하는 그대들이여.

그대들의 자기는 파멸하려고 하고, 그 때문에 그대들은 몸을 경멸하는 자가 되었도다! 그대들은 더 이상 그대 자신을 넘어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대들은 이제 삶과 대지에 분노한다. 눈을 흘기며 경멸하는 그대들의 눈길에는 어떤 질투가 담겨 있다.

나는 그대들의 길을 가지 않는다. 몸을 경멸하는 그대들이여. 그대들은 나에게 초인에 이르는 다리가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환희와 열정에 대하여


나의 형제여, 그대에게 한 가지 덕이 있고, 그것이 그대의 덕이라면, 그대는 그것을 아무와도 나누어 갖지 못한다.

물론 그대는 이 덕의 이름을 부르고 쓰다듬고 싶어 한다. 그대는 이 덕의 귀를 잡아당기며 장난이라도 치고 싶어 한다.

그런데 보라! 이제 그대는 이 덕을 군중과 나누어 갖고, 그대의 덕으로 군중이 되며 가축의 무리가 되었다!

그대는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나의 영혼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달콤하게 만들며, 나의 내장을 굶주리게 하는 것,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이름도 없다.”

그대의 덕은 이름으로 친숙하게 부르기에는 너무 높은 곳에 있어야 하리라. 그리고 덕을 말해야 할 때는 더듬거리며 말하더라도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

더듬거리며 말하라. “그것은 나의 선이고, 나는 그것을 사랑한다. 그것은 내 마음에 쏙 들며, 나는 오로지 그 선을 원한다.

나는 그 덕을 신의 법으로서, 인간의 규범이나 필수품으로서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덕은 이 지상의 너머나 천국18)으로 인도하는 이정표가 되어서는 안 되리라.

내가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 지상에서의 덕이다. 그 속에 현명함은 별로 없고,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이성은 아주 조금만 들어 있다.

그러나 이 새는 우리 집에 둥지를 틀었다. 그 때문에 나는 이 새를 사랑하고 껴안는다. 이제 이 새는 우리 집에서 황금 알을 품고 있다.”

이렇게 그대는 더듬거리며 그대의 덕을 칭송해야 한다.

한때 그대에겐 열정이 있었지만, 그대는 그것을 악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제 그대는 그대의 덕만을 지니고 있는데, 그 덕은 그대의 열정에서 자라난 것이다.

그대는 이러한 열정의 마음에 그대의 최고 목표를 두었다. 그러자 그 열정은 그대의 덕이 되고 환희가 되었다.

그대가 다혈질이거나 관능적이거나 광신적이거나 복수심에 불타는 자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그대의 모든 열정은 덕이 되었고, 그대의 모든 악마는 천사가 되었다.

한때 그대는 그대의 지하실에 들개를 키우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 들개들은 새와 사랑스러운 여가수로 변했다.

그대는 그대의 독으로 그대의 향유를 만들어낸 셈이고, 그대의 슬픔이라는 암소에게서 젖을 짜낸 셈이다. 이제 그대는 그 젖가슴에서 나오는 달콤한 젖을 마시고 있다.

그리고 그대에게서 더 이상 악이 자라나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지닌 덕의 투쟁에서 자라는 악이 아니라면.

나의 형제여, 그대에게 행운이 있다면 그대는 하나의 덕을 가질 뿐 더는 갖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리를 건널 수 있기 때문이다.

덕이 많다는 것은 돋보이는 일이긴 하지만, 힘든 운명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사막으로 가서, 덕의 싸움을 견디고 전쟁터가 되는 것을 감내하느라 지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던가.

나의 형제여, 전쟁과 전투는 악한 것인가? 하지만 이러한 악은 꼭 필요하고, 그대의 여러 덕이 서로 시샘하고 불신하며 비방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보라, 그대의 덕들은 각기 최고의 자리를 갈망하고 있지 않은가. 그대의 정신을 그 덕의 전령으로 삼고자, 덕은 그대의 정신 전체를 원한다. 그대의 덕은 분노, 미움, 사랑 속에서 그대의 힘 전체를 원한다.

모든 덕은 다른 덕을 시샘하는데, 이 시샘이란 끔찍한 것이다. 덕의 시샘으로 파멸에 이를 수 있다.

시샘의 불꽃에 휩싸인 자는 결국 방향을 돌려, 전갈처럼 자기 자신을 독침으로 쏜다.

아, 나의 형제여, 그대는 어떤 덕이 자기 자신을 비방하고 찔러 죽이는 것을 본 적이 없는가?

인간이란 극복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의 덕을 사랑해야 한다. 그대가 그것들로 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창백한 범죄자에 대하여


그대 재판관과 제물을 바치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제물로 바쳐진 동물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해야 죽일 것인가? 보라, 창백한 범죄자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의 눈은 커다란 경멸을 보이고 있다.

“나의 자아는 극복되어야 하는 무엇이다. 나의 자아는 나에게 인간에 대한 커다란 경멸이다.” 그의 눈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의 최고 순간은 자기 자신을 재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숭고해진 자를 그의 비열한 상태로 다시 되돌리지 마라!

이처럼 자기 자신에게 시달리는 자에겐 빨리 죽는 것 말고는 어떤 구원도 없다.

그대 재판관들이여, 그대들은 복수심으로가 아니라 동정심으로 사형 판결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그대들은 사형 판결을 내리면서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도록 노력하라!

그대들은 자신들이 죽이는 자와 화해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그대들의 슬픔이 초인에 대한 사랑이 되도록 하라. 그리하여 그대들이 아직 살아 있음을 정당화하라!

그대들은 ‘적’이라고 말해야지 ‘악인’이라고 말해선 안 된다. ‘병자’라고 말해야지 ‘악당’이라고 말해선 안 된다. ‘바보’라고 말해야지 ‘죄인’이라고 말해선 안 된다.

그리고 붉은 법복을 입은 재판관이여, 그대가 이미 마음속에서 행한 모든 일을 큰 소리로 말한다면 다들 이렇게 소리칠 것이다. “이 더러운 놈, 독충을 없애 버려라!”

하지만 생각과 행위, 그리고 그 행위의 표상은 별개의 것이다. 그것들 사이에는 인과의 수레바퀴가 돌지 않는다.

어떤 표상이 창백한 사람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그가 어떤 행위를 했을 때 그는 그 행위를 감당할 만했지만 그 행위를 하고 난 뒤에는 그것의 표상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는 이제 언제나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한 자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이를 망상이라고 부른다. 즉 그에게는 거꾸로 예외가 본질이 된 셈이다.

줄 하나가 암탉을 꼼짝 못하게 묶어놓는다. 이처럼 그가 저지른 어떤 행위가 그의 가련한 이성을 꼼짝 못하게 묶어버리는 것이다.―――나는 이를 행위 이후의 망상이라고 부른다.

들어보라, 그대 재판관들이여! 또 다른 망상이 있으니 이는 행위 이전의 망상이다. 아, 그대들은 이러한 영혼 속으로 충분히 깊게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붉은 법복을 입은 재판관이 말한다. “이 범죄자가 살인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강탈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대들에게 말한다. “그의 영혼이 원한 것은 강탈이 아니라 피였다. 그는 칼을 휘두르는 행복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가련한 이성은 이러한 망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설득했다. “피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너는 강탈을 하지 않을 것인가? 복수를 하지 않을 것인가?” 이성이 말했다.

그리고 범죄자는 자신의 가련한 이성의 말에 귀 기울였는데, 이성의 말은 그의 마음을 납덩이처럼 짓눌렀다. 그래서 범죄자는 살인하면서 강탈까지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망상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죄책감이란 납덩이가 다시 그의 마음을 짓누른다. 그러자 그의 가련한 이성은 다시 뻣뻣해지고 마비되며 무거워졌다.

그가 머리를 흔들 수만 있어도 그의 짐은 굴러떨어지겠지만, 누가 이 머리를 흔들 수 있단 말인가?

이 사람의 정체는 무엇인가? 정신을 통해 세계 속으로 손을 내뻗는 질병의 무더기이다. 즉 질병들은 이 세계에서 먹이를 낚아채려고 한다.

이 사람의 정체는 무엇인가?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는 뱀들이 뒤엉켜 있는 것이다. 그래서 뱀들은 각기 따로 흩어져 이 세상에서 먹이를 구한다.

이 가련한 몸을 보라! 이 몸이 괴로워하고 탐낸 것을 이 가련한 영혼이 나름대로 해석해 낸 것이다. 이 영혼은 그것을 살인의 욕구로, 칼을 휘두르는 행복의 갈망으로 해석했다.

지금 악하다고 불리는 악이 병든 자를 덮친다. 병든 자는 자신이 받은 고통으로 남에게 고통을 주려고 한다. 하지만 이와 다른 시대가 있었고, 다른 악과 선이 있었다.

한때 의심은 악이었고, 자기에 대한 의지도 악이었다. 그때는 병자가 이단자가 되었고 마녀가 되었다. 이단자이자 마녀로서 그는 고통을 받았고 남에게 고통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말이 그대들의 귀에 먹히지 않는다. 이런 말은 그대들의 선한 자에게 해롭다고 그대들은 나에게 말한다. 하지만 그대들의 선한 자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대들의 선한 자들이 지니고 있는 많은 점이 나에게 구역질을 일으킨다. 그런데 정말이지 그들의 악은 그렇지 않다. 나는 이러한 창백한 범죄자처럼 그들도 자신들을 파멸로 이끌 망상을 품기 바란다!

참으로 나는 그들의 망상이 진리나 성실, 정의로 불리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들은 오랫동안 살기 위해, 가련하지만 안락하게 살기 위해 자신의 덕을 지니고 있다.

나는 급류가 흐르는 강가의 난간이다. 붙잡을 수 있는 자는 나를 붙잡아라! 그렇지만 내가 그대들의 지팡이는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3) [마태복음] 12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성서에서는 고통 속에서 번민하며 살아가는 인간을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신세로 본다.
14) 여기서 잠이란 가치 판단을 기피하거나 포기하고 기존의 도덕률에 무비판적으로 빠져 있는 것을 말한다. 깊은 잠에 빠지지 말라는 표현은 비유적인 표현이므로 진짜 밤에 잠을 자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이런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니체를 오해하고 왜곡하게 된다.
15) 니체는 신이 인간을 만든 게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니체가 파시스트를 만든 것이 아니라 파시스트가 왜곡된 니체의 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16) 서구의 철학자들이나 기독교의 성직자, 프로테스탄트들은 인간을 영혼(정신)과 몸으로 나누어 영혼을 받들고 몸을 무시해 왔다. 반면 불교에서는 몸을 생리학적 입장에서 대하고 몸의 선악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17) 니체는 정신과 몸을 통합하는 제3의 신체를 자아와 구별하여 자기(Selbst)라고 칭하고 있다.
18) 예수는 천국을 신앙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이 세상에서 찾으라고 했다. 그러므로 니체가 보기에 예수야말로 유일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추천 (1) 선물 (0명)
IP: ♡.252.♡.103
뉘썬2뉘썬2 (♡.169.♡.51) - 2023/12/03 08:44:57

꿀잠자고 숙면을 취하는것이 건강에 좋다고 햇는데 잠은 가장 사랑스러운
도둑이고 생각을 훔쳐간다고 하네요.

졸음에 겨운 자들은 행복하다네요.잠을 푹자고나면 피로가 많이 풀리지요.
마치 자면서 무슨 물리치료라도 받은듯.

단차 (♡.252.♡.103) - 2023/12/03 09:02:29

현자들은 잠 자는 시간도 아까워했나보죠. 사유를 멈추는 거라고 생각했나봐요. 사실 꿈을 꾸고 숙면을 하면 뇌가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더 또렷한 사유를 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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