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2

단차 | 2023.11.18 07:49:15 댓글: 2 조회: 254 추천: 2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18565

02



난 진정한 속 얘기를 나눌 사람 하나 없이 그렇게 혼자 살아오다가 6년 전 사하라 사막에서 비행기 고장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모터 속 무언가가 망가졌는데 정비공도 승객도 없는 상황이라, 힘든 수리겠지만 어떻게든 혼자 고쳐내 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것은 내겐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있는 거라곤 일주일 남짓 마실 물이 다였으니까.

  첫날 밤, 나는 사람이 사는 곳에서 수천 킬로는 떨어진 모래위에서 잠이 들었다.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뗏목위 조난자보다 더더욱 고립된 상태였다. 그러니 동틀 녘 묘한 어린 목소리가 잠을 깨운 순간, 내가 얼마나 놀랐을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 목소리는 이렇게 말했다.







"저, 부탁인데. 양 한 마리만 그려줘요."
"으.. 응?!"
"양 한 마리만 그려줘요."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눈을 비비고 뚫어지게 쳐다봤다. 거기엔 심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범상치 않은 남자아이 하나가 서 있었다. 이것은 훗날 그 아이를 그린 것 중 가장 잘 된 초상화다. 그러나 실제 모델이 지닌 매력에는 영 미치질 못한다. 하지만 그게 내 탓은 아니다. 여섯 살, 어른들 말에 기죽어 화가의 길을 접은 나였기에, 속이 안 보이는 보아구렁이와 속이 보이는 보아구렁이 그림 말고는 더 익힌게 없었으니 말이다.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는 그의 출현을 바라보았다. 그때 나는 사람 사는 곳에서 수천 킬로는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이 아이는 길을 잃거나 녹초가 된 모습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말라 쓰러질 것 같지도, 겁을 먹은 것 같지도 않았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아이의 기색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 간신히 입을 펠 수 있게 된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니?"

그리자 그 아이는 너무도 중요한 일이라는 듯 아까의 말을 차분히 반복했다.




"저기 부탁인데. 양 한 마리만 그려줘요."

  감당 너머의 신비로운 일을 맞닥뜨리면 도무지 거역이라는게 불가해진다. 사람 사는 곳에서 수천 킬로나 떨어져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인데도 나는 그의 티무니 없는 요구에 주머니에서 좋이와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그 순간. 나라는 사람이 배운 것은 지리와 산수와 문법이 다였다는 게 떠올랐고 (좀 언짢은 기분이 되어) 난 그림을 그릴 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아이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한 마리만 그려줘."

  나는 양을 그려 본 적이 없었기에 대신 내가 그릴 줄 아는 두 가지 그림 중 하나를 그려주었다. 속이 안 보이는 보아구렁이 말이다. 그 뒤로 이어진 아이의 대답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아니! 코끼리를 먹은 보아구렁이 말고. 보아구렁이는 너무 위험하고 코끼리는 너무 거추장스리워. 내가 사는 곳은 아주 작거든. 양이 필요해. 양 한 마리만 그려쥐."
  그래서 난 그렸다.
  그가 찬찬히 살펴보더니 말했다.
"안 돼! 이 양은 벌써 너무 아파보이는걸. 다른 양으로 그려줘."

  나는 또 그렸다.
  내 어린 친구는 너그럽고 선하게 웃으면서

  "에이 잘 봐봐, 이건 숫양이야. 뿔이 있잖아."

  그래서 난 다시 그렸다.
  하지만 앞서 그린 그림과 마찬가지로 퇴짜를 맞았다. 

  "이 양은 너무 나이 들었네. 난 오래 살 양이 필요해."

  서둘러 비행기 모터를 분해해야 했던 나는 더는 못 참고 대충 끄적여 이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는 던지듯 건넸다.









  "자, 이건 상자야. 네가 원하는 양은 그 안에 있고."

  이 말에 어린 심사위원의 얼굴이 환해지는 걸 보고 나는 적잖이 놀랐다.

  "내가 원하던 게 바로 이거야! 이 양에게 풀을 많이 줘야 할까?"

  "그건 왜 물어?"

  "내가 사는 곳은 너무 작아서.."

  "분명 그걸로 충분할 거야. 아주 작은 양이니까."

  그는 고개를 숙여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작지도 않은데.. 어! 잠이 들었네..."

  이렇게 해서 나는 어린 왕자를 알게 되었다.











추천 (2) 선물 (0명)
IP: ♡.234.♡.144
봄날의토끼님 (♡.65.♡.126) - 2023/11/18 08:22:28

"어린 왕자"는 제가 20대때 읽었던 책인데 올해 우연히 잠깐 다시 보게 되었는데, 글쎄 제가 그때 읽었던거랑 다른 내용으로 다가오더라구요. 제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제야 그 책의 깊은 뜻을 조금 더 이해한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이제 바쁜 시기가 좀 지나서 다시 정독을 해볼 계획이예요! 우리 독서 취향 비슷하네요~

단차 (♡.252.♡.103) - 2023/11/18 08:29:02

어린 왕자는 저는 15살때 처음 빌려서 읽어본 책인데요. 그땐 그저 별 생각이 없었어요. 다시 20대때 어느 언니 한분이 선물로 주셔서 읽어보니 다르게 다가오더라고요.
그런데 30대가 되어서 다시 읽어보니 또 다른 것들이 보이네요. 어린 왕자는 진짜 신기한 책 같아요.

봄날의 토끼님과 독서취향이 비슷하다니 기분이 좋아요.그래서 대화가 잘 되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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