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외전 1

3학년2반 | 2022.02.27 07:50:45 댓글: 0 조회: 1080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1455

완 결 / 의 천 도 룡 기
제 1 장 : 떠나버린 사랑아
空山新雨后,天气晚来秋。
明月松间照,清泉石上流。
竹喧归浣女,莲动下渔舟。
随意春芳歇,王孙自可留。

<산거추명(山居秋暝)>은 당(案)이 한창 흥하던 시기의 유명한 작
품이다. 이 작품의 작자는 성이 왕(?)이며 이름은 유(维)이고 자
(字)는 마힐(摩诘)이다. 그 시인은 음률에 정통하였고 서화에도 출
중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깊고 넓은 학식을 논하자면 비록 절후
(绝后)라고 말할 수는 없더라도, 공전(空前)이라고는 할 수 있었다.

<동파지림(东坡志林)>에는 그를 이렇게 평하고 있다.

"마힐의 시를 음미하노라면 시 속에서 그림이 보이며, 마힐의
그림을 보노라면 그림 속에서 시를 음미 할 수 있다."

이는 왕마힐의 시와 그림이 얼마나 정교하고 오묘한가를 정확하게
표현해 주는 것이며, 소동파(輪?惰) 같은 대가(暗?)만이 이 작품
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몽고가 중원을 차지한 지 어언 100년이 넘어 한(洞)나라 문화와의
교류가 자연스럽게 깊어질 즈음 조민(??) 역시 비록 여양왕부(?
暫?繞) 출신이었지만 한나라 문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지금 그
녀의 눈앞에 펼쳐진 정경은 마치 마힐의 시음(益趙)을 그대로 새겨
놓은 듯했다.


외로운 산에 이른 봄비가 내리니,
가을의 서늘함을 느끼게 하는구나.
소나무 사이로 밝은 달빛 비추어 들고,
바위 위로 졸졸 흐르는 맑은 샘물소리 들리네.
빨래 끝낸 소녀들이 돌아올 때,
죽림 사이로 들려오는 웃음소리와 조잘대는 소리.
작은 배는 조용한 수면을 한가롭게 떠다니고,
가볍고 부드럽게 연꽃을 흔드는.......

주위의 경치를 바라보던 조민은 마힐의 시를 낮게 읊조리다 마지
막 구절인 '봄 향기에 취한 왕손이 스스로 머무는구나'라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자기도 모르게 뺨이 달아올랐다. 커다란 노송(?飮)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손 닿는 대로 옷자락을 잡아 당기고 있는 모
습에서는 평상시 그녀의 쾌활한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장무기(遵午?)는 손에 도룡보도(艾汝?埃)를 쥐고 조민과는 전혀
다른 심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님의 가르침을 받았
다고는 하나 애석하게도 그 기일이 너무 짧았고, 시문을 배웠어도
학문이 깊지 않아 조민이 느끼는 이런 미묘한 감정을 느낄 수가 없
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경치가 하도 고요하여 장무기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혼란스러운 생각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한줄기 평화가 찾아왔다.

오랜 침묵만큼이나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 달빛은 버드나무 끝에
서 빛나고 나뭇가지의 어지러운 그림자가 달빛을 받아 흐느적거렸
다. 멀리서 은은히 들려오는 매미 울음소리 외에는 사위가 적막에
싸여 있었다. 그때 홀연히 한줄기 밤바람이 스쳐지나가며 상념에
젖어 있던 장무기를 흔들어 깨웠다. 그가 고개를 들어 조민을 쳐다
보니 그녀는 여전이 고개를 숙이고 옷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장무기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자 가슴이 두근거려 왔다. 그는
조민에게 다가가서 무슨 말인가 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소리는 입
밖으로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하고 목구멍에서만 맴돌았다.

지나간 일이 안개처럼 희미하게 머릿속에 피어 올랐다. 녹류장(?
力逡)에서의 최초의 만남, 무당산에서 조민을 위해 세 가지 일을
해주기로 어쩔 수 없이 약속했던 일, 만안사(???)에서 자신이
그녀와 적이 될 것을 밝힌 일, 영사도(這?隘)에서 함께 죽음을 각
오한 일, 자신을 향한 그녀의 깊고도 진실한 사랑을 배반하고 오히
려 수차례나 그녀를 죽이려 했던 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장무기는 견딜 수 없이 황송하고 부끄러
울 뿐이었다. 조민의 부친인 영양왕 찰한특목이(撤統墮靈?)는 조
정의 중신이며 병권을 손 안에 쥐고 있어 그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그러나 조민은 사랑을 위해 가문을 등졌으며, 장무기는
명교(曄?) 교주로서 조정에 반기를 들고 몽고인들을 제거하기로
맹세하지 않았던가?

장무기에 대한 조민의 깊은 정을 그가 어찌 모르겠는가! 조민이
자신의 영화를 초개처럼 버리고 그와 함께 방랑하며 이런 옹색한
심산유곡까지 와서 일생을 가난하게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아
무리 위세당당한 영웅호걸이라지만 지금은 그저 그녀에 대한 애틋
한 정만이 피어오를 뿐이었다.

그는 가만히 소리내어 조민을 불렀다.

"민 누이......"
그의 목소리는 깊은 사랑과 함께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회환이 담겨져 있었다. 이 모든 심정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리
오!

조민의 가녀린 몸이 경미하게 떨렸지만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
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 누이, 집 생각을 하고 있소?"
오랫동안 말이 없는 조민을 보고 장무기가 부드럽게 물었다. 그러
나 장무기의 이 한마디가 잔잔한 조민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말았
다.

조민은 내상을 입은 장무기를 구하기 위해 부친뿐만 아니라 오빠
와도 의절해야만 했다. 그 후로 부친과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라는
생각만 들면 마음이 우울해지고 간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비통함
을 주체할 수 없었다. 부친과 연인, 이들 모두 함께 있을 수 없는
현실은 그녀에게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데 장무기가 집 얘기를 들먹이자 조금 전까지 그녀를 감싸고
있던 감미로움이 일시에 육친에 대한 그리움과 괴로움으로 변하여
코가 시큰거리고 목이 메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무기는 마음 속 깊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머뭇거리다가 나즈막히 말했다.

"민 누이, 나는 어렸을 때 부모를 잃어 그 괴로운 마음을 누구보
다도 잘 알고 있는데 어찌 당신으로 하여금 그와 같은 괴로움을 겪
도록 놔 둘 수 있겠소? 그 일은 기다렸다가......, 내일 함께 대도
(暗?)로 돌아가 부친과 형님을 뵙고 사연을 아뢴 후 다시......
다시...... 하는 게 어떻겠소?"

조민은 더듬거리며 말하는 장무기의 마음에 감동하여 슬픔 속에서
도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일순간에 슬픔과 기쁨이 교차되
어 장무기의 품안으로 와락 뛰어들었다. 장무기는 조민이 어째서
이러는지 알 수 없어 그녀를 품에 안고 그저 멍청히 서 있을 수밖
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자 장무기는 다시 입을 열었다.

"민 누이, 전에 내게 해 달라던 세 가지 중에 두 가지는 실행했소.
당신은 그 마지막 한 가지는 하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반드시 할거
야."

그날 호주성(蔽搾?)에서 장무기가 편지로 교주의 자리를 사임한
후에, 조민은 그에게 세번째 일을 해 달라고 하였다. 당시 그는 그
녀가 또 무슨 괴이한 일을 자신에게 시킬지 몰라 두려워했었다. 그
런데 그 일이 자신의 눈썹을 그려 달라는, 그것도 일생 동안 그려
달라는 것인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장무기는 그것을 기쁘게
승낙했기에 지금 그녀에게 그때의 일을 다짐하고 있었다.

조민은 장무기의 확신에 찬 말을 듣고 마음 속 깊이 연정을 느껴
그의 품속으로 더욱 파고들며 안겼다.

장무기는 일부러 숙연한 척하며 말했다.

"사내 대장부가 어찌 한 번 한 말을 지키지 않을 수 있겠소! 나
는 당신에게 한 약속을 어긴 적이 없는데 민 누이는 어찌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오?"

조민은 그의 품속을 살며시 벗어났다.
"장무기, 당신, 말 똑똑히 해요. 제가 언제 약속을 어겼나요?"
달빛 아래 비친 조민의 얼굴은 아직도 눈물을 머금고 있었으나 표
정은 숙연한 기색이 완연했다. 장무기는 미소를 지었다.

"두번째 일인 주지약(蹉?煮)과 결혼을 못 하게 하고 난 후 나에
게 약속한 일이 있지 않소...... 그 일을 배상해 준다고......."

여기까지 말하던 장무기는 방금 그녀의 부친께 사정을 아뢴 후에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했던 말이 생각나 말을 명확하게 끝맺지 못했
다. 장무기는 고의로 그녀를 화나게 한 것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어 더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조민이 주지약과 장무기의 혼례에 와서 소란을 피운 뒤에 장무기
는 장난으로 조민에게 신방을 배상하라고 했었다. 조민 역시 그가
장난하는 것을 알고 부끄러워 나무라려고 하다가 순간 생각을 바꿨
다. 자신과 장무기가 이런 옹색한 곳을 다니는 것은 산과 물이 맑
고 수려한 곳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주지약을 피하고 강호를 은
퇴해서 살려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대답할 말이 없어 고개를 떨구
었다.

장무기는 미안한 듯 입을 열었다.

"민 누이, 화내지 마. 나......난 고의가 아니었어."

조민이 쌀쌀맞게 되물었다.
"그러면 도데체 뭐예요?"
말투는 강했으나 그 말에는 부끄러움이 배어 있었고 얼굴은 발갛
게 달아 있었다.

밤바람이 불어와 차가운 기운이 점점 짙어졌다. 어둠과 침묵의 색
한 분위기를 가르며 조민은 개미같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기 오빠, 이곳 경치를 좋아해요?"
"좋아해."
장무기는 정신 차리고 조심스럽게 대답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안하여 그저 이렇게 한마디밖에 대답하지 못했고 다시 침묵이 흘
렀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장무기가 조심스럼게 물었다.

"민 누이, 이곳 경치를 좋아해?"
"정말 좋아요!"
장무기는 마음이 흔들렸다.
"나...... 난......"
토라진 듯 등을 '홱'하고 돌리며 조민이 소리쳤다.
"무기 오빠, 오빠는 줄곧 횡설수설하고 있는데 원래는 그런 분이
아니잖아요? 어찌하여 말을 끝맺지 못하나요?"

장무기는 조민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나...... 나......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소."
조민의 두 어깨가 경미하게 떨리는 것으로 보아 몰래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말소리는 단호했다.

"저 조민은 여기에서 살면서 다시는 강호에 갈 생각이 없어요. 무
기 오빠의 뜻은 어떤지 모르겠군요."

"그.....그러면 더 이상 좋은게 없지."

"그러나....."

조민이 망설이며 말꼬리를 흐렸다.

장무기가 답답한 듯 채근하며 물었다.
"왜?"

"바람이 불고 햇볕은 들지만 어쨋든 비가 오면 피할 곳은 있어야
겠지요?"

"맞아, 맞아!"

사람 마음을 스산하게 하는 매미소리만이 침묵의 어색함을 덜어
주고 있었다. 조민은 갑자기 몸을 돌려 장무기를 바라보면서 화를
냈다.

"무기 오빠,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바보라고 하던데 이제보
니 정말 바보로군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몸을 돌려 몇 발짝 뛰
어가다 이끼낀 바위에 앉아 웃는 듯 마는 듯 묘한 표정으로 장무기
를 바라보았다.

장무기는 어리둥절해서 가만히 있다가 문득 깨닫고는 자기 뺨을
찰싹 때렸다.

"무기야, 장무기! 넌 정말 바보스럽기 그지없구나!"
그는 몸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치솟은
고목들이 서 있고 계곡 사이로 흐르는 한 줄기 맑은 물이 먼 곳의
호수로 흘러들고 있었다. 뒤쪽으로도 산이 둘러쳐져 있어 누가 보
아도 명당이었다.

장무기는 마음 속으로 어떤 결정을 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는 도룡도를 들고 바쁘게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민 앞에
한 무더기의 나무들이 쌓였다. 그는 '철컥' 소리를 내며 도룡도를
칼집에 넣었다.

장무기가 팔뚝만한 굵기의 말뚝감 네 개를 가볍게 던지자 '꽈광'
하는 소리가 나면서 네 개의 말뚝은 일 척(?) 남짓 땅에 박혔다.
네 개의 말뚝 위에 다시 네 개를 횡으로 올려놓고 너비 일 척에 두
께 이 촌(寸)의 널판지 대여섯 개를 붙이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놀랍게도 큰 침상이었다. 그 크기는 너덧 명이 함께 굴러도 족하리
만큼 컸다. 장무기의 행동을 지켜보던 조민은 그가 집을 먼저 짓지
않고 침상부터 만드는 것을 보자 내심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다
시 쳐다볼 생각을 못 하였다.

장무기는 침상이 탄탄하고 편안한 것을 확인하고 미소를 띄우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침상 옆에 탁자를 만들고 다시 이 척 높이의 아름
드리 나무 두 토막을 의자 대용으로 놓았다. 방 안의 용구를 배치
한 다음 잠깐 생각에 잠긴 장무기는 갑자기 몸을 날렸다. '탁',
'팍', '꽈당'하는 요란한 소리가 끊이지 않자 놀란 조민은 살며시
고개를 들어 보고 어안이 벙벙해 졌다. 장무기가 나무집의 뼈대를
견고하게 세우려고 두께 삼 촌, 너비 이 척의 널판지를 `팍팍팍'하
고 땅 속에 박으니 벽이 세워졌다. 견고한 널판지였으나 장무기가
가볍게 누르니 삼 척 정도가 땅에 박혔다. 이런 내공을 가진 사람
은 아마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장무기는 나무집 앞에 서서 만족스러운
듯 가볍게 한숨을 돌리더니 몸을 돌려 조민을 향해 걸어왔다. 조민
옆으로 다가선 장무기가 부드럽게 말했다.
"민 누이, 집 다 지었어."
"응!"
"좀 누추하더라도, 민 누이, 싫다고 그러지 말기를......"
"응!"
"밤 기운이 차가우니 민 누이, 일찍..... 일찍 휴식을 취하지. 내
일 또 서둘러서 대도(暗?)로 떠나야 하잖아."

조민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일어나더니 `슉'
하며 쌍도(?埃)를 뽑아 들었다. 그녀가 마치 한 마리의 제비처럼
수풀을 스쳐지나가자 그 자리에는 푸른 풀들이 잘려져 있었고 그
중 반을 안고 나무집으로 들어 갔다. 장무기는 곧 그녀의 심중을
알아차리고는 남은 반을 들고 나무집으로 들어갔다.

장무기가 싱싱한 풀을 조민에게 건네주자 조민은 침상 위에 골고
루 풀을 깔았다. 집 안은 갑자기 풀과 나무의 상큼한 향기로 가득
해 졌다. 두 사람은 어색한 느낌에 어찌할 바를 몰라 서로의 눈길
이 마주쳤으나 재빨리 각자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색함을
이기지 못한 장무기가 살며시 조민의 부드럽고 작은 손을 잡았다.

"민 누이, 많은 친구들을 불러 우리 둘을 축복해 달라고 할 수 없
으니 당신에게 정말 미안하오."

조민은 오른손으로 장무기의 입을 막으며 더이상 말을 못하게 하
였다. 두 사람이 지금 솔직 담백한 마음으로 서로를 응시하고 있는
데 계속해서 말을 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조민은 생각했다.

장무기는 조민의 손을 잡고 문 밖으로 나왔다.

달은 어느새 중천에 떠 있었다.

"하객(跆選)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소. 나 장무기가 남아로 태
어나 어찌 식언을 하리오. 청풍(?憚)이 증거가 되고 명월(曄?)이
증명하리니, 나 장무기가 살아 있는 한 만약 민 누이를 저버리는
일을 한다면......."

달을 보고 맹세하는 장무기의 의미심장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일갈의 괴성이 바람을 가르며 들려왔다.

"잠깐 기다리시오!"

장무기와 조민은 어리둥절하여 주위를 살폈다. 그때, 나무 뒤에서
푸른 옷을 걸친 한 여인이 옷자락을 나부끼며 걸어 나왔다. 그 여
인은 바로 일찍이 장무기와 신방을 차릴 뻔 했던 주지약(蹉?煮)이
었다. 그녀는 허리에 장검을 차고 손에는 큰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 왜 그래요? 환영하지 않는 거예요?"

놀란 장무기가 어찌할 바를 몰라 더듬거렸다.

"지약! 당신...... 당신이 우리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았지?"
주지약은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 두 사람은 너무나 다정스럽고 흥분이 되어 모든 것을 잊어
버리고 있었죠. 내가 줄곧 뒤쫓아왔는데 당신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더군요. 사랑에 빠지면 다른 것은 안 보이게 되나 보죠?"

주지약은 장난하듯 웃었으나 조민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침울한
표정이었다.

"지약, 당신...... 당신은 하필 왜 꼭...... 꼭......."
"꼭, 뭐요? 장 대교주와 조민 군주의 결혼 축하주를 마시려고 왔
는데 그것도 안 되나요?"

주지약은 두 사람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나무집으로 들어가더
니 푸른 풀이 깔려 있는 나무 침상을 보고 탄식을 했다.

"무기, 조민, 당신들 두 사람, 너무 조급하지않아요? 혼인 대사를
어찌 이렇게 경솔하게 치를 수 있나요! 이러는 것은 군주의 고귀한
신분을 욕되게 하는 게 아닌가요?"

화가 난 조민은 벌떡 일어서려다가 장무기가 살며시 손을 잡는 바
람에 다시 주저않아 장무기를 쳐다보았다. 간청하고 있는 장무기의
눈빛을 본 조민은 마음이 약해져 그저 '흥'하고 콧방귀만 뀌고 말
았다.

주지약은 이런 사정을 모르는지 여전히 비웃고 있었다.
"조민, 이 장무기는 사람도 아니에요. 나는 장무기한테 당신이 조
롱당할까봐 특별히 서둘러서 왔어요."

"주지약, 당신은......."
장무기는 자신의 처지가 매우 난처해진 것을 깨닫고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고 말았다.

주지약은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보따리를 풀어 한 쌍의 커다
란 붉은 초를 꺼내어 탁자 위에 놓고 불을 붙였다. 촛불의 불빛을
받고 있는 주지약의 모습은 고상한 난초와 같았고 그녀는 비웃는
듯 마는 듯 묘한 표정으로 침상에 걸터 앉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조민의 아름다운 얼굴은 이미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주지약의 행동을 지켜보던 장무기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당신의 그 성의는 매우 고맙소."
주지약의 수려한 얼굴이 돌연 얼어붙으며 냉랭하게 변했다.
"장무기, 당신이 사내 대장부라면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지겠지요?"
"그건...... 당연히 책임을 지겠소!"
"좋아요! 당신은 제게 한 가지 일을 해준다고 했지요? 몽고인을
제거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고 협의지도(?琮柵?)에 위배되지 않
으면 그 일이 어떤 일이건 해준다고 했었지요?"
"그렇소. 그러나......"
"대장부란 모든 일에 결단성이 있어야지 어찌 그리 망설이고 주저
하나요?"

장무기는 가슴이 두근거려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나보고 무슨 일을 해 달라는 거지?"
주지약의 안색이 홀연 부드러워지더니 조민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고로 신부는 혼례복으로 붉은 옷을 입어야 하는데 조 소저는
어찌하여 노란색 옷을 입었지요? 나는 벌써 장무기, 이 사람이 당
신을 위해 생각 못 했을 것을 예측해서 언니로서 조 소저를 위해
이 옷을 준비해 왔지요."

말을 마친 주지약은 보따리에서 붉은 혼례복 한 벌을 꺼내 좍 펼
쳤다. 촛불 앞에 펼쳐진 붉은 옷은 방 안을 순식간에 붉게 물들게
했다. 주지약이 조민에게 혼례복을 건네주었으나 조민은 눈길조차
주기 않고 있었다. 그러나 주지약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혼례복을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장무기가 어색함을 이기지 못해 어쩔 줄을 몰라하는데 '좍' 소리
를 내며 주지약이 보따리 안에서 붉은 옷을 또 한 벌 꺼내어 펼쳐
놓았다. 그녀는 득의만면하여 조민에게 말했다.

"조씨 누이, 내가 이 옷을 입으면 잘 맞을까?"
조민은 분을 이기지 못해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했고 안색은 창
백해 있었으나 여전히 한 마디도 못 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주지약이 마술을 부리듯 붉은 초에 붉은 옷을 꺼내 놓는
것을 보고 보따리 속에 또 무슨 기괴한 것이 들어 있을지 모르겠다
고 생각했다.

"신랑은 급할 것 없어요. 제가 호주(蔽搾)에 있을 때 당신을 위해
서 장삼을 지어 준 적이 있잖아요? 그래서 당신의 옷 크기는 내가
잘알아요."

그녀는 다시 두 손을 보따리 속에 넣더니 오른손으로는 붉은 장삼
을 꺼냈는데 그것은 당연히 장무기의 것이었고, 왼손으로는 세 송
이 붉은 꽃을 꺼내 들었다.
장무기는 입을 벌리고 더듬거리며 물었다.

"이...... 이..... 이것은 무슨 뜻이오?"

방 안을 비추고 있는 붉은 빛은 주지약의 모습을 더욱 부드럽고
요염한 여인처럼 보이게 해 그 모습은 흡사 맑은 물에 떠 있는 부
용과 같았다. 주지약은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에게 시킬 일이란, 바로 나도 조씨 누이와 같이 이 혼례복을
입고 당신과 혼례를 행하는 거예요."

장무기는 그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호주성에서 모든
친우들을 부르고 명교(曄?)의 위아래 할 것 없이 모두 모이게 한
그날은, 초롱을 매달고 오색 띠를 드리워 장식하여 그야말로 화려
함의 극치를 이루었었다.

장무기와 주지약이 조상에 참배하고 혼례를 선포하려던 순간 조민
이 혼례당에 나타나 장무기가 그녀에게 들어 주기로 약속했던 세가
지 일 중 한 가지를 이행하라고 요구했었다. 그녀가 요구한 일은
주지약과 결혼하지 말라는 것이었고 이 말을 들은 하객들은 떠들썩
했었다. 조민은 이때 주지약의 구음백골조(?遭汪誦?)에 당해 어
깨에 다섯 개의 손가락 자국이 났고 장무기는 결국 조민을 따라 나
섰기에 주지약과는 혼례를 치루지 못했다. 그 후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장무기는 항상 주지약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제시한 이 조건은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나라 때에는 조야(?孜)의 위 아래로 많은 처첩을 거느리는 게
성행하여 일반 백성들도 재력만 좀 있으면 첩을 두지 않는 이가 없
었다. 그러나 장무기는 주지약, 소소(蹂鍮), 은리(肇涅), 이 세 명
의 소녀를 모두 사랑했지만 조민을 선택하려고 마음을 굳게 정한
바라 절대로 옆을 보고 싶지 않았다.

순간, 흥분을 이기지 못한 조민이 몸을 움직여 쌍도로 주지약의
두 눈을 겨냥하며 나아갔다.

"민 누이, 안 돼!"
두 여인은 이미 한 덩어리가 되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진짜 무공 실력을 논한다면 주지약이 조민보다 한 수 위였다. 그
러나 조민은 무림 육대파(俉殮俎暗駝)의 고수들을 만안사에 가두고
약물로 그들의 내공을 쓸 수 없게 한 후, 그들에게 무공을 펴쳐 보
이게 했었다. 그때 옆에서 정교하고 오묘한 초식들을 적잖이 보고
배워서 내력의 부족함을 보충했다.

두 사람의 싸움은 한 시진이 지나도록 결판이 나지 않았다. 가쁘
게 숨을 몰아쉬며 주지약이 말했다.

"조 소저, 이 장가 녀석이 본래 이 언니와 결혼하기로 약조되어
있었어. 그럼에도 나는 아직까지 너한테 화를 내지 않고 있는데 네
가 오히려 이 언니에게 싸움을 걸어?"

조민은 화를 내며 욕을 해댔다.
"당신운 아미파의 장문인으로소 규율을 지키지 않으니 그 죄를 어
찌 감당하려고 하지요? 당신은 사전에 모든 계획을 짜놓고 장 교주
를 속였으면서 어찌 지금에 와서 얼굴을 들고 있을 수 있지요? 부
끄럽지도 않나요?"

두 여인은 치열한 설전을 벌이면서도 손끝으로는 상대방의 생명을
앗으려는 강렬한 초식을 펼치고 있었다. 장무기는 놀라서 살이 떨
려와 조민과 주지약의 빠르고 번개 같은 결투를 어찌할 바를 모르
고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은 장무기가 지닌 일신의 신공(佚
殺)도 아무 소용이 없었고 다만 '민 누이 조심해!', '지약, 조심해!'
하고 번갈아 소리쳐댈 뿐이었다.

주지약은 한창 초식을 전개하면서도 조민이 듣기에 매우 애매모호
한 말을 내뱉었다.

"조씨 누이, 너와 내가 같이 이 양심 없는 사람에게 시집가서 자
매지간처럼 서로를 보살펴주기도 하면서 우리 세 사람이 강호를 같
이 다니면 좋지 않겠어?"

그녀가 '좋지 않겠어?'하는 말이 다 마치기도 전에 장무기가 큰
소리로 외쳤다.

"민 누이, 안 돼!"
장무기는 외침과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 조민의 영태대혈(這恥暗?)
을 짚었다. 조민은 순식간에 몸이 굳어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주지약은 조민을 고의로 격노시켜서 그녀를 교란시키고 있었던 것
이다. 그녀의 초식이 조민보다 월등히 높은 것도 아니었고 또한 조
민의 임기응변에 능한 달변을 쉽게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지약이 미친 듯이 날뛰자 조민은 주지약의 장검을 막으며 왼손
의 단검으로는 상대의 오른쪽 외 부근의 천정대혈을 노렸고, 오른
손의 검으로는 주지약의 복부인 천추혈을 찌르려고 했다. 이 초식
은 상하좌우, 즉 넓이와 높이를 공격하는 것으로 곤륜검법 중의 양
의검법 제 십칠 초식인 '음차양착(遭拓暫川)'이었다. 만안사에서
곤륜파 장문인 하태충(太梔沖)이 모욕을 받을 때 사정이 급하게 되
자 이 초식을 펼쳤었는데 조민이 몰래 보고 배웠던 것이다. 이 초
식은 기묘하여 공격의 선후와 관계없이 막을래야 막을 수 없는 초
식이었다.
주지약은 이 초식의 위력을 모르고 있었다. 조민이 단검으로 찌르
려 하니 더 생각하지 않고 장검을 위로 한 채 외곽으로 치켜들어
조민의 왼쪽 검을 겨누었고 조민은 쌍검을 엇갈리지 않고 돌연 왼
쪽 복부 아래로 기습해 왔다. 주지약이 상황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
미 어쩔 도리가 없었다. 주지약은 번개같이 장검으로 조민을 향해
찔렀다. 이 초식 역시 자신의 목숨을 건 검법으로, 자신의 복부와
천정대혈리 찔리더라도 자신의 장검으로는 상대의 가슴을 찌르는
것이다. 조민과 주지약은 사생결단 목숨을 건 초식을 펼치고 있었
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때 장무기가 조민의 혈도를 짚은 것이다. 조민은
꼼짝하지 못한 채 주지약의 장검이 자신의 가슴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두 눈을 빤히 뜨고도 멍청히 보고 있어야만 했다. 조민은 이
제 모든 상념을 버리고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렸다.

장무기는 눈앞의 형세가 위험한 것을 보고 다시 소리 질렀다.
"지약, 안 돼!"
장무기는 외침과 동시에 오른손에 삼 할의 구양신공(?暫佚殺)을
모아 검신을 향해 장(雋)을 휘둘렀다. 순간 '펑', '삭'하는 폭발음
이 차례로 울리더니 주지약은 땅 위에 힘없이 쓰러졌고 동시에 조
민의 왼쪽 팔에서는 검붉은 피가 솟구쳤다.

장무기는 주지약이 구양신공을 이겨내지 못할까봐 단지 삼 할의
공력만 운기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했음에도 주지약은 견뎌내지
못하고 땅에 쓰러졌다. 그리고 비록 장무기의 장력이 주지약의 장
검을 수 촌 정도 치우쳐 흔들리게 해서 조민의 목숨은 구했으나 검
신이 너무 예리한데다 장력을 받은 힘도 그리 많지 않아 그대로 조
민의 왼쪽 팔을 찔러버렸다.

장무기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조민의 왼쪽 팔의 혈도를 눌러
지혈시키고 동시에 조금 전에 짚었던 혈도를 풀어주었다. 혈도가
풀리자 조민은 손을 휘둘러 장무기의 뺨을 힘차게 한 대 때리고는
뛰어 나갔다. 몇 방울의 선혈이 널판지 위에 떨어졌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조민의 선혈은 그 색깔이 짙고 검붉었다.

장무기는 그녀를 쫓아가려다가 주지약을 돌아보았다. 주지약은 창
백한 안색을 하고 입가엔 한줄기 피를 흘리며 눈물 맺힌 눈으로 무
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무기는 주지약의 상처가 가볍지 않아 보
여 차마 그냥 갈 수 없었다. 장무기는 주지약을 안아 침상 위에 눕
히고 손을 뻗어 맥을 짚어 보았다. 호흡이 불규칙하고 미약하여 급
히 수장을 주지약의 명문대혈 위에 놓고 체내에 자신의 최고 내력
(?淹)을 주입시켰다.

주지약의 얼굴이 갑자기 두려워하는 기색으로 변했다. 장무기는
자기가 그녀를 해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옅게 쓴웃음
을 지었다. 정신을 집중하고 운기조식을 하려는데 갑자기 침상의
짙은 풀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장무기는 조민에게 생각이 미치자
망치로 가슴을 얻어맞은 것 같았다. 장무기의 마음이 혼란해지자
주지약은 체내에 내식이 문란해지면서 '왁'하며 검붉은 피를 토하
고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장무기는 다시 정신을 집중하고 운기조식
을 한 다음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지약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장무기는 땀을 비오듯 흘리며 그녀의 체내에서 흔들린 내력을 원
위치로 보내는 데 전력했다. 주지약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으나 장
무기는 그녀가 극도로 허약한 것을 알아내고 구양신공을 천천히 넣
어주었다. 장무기는 갑자기 주지약의 체내에서 한 줄기 음한 내력
이 나타나 자신의 구양신공에 저항하는 것을 느끼며 약간 멍청해
있다가 곧 그 전에 주지약이 현명이로(?閻??)에게 현명독장을
맞았던 것을 생각해냈다.

그 장법은 극도로 음(遭)하고 독하여 발작하면 한기가 안에서부터
생겨 견디기가 매우 어렵다. 장무기도 어렸을 적에 일장을 맞았던
경험이 있었고, 태사조 장삼풍(遵寃彈) 같은 절세 무공의 극치에
있는 사람도 제거하지 못하여 거의 죽을 뻔했던 장법이었다.
지약의 얼굴에는 간절한 표정이 가득찼다. 그것은 독장을 제거해
달라는 눈빛이었다. 장무기는 더욱 힘차게 내력을 밀어 넣었다.

그러나 주지약에게는 정말 말하기 어려운 고통이 있다는 것을 장
무기는 모르고 있었다. 주지약은 고심 끝에 의천검 속에 들어 있던
무공 비급인 '구음진경(?遭??)'을 얻어 이곳저곳을 떠돌며 연습
한 결과 작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전에 현명신장을 맞았을
때 전신이 얼음 창고에 떨어진 것 같았지만 다행히 조민이 장을 내
밀어 구해줬었다.

주지약은 그 기회에 아예 체내에 있는 한독을 조민에게 밀어 넣으
려고 했었고 당시 조민은 수장(?雋)이 주지약에게 꼭 붙어 있어
벗어날 수가 없었다. 조금 지나자 한기를 느낀 조민이 전신을 떨면
서 견디기 어려워하자 장무기는 상황이 급한 것을 보고 조민에게
구양신공을 전해 주었었다. 구양신공은 현명신장의 상극으로 독장
을 장무기의 수장에서 주지약의 체내로 흘려보내서 다시 주지약의
몸 밖으로 제거시켰다. 주지약이 연마한 구음진경은 음한 무공에
속하여 현명신장과 비슷한 곳이 있는데, 장무기는 그날 독장을 제
거할 때 주지약의 내공이 십에서 육칠 할밖에 제거되지 못한 것을
알지 못했다.

'구양신공'과 '구음진경'은 무림 양대의 정교하고 오묘한 내공법
문이라 그 높고 낮음을 가릴 수 없었다. 그러나 장무기는 어렸을
때 우연한 기회에 구양신공을 익히게 되었고 후에 또 건곤대나이,
무당심법, 그리고 성화령상 등 제반 무공을 두루 배우게 된 데다가
심성이 총명하고 지혜로워 연습을 할수록 내공이 더욱 웅혼해졌다.
그러나 주지약은 수련한 기일이 짧은 데다 급히 완성하기 위해서
조급하기만 했기 때문에 숙련의 정도가 그다지 깊지 못했다. 만약
장무기와 내공으로써 겨룬다면 그것은 반딧불과 태양의 밝기를 겨
루는 꼴이었다.

근원이 현저히 다른 내공끼리의 만남에서 약자는 강자에게 잡히기
마련이다. 주지약은 비록 마음은 다급했지만 자신이 조금이라도 분
심이 일어 입을 열어 말을 한다면 즉시 구양신공에 의해서 피를 토
하고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주지약은 공력을 운기하여 저항하려
하다가 강약이 너무 현저히 차이가 나는 데다 장무기가 조그마한
장애라도 받으면 체내에 웅혼한 내공을 더욱 강하게 밀어 넣을 것
같아 어쩌지 못하였다. 그저 속으로 화가 나고 괴로워서 안색이 사
색이 됐을 뿐, 다시 저항하려는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고 장무기가
호의로 자신의 내공을 폐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마음
이 쓰러려 두 줄기의 맑은 눈물이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장무기는 이런 사정을 모르고 갑자기 그녀의 체내에서 저항하던
음한 힘이 완만해지자 성과가 있는 줄 알고 더욱 긴밀하게 구양신
공을 보내 그녀 몸에 있는 장독을 조금씩 제거해 갔다.
반 시진이 지난 후, 장무기는 자신의 내력이 닿는 곳마다 아무런
저항이 없자 즉시 장을 회수하고는 길게 한숨을 돌렸다.

그는 주지약이 조금씩 모은 내공을 자기가 아주 깨끗하게 폐해 버
렸다는 것을 추호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지약은 이제 아무
런 내공이 없는 평범한 아녀자에 불과했다.

붉은 초는 이미 반이나 타들어 갔고 붉은 혼례복은 땅 위에 흩어
져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장무기는 조민의 상처가 걱정이 돼서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품속에서 얇고 누렇게 바랜
책을 꺼내면서 말했다.

"지약, 이것은 민 누이가 당신에게서 훔친 '구음진경'인데 당신에
게 돌려 주겠소. 순서대로 정진하고 너무 급히 완성하려 하지 마시
오"

그는 몇 발짝 가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지약, 나를 향한 당신의 정에 이 장무기는 보답할 수 없으니 용
서해 주길 바라오. 이만 실례하겠소!"

주지약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장무기는 '구음진경'을 놓고 날
듯이 집을 나갔다.

순식간에 주지약의 눈앞에서 장무기의 그림자는 사라져 버렸다.

장무기가 문을 나와 보니 산에 초생달이 걸려 있고 숲속에는 바람
소리만 공허하게 울리고 있을 뿐 그 어디에도 조민의 자취는 없었
다.

장무기는 조민이 부상을 당했으니 분명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
라고 생각하고 신법을 전개하여 발끝을 가볍게 들고 날쌔게 어둠
속으로 달려들었다.

차 한 잔 따를 시간에 벌써 십 리를 달렸으나 조민의 그림자는 보
이지 않았다. 장무기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조민의 경공으로는 십
리 이상을 벗어날 수 없었을 테니 분명히 자기가 길을 잘못 들었다
고 여기고 몸을 돌려 다시 찾기 시작했다.

대략 한 시진이 지났을 때 장무기는 이미 사방 십오 리 이내를 샅
샅이 뒤졌어도 여전히 조민이 보이지 않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조
민과 자기가 남쪽으로 올 때는 온유하기만 했던 바람이 지금은 장
무기의 가슴을 아프게 찔러댔다. 장무기는 조급해졌다. 자기는 두
번이나 주지약을 비호하고 나섰고 그 덕분에 조민은 두 번이나 주
지약의 손에 상처를 입지 않았는가. 장무기는 정말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미안한 생각이 들어 마음이 더욱더 다급해졌다. 조민
이 어딘가에 숨어서 자신을 만나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아 더욱 불안
해지고 걱정되었다. 만약 이승에서 조민을 찾을 수 없다면 자신 역
시 절대로 살아 남을 생각이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결심하자 마음이 다소 안정되었다. 조민이 자기를 피하여
만나지 않으려고 한다면 분명히 찾기 힘든 곳에 숨어 있으리라 생
각한 장무기는 걸음을 편벽하고 황폐한 곳으로 옮겼다. 그는 동굴
속, 나무 위, 길게 자란 풀 속을 헤쳐 보거나 절벽에 몸을 내밀어
찾아보았으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렇게 반복하길 몇 시진,
아직 조민은 찾지 못하고 산속의 호랑이나 표범 등 야수들만 큰 재
난을 당하게 되었다. 조민을 못 찾은 홧김에 걸리는 맹수마다 살수
를 펼쳤던 것이다. 그래서 사방 십여 리 안에 있던 맹수들은 거의
죽음을 면하지 못했지만 덕분에 부근에 사는 주민들은 이제 안심하
고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동쪽 하늘이 점차 밝아오자 겹겹이 쌓인 산림이 그 장관을 드러내
고 산속의 운무가 피어올랐다. 공기는 더없이 맑고 깨끗하기만 하
였다. 장무기는 하룻밤 내내 뛰어다니다시피 했으나 전혀 피곤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상하리 만큼 체내에 구양진기가 가득 차서 사지
구석구석에 활력이 충만해 왔다. 하지만 가슴 속만은 콱 막혀 답답
하기 이를데 없었다.

장무기는 동쪽을 바라보고 한줄기 맑은 휘파람을 불었다. 그 휘파
람 소리는 계곡의 기복을 따라 은은하게 퍼져나가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 애절한 그리움을 감칠맛나게 호소하는 것처럼 완곡하게 애
원하는 듯하였고 아침 바람에 실려 천천히 깊은 산골로 파고 들어
목메어 통곡하는 것 같았고 또한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내는 것도
같았다. 휘파람 소리는 끊어지는 듯하다가 다시 이어져 산꼭대기로
올러거 끊이지 않고 선회하였다. 장무기는 진기를 충분히 운기시켜
휘파람 소리가 하늘에 닿아 저 멀리까지 들릴 수 있도록 맹렬히 불
어댔다. 이러한 장무기의 행동은 조민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어떠
한 고통이 따르더라도 감수할 것이며 하늘이나 땅조차 두렵지 않다
는 것을 항변하는 것 같았다.

휘파람으로 마음을 달랜 장무기에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조민이 부상을 입었으니 분명히 마을 근처에서 약을 구할
것이다.......' 이제야 그것을 생각해낸 자신이 멍청하고 한심스러
웠다. 즉시 진기를 운기하여 산 밑에서 제일 가까운 마음로 달려갔
다.

차 한 잔 따를 만한 시간에 벌써 약방에 도착하였으나 시간이 너
무 일러 약방 문은 아직 열려 있지 않았다. 장무기는 약방 문을 한
동안 두드렸다. 잠시 후에 약방 문이 '끼이기' 소리를 내며 조금
열리더니 아직 잠이 덜 깬 얼굴 하나가 쑥 나오며 불쾌하게 말했다.

"손님, 지금 시간이......."
장무기는 그의 말을 끝어 버리고 물었다.
"어젯밤 부상당한 여인이 와서 약을 사간 적이 있나요?"
"없어요!"
약방 주인은 장무기가 더 묻기도 전에 대문을 '꽝'하고 닫아 버렸
다. 장무기는 할 수 없이 다른 약방을 찾았으나 이 조그마한 마을
에는 약방이 그곳 한 집밖에 없었다. 장무기는 다른 약방이 없다면
객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희망을 가득 안고 이 마을의
객점을 모두 뒤졌으나 여전히 조민의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다.

장무기는 그제서야 허탈하고 피곤함이 몰려왔다. 곧 그는 마음이
심란해져서 길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때 갑자기 차가운 물이
장무기를 덮쳤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어린 계집애가 함지를 들
고 당황해 하며 장무기를 보고 있었다. 장무기는 씁쓸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괜찮다는 뜻을 표하고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막연하게 반 시진을 떠노니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만약 조민이 그 나무집으로 돌아갔다면, 그럼, 그럼......' 장무
기는 재빨리 몸을 돌려 공력을 십분 운기하여 날 듯이 산으로 향했
다.

해는 서서히 떠올라 온 산하를 금빛으로 물들였고 밭에서는 벌써
농부 한 사람이 김을 매고 있었다. 농부가 고개를 드니 갑자기 그
림자 하나가 스쳐지나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농부는 아직 잠이
덜 깨서 눈이 침침한가 하고 눈을 비비고는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장무기의 등골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조민과 주지약, 이 두
여인 중 누구 하나가 조금이라도 사고를 당한다면 그는 일생을 뼈
저리게 후회하며 지내게 될 것이다. 얼마 안 되어 멀리 나무집이
보였으나 주위는 아무런 이상 없이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장무
기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재빨리 나무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주지약은 이미 떠나고 없었고 집 안은 자기가 떠날 때와 똑같이아
마음이 다소 안정되었다. 탁자 위에 놓인 두 개의 붉은 초와 두 벌
의 붉은 혼례복이 바닥에 어지러이 놓인 것을 보자 허탈감이 밀려
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벽에는 조민이 흘린 피가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장무기는 그것을 바라보며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틀 동안 나무집에 멍하니 앉아 있는 장무기의 두 눈은 충혈되었
고 피곤한 기색이 완연했다. 삼 일째, 해가 저물 시간에야 장무기
는 떠나고 싶은 생각이 일었다. 몸을 일으켜 몇 걸음 가다가 이렇
게 떠나면 이 집은 아무도 돌보지 않아 썩어 엉망이 될 것이 분명
하다는 생각이 들어 불에 태워 없애기로 했다.

불씨는 점점 커져서 활활 타올라 '와르르'하는 소리를 내며 나무
집을 무너뜨렸다. 장무기는 길게 탄식하며 몸을 돌려 천천히 산을
내려갔다.
x x x

삼 개월 후, 어스름 해가 질 무렵 장무기는 대도(暗?)에 도착했
다. 그는 번화한 거리의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있었지만 외롭고
고독했다. 그의 눈 언저리는 푹 꺼져 있었고 얼굴은 검게 말라 끊
이지 않고 밀려오는 번민과 조민의 생사를 모르는 고통에 시달린
흔적이 역력했다.
목적 없이 걷던 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어느 작은 주점의 문 앞에
이르렀다. 장무기는 어딘가 눈에 익은 듯하여 사방을 ?어보고는
아연해졌다. 이 주점은 옛날 조민과 같이 와서 몇 번 술잔을 기울
였던 곳으로 그때는 두 사람이 서로 적대시할 때였으니 과연 기이
한 인연이었다. 그리운 마음이 절실하여 자신도 모르게 이곳으로
온 것이라 생각되자 장무기는 힘없이 고개를 흔들며 쓴웃음을 지었
다.

주점 안에는 여전히 몇 개의 탁자가 있었고 탁자 위에는 각 한 통
씩의 젓가락이 놓여 있었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주점에는 손님이
없었고 주점의 점원은 벽 구석에서 연신 탁자에 코를 박으며 졸고
있었다. 장무기는 조민과 자주 앉던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점원을
불렀다. 신선로 하나와 세 근의 생 양고기를 썰어서 백주 두 근하
고 가져오라고 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펄펄 끊는 신선로를 내오
고 술상도 준비해 오는데 술잔이 하나인 것을 보고 장무기는 말했다.

"번거롭지만 술잔 하나만 더 가져오시어"
"손님, 다른 손님이 더 오실 겁니까?"
"아니, 없소."
점원은 매우 괴이하게 느끼고 낮게 중얼댔다.
'이상하다. 이상해! 정말 이상해.......'
장무기는 그가 중얼대는 소리를 듣고 되물었다.
"왜 이상하다고 하는 것이요?"
점원은 그의 청력이 보통이 아님을 알고 내심 당황해 하며 얼버무
렸다.
"손님, 의심도 많으십니다. 소인은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당신이 무슨 이상하다고 괴이한 일을 당했는지, 난 그저 듣고 싶
을 뿐이니 어디 얘기 좀 들려 주시구려!"

점원은 술잔을 하나 더 가져와서는 그의 옆에 섰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며칠 전에도 공자 한 분이 저희 주점에 오
셨는데 그 분도 손님처럼 이곳에 앉으셨죠."

이렇게 말하면서 장무기의 맞은편을 가리켰다.
"술 안주도 지금처럼 손님과 똑같은 것을 시켰는데 더 이상한 것
은 그분의 외양(?昨)은 분명히 부잣집 공자인데 말소리는 가늘고
애교스러워서 소인은 매우 괴이하다고 여겼었지요."

장무기는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점원이 말한 '공자'는 분명히
조민이었다. 그녀는 남장하기를 즐겨했지만 목소리를 바꾸기는 어
려랄다. 그 공자에 대해 자세히 물어 조민임을 알게 된 장무기는
크게 기뻤다.

"그 공자가 하는 말을 들었소?"
점원은 웃으면서 말했다.
"저희 주점에 손님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 공자 분의 행동이 이
상하여 소인이 주의해서 보았지요. 그는 많은 안주를 시키고는 한
점도 입에 대지 않고 묵묵히 앉아만 있을 뿐이었어요. 그러다가 결
국에는 술잔을 들고 지금 손님이 앉아 계신 자리에 대고 말했지요.
'인연이 없으면 마주보고 있어도 알아보지 못하고 인연이 있으면
천리를 떨어져 있어도 만나게 되겠지요.' 이렇게 이야기하고는 단
숨에 술을 들이키고 은자 한 덩어리를 놓더니 떠나가 버렸습지요."

장무기는 마음 속으로 되씹었다. '인연이 없으면 마주보고 있어도
알아보지 못하고 인연이 있으면 천리를 떨어져 있어도 만나게 되리
라! 인연이 있으면 천리를 떨어져 있어도 만나게 되리라!'

점원이 장무기를 보고 물었다.
"손님, 그 공자분과 아는 사이십니까?"
장무기는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 돌연 몸을 일으켜 문 밖으로 뛰
어나갔다. 점원은 눈앞에 있던 장무기가 눈깜짝할 사이에 그림자처
럼 사라져 버리자 그가 앉았던 의자만 멍청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가 자신의 넓적다리를 꼬집어 본다는 것이 그만 너무 아프게 꼬집
어 입술을 깨물고 정신이 나간 듯이 중얼거렸다.

"정말 괴이하네. 올해 운수가 안 좋아서 내가 귀신을 만났구나!"
점원은 불경을 외우기 시작했다.
장무기는 문을 나와 길에 행인들이 있는 것을 보고 경공을 펼치게
되면 사람들이 놀랄 것 같아 걸음을 천천히하여 여양왕부(?暫?繞)
쪽으로 향했다. 조민이 대도에 왔다면 분명히 집에 돌아갔을 것이
라고 생각하며 그녀가 식구들과 화해를 했는지, 상처는 다 나았는
지 궁금하기만 했다.

어느새 한길을 가로질러 여양왕부의 높은 담 밑에 와 있었다. 멀
리서 보니 십 장 높이의 깃발이 꽂혀 있고 그 위에는 삼각의 큰 깃
발에 금실로 '여양왕'이라는 세 글자가 크게 수놓아져 있었다. 왕
부의 문 양쪽에는 큰 홍릉등을 달아 놓았고 문 위에는 금색으로
'여양왕부(?暫?繞)'라고 씌어진 현판이 걸려 있었다. 대문 양쪽
육칠 장 내에는 좌우로 몽고 군사가 긴 창을 들고 정렬해 있어 자
못 위엄이 있어 보였으며, 양쪽 문 옆에 서 있는 위세당당한 돌사
자가 그 기세를 더욱 뽐내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은 총총히 제 갈길
을 갈 뿐 잠시도 감히 머무는 이나 바라보려는 사람이 없었다.

장무기는 그 기세에 눌려 눈이 커지고 말문이 막혔다. 조민이 이
런 부귀영화를 내버리고 자기 같은 가난한 놈을 따르기를 원했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에 대한 사랑이 한층 더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 조민을 찾는다면 결단코 그녀와 같이 속세를 떠나 심산유곡
에 가서 다시는 그녀가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하
였다.

왕부 문 앞에는 좌우로 길이 나 있었다. 장무기는 왼쪽으로 돌아
행인이 비교적 적은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장무기는 생각을
거듭한 끝에 몰래 들어가서 조민을 만나 이야기하기로 결정했다.
만약 대문으로 들어간다면 그녀에게 사정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 골
목으로 접어든 것이다.

높은 벽에 올라 안을 들여다보니 불빛이 휘황찬란하고 각종 음악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시간은 아직 일렀다. 여양왕 일가는 유흥
을 즐기고 있으니 지금 들어간다면 소동을 일으키게 될 것 같아 밤
이 깊어 조용할 때 다시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곧바로 오던 길을 되돌아 조금 전의 그 주점으로 들어선 장무기는
말했다.

"금방 급히 가느라고 은자 지불하는 것을 잊었소. 다시 아까 시킨
그대로 가져오시오. 같이 계산 합시다."

점원이 더듬거렸다.
"당신...... 당신......."
장무기가 웃으며 말했다.
"만약 안심이 안 된다면 먼저 은자를 받으시구려."
점원은 귀신을 만난 것은 아님을 알게 됐지만 눈앞의 손님은 기이
한 기술을 갖춘 기인이라 혹시라도 잘못될까 두려웠다. 점원은 은
자를 받지 않고 어색하게 말했다.

"일전에 손님의 친구인 그 공자 분이 은자를 지불했는데 그때 이
미 원래 값보다 열 배 이상이나 내셨으니 손님은 얼마든지 안주를
시키십시오. 저희 주점은 감히 더이상 받을 수가 없습니다."

장무기는 미소를 지으며 아까 그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는 점원
이 가져다 주는 아까 그대로의 술과 안주를 보고, 왕성한 식욕이
이는 것을 느꼈다. 지난 삼 개월 동안은 식욕이 전혀 없었으나 조
민의 소식을 조금이라도 알게 된 지금 갑자기 한 끼 푸짐하게 먹고
싶어진 것이다.

술과 밥을 배불리 먹은 장무기는 부근에 있는 객잔에 가서 아우
(?整)라는 이름으로 방을 빌려 투숙하고는 정좌하고 정신을 가다
듬었다. 삼 경이 되서야 장무기는 비로소 객잔을 나서 여양왕부로
갔다.

장무기는 골목에 이르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높은 벽을 뛰어오른 장무기는 소리없이 왕부 안
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모든 것들은 이미 잠들어 고요하고 깊은 밤, 차가운 달은 높이 떠
있어 땅에는 나무 그림자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을 뿐 왕부는 정적
에 쌓여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야경을 도는 보초의 발소
리만 멀리서 들려왔다. 장무기가 달빛을 빌려 왕부의 내부를 살펴
보니 뜰이 겹겹인 데다 방이 수백 칸이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많은 방들 중에서 조민을 어떻게 찾아낸단 말인
가.
장무기는 돌연 오른쪽 십 장 밖의 꽃밭 쪽에서 나는 경미한 숨소
리를 들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검은 그림자가 낮게 엎드려 있었다.
아마도 밤 보초를 서는 이 같았다. 장무기는 엷게 미소를 지으며
그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번개같이 다가가 그 자의 아혈(?
?)을 찔렀다.

"만약 소리치면 한 방에 죽이겠다!"
보초는 놀라고 두려워하며 두 눈을 크게 뜨고 벌벌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의 규방은 어디 있느냐?"
그가 머뭇거리자 장무기는 손을 뻗어 그 자의 옥침혈을 누르며 약
간의 내력을 밀어 넣었다. 보초는 머리가 깨지는 듯한 고통에 괴로
워하며 손가락으로 동북쪽을 가리켰다. 장무기는 보초의 아혈을 풀
어 주었지만 옥침혈은 계속 잡고서 낮은 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가지?"
보초는 매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십 장 앞으로 가서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문 앞에 연못이 있는
곳이 공주의 침실입니다."

무기는 다시 보초의 아혈을 짚고 바람같이 손가락을 놀려 일곱 곳
의 혈도를 더 찍었다. 장무기는 눈을 들어 주위를 살폈으나 난감했
다. 이 여양왕부는 그렇게 위험한 곳은 아니었지만 경비가 삼어하
여 얕볼 수는 없었다. 십 장 이내에는 초소가 세 군데 있는데 보초
들의 무공이 비록 자기에 미치지 못하지만 만약 시끄럽게 떠들어대
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면 크게 성가시게 된다.

잠시 생각에 잠긴 장무기는 진흙을 집어서 운공으로 진흙환을 만
들어 마치 쇠와 같이 단단하게 하였다. 그런 후에 보초에게 말했다.

"한 시진 후면 혈도가 자연히 풀릴 것이다. 만약 떠들어대면 이
어르신께서 제일 먼저 너의 목숨을 없앨 것이다."

보초는 놀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장무기는 튀어일어나 곧바로 십
장 밖의 큰 나무로 갔다. 마치 나는 새가 나무에 앉고 놀란 뱀이
풀 속르로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몸을 멈춘 장무기는 갑자기 발
아래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았다. 나무 가
장자리에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허리에 십여 개의 단도를 꽂고 있
는 것이 암기수(???)가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왼손에는 술병을
들고 오른손에는 통닭구이를 쥐고 뜯고 있어서 머리 위레 있는 장
무기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식충이를 키워서 뭐하는가
하며 장무기는 속으로 여양왕을 비웃었다.

장무기가 자리하고 있는 나무는 매우 높아 왕부 안을 훤히 둘러보
수 있었다. 밤의 장막이 왕부를 완전히 덮고 있었으나 대문의 동북
쪽에 있는 문에서는 아직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고, 그 문 앞에는
아름다운 연못이 있었다. 장무기는 기뻐하며 민 누이가 아직 잠이
안 들었으니 만날 수 있겠구나 생각하였다. 그는 조민을 만나보고
픈 절실한 마음에 아무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법을 펼쳐 몸을 날
려 마치 귀신과 같이 초소를 스쳐지나갔다. 살며시 조민의 침실 앞
에 도달하여 주위를 살핀 그는 어째서 이곳에 초소가 없을까 하고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곧 깨닫게 되었다. 이곳은 공주의 규
방이니 여양왕이 아무리 조심스럽고 신중하다 하더라도 어찌 공주
의 규방에 경비를 세우려 하겠는가? 그녀 자신의 무공이 높으니 왕
부의 호위 무사 중 그 누구도 그녀를 능가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
이다. 조민이 이 왕부에서는 분명히 귀여운 횡포자의 하나라는 생
각이 들자 장무기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때 어둠을 뚫고 방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배
어 있는 힘에 장무기는 크게 놀랬다. 식지를 뻗어 맑은 연못에 적
시고 가볍게 창문에 구멍을 냈다. 구멍을 통해 들여다보니 방 안에
는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왼쪽의 나이든 사람은 신장이 약 칠
척이 넘어 보이는 것이 체구가 크고 우람해 보였다. 짙은 두 눈썹
은 양미간에 맞닿아 있고 두 눈은 성내지 않아도 위엄이 담겨 있었
으며 왼쪽 뺨에는 세 개의 길다란 털이 솟아 있었다. 엷은 황색의
비단옷을 입고 있는 그의 기개는 마치 태산과 같았다. 그는 다름
아닌 조민의 부친이자 원 조정의 중신인 여양왕, 곧 찰한특목이이
였다. 오른쪽에는 약 이십오륙 세 되어 보이는 장정이 공손히 서
있었다. 그도 역시 키가 아주 크고 튼튼한 체구였지만 민첩하고 용
맹해 보였다. 그는 조민의 친오빠인 고고툭목이(掃掃墮靈? - 중국
식 이름은 왕보보(???))였다.

방 안은 섬세하고 아름다우면서도 독특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그
윽한 향기는 은은히 퍼져 바깥에 있는 장무기에게까지 전해져 왔다.
그 향기는 조민이 갖고 다니던 향낭의 냄새여서 장무기는 마음이
흔들리며 조민에 대한 연정이 새롭게 솟았다.

갑자기 여양왕의 긴 탄식이 들려와 장무기는 급히 상념을 가다듬
고 여양왕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네 누이의 소식은 아직 없느냐?"
조민이 왕부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자 장무기는 어
리둥절해졌다. 고고특목이의 힘없는 소리가 들렸다.

"부왕께 아룁니다. 소자가 이미 사방을 탐문하고 있으니 소식이
있으면 보고 올리겠습니다."
"명교 교주 장무기는 이미 교주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하던데 그
소문이 사실이더냐?"

여양왕의 말을 듣고 있던 장무기의 마음 속에 한줄기 음영이 스쳐
지나갔다.

"그 소식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장무기는 교주 자리를 원 명교 광
명좌사 양소(斫閏)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여러 방면으로 알아 보았
으나 장무기가 어째서 교주 자리를 물러났는지는 아직 자세히 알아
내지 못하였습니다."

여양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네 의견은 어떠냐?"
"소자는 잘 판단하지 못하겠습니다. 부왕께서 가르침을 주십시오."
"고고, 너는 똑똑하고 언제나 빈틈이 없었다. 이 애비는 네가 중
책을 맡아 조정을 재난에서 구제하기를 바라는데 어찌하여 솔직하
게 흉금을 털어 놓지를 않느냐? 무슨 생각이 있길래 그러느냐? 명
확히 말해도 무방하다."

고고특목이는 잠깐 주저하다가 말했다.
"소자의 견해로는 그 일은 누이와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여양왕이 '어!'하는 소리를 냈지만 고고특목이의 이야기를 끊지는
않았다.

"여동생은 본 왕부의 군주이고 장무기는 명교 교주이면서도 서로
에게 사사로운 정이 있으니 명교의 상하가 어찌 적대시하는 몽고의
군주를 그들 교주의 부인으로서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장
무기와 누이는 함께 강호를 은퇴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미루어 본다면 장무기는 실로 큰 뜻을 품은 사람이 못 되니 누이가
그를 따르는 것은 정말 지혜롭지 못한 행동입니다."

장무기는 고고특목이의 말이 비록 다 맞지는 않았지만 자기가 포
보가 없다는 말은 천번만번 옳은 말이라고 여겼다. 장무기는 부끄
러움에 진땀을 흘렸다.

여양왕은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느구나. 장무기 수하에 대장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주원장(錯?汁)이라고 한다. 그는 승려 출신이었으
나 지금은 백만의 군사를 통솔하는 장군이다. 생각해 보아라. 주원
장이란 자가 장무기가 태상황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했겠느냐?"

"부왕의 뛰어나신 식견이십니다."
"네 누이가 가문을 배반하고 나간 것은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
고 명교 중에서도 일부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결코 난처하게
는 안 할 것이다. 나의 견해로는 장무기가 퇴위한 것은 아마도 주
원장과 크게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고고특목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여양왕은 손을 저으며 말
했다.

"내 생각도 다만 추측일 뿐이란다. 사실 여부가 어떤지는 세인이
알기가 힘들지. 주원장은 일대 효웅이라 후에도 그와 왕래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니 그때를 위해 그에 대한 방비를 해야 하느니라."
"소자, 명심하겠습니다."
"양소란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 사람은 문무를 겸비하긴 하였으나 애석하게도 나이가 많고 덕
이 모자라 명교의 상하가 그에게 심복하지 않습니다."
"명교는 이미 꺼려할 필요가 없고 꺼려해야 할 사람은 오직 주원
장이다"

잠시 멈칫하던 여양왕이 말을 이었다.
"장무기가 명교를 이어받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위아래를 정돈하여
단시간 내에 그 명성과 위엄을 크게 떨쳤으니 그는 실로 일세의 기
인이다. 결단을 내려 용퇴하는 것이 대장부의 본색을 잃지 않는 것
은 아니지. 그 사람의 무공이 고강하여 제일인지이니라. 만약 그가
나를 위해서...... 아, 아!"

고고특목이는 나이가 들었지만 아직 원대한 뜻을 품교 계시던 부
왕이 오늘은 왜 이렇게 의기소침해 하는지 몰라 의아하게 여겼다.

"부왕......."
여양왕은 손을 내저었다.
"너는 민 누이의 소식에 주의해라. 나는 그 애가 몹시도 보고 싶
구나."
민 누이의 행적을 아게 되면 소자가 장무기를 잡아오겠습니다."
여양왕은 정색을 하며 고고특목이를 타일렀다.
"장무기는 기인이니 후에 만나면 예로써 대해야지 절대로 무례하
게 굴어선 안 된다."
"예!"
장무기는 여양왕의 사리에 맞는 말을 듣고 마음 속으로 갑자기 친
근감이 우러나와 당장 뛰어 들어가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늦었구나, 자야 되겠다."
"부왕......."
"왜 그러느냐?"
"소자가 아까 청한 일은......?"
여양왕이 머뭇거리자 고고특목이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황상은 어리석고 무도한 자입니다. 또한 부왕이 공을 많은 것을
꺼려하여 자기의 자리가 불안해지자 병권을 빼앗고 변경 곳곳에는
무능한 장수만을 보내 병사를 통솔하게 하니 어찌 싸움에서 패하지
않겠습니까? 소자는 실로 조정의 일을 염려해서 이러는 것입니다.
소자가 보기에 황태자는 학문에 정통하였으며 똑똑하고 민첩하니
지금의 황상과 차이가 많습니다. 만약 세자가 등극할 수 있다면 종
묘사직의 복입니다. 그래서 소자는 과감히 부왕께서 심사숙고 해주
시기를 간곡히 청하는 것이옵니다."

장무기는 크게 놀랐다. '설마 이 고고특목이가 순제{??) 암살을
꾀하는 것은 아니겠지?' 장무기는 이미 그들의 비밀을 몰래 듣고
말았으니 들키면 시끄러워질 것 같아 숨을 죽였다.

장무기는 비겁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으나 일전에 대유황성
(暗???)에서 한림아(褪殮?)가 순제를 암살하려고 할 때, 팽영
옥(?沮?) 스님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우매하고 무도한 몽고 황제가 라마승을 임용하여 조정은 문란해
졌으며, 또 가로(??)에게 황사(??)를 채굴하게 하여 백성을 혹
사시키고 물자를 낭비하니 천인공노할 노릇이 아니겠소? 우리가 근
년에 몽고인들을 모조리 쳐부수었는데 우리 같은 오합지졸이 천하
를 종횡하던 몽고 정병을 어찌 이길 수 있었겠소? 그것은 어리석은
황제가 인재를 기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오. 여양왕이 용병술에 뛰
어나고 능하자 몽고 황제는 일부러 모든 일에 농간을 부리고 만사
를 견제하고 있소. 이는 여양왕의 공이 너무 커서 그에게 황제 자
리를 빼앗길까 두려워 병권을 줄이고 흰소리하고 아첨하는 자들을
파견하여 군사를 이끌게 하는 것이오. 몽고병이 아무리 싸움을 잘
한다고 해도 이런 머저리 같은 장군들 때문에 모두 죽음을 당하는
거라오. 이는 몽고 황제가 우리의 일을 크게 거들어 주는 게 아니
겠소?'
장무기는 그 말을 들은 후 일리가 있다고 여겼고, '하늘이 만든
재난을 피할 수 있지만 사람이 스스로 만든 재난은 피할 수 없다'
라는 옛말도 있어 만약 고고특목이가 정말로 순제를 암살하려 한다
면 중원의 백성을 위해 혼군 순제를 구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여양왕은 왼쪽 빰에 있는 세 개의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주저하다
가 비로서 입을 열었다.
"어떻게 이 일에 착수할 계획이냐? 솔직히 말해 보거라!"
고고특목이가 여양왕에게 다가서며 은근한 목소리로 몇 마디 속삭
였다. 여양왕은 주위를 서성이며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무
슨 결심을 한 듯 조용하면서도 단호하게 지시했다.

"이 일은 네 계획대로 따르겠다. 실로 중대한 일이니 황태자조차
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여라."

"소자, 명심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더이상 말을 하지 않고 각자의 침소로 돌아갔다. 장무
기는 그들이 완전히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몸을 일으켜 여양왕부를
빠져나와 객잔으로 돌아왔다. 장무기는 고고특목이가 앞으로 어떻
게 손을 쓸지 모르는데다 자기는 비록 혼군 순제를 구할 마음이 있
기는 해도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아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
다.

장무기는 조민을 만날 수 있기를 갈망하며 밤에는 주점에 머루르
고 한낮에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한가로이 거리를 거닐었다. 당
시는 몽고가 중원을 통치한 지 이미 백여 년이 넘어 중원 백성들의
원한은 더욱 심해 가고 있었지만 이 성의 주민들은 비교적 편안해
보였으며 매우 번창한 곳이라고 장무기는 생각했다.

그렇게 거리를 방황하던 어느날 돌연 몽고 기병부대가 말을 끌고
지나가서 길가던 사람들은 분분히 피했다. 그런데 거동이 불편한
한 노인이 행렬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한 기병대에게 부딪혀 그 뒤
를 따라오던 네 명의 기병들의 말발굽에 밟히고 말았다. 몽고병들
이 활개짓하며 떠나가 버린 후에야 비로소 행인 두 사람이 숨이 간
들간들한 노인을 길 옆으로 옮겨 놓기는 하였으나 그들도 아무런
대책 없이 손을 툭툭 털고 떠나가 버렸다.

장무기는 이곳 주민들의 냉담함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하고 그
노인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육순쯤 되어 보이는 노인은 오른팔이
절단되었으며 갈비뼈가 세 대나 부러져 정신을 잃고 있었다. 장무
기는 품에서 약병을 꺼내 그 속에서 '지원단(??沈)' 두 알을 꺼
냈다. 두 손으로 노인 뺨의 동혈을 잡고 입을 벌려 약을 입 안에
넣어 주고는 다시 하관혈을 짚으니 '꼬르륵' 소리를 내며 환약 두
알이 뱃속으로 내려갔다. 이제는 노인의 생명에 지장이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그의 절단된 뼈를 접골해 주었다. 이런 중상은 일반
의원이 보면 고개를 가로젓지만 장무기의 눈에는 약간만 치료하면
될 정도의 상처일 뿐이었다. 그가 바람같이 빠르고 능숙한 손놀림
으로 그 노인의 뼈를 맞춰 주고 목판으로 고정시켜주는 데까지 걸
린 시간은 불과 차 반 잔을 따를 정도의 시간이었다. 그 노인은 정
신이 조금씩 들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더듬더듬 고맙다고 말했다.

"어르신,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하지만 얼마 동안은 고생 좀 하셔
야 할 겁니다. 제가 처방전을 써 드릴 테니 그대로만 하신다면 이
틀 정도 쉬고 나면 완쾌되실 겁니다."

장무기는 미소를 띠며 노인의 말에 대답했다.
장무기는 점포에서 지필묵을 빌려 처방전을 써 그 노인에게 건네
주었다. 장무기가 노인을 치료하는 광경을 구경하던 주위 사람들이
흩어지고 이제 장무기도 몸을 일으키는데 갑자기 한 사내가 그의
팔을 잡았다. 장무기는 흠칫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대략 사십 세
정도의 하인 차림이었으나 그 말투가 매우 오만했다.

"의술을 아느냐?"
장무기는 기분이 나빴지만 그래도 대답을 해주었다.
"조금 압니다."
"그럼 됐다. 나를 따라 오너라."
장무기의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그는 혼자서 앞으로 걸어갔다. 장
무기는 기가 막혔으나 어차피 다른 일이 없기에 따라가면서 그가
무슨 괴이한 짓을 하나 보려고 했다.

길을 건너 골목을 지나도 그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고 장무기 역
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하나는 앞에서 하나는 뒤에서
이 장 간격을 두고 걸어갔다. 거의 차 한 잔 마실 시간을 걸어서
골목을 빠져나가니 갑자기 시야가 확 트였다. 좌우로 끝이 안 보이
는 높고 큰 벽이 눈에 걸렸다. 사내는 발걸음을 머추지 않고 앞으
로 가더니 작은 문 앞에 다다라 문을 몇 번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
서 문이 열렸다. 장무기가 따라들어가서 주위를 살펴보니 자신이
아주 큰 정원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화초는 소박했지만 모두
정갈해 보였다. 정원 가운데를 지나 안채에 도착하자 사내는 장무
기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손짓하고는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잠시 후,
다시 나온 사내는 장무기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채는 그다지 화려하고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호방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 몇 개의 정원을 돌아서 한 침실 앞에 다다르자 사내는 무
릎을 꿇고 아뢰었다.

"유 공공, 의원이 도착했습니다."
방 안에서 남자도 여자도 아닌 목소리가 무력하게 들려왔다.
"들어오너라."
장무기는 적잖이 놀랐다. '설마 이 유 공공이 환관이 아닐까? 그
럼 나는 이미 황궁에 들어와 있단 말인가?"

침실의 큰 침상 위에 한 사람이 엎드려 있었다. 약 사십 세 정도
의 남자였으나 입 주위에 수염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아 환관임
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길 안내자가 유 공공의 등에 덮힌 이불
을 젖히자 찢기고 터져 있는 살찐 엉덩이가 나타났다.

환관이 장무기를 돌아보았다.
"치료할 수 있겠느냐?"
장무기는 거절할 생각을 품고 있었으나 유 공공의 위엄있는 목소
리가 이어졌다.

"만약 치료하면 본 공공이 너를 박대하지는 않겠다."
잠시 망설이던 장무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아가서 상처를
살폈다.

"이 상처가 세(寃) 시진 전에 맞은 것입니까?"
유 공공이 급히 대답했다.
"맞다, 맞아!"
장무기가 상처입은 시간을 정확히 맞추자 그의 고통스러워하던 안
색에 놀라 기뻐하는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장무기가 미소를 띠우며 그의 혈도를 몇 군데 짚어주자 유 공공은
금방 통증이 줄어드는 걸 느끼고는 매우 경복하여 늘어지게 찬탄했
다.

"신의(佚?)로구나, 신의야!"
장무기는 이렇게 말하는 유 공공의 내심에 이상하게 탄식이 스며
있음을 느꼈다. 장무기는 조금 이상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품속에
서 '흑옥속단고(閒?垠十簫)'를 꺼내 시퍼렇게 터져 뭉그러진 그의
엉덩이에 붙였다. '흑옥속단고'는 조민이 사용하던 성약(濡疵)인데
장무기가 처방전을 얻어 원본과 똑같이 만들어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장무기가 다른 계획이 없었다면 절대로 이 성약을 내
시의 엉덩이에 붙여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흑옥속단고'는 영험하기 그지 없었다. 유 공공은 그것을 붙이자
마자 청량함을 느끼고 말할 수 없이 편안해져 금방 일어나서 말을
붙이려고 했다. 장무기는 그런 그를 만류라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반 시진 후에야 거동하실 수 있습니다."
유 공공이 기이하게 여기고 물었다.
"겨우 반 시진 후에 거동할 수 있다고?"
장무기는 웃기만 할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유 공공은 장무기에
게 큰 상을 주라고 장무기를 안내히 온 사람에게 분부했다. 장무기
는 유 공공의 호의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상은 필요없습니다. 소생은 의술을 배워서 치료했을 뿐이고 약재
는 제가 직접 채집하니 유 대인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유 대인
께서 입으신 상처는 피육지상(誕嘲柵轅)에 불과하니 이틀만 요양하
시면 자연히 완치되실 겁니다. 그럼 소인은 물러가겠습니다."
"신의, 잠깐 멈추시오. 아직 한 가지 부탁할 일이 남아 있소."

장무기는 '아' 소리를 내며 걸음을 멈추자 유 공공이 길 안내자에
게 명령했다.

"차를 가져오너라."
"예"
사내가 몸을 돌려 나가자 유 공공이 겸손하게 물었다.
"존함이 어떻게 되시오?"
"소인의 성은 증(彩)이고 이름은 아우(?整)입니다."
"아, 증 신의군요. 잠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떻겠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이때 사내가 차를 들고 들어와 그 자리에 끼어들려고 했다.
"유 공공, 또 어떤 분부가 계신지요?"
유 공공이 손을 내젓자 사내가 물러갔다. 유 공공이 찻잔을 가리
키면서 말했다.
"증 신의, 차 드시오."
"대단히 감사합니다. 유 대인께서 필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얼마
든지 분부하십시오."
"증 신의, 상처를 치료하는 외에 다른 기타 복잡한 증상도 고칠
줄......."
"유 대인, 웃음거리가 될까 부끄럽습니다. 소인이 비록 천성이 우
둔하기는 해도 어려서부터 집에서 엄하게 의술을 배웠습니다. 그래
서 약간의 의술을 알고 있을 뿐 '신의'라는 두 자는 감히 어울리지
아 부끄럽습니다."

유 공공은 장무기의 말 속에 무슨 병이든 모두 고칠 수 있다는 뜻
이 담겨 있음을 알아채고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내 상처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아시오?"
그는 장무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성상께서 무슨 병에 걸리셨는지 갑자기 전신이 부어올랐는데 몇
몇 어의들이 속수무책이었는지라 나에게 궁 밖에서 명의를 찾아 오
라고 명하셨다오. 경성 안에는 명의가 적지 않았기에 그들을 데려
가서 보였지만 여전히 효험이 없었고 처방전 한 장도 제대로 쓰지
못라는 것이었소. 이에 성상께서 진노하시어...... 콜록, 내가 제
대로 일을 못 했으니 맞아도 어쩔 수 없지!"

장무기는 속으로 환관을 비웃었다. '의원이 치료를 못하는 것이
왜 당신 탓이란 말인가? 정말로 비굴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군!"

유 공공은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증 신의, 성상 옥체의 괴질을 치료할 수 있겠소? 만약 성공한다
면 그대와 나는 부귀를 얻게 될 것이오."

장무기는 태연스레 대답했다.
"보는 거야 무방하지만 성공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신의께서는 너무 겸손하시오. 우리 지금 함께 가 보는 것이 어
떻겠소?"

장무기가 환관의 상처를 생각하여 물었다.
"그러나 유 대인의 상처가......."
"지장 없소, 지장 없어."
그는 종을 울렸다. 길을 안내해 온 사람이 들어오자 유 공공이 소
리쳤다.

"가마 두 채를 준비하거라!"
얼마 지나지 않아 가마가 준비되자 사내는 유 공공을 안아서 가마
에 태웠다. 장무기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할 수 없다는 듯 뒤
의 가마에 들어가 앉았다. 유 공공이 '떠나자'하고 명하는 소리가
들리자 가마가 가볍게 들려졌다. 장무기는 밖을 내다볼 생각도 않
고 눈은 감고 명상에 잠겼다. 약 반 시진을 갔을까. 가마가 멈췄다.
가마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니 후궁에 들어온 것인지 엄숙하고 경
건한 분위기가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했다. 유 공공은 장무기를 가
다리게 하고는 절룩절룩거리며 황제에게 아뢰기 위해 들어갔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한 사람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덕서(?鴦油), 알현하옵니다."
유 공공은 엎드려 예를 표한 후 일어나 예관(籍?) 뒤에 서서 그
가 하라는 대로 따라하였다. 복도를 통해 뜰을 지나 황제의 침실에
도착했다. 유덕서는 엎드려 알현하였다.

"소인, 황상께 문안드립니다."
휘장 뒤에서 노기 띤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비(?迂)야, 상처가 빨리 아물었구나."
유덕서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노비는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성상의 흥복을 얻어 신의를 만
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의술이 고명하여 특별히 황상께 보여드리려
고 모셔왔습니다. 노비가 일처리를 잘못한 것은 죽어 마땅하지만
황상께서는 죄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는 말하면서 연신 절하였다.
휘장 뒤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빨리 불러 들여라!"
얼마 되지 않아 예관이 장무기를 데리고 들어갔다. 침실로 들어온
장무기는 십여 명의 노인들이 근심이 쌓인 얼굴로 엎드려 있는 걸
보고 이들이 필시 경성 안의 명의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덕서는 장무기가 당당하게 주위를 살피는 것을 보고 급히 그에
게 무릎을 꿇라고 손짓했다. 그러나 장무기는 모르는 척하자 유덕
서는 혼신에 땀을 흘리며 줄곧 끙끙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휘장 뒤에서 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어떤 사람인고?"
유덕서는 혼비백산하여 머리를 조아렸다.
"황상께 아, 아, 아뢰옵니다. 그는 미, 미, 미천한 백성이라 예법
을 모르오니 용서하여 주시시 바랍니다."

휘장 뒤의 사람이 물었다.
"그가 네가 말하던 신의냐?"
"바로 그렇습니다......."
"알았다. 그를 들여보내거라."
두 명의 궁녀가 휘장을 올려 장무기를 들어가게 한 후에 다시 휘
장을 내렸다.
휘장 안은 금빛으로 휘황찬란하였고 가운데에는 거대한 용상(井偉)
이 있었다. 그 옆에는 네 명의 궁녀가 서 있었고 침상에는 한 사람
이 누워 있었는데 그가 바로 원나라 순황제였다.

원 순제가 말했다.
"성과 이름은 무엇이냐?"
그 목소리에 병기(?褶)가 느껴지지 않자 기이하게 여긴 장무기가
눈을 들어보니 순제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를 한 번 훑어본
장무기는 깜짝 놀랐다. 처음 들어올 때는 휘장이 사방으로 드리워
져 있어 옥내의 광선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 어둠에 조
금 익숙하게 되자 왼쪽 눈은 붉고 오른쪽 눈은 파랗게 되어 있는
윈 순제의 두 눈을 볼 수 있었다. 장무기는 왕난고(?蜃少)의 <독
경(??)>의 한 구절이 갑자기 떠올랐다.

'근왕초(??草)는 본래 독이 없다. 그러나 복용 후에 방사(溫?)
를 하면 왼쪽 눈이 붉은색이 되고 오른쪽 눈이 청색이 되는 데다가
몸에는 홍, 청 두 줄의 무늬가 선명하게 생기게 된다. 방사를 한번
할 때마다 그 색깔이 짙어지며 방사를 열 번 하게 되면 죽는다. 치
료법은 내공으로 용천혈(占??)에서 근왕초 독액을 흡인한다. 시
술자는 방사를 삼 일 동안 삼가하면 자연히 독이 제거된다. 근왕초
의 생산지는 상고의 황하 북쪽인데 이미 멸종됨.'

장무기는 이 풀이 멸종되었는데 독을 쓴 사람이 어디서 이 풀을
얻어 왔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독'이라는 말이 떠오르자 장
무기는 홀연히 여양왕과 고고특목이가 생각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자기는 절대로 그 두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겠지
만 이 혼군(逋宿)을 설복하기란 쉬울 것 같지 않았다.

순간 한 계책이 번뜩이며 떠올랐다. 자신이 생각해도 실로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얼굴에 한가닥 엷은 웃음을 띄었다. 순
제는 그가 말없이 미소 짓고 있는 것을 보고 다그쳤다.

"이 노비는 짐을 치료하라는데 묘한 웃음을 짓고 있으니 죽여 마
땅하다."

장무기는 태연히 일을 열었다.
"황상의 몸에 붉은 선 무늬와 청색 선의 무늬가 생겨나지 않았습
니까?"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
순제는 의아해 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맞다, 맞아. 네가 치료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어인 병이냐?"
"이것은 병이 아닙니다."
"터무니없는 소리...... 아니, 정말 병이 아니란 말이냐?"
"전하, 축하드리옵니다."

순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축하할 일이 어디 있느냐?"
"성상께서 조정 일로 과로하시는 것을 알고 하늘이 특별히 성상께
하사 하신 선물입니다."

순제는 기이하게 여겼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
장무기는 일부러 숙연하게 말했다.
"매일 방사를 세 번 하고 순순한 미주 세 되를 마시며 음악을 세
곡을 들으면......."

순제가 크게 노하여 소리쳤다.
"온통 허튼소리뿐이로구나. 여봐라! 이 놈을......."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황상. 몸의 무늬는 매번 방사를 한 다음에
색깔이 더욱 짙어지지 않습니까?"

순제는 장무기에게 눈을 떼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네가 그것은 또 어떻게 알았느냐?"
"그것은 방법이 틀려서 그렇습니다. 제가 황상의 몸에 있는 색깔
을 지워 드린 후에 한 번 시도해 보십시오."

순제는 자신의 몸에 있는 무늬를 제거해 준다는 말에 의심스럽게
장무기를 쳐다보았다.
"그 말이 과연 사실이렷다?"
"미천한 백성은 목숨을 걸고 아룁니다."
"어떻게 제거하느냐?"
"아주 간단합니다. 황상의 발을 내미시면 됩니다. 그러나 황상께
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하늘의 뜻데로 일처리를 하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재발하여 다시는 구해 드릴 수 없습니다.

순제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것은 짐의 뜻과 같으니 빨리 시도하렷다!"
장무기는 더이상 말하지 않고 앞으로나가 쌍장으로 순제의 용천혈
을 제지시키고 운공하여 순제의 발에 있는 소음경맥에서 근왕초 독
액을 천천히 자기 체내로 흡입시켰다. 어쨌든 자기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고 방사를 삼가는 것은 삼 일이 아니라 얼마든지 길어도
무방하기 때문이었다.

반 시진 후에 몸에 있던 무늬가 모두 사라지자 순제의 몸은 하얗
고 보드랍게 쌀진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장무기는 공력을 거두
고 일어나 순제를 보며 말없이 웃었다. 순제는 매우 기뻐하며 옆에
있는 궁녀를 끌어당겨 곧바로 하늘의 뜻에 따라 방사를 치르기 시
작했다. 장무기는 몹시 난처하여 얼른 휘장 밖으로 나왔다. 순제가
명확하지 않게 무슨 말인가를 했다.

"경들은 잠시 기다려라! 과인이......."
더이상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제 2 장 : 의로운 암살
장무기는 허탈한 마음으로 침궁을 나오며 원 순제의 그런 행동에
대해 마음 속에서 비웃음이 일었다. 불쌍한 한 무리의 명의들이 엉
거주춤 무릎을 꿇고 앉아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어찌할 바를 몰라
곤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순제가 원기왕성하게 휘장을 제끼고 나오니 유덕서는 기회를 놓치
지 않고 머리를 조아렸다.

"전하, 축하드리옵니다."
순제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유덕서, 이번에 네 공이 크니 과인이 상을 내리리라."
유덕서는 뜻밖의 기쁨에 계속 머리를 조아렸다.

순제는 전전긍긍하며 엎드려 있는 명의들을 보고 진노했다.
"앞으로 백성들이 해를 입지 않도록 졸의(??) 무리를 끌어내어
참형에 처하라."

장무기가 앞으로 나가 읍하며 말했다.
"전하, 전하는 병이 나신 게 아니었는데 어찌 그들을 탓하십니까?
그들을 용서해 주시는 편이 좋을 줄 아룁니다."

순제도 생각해 보니 맞는 것 같았다.
"됐다, 됐어! 유덕서, 그들을 데리고 나가서 각자에게 은 한 냥씩
나누어 주어라."

의원 무리는 천번만번 감사하며 앞을 다투어 유덕서를 따라 침궁
을 나갔다. 순제는 장무기를 불러 세웠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증아우(?整:황소)입니다."
순제는 즐겁게 웃었다.
"네 이름이 온순하구나. 말해 보아라. 무엇이 갖고 싶으냐? 과인
이...... 꼭 만족하게 해주리라."

장무기는 우연히 이 늙은이의 생명을 구하게 됐지만 여양왕의 다
른 음모가 또 있을지 모르니 도와주려면 끝까지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인은 세상을 떠돌아 다니며 의술을 행해 거주할 곳이 없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제게 먹을 것을 주신다면 증아우는 감개무량하겠습
니다."

순제는 그 말을 듣고는 '껄껄' 호탕하게 웃으면서 눈물까지 흘렸
다.

"좋아. 너는 궁중에 머물도록 하여라. 궁중의 모든 법칙은 너만은
예외로 지키지 않아도 좋다. 어떠냐?"

장무기는 무척 기뻐하는 척하며 대답했다.
"성은이 망극하옵고...... 음...... 그저...... 가없이 넓고 크십
니다."

순제는 정말 참을 수 없어 또 '하하" 소리내어 크게 웃었다. 황상
의 완쾌 소식과 하늘이 내렸다는 세 가지 지시가 삽시간에 후궁에
퍼져나가자 모든 비빈들은 마음이 간지러워 견딜 수 없이 즐거웠다.
다만 황후만이 종묘사직에 방해가 될까 두려워 깊이 우려하였으나
황제의 일이라 간섭할 수가 없으니 번민만 하고 있었다.

순제는 종일 환락을 즐기느라 허리가 시큰거리고 다리가 아픈 걸
면하기 위해 장무기에게 그 통증을 제거해 달라 하였고 장무기는
구양신공으로 양기를 돋아 주었다.

순제는 크게 기뻐하며 장무기에게 삼십 명의 궁녀를 하사하였다.
장무기는 그의 본성에 별로 맞지 않았고 또한 근왕초 독액이 몸에
있었기에 자연히 삼십 송이 꽃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 종일 술
을 마시고 술에 취한 척하며 엎어져 자든가 또는 후궁을 빠져 나갔
다.

장무기는 궁내의 이곳저곳을 아무런 제약없이 출입할 수 있어 유
유자적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삼십 명의 궁녀는 장무기가 시종
궁녀들의 혈도를 짚거나 약을 먹여 잠을 이룰 수 없게 해놓아서 궁
녀들은 모두 다음 날 아침에는 자연히 안색이 창백하고 졸린 눈으
로 하루 종일 하품만 하게 되었다. 순제가 이를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 장무기에게 전날 밤 신위(佚?)를 펼쳐 재미를 봤느냐고 넌즈
시 물어보았으나 장무기는 웃기만 하고 말이 없었다.

어느덧 한 달이 넘어 그 사이 순제는 세 번이나 중독됐었고 매번
장무기가 순제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황제는
아무것도 모르고 남몰래 하늘의 '은총'에 감격할 뿐이었다. 늙은
황제는 드러난 곳에 있고 여양왕은 숨어 있으니 조금이라도 신중하
지 않으면 순제가 생명을 잃는 일은 쉬우리라고 장무기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순제는 자신을 음해하려는 적이 있는 것도 모르고 종일 환
락에 빠져 있었다. 여양왕이 한 달 동안 수차례에 걸쳐 독을 쓸 수
있었다면 궁중 안에 첩자가 있는 게 분명했다. 장무기가 이 사람을
찾아내어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고 은밀히 조사해 보니 독을
쓴 사람은 어주(蠶着)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장무기가 그에게 그
저 몇 마디 사실을 캐묻자 그는 혼비백산하여 멀리 달아나 그 후
그의 종적은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아침 장무기는 궁 연못에서 술을 마시며 네다섯 명의 궁
녀의 시중을 받았다. 멀리서 보이는 이 광경은 한가하게 떠도는 구
름과 들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학 같았음에도 장무기는 자유롭지 못
하였다. 한 환관이 와서 황제가 사냥하러 출궁하는데 장무기도 함
께 가잔다고 아뢰었다. 장무기는 이 일이 의외라고 여기고 되물었
다.

"어느 대인이 모시고 가는고?"
"여양왕입니다."
장무기는 여양왕이 독을 넣어도 소용없자 결국은 또 새로운 방법
으로 순제를 암살하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무기는 순제에게
고하여 궁에서 나지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여기고 좋은 방법을 생
각하며 걷다 보니 벌써 주최문(錯崔?) 앞에 이르렀다.

순제는 금빛 찬란한 갑옷을 입고 위엄을 부리며 막 출발하려고 하
고 있었다. 눈꺼풀이 약간 부어 있는 것은 향락의 과로 증상이 분
명했다.

순제는 장무기를 보자 기뻐하며 말했다.
"증아우, 때 맞춰 잘 왔구나. 이대로 짐을 따라 궁 밖으로 사냥하
러 가자."
"전하, 하늘의 세 가지 지시 중에 사냥하라는 것은 없었는데...."
순제는 손을 내저었다.
"과인이 요 며칠 종일 궁중에 갇혀 있었더니 이제 싫증이 난다.
밖에 나가서 근골을 좀 움직여줘야 하겠다."

순제는 하늘이 내린 세 가지 지시를 따른 후에 기력이 왕성해지고
있는 줄 알고 있었을 뿐 장무기가 사흘이 멀다하고 자신의 체내에
구양신공을 주입시키는 것은 알 리가 없었다. 순제가 이미 결정한
것을 보고 다시 돌이킬 수 없다고 느낀 장무기는 입을 열었다.

"전하, 소인이 어제 공력을 지나치게 써서 밤새 잠 한숨을 못 잤
습니다. 그러니 소인이 전하를 모시고 가지 못함을 용서해 주십시
오."

순제는 약간 실망하는 듯했으나 장무기를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피곤한 기색이 완연하여 졸려 보이므로 웃으며 말했다.

"한 마리 들소가 공력이 모자랄 때도 있느냐? 하하! 됐다, 됐어.
그 모양으로 가면 흥을 크게 깨뜨리겠구나. 가거라!"

장무기는 감사하다고 한 후에 물었다.
"전하, 오늘 어느 곳으로 사냥을 가시옵니까?"
"과인은 서원(??)으로 가려 하는데 무슨 일이 있느냐?"
"소인이 감히 성상께 청컨대 소인에게 노루다리를 하사해 주십시
오."
"너는 아마 녹편(??)을 갖고 싶은 것이겠지? 하하하......."
여양왕 부자와 삼천 금위군은 갑옷으로 완전 무장하고 문 밖에서
호위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당세의 성상이라는 자가 이런 말을 하
자 여양왕은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쳐 명했다.

"떠나자!"
삼천 금위 정예부대가 길을 열어 주자 일행은 위풍당당하게 주최
문을 나갔다.

장무기는 순제 일행이 떠나가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궁을 나섰다.
문지기들은 장무기를 알고 있어 더이상 캐어 묻지 않았다.

궁을 빠져나온 장무기는 옷가게에 들러 백발 노인으로 가장한 후
신법을 펼쳐 곧바로 서원 사냥터로 달려갔다.
서원 사냥터는 경성에서 서쪽으로 사십 리 밖에 있었다. 장무기는
순제 일행을 피해 돌아서 갔으나 그래도 사냥터에는 먼저 도착하였
다. 사냥터는 수십 리가 넘어 보였고 평탄한 산세에 산림의 정취와
향초가 그윽하게 깔려 있었다. 장무기는 잠시 주위를 탐색하고 동
쪽 끝 숲으로 들어갔다.

해가 나무 사이로 비추어 들어 나무 그림자가 어지러웠고 짙은 소
나무 향이 코를 찔렀다. 간혹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
지만 모든 것이 정적에 쌓여 있었다. 한 무리의 꽃사슴들은 산비탈
위에서 먹이를 찾느라고 장무기를 발견하지 못했다.

순간, 숲속에서 한 줄기의 빛이 살짝 스쳐지나갔다. 장무기는 즉
시 몸을 날려 달려가면서 나뭇잎 두 장을 뜯어 숲속을 향해 날렸다.
그러자 숲속에서 두 개의 녹색 그림자가 공중으로 튀어 오르더니
몸을 옆으로 돌리며 장무기를 향해 번쩍이는 것을 던졌다.

장무기는 반사적으로 몸을 살짝 피했다. '파박'하며 두 개의 암기
(??)가 장무기 뒤의 나무에 꽂히면서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그 힘이 보통이 아닌 듯했다.

나뭇잎이 다 떨어지기도 전에 녹의(?縱)에 복면을 한 네 명이 이
미 장무기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장무기는 겸손하게 읍하며 말했다.
"호한 여러분, 당신들의 행적이 이미 발각되었으니 당신네 주인
이 말려들지 않게 하려면 빨리 물러가시오."

동수나인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외람되지만 좀 여쭙겠습니다. 노인장의 존함은 어떻게 되시는지
요?"

장무기가 백발로 분장하여 상대방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함을 다행
으로 여겼다.

"이 늙은이는 일개 백성으로 언급할 만한 위인이 못 됩니다. 여러
분께서 만약 이 늙은이를 믿을 만하게 여기신다면 물러나시어 다른
날 다시 계책을 꾸미시는 게 어떠신지요?"
녹의 호한 중 한 사람이 의심스러운 듯 캐물었다.
"노인장, 어떻게 우리들이 여기 있다는 것 아셨소?"
"밝힐 수 없음을 사과드리오. 순제는 이미 경계하고 있어 당신들
은 결코 성공할 수 없소. 만약 물러가지 않으면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될 것이오."

녹의 호한이 주저하며 결정을 못 하자 다른 녹의 호한이 나섰다.
"대형, 이 늙은이의 허튼소리는 듣지 마세요. 우리 이 사람부터
처치하고 그 다음 늙은 순제를 죽여도 늦지 않아요!"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검을 들고 한꺼번에 달려드는데 초식이
매우 독랄하였다.

장무기는 그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몸을 비스듬히 피했다.
순간 칼끝에 등을 부딪힐 뻔했다. 미처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전에
동북 두 방향에서 장검이 또 다가오자 장무기는 어쩔 수 없이 하늘
높이 훌쩍 뛰어올랐다. 네 자루의 장검이 장무기를 향해 사방에서
한 치의 거리를 겨누고 있어 조금이라도 늦게 뛰어올랐다면 장무기
는 지금 네 조각이 났을 것이다.

장무기가 몸을 날려 뛰어오르자 네 자루의 장검이 곧바로 반 허공
에 떠 있는 장무기를 향해 찔러 왔다. 만약 장무기가 여기서 기력
이 다해 떨어진다면 네 자루의 검에 의해 몸이 조각이 날 운명이었
다.

장무기는 단전에 기를 모아 허공에서 한 장 정도 더욱 치솟으며
몸을 이 장 앞으로 뻗어나가 안전하게 내려섰다. 이런 경공을 본
네 사람은 놀라서 서로 쳐다보고 있다가 한 사람이 물었다.

"노인장은 무당파의 어느 분이십니까?"
무당파의 제운종(?貞?)은 그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어
무림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장무기가 한 장 가량 뛰어오른
경공술은 무당파 제운종의 '경공심법'이었으나 날아서 두 장을 앞
으로 나아간 경공술은 명교의 진교지보(??柵?)인 '건곤대나이심
법'이었다. 그러나 네 사람은 전혀 알아보지 못하였다.

"제운종? 제운종이 공중에서 횡으로 이동하는 줄 아는가?"
장무기는 자기가 순제를 구하기 위해 이렇게 고심하는 것을 천하
의 몇 사람은 깨닫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만약 오늘의 일이 무당파
와 관계가 있다고 강호에 퍼지게 된다면 무당파의 명성에 크게 누
가 될까 우려되어 짐짓 어뚱한 말을 한 것이다.

네 사람의 견식이 비록 높았지만 무당파에 이런 인물이 있었는지
는 모르는 것 같았다. 더욱이 제운종의 경공이 하늘 높이 치솟을
수는 있어도 횡으로 이동할 수는 없음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니
노인으로 변장한 장무기와 무당파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의
심하지 않았다.

"귀하의 솜씨가 비범하신데 어찌하여 몽고의 앞잡이 노릇을 하십
니까?"
장무기는 빙긋이 웃었다.
"당신들은 어떻게 해야 이 늙은이의 말을 믿겠습니까?"
"나의 검을 이기면 믿겠소."
"그럼 실례하겠소이다."
장무기는 '다'라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그 신형이
마치 귀신과도 같았다. 만약 공력을 논하자면 네 사람은 모두 장무
기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네 사람이 합심하여 검진을 정밀하
게 펼친다면 당장 시비를 가리기는 어려울 듯 싶었다. 장무기는 선
수를 쳐 네 사람을 제압하고 다시 대화하자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
으면 순제가 도착했을 때, 여양왕에게 분명히 크게 지장이 따를 것
이었다.

그러나 장무기도 빨랐지만 네 사람도 빠르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네 자루의 장검이 매초식을 다투어 공격해 왔고 칼끝이 매섭기가
비할 데 없었다. 장무기는 네 사람이 순제를 암살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자 순간 존경하는 마음이 일었다.
그래서 동작을 전개할 때마다 그들이 상처를 입지 않도록 조심스럽
게 초식을 펼쳤다.

장무기는 순제도 구하고 여양왕의 음모도 발각되지 않게 해야 했
다. 또한 이들 네 명의 여웅호걸들과 원수를 지고 싶지 않아 네 사
람을 설득하여 보내야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장무기는 진정한
실력을 발휘할 수 없 어 수차례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장
무기는 더이상 지체하면 오히려 상황이 나빠질 것 같았고, 이 사람
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부득이 거칠게 대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소
리를 질렀다.

"조심하시오!"
왼손을 당겨 건곤대나이심법을 운기하자 장무기를 겨누고 있던 두
자루의 장검이 '팍팍' 소리를 내며 나무 위에 곧바로 내리꽂혔다.
두 사람은 검을 두고 재빨리 뒤로 뛰어올랐다. 장무기는 오른손이
헤엄치는 뱀처럼 매우 빠르게 움직이니 다시 '팍팍'하는 소리를 내
며 나머지 두 자루의 장검이 나무게 꽂혔다. 장무기는 말없이 미소
를 지었다.

네 사람은 순식간에 빈손이 되었다. 그들은 만약 상대가 손끝에
정을 남기지 않았다면 자신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
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네 사람은 장무기에게 읍을 하고 장검을
둔 채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장무기는 그들이 새파랗게 질린 안색을 보고 내심 꺼리며 입을 열
었다.

"여러분, 잠깐만!"
네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는 데 갑자기 네 줄기의 검광이
그들을 향해 날쌔게 날아오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재빨리 피했다.
'철컥, 철컥, 철컥, 철컥'하고 네 번의 소리가 나더니 장검이 각자
의 칼집에 채워졌다.

"영웅 여러분, 이 늙은이가 예를 올리오. 앞으로도 기회가 많으니
또 만나게 될 때가 있겠지요."

장무기의 경의가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한 여자의 표독스런 목소
리가 들렸다.

"표창 받아라!"
장무기는 머리 뒤에서 바람 가르는 소리를 느끼고는 팔을 뒤로 휘
둘렀다. '팍' 소리가 나며 표창이 몸 뒤로 삼 장 밖으로 떨어졌다.
장무기는 몸을 돌려 빙그레 웃으며 녹삼의 여인을 보았다. 그 여인
은 어안이 벙벙한 채 손안의 표창을 보며 아연실색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표창이 기습해 오는 걸 알고 손을 뻗어 나뭇잎 한 장을
떼어내어 던졌던 것이다. 표창은 당연히 나뭇잎 정도는 뚫을 수 있
었으나 장무기가 던진 나뭇잎에는 강력한 내공이 실려 있어 오히려
표창이 삼 장 밖으로 나가 떨어진 것이다.

이런 행동은 위태롭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만약 표창을 던진 사람
과 장무기의 내력이 비슷했다면 표창이 무거우니 분명히 장무기가
맞았을 것이다. 또한 바람소리의 강약을 듣고 결정한 위치에 조금
이라고 오차가 있었다면 어쩔 수 없이 표창에 맞아 쓰러졌을 것이
다.

장무기도 이런 행동이 위험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긴박한 데다 일초식으로 상대를 제압하지 않는다면 시
간을 끌게 되어 큰일이 벌어지게 되기 때문에 부득불 위험한 수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녹삼 여인은 놀라서 어쩔 줄 몰라하며 멍하니 장무기를 쳐다보았
다. 장무기는 겸손하게 공수하며 말했다.

"이번 일은 일시에 해명하기 쉽지 않소. 여러분, 이만 물러나시길
권고드립니다. 만사는 하늘이 정해 주신 대로 이루어질 것이오."

녹삼 여인은 상대의 무공이 그 깊이를 예측할 수 없어 만약 더 다
툰다면 창피를 자초하게 되리라 생각했다. 게다가 그가 이와 같이
말하자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여기고 즉시 읍을 했다.

"그럼 물러가겠소이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떠나갔다. 장무기 뒤편의 나무 위
에서 세 명의 녹삼 복면 여인이 뛰어 내려오더니 그녀를 쫓아갔고
먼저 네 명의 검객도 읍을 한 후 몸을 돌려 떠나갔다. 여덟 줄기의
녹색 신형이 몇 번 번쩍이더니 청록색의 망망한 숲의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장무기는 길게 탄식을 했다. '강호녹림 중에서 얼마나 많은 영웅
호걸들이 순제를 암살하려 하겠는가. 내가 순제를 보호하느라 심혈
을 기울인 진정한 이유를 또 몇 사람이나 이해해 주겠는가?'

돌연 말발굽소리가 들려와 사냥 부대가 곧 도착할 것임을 알렸다.
장무기는 아직도 자객이 매복해 있지 않은가 하는 걱정이 되어 떠
날 생각을 못 하고 높이 솟은 고목을 골라 몸을 날려 빽빽한 나뭇
잎 사이로 몸을 숨겼다.

그때, 순제는 삼천 금위군을 몇 대대도 나누어 숲속 깊이 들어왔
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큰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장무기가
숨은 나무 밑으로 당황한 동물들이 왔다갔다 했다. 수천의 인마(?
?)들이 사냥감을 한 곳으로 몰며 포위망을 좁혀 들어 가는 모양이
었다. 장무기는 그 가운데 위치하고 있고 또한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주위의 정황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벌써 해가 높이 떠서 청록색의 나무숲을 비추고 있었다. 사방 사
오 리 안의 평온하던 곳에서 이리저리 날뛰는 사냥감들 때문에 먼
지 구름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었고 짐승을 몰아대는 소리가 끊
이지 않아 삼림 속이 시끌벅적하였다.

포위망이 사방 일 리로 축소되자 황상의 어의가 도착했다. 뒤로는
수십 명의 무사들이 따랐고 여양왕 부자는 황상의 좌우를 보호하고
있었다.

장무기가 올라가 있는 나무 밑에서는 동물들이 놀라서 황급히 이
리저리 뛰고 있었다. 순제가 화살을 활시위에 얹으며 '쉭, 쉭, 쉭'
하며 쏘아대자 토끼나 노루가 쓰러졌고 화살은 하나도 없었다. 가
끔 환호성이 터지는 가운데 장무기는 순제의 활 솜씨가 정교한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몽고인이 송(陰)을 무너뜨리고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몽
고 무사의 탁월한 승마와 활쏘는 솜씨 때문이었다. 원조 개국 선조
중에는 징기스칸, 발도(??), 타뢰(??) 등 지혜와 용맹을 겸비
한 인물이 있었다. 또한 역대의 몽고 황족에게 있어서는 말타고 활
쏘는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제일의 중요한 임무였다. 원 순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때문에 원조 백여 년 후에도 몽고 군대는 여전히
용맹하였다. 그러나 고여 있는 물은 썩기 마련, 선조들의 고난에
찬 정복이 끝나자 갖은 사치와 방종이 계속되면서 황실이 실력 있
는 사람을 제대로 쓰지 않아 천하를 종횡하던 몽고의 정예군대가
거듭 패배를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흥분하여 소리를 지르는 순제의 모습은 평상시보다 몇 배나 더 위
풍당당하고 힘차 보였다.

여양왕과 고고특목이는 장무기가 숨어 있는 나무 밑에 서 있었다.
여양왕이 망연히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고고특목이를 쳐다 보자 고
고특목이 역시 매우 의혹스러워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고특목이는 순제의 서원 사냥 소식을 남몰래 강남팔준(析辰?懺)
에게 누설시켰었다. 그는 강남팔준과 안면은 없었지만 중원 무림인
모두가 황제를 제 손으로 죽이지 못해 한스러워하고 있으므로 이
소식을 듣게 된다면 분명히 암살하러 올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강남팔준의 행동을 감시하던 고고특목이의 밀정이 입을 막기 위해
칼을 휘둘러 목을 베어 버렸다. 몽고인은 일을 처리하는 데 그 누
구보다도 치밀했다. 고고특목이에게 있어서 한 사람을 죽이는 것쯤
은 하찮은 일이며 더구나 이 일은 국가 안위에 관한 일이라 더욱
거론할 가치가 없는 문제였다. 강남팔준의 손을 빌려 순제를 없앤
후에 자기는 그 시신을 가지고 경성으로 돌아가서 세자를 등용시키
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계획은 이처럼 주도면밀했지만 그는 장무기를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흥이 오른 순제가 한 마디 명령을 하자 삼천 금위군이 일제히 화
살을 쏘아대는 바람에 서원 사냥터는 거대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장무기는 몽고 기병들의 용맹한 기백 그리고 우수한 활솜씨를 보고
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몽고 정예군대가 명
교 교도들에게 완패당했다고 믿겠는가? 보아하니 순제 늙은이는 활
실히 죽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내어 여양왕의 암
살기도를 저지시켜야 된다.'

그러나 아무리 재삼재사 숙고해도 뾰족한 방법을 얻을 수 없었다.
순제는 이미 북을 울리며 군대를 철수시켰고 일행은 사냥감을 가득
싣고 황궁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병마 대대가 멀리 가기를 기다렸다가 길을 다기 돌아서
대도에 도착하여 변장을 벗고 후궁으로 돌아와 잠 속에 빠졌다. 저
녁이 되어 순제가 베푼 잔치에서 장무기는 그저 바보스럽게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순제는 그가 말이 없자 크게 웃으
며 시종에게 분부하여 녹편 한 개를 장무기에게 하사하였다. 장무
기는 멍하니 녹편을 쳐다보며 어떻게 이걸 먹을까 눈 앞이 캄캄했
다. 순제가 빨리 먹으라고 재촉하자 장무기는 매우 기뻐하며 은혜
에 감사하는 척하고 술잔을 들어 건배하며 얼버무렸다. 그리고 그
는 틈을 타서 그 옆자리에 앉아 있는 합마(播?)에게 주었다. 합마
는 마침 그가 갈망하던 것이라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원사(??>에 기재된 바에 의하면 (장무기에게 녹편을 받은)합마
는 원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영종(災?) 유모의 아들로
서 그의 부친의 이름은 도로이고 기국공(?髓頌)에 봉해졌다고 한
다. 합마는 그의 외삼촌 설설(??)과 함께 순제의 신임을 받았는
데 두 사람 중에서 합마가 말재간이 더 좋아 어전에서 시위사(珥?
?) 임무를 맡았다. 합마는 원조 우승상 탈탈(醉醉)과 사적인 교제
가 매우 깊어 탈탈이 파면 당하자 탈탈을 위해 상소를 올렸다.

탈탈의 파직 후 좌승상인 태평(梔?)이 등용되었는데 그는 합마가
궁에서 황제를 옳지 않은 쪽으로 인도하는 것을 보고 그를 쫓아내
려고 하였다. 이에 순제는 번거롭고 화가 나서 좌승상인 태평과 합
마, 설설을 함께 궁 밖으로 축출시켰다. 후에 탈탈이 다시 복직되
었고 그는 그전에 자기를 위해 황제에게 통사정해 줬던 합마의 은
혜를 갚기 위해 구실을 대서 황상께 주청(遮?)하였다. 순제 역시
합마가 없어진 뒤에 궁중이 적지 않이 쓸쓸하던 차라 진언을 듣자
크게 기뻐하여 합마를 다시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탈탈은 사람이
정직하여 원조정의 훌륭한 관리였으나 그 역시 충신과 간신을 분별
할 줄 몰랐다. 대원(暗?)의 멸망은 그렇게 운명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 역시 후일담에 불과한 것이다.
합마는 녹편을 복용하고 황상께 아뢰었다.
"전하, 미천한 신이 연엽아법에 정통한 라마승 한 명을 알고 있습
니다."
순제는 술에 취하여 빈첩들과 시시덕거리다가 그의 진언을 듣고
귀가 솔깃해졌다.

"연엽아법이 무엇이냐?"
"큰 열락이란 뜻입니다."
순제는 영문을 몰라 소리쳤다.
"말을 똑똑히 하렸다!"
합마는 주저하다가 순제가 화를 내려 하자 재빨리 순제 옆으로 다
가가 귀엣말로 낮게 속삭였다.

"이 연엽아법이란 일종의 방사술입니다."
순제는 끈끈한 미소를 지으며 그 라마승을 대령하라고 명했다. 합
마는 급히 궁을 나가 라마승을 데려왔다. 절을 하고 몸을 일으켜
세운 라마승을 유심히 살펴보니 이마가 푹 패인 것이 확실히 내공
이 심오한 것 같았다.

순제는 고귀한 스승을 얻은 듯 그 라마승에게 사도지책(?扼柵?)
을 명하였다. 색념에 사로잡혀 이름도 모르는 라마승에게 선뜻 직
책을 주는 순제를 보고 장무기는 실로 당황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순제는 벌써 마음이 미혹되기 시작하여 연엽아법을 빨리 배우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러나 그 운우지도(?町柵?)를 짧은 시간에
배울 수는 없었다. 몸이 달은 순제는 라마승을 아예 궁중에 머물도
록 했다. 순제는 전력을 다해 연습하였고 또 장무기가 몰래 기(褶)
를 넣어 주니 진전이 매우 빨라 얼마 지나지 않아 욕정을 쏟는 것
과 거두는 것이 자유자재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러나 라마승은 장
무기가 도와주는 것을 모르고 황상은 예지가 뛰어나다고 찬탄을 금
치 못했다. 후궁의 비빈들은 모두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순제는 더욱 조정일을 돌볼 여유가 없어 조정의 대소사 일체를 탈
탈에게 맡기고 하루 종일 후궁에서 주지육림에 빠져 있었다.

라마승을 추천한 합마는 황상의 환심을 얻어 적지 않은 상을 하사
받았다. 합마의 매부 독로찹목아(???迎?)는 이를 보고 눈이 빨
개져서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결국 이인(??) 한 명을 찾아내고는
서둘러 입궁했다.

"신이 듣건대 황제(??)가 어녀(蠶?)로서 신선이 되고 팽조(?
?)가 음을 채굴하여 수명을 얻었으니 전하께서는 귀하신 천자시라
도량이 넓으시어 만약 이 이인의 기술을 연마하신다면 자연 영원히
장수하실 수 있습니다."

순제는 득의만면하여 말했다.
"경은 연엽아법이란 것을 들어보았는가? 짐은 이미 그것으로 맛을
느끼고 있느니라."
"신이 알기로는 쌍수법(?懿擾)이라는 것이 있는데 비밀법이라고
도합니다. 연엽아법은 남자에게만 해당되지만 쌍수법은 보다 오묘
하며 남녀에게 두루 좋다고 합니다."

순제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급히 물었다.

"경은 그 기술을 잘 아는가?"
"신은 아직 할 줄 모릅니다만 가린진(?閱?)이라는 한 라마승이
있는데 그가 이 기술에 매우 정통합니다."
"그런 이인이 있다면 어찌 일찍 천거하지 않았느냐?"
"가린진은 궁 밖에 있어서......."
"빨리 불러오너라!"
돌로첩목아가 출궁하여 가린진을 데려오자 순제는 두 사람이 어전
에 들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영접하며 예를 갖추었다. 냉담하
게 옆에 앉아 있던 장무기는 이번엔 이 가린진에게 무슨 관직을 줄
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간사스런 목소리로 가린진이 황제를 아뢰었다.
"전하, 이 방법은 용과 봉황의 교배법으로서 실로 훌륭한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장무기는 라마승이 대담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순제가 그의
머리를 내리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순제는 거슬려 하지
않고 정색을 하며 물었다.

"우아한 황후는 융통성이 없어 아마도 이런 선술(??)을 연마하
지 않을 것이다. 다른 후비들은 시험할 수 있는데 천품이 어떤지
모르겠구나."
"온 천하의 여자 중 전하의 비빈이 아닌 사람은 없지요. 전하께서
는 왜 꼭 후궁이어야 한다고 얽매이십니까? 양가집 규수를 뽑아 입
궁시켜 연습시키면 다다익선이 아니겠습니까?"

이 제안은 순제의 마음에 쏙 들어 순제는 가린진을 대국사로 임명
하였다. 다음 날부터 돌로첩목아는 환관을 감독 인솔하여 미녀를
뽑아 입궁시켰고 가린진은 뽑혀 온 미녀들에게 비술(澐?)을 가르
쳤다. 그것을 본 장무기는 이런데도 대원(暗?)이 망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정말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x x x
장무기는 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여양왕의 암살 기
도를 제지하는 문제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비로소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장무기는 휴가를 청했다. 마침 쌍수법을 배우느라 정
신이 없었던 순제는 그에게 빨리 갔다오라는 당부만 하고 허락을
해주었다.

궁을 나온 장무기는 먼저 객잔에 가서 도룡보도를 찾아가지고 주
막으로 가서 점원에게 조민이 왔었느냐고 물었으나 허사였다. 장무
기는 망연하여 거리를 배회하다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
렸다. 짧은 서찰을 써서 품안데 감춘 장무기는 변장을 하고 여양왕
부로 들어갔다. 서쪽 높은 벽을 지나서 침입하였으나 문을 지키는
수십 명 중 한 사람도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위세등등하게 왕부의
문을 지키고 있었다. 왕부 안에는 하인들의 왕래가 베틀 북 드나들
듯이 빈번하여 장무기는 걸음걸이를 천천히 하며 한 시녀의 뒤를
쫓아갔다.

왕부의 안의 연못에 오색찬란한 불빛이 반사되어 우아하고 아름답
기가 그지 없었다. 앞에 시녀는 가볍게 움직이며 긴 치마를 팔락거
리는데 몸매가 아리따운 것이 순제의 측근에 있는 많은 비빈에 손
색이 없었다. 또한 궁중의 꽃들에 비해 이 시녀는 청아한 영기(這
褶)를 품고 있었다.

장무기는 물가의 정자에 가까워지자 입을 열었다.
"소저, 잠깐만. 소인이 한 가지 청할 일이 있소이다."
시녀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구레나룻의 사나이가 자
기를 바라보고 있자 기이하게 여기어 물었다.

"어르신네, 이 노비를 부르셨습니까?"
시녀의 손에는 쟁반이 들려 있었고 쟁반 위에는 고풍이 짙은 다구
(??) 한 질이 놓여 있었다. 찬한한 빛을 받아 영롱이는 시녀의
눈 빛은 더욱 청초해 보였다.

"예, 소인이 불렀소만 어르신네라니 천만의 말씀이오. 소인은 오
늘 처음 왕부에 들어왔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초롱을 달고 오색 천
으로 장식을 하였는지 몰라 감히 소저께 묻는 것입니다. 왕부에서
오늘 잔치라도......?"

시녀는 그가 자기를 부를 때마다 소저, 소저 하자 마음 속으로 즐
거웠다. 그의 차림을 눈여겨 보고는 왕부에 새로 온 하인일 것이라
생각했다.

"왕야와 공자께서 만찬을 하시는 것이지 잔치를 베푸시는 게 아니
야. 만약 잔치를 베푸신다면 그거야 말로 정말 번화하고 떠들썩하
게?"

장무기는 놀라움에 혀가 굳어졌다. '순제의 식사 때에도 이와 같
이 많은 사람이 동원되지는 않는데.......'

"듣기로는 군주가 매우 무섭다는데, 그렇소?"
시녀는 짜증을 냈다.
"터무니없는 소리 말아. 군주께서는 무예가 고강하시고 마음씨가
얼마나 좋으신데 그런 무지한 사람들이 마구 떠들어대는 소리를 믿
다니....... 내가 오랜 세월 동안 군주의 시중을 들어 왔는데 어찌
모를 리 있겠어?"

장무기는 생각했다. '알고 보니 이 여자가 조민의 시녀로군. 어쩐
지, 그래서 이렇게 수려하고 청초하게 생겼구나.'

장무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저, 어째서 군주의 시중을 들지 않고 있소?"
시녀는 길게 탄식을 했다.
"군주께서는 반 년 전부터 어디로 가셨는지 알 수 없어. 며칠 전
에 어르신네께서 웬일인지는 모르지만 화를 내시며 군주의 시중을
들던 시녀들을 모두 주방으로 보내시어....... 아휴, 시간이 다 되
어 가네, 가야 되겠어."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선녀가 허공을 거니
는 듯 했다. 그러나 장무기는 조민이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자 실의에 빠져 더이상 그 시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싶
은 마음이 없었다. 즉시 몸을 돌린 장무기는 동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민의 규방 창 밑에 다다랐다. 옥내등
은 여전히 밝혀져 있고 아무런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실내를
서성이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장무기는 지난 번과 같이 창문의 면
지를 뚫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서성이는 사람은 여양왕이었고
고고특목이는 옆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안색이 매우 음울해 보였
고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여양왕은 사랑하는 딸 조민이 집을 떠난 후 보고 싶을 때마다 조
금만 시간이 있으면 딸 방에 들어와서 근심 걱정을 달래곤 했다.
고고특목이 역시 부친을 따라 방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단지 배석하
는 것에 그쳤다. 그것이 거듭되니 자연히 이 방은 부자 두 사람이
대사를 상의하는 장소로 변했다.

장무기는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아 서찰을 꺼내 운력을 실어 방
안으로 던졌다. '쉭' 소리를 내며 서찰은 면지를 뚫고 곧장 여양왕
의 가슴 앞으로 날아갔다.

고고특목이는 놀라며 몸을 날려서 덮쳤으나 여양왕은 이미 한 장
의 편지를 손에 쥐고 있었다. 고고특목이는 즉시 창을 부수고 나갔
으나 사람의 그림자은 벌써 지붕 위로 오르고 있었다. 그가 몸을
튕겨 지붕 위로 따라 올라갔을 때 장무기는 벌써 겹겹이 널려 있는
옥담을 지나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고 그때까지도 여양왕
부 정원에 가득한 무사들은 그것을 단 한 사람도 눈치채지 못했다.
고고특목이는 부친이 위험할 것 같아 더 쫓아가지 못하고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왔다.

장무기는 서찰을 던질 때 힘을 조절하여 여양왕이 안전하게 손으
로 잡을 수 있도록 했었다.

방으로 돌아온 고고특목이는 여양왕의 안색이 창백한 것을 보고
황급히 물었다.

"부왕, 왜 그러십니까?"
여양왕은 대답을 하지 않고 서찰을 건네주었다. 서찰을 읽는 고고
특목이의 안색도 서서히 굳어졌다.


<
공경하는 여양왕, 그리고 공자께.
당신들 부자는 몽고 호걸이시니 소인은 백 번 흠모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순제의 운이 아직 다하지 않았으니 이를 사람의
힘으로 어찌 막을 수 있겠는지요! 그래서 어주(蠶着)를
해직시켜 멀리 도망가게 했고 강남팔준의 거사를 방해하
였습니다. 소인이 많은 무례를 범하였더라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여양왕과 공자께서는 모든 것을 하늘
이 정한 대로 따르는 것이 어떠하실런지요?
>
여양왕 부자는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
의 안색은 사그라진 잿빛 같았다. 여양왕은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긴 탄식을 했고, 지붕 위를 응시하는 고고특목이의 뺨에는 구슬
같은 두 줄기 눈물이 걸려 있었다.


x x x
장무기는 여양왕부를 뒤로 하고 하늘 끝에 비스듬히 걸려 눈물을
머금은 듯 차갑게 떠 있는 반달을 보며 말할 수 없는 괴로움과 처
량함에 젖었다. 고독하고 적적함을 이기지 못하여 그리움과 근심에
싸여 있을 때, 홀연 어디선가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무기는 호기심이 일어 집 몇 채를 뛰어넘어 소리가 들려오는 공
터에 다다랐다. 한 그루 큰 나무의 그림자 밑에서 두 사람이 한 청
삼을 입은 여인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상황을 보아하니 그
여인이 쉽게 지지는 않을 것 같았고 주위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아 다투는 장면을 조용히 관찰하기로 했다.

세 사람은 치열하게 다투면서 달빛 아래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
다. 장무기는 그들 세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너무 놀라 입이 떼
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현명이로(?閻??)였고 청삼 여인은 바
로 장무기의 친사촌 여동생 은리(肇涅)였다.

은리는 장검을 조심스럽게 내둘러 초식을 펼치는데 그 또한 정교
하고 기이했다. 몇 달을 못 본 사이에 사촌 여동생의 무공이 매우
정진되어 엄청난 고수가 된 것 같았다. 비록 포위를 빠져나가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치밀하게 방어하며 한편으로는 교묘한 초
식으로 공격하고 있어 일시에 패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장무기는
한순간 어리둥절하여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현명이로 두 사람이 네 장(雋)을 뒤집어 날려도 이길 수 없자 학
필옹이 말했다.

"사형, 무기를 사용합시다."
그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쌍장으로 공격하였다. 은리의 장검이 옆
으로 흔들리자 그 사이에 두 자루의 학취필(兎?帑)을 꺼내어 쌍필
을 교차시키며 검신을 걸려고 하였다. 은리는 그의 내공이 심후할
까 두려워 될 수 있는 대로 그와의 접촉을 피하면서 검 끝으로 검
화(盛?) 칠팔 송이를 그리며 현명이로에게 곧바로 달려들었다. 장
무기는 속으로 '큰일났다!'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학필옹의
필점이 검화의 중심을 겨누고 은리의 검초식을 깨뜨리며 쌍필을 내
던지니 공중에서 한 번 부딪치고는 방향을 바꾸어 은리의 인영, 복
면의 두 혈을 공격하였다. 은리는 쌍필이 다가오자 검을 휘둘러 올
렸으나 쌍필의 방향이 바뀌는 바람에 즉시 장검을 회수하지 못했다.
등 뒤의 녹장객이 이 기회를 틈타서 가볍게 일장을 쳤다.

순식간에 사태가 변하자 장무기는 번개같이 뛰어나가며 허공에서
돌멩이를 녹장객을 향해 날렸다. 현명신장의 위력을 알고 있는 장
무기는 만약 은리가 이 장을 맞는다면 중상을 입게 되므로 먼저 녹
장객부터 공격했다.

녹장객은 돌조각이 강하게 날아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몸을 피했
다. 은리는 이미 쌍필점에 맞아서 꼼짝할 수 없었다. 할필옹은 일
초식에 손쉽게 은리가 무너지자 계속해서 쌍장으로 은리를 공격하
려 했는데 갑자기 예기치 못한 공격을 받게 되자 십 할의 공력을
장에 집중시켜 은리를 아예 죽이려고 하였다.

장무기는 반 허공에서 허리를 비틀어 몸을 학필옹쪽으로 돌려 장
을 받았다. '펑'하는 거대한 소리가 나며 장무기는 다시 하늘 높이
날아올랐으나 학필옹은 내상을 입고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녹장객은 크게 놀랐다. 그들 사형제 두 사람이 함께 강호를 누비
는 동안 적수가 될 만한 자가 없었는데 사제가 어떻게 이 구레나룻
의 장한이 내민 일장에 상처를 입었단 말인가? 더이상 생각을 않고
은리를 향해 장을 들어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은리는 연과
같이 흐느적거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장무기는 이때 반 허공에서 장을 휘들러 녹장객을 향해 공격했고
녹장객은 할 수 없어 쌍장으로 맞받았다. 장무기는 장력으로 공격
하면서 무당 제운종의 신법을 펼치며 은리 쪽으로 날아가 은리가
막 땅에 떨어지려는 순간 팔을 뻗어 그녀를 그러잡고 안전하게 땅
에 내려놓았다. 이 몇 동작은 순식간에 일어나 마치 한 동작과 같
았다.

녹장객은 쌍장의 공격이 실패하자 원숭이 신법으로 장무기에게 달
려 들었다. 그때 학필옹이 더듬거리며 녹장객을 말렸다.

"사형.... 아.... 안 돼요! 그는 자.... 장.... 무기.....에요."
녹장객은 동작을 멈추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구레나룻의 장한을 바
라보았다. 장무기는 아무 말도 없이 양쪽 뺨에 붙인 수염을 떼면서
빙그레 웃음지었다.

녹장객은 놀라서 두어 걸음 뒷걸음질쳤다.
"장무기, 당신은 왜 또 나타나서 참견하는 거요?"
장무기는 은리의 혈도를 풀어 주며 그녀가 온몸을 떨면서 말을 하
지 못하는 것을 보고 한독이 발작한다는 것을 알았다. 즉시 운기조
식하여 구양신공을 체내에서 한 번 순환시킨 후 허리의 명문새혈을
막아 주었다. 그는 구양신공이 천천히 은리의 체내로 들어가는 것
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이 여인은 나의 사촌 여동생이요. 그래도 내가 쓸데없이 참견하
는 것 같소?"

녹장객은 자기와 사제의 힘으로는 장무기를 이길 수 없음을 알았
다. 또한 사제의 부상이 가볍지 않으니 자기 혼자서는 더욱 장무기
의 상대가 안 되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그냥 물러서는 것은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힐난을 퍼부었다.

"모든 사람들이 장 대교주는 영웅 중의 으뜸이라고 하던데 교주께
서는 꽃을 보호하는 데도 일가견이 있으신가 보지요? 하하하, 교주
대인, 군주 부인께서는 안녕하신가요?"

녹장객은 입으로 '하하' 하고 웃으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고 있었고 말을 마쳤을 때는 이미 학필옹 옆에 서 있었다.

장무기는 속으로 화가 났지만 지금은 기(褶)와 혈(?)이 들끓고
있었고 또한 운공으로 은리의 한독을 제거하느라 어쩔 수 없어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다만 차갑게 코웃음만 쳤다.

조금전 허공에서 방향을 바꿔 학필옹을 공격한 장무기는 이미 기
력이 다 소진했다. 그런데 다시 학필옹의 일격을 맞받아쳐 진력이
완전하지가 않은 데다 아직 운기조식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몸을
날려 은리를 받는 바람에 지금, 만약 녹장객이 자신의 부상을 눈치
채게 되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크게 우려되었다.

녹장객은 강호를 수십 년간 종횡하여 경험이 풍부했지만 장무기가
부상당한 것을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두 사형제는
장무기에게 크게 해를 입어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장무기가 더이상
다가오지 않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장무기, 당신은 우리를 몰래 습격하였으니 영웅호걸이라 할 수
없소. 우리 후일 다시 결투합시다."

장무기는 입을 열지 못하고 여전히 웃음만 흘리고 있었다. 녹장객
은 사제를 겨드랑이에 끼고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장무
기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리는 가볍
게 소리를 지르며 깨어났는데 돌연 옆에 한 남자가 자기 허리를 잡
고 있는 것을 보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놀라움은 아직 전부 제거되지 못한 독을 재발시켜 그 독이 다
시 십이 경맥으로 흘러들어가 은리는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장무기 역시 기의 흐름이 막혀 뜨거운 피를 입에서 내뿜었
다. 장무기는 정좌하여 운기조식을 하기만 하면 이만한 상처쯤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나 은리가 걱정 되어 어쩔 수 없이 자
신을 돌보지 않고 진기를 응집시켜 구양신공을 은리의 체내에 주입
시켰다.

은리는 한기(吐褶) 때문에 몸이 떨려와 견디기 어려웠는데 갑자기
뜨거운 기가 체내로 흘러들어와 말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그
녀는 이 사람이 자기의 상처를 치료해 주려 한다는 것을 알아채고
호흡을 가다듬고 기를 안정시켜 내식을 장무기와 합치하였다. 얼마
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 정도 한독이 제거된 은리가 가늘게 눈을
떴다. 그런데 옅은 달빛 아래에서 자기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사람
이 바로 장무기가 아닌가? 은리는 멍하니 있다가 장을 휘둘러 장무
기의 뺨을 갈기며 소리쳤다.

"증아우, 당신 아직 안 죽었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무기는 '왁'하는 소리와 함께 입에
서 선혈을 토하며 쓰러졌다.

"증아우, 왜 그래요? 증아우! 증아우!"
"빨...... 빨리...... 이곳을...... 떠나......!"
장무기는 더듬거리다가는 혼절해 버렸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장무기는 천천히 깨어났다. 깨어나 보니 자
기가 칠흙 같은 암흑 속에 있었다. 몸은 차가워 마치 진흙에 덮혀
있는 것 같았다. 이상히 여겨 몸을 일으켜 앉으려고 머리를 드니
나뭇가지들이 얼굴에 닿았다. 뺨이 아려 왔다. 장무기는 몸을 꼼짝
할 수 없는 것을 느끼고는 중얼거렸다.

"설마 내가 죽은 것은 아니겠지?"
약간의 운력을 써 보니 내공은 여전하였다. 마음을 가다듬고 운기
조식하며 모든 혈을 뚫고 내력이 순행하는 곳에 장애가 없는 것을
느끼자 상처가 치료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째서 자기가 생
매장 당했는지 알 수 없었다. '생매장'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자 장
무기는 아연해졌다. '국외 황도에서 은리가 죽은 줄 알고 그녀를
생매장했었는데 이번에는 은리가 나를 생매장할 줄이야!'

장무기는 마음을 진정하고 구양신공으로 공력을 전신으로 퍼뜨리
며 힘차게 뛰어 일어나 흙을 뚫고 나왔다.

세상은 아름다웠으며 햇빛은 밝고 따뜻했다. 장무기는 자기가 삼
림 속에 있음을 알았다. 고목이 하늘을 찌를 둣 높이 솟아 있고 새
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돌려보니 무덤 앞에 세워진
나무 패 위에 '부군 증아우의 묘. 은리 근립(??)'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장무기는 고마운 마음이 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파 와
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목패를 뽑아 조심스럽게 흙을 털어냈다.
그는 한동안 목패를 쓰다듬다가 품안에 넣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삼 장 정도 떨어진 곳에 한 흑의의 여인이 속세를 떠난 듯이 정좌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름다운 얼굴 위에는 몇 줄의 혈흔이 남
아 있었으나 청초하고 수려한 모습의 여인은 바로 은리였다. 은리
는 장무기가 무덤을 박차고 나왔는데도 놀라지 않고 오히려 입꼬리
를 삐쭉거리며 야박하게 화를 냈다.

"왜 안 죽었지요?"
장무기는 그녀가 이렇게 묻자 기가 막혔다.
은리는 장무기가 아무 말이 없자 더욱 화가 난 듯 소리쳤다.
"증아우, 내가 묻는 말이 들리지 않아요? 귀가 먹었나요?"
장무기는 은리의 성격이 겉으로는 괴벽스럽지만 내심은 매우 부드
럽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다
만 우물쭈물 머뭇거렸다.

"나...... 나......."
"나는 무슨 나, 당신이 죽지 않았는데 그 목패는 가져서 뭐해요?
빨리 돌려줘요."

이렇게 말하는 그녀는 노한 얼굴에는 어느새 부끄러운 빛이 드러
나고 말끝이 흐려지며 목소리가 낮아졌다.

장무기는 역시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품안에서 목패를
천천히 꺼내기는 했으나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렷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은리가 이미 목패를 빼앗아 원래 위치
로 돌아간 것이다. 그 신법이 매우 신속하여 미묘하기 이를 데 없
었다. 장무기는 입을 열어 감탄하였다.

"훌륭한 신법이로군!"
은리가 두 손에 힘을 주어 목패를 부러뜨리려고 하자 장무기가 다
급히 외쳤다.

"안 돼, 은리!"
급히 신법을 펼쳐 목패를 빼앗아 보니 다행이 부러지지는 않았다.
멍하니 목패를 안고 있는 장무기를 보고 은리가 투덜거렸다.

"당신, 당신은 항상 나를 괴롭히는군요!"
장무기가 은리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은리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장무기는 은리가 자기를 진심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
고 있었다. 장무기는 가볍게 은리의 보드라운 손을 잡았다.

"은리, 그렇게 화내지 마. 나, 난 정말 이 목패가 좋아. 나에게
주면 어떻겠어?"

은리는 갑자기 장무기의 품속에 파고 들며 소리내어 울었다. 그런
데 두 손으로 장무기를 꽉 안고 식지로 힘껏 장무기의 등을 누르고
있었다.

장무기는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등에 심한 고
통이 느껴지며 한줄기 한기로 인하여 순식간에 전신이 추위로 떨리
기 시작했다. 그러나 은리가 다칠까 두려워서 운공으로 저할할 수
도 없었다.

"은리, 왜 이러는 거지?"
은리는 여전히 울고 있었고, 그 울음소리에는 슬픔이 가득 담겨
(?=감겨) 있었다.

은리는 '천주만독수(?鑽???)'를 연마한 적이 있었다. 이 무공
은 독거미의 독액과 자기의 피를 합치시키는 무공이다. 이 무공에
약간이라도 성과가 있으면 한 손가락으로 상대를 찔러도 그 상대는
무공을 완전히 잃게 되는 음독한 무공이다. 그러나 이 무공을 더욱
연마하면 용모가 파괴되고 완전히 연마하게 되면 그때는 말할 수
없이 추해진다. 은리도 이를 면하기 어려웠다. 황도에서 주지약이
중상을 입은 은리의 얼굴을 보검으로 십여 차례 난도질을 했었는데
은리는 이같은 큰 재난에 죽지 않고 오히려 복을 얻게 되었다. 그
녀의 얼굴에 고여 있던 독액이 피에 섞여 흘러나와 원래의 얼굴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주지약이 사용한 보검이 매우 날카
로웠기 때문에 십여 개의 옅은 혈흔만이 남아 있을 뿐 아름다움에
는 손상이 없었으며 도리어 기이한 아름다움을 발산하였다.

장무기는 차마 은리를 밀어내지 못하고 또한 운공으로 저항도 할
수 없어 가까스로 한기를 이겨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머
리가 혼미해지며 눈이 흐려지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더이상 참
을 수 없어 저항하려 했으나 벌써 내공은 상실되었다. 사정이 이미
어렵게 된 것을 안 장무기는 도리어 편안함을 느꼈다.

조민이 버럭 화를 내고 가버린 후 그 소식을 알 길이 없었고, 은
리가 자기 옆에 있어 떨쳐버리기 어려우니 지금 죽는다면 모든 일
이 해결될 것 같았다. 편안한 마음으로 가볍게 은리를 어루만지려
던 장무기는 사지에 힘이 빠져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미혹된 마음
으로 운기를 하고 있던 은리도 힘이 빠져 장무기를 따라 쓰러지고
말았다.

잠시 후 깨어난 은리는 자신이 장무기를 꼭 껴안고 있음을 알고
부끄러워졌다. 애틋한 눈빛으로 장무기의 위아래를 훑어보던 은리
는 장무기의 이마에 청자지기(?朱柵褶)가 드리워져 있는 것을 발
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는 분명히 '천주만독수'의 독에 중독
된 것이 틀림없었다. 황급히 장무기의 몸 밑에서 손을 빼내 보니
자기의 식지에 은홍빛 선혈이 물들어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장무
기에게 중상을 입혔다는 것을 깨달은 은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장무기의 코 앞에 손을 갖다 대 보았으나 이미 숨이 끊겼다.

은리는 돌연 '찰싹'하고 장무기의 뺨을 때리며 독하게 소리쳤다.
"증아우, 정말 죽고 싶어요? 이렇게 쉽게 죽게 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장무기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은리는 자신의 몸으로
장무기를 덮었다. 장무기의 몸이 천천히 식어 가고 있는 것이 느껴
졌다. 은리는 장무기의 내공이 자신보다 훨씬 높다는 걸 잘 알 고
있었다. 그가 운공하여 저항하지 않은 것은 은리 자신의 내공이 강
하지 못해 식지의 독액이 은리 스스로에게 중상을 입힐것을 우려했
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은리의 마음은 말할 수 없는 실의와 혼란에 빠
져서 안절부절 못하고 어느 곳에 머물러야 할지를 몰라 당황했다.
갑자기 어렸을 때의 성정이 포악한 장무기가 마음 속에 불쑥 나타
났다. 은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은리는 점점 환상으로 빠져들어 갔다. 어린 장무기가 그녀를 따라
영사도에 도착하여 두 사람은 함께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다. 그러
나 장무기는 항상 자신의 힘을 믿고 약한 자를 괴롭혀 섬에 있던
새와 독사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없애 버렸다. 자기는 언제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좋은 말로 설득하려는데 그 간악한 장무기가 화가
나서 눈을 부릅뜨며.......

해는 점차 서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고 은리는 싸늘하게 식은 장
무기의 몸 위에 엎드려 조용히 잠들었다. 은리의 표정에는 애정과
증오가 겹쳐 있었다.

오랜 시간을 떠돌던 장무기의 혼이 담시 몸으로 돌아왔다. 몽롱한
가운데서도 자신의 차디찬 몸 위에 부드럽고 따뜻한 무엇이 덮여져
있음을 느꼈다. 가느다란 호흡이 뺨으로 전해져왔다. 구름 같고 안
개 같은 부드러운 향기가 코로 전해 왔다.

장무기는 은리가 부상을 입을까 두려워 진기를 응집하며 버티다가,
체내로 들어온 독액을 억제할 수 없게 되어 혼절해 버렸다. 장무기
는 억지로 버티고 있었고, 은리 또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한 것이다. 은리 몸에 축적되었던 독액이 의식하지 못한 상황에서
모두 장무기의 체내로 흘러 들어갔다. '천주만독수'는 위력이 대단
하여 장무기는 전신이 차가워져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 은
리는 해독제를 갖고 있었으나 그녀의 마음이 정(盡)으로 미혹되어
있어 장무기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설사 은리가 정신
을 차린다 해도 그때는 이미 장무기는 심하게 중독되어 해독제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장무기는 혼절한 후에야 평상시에 체내에 모아 두었던 심후한 내
공이 혈액을 따라 완만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중독이
너무 심해 신공을 움직였을 때에도 장무기의 몸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러나 구양신공은 음한독기(遭吐?褶)와 상극이라 그 움직임에 따
라 한기를 압도하여 장무기의 체내를 돌았다. 조금 지나자 장무기
의 혼은 자연스럽게 마음으로 돌아왔다.

장무기가 막 깨어나려고 하는데 은리가 그의 앞가슴을 부여잡고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무기 오빠, 죽지 말아요, 죽지 말아. 나를 때려도 좋고 욕해도
좋고 물어 뜯어도 괜찮으니 죽지 말아요......."

장무기는 깜짝 놀라 머리를 들었다. 은리의 창백핵던 얼굴이 발그
스레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의 체내에 있던 독액이 완전히 없어
진 것이었다. 하지만 은리는 아직 꿈 속을 헤매고 있었다. 장무기
는 잠시 상황을 정리하여 보았으나 자기가 어떻게 해서 다시 살아
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정무기는 가만히 속삭였다.
"은리, 은리, 일어나. 나 안죽어. 일어나......."
은리는 '끙'하면서 천천히 고개를 들어 멍하니 장무기를 쳐다보았
다. 눈빛이 몽롱하여 마치 장무기가 갑자기 어른이 된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야, 당신은 아니에요. 당신은 장무기가 아니에요. 아! 생각
났다. 당신은 증아우예요."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장무기는요? 무기 오빠 어디로 갔어요? 왜 나를 데려가
지 않는 거지요?"

그녀는 홀린 사람처럼 숲속으로 걸어갔다.
장무기는 그대로 둘 수 없어 몸을 일으켜 쫓아가려 했으나 발에
힘이 없었다. 독액이 아직 모두 제거되지 않은 것 같았으나 은리가
천천히 걸어가고 있어 장무기는 몇 걸음에 그녀를 잡을 수 있었다.
은리의 미혹된 기색에 장무기는 매우 다급해져 그녀의 두 팔을 잡
고 흔들었다.

"은리, 내가 바로 장무기야. 많은 세월이 흘렀으니 너도 컸고 나
도 컸어. 내가 바로 너의 무기 오빠야."
"당신이 정말 무기 오빠예요? 어렸을 적에 나를 깨문 무기 오빠란
말이에요?"

장무기는 창피한 기색을 띠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때는 네가 나를 영사도로 호의로 데려가려는 것을 몰랐기 때문
이었어. 은리, 다시 내게 화내지 말아, 응?"

은리는 장무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 화 안 내. 난 정말 기뻐요. 그럼 당신은 증아우가 아니에요?"
"그때 나는 수차례 속아서 가명을 쓰게 되었지. 그 당시 나는 그
소녀가 너인줄 정말 몰랐었어."
"당신이 정말 무기 오빠예요? 날 다시 물 거예요?"
"은리, 이후로 내가 잘 보살펴 줄께. 다시는 너를 물지 않을 거야."
은리는 길게 탄식하며 실의에 빠진 듯 머리를 가로저었다. 장무기
는 은리가 자신의 말을 못 믿어서 그러는 줄 알고 변명을 하려고
하는데 은리가 말을 가로챘다.

"당신이 정말 장무기라면 당장 무릎을 꿇고 나를 사부로 모셔요."
장무기는 어리둥절했다.
"은리, 무엇 때문이지?"
"영사도에서 당신의 의부 금모사왕(?獰??)이 내 사부 금화파파
(??打打)와 겨룰 때 무공구결을 내게 전수해 주었어요. 그는 화
도(飄隘)에서 깨달은 무공이라며 후에 당신에게 전수해 주라고 하
셨어요."

장무기는 비로소 은리의 무공이 크게 진전된 것은 의부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은리를 사부로 모시면 일이 어색하게 돌
아갈 것이 분명했다. 은리의 나이가 어린 것은 차치하더라도 일단
사부로 모시면 그녀에게 예를 차려야 하니 자유롭게 나다닐 수 없
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은리가 이렇게 하는 데에도 시로 부득이한 이유가 있었다. 본래
금모사왕 사손(?吟)의 무공구결을 전해주는 데 사도지간의 예를
갖출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장무기에 대한 정이 오랜 세월 깊어
있었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무기는 어렸을 때의 고집 세고 오만한
작은 장무기였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다 자라 남을 위할 줄 아는
장무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와 장무기는 모두 정에 쉽게 움직
이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아예 장무기에게 자기를 사부로
모시라고 하면 사도의 명분이 생기니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처리
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은리는 그에게 자기를 사부로 모시라고 하는데도 얌전히 자기의
말을 듣고 있는 장무기를 보며 어렸을 때의 장무기의 모습은 다 사
라졌다고 생각했다. 은리는 화가 나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장무기가 아니에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장무기가 고개를 들어보니 은리의 아름다
운 모습이 이미 황혼 속으로 십 장 밖이나 가 있었고 그 신법의 빠
르기가 마치 귀신과도 같았다. 이런 경공은 자기나 위일소(??尹)
보다 결코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장무기는 은리를 쫓아가려고 했으나 체내의 독액이 아직 완전히
제거되지 않아 하반신에 힘이 빠져 주저앉고 말았다. 은리는 끔인
지 생시인지 그림자를 드리우며 점점 멀어져 가더니 황혼에 싸인
산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망연히 있던 장무기는 은리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깨닫고 비
로소 공력을 움직여 독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한 시진이 지난 후에
야 장무기는 운공을 거두고 일어났다. 때는 이미 밤이 깊어 하늘에
드문드문 별이 떠 있었다.

은리를 사부로 모시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자 장무기는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고, 그 기쁨은 조금 전 그녀와 함께 서로 포옹
하고 있던 정경을 떠올리게 했다. 돌연 마음이 덜컥 내려앉으며 장
무기는 매섭게 자기의 뺨을 때리며 중얼거렸다.

"장무기야, 장무기. 조민은 너 때문에 화가 나서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데 너는 어찌하여 곳곳에 정을 주려 하는가? 정말 죽어 마땅
해."

조민을 생각하자 장무기는 가슴이 두근거려 왔다. 이미 몇 달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전혀 없으니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 길이 없었
다. 눈을 들어 주위를 살펴도 그녀가 갈 만한 곳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주저하던 장무기는 발길 닿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아무 목적 없이 한 달 남짓 떠돌던 장무기는 어느 날 종남산(?辰
雲)이 있는 섬서성 경내의 번천(歪?)에 도착했다. 한조(洞?) 개
국 공신인 번회가 이곳에서 식읍했다 하여 그 이름을 얻었다. 이곳
은 송백이 울창하고 수전(?址)과 채소밭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있
어 강남의 절경을 완연히 보여주고 있었다.

장무기는 종남산이라는 이름이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
았다. 곰곰히 생각하던 장무기는 뜻밖에 두 차례나 자신을 도와준
황삼의 미녀가 생각나 손뼉을 마주쳤다. 또 소림사 뒷산에서 그녀
와 헤어질 때 그녀가 한 말이 생각났다.

"종남산 뒤 활사인묘에 있는 신조협려(佚??億)는 강호와 인연을
끊으셨도다."

'설마 그 황삼 미녀가 종남산 일대에 있는 것이 아닐까? 활사인묘
(???汭)는 또 무슨 뜻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이미 '강호
와 인연을 끊었다'하였으니 자기가 찾는다 해도 헛수고가 될 것 같
았다. 거리를 걷던 장무기는 한 주막을 찾아 들어가 술과 안주를
시켰다.

주막의 한쪽 구석에는 도포를 입고 허리에는 장검을 찬 두 무사가
가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나이는 대략 삼십 세 정도로 보였다.
장무기는 속으로 이곳에서 전진교(???)가 멀지 않으니 이 두 사
람은 필시 전지교 제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장무기는 어릴 때 빙화도에서 의부와 함께 살았었다. 의부로부터
전진교를 설립한 조사야 왕중양(?脹暫)은 천하에서 제일가는 검술
의 고수이며 군웅(潚?)을 이끌고 금나라에 항거한 영웅적 기개를
지닌 영웅호걸이었다고 들었다. 문하에 일곱 제자를 두었는데 '전
진칠자(???侏)'라고 불렸으며 그들 모두 무예가 탁월하고 용감
하며 의협심이 강하다는 것을 세상에서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그
런 전진교에서도 제 삼대 제자 중에서 반역자가 나왔는데 이름이
조지경(???)으로 금국 무사 금륜법왕과 결탁하여 전진교를 무너
뜨리고 조정에 투항하려 했었다. 전진교의 고수들은 화를 내며 떠
나거나 혹은 살육 당했으며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원 조정에 귀의
했다. 백여 년이 지난 지금, 전진교는 이미 세력이 쇠퇴하였다. 그
옛날 강호에서 당당한 위세를 날리던 전진교도 지금은 다만 삼사류
의 역할 밖에 못하고 있었고 더이상 그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이조
차 없었다. 지금의 전진교 교주는 백안덕룡(頑?鴦汝)인데 조정에
서 임명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장무기도 아는 것이 많
지 않았고 강호에서도 특별히 언급하는 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아
마도 무공을 할 줄 모른는 사람인 것 같았다.

주막집 아이가 술상을 차려 오자 장무기는 천천히 마시며 곁눈으
로 두 남자를 주시했다.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사형, 이번에 하산해거 옥봉(??)과 맞설 수 있는 방법을 알아
냈으니 큰 공을 세우신 겁니다. 자, 자, 사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
다."

사형이라고 불린 곱슬곱슬한 수염을 한 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사제, 무슨 말인가? 공로를 논하자면 어찌 우매한 형인 나 혼자
독차지 할 수 있겠는가? 사제 몫도 있지! 자, 자, 건배부터 하고
이야기 하세!"

사제라 불린 몹시 여윈 사내는 그 말을 듣고는 매우 기뻐하며 건
배한 후 공손하게 사형에게 술을 한 잔 가득 따랐다.

"옥봉이 우리를 백여 년 넘게 괴롭혀 왔는데 이번에 제게하게 되
면 활사인묘에 수많은 무공비급이 있을 테니 우리 전진교는 다시
위세를 떨칠 수 있게 되겠군요."

장무기는 '활사인묘' 네 글자를 듣자 저도 모르게 놀랐다. 두 사
람의 대화로 보아 '활사인묘' 주인에게 불리한 일이 꾸며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장무기는 이 일을 자기가 안 이상 방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제 3 장 : 종남산의 황삼 미녀
두 사람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으나 장무기를 속이지는 못했다.

사제는 이어서 말했다.
"사형, 자신 있으신지요?"
곱슬곱슬한 수염의 사나이는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사제가
채근하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옥봉은 정말 불가사의해요. 일전에 제가 잘못하여 쏘였는데
전신이 가렵고 아파서 정말 참기가 어려웠지요. 만약 양빙(斫?),
그 못된 년이 갑자기 동정심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도 벌
써......."

'양빙? 양빙이 누구지? 설마 양씨인 황삼 미녀는 아니겠지? 만약
정말 그녀라면 버릇없는 이 녀석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곱슬곱슬한 수염의 사나이가 웃으며 말했다.
"네가 교(?)의 규칙을 어기고 금지구역에 들어갔으니 어찌 그런
꼴을 당하지 않겠느냐?"

깡마른 사나이가 비웃으며 말했다.
"이 아우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 전진교의 사람들에
게 무슨 금지구역이 있단 말입니까?"
"사제, 너나 나나 다 알지 않는가? 무얼 숨기려고 그러나? 사실
전진교의 사제들이 자네가 그 백의의 하녀를 사모하여 금지구역으
로 들어갔다가 옥봉에 쏘인 것을 모르는 줄 아느가?"

깡마른 사나이는 겸연쩍게 웃으며 그 말을 시인하는 듯했다. 곱슬
곱슬한 수염의 사나이가 또 말했다.

"기실, 사형들도 누구나 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다만
너처럼 이렇게 애가 타서 그러지는 않는 것 뿐이지. 이번에 활사인
묘를 공격하면 형제들에게 행운이 올 것이야. 하, 하, 하,......."

장무기는 전진교 문하의 도사가 이렇게 방자한 것에 노기를 느끼
고 두 사람이 있는 탁자 앞으로 다가가 앉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두 분 도형(??), 소인이 결례를 무릅쓰고 한마디 여쭙니다."
곱슬곱슬한 수염의 사나이는 장무기의 수중에 있는 칼을 보고 강
호 인물일 것이라 짐작하고는 순간 경계의 눈빛을 보였다.

"호한께서 무슨 일을 알고 싶어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저는 활사인묘의 주인과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데 두 분 도형
께서 활사인묘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실 수 있는지요?"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미천한 저의 성은 진(?)이고 이름은 유량(?馭)입니다."
두 사람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진 장로께서 개방의 유명하신 대영웅
이신데 실례를 범했습니다. 빈도(??)는 전지교 제자 장덕재(遵鴦
?)이며 이 자는 빈도의 사제 손덕무(誾鴦俉)이옵니다."

손덕무는 겸손하게 송수하며 말했다.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진 장로께서 양빙(斫?)과 무슨 불화
가 있으신지 모르겠군요?"

장무기는 그때야 비로소 황삼 미녀가 양빙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리고 진유량의 명성이 이렇게 높은 줄도 알게 되었다. 장무기는 그
의 이름을 사칭하였기에 들키지 않으려고 즉시 말했다.

"나는 이제 개방파가 아니오. 순전해 내 개인적인 일 때문에 온
것이오."

두 사람은 그가 제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자 더이상 캐묻지 않고
점원을 불러 안주를 더 주문하였다. 장무기가 물었다.

"방금 두 분 도형께서 옥봉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요?"

손덕무는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자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것은 일종의 훈련받은 흰색의 벌인데 그 벌에 한 번 쏘이게 되
면 활사인묘의 독문(??) 해약이 없이는 필히 죽고 만답니다. 히
히, 그러나 지금은 괜찮아요. 우리 사형이 나서면 그 옥봉도 이제
는 위협이 될 수 없습니다."

장무기는 '아'하고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장 도장, 한 번 보여주실 수는 없는지요?"
무림에서는 본래 이런 일은 굉장한 기밀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러
나 두 전진교도가 진유량을 겪어 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악명은 일
찍이 들어서 알고 있었으며, 더욱이 자기들과 의기가 투합되는 것
같았고, 또한 그의 말투로 보아 양빙과 사이가 나쁜 듯하여 자기들
에게 큰 협조자가 나타난 것 같아 더아상 꺼리지 않고 말했다.

"백여 년을 전진교의 많은 사람들이 이 옥봉 때문에 피해를 입었
는데 아무런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빈도가 우연히 한 서역 무
사와 이야기를 하다가 그 무사에게서 큰 사막에 사는 검은색 말벌
이 옥봉만 먹고 사는 천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역에 가서 몇 달을 찾아 헤맨 끝에 그 말벌을 찾아내었지요. 자,
바로 저것입니다."

그는 방 구석에 있는 벌상자를 가리켰다.
"이번에 진 장로께서 도와주신다면 그 활사인묘를 쳐부수는 데 무
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두 사람이 호쾌하게 웃자 장무기도 따라서 웃음을 지었으나 마음
속으로는 말벌 상자를 없앨 궁리를 하고 있었다.

백여 년 전, 전진교 창시자가 된 양중양에게는 사매 임조영(??
苧)이 있었는데 무공이 매우 비범하였다. 왕중양은 그 당시 제일의
고수로 무림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의 사매 임조영은 왕중양
을 사모하고 있었으나 왕중양은 금나라에 대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녀간의 정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종남산에 있는 활사인
묘를 수리하여 그곳에 병기와 양식을 숨겨 놓고 금나라에 항거하는
데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그 후에 거사가 실패하자 그는 활사인묘
에 은거하였다. 그때 임조영이 그에게 결투를 제의했고 만약 왕중
양이 지면 활사인묘를 그녀에게 살게 하고, 그녀가 지면 자살하겠
다고 제의했다. 왕중양은 어찌 사매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연분이 닿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무예 시합에서 임조영은 계
략을 써서 왕중양을 이기고 활사인묘에서 살게 되었다. 왕중양은
활사인묘를 나와 그 옆에 초옥을 짓고 전심으로 수도하였고 종남산
은 후에 전진교의 성지가 되었다. 왕중양은 활사인묘 주위에 선을
긋고 금지구역이라 선포하고 엄규를 정해서 전진교의 상하 모든 이
들이 활사인묘 부근에 접근을 못 하도록 했다. 임조영 역시 활사인
묘에서 일파를 창시하여 고묘파(召汭駝)라 칭했다.

그녀의 선배 중 소용녀는 신조대협 양과와 결혼하고 강호를 은퇴
했는데 그 후 그들의 행방을 아는 이들이 아무도 없었다. 고묘파의
무공은 전적으로 전진교의 무공과 맞서기 위해서 만들어진 무공이
라 전진교 문하 제자들은 교의 엄한 문규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내심 꺼려지기 때문에 활사인묘 부근에 가서 쓸데없이 일을 만들려
고 하지 않았다. 백여 년 동안 닭 울고 개짖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살았어도 늙어 죽을 대까지 한 번도 왕래하지 않아 서로 평
안무사 하였다.

이 내용은 장무기는 말할 것도 없고 눈앞의 전진교 문하 제자들도
모르고 있는 사실이었다. 세월이 덧없이 흘러 백여 년이 지나가고
전진교 문하에고 호색한이 간혹 있어 활사인묘 부근에서 아름다운
소녀들의 모습을 보고는 마음이 설레였지만 활사인묘는 옥봉의 위
력을 갖고 있어 아예 싸움이 시작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전진교에
서 진심(?入)을 일으킨 자들이 생겨났는데 최초로 시도했던 자인
쇠코(일명 고집불통)도사를 비롯하여 모두 옥봉에게 당했다. 그래
서 전진교의 상하 모두 옥봉을 언급하면 안색이 변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 무서운 옥봉도 장덕재가 구한 말벌 때문에
모두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장덕재는 말벌 한 상자를 들고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술
값을 내고 산을 올랐다. 장무기는 다만 뒤를 따를 뿐 말이 없었다.
보광사를 지나 금련각에 다다르자 거기서부터 험준한 길이 시작외
었다. 가까스로 험준한 길을 빠져나오니 돌무더기가 자잘하게 흩어
져 있고 절벽에 굴곡이 심한 언덕으로 길이 나 있었다. 일월암을
지날 때는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포자암에 다다랐을 때에는 초
승달이 산 사이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포자암(?侏?)은
그 형상이 마치 한 부인이 아이를 안고 있는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었다.

장무기는 계속 이 두 도사와 함께 갈 것인지 여부에 대해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지교가 이미 쇠퇴했다고는 하지만 빈자들이 산을 내려와 강호를
다니다가 진유량을 본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기가 가짜인 것ㅇ르
식별해낸다면 매우 성가신 일이 생길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진교가 이와 같이 조사야의 유지를 저버리고
양빙과 맞서려고 하니 자기는 이 일을 수습하여 양빙을 만날 때 선
물고 주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 자기가 갑자
기 그녀를 찾아갈 명분이 없을 것 같았다. 장무기는 이런 생각이
들자 두 사람과 잡담을 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더 걸어가니 정면에 큰 암석이 길을 막고 있었다. 그 형상
이 음산하고 기이하여 마치 한 노파가 허리를 구부리고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장무기는 은밀히 경계를 하였다. 세 사람이 모퉁이를
두 번 돌아서니 시야가 트였다. 송림 사이로 연못이 보였고 맑은
연못에는 달이 떠 있어 아늑함을 느끼게 하였다. 연못을 지나자 산
을 이고 지어진 전진도관(????)이 보였다. 도관은 달빛 아래
우뚝 솟아 있었는데 그 옥영(?財)이 아물거리며 끊임없이 이어져
그 기세가 자못 웅대해 보였다.

정원을 지나 세 사람은 대전에 다다랐다. 한 도동(??)이 들어가
통보하자 잠시 후애 전진교 교주 백안덕룡이 나왔다.

그는 키가 크고 수염이 백발이며 용모는 약간 야위어 보였으나 건
신에서 선풍도골(?憚?誦)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장무기는 이 사
람이 무공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것 같아 보여 순간 멍했지만 즉시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전진교 교주는 황제가 봉(?)하니 대개
무공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장과 손, 두 사람에게 교주 백안덕룡이 냉랭하게 말했다.

"장덕재, 너는 제멋대로 하산하여 반 년이 넘어서 돌아왔는데 도
대체 왜 그랬느냐?"

장무기는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제멋대로 하산? 그렇다면 교규
(??)에 의해 징벌을 받아야 하는데......'

장덕재는 움츠러들지 않고 도리어 기뻐하며 말했다.

"교주 대인께 아룁니다. 제가가 제멋대로 하산한 것은 서역에 가
서 무서운 말벌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벌은 옥봉을 즐겨 먹으
니 바로 눈엣가시인 활사인묘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백안덕룡은 안색은 여전히 얼음같이 차가웠다.
"활사인묘에서 너를 건드렸느냐?"
"그들의 옥봉이 자주 사형제를 쏘아 죽게 해서......."
백안덕룡은 '흥'하며 코웃음을 쳤다.
"장덕재, 너도 알겠지만 옥봉은 금지구역을 보호하도록 잘 훈련이
되어 었다. 만약 교의 규칙을 어기고 금지구역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마땅히 옥봉에 쏘여 죽어도 싸다."

장덕재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고 백안덕룡은 질타가 어둠을
뚫고 계속 이어졌다.

"출가한 사람이 당연히 청정하게 도를 수행해야지 어찌 그리 경거
망동하느냐? 네가 제멋대로 하산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요, 청규(?
?)를 지키지 않고 살기를 경솔하게 부리려 했으니 그 죄가 둘이니
라. 어떻게 너를 처벌해야 하겠느냐?"

장덕재가 중얼거렸다.
"이거...... 이건......."
그의 얼굴에는 두려워하는 빛은 조금도 없고 오히려 증오의 빛이
떠올랐다.

"이곳은 출가인이 수도하는 조용한 곳이다. 네가 만약 지내기에
익숙치 않다면 떠나거라."

말을 마친 교주는 장덕재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리를 떴다.
그는 장무기를 보고 못 본 듯이 지나갔다.

장무기는 어리둥절했다. 천하에 각방 각파의 장문인 중 절기를 지
니지 않은 이가 없는데 아무리 백안덕룡이 전혀 무공을 모른다 하
더라도 문하 제자가 교칙을 위반한 데 대해 이렇게 간단하게 몇 마
디 훈계만 하고 말다니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장덕재와 손덕무는 무안하고 멋적어하며 장무기를 이끌고 자기들
이 머무는 곳으로 돌아왔다. 장덕재가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하자
장무기가 살며시 위로하는 척 물었다.
"장 도장, 외람되지만 교주가 어째서 도장에게 그렇게 대하지요?"
장덕재가 '흥'하며 대답이 없자 손덕무가 대신 대답했다.
"실로 자기 얼굴에 침 뱉기지요!"
장무기는 일부러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그러는데요?"
"교주는 황제가 지지해 주고 있어 우리 사형제들을 너무 엄하게
통제하고 있어요. 흥, 언젠가 이 어르신네께서 더 못 참게 되면 그
냥 단검에......."

장덕재가 급히 소리 지르며 말을 막았다.
"사제, 허튼소리 하지 말게!"
손덕무는 상관없다는 투로 고개를 저었다.
"사형, 덕자 돌림의 형제들은 사형의 무공에 경탄하지 않는 사람
이 없어요! 모든 사람이 사형이 교주가 되기를 바라고 있고 그렇게
되면 형제들이 통쾌해 할 겁니다. 황제가 쓸데없이 참견을 해서 닭
한 마리 붙들어 맬 힘도 없는 사람을 교주로 파견하여 이렇게 형제
들을 억압하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겠단 말이에요. 모든 형제들
은 벌써부터 답답해서 참기 어려워하고 있어요. 지금 당장이라도
사형께서 고개만 끄덕이시면 이 사제는 저 흐리멍텅한 늙은이를 없
애 버리겠습니다."

장덕재는 눈빛을 반짝였다가 얼른 감추었다.
"사제, 너무 늦었으니 진 장로를 쉬시게 해드리세. 내일 우리는
양빙, 그 못된 년을 결단내러 가자구."

두 사람은 방을 나갔다. 오늘 밤 두 사람이 행동을 취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장무기는 냉소를 터뜨리며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혔
다. 삼 경이 지나 밤이 깊어지자 장무기는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
가 백안덕룡이 거주하는 곳으로숨어 들어갔다.

그의 문 앞에 다가가서 보니 방 안에는 불이 환히 켜져 있었고 백
안덕룡은 손에 불진(旴?)을 들고 수양하고 있었다. 장무기가 어떻
게 할까 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백안덕룡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주께서는 기왕에 오셨으니 들어오셔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떠신지요?"

장무기는 이 늙은 도인의 불가사이한 능력을 기이하게 여겼다.
'나와 같은 경공술을 갖춘 자는 세상에 몇 사람 없는데 어떻게 이
늙은 도인이 뒤에 있는 사람을 알아낼 수 있었을까?' 장무기는 문
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깊은 밤에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백안덕룡은 환하게 웃었다.
"시주께서는 자애로우신 마음에서 오신 것인데 어찌 죄가 있겠습
니까? 앉으시지요."

장무기는 더욱 이상하게 여겼다. '어떻게 내가 무엇을 하려 하는
지 다 알고 있지?'

"시주께서는 매우 놀라셨겠지요?"
장무기는 더이상 변명을 하지 않고 끄덕였다. 백안덕룡이 흥미롭
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노도(??)가 올해 몇 살인지 시주는 아시겠소?"
장무기는 늙은 도인의 안면을 살폈다. 그의 수염과 머리가 비록
모두 백발이 되었지만 두 눈동자는 마치 동자(?侏)와 같이 흑백이
분명하여 대강 추측을 말했다.

"도장께서는 올해 고희 정도 되셨습니까?"
백안덕룡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직이 말씀드리자면 이 노도는 이미 백 살이 넘었습니다. 제가
천상(?蝟)을 우러러보니 내 수명이 아직 삼 년이 남아서 오늘 밤
죽음에 이르지 않을 것 같은데 시주께서 많은 수고를 해주셔야겠군
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장무기는 들을수록 이상하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백안덕룡이 계속
말했다.

"나는 본래 금나라 사람인데 스승에게 무예를 전수반은 후에 궁중
에 들어가 황제의 신임을 얻어 비로소 이 임무를 받고 파견된 것이
오. 이 늙은이는 본래 한가로이 구름과 들 사이를 노니는 학처럼
살았는데 전진일파가 몇 년도 안 되어 멸망할 것을 알고 같은 길을
걷는 사람으로서 정을 생각하여 이 관중(?猖)에 와서 주관하게 된
것이지요. 빈도가 천의(?倧)를 저버리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곳에 온 것은 실은 전진의 유적(除?)을 수집
정리하기 위한 것뿐이오. 왕년에 기세가 당당했던 전진일파가 몰락
한다 해도 기록조차 모두 없어지는 우매한 짓을 당하는 것은 면해
야겠지요."

장무기는 숙연해지며 경의를 표했다.
"도장께서 선풍도골이시어 비상한 능력을 갖추고 계시지만 문하
제자 중에 다른 뜻을 품은 자가 있으니 도장께서는 몸조심 하셔야
겠습니다."

덕안백룡은 엷게 미소를 지으며 장무기를 바라보았다.
"시주께서는 안심하십시오. 모든 일은 하늘이 정하니까요. 당신이
다시 중원으로 돌아갈 때, 그때 오셔서 이야기를 나누셔도 무방하
지요."
"중원으로 돌아갈 때?"
"시주의 자애로운 마음씨에 이 노도는 경모(?渶)하는 마음이 생
기는군요. 그러나 시주께서는 아직 긴요한 일이 있으시니 우린 여
기서 이별해야겠습니다."

말을 마친 백안덕룡은 불진을 휘두르며 천천히 내실로 걸어 들어
갔다. 도포가 가벼이 또 있는 것이 흡사 신선의 모습과 같았다. 장
무기는 그 자리를 떠나는 백안덕룡을 보면서 속으로는 한줄기 의구
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내게 무슨 긴요한 일이 있지?'

순간 '퍽'하는 가벼운 소리가 들리더니 한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
다. 장무기는 재빨리 몸을 문 뒤로 숨겼다. 그 사람 손에는 장검이
들려 있고 살며시 문을 밀고 들어오는데 자세히 보니 손덕무였다.
장무기가 한 팔을 휘둘러 장풍으로 촛불을 꺼버리니 실내는 순식간
에 칠흑 속에 싸였다.

손덕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누가 매복해 있는 줄 알고 급히 뒤로
돌아서 문 밖으로 도망가려 했으나 문은 이미 장무기에 의해 닫혀
져 있어 그대로 '꽈당'하고 문짝에 부딪혔다. 등골이 너무 아파 참
기 어려워 자신도 모르게 '아야'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얼른 일
어나 장검무(只盛塢)를 펼치며 온몸의 빈틈을 가렸다.

장무기는 냉소를 터뜨리며 마음 속으로 그를 오늘 단단히 놀래 주
지 않으면 이후에도 분명히 다시 찾아오리라 생각했다. 장무기는
건곤대나이심법으로 좌장을 한 바퀴 돌리고 우장을 이어 돌렸다.
'휙'하는 바람소리만 들렸으나 손덕무는 자신의 장검으로 자신의
왼팔을 찔렀다.

손덕무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조심하지 않은 자신을 질책하느
라 중얼거렸다. 숨을 죽이고 기를 안정시킨 손덕무는 장검무 자게
를 취하며 문 밖으로 도망가려 했다.

장무기는 쌍장을 또 한 번 휘둘렀다. '쉭' 소리가 나며 손덕무는
자신의 장검으로 자신의 왼족 손목을 싹둑 자르고는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 잘려나간 손의 다섯 손가락은 여전히 문짝을 잡고 있었다.

손덕무는 이제야 자기가 잘못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아연실
색하고 있었다.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라 좌우를 분간할 수 없
었다. 손덕무는 '쿵'하며 무릎을 꿇고 떠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신...... 신선님...... 목...... 목숨...... 목숨만 살려줍쇼...
...."
손덕무가 무릎을 꿇자 장무기는 전곤대나이심법을 거두었다. 장
무기는 그를 충분히 놀라게 했으니 감히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생
각하고 살며시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는 신속하게 한 발을 날려
손덕무를 문 밖으로 차버렸다. 손덕무는 여전히 살려달라고 애원하
고 있었다.

장무기는 방 바닥에 떨어진 장검을 집어들고 약간의 운력을 써서
장검을 마당에 쓰러져 있는 손덕무에게 던졌다. '쨍그렁'하며 장검
이 손덕무 앞에 꽂히려는 찰라 '파파팍'하고 몇 번 소리가 나더니
장검은 이미 잘게 잘려 바닥에 흩어졌다.

이 수법은 장무기가 여양왕부에 서찰을 보낼 때 썼던 수법으로 지
금은 도력(?淹)을 그때 보다 훨씬 많이 사용하여 그 진동으로 장
검이 잘게 잘리도록 한 것이다.

손덕무는 가슴이 미친 듯이 뛰며 안색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그
는 문 안으로 들어선 후 일초식도 겨루어 보지 못하고 심지어는 상
대가 누군인지 모른 채, 자기 스스로 찌르고 손목을 잘랐고 또 발
길질에 채였다. 상대의 무공이 마치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
라고 여기고 황망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비
실비실 도망가기는 하면서도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장무기는 그가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느긋하게 방으로 돌아왔다.
그가 막 잠이 들 즈음 밖에서 두런두런 수근거리는 소리가 창문 너
머로 들려왔다. 밖으로 나온 장무기는 소리가 나는 곳을 더듬어 찾
아 갔다.

소리나는 방의 창문 밑으로 다가가니 장덕재의 성난 목소리가 들
려왔다.

"사제,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손덕무는 너무 놀라 아직도 진정이 안 되어 정신이 없었다.
"귀신, 귀신, 귀신......."
장무기는 빙긋이 웃으며 동멩이 하나를 집어 지붕 위를 향해 던졌
다. 장덕재는 갑자기 지붕 위에서 나는 '달그락'하는 소리를 듣고
소리를 질렀다.

"누구냐?"

말도 채 끝나기 전에 이미 검을 빼들고 지붕 위로 뛰어 올라가 있
는 것을 보니 신법(壬擾)이 느리지 않았다.

이때 장무기는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가 손덕무가 미처 고개를 돌
리기 전에 그가 잠이 들드록 혈도를 짚어버렸다. 이어서 장을 뻗어
의자와 탁자를 문지르고 난 후 구석에 있는 말벌 상자를 안고 재빨
리 방을 빠져 나왔다.

장덕재는 지붕 위에서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사람이라고는 그림자
도 안 보이자 방 안으로 되돌아왔다. 돌아와보니 손덕무가 손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잠이 들어 있자 욕을 해댔다.

"지금이 몇 시진인데 잠에 곯아떨어질 수 있지?"

장덕재가 의자에 앉으려 하자마자 넘어질 뻔하여 급히 손을 뻗어
탁자를 잡았다. 그러나 탁자가 와르르 하고 산산이 흩어져서 장덕
재는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갑자기 톱밥 냄새가 방 안에 진동했
다. 고개를 숙여 바닥을 바라보던 장덕재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알고 보니 탁자하고 의자는 누군가가 굉장한 수법으로 진동을 가하
여 이미 조각이 나 있었다.

눈을 들어 방 안을 둘러본 장덕재는 앞이 캄캄했다. 자기가 반년
을 고생해서 서역에서 가져온 말벌 상자가 없어진 것이다. 즉시 검
을 움켜잡은 장덕재는 방을 뛰쳐나와 진유량의 방으로 갔다. 그러
나 방안뿐만 아니라 그 어디에더 진유량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었
다. 흥분한 정덕재는 진유량의 십팔 대 조상까지 욕을 해대고 있었
다.

x x x
말벌 상자를 품에 안은 장무기는 장덕제와 손덕무한테서 활사인묘
로 가는 길을 알아놓았기에 즐겁기 그지 없었다.

차 반 잔 마실 시간을 흥겨운 기분으로 걸어가다보니 발 아래에
무엇인가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머리를 숙여 보니 석비(?橒)였다.
밝은 달빛이 비춰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이곳은 금지구역이니 타인의 통행을 금지한다.'
시간이 아직 이른 탓인지 숲속은 바람소리조차 없이 고요했다. 지
금은 찾아가기에 너무 이른 시간인 것 같아 장무기는 난처했졌다.
말벌 상자를 땅 위에 내려놓은 장무기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밝은 달은 비스듬히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몇 개의 별들이 반짝이
고 있는 하늘은 매우 맑고 짙푸르게 보였다. 장무기는 넋을 잃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장무기는 여전히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 소리는 야색이 짙은 고요한 숲속에 색다른 분위기
를 만들었다. 그러나 기묘한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장무기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장무기는 갑자기 안색이 변하며 급히 몸을 일으켜 주위를 살폈다.
새하얀 안개 구름이 숲 깊은 곳에서 무언가 자기를 향하여 날아오
고 있었는데 바로 극독을 지닌 옥봉이었다.

'양빙의 횡포가 이렇게 심한 줄은 미처 몰랐네. 나는 아직 금지구
역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는데 어찌 이와 같이 대할 수 있는가?' 장
무기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뛰어 도망치자니 위엄
을 잃고 안 뛰자니 옥봉에 쏘일 것 같아 즉시 구양신공을 운공하여
정신을 집중하고 서 있었다. 구양신공이 옥봉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을지는 그도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옥봉은 경계 표시인 비석이 있는 곳까지 날아오르더니 공
격은 하지 않고 허공에서 횡르로 오밀조밀하게 열을 서서 전쟁터의
병사들이 대오를 정비하듯 하여 마치 장무기를 감시하는 듯이 바라
보고만 있었다.

장무기는 옥같이 맑고 눈부신 옥봉을 노려보며 만약 이 조그마한
것들이 몽땅 덤벼들면 어떻게 하나 하여 머리털이 쭈삣쭈삣 섰다.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있을 때 갑자기 '파닥파닥'하는 소리가 들렸
다. 발 옆에 있는 상자 속의 말벌들이 옥봉의 냄새를 맡고 밖으로
나오려고 애쓰는 소리였다. 장무기는 불현듯 방법이 생각나 운기조
식하여 목소리를 모아 활사인묘를 향하여 소리쳤다.
"소인은 인사드리려고 온 것이지 별다른 뜻이 없사오니 옥봉을 물
러나게 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서역의 말벌을 풀어 놓겠습니다."

홀연히 숲속에서 요금(??) 소리가 들려오는데 그 소리는 매우
긴장되어 있었다. 옥봉들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더니 눈깜짝할 사이
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필히 그 주인이 말벌의 위력을 알고 있
어 급히 옥봉을 불러들인 모양이었다.

장무기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숲속에서 홀연히 금 타는
소리가 다시 퍼지더니 잠깐 사이에 소(淪) 소리와 금 소리가 어우
러져 들렸다. 비록 장무기가 음리(釣衍)에 문외한이라 해도 은은히
들리는 금소(?淪) 소리에 질책의 뜻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달빛 아래로 백의의 소녀 네 명이 천천히 나타났다. 각자 손에는
요금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장무기와 이 장(晙) 거리를 두고 걸음
을 멈추었으나 금 연주는 계속했다. 그 소리는 은근하고 길게 이어
져 들리는 듯 마는 듯했다. 여인들이 들고 있는 요금은 보통 칠현
금보다 반이 짧고 폭도 반이 좁아 보였다. 그래도 칠현을 구비하고
있었는데 청초하고 절속한 듯한 네 명의 백의 소녀에게 안겨 있으
니 요금이 더욱 귀여워 보였다.

이어서 숲속에서 다른 네 명의 흑의의 소녀가 각자 흑관장소(閒?
只淪)를 들고 나오는데 소신(淪壬)은 일반 소에 비해 반이 길었다.
네 명의 흑의 소녀와 네 명의 백의 소녀가 엇갈려 서 있으니 네 개
의 흑백이 합쳐져 그 대조가 너무나도 선명했다.

음악 소리는 부드럽고 우아했다. 은은히 퍼지는 소리를 뚫고 숲속
에서 엷은 황삼을 입은 미녀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녀의 두 걸음
뒤에는 녹삼의 소녀가 두 손으로 장검을 받쳐 들고 있었다. 황삼
미녀는 양빙(斫?)이었고 녹삼 소녀는 그녀의 무기를 떠받치고 있
었다.

황삼 미녀는 대략 이십칠팔 세로 보였다. 자태는 단아하고 아름다
워 마치 세속을 초월한 것 같았다. 다만 달빛을 받은 그녀의 얼굴
이 너무 창백하여 혈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장무기는 자
기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지금 나온 사람은 활사인묘의 주인, 그리
고 장무기를 몇 차례 위험에서 구해준 양빙이었기 때문이었다.

양빙은 발자국 소리를 듣고 즉시 벌을 풀어 놓았었는데 누군가가
서역 말벌을 풀어 놓겠다고 위협하자 크게 놀랐다. 그러나 달빛 아
래 서 있는 사람이 장무기임을 알자 더욱 놀랐다. 양빙은 언짢은
기색으로 훈계했다.

"장무기, 당신도 이제 다 컸는데 아직도 이렇게 조리와 순서가 없
소?"
"누님, 이...... 이건......."
한 백의 소녀가 장무기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참지 못하여 '푸'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장무기는 더욱 부
끄러웠다. 양빙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장 대교주, 명고를 돌보지 않고 무슨 일로 이곳에 오셨소?"
장무기는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몰라 말을 더듬었다."
"나...... 나......."
양빙은 그의 발 옆에 있는 말벌 상자를 반견하고 안색을 흐리며
차갑게 말했다.

"장무기, 말벌을 왜 이곳으로 가져 오셨소?"
여덟 명의 소녀는 양빙이 이와 같이 묻자 갑자기 안색이 흐려졌다.
그녀들도 말벌이 옥봉과 상극임을 아는 것 같아 보였다. 장무기는
그렇다면 오해를 빨리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장무기는 당황하여 두서없이 원인과 결과를 자세히 이야기하며 끝
으로 말했다.

"누님, 만약 믿지 못하겠거든 우리 전진교에 가서 대질합시다."
양빙은 처음에는 눈살을 찌푸리고 장무기의 조리없는 설명을 듣고
있다가 지로소 그를 오해했다는 것을 알고 살짝 웃으며 애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장 대교주의 도움에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소녀는 이 상자를 예
로써 받겠습니다."
장무기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누님,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옆에 있던 시녀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장무기는 왜 그러
는지 몰라 의혹에 찬 눈빛으로 그 흑의의 시녀를 쳐다보았다. 양빙
은 아름다운 얼굴에 차가운 빛을 띠었다.

"무례하구나! 혼 좀 나야 되겠군."
그 시녀는 혀를 내밀더니 장무기를 보며 여전히 익살스러운 표정
을 지었다. 양빙이 겸손하게 말했다.

"장 교주, 멀리 오시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묘에서 잠시 쉬어 가시
지요."
"누님, 난 이미 교주가 아니에요."
양빙은 장무기가 연신 누님이라고 부르자 양볼이 발그스레 상기되
어 그가 교주를 그만두었다고 하는데도 잘 알아듣지 못하고 몸을
돌려 앞으로 향했다. 장무기는 양빙을 따라가면서도 어째서 아홉
명의 시녀들이 깔깔대며 신색이 은밀해지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숲 사이를 지나 묘 앞에 다다른 양빙이 무엇을 움직이자 커다란
바위가 천천히 움직이더니 동굴이 하나 나타났다.

"장 대교주, 안으로 드시지요!"
여덟 명의 시녀는 깔깔거리며 두 사람 옆을 지나 동굴로 들어갔고
양빙의 얼굴이 발그스레 변했다. 장무기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양빙은 석문을 닫은 후 장무기를 동굴 안으로 안내했다.

동굴 안에는 횃불이 매우 밝았고 공기도 맑고 신선하여 동굴 밖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평상시에는 횃불을 밝히지만 시녀들이 당신을 귀빈으로 모시는데
어두워 잘 보이지 않을까봐 불을 밝혔군요."

장무기가 말하고 있는 양빙을 바라보니 횃불 아래 그녀의 볼은 약
간 발그스레하여 온화하고 점잖으며 귀한 티가 나서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양빙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앞장서 걸었다. 장무기
는 황삼을 걸치고 바람 같이 걷는 양빙의 모습이 선녀의 가벼운 걸
음걸이 같이 신묘(佚濊)하기 이를 데 없다고 생각했다. 동굴 깊은
곳에서 가끔 소녀들의 애교 섞인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동굴 속에
는 따사로운 향기가 흐르고 있어서 장무기는 심신이 흔들리자 급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장무기야, 장무기, 조민의 마음을 저버리면
안 된다.'

구부러진 길을 몇 번 돌아 마침내 양빙이 손으로 석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 왔어요."

석실로 들어가니 가운데에 돌탁자가 놓여 있었으나 의자는 없었다.
벽면에 있는 돌침대 위에는 흰 명주가 횡으로 걸려 있을 뿐 다른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장무기는 호기심이 일었다.
"누님, 평상시 정말 불을 안 켜나요?"
양빙은 사랑스럽게 웃었다.
"나는 태어나서부터 이곳에서 살아 이미 습관이 되어 불을 밝히든
안 밝히든 마찬가지예요."
"불을 끈 후에는 어떤 느낌인지 정말 모르겠군요."
양빙은 홍조를 띠며 돌연 소리를 높여 말했다.
"소취(蹂?), 몰래 엿보지 말고 귀빈이신 장 대교주의 분부를 들
었으면 어서 불을 끄거라!"
깔깔거리는 웃음 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고 곧이어 한 흑의 소녀
가 흰 팔을 가볍게 휘두르니 모든 불이 일시에 꺼져버렸다.

옥내에 순식간에 짙은 어둠이 깔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장무기
는 마음이 이상해져 할 말이 없어도 무슨 말이든 해야만 할 것 같
았다.

"정말 상상하기 어렵군요. 당신들은 이런 곳에서도 어려움없이 생
활할 수 있다니......"
"이렇게 지내는 게 습관이 되면 자연히 볼 수 있답니다. 못 믿겠
거든 당신도 시험해 봐요."

장무기는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두근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양빙도
방금 실언한 것을 알아차렸는지 더이상 말없이 묵묵히 있었다.

이곳에는 한줄기 빛도 조그마한 소리도 없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양빙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장 대교주...... 장무기, 왜 교주를 그만두었지요?"
"나는 어쩔 수 없이 교주가 된 것이었어요. 일개 소생에 불과한
내가 명교의 많은 영웅호걸들을 어찌 호령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일찍 자리를 양보한 것이지요."

양빙은 사랑스럽게 웃었다.
"소림사 소실산에서의 당신 모습은 당당한 교주의 모습이었는데요."

장무기는 저도 모르게 긴 탄식이 나왔다. 장무기가 명교교주를 그
만 둔 것은 주원장(錯?汁), 서달(愈阿) 그리고 상우춘(位瀞春) 때
문 이었으나 차마 그런 권력에 눈이 먼 사람들 때문에 교주 자리를
양소에게 내어 놓았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더없이 쓰려왔다.

양빙은 장무기에세 말할 수 없는 고충이 있었다는 것을 느끼고 더
이상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장무기, 항상 함께 있던 소저는 누구였지요? 내가 듣기로 그녀는
몽고인이라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이 말은 또 장무기의 근심을 건드렸다.
"그녀가 몽고인이라는 것은 사실이에요. 조민이라고 하지요. 그런
데 제가 그만 그녀에게 잘못을 저질러 그녀가 떠나버렸는데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어요. 그래서 지금 그녀를 찾고 있지요."

양빙이 고의는 아니었으나 두 번이나 그의 아픈 상처를 건드린 데
대해 사과의 말을 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습격해 왔어요. 내가 가볼 테니 당신은 여기서 꼼짝하지
말아요."

장무기는 누군가 습격해 왔다는 말에 당황했다.
"누님, 우리 같이 가요."
양빙은 약간 주더하다가 말했다.
"좋아요. 나를 따라와요."
그녀는 흰 손을 내밀어 장무기의 손을 잡아 끌고 암흑 속에서도
유연하게 왼쪽으로 돌고 오른쪽으로 돌았다. 어둠 속에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양빙이 물었다.

"소취, 어찌 그리 놀라 허둥대는 것이지?"
"아씨, 서역 무사예요. 세 명인데 위세가 대단해요. 네 명의 백의
언니들이 그들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붙들렸어요."
"부상당한 사람은 있느냐?"
"아마도 그들한테 혈도를 눌린 것 같아요. 부상당하지는 않았어요."
양빙은 '휴'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다시 장무기를 끌
고 급히 앞으로 나갔다. 장무기가 물었다.

"그들은 옥봉을 두려워하지 않나요?"
"서역 무사와의 무예 시합에서는 옥봉을 풀지 않아요."
그녀는 장무기의 눈에 계속 의혹이 남아 있자 장무기에게 물었다.
"신조대협 양과와 소용녀의 이름은 들어 보았지요?"
"의부한테서 들었습니다."
"당신의 의부는 금모사왕 사손이지요?"
"그렇습니다."
"신조대협 양과와 소용녀는 나의 조부, 조모이신데 그분들이 강호
에서 활약하실 때 금륜법왕(?戀擾?)을 물리친 적이 있어요. 금륜
법왕은 패배를 승복하지 않았지만 조부, 조모를 이길 수는 없었지
요. 금륜법왕이 죽자 그의 제가들이 가끔 서역에서 무예 시합을 하
자고 찾아오는데 쌍방이 무공만 겨루고 옥봉은 사용하지 않기로 약
속했어요."
"그랬었군요!"
양빙이 돌연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암흑 속에서 장무기는 그녀의
몸과 부딪칠 뻔했다. '팍' 소리가 가벼이 들리더니 한줄기 광선이
활사인묘로 들어왔다. 양빙이 비밀 구멍을 열었던 것이다. 비밀 구
멍으로 밖을 내다보니 떠오른 태양 아래 체격이 건장한 호인(怖?)
세 사람이 서 있었고 그 옆에는 백의 소녀 네 명이 쓰러져 있었는
데 상황이 어떤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세 명의 호인은 모두 짙은 붉은색 비단 하의를 입고 있었다. 한
사람은 울퉁불퉁한 근육을 자랑하며 상반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
로 보아 고수가 분명했다. 세 사람은 양빙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
었다.

장무기가 그들을 한 번 둘러보고는 양빙에게 말했다.
"누님, 제가 나가서 그들을 혼내줄까요?"
"내가 당할 수 없을 때 다시 당신이 나가도 늦지 않아요. 소위,
너는 여기서 장 공자를 잘 모셔라."

장무기는 그녀를 급히 불렀다.
"아, 아, 아, 누님......."
양빙은 몸을 돌려 암흑 속으로 사라져 갔다. 장무기는 길을 잃을
까 두려워 그저 비밀 구멍 앞에서 밖을 내다볼 수밖에 없었다. 앞
에 있던 소취가 물었다.

"장 공자님, 황사인묘에는 남자가 들어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십
니까?"

장무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은...... 나는 전혀 몰랐어요."
소위가 즐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아씨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당신을 들어오게 하였으니 당신
은 복이 있는 사람이에요. 만약 지금 당신이 나간다면 저 세 명의
호인은 분명히 아씨를 조소할 거예요. 그들은 활사인묘의 규칙을
알고 있거든요."

장무기는 황급히 물었다.
"그, 그럼 어떻게 하면 되지요?"
"정말로 돕고 싶으세요?"
"예쁜 누님, 저를 놀리지 마시고 무슨 방법이 있으면 빨리 가르쳐
주세요."

양빙이 이미 세 명의 흑의 소녀를 데리고 묘문을 나가고 있었고
녹삼 소녀는 두 손으로 검을 받들고 그 뒤를 쫓았다.

"비구니로 분장하면 어때요?"
"비구니로 분장을? 왜 그렇게...... 아! 그렇게 해요. 빨리 가서
옷을 가져와요."

소취는 깔갈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장무기
는 도룡도를 꺼내 순식간에 자기 머리를 빡빡 깍아 버렸다. 이때
밖에서는 의견 합의하에 검을 가진 자가 먼저 양빙과 겁법을 겨루
기로 했다.

양빙이 머리를 끄덕이자 녹삼 소녀는 장검을 갖다 바치고 물러났
다. 양빙과 검을 지닌 호인이 결투 자세를 취했다. 호인이 몇 마디
했고 양빙이 고개를 가로젓는 것이 보였다. 호인은 더이상 사양하
지 않고 '웅'하는 소리와 함께 장검을 칼집에서 뽑아 손목을 떨며
칠두검화(??盛?)를 펼치는데 검의 세력이 몹시 독날한 것이 검
술의 고수가 분명했다.

양빙은 천천히 장검을 뽑아 들었으나 모든 사람은 청광이 번쩍이
는 것만 느꼈다. 삼 척(?)의 푸른 칼을 손에 들고 여유자작한 태
도로 푸른 풀 위에 서 있는 양빙은 마치 연약한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을 타는 듯 아름답고 부드러워 보였다.

호인은 이마가 움푹 패이고 눈동자가 빛나는 것으로 보아 내공이
상당한 것을 알 수 있어 장무기는 손에 땀을 쥐었다.

호인이 일갈을 지르며 돌연 검세(盛留)를 전개하니 매 검광이 마
치 광풍폭우가 몰아치듯 양빙을 향해 쏟아졌다.

황삼을 휘날리며 파란 칼날이 돌연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챙챙챙'
하며 일진의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면서 두 사람은 각자 이 척
(?)을 뛰어 서로 떨어졌다.

양빙이 멈추지 않고 몸을 구부려 좌우로 공격을 펼치니 그 신법이
가벼워 세속을 떠나 구름을 떠다니는 듯하였고 장검은 또한 경쾌하
게 움직였으나 칼끝에는 한기가 서려 있었다. 호인도 이에 질세라
검을 위로 휘두르며 굳건하게 맞섰다. 양빙은 검신이 서로 부딪치
기 전에 이미 검을 돌려 몸을 비스듬히 하면서 공격해 들어갔다.

검광이 세 번씩 일곱 번이나 번쩍였으나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대단히 괴이했다.

돌연 양빙의 검초식이 느려지며 매합마다 아무런 목적 없이 느리
게 찌르는 듯하였고 검이 나가는 방향도 이상하여 마치 무초무검
(午?午盛)같이 보였다. 호인은 장검을 간간히 휘둘렀지만 양빙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검을 뻗었다. 호인은 크게 당황하여
허둥지둥 몹시 낭패한 모습을 드러내며 화를 냈다. 화가 난 호인이
괴성을 지르면서 순식간에 양빙을 향해 다가섰다. 호인의 검이 양
빙의 뇌문을 찌르려고 검을 펼치고 있었다. 양빙은 몸을 비스듬히
하여 이 일검을 피했다.

호인은 여전히 양빙과 삼 보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돌연 호인
의 검이 횡으로 춤을 추며 양빙의 목을 향해 들어왔다. 양빙은 살
짝 뛰어올랐고 장검은 빗나갔다. 양빙은 칼끝은 피했으나 검기로
인한 통증을 느꼈다. 호인의 내공이 극한 경지에 이르고 있어 그
위력이 정말 대단했다. 그러나 호인은 장검으로 쪼개거나, 횡으로
자르거나, 곧바로 찌르거나 하는 것이 마치 창칼을 휘두르는 것 같
이 서툴러서 검술은 기민한 기가 하나도 없어 보였다.

소취가 언제인지 벌써 장무기 옆에 와 있었다. 손에 비구니의 승
복을 들고 있던 소취는 호인의 기괴한 검술을 보고는 '푸'하고 실
소를 터뜨렸다.

장무기는 호인의 내공이 굉장해서 검기만으로도 사람을 부상 입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검과 기의 합일이 아직 미숙하기는 했지만 내
공을 검신에 모아 공격할 때의 강력함을 보니 이런 무공은 강호에
서조차 보기 드문 것이었다.

수합을 겨루고 난 뒤 양빙은 상대가 내력으로 버틴다는 것을 알았
다. 그녀가 잠시 멈칫하자 호인이 또 일검으로 머리를 공격해 왔다.
양빙은 더이상 피하지 않고 삼 척(?) 청봉(??)을 아래에서 위로
곧바로 치켜들었다.

'쨍강'하고 둔탁한 소리가 울리며 두 자루의 장검이 서로 교차되
어 호인의 검은 밑으로, 양빙의 검은 위로 향해 있었다. 두사람은
마치 각자 식지를 내밀어 내력을 겨루는 것 같았다.

장무기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양빙은 강한 것을 강한 것으로
맞부딪쳐 호인의 함정에 빠지고 있었다. 만약 양빙의 내력이 호인
보다 조금이라도 뒤지면 호인의 장검이 기세를 타고 내려와 양빙을
두 조각 낼 것이고, 만약 호인의 내력이 양빙에 미치지 못한다면
양빙의 검끝이 위로 올라가 호인의 인후를 찔러 죽이게 될 것이었
다.

장무기는 더 생각할 여유도 없이 소취가 들고 있는 승복을 잡아채
며 머리 위로부터 뒤집어 쓰면서 급히 말했다.
"빨리 나를 데리고 나가 줘요."

비밀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는 소취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머
물고 있었다. 장무기도 따라서 눈길을 돌렸다. 기이하게도 호인의
신색이 두려움에 젖어 있었고 몸은 주체할 수 없는지 벌벌 떨고 있
었다. 장무기는 상황을 다시 살펴보고 그 이유를 알았다. 양빙의
장검이 앞으로 몇 촌(寸)을 미끄러져 가서 그 호인의 단중대혈 위
에 가볍게 닿아 있었던 것이다.

단중이란 몸의 대혈로서 이 혈을 뺏기면 전신이 마비가 되는데 만
약 상대가 조금만 힘을 쓰면 심맥이 끊기게 되어 가볍게는 정신이
상이 되고 심하면 비명에 가게 된다.

무림의 고수인 호인이 어찌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긴박한지 모르
겠는가? 그러나 지금 내력을 거둔다면 양빙의 장검이 가슴을 찌르
거나 인후를 찌를 것이고 만약 내력을 거두지 않으면 자기의 단중
대혈이 이미 장검에 의해 제압당했으니 설사 양빙이 내력을 쓰지
않는다해도 이렇게 견디다가는 결국에는 피를 토하고 죽게 될 상황
이었다.

호인의 내식이 거의 무너질 듯하자 양빙은 돌연 검을 회수하더니
왼쪽으로 비스듬히 이 장(晙)을 날아가듯 물러나 얼굴에 미소를 띠
고 호인을 바라보았다.

호인은 내력을 거두면서 운기조식한 다음 양빙에게 몸을 굽혀 읍
을 하며 살려준 은혜에 대해 감사의 표시를 했다. 그는 쓰러져 있
는 네 명의 백의 소녀들의 혈을 풀어 준 후 옆으로 물러섰고 정신
을 차린 네 명의 백의 소녀는 양빙에게 예를 갖춘 후 옆으로 물러
났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장무기가 애가 타서 애원했다.
"소취, 나를 빨리 데려가 줘요. 그들이 만약 차륜전술을 쓰게 되
면 아씨가 크게 당할 겁니다."

얼굴을 돌린 소취는 장무기가 대머리가 된 것을 보고 깔깔거리며
웃다가 그의 황급해 하는 기색을 보고는 손을 잡고 앞으로 인도했
다. 알고 보니 출구는 멀지 않았다. 모퉁이를 두 번 돌고 나자 앞
이 환해졌다. 동굴 입구에 도착한 장무기는 소취의 손을 뿌리치고
신형을 새 같이 하여 재빨리 동굴 밖으로 나갔다.

만도를 찬 호인이 앞으로 나와 양빙에게 두 손 모아 읍을 하며 입
을 열려고 하는 순간, 동굴에서 비구니 복장을 한 사람이 날아오는
데 그 신법의 빠르기가 귀신 같았다. 호인은 사람으로서는 전혀 생
각해 낼 수 없는 신형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다물
줄을 몰랐다. 미녀들은 붉은 입술에 흰 얼굴을 한 총명하고 아름다
운 비구니가 동굴 앞에 서 있어 모두 깜짝 놀랐다. 그 비구니가
장무기라는 걸 알아차린 몇몇 시녀들은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지그
시 깨물고 있었다.

양빙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소취, 너 무슨 장난을 했느냐?"
소취는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옷소매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장...... 장 도고(?少)께서 적이 침입해 들어왔다며 아씨를 도
와 적을 물리치겠다고......."

양빙은 눈을 크게 뜨고 장무기를 바라보면서 웃음을 참느라 애썼
으나 겉으로는 화를 냈다.

"터무니없는 짓이야!"
장무기도 자기가 순식간에 저질러 놓은 일에 스스로 당황하여 얼
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변명하려고 입을 여는데 소취가 가로막았다.

"아씨, 장 사태는 벙어리랍니다. 너무 그녀의 호의를 책하지 마십
시오."

장무기는 식은땀을 흘렸다. 만약 소취가 때맞추어 일깨워 주지 않
아 자기가 입을 열었다면 모두 탄로나지 않았겠는가? 지금은 물길
을 따라 배를 젓듯이 아주 끝까지 가장해야겠다고 생각한 장무기는
아무렇게나 어지럽게 손짓을 하여 양빙 대신 자기가 그 호인과 무
예를 겨루겠다는 뜻을 표했다. 양빙 등이 그의 괴이한 손짓을 보고
어떻게 그의 뜻을 알아보겠는가? 다만 그의 까까머리를 보고 모두
웃음을 참고 있을 뿐이었다.

장무기는 결투장 가운데로 몇 걸음 나와 비구니 식으로 머리를 조
아린 후 결투 자세를 갖추고 호인이 공격해 오기를 기다렸다.

호인은 장무기를 보고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며 양빙에게 말했다.
"저는 합적(播?)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오늘 중원에 온 것은 무예
를 겨루기 위해서 입니다. 당신과......."

"장무...... 장 사태, 당신은 옆으로 잠깐 비켜 주시지요. 제가
안되겠거든 그때 여도사께서 나서 주셔도 늦지 않습니다."

장무기가 멍하니 있다가 물러나며 흰 얼굴을 또 한 번 붉게 물들
이자 정말 귀여워 보였다.

합적은 두 손으로 만도를 거머쥐고 힘껏 내던졌다. 만도는 밖으로
튀어나갔다가 다시 되돌아 왔다. 모든 사람들은 이 만도가 이렇게
괴이한 것일 줄은 생각을 못 했다. 만약 그가 먼저 예고를 하지 않
았다면 방어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합적이 양빙에게 말했다.

"협의가 있으시군요. 조심하시오!"
합적은 양빙이 좀전의 무사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은 것에 감격한
여 자기 무기의 비밀을 미리 가르쳐 주며 사심이 없다는 뜻을 표한
것이었다. 장무기는 마음 속으로 이 합적은 기개가 있는 장부라고
생각했다. 양빙은 합적에게 감사를 표하고 한 흑의 소녀의 수중에
있던 장소(只淪)를 받아 천천히 결투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양빙은 절을 하고 말했다.
"자!"
합적은 더이상 사양하지 않고 만도를 곧바로 던졌다. 양빙은 장소
로 만도를 따돌리고 합적의 견우혈을 짚으려 했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정중하게 대하다가 싸움이 갈수록 치열해지가
더이상 성로 양보하지 않다. 만도는 춤을 추며 오는데 마치 유성이
획을 그으며 가는 듯, 물이 흘러가는 듯 불시에 튕기며 혈을 치는
것이 흡사 장하(只泰)가 불시에 파도를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칼 속
에 장을 품고 있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이 부시게 했다.

양빙은 흑관 장소를 마치 뱀이 놀라 구멍에서 나오는 듯, 검은 번
개가 치듯 신출귀몰하게 놀렸다. 그런 다음 기류가 격동하여 서로
겨룰 때, 은은히 소(淪) 소리가 들렸다.

합적이 장소를 막으며 갑자기 팔뚝을 길게 뻗어 원을 그리니 만도
는 공중에서 햇빛을 받으며 획을 그으면서 곧바로 양빙에게 달려오
는 듯하다가 불시에 튕겨올라 마치 긴 무지개를 그리며 떨어지는
해와 같았다.

양빙의 장소는 대나무로 만든 것이라 만도와 정면으로 대항할 수
없었다. 그녀는 상대의 기세가 급해지자 장소를 힘차게 던졌다. 장
소는 소리를 내며 곧바로 합적의 아랫배를 공격했다.

합적은 한 발을 들어올려서 장소를 피하며 만도의 기세를 늦추지
않고 양빙을 향해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양빙은 장소를 손에서 놓아 버렸으니 만약 뒤로 물러나지 않으면
분명히 당할 참이었다. 합적은 양빙이 설령 뒤로 뛰어 이 만도를
피한다 해도 무기를 손에서 떨어뜨렸기 때문에 이미 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노란 그림자가 번쩍 지나가더니 만도를
헛날리게 되었고 눈앞에 있던 양빙의 그림자는 자취도 없었다. 무
사는 '아차'하고 만도를 회수하려는데 갑자기 후뇌의 옥침혈이 섬
뜩함을 느끼고 죽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기다려도 아무런 이상이 없자 고개를 돌려 보니 양빙은 이
미 장소를 손에 들고 여유있게 서서 공수하며 말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합적은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사색이 되어 물러났다.
조금전 만도가 양빙의 뇌문을 스치려는 순간 양빙은 이미 삼 척
(?)을 합적 뒤로 날아갔다. 이는 바로 '구음진경'의 어신술로서
치명적인 일격을 마치 물찬 제비와 같이 아름답고 부드러운 자태로
피할 수 있는 것이었다. 뛰어오를 때 그녀의 섬세한 손이 합적의
옥침혈 위를 스치며 오른손으로는 장소를 받아쥐고 선녀가 내려앉
는 듯 사뿐하게 향기롭고 푸른 비취 같은 풀 위레 내려섰던 것이다.
장무기는 완전히 홀려서 아찔해졌다. 양빙이 내공이 자기의 구양
신공과 현저히 다른 것을 느꼈으나 깊이 이끌려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질렀다.

"훌륭해요!"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대경실색했다.

장무기는 돌연 자기가 실언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되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 명의 호인 중 이미 두 사람은 지고 남은 한 사람인 상반신을
드러낸 자가 앞으로 걸어나오며 공수했다.

"소저, 축하드립니다. 활사인묘에 남자가 있다니 그럼 그와 소인
이 무예를 겨루어도 되겠군요?"

양빙의 아름다운 얼굴이 순식간에 발그레하게 물이 들며 우물거리
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역 무사의 사조, 금륜법왕의 유훈에는 활사인묘에 남자가 있다
면 그 남자와 무예를 겨루어야 한다고 되어 있었으며 양빙도 이 사
실을 알고 있었다.

장무기는 상대가 솔직하게 자지와 겨루겠다고 하니 거절할 수 없
었다. 이미 상대에게 들켰으니 아예 비구니 승복을 벗어버리고 공
수하며 말했다.

"소인은 장무기라고 합니다. 귀하의 가르침을 바랍니다."
"소인은 달자합(阿挫播)이라고 합니다.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장무기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그저 옛 친구를 방문하려 한 것이지 다른
뜻은 전혀 없소이다."

달자합은 웃으며 말했다.
"장 대협, 어려워하실 필요없습니다. 소인 축하드립니다."
양빙이 화를 내었다.
"달자합,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허튼 소리 말아요!"
"활사인묘는 남자에게는 금지구역이고 묘의 주인과 혼인 약속이
있지 않고는 어찌 함부로 들어갈 수 있겠소. 안 그렇소?"
"귀하는 오해하셨습니다. 소인은 이미 결혼 약속이 되어 있고 우
처(情?)는 이 소저의 제자입니다. 그러니 제가 이 활사인묘에 들
어갈 수 있겠지요?"
"그렇군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자, 오셔서 위풍을 보이시지요."
야빙이 가로막으려고 하는데 장무기가 달자합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어떻게 해야만 비로소 진 것을 인정하겠소?"
"왜 그런 말을 하시오?"
"만약 무예를 겨룰 때 귀하에게 일초 반 식을 이기면 어찌하겠소?"
"그럼 우리는 즉시 서역으로 돌아가 다시 일이 년을 연마한 후 또
다시 찾아와서 무예를 겨룰 것이오."
"그렇게 하면 끝이 없을 것이오. 싸움은 오늘 완전히 끝냅시다.
저와 귀하가 겨룬 후 누가 이기든 지든 간에 이후로 다시는 서로
분쟁을 일으키지 맙시다. 귀하의 뜻은 어떠하십니까?"
"당신이 만약 소인의 주먹 세 번 받을 수 있다면 저희는 영원히
중원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이고 저희 문하 제자들도 다시는 성
가시게 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정합시다.!"
모든 사람은 놀랐고, 양빙이 소리쳤다.
"안 돼요!"
장무기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오늘 이로 고묘파의 전인을
난처하게 하였으니 분명한 수법으로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고 이후
후환이 없도록 해주리라고 결심했다.

달자합은 장무기가 자신의 제안을 한마디로 승인할 줄은 생각지도
못하다가 너무도 손쉽게 응낙하자 도리어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녀석이 정말 죽고 싶은가?'하고 생각하다가 이 녀석이 이렇게
뽐내니 한 방에 맞아 죽어도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않고 어두운 얼굴을 하고 결투장으로 나갔다.

장무기는 자세를 바로잡고 섰다.
"자!"
그는 구양신공을 전신에 운기시켰다.
달자합은 기를 약간 움직여 오른팔로 일 권을 가했다. 방금 양빙
이 그의 두 사제를 살려준 것을 생각하여 달자합도 이 일 권에 사
할의 공력을 들였다. 그는 속으로 장무기의 내공이 제아무리 강하
다고해도 이렇게 막기만 하면 어찌 이겨낼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
하며 일 권에 장무기를 죽이게 되면 양빙의 체면이 떨어질까봐 여
운을 남겼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니 상대를 때려 중상을 입혀서
쓰러뜨리게만 되도 이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달자합은 이 일 권으로 분명히 상대에게 일격을 가한 듯
했으나 흡사 마른 풀을 명중시킨 듯 손이 닿은 곳이 폭신폭신하여
전혀 자신의 공력이 먹혀 들지 않았다. 달자합은 크게 놀라서 머리
를 긁적거리며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을 알 수가 없어 그저 자기가
힘을 너무 가볍게 쓴 때문이라고 여겼다.

장무기는 웃으며 말했다.
"귀하께서 저를 봐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마음껏 치셔도 무
방합니다."

달자합은 숨을 죽이고 기를 모아 '하!'하고 기합을 지르며 오른팔
을 두 배로 거칠게 하고 근육을 드러내니 근골이 움직이는 것이 보
였다. 그는 한 걸음 내디디며 권을 휘둘러 장무기의 아랫배를 힘껏
쳤다.

이 일 권은 적어도 천근은 되어 공력을 십분 활용한 것이었다. 달
자합은 이 일 권이 철벽에 부딪힌 것 같자 크게 놀라 걸음을 한 발
되물리려는데 이미 장무기가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장무기는 웃으며 말했다.
"아직 일 권이 남았으니 귀하께서 잠시 쉬시고 하셔도 좋습니다."
달자합은 안색을 흐리며 아무 말도 않고 앉아서 운기조식했다. 모
든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눈을 크게 뜨고 아무 말도 못 했다. 달자
합의 일 권이 장무기의 강철같이 단단한 아랫배를 가격했을 때, 돌
연 온후한 내력이 그의 팔로 부딪혀 돌아왔다. 되돌려 받은 힘은
바로 자기가 전력을 다해서 쏟은 바로 그 십할의 공력을 쏟아 부운
천근의 힘이던 것이다. 어떻게 상대가 그 힘을 튕겨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장무기가 뒤로 물러나지 않았더라면 그 되돌아온 힘
때문에 달자합의 팔은 벌써 조각조각 터져 나갔을 것이다.

장무기가 양보하여 목숨을 건졌지만 달자합은 호흡이 어지럽고 가
슴이 떨려와 장무기의 말에 따라 앉아서 운기조식하여 호흡이 정상
으로 돌아오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이런 행동이 그리 점잖치
못한 것은 알았지만 이기려면 하는 수 없었다.

차 반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달자합이 내공을 거두고 일어나서
두 사제를 돌아보고 그들의 의혹스러운 기색에 서글프게 웃었다.
그는 장무기를 해괴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장 대협, 마지막 일 권을 받으시지요."
장무기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달자합은 두 눈을 감고 내식을 운기하는데 일진의 경미한 파공음
이 들려왔다. 그 파공음은 마치 콩 튀기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모두
놀라서 안색이 변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달자합은 외가 무술에 정
통한 사람이라 힘으로 모든 혈을 뚫는 연마를 하여 내뿜고 거두는
데는 자유로운 경지에 도달하였으니 권격의 힘도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모두 장무기를 걱정하며 손에 땀을 쥐었다. 그러나 정
작 장무기 본인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장무기는 마음
속을 비워 공명청정(囚曄??)을 고수하고 있었다. 바로 구양신공
의 총강이었다.

'강한 것은 강한 대로 청풍이 산과 강을 스치듯하며, 날뛰면 날뛰
는 대로 밝은 달이 대강(暗析)을 비추는 듯하고, 독하면 독한 대로
나 스스로는 한 모금의 진기로 족하다.'

달자합은 이미 함께 죽자는 마음을 먹었다. 장무기는 그의 주먹을
두 번이나 맞고도 아무일 없는 듯이 있는데 자기가 오히려 반격을
당하여 부득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운기조식을 해야 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는 십이분의 공력을 운기했다. 이번 주먹이 상대
를 쓰러뜨리지 못하면 되돌아오는 진동의 힘으로 자신이 비명에 갈
수도 있겠지만 차라리 그렇게 죽는 것이 떳떳하다고 생각했다.

경미한 호흡이 갈수록 조밀하게 들리자 달자합의 붉은 나삼이 점
점 부풀어 오르고 머리에 쓴 모자에서는 가느다란 연기가 새어나오
는 것이 진력을 이미 최고로 발휘한 듯했다. 돌연 큰소리를 지르며
오른쪽 주먹에 진력을 다해 장무기의 가슴을 공격했다.

모두 깜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이 석파경천할 일격이
아무런 기미도 없고 다만 장무기와 달자합이 여전히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좀 다른 것은 장무기는 미소를 띄고 있었는데 달자합은 마
치 귀신을 본 듯한 표정이었다.

달자합의 이 경천동지할 일격이 장무기의 몸에 닿자 마치 진흙으
로 만든 소가 바다로 들어가듯이 주먹이 자취도 흔적도 없이 사라
져 버린 것이다. 달자합은 속으로 이 자는 사람이 아니라 신선이
아니면 귀신이라고 생각했다.

"귀하께서는 손끝에 정을 남겨 주시니 감사합니다."
달자합은 두려워하는 빛으로 몸을 돌려 산을 뛰어 내려갔고 남은
두 사제도 모두에게 급히 이별을 고하고 따라 내려갔다. 그들은 잠
깐 사이에 숲속으로 사라졌다.

장무기가 몸을 돌리자 소녀들이 호기심에 찬 눈으로 자기를 보고
있어 이상히 여기어 물었다.

"왜들 그렇게 저를 보고 있지요? 왜 그래요?"
소취가 그의 반들반들한 머리를 보고 참지 못하고 웃기 시작했자
양빙도 빙그레 웃었다. 장무기가 멋적어하며 그의 머리를 어루만지
니 모든 여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소취가 물었다.
"장무기, 방금 무슨 마법을 쓰셨길래 달자합이 놀라서 도망갔지요?"
"무슨 마법을 쓰다니요?"
"그럼 어째서 그 일 권이 당신 몸을 공격했는데도 당신은 아무렇
지도 않나요?"
"방금 당신이 펼친 것이 구양신공인가요?"
장무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는 일 초식도 펼치지 않았
는데 양빙은 알아차린 것이다. 장무기는 그녀에 대해 더욱 존경하
는 마음이 들었다.

"누님이 아까 펼치신 것은 구음진경의 무공이 아닌지요?"
양빙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인했다.
"당신이 어떻게 알지요?"
"저는 의천검 중에 '구음진경'이 몇 장 수록되어 있어 본 적이
있는데 누님의 무공이 비슷한 것 같아서 여쭤 본 겁니다."

두 사람은 속으로 상대방의 무공이 탁월함에 찬타하며 구양진경과
구음진경은 모두 무림의 보물이니 만약 서로 참조하여 연구하면 분
명히 큰 수확이 있을 텐데 하는 똑같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양빙은 아녀자인데 어떻게 이런 말을 먼저 할 수 있겠는가!
또 장무기는 방금 비구니 노릇도 제대로 못 하여 오히려 양빙에게
말썽을 일으켰는데 또 어찌 감히 당돌하게 말하겠는가!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부그러워서, 또 한 사람은 용기가 없어서 모두 입을 열
지 못해 무예 정진의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소취가 갑자기 분위기를 바꿨다.
"아이구, 배고파 죽겠네. 진지 드셔야지요?"
"양 누님, 그리고 여러 자매님, 소인은 일이 있어서 여기서 이별
을 고해야겠군요."

양빙이 놀라서 말문이 막히자 소취가 입을 열었다.
"장무기, 활사인묘를 뭘로 보고 그러는 거예요?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는 그런 곳인줄 아세요? 아마도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예요."

장무기가 더듬거렸다.
"이...... 이......"
"소취, 무례하게 굴지 말거라!"
소취는 '흥'하며 장무기를 홀겨보았다.
"장무기, 기왕 오셨으니 과일이라도 드시고 가시지요."
장무기도 더이상 사양할 수 없었다.
"그럼 폐를 끼치겠습니다."
일련의 소녀들은 양빙의 분부를 기다리지 않고 뛸 둣이 기뻐하며
음식 장만을 서둘렀다. 얼마 후 네 명의 흑의 소녀가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를 들고 나와 무예 시합하던 풀 위에 놓고 과일을 갖다
놓았다. 양빙이 장무기에게 자리를 권하니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앉
았다. 녹삼 소녀는 앞으로 나와 두 사람에게 술을 따랐다. 양빙은
잔을 들고 말했다.

"장 공자님의 도와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양 누님의 융숭한 대접에 감사드립니다."
두 사람은 서로 쳐다보며 술잔을 기울였다. 장무기는 술맛이 맑고
그윽한 것이 구하기 힘든 옥으로 만든 미주라는 것을 알았다. 녹삼
소녀는 또 두 사람에게 술을 따랐다.

'띵띵띵'하며 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금 소리가 은은하게 퍼
지며 구성진 것이 끊이지 않아 오래 여운을 남겼다. 금의 여운이
사라질 듯 말 듯 하는 사이에 흑소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기 시작하
니 금과 소가 어우러진 것이 청아하고 속세를 초월한 것 같았다.
장무기는 속세의 기가 깨끗하게 씻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저 말할
수 없는 깨끗하고 새로운 마음뿐이었다. 양빙이 잔을 들고 웃으며
말했다.

"장 공자, 지금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겠군요. 자, 건배
합시다."
장무기는 양빙이 미주 두 잔을 들이켜 백설같이 흰 피부가 은은히
홍조를 띠어 그 자태가 더욱 아름다운 데다 그녀의 성숙미와 우아
한 자태에 반해 저도 모르게 양빙을 불렀다.

"누님!"
이 소리는 너무 친근하여 마치 어린 시절 함께 놀던 소꼽친구를
부르는 것 같이 느껴졌다.

양빙은 장무기의 순결한 마음을 느끼고 마치 남동생 같이 여겨져
자연스럽게 누나가 남동생을 위로하듯 미소지으며 서로 마주 보았
다.

장무기는 일어나 몸을 굽혀 인사했다.
"누님의 관대한 대접에 감사합니다. 이 동생은 이제 그만 떠나야
겠습니다."

양빙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무기는 몸을 돌려 큰걸음
으로 산을 내려갔다. 몇 리를 갔을 때 홀연히 금 소리가 들려왔는
데 거기에는 배웅의 뜻이 담겨 있었다. 장무기는 기를 담아 전음을
보냈다.

"여러 누님들의 아름다운 뜻에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장무기는
이별을 고합니다."

요금이 세 번 울리더니 군산지중(潚雲柵猖)에는 다시 침울한 정적
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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