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신조협 양과후전 7

3학년2반 | 2022.02.26 07:44:21 댓글: 0 조회: 742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1240

화산논검(華山論劍) 제22권 7부 신조협 양과후전 IV
제목: 화산논검 제22권 (전22권)
지은이:
옮긴이: 박영창
- 차례 -
제25장 하룻밤의 사랑
제26장 남해신니
제27장 여노악의 과거
제28장 모용세가
제29장 주백통을 구한 황약사
제30장 모용협의 실체
제31장 교주의 탄생
제32장 백의 여인의 정체
제25장 하룻밤의 사랑
그때 확도와 사대제자들이 오고 있었는데 황야에 누런 먼지를 말아올리는 품이 상당히 기세
가 등등해 보였다.
가까이 다가온 확도는 양과를 알아 보자 깜짝 놀랐다. 그는 이신조협 양과를 뼈에 사무치게
미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무적이 확도에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양과란 놈이 몸에 중상을 입었으니 조심할 것 없소이다. 광야께서는 조급해 하지 마십시
오."
"그렇다면 왜 저능을 사로잡지 않았는가?"
이렇게 묻던 확도는 무채접을 보자 음탕한 생각이 또 가슴속에 들끓기 시작했다.
"무소저, 그간 무고했겠지? 아마 본왕과 임자는 아주 인연이 깊은 모양이야."
무채접은 확도가 색마처럼 자기를 능글맞게 바라보자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집법사자의 등 뒤로 물러서며 소리 쳤다.
"확도, 이 놈아…… 넌 수치도 모르는구나!"
확도가 부채를 확 펼쳐들고 살랑살랑 부치면서 말했다.
"본왕이 왜 수치를 모르겠는가?…… 우린 전에……."
무채접은 그 일을 생각하자 대번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허튼소리 말아라!"
무채접은 다시 집법사자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언니, 저 놈이…… 날 강간하려고 했었어요. 저 놈을 반드시 죽여 내 한을 풀어 주세요."
집법사자가 확도를 쏘아보며 물었다.
"네놈이 감히 내 여동생에게 방자하게 굴었단 말이냐?"
목소리는 비록 높지 않았으나 그녀의 말은 아주 위엄있게 들렸다. 확도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추한 여인은 누구일까? 용모는 추하게 생겼으나 언행은 아주 무게가 있어 보이는구나.
조심해야겠다.'
송무적이 확도에게 귓속말로 집법사자의 신분이며 방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확도는 내심 생각했다.
'바로 저 여자가 강호의 군웅들이 그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오독방의 집법사자였구나.
아마 재간도 대단할 것이다.'
확도는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음탕한 웃음을 피우며 말했다.
"듣자니 오독방의 집법사자는 선녀같이 아름답다고 하던데 본왕에게 그 얼굴을 보여줄 순
없겠소?"
무채접이 퉤하고 침을 뱉고 나서 욕설을 퍼부었다.
"색골 같은 놈아, 언니의 용모를 어찌 너 같은 놈에게 보여줄 수 있단 말이냐?"
"여동생이 이처럼 사내들을 홀딱 반하게 할 정도이니 언니는 아마 사내들의 얼을 뺏아갈 정
도겠군?"
집법사자가 물었다.
"그래 네놈이 얼을 빼앗길 생각이냐?"
"물론이지. 그것도 아주 완전히 빼앗길 수도 있지."
그러자 진웅, 장기, 연무, 임맹 사대제자들도 히히덕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우리도 마한가지야!"
그 자들의 이런 추잡한 언행을 보고 무채접은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언니, 보셨지요? 저 놈들이 저토록 방자해요!"
이때 양과는 깨어났다가 집법사자가 자기를 구해준 것을 보고 내심 무척 감동했다.
'결국 용녀는 날 완전히 잊어버리지는 않았구나.'
이렇게 생각하자 온 몸에 뜨거운 피가 끓어번지고 무궁한 힘이 솟구쳐오름을 느꼈다. 양과
가 집법사자와 무채접의 앞을 막아서며 큰 소리로 말했다.
"확도, 너 같은 사악한 소인배가 방종하게 구는걸 난 용서하지 않겠다!"
양과가 우뚝 일어서는 것을 본 확도는 아까 그가 중상을 입었다고 한 말이 거짓이라는 생각
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는 비록 집법사자의 무공이 대단하고 심성이
독랄하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하찮은 아녀자가 강하면 어느 만큼 강하겠는가하고 생각
하는 터였다. 기껏해야 독주여니 완안방방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확도는
신조협 양과를 가장 경계하고 있었다.
무채접은 양과의 늠름한 등을 바라보면서 그가 극독에 중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자
기들을 보호해주려고 나선 것에 깊이 감동되었다. 그녀는 슬그머니 집법사자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한탄했다.
'언니, 언니가 이런 남편을 갖고 있다는건 실로 하늘이 준 커다란 은혜예요. 그런데도 언니
는 왜 양공자님과 부부 사이의 연을 다시 이으려고 하지 않는거죠? 정말 지난날의 일을 잊
어버렸단 말이에요? 휴, 내가 만일 양공자님과 부부로 결합할 수만 있다면 금생에 더 바랄
것이 없겠어요.'
무채접이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양과는 몸을 비틀거리면서 두세 번 쓰러지려 했다. 체
내에 퍼진 극독이 그로 하여금 버티고 서 있을 수 없게 한 것이었다. 무채접이 "양공자님!"
하고 부르면서 손을 내밀어 부축하려 했으나 집법사자가 먼저 양과를 부축했다. 그러나 곧
집법사자는 양과를 무채접에게 넘겨주면서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접아. 넌 이 주제넘은 사람을 잘 보살펴라!"
그 말을 들은 양과는 눈물이 질끔 솟았으며 속으로 한탄해마지않았다.
'이 양과가 채설주에 중독된 데다가 또 거와까지 삼켰으니 이젠 폐인이 된 것이나 다름없구
나. 그러니 용녀가 날 아는 체하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정말 내 용녀가 변심했단
말인가?'
양과는 지난날 소룡녀와 할께 다정하게 지내면서 항상 그림자처럼 떨어지지 않고 다니던 일
을 생각하고는 소룡녀가 변심한 일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무채접은 양과가 자기 체내에 퍼진 극독 때문에 걱정하는 줄 알고 부드러운 어조로 위안했
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꼭 방법을 알아내 당신을 치료해드리겠어요."
확도는 양과가 정말 불치의 중병에 걸린 것을 보자 시름이 놓여 너털웃음을 웃었다.
"양과, 네놈에게도 오늘 같은 날이 있게 됐구나 그래 아직도 본왕과 겨루어 볼 생각이냐?"
확도는 여전히 그를 양과로 변장해서 오군영을 보호하던 양효비로 알고 있었다.
'만일 양과가 없었더라면 본왕이 이미 전세교주의 신물인 인골 염주를 수중에 넣었을 거고
그렇게 되면 서역신교에서 누가 감히 나를 변절자라고 욕하고 멸시할 수 있단 말인가?'
매번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확도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으며 양과를 당장 잡아죽이지 못
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집법사자가 한 걸음 나서며 쌀쌀한 기색으로 말했다.
"확도. 네 놈이 본방을 무시하고 본방의 교화사자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는데 그 죄를 아느
냐?"
"난 대원국의 왕야인데 네 년이 감히 본왕을 사로잡아 원수를 갚으려 하다니, 그 죄를 아느
냐?"
"네 놈의 신분을 난 상관하지 않는다. 본방과 맞서는 자는 징 벌을 받아야 한다."
집법사자가 흰 옷소매를 내치자 우레 같은 소리가 나면서 진기가 확도의 가슴팍으로 곧장
뻗어갔다. 확도는 그 기세가 대단한 것을 보자 감히 정면으로 막지 못하고 급히 옆으로 비
켰다. 하지만 벌써 가슴이 뜨거워지고 숨이 콱 막혀옴을 느껴 집법사자의 고강한 무공에 대
한 소문이 과연 헛소문이 아니었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확도가 온 몸에 진기를 운행하며 말했다.
"사자님께서 인골염주를 욕심내는 것은 아니겠지요? 인골염주는 양과가 잃어버렸으니 당신
은 저능의 죄를 따져야 할텐데 오히려 비호하고 있군요. 듣자니 모용협이 인골염주를 빼앗
아 와불산 으로 돌아갔다고 하더군요. 만일 그자가 전세교주를 찾기만 하면 당신들의 오독
방은 헛고생만 죽도록 한 셈이 되지 않겠소? 그러니 본왕은 당신에게 어서 모용협을 찾아가
볼 것을 권고하는 바 이오."
확도는 취선루의 싸움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에 이렇게 말로 이간질해서 집법사자가 양과를
내버리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언니, 저 놈이 이간질을 하려 하니 곧이듣지 마세요! 저 놈은 나쁜 심보를 품고 있는 게 분
명하니 어서 죽여 버리세요!"
무채접이 화가 나서 이렇게 소리치자 확도가 무채접을 보고 웃으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무소저, 왜 이렇게 모멸차게 구는 거요? 그래 접때 내가 정성껏 위로해드린 일을 잊어버렸
단 말이오?"
"너…… 이 수치도 모르는 놈아?"
무채접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소리쳤다.
집법사자가 콧방귀를 뀌더니 확도를 향해 옷소매를 내쳤다. 확도가 옆으로 몸을 날리면서
부채를 펼쳐 옷소매를 베려고 했다. 그런데 칼처럼 날카로운 부채의 가장자리가 횐 옷소매
와 부딪치자 마치 쇠붙이에 부딪히기나 한듯 옷소매는 끄떡없고 오히려 부채를 쥔 손이 충
격을 받아 정하고 저려오는 것이었다.
확도는 뒤로 물러서며 생각했다.
'이 추한 여인은 대단히 고강한 무공을 지녔구나. 혼자 맞서 싸우다간 해를 입을 것이다. 함
께 달려들어 공격을 해야겠다. 양과가 중상을 입어 무채접이 곁에서 돌보고 있으니 상대방
은 혼자 서 싸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쪽엔 귀두방의 송무적과 사대제자 등
고수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귀두방의 나머지 십여명 제자들이 있으니 승산이 있다.'
확도는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명령을 내리려고 했다. 집법사자는 확도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것을 보고 그가 꿍꿍이를 꾸민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이번에는 두 옷소
매를 전력을 다해 동시에 내쳤다. 확도는 감히 정면으로 맞받아치지 못하고 뒤로 훌쩍 물러
서면서 부채와 장을 동시에 내 침으로써 옷소매의 힘을 소실되게 하려고 생각했다.
"모두들 달려들어 이 사방(邪幇)의 요귀를 죽여 버리자!"
확도가 옷소매의 공격을 막는 한편 이렇게 소리 지르자 사대제자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고 서로 앞장서서 집법사자에게 달려들었다. 집법사자는 이 사대제자를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 그녀가 한 쪽 옷소매를 내치자 긴 옷소매가 마치 흰 용처럼 춤추며 사대제자들의
병장기들을 몽땅 휘감아 하늘로 던져버렸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여력으로 사대제자들을 한
장 밖으로 나가 떨어지게 했다. 사대제자들은 그저 눈앞에 횐 옷소매가 지나가고 뒤이어 이
상야릇하게도 몸체가 허공에 들려 나자빠지게 되자 기어 일어나서는 서로 얼굴들을 마주보
았다. 그들은 집법사자가 무슨 초식을 썼는지 똑똑히 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승무적이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므로 귀두방의 제자들은 싸움에 뛰어들지 않았다. 확도가 소
리쳤다.
"송방주, 당신은 왜 나서지 않는거요?"
"왕야, 집법사자는 지독한 년이기에 이처럼 마구 공격해서는 안됩니다. 사람 숫자가 많은 것
만 믿고 덤비다가는 오히려 저년에게 당하기 쉽지요,"
"그래 저 년이 양과란 놈을 끌고 가게 내버려둬야 한단 말인가?"
"힘으로 안되면 계책으로 해야지요."
"어떤 계책인가?"
송무적이 확도의 귀에 입을 대고 소곤거렸다.
"……이러이러하게 해야지요……."
확도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실로 일개 방의 방주가 되기에 손색이 없구만. 병법을 잘 알고 지휘도 잘하니 당신 생각대
로 해보구려."
그러자 송무적이 명령을 내렸다.
"이후아, 넌 여러 형제들을 거느리고 양과를 붙잡도록 해라. 풍노사, 우린 왕야와 함께 집법
사자를 공격한다!"
이후아가 열 명의 귀두방 제자들을 거느리고 소리를 지르며 양과와 무채접을 둘러쌌다. 무
채접이 양과를 부축한 채 소리쳤다.
"언니, 어서 와서 절 도와줘요!"
"무서워하지 말아라!"
집법사자가 이렇게 대꾸하며 도와주려고 했다.
확도와 사대사자 그리고 송무적, 풍노사는 동시에 집법사자를 둘러쌌다. 확도가 입을 열었
다.
"이 요녀야. 네 년이 양과를 구할 수 있겠느냐?"
일곱 사람이 제각기 병장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집법사자는 더 이상 사정을 두지 않고 긴
옷소매를 휘둘렀는데 그 기세를 막을 자가 없었다. 하지만 확도 무리들은 우격다짐으로 공
격하는 것이 아니라 전진하다가 때로는 물러서기도 했으며 한 사람이 공격하면 옆 사람이
막아주기도 했다.
집법사자가 몸을 돌려 뒤의 공격을 물리치려고 하면 뒤에서 공격하던 사람들은 벌써 물러가
고 앞으로 물러섰던 사람들이 다시 집법사자의 등 뒤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여러 번
거듭하면서 확도 무리들은 둘러싸기만 할뿐 격전을 치를 생각을 하지 않다 보니 절세의 무
공을 지닌 집법사자라 할지라도 재간을 마음껏 부릴 수 없었으며 맹호가 승냥이 무리에 둘
러싸여 공격받는 형국이 되었다.
무채접은 양과를 돌보는 한편 이후아 등의 공격을 막아내야 했다. 그래서 무채접은 다급해
서 집법사가에게 도와달라고 여러번 외쳤지만 여러 놈들에게 둘러싸인 집법사자는 도무지
몸을 뺄 겨 를이 없었다.
무채접은 더는 버터내기 어려워 또다시 외쳤다.
"언닌 왜 아직도 검을 쓰지 않나요?"
집법사자는 원래 쉽게 병장기를 쓰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무채접이 정말 위험한 지경
에 빠지고 기어이 양과를 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보자 쌍익검을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
쌍익검은 매미날개처럼 얇아서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녀의 이 형검술은 변화무
궁하고 괴이한 것이어서 쌍익검을 꺼내들자마자 풍노사와 장기가 다치게 되었다. 확도가 그
것을 보고 움찔 놀라 면서 큰 소리를 질렀다.
"모두들 조심하게!"
뭇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포위망을 넓히지 않을 수 없었다. 집법사자가 쌍검을 휘두르는 바
람에 두 장 범위 안에는 찬 기운이 돌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포위망을 뚫지는 못했다.
이후아가 소리쳤다.
"형제들, 양과를 사로잡는 자에게는 상을 주겠네!"
제자들이 환성을 지르면서 더욱 기를 쓰고 양과를 사로잡으려고 했다. 무채접은 좌우 양쪽
에서 공격해오는 자들을 이리 막고 저리 막다 보니 점점 견디기가 어려웠다.
바로 이때 한 떼의 관군들이 말을 타고 나는듯이 달려왔다. 모두 스무여 명쯤 되었는데 빛
나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우두머리는 금빛 나는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손에 긴 창을 들고
이쪽으로 달려오면서 큰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거 양대협이 아니시오?"
양과는 몽롱한 의식 중에서도 누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 그렇소. 누가 이 양모를 부르는거요?"
"과연 양대협이시군요!"
그 대장은 이렇게 말하면서 다가오다가 또 노한 소리를 질렀다.
"저런, 여기에 확도란 놈도 있군 그래!"
그 대장은 양과가 놓아준 가흥부의 기병도위 장흥국이었다. 그는 양과가 부상을 입고 도적
들에게 포위되어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을 보자 창을 휘두르며 큰 소리를 질렀다.
"형제들, 포위당한 사람은 바로 내 목숨을 살려준 양과 양대협이시네. 날 따라 양대협을 구
하자!"
관군들이 장흥국을 따라 말을 타고 나는듯이 달려와 포위망을 돌파했으며 각기 칼과 창으로
공격하는 바람에 귀두방의 제자들은 대번에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이후아는 이 관군들이 무엇 때문에 양과를 구하려고 드는지 알 수 없어 소리쳤다.
"형제들, 먼저 이 관군들부터 죽이자!"
하지만 기병들은 훈련을 잘 받은 사람들이어서 장흥국의 인솔하에 세찬 공격으로 밀어붙였
다. 개개인의 무공에 있어서는 장흥국의 관군들은 귀두방 제자들보다 좀 못할 수도 있었지
만 진을 치고 대규모적인 전투를 벌이는 기술은 귀두방 제자들보다 월등 앞섰다.
비록 귀두방 제자들의 수중에 있는 귀두도가 아주 흉맹스럽고 지독한 것이기는 했지만 기병
들이 모두 갑옷을 입고 있는 데다가 행동이 일사불란하게 대오를 지어 공세를 취했기에 몇
번의 공격 으로 귀두방의 제자들을 물리쳐 버렸다.
확도는 장흥국의 용맹을 잘 알았기에 사대제자들과 송무적 등을 데리고 도망가는 수밖에 없
었다.
"장흥국 이 놈아. 본왕은 절대 너희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확도가 도망가면서 이렇게 소리치자 장흥국이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대꾸했다.
"이 장모가 송나라와 원나라가 싸우게 될 때 진두에서 어련히 네 놈에게 도전하지 않을까봐
그러느냐?"
장흥국은 말에서 내려 급히 양과 앞으로 다가오면서 두 손을 모아쥐고 예를 올렸다.
"양대협님, 당신은…… 왜 이러는 거요?"
양과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장장군이시오?"
"바로 나요."
"장장군께서는……양양에 가서…… 원나라 군대에 항거하는 곽대협님을 돕겠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난 그럴 생각이오."
"그렇다면…… 왜 아직 이곳에 남아 있는 겁니까?"
장흥국이 한숨을 쉬고 나서 연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양과와 객점에서 작별한 뒤 군
중에 돌아와 원나라 군대와 싸울 의향을 갖고 있는 이십여 명 장병들과 의논한 후 그날로
가흥성을 떠나 양양에 있는 부대로 떠나려 했다. 그런데 가흥부에서는 도리어 그들이 군법
을 위반한 것으로 치부하고 수백 명의 기병들을 파견해서 그들을 잡아 죽이게 했다. 그 소
식을 들은 장흥국은 북쪽으로 가지 않고 서남쪽으로 향했다. 추격하는 군대들이 분명 북쪽
으로 달려가게 될 것이므로 그들은 잠시 산중에 숨어 있기로 했다. 과연 예견했던대로 추격
하는 부대는 북쪽으로 삼백여 리 뒤쫓아가다가 아무런 수확도 없자 가흥성으로 돌아가버렸
다. 장흥국은 그제서야 인마를 이끌고 양 양쪽으로 가다가 때마침 이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처럼 양과 일행을 구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양과는 그 말을 듣고 탄식해 마지 않았다.
"송나라 군대가 이처럼 장병들을 원수로 생각하고 나라에 보답하지 못하게 하니 망할 날이
가까워 오는군요."
"장군이 무능하면 천군만마를 죽게 하지만 한 나라의 황제가 무능하면 온 나라를……."
장흥국도 이렇게 통탄했다.
"장장군의 행적이 확도란 놈에게 탄로났으니 그 놈이 분명 가흥부의 관군을 끌고 와 추격할
것입니다. 그러니 조심하십시오."
"괜찮소. 내가 병법을 좀 알기에 능히 추격병을 피할 수 있소."
"그럼 떠나도록 하십시오. 접아가 날 보살필 것이고 사나흘이 지나면 병도 나을 겁니다."
"그럼 이 장모는 물러가겠습니다."
장흥국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말잔등 위에 올라앉았다. 양과가 두 손을 모아쥐고 말했다.
"장군의 혁혁한 전공(戰功)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몽고 오랑캐들을 몰아내기 전에는 절대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장흥국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기병들을 데리고 떠났다.
집법사자가 한 쪽에서 쌀쌀한 눈길로 이 장면을 줄곧 지켜보다가 기병들이 멀리 떠나가자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당신이 애국지사일 줄은 생각밖이군요."
그제서야 제 정신을 차린 양과가 정색하고 대답했다.
"난 비록 곽정 대협님과 장장군처럼 나라를 보위하지는 못하지만 협의를 행하고 위험과 어
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주려 하고 있소. 용녀, 지난날 우리가 고묘에서 기거할 때 전진교
의 조사님인 왕중양 진인은 금나라 군대를 막아내셨소. 지금 왕중양 진인의 지난날의 거룩
한 행동을 생각하기만 하면 실로 창피한 생각이 드오."
집법사자는 쌀쌀한 기색으로 콧방귀를 뀔 뿐 한 마디의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양과가 말을 이
었다.
"임잔 정말 지나간 일들이 기억나지 않나? 임잔 소룡녀……용녀임에 틀림없어……."
"난 그 무슨 소룡녀도 아니고 당신의 용녀도 아니란 말이에요. 당신이 다시 그런 허튼소리
를 하면 용서하지 않겠어요!"
"용녀……."
양과는 이렇게 한 마디 하더니 몸을 부르르 떨면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무채접이 양과를
부축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언니, 언닌 그 일을 인정하지 않으면 되는거지 화는 왜 그렇게 내시나요?"
"접아, 난 네가 저 사람을 깊이 사랑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 사람의 정을 떼느라고 그러
는거다. 만일 딴 사람이 그런 허튼소리를 했더라면 벌써 죽여버렸을거야."
무채접은 묵묵히 눈물만 흘렸다.
이윽고 집법사자는 무채접이 계속 울고만 있는 것을 보자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다가와서 손
으로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면서 물었다.
"저 사람은 이미 극독에 중독되었는데 넌 저 사람을 어떻게 할 작정이니?"
"전…… 마음이 어지러워요……."
"정이란 사랑을 못살게 구는 법이지……."
집법사자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한숨을 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양과는 본방의 대사를 망친 사람이니 넌 더는 저 사람을 보살필 필요가 없다. 이 언니를
따라 가자."
"전 저 이를 구해내 고야 말겠어요."
"네가 저 사람을 어떻게 구한단 말이니?"
"언니는 방주님의 훌륭한 제자이니 꼭 저 이를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이 언니가 독을 제거하는 능력은 그렇게 대단한게 아니다. 거와는 천하의 절독이니 그걸
제거할 사람은 없어. 그리고 내게 설사 그런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결코 양과를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겠어."
"만일 양과가 한 말이 사실이어서 언니가 정말 저 이의 아내 소룡녀라면 저 이가 죽는 걸
보고도 구해주지 않는건 큰 유감이에요."
"이 일은 더 끄집어내지 말아. 난 신선도에 오기 전의 일들은 이미 잊어버렸고 또 더 생각
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이전에 소룡녀였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집법사자이고 오로지 방주님
의 명령만을 좇을 따름이야. 방주님은 내가 이전의 일을 생각하는 걸 허락하지 않고 나도
또 그걸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난 그걸 이미 알았어요."
"네가 윌 알았다는 말이니?"
"언닌 방주님을 사랑하고 있지요. 제가 그걸 모를줄 알았나?"
"얘가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거야?"
"내가 허튼소리를 한다구요? 그럼 언닌 왜 매번 여방주님을 만날 때마다 어쩔 줄을 몰라하
고 두 눈에 정이 철철 흘러넘치는 거죠? 여인들은 자기가 맘 속으로 그리는 사람 앞에서만
그렇게 한다는 걸 나도 알고 있어요."
"더 말하지 말아."
"내가 언니의 맘 속을 꿰뚫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언니가 양공자님과 다시 만나기
싫어하는걸 이상하게 생각할게 없군요. 이미 정이 없어진 거니까요. 휴, 하지만 언닌 미쳤어
요. 방주님은 언니에게는 할아버지뻘이 되는 사람인데 어찌 언니와 부부간이 되려고 하겠어
요?"
"더 말하지 말라니까."
"난 말하겠어요. 말하고 말고요!"
집법사자가 드디어 참지 못하고 무채접의 귀쌈을 때렸다.
"그래 날 무시하는 거니?"
무채접은 얼떨떨해졌다. 무채접은 집법사자와는 친자매처럼 지냈으며 집법사자가 무채접을
때린 것은 이전엔 생각조차 못해 본 일이었다. 집법사자도 홧김에 무채접의 귀쌈을 때렸지
만 몹시 후 회되어 발을 동동 구르다가 훌쩍 몸을 날려 도망쳐 버렸다.
무채접도 자기의 말이 지나쳤음을 느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언니, 나도 언닐 그렇게 화나게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정말 미안해요.'
무채접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양자를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양공자님, 정말 불쌍하군요. 당신은 그토록 언니를 사랑하고 있건만 언니는 이미 변심했어
요…… 언닌 내게 화가 나서 도망갔어요. 어떻게 하면 당신을 구할 수 있는거죠?"
무채접은 마침내 양과를 업고 한 농가로 왔다. 말 한 필을 사서 함께 탔는데 자기가 앞에
타고 양과를 뒤에 태웠다. 양과가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말 위에서 떨어질까봐 걱정
되어 그녀는 넓은 띠로 양과를 자기의 허리에 붙들어했다. 그녀는 말을 몰아 남해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무채접은 방주 여노악을 설복해서 양과의 몸에 있는 독을 제거해 달라
고 부탁하기로 작정했다. 사오백 리마다 한 번씩 말을 바꾸어타면서 그들은 밤낮으로 달렸
다. 목이 마르면 샘물로 목을 축이고 배가 고프면 건량을 꺼내 요기를 했다. 그래서 닷새만
에 드디어 남해가에 당도했다.
무채접은 휴식할 생각도 않고 비싼 값으로 빠른 배 한 척을 빌렸다. 반나절이 채 못돼 해안
에서 가장 가까운 비어도(飛魚.島)에 도착했다. 비어도의 비어당(飛魚堂)에는 오독방의 제자
칠십 명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교화사자가 당도한 것을 보자 급히 나와서 영접했다.
무채접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가장 빠른 배 한 척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이
튿날 일찌감치 오독 방의 본부인 신선도로 가려고 했다.
그리고 나서 무채접은 휴식을 취했다. 그녀는 양과를 잘 눕히고 나서 옆에 있는 의자에 앉
아 지켜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한밤중에 양과가 깨어났다. 양과는 자기가 침상에 누워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겨우 일어나
앉았다. 어슴푸레한 등불및 밑에 무채접이 의자에 앉아 곤히 잠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양과
는 자기 가 비어도에 와 있음을 알았다. 사방을 둘러보니 방안의 설비는 아주 화려했는데
아마도 그 섬에서 가장 훌륭한 침실인 것같았다.
양과는 땅바닥에 내려서다가 갑자기 자기의 움직임이 완전히 자유스럽다는 것을 느끼게 되
었다. 조용히 진기를 움직여보니 거침없이 통하는 것이 아닌가? 체내에 있는 두 가지의 절
독이 몽땅 소멸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양과는 무채접의 파리해진 얼굴을 보고 그녀가 여러날 동안이나 쉼없이 말을 달려오느라고
몹시 지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양과는 무채접을 살며시 안아다가 침상에 눕히고 살포시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런 다음 의자에 앉아 생각했다
'접아는 내게 이처럼 성의를 다했는데 난 어떻게 이에 보답을 해야 한단 말인가? 접아에게
장가들겠다고 대답한 일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 이미 소룡녀를 찾았으니 그렇게 할 수도 없
는 일이 다. 비록 소룡녀가 이전의 일을 몽땅 잊어버렸다고 하더라도 그녀에 대한 내 깊은
정이야 어찌 변할 수 있으랴? 그렇지만 당당한 사내대장부로서 접아에게 장가들겠다고 대답
하고서 그것을 어긴다면 얼마나 신용이 없는 일인가?'
이렇게 망설이며 접아가 다시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지 않기만을 바랐다.
갑자기 무채접이 소리를 질렀다.
"양공자님, 양공자님!"
양과가 급히 침상으로 다가가서 가벼운 목소리로 불렀다.
"접아……."
그런데 무채접은 몸을 뒤척이더니 다시 곤히 잠드는 것이었다. 아마 그녀는 꿈을 꾸고 있었
던 모양이다.
양과는 그녀를 보고 한숨을 지었다. 무채접은 활발하고 천진난만한 소녀였는데 양과를 만난
뒤로 맘 속으로 번뇌를 느끼게 된 것이었다. 그녀가 꿈속에서도 양과를 부르는 것을 보면
그녀가 양과를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었다.
'접아가 나에 대한 사랑에서 헤어나지 못하는데 만일 내가 저버린다면 얼마나 충격을 받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한 양과는 부지중에 "휴"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한숨소리에 무채접이 놀라 잠에서 깼다. 그녀는 눈을 뜨자 양과가 의자에 앉아 있고 자
기가 침상 위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급히 몸을 일으켰다.
"양공자님, 왜 일어나셨나요?"
"임자가 너무 피곤해 보이기에 내가 들어다 눕힌거야. 푹 자라구."
"난 아무 데서 자도 돼요. 하지만 당신은 몸에 절독이 퍼져 있으니 잘 쉬어야 해요. 어서 와
서 누우세요."
"난 이젠 병이 다 나았어."
"그게 어디 당치나 한 일인가요? 당신은 거와를 삼킨 뒤 정신이 흐릿해졌는데…… 어디 봐
요, 정말 나았나요? 능히 걸을 수도 있고 나를 안아다가……."
이렇게 말하는 무채접은 이 모든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양과는 제 자리에서 몇번
가볍게 뛰어 보이기도 하고 장을 휘둘러 보이기도 했다. 장풍에 창문이 찌르릉하고 울렸다.
"보라구. 다 낫지 않았냔 말야."
무채접은 자기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당신은 정말 나았군요.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거와는 절독이 아닌가요?"
"나도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어, 아마도 거와와 채설주 이 두가지 독이 서로 상극이어서
그런가봐. 아무튼 난 이젠 다 나았다니까."
무채접은 흥분해서 팔짝팔짝 뛰더니 갑자기 양과의 품에 뛰어 들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
면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참 잘 됐어요. 참 잘 췄단 말이에요!"
"내가 오늘 여기 있게 된건 모두 접아의 덕분이야. 난…… 더 없이 고맙게 여겨."
"양공자님, 당신이 만일 낫지 않게 되었다면 저도 이 세상을 하직할 거란 걸 아셔야 해요."
"접아, 임자가 이처럼 극진히 대 해주었는데 내가 어떻게 보답해야 하나?"
"정말 바보로군요. 제가 언제 당신에게 보답해달라고 했나요?"
양과는 그 말을 듣고 무채접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양과는 순전히 은혜에 감동되어
그런 것이고 다른 의도가 없었지만 무채접은 그것을 양과가 자기에게 사랑을 표시하는 것으
로 간주했다. 그래서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양과의 품에서 빠져나와 도망갔다.
이윽고 비어당의 제자가 들어와서 인사를 하고 나서 말했다.
"양대협님, 목욕을 하십시오."
그 말을 들은 양과는 아주 기뻤다. 그는 오랫동안 목욕을 하지 못했기에 몸에서 냄새가 나
고 몹시 근질거렸던 참이었다. 그는 그 비어당 제자를 따라 나왔다.
목욕을 다 하고 방으로 돌아오니 식탁 위에 갖가지 산해진미와 진귀한 술이 상다리가 부러
질 정도로 차려져 있었는데 상어지느러미며 제비둥지로 만든 고급요리도 있었다.
자리에 앉은 양과는 향기로운 술과 요리냄새를 맡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며 한잔 마시
고 싶은 생각이 났다. 하지만 옆에 놓인 젓가락을 보자 이건 무채접이 쓸 거라는 생각이 들
어 술잔을 내려놓았다.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해도 무채접이 오면 같이 음식을 들어 야겠다.'
술을 다시 한번 데웠는데도 무채접은 오지 않았다. 무채접이 들어오자 담담한 향기가 풍기
는 것이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던 양과는 그만 깜짝 놀랐다. 무채접이 정갈한 의복을 갈아
입고 아름다운 머리칼을 어깨에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물기가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고 있었
다. 그녀는 아마 방금 목욕을 하고 화장을 한 모양이었는데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무채접은 종래로 연지나 분같은 것을 바르지 않았는데 양과의 건강이 회복된 것을 보자 너
무 기쁜 김에 약간 화장을 했던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약간 부끄러움을 느끼던 참인데 양
과가 뚫어 질 듯이 바라보는 바람에 더욱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한채 나무라는듯이 말했
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나요? 처음 만난 사이도 아닌데."
"너무나 뜻밖이어서 그래."
"뜻밖이라니 뭐가요?"
"접아가 이처럼 아름다우리라고는 정말 몰랐어."
무채접은 눈을 흘기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아주 기뻤다. 그녀는 급히 시종들을 밖으로 내보
내고 나서 말했다.
"제가 어디가 아름답나요? 공자님 눈이 시지 않을 정도면 다행이지요."
"접아가 아름답지 않다면 이 세상에 미인이라곤 아마 한 사람도 없을걸."
"당신 동생 양효비가 입술에 발린 소리를 잘한다고들 말하지만 제가 보기엔 당신도 그보다
못하지 않군요. 상처가 낫자마자 그 입이 거짓말을 하는군요."
양과는 얼굴을 붉히더니 술잔을 들면서 말했다.
"이 양모가 접아의 커다란 은덕에 감동해 한 잔 들겠어."
양과가 술잔을 단번에 비웠다. 무채접도 술을 마셨다 그녀는 양과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며
미소를 지었다.
"양공자님 몸에 있는 극독이 제거된 기쁨을 위해서도 한 잔 건배하자구요."
두 사람이 동시에 잔을 비웠다. 양과가 다시 말했다.
"내 몸에 있는 독이 이미 제거되었으니 임잔 여방주님에게 사정하러 갈 필요가 없게 되었
어."
무채접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난 이 일 때문에 아주 걱정했어요. 방주님이 도와주겠다는 대답을 안하면 전……."
"어쩌려고 했나?"
"죽겠다고 위협할 생각이었어요.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요."
"접아, 임잔 정말 좋은 여자야. 난……."
"더 말씀하지 마세요. 전 다 알고 있어요. 그저 당신이 절 버리지 않기만 하면 저는 만족하
겠어요. 절대 다른 망녕된 생각을 품지 않겠어요."
양과는 그녀가 하는 말의 뜻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듯이 한
동안 침묵을 지켰다.
무채접이 젓가락으로 상어지느러미를 집어주면서 말했다.
"이 음식은 원기를 복돋워주는 거예요. 당신은 몸이 방금 회복되었으니 많이 드셔야 해요."
그런데 양과는 상어지느러미를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술단지를 들더니 미친듯이 마시기 시
작했다. 무채접이 급히 술단지를 빼앗으며 꾸짖었다.
"양공자님, 왜 이러세요? 술이 비록 혈기를 돕기는 하지만 많이 마시면 몸을 해치게 돼요."
양과는 쓴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접아, 임잔 내게 시집오지 못할 것이 뻔한데 이처럼 날 자상하게 대해주는구려. 난…… 난
어떡하면 좋단 말이오?'
갑자기 배가 칼로 에는듯이 아파왔다. 양과는 처음에는 참으려고 했으나 통증은 점점 더해
갔다. 그래서 끝내 "아" 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의자에서 떨어져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무채
접은 깜짝 놀라 급히 양과를 부축하면서 물었다.
"양공자님, 당신…… 이게 어찌 된일 이세요?"
양과는 안색이 창백해졌고 이마에는 콩알같은 땀이 뚝뚝 흘러 내렸으며 이빨을 부득부득 갈
았다.
"아니, 괜……찮아."
"괜찮다뇨? 독이 다시 발작하는 게 아닌가요?"
무채접의 말은 옳았다. 거와의 독은 양과의 체내에 잠복해 있으면서 경맥을 따라 흐르고 본
능적으로 양과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었다. 하지만 양과의 체내에 아직도 남아 있는 채설주
의 독과 거와의 독, 이 두 가지가 서로 상극이어서 서로 견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양과
의 몸에 채설주의 독이 남아 있지 않았더라면 벌써 거와의 독 때문에 죽고 말았을 것이다.
거와의 독과 채설주의 독이 서로 상대방을 완전히 누를 수 없었던 까닭에 양과는 일시 회복
된 듯했으나 폭주를 하는 바람에 이 두 가지의 독성이 다시 발작해 체내에서 마구 움직이게
되었던 것이다.
무채접은 양과를 침상에 안아다 눕혔다. 고통에 부대끼는 양과를 보고 무채접은 다급해졌다.
무채접은 양과를 앉힌 다음 자기도 양과의 몸 뒤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조용히 현공(玄功)
을 움직여 쌍장을 그의 등에 갖다 대고 자기의 공력으로 그가 독을 막아내는 것을 도와주려
했다.
하지만 둘 가지의 절독은 그 힘이 대단한 것이어서 무채접이 미처 양과의 경적에 진기를 밀
어넣기도 전에 독력의 충격으로 장이 그의 등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양과가 통증을
참으면 서 말했다.
"쓸데없는 일이야."
무채접은 급하다 못해 칠성이나 되는 진기를 모아서 쌍장으로 양과의 뒷잔등을 갑자기 들이
쳤지만 역시 독력의 충격을 받아 손바닥이 잔등에서 떨어져 나왔다. 무채접은 그 충격으로
피가 끓 어올라 하마터면 내상을 입을 뻔했다. 무채접은 실패를 받아들이지 않고 십성의 공
력을 모두 사용하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양과가 몸을 돌이키더니 왼팔로 무채접을 억세게 껴안으면서 알지 못할 말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무채접이 말했다.
"양공자님, 손을 놓으세요!"
하지만 양과는 왼팔로 더욱 억세게 껴안았다. 무채접은 아무리 발악해도 그 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두 가지의 극독은 무채접의 장력의 진동을 받아 합쳐져서 더욱 큰 힘으로 양과의 체내에서
좌충우돌 흘러다녔다.
양과는 마치 부글부글 끓고 있는 가마 속에 들어간 것처럼 온 몸이 뜨거워졌으며 정신이 어
지러운 가운데서도 자기 몸에 밀착되어 있는 따뜻하고도 부드러운 몸과 특이한 향기를 느꼈
다.
"용녀…… 용녀……."
그는 미친 듯이 무채접을 짓누르고 손으로 그녀의 의복을 찢기 시작했다.
"양공지님, 이러지 말아요…… 이러지 말라니까요."
무채접이 놀라서 이렇게 부르짖는데 양과는 계속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용녀…… 용녀…… 난 마치 임자를……."
무채접은 온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서 발악했다.
"난 소룡녀가 아니라 무채접이에요."
그녀는 당장 양과를 힘껏 떠밀어 버릴 생각이었으나 양과의 손이 자기의 살결을 어루만지기
시작하자 온몸이 나른해짐을 느껴 더는 발악할 수가 없었다.
한 바탕의 미친 듯한 정사가 끝나자 양과는 드디어 평온한 상태에 들어가 곤히 잠이 들었
다.
무채접은 양과의 곁에 까딱 않고 누워 있었으나 아무 생각도 없었다. 자기가 가장 바라던
것이 양과의 사람이 되는 것이었는데 정작 이렇게 되고 보니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무채접
은 손으로 자기의 부드러운 살결을 만져 보았다. 자기의 모든 살결은 양과가 다 만져 보았
고 그가 완전히 자기를 차지해 버린 것이었다.
무채접은 몸을 돌이켜 양과에게 바싹 다가붙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낭군님, 난 이젠 당신의 것이 되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방금 절 소룡녀로 알 뿐 근본적으로
접아 생각을 하지 않더군요.'
무채접의 눈꼬리로 눈물이 줄지어 흘러내려 벌거벗은 양과의 가슴팍을 적시고 있었다.
하지만 이 밤이 영원히 이 하룻밤이 일생처럼 길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드디어 수탉이 날이 밝았음을 알리자 양과도 꿈속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그는 부드
러운 몸이 자기 곁에 붙어 가볍게 흐느끼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용녀……."
양과는 자기 곁에 붙어 누워 있는 여인을 안고 보았더니 자기의 용녀가 아니라 무채접이었
다. 어젯밤에 확실히 용녀를 끌어안았는데 어째서…….
양과가 보게 된 것은 무채접의 가련한 눈물과 눈부시게 아름다운 몸매였다. 그는 급히 이불
로 무채접의 몸을 가려주며 놀란 듯이 물었다.
"접아…… 임자가 어떻게 이 곳에 있나? 용녀는 어디 갔어?"
무채접은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구슬같은 눈물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당신의 용녀는 멀리 천리 밖에 있어요."
"그렇다면 어젯밤에 우리 둘이……."
"어젯밤에 당신은 절 죽어라고 끌어안고는 입으로 '용녀'를 불렀어요……. 난 당신이 나를
용녀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어요."
양과가 자기의 귀쌈을 호되게 갈겼다.
"난…… 난 실로 어리석은 놈이야! 접아, 미안해!"
"당신이 내 몸을 망쳐놓고 미안하다고 말씀하나요?"
"난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난……."
양과는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였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무채접은 몸을 돌
려 양과를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낭군님, 난 조금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요. 어젯밤에 저는 당신을 떠밀어 버릴 수도 있었
지만…… 나 스스로 맘이 내켜서 그랬던 거예요."
"난……."
무채접이 섬섬옥수로 그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아무 말씀도 하지 마세요. 이 접아는 다 알고 있으니까요."
무채접은 한숨을 쉬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어젯밤의 그 일이 있기 전에 대하던 것처럼 절 대해 주면 돼요. 당신은 계속 저의 언니를
추구하세요. 저도 당신을 도와 언니를 설득할테니까요. 전 절대 당신에게 달라붙어 못살게
굴지는 않겠어요."
"접아, 내가 일시 어리석은 탓에 임자와 부부관계를 맺었지만 절대 당신을 버리지는 않을거
야."
무채접은 옷을 입고 나서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당신의 맘 속엔 소룡녀 한 사람뿐인 것을 난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은
제게 장가들겠다고 대답한 적이 있지요. 어젯밤이 바로 우리 두 사람 사이의 화촉동방의 밤
이라 할 수 있어요. 하룻밤의 부부노릇을 한 것만으로도 전…… 아무 유감도 없어요."
양과도 일어나 옷을 입으면서 대답했다
"접아, 난 그럴 수는……."
"여기에 무슨 가능하고 불가능한 일이 있겠어요? 천하의 부부들이란 마음이 맞으면 합치고
마음이 맞지 않으면 갈라서는 건데요."
무채접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말머리를 돌렸다.
"당신 체내의 두 가지 독은 지금 어때요?"
양과가 조용히 진기를 움직여 보았더니 아무런 장애도 없었다.
"거와의 독은 비록 극독이기는 하지만 채설주의 독만큼 오래 가지 못하는군. 얼음이 녹듯
녹아버린 것같아."
사실 어젯밤 양과는 정욕이 너무나도 성해 두 가지 독의 독력이 열로 변했는데 무채접과 동
침해서 그 열을 발산하는 바람에 해열이 된 것이었다. 거와 독의 독성이 열로 변해 몽땅 빠
져나가고 그 힘만 양과의 진기 속에 녹아들어 오히려 그가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양과가 나중에야 분명히 알게 되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어젯밤에 겪은 일이 쑥스럽게 느껴져서 침묵을 지켰다. 이때 문 밖에서 제자가
소식을 알렸다.
"큰 배가 이미 준비되었는데 사자님께선 언제 떠나시렵니까?"
무채접은 양과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공자님께서는 이미 독성이 제거되었으니 이 배로 돌아가시지요."
양과는 약간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임자가 시키는대로 하지. 난 아직 할 일이 있으니 그 일을 끝내고 꼭 임잘 찾아오겠어."
양과는 인골염주가 아직 자기 수중에 있으니 제 때에 가져가야 겠다고 생각했다. 무채접은
양과가 자기에게 무정하게 군다고 여겨 눈물을 머금고 대답했다.
"양공자님께서 좋을대로 하셔요."
"접아, 이곳에서 꼭 기다려줘. 내가 그때 와서 다 이야기하도록 할테니까."
양과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는 제 자를 따라 비어도의 부두로
나갔다.
물에 큰 배가 정박하고 있었는데 뱃머리에 기형적이고도 괴상하게 생긴 비어(飛魚)가 그려
져 있었다. 돛대 끝에 검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백골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
었다. 이 것이 바로 오독방의 깃발이었던 것이다.
양과가 배에 오르며 말했다.
"육지로 돌아가겠어."
배 위의 두목이 물었다.
"양대협님, 우린 신선도로 가기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안가겠어."
"그런데 어제 교화사자님께선 이 배로 신선도로 가라고 영을 내리셨는데요……."
"이 양모가 육지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지 않았나!"
이때 제자 한 사람이 손에 영기(令旗)를 들고 뛰어왔다.
"사자님의 명령입니다.!"
그는 배 위에 뛰어올라 두목과 몇마디 주고받더니 도로 기슭으로 뛰어내리는 것이었다. 그
두목이 웃으면서 양과에게 말했다.
"교화사자님께서 과연 명령을 고치셨습니다. 본선은 이제 육지로 가게 되었습니다. 바다에
풍랑이 세니 대협님께서는 선창에 들어가서 쉬시지요."
양과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한 제자를 따라 선창으로 들어갔다.
선창 밖에서 두목이 끊임없이 명령을 내리고 수부들이 대답하는 소리가 나더니 큰 배는 천
천히 부두를 떠나 대해로 나갔다.
양과는 선창에 잠깐 앓아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두목이 말했다.
"바다 바람이 세찬데 대협께서는 선창에 들어 가시지요."
"난 바다 풍경이 보고싶네."
그 두목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자기 일을 보러 갔다. 이때 붉은 해가 막 해면에서 솟아올
랐는데 모양이 계란처럼 길쭉해 보였고 노을 빛이 해면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가벼운 해풍
이 불어 폐부로 시원한 공기가 스며들어 기분이 상쾌했다.
큰 배는 곧장 해가 솟아오르는 방향으로 달렸다. 파도는 그다지 일지 않았으나 뱃전을 철썩
철썩 때리곤 했다. 양과는 부지불식간에 동해가에서 검술을 연마하던 일들이 생각났다. 바다
의 파도는 여전하건만 세상은 많이 변했다.
양과는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 두목을 찾아 큰 소리로 물었다.
"육지는 서쪽인데 이 배는 왜 동쪽으로 가는 거요?"
"배 위의 화물들을 근처에 있는 섬에 부려야 하므로 동쪽으로 가는 겁니다. 하지만 대협께
서는 시름을 놓으십시오. 해가 지긴 전에 제가 대협님을 꼭 육지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점심 때가 되어 모두들 식사할 때 양과가 또다시 물었다.
"왜 아직도 섬이 보이지 않는 거요?"
"곧 당도하게 됩니다. 양대협님,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임자가 궤계를 꾸몄다간 재미없을 줄 알게."
"제가 어찌 양대협님을 속이겠습니까? 더군다나 교화사자님의 영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양과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채접은 교화사자이며 또 여노악의 수양딸인데 비어당의
제자 놈들이 그녀의 영을 어길 수는 없는 일이라고 여겨져서 시름을 놓게 되었다.
하지만 해가 서산에 기울어질 때가 되었는데도 배가 섬에 당도 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양과는 또다시 의심이 나서 두목을 찾아갔다.
"앞에 있는 섬에 화물을 부린다 치더라도 오늘 안으로 육지에 가기는 틀렸어. 이건 왜 이런
거야?"
"양대협님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곧 당도하게 됩니다. 그 다음엔 우리 배는 해류를 따라가는
데다가 순풍까지 있게 되니 한 시진이면 육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 양모는 해변가에서 산 적이 있기에 바다의 해류를 이용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어. 하
지만 여기에서 육지로 가기는 너무 멀어서 한 시진 안으로는 절대 당도하지 못할 거야. 날
속이려 들지 말아."
"양대협님쩨서 믿지 않는다면 저도 방법이 없지요."
두목이 고개를 돌리며 그 자리를 뜨려고 하자 양과는 손으로 그의 뒷덜미를 틀어쥐면서 대
추혈을 누르며 호통쳤다.
"빨리 항로를 바꾸라고 명령해라!"
"양대협님께서 이처럼 강요하시면 저는 그 명을 따르기 어렵습니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양과가 대노하여 손에 힘을 주자 두목이 아픔을 참지 못해 소리쳤다.
"대협님, 손을 놓으십시오! 이건 저 혼자 결정한 일도 아닙니다."
"그래 이 배는 어디로 가느냐?"
"신선도로 갑니다……."
"교화사자가 육지로 가라고 분부했는데 왜 신선도로 가는가 말이야?"
"사실 교화사자께서 신선도로 가라고 영을 내렸습니다. 게다가 저더러 육지로 돌아간다고
당신을 속이라고 하셨지요."
양과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발을 굴렀다.
"접아, 임잔 왜 그런거야?"
양과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큰 소리로 명령했다.
"어서 뱃머리를 돌려라!"
"제가 명령을 내린다고 해도 수부들이 말을 듣지 않을 겹니다."
"무엇 때문에?"
"그건…… 그건……."
양과가 발로 걷어차며 소리쳤다.
"어서 말해!"
"그 사람을 놓아주세요!"
이때 선미(船尾)쪽에서 한 여인이 걸어오며 말했다. 다름아닌 교화사자 무채접이었다. 그녀
는 얼굴의 화장을 지워버렸으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다만 안색이 약간 창백해진 듯
싶었다.
양과는 얼떨떨해서 두목을 놓아주었다. 그 두목은 급히 무채접의 몸 뒤로 피했다.
"접아? 임자도 배에 있었구만 그래."
"그래요, 난 당신이 선창에 들어간 틈을 타 슬쩍 배에 올랐지요."
"배가 신선도로 가는 명령을 임자가 내렸나?"
"조금도 틀림이 없어요."
"접아, 임잔…… 왜 이러는 거야?"
무채접은 뱃전을 부여잡고 파도가 일렁이는 대해를 바라보며 석양을 가리켰다.
"낭군님, 이 석양이 얼마나 아름답나요?"
"접아, 날 어서 육지로 보내줘. 난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
"낭군님, 당신 보기엔 제가 아름답나요, 아니면 석양이 더 아름답나요?"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석양 노을에 물들고 눈에서 사람을 취하게 할 것만 같은 매혹적인 빛
이 넘쳐흘렀다. 아마 그녀의 얼굴보다 석양이 더 아름답다고 말할 사람은 있을 것같지 않았
다.
"임잔 날 어떡할 셈이야?"
"한 시진만 더 있으면 신선도에 도착하게 돼요. 신선도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신선처럼 유
쾌하게 살아가고 있어요."
무채접이 웃는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낭군님, 당신은 신선보다 더 즐겁게 될 수 있을 거예요."
양과가 대답을 않자 무채접이 깔깔 웃어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언니와 부부간이 되어 다시 합칠 수 있기를 바라지 않나요? 신선도에서 언니를 기
다리면 돼요. 하지만 아마 아주 실망하게 될 거예요."
"그건 무슨 말이야?"
무채접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언니가 기억을 회복했다고 하더라도 당신에게 희망적인 말을 하지 않을 거예요. 그건 언니
가 이미……."
"그녀가 어쨌단 말이야?"
"난 말하지 않겠어요. 아무 것도 말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언니가 직접 당신에게 말해주기를
바라요. 내가 말한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믿지 않을 거예요. 내가 사심을 품고 당신들 부부간
을 갈라놓으려 하는 줄로 여길테니까요."
"접아, 우리 세 사람의 일은 차후에 다시 말하기로 하고 우선 나를 돌려보내줘. 난…… 난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
양과는 이렇게 말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만일 8월 15일 새벽에 인골염주를 전세교주에게 넘겨주지 않는다면 서역신교와 중원의 무
림은 처절한 살육전을 벌이게 될 것이다.'
무채접은 이젠 석양을 구경하지 않고 마치 아주 괴상한 물건을 구경하기나 하는 듯이 양과
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낭군님, 당신은 과연 대장부이고 대영웅이에요. 무슨 일을 하든지 맺고 끊고 하는 멋이 있
거든요. 그래서…… 난 당신을 좋아하는 것이고 여인의 가장 고귀한 정조까지 당신께 바친
거예요."
"임자가 정말 날 좋아하거든 뱃머리를 돌리도록 명령해."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쩔 셈인가요?"
"내가 임자의 부하에게 강제로 명령을 내리겠어."
무채접은 깔깔 웃다가 말했다.
"존경하는 양대협님, 이 배는 오독방 비어당의 주선(主船)인 비어선이라는걸 알아야 해요.
배 위의 제자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라 내 명령 없이는 절대 뱃머리를
돌리지 않을 거예요."
양과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고물 쪽으로 달려가서 키를 잡은 제자를 틀어쥐고 호통
을 쳤다.
"키를 돌려라! 듣지 않으면 죽여버릴테다!"
"교화사자님의 영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 제자는 양과를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것이었다. 양과가 그의 어깨를 틀어쥐고 다섯 손가
락에 힘을 주니 견갑골이 부서지는 소리가 뿌지직뿌지직하고 났다. 그 제자는 아픔을 참아
가며 소리 쳤다.
"당신 명령대로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오!"
그는 이렇게 말하더니 앞에 있는 말뚝에 머리를 처박는 것이었다. 그 제자는 머리가 으깨어
져 뇌수가 흘러나와 당장 죽어버렸다.
즉시 다른 한 명의 제자가 올라와서 키를 잡는데 곁에 있는 시체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양과는 깜짝 놀랐다 그저 혼 좀 내줄 생각이었는데 스스로 자살까지 할 줄은 정말 뜻밖이었
다. 양과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무채접은 명령을 내려 시체를
바다에 던져버리게 한 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양대협님, 참으로 재간이 대단하군요."
"난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어."
"당신이 비어당의 수부들을 몽땅 죽인다고 하더라도 이 비어선을 당신이 가자는 방향으로
몰 수 없을 거예요. 다만……."
"그럼 무슨 방법을 써야 하나?"
"당신이 날 굴복시켜 내가 당신 말씀을 듣게 하는 수밖에는 없어요."
무채접은 두 손으로 뒷짐을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난 마냥 당신을 신선도로 데려가려 하고 당신은 육지로 돌아 갈 생각을 하고 있잖아요. 그
러니 당신이 갖은 수단을 다 써서 날 못살게 굴어 내가 견뎌내지 못하게 해서 방향을 바꾸
게 해야 하지요."
그녀는 양과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난 절대 반격을 하지 않을거고 도와달라고 수부들도 부르지 안겠어요."
"임잔 내가 임자에게 절대로 손을 대지 않으리라는걸 뻔히 알고 있지 않은가?"
"당신은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사내 대장부가 대사를 이루려면 일개 아녀자쯤
죽여 버리는게 뭐가 대단한 일인 가요?"
"임자가 내게 베풀어준 은혜가 태산같은 사람이 아니고 전혀 생소한 사이라고 하더라도 난
임자에게 폭력은 쓰고 싶지 않아."
무채접은 손뼉을 몇 번 치더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좋아요. 그럼 당신은 날 따라 신선도로 가는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후회해선 안돼요."
양과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석양이 서쪽 수평선 아래로 넘어가고 있었다.
"접아, 제발 허튼 짓은 하지 말아줘!"
"저는 당신을 신선도로 끌고 가서 다시는 내놓지 않을 거예요. 만일 후회된다면 지금도 늦
지는 않았어요. 그렇지 않고 일단 신선도로 들어가서 방주님에게 잡히게 되는 날이면 당신
이 새가 된 다고 해도 달아나지 못해요!"
"임…… 임잔 왜 이처럼 지독한가?"
"지독한게 아니라 내 멋대로 하기 좋아하기 때문이죠. 전 줄곧 내 멋대로 살아왔어요. 방주
님인 의부님까지도 제게는 손발 다 들었지요. 당신은 똑똑히 생각해야 해요!"
양과는 손으로 무채접의 팔을 틀어쥐고 사나운 기세로 말했다.
"당신이 무정하니 내가 틀렸다고 나무라지 말아!"
제26장 남해신니
무채접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말했다.
"좋아요. 날 한 대 쳐도 좋고 뭇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줘도 좋아요……. 사내들이 여자를 모
욕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테니 마음대로 해보세요. 제가 혹시 수치감을 못 이겨 뱃머리
를 돌리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요."
양과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그가 왼쪽 손을 치켜들었음에도 무채접은 고개를 번쩍 쳐들
고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양과는 온 몸을 부르르 떨며 장을 내치면서 "아" 하고 외쳤
다.
그러나 그 장은 무채접을 때린 것이 아니고 뱃전을 친 것이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사
발만큼 굵은 나무가 부러져 나갔다. 그것을 본 무채접은 속으로 몹시 놀랐다.
'저 장에 맞았더라면 아마 틀림없이 죽었을거야.'
양과는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했다.
"이 양모는 신선도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도망칠 것이다. 만일 성공하지 못하면 죽
음으로써 천하에 사의를 표할테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선 선창 속으로 들어갔다.
무채접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뒤따라 선창 안으로 들어왔다.
"낭군님, 이 접아가 분명 사람을 잘못 본 것이 아니군요. 당신은 정말 정도 있고 의리도 있
는 분이에요."
"이 양모는 앞으로 불의한 사람이 되고 말거요."
"낭군께서 절 이처럼 너그럽게 대해주시는데 제가 어찌 당신을 해칠 수 있나요?"
그리고 나서 무채접은 뱃머리를 돌리라고 명령했다.
"접아, 임자는……."
양과가 무채접의 뜻밖의 행동에 놀라 이렇게 말하자 무채접이 그의 품에 뛰어들면서 눈물을
비오듯 흘렸다.
"낭군님, 이번에 헤어지게 되면, 당신은 앞으로 저와 다시는 안 만나려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전 원래 당신을 신선도에 붙잡아두려고 했으나, 그것은 몸뚱아리만 잡아두는 것이
고, 마음은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난…… 난 어떡하면 좋아요?"
바로 그때 두목이 뛰어들어왔다.
"이 놈아, 왜 무례하게 구느냐?"
무채접이 나무라자 두목은 대경실색한 표정으로 예도 갖추지 못한 채 급히 말했다.
"큰일났어요. 그…… 그들이 쳐들어왔어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냐?"
"나가 보시면 알게 됩니다."
두목은 그러면서 이마의 식은땀을 훔쳤다. 무채접은 선창에서 나와 뱃머리로 갔다. 수부들은
모두 자기 위치를 지키고 있었지만, 그 얼굴에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두목이 남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자님, 보십시오. 그…… 그것들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요."
무채접이 얼핏 남쪽을 바라보자 거기에는 비어 선보다 큰 배 한 척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배는 뱃머리에 철판을 씌운 듯 빛이 났고 돛대 위에는 푸른색 삼각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 깃발 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양과도 뱃머리로 다가와서 물었다.
"저건 누구의 배요?"
"낭군님, 당신은 남해신니를 만나볼 생각이 없으세요? 이제 곧 만나게 될 거예요."
"저 배가 남해신니의 것인가?"
무채접이 고개를 끄덕이며 큰 소리로 명령했다.
"모든 돛을 올리고 북쪽을 창해 전속 항진하라!"
두목이 그 명령을 복창하자 비어선은 세 폭의 돛을 모두 올리고 뱃머리를 북쪽으로 돌렸다.
해류와 순풍의 도움으로 비어선의 속도는 급격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뒤에 있는
큰 배도 속도를 올려 갈수록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접아, 무엇 때문에 남해신니를 두려워하는 거지?"
"본방은 그 여인과 은원이 아주 깊어요. 잘못 되는 날이면 우린 모두 고기밥이 되고 말 거
예요."
양과는 무채접이 전에 한 말이 떠올랐다. 여노악이 남해신니에게서 집법사자를 빼앗아 갔다
는 말이다. 만일 그 이유가 아니라면 또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수부들이 기를 쓰고 노를 저었지만 남해신니의 큰 배는 재빨리 뒤쫓아왔다. 그 배에는 가벼
운 차림을 한 많은 여인들이 타고 있었다.
'어째서 모두 여자들만 타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어떻게 또 사내들이 모는 비어 선보다 빠
를 수 있을까?'
양과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 배에서 늙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어선 선장은 듣거라. 즉시 배를 세우지 않으면 너희들은 모두 고기밥이 되고 말 것이다.
빨리 배를 세워라."
두 배 사이의 거리가 아직 오십여 장이나 되었지만 그 목소리는 아주 똑똑하게 들렸다. 고
함을 치는 것도 아닌데 그 목소리가 아주 맑게 들리는 것에 양과는 깜짝 놀랐다.
'저 사람은 공력이 대단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곳까지 목소리가 이렇게 분명히 들려올
수 없다. 아마 황약사, 주백통 같은 절정고수들만이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큰 배 위에서 몇명의 여인들이 시커멓고 커다란 물건을 둘러싸고 바삐 돌리고 있었다.
"접아, 저 여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거지?"
그것을 본 무채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때 두 배 사이의 거리는 스무 장도 못되었다.
무채접이 외쳤다.
"키를 돌려라. 키를 돌려!"
뒤따라오는 배에서 푸른 연기가 솟구치더니 곧이어 천지를 진동시키는 폭발음이 들려왔다.
무채접은 양과의 손을 끌며 외쳤다.
"엎드리세요."
양과는 영문도 모르고 무채접이 시키는대로 갑판 위에 엎드렸다.
엎드리자마자 머리 위에 조약돌 같은 것들이 "씽" 하고 무더기로 지나갔다. 그것들이 날아
가는 속도는 화살보다 더 빠른 것 같았다. 선체에 돌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고 또 돌에 맞
아 죽어 가는 수부들의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큰 배로부터 웃음소리와 함에 또 그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추지 않으면 비어선을 격침시키겠다."
양과와 무채접이 몸을 일으켜 바라보니 눈 앞은 온통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뱃전이 여러
곳 파괴되고 돛대 하나가 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십여 명의 수부들이 죽거나 다쳐 선혈을
콸콸 쏟 으며 비명을 지르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무슨 물건이 이처럼 무섭단 말인가?"
양과가 묻자 무채접은 큰 배 위의 그 시커먼 물건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저들에게는 철포(鐵砲)가 있어요."
"어떻게 남해신니가 철포까지 가지고 있단 말인가?"
양과는 철포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그것은 전쟁무기로 그 위력이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철포를 쏘면 아무리 튼튼한 성도 부술 수 있고 한 번에 수백명씩 죽
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양과도 소문만 들었지 실물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바로
지금 그 물건을 보자 그 위력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그 귀한 철포를 남해신니가 어떻게 구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저 물건만 가지고도 충분히 본
방을 위협할 수 있죠."
무채접이 한숨을 쉬며 그렇게 말했다.
십여 명의 수부가 살상당하자 비어선의 속도는 떨어져 급기야 큰 배와 나란히 달리게 되었
다. 이제 그 큰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그 배의 높은 단 위에 한 늙
은 비구니 가 승포자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앉아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합장하고 맑은 목
소리로 말했다.
"배를 멈추지 않으면 당장 비어선을 두동강낼 것이다."
그 배의 뱃머리에 씌운 철판은 적선을 들이받아 침몰시키기 위한 용도임이 틀림없었다.
무채접은 남해신니가 말한대로 행하는 성격인 줄 알고 있었기에 급히 닻을 내리라고 명령했
다. 무채접은 남해신니에게 읍을 하며 물었다.
"본방은 예로부터 귀하를 공경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리 함부로 대하시는 것입니까?"
"조그만 계집애가 무슨 참견이냐? 차후 신선도를 점령하면 여노악과 셈을 치를 것이다. 너
희들은 무기를 버리고 한 사람씩 이쪽으로 건너오도록 해라."
그러자 몇몇의 여인들이 두 배 사이에 구름다리를 놓았다.
두목이 무채접을 보고 물었다.
"사자님, 결사항전합시다."
"어떻게?"
"우리가 건너가기만 하면 그까짓 아녀자들을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나도 여잔데, 그래 네가 날 이길 수 있느냐?"
"제가 어찌 감히……."
"결사항전을 하려 해도 상대와 봐가며 해야 하는 거야. 이 좁은 구름다리로는 한 사람씩밖
에 건너가지 못하잖아? 저 여자들이 사람이 건너가는 족족 붙잡으면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이
냐?"
"그럼…… 우리는 정말 남해신니의 포로가 된다는 말씀입니까?"
"이 망망대해에서 도망갈 곳도 없고 또 건너가지 않는다면 이 배와 함께 고기밥이 되고 말
거야."
"제 생각에는……."
"건너가서 보잔 말이다. 일부러 목숨을 버릴 것까지는 없다."
"그럴 수밖에 없겠군요."
두목은 제자들에게 무기를 버리고 한 사람씩 남해신니의 배로 건너가라는 무채접의 명령을
전달했다. 과연 무채접이 예상했던 대로 비어선의 수부들은 건너가는 족족 그 배의 여인들
에게 결박 당했다.
양과가 귓속말로 물었다.
"접아, 정말 알 수 없군."
"뭐가요?"
"내가 뱃머리를 돌리라고 위협할 때 수부들은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더니, 어떻게 이렇게 쉽
게 남해신니의 포로가 될 수 있는 거지?"
"그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비록 남해신니에게 시끄러운 일을 많이 당하지만 방주님은
제자들에게 그 여인의 옷끝도 건드려서는 안된다고 엄명을 내리셨죠. 그래서 저 여인이 본
방의 영역 내에서도 제멋대로 구는 것이죠. 요 몇년간 저 여인에게 붙잡힌 본방의 제자가
도대체 몇명이나 되는지 모른다구요. 도망쳐온 사람들에게도 방주님은 묻지 않았죠."
비어당의 제자들이 모두 건너가자 무채접이 말했다.
"낭군님, 우리도 건너가죠."
무채접이 앞장서자 양과도 그 뒤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배에 오르자 몇몇의 여인들
이 무채접을 결박하기 시작했다. 남해 신니가 말했다.
"이 계집애는 교화사자이니 보통 밧줄 말고 소 힘줄로 꼰 밧줄로 묶어라."
포박을 담당하는 여인들은 양과를 잘 모르는 데다가 외팔이인 것을 보자 대충 묶었다.
남해신니는 비어선 안에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는지 수색하게 한 다음 식량, 음료수 등 쓸만
한 물건들을 옮겨싣게 했다.
여인들이 큰 배로 다 돌아오자 그 배는 닻을 올리고 십여 장 밖으로 물러섰다가 전속항진해
서 비어선을 떠받았다. "꽝"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비어선은 두동강난채 천천히 바다 밑
으로 가라앉았다. 비어선과 동고동락을 해온 수많은 비어당의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통
곡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남해신니는 득의양양해서 미친듯이 웃어댔다 큰 배는 뱃머리를 돌려 동남쪽으로 달리기 시
작했다. 남해신니는 무채접을 앞으로 끌어오게 한 다음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물었다.
"얘야, 놀랐지?"
그 목소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방금 전 양측이 대적하고 있을 때의 그 살벌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무채 접은 의아해 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난 오독방의 교화사자이지 계집애가 아녜요."
"그래, 그래. 넌 계집애가 아니고 어른이지."
남해신니가 웃으면서 말하는 품은 여전히 어린 계집애를 대하는 태도였다.
"너 같은 아녀자가 하필 여노악 같은 그 늙은 두상을 따라다니며 사방에서 악행을 할 필요
가 뭐가 있느냐? 차라리 날 따르려무나."
"의부님의 은혜가 하늘같은데 내가 어찌 방주님을 배반한단 말예요? 그런 얘기는 다시 꺼내
지도 마세요. 죽이고 싶으면 죽이고 가마에 넣고 삶으려면 삶아요. 본 사자는 눈썹 하나 까
딱하지 않을 거예요."
남해신니는 갈수록 무채접이 귀엽게 느껴져 옆에 있던 한 중년부인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
다.
"저 계집애는 참 드세군."
"저런 처녀를 데려다 가르쳐야 사태님에게 충성할 수 있죠."
남해신니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무채접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떠냐? 날 따르는게 좋을 것이다. 내가 사는 악귀도(惡鬼島)는 태반이 여자고 살기도 편하
지."
"당신이 아무리 유혹한다고 해도 난 의부님을 배신하지 않을 거예요."
그 말에 남해신니는 화가 났다.
"의부라구? 무엇 때문에 여노악 같은 놈팽이를 의부로 여기는 게냐? 저 년을 끌어내라!"
큰 배는 한 시진쯤 달려 한 섬 가까이에 이르렀다. 그 섬은 기암괴석 투성이에 온통 검은
색만 보이는 불모지대였다.
양과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악귀도라는 이름이 딱 어울리는구나. 악귀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곳에 살 수 있단 말
인가?"
그런데 양과가 혼자 중얼거린 이 말을 높은 단상에 앉아 있던 남해신니가 듣게 되었다. 그
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내가 이 섬에 살게 된 것은 모두 너희들의 방주 덕분이지."
아마 남해신니는 양과를 오독방의 제자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큰 배가 항구에 들어서자 남해신니는 몇명의 중년부인을 대동하고 무채접을 끌고 먼저 부두
에 내렸다. 양과는 비어당의 제자들과 함께 깊은 산굴 속에 감금당했다. 그들은 모두 긴 밧
줄에 굴비 엮이듯이 한쪽 발목을 묶였다.
이윽고 건장한 체격의 여인들이 큰 광주리에 반쯤 익은 썩은 물고기를 담아와서 각 사람의
입에 한 마리씩 억지로 밀어넣었다. 모두 그 물고기를 토해버리고는 욕설을 퍼부었다.
양과는 해독이 된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아 아직 몸이 허약했다. 비록 썩은 고기라도 체력
을 보강하기 위해서는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양과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 물고기를 억지로 삼
켰다.
날이 금방 어두워지자 수부들은 남해신니가 자기들을 앞으로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모두들
불안해 했다. 바다에서 하루종일 힘든 일을 했던 수부들은 자시(子時)가 되기 전에 잠에 곯
아떨어졌다.
양과는 눈을 감고 정신집중을 한 다음 모두들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내공을 이용해서 밧줄
을 끊어버렸다. 그가 발목을 묶은 밧줄을 힘껏 비틀자 그 밧줄도 끊어져 나갔다. 양과는 몸
을 일으켜 슬그머니 동굴 밖으로 나갔다. 양과는 품 속에 인골염주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
고 안심했다. 삼십여 보를 걸어나가도 파수를 보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그들은 비어당 제자
들이 모두 포박되어 있으므로 도망갈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양과는 옛날 소룡
녀와 햇빛이 들지 않는 고묘에서 살았기에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잘 식별할 수 있었다. 그
래서 그는 재빨리 동굴 입구로 더듬어나갔다. 동굴 밖에서 두 여인의 그림자가 언뜻 비쳤다.
양과는 바위 뒤에 숨어 돌을 하나 집어 동굴 속 깊은 곳을 향해 던졌다.
소리가 나자 두 여인은 검을 뽑아들었다.
"누구냐?"
그 두 여인은 수색하기 위해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들이 지나가자 양과는 재빨리 동굴
밖으로 나와 몇 장 날았다.
하늘에는 뭇별들이 반짝이고 있었지만 섬은 온통 캄캄했다. 자시가 넘었기에 섬에는 한 점
의 등불도 없었다. 양과는 길을 몰랐기에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자 야경을 서는 여인 한 사
람을 붙잡 아 무채접이 잡혀 있는 곳을 알아냈다. 양과는 그 여인의 혈도를 눌러놓고 돌더
미에 던져 버린 다음 산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무채접이 갇혀 있는 동굴에 이르자 갑자기 먼 곳에서 두 여인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양
과는 한쪽 편에 숨어서 그 두 여인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녀들은 걸어오면서 재
잘거리고 있었다.
"그 년이 아주 악랄하지만 태사님께서는 잘 처리하실 수 있을 거야."
"그 년은 여노악의 수양딸이니 귀순하지 않을 것은 뻔하지. 아마 사태 님께서 벌을 내리실
거야."
"사태님이 내리는 벌은 천하에 견뎌낼 자가 없어."
"사흘이 지나지 않아 그 년은 반드시 사태님에게 귀순할 거야. 난 내기를 걸 수도 있어."
두 여인은 이렇게 재잘거리면서 양과의 앞을 지나갔다.
'무채접이 남해신니에게 끌려갔단 말인가?'
양과는 그 두 여인의 뒤를 살그머니 밟다가 삼보 거리쯤 되자 기침소리를 냈다.
두 여인이 고개를 막 돌리려고 할때 양과는 번개같이 그녀들의 혈도를 찔렀다. 양과는 둘
중에 나이가 좀 많은 여인은 한쪽으로 집어던지고 좀 젊은 여인을 조용한 곳으로 끌고 갔
다.
"소리내면 죽여버릴테다."
양과가 이렇게 말하자 그 여인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양과가 그녀의 아혈을
풀어주며 물었다.
"무채접은 지금 어디 있느냐?"
"우…… 우리…… 사태님 방에 갇혀 있어요."
"사태는 어디 있나?"
"이 산꼭대기에 있는 동굴에 있어요."
"그곳엔 또 누가 있느냐? 보초가 있겠지?"
"그곳엔 사태님 혼자 계세요. 길엔 보초가 칠중으로 깔려 있어요. 당신은 아마 그 감시선을
뚫지 못할 거예요."
"그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몇 가지인지 아느냐?"
그 여인은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이 길밖에 없어요. 나머지 삼면은 모두 절벽이라 원숭이라도 기어오르
지 못해요."
"그럼 나도 오를 수 없단 말이냐?"
양과가 웃으면서 물었다. 그 여인은 섬에서만 살다보니 남자를 거의 본 일이 없었기에 양과
가 웃는 얼굴을 보이자 그녀는 도리어 겁을 내며 고개를 숙였다.
"전…… 전 몰라요."
양과는 다시 그녀의 아혈을 찌른 다음 나이많은 여인 곁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양과가
그 여인의 옷을 벗기자 옴짝달싹 할 수 없게 된 그 여인은 놀라서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녀는 양 과가 자기를 겁탈하려고 하는 줄로만 알았다. 양과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왜 날 그렇게 보는거냐?"
그 여인은 양과가 정말 흑심을 품고 있는 줄 알고 놀라서 가슴이 콩콩 뛰었다. 그녀는 이렇
게 가까이서 사내를 접해 본 적이 없었지만 정조를 잃는다는 것이 여자로서 큰 한이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또 은근히 한 번 이 사내에게 그런 일을 당해 보고 싶은 생각
도 들어 갑자기 온몸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이었다.
양과는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을 보고 그녀의 마음을 알아챘다. 자기도 모르게 욕
정이 솟은 양과는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춘 후 귓속말을 했다.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
그리고 나서 양과는 여자 옷으로 갈아입고 분이며 연지같은 것을 들춰낸 다음 얼굴에 찍어
발라 추한 여자로 변장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알만 해?"
양과가 웃으면서 말하자 그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양과는 그녀의 아혈을 풀어준 후 물었
다.
"임자 이름이 뭔가?"
"해고(海姑)라고 불러요."
"내가 보기엔 임자는 열대여섯 살밖에 안되어 보이는데 남의 고모 노릇 하자니 너무 이른
것 아닌가?"
"이름이 그런 걸 어떻게 해요."
"내가 시키는대로 하겠나?"
해고는 양과가 무엇을 시킬 줄 몰라 멍청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자, 그럼 그냥 해고라고 부를까? 아니 해소저라고 부르지."
"제 성은 해씨도 아닌데 어떻게 해소저라고 부르나요? 전…… 전 해고라고 불러요."
그 처녀의 고집도 어지간히 센 편이었다. 양과가 웃으며 말했다.
"해고, 지금 내가 임잘 데리고 사태가 있는 동굴로 가려고 하는데, 어때?"
"안돼요. 안돼요."
"왜 안된다는 거야?"
"만일 사태님께서 제가 당신을 사태님이 계시는 악귀동(惡鬼洞)으로 데리고 들어간 일을 알
게 되면…… 그 분은 제게 벌을 내리실 거예요."
양과는 그 말을 듣자 오히려 기뻤다. 만일 해고가 그를 데리고 악귀동으로 들어갈 수 없다
면 "방법이 없어요"라고 말해야 하는 데, "안돼요"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분명히
데리고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었다.
"임잔 날 꼭 데리고 가야 해. 내가 여자로 변장한 데다가 말도 안하면 보초들은 알아보지
못할게 아닌가?"
"저…… 저도 보초들을 통과할 수 없어요. 당신은 제 언니를 데리고 가면 안되나요?"
그녀는 나이많은 여인을 가리켰다. 양과는 그 말을 듣고 머리를 굴렸다.
'언니라는 자는 나이가 많으니 아마 잔꾀도 많을 것이다. 만일 기를 쓰고 소리라도 지른다
면 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다.'
양과는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위협했다.
"말을 안 들으면 죽일테다. 그것도 먼저 강간하고 나서 죽이겠단 말야!"
양과가 험악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정말 먼저 강간하고 죽일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 해고
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양과는 혈도를 풀어주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
"그래야 예쁜 처녀지."
그렇게 해서 해고가 앞장서고 양과가 뒤를 따르며 산꼭대기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첫번째
보초선을 통과할 때 길목을 지키던 여인이 소리쳤다.
"누구냐?"
해고가 비명을 지르거나 목소리가 달라져 상대방에게 들킬까 봐 양과는 손에 식은땀을 쥐었
다. 다행히 해고는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전 해고예요."
"엉? 넌 방금 산꼭대기에서 내려오더니 어째서 또 올라가는거냐?"
"사태님 심부름을 하는 중예요."
"뒤에 따라오는 사람은 네 언니냐?"
"언니는 먼저 잠자러 갔어요. 이 사람은 사태님께서 무채접을 벌 주려고 부른 사람예요."
관문을 지키던 여자가 돌문을 열어주자 해고와 양과는 급히 그 곳을 지나갔다. 관문에서 멀
어지자 양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똑똑한 처녀로군."
계속 이렇게 속이면서 두 사람은 순조롭게 일곱 개의 관문을 통과했다.
앞에 두 장 너비는 될 만한 커다란 동굴입구가 보였다. 그것은 거대한 석문으로 닫혀 있었
는데 안에서 불빛이 은은히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해고가 말했다.
"무채접은 이 안에 있어요."
양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의 혈도를 누르려 했다. 그때 해고가 갑자기 석문을 가리키
며 소리쳤다.
"사태님께서 나오시는군요!"
양과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해고는 벌써 이십여 보나 도망갔다. 양과가 추격하려 하자 해고가 두 손을 흔들며 말했다.
"당신이 쫓아오면 전 소리치겠어요."
양과는 발을 멈추고 말했다.
"넌 왜 도망가는 거냐? 어서 이리 와."
"전 당신이 혈도를 찌르려는 것을 알아요. 그것은 정말 견디기 어려워요."
"안그럴게."
양과가 이렇게 말하며 다가가자 해고가 고함을 칠 듯이 위협하는 바람에 다시 발걸음을 멈
추지 않을 수 없었다.
"소리치기만 해봐라. 당장 죽여 버릴테다."
"안그럴게요."
"그럼 이리 와."
"들어가 보세요. 전 당신 일을 망치지 않을 거예요. 그럴 생각이 있었으면 벌써 소리를 질렀
지요."
양과는 잠시 생각해보고 다시 말했다.
"그럼 소리 지르지 않겠다고 맹세해."
"그건 쉽죠. 이 해고가 소리를 지르거나 사람을 불러와 당신을 붙잡게 한다면 벼락을 맞을
거예요. 배를 타면 배가 가라앉고, 길을 걸으면 길이 꺼질 것이고 물을 마시면 배탈이나 죽
을 거예 요…… 이러면 되겠어요?"
양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저 애가 맹세를 이처럼 쉽게 하는게 의심스럽구나. 그러나 바닷가 사람들은 배가 가라앉는
다는 말을 가장 꺼리는 법인데 아마도 해고는 진짜로 맹세한 것같아.'
양과가 말했다.
"넌 돌아다니지 말고 좀 숨어 있어라."
"제가 당신을 이곳에 데려온 이상 이젠 악귀도의 죄인이 되었으니, 감히 돌아다닐 수도 없
고 다른 사람과 만나서는 더욱 안되지요. 휴, 아마 저는 당신과 무소저를 따라 도망갈 수밖
에 없을 거예요. 사태님께서는 절 결코 용서하지 않으실테니까요."
그 말을 듣자 양과는 해고가 무척 불쌍해졌다.
'내가 접아를 구해내면 다른 여인들이 분명 해고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양과는 이렇게 생각하고 난 다음 좋은 말로 해고를 달랬다.
"넌 날 많이 도와주었으니, 이 양모는 절대로 널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 기다려
라."
"아, 당신은 양씨였군요."
"내 이름은 양과이고, 자는 개지(改之)다."
"그러면 강호인들이 신조협이라고 부르는 그 양과이신가요?"
"바로 그렇다."
"전 당신이 오독방의 제자인 줄 알았는데, 신조협이셨군요."
해고가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양과는 웃으면서 석문을 밀고 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은 넓게 긴 복도가 나 있었는데 벽에는 이십여 보마다 초롱불이 하나씩 걸려 있어서
아주 밝았다. 양과가 백여보 쯤 걸어가자 그 복도는 두 갈래로 나눠졌다. 왼쪽 복도는 위쪽
으로 향했고 오른쪽으로 난 복도는 아래쪽으로 향했는데 모두 계단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
데 왼쪽 복도에는 초롱불이 없었기에 양과는 오른쪽 복도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
다.
돌계단은 완만하게 오른쪽으로 굽어 들면서 환형(環形)을 이루었는데 몇 바퀴를 돌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이윽고 동굴 바닥에 이르렀다. 앞에 등불이 밝게 켜진 네모난 대청이 있었
는데 거기에는 돌탁자, 돌의자 등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돌로 만든
것이었다.
네 벽에는 각각 석문이 두개씩 나 있어 팔괘(八掛)의 방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분
명 일종의 진법(陣法)같아 보였다. 양과는 황약사에게 기문술수(奇門術數)를 배웠기에 경거
망동하지 않았다.
곤문(坤門)안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오자 양과는 다가가서 귀를 대고 자세히 들었다. 그
안에서는 무채접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하나의 늙은 목소리는 틀림없이 남해신니의
목소리 였다.
남해신니가 말했다.
"무소저, 그 여노악이라는 자는 심사가 바르지 않아. 듣자니 그 자가 중원을 독식하려고 한
다는데, 절대 뜻대로 되지 않을 거야. 무소저가 그 자를 따라서 무슨 이익이 있겠어?"
"사태님께서는 더 이상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죽이시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세요. 하지만 이
무채접이 의부를 배신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마세요."
남해신니는 아주 화가 나서 콧방귀를 뀌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그렇게 입이 닳도록 얘기했는데도 계속 고집을 피운단 말이냐? 네가 크게 악한 일을
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벌써 한 장에 죽였을 것이다."
"의부님께서 당신과 싸우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시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순순히 투항했겠
어 요?…… 당신은 방주님 은혜에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매사에 본방과 맞서니 어찌 예를
안다 하 겠나?"
"됐다. 됐어! 즉시 네게 형벌을 가할테다. 얼마나 견디나 어디 두고 보자."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하겠어요?"
"난 사람을 때리지는 않아. 내가 늘 쓰는 형벌로 네 년을 굴복시키겠다."
"도대체 어떻게 할 셈예요?"
"난 네 년을 매달아놓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할 거다. 네 년이 피곤해 잠들려 하면 사람을
시켜 결코 잠을 못자게 할 것이다."
"그게 무슨 대단한 형벌인가요? 난 두렵지 않아요."
무채접은 정말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밖에서 이 말을 들은 양과는 움찔 놀랐다. 그는
전에 그런 형벌을 당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견딜 만하지만 사흘이 못가서 아무리
건장한 사내라도 견디지 못하는데, 접아 같은 연약한 여인이야 더 말 할 나위도 없는 것이
었다.
"너 같은 계집애는 사흘이면 굴복시킬 수 있어. 혹시 네가 닷 새를 견딘다면 내가 풀어주
마."
"그거 쉬운 일이죠. 기다리기 답답하니 얼른 시작해요."
"좋아, 오늘 밤은 내가 직접 지킬테다."
"고마워요."
양과는 속으로 생각했다.
'남해신니가 자리를 뜨지 않으면 접아를 구할 기회가 없다. 만일 내일 아침에 포로숫자가
하나 적어진 것을 알게 되면 즉시 남해신니에게 보고돼 온 섬이 발칵 뒤집히게 될 것이다.
난 길도 잘 모르고 도망칠 곳도 없으니 분명 들키고 말 것이다.'
양과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돌계단을 밟는 소리에 양과는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숨을 곳이라곤 없었다. 양
과는 급히 감문(坎門)을 열고 들어가서 석문을 가볍게 닫고 문틈으로 동정을 살폈다.
돌계단으로 이십여 명의 여인들이 모두 손에 검을 들고 내려왔는데 앞장선 여인은 바로 양
과의 길잡이 노릇을 했던 해고였다. 양과는 깜짝 놀라 해고가 맹세를 어긴 것이라고 생각했
다.
"여러 언니들은 팔괘의 각 문을 지키면서 조심하세요. 양과는 신조협이라고 불리니 반드시
재간이 대단할 거예요."
그리고 해고는 건궁(乾宮)의 석문을 열고 큰 소리로 물었다.
"사태님, 누가 침입하지 않았나요?"
남해신니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무채접을 바라보고 있다가 해고의 말을 듣고 입을 열었다.
"해고야, 너 또 방해하러 왔구나. 사매들을 왜 저렇게 많이 데리고 왔느냐? 날 화나게 만들
셈이냐?"
"사태님, 방금 비어당 제자 한 사람이 도망쳐서 이곳 악귀동으로 잠입했어요."
"그래? 너희들이 그 놈들을 모두 묶어놓지 않았더냐?"
"그 놈은 무공이 아주 고강해서 밧줄로는 안돼요."
"뭐?"
"그 놈은 분명히 지금 이곳에 숨어 있어요."
"그 자가 어떻게 우리의 일곱 개나 되는 보초선을 통과할 수 있었단 말이냐?"
해고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그 자가 갑자기 저의 혈도를 눌러놓고선……."
"그래서 네가 이곳까지 끌고 왔구나."
해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넌 악귀동이 이 섬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내가 비록 너를 아끼기
는 하지만 벌을 내리지 않을 수 없구나."
해고는 남해신니에게 달려들어 팔을 붙잡고 애원했다.
"전 방법이 없었어요. 그 잔 제가 만일 말을 듣지 않으면 저…… 저……."
해고는 많은 여인들 앞에서 강간하고 죽여버리겠다는 말을 꺼 낼 수가 없었다.
"그 놈이 뭐라고 하더냐?"
해고는 남해신니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 남해신니는 화를 버럭 냈다.
"그 미친 놈이 감히 나의 해고에게까지 손을 뻗치려 하다니? 그 놈은 지금 어디 있느냐? 어
서 잡아 오너라."
"사태님, 걱정하지 마세요. 그 놈은 도망가지 못할 거예요. 사태님께선 제가 왜 그 놈을 여
기까지 데리고 왔는지 아시겠죠?"
"그럼 네가 그저 겁이 나서 한 짓이 아니란 말이지?"
"전 그깟 놈은 두렵지 않아요."
"정말이냐?"
"그 놈의 무공은 확실히 대단한 것 같아요. 만일 정면으로 부딪치면 우리 자매들이 크게 당
할지도 모르죠. 그래서 제가 그 놈을 이곳으로 끌고 온 거예요. 사태님과 팔괘궁까지 있는
데, 그 놈이 날개가 있다 해도 어떻게 도망갈 수 있겠어요?"
남해신니는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해고의 볼을 찌르며 말했다.
"이 계집애가 여간 재치있게 말을 하는게 아니구나."
"사태님, 그 놈이 누군지 아세요?"
"여노악의 수하 중에서 무공이 좀 강한 놈이겠지."
"사태님께선 짐작 못하셨을 거예요. 그 자는 중원 무림에서 유명한 신조협 양과예요."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그 사람은 외팔이인 데다가 무공이 고강하고 스스로 양과라고 하더군요. 절대 틀림없어요."
그 말을 듣고 남해신니는 속으로 생각했다.
'신조협 양과의 무공은 아주 대단하다고 하던데. 만일 그가 양과라면 좀 귀찮게 되겠군.'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마 무채접과 함께 나중에 잡힌 그 외팔이 사내구나."
"사태님께서 의심나시면 무소저에게 물어보시면 되잖아요?"
남해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해고는 현명하구나."
남해신니는 결박당한 무채접 앞으로 와서 물었다.
"그 외팔이 사내가 신조협 양과냐?"
무채접은 이 여인들이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싶어 사실대로 말했다.
"그럼요. 바로 신조협 양과지요. 그가 도망쳤나요? 흥, 난 당신들이 그 분을 가두어 둘 수
없으리라는 걸 이미 짐작했어요."
남해신니는 눈을 부릅뜨며 소리를 질렀다.
"걱정말아. 그 놈이 어떻게 빠져나왔던 간에 난 반드시 잡을테니까."
남해신니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해고를 데리고 건궁을 나와 석 문 옆에 있는 기관을 조작해
서 건궁을 봉쇄했다.
"해고야, 양과가 이곳으로 오지 않고 산정으로 올라가지 않았느냐?"
"저희가 이미 산정을 수색했는데 아무도 없었어요. 양과는 분명히 팔괘궁에 숨어 있어요."
남해신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또 다시 기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석문이 내려와 돌계단이 나 있는 출입구를 봉쇄했다.
양과는 감궁 안에서 이거 야단났다고 생각했다. 만일 남해신니가 문을 열고 들어와 수색한
다면 꼼짝 못하고 들킬 판이었다.
해고가 고함쳤다.
"양대협님, 양공지님, 제가 다 보고 있으니까 어서 나오세요."
양과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한 자 두께도 넘는 석문 안에 있는데 해고가 날 어떻게 볼 수 있단 말인가?…… 그 계집애
가 분명 나를 속이는 것이다.'
과연 해고는 이쪽 저쪽을 힐끔힐끔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양과가 어느 궁에 숨어 있는지
알지 못해 되는대로 큰 소리를 쳤던 것이다.
남해신니가 말했다.
"해고야, 부르지 않아도 된다. 내가 이제 진세(陣勢)를 발동 할 것이다."
"절대 그러지 마세요. 팔괘궁의 진세가 한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그 놈은 이 안에서
죽게 돼요…… 사태님……."
해고가 이렇게 말렸으나 이미 늦었다. 남해신니가 일장을 날리자 벽에 그려진 태극양의도
(太極兩儀圖)가 진동을 받아 팔괘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고가 말했다.
"무채접은 아직 건궁 안에 있지요?"
그리고 급히 건궁에서 무채접을 끌어낸 다음 다시 건궁을 봉쇄했다.
해고가 또다시 외쳤다.
"양대협님, 계속 숨어 있다가는 팔괘궁의 진세에 목숨을 잃게 돼요."
그래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남해신니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두 번이나 태극양의도를 장력으로 진동시켜 팔괘궁
진세를 움직였다. 무채접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그저 걱정스런 시선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감궁은 온통 캄캄했다. 양과는 남해신니가 허장성세를 부리는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갑자기
석문들이 "꽝" 하고 닫히자 그만 깜짝 놀랐다. 그래서 손으로 석문을 있는 힘껏 잡아당겨
보았으나 끄덕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양과는 석문이 기관으로 봉쇄된 것을 알게
되었다. 이윽고 콸콸거리는 물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양과는 눈으로는 볼 수 없었으나 이미 발 밑이 축축히 젖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손으
로 아래를 더듬어 보니 바닥에서 물이 샘처럼 솟아 순식간에 무릎까지 차올랐다.
양과는 당황해서 그제서야 이 팔괘궁의 위력을 느낄 수 있었다. 사방의 벽을 만져보니 돌들
을 어찌나 잘 맞물려 놓았는지 조그만 틈도 찾아낼 수 없었다. 어느덧 물이 옆구리까지 차
올랐다.
양과는 훌쩍 몸을 솟구쳐 두 장 남짓한 천장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물 속에 떨어졌다.
'물이 천장까지 차게 되면 익사하고 말겠구나.'
양과는 다급히 소리쳤다.
"날 내보내줘! 날 내보내달란 말이다!"
이때 우르릉거리는 기관소리가 사방에서 요란하게 났기 때문에 양과가 아무리 소리를 지른
다고 해도 밖에서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양쪽이 환히 밝아오더니 석
문이 열리든 듯했다.
양과는 급히 물 속에서 훌쩍 뛰어 그 중의 한 석문 쪽으로 날아갔다. 그 석문이 "꽝" 하고
다시 닫히면서 사방이 다시 캄캄해졌다.
여인의 목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양대협님…… 빨리 나오지 않으면…… 죽고 말아요."
아마도 해고의 목소리인 것같았다. 양과는 쓴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나가면 너희들이 동시에 달려들어 공격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니 못들은
척해야겠다. 너희들이 내가 팔괘궁에 없는 줄 알고 밖으로 나가면 그때 접아를 구해 이 흉
측한 곳을 빠져 나갈테다. 이 양모의 재주가 어떤지 보기나 해라.'
돌이켜 생각해보니 방금 물이 솟아오를 때 자기는 감궁 안에 있었다. 감(坎)은 물에 속하므
로 진세가 움직이자 물이 솟아올랐던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자기가 있는 곳이 무슨 궁인지
알 수 없었다. 양과는 황약사에게 기문지술(奇門之術)을 약간 배우기는 했으나 수박 겉핥기
로 대충 배우다 보니 팔괘궁의 건(乾), 감(坎), 곤(坤), 태(兌), 이(離), 간(艮), 진(震), 손(巽)
이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지 알 수 없었으며 또 그것이 어떻게 순환 하는지는 더욱 알지 못
했다.
한참 답답해 하고 있는데 사면이 차츰 환해지더니 별빛 같은 것이 반짝이는 듯했다. 양과는
처음에는 멍하니 있다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 별빛 같은 것은 바로 불빛이었는
데 상하 전후좌우에서 화염이 분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가운데로 피한 양과는 머리를 굴렸
다.
'이(離)는 화(火)에 속하니 이곳은 이궁이 틀림없다.'
화염이 점차 맹렬해지며 전체 이궁이 불타오르는 듯했다. 양과는 기력을 모아 발이 데지 않
도록 공중으로 뛰어올랐으나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었다. 불에 떨어지면 다시 급히 뛰어오
르곤 했지 만 두루마기 자락은 이미 불에 붙어 타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두루마기를 벗어
던지니 그것은 즉시 타서 재가 돼버렸다.
양과는 뜨거움을 참아가며 머리를 굴렸다.
'불에 타죽지는 않는다 해도 살이 익어 뻗겠구나.'
그런데 갑자기 체내에서 기열(奇熱)이 느껴졌다. 거와와 채설주의 독은 원래 모두 열독(熱
毒)에 속하는 것이었다. 채설주는 설봉(雪峰)의 혹한지대에서 살기 때문에 생존하려면 반드
시 몸에 대단한 열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채설주의 독은 열 독에 속하며 거와의
독보다 더 극심한 것이었다. 거와의 독은 일부분은 양과의 진원(眞元)에 융합되고 다른 일부
분은 채설주의 독과 합쳐져 체내에 암장되어 지금까지 발작하지 않고 있었는데 지금 양과의
주위에 온통 열화가 끓어번지자 채설주의 독이 발열을 하기 시작했다.
양과는 안팎에서 끓어오르는 열을 참을 길이 없어 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이상스럽게도
앞에 있는 문이 그 소리와 함께 열렸다. 양과는 급히 그쪽으로 들어갔다. 양과가 들어가자마
자 그 석문은 이내 다시 닫혔다.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회오리 바람이 불어 왔다. 어둠 속에서 조약돌들
이 마구 날리는데 숨을 곳이라고는 없었다. 할 수 없이 양과는 구석진 바닥에 납작 엎드려
외팔로 머리를 감싸고 생각했다.
'이곳은 분명 간궁(艮宮)이겠구나. 조약돌이 언제까지 날리려나!'
그러나 조약돌은 갈수록 세차게 휘날려 양과의 몸뚱이에 마구 떨어졌다. 양과는 너무나 아
파서 옷을 찢어 손에 쥐고 휘둘러 조약돌을 막았다. 하지만 날리는 조약돌이 너무 많아서
적지 않은 조약돌에 맞아 온몸의 살가죽이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양과는 이궁에 있다가 큰
소리를 치자 석문이 열렸던 일을 생각하고선 다시 고함을 질렀다.
아니나 다를까 과연 또 석문이 열렸다.
'앞으로 어떤 기관이 나올지 알 수 없지만,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고 봐야겠구나.'
양과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열린 문으로 재빨리 뛰어들어갔다.
석실 안은 새까맣고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양과는 진세를 흐트러놓게 될까봐 겁이 나서 조
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곧이어 아주 작은 물건들이 양과의 머리와 온몸에 떨어지면서 코를
찌르는 듯한 악취가 풍겨왔다. 손으로 만져보니 진흙같았다. 양과는 생각했다.
'곤(坤)은 지(地)라고 했으니 이 궁은 분명 곤궁인가 보다.'
양과는 급히 속옷으로 머리를 가렸다. 그러나 진흙은 갈수록 쏟아져내려 순식간에 발등까지
덮어버렸다. 양과는 진흙 속에 묻힌 발을 빼내면서 한탄해 마지 않았다.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면 생매장을 당하고 말겠구나. 간궁에서 조약돌에 맞아 죽는 것보
다 나을 게 없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한 양과는 연속 소리를 질렀다.
왼쪽의 석문이 열리자 양과는 그곳으로 기어들어갔다. 석문이 닫히자 양과는 자기가 곤궁을
벗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진흙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양과는 이 궁이 무슨 궁인지 알 수 없었다. 진세가 움직이기 전에 급히 사방을 더듬
어 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자그마한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참 생각을 하고 있는데 미지근
한 것이 얼굴에 떨어지기에 손으로 닦아 보았더니 진득진득하고 비린내가 나는데 무슨 물건
인지 알 수 없었다. 멍하니 서 있는데 그 비린내 나는 물건이 마치 비가 오듯 떨어지기 시
작했다. 금방 석실 안에 그 물건이 가득 떨어져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양과는 생각했다.
'팔괘 중에서 태(兌)를 택(澤)이라고 하니 발 밑의 물건이 미지근하고 끈적끈적한 데다가 비
리기까지 한 것을 보면 연못 속의 썩은 흙이 틀림없다. 이곳은 분명 태궁이다.'
양과는 또다시 고함을 질렀다.
눈 앞에 있는 석문이 열리기 시작하자 양과는 문 넘어로 훌쩍 날아들어갔다. 미처 착지하기
도 전에 머리 위에서 우레소리 같은 것이 나더니 번쩍하는 섬광이 눈 앞을 스쳐 지나갔다.
양과는 대 경실색했다 우레와 번개라면 이 궁은 분명 진궁(震宮)일 것이었다. 진세가 발동하
면 벼락이 칠텐데 그러면 도망칠 곳도 없게 되는 것이었다.
다급해진 양과가 고함을 지르고 일곱번째 석실에 들어가선 머리를 굴렸다.
'내가 이미 감, 이, 간, 곤, 태, 진 육궁을 지나왔으니 이젠 건(乾), 손(巽) 두 궁만 남아 있
다. 건은 천(天)을 주관하고 손은 풍(風)을 주관하므로 건궁에 이르면 아주 대길하게 될 것
이 아닌가?'
그때 갑자기 광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는데 이곳은 손궁이었다. 양과는 급히 땅바닥엘 발을
붙이려고 했으나 풍세가 너무 거세 바람에 휩쓸려 석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양과는 급히 장
으로 벽을 막았다.
풍향이 갑자기 바뀌면서 이번에는 바람이 양과를 다른 쪽으로 날려보냈다. 이렇게 수차례
바람이 여러 방향으로 그를 벽으로 날려보내자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다급해진 양과가
다시 큰 소리를 질렀다.
앞쪽의 석문이 열리기에 양과는 즉시 그 쪽으로 날아들어가서 긴 한숨을 쉬었다.
'일곱 개의 궁을 거쳤으니 이제 남은 것은 건궁이다. 건은 천이니 아주 대길할 것이다.'
놀란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고 있는데 위에서 비린내가 나는 물건이 뚝뚝 떨어져 코를 찔렀
다. 건궁이 아니라 태궁으로 되돌아 온 듯했다. 양과가 고함을 지르고 다시 뛰어든 곳은 곤
궁이어서 진흙이 떨어졌다. 양과가 또 다시 고함을 지르고 다른 석실로 뛰어들었는데 그곳
은 간궁이어서 조약돌이 마구 휘날렸다.
양과가 계속 고함을 지를 때마다 석문이 끊임없이 열리고 닫혀 양과는 이 궁에서 저 궁으로
도망가곤 했으나 결코 건궁으로 들어설 수는 없었다. 양과는 장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목숨도 여기서 끝장인가 보다.'
그는 이 궁 저 궁으로 옳겨다니다가 또다시 이궁으로 돌아오게 되자 열화가 타는 속에 다시
채설주의 독이 끓어올랐다. 뜨거움을 참지 못해 황급히 도망치고 보니 감궁의 물 속에 들어
가게 되었다.
열화 속에서 시달리다가 찬물 속에 들어가니 시원해서 좋았지만 감궁의 수세가 갈수록 강해
져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하지만 체내의 열독이 발작했던 까닭에 찬물로 그 열기를
식히자 아주 기분이 좋았다.
양과는 한열(寒熱)이 서로 융합되는 이치를 깨닫게 되자 공력을 움직여 물 속에서 한기를
끌어들여서는 체내에 있는 채설주의 독 열을 제거했는데 의외로 큰 효과를 보았다. 양과는
채설주의 독성이 적지 않게 줄어들자 아주 기분이 좋았다.
양과가 기뻐하고 있을 때 한 쪽 옆의 석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석실 안의 물이 갑자기 사라
지는 것이었다. 석문 밖은 아주 밝았는데 이 문은 바로 정면에 있는 대청으로 통하는 문이
었다. 뭇여 인들이 호시탐탐 석실 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양과, 아직도 나오지 않을 셈이냐?"
남해신니가 이렇게 말하자 양과는 움찔하고 놀랐다.
'저 여자가 내가 감궁 안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남해신니는 양과의 마음을 궤뚫어보기라도 한 듯이 다시 말을 이었다.
"양과, 임자가 팔괘궁의 도처를 돌아다닌 것을 난 손금보듯이 훤히 알고 있네."
"석문이 그렇게 두껍고 무거운데 당신이…… 어떻게 봤다는 말이오?"
"내가 팔괘궁의 진세를 설치했는데 궁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러자 해고가 큰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팔괘궁에 있으면 진세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당신이 약간만이라도 움직이면 진법(陣
法)이 발동하게 되지요. 그래서 사태님께서는 당신이 어느 궁에 있는지 환히 알고 계시는
것이지요. 당신은 이 궁에서 저 궁으로 자기 마음대로 간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사태님께서 진법을 조종하고 있었던 까닭에 능히 석문을 열 수 있었던 거예요."
"이 양모를 잡으려 했다면 왜 어느 궁에서든지 가둬 죽여버리지 못했나?"
"사태님께서는 인자하고 너그러우신 까닭에 당신의 목숨을 빼앗기를 원하지 않으신 거예요.
그래서 진법을 극한까지 쓰지 않으신 거예요.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은 지금 살아 있을 수
없죠. 이 궁 저 궁을 돌아다녀 보았으니 각종의 진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잘 알았을
거예요. 하하하…… 당신은 쓴 맛을 이미 보았으니 어서나와 포박을 받으시죠. 그렇지 않다
간 사태님께서 석문을 닫아 버리실 거예요."
"잠깐, 이 양모가 나가겠소."
양모는 이렇게 말하고 석실 밖으로 걸어나왔다
해고가 남해신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사태님, 저 자를 어떻게 처리하려고 하십니까?"
양과는 팔괘궁 안에서 완전히 거지꼴이 된 데다가 악취까지 풍기자 해고는 배를 잡고 웃어
댔다.
양과는 등불 아래서 자기 꼴을 보고 소리쳤다.
"이 계집애가 뭐가 우습다고?"
"웃는 것은 내 마음이라고요."
"넌 내가 악귀동에 잠입한 것을 발설하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해놓고선…… 맹세를 어기면
벼락을 맞고 죽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해고는 양과가 자기가 한 맹세 구절을 주워섬기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기는커녕 더욱 기뻐
날뛰며 깔깔 웃어대는 것이었다.
"양대협님은 기억력이 참 좋군요."
"넌 그래 두렵지도 않느냐?"
그 말에 해고는 쓰러질듯이 웃다가 남해신니의 부축까지 받게 되었다. 남해신니는 귀엽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해고의 이마를 찌르며 역시 웃으면서 말했다.
"이 계집엔 수다스럽고 잔꾀도 많더니 이젠 담도 커졌구나."
그러자 해고가 웃으며 말했다.
"양대협께선…… 히히히…… 그걸 다 믿으셨군요. 하하하……."
"군자일언 중천금이라고 했거늘 넌 부끄럽지도 않느냐? 흥, 넌 반드시 응보를 받을게다."
남해신니기 말했다.
"해고는 그런 맹세를 하루에도 몇번이나 하는지 알 수 없지. 저 어린 나이에 아마 몇만번이
라도 했을거야. 하지만 지금까지 무슨 응보를 받아 본 적이 없지."
양과는 그 말을 듣고 아연실색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요런 조그만 요녀를 만나 이 양과가 수모를 당하는구나.'
남해신니가 말했다.
"해고야, 그만 떠들어라. 어서 저 양가란 놈을 묶어라."
건장한 여인 두 명이 이미 준비해둔 소힘줄로 만든 밧줄을 가지고 양과를 결박하려고 다가
왔다. 양과는 슬며시 신공(神功)을 움직였다. 그는 이 두 여인을 인질로 삼아 무채접과 교환
하려는 생각을 했다.
"양과, 네가 비록 중원 무림에서 한가닥 한다고 하지만 이 악 귀도에서는 한 푼의 가치도
없는 사람이다. 만일 네가 경거망동 하다가 다쳐도 날 원망하지는 말아라."
남해신니가 이렇게 엄포를 놓는데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극히 위엄이 있어 보였
다. 그녀는 마치 양과를 손바닥 위에 놓고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물건으로 생각하고 있
는 듯했다.
양과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가 죽은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젠 이 양모도 조용히 포박당하렵니다. 더 고생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현명하군. 현명한 사람은 말을 잘 듣는게 낫다는 것을 잘 알자."
양과는 왼팔을 뒤로 가져가면서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양모가 비록 현명하지는 못하지만 말을 고분고분하게 듣는 것이 좋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
니다."
건장한 여인 두 사람이 각기 양쪽에 서서 밧줄을 잡아당기면서 소리쳤다.
"꼼짝말앗!"
양과는 밧줄이 몸을 스치려는 순간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엎드렸다. 그러자 두 여인은 지나
치게 힘을 썼던 까닭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가 겨우 몸을 가누었다.
"이 양가야, 아직도 순순히 말을 듣지 않을테냐?"
"이 양모가 장난을 좀 친 것뿐입니다. 묶으려거든 어서 묶으시오. 하필 그렇게 멀리 서 있을
것은 뭡니까?"
두 여인은 밧줄을 잡아당기면서 이번에는 뒤로부터 묶으려고 했다. 양과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지만 그녀들이 밧줄에 힘을 주리라는 것을 알고 장을 뒤로 가져갔다. 장력이 밧줄에 닿
자 두 여인은 두 팔이 마비되면서 밧줄을 마음대로 놓을 수도 없게 되었다. 양과는 그 틈에
한 여인을 향해 뛰어가 손으로 붙잡았다.
제27장 여노악의 과거
그 여인은 아주 기민하게 뒤로 물러서면서 쌍장을 내쳤다. 양과는 그 쌍장을 막지 않고 그
장이 자기 몸에 맞는 것도 관계하지 않고 왼팔로 그저 붙잡으려 고만 했다. 그 여인은 자기
의 쌍장이 양과의 가장 부드러운 부위를 가격할 수 있게 되었다고 내심 좋아했다. 그러나
양과의 손은 이미 그 여인의 눈 앞으로 날아들었다. 갑자기 양과는 등 뒤에 세찬 바람이 이
는 것을 느끼자 그 건장한 여인을 놓아두고 장을 뒤로 돌려 그것을 받아쳤다. 남해신니의
옆에 있던 중년부인이 뒤에서 달려들었던 것이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각기 몇 보씩 밀려났다.
양과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남해신니가 오독방과 대치할 수 있는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구나. 수하에 이런 고수가 다
있단 말인가?'
보아하니 그 중년부인은 용모는 별로 뛰어나지 않았는데 무공만은 비범해서 자기의 공력과
상하를 가를 수 없을 정도로 엇비슷했다. 만일 이런 여인이 중원 무림에 나가기만 한다면
기필코 유명인물이 될 것이었다.
양과는 즉시 업신여기던 태도를 바꿔 두 손을 모아쥐며 입을 열었다.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십니까?"
양과는 이 중년부인이 결혼했는지를 알 수 없었기에 '부인'이 라고 부를 수 없었고 그렇다
고 '소저'라고는 더군다나 부를 수 없어 '귀하'라고 불렀다.
중년부인이 입을 실룩거렸는데 웃는 것인지 혹은 경멸하는 것인지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러더니 그녀가 말하는 것이었다.
"이름이 있으면 어떻고 이름이 없으면 어떻단 말인가요?"
그녀의 말은 불문(佛門) 제자의 말투같았다.
양과는 소룡녀와 헤어진 후 동해에서 열심히 수련을 쌓았기에 심성이 매우 부드러워졌다.
만일 소룡녀를 찾느라고 여러 가지 사건들을 겪어 보지 않았더라면 깊은 산 속에 틀어박혀
세상사를 잘 모르고 지내게 되었을 것이다. 허장성세하는 중년부인을 보자 양과는 쓴웃음을
지으며 또 한마디 했다.
"귀하께서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이름이 있으면 도명(道名)도 있는 거고 성이 있으면 도성
(道姓)도 있는 게 아닙니까?"
그 중년부인은 얼굴을 약간 붉히며 대답했다.
"양대협님께서는 과연 뛰어난 점이 있군요."
해고가 중년부인 옆에 붙어서서 말했다.
"이 분은 제 어머니로 모두 해부인(海夫人)이라고 부르지요."
그러자 중년부인이 토를 달았다.
"제 남편의 성이 해씨랍니다."
그 말을 듣고 멍해진 양과가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모녀간이었구나. 해고가 아까 자기 성이 해씨가 아니라고 하더니 정말 해씨일 줄이
야……. 허 참, 조그만 계집애가 늘 거짓말만 하는구나. 열대엿 살밖에 안되는 계집애가 이
렇게 망녕되게 굴다니 내 평생에 처음 당하는 일이다.'
양과는 스스로 자기가 총명하다고 생각해 왔고 황용보다 더 지혜가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악귀도에 와서 이런 어린 소녀에게 속았던 것이다. 그래서 양과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
다는 말이 정말 옳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고는 양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소리쳤다.
"당신은 제 어머니도 이기지 못하잖아요? 그래도 불복하고 포박당하지 않겠다면 제가 당신
을 쓰러뜨릴 수밖에 없군요."
양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자기가 지혜 면에서는 졌지만 싸움에 있어서는 저 계집애
가 근본적으로 자기의 적수가 될 수는 없다고 자신했다. 그런데도 저 계집애가 도전했으니
무공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그러는지 알고싶었다.
"한숨은 왜 쉬나요? 내가 당신을 사로잡은 뒤에 한숨을 쉬는 게 좋지 않겠어요?"
해고는 이렇게 말하더니 가냘픈 손을 들어 양파의 가슴을 내쳤다. 그런데 이 나이어린 소녀
의 장이 그토록 셀 줄이야? 양과는 오른쪽으로 몸을 비키면서 손으로 해고의 손목을 잡으려
고 했다. 하지만 해고의 이 공격은 기만동작에 불과한 것이었고 다른 한 쪽 장이 양과의 단
전을 노리고 날아드는 것이었다. 양과는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이 계집애가 이처럼 독랄한 면이 있단 말인가? 절묘한 신법으로 공격을 피할 줄 아는구
나.'
해고는 득세하기 시작하자 사정없이 날뛰었다. 쌍장이 상하좌우로 자유롭게 움직이는데 실
로 방향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양과는 섣불리 공격하지 않고 해고의 무공초식을 자세히 관
찰했다.
'해고의 무공이 이렇게 훌륭한 것을 보니 저 애를 잡을 때 밤이 아니었고 저 애가 방비를
안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쉽사리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정도의 무공이라
면 산에 오 를 때 도망가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을텐데. 그러고 보니 저 애는 정말 나를 악
귀동으로 유인한 것이구나.'
보면 볼수록 해고의 무공은 어딘가 눈에 익은 것이었다. 해고가 쓰는 초식은 그 허실을 가
늠하기가 어려웠지만 그 어떤 규칙 같은 것이 보였다. 위쪽을 공격하는 것처럼 하다가 사실
은 아래쪽을 공격하며 위쪽으로 기만동작을 취하기는 하지만 방어가 되어 있어 그 기만동작
이 공격과 방어로 변하기도 했다. 그 애는 또 장을 내칠 때마다 발길질도 하곤 했는데 그
초식이 아주 괴이 했다. 양과는 해고의 무공초식이 오독방의 그것과 아주 비슷하다는 생각
이 퍼뜩 났다 그러나 오독방의 사십구로 장퇴법에 비해 더욱 세련된 것이었다.
'해고와 여노악간에 무슨 연관이 있는게 아닐까?'
해고는 양과가 줄곧 피하기만 하자 자기가 두려워서 그러는줄 알고 점점 담이 커졌다. 해고
는 칠성의 공력을 구성까지 높이고 거의 방어를 하지 않았다.
해부인은 그것을 보고 걱정돼서 소리쳤다.
"해고야, 조심해라. 역습에 대비해야지."
"사태님과 어머니가 여기 있는 한 저 사람이 감히 방종하게 굴지는 못할 거예요."
해고는 깔깔 웃으면서 가냘픈 장으로 양과의 가슴팍을 힘껏 내쳤다. 양과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단장(單掌)으로 기만동 작을 취했다. 해고는 과연 그 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서 오른 발로 양과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양과의 그 초식은 기만동작이기도 했지만 옆으로 피하면서 그 손으로 대번에 해고의 종아리
를 잡아 공중으로 집어던졌다. 이 초식은 노원헌도(老猿獻桃)라는 것으로 무림에서 가장 흔
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것이었다. 하지만 양과가 적절한 때 사용했기에 즉시 효과가 나타났
다.
해고는 중심을 잃고 뒤로 떨어지게 되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자기의 옷깃을 잡아당기는 것
을 느꼈고 그녀는 급히 공중제비를 돌아 착지했다. 해부인이 해고를 붙잡아 주었기에 넘어
지지 않은 것이었다.
해부인이 해고의 앞을 막아서며 쌍장을 번갈아 쓰면서 양과가 자기 딸을 추격하여 공격하는
것을 방어했다.
해고는 양과가 평범한 초식으로 자기를 쓰러뜨릴 변하자 창피 한 나머지 화가 나서 소리쳤
다.
"다시 한 번 해봐요."
해부인이 딸을 잡아당기며 말렸다.
"넌 저 사람의 적수가 못돼."
해고는 두 눈을 부릅뜨며 불복했다.
"아녜요. 전 넘어지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딸의 체면을 깎으면 서까지 남의 위풍을 돋워 주
는군요."
양과가 미소를 지으며 해부인에게 말했다.
"귀댁의 따님은 아주 총명하고 귀엽군요. 하지만 이런 소녀는 규방에서 소꼽놀이나 하는 것
이 어울리지 목숨을 걸고 싸움질을 하는 것은 어울리는 일이 아니지요."
그러자 해고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흥, 당신은 내가 어리다고 무시하지만 그래 어린 소녀 하나 제압하지 못하고 어떻게 신조
협이라고 부를 수 있겠어요? 좋아 하기엔 너무 이르잖아요."
해부인이 양과에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양대협님께서 사정을 봐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양과가 담담한 미소를 짓자 해고는 어머니의 말이 고깝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어머니, 왜 저 사람에게 고맙다고 하나요?"
"넌 많은 허점을 보이고서도 아직 모르고 있구나. 양대협님께서 사정을 봐주지 않았더라면
넌 이미 몇번이고 죽었을 것이다."
해고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갑자기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웃었다.
"이 딸의 무공은 모두 어머니가 가르친 것인데 무슨 허점이 있다고 하시는 거예요?"
해부인은 딸에게 눈을 흘기고 나서 양과 쪽으로 돌아서면서 말했다.
"하지만 우리 애도 당신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으니 이제 두 사람은 피장파장인 격이죠."
그 말을 듣고 양과는 어떨떨해졌다.
'해소저가 날 구해 주었다니? 날 여기까지 유인해서 하마터면 팔괘궁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
는데.'
양과는 해부인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남해신니가 말했다.
"양과, 임자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군. 아까 해고가 여러번 내게 임자를 용서해달라
고 통사정을 하지 않았다면 임잔 이미 팔괘궁에서 죽었을 것이네."
양과는 어정정한 표정으로 무채접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채접은 비록 남해신니
의 말이 사실이고 해고가 확실히 남해신니에게 양과를 용서해달라고 사정한 것을 알고는 있
었지만 악귀도의 여인들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기에 큰 소리를 질렀다.
"낭군님, 이 여인들의 말을 믿지 마세요. 이 여인들은 낭군님이 순진한 줄 알고 이렇게 속이
는 거예요. 당신을 유인해서 사로 잡으려고 하는 것이니 절대 속지 마세요."
해고는 화가 나서 무채접을 때리려고 들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이 수치도 모르는 년아!"
"내가 왜 수치를 모른단 말이냐? 난 남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으로는 가장하지 않아. 더군다
나 지고서도 생떼를 부리는 일은 더더욱 하지 않아."
"하지만 나도 낭군님이요 뭐요 하고 함부로 지껄이지는 않아…… 퉤, 규방여자가 남의 사내
를 보고 낭군님이라고 하다니, 그래 부끄럽지도 않니? 나 같으면 창피해 죽겠다."
그 말에 여인들이 박장대소했다.
무채접은 해고의 욕설을 듣자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지며 소리 쳤다.
"내가 만일 묶인 몸이 아니라면 저 년의 아가리를 찢어놓겠어!"
"좋아! 기다릴테니 어디 재간이 있으면 덤벼봐."
두 여인이 말다툼을 하자 다른 사람들은 그게 재미있어 말릴 생각도 하지 않고 계속 구경만
했다.
남해신니가 두 여인을 말렸다.
"이젠 그만 다투거라. 지금이 어디 말다툼할 때냐?"
그러자 해고가 서둘러 대꾸했다.
"그래요. 지금은 양과를 잡는 일이 가장 중요하지요."
"그래야지. 너희들 중 누가 나서서 양과를 붙잡을테냐?"
여인들은 팔괘궁으로도 양과를 굴복시키지 못한 데다가 그가 해부인보다 공력이 약하지 않
은 것을 보고 그 누구도 선뜻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해부인이 말했다.
"사태님, 제가 해볼게요."
그 말을 듣고 남해신니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많은 제자들 중에 해부인밖에 양과를 당할 사람이 없구나.'
그리고 남해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부인이 한 번 기합을 지르자 다리를 움직이지도 않
았는데 벌써 양과 앞에까지 날아와서 장을 휘두르며 치고받기 시작했다.
양과는 신재공해(神在控海)의 초식을 써서 장으로 반격했다. 해부인은 오른쪽으로 피하면서
오른팔로 양과의 장을 막아 아래로 누른 다음 뒤로 잡아당기면서 왼쪽 장으로 양과의 뒷덜
미를 내리쳤다. 양과는 오른쪽 팔소매가 이궁의 열화에 절반이나 타버렸지만 나머지 팔소매
에 진기를 불어넣어 해부인의 왼팔을 내리쳤는데 그 기세가 아주 매서웠다.
해부인은 놀라 소리를 지르며 급히 뒤로 몇보 물러섰다.
'양과는 비록 외팔이기는 하지만 옷소매에 진기를 불어넣으니 고수의 장보다 더 무섭구나.
조심해야겠군.'
그리고 해부인은 다시 양과와 어울려 싸우기 시작했다. 장풍소리가 획획거리고 옷소매가 나
부끼는 소리가 요란한데 그 기세가 한 장도 넘게 퍼졌기에 구경하던 여인들은 모두 뒤로 물
러섰다. 이십여 합이나 싸웠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양과는 팔괘궁에서 체력을 많
이 소모했지만 해부인은 그렇지 않아서 심리 적으로 양과가 약간 불리했다.
한참이 지나도록 승부가 나지 않자 남해신니는 그러다가 해부인이 실수라도 할까봐 두려워
뭇여 인들에게 동시에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양과는 급히 뒤쪽의 석벽 언저리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여럿이 한 사람에게 덤비다니, 이게 어디 영웅호걸이 할 짓이오?"
무채접도 침을 뱉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런 비열한 수단을 쓰는 게 부끄럽지도 않나요?"
해부인과 뭇여인들도 이렇게 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는 얼굴로 남해신니를 바라보았다.
남해신니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쌀쌀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직접 출수해야겠군."
그녀는 체면 때문에 직접 손을 쓰려고 하지 않았지만 만일 여럿의 힘으로 제압하면 양파가
불복할 것같아서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양과는 깜짝 놀라 속으로 생각했다.
'제자인 해부인만 해도 이렇게 무공이 높은데, 아마 남해신니는 황약사 정도 가는 고수임이
분명하다. 아마 이기긴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양과는 어렸을 때부터 자존심이 강했기에 결코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래서 슬며시
내공을 운행하면서 결사항전할 준비를 했다. 혹시 좋은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남해신니가 두 손을 휘휘 내젓자 뭇사람들은 양쪽으로 물러서며 길을 내줬다. 그녀는 한 걸
음 한 걸음 양과쪽으로 다가왔다. 양과는 놀랍게도 남해신니가 내딛는 발자국마다 땅이 파
이는 것을 보았다. 땅바닥은 암석을 고르게 깔아놓은 것인데 그 암석에 깊은 발자국이 난다
는 것은 이 여인의 공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충분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양과는 속으로 탄식해 마지 않았다.
'이 양과는 오늘 분명히 지고 말겠구나.'
무채접도 그 광경을 보고 무척 놀라서 소리쳤다.
"낭군님, 조심하세요."
해고는 무채접이 양과를 '낭군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자 화가 나서 남해신니를 잡아당
기며 말했다.
닭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어요? 저 양과는 아예 사태님의 적수가 되지 못하니 직접
손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해고야, 어서 물러서거라. 농담은 그만 하거라."
"농담하는게 아니에요."
"넌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게냐?"
"벌써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저 사람을 사로잡겠다고 말예요."
"네 무공은 저 사람보다 훨씬 못한데 어떻게 사로잡는단 말이냐?"
"제가 검으로 대번에 저 양과를 사로잡을게요."
그 말에 여인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요? 신조협을 사로잡겠다는데 그렇게도 우습나요?"
해고가 뾰로통해져서 이렇게 소리 지르자 그녀보다 키가 좀 큰 소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우린 네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볼 셈이야."
"뭘 지켜볼게 있다구?"
"네가 매일 큰 소리를 치지만 남을 사로잡기는 고사하고 남에게 잡혔으니 이게 바로 응보
야!"
그 말에 여인들은 또 깔깔 웃어대기 시작했다. 해고가 그 키큰 소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내가 양과를 사로잡게 되면 다시는 언니라고 부르지 않겠어. 네가 도리어 날 언니라고 불
러야 해."
"그러지. 내기라도 걸지 뭐."
해고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몸을 돌리며 말했다.
"사태님, 어머니. 양과가 무엇 때문에 도망나왔는지 알아맞혀 보세요. 일곱 개의 보초선까지
넘으면서 여기 악귀동까지 들어온 이유가 뭐겠어요?"
남해신니와 해부인은 서로 마주보았다.
'그래, 양과가 도망쳤으면 배를 빼앗아타고 악귀도를 떠나면 될텐데, 여긴 왜 왔을까?'
그녀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해고가 히죽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무채접이 양과를 낭군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남사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그건 그들 사이가
끔찍하다는 것을 말해주지 요…… 양과가 악귀 동으로 온 것은 무채접을 구해서 도망치려
했기 때문예요."
"그런데 어쨌단 말이냐?"
해부인이 이렇게 묻자 해고는 무채접에게 다가서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어머니, 양과가 이 여인을 구하러 온 이상 이 여자가 이곳에서 죽는 것을 뻔히 눈뜨고 볼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럴 수야 없겠지."
해부인은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 양과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녀는 양과가 무채접을 아주 아
끼고 있고 그들 사이의 관계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봤다.
해고는 검을 뽑아들고 무채접의 목에 대면서 깔깔 웃어댔다.
"그래서 난 검으로 양과를 대번에 사로잡을 수 있다고 말한 거예요."
양과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 검을 어서 내려놓아라!"
해고는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사태님, 어머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남해신니가 큰 소리로 웃었다.
"역시 해고는 총명하군."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양과를 향해 큰 소리로 윽박질렀다.
"넌 그래도 포박당하지 않을테냐?"
해고가 다시 말했다.
"내가 이 검에 힘을 주기만 하면 이 귀여운 미인은 즉시 끝장 나는 거예요. 얼마나 가슴아
픈 일인가요?"
무채접은 분하기도 하고 겁도 났으나 큰 소리를 질렀다.
"낭군님, 제 걱정말고 어서 도망가세요. 공력을 회복한 후 이 나쁜 년을 잡아죽여 제 원수를
갚아 주세요."
양과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어찌 임자가 죽는 것을 보면서 혼자 도망갈 수 있겠나?'
양과는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고개를 쳐들고 장탄식을 했다.
"당신들이 날 결박하시오. 하지만 이렇게 비열한 수단을 쓰는데 이 양모는 불복할 것이오."
해고가 득의양양하게 웃어댔다.
"당신이 불복하면 어쩔 건가요?…… 여러 언니들, 빨리 묶지 않고 뭐해요?"
몇명의 건장한 여인들이 소힘줄로 만든 밧줄로 양과를 꽁꽁 묶어 땅바닥에 내던졌다. 무채
접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낭군님, 당…… 당신이 절 돌볼 필요가 뭐가 있나요?"
양과는 눈을 꼭 감은 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남해신니가 아주 기뻐하며 말했다.
"무채접은 끌고 가고 양과만 남겨 두거라."
여러 여인들이 무채접을 끌고 나가려 했다
"잠깐만 기다려요."
해고가 소리치자 여인들은 발을 멈추었다
"사매, 또 무슨 일이야?"
"당신들은 방금 내기 건 것을 잊었나요? 빨리 이 언니에게 인사하세요."
뭇여인들은 어쩔 수 없이 언니라고 몇마디 떠들어댔다. 해고가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귀여워. 모두 내 훌륭한 사매들예요."
키 큰 소녀가 탄식하며 말했다.
"어서 가자. 지혜와 계략으로 말하면 우린 도무지 저 계집애의 상대가 안돼."
뭇여인들이 나가자 남해신니가 해부인과 해고에게 말했다.
"너희들도 돌아가거라."
"전 사태님께서 저 사람을 심문하는 것을 보고 싶어요."
해고가 이렇게 떼를 쓰자 남해신니도 할 수 없었다.
"좋아, 그럼 넌 여기 있거라."
해부인은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해고는 섬섬옥수를 내밀더니 양과의 옆구리에 있는 소혈(笑穴)을 건드리며 말했다.
"당신도 점혈 맛을 봐야 해요."
양과는 갑자기 온몸이 간지러워 크게 웃기 시작했다. 너무 웃다 보니 눈물까지 나왔다.
남해신니가 옷소매를 내쳐 양과의 혈도를 풀어주며 말했다.
"이 계집앤 그저 장난만 치려 하는구나."
"누가 남에게 혈도를 찍으면서 야단법석을 피우라고 했던가요? 또 사람을 위협하면서 말하
기를……."
해고는 강간한 다음 죽여 버리겠다는 말까지 하고는 얼굴을 붉혔다.
양과는 웃음을 그치고 나서 말했다
"조그만 계집애가 속도 좁구나."
"또 허튼소리를 하면 쓴맛을 더 보여주겠어요."
남해신니가 말했다.
"양과, 듣자니 임잔 협의를 행하고 악한 자를 징벌해 강호에서 사람마다 칭찬이 자자한데
어찌 오독방 사람들과 휩쓸려 다니는가?"
양과는 소룡녀와 헤어진 후 황용에게 소룡녀가 남해신니의 구원을 받았고 남해신니가 품성
이 인자하고 관대하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소룡녀에 대한 그리움이 더해감에 따라 남
해신니는 마치 살아 있는 보살처럼 보였다. 어제 남해신니가 비어당의 어선을 공격하자 양
과는 더군다나 이 여인을 협의를 지키는 사람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양과는 남해신니의 팔괘궁 안에서 허다한 고초를 겪게 되자 약간 적의를 품게 되었
다. 그러나 지금 남해신니가 아랫사람을 아끼는 마음으로 따뜻한 말을 해주자 아주 감동했
다. 그래서 양과는 자기가 사랑하는 처와 헤어지게 된 일부터 시작해서 오독방을 만나게 된
일까지 모두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남해신니는 그 말을 듣고 탄식을 했고 눈물을 글썽이며 양과의 지순한 사랑에 감동했다. 그
때 해고가 물었다.
"당신은 오독방의 집법사자가 소룡녀라고 생각하시나요?"
"내가 보기엔 그녀의 몸매와 목소리가 소룡녀와 아주 비슷하더군. 유감스럽게도 얼굴엔 가
면을 쓰고 있었지만 말이야. 하지만 무채접의 말에 의하면 그녀가 대단한 미인이라는데 아
마 그녀가 소룡녀임이 틀림없어."
양과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남해신니에게 물었다.
"사태님, 당신이 그녀를 구원할때 자기 이름을 말하지 않던가요?"
"내가 십육 년마다 한 번씩 중원에 나간다는 말은 황용이 잘못 전한 것인데. 지난날 내가
분명히 한 처녀를 구한 적이 있었지.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어. 하지만 그곳은 절정곡이 아니
었어. 그렇다고 절정곡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니었고 아마 백 리쯤 떨어진 곳이었
지. 그때 난 여노악이 절정곡에 가서 삼절독중의 하나인 정화의 씨를 받아다가 신선도에 심
어서 나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사태님과 여방주는……."
양과가 급히 말허리를 잘랐다.
'아 두 사람은 원수지간인데 그 무슨 관심을 끌려 했다는 말인가?'
양과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해고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모르고 있었군요. 사태님과 여방주는 원래 부부였어요."
그 말에 양과는 깜짝 놀랐다 남해신니는 얼굴의 근육을 부르르 떨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우린 한때 부부였었지. 뿐만 아니라 사형매(師兄妹) 간이기도 했고. 사부님에게는
우리 두 제자밖에 없었지. 사부님께서는 나를 각별히 아끼셔서 본문의 무공을 모두 전수해
주셨지. 그때 난 어려서 세상물정을 몰라 본문의 정수를 어째서 사형에게는 전수해주지 않
느냐고 물었었네. 그랬더니 사부님께서 여러번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씀하시는게 아니겠나?
'네 사형은 자질은 너보다 좋다만 내가 그동안 관찰한 바에 의하면 차후 악인이 될 기미가
보이는구나' 난 그때 사형과 아주 마음이 통했기에 사부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
네. 후에 사부님이 돌아 가시자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갔지. 그런데 시청은 내
게 갖은 아첨을 다 하면서 본문의 무상심법 (無上心法)을 자기에게 전수해 달라고 하는 것
이 아니겠나? 하지만 사부님께서 임종시에 내게 심법을 절대 사형에게 전수해주지 말 것을
당부하셨지. 그러니 내가 어떻게 사부님의 유언을 저버릴 수가 있었겠나? 열아홉 되던 해
여노악이 내게 청혼하길래 난 받아들였지. 결혼 한 후 우리 부부는 서로 몹시 아끼면서 살
아갔지. 사형은
내게 충심을 맹세하면서 딸 여인만 보면 머리를 숙이고 피하기로 했었네, 게다가 여러 가
지 궁리를 해가면서 내 비위를 맞추려고 했었지. 그땐 난 본문의 장문이었지. 하지만 난 아
녀자라 그릇이 크지 못하다고 생각했고 본문의 여러 번쇄한 일들을 처리하는데 게을렀었지.
당시 난 사형에게 맘을 몽땅 주다보니 제멋대로 장문인의 자리를 그에게 넘겨주고 말았네.
그 사람은 더 말할 것 없이 기뻐하면서 본문의 대소사를 아주 질서정연하게 처리해감에 따
라 남해제도에서 본문의 세력은 날로 강성해졌네. 나도 아주 기제했지. 그런데 사형은 매일
미간을 찌푸리고 있지 않았겠나? 난 사형에게 무슨 일로 그러느냐고 물었네. 그 이는 말할
듯하다가도 그만두는 것이었네. 난 그 이가 내게 불만을 가지고 있고 또 따로 봐둔 여인이
있지않나 싶어 계속 캐물었지. 그 이는 드디어 참지 못하고 내게 얘기해 주더군. 자기는 장
문인이면서도 본문의 무상심법을 모르다 보니 자신의 무공도 더 늘지 않고 수하에 제자들을
데려다 가르치기도 어렵다고 하더군. 그때 내 무공은 그이보다 훨씬 높았는데 아내가 남편
보다 무공
이 높은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하더군. 그는 부부 사이에는 서로 비밀이 없어야 한다
고 말하더군. 더군다나 사부님이 돌아가신 후 몇년 동안 자기는 모든 일을 성실히 했고 결
코 나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나? 그리고 도처에서 성행을 일삼아 사람
들의 지지를 받고 있지 않느냐고 말하더군. 그래서 난 스승의 유언을 어기고 그 이에게 본
문의 심법을 전수해주기 시작했네."
양과가 말했다.
"그것은 그 자의 계략이었군요."
남해신니는 말을 이었다.
"그 뒤에야 난 이 모든 게 그 사람의 궤계였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지. 그 사람은 사부
님이 자신에게 심법을 전수해주지 않자 내게 전수해달라고 애걸했었지. 그러나 거절당하자
거짓으로 날 사랑한 것처럼 꾸며댄거지. 결혼한 후 그 사람과 나는 부부였으니까 자연히 심
법을 전수해주게 된 것이지."
남해신니는 아주 후회된다는 듯이 이를 악물더니 말을 이었다.
"나는 심법을 가르치면서 그의 무공이 나날이 고강해지는 것을 보고 무척 기뻐했네, 나는
심지어 내 공력을 써가며 그 이가 십이정경(二二正經)을 거침없이 통하게 하는 것을 도와주
었네. 심법을 절반쯤 전수했을때 그 이가 어느날 술에 흠뻑 취해 돌아 와서는 허튼소리를
해대는 것이 아니겠나? 천하의 영웅들을 쓸어버리고 무림의 패주가 되겠다고 말이야. 그때
나는 그 이가 취중에 한 말이어서 별로 마음 속에 담아두지 않았었네. 그러나 이틀 후 난
내 유일한 제자, 즉 해고의 어머니인 해부인에게서 여장문인이 남해의 도적인 악사신과 결
탁해서 남천대협(南天大俠)을 죽여버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네.
그때 나는 비록 깜짝 놀라기는 했으나 거짓말로 생각하고 돌아온 여노악에게 따져물었네.
그랬더니 그가 딱 잡아떼는 것이 아니겠나? 난 해부인을 데려다가 그와 대질을 시켰지. 휴,
난 한때 어리석어서 그런 자를 정인군자로 생각했던 거야. 그 일 때문에 10년 후에 해고의
아버지가 그 자에게 살해당하고 해부인마저 그 자의 마수에 당할 뻔했지……. 유감스럽게도
해부인도 소문을 들었을 따름이었고 증거를 대지는 못했네. 난 그 사람이 말수가 너무 많길
래 의심스러워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했더니 과연 해부인의 말이 사실이더군. 난 화가 나서
그와 한바탕 싸웠지. 여노악은 본문의 심법을 완전히 배우지 못했고 무공도 나보다 못 했기
에 숱한 구실을 대가며 변명하는게 아니겠나? 나는 그걸 믿어버렸네. 하지만 차후로는 절대
함부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고 다짐을 받아두었네. 그 자는 내가 말한대로 하겠노라고
대답하더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는 밖에서 해적들과 결탁해서 살인하고 화물을 강탈했는데 여러 가
지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었지. 나는 아주 기분이 상했지만 그의 아내라 그를
때리지도 못하고 죽일 수도 없었네. 그래서 심법 중에 제일 마지막 부분이자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한 대목을 전수해주지 않았네, 그 자가 애걸복걸하며 마지막 부분을 가르쳐 달
라고 하기에 난 '당신 이 잘못을 고쳐야만 전수해주겠어요'하고 말했네. 그랬더니 그 자는
눈물을 흘려가며 '이후로는 꼭 고치겠소'하고 대답하는게 아니겠나? '그래 어떻게 고치겠어
요?'하고 물었더니 '부인 말대로 하겠소'하고 대답하더군.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지. '
그럼 좋아요. 당신이 강탈해온 불의의 재물을 모두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주인을 찾을 수 없
는 것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절에 기부하세요. 그리고 무림인들 앞에서 앞으
로는 악당들과 손을 끊겠다고 선포하세요.'
여노악은 내 말을 듣더니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밖으로 나가버리는게 아니겠나? 나는 실망하
기는 했지만 또 여러 차례 권고를 했었지. 하지만 그는 제멋대로 행동하고 결코 내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으려고 했네. 그래서 난 화난 김에 삭발을 하고 비구니가 되어 해부인 일가
를 데리고 이 섬으로 옮겨왔지. 부처님 앞에 그를 대신해 속죄하려는 생각이었네. 그 자는
내가 떠나자 고삐 풀 린 망아지처럼 설쳐대면서 오독방의 기치를 내걸고 스스로 방주가 되
어 강호의 악한들을 끌어 모았지. 그리고 도처에서 독물을 수집해 들이고 야심이 가득해서
때가 되기만 하면 중원 땅에 쳐 들어가 패왕이 되려고 했네.
몇년이 지난 뒤 난 그가 천하삼절독의 하나인 정화를 훔쳐다가 신선도에 심으려 한다는 말
을 듣고 깜짝 놀랐었네. 난 일찍이 사부님에게서 삼절독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그것이 대 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그래 난 그 자의 뒤를 쫓아갔네. 절정곡에서 정화를
훔쳐가지고 나온 그를 만나 그 정화를 버리라고 말했더니 기어이 말을 듣지 않는게 아닌가?
말이 몇마디 오가지 못하고 우린 싸우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제서야 그가 본문의 무상 심법
을 완전히 배우지는 못했지만 스스로 사공(邪功)을 익힌 것을 알았다네. 그 자의 초식은 아
주 괴이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우리는 비기고 말았네.
백여 합까지 싸우다가 나는 드디어 그 자의 무공의 오묘한 점을 파악했네. 그의 사공은 비
록 속도가 아주 빠르기는 하지만 몸에 손상이 가는 것이었는데 공력이 커질수록 그 손상도
는 더 높아지는 것이었네. 그 자는 본문의 정종무공(正宗武功)을 토대로 사공을 닦았기에 잠
시 동안은 별 탈이 없겠지만 삼,사십 년이 지난 뒤에는 반드시 큰 화를 입게 되는 것이네.
이런 사공을 전수 받은 제자는 이십 년을 더 살기가 어렵지. 나는 싸우면서도 이런 사실을
그에게 얘기해 주었지. 계속 그렇게 살다간 천고에 악명만을 남길 것이라고.
그는 갑자기 몇보 훌쩍 뛰어 물러서더니 정화를 들고 '부인, 내가 왜 정화를 훔쳐 냈는지
아시겠소?'하고 물는게 아니겠나? 나는 쌀쌀한 기색으로 '정화를 가지고 남을 해치기밖에
더하겠어요?'하고 대답했네. 그러자 그는 큰 소리로 웃고 나서 다정한 눈길로 날 바라보며,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삼절독에 대해 얘기할 때 당신은 정화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골똘히
듣고 있더군. 만일 정화를 복용하거나 찔리게 되면 마음 속에 정이라는 것이 생기지 않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그 독이 발작해서 극심한 통증을 느끼게 된다고 하니까 당신은 그 정화
한 송이를 얻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했었지. 만일 사랑하는 이에게 딴 마음이 생기면
그것을 먹여서 징계할 수 있거든. 그 정화를 집에 옮겨다 심고 매일 그것을 보면 자기가 박
정해지지 않도록 다스릴 수 있지 않겠나?'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나를 바라보다가 또다시
말을 이었네. '나는 남편으로서 당신이 한 말을 하루라도 잊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정화를 훔
쳐다 부인에게 드리려는 것이오.' 그러면서 정화를 내게 넘겨주었지."
해고가 말했다.
"그 분이 사태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을 보면 역시 정이 남아 있었군요."
남해신니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사람은 정화를 이용해서 내 마음이 약해지기를 바랐고 또 잘 구슬리기만 하면 내가 심
법의 마지막 부분을 자기에게 전수해 주리라고 생각했던 거야. 하지만 그의 인간성을 확실
히 알고 있 는 내가 다시 속을 리가 있었겠나? 난 정화를 받아서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발
로 짓밟으면서 쏘아댔지. '금생금세에 당신이 심법의 마지막 부분을 전수받을 수 있으리고
는 생각하지 마세요!'
그는 아주 기가 죽은 듯이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돌려 절정곡쪽으로 가는게 아니겠나? 나는
길을 가로막고 말했지. '전 당신이 또 다시 정화를 훔쳐다가 사람들을 해치지 않기를 바라
요.' 그랬더니 그는 창피한 나머지 화가 나서 내게 덤벼들기 시작했네. 하지만 결국 공력이
나보다 못한 데다가 그가 닦은 것은 방문좌도(旁門左道)여서 그 사악한 것으로는 바른 것을
이길 수가 없었던 거지. 그는 나와 장에 격중당하자 황급히 도망치고 말았네. 듣자니 그는
내상을 입고 즉시 신선도로 치료하러 갔다더군. 나중에 또 듣자니 사람들을 절정곡에 파견
해서 슬그머니 정화를 훔쳐내려 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방금 양대협이 얘기했다시피 그
제서야 임자가 정화를 모두 소각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네."
양과가 웃는 얼굴로 물었다.
"그럼 사태님께선 어떻게 소룡녀와 만나게 됐습니까?"
"난 여노악을 쫓아낸 후 여제자들을 모아서 오독방과 대적해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해
를 당하지 않게 하려고 결심했지.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흰옷 입은 젊은 여인이 길 옆에 정
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지. 부축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중독된 듯 싶어 맥을
짚어보니 내공기초가 아주 훌륭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치료를 해주는 한편 그녀를 데리고
이 악귀도로 돌아왔네. 난 그녀를 치료해주고 제자로 받아들일 생각이었지. 그래서 내 몸의
진기를 불어넣어 독을 제거했지. 그런데 이 일을 여노악이 알게 될 줄 어찌 알았겠나? 그
자는 십여 명이 넘는 고수들을 거느리고 대대적으로 공격 해왔지. 난 방금 진기를 써서 그
처녀를 치료하느라고 공력을 지나치게 소모했기 때문에 그 자들을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
네. 그래서 그 처녀를 여노악에게 빼앗기게 된 것이지."
양과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사태님은 그 흰옷 입은 여인의 이름도 알 수 없었겠군요?"
"그 애는 계속 혼수상태에 있었기에 아마 내가 해독해준 일도 모를거야. 나중에 듣자니 그
애는 회복한 후 기억을 상실했고 여노악의 수하에서 총애를 받는 집법사자가 되었다더군.
여노악은 스스로 익힌 사공을 그 애에게 전수했고 그 앤 내공기초가 좋다보니 무공이 급속
히 늘어나서 7년 전에는 오독방에서 방주를 제외하고는 제일필수가 되었고 지금은 그 무공
이 거의 여노악을 따라잡을 정도라네. 휴, 그 애는 기초가 아주 좋았는데 유감스럽게도 사도
(邪道)에 빠지게 된 것이지. 그러지 않고 내가 그 애를 거두었다면 오독방 따위야 무서울게
없지."
남해신니는 한 바탕 이야기를 하고 나서 해고를 시켜 양과를 결박한 밧줄을 풀게 했다. 그
녀는 양과를 깊이 믿어 해고에게 그를 데리고 나가 쉬도록 하게 했다.
다음날 일찍이 일어난 양과는 해고를 따라 악귀동에 와서 남해신니를 만났다. 산정에 이른
양과는 대해를 바라보다가 북쪽에 악귀도보다 거의 열 배나 더 큰 섬이 있는 것을 보게 되
었다. 섬 은 녹음이 울창했다.
"저것은 무슨 섬인데 저렇게 숲이 울창한가?"
"저게 바로 신선도예요."
"뭐? 신선도가 이렇게 가깝단 말인가?"
"그렇기에 능히 오독방을 견제할 수 있는 거지요. 그렇지 않고 오독방이 전부 출동하면 중
원무림은 피바다가 되고 말 거예요."
해고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신선도에는 도처에 기이한 꽃과 과실이 있고 맑은 샘이 솟는다고 해
요. 그래서 아마 신선도라고 불리나 봐요. 그런데 이 악귀도에는 풀조차 자라지 않지요. 하
루라도 빨리 오독방을 물리치고 우린 신선도로 이사가야 해요."
"오독방은 무림 전반과 맞서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세력이 큰 것같지만 예로부터 사악한 것
이 바른 것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곧 무너지고 말거야. 그때 이 양모는 신선
도에 가서 사태님, 해부인, 그리고 임자를 만나보려고 해."
"그럼, 양대협님께서는 떠나시려고요?"
양과가 고개를 끄덕이자 해고가 다시 말했다.
"이 악귀도는 산수가 보잘 것 없으니 귀한 손님을 남아 있게 하기가 어렵지요."
"난 귀빈이 아니라 임자의 포로일 따름이야."
"당신은 어쨌든 손님이고 손님은 떠나게 마련인 법이죠. 악귀도는 손님을 묵게 하기 어려운
곳이죠."
"신선도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악당들이 살고 있고 악귀도는 보잘 것 없기는 하지만 협녀(俠
女)들이 살고 있지. 그러니까 아름다운 것이라고 해서 꼭 정말로 아름다울 수 있는게 아니
고 추악한 것이라고 해서 꼭 정말로 추악할 수만은 없는거지. 이 양모는 절대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는 않아."
"양대협님께서 그런 아량이 있으니 우리는 기뻐요."
"무공을 놓고 말하더라도 협객들은 무공을 악한 자를 징벌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데
쓰지만 악한들은 무공을 남을 못 살게 구는데 쓴단 말이야. 그러니까 무공 자체에 정도와
사도의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 바른 사람과 그른 사람의 구분이 있게 되는
것이지."
"아유, 당신은 정말 견식이 높군요."
양과는 그 말에 웃고 나서 문득 무슨 일이 생각났는지 물었다.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되지?"
"어젯밤 당신은 달을 보셨나요?"
"아니, 달이 없던데?"
"그건 어제가 칠월 그믐이었기 때문예요."
"그럼 오늘은 팔월 초하루겠구만 그래. 8월 15일 신교 교주가 전세하는 날까지 날짜가 14일
밖에 남지 않았군. 그런데 아직 난 남해에 있으니 이러다가 시간을 어겨 인골염주를 와불산
으로 가져가지 못하면 의형 합포장로가 위험할텐데."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당신의 접아를 생각하는 것인가요?"
해고가 이렇게 말하며 낄낄 웃자 양과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어서 사태님을 만나러 가자."
해고는 양과를 데리고 악귀동으로 들어갔다.
남해신니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가 두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웃으면서 물었다.
"양대협님, 잘 주무셨소?"
"사태님께서는 후배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사태님 앞에서 대협이란 두 글자는 제게 어울리
지 않습니다."
"당신은 천하에 유명한 사람인데 이렇게 겸손하니 정말 심성이 좋은 분이오."
"이 후배는 섬을 떠날 생각인데 사태님께서는 보내주시렵니까?"
"며칠 더 묵다 가면 안되겠나? 난 임자와 함께 무공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이 후배도 사태님을 만난 김에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 중요한
일 때문에 오래 묵을 수가 없습니다."
"떠나든 말든 임자 마음대로 하게. 난 말리지 않을테니."
"그러면 아주 고맙습니다."
해고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양대협님께선 무슨 중요한 일이 있어요? 이삼일 묵어도 안되나요?"
"그 일은 서역신교와 중원 무림에 관계되는 일이기에 더이상 묵을 수가 없어."
"중원 무림과 서역신교가 어떻게 관계를 가지게 되었죠?"
남해신니도 이상하게 생각되어 물었다.
"신교는 원래 중원 무림과 별로 왕래를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서역신교의 전세교주가 8월 15일에 와 불산 남쪽에서 세상에 나오기
로 되어 있는데 그 교주의 신물을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만일 이 인골염주를 제때 넘
기지 못 한다면 큰 화가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양과는 오독방과 모용세가가 인골염주와 전세교주를 이용해서 신교를 통제하려 한다
는 것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남해신니가 중얼거렸다.
"근 몇달 동안 오독방에서 병력을 자주 이동시키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바로 그 일 때문
이었구만……. 만일 오독방이 신교를 통제해서 두 문파가 합치게 되면 중원 무림은 그것을
당해낼 수 없을 거야. 아주 위험스런 일이지."
그리고 남해신니는 큰 배를 준비하라고 명령하고 자기가 직접 양과가 중원으로 돌아가는 것
을 배웅하려고 했다.
"사태님이 아니었다면 이 후배는 신선도에 갇혔을 것이고 8월 15일에는 중원 무림에 큰 재
앙이 생겼을 것입니다. 사태님께서는 이번에 중원 무림을 구해주신 셈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우연이고 양공자의 협의지심(俠義之心)이야 말로 천지를 감동시키는 것이네.
임자는 반드시 대사를 이를 수 있을 것이네."
세 사람이 산에서 내려와 부두에 도착하자 큰 배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사태님, 이 후배에게는 한가지 청이 있습니다."
"어서 말하게."
그런데 해고가 갑자기 말허리를 잘랐다.
"당신은 사태님에게 무채접을 놓아달라고 하실 작정이죠?"
"그래, 임잔 어떻게 내 생각을 그렇게 꼭 집어내나?"
"어젯밤 부부간의 그 사랑을 우린 모두 보았으니까요. 당신이 그 여인 생각을 하지 않는다
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요……."
"이 양모는……."
양과는 꺽꺽거리다가 말이 막혀 대답을 잇지 못했다. 남해신니가 침묵을 지키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자 양과는 다시 말했다.
"사실 접아는 마음씨가 선량합니다. 그녀는 오독방을 따라 그 무슨 커다란 나쁜 짓을 한 일
이 없습니다."
그러자 해고가 또 큰 목소리로 참견했다.
"그 년이 당신을 신선도로 끌고가려고 했는데도 당신은 그녀를 대신해 통사정을 하는군요?"
양과는 한숨을 쉬면서 생각했다.
'접아는 날 깊이 사랑하다 보니 내게 중요한 일이 있는 줄 모르고 날 신선도에 붙들어 두려
고 한 것이다. 그녀는 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봐 겁이 났던거지.'
그때 배 위에서 발을 묶인 사내들이 줄지어 내려왔는데 옷차림이 남루하고 모두들 수척해
보였다. 아마도 수개월 동안 잘 먹지 못한 듯 싶었다.
"저 사람들은 무슨 사람들인가?"
"포로가 된 오독방의 제파들예요. 섬에 일꾼이 모자라서 저들을 이용하죠."
그 말을 듣고 양과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독방 제자들은 중원땅에서 우쭐거리면서 갖은 나쁜 짓을 다했지. 그런데 사태님은 그들
을 죽여버리지 않고 일을 시키니 사람을 쓸모있게 써먹는 셈이군.'
갑자기 두루마기를 입고 선비모양을 한 사내가 양과 앞을 지나 가다가 멈추더니 눈도 깜빡
이지 않고 뚫어질듯이 양과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더러운 놈 같으니라고, 아직도 물러가지 않고 및하는 거냐?"
해고가 욕설을 퍼부었다. 그녀는 그 선비란 놈이 나쁜 생각을 품고 자기를 바라보는 줄 알
았던 것이다.
해고는 미인이었기에 포로가 된 오독방 제자들 중에서 극히 사악한 놈들은 대담하게도 그녀
에게 침을 흘리곤 했었다. 그때마다 오독방 제자들은 해고에게 물씬 두들겨 맞거나 바다에
던져져 상 어밥이 되는 일도 있었다. 해고는 눈 앞에 양과가 있어서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욕설만 퍼붓고 있었다.
그 사내는 해고의 욕설을 듣지 못한듯이 계속 양과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내의 뒤에 있
던 통통한 사내가 등을 밀면서 귓속말을 했다.
"어서 가세. 저 시끄러운 놈을 상관할 필요가 뭐 있나?"
통통한 사내는 동료가 움직이지 않자 자기도 눈길을 들고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는 것이었
다.
세번째 사람은 도사였는데 그 도포자락은 본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웠다.
"임자들, 두 사람은 왜 멍하니 서 있나?"
그 도사는 이렇게 묻다가 눈길을 들어 양과를 바라보더니 역시 마술에 걸리기라도 한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해고가 대노해서 한 건장한 여인의 손에서 가죽채찍을 빼앗아 들더니 호되게 때리기 시작했
다. 그 세 사람의 얼굴에는 대번에 핏자국이 생겨났다.
선비차림을 한 자가 급히 물었다.
"당신은 양공자가 아니시오?"
"아니 당신들은 시정삼걸이 아니시오?"
그러자 통통한 사내가 물었다.
"당신은 양효비요? 아니면 신조협 양과요?"
도사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당신의 오른팔은 정말 잘린거요?"
남해신니와 해고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양과가 물었다.
"난 양과요. 그때 세분의 공격을 받고 어찌 혼이 났던지……. 황약사 선배가 도와주지 않았
다면 난 죽음을 면치 못할 뻔했소."
통통한 사나이가 큰 소리로 웃어댔다.
"보게나, 이 사람은 과연 신조협이야. 양효비 그 나쁜 놈은 오독방의 장세사자인데 어찌 감
히 이 곳에 올 수 있겠나?"
그러자 선비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아니야. 양효비가 신조협으로 변장해서 진짜와 가짜를 분간 할 수 없게 만들었잖아? 심지
어 노완동 주백통도 구별하지 못하잖았나? 그 놈이 신조협으로 변장해서 악귀도에 와 남해
신니를 속일 수도 있지 않은가?"
도사가 큰 소리를 쳤다.
"그렇고 말고. 양효비가 와서 잠복한 후 여노악과 안팎에서 악귀도를 협공할 수도 있는 일
이지."
세 사람은 눈길을 주고받더니 갑자기 양과에게 달려들었다. 양과가 옷소매를 크게 내치자
마치 태풍에 휩쓸린듯이 세 사람은 모두 나자빠지고 말았다.
"이 양모는 임자들과 아무런 원수도 진 일이 없는데 왜 이렇듯 못살게 구는거요?"
세 사람은 족쇄를 차고 있었기에 한참만에 몸을 일으킬 수 있었는데 일어난 뒤에 또 요란하
게 웃어대는 것이었다. 건장한 여인 몇 사람이 뛰어와 검으로 그들의 등을 겨누고선 남해신
니의 명만 기다리고 있었다. 명령만 내리면 바로 죽일 태세를 취했다.
이 세 사람은 한 바탕 웃고난 후에야 두 손을 마주잡고 양과에게 예를 올렸다.
"진짜 신조협님이셨군요. 우리가 실례를 범한 것을 양대협님께서는 용서해주십시오."
"이 양모는 이미 삼걸의 대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협의를 행하는 세 호한이 어떻게 되
어……."
양과는 말끝을 흐렸다. 그는 시정삼걸이 어째서 남해신니에게 오독방의 제자로 간주돼 이곳
에 갇혀 옥살이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해고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저 놈들은 이미 오독방에 귀의했다가 제 어머니에게 잡힌 거예요. 호한이라니, 당치않은 말
예요."
퉁소부는 선비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우린 그 양효비란 나쁜 놈의 꼬임에 빠져든 것이오."
그 말에 양과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임자들은 양효비에게 속아 나쁜 길로 빠졌는가?"
수교장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 놈은 궤계가 많은 놈인데 우린 경솔하게 그 놈의 말을 믿고 모든 나쁜 짓을 양대협께서
한 것으로 알았지요……. 휴, 이젠 후회해도 늦었지만!"
양과는 속으로 생각했다.
'시정삼걸은 협의를 행하기로 이름난 사람들인데도 효비동생에게 이처럼 해를 입었구나. 효
비를 만나면 난 어떡하면 좋을까? 아예 그 애의 무공을 폐해버려야겠구나.'
초혼도사가 말했다.
"우리가 양대협님을 만난 것은 천의(天意)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양모를 만난들 무슨 소용이 있소?"
"우리들은 경솔하게 양효비의 요언을 믿고 그 놈을 따라 도처에서 살인방화를 하고 신조협
의 명예를 더럽히다가 해부인에게 잡혀 이리로 왔습니다. 생각할수록 한심한 일이고 사람들
을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
퉁소부는 선비도 말했다.
"우리 삼형제는 양대협님의 조처만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세 사람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양과는 소매를 내쳐 전력으로 시정삼걸을 받들어
일으켰다. 그것을 본 해고가 감탄하며 손뼉을 쳤다.
수교장이 말했다.
"양대협님, 차라리 시원하게 우리를 죽여 주십시오."
"이 양모는 사람을 죽일 이유가 없소."
"우리가 양대협님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는데 그 죄를 어찌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양대협의 손에 죽게 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퉁소부는 선비와 초혼도사도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대협께선 어서 손을 쓰십시오."
시정삼걸은 고개를 내밀고 죽기를 기다렸으나 양과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성현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잘못이 없겠소? 세 분께서 반성하고 계신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오."
수교장이 말했다.
"우리는 이미 죽기로 결심했으니 양대협께서는 손을 쓰시기 바랍니다."
"난 절대로 당신들을 죽이지 않겠소."
남해신니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양공자는 과연 도량이 넓군요. 난 정말 탄복했소."
해고가 귓속말로 물었다.
"양대협님, 당신은 정말 저 사람들을 용서하실 건가요?"
양과는 웃기만 할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해고는 양과를 경모해 마지 않았다.
초혼도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양대협님이 넓은 도량으로 우릴 죽이려 하지 않으니 어떻게 하겠소?"
수교장이 말했다.
"그럼 우린 자결해야지요."
퉁소부는 선비도 말했다.
"그 말이 옳소. 이젠 양대협님도 만나뵈었으니 세상에 더 바랄 게 뭐 있겠소?"
그리고 시정삼걸은 각기 장으로 자기들의 정수리를 쳐서 즉시 죽어버렸다.
모두들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양과는 한탄했다.
"그 나쁜 녀석의 꾀임에 빠져 실수를 한건데…."
남해신니는 염불을 했다.
"선과 악은 종이 한 장 차이밖에 없는 것. 시정삼걸은 잘못을 참회했으니 사방극락세계로
갈 것이오."
해고는 아연실색해서 중얼거렸다.
"저 사람들이 그럴 필요까지 있었나요? 공을 세워 속죄를 하면 더욱 좋았을텐데……."
남해신니는 해고의 머리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해고야, 넌 아직 모르느리라. 엎지른 물은 다시 주워담지 못 하는 것과 같이 저 사람들에게
죽은 사람들도 다시 살아날 수는 없는 것이다. 훌륭한 일을 천 가지를 한다 해도 그 잘못을
씻을 수는 없는 것이란다."
"그럼, 저 사람들은 꼭 죽어야 했나요?"
"저 사람들이 저지른 죄악은 실로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니 죄를 짊어지고 사는 것보다는
깨끗하게 죽는게 낫느니라. 그들로 말하자면 죽음이 바로 해탈이니라."
양과가 말했다.
"그러니까 사람은 언제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힘써야 하고 일단 큰 잘못을 저지르면 시
정삼걸처럼 유감없이 인생을 끝마칠 줄도 알아야 하지."
해고는 알동말동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말했다.
"그 사람들 생각은 이제 그만 하죠. 즐겁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죠."
양과는 남해신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태님, 접아의 일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무채접이 임자의 가까운 사람이고 또 임자가 보장하는 한 난 못살게 굴지는 않겠네. 사실
나도 그 애가 훌륭한 처녀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내심 내 곁에 두고 싶어하는 것일세. 유감
스럽게도 그 앤 아직 각성하지 못했기에 여노악을 배반하려고 하지 않네."
남해신니는 문득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내가 풀어주면 임자는 그 애를 데리고 갈 셈인가 아니면 신선도로 돌려보낼 셈인가?"
양과는 생각했다.
'이번에 와불산으로 가는 길은 매우 위험하니 접아를 데리고 갈 수는 없다. 그러나 그녀를
신선도로 보낸다면 여노악이 그녀에게 오독방을 위해 일하게 할텐데 그것은 그녀를 해치는
것이 아닌가?'
남해신니는 양과의 심사를 알아챈 듯 웃음을 지었다.
"임자가 날 믿는다면 무채접을 내게 맡겨두고 가게."
"그럼, 사태님께서 수고해 주십시오."
"그런 겸사의 말은 말게나. 양공자, 어서 배에 오르게."
양과가 말했다.
"사태님께서는 공사다망하시니 여기까지 배웅하시면 됩니다. 사태님께서는 오독방을 경계하
도록 하십시오."
"그럼 더 멀리 배웅하지는 않겠네."
양과가 배에 오르자 큰 배는 닻을 올리고 부두를 떠나기 시작했다. 양과는 고물 쪽으로 가
서 왼팔을 흔들며 남해신니와 해고에게 작별을 고했다.
큰 배는 점점 하나의 검은 점처럼 작아졌다. 해고가 말했다.
"양대협님께서는 언제 돌아오실까요?"
"이번 걸음이 순조롭기만을 바랄 뿐이다."
"손님은 손님이고 떠날 사람은 어쨌든 떠나야지요. 사태님께서 아무리 잘 대해준다고 해도
이곳은 결국 그 분의 집은 아니니까요."
남해신니는 그 말을 듣고 자애로운 웃음을 띄우며 물었다.
"해고는 뭘 생각하지?"
"사태님, 집법사자가 소룡녀라면 양대협님이 다시 그녀와 부부 사이로 만날 수 있을까요?"
"널 어떻게 생각하니?"
"그런데…… 양대협님에겐 또 무채접이란 처녀가 있잖아요?"
"그건 남의 일이니 우린 상관하지 말자구나."
"난 상관하지 않겠어요."
그 말에 남해신니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사태님, 왜 웃으시죠?"
"해고가 이제는 다 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다."
"절 비웃지 마세요."
해고는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지면서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기분이 가라앉은 해고가 다
시 말했다.
"사태님, 우리는 왜 그를 붙잡아둘 수 없는거죠?"
남해신니는 한동안 생각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그 사람 같은 사내는 천하를 정처없이 떠돌아다니기를 좋아 하니 그를 만류할 만한 여인은
얼마 없단다. 그 사람을 머무르게 할 수 있는 여인이 있다면 그 여인은 실로 보통 여인이
아닐 거야."
제28장 모용세가
면면히 뻗어간 와불산은 먼 곳에서 바라보면 마치 누워서 쉬고 있는 미륵불의 형상이었다.
와불산도 수림이 무성하고 경치가 수려한 것만은 사실이나 강남엔 명산들이 너무 많아 와불
산은 그 명산들 축에 끼이지는 못했다.
와불산이 무림 사람들에게 그렇게 이름이 난 것은 순전히 와불산 남쪽 기슭, 미륵불의 배
형상과 같은 곳 아래 모용세가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모용세가의 무공이 벌써 수백년이나 이어져 내려오며 강호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데 그 세력
이 굉장한 것은 더 말할 것 없고 재산도 엄청나 도무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모용세가
는 이런 세력과 부로써 천하의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을 부단히 자기 주위에 집결시켜 왔다.
모용협의 대에 이르러서는 낡은 집 외에 새 집들도 많이 지어 그 부중의 크기가 임안(臨安)
에 있는 황궁을 거의 따라갈 정도였다.
모용협의 수하에는 고수들이 많았거니와 문하의 제자들만 해도 족히 칠백명은 넘었다.
모용협의 수하에는 군사(軍師)가 둘 있었다. 총관인 주명과 부관인 소이선생이었다. 주명은
지모가 많아 소제갈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모용협은 또 소년시절부터 친하게 사귀어 의형제까지 맺은 무림 고수 다섯이 그의 가까이에
있었는데 큰 형은 위방성(魏方成), 둘째 형은 적량, 셋째 형은 상청, 넷째 형은 유대덕, 다섯
째형은 풍자귀였다. 모용협은 막내인 여섯째였다. 둘째형 적량은 3년 전에 병으로 죽었다.
상청, 유대덕, 풍자귀는 당대의 일류 고수들이다. 그러나 그 셋의 무공을 합쳐도 큰 형 위방
성을 당해내지 못했다. 위방성은 쉰 살이 가까운 사람인데 내가(內家)의 금장공이 유명했다.
그는 총관인 소제갈 주명과 더불어 모용부의 뭇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모용협의 존경
을 받고 있었다. 그의 무공은 모용협의 무공과 비슷한 정도였다.
그러나 모용협이 자기의 오른팔로 여기고 있는 사람은 그래도 탁장청이었다. 탁장청의 절정
검법이 세상에 둘도 없는 독특한 검법인 것에도 그 연유가 있겠지만 그보다도 그들 둘은 어
려서부터 지금까지 사귀어온 절친한 친구인 까닭도 있었다. 그러기에 모용협은 매번 큰 일
이 있어 출타를 할 때면 다른 사람은 안 데리고 나가도 탁장청만은 꼭 데리고 나가곤 했다.
오늘, 모용협은 화원의 정자 안을 왔다갔다 하면서 탁장청의 일을 근심하고 있었다.
소이선생이 거와장에서 도망쳐 와 의제 탁장청이 오자겸에게 붙잡힌 일을 보고하자 모용협
은 황황불안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데도 소제갈 주명은 수염도 없는 아래턱을 매만지며 빙그레 웃었다.
"근심하지 마십시오. 오자겸이 탁공자를 어쩌지는 못할 겁니다."
모용협은 오자경의 사람 됨됨이를 익히 알고 있어 근심이 되는 지라 미간을 찌푸렸다.
"그 오 영감은 오독방 주작분타의 타주로서 악독한 인간인데 아우가……."
"하지만 오자겸의 딸 오군영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오자겸은 아들 오군량보다 딸 오군
영을 더 사랑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5년 전에 그렇게 힘들여 사위를 고르려 했겠습니까?"
주명의 말에 모용협이 물었다.
"그렇다면……."
"오군영이 우리 손에 있기에 오군영이 잘못 될까봐 탁장청 공자님을 그들이 해치질 못한단
말입니다."
모용공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의 말을 들으니 근심이 덜어지는 것같소."
모용공자는 큰 소리로 수하를 불렀다.
"여봐라, 오소저를 이리 끌고오너라."
"가만, 공자님께선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주명이 물었다.
"오군영으로 내 아우 탁장청을 바꿔와야 하질 않소. 그러려면 오군영을 어서 거와장으로 보
내야지 늦었다가 그 사이 무슨 변고라도 생기면 어쩌겠소?"
모용공자의 말에 주명은 크게 웃었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가만 있으면 거와장에서 탁장청 공자님을 모시고 올 겁니다."
"글쎄……."
모용협은 주명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주명은 자신있게 말했다.
"오자겸은 딸을 구하려는 마음만 급한 것이 아니라 인골염주와 전세교주를 빼앗아가는 것도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기에 꼭 올 겁니다. 그는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하는 일들도
미리 다 대비책을 세우고 있지요."
그래도 모용협은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팔월 열사를 되었는데도 거와장 쪽에선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그렇게 되자 모용협
은 물론 소제갈 주명마저도 조급해졌다.
모용협은 정자에서 왔다갔다 하며 좌불안석이었다. 그런데 제자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아우에게 무슨 소식이 없느냐?"
모용공자가 급히 물었다.
제자는 인사를 하고 대답했다.
"공자님의 예측이 맞았습니다. 전해온 소식에 의하면 오자겸의 부자는 나흘 전에 거와장을
떠나 탁장청 공자님을 데리고 와 불산으로 오고 있답니다."
모용공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흘 전에 떠났다구? 그런데 왜 이제야 보고하는 거냐? 전서 구 세 마리는 원하는 거냐?"
"제자도 전서구의 쪽지를 받고 이렇게 달려온 것입니다요. 오씨 부자가 깊은 밤 스무명의
고수들을 데리고 원문으로 빠져나가 이곳으로 떠났기에 그곳에 있는 우리 염탐꾼이 어젯밤
에야 비로소 소식을 알고 급히 전서구를 띄운다고 쪽지에 썼더군요."
모용협은 그 말에 정자의 난간을 손바닥으로 탁 쳤다.
'이 오영감탱이가 교활하기 짝이 없구나. 만만히 볼게 아니다.'
모용협은 제자에게 분부했다.
"넌 가서 각 초소에 알려라. 시시각각 경각심을 늦추지 말고 있다가 아우 소식만 있으면 즉
시 보고해야 한다고, 만약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간 엄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가서 알려라."
제자는 허리를 굽신거리고는 가버렸다.
그런데 이 때 또 다른 제자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와 보고했다.
"공자님, 주작분타 타주 오자겸과 강남 소검객 오군량 그리고 거와장 무림고수 여덟 명이
탁장청 공자님을 끌고 이미 대문 앞에 이르고 있사옵니다."
"아니, 뭐야? 대문 앞에 당도하기까지 뭣들 하고 있었던 거야?"
모용협은 놀라 큰 소리를 쳤다.
제자는 놀라 무릎을 털썩 꿇으며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제, 제자도 모릅니다. 그것들이 어떻게 대문 앞까지……."
모용협은 화가 나서 제자를 걷어찼다. 제자는 저만치 멀리 날아가 떨어졌다.
"어서 주선생, 소이선생, 위방성 형님, 풍자귀 형님을 부중 대문 밖으로 불러라. 난 먼저 대
문 밖으로 간다."
그리고는 자기 먼저 황급히 대문으로 달려갔다.
외원 두 개를 지나다 그는 위방성을 만났다. 위방성이 물었다.
"공자는 신색이 왜 그렇소?"
"형님, 마침 잘 만났네요. 어서 나하고 대문 밖엘 나가봅시다. 오자겸 부자가 탁장청을 끌고
왔답니다."
그들 둘이 대문에 이르자 어느새 주명이 부중의 고수 스무 명 을 데리고 와 있었다.
'소제갈은 정말 작은 제갈량이구나. 매사 생각이 남보다 앞서 거 든.'
모용협은 이렇게 내심 탄복했다.
주명은 한 손으로 그 밋밋한 턱을 쓰다듬으며 다른 한 손으로 여유있게 부채질을 하면서 빙
그레 웃었다.
"이젠 마음이 놓이시겠지요?"
"선생의 신기묘산은 정말 귀신 같습니다."
모용협은 마음이 조급해 앞뒤를 가리지도 않고 대문을 열라고 명했다.
주명이 급히 손을 내저었다.
"우선 쪽문으로 내다보시고 방비책을 세우는게 좋지 않을까요?"
"그것도 좋겠소."
호용협은 주명의 말을 듣고 대문으로 가서 쪽문을 열고 대문 밖을 내다보았다. 대문 밖에는
자기 부하들이 창칼을 들고 두 줄로 서 있는데 거기에서 삼십여 보 떨어진 곳에 오씨 부자
와 고수이십여 명이 서 있었다. 탁장청은 꽁꽁묶인 채 이십여 명의 고수들 속에 잡혀 있었
다.
"오자겸의 표정이 똑똑히 보입니까?"
주명이 뒤에서 물었다.
모용협은 쪽문을 도로 닫고 돌아서며 말했다.
"오영감탱이가 퍽 초조해 하는 것같소."
주명은 부채질을 하며 빙그레 웃었다.
"오영감은 공자님보다 더 조급할 것입니다."
탁장청을 급히 구해낼 생각만 하던 모용협이 물었다.
"그럼 선생의 의사는……."
"우리는 참고 기다림이 상책인 것 같습니다. 오영감이 속이 탈대로 타게 내버려둡시다."
"그러다 내가 먼저 속이 타 죽겠소."
"공자님이 그렇게 조급해 하실게 뭡니까?"
모용협은 발을 굴렀다.
"아우가 오영감 손에 있는데 내가 왜 속이 타지 않겠소."
그 말에 주명은 또 빙그레 웃었다.
"공자님께선 마음 놓으십시오. 오자겸이 왜 천리 먼 곳에서 기세등등하게 찾아왔습니까? 오
군영을 바꿔가려는 욕심만이 아니지요. 또 다른 여러가지 조건을 내놓을 것입니다. 우리 쪽
이 조급해 할수록 오영감은 더 기세등등해 할 겁니다. 우리가 태연자약하고 심드렁해 하는
것처럼 보여야 그들은 풀이 죽습니다."
그러나 모용협은 그 말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오."
그러자 풍자귀와 같이 모용공자의 옆에 와 있던 소이선생이 그 말에 대답했다.
"오자겸은 우리보다 더 조급한 입장에 처해 있지요. 그렇지 않으면 그 먼 데서 자기가 직접
오군영을 바꿔가려고 오겠습니까? 그러면서도 그들은 마치 먼 곳에서 온 귀빈 행세를 하고
있으며 갑작스레 우리가 있는 곳에 나타나는 것으로 자기들의 위풍을 보이고 있지요. 그래
서 자기네 주작분타가 만만치 않음을 보이고 마치 자기네가 오군영을 바꿔가려고 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기 네를 모셔온 것같은 분위기를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용협은 그제서야 깨닫고 정신이 나서 말했다.
"두 선생의 말이 옳소. 우리가 문을 닫은 채로 여기서 나가지 않고 오영감이 온 일에 무관
심하는 척하며 시간을 끌면 그들은 마침내 기가 한풀 꺾일거요. 그때에 가서는 저것들이 우
리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모두들 그 말에 크게 웃었다.
대문 밖에 서 있는 오씨네 부자들은 조급해졌다.
"저놈들이 왜 아직도 안 나올까요?"
오군량이 초조해 하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무슨 대책을 꾸미고 있는가 봐."
"벌써 반 시간이나 지났는데."
오군량은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한 번 소리쳐 봐라."
오군량은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 고함을 질렀다.
"모용협, 그냥 안 나오겠어? 그럼 우린 탁장청의 손을 끊어 버릴테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대문 안은 잠잠했다.
오군량은 보초들이 서 있는 대문 앞으로 다가가 보초들에게 물었다.
"그래 안에다 전갈은 했겠지?"
"전갈은 벌써 했소."
"그런데도 이 모용협이 왜 안 나와?"
오군량은 눈을 부라렸다. 보초 두목도 오군량을 못마땅하다는 듯 노려보았다.
"우리 공자님은 공사다망하신 분이오. 마음대로 만나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오."
"뭐야? 넌 무슨 물건짝이기에 감히 내 앞에서 무례하게 굴어?"
오군량은 검을 쫙 뽑아들었다.
"흥, 넌 도대체 무슨 물건짝이기에 모용세가 부중 앞에서 무엄하게 구는거냐?"
보초도 이에 질세라 눈을 부라리며 대꾸를 했다.
대노한 오군량은 보초 두목에게 칼을 휘두르며 덮쳐들려고 했다. 보초들도 창칼을 꼬나들고
는 덤벼들 기세다. 그러나 주인 모용협의 명이 없었기에 함부로 손을 쓰지는 않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오자겸은 아들을 꾸짖어 뒤로 물러서게 했다.
오군량은 보초들에게 눈을 부라리며 투덜거렸다.
"운수 좋은 줄 알아라."
탁장청은 그걸 보고 득의양양하여 껄껄 웃었다. 거와의 독무에 중독되었기에 그 소리는 크
지 못했다.
"우리 모용세가의 보초들도 어쩌지 못하면서……. 하하하."
"하하가 뭐야?"
오군량이 또 화를 내고는 윽박질렀다.
"하하가 뭐냐고? 경멸의 뜻이다. 그것도 몰라?"
오군량은 깐죽거리는 탁장청에게 된주먹을 내질렀다.
"까불다간 죽을 줄 알아라."
탁장청은 아픔을 참느라고 이를 악물고 매서운 눈길로 오군량을 노려보며 악다구니를 했다.
"네가 날 죽여? 어디 죽여봐라."
오군량은 탁장청의 살기어린 눈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그는 으름장을 놓으며 제
압하려 들었다.
"죽이라면 못 죽일 줄 아느냐?"
검을 치켜들고는 내찌르려 했다.
그러나 탁장청은 눈 하나 깜짝하지도 않았고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군량은 탁장청을 단 칼에 요절내고 싶었다. 그러나 탁장청을 죽이면 자기 누이동생의 생
명도 위태롭다는 것을 알기에 차마 죽 일 수는 없엇다. 그는 탁장청을 정말 찌르는 척 몇
번 허위동작 을 해보였을 뿐이다. 그러나 탁장청의 얼굴에는 조금도 겁내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두고보자. 내가 조만간에 널 죽여버리지 않는가."
오군량이 매몰차게 내뱉었다.
탁장청은 오히려 이죽거리면서 코웃음을 쳤다.
"조만간 내 손에 죽지나 말지."
옆에서 들어보면 탁장청의 말이 더욱 무서움을 느끼게 했다.
탁장청의 절정검법의 위력을 잘 알고 있는 오군량은 탁장청의 노한 눈길을 외면해 버렸다.
지모 있는 오자겸은 모용세가 사람들이 그냥 나오지 않는 뜻을 대강 짐작하고 다시 보초들
에게 내공을 모아 말했다.
"수고스러운대로 또 한 번 전갈해주시오. 본 타주는 이제 일각을 더 기다려 보겠는데 그래
도 모용공자가 바빠서 나오지 않는다면 본 타주는 즉시 돌아가겠다고 전해주시오."
내공을 모아 하는 말이기에 자기의 음성이 모용 부중 깊은 곳까지 똑똑히 들릴 것이라고 믿
었다. 그러니 모용협이 대문 가까이 있지 않다고 해도 못 들을 리 없으리라.
오자겸의 예상대로 모용협은 대문 안에서 그 말을 똑똑히 듣고 뭇사람들을 돌아보며 웃었
다.
"이 영감탱이가 지금 무공을 과시하고 있소. 이젠 나가봐야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무서워
안 나가는 걸로 알겠소,"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명하여 대문을 열게 하고는 거드름을 피우며 의젓하게 나갔다.
모용협은 오늘 담황색 명주 두루마기에 허리에는 녹색 띠를 맸다. 젊고 생기 있어 보였다.
주인이 나타나자 대문 앞에 서 있던 무사들은 양쪽으로 비켜섰다. 주명, 소이선생, 풍자귀
그리고 고수 스무 명이 모용협의 뒤에 좌우로 늘어서 옹위하고 있었다.
오자겸은 지난 일이 후회되기도 했다. 5년 전 그때 강호에 유명한 저 모용협에게 딸애를 결
혼시켰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서서히 구슬려 내게 복종하게 했더라면 오늘날의 이런 일이
일어나 지도 않았을텐데.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선 만회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또 다
른 한편, 모용협을 사위로 삼았다 해도 모용협이 자기 말을 듣지 않고 그냥 오독방과 대적
하여 나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사위를 삼지 않는 것보다 더 못할 것이 아닌가? 이런 생
각을 하며 오자겸은 후회할 필요가 없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자겸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맞쥐며 인사를 건넸다.
"모용공자님, 정말 천호만환(千乎萬喚)해서야 나오십니다. 하하하."
모용공자는 그 말에 안색이 변했다.
천호만환해서야 나온다는 말은 당나라의 대시인인 백거이의 비파행(琵琵行)에 나오는 말이
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하루는 백거이가 밤에 배를 타고 물놀이를 나갔는데 뜻밖에 자주
애절한 비파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백거이는 배를 그 곳으로 몰게 해 비파 켜는 사람
을 만나보고자 불렀다. 열 백번을 불러서야, 즉 천호만환해서야 비로소 비파로 얼굴을 반쯤
가린 여인이 나타났다. 그 여인은 원래 소녀시절 악기(樂妓)였는데 나이가 들자 상인에게 시
집와서 장사치의 부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상인 남편의 환심을 못 얻고 있
었다.
그러니 오자겸은 지금 이 구절을 인용하여 모용협을 늙은 나이에 시집온 기생이라고 빗대놓
고 모욕한 것이다.
모용협과 주명 그리고 소이선생은 모두 사서오경을 통독한 사람들이라 오자겸의 그 모욕적
인 언사를 알아듣지 못할 리 없었다.
소이선생이 코웃음쳤다.
"아니, 오타주는 옛날 시사(詩詞)를 배우러 여기까지 오셨소?"
그러자 주명도 부채질을 하면서 오자겸을 비아냥거렸다.
"저분들이야 학식이 깊어 입만 열면 시가 나오는 태백금성 같은 분이신데 우리 같이 창칼이
나 휘두를 줄밖에 모르는 강호인들 이 어떻게 면담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분들 기분 상하
지 않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모용협도 주명의 뜻을 알아 차리고 빙긋 웃었다.
"선생의 말이 옳소. 우리 같은 사람은 피해 들어 가는 게 좋겠소."
둘은 손을 잡더니 도로 대문 안으로 들어가려고 돌아섰다. 탁장청의 일엔 전연 무관심한 듯
했다.
"공자님, 가만, 거기 좀 서시오."
오자겸이 급히 소리쳤다.
"왜 ? 무슨 일이시오?"
모용협이 고개를 돌렸다.
"이 늙은것이 여기까지 온 것은 순전히 탁장청 공자 일로 왔소이다. 그래 모용공자는 탁공
자의 생사에 전혀 신경쓰지 않을 셈이오?"
모용협은 결박당해 있는 탁장청을 한번 힐끗 보고 나서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탁장청이 내 친구이기는 하나 아깝게도 거와 독에 중독이 되었으니 이젠 소용없는 사람이
되었군요. 그런 사람을 내가 신경 쓸 필요가 뭡니까?"
오자겸은 그 말이 참으로 뜻밖이었다.
"아니, 탁공자는 모용공자와 의형제가 아니오?"
모용협은 한숨을 지었다.
"난 그 사람 무공을 이용하자고 의형제를 맺었던거요. 그런데 지금은 폐인이 되었으니 그런
의형제를 둬서 무슨 소용이 있겠소? 미안하지만 오타주께서 도로 데리고 가시오."
모용협의 속마음을 알고 있는 탁장청은 일부러 노한 표정을 지어 모용협을 욕했다.
"이 놈 모용협아, 네가 이렇게 박절하게 굴 줄은 몰랐다. 내가 풀려나기만 하면 너같은 놈은
절대 용서치 않으리라."
그러자 모용협이 빙그레 웃었다.
"네가 날 용서치 못한다면 어쩔 셈이지? 그 따위 소리 말고 목숨이나 부지할 궁리나 해
봐."
탁장청은 또 모용협을 결의지정도 모르는 놈이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모용협은 코웃음만 칠 뿐 대답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모용부의 여러 보초들도 알 수가 없었다.
오자겸도 그들 둘의 사이를 의심했다. 모용협의 말이 진짜라면 자기네에게 대단히 불리하다
고 생각한 오자경이 급히 말했다.
"둘은 의형제가 아니오? 그렇게 다툴게 있소? 헤헤, 두 의형 제 간의 정을 그냥 살릴 수 있
는 방법이 있소이다. 모용공자님께서는 들어보시겠소?"
"어서 말씀해 보시오."
"탁공자를 모용공자에게 내주면 되지 않겠소? 그러면 둘은 예전대로 우애 좋게 지내질 않겠
소?"
"거 고마운 말씀이군요. 오타주님께서 의협심으로 불원천리 내 아우를 여기까지 데려왔다면
야 더 말할 게 있겠습니까? 어서 내 아우를 놔주시오."
그러자 오자겸은 수염을 내리쓸며 말했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모용협이 크게 웃었다.
"오타주께서 밑지는 장사는 절대 안할 것이라고 짐작은 했다니까요."
오자경의 얼굴이 좀 붉어졌다. 그래도 그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거 농담도 잘 하시는군요. 그런데 한 가지 물어봅시다. 우리 딸애가 부중에 있다는 게 정말
이오?"
"정말이야 정말이지요. 5년 전 모용세가의 며느리로 들어오려 다가 그만 양과 그 녀석이 난
동을 피우는 바람에 혼사가 뒤죽박죽이 되었지 않았소? 그래 지금 여기 와 자진해서 나를
따르고 있지요."
그러자 오군량이 참다 못해 욕을 해댔다.
"허튼소리 말아. 누이동생이 너같이 몰염치한 인간을 따를 리 가 없다. 어서 누이동생을 못
내놓겠느냐?"
오자겸은 눈짓을 해서 아들을 막고는 큰 웃음을 지었다.
"내 아들놈이 버릇없이 구는걸 양해하시오."
모용꼴도 빙그레 웃으며 일침을 가했다.
"그 집 아들은 강남 소검협으로 이름이 좨나 난 것같은데 버릇은 정말 없군요. 버릇 좀 잘
가르치시오."
오군량은 그 말에 화가 나서 목까지 붉어졌다. 그는 당장 달려들어 모용협과 싸우고 싶었지
만 아버지가 말리는 바람에 그러지도 못했다.
오자겸도 자기 아들을 모용협이 그렇게 경멸하는 것을 보고 분기가 솟구치지 않을 리 없었
다. 그러나 딸애를 구해내야 했기에 애써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억지 웃음을 지어 보이
며 말했다.
"이 애 말은 듣지 마시오만, 난 딸애 얼굴이라도 먼저 보고 싶소. 딸애가 확실히 부중에 있
다면 난 즉시 탁공자와 바꾸겠소. 그러나 딸애가 부중에 있지 않다면……. 허허."
겉웃음을 웃는 오자겸의 눈끝은 매서웠다. 그 뜻인 즉 딸애가 모용세가 부중에 없다면 탁장
청은 단연 파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지껏 입을 다물고 있던 위방성이 모용협의 뒤에서 앞으로 나왔다.
"누군데 이렇게 감히 모용세가를 협박하는겐가?"
오자겸은 눈을 찌푸렸다.
"영웅 이름은 어떻게 부르는지……?"
"본인의 성은 위씨이고 이름은 방성이라고 하외다. 난 영웅도 아니고 호한도 아닌 무명소졸
이외다."
오자정은 그 말에 약간 놀라는 기색을 띠었다.
'모용협네 의형제들 중에서 맏이인 위방성기로구나. 금장공이 유명하다던데…….'
오자겸은 위방성을 찬찬히 훑어보고 나서 아주 쌀쌀하게 말했다.
"무명소졸이라면 물러서게, 여긴 무명소졸이 나와 말하는 데가 아니네."
그러자 위방성은 언성을 높여 쌍소리를 했다.
"이 두상이 죽고싶어 환장했나?"
오자점도 자기를 두상이라고 욕하는 데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이 무엄한 놈, 누구보고 두상이라느냐? 네 그 잘난 금장공을 믿고 그러느냐? 어디 한번 해
보자."
위방성이 모용협에게 수군거렸다.
"내 가서 저 두상 기를 꺾어놓고 올까?"
모용협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맏형의 무공이 나보다 약하지 않으니 오자겸에게 지지는 않을 거다. 어쩌면 돌연한 수법으
로 이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오자겸도 이 모용세가의 수하에 무림 고수들이 운집해
있음을 알 겠지. 모용협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위방성은 발을 모아 구르더니 씽하고
오자겸 앞 댓걸음 되는 데까지 날아왔다. 얼핏 보면 그리 대단한 경공이 아닌 것같지만 힘
하나 안들이고 그렇 게 쉽게 하는 경공은 많지 않다. 보통 무림인들은 먼저 자세를 취하고
운기를 해서 힘을 단단히 모았다가 몸을 솟구친다. 그리고 공중을 날아갈 때는 몸이 꼿꼿해
지고 착지할 때엔 무겁게 떨어진다. 곁의 사람이 보기에도 힘겹게 보인다. 그러나 위방성은
소리도 없이 수월하게 날아왔던 것이다.
오자겸은 내심 찬탄하고는 위방성이 착지하기 전에 위방성의 가슴을 향해 장을 내쳤다.
위방성은 놀랐다. '거와장 장주이며 오독방 주작분타 타주라는 오자겸이 이렇듯 독랄할 수
가 있는가!' 다행히 위방성은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금장공이 있기에 왼손으로는 몸을
보호하고 오른손의 장을 오자겸에게 내쳤다.
오자겸은 얼른 발길을 날렸다. 그가 익히 쓰는 장퇴법이었다.
모용협에게 거와장의 무공이 기괴하다는 말은 일찍부터 들었으나 이 같이 장퇴를 동시에 쓰
다시피 하는 초식은 처음 보는 위방성이었다. 그는 급히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면서 두 손을
아래 위로 휘둘렀다. 오자겸의 더욱 기괴한 초식을 막기 위해서였다.
위방성이 이렇듯 조심하자 오자점도 무모하게 급히 공격을 하지는 못했다.
둘은 서로간의 무공을 탐색하면서 공격을 하다간 곧이어 물러 서기도 했다. 그저 서로 붙었
다간 떨어지곤 하는 것이 일견, 생사박투가 아니라 친구지간에 서로 무공을 연습하는 것같
기도 했다.
그것을 본 소제갈 주명이 냉소를 했다.
"오타주님, 왜 그렇게 수줍은 규방 규수처럼 머뭇거리기만 합니까? 대담하게 공격해 보시
오,"
그러자 보초들이 하하 웃었고 소이선생도 가만 있지 않고 오자 경의 약을 올렸다.
"거 모르는 말씀 그만하시오. 저 오영감이 거와장을 떠나오니 장정들 보호가 어디 있어야지.
그래서 저렇게 조심 하는거요. 맏 형님 손에 패하면 누가 저 영감의 뒤를 막아주겠소? 뒤를
막아 줄 사람이 있어야 도망이라도 가지."
오자겸은 그들 둘의 말에 바짝 독기가 올랐다.
'당당한 오독방 사대타주의 한 사람인 내가 이 위방성 같은걸 못 이긴다면 앞으로 어떻게
강호에서 입신양명을 하겠는가?'
오자겸은 여태까지 근심하던 태도와는 다르게 연속 장퇴법을 쓰며 맹공을 가했다.
그러나 위방성은 여전히 여유작작한 태도로 금장공을 쓰며 방어만 했다.
금장공은 방어에 능한 무공이다. 그러나 장력이 대단해서 일단 공격해서 명중만 하면 상대
방은 죽지 않으면 뼈가 부서진다.
두 사람은 하나는 맹공격하고 하나는 그냥 조심하며 막기만 했다. 오자겸은 위방성 주위를
돌면서 장과 퇴를 번갈아 내쳤다. 위방성은 그 자리에서 방장을 휘두르며 오자경의 장과 발
을 막았 다. 곁에서 보면 오자경이 우세이고 위방성은 반격 능력마저 잃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오자겸 자신도 내심으로는 알고 있었다. 자기가 가장 위력 있는 초식을 썼는데도 위
방성을 거꾸러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자기 내력만 숱하게 소모했다. 이렇게 나가
다간 마지막엔 체력이 달려 상대방에게 지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된 이상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휴전을 요구할 수도 없었다. 그러면 얼마나
체면이 손상되는 일인가? 오자겸은 이젠 억지로라도 끝까지 싸우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
었다. 그 는 혼신의 힘과 재간을 다 했다. 그는 위방성의 방어에 조금이라도 허점이 보이기
를 기대했다. 그러면 아예 죽여버리는 초식을 쓸 셈이었다.
그의 속셈을 알아차린 듯 위방성은 힘을 저축하며 방어만 했다. 사전에 그는 모용협에게 거
와장 무공초식을 배워 익히 알고 있었기에 오자경의 허위동작에 속지 않았다. 그는 오자경
의 어떤 공격도 침착하게 방어해 나갔다.
그들은 오십여 합을 싸웠으나 도무지 승부가 나지 않았다.
초조해진 오자겸은 노호하며 쌍장을 앞으로 꼿꼿이 내밀었다. 늘상 쓰던 사십구로 장퇴법이
아니었다. 그는 평생 배운 무공을 다 써서 상대방과 장력을 겨뤄보려는 것이었다.
오자겸이 뿜어내는 장력이 굉장함에 놀란 위방성은 다리를 꼿꼿이 뻗치며 옆으로 몸을 비켜
오자겸의 장력을 피했다. 그와 동시에 오자겸의 팔꿈치에 장을 내리쳤다.
오자겸의 쌍장은 첫물을 켜고 그 대신 상대방에게 팔꿈치를 얻어맞기만 했다. 다행히 그는
양팔에 힘을 주고 있었기에 팔꿈치를 맞았어도 큰 해는 입지 않았다.
둘은 내력이 부딪치는 바람에 그 충격에 튕겨 각기 물러났다.
오자겸은 위방성의 금장공 내력이 자기 몸 안에까지 밀려들어 왔기에 몸 쓰기가 불편해졌
다. 그는 묵묵히 진기를 써서 몸에 든 금장공 내력을 점차 없애버렸다. 그리고는 두 손을 가
슴 앞에 맞
쥐면서 말했다.
"귀하의 금장공은 대단합니다. 듣던 바와 다름이 없군요."
위방성도 상대방의 장력에 충격을 받아 오장육부가 다 울렁거렸다.
'오영감의 장력을 옆으로 피했는데도 이런 지경이니 정말 내력을 겨뤘다면 내가 못 따르리
라.'
이렇게 생각한 위방성도 두 손을 가슴 앞에 맞쥐며 읍을 했다.
"오타주님의 무공도 대단하십니다. 탄복해 마지 않습니다."
둘은 더 싸울 생각이 없었다.
대문 앞으로 돌아온 위방성은 낮은 소리로 수군거렸다.
"저 영감의 내력이 굉장하다니까."
오자겸은 화가 나서 모용협 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명망 있다는 모용세가가 이렇게 손님 대접을 하시기오?"
그러자 모용협이 웃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오타주님을 부중으로 모셔드릴까요? 오타주님이 우리 부중에 드시려
할지 모르겠군요."
"그런 소린 작작 하고 어서 내 딸이나 내보내시오. 내가 좀 만 나야겠소."
"부녀 상면이야 의당 해드려야지요. 난 막지 않아요. 여봐라, 오소저를 어서 모셔오너라."
모용협의 명이 떨어지자 얼마 안 되어 오군영이 대문 밖으로 끌려나왔다.
초췌해진 딸애의 모습을 보자 오자겸은 가슴이 에는 듯했다.
"얘…… 얘야, 큰 일은 없냐?"
오군영도 눈물이 글썽했다.
"아버지, 이렇게 저를 구하러 오시니 고마워요. 그런데 저는 혈도를 찍혀 아버지께 절을 올
릴 수가 없어요."
이리로 끌려나올 때 모용부의 고수들은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게 혈도를 눌러놓았던 것이다.
총명한 오군영은 지금 이 틈을 타서 그 사실을 여러 사람들에 밝혀버렸다. 첫째 모용세가가
여자 하나에도 이렇게 조심함을 비웃기 위해서고 두번째는 아버지와 오빠에게 알려 모용세
가와의 싸움에서 무모한 행동을 조심하고 계략으로 이기게 하기 위해서였다.
모용협은 얼굴을 붉히며 수하들을 꾸짖었다.
"누가 오소저의 혈도를 찍으라고 했느냐? 어서 혈도를 풀어놓지 못할까?"
오군영을 압송해온 두 고수들은 "예예" 하며 허리는 굽신거렸으나 오소저의 혈도는 풀어주
지 않았다.
오군영이 한 술 더 뜨며 신랄히 비웃었다.
"모용공자님, 그런 허위적인 언행은 그만두세요. 여태까지 그냥 날 집에 결박시켜 놓지 않았
나요? 언제 포승을 풀어놓은 적이 있어요?"
그러자 오자겸이 급히 소리쳤다.
"모용공자님, 이젠 사람을 서로 바꾸는 게 어떻겠소?"
모용공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탁공자부터 이리로 보내시오."
오자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말이 안 되오. 여기가 모용공자네 지역인데 내가 먼저 사람을 놓아주었다가 거기서
번복을 하면 우리만 낭패가 아니오. 그렇게는 못하오."
"그럼 어떻게 하자는거요?"
"두말할 것 없이 우리 딸애부터 놓아보내시오. 그럼 내가 탁장청을 놓아보내겠소. 절대 식언
은 없을 것이오."
"그래 그 말을 무엇으로 믿겠소?"
위방성이 코웃음쳤다.
"그렇군요. 오타주가 다를 꾀를 쓴다면 우린 오군영만 놓아주고 아무런 이득도 없지 않소.
하하하, 이런 밑지는 장사야 할 수 없지. 할 수 없구 말구."
모용협의 말에 오자겸은 너무 불쾌해 두 주먹을 불끈쥐었다.
"그런 식언을 하고 이 늙은 것이 달아나겠소? 모용부에 고수들이 이렇게 즐비한데 내가 달
아난다면 어디로 달아나겠소?"
"글쎄 말은 그럴 듯하지만 그래도 난 사람을 먼저 놓아보내지는 못하겠소이다. 오독방이 번
복무상하다는 거야 세인이 다 아는 사실이니까요. 우리 모용세가는 그렇지 않소이다. 우린
종래로 신용을 첫자리에 놓고 있지요."
모용협의 말이었다.
그러자 주명이 부채를 홱 내저으며 말을 가로챘다.
"두 분께서 다툴 필요가 뭡니까? 쌍방이 동시에 사람을 놓아 보내면 되지 않소."
그러자 모용협이 먼저 손뼉을 치며 동조를 했다.
"그게 좋겠소."
오자겸도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을 표했다.
주명은 그의 계획을 말했다.
"내가 셋까지 세면 쌍방이 동시에 사람을 놓아보내는데……."
그러자 오군량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다가 너희들이 사람을 놓아보내지 않으면 어떡하지?"
"이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데 그런 식언을 할 우리가 아니다. 그만 시끄럽게 놀아라."
오자겸은 아들을 눈짓으로 제지시켰다. 그리고는 주명에게 말했다.
"그럼 선생 의사대로 하겠소이다."
"그런데 사람을 놓아보내기 전에 내 물어볼 일이 하나 있소이다."
주명의 말이었다.
"물어볼 일이라니 무엇이오?"
주명은 탁장청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탁공자님, 몸에 중독된 자와독은 해독이 되었습니까?"
"거와장 사람들은 모용세가만큼 도량이 넓지 못 하오."
탁장청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난감한 일인데. 탁공자가 중독된 거와독을 뺄 재간이 우리에겐 없는데 중독된 폐
인을 바꿔와서야 가만, 내가 정신 이 빠졌다고 아무 쓸모 없는 폐인을 바꿔올까? 자, 이럽시
다. 사람 바꾸는 일은 걷어치웁시다. 우린 그런 밑지는 장사는 안 하겠소."
모용혈은 이러고는 소매자락을 획 뿌리치고 돌아서 대문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오자겸은 다급해졌다. 자칫하면 딸을 구해낼 수 없기에 오자겸은 급히 소리쳤다.
"가만! 잠깐만! 내 당장 탁공자에게 해독약을 먹이겠소이다."
모용협은 소리내며 웃었다.
"해독약을 먹이는지 독약을 먹이는지 여기서 보고야 어떻게 알겠소?"
"이 해독약은 약효가 아주 빨라 잠시 후면 알 수 있지요. 이제 보시면 알 겁니다."
오자겸은 수하를 시켜 해독약을 가져오게 해서 탁장청의 입에 넣어주었다. 해독약을 먹은
탁장청은 눈을 감고 진기를 모았다. 그러다가 잠시 후 두 눈을 떴다.
조급한 심정을 참지 못한 모용협이 물었다.
"아우, 어떤가?"
그 말에서 의형 모용협의 정을 느낀 탁장청은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심려 마시오, 형님. 이젠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둘의 대화를 들은 오자겸은 그제야 이것들이 여태까지 연극을 꾸미고 있었구나 하고 자탄했
다. 이럴줄 알았더라면 탁장청에게 해독약을 먹이지 말걸. 해독약을 먹이지 않아도 모용협은
사람 바꾸는 걸 동의했을텐데…… 내가 딸애를 구하려는 마음만 급해 모용협에게 속았구나.
그러나 이미 이 지경이 된 이상 후회한들 소용이 없었다.
주명은 또 주명대로 시간이 지체되면 새로운 변고가 생길까봐 급히 소리쳤다.
"하나……둘……셋!"
오군영과 탁장청은 각기 자기편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갔다.
양쪽 사람들도 예상 외의 일에 대처할 준비를 갖추고 아주 긴장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복판 공지에서 마주치게 된 오군영과 탁장청은 서로 한 번 흘낏 보고는 말도 없이 스쳐지나
갔다.
둘이 각자 자기 편으로 넘어가서야 쌍방은 모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모용협은 사람들을 시켜 탁장청을 결박한 포승줄을 얼른 풀었다. 그리고는 반가워 탁장청을
꽉 끌어안았다.
그런데 오자겸네 쪽에서는 오군영의 혈도들을 다 풀 수가 없어 야단이었다. 허리의 혈도들
은 다 풀었는데 오군영 팔에 있는 두 혈도는 어떻게 눌러놓은 것인지 갖은 방법을 다 써도
풀 수가 없 었다.
속이 탄 오자겸은 모용협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이런 법이 어디 있나? 우린 탁장청을 해독시켰는데 거기선 오히려 무슨 해괴한 수단으로
우리 딸애의 혈도를 눌러놨단 말이오?"
모용협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주명을 돌아보았다. 주명은 빙긋 웃기만 할 뿐 대답
이 없었다. 모용협은 그게 주명이 한 계책임을 알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오타주님은 무림에 이름 높은 선배 고수가 아니십니까? 그런데 고만한 혈도도 못푸십니
까?"
오자겸은 그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점혈법이 무림 중에 어디 한두 가지요? 천차만별 부지기수인 데. 어느 절정 고수도 그것을
다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소."
그는 딸을 구하려는 마음 때문에 남들이 웃는 것은 우려할 경황이 없었다.
"어서 우리 딸애 혈도를 풀어주시오."
그러자 주명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당분간 혈도를 풀지 못하겠으면 거와장에 돌아가 정성들여 수련을 하시오. 반 년쯤 지나면
자신의 진기로 혈도를 열 수가 있을 거외다. 너무 심려 마시오."
그러자 오군영이 주명을 노려보다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저것들에게 사정 그만하세요."
오자겸은 딸의 말은 못 들은 것처럼 계속 모용협에게 사정했다.
"난 다 안다니깐. 이 점혈법은 기괴할 뿐만 아니라 음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오. 자기 진기로
혈도를 열려고 하다간 도리어 상반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걸 누가 모르는줄 아오? 그렇게
했다간 반 년 뒤엔 내 딸은 두 팔을 보존할 수가 없을텐데 이런 짓을 하고도 가만 있단 말
이오? 양심이 있소?"
모용협은 그 말을 듣고 주명선생이 독한 짓을 했구나 하고 적이 놀랐다. 모용협의 눈길에서
무언가를 읽은 주명이 낮은 소리로 모용협에게 말했다.
"제가 소판관(小判官) 염봉(閻鋒)을 시켜 그런 혈도를 눌러 놓게 했지요. 우리 모용세가가
그렇게 녹록치 않음을 보여주고 앞으로 교주가 전세할 때 거와장 인간들이 소란을 못 피우
게 하려고 그랬지요."
"선생은 정말 소제갈이시오."
모용협은 내심 기뻐했다.
"이봐, 모용협! 소협객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그런 지독한 짓을 한단 말이냐? 어서 내 누
이동생 혈도를 풀어주지 못할까?"
오군량이 소리쳤다.
오군영도 아버지의 말을 듣고 황황불안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말을 못했다.
모용협은 오히려 박장대소를 했다.
"소장주님…… 아니, 소타주님…… 정말 영웅답다니까. 정말 기백 있다니까. 나하고 한번 겨
뤄보겠다는 거요? 그럼 겨뤄봅시다……. 핫하하!"
그때 백 보쯤 떨어져 있는 한 그루 높은 고목나무 위에서 별안간 너털웃음 소리가 들려왔
다. 나뭇가지와 잎이 무성해서 사람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 위에서 들려오는 음성만은 분명
했다.
"이보시오 모용협, 난 모용협이 오소저를 그렇게 쉽사리 놔주지 않을걸 미리 다 알고 있었
다니깐."
모용협은 미간을 찌푸렸다.
"나무 위에 사람은 누군데 자기 정체를 밝히지 못하고 있소?"
오자겸이 데리고 온 고수가 나무 위에 올라가 무슨 수작을 꾸미고 있는가 보다고 모용협은
생각했다.
그러나 오씨 부자들도 그 나무 위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그 사람이 모용협을
꾸짖는 걸로 봐선 적어도 거와장의 적은 아니겠다고 추측할 뿐이었다.
그런데 나뭇가지가 살랑 흔들리면서 사람 둘이 나무 위에서 대문 앞까지 날아내려 왔다.
오독방 장세사자 양효비가 모용협의 네번째 의형인 난쟁이 유대덕을 거머쥐고 내려왔던 것
이다. 양효비에게 뒷덜미를 치켜들린 유대덕은 대혈을 눌려 말도 못하고 몸도 움직이지 못
했다.
양효비는 유대덕을 발부리에 메쳐놓고 나서 너털웃음을 웃었다.
"이봐 모용협, 임자에게 아무리 귀신 같은 소제갈이 있다한들 이 장세사자의 일이야 생각도
못했겠지."
유대덕을 잡아 인질로 삼은 양효비는 원래 객점에 가서 오군영을 바꿔가려고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모용협은 오군영을 끌고 가흥을 떠나가 버린 것이었다. 오군영을 구하려고 양효
비는 모용 협을 계속 추격했으나 끝내 따라잡지 못한 채 와불산 아래에 있는 모용세가의 부
중까지 오게 되었던 것이다. 양효비는 즉시 모용협과 담판해서 오군영과 바꾸려고 했으나
자기 혼자 힘으로 잘 못하면 모용협 무리들에게 붙잡힐 것같아서 그만두었다. 그는 모용세
가 담을 돌면서 기회를 노렸다. 그러다가 오늘 거와장 사람들이 오는 것을 보게 되었고 그
래서 고목 위로 날아올라 몸을 숨 겼던 것이다.
양효비를 본 오군영은 낭군님이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혼례식도
하지 않고 남들 앞에서 낭군님이란 소리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군영은 오로지 정
이 듬뿍 담긴 눈길로 양효비를 쳐다볼 뿐이었다.
양효비는 그 눈길을 못본 척하고 그냥 모용협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렇듯 비열한 접혈법은, 나 같은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쓰지 않을건데 당당한 모용 소
협객님께서 쓰시다니 참 탄복할 일이오. 탄복할 일이라니까."
모용협은 그 말엔 대답을 않고 양효비의 발 앞에 넘어져 있는 유대덕을 보고는 근심스러운
듯 물었다.
"넷째형님, 괜찮아요?"
그러면서 속으로는 양효비를 어떻게 붙잡을 것인가 궁리를 했다. 그 인골염주를 양효비가
가흥에서 훔쳐갔는데 마침 오늘 이렇게 제 발로 찾아왔으니 잘 됐다 싶었다. 그런데 양효비
의 무공도 무공이려니와 유대덕 형님까지 양효비의 손에 있으니 어떻게 해야 양효비를 잡을
수 있을지 모용협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주명에게로 눈길을 주며 선생 소견엔 어떻게
하면 좋겠소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주명은 태연히 부채를 흔들며 말했다.
"그래 거기는 장세사자라는 양효비요?"
그는 양효비와 초면이었다. 유대덕이 잡혀 있음을 보고 그렇게 추측했다.
양효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런 사람이오. 내 추측이 옳다면 거긴 소제갈이라고도 불리는 주명선생이 아니오?"
주명은 그 말에 웃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둘은 아주 연분이 있습니다."
둘은 서로 쳐다보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억지로 지어보이는 웃음이었다.
"내가 한번 장세사자가 여기 온 목적을 말해볼까요?"
"그러시오. 내가 여기 온 목적을 알아 맞힌다면 동전 한 닢을 상으로 주겠소."
그러자 보초 하나가 나서며 양효비를 꾸짖었다.
"감히 누구를 조롱하는 거요? 우리 주선생님께 그런 무례한 언사를 던지는 법이 어디 있
소?"
"가만있자, 그러고 보니 자네가 이 동전 한 닢을 가지겠다는 건가?"
양효비는 동전 한 닢을 그 보초에게 내뿌렸다. 보초는 번개같이 날아오는 그 동전을 칼로
쳐버리려고 했으나 그 동전은 어느새 그의 인후에 날아와 박혔다. 보초는 비명 한번 못 지
르고 폭 고꾸라졌다. 자기 동료 한 사람이 죽은 것을 본 보초들은 창칼을 들고 양효비에게
덤벼들려고 했다.
그러는 것을 모용협이 꾸짖어 물리쳤다. 그리고는 차디찬 음성으로 말했다.
"애매한 보초에게 화풀이를 할게 뭐가 있소? 해 보겠으면 나하고 해봅시다."
양효비는 매몰차게 대답했다.
"모용세가의 인간들은 모두 죽일 것들이오. 내 먼저 당신 보초들을 모조리 죽여버린 다음
당신을 상대하겠소."
"공자님, 내가 가서 저 범 무서운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를 족쳐버릴까요?"
위방성이 말했다.
주명이 웃으며 말렸다.
"좀 가만 계세요. 나와 장세사자간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는 주명은 양효비를 보고 말했다.
"그 동전 한 및은 원래 내가 가질 건데 애석하게도 보초에게 주었군요."
"난 은자는 많지 않지만 동전은 아직 한 닢 남아 있으니 내가 온 목적만 알아맞히시오. 두
손으로 받쳐드리지요."
"좋소. 일구이언이 있어서는 안 되외다. 장세사자는 오소저를 구하러 온 것이오."
그러자 양효비는 픽 웃었다.
"그거야 누군들 맞히지 못하겠소? 분명 가흥부에서 일어난 일을 소이선생이 이미 알려준 모
양이군요. 그렇지 않소?"
"그리고 오소저 몸에 막힌 혈도를 열어주려고 이렇게 나타나 질 않았소?"
주명의 말에 양효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거의 맞힌 것같소."
"오소저의 혈도는 제때에 열지 못하면 두 팔이 병신이 되기에 그것을 열어주려고 나왔다,
참 고마운 일이오. 주작분타 타주님의 성화를 우리는 면하게 되었으니 말이오."
양효비는 두 눈을 끔벅거리다가 크게 웃었다.
"주선생의 추측은 제갈공명도 못 따르겠소. 주선생이 이겼소."
그러면서 양효비는 동전 한 닢을 주명에게 집어던졌다.
그리 빠른 속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주명은 손으로 잡으려던 생각을 고쳐 부채를 펼쳐 동전
을 받았다. 양효비가 오독방 제자 인만큼 동전에 극독을 발랐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내 또 한 가지 말할까요? 장세사자께선 오소저의 혈도를 풀어주어야 유대덕 형님을 내놓겠
다는 것이 아니오?"
주명의 말에 양효비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주선생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소. 주선생이 나를 보좌했으면 천하무적으로 천고에 이름을
날릴 수 있었을텐데 애석하게도 그 재간이 아깝구려."
그러자 그들의 설전을 가만히 지켜보던 모용협이 차갑게 말했다.
"그렇다면 거기서 먼저 유대덕 형님을 놓아보내시오."
그말에 양효비는 다른 말 없이 유대덕의 몸을 몇 군데 꾹꾹 찔러 혈도를 풀어주었다.
엉거주춤 일어난 유대덕은 얼이 나간 사람처럼 양효비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양효비는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날 왜 보고만 있어? 놓아주는데 어서 달아나지 않고. 얼빠진 사람 같으니라구."
유대덕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양효비가 이렇게 자기를 쉽게 놓아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던 그였기에 한동안은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진짜로 놓아주는 줄 알
게 되자 그는 양효비의 얼굴에다가 침이라도 뱉고 달아나고 싶었다. 하지만 남들이 웃을까
봐 그러지는 못하고 될수록 점잔을 부리며 모용협에게 돌아왔다.
모용협도 양효비의 소행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봐 양효비, 너는 내가 식언할 게 두렵지 않은가?"
양효비가 웃었다.
"난 모용공자님의 인품을 굳게 믿고 있지요. 금방 오소저의 혈도를 열어주겠다고 대답했지
않았소? 난 모용공자가 일구이언은 안하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으니까요."
모용협은 빙그레 웃었다.
양효비 이 자의 담은 보통 큰 게 아니구나. 인골염주를 대담하게 훔쳐 가더니 이번엔 또 유
대덕 형님을 두말없이 내놓다니. 나도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식언할 수야 없지.
이렇게 생각한 모용협은 소판관 염봉을 시켜 오군영의 혈도를 열어주게 했다.
염봉은 한 쌍의 판관필(判官筆)을 쓰는데 능수능란했다. 그는 판관필로 상대방의 혈도를 찌
르는 무공과 그 혈도를 열어주는 방법이 무림에서 가장 유명했다. 그의 해혈(解穴) 수법은
그만이 아는 비밀로서 신비스럽기 그지 없었다.
염봉은 성금성큼 오군영 앞으로 가서 오군영의 어깨의 모처를 손가락으로 꾹 지르고는 "이
젠 됐어!" 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오군영이 남모르게 진기를 운행해보니 두 팔의 혈맥이 거침없이 통하면서 혈도가 열렸다.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아버지를 보고 방긋 웃고는 양효비에게도 웃음을 보냈
다. 그녀의 눈에는 정이 가득차 있었다. 남들이 없었다면 그는 벌써 양효비의 품에 안겼을
것이다.
오자겸은 모용공자 패거리들에게 두 손을 맞잡아 보이며 작별 인사를 했다.
"이 큰 은덕을 앞으로 꼭 갚으리다. 잘 있으시오."
그리고는 딸과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떠나려고 했다. 양효비는 장세사자로서 오독방에서의
지위가 타주들보다 높았다. 그러기에 오자겸은 양효비에게 앞장서라고 했다. 그러나 양효비
는 오군영 의 환심을 사려고 굳이 사양하고 오군영과 나란히 걸어갔다.
그런데 오자겸의 작별인사를 들은 모용협의 얼굴은 험악해졌다.
원래 강호에서는 원수 갚으러 오겠다는 말을 은덕을 보답하러 오겠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10년 전 우리 부모처자를 죽인 그 은덕을 몰치난망(沒齒難忘)하여 오늘 그 은혜를 갚고자
이렇게 왔소." 하고 말하는데 실은 그 원수를 갚고자 이렇게 왔다는 말이다.
그러니 오자경의 작별인사가 좋게 들릴리 있겠는가? 모용협은 뒤돌아 걸어가는 거와장 사람
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주명에게 물었다.
"저것들, 더욱이 양효비를 여기 잡아둘 방법이 없소?"
그러자 주명이 빙그레 웃으면서 내공을 실어 사람을 불렀다.
"능소와 부방은 어디 있지?"
그러자 앞 양쪽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날렵한 무사 사십여 명이 양쪽에서 우르르 몰려 나오면서 거와장 사람들을 복판에
놓고 에워쌌다. 한 쪽의 무사는 능소가 영솔하고 있었고 또 한쪽의 무사는 부방이 영솔하고
있었다.
놀란 오자겸이 급히 소리쳤다.
"빨리 가자!"
그런데 주명이 또 외쳤다.
"벽사신군은 어디 있소?"
그러자 징그러운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스르륵 스르륵 뱀 기는 소리가 진저리가 나게 들려왔
다.
오자겸 일행은 마구 내빼려고 했다.
파란 녹포를 입은 사람이 나타나며 그들을 막았다. 시퍼런 얼굴빛이며 작고 동그란 녹두알
같은 눈알이며 5년 전 거와회의에서 날뛰던 그 벽사신군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곧이어 수백 마리의 벽사가 구불구불 기어오며 거와장 사람들의 퇴로를 막았다.
"벽사신군이구나!"
오자겸은 놀란 소리를 질렀다.
"핫하하…… 오장주님께선 날 아직 잊지 않고 계시는군. 핫하하, 고마운 일이군. 고마운 일
이야."
"아니 벽사신군 당신이 어떻게 여기 와 있지?"
"주명선생께서, 오장주님의 길을 여기서 막으라는 분부가 있었지요. 그 분부를 어길 수가 있
어야지요."
"그렇다면 당신이 모용협네 패에 들어갔다 이건가?" 벽사신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
쉬었다.
"모용공자께서 금은보화도 많이 주고 미녀들도 그냥 갖다가 내게 만기는 판이니 내 어찌 모
용공자를 돕지 않겠소?
그러면서 그는 그 녹두알같은 눈알을 굴리며 오군영을 탐욕스럽게 훑어보았다.
"오장주님께서 그때 딸애를 내게 내주었으면 오늘 이런 화를 입지 않을건데 말입니다."
그러자 양효비가 오군영의 앞을 막아서며 벽사신군을 쏘아붙였다.
"이 자식, 또 허튼소리를 해봐라. 아예 죽여버릴테다."
그러자 벽사신군은 뱀무리가 있는 데로 슬슬 꽁무니를 빼며 말했다.
"듣자니 네놈이 오독방 장세사자로서 무공깨나 한다더구나. 그러니 방비는 좀 해야겠지만
네 아무리 무공이 어쩌구 저쩌구해도 이 사진(蛇陣)은 벗어나지 못하리라."
벽사신군은 이어 쓰쓰쓰 하는 기분 나쁜 소리를 연달아 냈다. 그러자 뱀들은 사십 마리가
한 줄씩, 스무 줄이나 진을 쳐서 오자겸 무리 쪽으로 기어왔다. 뱀들의 입에서 풍겨나오는
역한 냄새에 구역질이 났다.
오자겸 일행은 그들만의 비법으로 조제한 해독약을 얼른 삼켰다. 오군량은 누이동생 오군영
과 양효비에게도 각각 해독약을 한 알씩 주었다. 거와의 독도 해독시킬 수 있는 약이기에
벽사가 뿜 는 독한 냄새를 해독하기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벽사에 물릴까봐 겁이 나서
뒷걸음질쳤다.
"양과 그 녀석이 거와를 삼켜버리지 않았으면 우리가 이따위 벽사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
는데 ……."
오군량이 이렇게 내뱉자 양효비가 놀라 물었다.
"뭐요? 양과가 어쨌다는 거요?"
오군량이 금방 한 말을 되새기자 양효비는 목이 메어 되물었다.
"그럼, 그럼 죽었단 말이오?"
오군영도 양과가 자기를 구해준 은공을 생각해서 다그쳐 물었다.
"양과가 정말 거와를 삼켰단 말이에요?"
"여하튼 양과가 거와를 삼켜버린건 사실이야. 십중팔구 거와 독에 죽었을 것이야. 자, 그 소
린 이젠 그만하자. 지금이 어디 양과를 놓고 얘기할 때인가."
양효비는 오군량의 말을 어느 정도 믿게 되었다. 그는 대번에 두 눈에는 눈물이 글썽해졌다.
형님이 죽었다면 나의 피붙이 하나가 또 죽은 것이다. 그러나 한편 나에 대한 단속도 적어
진다.
그는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오군영도 눈물을 글썽이며 속으로 탄식했다.
'양과가 내 손에서 인골염주를 빼앗아가긴 했지만 필경 양과는 일대 대협객인 것만은 사실
이 아닌가? 이런 대혈객이 죽다니, 실로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자겸 일행은 이미 모용세가 대문 앞까지 퇴각했다.
"오타주님과 양사지님은 어째서 가던 길을 되돌아오십니까?"
모용협이 의뭉스럽게 비아냥거렸다.
오자겸은 고송보검을 꼬나들며 일성을 내질렀다.
"기껏해야 너 죽고 나 죽으면 되겠지. 사람 많다고 야단쳐도 그쪽이 꼭 이긴다고는 말 못하
지."
"일리 있는 말씀이오. 나도 크게 싸울 생각은 없소이다. 모든 일은 상의해서 해결합시다."
"그래 어쩌자는 거요?"
오자겸이 의아스러워 물었다.
"오타주님께선 딸애와 양효비만 여기 남겨놓으시오. 그러면 살 길을 열어주리다."
"아니, 우리 딸애를 또 붙잡아둬서 뭣하려오?"
"그럼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오소저를 남겨 놓으라는 데는 다른 뜻이 없습니다. 오로지 8월
15일 전세교주일에 당신들이 와서 소동을 일으키는 걸 막기 위해 인질로 잡아두자는 뜻이지
요."
"그럼 나 양효비는 왜 남으라는거지?"
양효비의 말에 모용협은 억지 웃음을 웃었다.
"다른 것이 아니라 관가를 대신해 도적을 잡기 위해서요. 장물과 도적을 함께 잡기 위해서
요."
'그렇다면 이 자들이 내가 인골염주를 도적질한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귀신도 모르게 감
쪽같이 한다고 했는데 이 자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여기엔 무슨 꿍꿍이가 있다. 그보
다 엄포를 부려 내 말을 받아보자는 게다.'
이렇게 생각한 양효비는 시치미를 뗐다.
"난 도대체 무슨 말인지 듣고도 이해를 못하겠군."
모용협은 코웃음을 쳤다.
"모르겠다고? 좋다. 내가 알게 해주지. 여봐라, 어서 저 놈을 잡아 묶으렷다."
그러자 무사들이 그들을 에워쌌다.
"모용협은 후회하지 마라."
양효비가 급히 소리쳤다.
"무슨 말인가?"
모용협이 깜짝놀라 물었다.
양효비는 유대덕을 손으로 가리켰다.
"내가 왜 유대덕을 그렇게 쉽게 놓아준 줄 아느냐?"
모용협은 유대덕을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쏘아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자는 거냐?"
"여봐 유대덕. 왼쪽 가슴 네번째 갈비뼈 아래가 좀 아프지 않나?"
양효비가 물었다.
눈을 껌벅거리며 그곳을 만져보던 유대덕이 놀란 소리를 질렀다.
"아이구 이봐. 정말 아픈데. 몹시 아픈데. 이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지?"
그러자 양효비는 팔짱을 끼고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왜 우리를 오독방이라고 하는지 아나?"
"그건…… 그건, 너희들이 독약 쓰는데 유명한 데다가 충심환으로 허다한 강호 문파들을 통
제하고 있기 때문……."
"과연 총명한 사람이군. 그러면 또 물어보자. 내가 왜 임자를 놔주었지? 왜 늑골 아래가 아
프지?"
유대덕은 그만 안색이 새카맣게 변했다.
"그럼, 그럼 내게 독약을 썼다 이 말인가?"
"용케도 맞히는군. 흐흐, 소제갈보다도 더 나은 것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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