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논검 - 신조협 양과후전 8

3학년2반 | 2022.02.27 07:40:09 댓글: 0 조회: 601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1454

제29장 주백통을 구한 황약사
유대덕이 놀라 소리쳤다.
"왜, 왜 나를 해코지 하는 것이지?"
양효비는 여유롭게 너털웃음을 웃었다.
"너를 그렇게 만들어놓지 않으면 난 당장이라도 모용세가의 종이 될 게 뻔하거든. 그래서
그런 것이니 나를 원망하지 말고 모용협을 원망해라."
일이 이렇게 되자 상황이 확 달라졌다. 방금까지도 모용세가가 호풍환우할 정도로 우쭐거렸
는데 지금은 오독방 패거리가 신명이 나 야단치게 되었다.
오자겸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그는 양효비에게 두 손을 맞쥐어 보이며 읍까지 했다.
"장세시체성의 대지대용(大智大勇)으로 우리 집 노소(老少)를 구하게 되었으니 정말 고맙습
니다."
"오타주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양효비는 이렇게 사양의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내가 오군영 때문에 이러는 거지 오군영
이 아니면 너희들 일에 내가 왜 고생을 할까' 하고 뇌까렸다.
모용협은 소제갈을 한 쪽으로 끌어다가 수군거렸다.
"선생,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소제갈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젠 저도 속수무책이외다. 양효비 저 자식이 저런 짓을 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제는
저것들을 놓아주는 대가로 해독약이나 얻어서 유대덕 형님의 목숨부터 구하는 게 급선무입
니다."
"그러나 인골염주가 양효비 수중에 있는데 어떻게 놓아준단 말이오?"
"놓아주지 않으면 해독약을 구하지 못할텐데 그러면 유대덕 형님의 목숨은 어떻게 구합니
까? 그 인골염주는……. 우리가 후에 천천히 방법을 강구해 봅시다. 양효비를 와불산에서 떠
나지 못하게만 한다면 조만간에 양효비는 붙잡을 수 있습니다."
모용협은 그냥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을 하지 않았다.
"이봐 모용협. 수하들을 물러서게 하지 않고 거기서 뭘하는 거냐?"
그러더니 양효비는 붉은 환약 한 알을 꺼내 보이며 약을 올렸다.
"이게 뭔지 알아? 유대덕의 목숨이 이 환약 한 알에 달려 있거든. 그런데 이 환약을 먹을
복이 유대덕에게 있는지 모르겠군."
양효비에게 붙잡혀 요 며칠 동안 학대받은 유대덕은 투지를 잃고 죽음이 겁나 어쨌든 살 욕
심만 남았다. 그는 모용협 앞으로 가서 가련한 모습을 보이며 애원했다.
"공자, 날 구해 주오. 날 꼭 구해 주오."
모용협은 무슨 큰 결심을 내린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대덕은 모용협이 동의하는 줄 알고 만면에 화색이 가득하여 양효비에게 소리쳤다.
"공자가 너희들을 놓아주기로 대답했다. 어서 해독약을 가져 오너라. 어서 해독약을 이리로
가져와."
"진짜 우리를 놓아준다면 해독약은 당연히 줄 것이다. 그런데 네 말보다 우린 모용협의 말
을 직접 들어 봐야겠다."
양효비의 말에 유대덕은 모용협을 보며 조급히 독촉했다.
"공자, 어서…… 어서 우리 사람들을 물러서게 해야지."
그러나 모용협은 그런 명령은 내리지 않고 도리어 유대덕에게 엉뚱한 질문을 했다.
"유대덕 형님, 우리 육형제가 의형제를 맺은 다음 지금까지 이 아우가 형님 대접을 어떻게
했다고 생각하시오?"
"그거야 더 말할 나위 있나? 그냥 나를 친형님처럼 대접하며 우리 부모처자까지도 부중에
들여다가 복을 누리게 했으니 그 은덕을 잊을 수 없지."
모용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은 이 아우의 평생 소원이 뭔지 아시겠지요?"
"그거야 대업을 이룩하려는 거지. 난 공자의 그런 영웅적인 기백에 탄복되어 모용세가를 위
해 조그마한 힘이라도 바치는 거네."
그러자 모용협이 유대덕의 두툼한 어깨를 투닥거렸다.
"형님도 우리 육형제가 결의하여 다진 맹세를 기억하고 있겠지요?"
"기억하다마다. 동년 동월 동일 생은 아니나……."
"그 마지막 구절 말입니다."
"대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만번 죽어도 서슴지 않는다."
유대덕은 그 말을 내뱉고는 가슴이 철렁해서 얼굴색이 달라졌다.
모용협은 빙긋 웃었다.
"참 훌륭한 형님이라니까."
그리고는 그의 귀에다 대고 무어라고 수군거리는데 그 말을 듣는 유대덕의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종국에는 새까맣게 변했다.
"형님의 부모님도 친부모님처럼 대접하고 형님의 자식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형수님은
친누이처럼 모시겠소."
모용협의 말에 유대덕은 얼이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있다가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 옛날부터 충효는 겸비하기 어렵다 했으니 난 더 할 말이 없네. 공자가 내 대신
효도를 다 해주게."
이렇게 힘없이 몇마디 던지고는 천천히 부중으로 들어가버렸다.
"이봐, 모용공자."
모용공자의 뜻을 짐작한 위방성이 불렀다. 그러나 모용공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서릿발같이
차디찬 목소리로 단호한 명령을 내렸다.
"여봐라. 저 오독방 요귀들을 몽땅 잡으렷다."
그러자 벽사신군이 좋다고 웃어대며 뱀들을 몰아오고 양쪽에 선 능소와 부방의 무사들이 협
공해 왔다. 앞에는 모용협과 위방성 그리고 숱한 보초들이 노리고 있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오자겸은 또 당황했다.
"장세사자님, 글쎄 저 모용협이 자기 의형제 유대덕의 생사도 전연 돌보지 않고……."
기실 양효비도 모용협이 그럴 줄은 뜻밖이었다.
모용협을 인의를 지키고 속이 관대한 젊은 협객으로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 않다. 생각
밖으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독한 인간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런데 오군영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아버지, 우린 어떻게 하죠?"
오자경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리고 있었다.
"모두 장세사자 말만 들어라."
양효비는 사방을 둘러보고 낮은 목소리로 오자겸에게 말했다.
"소염라 부방의 무공이 제일 약하니 그쪽으로 돌파해 나갑시다. 거와장 고수 스무 명은 뒤
를 막게 해주시오."
오자겸이 데리고 온 고수 스무 명은 모두 오자경의 심복이었다. 그는 이 고수들을 방패로
내놓기가 아까웠다. 그러나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니 그 제안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스무 명의 고수들에게 뒤를 막으라고 명령했다.
양효비와 오씨네 부자 이렇게 셋은 부방을 향해 쳐나갔다. 부방은 용감하게 삼고강차(三股
鋼叉)를 꼬나들고 양효비를 찔러왔다.
부방은 거와장에서 양효비를 처음 봤다. 그는 양효비가 오독방 삼대 사자들 중의 하나임은
알고 있었으나 양효비의 무공이 높으면 얼마나 높겠는가 하고 업신여겨 먼저 양효비부터 공
격했다.
그러나 양효비는 지난 날의 양효비가 아니었다. 부방 같은 건 아주 만만히 보고 있었다.
양효비는 일 같지 않게 부방의 삼고강차를 빼앗아서는 그 삼고 강차로 부방을 찔렀다.
부방은 어떻게 삼고강차를 빼앗겼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얼떨떨해 있는데 양효비가 삼고강
차로 찔러왔던 것이다.
부방은 황망히 피하느라고 피했으나 미처 피하지 못하고 가슴 에 구멍이 뚫려 죽고 말았다.
양효비가 단번에 부방을 죽이는 것을 본 무사들은 그만 간담이 서늘해져 맞서 싸울 생각을
못했다. 양효비, 오자겸, 오군량, 오군영 넷은 연거푸 모용세가 놈들 몇을 쓰러뜨리면서 쉽게
포위를 뚫고 나갔다.
오독방 패거리들이 달아나는 것을 본 모용협은 즉시 추격했으나 오자경이 데리고 온 고수
스무 명이 결사적으로 막아섰다. 모용협과 위방성은 각기 치명상을 입히는 초식들을 써 연
거푸 열여 덟 명을 쓰러뜨리고서야 길을 열고 오자겸 일행을 추격하게 되었다.
풍자귀와 소이선생이 그 뒤를 따라가고 주명은 대문 앞에서 독전을 했다. 그는 모용협 등이
숫적으로 열세에 처할까봐 벽사신군을 시켜 급히 뱀을 몰고 추격하게 했다. 벽사신군은 입
으로 괴상한 소리를 내며 뱀을 몰고 부랴부랴 달려갔다.
경공이 높은 양효비와 오자겸은 몇 번 날아 벌써 10여 장 밖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오군량
은 경공이 시원찮았다. 그리고 그의 누이동생 오군영은 십수일 결박 당해 있었기에 두 다리
의 혈맥이 잘 통하지 않았고 그 사이에 소판관 염통에게 혈도를 눌렸던 탓으로 자기의 경공
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군량과 오군영은 뒤에 처지게 되었다.
오자경과 양효비는 하는 수 없이 오군량과 오군영을 기다렸다가 날아가곤 했다. 모용협과
위방성이 점점 더 가까이 쫓아왔다. 하는 수 없이 양효비는 오군영의 허리를 끌어안고 오자
겸은 아들 오군량의 손목을 쥐고 끌며 달아났다. 모용협과 위방성은 계속 추격해 왔다.
이렇게 20여 리를 달려왔다. 오자겸은 자꾸만 처졌다. 모용협과 위방성은 오자겸을 바싹 쫓
아왔다. 기껏해야 삼십보나 되었을까? 모용협이 소리쳤다.
"게 섰거라. 너희들은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양효비는 뒤를 흘낏 돌아보고나서 머리를 굴렸다.
'저것들은 둘인데 우린 넷이잖아. 한번 싸워 보면 혹시 이길 수도 있겠는데.'
이렇게 생각한 양효비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다른 셋도 멈춰섰다.
그것을 본 모용협이 너털웃음을 웃었다.
"핫하하, 왜 그냥 달아나시지?"
양효비는 일행들 세 사람에게 눈짓을 했다.
"우리가 왜 달아나? 너희 두 놈 편하게 하려고 달아날까?"
넷은 모용협과 위방성을 에워싸고는 결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모용협은 앙천대소를 했다.
"그래 그 주제에 우리한테 맞서 보겠다는 건가?"
양효비는 두말없이 쌍검을 빼들더니 아래 위로 모용협을 내찔렀다. 모용협은 얼른 옆으로
피했다.
오군영이 장을 쳐왔다. 모용협은 얼른 한 장으로 막고 다른 한 장을 오군영에게 내쳤다. 오
군영은 감히 맞장은 못치고 뒤로 훌쩍 날아 물러섰다.
양효비의 쌍검이 또 모용협의 인후와 아랫배를 찔러왔다. 모용협이 급히 피하는데 양효비의
쌍검이 어느새 가위같이 엇바뀌며 모용협의 허리를 끊어버리려 는 듯 사납게 덤벼들었다.
허허실실. 예상할 수 없는 무서운 초식이었다. 오독방의 괴이한 검법이 쌍검에도 적용될 줄
은 모용협은 미처 몰랐다. 이렇게 쓰는 쌍검은, 쌍검이 모두 실제적인 동작일 수도 있고 쌍
검이 모두 허위 동작일 수도 있었으며 또 쌍검이 일허일실(一虛一實)로 각기 다를 수도 있
어 검 하나를 쓰는 것보다 더욱 신기하고 괴이하여 그 위력은 배가 되었다.
모용협은 급히 한옥검을 뽑아 휘두르며 양효비를 대적했다.
남방의 가을 날씨는 그래도 더운 날씨였다. 그런데도 한옥검을 휘두르자 주위엔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씽쌩 일었다. 오군영은 양효비와 연합해 싸우려 했지만 무공이 제대로 회복
되지 못해 한옥검의 찬 바람을 이겨내지 못할 것 같고 게다가 손에 쥔 무기 조차 없어서 멀
리 물러났다. 그러다가 틈이 보이면 장풍을 내치 든가 주먹질을 하곤 했다.
오자겸과 오군량은 각기 장검을 휘두르며 위방성과 싸웠다. 아까 모용부 앞에서 위방성과
싸워 승부를 가리지 못한 오자겸은 스스로 체면이 깎인 것 같았기에 이번에는 고송검을 휘
두르며 사 정없이 공격했다. 위방성은 손목의 철갑으로 검을 막으면서 공격은 여전히 금장
공을 썼다.
위방성의 무공은 오자겸과 엇비슷했으나 그래도 조금 힘이 모자라는 축이었다. 게다가 오군
량의 검까지 막아야 했으니 점점 힘이 부쳐 삼사십 합을 싸우고나니 몰리기 시작했다.
오자겸은 기뻐 소리쳤다.
"얘 군량아! 우리 부자가 힘을 더욱 늘려 단 칼에 이 놈을 요절내고 말자."
모자겸 부자의 검은 더욱 빨라졌다.
위방성은 점점 더 궁지에 몰려 사지로 끌려갔다.
기실 일대 일로 싸운다면 양효비는 모용협의 적수가 못된다. 그런데 모용협은 수시로 오군
영을 막아야 했다. 불시에 내치곤 하는 오군영의 주먹질은 보통 주먹질이 아니었다. 주백통
에게서 배운 칠십이로공명권이었다. 이렇게 되니 모용협은 신경을 양쪽으로 써야 했다. 양효
비는 또 오군영 덕으로 모용협과 계속 싸울 수가 있었다.
모용협이 쓰는 한옥검이 일으키는 찬 바람은 상대방의 진기를 눌러버리는 효능이 있었다.
반면 양효비는 쌍검으로 상대방의 정신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기괴한 이형검법을 썼다. 각
자의 특징이 있어 누가 누구를 어쩌지 못했다.
그런데 이 때 풍자귀와 소이선생이 당도했다.
"둘은 맏형님을 도와 오씨네 부자를 족치시오."
모용협이 소리쳤다.
"공자님은 괜찮겠습니까?"
소이선생이 물었다.
모용협은 싸우면서 대답했다.
"날 이길 솜씨를 양효비는 아직 못 배웠소."
풍자귀와 소이선생은 위방성을 도우려고 병장기를 꺼냈다.
풍자귀가 쓰는 병장기는 두 자 길이의 사룽철자 한 자루와 등 나무줄기로 만든 방패 하나였
는데 설사 적을 거꾸러뜨리지 못한다 해도 적에게 쉽사리 해를 입지 않게끔 공격과 방비가
겸비되어 있었다.
풍자귀는 뛰어들어 방패로 오군량의 검을 막으면서 사룽철자로 오자겸을 내찔렀다. 오자겸
은 급히 피하면서 풍자귀의 옆을 검으로 내찔렀다. 그러나 어느새 풍자귀의 방패가 그 검을
막아 내쳤다. 오자경이 연속 내찔렀지만 매번 풍자귀의 방패에 막혀버리곤 했다.
소이선생은 한 장이나 되는 연편(軟鞭)으로 오자겸의 배후를 공격했다. 전후 협공을 받는 바
람에 오자겸은 궁지에 몰렸다.
상황이 불리함을 눈치챈 양효비가 오군영의 손목을 끌고 달아났다.
"아버지와 오빠는 어떡해요?"
하는 수 없이 양효비를 따라 달아나면서 오군영이 걱정스런 말을 했다.
그러나 양효비가 미처 대답할 사이도 없이 모용협이 어느새 따라와 그들의 앞을 막았다. 모
용협은 한옥검을 꼬나들고 외쳤다.
"달아나? 어디로 달아나?"
양효비는 눈동자를 굴리더니 간사스러운 웃음을 띠었다.
"해독약을 달라고 이러는 거지?"
그리고는 양효비는 주홍색 환약 하나를 꺼내 모용공자에게 던져주었다.
"자, 이젠 우리를 놓아줘야지."
그러나 모용협은 해독막을 받고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양효비는 이상한 듯 눈을 끔벅거렸다.
"왜? 또 어쩌겠다는 거지?"
"난 다른 물건을 요구하오."
모용협의 말이었다.
"다른 물건? 이 양효비과 몸에 있는 것이라면야 달라는대로 즉시 내주겠소. 도대체 뭣이
오?"
"난 원래 내게 있었던 물건을 되돌려 달라고 할 뿐이오."
"참 무슨 소리인지. 내 몸에 모용세가네 물건이 있을 턱이 있나. 헤헤, 내가 모용부에 몰래
들어간…… 그러나 난 그 때 동전한닢도 안가지고 나왔는데."
모용협은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삼년 전 그 일은 난 말도 하지 않소. 난 당신이 훔쳐간 그 물건을 되찾자는 거요."
양효비는 그 말에 억지웃음을 지었다.
"허 참, 무슨 말인지. 내가 도적인가? 남의 물건을 도적질하게. 천하의 가장 유명한 도적놈
도 모용공자 무공에 눌려 모용세가 물건은 훔칠 엄두도 못낼건데 하물며 내가 어떻게……."
"정말 안 내놓겠다 이건가?"
"도대체 무얼 가졌다고 그래요?"
오군영이 양효비에게 낮은 소리로 물었다.
양효비는 두 손을 벌리며 비실비실 웃었다.
"정말 난 무용세가네 물건을 도적질한 일이 없소. 내가 양과로 가장해서 다닌 적이 있는데
혹시 양과가 그랬는지도 모르지. 그런 걸 모용공자자 사람을 잘못 보고……."
"생사불명한 양과를 거론하지 말아요."
오군영의 말이었다.
양효비가 그냥 시치미를 메자 모용협은 검으로 위협하면서 소리쳤다.
"어서 못 내놓겠나?"
양효비는 그래도 눈을 부릅뜨며 뇌까렸다.
"내놓긴 뭘 내놓으라는 거야? 뭐 검을 휘두르면 내가 겁먹을 줄 아느냐."
그때 오군량이 소리쳤다.
"아버지가 위급하다. 동생, 어서와!"
오군영이 언뜻 돌아보니 아버지는 검술이 문란해지며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오군영은 급히
아버지에게로 달려갔다.
"여보, 군영!"
양효비도 모용협도 그 쪽으로 달려갔다.
무림 고수 여덟이 한군데 엉켜 어지럽게 싸우기 시작하니 실로 아슬아슬하고 그 소리는 천
지를 진동할 듯했다.
그런데 이때 산허리에서 누군가 껄껄거리며 호탕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그
웃음소리는 순식간에 백보 앞까지 이르렀다.
머리칼도 수염도 눈썹도 모두 눈같이 희나 얼굴색은 어린 아이 처럼 울긋불긋한 노인 하나
가 날아왔다.
그 경공은 세상 당할 자가 없는 듯했다. 모두들 놀라서 싸움을 멈췄다. 먼저 양호비가 반가
워 웃으며 소리쳤다.
"사부님, 사부님!"
그리고는 달려가 굽신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다.
"제자 양효비 인사 드립니다요."
모용협이 자세히 보니 날아온 노인은 노완동 주백통이었다. 모용협은 가슴이 철렁했다.
'이거 오늘 재수 사납군. 양효비 사부인 주백통이 오다니.'
주백통은 양효비를 부축해 일으키며 웃으면서 투덜거렸다.
"이놈아,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 그래 어디 있었지? 쥐굴에 숨어 있었냐?"
이젠 주백통의 성미를 속속들이 아는 양효비였기에 웃으며 역시 농담으로 그 말을 받았다.
"글쎄 말입니다. 사부님과 그냥 술래잡기를 하려는데 막아서는 자가 있지 않겠어요. 그러면
서 또 하는 말이 '노완동이 무슨 물건짝인줄 몰라? 그런 물건짝을 다 사부님으로 삼아?'이
러더란 말입니다. 제자가 듣고 어찌 가만 있겠습니까? 사부님을 모욕하는걸 듣고도 가만히
있는 놈은 제자가 아니지요. 그래서 전 사생 결단 싸웠지요."
"어느 놈이 날 욕해? 내 그 놈의 귀뺨을 단단히 쳐야겠다. 어느 놈이냐, 가보자!"
주백통이 그러자 양효비는 모용협을 손가락질을 했다.
"바로 저 자예요."
주백통은 모용협에게 눈을 부라렸다.
"보긴 멀쩡하게 생긴 위인이 이 노완동을 왜 함부로 욕하지?"
모용협은 허리를 잔뜩 굽히며 예부터 갖췄다.
"선배님, 양효비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소생은 선배님을 욕한 적이 없습니다."
주백통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런 상스런 욕을 할 젊은이 같진 않은데."
"사부님, 저 자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아시나요?"
양효비가 급히 나서서 사부의 말을 잘랐다.
"왜 그런 말을 하지?"
"저 자가 사부님을 욕했다고한 내 말을 거짓말이라 했잖아요? 그러니 사부님 제자가 거짓말
쟁이라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사실은 사부님을 또 욕하는 겁니다."
주백통은 눈을 끔벅거렸다.
"네 말은 듣고도 잘 모르겠다."
"모르다니요? 저 자가 사부님 제자가 거짓말쟁이라고 한 셈이죠? 사부님 제자는 모두 정정
당당한 사내 대장부인데 거짓말 할 수 있나요? 사부님이 거짓말하도록 가르쳤나요?"
"음∼ 그래 네 말이 옳다. 이 노완동의 제자들은 어떻게 가르친 제자들인데 거짓말을 할
까?"
주백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모용협에게 또 눈을 부라렸다.
"그래, 네가 또 날 욕했구나? 넌 남 욕하는 재간이 보통이 아닌데."
노완동의 위인이 어떻다는걸 모용협이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수하들이 있는 데서 그런 말을
듣고 참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자기의 위업이 바야흐로 이루어지려는 이 마당에 두려워할
게 무엇이냐? 모용협은 담을 키워 노완동에게 쌀쌀히 말했다.
"선배님이 그렇게 노신다면 소생도 달리 설명해드릴 수가 없군요."
"뭐, 놀아? 너 진짜 욕을 하는구나. 가만, 이 주백통이 모용세가라면 쩔쩔맬 줄 아느냐?"
그러더니 주백통은 다짜고짜 모용협의 뺨을 후려쳤다. 귀청이 째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주백통은 좇아서 박장대소를 하며 어린애처럼 팔짝팔짝 뛰기까지 했다.
"안되겠지? 안되겠지? 네가 내 장을 피해? 그러려면 아직 삼 십 년은 더 수련해야 돼. 알겠
어?"
그러자 양효비가 곁에 있다가 좋아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떠들었다.
"사부님 잘해요. 우리 사부님 잘한다."
"흐흐흐, 이게 아주 절묘한 초식이란다. 황약사를 만나면 한번 써볼까 벼르던 참인데…… 그
래 너도 배우고 싶냐?"
"예, 배우고 싶다마다요."
"좋아. 내 당장 가르쳐주지."
주백통은 이에 양효비의 귀에다 입을 갖다대고 수군거리며 그 초식을 가르쳐 주었다. 양효
비는 이 초식도 아주 기괴한 초식인줄 알고 구미가 바짝 동해 명심해 들었다. 총명한 그는
즉시 그 비 결을 파악했다.
주백통이 모용협을 손가락질하며 양효비에게 말을 건넸다.
"그럼 이젠 저 모용협을 한번 쳐봐."
그러나 양효비는 머뭇거렸다. 그 법수가 기묘하다고는 하지만 자기보다 무공이 나은 모용협
에게 써서 효과를 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왜 머뭇거리지? 어서 쳐보지 않고."
주백통이 재촉했다.
양효비는 내가 네 귀뺨을 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네가 날 어찌 진 못하리라 하면서 이를 사
려물고 모용협에게로 다가갔다.
주백통에게 귀뺨을 불이 나게 얻어맞은 모용협은 화가 머리끝까지 끓어올랐지만 주백통의
신기한 무공에 눌려 보복을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양효비가 다가오자 그 화풀이 할
대상이 찾아온다고 내심 별렀다.
"자, 내가 임자 귀뺨을 치러 왔어. 알겠지?"
양효비는 그러고는 손바닥으로 모용협의 뺨을 후려쳤다. 미리 방비를 한 모용협은 양효비의
손바닥을 막으려 얼른 한 손을 내밀었다. 주백통이 양효비에게 비결을 가르쳐주는걸 보았기
에 모용협은 이번에 온 힘을 다 쏟았다. 그러나 양효비의 손이 언뜻하고 중도에서 피하는
바람에 모용협의 손은 빗나가버렸다. 모용협은 자세를 다시 가누려고 했으나 어느새 양효비
의 손바닥이 그의 귀뺨을 번개같이 후려쳤다.
주백통이 좋다고 박장대소를 했다.
"노완동의 제자는 다르긴 다르구나. 핫하하, 한번 가르쳐주면 당장 익혀 써먹거든, 얘, 또 한
번 쳐 봐. 재미 나는데."
양효비가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이번엔 속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저 내가 가르친대로만 해. 백발백중일 거다."
양효비는 사부가 시키는대로 또 모용협의 귀뺨을 후려쳤다. 그런데 이번엔 모용협도 악심을
먹었는지라 양효비가 후려쳐오는 손바닥을 한 손으로 막으면서 다른 한 주먹으로는 양효비
의 가슴을 죽어라고 내질렀다. 네가 내 귀뺨을 치면 난 네 목숨을 빼앗겠다는 기세로…….
그런데 그 찰나 주백통이 번개같이 덮쳐오는 것이 보였다.
'아차, 내가 또 놈들의 꾀에 빠지는구나. 양효비를 내치는 사이 주백통이 날 죽이려는 수작
이었구나.'
이런 생각에 모용협은 멈칫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양효비의 손바닥이 모용협의 귀양을 또
불이 나게 후려쳤다.
그러나 주백통이 가르친 이 초식은 치명상을 입히는 초식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모용혈은 귀뺨을 세 번이나 얻어맞았어도 상한 데는 없고 단지 얼굴이 붉어졌을
뿐이었다.
양효비는 모용협이 분한 김에 자기에게 결사적으로 달려들까 봐 얼른 뒤로 물러났다.
"이봐, 모용협! 이런 수모를 당하고도 모용세가의 수령으로 자처하겠어?"
모용협은 격분에 얼굴이 벌개지고 치를 떨었다. 그는 한옥검을 뽑아들고 이를 갈았다.
"양효비와 주백통은 들으라. 너희 사제들을 죽이지 못하면 모용세가가 이 세상에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
그리고는 주백통과 양효비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소이선생이 모용협의 허리를 황급히 끌어안으며 말렸다.
"공자님, 고정하십시오. 대장부는 굴신(屈身)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한신도 남의 가랑이 밑
을 지나는 치욕을 참았습니다. 하물며 공자님은 견식이 한신 백배이신데 남의 꾀에 걸리겠
습니까?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을 기한다고 합니다. 꼭 오늘 복수를 해야 합니까? 저 놈들은
조만간에 공자님의 칼에 죽을 겁니다."
모용협은 분노를 가까스로 짓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의 말을 따르리다."
풍자귀도 다가와서 모용공자를 끌었다.
"공자님, 저 소인배들과 다루지 마시고 집으로 돌아갑시다."
그런데 이 때 소름끼치는 스르륵하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 왔다. 벽사신군이 뱀을 몰고
온 것이었다.
"공자께서 사람이 모자랄까봐 주선생이 시켜서 왔습니다."
벽사신군의 말이었다.
'이거야 말로 설중송탄(雪中送炭)이로구나. 주선생이 우리를 살리는구나.'
모용협은 기뻐하면서 손으로 노완동을 가리켰다.
"어서 독사들을 내몰아 저 자들을 공격하시오."
주백통은 그만 혼비백산해 어쩔줄을 몰랐다. 본래 뱀을 제일 무서워 하는 그인데다가 거와
회의에서 벽사신군이 친 사진에 혼이 난 적이 있는 그는 황급히 나무 위로 날아올라갔다.
벽사신군이 코웃음쳤다.
"나무 위에 올라가면 무사할까? 뱀이 나무 위를 못 올라가는 줄 아는가보지."
벽사라는 독사들은 이미 오자겸 일행을 에워싸고 있었다. 벽사 두 마리가 주백통이 오른 나
무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봐 효비야, 나좀 살려!"
얼이 나간 주백통이 다급히 소리쳤다.
'내 발등에 떨어진 불도 못 끄겠는데 저를 살려줄 사이가 어디 있어?'
양효비는 이러며 한 장밖에 높이 솟아 있는 큰 바위를 쳐다보았다. 그 곳만이 살 곳이었다.
그는 오군영의 손목을 끌고는 두 발을 굴러 몸을 솟구쳤다.
"어서 저 위로 올라가오,"
경공이 괜찮은 그는 손쉽게 오군영을 데리고 바위 위로 날아올라갔다.
오씨네 부자들도 선후로 바위 위로 날아올랐다.
주백통이 있는 나무 위로 벽사 두 마리가 계속 기어올랐다. 주백통의 발에서부터 이젠 한
자 거리밖에 남지 않았다. 주백통은 부랴부랴 나무꼭대기로 올라갔다. 벽사 두 마리도 마냥
따라 올라왔다. 뱀에 쫓긴 주백통은 종국에는 나무 맨 꼭대기 가지까지 올라갔다. 가는 가지
가 휘어져 흔들리며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같았다. 그래도 주백통은 그 위에 아슬아슬하게
그냥 서 있었으니 재간은 정말 재간이었다.
이런 경공에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면서 또 그런 재간을 가지고 있는 주백통이
독사에게는 꼼짝도 못한다는 것이 한편으론 우습기도 했다.
"사부님, 어서 이리, 이리로 와요."
양효비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주백통은 그리로 날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 곳으로 날아가려면 두 발을 굴려 그 반
작용으로 몸을 솟구쳐 올려야 하는데 디디고 있는 이 가는 나뭇가지를 굴려 가지고선 다섯
장이 넘는 그 거리를 날아갈 수 있도록 몸을 솟구칠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중도에서 떨
어지면 수백 마리 벽사들이 진을 치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속에 떨어져 뱀밥이 되고 말
것이 아닌가?"
아이고 사부님, 저 봐요. 뱀이 사부님 발밑까지 왔어요."
주백통이 내려다보니 뱀 한 마리가 거의 발밑에 닿을 듯하였다. 주백통은 우는 소리를 냈다.
모룡협은 나무 아래서 쾌재를 불렀다.
"노완동, 무공만 스스로 폐해버리시오. 내가 살려 주리다."
주백통은 얼이 빠졌다. 그는 우는 소리로 애원했다.
"먼저, 먼저 뱀부터 물려주게. 뱀부터 말이네."
모용협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지 말고 내가 시키는대로 당신이 갖고 있는 무공부터 폐하라니까요."
"내가 이 나무 끝에서 스스로 무공을 폐하면 어떻게 되나? 당장 나무꼭대기에서 떨어질텐데
그러면 뱀에게 죽기 전에 머리가 터져 죽겠네."
"그래도 그렇게 죽는 게 뱀에게 물려죽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요?"
"그런 말같지 않는 소리 하지도 말게. 무공을 자폐해서 떨어지면 뱀 무리 속에 떨어지는데
뱀들이 가만 있을까? 뱀에게 뜯겨 살점하나 안 남을 게다."
그러는 사이에 뱀은 주백통의 발을 물려고 입을 확 벌렸다. 단 한순간도 지체할 수가 없었
다. 주백통은 죽기로 작정하고 진기를 써 그 큰 바위를 향해 몸을 솟구쳤다.
한 넉 장들 날아갔을까? 주백통은 더 날아가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벽사신군은 뱀을 몰고와 기다리고 있었다. 벽사들은 대가리들을 꼿꼿이 세우고 주백통이 떨
어지면 포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백통은 번개같이 입고 있던 헌 적삼을 벗어 아래로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그 반작
용으로 다시 두어 자 넘게 날아올랐으며, 손바닥을 아래로 누르면서 또 그 반작용으로 얼마
를 날아올라 겨우 큰 바위 위 모서리에 이르렀다. 양호비가 손을 잡아 끌어올렸다.
아슬아슬하면서도 절묘한 장면이었다. 모용협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경탄했다.
주백통은 어깨를 으쓱하며 아래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이 봐 모용협, 안되겠지? 그 잘난 뱀으로 날 어쩌겠다구? 꿈도 꾸지마."
모용협은 바위 위로 등나무 줄기들이 줄줄이 뻗어오른 것을 보고 벽사신군에게 뱀을 바위
위로 기어오르도록 시켰다.
뱀들이 등나무 줄기를 타고 바위 위를 향해 기어오르는 것을 본 주백통은 또 안색이 변해
벌벌 떨었다.
"이걸 어떻게 하지? 아이고 이걸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뭐 어떻게 해요? 이렇게 하면 되죠."
양효비가 히쭉 웃으며 검으로 등나무 줄기들을 툭툭 죄다 끊어버렸다. 반반한 석벽 밖에 남
지 않았다. 그러자 뱀들은 더 올라 올 수가 없었다.
"진짜, 노완동의 제자로구나. 총명해! 핫하하, 대단히 총명 해."
모용협은 그래도 벽사신군을 시켜 뱀들로 바위 밑을 겹겹이 에워싸게 했다. 그리고는 바위
위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어서 투항해라, 죽지 않으려거든."
"투항? 재간이 있으면 어디 올라와봐!"
양효비가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어디 너희들이 내려와 봐라."
모용협은 코웃음을 쳤다.
소이선생도 고함쳤다.
"이 봐, 양효비야. 이젠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지. 도망가긴 어디로 도망가. 내려오지 않으면
그 위에서 굶어죽는다. 주백통 선배님은 벽사가 아주 두렵다면서요? 이제 굶어 어질어질하
다가 잘못해서 아래로 떨어지면 역시 뱀한테 뜯겨 뼈도 안 남아요. 그러기 전에 어서 내려
와 고스란히 투항하시오."
주백통은 하하 웃더니 아래를 내려다 보며 놀려댔다.
"아이고 무서워라! 정말 무서워 죽겠다. 그런데 이 노완동은 근래 열흘 보름을 굶어도 배 고
픈줄 모르고 기운이 나는 그런 무공을 배웠으니 그 사이 떨어지는 염려야 없겠지."
모용협은 양효비 일행을 당분간은 어쩔 수가 없어서 소이선생에게 수군거렸다.
"저것들이 사나흘이 되어도 안 내려오면 어쩔까? 내일 모레면 교주가 전세하여 태어나는 때
인데 여기 그냥 남아 있을 수도 없고. 이거 큰 일이 아닌가?"
소이선생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공자께서 염려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양효비가 지니고 있는 인골염주가 아닙니까?"
"그렇소."
모용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인골염주 하나를 만들어 그 때 가서 진짜로 가장하면 누가 알지 못할 겁니다."
"만일 그 사이 오독방의 대부대가 쳐들어와서 양효비를 구해 가면 어쩌겠소? 그러면 만사가
다 틀려진단 말이오."
소이선생은 그 말에 웃었다.
"여기는 심산벽골입니다. 집도 없습니다 그러니 오독방이 여기로 올 기회는 아주 적습니다.
오독방 대부대가 어떻게 알고 여길 오겠습니까? 우리 이럽시다. 벽사신군을 시켜 독사들로
그냥 에워싸고 있으라고 합시다. 괄월 열닷새만 지나 우리가 전세한 교주를 데리고 서역에
가서 신교를 통제한다면 양효비가 여기를 벗어난다고 해도 그 때는 이미 행차 뒤의 나팔이
란 말입니다.
"그것도 일리 있는 말이군요."
모용협은 벽사신군과 풍자귀에게 명하여 여기 남아 양효비 일행을 지키게 하고 자기는 위방
성과 소이선생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모용협이 간 것을 보고 오자경이 말했다.
"장세사자님, 저것들이 그냥 우리를 이렇게 가둬놓을 모양인데 이걸 어쩐단 말이오?"
사실 양효비는 일행 누구보다도 더 조급해 하고 있었다. 만약 이 바위 위에서 팔월 열닷새
만 넘긴다면 그가 계획하고 있던 일이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이 된다. 그러나 양효비는 아
무리 궁리 해봐도 뾰족한 수가 생각나질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라."
오직 주백통만은 태평무사 아무런 근심이 없었다.
"여기가 참 좋구나. 바람이 슬슬 통하니 시원하기도 하고 이런데서 아예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난 왜 이전엔 이렇게 좋은 곳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마치 세상에 없든 낙원이나 찾은 것처럼 기뻐했다.
오군영이 양효비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낭군님" 하고 "낭"자를 떼다가 말고는 물었다.
"양공자님, 무슨 방법이 없나요?"
자기와 양효비 사이의 일을 부모들은 아직 모르고 있기에 아버지와 오빠 앞에서 양효비를
차마 낭군님으로 부르진 못했다.
고민 중에 있던 양효비는 오군영이 묻는 것이 성가셔서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방법? 당신이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봐."
오군영은 그 말에 기분이 상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것을 본 양효비는 내가 너무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여보, 근심 마오. 내 반드시 방법을 생각해 낼거요."
"근심은 내가 무슨 근심을 하겠어요."
오군영도 쌀쌀하게 대답했다.
양효비는 자기의 퉁명스러운 말에 오군영이 뾰루퉁해진 것을 보고 다가가 오군영의 허리를
껴안았다.
"여보, 내가 잘못했소. 나도 너무 조급해서 그랬소. 양해하시오."
오군영은 아버지와 오빠가 보는 것 같아 얼른 얼굴을 붉히며 양효비의 팔에서 벗어났다.
오십 인생을 살아온 경험으로 오자겸은 딸애와 양효비가 다시 화해를 하고 서로 좋아하는
눈치를 느꼈다.
오군량도 누이동생을 한쪽으로 끌고가 물었다.
"얘, 너와 양효비는 다시 그렇게 됐냐?"
"오빠는 무슨 허튼소릴……."
오군영은 얼굴을 붉혔다.
"허튼소리라니, 이 얘 좀 봐. 내가 네 오빠인데 네 종신대사에 관심을 가지는 거야 당연한
일 아니냐?"
"옳아요. 옳은 말씀이외다. 그럼 형님, 이 매부가 인사 드립니다."
양효비가 오군량에게 허리를 잔뜩 굽히며 인사를 했다.
"아니 이거, 이건 왜 이러지?"
"군영이와 저 사이의 일을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오군량은 놀라서 말했다.
"혼인이란 종신대사인데 애들 장난인 줄 아나? 예물도 안 보내온 처지에 결혼을 했다고 말
할 수가 있나? 그러니 아직까지는 내 매부가 아니네."
"강호인들이 그런 세속의 예절을 다 지켜야 하오?"
그러자 오자겸이 수염을 내리쓸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장세사자 말이 옳은 말이야. 장세사자는 기실 5년 전에 벌써 내 딸 군영과 혼사를 치렀지.
그 사이 소소한 일로 반목이 생기긴 했지만 오늘 다시 화해가 되어 사이 좋게 되었으니 이
또한 경사가 아닐손가?"
그러자 약삭빠른 양효비는 얼른 무릎을 끓고 큰 절을 했다.
"장인 어르신 절 받으십시오."
오자겸은 기뻐서 양효비를 부축해 일으켰다.
"됐네 됐어, 어서 일어나게."
그는 딸애가 끝내 직위 높은 남편을 얻었다고 흐뭇해서 싱글벙글 웃었다.
"임자는 방주의 신임을 두텁게 받는 심복이 아닌가? 앞으로 우리를 위해 방주 앞에서 좋은
말 많이 해주게나."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양효비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장인, 사위가 이렇듯 친밀함을 본 오군영도 내심의 기쁨은 말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부끄러
운듯 얼굴을 붉혔다. 오자겸은 오군영을 양효비 곁으로 끌어다놓으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장세사자를 지성으로 모셔야 하느니라."
오군영은 얼굴이 확 달아올라 아버지 품에 안기며 응석을 부렸다.
"아버지도 참……."
오자겸은 너털웃음을 웃었다.
"요 깜직한 것아, 부모도 모르게 종신대사를 맺는 법이 어디 있니?"
오군영은 고개도 못들고 허리를 꼬았다.
"아버진 또 그러시네."
아버지 앞에서 응석을 부리는 오군영의 모습을 보는 양효비는 당장이라도 오군영을 품에 끌
어안고 마음껏 애무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아래에서 풍자귀가 비아냥거렸다.
"핫하하, 거 참 보기 좋다. 부부끼리 좋아서 정신이 없구만 그러지 말고 당신들이 처한 작금
의 처지나 잘 생각해 보시오."
그 말에 바위 위에 있는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있던 기분은 삽시에 사라져버렸
다.
"이 장세사자가 여기를 벗어나기만 해봐라. 제일 처음 네놈부터 죽이라라.
양효비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풍자귀는 앙천대소를 했다.
"날 겁주는 거냐. 나 풍자귀는 남이 겁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란 사람이다. 그런 엄포는 시들
방귀로 여긴다. 핫하하, 이 양가야, 그런 소린 작작하고 죽기 전에 남길 말이나 있으면 어서
말해. 있다가 염라대왕에게 가서 이러니 저러니 하소연 말고."
풍자귀가 어떤 사람인가? 남에게 종래로 손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말싸움에서도
남이 한마디 하면 자긴 열마디를 해야 직성이 풀린다.
날은 점점 어두워졌다. 수림 속엔 어둠이 깃들고 이어 밝은 달이 떠올랐다. 바위 위에 사람
들은 물론 바위 아래 사람들도 지쳤다. 모두들 앉아 말이 없었다. 정적이 깃들인 사방엔 이
따금씩 뱀들이 기어다니는 스르륵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노완동 주백통은 그 지경에서도 한잠 푹 자고 일어났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떠들었다.
"이거 배고파 죽겠다. 배고파 죽겠네."
그리고는 바위 아래로 날아내려 가려고 했다. 먹을 것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다
언뜻 생각난 것이 있었다. 밑엔 뱀천지가 아닌가? 거기로 뛰어내렸다간 뱀 밥이 되지. 그는
몸서리를 치며 양효비를 꾸짖었다.
"이봐 효비야, 네가 스승을 이같이 대접하느냐?"
"사부님, 왜 그러세요? 배가 고파 그러세요?"
양효비는 짐짓 느릿느릿 대답했다.
주백통은 자기 배를 툭툭 쳤다.
"자식, 배 안에서 회충이 다 운다. 꾸르륵 창자 요동치는 소리 도 못들었어?"
"아니, 사부님께서 배가 고플 수 있습니까? 사부님께선 근래 열흘이고 반달이고 밥 한 끼
안먹어도 배고프지 않는 무공을 수련하셨다고 했잖아요?"
주백통은 조그만 눈을 부릅떴다.
"이놈아, 넌 왜 그렇게 사람이 둔해졌니? 바보같은 소리만 하고 앉았구나."
그리고는 잠깐 뜸을 두더니 낮은 소리로 수군거렸다.
"너 그 말을 정말로 믿니? 모용협 일당을 속이느라고 꾸며낸 말이야. 그것도 몰라?"
"허― 그래요?"
"임마, 이 노완동은 정말 배 고파 죽겠다. 통닭구이가 먹고 싶구나."
그는 기름이 번지르르 도는 구수한 통닭구이가 눈 앞에 보이는 것 같아 군침을 꿀꺽 삼켰
다.
"아이고 사부님도 여긴 돌 밖에 없는데 어디 가서 통닭구이를 구해오라고 성화예요?"
양효비는 한숨을 쉬었다.
배고프다는 소리를 하게 되니 주린 배가 정말 자꾸 요동을 쳐 주백통은 더는 참을 수가 없
었다. 그는 미친듯이 양효비의 멱살을 한손으로 거머쥐고 한손을 높이 쳐들었다.
"어서 통닭구이를 못 구해오겠냐? 내게 귀뺨 한 대 맞아봐야 정신차리겠냐?"
"아이고 사부님, 귀뺨이 아니라 목을 벤다고 해도 통닭구이는 못 구해 온다니까?"
그러자 오군영이 달려와 주백통의 팔에 매달리며 애걸했다.
"선배님, 제발 이러지 마세요."
"얘, 이 손 놔라 놔. 네가 아무리 애걸해도 소용없다. 통닭구이를 못 구해오면 난 가만 안있
겠다. 난 꼭 이 자식을 두들겨 패고야 말겠다."
주백통은 계속 고집을 부렸다.
"정 그러시려면 저 분 대신 날 때려요."
오군영이 또 사정했다.
"내가 내 제자를 때리는데 넌 중뿔나게 웬 참견이냐?"
그 바람에 오군영은 얼굴이 새빨개져 무릎을 끓었다.
"저에게도 칠십이로공명권을 전수해 주셨잖아요. 저도 어르신 절반 제자는 되는 셈이니 저
를 때려요."
주백통은 들었던 손을 내려놓았다. 아무리 해도 여자를 때릴 수야 없지 않은가?
"할 수 없지. 옥봉 독을 치료해준 네 일이 고마워 양효비를 잠시 용서해둔다."
오군영은 기뻐 연신 몇 번 머리를 조아렸다. 양효비가 오군영을 부축해 일으켰다.
"고맙소."
오군영은 부끄러워 대답을 안했다.
양효비가 눈을 도르르 굴리더니 주백통을 보고 빙긋 웃었다.
"사부님, 내게 방법이 있어요."
"방법? 무슨 방법?"
주백통은 귀가 번쩍했다.
"사부님 그저 눈 꼭 감고 입을 벌려 구수한 닭고기가 입으로 들어간다 생각하면서 꿀떡꿀떡
삼키는 흉내를 내보십시오. 그러면 허기가 싹 달아날겁니다."
주백통은 그 말대로 눈을 감고 입을 벌리며 몇 번 삼키는 흉내를 내보았다. 그러더니 눈을
떴다.
"이놈아, 찬 바람이 배로 들어가니 시장기가 더 나서 죽겠다.
네 이놈, 스승을 놀리는 수작이 아니냐?"
양효비는 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그럴 수가 있습니까? 제자가 감히 죽지 못해 스승님을 놀리겠습니까? 제자는 매번 배가 고
프면 그런 방법을 쓰곤 해서 시장기를 멈추곤 했다니까요. 그래서 스승님에게 진언……."
"그런데 난 왜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느냐?"
양효비는 눈을 끔벅거렸다.
"아마 스승님 무공이 세상 둘도 없으니 스승님 위도 제자보다 몇십 배 큰 모양입니다. 그래
서 그런 방법이 소용없는 모양입니다."
오씨네 부자 둘과 오군영은 양효비가 스승 주백통을 놀리는 것을 보고 웃음을 참느라고 야
단이었다.
주백통은 아무래도 모르겠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참, 모르겠어. 하긴 이 노완동의 무공이 세상 일등이니까 그 잘난 찬바람 몇번 마셨다고 허
기가 멎을 리 없겠지."
바위 아래에선 벽사신군과 풍자귀가 모용협 제자들이 가져온 술과 고기를 맛있게 먹어대기
시작했다. 구수한 술냄새와 고기냄새가 바람에 실려 바위 위로 날아왔다. 가뜩이나 허기에
주린 배를 안고 있는 바위 위의 다섯 사람은 입에 군침이 돌아 견딜 수 가 없었다.
주백통은 침을 흘리며 바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헤헤하고 실없는 웃음을 몇번 웃고
는 아래에다 대고 애걸하듯 말했다.
"이봐, 벽…… 벽사, 이봐, 뱀귀신! 그 술과 고기를 좀 이리 보내게나. 이 노완동과 같이 좀
나눠먹게나."
주백통은 벽사신군이란 호가 생각나지 않아 한참을 생각하다가 벽사실군의 몸이 새파란 게
벽사와 같은 것을 보고 아예 뱀귀신이라고 호칭했다.
벽사신군은 자기를 뱀귀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제일 질색이었다. 그는 노완동을 향해 지껄여
댔다.
"늙은 두상 죽지는 않고, 내가 뱀귀신이야?"
"그럼 뭐라고 부르나?"
주백통은 그래도 웃어보였다.
"네 조부(祖父)라고 불러."
'네 조부? 세상 네라는 성도 다 있나? 모르지. 세상이 하도 넓으니 네씨 성도 있겠지.'
주백통은 이런 생각을 하고 말했다.
"네 조부라? 그럼 네 조부, 술과 고기를 이리 좀 보내게."
벽사신군은 대노하여 또 주절거렸다.
"이 늙어도 죽지 않는 주가야. 네 조부는 네가 굶어죽도록 놔두겠다. 술 한방울도 안주겠
다."
'가만, 저 자가 날 늙어도 죽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지? 늙어도 죽지 않으면 무병장수란 말
이 아닌가? 아무리 늙어도 죽지 않는다, 거 참 듣기 좋은 말일세. 그 자식 내게 아첨하는 것
인가?'
노완동은 기분이 좋아서 웃었다.
"난 노완동이야. 늙어도 죽지 않는 사람이라니 참 반가운 소리 네만 아무리 무병장수할 사
람이라도 굶으면야 안죽는 법이 있나. 여보게 네 조부 이 사람아, 그런 빈말로 존대만 하지
말고 거 술 과 고기를 이리 좀 보내게. 내가 공짜로 먹겠다는건 아니네. 돈을 준다니까. 은
자를 준다니까."
그리고는 주백통은 은자를 한움큼 아래로 던져주었다.
그러나 벽사신군은 이것을 자기에 대한 모욕으로 느끼고 올려 보며 욕을 했다.
"내가 네 조부다. 은자는 소용없다. 난 너를 굶어죽일테다."
"헤헤, 안다니까 그러네. 거기가 네 조부인줄 난 다 안다니까. 은자는 소용없다고? 그럼 금
괴를 줄게."
주백통은 금괴를 내던졌다. 열 냥짜리 금괴였다.
벽사신군은 발을 동동 구르며 욕했다.
"이 늙어도 죽지 않는 두상탱이야……."
"그래 그래. 난 늙어도 죽지 않는 장생불로하는 노완동이지."
풍자귀가 보다 못해 벽사신군을 잡아당겼다.
"여보게 벽사신군. 그런 실성한 인간과 실랑이 할 게 뭐 있나? 술맛 털어지네. 술이나 먹
세."
벽사신군은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주백통은 이 뱀귀신이 왜 저렇게 성을 내는지 알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은자를 줘도 싫다 금괴를 줘도 싫다. 그래 네 조부는 도대체 뭘 줘야 술과 고기를 이 노완
동에게 주겠다는 건가?"
풍자귀가 올려다보며 고성을 질렀다.
"주백통 선배님, 정말 술이 먹고 싶소?"
"물론이지, 먹고싶다마다. 이거 배가 고파 죽겠다니까."
주백통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풍자귀는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술과 고기는 여기 많소이다. 쇠고기도 삶은 편육이 열 근이나 있고 술은 여아홍이 한 단지
나 있소이다. 우리 형제 둘이선 내일 새벽까지 마셔도 못다 먹겠소."
"그런데 왜 좀 이리 안올려보내나?"
"심산유옥에 또 깊은 밤이라 술과 고기 값이 비싸진다는 말이 있잖소? 그 도리야 선배님이
우리보다 더 잘 알게 아니오?"
"그래서 내가 금괴와 은자를 얼마나 많이 내려보냈나."
풍자귀는 노완동이 내려보낸 금괴와 은자를 손바닥에 놓고 추스려보면서 말했다.
"금은이야 체외지물(體外之物)인데 금은 가지고서야 이 비싼 술과 고기를 못 바꾸지요,"
그리고는 그 금과 은을 주육을 갖고 온 제자에게 상으로 내주며 분부했다.
"어서 가 모용공자님에게 아뢰렷다. 주백통 선배님께서 굶어 세상 하직하게 되었다고 말이
다."
두 제자는 시원하게 대답하고 떠나갔다.
주백통은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엇을 내야 술과 고기를 주겠다는 거지?"
풍자귀는 일부러 소리가 나게 술 한잔을 쭉마셨다.
"카―, 말씀드려도 아까워서 내려고 할까?"
"내 목숨만 내놓으라고 하지 않으면 다른 것은 그 어떤 것도 다 내놓을 수 있네."
풍자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건 그만두고 주백통 선배님 제자를 내놓으시오. 내놓으시겠소?"
"뭐? 제자를? 아니, 양효비 말인가? 양효비를 가져선 뭘 하겠는가? 양효비가 돈인가?"
풍자귀는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 그건 상관하지 마시고 술과 고기를 드시려거든 제자를 내려보내시오. 혈도를 눌러 아
래로 던지면 즉시 술과 고기를 올려보내지요."
주백통은 양효비를 돌아보았다.
'저 녀석의 혈도를 눌러 내던지면 당장 뱀밥이 될 게 아닌가?'
그런데 밑에선 풍자귀가 술을 먹으면서 머리를 흔들며 타령까지 했다.
"인생이 얼마더냐? 술 없인 못 살겠네. 살아 생전 술 한 잔이 죽어 제삿상 백 잔보다더 나
으리. 먹다 죽은 귀신 원이 없고 주려 죽은 귀신 신선이 되어도 울음 뿐이라네."
주백통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돌아서 양효비를 불렀다.
"이봐, 효비야. 어서 어서 내려가. 이 스승에게 술과 고기를 대접하려면 네가 아무래도 내려
가야겠다."
양효비는 사색이 되어 우는 소리를 했다.
"사부님, 저 자들의 꼬임에 빠지지 마세요. 저 자들은 내가 미워서 죽이려고 그러는 거예요.
난 내려가기만 하면 저 자들에게 죽어요."
"스승을 위해 하는 일인데 그런 고집이 어디 있어? 어서 내려 가."
주백통은 한숨을 지으며 손을 뻗쳐 양효비를 거머쥐려 고 했다.
양효비는 사색이 되어 오군영 뒤에 가 숨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부님, 저 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니까요."
오군영도 소리쳤다.
"선배님, 저 자들의 궤계에 빠지면 안됩니다."
오자경과 오군량도 달려와 양효비를 보호하고 나섰다.
바위 위에서 난리가 났다고 풍자귀는 싱글벙글하며 외쳤다.
"주백통, 어서 양효비의 혈도를 눌러 내던져요. 그러면 즉각 술과 고기를 올려보낸다니까요.
야, 그 술맛 좋구나. 핫하하, 그 고기 구수하구나!"
굶주리다 못해 정신이 잘못된 주백통은 술과 고기만 눈 앞에 아른거렸다. 그는 두 손을 앞
으로 허우적거리다가 오씨네 부자를 밀어놓고 또 공명권을 써 오군영까지 넘어지게 하고서
는 양효비 를 거머쥐려고 달려들었다.
양효비는 당황해서 장을 내치며 주백통을 막기도 하고 또 이리 저리 피하기도 했다. 이에
대노한 주백통은 자기 진짜 재간을 써서 양효비를 후려쳤다. 양효비는 한 옆으로 얼른 피했
다. 그런데 어느새 주백통의 다른 손이 대금나수(大擒拿手)로 후려오며 양효비의 뒷덜미를
덥석 움켜쥐는 것이었다.
노완동 주백통의 좌우호박지술은 천하에 당할 자가 없었다. 한 손으로는 공명권을 씀과 동
시에 다른 한 손으로는 대금나수를 쓰자 양효비 재간으로는 피할 수가 없었다. 양효비는 뒷
덜미 대혈 을 움켜쥐여 옴짝달싹을 못하게 되었다.
주백통은 양효비를 선뜻 쳐들고 바위 모서리로 가서 내던지려고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양
효비는 바둥거리며 밑을 내려다보았다. 달빛 아래 퍼런 빛이 반짝반짝하는 게 온통 벽사 천
지였다. 양효비는 죽는다고 아우성을 쳤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오군영이 목멘 소리를 질렀다.
"어마나 선배님, 어서 우리 낭군님을 놔주세요. 제발."
그러다가 오군영은 그만 까무라쳐 넘어졌다. 오군량이 급히 동생을 일으켜 앉히고 진기를
넣어 응급처치를 했다. 그것을 본 풍자귀는 좋다고 일어서서 떠들었다.
"주백통 선배님, 어서 손만 놓으시오. 그러기만 하면 이 술과 고기는 몽땅 선배님 것이외
다."
주백통은 두 눈이 벌개져서 소리쳤다.
"속이지 않겠지? 거짓말이 아니겠지?"
"거짓말이라니요? 주백통 선배님이 어떤 분이라고 제가 감히 거짓말을 해요? 주백통 선배님
무공이 천하무적인데 그 주먹에 맞아죽지 못해 거짓말 할까요? 그런 걱정 절대 마십시오.
내 말에 신용이 없다면 그저 한 주먹으로 날 쳐죽이시오."
그런데 이때 깨어난 오군영이 주백통에게 미친듯이 달려들어 주백통의 팔을 죽어라고 앞으
로 당겼다. 그러나 주백통이 어떤 사람인가? 수십 년 무공을 닦은 사람인데 오군영의 힘으
로야 끄덕도 안했다. 오군영은 급한 김에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는 모르나 주백통의
귀뺨을 죽어라고 후려쳤다.
짝 하는 소리가 먼 곳까지 들렸다.
바위 위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양효비마저도 아우성소리를 뚝 그쳤다.
무림 선배이고 일등 고수인 노완동이 가만 있을까? 가뜩이나 굶주려 발광을 하고 있는데 잘
못하면 오군영을 갈기갈기 찢어죽일 것이다.
모두들 숨소리도 못냈다.
오군영도 스스로 한 짓에 놀라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양효비를 구하기 위해 모
든 것을 각오하고 노완동을 날카로운 목소리로 꾸짖었다.
"스승이란 분이 이게 무슨 짓이죠? 그 잘난 술과 고기가 탐나 제자를 죽여요? 어서 내 낭군
님을 내려놔요, 어서요!"
그런데 생각 밖으로 주백통은 오군영의 말대로 양효비를 당겨 다가 바위 위에 천천히 내려
놓는게 아닌가? 그리고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정말, 자칫했으면 제자를 죽일 뻔했구나. 위험했어."
그는 창피스러운듯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죽을 뻔했던 양효비는 오군영을 와락 끌어안으며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고마워 고마워. 앞으로 절대 잊지 않을거야. 잊는다면 천벌을 받을거야."
양효비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오군영이 얼른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런 불길한 소린 왜 하죠?"
풍자귀는 그만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었다. 그러나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위에
다 대고 소리쳤다.
"노완동, 정말 굶어죽을 작정이시오?"
주백통은 밤하늘을 우러러보며 장탄식을 했다. 그리고 휘파람을 길게 한번 불었다.
"이 노완동이 하마터면 너에게 속을 뻔했다. 내 이제 이곳만 벗어나면 너를 절대 가만 두지
않을테다. 가죽을 벗기고 힘줄을 뽑고 뼈를 탕쳐서 기름에 튀겨 개 먹이로 줄 테다."
노완동은 풍자귀를 내려다보며 입에 담지도 못할 악담을 퍼부었다.
그런데 노완동의 긴 휘파람 소리에 이끌어 왔는지 갑자기 구성진 퉁소소리가 들려왔다. 처
음은 몇 리 밖에서 들려오는 것 같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퉁소 소리는 수림으로 다가왔다.
애간장을 끊는듯 애절한 퉁소 소리였다. 누구도 그 소리에 나오는 눈물과 서러운 마음을 걷
잡을 수가 없었다. 각자는 자기의 진기를 운행시켜 이 심상찮은 퉁소 소리가 가져다 주는
비애를 막느라고 야 단이었다.
퉁소 소리는 점점 더 가까이 들려왔다. 바위를 둘러쌌던 뱀들 이 괴로워 못 참겠는지 몸을
비비꼬며 구불덕거렸다. 벌써 몇 마리는 슬렁슬렁 달아나기 시작했다. 벽사신군은 뱀들이 퉁
소 소리 에 그러는 줄을 알았다. 그는 큰 소리를 쳐 달아나는 뱀들을 막으려고 했다.
노완동이 갑자기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또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 퉁소 소리도 화답이나
하는듯 음향을 높였다.
"동사 황약사다!"
주백통은 기뻐 부르짖었다.
퉁소 소리를 참을 수 없어 뱀 무리들은 점점 남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벽사신군은 뱀들
을 막으려고 악다구니를 지르며 날 뛰었지만 허사였다. 높아가는 퉁소 소리에 뱀들은 벽사
신군의 소리는 아랑곳 하지 않고 뿔뿔이 남쪽으로 홑어져 번개같이 달아났다.
대경실색한 벽 사신군의 안색은 말이 아니었다.
"형님, 어서 뜁시다. 필시 어느 고인이 암암리에 저것들을 돕는 것 같습니다."
벽사신군은 풍자귀를 잡아끌었다. 그렇게 믿었던 뱀 무리들이 없어지니 둘은 끈 떨어진 망
석이 되었잖은가? 바위 위에 있는 무리들이 내려오면 둘은 영락없이 죽고 말 것이다. 둘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는 달아나기 시작했다.
주백통 일행은 바위 위에서 뛰어내렸다.
"여보게 황약사, 그러지 말고 어서 나오기나 해."
주백통이 황약사를 불렀다.
"이봐, 황약사. 안나오겠어? 그럼 내가 들어가 붙잡는다."
그러나 수림 안에서는 목소리만 들려왔다.
"이 노완동아, 이번에 네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이 다음엔 날 성가시게 굴지 말게."
"핫하하, 과연 황약사가 틀림없구나. 자네가 날 구해주었다구? 모를 말이지. 자네 무공이 나
보다 못한데 날 어떻게 구해?"
그리고 주백통은 수림 속으로 쫓아 들어갔다.
"정말 두통나는 사람이라니까."
수림 속의 음성은 신속히 멀어져 버렸다. 모두들 혀를 찼다. 오군량은 한참 있다가 한숨을
지었다.
"언제 가야 난 저런 귀신 같은 재간을 가질 수 있을까?"
제30장 모용협의 실체
양효비가 달아났다는 말을 들은 모용협은 근심에 싸였다.
"양효비가 인골염주를 가지고 있으니 반드시 전세교주를 빼앗으러 올거네. 이거 야단났는
데."
그러자 소제갈 주명이 계책을 세웠다.
"제자들을 풀어 주위를 수색하게 하십시오. 그래서 일단 양효비의 종적만 발견하면 총동원
하여 그 놈을 잡읍시다. 잡지 못해도 그 놈을 와불산에서 쫓아버릴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모용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군요. 그런데 또 한 가지 우려가 있어요. 황약사와 주백통이 당
대 절정고수들이 와불산에 나타난 것이 아무리 봐도 심상칠 않아요.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만 같아 요."
그러자 주명은 부채를 흔들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 두 사람은 염려할 게 못됩니다."
"그건 무슨 말이오?"
주명은 밋밋한 아래턱을 쓰다듬었다.
"주백통은 그 별명이 노완동이지요. 그만큼 실성한 사람처럼 아무 일이나 장난으로 대하며
도무지 진정으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다가 단순하기 짝이 없어서 전세교주를
빼앗을 생각은 절대 하지도 않을 사람입니다."
"하지만 황약사는 생각이 깊지 않소?"
"황약사로 말하면 정파와 사파 사이에서 자기 혼자 있는 사람이지요. 그는 화산논검에서 천
하제일이라는 이름을 따내려는 욕심이 있을 뿐 천하를 가지겠다는 생각은 애당초 가지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황약사가 강호를 다니는 것은 산천을 구경하고 은사(隱士)들을 찾아 이야
기나 나누기 위한 것이랍니다. 속세의 일엔 아주 초탈한 사람이지요. 그가 와불산에 온 것은
아주 우연하게 온 것같습니다."
"글쎄 그러면 얼마나 좋겠소."
"지금 우리가 가장 유의할 대적은 오독방이라고 봅니다. 그들이 인골염주를 갖고 있기에 우
리보다 좀 유리한 형편이지요."
그러자 모용협이 적이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주위에 있는 근래 해산할 임산부들을 모두 부중에 잡아넣기를 잘 했소. 이것만으로도 우리
가 전세교주를 가질 자신이 있지 않소?"
모용협은 일어나 원정을 지고 왔다갔다 하다가 문득 멈추어 서서 탄식을 했다.
"탄식은 왜 하시지요?"
"우리 집 안사람이 임신한 지 일곱달 밖에 안되니 참 애석하단 말이오. 이미 열달이 차 15
일에 득남을 한다면 얼마나 좋겠소? 그러면 내 아들이 당연히 전세교주가 될 게 아니오?
그러면 이렇게 속을 색일 필요가 없지 않겠소?"
모용공자의 말에 유명은 빙그레 웃었다.
"그런 일로 한숨 지을 게 뭐 있습니까? 부인께서 10월에 해산 을 하신다면 그때가서 진짜
전세교주를 남 모르게 죽여버리고 그 대신 아드님으로 바꾸어놓으면 누가 알겠습니까. 귀신
도 모를 겁 니다. 이렇게 되면 진짜 전세교주가 이 다음에 커서 우리를 배반하는 것도 미리
방지할 수 있지 않습니까?"
모용공자는 그말에 얼굴이 환해지며 크게 웃었다.
"선생은 정말 제갈공명이오."
둘은 또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런데 이 때 밖에서 급한 발걸음 소리가 나더니 문을 열며 소
이선생이 들어왔다. 당황한 기색이었다.
평소 아무리 위급한 상황에 직면해도 언제나 침착하던 소이선생이 아닌가?"
무슨 일이 생겼소?"
소이선생은 이마에 돋은 땀방울을 훔쳤다.
"신교(神敎)에서 두 장로가 왔습니다. 전세교주를 데려오라고 보낸 장로들이지요."
"옥륜법왕과 합포장로가 왔지요?"
주명이 물었다. 그들은 이미 신교에서 누구를 파견한다는 것을 염탐하여 알고 있었다.
소이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들 둘은 이미 며칠 전에 와불산에 와 있었지요. 종적을 감추고 사방을 다니며 임산
부들을 조사하다가 순찰다니는 우리 두 무사들에게 방금 발각되었습니다."
모용협은 그 말을 듣고 큰 일이 아니라는듯 빙긋 웃었다.
"그런 일로 그렇게 당황해 할 게 뭐 있소? 그들이 온다는 거야 우리가 이미 짐작하고 있던
일이 아니오."
소이선생은 찻잔을 들어 차를 한모금 마시고 말했다.
"그들 뿐만이 아닙니다. 독주여니 완안방방과 혁중달이 그들과 함께 있는데 그들은 상청 형
님을 인질로 끌고 왔습니다. 그것들이 상청형님으로 우리를 협박한다면 일이 아주 난처해집
니다.
"과연 그렇겠군요. 그래 그들 뒤를 많게 사람들을 파견했소?"
주명이 물었다.
"예. 풍자귀 형님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크게 염려할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우
리가 전세교주를 안고 있기만 하면 그들이 어쩌겠습니까? 우리 말을 고스란히 들어야지요."
"그런데 선생은 당황해 할 게 뭐요?"
모용협이 물었다.
"밖을 순찰하다가 저는 바위들 사이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지요. 그래서 살금살
금 가보니, 글쎄 합포장로와 완안방방이 오독방 청룡당 당주 호청룡과 철검보 보주 사도인
과 싸우고 있질 않겠습니까?"
소이선생의 말에 주명이 아래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러니 오독방도 왔다 이 말이군요. 말을 들어보니 오독방도 이번 일을 극히 중시하는 모
양이군요. 그렇지 않으면 청룡분타와 주작분타 이 두 개 분타를 다 보낼 수 없지요. 참, 우
리가 충심환의 독을 빼는 해독약을 얻을 수만 있으면 좋겠는데. 그 해독약을 철검보 보주
사도인에게 줘보시오. 그러면 사도인은 반드시 오독방을 배반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에
게 아주 유리하지요."
모용협은 그 말에 귀가 솔깃해져 고개를 끄덕였다.
"오독방에 잠입해 있는 우리 사람이 있잖소? 그 사람 보고 즉시 그 해독약을 홈쳐내라고 독
촉하시오,"
그러자 주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녀석은 신선도에 잠복한지 삼 년이나 되는데 아직까지 방주 여노악의 얼굴도 한번 못
보고 있답니다. 전서구로 전해온 소식에는 반 년 내로 꼭 해독약을 훔쳐 보내겠다고 했지만
그 장담 이 실현될 지는 보아야 할 일이지요. 어쨌든 요 며칠 내로는 그 해독약을 홈쳐보내
지 못할 겁니다."
모용협은 의자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애석한 일이로군. 참으로 애석한 일인데. 지금 우리 손에 그 해독약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
소. 충심환에 중독되어 오독방을 할 수 없이 따르는 각 문파들에게 그 해독약을 나누어주면
오독방은 모래성처럼 무너질게 뻔한데……."
"공자님,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대사를 도모하고 있어요. 조급해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주명이 이렇게 말하자 소이선생이 말을 이었다.
"오독방 청룡분타 쪽엔 타주 호청룡과 사도인 밖엔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철검보
제자들도 안 보이고 청룡타의 제자들도 안 보였습니다. 철검보의 제자들은 데리고 왔다가
자칫하면 대사를 망칠까봐 오독방이 꺼려 데리고 오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청룡타 백 명의
제자들은 꼭 왔을 겁니다. 이미 와 어디에 숨어 있을텐데 그 곳을 알 수가 있어야지요?"
모용협은 사색에 잠겼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늘이 팔월 열나흘이니 내일 아침엔 큰 싸움이 나겠구나."
주명은 자못 정중한 기색이 되어 읍까지 하면서 말했다.
"부중에 이미 제자 오백 명을 모아 놓았습니다. 모두 공자님께 충성을 다 할 것을 맹세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양효비가 인골염주를 가지고 나타나는 것을 사전에 막아내기만 한
다면 교 주의 탄생과 더불어 우리의 대업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만사가 뜻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소."
모용협은 은근히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팔월 열나흘 온 낮에 걸쳐 와불산은 여느때와 같이 사뭇 조용하기만 했다. 순찰을 다니는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이따금씩 보일 뿐 청룡분타의 수하들이나 주작분타의 수하들 그리고
양효비 등은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신조협 양과도 보이지 않았다. 왔는지 안
왔는지? 안 왔으면 언제 오는지? 때마침 온다면 그 진짜 인골염주를 전세교주에게 내놓을
수 있는지? 누구도 알지 못하는 수수께끼였다.
그 중에서도 제일 조용한 곳은 모용부였다.
오독방이나 신교의 고수들이 잠입하여 가족을 인질로 잡아갈 까봐 모용협은 가족들을 모두
후화원 서쪽 집에다가 모아놓고 그 주위를 백 명의 무사들로 삼엄하게 지키게 했다. 나머지
몇 백 명 제자들은 모두 말 없이 긴장해 싸울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내일 아침의 싸움이
어떤 싸움인가를 그들 모두가 잘 알고 있었기에 단단히 각오하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던 하늘이 저녁 무렵이 되자 변하기 시작했다. 하늘 저쪽에서 문득 먹구
름이 밀려오기 시작하더니 눈 깜짝 할 사이에 온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동시에 찬 바
람이 일며 수림을 우수수 흔들어댔다. 마치 가을을 연상케 했다.
번개가 치고 우레가 울었다. 모용세가 대문 앞에 있던 천 년 묵은 소나무가 벼락을 맞아 요
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문을 지키던 보초들은 혼비백산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이게 무엇이지? 이게 천벌을, 천벌을 내린다는 건가?"
한 보초가 칼자루를 죽어라고 틀어쥐며 물었다.
"신교교주를 빼앗아 차지하는 일이 하늘의 뜻을 어기는 일이 라고 하늘이 벌을 내리려는가
봐. 그렇지 않나?"
그러는데 보초 두목이 와서 그들의 귀뺨을 호되게 후려쳤다.
"큰 싸움을 앞두고 무슨 허튼소리냐? 또 한번 그 따위 군심을 동요하는 소리를 했다간 봐
라. 무조건 죽여버릴테다."
두 명의 보초는 뺨을 싸쥐며 입을 다물었다.
"저봐, 쥐! 저 쥐새끼들 봐."
숱한 쥐들이 대문 앞을 급히 지나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보초들은 감히 말을 못했다.
보초 두목도 속으로는 수상한 생각이 들었다. 여기 사람들이 여남은 명이나 서서 떠드는데
그 많은 쥐들이 뛰어나와 앞을 지나가다니, 쥐들의 간덩이가 갑자기 주먹만 해졌는가? 진정,
진정 하늘이 천벌을 내리려고 이러는가? 보초 두목은 벼락맞아 뭉청 끊어진 천 년 노송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 때 대문이 열리며 교대할 보초 스무 명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들도 오면서 "이
상해, 이상하단 말이야." 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상하다니? 뭐가 이상하단 말이오?"
먼저 대문을 지키고 있던 보초들이 물었다.
"글쎄 부중에 쥐들이 모두 땅위로 나왔어요.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갈팡질팡 온통 쥐천지인
데 개미새끼들은 또 무슨 일로 덩달아 새까맣게 땅 위로 기어나오지 않겠어요? 이런 일은
보다 처음이라니까요. 백 년에 한번도 없을 괴상한 일이라니까요."
그러자 교대가 끝난 보초 두목이 소리쳤다.
"그런 소리 그만 하고 이제부터 정신들 차리고 보초나 잘 서!"
보초들은 서로의 얼굴만 멀뚱히 쳐다보며 입을 다물었다.
날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번개와 우레도 이즈음엔
잠잠해지고 바람도 점점 멎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검은 구름이 밀려가고 하늘이 갰다. 석양빛이 비춰졌고 대지는 이전처럼
조용해졌다. 그러나 보초들은 어쩐지 오늘 일이 심상치 않게만 여겨졌다.
먼 곳에서 몇 사람이 가까이 오는 것이 보였다. 보초들은 창칼을 꼬나들었다.
대문 앞에 당도한 사람은 모두 다섯이었다. 가운데 둘은 붉은 옷을 입은 티베트인이고 그
곁에는 예쁘게 생긴 비구니와 곰같이 우둔하게 생긴 장한이 서 있었는데 장한의 손에는 꽁
꽁 묶인 깡마른 사내가 들려 있었다.
보초들이 살펴보니 그 오랏줄에 결박된 사람은 모용공자의의 형제 중 셋째인 상청이었다.
"다가 오지 말고 게 서시오!"
보초 두목이 그들을 보고 소리쳤다. 그리고는 먼저 상청을 보며 읍을 했다.
"상청 어르신 고생 많으십니다. 공자님께선 상청 어르신을 구하려 여러가지로 애쓰고 있습
니다."
상청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어서 가 공자님께 아뢰게. 옥륜법왕과 합포장로 그리고 독주여니 완안방방과 혁중달이 전
세교주를 빼앗으러 왔으니 조심하라고 어서 가 아뢰게."
이에 놀란 보초 두목은 보초 하나를 급히 부중으로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보초는 영
패 하나를 들고 나와 고성을 질렀다.
"우리 공자님께서는 옥륜법왕과 합포장로님 그리고 완안사태님과 혁장군께서 어서 안으로
듭시라고 하십니다."
보초 두목은 얼떨떨해져 그 보초에게 수군거렸다.
"임자, 잘못 듣고 전하는 게 아냐?"
그 보초는 영패를 보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공자님의 분부대로 입니다. 내가 목이 몇 개라고 없는 말을 하겠습니까? 반자도 틀림이 없
다구요."
보초 두목은 알 수가 없었으나 공자의 영이라 대문을 열어주었다.
합포장로가 옥륜법왕에게 뭐라고 하자 옥륜법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서 대문 안으로 들
어갔다. 합포장로와 완안방방 그리고 혁중달이 그 뒤를 따랐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무사 하나가 합포 일행을 안으로 인도해 들어갔다. 한 곳에 이르자
넓은 정원 맞은편에 모용세가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이 보이는데 그 자홍색 대문 위에는 금
빛으로 '충 의당(忠義堂)'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었다. 좌우엔 용을 새긴 기둥들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각 기둥마다에는 금도무사 열여덟 명이 줄지어 서 있었다.
모용협은 자색의 두루마기에 허리엔 한옥검을 차고 정문 밖에 서 있었다. 보기만 해도 일방
패주의 위풍이 늠름했다. 그 좌우에는 소제갈 주명과 탁장청이 서 있었다. 탁장청은 해독약
을 먹고 하룻밤 쉬었기에 무공이 태반은 넘게 회복되었다.
모용협은 웃는 얼굴로 읍을 했다.
"두 분께서는 옥륜법왕님과 합포장로님이 아니십니까?"
"예, 그렇소이다."
합포는 차디찬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는 모용공자의 영웅다운 모습을 속으로 개탄했다. '저
런 영준한 젊은이가 옳은 일을 하면 얼마나 전도창창하랴? 그런데 오히려 나쁜 심보를 갖고
우리 신 교를 어쩌겠다고 야단을 하다니? 야심도 분수가 있어야지…….'
그런데 완안방방이 모용협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소리쳤다.
"이봐요 모용협. 부근의 임산부들을 당신네들이 잡아왔지?"
모용협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거기서 내 셋째형을 잡는데 내가 임산부 몇을 왜 못 잡겠소?"
"공자는 날 걱정하지 마시오. 대업을 성취해야 하오."
매달려 있는 상청이 소리쳤다.
그러자 혁중달이 주먹으로 때리며 욕을 했다.
"닥치지 못해! 남아봉에 죽지 못해 환장했냐?"
"어디 죽여봐라. 자, 죽여라."
상청의 입은 가만 있지 않았다.
"못 죽일 줄 아느냐? 전세교주 때문에 놔두지, 전세교주 일이 아니면 벌써 죽였을 거다."
그러는데 완안방방이 모용공자에게 말했다.
"우리를 부중에 들여놓는 걸 보니 모용공자 담도 웬만큼 큰 모양이군요. 우리가 모용부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까봐 겁나지도 않는 모양이죠?"
모용혈은 대답하지 않고 앙천대소를 했다.
날은 아주 어두워졌다. 무사들의 손에는 저마다의 횃불들이 들려 있었다. 횃불에 비친 정원
은 백주처럼 밝았다. 그 빛에 비친 모용협의 얼굴은 아주 험악하게 보였다.
"내가 당신들을 부중으로 모실 때는 그만한 신심이 있다는 말 이 아니겠소? 그만한 자신감
이 없을 모용협이 아니란 말이오."
모용협은 점잔을 빼며 말했다.
그러나 합포 일행을 부중에 들여 놓을까 말까 하는 것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갑론을
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명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우리가 들여놓지 않는다고 가만 있을 그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들여놓지 않으면 그들은 쳐
들어올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독방까지 대적해야 하기에 될수록 제자들의 생명을 아껴놔
야 합니다. 아무래도 잠시 접전을 피하고 그들을 들여 놓음이 상책입니다. 이제 태어날 전세
교주만 우리 손에 있다면 저들이 함부로 우리를 어쩌지는 못할 것입니다."
모용공자는 주명의 말을 따랐던 것이다.
합포가 합장을 하고 말했다.
"교주님께서 탄생하실 때는 시방(十方)의 신령들이 좌우를 호위하게 되며 인골염주와 교주
님이 동시에 출현하게 됩니다. 아울러 그 때면 천지가 진동하고 마귀들이 전멸하게 됩니다.
모용 공자께서도 빨리 참회하여 개과천선하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입니다."
"장로님께선 나를 겁주려는 거요? 내일 새벽 내가 교주님을 모시게 되면 당신들은 모두 이
모용협의 수하가 될 터인데 그때도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호령할 셈이오? 그러지야 못하겠
지."
그러고는 모용협은 한바탕 너털웃음을 웃었다.
합포는 노하여 두눈을 부릅뜨며 적금강마저(赤金剛魔杵)를 치켜들었다.
"그냥 고집스레 회개하지 않는다면 나는 하늘을 대신해 도를 실천하는 수밖에 없소."
"장로님 고정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난 잡아놓고 있는 임산부들부터 죽여버리겠소? 겁나지
않소?"
그리고는 손짓을 획 했다. 제자 열둘이 가마 여섯개를 메고 충의당에서 나왔다.
가마 위에는 만삭이 된 배를 안고 신음하는 임산부들이 누워 있었다. 금방이라도 해산을 할
것 같이 보였다.
"자, 보시오. 여기 분명 귀교의 전세교주를 임신한 여인이 있을 것이오. 당신이 감히 우리에
게 손을 댄다면 교주님이 탄생할 수 있겠는지 모르겠소."
합포는 발을 구르면서 적금강마저를 내려놓으며 옥륜법왕에게 티베트어로 무어라고 말했다.
옥륜법왕은 두 눈을 떴다가 다시 감으며 또 자기네 언어로 뭐라고 말했다. 합포는 모용협에
게 두 손을 합장하며 말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교주님은 여러 신령들이 보우하기에 우리는 안심하고 교주님
의 탄생을 기다리겠습니다."
모용협은 제자들을 시켜 그 여섯 명의 임산부를 다시 충의당 안으로 들여가게 했다. 그리고
는 의자에 앉았다.
완안방방이 냉소를 하며 상청에게 삿대질을 했다.
"모용공자께서 저 의형을 불쌍히 여긴다면 임산부와 인골염주를 어서 내놓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
그러더니 검끝을 상청의 가슴에 갖다대었다.
모용협은 두 눈썹을 곤두세우며 소리쳤다.
"네가 감히 어쩌겠다는 거냐?"
그러자 주명도 부채를 흔들며 완안방방을 위협했다.
"우리 모용공자님께선 내일이면 서역신교의 주인님이 되신다. 상청 형님을 건드리기만 해봐
라. 너희들도 살아 남지 못하리라."
완안방방은 깔깔 웃었다. 그러더니 아주 부드러운 음성으로 비꼬았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모용공자에게 아첨해야겠군요"
하고는 검끝으로 상청의 가슴팍을 반 자나 쭉 내리 베었다. 거기선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
내렸다.
상청은 이를 악다물고 신음소리도 내지 않았다. 완안방방은 또 상청의 가슴팍을 검 끝으로
쭉 내리 베었다. 그러면서 깔깔 웃었다.
"모용공자님, 어때요? 그렇게 그냥 의형이 내 칼에 난자당하는 걸 보고만 있겠어요?"
상청이 완안방방을 향해 욕지거리를 해댔다.
"이 쌍년아, 이 지독한 년아. 난 죽어도 널 가만 두지 않을테다."
주명은 이를 갈며 합포를 보고 말했다.
"출가한 분들은 자비를 첫 자리에 놓는다는데 저 독주여니가 하는 짓을 당신은 그냥 보고만
있단 말이오?"
"부처님께서는 창생에게 자비를 베푸시지만 마귀는 사정없이 징벌하는 법입니다."
합포의 대답이었다. 완안방방은 그 말이 좋다고 웃으면서 모용협에게 말했다.
"모용공자님, 그래 아직도 우리 요구를 들어주지 않겠어요?"
모용협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말이 없었다.
상청은 아픔을 참으며 부르짖었다.
"공자님, 나는…… 나는 관계치 말고 대업을…… 대업을 이룩하시기……."
모용협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셋째 형님, 고마운 말씀입니다.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잠시만 참아주시오. 내일 아침 꼭
구해 드리리다."
그 말에 완안방방이 또 자지러질 듯이 웃었다.
"내일 아침?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그러더니 검을 후려쳐 상청의 오른팔을 툭 끊어버렸다. 붉은 피가 샘 솟 듯했다. 상청은 단
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이마엔 비지땀이 흘러내리고 사지엔 경련이 일었다.
완안방방은 검날에 묻은 피를 상청의 적삼에 대고 닦은 다음, 또 부드러운 음성으로 모용공
자에게 말했다.
"모용공자님, 그래도 우리 요구를 들어주지 않겠어요?"
그러자 탁장청이 그 녹슨 검을 확 뽑아들고 일전의 태세를 갖췄다.
"지독한 년, 해볼려면 나 탁장청하고 해보자."
그러자 완안방방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면서 또 검을 휘둘러 상청의 왼팔을 툭 끊어버렸
다.
"난 댁하고는 싸우기 싫어요. 두려워서가 아니고 더러워서 그래요."
"뭣이 어째? 내가 왜 더러워?"
"다른 사람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게 더럽지 않나요?"
그 바람에 탁장청은 성난 사자 같이 완안방방에게 달려들었다. 혁중달이 낭아봉을 치켜들며
부르짖었다.
"이놈, 우리 아씨를 건드리기만 해봐라. 네 대가리를 박살낼테다."
탁장청이 혁중달을 무서워 할 사람인가? 탁장청은 완안방방을 향해 녹슨 검을 내찌르려 했
다. 그런데 벌써 완안방방의 검끝은 상청의 인후에 닿아 있었다.
"너 탁장청, 까딱만 해봐. 내가 먼저 이 자부터 요절낼테다."
탁장청은 그 바람에 검을 멈추었다.
상청은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을 참으며 모용공자를 보고 말했다.
"모, 모용공자. 아예 나를…… 시원히 어서 죽게……."
그러자 완안방방이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쉽게 죽게 놔둘 줄 아느냐?"
완안방방은 또 검으로 상청의 왼발을 내리찍었다. 상청은 또 죽는다고 비명을 질러댔다. 고
통을 참느라고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불빛 아래 악귀처럼 보였다.
주명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어서 모용협의 귀에다 대고 조용히 말했다.
"어쩌면 좋을까요?"
모용협은 손을 내저었다.
"상청 형님, 형님은 모용세가의 대업을 이룩하기 위해 여러해 동안 큰 고생을 했습니다."
모용협은 그리고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모용공자, 그러지 그러지 말게."
"7년 전 산동에서 우리 형제 여섯과 태산 열여덟 무리들과 싸울 때 형님이 이 동생을 죽음
에서 구해내어 삼백 리를 업고 왔습니다. 그래서 용한 의사를 찾아 내 상처를 치료해 주었
습니다. 형님이 없었으면 이 동생은 그 때 벌써 황천객이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4년 전 파
양효에서 모용세가의 팔십 명 제자들이 도적떼들에게 포위되었을 때 형님이 도적놈들을 죽
여버리고 팔십 명 제자들을 구해냈습니다. 그 팔십 명 제자들은 모용세가의 정예들로서 그
팔십 명 모두를 모용세가의 세력이 땅에 떨어졌을……."
모용협의 말에 상청은 그래도 아픔을 참으며 소리를 질렀다.
"지나간 일, 지나간 일을 다시 말할 필요가 뭐지."
"이 아우는 형님의 부모를 꼭 친부모처럼 잘 봉양하리다."
모용협은 이 한 마디를 하고는 허리춤에서 무엇인가 꺼내 번개 같이 집어던졌다. 서릿발 같
은 것이 상청의 인후로 날아갔다. 은빛 나는 연자표였다. 상청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목을
꺾고 죽어 버렸다.
모용협은 눈물을 글썽이며 일어나 완안방방에게 소리쳤다.
"독거미 같은 년, 이제 또 무엇을 가지고 야단할테냐?"
모용협이 이런 짓을 할 줄 몰랐던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경악 실색해서 모용협을 바라보았
다. 합포까지도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의형제까지도 제 손으로 죽이다니, 이……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주명과 다른 금도무사들의 표정은 침울해졌다.
자기 의형제도 저렇게 죽이니 우리 같은거야 더 말할 게 있겠는가? 모두들 가슴을 짓눌러오
는 격분을 누를 길이 없었다.
탁장청은 발을 구르며 장탄식을 하다가 모용협의 곁으로 물러섰다.
모용혈은 울먹거리고는 옷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내가 셋째 형님을 죽인 것이 아니오. 저 독주여니가 셋째 형님을 죽인 것이오."
완안방방도 모용협이 한 짓을 보고 적이 놀랐다.
'지독한 인간이다. 내 비록 독주여니라고 하지만 나더러 의형제를 죽이라고 하면 죽이지 못
할 거다. 혁중달을 等고 말해도 그가 언제 나를 배반한다고 해도 나는 그를 죽이지 않을 것
이다.'
완안방방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모용공자를 짐승같은 놈이라고 비난했다.
"모용공자님은 과연 대단한 영웅이시네요. 모용공자님 같이 의형제도 서슴지 않고 죽이는
영웅호걸은 세상에 드물거야. 하여튼 대단하셔. 정말 뛰어난 대인물이야."
그러자 모용협은 완안방방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서역신교만 손에 넣게 되면 난 무엇보다도 너부터 죽여 셋째 형님의 원수를 갚을테다."
완안방방은 모용협의 악다구니에 다소 겁이 나서 즉시 대답을 못했다. 그런데 혁중달이 상
청의 시체를 모용협의 발 앞에다가 집어던지며 큰소리를 쳤다.
"넌 사람도 아니야. 짐승보다도 못해!"
모용협이 코웃음을 쳤다.
"참새가 대붕의 뜻을 어이 알리오!"
이 말은 원래 태사공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나온 말이다. 진나라 말기, 백성들이 폭정
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고 진승이 종일 생각에 잠겨 있자 그의 벗들이 진승을 비웃었다. 그
러자 진승 이 "참새 무리들이 어찌 대붕의 뜻을 알리오!" 하고 말했다. 대붕이란 아주 큰 새
의 이름이다. 진승은 후에 봉기를 일으켜 진나라를 타도하는 선구자가 된다. 그러기에 '사기
'에서 나오는 이 말은 후에 대업을 이루려는 사람들의 포부와 결심을 표현하는 말이 되었던
것이다. 모용혈이 자기를 진승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 타당한지, 그리고 모용협이 진승의 이
말로 자기를 격려함이 옳은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모용협은 그런 의미로 그 말을 내뱉었
던 것이다.
주명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모용협이 하는 짓을 보다 못해 부채를 땅에다 콱 내동댕이
쳤다.
"진정 같이 일하지 못할 사람이군"
주명은 홱 돌아서더니 그 자리를 분연히 떠났다.
"선생은 어디로 가시는 것이오?"
모용협이 급히 물었다.
발걸음을 멈춘 주명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분연히 말했다.
"이 넓은 천지 어디를 못 가겠소? 난 천하를 돌아다니겠소. 다시는 남을 돕는 일을 하지 않
으리다."
"그래 나를 버리고 떠나겠다 이 말이오?"
모용협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공자는 어제는 유대덕 형님을 버리더니 오늘은 셋째 형님 상청을 버리지 않았소? 공자와
생사를 같이 하기로 맹세했던 의형제들이 아니오? 이렇듯 의리 없고 무정한 사람을 나는 도
와드릴 수가 없단 말이오."
"선생은 어째서 내 고충을 그리도 몰라주오. 그 모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었소?"
모용협은 발을 굴렀다.
"이유야 어떻든간에 제 손으로 형제를 죽이는 법이 어디 있소? 난 공자가 큰 뜻을 품은 당
세의 영웅으로 알았는데 이렇듯 의리없는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소."
"선생, 지금이 어느 때요? 사람이 모자랄 때가 아니오. 정 떠나겠다면 나를 도와 신교를 차
지한 다음에 떠나시오. 제발 빕니다."
모용협은 털썩 무릎까지 꿇었다.
주명은 잠시 주춤했다. 그러다가 끝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무겁게 말했다.
"난 이젠 모든 것에 신심을 잃었소이다. 아무 일도 하고 싶질 않아요. 공자께서는 자중하십
시오. 잘 있으시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선생! 선생!"
모용협이 일어나며 주명을 연신 사무치게 불렀다.
그러나 주명은 여전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더 빨리 걸어갔다.
"선생은 왜 날 버리고 가는 것이오?"
모용협이 또 소리쳤다.
"공자는 왜 의형제들을 사정없이 죽였소?"
주명은 그 말을 남기고 미련없이 걸어갔다.
모용협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그는 아를 사려물며 탁장청에게 눈짓했다.
탁장청은 흠칫 놀랐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쏜살같이 주명에게로 달려가더니 녹슨
검으로 주명을 내찔렀다. 주명은 등 뒤에서 나는 소리에 고개는 돌렸으나 몸은 미처 피하지
못했다. 탁장청의 그 녹슨 검은 주명의 등에 깊숙이 틀어박혔다.
주명은 두 눈을 부릅뜨며 모용협을 손가락질했다.
"이, 이럴 수가……."
모용협의 음성은 얼음같이 차가웠다.
"지모가 대단한 선생이 아니오? 우리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데 그대로 놔둘 수는 없소.
만약 선생이 다른 사람을 도와준 다면 난 비명횡사를 하게 될 게 아니겠소?"
"임금을 모시는 건 호랑이를 모시는 것과 같다."
주명은 이렇게 말하고 쓰러졌다. 소제갈은 이렇게 죽고 말았다.
탁장청은 녹슨 검에 흐르는 피를 입김을 슬슬 불어 땅에 떨궈 버리고는 탄식했다.
"주선생, 당신도 우둔하지. 그런 고집을 부릴 게 뭐 있는가? 내가 배운 검술이 살인하는 검
술인 줄 모른단 말인가? 주선생같은 사람을 살려둘 수는 없지."
모용협은 땅에 쓰러진 두 시체를 보고 세번 크게 울고 또 세번 크게 웃었다. 그러더니 종국
에는 두 눈을 부릅뜨며 악다구니를 했다.
"그 누가 나를 배반한다면 이렇게 되리라."
합포의 놀람은 형언할 수가 없었다. 모용협이 그렇게 악독할 줄은 몰랐다. 이같이 잔인하고
간악한 자를 살려두면 사람들에게 해만 될 뿐이었다. 그러나 합포도 당분간 모용협을 어떻
게 할 방 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주명이 죽기 전에 "임금을 모심이 호랑이를 모심과 같다"
고 하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이상했다. 모용협이 임금인가? 임금도 아닌데 왜 그런 말을 했
을까. 그저 비유해서 한 말일까?
그때 한 사람이 들어왔다. 풍자귀였다.
"모용공자, 신교 사람들이 왔소?"
풍자귀가 들어오자마자 떠드는 소리였다. 그는 합포 일행을 미행했는데 중도에서 놓치고 사
방으로 찾아다니다가 이렇게 돌아 온 것이다. 그는 주명의 시체를 보고 놀라서 소리쳤다.
"아니, 이게 주선생이 아닌가? 주선생이 어떻게……."
그리고는 모용협을 바라보았다.
"주명은 모용공자를 배신했소. 그래 내가 죽였소."
탁장청이 차갑게 말했다.
"그럴 리가 있나?"
풍자귀는 모를 일이라는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상청의 시체를 보고는 덮칠 듯 다가갔다.
"아니, 셋째 형님은 누가, 누가 죽였단 말인가?"
완안방방이 코웃음쳤다.
"모용공자님이 대의멸친(大義滅親)을 한 거죠. 볼만하죠?"
풍자귀는 물론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완안방방을 노려보았다.
"분명 네가 한 짓이지?"
"허튼소리 말아요. 난 거짓말 안해요."
풍자귀는 뛰어 일어나며 철추로 완안방방을 내리쳤다. 완안방방은 급히 검으로 철추를 막아
내쳤다.
"왜 이러죠?"
"셋째 형님의 원수를 갚겠다. 네년을 칼로 쳐 죽일테다."
혈안이 된 풍자귀는 날뛰며 연속 철추를 내리쳤다.
물론 풍자귀의 무공은 완안방방을 따를 수가 없었다. 완안방방은 검날에 내력을 모아 풍자
귀의 철추를 힘껏 내쳤다. 완안방방의 검에 맞은 풍자귀의 철추는 석자 높이로 튕겨나갔다.
풍자귀는 하마터면 철추를 놓칠 뻔했다.
"나 독주여니는 사람을 죽여도 광명정대하게 죽인다. 내가 죽였으면 죽였다고 떳떳이 말하
지 속이는 법은 없다. 상청은 내가 죽이지 않았어. 나를 모함하지 마라."
풍자귀는 그 말에 멈칫했다. 그도 완안방방이 사람을 죽이면 자신의 이름을 밝히곤 하는 버
릇을 안다. 그런 여인이니 죽였으면 죽였다고 할게 아닌가? 상청 형님을 죽인 사람은 완안
방방이 아니다. 그럼 누군가? 풍자귀는 모용협 곁으로 가서 물었다.
"상청 형님을 죽인 사람이 누구요?"
그러자 완안방방이 검끝으로 상청의 시체를 가리키며 냉소했다.
"저 연자표가 안보이는 모양이지? 연자표를 보고도 누가 한 짓인지 몰라?"
풍자귀가 바라보니 상청의 목에 박힌 것은 다름 아닌 모용협의 연자표였다. 모용협이 그 은
빛이 번쩍번쩍하는 연자표를 늘 썼기에 풍자귀의 눈에 익었던 것이다. 풍자귀는 모용협을
돌아보고는 눈치를 살폈다.
"모용공자, 이, 이건 어찌된 일……."
그는 모용공자가 '내가 한 짓이 절대 아니오!' 하고 큰 소리로 항변할 것을 얼마나 바랐는
지 모른다.
그러나 모용공자의 입에서 나오는 한숨 섞인 소리는 그의 기대와는 딴판이었다.
"셋째 형님은 독주여니의 협박에 시달릴 수가 없어 내게 간청 했소. 나도 형님이 독주여니
에게 손발을 잘리며 고생하는 것을 볼 수가 없었소. 그래 부득이하게 그럴 수밖에 없었소."
풍자귀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우리 육형제가 맺은 맹세와 정을 잊었단 말이오?"
탁장청이 풍자귀를 끌어당겼다.
"대사를 도모하려면 어차피 희생이 있게 되는 법이 아닙니까?"
풍자귀는 탁장청의 손을 사정없이 뿌리쳤다.
"그래서 의형제의 생명이 헌신짝같단 말인가?"
풍자귀는 노했다.
그러나 모용협도 벼락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뭣이 어째요? 큰 적을 앞에 두고 군심을 동요시킬 작정이오?"
모두들 아연해졌다 풍자귀도 흠칫 놀랐다. 비록 의형제 항렬로는 형뻘이 되나 풍자귀는 어
쨌든 모용협의 부하였다. 무공도 모용협의 적수가 아니었다. 풍자귀는 겁이 나서 입을 다물
었다.
그런데 제자 하나가 뛰어와 보고했다.
"공자님, 오독방 청룡당 당주 호청룡이 철검보 보주 사도인과 제자 팔십 명을 데리고 원문
으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모용협은 놀랐다. 뒷문은 와불산과 이어져 있다. 그러나 문 밖의 백보쯤 되는 길이 안으로는
풀 한 포기도 없는 공지였고 높은 담벽에는 궁수 백 명을 풀어 지키게 했다. 설사 무림의
일류 고 수들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백 명의 궁수들이 쏘아대는 빗발 같은 화살을 막으며 그
넓은 공지를 통과할 수는 없으리라 모용협은 동서남북 네 개의 문 중에서 이 뒷문을 난공불
락의 문으로 생각 해 마음 놓고 있었다.
"무엇이 어째? 청룡분타 무리들은 화살을 먹는 불가사리들이란 말인가?"
"이렇게 된 일입니다. 비록 달빛은 밝았지만 그 높은 성벽 위에선 땅 위에 있는 작은 물건
들은 분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린 눈을 비비며 경각심을 높이고 있는데 글쎄 수
없이 많은 독충들이 어느새 어디로 기어올라왔는지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 사람을 여남은
명이나 물어 죽였습니다. 그래서 황급히 달려들어 독충들을 때려잡는데 청룡분타 무리들이
그 틈에 도둑고양이 들처럼 소리없이 올라왔습니다. 우리가 활을 당기려 할 때는 그 놈들
중 심여 명의 고수들이 이미 성벽 위에 올라와 칼을 휘둘렀습니다. 우리는 활도 쏠 수 없게
되었지요. 우리들은 결사적으로 싸웠습니다만 우리 모두는 활 재주는 있어도 다른 재간은
시원찮은 궁수들이 어서 청룡분타 무리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단번에 태반이 넘는
사람들이 놈들에게 죽었습니다."
제자는 대장부의 체면도 아랑곳 얼이 엉엉 울었다.
모용협은 발을 굴렀다. 후회막심이었다. 애당초 주명의 말을 들었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주명은 뒷문이 요긴한 곳이기에 사람을 더 증파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때 모용협은 뒷문은 철옹성이라고 믿으며 주명의 말을 듣지 않았다.
뒷문 쪽으로부터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함성이 들려왔다.
"주선생, 어쩌면 좋겠소?"
모용협은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이 흘러 나왔다.
"주선생은 이미, 이미 죽었소."
모용협은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말 그렇지, 죽었지."
모용협은 갑자기 주명에 대한 증오심이 솟구쳤다. 주명, 이놈! 네가 날 배신하고 떠나갔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청룡분타 무리들이 이렇듯 쉽사리 쳐들어올 수가 없지.
모용협은 정신을 가다듬고 제자에게 명령했다.
"위방성 형님에게 무사 백 명을 거느리고 가서 막게 하라. 오독방 제자들을 한 놈도 내원으
로 들여보내면 안된다고 전하라."
그 제자는 명을 받고 급히 갔다.
모용세가 부중은 내원과 외원으로 나뉘어 있는데 내원은 낡은 저택들이 있었고 외원은 모용
협이 후에 확장한 곳이었다. 내원에는 각종 재물과 양곡 그리고 원근에 유명한 수천 권의
비밀서적 들이 비치된 장서각이 있었다. 지금 모용협의 가족들이 모여 있는 화원도 이 내원
안에 있다. 오독방 무리들이 뛰어들어 방화를 하면 인심이 소란해질 것이다. 그러기에 모용
협은 내원을 결사코 사수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제자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들어 왔다.
"큰, 큰 일이 났습니다. 큰 일……."
"덤비지 말고 아뢰렷다."
모용협이 소리쳤다.
제자는 무릎을 꿇으면서 아뢰었다.
"주작분타 타주 오자경이 그의 아들과 딸 그리고 거와장 장정 이백 명을 데리고 정문으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정문엔 능소와 부방이 무사 백오십 명을 데리고 지키지 않느냐? 그래 그들도 패했다 이거
냐?"
제자는 고개를 떨구며 아뢰었다.
"거와장에서 온 장정 이백 명은 모두 극독을 바른 병장기를 썼습니다. 살가죽만 스쳐도 죽
어넘어졌습니다. 우리는 악전고투하며 그 놈들을 사십 명이나 죽이고 숱한 놈들을 부상 입
혔지만 그 사이 우리 무사들은 절반도 더 넘게 죽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능소와 부방 두
두목은 나머지 칠십 명 무사를 데리고 두 번째 대문으로 퇴각해서 혈전을 계속 벌이고 있습
니다."
"그럼 급히 가 알려라. 능소와 부방은 속히 들어와 내원을 사수하라고 해라. 어서 가 전하
라."
모용협은 급히 명령했다.
사실 정문의 실태 역시 모용협이 주명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래 소제갈 주명은
정문 안에다가 함정을 깊게 파놓고 무사들은 모두 내원을 지키는 이른바 공성계(空城計)를
주장 했었다. 그러나 모용협은 정문 지키는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군웅들에게 멸시를 당한
다고 자존심을 내세웠다. 그리고 또 오독방 이 정문은 감히 공격하지 못하리라 여겨 무공이
시원찮은 무사들을 보내 정문을 지키게 하고 무공이 높은 무사들은 도리어 동문과 서문에
보내 지키게 했다. 모용협은 오독방이 동문과 서문을 기습하기 쉽다고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오독방은 그런 괴상한 행동들을 늘 잘했다.
그런데 이번엔 오독방은 측문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모용협이 방심하고 있는 정문과 뒷문으
로 쳐들어왔다. 모용협은 가슴이 떨렸다. 주명의 말을 안들은 일이 못내 후회되었고 주명을
죽인 일도 후회되었다. 그러나 이왕지사 이렇게 되었는데 후회가 무슨 소용이랴.
"내가 보초들을 데리고 가서 정문을 막겠소."
탁장청이 읍을 하며 말했다.
모용협은 손을 가로저었다. 탁장청마저 떠난 다음 신변에 무슨 변고가 생긴다면 자기는 고
림무원에 빠질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어서 소이선생을 모셔와라."
모용협이 수하에게 분부했다.
"소이선생은 연락책의 소임을 맡고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곁에 있던 금도무사가 말했다.
모용협은 속으로 또 장탄식을 했다. '상청 형님이나 유대덕 형님이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소이선생 대신 연락책을 맡았을 것이고 소이선생을 내 곁에 불러올 수 있으련만.'
그 런데 풍자귀가 나섰다.
"내가 소이선생을 대신하면 어떻겠소?"
모용협은 언뜻 풍자귀를 한번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짜증섞인 소리를 했다.
"형님은 진정될 때까지 좀더 쉬시오."
그러자 풍자귀가 탄식했다.
"큰 적을 앞에 두고 내가 일의 경중을 모르겠소? 걱정 마시오."
모용협은 이에 웃는 얼굴을 지으며 두 손을 가슴 앞에 맞쥐었다.
"그럼 형님만 믿겠소."
풍자귀는 깊숙이 허리를 굽히고는 나는듯이 달려갔다.
합포가 장탄식을 했다.
"모용공자, 인골염주와 임산부들을 우리에게 어서 내놓으시오. 그러면 이 위험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모용협은 차디차게 대꾸했다.
"나 모용협은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인데 그깟 오독방 무리들을 두려워 하겠소? 그런 소리
말고 장로님이나 어서 내 수하로 들어오시오."
합포는 물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소린 듣기도 싫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이선생이 총총히 당도했다. 이 때는 주명과 상청의 시체를 치운 후이
기에 소이선생은 그 둘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그는 오자마자 물었다.
"주명선생은요? 주명선생은 어디 갔기에 날 부릅니까?"
"주선생은 다른 요긴한 일이 있어서요. 소이선생이 날 도와 전반적인 국면을 지휘해야겠어
요."
소이선생은 더 이상 말 없이 모용협을 도와 오독방의 침입을 막기 시작했다.
어느새 자정이 되었다. 오독방과의 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원래는 모용부의 사람들이 많았기에 우세를 차지했었지만 오독방 백호분타 제자들이 백여
명이나 더 증원되어 왔기에 오독방의 역량이 단번에 커지게 되었다. 오독방은 네 개 분타
중에 세 개 분타의 제자들을 이 곳에 출동시켰던 것이다. 오독방의 현무분타는 하동으로 세
력을 확대하러 갔기에 미처 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 모용세가로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
었다. 그렇지 않고 오독방 네 개 분타가 총출동으로 했다면 모용세가의 힘으로는 막지 못했
을 것이다. 쌍방은 사상자를 수없이 내며 계속 싸웠다.
모용협은 충의당 앞에 침착하게 앉아 있었다. 대장군의 위풍 그대로였다. 그 좌우엔 소이선
생과 탁장청이 서 있었다.
뜰에는 옥륜법왕이 눈을 내리감고 단정히 앉아서 교주님이 탄생하실 여명을 기다리고 있었
고 그 뒤에는 합포와 완안방방 그리고 혁중달이 서 있었다.
늙은 여인 하나가 충의당에서 뛰어나왔다. 그는 모용협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아뢰었
다.
"공자님, 임산부 둘이 해산을 하려는지 신음소리를 높이고 있사옵니다."
모용협은 기뻐서 급히 분부했다.
"어서 들어가 간호를 잘하렷다. 의외의 일이 생겨서는 절대 안 되느니라."
합포가 그 상황을 티베트어로 옥륜법왕에게 알렸다. 그러자 옥륜법왕은 우렁찬 목소리로 염
불을 여러번 외웠다. 이 깡마른 노인에게서 그렇게 심후한 목소리가 나올 줄 몰랐던 여러
사람들은 내심 크게 놀라고 있었다.
탁장청이 적의를 품고 모용협에게 수군거렸다.
"듣건대 옥륜법왕의 무공이 금륜법왕보다 퍽 더 세다더군요. 옥륜법왕과 접전하는 것은 될
수록 피하는 게 좋겠소."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그렇지 않으면 계략을 써서 이겨야지."
모용협의 대답이었다.
그런데 화원에서 일대소동이 일어난 듯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용협은 크게 놀랐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어서 일아보아라."
금도무사 두 명이 명을 받들고 뛰어가려는데 두 사람이 선후해서 뜰안으로 뛰어들었다.
노완동 주백통과 장세사자 양효비였다.
주백통은 등에 사람까지 하나 업고 있었다. 업힌 사람의 복색을 봐서는 여인인데 그 얼굴은
주백통의 등에 가려 누군지 보이 질 않았다.
십여 명이나 되는 금도무사들이 칼을 뽑아들고 그들 둘을 에워쌌다. 모용공자에게 불리한
일이 생길까봐 두려워서였다.
"그래 싸우겠다는 건가? 난 벌써 한번 싸웠어. 이젠 더 싸우고 싶지 않은데."
주백통은 두 눈을 부릅떴다.
모용협은 양효비를 보고 안색이 대번에 변하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저 자를 잡으렷다."
그는 양효비가 인골염주 일을 말할까봐 겁이 났다. 그는 의자에서 벌떡 솟구쳐 일어서더니
양효비에게 바람처럼 덮쳐갔다. 탁장청도 따라갔다.
"이봐 효비야, 저것들이 왜 저러지? 이 여인을 구해내니까 저 야단인가?"
주백통이 양효비에게 물었다.
양효비는 주백통의 등에서 그 여인을 받아내리며 주백통을 부추겼다.
"바로 저것들이 이 여자를 납치해 왔단 말이에요. 대인대의(大仁犬義)하시고 대지대용(大智
大勇)하신 사부님이 아니세요? 어서 저 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리세요."
주백통은 양효비의 말에 더 묻지 않고 왼주먹으로는 고목생아(枯木生芽)의 초식을, 오른주먹
으로는 장홍관일(長虹貫日)의 초식을 써서 모용협과 탁장청을 내쳤다. 유명한 좌우호박지술
이었다. 모용협과 탁장청은 주백통의 주먹이 무비의 힘을 갖고 있음을 알고 막지는 못하고
양 옆으로 얼른 피했다.
양효비는 그 여인 등 뒤의 대혈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소리쳤다.
"이봐 모용협, 이 여자가 누구지?"
열여털이나 열아홉 정도된 나이에 살갗이 희고 이목구비가 청수하고 아래턱엔 작고 검은 점
이 나 있는 그 여자는 임신한 배가 눈에 띄게 불룩했다. 그녀는 바로 임신한지 일곱달이 되
는 모용협의 아내 매씨(梅氏)였다.
"봤어? 알만하지?"
양효비가 또 소리쳤다.
모용협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매씨에게 소리쳤다.
"어떻게 저 놈의 손에 잡혔소?"
그러나 매씨는 말 한마디 못했다. 오로지 애원의 눈길로 모용협을 바라볼 뿐이엇다.
양효비가 혈도를 풀어줘서야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울지 말고 말해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모용협이 초조해 물었다.
매씨는 남편이 두려워서인지 울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내가 막 잠이 들려는데 밖에서 함성이 들리지 않겠어요. 혼자 있기가 겁나 종년을 불러 친
구 삼아 누우려니 또 당신 생각이 나서……."
"에잇, 바보같은 년, 허튼소리말고 골자만 말해 골자만."
모용협은 답답해 발을 굴렀다.
"그런데 창문이 흔들리며 백발노인이……."
매씨는 주백통을 가리켰다.
"이 백발노인이 뛰어들지 않겠어요. 첩이 놀라 고함을 지르려니까 이 백발노인이 첩의 혈도
를 꾹 눌러버려 꼼짝 못하게 되었지요. 백발노인은 종년도 혈도를 눌러 쓰러뜨려버리고는
첩을 업고 창문으로 날아 나왔지요. 높은 누각 위에서 내려다보니 온통 새까만데 얼마나 무
서운지 눈을 꼭 감았더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구만요."
여인은 강남 절강지방의 사투리를 썼는데 황급한 중에 하는 말인데도 그 목소리가 달콤하기
그지 없었다.
모용협은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부인을 호위하는 무사들은 다 어딜 갔느냐?"
매씨가 떨며 대답했다.
"이 사람들이 이리로 오면서 숱한 무사들의 혈도를 눌러 쓰러 뜨렸어요. 무사들을 욕하지
마세요. 그들은 자기가 할……."
그때 풍자귀가 무사 삼십여 명을 데리고 왔다. 그는 주백통과 양효비를 손가락질하며 부르
짖었다.
"어서 부인을 놓아 주지 못하겠느냐?"
"형님, 저 놈들이 어떻게 화원으로 쳐들어왔소?"
모용협의 물음엔 노기가 섞여 있었다.
풍자귀는 얼굴이 벌개져 대답했다.
"글쎄 말이오. 난 사람들을 더 보내서 화원을 물 샐틈 없이 보호하느라고 했는데 글쎄 저것
들이 어떻게……. 나도 모르겠소."
그러자 주백통이 흐뭇해하며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나 노완동은 황궁도 내 집 드나들듯 하던 사람이야. 이 잘난 모용세가 사람들이 날 막아
내? 핫하하."
"야, 우리 사부님이 누군지 몰라? 천하 일등 고수다. 최고야. 그런데도 고스란히 투항하지
않고 뭘해?"
양효비가 소리쳤다.
"이봐 양효비, 내 아내는 왜 잡아왔어?"
모용협은 격분을 애써 참으며 양효비에게 물었다.
그러자 주백통도 덩달아 매씨를 보며 양효비에게 물었다.
"이 배 불룩한 여인이 모용협 색시인가?"
"예, 모용협의 아내지요."
그러자 주백통이 그 조그마한 눈을 딱 부릅떴다.
"그런데 넌 이 여자를 왜 붙잡혀온 여자라고 했지? 모용협이 왜 제 색시를 붙잡아오겠나?"
"사부님이 내 말을 잘못 들으신 모양이네요. 내가 언제 그랬어요?"
양효비는 시치미를 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주백통은 자기 머리를 쓱쓱 긁으며 중얼거
렸다.
"잘못 듣다니, 그럴 수가 있나? 나 노완동은 아직 젊었는데 벌써 귀가 멀 수야 없지."
그때 갑자기 눈 앞이 환해지며 한 사람이 또 나타났다.
주백통은 반가운 소리를 질렀다.
"황약사로구나. 임잔 왜 아직 안 떠났나?"
명성이 자자한 황약사가 나타났다는 말에 모두들 크게 놀라고 있었다.
인피가면을 쓴 황약사의 얼굴은 무서웠다. 그는 뒷짐을 지고 주백통에게 담담히 말했다.
"이봐 노완동. 이게 무슨 바보같은 짓인가? 무엇 때문에 이런 한심한 짓을 하는 건가?"
양효비는 이 기회에 황약사의 환심을 사려고 웃는 얼굴로 반겼다.
"황노선배님, 소생 양효비 인사드립니다. 앞으로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황약사는 양효비를 본 척도 안했다. 그는 주백통만 보면서 재촉했다.
"날 따라 오게, 주백통 저런 덜된 제자는 없었던 것으로 하고 말이네."
"내가 왜 임자를 따라 가? 난 안가. 내가 왜 가?"
주백통이 그렇게 말하자 황약사는 가볍게 탄식을 했다.
"내가 밤에 천문을 보고 또 여기 벌레들과 짐승들이 노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조짐이야. 날 따라가지 않다간 큰 재난을 면키 어렵네."
주백통은 눈을 끔벅거리며 멀뚱히 바라보았다.
"임자가 천문과 점괘를 보는 줄은 나도 아네만 날 놀리는 것 은 아니겠지?"
"믿고 안믿는 건 자네에게 달렸지. 난 친구로 도의를 다 할 뿐이네. 너무 남의 말에 놀지 말
게."
그리고는 발걸음을 떼지 않고 모듬발로 생하고 담벽 밖으로 날아갔다. 모두 황약사의 신공
에 크게 놀라고 있었다. 오직 옥륜법왕만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담 밖에서 또 황약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옥륜법왕께선 세속을 벗어난 고인(高人)이 아니시오? 그런데 하필 그 일에 그리도 집착하
신단 말이오? 세속 밖에 있는 고인압지 않습니다.
음성은 어느새 몇 리 밖으로 멀어져 갔다.
합포장로가 옥륜법왕에게 그 말을 통역해 주었다. 옥륜법왕은 눈썹을 꿈틀하더니 염불을 크
게 외웠다. 마치 황약사를 전송하는 것처럼.
주백통은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몸을 솟구쳐 황약사를 쫓아 날
아가며 물었다.
"이봐 황약사, 도대체 무엇이 어쨌다는 거야? 좀 똑똑히 말해 봐?"
"사부님, 사부님!"
양효비가 급히 주백통을 불렀지만 주백통은 눈 깜짝할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 둘이 달빛 아래 사라지는 것을 보며 모용협은 자기도 황약사처럼 자유자재로 세상을 돌
아다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생각을 문득 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이었다. 그는
한옥검을 뽑아들고 엄한 소리를 내질렀다.
"양효비 이 놈, 살고 싶거든 어서 내 아내를 놓아보내라."
양효비는 껄껄 웃기부터 했다.
"내가 왜 임자 아내를 잡아왔는지 아나? 임산부들을 내게 넘겨주면 내가 임자 아내를 놔주
지."
모용협은 코웃음을 쳤다.
"그런 말같지 않은 소리는 하지도 마라."
양효비는 머리를 저으며 웃어대더니 매씨의 볼에 쪽하고 입을 맞추었다.
"이쁜 각시, 각시 지애비가 내 말을 안듣는구먼. 어찌면 좋겠소?"
매씨는 얼굴이 발개져 고개를 못들었다.
"개 같은 자식!"
모용협이 양효비를 욕했다.
그러나 양효비는 오히려 싱글벙글 웃으며 이번에는 매씨의 젖가슴에 손을 쑥 넣었다.
"야, 보드랍고 매끌매끌하고 몽글몽글 하고……. 거 기분 참 좋구나. 이렇게 살찐 젖가슴이
다 있담."
혈도를 눌려 매씨는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수모를 견디다 못해 죽고 싶었다.
"낭군님 날 구해줘요. 어서요."
울며 애원하는 그녀의 얼굴은 눈물 투성이였다.
"양효비 이 자식아, 형수님을 못 놔주겠냐? 죽고 싶어 환장했냐?"
탁장청이 그 녹슨 검으로 양효비를 가리키며 이를 갈았다. 그 목소리는 높지 않았으나 어
찌나 얼음장처럼 찬지 듣는 사람의 모골이 송연하게 했다.
하지만 양효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엔 매씨의 불룩한 배를 슬슬 만졌다.
"이 안에 필시 작은 모용공자가 있으렷다. 그런데 네 애비가 너를 어떻게 하려는지 모르겠
다. 네 애비가 다른 임산부들을 내게 바치지 않으면 넌 네 에미 배 안에서 죽고 말겠는데.
애석하구나 애석한지고."
모용협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 악독한 놈아."
양효비는 피식 웃었다.
"나보고 악독하다고? 글쎄 나도 선량한 사람은 못 되지만 너 보다는 몇 배 나아. 네게 비하
면 난 아무 것도 아니지."
그리고 양효비는 매씨의 허리띠를 천천히 끌렀다.
"부인의 옥체를 활짝 보이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그러자 합포가 보다 못해 큰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짓이오? 마귀 같은 인간."
"마귀?"
양효비는 앙천대소를 했다.
"그래 난 마귀요. 그러나 이 마귀는 조금만 있으면 신교의 주인이 된단 말이오."
그때 보초 하나가 급히 뜰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모용협이 물었다.
그런데 그 보초는 모용협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금도무사 사이를 파고들더니 양효비 앞으로
갔다. 그리고는 보초옷을 벗어젖혔다. 무명적삼을 입은 그는 오른쪽 소매가 홀쭉 비어 있었
다.
양효비는 놀라 두 눈을 치켜떴다.
"형…… 형님이…… 형님은 거와장의 거와를 삼켰지 않소?"
모용협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합포만이 양과를 반겼다.
"아우, 그 동안 무사했는가?"
합포가 소리쳤다.
양과는 합포에게 돌아서서 인사를 했다.
"형님, 고맙습니다."
그리고는 양효비를 돌아보며 꾸짖었다.
"아우, 이게 무슨 짓인가?"
양효비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어눌한 표정으로 웃었다.
"형님, 이 아우와 같이 교주님을 차지합시다. 그러면 대사를 성취하게 됩니다."
양과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돌연 양효비에게 일장을 날렸다. 방비를 하지 않았던 양효
비는 급히 뒤로 뛰어 물러났다. 하마터면 맞을 뻔했다.
"아니, 형님은……."
양과는 아우를 그렇게 물리치고는 매씨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매씨에게 허리 굽혀
정중히 사과를 했다.
"이 양과가 아우를 잘못 단속해서 부인께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매씨는 사지를 움직이게 되자 그 황망한 속에서도 양과에게 고마움을 잊지 않고 답례를 했
다. 명문의 규수라 달랐다. 그리고 그녀는 모용협에게로 달려가 품에 만기며 흐느껴 울었다.
모용혈은 노인을 시켜 매씨를 충의당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게 했다.
양효비는 얼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부르짖었다.
"아이고 형님, 형님 때문에 내 대사가 틀어졌네요."
"대사가 틀어졌다구? 네가 임산부를 인질로 끌어다가 해치려고 했으니 이건 인(仁)을 버린
거야. 그리고 형님의 말을 듣지 않고 탐욕에 눈이 멀었으니 이건 의(義)를 버린 거다. 그리
고 남의 여인을 숱한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히 모욕하면서도 부끄러운줄 모르니 이건 염치를
모르는 것이다. 이런 인의도 모르는 몰염치한 인간을 아우라고 하자니 난 부끄러워 얼굴을
못들겠다."
양효비는 아무 대답도 못했다.
모용협과 탁장청은 서로를 쳐다보며 눈짓을 했다. 그러더니 각기 장검을 들고 양효비를 공
격해왔다. 양효비는 얼른 금도무사들을 한 손에 하나씩 잡아서 던져버렸다. 모용협과 탁장청
의 검은 금도무사의 등을 찔렀다. 양효비는 양과의 몸 뒤로 피하며 소리 쳤다.
"형님, 형님!"
양과는 양효비를 붙잡으며 엄하게 꾸짖었다.
"네놈이 내 아우가 아니었으면 벌써 내게 죽었을 것이다."
양과는 한숨을 쉬었다.
"그 때 완안방방의 검에 찔려 죽을 걸 내가 살려주었지. 그런데 내가 단속과 교육을 잘 하
지 못해 네놈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이 형이 보고만 있을 수가 없다. 내가 이제 네 무공을
폐해 버리 고 네놈을 불문에 귀의시키겠다. 너같은 놈은 그렇게 해야 속죄가 되고 사람이
될 것이다."
양효비는 그만 혼비백산해서 달아나려고 안간힘을 바득바득 썼다. 그러나 양과에게 뒷덜미
대혈을 눌려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는 죽는 소리로 애걸했다.
"형님, 우리 형제 둘은 다 같은 고아가 아닙니까? 단속해 주는 사람이 없어 이렇게 되었으
니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빕니다. 형님."
양과는 손바닥에 진기를 넣다가 그 말에 그만 멈추어버렸다.
그러자 모용협이 지껄였다.
"이봐요 양과. 대협객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양효비같은 녀석을 가만 놔둔단 말이오? 양효
비는 여인들을 간음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며 세상에 악한 짓이란 악한 짓은 다
한 인간이오. 그런 놈을 놔 준다면 하늘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오."
양과는 그 말에 눈썹을 곤두세웠다.
"이 양과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다. 아우라고 사정봐줄 사람이 아니다."
그러자 양효비가 소리쳤다.
"형님, 이 아우가 할 말이 있소."
"또 무슨 수작을 피우려 드는 게냐?"
양과는 장력(掌力)을 거두었다.
"저 모용협이 왜 전세교주를 자기가 차지하려고 하는지 아시오?"
양과는 바로 그것을 알려고 하던 참이었다.
"그래 말해봐라. 어디 들어보자."
"삼년 전 일이지요. 난 모용세가의 장서각에 무림에 관한 비밀서적들이 수없이 많다는 소리
를 듣고 호기심이 나서 모용부로 잠입해 들어갔지요. 그런데 아침 모용공자와 탁장청이 장
서각에서 나오며 수군거리지 않겠어요? 난 얼른 나무 뒤에 숨어 그들의 말을 엿들었지요.
탁장청이 '두 분 선생과 모든 형제들이 공자에게 그렇듯 충성하는데 망설일게 뭐요?' 하고
말하니 모용협은 '복국(復國)하는 게 어디 애들 놀음인가? 아직은 우리 힘이 부족해. 이런
힘으로 거사를 했다간 관군에게 진압당하기가 쉬워'하고 말하더란 말입니다. 나라를 다시
세우다니, 모용협이 무슨 나라를 잃어버렸기에 다시 세운단 말입니까. 난 이상한 생각이 들
었지요. 그런데 탁장청이 또 말합디다. '그건 너무 염려할 게 없어요. 송나라 군대는 무능하
기 짝이 없으니까요. 몽고놈들에게 쫓겨 강남에 와 있는 꼬락서니를 봐요. 일심협력해서 싸
우면 송나라 군대는 그리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용협은 그 말을 듣지 않
았어요. '송나라가 약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인재가 없는 것이 아니네. 숱한 인재들이 보좌
해주고 있어
. 그러니 우리 몇 백 명으로 그들을 어찌 하기엔 아직 어려운 일, 계속 인재들을 끌어들여야
하네.' 나는 계속 듣고 나서야, 모용협이 바로 송나라 이전에 강남에 있었던 소국인 위나라
의 후예임을 알았지요. 나라가 망한 다음 그들은 와불산 남쪽에 은거해 있으면서 대대로 계
속 복국을 꾀해 왔지요. 나는 그 때 모용협이 바로 황제의 꿈을 꾸는 것을 보고는 욕심도
분수가 있어야지 하고 코웃음을 쳤지요."
"이 자식 계속 허튼소리를 꾸며댈테냐?"
모용협이 윽박질렀다.
양효비는 모용협을 노려보며 비아냥거렸다.
"허튼소리? 넌 내게 감사드려야 한다. 네가 복국 꿈을 꾸고 있는 걸 그때 내가 관가에 고발
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고발만 했더라면 너희들 이 모용세가는 벌써 관가의 말발굽에 쑥
밭이 되었을 것이다. 헤헤, 그런 줄 알았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엎드려 절해라, 절!"
제31장 교주의 탄생
양효비의 말에 양과와 합포 등이 크게 놀란 것은 더 말할 것 없고 모용부의 금도무사들마저
도 놀라서 마주보기도 하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그러자 모용협이 갑자기 소리내어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나는 확실히 위나라 후예이다. 복국의 중임을 어깨에 메고 지금까지 무던히도 애를 써왔다.
내 정성은 하늘이 알아줄 것이다."
지극히 경건하고 비장한 심정으로 하는 말이었다.
합포는 그제서야 소제갈 주명이 죽기 전에 왜 "임금 모시기가 호랑이 모시기와 같다"고 말
했는가를 알게 되었다. 모용협의 복국 염원이 실현된다면 모용협은 임금이 아닌가? 합포는
격분해서 모용협을 꾸짖었다.
"그러면 네 위나라나 복국할 것이지 왜 우리 교주님을 통제하려고 하느냐? 서역신교의 세력
을 빌리자는 거냐?"
"서역신교의 세력이 방대하고 교주의 지위가 어떤 왕야보다 높음은 누구나 다 아는 일! 내
가 전세교주를 통제하게 되면 모든 서역을 통제하게 된다. 그러면 서역에서부터 위나라 깃
발을 날리고 연후하여 원나라와 손잡고 송나라를 멸하고 천하 강산을 원나라와 나누어 가지
면 이보다 더 묘한 계책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꼭 천하를 가질 날이 있을 것이다."
모용협은 꺼리낌없이 말했다.
그 말에 양과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했다.
"복국 복국 하는데 천하 백성이 자네 하나 때문에 도탄에 빠지는 것이 양심에 가책되지도
않는지?"
모용협은 코웃음을 쳤다.
"양과, 임자는 기껏해야 협객질 밖에 못하겠어. 자고로 진정한 영웅은 모두 천하를 종횡하며
나라를 세운 사람들임을 왜 모르는가? 시야가 그렇게 좁다니……."
"아무튼, 우리 신교는 절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합포가 고성을 질렀다.
"늦었소이다. 교주님께선 금방 탄생하게 되오. 교주가 내 손에 있어요. 핫하하, 때가 되면 짐
이 임자를 호국선사로 봉해줄테니 좀 기다리시오."
그리고 모용협은 또 너털웃음을 웃었다. 벌써 개국대왕(開國大王)이 된 듯 야단이었다.
양효비는 이를 갈았다.
"이 놈, 어디 네 뜻대로 될 줄 아느냐?"
양효비는 품에서 인골염주를 꺼내 보이며 합포장로에게 소리 쳤다.
"이봐요, 합포장로님 인골염주가 여기 있어요. 모용협에게는 인골염주가 없다니깐요."
모용협은 크게 놀랐다. 양효비가 이 시각에 인골염주를 내놓을 줄은 정말 몰랐다. 모용협은
어쩌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합포는 인골염주가 계속 모용협의 손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러기에 모용세가의 부중까지 들
어와서도 모용협에게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이다. 전세교주의 신물인 인골염주가 모용협의 손
에 없는 줄 알았다면 그들은 벌써 모용협을 없애고 임산부들을 빼앗았을 것이다.
양효비는 득의양양 인골염주를 흔들어 보이며 모용협에게 말했다.
"신교의 교칙을 너도 알겠지? 전세교주의 신물이 없으면 전세 교주님을 영접하지 못한단 말
이야."
모용협은 낙심천만이 되었다. 그는 마지막 발악을 하듯 손을 번쩍했다. 연자표 두 개가 하나
는 양효비에게 하나는 양과에게 번개같이 날아갔다.
양과는 일같지 않게 슬쩍 피해버렸다. 양효비도 날아오는 연자표를 급히 피하느라고 했지만,
방금 전 양과에게 혈도를 눌렸던 여파로 진기가 아직 순통되지 못하고 있었기에 동작이 늦
어졌다. 그래서 미처 피하지 못했다. 양효비는 연자표에 인후가 관통돼 숨이 끊어졌다.
무림의 패주가 되어 천하 무림을 호령해 보려던 양효비는 이렇게 비참한 종말을 맺게 되었
다. 악보(惡報)라고나 할까?
연자표를 내던진 모용협은 인골염주를 빼앗으려 양효비에게 달려들고 탁장청은 그 녹슨 칼
로 양과를 공격했다. 양과가 양효비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자는 것이었다.
합포도 인골염주가 모용협의 손에 들어갈까봐 염려돼 적금강마저로 모용협을 내리쳤다.
돌연적인 이 변고에 뭇사람들은 미처 어쩔 줄을 몰랐다. 소이 선생과 풍자귀가 좀 늦게 정
신을 차리고 각기 연편과 등나무 방패로 합포의 적금강마저를 막으러 달려왔다.
그런데 모용협이 인골염주를 막 쥐려는 순간 눈앞에 흰 무엇이 언뜻 하더니 섬섬옥수 하나
가 인골염주를 가로채 갔다.
소이선생과 풍자귀는 합포의 적수가 아니었다. 합포의 적금강마저에 그들의 연편과 방패는
날아가고 그들 둘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탁장청은 양과를 공격하다 말고 노려보
기만 했 다.
모용협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인골염주를 가로채가는 그 섬섬옥수를 거머
쥐려고 손을 뻗쳤다. 그런데 그 순간 섬섬옥수가 언뜻하더니 인골염주는 보이지 않고 그 대
신 그녀의 다른 한 손이 모용협을 향해 장을 쳐왔다. 초식도 기이한 초식이요 힘도 대단한
힘이었다. 모용협은 두 발을 빗 디디며 쌍장으로 자기 앞을 막았다. 그러나 그 여인의 장력
이 얼마나 센지 모용협은 뒤로 비틀거리며 대여섯 걸음이나 물러났다.
모용협은 급히 몸을 가누며 기혈을 조절하면서 앞을 바라보다가 놀란 소리를 질렀다.
"집법사자가……."
모용협은 자기네 내원은 금성철벽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노완동 주백통, 양효비, 황
약사, 양과 그리고 집법사자 이런 사람들이 모용부 제자들도 모르게 무난히 쳐들어오지 않
는가? 모용협은 부하들에게 오독방을 막느라고 애쓰지 말고 어서 들어와 부중의 요해처를
막으라고 명령했다.
집법사자를 본 양과는 '소룡녀' 하고 달려가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부부끼리 그럴 장
소와 때가 아니었다.
집법사자는 여전히 백의를 입고 검은 머리칼을 드리우고 있었다. 얼굴에는 여전히 구역질나
게 하는 인피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크고 예쁜 두 눈만은 그렇게 매혹적일 수 없었다.
그녀는 양과를 힐끗힐끗 보았다. 그 눈길에는 매혹적인 웃음과 정이 담겨 있었다. 양과는 가
슴이 울렁거렸다.
'소룡녀가 본색을 드러내려는가 보다. 자기가 소룡녀임을 자인하려는가 보다. 그렇지 않으면
저런 다정한 눈길로 날 바라볼 수 없지.'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뿐이었다. 집법사자는 얼른 고개를 돌려 모용공자를 노려보았다.
"모용세가의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버렸어요."
모용협은 충의당 문 앞으로 퇴각했다.
"그런 소리 마시오. 인골염주를 빼앗기기는 했지만 이제 곧 환생할 교주님은 우리에게 있
소."
그때 합포가 노한 소리를 내지르며 집법사자를 향해 적금강마저를 휘두르며 덮쳐들었다. 그
러나 합포의 적금강마저는 집법사자가 휘두르는 팔소매에 맞아 튕겨났다. 합포도 열 걸음이
나 뒤로 물러났다.
천성적으로 신력(神力)을 갖고 있는 데다가 이십여 년 무공을 수련하였기에 합포가 내리치
는 적금강마저에는 천근의 힘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적금강마저가 집법사자가 휘두르는 그
긴 팔소매에 튕겨나다니? 집법사자의 무공이 얼마나 세면 이럴까? 정말 가늠키 어려운 일
이었다.
합포는 적금강마저를 단단히 틀어쥐며 외쳤다.
"이 오독방 마녀야, 인골염주를 어서 돌려주지 못하겠느냐?"
그리고는 온 힘을 다해 적금강마저로 집법사자를 내리쳤다. 집 법사자는 옷소매를 쓰지 않
고 가볍게 날아 합포의 등 뒤로 가서 합포의 뒤등을 섬섬옥수로 슬쩍 밀었다. 그때 합포는
눈 앞에 여 인이 보이지 않자 적금강마저를 당기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등 이 집법사자에
게 밀리자 합포는 몸을 미처 가누지 못하고 엎어질 듯 비틀거리며 한 장 밖으로 밀려나갔
다. 앞에 있는 금도무사 둘이 넘어가는 적금강마저에 맞아 즉사했다.
합포의 신력에 놀라는 사람도 많았지만 집법사자의 무공에 놀라는 사람이 더 많았다.
양과가 합포를 부축하며 집법사자에게 말했다.
"이 분은 내 의형님이오."
그러나 집법사자는 그들에게 등을 돌려대며 차갑게 말했다.
"그런 줄 알았기에 죽이진 않았어요."
의제 양과와 집법사자 사이에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지 합포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인골
염주를 빼앗는 것이 급했다. 인골염주만 가지면 모용협을 꼼짝 못하게 할 수가 있었다. 그는
옥륜법왕 옆으로 가서 사부인 옥륜법왕에게 투어라고 수군거렸다.
옥륜법왕은 반나절이나 묵묵히 있다가 서서히 일어나 집법사자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합포
가 옥륜법왕에게 출전을 간청했던 것이다. 합포의 힘과 재간으로는 집법사자를 어쩔 수가
없었다.
모용협은 옥륜법왕과 집법사자가 싸우기를 기다렸다. 그들의 싸움에서 어부지리를 얻자는
심산이었다.
옥륜법왕은 집법사자와 열 발짝 쯤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합장을 하고 나무아미타
불을 외웠다. 그리고는 그 여윈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집법사자에게 인골염주를 내놓으라는
뜻이 리라.
집법사자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저었다.
옥륜법왕은 가벼운 한숨을 지었다. 그러더니 붉은 보자기를 풀고 거무튀튀한 둥근테 하나를
꺼내며 티베트어로 뭐라고 했다.
합포가 그 말을 통역했다.
"집법사자는 들으라. 본교의 신성한 물건인 인골염주를 돌려주지 않는다면 법왕께서는 부득
불 싸우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다. 우리 사부님의 묵옥륜(墨玉輪)은 강철보다 더 굳센 것이
어서 맞기만 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우니 집법사자는 지금이라도 잘 생각해보기 바란
다."
집법사자는 빙그레 웃으며 두 손을 언뜻하더니 쌍익검을 꺼냈다. 매미날개처럼 얇은 칼날은
투명해서 웬만한 눈으로는 볼 수가 없었다.
옥륜법왕은 집법사자의 재간을 아까워하는 듯 또 한번 탄식을 하고는 묵옥륜을 눈 앞에 들
며 손을 쓰려고 했다.
양과가 보다 못해 집법사자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여 …… 여보, 어서 인골염주를 돌려주시오."
집법사자와 옥륜법왕 이 두 고수가 싸우기만 하면 승부를 가르기 어려울 것이며 종국에는
둘이 다 상하거나 죽는다는 걸 양과는 알고 있었다. 양과는 의부 서독 구양봉과 북개 홍칠
공이 설봉 산에서 서로 싸우다가 마침내 둘 다 죽던 일을 직접 목격했었다. 그는 그런 일이
또다시 벌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모용세가의 제자들이 이미 모두 부중의 요해처로 물러가 그 곳을 지키고 있었기에 오독방의
청룡분타, 백호분타, 주작분타의 사람들은 이미 충의당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청룡당
당주 호청룡은 대철간을 손에 들고 너털웃음을 웃으며 집법사자에게 말했다.
"집법사자님 보시오. 우리 모두 여기 있습니다. 집법사자님께서 명령만 내리면 우린 충의당
으로 쳐들어갈 겁니다."
호청룡은 맨발에 머리칼을 길게 흩날리고 있었는데 그 뒤엔 철검보 보주 사도인이 남 부끄
러워 그러는지 머리를 가슴에 파묻고 숨어 있었다.
오자겸이 아들 딸을 거느리고 뛰어들어왔다. 오군량은 양효비의 시체를 보고 놀란 소리를
질렀다.
"아니, 장세사자가 아닌가? 장세사자가 죽다니?"
뒤따라 오던 오군영은 양효비의 시체를 보고는 눈앞이 아찔해서 까무러치고 말았다. 오군량
은 급히 누이동생을 안고는 아버지에게로 갔다.
집법사자는 양과를 보고 옷소매를 가볍게 내저었다. 양과는 그 소매바람에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양과는 이 일에 참견치 말라."
그녀가 자기 이름을 부르자 양과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는 집법사자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소룡녀는 원래 양과의 사부였다. 종남산 고묘에 있을 때 그녀는 양과를 그냥 "얘, 양과야"
하고 불렀다. 그들이 결혼한 다음에도 소룡녀는 양과를 그냥 양과라고 이름을 불렀다. 당신
이나 여보하는 식으로 존대하는 호칭은 쓰지 않았다. 양과는 소룡녀와 헤어진 지 몇 년만에
또 소룡녀가 자기 이름을 직접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되자 기왕지사들이 퍼뜩퍼뜩 떠올라 솟
구치는 격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옥륜법왕이 집법사자를 향해 묵옥륜을 수평으로 밀어왔다. 일견 아주 범상한 초식 같으나
집법사자의 모든 방위를 막아버리는 초식으로서 그 힘이 절륜한 것이었다. 집법사자는 검
하나로는 묵옥륜을 막고 다른 검 하나로는 옥륜법왕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옥륜법왕은 집법
사자의 무공이 자기와 비슷함에 놀라면서 얼른 묵옥륜을 당겨 집법사자의 검을 막았다.
둘은 서로 경계심을 높이며 병장기들이 채 부딪치기 전에 재빠르게 회수하면서 계속 새로운
초식들을 쓰곤 했다. 어느 누가 조금만 마음을 늦추면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검에서 나는
소리와 묵옥륜를 후려치는 소리는 들렸지만 그 병장기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는 들리지 않
았다. 그들 둘은 칠팔십 합을 싸웠으나 승부를 가리질 못했다.
날이 밝기 시작했다. 동녘 하늘이 훤히 밝아왔다. 은쟁반 같던 달은 밝은 빛을 잃고 서쪽 하
늘에 걸려 있었다. 주위의 물건들이 점점 더 똑똑히 보이기 시작했다. 금도무사들은 들었던
횃불들을 꺼버렸다.
집법사자와 옥륜법왕은 계속 싸우고 있었다. 벌써 이백여 합을 싸웠지만 자웅을 못 가리고
있었다. 옥륜법왕은 필경 몇 십년 무공을 쌓은 사람이기에 집법사자보다 조금 더 강한 축이
었으나 집 법사자의 쌍익검이 얼마나 날쌔고 그 초식이 얼마나 교묘한지 도무지 이길 수가
없었다.
충의당에서는 임산부의 자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산파가 뛰어나와 모용협에게 무어라고
수군거렸다.
"순산이 될까? 뜻밖의 일은 안생기겠지?"
모용협이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부인께서는 크게 놀라시어 벌써 피가 잘못하면……."
산파는 꺽꺽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가 잘못 되기만 해봐라. 살아남지 못할 줄 알아라."
모용협이 위협했다. 산파는 얼굴이 백짓장이 되어 뛰어들어갔다.
매씨는 원래 임신한 지 일곱달 밖에 안된다. 체질이 약해 그 동안 몇 번이나 유산할 뻔했는
지 모른다. 다행히 용한 명의의 도움이 있었기에 여태까지 태아를 보존해 오고 있었다. 그런
데 간밤에 주백통에게 크게 놀라고 또 대혈까지 눌렸기에 기가 문란해져 태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모용협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만약 아내가 지금 이 때 유산하게 되면 큰
일이었다. 달을 채우지 못했기에 태아가 죽을 수도 있고 겨우 살린다고 해도 제 에미처럼
약질이어서 앞으로 대업을 계승할 수 있을지 큰 염려였다. 그런데 이 때 또 두 명의 임산부
가 바야흐로 해산하게 되었다. 해가 돋을 때 출생하는 남자애는 곧 교주님이다. 모용협은 기
쁨과 근심이 절반이었다.
그런데 산파가 또 뛰어나왔다. 경황 실색하여 기색이 말미 아니었다.
"공, 공자님. 야, 야단났어요."
"야단이라니? 무슨 일인가? 어서 말하지 못할까?"
"부인님께서 하, 하혈을 피가 막 유, 유산인 듯……. 이거 큰 야단……."
모응협도 눈을 부릅떴다.
"공자님, 어서 들어가 보시오. 진기를 써서라도 태아를 보존해야 합니다요."
소이선생의 말이었다.
모용협은 발뒤축을 구르더니 충의당으로 뛰어들어갔다.
때를 같이하여 동쪽 하늘에는 노을이 불타더니 아침 해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집법사자와 옥륜법왕의 싸움은 더욱 치열해졌다. 둘은 모두 어서 이겨야겠다는 마음에 다급
해졌다. 그래야 아침 해가 솟아오르는 이 때 인골염주를 가지고 충의당에 들어가 전세교주
를 빼앗아 가질 수가 있었다. 둘은 온 힘을 다 내고 있었다. 내기가 한 장 밖에까지 뻗쳤다.
쌍방의 수하들은 각기 자기네 사부님을 도우러 다가가다가도 그 내기에 밀려 도로 물러서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붉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우지끈 우지끈 마른 벼락이 치기 시작했다. 귀
청을 찢는 천둥소리가 지나가더니 그 다음은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처음은 그
런 줄 모르고 오래 서 있다 보니 지쳐서 현기증이 났는가 했는데 주위를 보니 그렇지 않았
다. 누군가 소리쳤다.
"아이고 저 봐. 와불산이 다 요동한다."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던져졌다. 와불산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땅밑에서도 무엇
이 터지는 듯 무시무시한 굉음이 들려왔다. 이어 땅이 무섭게 요동을 쳤다. 서 있던 사람들
이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는 건 더 말할 것 없고 주위의 담벽이며 집들이며 나무들이 마구 흔
들렸다.
집법사자와 옥륜법왕도 몸을 가눌 수가 없어 각기 싸움을 그만두고 물러났다. 옥륜법왕은
묵옥륜을 거두고 염불을 외웠다. 합포는 격동되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교주님이 환생하시는가 봅니다. 천지가 요동을 하며 신명이 위엄을 떨칩니다. 마귀들을 족
치려는가 봅니다."
합포는 천지신명께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땅은 더욱 세차게 요동쳤다. 충의당 지붕 위에 있는 기왓장들이 떨어지면서 금도무사들과
오독방 제자들의 머리를 쳤다. 금도무사들과 오독방 제자들은 쓰러지는 놈은 쓰러지고 달아
나는 놈은 달아났다. 나무줄기를 부여안고 몸을 가누고 서 있는 양과는 생각했다.
'가흥에 있을 때 합포 형님이 뭐라고 했지? 전세교주님께서 귀천을 하면서 이런 예언을 하
셨다지? 그 예언이 오늘 맞아떨어지는가 보다. 이렇게 영험할 줄이야.'
이런 생각을 하니 양과는 무섭지 않았다.
'간밤에 황약사가 주백통을 불러 데리고 가려고 했지. 필경 이런 변이 일어날 줄 황약사는
미리 알았기에 그랬는 모양이다.'
사실은 지진이 일어난 것이었다. 고대의 '천공개물(天工開物)'이란 책에 벌써 지진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그러나 송나라 때에 이르러서도 많은 사랑들은 이 지진이란 자연현상을
자연현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천문지리에 정통한 황약사만은 십오일 여기에서 지진이 일어난다는 예측을 할 수 있
었고 또 그러기에 자기의 친구 주백통을 불러갔던 것이다. 양과도 여기에 있는 줄 황약사가
알았다면 양과도 데리고 갔을 것이다. 오로지 명리를 다투는 탐욕스러운 사람들만 남겨 재
화를 입게 했을 것이다.
와르르 담벽이 무너지며 스물도 넘는 사람들을 묻어버렸다. 경황실색한 다른 사람들은 사방
으로 천방지축 달아났다. 기왓장과 벽돌이 광풍에 날고 하늘과 땅이 뒤집힐듯 세차게 요동
을 쳤다.
그러나 옥륜법왕과 합포는 달아나지 않았다. 그들은 날아오는 기왓장과 벽돌들을 병장기로
막으면서 충의당으로 뛰어들어갔다.
양과는 그들이 임산부들을 구해서 교주가 평안히 출생하도록 하려고 충의당으로 뛰어들어간
것을 알았다.
'난 합포와 의형제다. 이럴 때 합포를 돕지 않고 언제 합포를 도우랴!'
양과도 합포를 따라 충의당으로 달려들어갔다.
집법사자도 정신이 번쩍 들어 제자들에게 외쳤다.
"어서 임산부들을 빼앗아내라. 후한 상을 줄테다."
그러나 모두들 제 목숨이 급한데 그런 말을 들을 사이가 어디 있는가? 청룡타주와 백호타주
만이 집법사자의 뒤를 따라 충의당으로 달려 들어갔을 뿐 나머지 제자들은 물론 심지어 오
자겸 부자와 딸, 세 사람도 밖으로 달아났다.
그때 마침 땅이 크게 진동하는 바람에 완안방방은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그런데 벽돌
하나가 날아오며 그녀의 머리를 세차게 때렸다. 그녀는 푹 쓰러졌다. 깨진 머리에선 피가 샘
솟듯했 다.
대문 밖까지 달아났던 혁중달은 완안방방이 쓰러진 것을 보고 도로 달려들어왔다. 그러나
완안방방 있는 데까지 미치지 못해 진동하는 땅에 비틀하고 나가 넘어졌다. 이 때 큰 나무
한 그루가 송두리째 뽑히며 완안방방 쪽으로 넘어졌다.
"우리 아씨를 다치지 마라."
혁중달은 부르짖으며 달려가 완안방방의 몸을 제 몸으로 덮었다. 넘어지는 고목은 혁중달의
허리를 끊었다. 혁중달의 입에선 시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
자기를 이렇게 목숨으로 보호해주는 혁중달이 고마워 완안방방은 울었다.
"왜 왜, 달아나지 않고……."
완안방방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아씨. 난 난……."
혁중달은 말을 채 못다 하고 숨이 넘어가버렸다.
완안방방은 대성통곡을 했다.
"내가 환장을 했지. 복수는 해 뭘하고 교주를 보호해선 뭘 하겠다고 이런데를 왔다가…….
당신과 결혼이나 했더라면, 당신은 분명 내게 정성을 다 했을텐데……."
그러나 아무리 울며 불며 해도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저승에 가서
나 부부간이 될는지.
그런데 또 담벽이 무너져 내리며 완안방방과 혁중달을 파묻어버렸다.
원수를 갚는다고 다니던 완안방방과 완안방방을 미친듯이 짝 사랑하느라고 따라다니던 혁중
달, 그들은 이렇게 황천으로 동행하게 되었다. 갖고 있던 모든 한과 정을 그대로 남겨둔 채
로.
양과가 충의당에 뛰어들어갔을 때는 지진이 가장 격렬하게 일어날 때였다.
바람벽들이 무너지고 지붕들이 무너져 내리고 먼지가 뽀얗게 날려 지척을 분간키가 어려웠
다.
양과는 무너져내리는 대들보와 서까래를 장풍으로 막았다. 그러다가 무거운 대들보에 도리
어 큉겨나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그는 일어나려고 손바닥으로 땅을 짚었다. 그
런데 손바닥에 뭔가 척척한 것이 닿는 것 같았다. 손바닥을 들어보니 시뻘건 피였다. 양과는
얼른 땅을 더듬었다. 사람의 살같은 것이 만져졌다. 자세히 보니 임산부였다. 먼지가 자욱해
서 얼굴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여인을 등에 업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사방에서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보였다. 날아오는 벽돌과 기왓장에 맞아 쓰러지
는 사람과 무너지는 벽에 파묻히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모두들 저만
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아수라장이었다.
양과는 합포의 이름과 소룡녀의 이름을 계속 목이 쉬도록 불렀다. 그러나 울음소리와 비명
만이 들릴 뿐이었다.
충의당이 모두 무너졌다. 이제는 더 무엇을 생각할 경황이 없었다. 양과는 비틀거리며 사람
들을 따라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런데 모용세가의 부중은 큰 집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기에 집이 아니면 담벽이었다. 그것
들이 여기저기서 무너지는 바람에 이리로 뛰어도 집과 담벽이 무너지며 길을 막았고 저리로
뛰어도 집과 담벽이 무너지며 길을 막았다.
이렇게 우왕좌왕 하다가는 끝내 죽고 말겠다. 이렇게 생각한 양과는 다른 사람들과 반대 방
향으로 도리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드디어 그는 화원에 이르렀다. 키 작은 나무들이 듬성
듬성 있는 개활지였다. 다른 곳보다 위험이 없었다.
지진은 한시각쯤 더 지속되다가 점점 멎기 시작했다.
동쪽 하늘엔 채운이 감돌고 붉은 아침 해가 눈부신 햇살을 뿌리며 솟아올랐다. 그러나 모용
세가의 부중은 순식간에 살벌한 폐허가 되어버렸다. 비명소리가 간담을 서늘케 했다.
양과는 소룡녀와 합포를 찾아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뒤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양과는 자기 등에 임산부가 업혀 있다는 생각이 났다. 그는 얼른 임산부를 내려놓
고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양과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임산부는 모용협의 처 매씨였다. 안색이 백짓장 같았다. 이를
악물고 있는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매씨의 두 다리 사이엔 피가 흘러내렸다. 해산하려는 모양이었다. 양과는 주위를 돌아보았
다. 그러나 주위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산파는 구할 수가 없었다. 양과
는 강호를 떠돌아다니면서 접생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으나 접생을 해본 적은 없었
다. 해산하는 여인도 이번이 처음이다. 양과는 어쩔줄을 몰라 쩔쩔맸다.
매씨가 또 비명을 질렀다.
양과는 하는 수 없이 자기가 아이를 받기로 했다.
"부인, 어쩔 수 없으니 내가 손을 써야겠소이다."
양과는 그녀의 치맛자락을 찢었다. 아이의 머리가 보였다. 양과는 두 손으로 아이를 받았다.
아이는 순조롭게 모체에서 나왔다. 그런데 긴 띠같은 살이 달려 나왔다. 그것이 탯줄인지 모
르는 양과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태, 탯줄을 끊어요."
매씨가 힘없이 말했다.
그제서야 양과는 정신이 들어 단도를 꺼내 탯줄을 끊었다.
"애 등을, 등을 손바닥으로 몇 번 치세요,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게."
매씨가 시켰다.
양과는 강호에서 들은 바가 있었기에 매씨가 시키는대로 아이의 등을 가볍게 몇 번 쳤다.
그러자 아이는 힘찬 울음을 터뜨렸다.
창백한 매씨의 얼굴에 웃음이 일었다. 매씨는 손을 내밀었다. 양과는 아이를 매씨에게 넘겨
주고 매씨를 부축해 일으켜 앉혔다.
"사내애예요."
매씨가 아이를 품에 안으며 기뻐했다.
"축하합니다 부인. 옥동자를 얻으셨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양과가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이 은혜를 잊지 않겠어요."
매씨는 그러다가 갑자기 눈물이 글썽해졌다.
"모용세가에 이런 큰 재앙이 덮쳤는데 이 애가 태어나다니. 애 아버지는 지금 어디 있는지
……."
"모용공자의 탐욕이 너무 커서 이런 응보를 받은 것입니다. 이 사내애도 달을 못 채우고 태
어났기에 자칫하면 위험할 것입니다."
양과의 말에 매씨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양과는 그것이 보기 측은해서 위안의 말을 몇
마디 했다.
"너무 상심하진 마십시오. 이제 모용공자가 무사히 살아 있다면 다시는 복국이고 뭐고 하는
나쁜 생각을 하지 말고 부부끼리 화목하게 살림이나 잘 하십시오. 그러면 편안하게 잘 살
수 있을 게 아닙니까?"
"저도 남편에게 그렇게 권하겠어요."
매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폐허 속에서 한 사람이 일어나더니 비틀거리며 뛰어왔다. 온 몸이 피투성이였다.
"누구요?"
양과가 매씨를 보호하며 물었다.
가까이 온 것을 보니 그는 모용협이었다. 머리에 심한 부상을 입은 모양인지 붉은 피가 이
마로 고랑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모용공자, 부인께서 득남을 하셨네."
양과는 이렇게 말하며 탄식을 했다. 모용협은 적의를 품고 양과를 노려보다가 매씨에게 다
가서며 기뻐서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이게 내 아들, 내 아들인가?"
매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공자님이 우리 모자를 구해 주었어요. 이 애도 받아내고 정말 잊지 못할 구명은인이에
요. 어서 고맙다고 인사드리시지 않고 뭘 하셔요."
모용협은 잠시 얼떨떨해 있다가 마지 못해 양과에게 인사를 했다.
"고맙소."
양과는 냉랭하게 대답했다.
"나 양과는 모용공자네 세 식구가 앞으로 조용히 살아갈 것을 기대할 뿐이오. 다른 사람들
을 더는 해치지 말고 말이오"
그때 관목림에서 한 백의 여자가 뛰쳐나왔다 집법사자였다.
"소룡녀,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양과는 너무도 반가웠다.
집법사자는 매씨가 안고 있는 갓난아기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애는……."
"모용부인이 득남을 하였소. 참으로 불행 중 다행이오."
"양과 아우!"
합포와 옥륜법왕도 어디서 오는지 달려왔다. 각기 임산부들을 하나씩 업고 있었다. 합포의
몸에는 몇 군데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양과는 달려가 합포와 옥륜법왕의 등에서 임산부들을
조심스럽게 받아내렸다.
"형님, 많이 다치지 않았소?"
합포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옥륜법왕과 같이 먼저 임산부들부터 살폈다. 맥을 짚어보
니 임산부들은 맥이 뛰지 않았다. 임산부들은 뒤통수며 잔등에 모두 중한 상처를 입고 있었
다. 둘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양과도 애석함을 금치 못했다.
"교주님이 노해 잠시 환생을 미루시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합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대 교주님 말씀이 있었는데 변동이 있을 리 없지."
그러나 임산부가 죽었으니 태아도 뱃속에서 죽었을 게 아닌가?
그런데 옥륜법왕이 매씨의 품에 안겨 있는 갓난애기를 손가락질하며 티베트어로 뭐라고 크
게 말했다.
"그 애는 모용공자의 아들입니다. 조산(早産)입니다만 그래도 평안무사하게 순산이 된 셈이
지요."
양과가 옥륜법왕에게 말했다. 옥륜법왕은 합포를 돌아보았다. 합포가 양과의 말을 통역해 주
자 옥륜법왕은 탄식을 했다.
"애석하게도 인골염주가 애 곁에 없구만. 그것만 있으면 이 애가 교주님 환생이 분명할텐
데."
그때 집법사자가 갑자기 매씨에게 덮쳐들었다. 모용협이 급히 장으로 집법사자를 내쳤다. 집
법사자는 슬쩍 피하며 쌍익검을 기묘하게 후려쳐 모용협을 베어버렸다. 모용협은 왜 그런지
알 수 없었으나 피하지 않고 그 칼을 맞았다. 쌍익검에 오른손이 뭉뚝 잘려나간 모용협은
비명을 지르며 땅에서 뒹굴었다. 매씨가 간절하게 모용협을 불렀다.
집법사자는 쌍익검을 거두고 한 손으로는 매씨에게서 갓난애기를 빼앗아 안고 한 손으로는
인골염주를 높이 들었다. 그녀는 득의양양해서 부르짖었다.
"이 애가 바로 전세교주님이시다."
모용협은 아픔을 무릅쓰고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내 아들을 내놓아라. 내 아들은 교주다 난 교주 아버지다.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 법이 어디
있느냐?"
모용협은 이를 갈았다.
"교주 아버지? 교주 아버지면 어쨌단 말이지?"
집법사자는 코웃음을 쳤다.
모용협은 대노하여 찢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합포와 옥륜법왕은 들으라. 나는 교주 아버지의 신분으로 명령한다. 너희 둘은 저 마녀를
어서 죽여버려라."
합포는 탄식을 하며 갓난애기를 향해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교주님, 제자 합포 인사 드립니다."
집법사자가 합포에게 명령했다.
"그러면 네가 어서 저 모용협을 죽여라."
"소룡녀 여보 소룡녀. 당신, 당신은 어찌 그리 지독한 여인이되었소?"
양과가 놀라 부르짖었다.
그런데 옥륜법왕이 집법사자 손에 들린 인골염주를 가리키며 무어라고 소리질렀다. 합포는
그 말에 인골염주를 유심히 살피더니 기뻐 부르짖었다.
"사부님 말씀이 옳습니다. 집법사자 손에 있는 인골염주는 전세교주의 신물이 아닙니다. 사
부님께서 도적맞은 그것입니다."
집법사자는 흠칫 놀랐다.
"그런 말로 누굴 속이려느냐?"
합포는 일어서며 크게 웃었다.
"이 마녀야, 그 애기는 전세교주님이 아니다. 교주님께서는 너희들이 미친듯이 날뜀을 하늘
에서 보고 다른 날로 미루고 오늘은 환생을 안하신 모양이 분명하다. 본교를 통제하려는 너
희들의 야 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흥, 이건 분명히 인골염주다. 눈 뜨고 봐도 모르겠느냐?"
집법사자가 인골염주를 흔들었다.
합포가 말했다.
"그 인골염주는 우리 사부님이 가흥객점에서 잃어버렸던 그 인골염주다."
그러자 모용협이 말했다.
"그럴 리가 없지. 그럴 수가 있나. 내가 얻은 인골염주를 양효비가 훔쳐갔는데. 그럼 간밤에
그건 가짜란 말인가? 핫하하, 알았다. 진짜 인골염주는 아직도 양효비에게 있다. 분명히 양
효비 몸에 있다."
모용협은 그리로 뛰어가려고 했다.
"다른 데서 찾지 마시오. 진짜 인골염주는 여기 있소."
양과가 품에서 교주 환생을 증명하는 진정한 신물인 미륜염주를 꺼내 흔들어 보이고는 합포
에게 그것을 넘겨주었다. 합포는 크게 기뻐하며 미륜염주를 옥륜법왕에게 보였다.
모용협은 발걸음을 멈추고 잘려나간 팔로 양과를 가리키며 언성을 높였다.
"그럼, 그럼 가흥에서 완안방방에게 내준 자금소갑 속에 있던 염주는 가짜란 말이오?"
양과는 차갑게 말했다.
"그렇게 소중한 보물을 이 양과가 정신나갔다고 그렇게 쉽게 내놓았겠나? 그런 짐작도 못했
단 말인가?"
그 말에 모용협은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거짓말, 거짓말이다. 네 말은 몽땅 거짓말이다. 내 아들은 틀림없는 전세교주님이다."
그러더니 그는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내 아들이 전세교주다. 난 전세교주 아버지다. 교주님의 아버지란 말이다. 핫하하, 나는 황
제, 나는 나라를 복국한 개국 군주이다. 개국 군주란 말이다. 핫하하. 나는 황제다, 황제. 한
하하."
모용협은 미쳐버렸다.
"여보, 아이고 여보."
매씨가 울며 불렀다. 그러다가 집법사자에게로 기어갔다.
"내 아들, 내 아들을 내놓아요."
집법사자는 매씨를 내려다보더니 손에 들었던 인골염주를 매씨의 정수리에 내뿌렸다. 매씨
는 거기에 맞아 곧장 즉사했다.
"여보 소룡녀 . 그게 무슨 짓이오? 그런 짓은 왜 하오?"
양과가 놀라 부르짖었다.
집법사자는 서글픈 웃음을 웃었다.
"십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라더니 내가 그만 그 꼴이 되었구나."
집법사자는 화가 나서 갓난애기를 땅에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몇 장 밖으로 날아가더니 이
어 수림 속으로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양과는 자지러지게 우는 갓난애기를 안아다가 합포에게 넘겨 주었다.
"형님, 형님을 도와 교주 환생을 영접하겠다고 언약한 일이 있었는데 오늘 그 언약을 지킨
셈이 되었으니 기쁩니다."
"아우께서 수고 많았네만 애석하게도 이 아이는 교주님이 아닐세 ."
합포는 갓난아기를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아기는 이 아우가 직접 접생을 했는데 그 때 인골 미
륜염주가 내 몸에 있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게 정말인가?"
합포는 놀라고도 기쁜 눈길로 양과를 쳐다보았다.
"정말이고 말고요. 이런 막중한 대사에 아우가 어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여태까지 말을 안했나? 사부님과 내가 얼마나 속을 태웠는지 아나?"
"내가 말을 했으면 모용협이 가만 있었겠습니까? 집법사자가 가만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그
런 것이죠."
합포는 양과의 말을 옥륜법왕에게 옮겼다. 법왕은 양과에게 허리를 굽히며 감사를 표하며
뭐라고 말했다.
"우리 사부님께서는 모든 신교 사람들을 대표해서 아우에게 감사드린다고 말씀하셨네. 그리
고 이 큰 은혜를 앞으로 꼭 갚아 드리겠다면서 차후 아우의 부름만 있으면 모든 힘을 아끼
지 않고 와서 도와드리겠다고 하셨네."
양과는 말없이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가 지금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소룡녀였다. 집법사자가 소룡녀임은 틀림없다. 그런
데 무슨 연고로 오늘처럼 잔인하고 흉악하게 변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찾아
가 옳은 길로 인도해 주어야겠다.
"형님, 그럼 아우는 이제 떠나겠습니다."
"떠나다니? 어디로 떠난단 말인가?"
합포가 놀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양과는 가까스로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형님과 법왕께서도 여기를 속히 떠나 서역으로 어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겁니다. 여기 있
다간 또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맞잡고 읍을 하고는 표연히 떠나갔다.
양과의 등을 바라보며 합포가 개탄했다.
"과연 아우는 협객이야. 아우가 없었더라면 교주님을 맞이하질 못할 뻔했어. 신교는 이번 일
을 좌시하지 않으리라. 앞으로 중원 무림에 꼭 문책하러 올 것이니 그 때의 살육 또한 처참
하리라."
그리고는 옥륜법왕과 같이 새로 환생한 교주님을 모시고 서역으로 돌아갔다.
이번의 싸움으로 오독방과 모용세가는 대단한 손실을 보게 되었다. 오독방은 청룡, 주작, 백
호 이 세 개 분타의 제자들이, 모용세가는 무사와 보초들이 싸움에서 죽거나 지진에 거의
죽었다. 겨우 살아 남은 백여 명도 이번 재앙에 간담이 서늘해져 모두 달아나버렸다.
청룡분타 타주 호청룡, 주작분타 타주 오자겸 그리고 백호분타 타주는 모두 지진 때 죽었다.
오군영을 업고 뛰던 오군량은 아버지의 보호로 오히려 살아남았다. 철검보 보주 사도인도
그 지진에 목숨을 잃었다.
집법사자에게 손목이 잘린 후 모용협은 절망에 빠져 미쳐버렸으며 후에는 거지가 되어 문전
걸식을 다녔으니 그 종말이 그처럼 비참할 수가 없었다. 탁장청, 소이선생, 풍자귀, 능소, 부
방 그리고 위방성도 모두 지진에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사람이 살아서 너무 욕심에 매달릴 일이 아니었다. 하늘은 언제나 공정한 법이다. 얻게 될
것은 생각지 않아도 쉽게 얻어지나, 얻지 못할 것은 아무리 바둥거려도 얻지 못한다. 오히려
생명만 잃기 쉽다. 신교에서 말하는 '연지우차(緣止于此)'란 바로 이를 일컫는 말이었다.
바닷가에 이른 양과는 지니고 있던 돈을 다 털어 큰 배 한척을 전세냈다.
배는 순풍에 돛을 달고 곧장 악귀도로 나아갔다. 이틀이 걸려서야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밋밋한 악귀도가 보였다.
사공은 무슨 말을 해도 배를 악귀도까지 몰고 가려고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어 양과는 검
으로 사공을 위협했다. 그제서야 사공은 배를 악귀도 부두로 몰고갔다.
양과가 돌아온 것을 알고 남해신니는 직접 마중을 나왔다. 해고도 따라와 양과의 손을 반갑
게 쥐고 기뻐서 통통 뛰며 야단이었다.
"모용세가가 하루 아침에 망했다는 말을 들었네. 난 임자 걱정에 잠을 못 잤네."
남해신니의 말에 해고는 까르르 웃었다.
"공자님은 복도 많고 명도 긴 분이신데 뭘 그러시지요? 팔괘궁도 어쩌지 못했는데 모용부가
공자님을 어쩌겠어요?"
양과는 그간의 일을 자초지종 상세히 남해신니에게 들려주었다. 남해신니는 연신 탄식을 했
다.
"그게 응보라는 거네."
"사태님, 무채접은 무사합니까?"
양과가 물었다.
그러자 해고의 입이 뾰루퉁해졌다.
"무사하지 않고 죽었겠어요? 우린 그만하면 대접 잘해주었어요."
남해신니가 해고를 나무라는 뜻으로 눈을 부릅떠보였다. 그리고는 빙그레 웃으며 양과에게
말했다.
"그 애는 좋은 애지. 그런데 매일 신선도로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으면 임자를 찾으러가겠다
고 야단하기에 내가 연금을 시켜놓았네. 그러나 의식에 있어서는 조금도 냉대하지 않았네."
"고맙습니다, 사태님. 무채접을 만나보면 좋겠는데……."
"얘 해고야, 공자님을 그리로 모셔다 드리렴."
남해신니가 해고를 시켰다.
해고는 내키지 않았으나 하는 수 없이 양과를 데리고 갔다. 도중에 해고는 쉴새없이 말을
했다. 해고 자신도 왜 그런지 몰랐다. 양과만 보면 무엇이든 자꾸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양
과는 그저 묵묵히 듣기만 했다.
"공자님이 떠나간 며칠 사이에 여기선 큰 일이 아주 많이 생겼어요. 뭐 알아요?"
"큰일? 무슨 큰일?"
양과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우리는 오독방의 대부분 제자들이 와불산으로 간 것을 알고 내부가 빈 틈을 이용해 오독방
의 비어당, 거해당(居蟹堂), 영사당(靈蛇堂) 이 세 개 분당을 연속 까뭉개 버렸다니까요."
그러더니 안색이 갑자기 침울해졌다.
"그런데 우리 자매들도 적지 않게 죽고 다쳤어요."
영사당이란 세 글자에 양과는 벽사신군이 떠올랐다. 벽사신군과 그가 몰고 다니던 뱀들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
사실 그날 밤, 벽사신군은 아무리 야단을 쳐도 뱀들을 불러모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말 잘
듣는 벽사들이 그날따라 죽어라고 달아나기만 했다. 뱀들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으니 모용
부에서 자기 지위가 땅바닥에 떨어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벽사신군은 전남으로 아
예 도망가고 말았다. 거기 가서 새롭게 재기할 궁리였던 것이다.
"다 왔어요, 이젠."
악귀도에선 제일 좋은 곳인듯한 집 앞으로 해고는 양과를 데리
"이건 원래 내 집인데 내줬거든요, 할 수 없이."
해고는 속에 내키지 않은 일이었다고 입을 비쭉내밀었다. 남해 신니의 명이니 해고는 어길
수가 없었던 것이리라. 양과는 해고에게 허리를 굽혀 읍을 했다.
"정말 고맙소이다."
그러자 해고는 방긋 웃었다.
"누가 그런 인사 받겠다나?"
그들이 집 안으로 들어서자 문 쪽에 등을 돌려대고 앉아 있는 무채접의 모습이 보였다.
"나가요, 보기 싫어요."
무채접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소리쳤다.
양과는 흠칫했다.
'왜 이러지? 오자마자 이건 뭔가? 내가 뭐 어쨌다고 이렇게 성부터 내는거지?'
그러자 해고가 기색이 새파래져 투정이 섞인 어조로 쏘아붙였다.
"왜 이래요? 누군 보고싶어 여기 왔는지 알아요? 보기 싫으면 그만둬요. 양과 공자님, 잘 됐
어요. 우린 갑시다 가요."
해고가 양과의 손목을 끌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양과 공자님이란 말에 무채접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니 낭군님, 이봐요."
무채접은 기뻐 일어나 양과의 품에 안겼다. 기쁨의 눈물이 그녀의 볼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양과도 가슴이 뭉클하며 콧날이 시큰해졌다.
"여보 무사했소? 그 동안."
무채접은 양과의 가슴을 두 주먹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원망하듯 말했다.
"무사가 뭐예요? 얼마나 속이 탔는지 알아요? 여기선 옴짝달싹을 못하게 하지, 당신은 마냥
소식이 없지, 난 애가 타서 죽을 뻔했어요. 그런 줄도 모르고 무사했는가가 뭐예요."
양과는 빙그레 웃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을 모르오. 내가 어딜 간들 임자를 잊겠소?"
해고는 그들 둘이 그러는 것을 보자 얼굴이 달아오르고 거기 있기가 거북해졌다. 그는 헛기
침을 한번 크게 하고는 말했다.
"양공자님, 난 내 할 일을 다 했으니 가요. 사태님에게 가요."
"그래 먼저 가 말씀드려요. 나도 곧 가겠다고."
양과는 웃으며 말했다.
해고는 불쾌했다. 그녀는 가려다 말고는 질투하는 소리를 했다.
"남에게 잠시 내주긴 했지만 여긴 어쨌든 내 방이에요. 그런데 사내분이 남의 처녀 규방에
그냥 있을 생각이에요?"
무채접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고 해고를 흘겨보며 까르르 웃었다.
"왜 시샘이 생겼니? 부러워 그러니?"
해고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무채접에게 눈을 흘겼다.
"별게 다 부럽겠다? 난 방안에 사내 냄새가 나는 게 딱 질색이란 말예요."
그러자 무채접이 코웃음을 쳤다.
"그게 무슨 말인지 내 모를 줄 알아? 그 나이엔 그러는 법이지만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라.
우리 낭군님이 아무렴 젖비린내 나는 어린애에게 정을 둘까?"
해고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다. 그녀도 입심이 센 축이었지만 필경은 처녀의 몸이라 그런 말
은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발을 탁 구르더니 밖으로 나갔다.
"어디 두고봐요. 뻐기기는."
해고가 안 쪽을 향해 소리쳤다.
"뻐긴다구? 뻐기면 어떻다는 거지? 낭군님이 돌아왔는데 내 왜 뻐기지 않을까?"
무채접이 안에서 대답했다.
"에그, 부끄럽지도 않은 모양이지. 결혼도 안한 주제에 그저 내 낭군 내 낭군. 내 낭군이 어
디 있어?"
양과는 무채접을 조용히 말렸다.
'천하의 처녀애들은 모두 사랑스럽게 자라났어야 할 것인데 어째서인지 입심들이 이렇게 세
졌는지 모르겠다. 화가 나면 입이 모두 칼날이다. 누구도 지려고 하지 않는구나.' 하고는 양
과는 속으로 개탄했다.
해고가 간 다음, 무채접은 양과의 품에 안겨 이 일 저 일을 다급히 물었다.
"이건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구만."
양과가 웃자 무채접은 잠깐 양과를 올려다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이젠 아무 것도 더 묻지 않을래요. 당신이 무사히 돌아왔는데 뭘 자꾸 묻겠어요? 다른 일
들을 물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리고는 양과의 손목을 끌고 침상으로 가 앉았다. 무채접은 양과의 얼굴을 눈 한번 까딱하
지 않고 계속 올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자꾸 보오?"
양과가 물었다.
"그 사이 수척해진 것 같아요."
무채접은 애처롭다는 듯 탄식을 했다.
양과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동안의 일이 어떠했던가? 수척해 지지 않을 리가 있는가? 그는
모용세가에서 발생했던 일을 천천히 쭉 다 이야기했다.
무채접은 그 사연을 듣고는 긴긴 탄식을 했다.
"저도 오독방이 조만간 그렇게 될 줄 알았어요. 하늘의 뜻을 어기고서 잘 될 수가 있겠어
요? 의부님은 전세교주를 통제하지 못하게 되어 대단히 서운해 할 것이지만요."
"그런데 이상한 일은 오독방 방주가 왜 직접 오지 않았는지 모르겠소? 오독방에서 인골염주
를 잃어버린 후 필승의 자신이 없게 되었으니 이기려면 오독방 방주가 직접 나서서 싸워야
할 게 아니겠소? 그런데 이런 큰 일에 오독방 방주는 보이지도 않더란 말이오."
그러자 이번엔 무채접이 쓴웃음을 지었다.
"무공과 지모로 말하면 오독방에선 의부님 다음 가는 사람이 언니지요. 언니가 못 해내는
일이 어디 있나요? 이번 일은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그런 횡액을 만난거죠. 그렇지 않았으
면 언니는 꼭 성공했을 거예요."
양과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럼 당신은 오독방이 교주를 통제했으면 하오?"
"글쎄 나도 모르겠어요. 의부님과 언니 일이 제대로 되는 것도 좋겠고 천하가 태평해지는
것도 좋겠고. 그런데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실현될 수는 없는 것 같고……."
그녀는 머리를 양과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난 더는 그런건 생각하지 않겠어요. 될대로 되라죠. 난 오직 당신과 같이 있으
면 행복해요. 만족해요."
"내가 왜 이렇게 급히 돌아왔는지 알겠소?"
무채접은 눈을 깜박거리다가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근심되어서 날 데리러 왔겠죠 뭐."
양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채접은 놀란 눈길로 양과를 바라보았다.
"저 때문에 온 게 아니란 말이죠? 그럼 왜 왔어요?"
"그날 밤 어리둥절한 속에 당신을 해쳤지만 그렇다고 의리 없고 정 없는 양과는 아니오. 당
신을 버릴 내가 아니오."
무채접은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튼 난 내가 좋아서 그랬어요. 난 내가 원해서 그랬어요. 이젠 당신에게 속한 무채접이
에요. 당신에게 버림을 받는다고 해도 난, 난 후회하지 않을거예요."
양과는 무채접의 그 정이 고마웠다.
"걱정마오. 난 당신과 꼭 결혼할 거요."
무채접은 눈물을 글썽이며 목멘 소리를 했다.
"정없이 마지못해 결혼하는 건 난 싫어요. 억지로 그러진 마세요. 나도 당신을 강요하지는
않겠어요. 마지 못해 하는 결혼은 뒤가 좋지 않아요. 언젠가는 꼭 후회하게 되죠. 그럴 바에
는 차라리 지금 헤어지는 게 좋아요. 가세요. 이제라도 떠나가세요."
그녀는 일어서서 창가로 걸어갔다. 등을 보이고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이 그처럼 애처로울 수
가 없어 양과는 다가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이러지 마오, 난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소. 내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오."
"거짓말."
"거짓말이라니?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소?"
양과는 안타까워 확약까지 했다.
"정말이에요? 정말이죠?"
무채접은 양과를 올려다보았다.
양과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는데 그것을 본 무채접은 방긋 웃었다 눈물 방울이 맺힌 그녀
의 얼굴은 봄바람에 피어난 이슬 머금은 배꽃 같았다.
양과는 머리를 숙이며 그녀의 볼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눈을 내리감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양과의 품에서 살짝 빠져나왔다.
"그러나 난 알고 있죠. 당신은 오직 언니 한 사람만 사랑하고 있잖아요?"
양과는 잠시 말을 못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소룡녀에게도 난 절대 변심을 아니할 거요."
"그럼 둘이 만나게 되면 난 어쩌지요?"
양과는 말문이 막혔다. 여태까지 그런건 생각도 하지 않았던 양과였다.
무채접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둘이 만나 정말로 같이 정들어 산다면 난, 난 심산 속에 들어가 삭발하고 비구니가 될 수
밖에……."
"그런 생각 마오. 절대 그러진 마오."
그러자 무채접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모르긴 해도 내가 비구니가 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거예요. 이제 보면 알겠지만."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양과는 가슴이 철렁했다.
"언니는…… 언니는 마음에 변했어요. 언니는 기억력을 상실해서 당신을 기억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언니는 또 이미 다른 사람에게 정을 바치고 있어요."
"그럴 수가 있나?"
양과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무채접이 냉소했다.
"그럴 수가 있냐구요? 세상엔 생각 밖으로 변하는 일이 얼마나 많다구요. 오독방은 원래 자
신만만하게 생각했지만 결과는 인골염주를 낭군님에게 빼앗기지 않았나요? 모용협은 어때
요? 갖은 꾀를 다 쓰고 갖은 애를 다 썼지만, 결국은 어때요? 자기 아들이 전세교주가 되었
어도 그는 그렇게 망해버렸잖아요? 당신의 아우 양효비 일도 그렇지요. 당신이 그럴 줄을
양효비가 생각이 나 했겠어요? 세상에 생각 밖으로 되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지겠어요? 고정
불변하는 일은 세상에 없다는 걸 아세요."
양과는 그래도 묵묵히 입을 꾹 다물고 대꾸를 하지 않았다.
무채접은 또 말을 이었다.
"사실, 정말로 말씀드리면 언니는 오독방에 가입할 때부터 정을 바치는 사람이 따로 있었어
요."
"그게 누구요?"
양과가 다그쳐 물었다.
무채접은 한 마디 한 마디 분명히 말했다.
"누구냐구요? 내 의부님인 오독방 방주 여노악이에요. 알겠어요?"
제32장 백의 여인의 정체
양과는 한동안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무채접은 겁이 났다.
"왜 이러세요? 왜 이러시냐구요?"
무채접은 양과의 팔을 흔들었다.
양과는 실성한 사람마냥 갑자기 크게 웃었다.
"그럴 수가 없어. 절대 그럴 수가 없지. 소룡녀가 그 때 몇 살이야. 갓 스물의 젊은 나이인
데 여노악은 쉰이 넙었잖아. 소룡녀 같은 절륜한 미모에 그런 늙은 영감에게 정을 둘 수가
있나?"
"그렇다면 내가 거짓말한다 이 말씀이죠? 이봐요. 언니가 당신을 버린 것을 알기에 내가 이
렇게 …….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요? 내 비록 사파에 몸을 두었던 사
람이지 만 아내 있는 남의 사내를 가로채는 짓은 안하는 사람이에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그
들 둘은 벌써……."
그러다가 무채접은 입을 다물었다. 양과의 기색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수가 없어, 절대 그럴 수가 없어."
양과는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무채접은 양과가 그러다가 병이라도 걸릴까봐 겁이났다.
"그럼 내가, 내가 허튼소리 한 셈 쳐요. 내 말을 믿지 않아도 좋아요. 그러다 너무 속상해
병이라도 나면 어쩌겠어요?"
양과는 갑자기 진정하며 말했다.
"내가 이번 돌아온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소. 하나는 당신을 데려 가려고 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룡녀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만나서 분명히 알아보려고 온 것이오."
"언니는 신선도에 있는데 거길 어떻게 들어간다는 거죠?"
양과는 이를 사려물었다.
"내게 방법이 있소. 당신은 여기서 기다리시오. 그녀가 나를 배신했든 안했든간에 만나서 일
을 분명히 하고는 내 꼭 돌아와서 당신을 데리고 가겠소."
양과는 그리고는 방문을 나갔다.
무채접도 따라 나가려고 했으나 문을 지키는 두 여인에게 막혀 버렸다.
"여보, 조심하세요. 조심하셔야 돼요."
무채접은 속이 닳아 발을 굴렀다.
해고를 따라 악귀동에 온 양과는 남해신니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남해신니는 해고를 시켜 얼
른 양과를 부축해 일으키게 하며 의아해서 물었다.
"왜 이러는 것이오?"
"사태님, 저를 도와주세요."
남해신니는 혹시 양과와 무채접이 다투었나 해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사실 무채접 그 애가 임자 생각을 얼마나 했는지 아나? 임자가 와불산으로 간 다음 그 애
는 매일 임자를 걱정했었네. 그 애가 성질은 좀 부리지만, 그런 나이 처녀들치고 안그러는
처녀애들이 몇이나 있나? 우리집 해고도 버릇없이 놀 때가 많으니 임자는 이해해 주게."
그러자 해고가 대번 입이 뾰루퉁해져 남해신니에게 눈을 흘겼다.
"제가 언제 버릇없이 놀았다고 그래요? 전 그런 적 없어요."
남해신니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너 하는 일이야 다 옳지."
"사태님, 그런 일 때문이 아닙니다. 이 양과가 이젠 나이가 얼마입니까? 접아를 이해 못할
사람은 아니지요."
양과의 말에 남해신니가 물었다.
"그럼 도대체 무슨 일이지?"
"사태 님께선 오독방의 내막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후배가 신선도에 잠입하려고
하는데 사태님께서 제발 도와주십시오, 그 은덕은 백골난망하리다."
"신선도에 들어가겠다구?"
남해신니와 해고는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양과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선도엔 뭐하러 들어가려고 그러죠?"
해고가 두 눈을 멀뚱거리며 물었다.
"난 소룡녀를 만나 결판을 내야겠소."
"집법사자가 꼭 소룡녀라는걸 어떻게 알죠?"
해고가 눈을 깜빡거렸다.
"틀림없이 소룡녀일 것이오."
"신선도의 경비가 멀마나 삼엄한지 아세요? 도처에 오독방 제자들이 득실거리는 곳이에요.
얼마나 위험하다고 그래요."
"오독방은 와불산 싸움에서 이미 기가 꺾였는데다가 지금 신선도는 비어 있을 거라니까."
그러자 남해신니가 말했다.
"임자 목숨을 위해서라도 난 임자를 도와주지 못하겠네. 솔직히 말해서 나 자신도 신선도에
들어갔다가 무사히 빠져나올 자신이 없는 형편이네."
남해신니의 말은 정말이었다. 그런 자신이 있었더라면 남해신니는 벌써 신선도를 뭉개버렸
을 것이다.
그러나 양과는 칼을 뽑아 제 목에 갖다대기까지 하며 결연히 말했다.
"소생이 수년 간 정화, 채설주 그리고 거와, 세상에서 독성이 제일 큰 이 삼대절독에 중독되
기까지 하며 갖은 고생을 다 겪어온 것은 모두 소룡녀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소룡녀
를 만나 그 동안의 일과 우리사이의 일을 분명히 하지 않고서는 소생은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사태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사태님께서 마다하시면 전 이 자리에서 이 검으로
죽겠습니다."
남해신니는 당황했다.
"가만, 내 말 좀 듣게. 내 임자를 도와주겠네. 이젠 됐겠지?"
그러자 해고가 남해신니의 팔을 흔들었다.
"도와주지 마세요. 도와주지 마세요. 그게 어디 도와주시는 건가요? 저 분을 사지로 끌고가
는 거지."
남해신니는 그 말에 탄식을 했다.
"난들 대답하고 싶어 대답하는 거냐? 저 고집을 꺾을 수가 없어 응낙하는 거란다."
작은 배를 몰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양과의 모습을 보고 해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남해신
니에게 말했다.
"사태님, 저 분은 왜 저렇게 총망히 다니시는지 모르겠어요."
"그것도 운명이겠지."
남해신니의 말에 해고는 눈물을 흘렸다.
"우린 저 분을 꼭 붙들어왔어야 하는 건데."
"무림의 호걸들은 갖은 고초를 겪게 운명지어져 있단다. 그렇지 않으면 무림 호걸이 될 수
없지. 그를 붙들어 둘 명이 아닌데 난들 어떻게 붙들어 두겠나?"
남해신니의 말에 해고는 흐느꼈다. 그녀는 이번이 영원한 이별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기가 크게 꺾인 오독방은 양과가 추측하던 그대로였다. 신선도는 비어있다시피 했다. 바닷가
에 떠있는 배도 얼마 안보였으며 보초들도 몇 명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양과는 배를 몰아 천천히 신선도로 접근해 바위 뒤에 숨어 때를 기다렸다.
어느덧 불그스럼한 여명이. 밝아왔다. 여명 직전은 가장 어두울 때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이
가장 피곤해하고 그래서 또 경계를 제일 늦추는 때이기도 했다. 양과는 배에서 내려 물 밑
으로 들어 가 천근추의 무공으로 바다 밑바닥을 걸어서 신선도로 향했다.
바다 밑바닥의 지세는 점점 위로 올라갔다. 드디어 모래바닥이 밟히더니 머리가 물 위로 나
오게 되었다. 눈앞에는 몇 장 넓이의 모래톱이 보이고 그 뒤는 무성한 파초림이었다. 양과는
탄지신공 (彈指神功)으로 돌조각 하나를 모래톱에 튕겨보냈다. 그 돌조각이 모래톱에 떨어졌
는 데도 아무런 동정이 없었다. 양과는 얼른 몸을 솟구쳐 파초림으로 날아갔다.
그는 운기를 해서 옷을 말리면서 사방을 살폈다. 왼쪽에 높은 망루가 하나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보초들이 그 안에 있었는데 안에서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양과는 두 발을 가볍게 굴려 생하고 망루 위로 올라갔다. 험악하게 생긴 사내 하나가 큰 칼
을 품에 안고 깊은 잠에 떨어져 있었다.
양과는 우선 그 장한의 혈도를 찍은 후 그를 흔들어 깨웠다. 그 장한은 어슴푸레 눈을 뜨다
가 시커먼 사람의 그림자가 있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그런데 양과가 검끝을 그 장한의 가슴팍에다 대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소리쳤다간 죽을 줄 알아라."
장한은 입을 다물었다.
양과는 집법사자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 사내는 모른다고 했다.
양과는 그 사나이의 혈도 한군데를 쿡 찔렀다. 그 사내는 온몸의 관절이 개미떼에게 물어뜯
기는 것 같은 아픔에 견딜 수 없어 집법사자의 숙소를 솔직히 가르쳐 주었다.
양과는 그 사내를 오랏줄로 잔뜩 묶고 헝겁뭉치로 입을 막은 다음 파초림 깊숙한 곳에 던져
버렸다.
여명이 동쪽 하늘에 비칠 때, 양과는 오독방 방주가 있는 방주부에 이르렀다. 그가 담장을
날아넘어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공교롭게도 순라를 돌던 경호병들에게 들켜버렸다.
"누구냐? 서라!"
놈들이 물었다
"나도 오독방 사람이오."
양과는 고개를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두 경호병은 칼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꼼짝말고 게 섯거라. 그렇지 않으면……."
그러나 양과가 어느새 덮쳐들었다.
경호병들이 내리치는 칼을 슬쩍 피하며 양과는 일장을 날렸다. 경호병 하나가 그 장풍에 가
슴을 맞아 흉골이 우지끈 부서지며 피를 토하고 죽었다. 다른 한 경호병은 경황실색하여 칼
을 휘둘러 양과의 허리를 치려고 했다. 양과의 옷소매가 그 경호병의 면상을 후려쳤다. 경호
병은 머리가 박살나 쿵하고 쓰러졌다.
양과는 계속 걸어들어 갔다. 내원에 이르자 또 경호병 네 명이 칼을 들고 뛰쳐나왔다. 양과
는 검을 뽑아 쉽사리 두 명을 찔러 죽이고 또 한 명은 옷소매로 후려쳐 죽였다. 그러자 다
른 한 놈이 칼까지 집어던지고 뺑소니를 치며 황급히 부르짖었다.
"자객이 왔다. 자객!"
양과는 몇 걸음 뛰지 않아서 그 놈을 붙잡아 죽여버렸다.
그러나 그 자의 고함소리에 사랑채에서 자고 있던 경호병들이 소스라쳐 일어나 뛰어나왔다.
무려 스무 명은 돼 보였다. 양과는 자기가 창안한 신기검법으로 연속 몇 놈을 절러 죽였다.
경호병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무공이 괜찮은 놈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양파에게야 어쩌
랴? 양과의 검이 번뜩일 때마다 어이쿠 어이쿠 하고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데 눈 깜짝할
사이 양과는 놈들을 열여덟 명이나 요절을 내버렸다.
그러나 경호병들은 물러나지 않고 계속 결사적으로 달려들었다.
경호병들과 싸우느라고 시간을 지체해서야 안되지. 이렇게 생각한 양과는 몸을 날려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지붕들을 건너뛰며 한가운데 있는 가장 높고 가장 큰 집으로 날아
갔다.
양과가 그 집 정원에 내려서자 경호병들이 어느새 따라왔다. 그들은 또 양과를 겹겹이 에워
쌌다. 양과는 검을 꼬나들고 집안을 향해 소리쳤다.
"소룡녀! 여보 소룡녀, 나 양과가 왔소!"
그러자 일남일나가 경호병들을 헤치며 양과 앞에 나타났다.
"양과가 아닌가? 담이 커도 유분수지 감히 오독방 방주부를 쳐들어온단 말인가?"
양과가 보니 그 일남일녀는 쌍사자표국의 총표두인 웅사 동진과 자사 원칠랑이었다.
"당당한 쌍사자표국의 총표두들이 남의 집 문지기를 하고 있나?"
양과가 비웃었다.
그러자 동진은 눈을 부릅뜨더니 자랑스럽게 말했다.
"흥, 우리 부부는 이미 방주부 총관이 되었다."
삼타삼당(三舵三堂)을 연이어 잃은 오독방은 원임 방주부 총관을 밖으로 내보내 그 사태를
수습하게 했다. 그 대신 동진과 원칠랑 이 부부 한쌍에게 총관직을 잠시 맡겼던 것이다. 호
랑이가 없으니 여우가 왕노릇한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것일까? 원칠랑이 입을 비쭉거리
며 말했다.
"여기까지 쳐들어온 것만 봐도 양대협님의 무공이 어떻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지금 우리 오
독방은 인재가 모자라죠, 양대협님께서 우리 오독방에 가입하실 생각은 없나요? 그러면 꼭
중임을 맡길 거예요."
양과는 침을 뱉었다.
"이 양과는 광명정대하게 살아온 사람이오. 오독방 같은 곳에 몸둘 내가 아니오. 어서 집법
사자나 여기로 불러주시오."
동진이 화를 내며 말했다.
"꿈도 꾸지 마라. 집법사자가 어떤 분이신데 너 같은 사람이 오라가라 하는 거냐?"
"어쨌든 난 만나야겠소."
양과는 검을 꼬나들고 앞으로 밀고 들어가려고 했다.
동진이 두 주먹을 치켜들며 응조공을 시작할 자세를 취했다.
"집법사자를 만나려거든 나부터 통과해야 한다."
원칠랑이 남편 옆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날뛰는 거지?"
양과는 코웃음을 치며 장검을 내찔렀다. 바다의 격랑 같은 무서운 소리가 일었다. 동진과 원
칠랑은 그 소리에 가슴이 섬뜩해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못 비키겠소? 그러면 양과도 사정을 안봐 주리다."
"여보, 저 사람이 우릴 업신여겨도 분수가 있지. 우리가 버릇 좀 가르쳐 줄까요."
원칠랑이 동진에게 하는 소리였다.
동진과 원칠랑은 하나는 대력응조공을 쓰고 다른 하나는 칼을 쓰면서 양쪽에서 양과를 협공
했다.
양과는 노한 소리를 지르며 옷소매에 진기를 넣어 휘둘렀다. 동진은 겁이 나서 칠팔보나 물
러섰다. 이와 동시에 양과는 왼손에 든 검으로 원칠랑의 만도를 내쳤는데 원칠랑은 하마터
면 만도를 손에서 놓칠 뻔했다. 양과는 또 원칠랑이 숨 돌릴 틈을 주지 않고 그녀의 옆구리
로 검을 찔러갔다. 원칠랑은 짧은 비명 소리를 지르며 뒤로 뛰었다. 지금에 이르러 양과의
무공은 이미 태반이나 회복되었다. 그러니 동진과 원칠랑이 어떻게 당하겠는가? 그들은 부
하들도 함께 달려들라고 소리쳤다.
그때 집문이 열리며 예쁘게 생긴 시녀가 나오더니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씨께서 모두들 물러서라고 하십니다. 모두들 물러서세요."
부중에선 집법사자를 아씨라고 불렀다.
동진은 자기 귀를 의심하는듯 되물었다.
"뭐? 물러서라고?"
"예. 아씨 분부십니다."
"저 자는 자객이야."
동진이 양과를 손가락질했다.
"글쎄 그건 몰라요. 난 아씨의 분부를 전달할 뿐이에요."
동진은 더 말을 못했다. 그는 양과를 흘겨보며 원칠랑과 뭇 경호병들을 데리고 물러나 가버
렸다.
시녀는 양과에게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그리고는 문 옆으로 비켜섰다.
호랑이 굴이라도 마다할 양과가 아니다. 그는 집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대청은 대단히 넓었다. 양 옆엔 남의인들이 각기 줄지어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 복판엔 호랑
이가죽으로 둘러쳐진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앞은 검은 휘장으로 가려져 있어 안이 잘 보
이지 않 았다. 그 옆에는 나무 의자가 있었는데 흰 비단에 덮여 있었다.
오독방 방주 여노악과 그의 부하들이 모여 대사를 의논하는 곳이 분명했다.
시녀가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편한 데 앉으세요."
"아씨는 어디 있소?"
양과의 말에 시녀가 방긋 웃었다.
"아씨는 옷을 갈아입고 계세요. 금방 나오실 거예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리고 시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양과는 앉아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차 두 잔을 다 마실 시간이 지나서야 집법사자가
표연히 나타났다. 서너 장이나 떨어졌는데도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향기가 물씬했다.
양과는 미간을 찌푸렸다.
종래로 분과 연지 같은 것은 바르질 않던 소룡녀가 아닌가? 소룡녀가 정말 다른 사람으로
변했단 말인가? 집법사자의 복색은 여전했다. 티 하나 없이 하얀 옷에 검은머리가 어깨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전히 인피가면을 쓰고 한들한들 가볍게 걸어와 흰 비단을 덮은 의자
에 앉았다.
"여보, 계속 그 가면을 쓰고 있을 셈이오?"
양과가 일어나며 말했다.
집법사자는 섬섬옥수를 들어 양과에게 가만 앉아 있으라고 권하며 물었다.
"여긴 왜 왔어요?"
"왜 오다니 ? 당신을 만나러 왔지."
집법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지었다.
"글쎄 이럴 줄 알았어요. 끝내 찾아왔군요."
"여보, 소룡녀. 그래 우리 부부가 맺은 서약을 잊었단 말이오? 왜 나를……."
양과는 흥분되어 말을 끝맺지 못했다.
"16년 뒤에 만나기로 했잖아요. 아직 시간이 안됐거든요."
양과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16년이라고 했으면 꼭 16년이 돼야 한단 말이오? 너무나 무정한 소리가 아니오? 요
몇년 동안 당신 생각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오?"
집법사자는 가볍게 한숨을 지었다.
"그래 그 정을 잊지 못한단 말이에요?"
"물론이지. 바다가 마른대도 내 마음은 변치 않을거요."
"그럼 좋아요."
집법사자는 방긋 웃으며 붉은색 나는 작은 환약 한 알을 양과에게 던져주었다.
"채설주 독이 아직 채 다 없어지지 않았으니 그 환약을 드세요. 그건 내가 2년 동안이나 기
화요초들을 채집해서 사흘 전에야 비로소 만들어낸 해독약이에요. 채설주 독은 절독이라 꼭
해독이 된다고 장담은 못하겠지만 한번 드셔 보세요."
양과는 그 말에 감동되어 그 환약을 입에 넣어 꿀꺽 삼켰다.
"고맙소."
"어때요?"
집법사자가 물었다.
양과는 진기를 운행해 보았다. 그런데 해독이 되기는커녕 뒷덜미의 대추혈이 아파왔다.
"대추혈이 좀 아프죠?"
집법사자가 물었다.
"그렇군."
"그러면 됐어요."
집법사자는 방긋 웃었다.
"되다니? 뭐가 됐단 말이오?"
"충심환을 먹고 나면 꼭 거기가 아프니까요."
"충심환? 채설주 독을 해독하는 해독약이라더니 충심환이었단 말이오?"
"내가 채설주를 몇 번이나 봤다고 해독약을 만들어요? 난 채설주를 두 번 밖에 못 보고 한
번도 건드리지 못했는데 어떻게 해독약을 만들겠어요?"
집법사자의 음성은 담담했다.
"그렇다면 정말 충심환을 먹였단 말이오? 부부끼리 이런 거짓 말을 하는 법이 어디 있소?"
"난 당신을 오독방에 가입시키려고 그랬어요."
양과는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부부가 이렇게 만나니 기쁘기는 하오만 그 사이 당신이 이렇게 많이 변할 줄은 몰랐소. 이
젠 농담도 제법 잘 하는구려."
"이게 농담인줄 아세요?"
집법사자는 그러면서 자기 얼굴에 썼던 인피가면을 벗었다.
"자 천천히 보세요. 내가 소룡녀인가 말이에요."
그 바람에 양과는 이상한 감이 퍼뜩 들어 집법사자를 자세히 훑어보았다. 초생달 같은 눈썹,
고운 눈매, 앵두 같은 입술, 희다못해 투명해 보이는 피부는 그야말로 미인이었다. 아니 바
로 경국지색이었다. 그러나 소룡녀는 절대 아니었다.
소룡녀도 흰 피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저렇듯 눈처럼 희지는 않았고 소룡녀의 눈길도 저렇듯
냉혹하지 않았다. 소룡녀는 선녀같은 아름다움을 가졌다. 소룡녀에 비하면 이 여인은 지옥바
닥에서 남의 혼을 빼먹는 요녀같았다.
양과는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눈앞이 어질어질해지고 주위의 물건이 빙빙 돌아가
는 것만 같았다.
양과는 미친듯이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그 웃음에는 처참함과 냉혹함이 담겨 있었다. 그 바
람에 지금까지 태연자약해 있던 집법사자도 당혹했다.
그런데 양과가 갑자기 웃음을 거두었다.
"소룡녀가 아니면서 왜 소룡녀로 가장해서 나를 해치는 건가?"
양과는 집법사자를 노려보았다.
"내가 가장했나요? 5년 전 거기서 나를 소룡녀라고 부를 때 나는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그
러나 당신이 계속 나를 소룡녀라고 부르며 쫓아다니기에 나는 사람을 시켜 알아봤지요. 그
제서야 내 모습이 소룡녀와 흡사해서 그런다는걸 알았지요."
"그래서 장계취계(將計就計)로 소룡녀인 척했다 이 말이오? 오독방과 싸워도 소룡녀 생각
때문에 사정을 두게 하려고 그런게 아니오?"
"그래요. 그런데 이 일은 곽정의 처 황용과 관계가 좀 있어요. 황용은 공자님이 소룡녀를 따
라 죽을까봐 남해신니가 어쨌다는 거짓말을 했지요. 그런데 정말 남해신니란 사람이 있었고
또 남해신니가 날 절정곡 밖에서 구해 주었죠. 양과 공자님, 공자님의 소룡녀는 모르긴 해도
이미 죽었기 쉬워요. 그럴 바엔 그냥 나를 소룡녀로 간주하심이 좋지 않을까요?"
"소룡녀도 아닌데 어떻게 소룡녀로 대하겠소?"
그러자 집법사자는 방긋 매혹적인 웃음을 지었다.
"난 내 무공도 용모도 소룡녀보다 낫다고 믿고 있어요. 게다가 큰 권세까지 가지고 있거든
요. 그런데 공자님 역시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 있잖아요? 공자님의 무공이 점차 더 회복되
면 모용협은 공자님의 적수가 못 될 거예요. 그러니 우리 둘이 손을 잡는 다면 세상에 무서
울게 뭐 있겠어요? 천하무적으로 대업을 꼭 이루어낼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그녀는 아름다운 몸매를 한들거리며 걸어오더니 교태를 부렸다.
"그저 공자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여기 있는 모든 것, 심지어 내 몸까지 공자님의 것이 될
거예요."
"집법사자께선 정말 이 양과에게 정이 있습니까?"
양과는 정말 마음이 흔들리는듯 물었다.
"미녀는 영웅을 따른다는 말이 있잖아요? 우리 둘은 재질이나 무공이나 서로 비슷하거든요.
천하에 우리 둘을 따를 사람은 없을 거예요. 우리 둘이 부부만 된다면 꼭 큰 위업을 이룩할
거예요. 우린 천생연분이지요."
양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소. 먼저 충심환 독부터 해독해 주시오."
"당신의 정을 내가 완전히 믿게 될 때까지 기다리세요. 그 때면 내가 당연히 해독해 드리겠
어요."
집법사자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양과도 허허 웃었다.
"집법사자는 어떤 사나이들도 매혹될 불가항력적인 미모를 갖고 있는데 나 같은 사람이야
더 말할 게 있소?"
그러면서 집법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집법사자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양과의 손은 집법사자의 가슴 앞으로 가까이 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팍하고 양과는 장을 내
쳤다. 아주 가깝기에 명중은 틀림없다고 양과는 믿었다. 그러나 집법사자가 그 순간 몸을 뒤
로 날리며 그 장을 그렇게도 용하게 피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집법사자는 양과를 노려보았다.
"정말 독하네요."
"한 장에 쳐 죽이지 못한 게 한이다."
"내가 미리 방비가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큰 봉변을 당할 뻔했군요. 양과
공자님, 충심환은 매년 한번씩 발작한다는 걸 아시죠? 그 고통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이죠. 만
약 해독 약을 먹지 못한다면 온 몸이 썩어 죽어버리죠, 두렵잖아요?"
양과는 그 말에 앙천대소를 했다.
"양모는 사경을 벌써 몇 번이나 건너 왔는지 모르는 사람이오. 그런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
겠소? 이 양과는 사파 요녀의 협박에 손을 들 사람이 아니오."
그러자 집법사자는 이를 갈았다.
"정말 미련한 사람이네. 좋아요. 다시 한번 묻겠어요. 투항하겠어요 안하겠어요?"
양과는 검을 뽑아들었다.
"내가 투항하려고 해도 이 검이 말을 듣지 않소."
"좋아요, 해보려면 해보죠."
집법사자는 양과를 매섭게 노려보더니 쌍익검을 들고 뒤로 물러갔다. 그러다가 바람벽을 두
발로 콱 디디며 양과에게 수평으로 날아오면서 쌍익검을 휘둘렀다. 본래 얇아서 잘 보이지
않는 쌍익검인 데다가 이렇게 휘두르니 더욱 보이지 않았다.
한 장 밖에서부터 양과는 그 검의 매서운 검기를 섬뜩하게 느꼈다. 철검보 사대검객 중의
하나인 유여홍의 장홍일검이 불가항력이라고 하지만 집법사자의 검술은 따르지 못할 것이
다. 검이 아직 가까이 오지 않았는데도 양과는 그 서릿발 같은 검기에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는 얼른 옆으로 날아갔다. 두 장 거리는 족히 날았다. 그런데도 옷자락이 두군데나 쭉 베
어졌다.
양과를 베지 못한 집법사자는 얼른 검을 멈추었다. 강력한 검기는 그 순간 주위에 있는 의
자 여러 개를 박살내 버렸다.
양과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 자기의 무공이 전부 회복된다 해도 집법사자를 이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경호병 하나가 허둥지둥 뛰어들어와 숨넘어가는
소리로 보고했다.
"아씨, 큰일났어요. 악, 악귀도 남해신니가 전함 세 척을 몰고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요!"
꽝 꽝 쏘아대는 포 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왔다. 남해신니의 전함에서 쏘는 포 소리이리라.
"항구를 지키기만 하고 내 명이 없인 출격하지 말라고 가서 전하라."
집법사자가 명했다. 그 경호병은 명을 받고 나는 듯이 달려나갔다.
양과는 내심 크게 기뻤다.
'나와 같이 내외협공으로 신선도 오독방 총부를 없애버리자는 것이겠지.'
이렇게 생각한 양과는 집법사자를 보며 냉소했다.
"이 빈 섬으로 어떻게 남해신니의 대포를 막겠는가? 오독방도 모용세가와 같은 종말을 면치
못하리라."
집법사자는 코웃음을 쳤다.
"그 잘난 배 세 척으로 신선도를 어쩌겠다고? 우리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여요?"
"저 밖에서 나는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어봐. 오독방 제자가 남해신니 제자들 열 배가 된들
무슨 소용 있겠소? 군심이 저렇게 동요되고 사기가 저렇게 떨어졌는데 이길 수가 있겠나?
도리어 화액을 면치 못할 것이오."
집법사자도 속으로 그것이 우려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색을 하지 않고 차갑게 말
했다.
"설사 그렇다 한들 당신은 그것을 볼 수 없어요."
집법사자는 그러면서 쌍익검을 휘둘러 다시 양과를 찌르려고 했다.
양과는 집법사자를 막아내기 힘들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막을 생각도 하지 않고 달아났다.
집법사자가 바싹 추격했다.
양과는 종남산 고묘에서 부단히 수련한 경공으로 대청 복판을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기도 하
고 돌기둥을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 집법사자는 쌍익검을 휘둘러 양과를 벌써 몇 번이나 찍
고 찌르고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매번 성공하지 못했다. 양과의 몸이 얼마나 날쌘지 쌍익검
은 허공을 찍지 않으면 돌기둥을 내려치곤 했다. 돌기둥에선 불꽃이 튀었다.
이때 문밖이 크게 소란스러워졌다. 병장기들이 맞부딪치는 소리에 경호병들의 아우성 소리
가 섞여 들려왔고 누가 죽는지 비명 소리도 들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해신니와 무채접이 대청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양과가 예측한 바대로 양과가 악귀도를 떠나자 남해신니는 즉시 제자들을 총동원해 배를 몰
고 나왔던 것이다. 무채접도 양과가 걱정돼 남해신니에게 빌다시피 해서 배에 올랐다. 오독
방 교화사자인 무채접이 같이 가면 남해신니의 이번 일에 도움이 되면 됐지 손해는 없을 것
이라고 남해신니는 생각하고 응낙했던 것이다. 남해신니와 무채접은 작은 배를 타고 먼저
신선도에 이르렀다. 이 때 날은 이미 훤히 밝아 있었으나 무채접이 오독방의 교화사자이기
에 연도에 있는 보초들은 허리를 굽신거리며 통과시켜주었다 그들은 이렇게 방주부 앞까지
순조롭게 왔는데 방주부 문앞에 와서 막혔다.
대노한 남해신니는 경호병 둘을 검으로 베어버리고 방주부 안으로 뛰어들어왔던 것이다.
양과와 집법사자가 만나 좋아하기는 커녕 크게 싸우고 있음을 본 무채접은 의아해 하며 물
었다.
"언니, 언니는 왜 양과 공자님을 죽이려고 하죠?"
집법사자는 그 말엔 대답없이 무채접을 쏘아보며 물었다.
"네가 남해신니 길잡이 짓을 했지?"
"난 언니네 부부가 만나……."
무채접은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 얼버무렸다.
"저 여자는 소룡녀가 아니오!"
양과가 외쳤다.
"소룡녀가 아니라니요? 언니가 틀림없이 소룡녀라고 당신이 말했잖아요?"
무채접이 눈을 깜빡거렸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 여자는 소룡녀로 가장했을 뿐이오. 가짜 소룡녀란 말이오. 날 유혹해서 오독방에 가입시
키려고 그랬던 것이오."
무채접은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언니가 소룡녀가 아니라면 둘은 자연 원수간이 된다는 것이 놀랍게 생각되었고 진짜 소룡녀
가 나타나기 전까지 자기가 양과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겠다는 것이 기뻤다. 사랑에 빠진
그녀는 지금 자기의 난처한 처지, 즉 사랑하는 양과와 자기의 의부님 그리고 성다른 언니,
이 사이에 처한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는 더 생각하지를 않았다. 그는 양과 곁으로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
"언니가 소룡녀도 아닌데 여기 있어 뭐하죠? 가요. 어서 가요."
"저 여인이 내게 충심환을 속여서 먹게 했소! 내가 어떻게 그냥 떠날 수 있겠소?"
양과의 말에 놀란 무채접은 집법사자를 보고 꾸짖듯 말했다.
"언니, 언니 이게 무슨 짓이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양과가 인골염주를 빼앗아갔어도 난 추궁을 하지 않았다. 그만 하면 나도 관용을 베푼 셈
이야. 난 양과를 우리 오독방에 가입시키려고 했는데 어디 말을 들어져야지. 하는 수 없이
그런 방법을 썼어."
무채접은 집법사자의 말에 안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그럼 난 의부님을 찾아가 해독약을 달라겠어요."
그러자 집법사자가 냉소를 했다. 그러나 막지는 않았다. 그런데 안쪽의 문에서 추하게 생긴
여인 둘이 장검을 들고 나오며 무채접을 막았다.
"물러서지 못해. 난 의부님을 만나야겠다."
무채접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아씨 허락 없이는 누구도 안으로 못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교화사자님께서 양해하세요."
한 추녀가 쌀쌀하게 말했다.
"난 방주님 의녀다. 몰라?"
"죄송합니다만 그래도 안됩니다."
무채접은 화가 나서 아미자 한 쌍을 뽑아들었다.
"안 비킬래? 이 아미자에 죽고 싶어?"
그러자 두 추녀도 장검을 빼들며 싸울 태세를 취했다.
자기 힘으로는 두 여인을 감당키 어려움을 안 무채접은 뒤로 물러나 집법사자 곁으로 가서
애걸했다.
"언니, 해독약을 날 줘요. 그러면 우린 다시는 오독방 일에 상관치 않고 머나먼 곳으로 가버
릴게요."
그러나 집법사자의 태도는 쌀쌀했다.
"그러면 방주님께서 얼마나 실망하시겠니?"
"언니, 의부님께선 언니 말을 제일 잘 듣잖아요? 언니만 응낙하면 의부님도 다른 말씀은 없
을거예요. 언니, 제발 좀……."
그러나 집법사자는 오히려 화를 냈다.
"그런 말은 다시는 하지마. 양과는 오독방에 가입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어. 있다면 죽음
의 길뿐이야."
그러자 양과가 무채접에게 소리쳤다.
"여보, 그런 사정 말고 이리 오시오. 이 양과는 죽을지언정 저런 요녀에게는 굴복하지 않을
것이오."
"뭐 요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담? 이런 사람은 가만 놔둘 수 없다."
대노한 집법사자는 몸을 솟구쳐 날아오며 허공에서 양과에게 쌍익검을 마구 내리찍었다. 양
과는 황급히 돌기둥을 안고 돌며 요리조리 피했다.
그런데 남해신니가 날아와 집법사자 앞을 막았다.
"그래 네가 요녀가 아니란 말이냐? 난 너 같은 걸 구해준 일이 후회막심이다."
집법사자는 조금 기가 꺾여 몇 걸음 물러섰다.
"나와 양과가 싸우는데 사태님께선 왜 이러세요? 사태님은 상관치 마시고 가만 계세요."
"가만 있어? 내가 왜 가만 있어?"
남해신니는 그러면서 장검을 생하고 휘둘렀다. 날카로운 칼바람 소리가 순식간에 온 대청만
을 뒤흔들었다.
집법사자는 양과를 쏘아보며 말했다.
"나는 양과의 동생 양효비를 유인해 오독방에 가입시켜 그런 비참한 종말을 맞게 했고 또
소룡녀로 가장해 양과에게 충심환을 먹였죠. 어때요? 복수할 생각이야 있겠죠?"
양과는 어금니를 갈았다.
"단칼에 너를 죽이지 못하는 것이 한이다."
"좋아요, 사내다운 소리군요. 그럼 우리 둘이 단독으로 싸워볼 까요? 그럴 용기가 있어요?"
"내가 너 따위를 겁낼줄 아느냐?"
노기가 충천한 양과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양과는 돌기둥 뒤에서 나와 집법사자를 검으로 내찔렀다. 둘은 어우러져 싸우기 시작했다.
격노한 양과는 초식도 독한 초식을 썼지만 그 위력도 절륜했다. 그는 열 합도 안돼서 집법
사자를 수세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열 합이 지난 다음 양과는 힘이 빠졌다. 집법사자가 오히
려 우세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집법사자가 왼손에 든 쌍익검을 돌연 양과에게 내던졌다. 쌍익검은 눈이 부셔서
찌푸린 양과의 두 눈을 향해 곧장 날아왔다. 양과는 검을 날려 그 쌍익검을 내쳤다. 그런데
그 순간 집법사자의 오른손에 쥐었던 다른 쌍익검이 양과의 왼가슴을 찔러왔다. 검을 돌려
막을 사이가 없었다. 순식간에 양과는 오른팔 소매에 내력을 넣어 집법사자를 후려쳤다. 양
패구상의 초식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찔러들어온 것이 집법사자의 쌍익검이었다. 그러
니 집법사자는 양과를 찌르면서도 피할 수 있었다. 설사 피하지 못하고 양과의 팔소매에 맞
는다고 해도 집법사자의 무공이 특출하기에 생명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이었다. 바로 이
위기일발의 순간에 무채접이 양과 앞을 번개같이 막았다.
"내 낭군을 다치지 마라."
날카로운 쌍익검이 그녀의 가슴을 관통했다. 양과의 오른팔 옷소매도 돌아오면서 무채접을
쳤다. 양과는 그 옷소매의 내력을 미처 어쩔 사이가 없었던 것이다.
무림고수 둘의 강한 협격을 동시에 당하게 된 무채접은 검에 찔리고 옷소매에 맞아 대번에
피를 토하며 비틀거렸다.
대경실색한 양과가 무채접을 부둥켜안으며 목메인 소리로 부르짖었다.
"여보 여보! 당신이 왜."
무채접은 겨우 눈을 떴다. 피가 흐르는 입가에 가까스로 웃음을 띠며 끊어질듯한 소리를 이
었다.
"낭, 낭군님. 소룡녀를 찾……찾으세요. 내세에는 꼭 나와 꼭 나와……."
말을 채 있지 못하고 그만 숨이 끊어져버렸다.
그토록 사랑스럽던 무채접은 이렇게 가버렸다.
양과는 대성통곡을 했다.
"아니, 난 지금 그대와 결혼하겠소. 좀 있다 가오. 나와 같이 가오."
집법사자도 뜻밖이었다. 무채접을 죽이려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양과를 내찌르던 검에 그
렇게 된 것이었다. 집법사자도 눈물이 글썽해졌다. 그는 양과에게 악다구니를 했다.
"모두 양과 너 때문이다. 무채접은 너 때문에 죽었다. 내 이 원수를 꼭 갚아주고 말리라."
양과는 핏발이 선 눈으로 집법사자를 쏘아보았다.
"뭐가 어째? 네년을 죽이지 못하면 내 성을 갈겠다."
그런데 남해신니가 양과를 말렸다.
"가만, 임자는 안되네. 내가 저년을 해치우지."
"사태님은 날 살려주더니 이젠 후회된단 말이지요. 그러나 사태님도 이젠 나를 어쩌지 못할
건데요."
양과는 비통함에 오히려 침착해졌다. 그는 완안방방이 자기에게 채설주 해독약을 주던 일이
갑자기 생각났다.
완안방방의 말은 해독약을 먹기 전에 반드시 백일 동안 조용히 수련해야 약효가 난다고 했
지만 지금 이 급한 경황에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쨌든 먹고 보자.
이렇게 생각한 양과는 그 해독약을 꺼내 얼른 삼켰다.
그런데 뜻밖에 채설주 독이 신속히 빠져버리는 감이 들었다.
그제서야 양과는 백일 동안 조용히 수련한 뒤에야 약효가 난다던 완안방방의 말은 순전히
자기를 놀리려고 속인 말임을 알게 되었다.
양과는 이젠 자신만만해졌다. 그는 먼저 남해신니에게 외쳤다.
"사태님, 이 후배와 집법사자 간의 일은 이 후배 스스로 해결 하겠습니다. 사태님, 잠깐 기
다려주십시오"
"여보게, 생사에 관계되는 일이니 조심하게."
양과는 크게 웃었다.
"사태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난 저년의 약점을 이미 간파했습니다. 세 합을 못 넘겨 내가
저년을 요절낼테니 어디 보십시오."
남해신니는 양과의 말을 반신반의했다. '집법사자의 무공은 나 보다 좀 못하지만 그래도 조
심하는데 양과가 이런 호언장담을 하다니?' 남해신니는 일단 양과가 위급해지면 달려들어
구해줄 준비를 하면서 한쪽으로 물러났다.
집법사자 앞에 성큼 다가선 양과는 장검을 비껴들며 말했다.
"난 세 합 안에 네 목숨을 거두어 버리겠다. 자, 시작하자."
"큰소리 치는군. 칼 받아라."
집법사자는 쌍익검으로 호를 그리며 양과를 후려쳐 왔다. 양과는 검을 휘둘러 쌍익검을 막
았다. 그런데 쌍익검의 힘이 얼마나 센지 막기는 막았으나 그 충격에 양과는 넘어질 듯 비
틀거렸다.
"그 잘난 재간으로 죽지 못해 호언장담이냐?"
집법사자는 코웃음을 치며 이번에는 쌍익검을 위와 아래로 쓰며 양과를 향해 찔러왔다. 그
녀는 전신의 내력을 다 내어 단번에 양과를 요절내려고 했다.
그녀는 양과의 재간으로는 이번 쌍익검의 공격을 피할 수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다.
주위에 몸을 숨길 돌기둥도 없으니 양과는 내력으로 쌍익검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무공이 자기보다 못한 양과가 어떻게 막겠는가? 죽지 않아도 그 충격에 반드시 증상을 입으
리라.
그런데 양과는 피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검으로 쌍익검을 막아 내치려는 동작을 했다. 집법
사자는 제대로 된다고 기뻐했다. 그런데 집법사자의 쌍익검이 채 닿기도 전에 양과는 뜻밖
에 번개같 이 몸을 날려 한쪽으로 피해버렸다. 그 바람에 집법사자의 쌍익검은 허공을 찌르
게 되었다. 양과의 경공이 그렇듯 전광석화 같을 줄 몰랐던 집법사자의 놀라움은 보통이 아
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양과는 어느새 집법사자의 뒤로 날아와 역벽화산(力雲華山)의 초식으로 검
을 내리쳤다. 높은 파도가 부서지는 듯한 무서운 소리가 났다.
집법사자는 미처 피할 새가 없었다. 그녀는 급히 쌍익검을 들어 양과의 검을 막았다. 그러나
지금의 양과는 방금 전의 양과가 아니었다. 채설주 독이 완전 해독되어 무공이 모두 회복된
양과 였다. 그는 전신의 내력을 제대로 쓰고 있었다. 그러기에 이 순간 양과의 장검은 경천
동지의 힘을 갖고 있어서 천하에 막을 자가 없었다.
집법사자의 쌍익검은 도리어 튕겨나고 양과의 장검은 집법사자의 잔등을 세차게 내리 찍어
갔다.
그래도 요행이랄까, 그 황급한 속에서도 집법사자는 앞으로 조금 뛰쳐나갔기에 죽지는 않았
다. 그렇지 않았으면 양과의 장검에 온 몸이 머리에서부터 발까지 두쪽으로 갈라져 버렸을
것이다.
중상을 입은 집법사자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양과는 냉큼 뛰어 한 발로 집법사자를 짓밟으며 위엄있게 소리쳤다.
"이 마녀야, 이제는 네가 어쩔테냐?"
그리고는 장검으로 그녀의 목을 겨누었다. 집법사자는 아픔을 참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
다.
"세, 세 합만에 죽인다고 하고선 두 합째 죽이다니. 이런 거짓 말……."
양과는 앙찬대소를 했다.
"싸움에선 적을 기만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잖아? 네가 세 합째는 정신을 바짝차
릴 줄 알고 난 두 합째 전력을 다 했다."
집법사자는 자지러지게 기침을 했다. 입가로 뻘건 피가 흘러내렸다.
"그렇지. 너에게 그런 고명한 무공이 있을 수 없지. 난 무공이 모자라서 진 건 아니다."
"무공이 모자라 진 것이 아니라구? 어쨌든 넌 내게 졌다. 넌 한스러울 테지만 죽어야 한다."
양과는 장검으로 집법사자의 목을 찔러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남해신니가 양과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가만, 내 좀 물어 볼게 있네."
양과가 검을 거두자 남해신니는 괴로움에 시달리는 집법사자를 보며 탄식을 했다.
"여노악 그 늙은 것은 지금 어디 있느냐?"
집법사자는 남해신니의 물음에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부부간의 정을 못잊어 그러세요?"
"개떡 같은 소리 말아. 난 천하를 위해 그 악당을 없애 버리려고 그런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사태님은 그 사람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겁니다."
"뭣이라고?"
남해신니의 놀란 음성이었다. 집법사자는 피를 토하더니 처참하게 웃었다.
"그 사람이 죽은 지 벌써 여러해 째예요."
그 말에 남해신니도 양과도 크게 놀랐다.
"내가 오독방에 가입한 그 이듬해에 죽었죠."
남해신니는 몸이 떨렸다. 서운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착잡한 심정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여노악과 몇 년을 같이 살았으니 그 정이 얼마간은 남아 있었다. 그러기에 서운했다. 그러나
한편 그런 악당이 없어졌으니 지하에 있는 사부님께서도 기뻐하시겠고 자기로 말하면 몇 년
이나 바라오던 소원이 달성된 셈이라고 생각 하니 기쁘기도 했다.
"그렇게 일찍 죽었는데 왜 장례를 치르지 않았지?"
"방주가 죽은 걸 아는 사람은 겨우 다섯 사람도 못돼요, 채접도 모르고 있었을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지?"
"방주의 죽음을 수하들이 몰라야 내가 그냥 방주의 이름으로 수하를 호령할 수 있을 게 아
닌가요?"
그러면서 집법사자는 대청 뒤 검은 휘장에 가려 있는 호랑이 가죽을 덮은 의자를 가리켰다.
"요 몇 년 동안 저 방주의 보좌에 앉아 있던 것은 사실 바람에 바짝 마른 여노악의 강시였
어요. 호호호, 그런데도 제자들은 누구도 그런 줄을 몰랐거든요."
그리고 집법사자는 또 웃으려다가 등아 입은 상처 때문에 기침을 자지러지게 했다.
남해신니와 양과는 놀란 눈길로 서로 쳐다보았다.
음험하고도 간악한 마녀로구나.
남해신니는 탄식을 했다.
"너 같은 음흉한 년을 내가 왜 그때 구해 뒀는지 모르겠다."
"아니에요. 사태님이 구해준 그 때는 나도 의협심이 많은 정직 한 여자였어요."
중상을 입어 내기가 문란해진 그녀는 자기의 심정을 공제할 수가 없었다. 지난날을 생각하
자 그녀는 몹시 우울해졌다.
"사태님, 내가 누군지 아세요?"
그녀가 물었다.
"너를 구한 다음 난 사람을 사방에 보내 네 내력을 조사했지만 지금까지 끝내 조사를 못하
고 있다."
"남천대협님을 아시죠? 남천대협님 집안 식구 스물여덟 명이 여노악의 손에 모조리 죽었으
니 사태님이 조사를 하면 어떻게 조사를 하겠어요."
"그렇다면 넌 남천대협과 어떤 사이지?"
남해신니가 다그쳐 물었다.
집법사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목메인 소리로 말했다.
"남천대협은 내 아버님이십니다."
"뭣이라고? 그럼, 그럼 넌 그때 죽지 않았단 말이냐?"
"여노악이 우리집 식구를 도륙할 때 나는 어머니가 몸을 덮쳐 줘 겨우 살아났어요. 나는 사
방으로 다니며 스승을 모시고 무예를 배웠지요, 일심으로 그 원수를 갚기 위해서였죠. 난 사
태님과 여노악이 반목해서 갈라졌음을 알고는 사태님과 손을 잡으려고 기회를 엿보며 기다
렸죠. 그런데 정화를 도적질하는 여노악을 막으러 사태님이 왔음을 알았죠. 난 사태님의 신
임을 얻기 위하여 극독을 먹고 자살한 여인처럼 가장하고 길 옆에 쓰러져 있었지요. 그랬더
니 사태님께서 자비심을 베풀어 나를 구해 악귀도로 데리고 왔지요."
그러자 남해신니가 말했다.
"이런 바보 같은 애를 봤나? 하필 그런 고육지계를 쓸게 뭐냐? 그때 나는 오독방을 없애려
고 가는 곳마다 협녀(俠女)들을 모으고 있었는데 그 때 찾아왔으면 내가 안받을리 있나?"
집법사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당시 나는 사태님께서 성격이 괴팍하고 사람들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소문을 들었어
요. 그래서 그런 꾀를 생각해낸 것이죠. 사태님께서 나를 받을 줄 알았으면 내가 왜 그랬겠
어요? 그러면 오늘날 이 지경은 되지 않았을건데."
집법사자는 탄식을 하더니 또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여노악이 사태님께서 절색의 미녀를 데리고 왔다는 소식을 제자들에게서 듣고는 음
성이 솟구쳐 나를 빼앗아가지 않았겠어요. 그날 밤부터 그는 내게 짐승 같은 짓을……."
집법사자는 눈물을 흘리며 이를 갈았다.
남해신니와 양과도 한숨을 쉬었다.
집법사자는 또 말을 이었다.
"난 원수는 못 갚고 오히려 원수에게 모욕을 당하게 되자 죽고 싶었지요. 그러나 내가 바닷
물에 뛰어든다고 해도 이 치욕은 씻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나는 생각을 바꿨어요.
나는 여노악에게 순종하면서 여노악의 환심을 사려고 애를 썼지요. 모든 일이 뜻대로 된다
고 생각한 여노악은 기뻐서 내게 무공을 전수해주고 또 나를 오독방 집법사자로 삼았지요.
난 치욕을 참으며 기회를 기다렸어요. 기회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죠. 내가 신선도에 온 그
이듬해 여노악은 무공을 수련하다가 주화입마되어 하반신을 못 쓰는 병신이 되었지요."
남해신니는 냉소를 했다.
"그래도 싸지. 옳은 길을 안 가고 사악한 길을 걸으며 사악한 무공만 수련하더니 끝내 그
업보로 그렇게 되었구나."
집법사자는 그 말에 흠칫 놀랐다.
"원래 그런 까닭인 걸, 그가 주화입마되어 병신으로 눕게 되자 난 돌연한 기습으로 그의 심
맥을 쳐버렸어요. 그리고는 달아나려고 했는데 문밖에서 채접이의 말소리가 났어요. 나와 여
노악의 관계를 그녀는 다 알고 있었고 우리도 그녀를 기피하지 않았기에 무채접은 늘 의부
집으로 들어와 의부를 만나곤 했거든요. 난 무채점이 들어오면 어쩌랴 싶어 그만 겁이 나서
얼굴이 다 하얗게 질렸죠. 나는 급히 밖으로 나가 무채접을 막으며 방주님이 지금 무공 수
련중이라 외인의 출입을 엄금한다고 하면서 채접이를 돌려보냈지요. 그리고 또 달아나려는
데 청룡분타와 주작분타 제자 들이 중요한 일을 보고하러 왔질 않겠어요? 난 또 거짓말을
했더니 그들은 내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더란 말입니다. 그들을 그렇게 되돌려 보내고 나
자 나는 문득 기발한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도망을 쳐도 오독방의 손에서 벗어나기 어렵
다. 그럴 바에는 아예 여기 남아서 방주의 이름을 빌려 오독방 제자들을 호령함이 더 좋지
않겠는가? 여노악도 무림패주를 할 수 있는데 나라고 왜 못하겠는가? 당시 내 무공은 이미
모든 오독방
제자들을 능가하고 있었고 오독방 내의 대소사를 내가 아주 잘 처리하곤 해서 신망을 얻고
있었거든요. 그런 데다가 나는 나를 의심하는 제자 몇은 죽여 버렸죠. 난 이렇게 점차 오독
방 전체를 통제하게 되었지요. 오독방은 원래 세 개 분타밖에 없었는데 내가 대권을 손아귀
에 넣은 다음 네 개 분타 다섯 개 당으로 확대되었지요. 지략을 봐도 여노악은 내 십분의
일도 못 따르죠."
"그러나 네 종말은 여노악보다 더 비참하구나."
양과가 코웃음쳤다.
집법사자는 양과를 독기어린 눈길로 노려보았다.
"누구 때문인가?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그러지 않았으면 난 벌써 서역신교까지 내 손에 넣
었을 거야. 난 당신을 영웅으로 보고 오독방 전부와 내 이 절색의 몸까지 바치려고 했는데
당신은 목석같이 아주 냉담했지. 사내 대장부가 공명도 미녀도 싫다 하니 무슨 사내 대장부
인가? 당신은 사내가 아니야. 영웅은 더욱 아니고."
이때 밖에선 포성이 멎고 함성이 더욱 요란했다.
남해신니는 빙그레 웃었다.
"포성이 멎은 걸 보니 해부인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신선도로 쳐들어오는가보군."
그러자 집법사자가 반박했다.
"이 섬에는 아직도 오독방 제자 팔백 명이 있는데 신선도를 점령할 수 있을 줄 아세요?"
이 때 문밖에서 병장기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비명소리가 연거푸 들리
고 이어 검을 꼬나든 해부인과 그 제자들 몇이 뛰어들어왔다.
"사태님, 신선도를 되찾았습니다."
해부인이 남해신니에게 인사하며 보고했다.
"허튼소리, 내 제자 팔백 명이……."
집법사자가 또 그런 소리를 했다.
"제자 팔백 명? 그런 오합지졸들은 우리와 싸우지도 않고 태반이 배를 타고 도망갔다. 싸움
다운 싸움도 없었어."
집법사자는 눈을 부릅떴다. 이젠 절망밖에 남지 않은 것이었다.
양과는 검끝을 집법사자의 인후에 갖다댔다.
"또 무슨 할 말이 있느냐?"
집법사자는 피를 또 한번 토하고 처참하게 웃었다.
"솔직히 말해봐요. 아까 그런 기만술을 쓰지 않고 나를 이길 수 있었나요?"
양과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기기는 하겠지."
집법사자는 이번에는 남해신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사태님의 지략이 여노악보다는 낫지만 나를 이길 수 있다고 봅니까? 나처럼 오독방의 세력
을 천하에 확대시킬 수 있어요?"
남해신니도 솔직히 대답했다.
"임자보다야 못하겠지."
"이젠 그딴 말하지."
양과의 말에 집법사자는 크게 웃었다.
"날 죽이겠다는 거예요? 난 종래로 남을 굴복시키면 굴복시켰지 남의 손에 굴복하지는 않는
사람이에요."
그리고서 집법사자는 남은 내력을 다 써서 자기의 심맥을 스스로 끊어 버렸다.
양과는 무채접의 시신을 신선도 어느 기이한 산봉우리의 남쪽 기슭에다 묻었다. 주위엔 산
꽃이 현란하게 만개해 있었다. 양과는 무채접의 무덤 앞에다 망처 무채접지묘 부 양과 립
(亡妻巫彩 蝶之墓 夫楊過立)'이란 글자를 새긴 돌비석을 세워주었다. 그리고는 양과는 대성
통곡을 했다.
묘는 남쪽을 향해 앉았는데 양과는 서북쪽을 바라보고 길을 떠나야 했다.
눈물이 비오듯 했다.
"여보, 내세에는 나를 꼭 기억할지, 나 양과를 따라다니며 고생만 실컷 하고……."
신선도는 다시 남해신니의 손에 들어왔다.
양과는 그 이튿날 배를 타고 북쪽으로 떠났다. 충심환의 독을 해독하는 해독약을 각 파 장
문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서였다.
양과를 전송하러 많은 사람들이 나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해고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양과가 떠나는 것을 보고 울음을 참지 못해 많은 사람들 앞에 울음을 터뜨릴까봐 저어해서
못 나오는걸까? 남 모르게 어디서 우는걸까? 아니면 어디서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일까?
양과의 배는 이틀이나 걸려서 뭍에 이르렀다. 배에서 내린 양과는 가흥으로 곧장 가서 객점
에서 하룻밤 묵고 그 이튿날 지전과 향 그리고 초를 사서 부모님에게 제사를 지내러 철창묘
뒤로 갔다.
그런데 부모님의 묘 앞에 웬 젊은 여인이 소복을 입고 향불을 피우며 지전을 사르고 있질
않겠는가? 양과는 이상해서 다가가 읍을 하며 물었다.
"분묘를 잘못 보신게 아닙니까?"
그러다가 양과는 자기를 돌아보는 여인의 얼굴을 보고 크게 놀랐다.
"아니 오소저, 오소저께서 어떻게……."
오군영은 울어 벌겋게 된 두 눈에 약간 웃음을 띠며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아주버님."
"오소저께선 어떻게 여길……."
오군영은 새로운 봉분을 가리켰다.
"낭군님을 여기에 모셨어요."
봉분 앞에 세운 새로운 비석이 양과의 눈에 보였다.
'망부 양효비지묘 처 양오씨군영 림(亡夫楊曉非之墓 妻楊吳氏 君瑛立)'
비석에 쓰인 글자였다.
"언, 언제 내 아우와 결혼을 하셨소?"
양과가 물었다.
오군영은 눈물이 글썽해졌다.
"5년 전에 우린 부부가 됐잖아요? 아주버님은 잊었어요?"
"그러나, 그러나 결혼은 여지껏 안한 듯한데……."
"우리가 결혼한 건 오직 우리 둘만 알지요. 난 이미 그이의 혈육을 임신한 몸이에요."
자기의 배를 쓰다듬어 보는 그녀의 얼굴엔 행복의 빛이 넘쳐 흘렀다.
양과는 남 모르게 탄식을 했다.
'아우, 넌 이 여자를 해쳤어. 아우는 풍류로 이 여자의 미모 때문에 그런 짓을 했을 뿐이지
진정으로 사랑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러나 이 여인은 그것도 모르고 진정으로 아우 너를 사
랑했고 지금도 그것을 행복하게 여기고 있으니 어찌보면 이 여인이 불쌍하기도 하구나.'
그러나 양과는 말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둘은 묵묵히 지전만 태웠다. 그러다가
그들은 작별을 했다.
"오소저, 아니 제수씨. 어디로 가시려오?"
양과가 홀연 그녀를 불러세웠다.
"아버님은 돌아가셨지만 오빠가 아직 계세요."
"거와장은 위험한 곳이 되었소이다. 부디 조심하시오."
"고마워요 아주버님. 그런줄 우리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미 심산유곡으로 이사 가
세상을 등지고 살 생각을 했어요."
양과는 좀 안심이 되었다.
"제수씨 몸엔 우리 양씨의 후대가 있으니 만약 제수씨께서 꺼리시지 않는다면 앞으로 그 애
를 나에게 맡겨주십시오. 내가 가지고 있는 무공을 모두 그 애에게 전수해 주겠습니다. 아우
하나 있는걸 옳은 길로 인도하지 못한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입니다.
오군영은 미소를 지었다.
"당세 대협객이신 아주버님께서 그러시겠다면 저야 더 고마울 데가 있겠습니까? 아이를 대
신해 감사드려요."
오군영은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그들 둘은 또 몇마디 더 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헤어졌다.
멀어져 가는 오군영의 나약한 모습을 바라보는 양과는 슬픈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아! 우리 양씨는 왜 이렇게도 불행하단 말인가? 내 어머니와 효비의 어머니 모두가 과부로
아들들을 키우더니 제수씨도 유복자를 과부 몸으로 키우게 되다니……."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가벼운 발짝소리가 들려왔다. 양과는 뒤를 돌아보지 알았지만 진기를
몰아 온 몸을 방비했다.
발걸음소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마치 두 손이 자기의 목을 조르려 오는 것 같았다. 양과는
신속히 몸을 낮추며 옆으로 피했다. 그러면서 재빨리 그 사람의 뒷덜미를 눌렀다. 그 사람은
비명을 질렀다. 여인의 목소리였다. 예쁜 소녀였다.
양과는 자기 눈을 의심하듯 끔벅거렸다.
"아니 해고 아냐? 해고가 어떻게 여길……."
"손부터 놔요. 아파 죽겠어."
해고는 째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양과는 그녀의 뒷덜미를 누른 손을 급히 떼었다.
해고는 깔깔 웃었다.
"맞혀 봐요. 내가 어떻게 여지까지 왔는지?"
"모르겠는걸."
양과는 고개를 저었다.
해고는 새침해져 눈을 흘겼다.
"그것도 몰라요. 난 줄곧 배에 숨어 따라왔어요."
'글쎄 누가 꼭 따라오는 것 같아 배 안을 살펴보기는 했는데 이제보니 해고였구나.'
양과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몰래 왔으니 지금 신선도에선 너를 찾느라 야단났겠다. 사태님과 해부인께선 얼마
나 걱정하실까? 어서 돌아가. 내가 데려다주마."
그러자 해고는 뒤로 피했다.
"돌아갈 것 같으면 내가 왜 따라왔겠어요."
양과는 미간을 찌푸렸다.
"뭣 때문에 날 따라왔지? 내가 널 데리고 노닐 짬이 어디 있게."
"소룡녀를 아직 못 찾았잖아요?"
해고의 물음에 양과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채접도 저 세상으로 갔잖아요?"
그 말에 양과는 한숨을 쉬었다.
해고는 방긋 웃었다.
"세상에 이름이 크게 난 분이 곁에 미녀가 없으면 어떻게 해요?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요?"
그러더니 그녀는 갑자기 얼굴이 빨개져 허리를 꼬며 말했다.
"사태님과 어머님께선 모두 내가 이쁘게 생겼다는데 어때요? 내가 내가 예뻐요? 미녀예요?"
그리고는 정이 담뿍 담긴 눈길로 양과를 쳐다보았다.
양과는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허, 허지만 넌, 넌 아직 어린애가 아니냐?"
해고는 그 말에 보란듯이 젖가슴을 내밀며 얼굴이 빨개 부르짖다시피 말했다.
"봐요, 난 다 컸어요! 눈으로 보면 몰라요. 난 다 큰 처녀예요!"
발육하기 시작하는 소녀의 예쁜 몸매를 보며 양과는 피식하고 웃고 말았다.
-大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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