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외전 2

3학년2반 | 2022.02.27 07:52:22 댓글: 0 조회: 494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1456

제 4 장 : 가자! 페르시아로
장무기는 섬서(섬?)에서 남쪽을 향해 떠난 지 하루 만에 악북(?
溶)의 무당산에 도착했다. 그는 무당산에 들러 백여 세를 바라보는
태사조 장진인을 뵙고자 마음 먹었다. 그러나 태사조를 뵈면 조민
의 문제 때문에 불안해 하실까 걱정이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우
두커니 서 있는데 멀리 산 위에서 도동(??) 하나가 뛰어내려왔다.
가만히 살펴보니 바로 사제 청풍(?憚)이었다.
장무기는 나무 뒤에 숨어 청풍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갑자
기 뛰어나갔다. 청풍은 깜짝 놀라 물러나려 했지만 이미 장무기의
품안에 안기고 말았다.

몸부림을 치면서 몇 발짝 뒤로 물러난 청풍은 뛰쳐나온 사람이 사
형 장무기인 것을 발견하고 반가움에 겨워 소리쳤다.

"장 사형이시군요! 깜짝 놀랐잖아요."
"무슨 일이 있기에 그리 급히 가느냐?"
"여섯째 사숙모께서 아이를 낳으시고, 갑자기 두부를 드시고 싶다
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마을에 내려가는 중이에요."

장무기는 여섯째 사숙모께서 아이를 낳았다는 말에 너무 기뻤다.
"불회 동생이 아이를 낳았단 말이냐?"
"그럼요! 태사조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데요. 장 상형이 오신 걸
알면 기쁨이 더 크실 텐데......."
"태사조께서는 안녕하시지?"
"예, 아주 좋으세요. 얼마전에 또 다른 무공을 창안하시고 장 사
형이 오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각했다.
'태사조께서는 나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시려 하시는구나. 그런데
나는 걱정만 끼치고 있으니......'

청풍이 두 눈을 멀뚱멀뚱 뜬 채 장무기를 바라보았다. 잠깐 생각
에 잠겼던 장무기는 언뜻 정신을 차려 청풍 사제에게 말했다.

"두부를 사러 간다고? 내가 그곳까지 동행해 주마."
"그래요. 사숙모께서 보채실 거에요. 늦으면 여섯째 사숙께 혼이
나요."

말을 마친 청풍은 장무기의 손을 잡고 마을로 내려갔다.
무당파(俉謁駝)는 장진인의 둘째 제가 유연주(??贊)가 장문인
직을 계승하고, 넷째 장송계(遵飮聲)가 일을 도왔다. 큰 제자 송원
교만이 자식을 잘못 교육하여 무당의 명예에 누를 끼쳤다는 자책감
에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외에는 모두 평안무사하게 잘
있었다.

청풍이 두부 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장무기는 갑자기 생
각이 바뀐 듯 얼른 청풍에게 말했다.

"태사조께서 안녕하시다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산에는 너만 돌아
가거라. 나는 일이 있어 가지 못하겠다. 사숙께는 나를 만났다는
소리는 일체 하지 마라. 알겠지?"

장무기는 청풍에게 몇 번씩 당부하고 산 입구까지 바래다 주었다.
청풍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자 그는 남쪽으로 몸을 돌렸다.

장무기는 한수(洞?)를 건너 숭산(?雲) 소림사(遊殮?)로 향했다.
오악의 하나인 숭산과 무당산은 예(謫:하남성)와 악(?:호북성)의
땅에 자리잡고 있는 명산 중의 명산이다. 하나는 예서(謫?)에, 하
나는 악북(?溶)에 위치하고 있지만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만산에 푸르름이 가득한 사월이 거의 끝나갈 즈음 장무기는 하남
소실봉(遊淋?)의 산그늘에 이르게 되었다. 숭산의 한 봉우리인 소
실봉은 산세가 자못 웅장했다. 하늘로 이어지는 산길은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그윽한 풍치와 고아한 정경을 이루고 있었다.

돌계단은 당 고종(案俗?:재위 650-683)이 소림사에 순행을 했을
때 축조된 것으로 길이는 무려 팔 리(?咽)에 달했다.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듯한 모습으로 길게 뻗은 돌계단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 멀리 다섯 갈래의 폭포가 힘차게 쏟아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뭇 산을 아우르는 기세로 사방을 굽어보고
있는 소실봉은 한 마리 우뚝 솟은 거미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돌계단으로 이루어진 산길을 따라 한동안 오르다 산굽이를 한 바
퀴 돌아드니 누런 담장에 푸른 기와로 이루어진 거대한 사찰이 눈
에 들어왔다. 바로 천 년 고찰 소림사였다.

지객승(?選弛) 정명(進曄)은 산문에 들어서는 사람이 장무기임을
한눈에 알아보고 방장 공문대사(囚?暗?)에게 알렸다. 얼마 후 공
문대사가 산문으로 달려와 합장을 하고 말했다.

"장 교주!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아미타불!"
"공문대사님! 이번 저의 출행은 사손 의부님을 뵙고자 함입니다.
그동안 잘 계셨는지 궁금합니다."
"아미타불, 장 교주의 효심과 충정은 실로 무당의 복입니다."
"공문대사님, 별말씀 다하십니다. 의부의 은혜는 태산보다 높고
북해보다 깊은데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훌륭하오! 훌륭하오!"
공문대사는 연신 장무기를 칭찬하며 계속 말문을 열었다.
"정명아! 얼른 삼신당(寃佚眼)에 달려가 장 교주께서 의부를 뵈러
왔다 이르거라."

정명은 대답을 한 후 몸을 돌려 경내로 빠르게 달려갔다. 원래 사
손은 소림사의 고승 도액(??)의 문하에 입교했지만 법명을 쓰지
않고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공문대사는 정명의 모습이
멀어지자 장무기에게 말했다.
"장 교주!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대사님! 저는 이제 교주가 아닙니다. 명교 교주의 직위는 이미
양소(斫閏)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장 교주의 뜻을 알겠소이다. 허허허."
두 사람은 경내로 걸음을 옮기면서 무림의 대소사에 관하여 담소
를 나누기 시작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까, 멀리 도액선
사가 가사 자락을 날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공문대사는 뜻밖에 도
액선사가 마중을 나오자 황급히 무릎을 꿇고 말했다.

"사질(??) 공문이 사숙을 배알합니다."
도액선사는 매우 날카롭고 무섭게 생겼지만 마음에 담긴 불심은
바다보다 더 깊었다. 그는 평시에는 소소한 예절에는 그자지 구애
받지 않았다. 공문대사가 무릎을 꿇자 얼른 오른손을 휘둘러 공문
을 일으켜 세웠다. 부드러운 바람이 가사 자락에서 일어나 공문대
사의 몸을 일으켰다.

"장 교조! 폐사에 왕림했는데 이리 영접이 늦어 죄송하오이다."
장무기는 도액선사의 공손한 말투에 몸둘 바를 몰랐다. 도액(??),
도겁(??-?=?), 도난(?蜃)은 소림사에서 가장 높은 고승이다.
일전에 장무기와 겨룬 도액선사는 장 교주의 인품과 무공에 깊이
탄복하여 하대하지 않았다. 장무기는 포권을 하고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후배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장 교주! 예까지 오셨는데 안타까운 말씀이오만 사손이 저에게
전하라고 했소. 이미 불문에 귀의한 몸, 수도에 정진코자 만나지
않겠다고 말이오."

장무기는 의부가 상견을 거부한다는 소식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도액선사님! 저의 의부께서는 안녕하신지요?"
"사손은 비록 많은 악업을 쌓았지만 천성이 유순하고 총명하여 공
덕무량(殺鴦午齬)한 불교의 종지를 크게 깨닫고 있소이다. 장 교주!
더이상 전할 말이 없다면 저는 이만 물러갈까 하오이다."
"도액선사님의 보살핌에 감사를 올립니다. 저도 더아상 전할 말이
없습니다. 이만 하직 인사를 올릴까 합니다."

장무기는 말이 끝나자 도액선사는 합장을 한 채 큰소리로 '아미타
불'을 외치고 몸을 돌려 떠났다. 장무기도 공문대사에게 하직 인사
를 한 후 산문을 빠져나왔다. 푸른 하늘에는 구름이 한가하게 떠다
니고 있었다. 장무기는 멀리 파도처럼 굽이쳐 흐르는 산세를 바라
보다가 북쪽으로 몸을 돌렸다.

x x x
한 달 후 장무기는 대도(暗?:북경)에 이르렀다. 순제는 그를 매
우 반갑게 맞아들이며 말했다.

"경은 그동안 어디를 다녔기에 소식이 없어 짐의 맘을 이리도 애
타게 했소!"

장무기는 황급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장무기가 대도를
떠난 후 원 순제는 칙령을 내려 청녕전(???), 가산(?雲), 자월
궁(侏?循) 등의 여러 전각들을 조성했다.

독로첩목아(???迎?)는 명령을 받고 전각 조성에 심혈을 기울
였다. 그는 원 순제의 총애를 얻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원 순제는 전각이 완성되자 친히 설계한 용주(井贊)를 오늘 내원
(??)에 띄우기로 했다. 마침 장무기가 도착하자 원 순제는 궁녀
의 호위를 받으며 장무기와 함께 용주에 올랐다. 주악이 울리며 거
대한 용주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용주는 길이가 일백이십 척이며, 너비는 이십 척에 달했다. 갑판
위로 오층 전각이 들어선 용주는 오색의 금장(?證)으로 휘황찬란
한 수를 놓고 있었으며, 조타수는 모두 스물네 명으로 금자색의 옷
을 걸쳤다.

용주는 후궁에서 전궁(?循)을 향해 부드러운 기세로 미끌어져 갔
다. 흔들림이 거의 없을 정도로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모습이 마
치 바람이 멎은 강물에 한량없이 떠다니는 부평초와도 같았다.

새로 설계한 궁루(循艅:궁중에 있는 물시계)는 높이가 육칠 척이
요, 너비가 삼사 척에 이르렀다. 나무를 짜맞추어 궤(錞)를 만들고
그 안에 호(騙)를 두어 위아래로 물이 흐르게 했다. 궤상과 허리에
는 서방정토의 삼성전(寃濡?)과 옥녀상이 설치되었다. 뭄통을 둘
러 각전(?智:시각을 표시한 눈금)이 띠를 두르고 있었다.

일정한 때가 되면 물이 불어 궤를 상승시킨다. 좌우에 늘어선 금
갑신(?薯佚:갑옷을 입고 손에는 악마를 물리치는 지팡이를 지닌
무신) 두 쌍이 각기 종(懲)과 징을 들고 있다가 시간에 맞추어 그
것을 두들겼다.

궤의 동쪽과 서쪽에는 일월궁(??循)이 지어져 있고 신선상 여섯
이 궁 앞에 서 있었다. 자,오시(侏佺裡)가 되면 스스로 몸을 움직
여 선교(??)를 지나 삼성전에 이른다.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물
시계였다.

장무기는 궁루를 보면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경이 보기에 어떻소?"
"폐하! 실로 신기막측한 물건이옵니다. 어느 누가 설계를 한 것이
옵니까?"
"하하하! 바로 과인이오."
장무기는 깜짝 놀랐다. '원 순제에게 이처럼 뛰어난 기술이 있었
다니!' 용주와 궁루의 빼어난 솜씨는 가히 사람의 넋을 빼놓기에
손색이 없어 보였다. 장무기는 머리를 조아리며 연신 감탄의 소리
를 내뱉었다.

"폐하의 영명하신 솜씨는 신선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만 백성의
흥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 순제는 장무기의 말에 기분이 좋은 듯 앙천대소했다. 원 순제
는 즉시 주안상을 마련하고 장무기에게 술을 하사했다. 술자리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을 때 번승(嵬弛:티벳의 라마승)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황상! 비직이 새로 창안한 놀이가 있사온데 이곳에서 펼쳐 보이
고자 하나이다. 윤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한번 펼쳐 보이시오!"
번승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 명의 궁녀가 조수가 되어야 한
다'고 말했다. 순제는 옆에 부복하고 있던 궁녀를 가리켰다.

궁녀는 가는 허리를 좌우로 흔들며 좌중의 한 가운데 농염한 자태
로 섰다. 번승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황상! 이 궁녀가 회잉(?坐:임신을 의미)을 했는지 헤아려 보십
시오!"

원 순제는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번승은 또다시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궁녀를 힘껏 안았다.

"비직이 일 각 정도의 시간으로 그녀에게 육갑(俎薯:임신을 의미)
을 하도록 만들겠습니다."

일순간 궁녀의 앵두 같은 입술은 번승의 흉악한 입술에 덮어 파르
르 떨렸다.

좌중의 사람들은 저마다 군침을 삼키고 음란한 눈빛을 쏘아댔다.
장무기는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고개를 돌리면서 생각했다.

'원 순제가 저리도 혼용(鋪竊)한단 말인가? 군신이 저저하니 어찌
체통이 설 수 있단 말인가?'

궁녀는 '으음'하는 콧소리에 장무기는 고개를 돌려 번승이 하는
짓을 보았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노기를 참으면서 장무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번승은 오묘한 내공심법을 이용하여 궁녀에게 기를 쏟고 있는 중
이었다. 궁녀는 혈도가 제압되어 괴로움인지 즐거움인지 분별할 수
없는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궁녀의 복부는 얼마 후 아이를 밴 여
자처럼 둥글둥글하게 부풀어 올랐다.

주위의 사람들은 벌게진 두 눈을 비비며 무엇이 즐거운지 연신 술
잔을 기울였다. 장무기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그릇에 담겨진 밥알
을 몇 점 모아 단단하게 뭉친 후 내공을 주입하여 번승의 기문혈을
향해 내쏘았다.

장무기의 탄지신공은 빠르고 힘이 있었다. 번승은 전심전력으로
내공을 운용하는 중이어서 방비를 할 수 없었다. 기문혈이 뜨끔하
면서 일시에 기가 흩어졌다. 내력이 점점 소멸해 가면서 오히려 궁
녀의 복기(?褶)가 번승의 보부로 쏟아져 들어갔다.

일시에 밀물처럼 몰려드는 기운에 번승은 숨도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온몸을 부르르 떨다 고개를 떨구었다. 기세등등하던 그의
모습은 일순간에 냉랭한 시체로 변했다.

원 순제는 황급히 장무기에게 궁녀를 치유토록 했다. 장무기는 그
녀의 맥박을 점검하고 인체의 중요한 혈도를 탄지신공으로 풀어 주
었다. 번승이 맥없이 자연사하자 원 순제는 뱃놀이에 흥취를 잃고
비밀실(澐?淋)로 자리를 옮겼다.

장무기는 이제까지 비밀실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 보지 못했다. 옆
에 가린진(?閱?)에게 묻자 그는 음흉한 웃음으로 말했다.

"히히히! 한번 가 보시면 아시게 될 게요. 장 형, 나를 따르시오."
일행은 용주에서 내려 비밀실이라고 하는 청녕전으로 이동했다.
원 순제는 또다시 연회를 베풀고 좌중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렸다.
무희들의 가무와 술 시중이 분위기를 더욱 농염하게 만들었다. 원
순제는 두 명의 궁녀를 가슴에 품고 내실로 들어갔다.

좌중의 대신들은 원 순제가 내실로 밀회를 즐기러 들어가자 너도
나도 궁녀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가 하면 무릎에 앉혀 희롱을 했
다. 장무기는 참담한 심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장무기가 나오는 동시에 독로첩목아가 청녕전에 뛰어들면서 소리
쳤다.

"큰일났습니다. 승상 탈탈(醉醉) 대인께서 행차하십니다."
좌중은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승상 탈탈 대인이 이곳에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원 순제의 황탄음란한 행위는 간신적자
의 교언에 더욱 기세가 올라 어느 누구도 어쩌지를 못했다. 황태자
는 요승음신(?弛躁日)을 단칼에 베고 싶었으나 그에게는 군권이
없었다. 황태자는 몰래 궁을 빠져 나가 태사(梔?) 탈탈에게 궁내
의 정황을 낱낱이 고했다.

황태자를 맞이한 탈탈은 한숨을 내쉬며 장탄식을 터뜨렸다.
"지금 각지에서는 명교 의군(琮琡)이 오랑캐를 내쫓겠다고 난리를
피우고 있는데 궁중에서는 어찌 그리도 황탄하단 말이던가!"

계속해서 그는 '합마(播?) 등은 무엇을 하기에 제대로 간언하지
못하는가'하며 울분을 토해냈다. 황태자는 의분에 찬 목소리로 말
했다.

"태사께서 합마를 말씀하시는데 그자가 바로 죄악의 괴수이오."
"합마가 이다지도 황탄하다니......."
탈탈은 황태자와 작별을 고하고 즉시 입조했다. 환관들이 몇 차례
저지했으나 막을 수 없었다. 청녕전에 있는 대신들은 대쪽같이 강
직한 탈탈 대신을 매우 두려워했다. 밀실에서 돌아온 원 순제는 아
무렇지도 않다는 투로 말했다.

"독로첩목아! 그가 어찌하여 이곳까지 올 수 있단 말이냐?"
"탈탈 대인은 승상이옵니다. 어느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만 두어라. 빨리 나가서 막도록 하거라.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
면 짐이 곧 나간다고 일러라."

장무기는 좌중의 대신들이 모두 탈탈 대인을 무서워하는 모습에
다시 내전으로 들어와 구석에 자리잡고 앉았다.

독로첩목아가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에 조복을 입은 휜칠한 사나이
가 합마를 밀치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독로첩목아는 황급히 앞을
막으며 소리쳤다.

"황상께서 밖에 대기하라는 명을 내리셨소."
독로첩목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철썩'하는 소리가 났다.
독로첩목아는 어쩔 수 없이 빨개진 오른쪽 뺨을 어루만지며 뒤로
물러났다.

장무기는 탈탈을 눈여겨 살펴보았다. 팔 척에 이르는 훤칠한 키에
용모가 호랑이처럼 당당해 보였으며, 떡 벌어진 가슴에서 뿜어져
나와는 범상치 않은 기운이 좌중의 기세를 짓누르고 있었다.

탈탈은 두 눈을 부릅뜨고 합마를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합마! 네가 이리도 무도하게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리다니. 네 죄
를 알렸다."

합마와 좌중의 대신들은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구석에 앉아 좌중을 굽어보던 장무기도 왠지 이 자리에 있
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용상에 앉아 있던 원 순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입을 열었다.
"경은 무슨 일이 있기에 이리 급히 입궐했소?"
탈탈은 노기를 거두고 고두 삼배를 올렸다. 원 순제가 '경은 몸을
일으키시오'라고 말하자 탈탈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말했다.

"황상께 진언하나이다. 합마의 직책을 거두시고 서역의 요승들을
축출하십시오. 궁중에서 더이상 음란한 풍기(憚褶)가 일어서는 절
대 아니되옵니다."
"경은 어찌하여 합마가 죄를 지었다고 말하는 게요?"
탈탈은 두 눈에 닭똥 같은 눈물을 떨구며 진언하기 시작했다.
"걸주(猩粲)는 신주(佚搾:중원을 일컬음)의 이름난 폭군이옵니다.
하(態)의 걸왕은 매희(?盒)를 총애했지만 화는 조량(?瘀)에서 비
롯되었고, 은(肇)나라 주왕은 달기를 아꼈지만 화는 비중(?瘡)에
서 시작했습니다. 지금 합마 등은 성상의 주위에서 성안(濡?)을
흐리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대의 조량이나 비중과 다를 게 어
디 있겠습니까? 황상! 간신의 무리를 멀리하소서."

순제는 역성을 내면서 소리쳤다.
"합마 대신은 경이 추천하지 않았소? 그런데 오히려 탄핵을 주청
하다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이오?"

탈탈은 흠칫 몸을 떨다 무릎을 꿇고 다시 말했다.
"신이 불명하여 추천을 그르쳤습니다. 폐하께서 죄를 물어 주십시
오."

원 순제는 그제서야 노기를 풀면서 부드러운 말투로 입을 뗐다.
"잘 알겠소. 경은 자리에서 일어나시오."
탈탈은 '황공하옵니다'라고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제는
말을 이어나갔다.

"군사의 일을 승상이 맡아 주어 짐은 염려를 놓고 있소. 경은 돌
아가 조정의 일에 더욱 힘을 쓰시오. 이곳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하
겠소."

탈탈은 물러나지 않고 계속 읍소를 했다.
"황상! 다시 한 번 간언하옵니다. 조정 내에 음란한 음악이 흘러
넘치면 백년 사직이 위험합니다. 요망한 무리를 물리치시고 정도를
찾으소서."

원 순제는 기분이 상한 듯 오른손을 들어 탈탈에게 물러나라는 손
짓을 했다.

"승상은 이만 물러나오. 나에게도 생각이 있소."

탈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청녕전을 물러났다. 합마의 무리는 만
면에 희색을 머금고 물러나는 탈탈을 바라보았다. 원 순제는 흥이
달아나자 불쾌한 듯 투덜거렸다.

장무기는 천리통(?咽枕)의 내공으로 원 순제의 탄식소리를 들었
다. 가늘고 끊어지는 말투였으나 장무기의 귀에는 뚜렷이 들렸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원나라는 필시 망하고 말 것이다.'
장무기는 속에서 이는 기쁨을 억누르며 연거푸 석 잔의 술을 비웠
다. 합마의 무리들은 탈탈이 물러나자 갖은 아첨의 소리로 원 순제
의 귀를 즐겁게 했다. 간신들은 탈탈을 귀양보내야 한다고 주청했
다.
장무기는 그러한 광경을 보면서 탈탈의 말로를 그려 보았다. 며칠
후 탈탈은 회안(??)으로 귀양보내졌다. 회안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는 날에 또다시 조서사 내려져 감숙(??)으로 옮기도록 했다.
감숙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일주야가 지난 어느 날 황제의
칙서가 다시 내려져 귀양지를 운남(?辰)으로 바뀌었다.

운남에 도착한 날 이미 합마의 무리들이 위조한 어명이 당도하여
탈탈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탈탈의 나이 마흔두 살의 일이었다. 강
직하고 충성스런 원나라의 승상 탈탈은 운남의 땅에서 이렇게 아쉬
운 생을 마쳤다.

장무기가 궁에 며칠 머무르면서 원나라 조정의 부패와 타락을 몸
소 체험했다. 원 순제는 간언을 하던 탈탈을 제거한 이후 매일 연
회를 베풀었다.

연회에 참석한 장무기는 궁에서 벗어날 궁리를 하고 있었다. 문득
페르시아 명교(曄?)의 교주로 소소(蹂鍮)가 생각났다. 장무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원 순제에게 가득 술을 따르며 말했다.

"황상! 이 자리가 비록 즐겁다 할지라도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이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장생불사의 비책을 준비하셔야 하옵니다."

원 순제는 '장생불사'라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경에게 좋은 비책이 있다면 말하시오."

"예로부터 제왕은 장생의 도를 끊임없이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연
(?)이 닿지 않았다든가 선복(??)이 미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
했습니다. 폐하께옵서는 하늘의 은총을 받으신 몸으로......."

원 순제는 장무기가 머뭇거리자 재촉했다.
"무슨 말인지 빨리 해보시오."

장무기는 얼른 말을 받았다.
"장생의 도를 제일 먼저 추구한 제왕은 진시왕이옵니다. 그는 사
람을 가려 뽑아 영주(咀澯)로 보내 불로초를 구하고자 했습니다."
"경도 영주로 떠날 생각이오?"
"진시황도 동해로 나가 불로초를 구했으나 얻지 못했습니다. 비직
은 그 뒤를 쫓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망망대해 중에는 바
드시 선산보도(?雲?隘)가 있다고 했습니다. 비직이 다행히 그곳
을 찾는다면 천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경의 말에 일리가 있소이다."
원 순제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합마가 끼어들면서 아첨을 떨
었다.

"장 형께서 떠나시면 그 신묘한 의술과 지혜로 장생불로초를 반드
시 찾을 수 있을 것이오. 황제폐하의 만수무강을 기원합시다."

원 순제가 귀가 즐거운지 연신 웃어댔다.
"경이 가겠다면 윤허를 내리는 바요. 짐이 해줄 일이 있으면 말하
시오."
"폐하께서 커다란 범선 한 척을 건조하여 주시고 약간 명의 어수
를 딸려 주시면 족하옵니다."
"오 백의 동남동녀(?審??)는 필요하지 않소?"
"그것은......."
장무기가 말을 못 하고 머뭇거리자 가린진이 끼어들었다.
"당연히 필요하겠지요. 동남동녀는 천지간에 가장 순양순음(?暫
?遭)한 정령이요, 이들의 정기가 있어야 영약의 구할 수 있습니다."

장무기는 가린진의 말이 끝나자 얼른 한 발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속으로 '만일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동남동녀를 선발한다면
백성들의 불안은 가중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가린진에게 말했
다.

"국사(髓?)의 말씀은 지당하오. 하오나 진왕 정(瞋:진시황)의 시
대에도 백성들의 지대한 원성을 들었소이다. 다시는 그때의 일을
반복해서는 아니되오."

원 순제도 장무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경의 생각이 그리 깊은 줄 몰랐소. 이번 선행(??)에는 동남동
녀를 선발하지 않겠소."
"폐하의 은총이 하해와 같습니다. 다만 해상에 도적떼가 들끓는다
하니 이에 대한 대배책만 있으면 가할 줄 압니다."
"알겠소. 경에게 전선(??)을 내려 수행토록 하겠소."
"비직이 또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전선은 첫째로 아름답고 견고
해야 합니다. 둘째는 선상에 설치할 대포는 보이지 않게 은폐시키
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이렇게 해야 신선에 대한 예의를 전부 갖출
수 있사옵니다."
"경의 말이 옳소. 그대의 말에 따르겠소."
원 순제는 장무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곁에 부복하고 있던 독
로첩목아에게 전선의 시공을 명했다. 장무기는 일이 순조롭게 풀려
나가자 계속해서 주청했다.

"진왕 정은 군사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동요케하여 하늘과 백성들
의 원망을 샀습니다. 따라서 이번 출행은 비밀에 붙이도록 해주십
시오. 선원들도 이번 출행의 목적을 알게 해서는 아니됩니다."
순제는 오른손을 들어 승낙의 표시를 하면서 얼굴 가득 함박꽃을
피웠다. 순제의 가슴에는 장생불로의 환상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올
랐다.

한 달 정도의 시일이 흘러 독로첩목아의 감독 아래 전선의 제작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장무기는 음양팔괘(遭暫??)의 이치에 따라
길일을 선택하여 출발 일시를 잡았다. 날짜가 정해지자 원 순제에
게 고별의 인사를 올리고 독로첩목아와 합마를 수행하여 해변으로
길을 떠났다.

멀리 거대한 전선의 위용이 한눈에 들어왔다. 장무기는 속에서 이
는 기쁨을 억지로 참으며 일체 내색을 하지 않았다. 선상에는 오랜
항해 생활에 필요한 음식물이 비축되었고 갖가지 금은 보화도 준비
되어 있었다. 일백여 명에 달하는 뱃꾼들은 모두 몽고군의 정예병
에서 선발해 온 일기당천(?蒔謁?)의 용사들이었다.

장무기는 뱃꾼들을 바라보면서 '만일 내가 페르시아에 도착하면
이들을 돌려보내리라. 소소(蹂鍮)는 나 혼자 찾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독로첩목아는 이미 배에 올라 갑판에 있는 선원들에게 이것저것
일을 지시하고 있었다. 장무기가 배에 오르자 그는 공손하게 말했
다.

"지금부터는 장 국사(髓?)께서 모든 명령을 내리십시오. 만일 어
기는 자가 있다면 이 몸이 용서하지 않겠소."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독로첩목아가 장무기에게 공손하게 대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출발에 앞서 원 순제가 장무기에게 대원
국사(暗?髓?)라는 훈작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자연히 독로첩목아와 합마는 장무기를 공손하게 모시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 되었다. 장무기는 갑판에 올라 깃발을 힘차게 펄럭였
다. 독로첩목아와 합마는 부두에 서서 장무기에게 작별의 손을 흔
들었다. 장무기의 출발 신호와 더불어 거대한 전선은 서서히 망망
대해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장무기는 뱃전에 나와 서늘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배의 이곳저곳을
세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과연 위용에 걸맞게 잘 지어진 전선이
었다.

갑판장을 맡고 있는 사내는 대략 쉰 살 정도로 보였는데 보통의
키에 단단한 체구를 자랑했다. 해상 경험이 풍부한지 바닷바람에
절은 거무틱틱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말솜씨도 탁월했고 일
처리도 매우 깔끔했다. 장무기는 줄곧 갑판 위에서 사방을 둘러보
고 있었다. 갑판장은 장무기가 먼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을
응시하면서 호탕하게 말을 뱉었다.

"이번에 출행하는 전선은 우리 몽고 수군의 유사이래 가장 크고
견고한 범선입니다. 앞뒤 갑판에 주포(嵯?)가 각각 일 문(??)씩
설치되었고, 측포(??)는 좌우 열 문씩 있습니다. 선상에 비축된
식량과 식수도 반 년은 버틸 수 있는 양입니다."

갑판장은 신이 나는지 계속 입을 열었다.
"장 국사님! 어느 방향으로 기수를 돌릴까요?"
장무기는 그제서야 말을 했다.
"남쪽 방향으로 돌리게."
"남쪽 방향으로......!"
갑판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전선은 신속하게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
다. 장무기는 시원한 남풍을 맞으면서 갑판장에게 물었다.

"갑판장! 전선에 동승한 수병들의 기예 솜씨는 어떤가?"
"몽고 수병 중에서는 단연 으뜸가는 실력이지요."
"그렇다면 즉시 대포의 문을 열고 연습 발사를 시켜 보게!"
갑판장은 장무기의 명령에 고개를 끄덕이고 포병들에게 발포를 명
했다.

잠시 후 '콰르릉' 소리와 더불어 갑판의 앞뒤에 숨어 있던 주포
두 문이 우람한 모습을 갑판 위로 드러냈다. 동시에 좌우 갑판에서
스무 개의 검은 구멍으로 측포가 주둥이를 내밀었다.

"화약 장전!"
갑판장의 호령이 떨어지자 수병들이 일제히 화약을 장전했다. 일
백여 명의 몽고 수병들은 어깨를 드러내며 우람한 근육을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화약 장전이 끝나자 갑판장은 또다시 소리쳤다.

"점화!"
잠시 후 '쾅' 소리와 함께 두 문의 주포에서 우렁찬 포성이 울렸
다. 장무기는 갑판 위에서 뱃전이 진동하는 쾌감에 우렁찬 박수를
던졌다.

"좌현 점화!"
"우현 점화!"
계속해서 '쾅', '쾅'하는 소리가 해상의 파도를 뒤집었다. 화약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 역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전선의 사방에서
솟구치는 물기둥이 장관을 이루었다.

"훌륭하네!"
장무기는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갑판장은 '은폐하라'하고 큰소리
로 외치면서 장무기에게 자랑스런 몸짓으로 어깨를 당당하게 폈다.
장무기는 그런 갑판장을 이끌고 선시로 들어와 자리에 앉히며 말했
다.

"그대는 항해의 목적지를 알고 싶은가?"
갑판장은 장무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장무기는 가까이 다가
가 귀엣말로 속삭였다.

"내가 그대를 불신임해서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네. 황제 폐하의
엄명이 있어 발설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네."
"그럼 국사께서는 항해의 목적지를 알고 계십니까?"
"약간은 알고 있다네. 황상께서 이르시길 '삼 일이 지난 후에는
발설해도 무방하네'라고 하셨으니 그때가 되면 귀뜸해 주겠네."

장무기는 원 순제가 항해를 허락한 이래 궁중에거 항해와 관련되
많은 서적을 탐독했다. 항로는 물론이고 암초나 풍라의 길 들을 익
혔다. 장무기는 원래 항해의 목적지를 누구에게도 알려 줄 생각이
없었으나 갑판장이 똑똑하고 용감하며 성실해 보이자 삼 일 추에
알려 줄 결심을 했다.

사흘이 지난 아침, 멀리 붉은 그림자가 파도를 타고 재빠르게 전
선으로 달려왔다. 태양이 바다에서 솟구치려는 찰나였다. 장무기는
이른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 갑판 위에 올라 아침 햇살을 받으며
무예 연습을 시작했다.

검광이 하늘을 가르고 장풍이 파도를 쪼개는 장무기의 무공을 연
습하는 모습에 몽고 수병은 넋을 잃고 바라만 보았다. 배가 심하게
요동하자 몇 명의 몽고 수병은 얼른 닻사슬을 오른쪽에 쥐어들고
가볍게 바다에 내던졌다.

순간 장무기는 '건곤대나이'의 여섯 단계 수법으로 해면에 떨어지
는 닻사슬을 공중으로 끌어올렸다. '드르륵' 소리와 더불어 닻사슬
이 감기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몽고 수병들은 신기막측한 장무기의
무공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는 두 손으로 커다란 원을 그으
며 숨을 골랐다.

몽고인들은 용력으로 천하를 얻은 민족이다. 그들은 평시에고 영
사에 대한 존경심이 남달랐다. 장무기의 뛰어난 무공을 직접 보게
된 몽고 수병들은 장무기에 대한 외경심이 한층 깊어졌다.

이날 장무기는 갑판장에게 행선지를 알려 주었다. 갑판장은 멀고
먼 페르시아가 항해의 목적지라는 장무기의 말에 깜짝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수년 간 항해를 한 경험이 있지만 발해
주위에서만 맴돌았을 뿐 멀리 나간 적은 없었다. 속에서 일어나는
두려움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장무기는 갑판장이 두 눈을 멀뚱멀뚱 뜬 채 아무 말도 없자 조용
히 말했다.
"갑판장!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돼네. 이번 항로는 내가 이미 오
랫동안 생각하고 있던 길이라네. 더구나 이 전선은 견고하고 대포
등으로 무장하고 있지 않은가?"

갑판장은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 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또다시 수일이 지났다. 망망대해의 끝에서는 붉은 노을이 힘차게
밀려오고 있었다. 장무기는 갑판에 앉아 조용히 저녁 노을을 감상
하고 있었다. 이때 망루에 올라 사방을 관측하던 수병 하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폭풍이 밀려온다!"
다급한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갑판은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했다.
그렇지만 무질서하지는 않았다. 모두가 제각기 바쁘게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한 수병이 급히 돛을 내리기 시작했다. 갑판장은 장
무기에게 급히 말했다.

"극사! 선창으로 들어가시지요."
장무기는 갑판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
다. 잔잔한 바람이 얼굴에 스쳐왔다. 아직도 폭풍이 불어오고 있지
는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손을 저어 갑판에 남겠다고 표시했다.

순간, '쿠르릉' 소리와 함께 붉은 노을이 하늘로 치솟으며 무섭게
전선으로 달려오고 있지 않은가? 장무기는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산더미 같은 파도가 순식간에 뱃머리를 강타했다. 장무기는 재빨리
두 장 정도 뛰어올라 선루의 창가에 사뿐히 걸터앉았다.

몇 명의 수병은 밧줄로 몸을 감고 갑판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바닷
물을 막아냈다. 갑자기 '으악' 소리와 함께 수병 한 명이 바닷물에
쓸려갔다. 장무기는 수병이 위험에 바지자 제비 같은 경공술로 갑
판으로 뛰어내렸다.

"국사! 위험합니다!"
갑판장이 큰소리로 외쳤다. 장무기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른
발로 갑판을 힘차게 차면서 허공으로 두세 바퀴 몸을 굴리며 해면
으로 뛰어내렸다. 허우적거리는 수병의 오른손을 가볍게 쥐고서 왼
손으로해수면에 장풍을 쏟아냈다. 탄력을 이용하여 해수면에서 대
여섯 장 높이로 뛰어오른 장무기는 갑판으로 몸을 날렸다.

또 한 차례 산더미 같은 파도가 장무기를 덮쳤다. 장무기와 수병
은 한몸이 되어 '가을 바람에 휘날리는 단풍낙엽(雙嘆??)'의 신
법으로 회전하며 바닥에 떨어졌다.

몽고 수병들은 또다시 장무기의 신력(佚淹)과 협기(?褶)에 감복
했다. 파도에 휩쓸렸던 수병은 바닷물을 한 양동이나 쏟아낸 추에
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 일로 장무기는 자연의 위력에 사뭇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거대한 전선도 파도가 한 차례 덮칠 때마다 수 없을 만큼
요동쳤기 때문이다. 수병들은 모두 선창으로 물러났다. 장무기도
갑판장과 함께 선창으로 들어와 폭풍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폭풍은 나흘 밤낮을 쉬지 않고 불어왔다. 장무기와 수병들은 지칠
대로 지쳤다. 이대로 하루만 더 지나가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저녁이 되자 폭풍의 위력이 점점 약해졌다. 하늘을 덮었던
구름이 서서히 걷히면서 별이 하나 둘 미소지으며 떠오르기 시작했
다.

전선은 별빛을 받으며 정처없이 남쪽으로 흘러갔다. 멀리 동녘에
서 여명이 동트기 시작했다. 망루에 올라간 수병은 이마에 오른손
을 올리고 사방을 관찰하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해적선이다!"
"해적선이 나타났다!"
갑판장은 즉시 대응 태세를 갖추도록 준비시키고 장무기에게 달려
왔다. 수병들이 이리뛰고 저리뛰는 모습을 바라보던 장무기는 갑판
장에게 조용히 말했다.

"급히 서두를 필요가 없네. 진정하게!"
"국사! 저놈들은 해적입니다."
장무기는 다급하게 대답하는 갑판장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두 손
을 들어 진정하라는 표시를 한 그는 멀리 해적선을 바라보았다. 하
늘 끝에 검은 깃발이 펄럭이는 두 척의 범선이 미끄러지듯 달려오
고 있었다.

"가까이 접근하면 그때 공격하도록 하게!"
갑판장은 그제서야 장무기의 뜻을 알아차리고 수병들에게 화약을
장전케 했다. 해적선은 장무기의 전선이 무장하지 않은 듯 보이자
방심하고 양쪽에서 달려들었다. 게다가 전선이 달아날 생각을 하지
않자 더욱 기고만장하여 접근했다.

장무기는 해적선이 가까이 다가오자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해적들은 흉악한 인상에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무어라고 지껄이
고 있었지만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장무기는 해적선이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은 채 접근하자 갑판장
에게 작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두 해적선의 가운데로 운항하라!"
갑판장은 장무기의 명령에 따라 곧바로 소리쳤다.
"전속력으로 전진한다!"
"화약에 불을 붙여라!"
전신은 신속하게 두 해적선 사이로 미끄러져 나가면서 일제히 포
문을 열었다. 이십 문의 대포가 위용한 자태를 뽐내며 해적선을 향
해 불을 뿜었다.

"쾅, 콰르릉!"
스무 발의 포탄이 해적선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갑판장은 계속 소
리쳤다.

"화약 장전!"
"불을 붙여라!"
"쾅, 콰르릉!"
마흔 발의 포탄에 해적선은 좌우측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 기수를 돌려라!"
갑판장의 고함에 전선은 신속하게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동
시에 갑판 전후에 장착한 주포가 불을 뿜었다.

섬광이 빛을 가르며 해적선의 허리를 강타했다. 해적선들은 선상
에서 대응 한 번 하지 못하고 바다로 몸을 던졌다. 순식간에 해적
선은 바다 속으로 침몰했다.

몽고 수병들은 해적선을 맞아 단숨에 승리를 거두자 장무기를 신
처럼 받들어 모셨다. 장무기는 수병들에게 술과 고기를 내려 노고
를 치하했다.

이날부터 수일 간은 바람도 한 점 불지 않았다. 하늘은 더욱 높이
솟아 올랐고 구름을 뚫고 푸릇푸릇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오후
가 되자 오른쪽 하늘 끝에 너덧 개의 흑점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장무기는 즉시 명령을 내려 신속하게 앞으로 배를 몰
았다.

해적선이 뒤따른 지 육 일째가 되었다. 전선은 여전히 흑점을 떨
구지 못했다. 갑판장은 해적선이 계속 쫓아오자 두려움에 안절부절
못했다. 장무기는 갑판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안심하라 이르고 해적
선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멀리 따라오는 관계로 숫자가 몇 명인지,
어떤 무장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몽고 수병들은 장무기의 신력과 용맹, 슬기를 믿고 있는지 매우
태평해 보였다. 단지 갑판장은 이곳의 해로를 잘 알지 못해 암초에
걸릴까 그것이 걱정이었다.

또다시 사흘이 지났다. 해적선은 점차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네 척이 되는 해적선은 커다란 범선이었다. 장무기는 명령을 내려
계속 앞으로 달아나도록 했다.

또다시 육주야가 지났다. 멀리 커다란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장무기는 해도(?愛)를 보고 저곳이 마래시아(?糧??)임을 알았
다. 하루만 지나면 마육갑해협(?俎薯??)을 지나게 된다.

다음 날 새벽 장무기는 갑판에 올라 좌우의 지형을 살피기 시작했
다. 이미 해적선은 지척의 거리에까지 추격해 왔다. 가장 큰 해적
의 범선은 우회하여 앞지르고 있었다. 장무기는 급히 종을 쳐서 잠
들어 있는 수병들을 깨웠다.

해적선은 장무기의 전선에 장착된 두 문의 주포와 이십 문의 대포
의 위용에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거리를 유지했다. 갑판장은 장무
기의 침착한 모습에 약간의 두려움을 씻으며 말했다.

"국사! 해적선의 대포는 사정거리가 우리보다 짧습니다. 더욱이
한 척에 네 문의 대포 밖에 없습니다."

장무기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앞쪽에 포진한 적선을 응
시했다. 네 척의 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했다. 검은색의
커다란 깃발에는 흰 해골이 그려져 있었다. 장무기는 한눈에 그 배
가 해적의 두목이 지휘하는 범선임을 알았다.

"우리는 저 배를 먼저 공격한다!"
장무기는 갑판장에게 앞쪽의 해적선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갑판장
이 걱정되는 듯 물었다.

"앞쪽의 해적선을 일방적으로 공격하면 옆과 뒤에 있는 해적선의
공격에는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합니까?"
"생각이 있다. 전속력으로 앞을 향해 달려간다."
장무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람의 방향이 북풍으로 바뀌었
다. 장무기는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수병들에게 화약 장전을 명령
했다.

해적선단은 장무기의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했다. 앞쪽에서 포진한
적선은 대응을 하지 않고 마육갑해협 쪽으로 달아났다. 세 척의 쾌
선도 뒤따르기 시작했다.

이번에 나타난 해적선은 지난 번 패퇴한 해적들과 한패거리였다.
겨우 살아난 몇 명의 해적선들이 산채로 돌아가 자신들의 배가 공
격을 받아 침몰했다고 보고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해적 두령이
즉시 명령을 내려 장무기의 전선을 사방으로 헤매며 찾기 시작한
것이다.

찾아낸 순간에 격퇴를 하고자 생각했지만 막상 거대한 전선을 본
해적 두령은 공격을 잠시 미루고 계속 뒤만 따르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장무기의 전선이 갑자기 공격을 하자 해적
선의 주선(嵯?)은 당황했다. 한 시진도 되지 못해 주선에 가까이
접근한 장무기의 전선은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쾅!"

갑판의 앞쪽에 장치한 주포가 불을 뿜었다. 포탄은 주선의 다섯
장 거리 앞에 커다란 물줄기를 이루며 폭발했다. 주선은 돛을 비껴
세우고 재빨리 옆으로 피했다. 주포가 계속 불을 뿜었다. 주선에서
쏘아대는 사정거리가 짧은지 장무기의 전선까지 미치지 못했다. 전
선의 주포도 주선을 제대로 명중시키지 못했다.

"쾅, 콰르릉!"
네번째 주포가 불을 뿜었다. '와지끈' 소리와 함께 주선의 후미가
무너져 내리며 불타기 시작했다. 동시에 주포가 다섯번째로 불을
뿜었으나 명중하지 못했다. 이미 주선은 가까이 접근했다. 갑판에
앉아 지휘를 하고 있던 장무기는 주선이 더이상 주포 공격을 할 수
없는 거리에까지 접근하자 갑판장에게 소리쳤다.

"갑판에 있는 모든 수병은 칼을 들고 대항할 준비를 하라!"
해적선의 주선은 수장의 거리에 접근했다. '슝'하는 소리와 함께
쇠갈쿠리가 전선으로 날아왔다.

"쇠줄을 끊어라!"
"좌현의 대포는 불을 붙여라!"
장무기의 명령에 몽고 수병들은 일제히 검을 들어 쇠줄을 내리쳤
다. 번쩍 하고 빛이 일었으나 쇠줄은 끊어지지 않았다. 동시에 주
선에서 무수한 화살이 쏟아지며몽고 수병들을 고꾸라뜨렸다.

장무기는 재빨리 도룡도(艾汝埃)를 꺼내면서 사자후(?侏披)를 터
뜨렸다.

"무림지존 도룡보도 천하를 호령하니 누가 따르지 않겠는가? 의천
검이 나타나지 않는 한 다툴 자 없도다!"
도룡도의 검광이 사방에 번쩍이는가 싶더니 쇠갈쿠리의 몇 줄이
단숨에 끊어졌다. '쾅, 콰르릉' 소리와 함께 스무 발의 대포도 일
제히 불을 뿜었다.

해적선의 주선은 스무 대의 포탄공격에 기우뚱거렸다. 후미에 접
근한 해적선에서도 포탄공격이 시작되었다. '쾅' 소리와 함께 장무
기의 기선도 세 발을 맞았다. 명중은 되지 않았지만 불길이 치솟으
며 십여 명의 몽고 수병들이 쓰러졌다.

해적선의 주선은 이미 반 이상이 침몰하고 있었다. 주선의 해적들
은 있는 힘을 다하여 갈쿠리의 줄을 당겼다. '쿵' 소리가 나면서
주선의 측면이 전선에 부딪혔다. 해적들은 일제히 줄은 타고 전선
으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장무기는 도룡도를 똑바로 세우고 허공에 검날을 세 바퀴 돌리면
서 몸을 솟구쳤다. '독수리가 먹이를 가로채는 기세(?存逮齒)'로
보도를 휘둘렀다. 전선의 갑판으로 오르려던 십여 명의 해적들은
비명을 지르며 바닷속으로 떨어졌다.

남아 있던 주선의 해적들은 마지막 발악을 하면서 창, 검, 모(盈)
를 일제히 던지며 갑판으로 뛰어올랐다. 장무기는 외손으로 장풍을
휘두르며 도룡도를 비스듬히 휘둘렀다.

장무기의 검광이 번쩍이는 곳마다 해적들의 비명소리가 파도에 휩
쓸리면서 해적선의 주선은 완전히 바닷속으로 잠겨들어갔다. 위기
는 끝나지 않았다. 또다시 포소리와 함께 전선의 후미에 불꽃이 일
면서 해적선의 포탄이 명중했다. 장무기는 급히 갑판의 뒤쪽으로
달려왔다. 갑판 위에는 십수 명의 병사들이 쓰러져 있었다.

"전속력을 내서 앞으로 달려라!"
장무기는 우선 해적선이 쏘아대는 대포의 사정거리를 벗어나는 게
급선무라 생각했다. 전선은 빠른 속도로 달려나갔다. 세 척의 해적
선도 뒤질세라 쫓아왔다.

장무기는 해적선의 대포의 사정권에서 벗어나자 갑판의 불을 마져
끄도록 명했다. 불길이 잡히자 그는 큰소리로 외쳤다.

"주포의 화약을 장전하라!"
갑판장이 말을 받아 소리쳤다.
"불을 붙여라!"
갑판장의 우악스런 명령과는 달리 화약의 불꽃은 '푸시식' 하면서
꺼지고 말았다. 갑판장은 '이런 밥통들 같으니'라고 외치면서 직접
화약을 다시 장전했다. 우렁찬 포 소리가 우리자마자 선두에 따라
오던 해적선의 선수에 명중했다.

연이어 후미의 주포가 불을 뿜었다. 해적선은 주포의 사정거리에
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차별로 포탄 세례를 받았다. 배에 불이 붙자
해적선은 더이상 쫓아오지 못하고 속력을 늦추었다. 간신히 불길을
잡은 듯 세 척의 해적선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더이상 접근하지 않
았다.

갑판장은 해적선의 위협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자 갑판을 수리
하고 대포를 점검하도록 명했다. 몽고 수병들은 갑판에 서서 먼 하
늘을 응시하고 있는 장무기를 마치 거대한 산처럼 느끼고 있었다.

장무기의 전선은 이미 마육갑해협에 들어섰다. 장무기는 전선의
속력을 늦추도록 명했다. 세 척의 해적선은 해적을 상징하는 검은
깃발과 검은 돛을 내리고 계속 뒤를 따랐다.

마육갑해협은 많은 상선들이 왕래하는 주요한 해로였다. 해변에는
많은 항구와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고 이국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범선과 선원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한 시진 정도가 흘렀을까, 해적선은 이미 지척의 거리에 접근하고
있었다. 갑판장은 주위에 상선이 많이 정박을 하고 있는 관계로 주
포를 쏘지 않았다. 장무기도 갑판장에게 쏘지 말라고 손짓을 했다.

해적선은 제비의 날개 모양으로 전선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포위
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해적선이 먼저 대포를 쏘기 시작했다. '번
쩍' 섬광이 일어나며 전선의 후미에 두 발이 명중했다.

"불을 붙여라!"
장무기는 깜짝 놀라며 급히 명령했다. 갑판장은 후미의 주포를 쏘
면서 신속하게 앞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해협의 사이에 정박하고
있던 상선의 선원들은 흉흉한 해적선이 나타나자 바다에 몸을 던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조용히 침묵을 지키던 해협에 포성이 요란하게 울리자 상선을 보
호하던 병선들이 일제히 출동했다. 또다시 '쾅' 소리가 나면서 해
적선의 포탄이 후미의 주포에 명중했다. '우지직' 주포를 받치고
있던 받침목이 맥없이 부러져버렸다.

전선은 해협에서 가장 좁은 지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미 후미의
주포를 사용할 수 없는 전선은 빠른 속도로 달아났다. 장무기는 다
급했다.

'이렇게 좁은 해협에서 상선을 만나면 큰일이다.'
장무기는 속으로 제발 맞은편에서 다른 배가 출현하지 않기를 원
했다. 장무기의 전선이 앞에서 달리고 해적선이 그 뒤를 쫓고 마래
시아 병선이 또다시 쫓았다. 장무기는 좁은 해협을 벗어나자 큰소
리로 외쳤다.

"좌측으로 뱃머리를 돌려라!"
장무기는 좌측으로 배를 돌려 뒤쫓는 마래시아 수병과 함께 해적
선을 향해 돌진했다. 해적선은 갑자기 장무기의 전선이 좌회전하면
서 공격하자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쾅', '콰르릉' 소리가 우렁차게 나면서 스무 문의 대포가 불을
뿜었다. 뒤쫓던 마래시아 병선에서도 대포가 불을 뿜었다. 양쪽으
로부터 협공을 당한 세 척의 해적선은 십여 발의 포탄을 맞고 기울
기 시작했다.

해적선의 최후 발악이 반 시진 정도 계속되었다. 그렇지만 장무기
의 전선과 마래시아 수병의 막강한 화력 앞에 얼마 견디지 못하고
침몰했다. 마래시아 병선은 침몰하는 해적선을 비껴 전선에 가까이
접근했다. 갑판장은 급히 뱃머리에 다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우리는 대원의 수군이오. 우리는 대원의 수군이오......."
마래시아 병사들은 한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듯 고개만 갸우뚱거렸
다. 마래시아 병선은 이미 가까운 거리로 접근했다. 네 척의 거대
한 범선은 좌우로 거리를 좁히며 빠르게 다가왔다. 장무기는 그 기
세를 보자 급히 소리쳤다.

"적선의 공격이다. 신속하게 피하라!"
장무기의 말이 끝나자 마래시아 병선의 대포가 불을 뿜었다. 장무
기는 마래시아 병사들이 자신들을 해적선으로 오인하고 있다고 생
각이 퍼뜩 들었다. 전선의 주위에 바닷물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네
발이 빗나가자 전선의 대포가 계속 불을 뿜었다.

장무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즉시 공격을 명했다. 다섯 척의 범선
은 서로 엉켜 대포를 쏘았댔다. 장무기의 전선에서 스무 문의 대포
가 일제히 불을 뿜어대자 상황이 달라졌다. 적병들은 장무기의 전
선에서 뿜어나오는 대포의 위력에 주춤했다.

장무기는 적이 주춤하자 급히 퇴각을 명했다. 다행히 전선의 돛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마래시아 병선도 급히 뒤를 쫓아오기 시작
했다. 적선에서 쏘아대는 대포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난 전선은 더욱
빠르게 달아났다. 장무기는 갑판에 서서 뒤쪽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며 깜짝 놀랐다.

앞쪽에 이십여 척의 병선이 수십 문의 대포를 장착하고 일자로 포
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뒤쪽에서는 네 척의 병선이 빠르게 뒤
쫓고 있었다. 전선은 이미 적선의 사정거리 내로 진입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갑판장에게 급히 물었다.

"선상에 강궁이 있느냐?"
"예! 준비되어 있습니다."
갑판장은 급히 강궁을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모든 병사들은 돛을 내리고 대포에 화약을 장전하라!"
장무기는 큰소리로 명령을 내리고 활을 받았다. 갑판장은 무슨 영
문인지 모르는 듯 두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장무기를 응시했다.

"갑판장은 화살대에 솜을 뭉치고 기름을 바르도록!"
장무기의 명령에 몽고 수병들은 일제히 화살대에 솜을 뭉치고 기
름을 바르기 시작했다. 갑판장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대포로도 닿지 않는 거리인데 화살로 어떻게 한다는 것이지?'
장무기는 갑판장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네 대의 화살을 줄에
걸고 힘차게 당겼다. '팅'하면서 현(?)이 끊어졌다. 그는 두 대의
활을 들어 다시 힘차게 당겼다. 또다시 '팅'하면서 현이 끊어졌다.
다시 네 대의 활을 들어 힘차게 당겼다. 그제서야 줄이 탱탱하게
잡아당겨졌다.

"불을 붙여라!"
장무기의 말에 수병이 재빨리 화살대에 불을 붙였다. '슈-융' 하
는 소리와 함께 네 대의 화살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푸
시식'하면서 화살은 정확하게 적선의 돛에 명중했다. 장무기는 계
속해서 화살을 날렸다.

범선의 돛은 매우 부드러운 면사(??)로 만들어져 있었다. 온종
일 바닷바람에 팽팽하게 늘어나 있어 불이 붙기에는 안성맞춤이었
다. 순식간에 스무 척의 적선에 불길이 타올랐다. 몽고 수병들은
장무기의 놀라운 무공에 사기백백했다.

"전속력으로 배를 몰아라!"
장무기의 명령이 떨어지자 신속하게 돛이 올려지고 앞으로 미끌어
져 갔다. 적선에서 쏘아대는 포탄의 불빛이 파도를 가르며 날아왔
다. 전선의 주포도 동시에 불을 뿜었다. 해면의 여기저기에 물기둥
이 솟구쳤다. 수척의 적선이 주포에 맞아 침몰했다.

전선은 신속하게 적선의 중간으로 돌진했다. 좌우현에 장착한 스
무 문의 대포가 불을 뿜었다. 두 척의 적선에 일곱 개의 구멍이 뚫
리며 바닷물이 힘차게 빨려 들어갔다.

'투루르'하면서 수십 개의 갈쿠리가 전선에 떨어졌다. 마래시아
병사들은 매우 용감했다. 화살이 빗발치듯 전선으로 날아왔다. 몇
명의 몽고 수병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대포
를 쓸 수가 없었다. 십여 척의 적선이 물샐 틈 없이 포위공격을 했
다.

뒤쫓아온 네 척의 병선도 이미 후미에 도착했다. 우측에 있는 세
번째 범선이 주선이었다. 선루의 꼭대기에 한 수병이 깃발을 흔들
며 선단을 지휘하는 모습이 장무기의 눈에 들어왔다.

장무기는 '적을 제압하려면 적장을 죽여라'라는 고사를 중얼거리
면서 도룡도를 힘차게 부여잡았다. 왼손을 들어 허공에 한 차례 원
을 그린 추 가슴으로 끌어내리며 호흡을 갈무리했다. 동시에 갑판
을 힘차게 내딛으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장무기는 능공호도(?囚??)의 수법으로 허공을 차면서 우측으로
날아올랐다. '슈-웅' 소리가 나면서 수대의 화살이 장무기에게 쏟
아졌다. '얍!' 장무기는 첫번째 날아온 화살을 가볍게 밟으며 허리
를 굽힌채 도룡도를 휘둘렀다. 수대의 화살이 도중에 허리가 잘리
며 푸드득 떨어졌다.

장무기는 화살을 발판 삼아 다시 한 번 허공으로 솟구치면서 제운
종의 신법으로 선루의 꼭대기로 날아올렸다. 공격을 당한 마래시아
병사가 장모(只盈)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장무기는 슬쩍 왼쪽으
로 피하면서 왼손의 장모의 자루를 힘껏 잡았다. 동시에 오른손으
로 '건곤대나이'의 수법으로 병사를 끌어당겼다가 수장 밖으로 밀
쳐냈다.

'퍽' 소리가 나면서 마래시아 병사는 바닷속으로 떨어졌다. 장무
기는 이미 아래층을 지나 이층으로 뛰어올랐다. 이층 선루에는 수
명의 병사들이 단모(俄盈)와 방극(瘟?)을 움켜쥐고 장무기를 에워
쌌다. 장무기는 허리를 반 쯤 급히며 도룡도를 힘차게 휘둘렀다.

단모를 치켜든 병사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때를 놓치지 않
고 장무기는 허공으로 솟구치며 돛을 지탱하고 있는 장대를 단칼에
부러뜨렸다. 수십 장의 돛이 병사들의 몸으로 쏟아져 내리자 장무
기는 적장이 있는 방향으로 뛰어 올랐다.

적장은 이미 장무기의 의도를 간파하고 수장 뒤로 물러났다. 그는
보검을 코에서 허리까지 반듯하게 세우고 두 다리로 기마 자세를
취했다. 장무기는 마래시아인의 검법을 처음 보았다. 중원의 검법
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듯했다.

갑자기 등뒤에서 마래시아 병사의 장모 공격이 들어왔다. 장무기
는 허공으로 반 장 솟구치며 왼손에 강한 내공을 주입하여 장풍을
쏟아냈다. 장무기의 장풍을 맞은 그 병사는 비명을 지르며 허공으
로 삼 장 정도 솟구치더니 바닷속으로 풍덩 떨어졌다.

장무기는 적장을 향해 오른발, 왼발 팔자형으로 다가갔다. 적장도
한 걸음, 두 걸음 뒷걸음질치며 보검을 두 손으로 힘있게 쥐었다.
사오 장 정도의 거리로 좁혀졌을 때 장무기는 기합 소리를 내지르
며 공중으로 삼 장 정도 솟구쳐 올랐다.

적장은 보검을 일자로 높이 세우고 둥글게 원을 그렸다. 장무기는
'능공공번(?囚囚僚)'의 신법으로 호공에서 몸을 한 차례 회전하며
도룡도를 휘둘렀다. 적장의 뒤에서 검과 창을 꼬아쥔 병사들 중에
한 명이 앞으로 뛰쳐나오며 장검으로 도룡도에 부딪쳤다.

그러나 어찌 도룡보도를 당하랴! 창은 일시에 허공으로 날아갔다.
장무기는 오른발로 선루의 바닥을 가볍게 내차며 일 장을 다시 솟
구쳤다. 동시에 왼발로 공격한 병사의 가슴을 힘차게 내리쳤다.
'풍덩!' 소리와 함께 마래시아 병사는 바닷물로 떨어졌다.

적장은 겁에 질려 보검만 꼬나들고 공격을 하지 못했다. 뒤를 힐
끗 바라보며 병사들에게 공격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세 명의 병사
가 일시에 장무기를 공격했다. 장무기는 도룡도를 검집에 재빨리
갈무리하면서 두 손으로 태극 모양의 회전을 한 다음 가슴에서 복
부로 끌어내렸다.

그것은 '건곤대나이'의 심법으로 내공을 모으면서 장무기는 허공
으로 다섯 장을 솟구쳤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힘차게 휘두르며 장
풍을 쏟아냈다. 세 명의 병사는 울컥 피를 토하며 바닷물로 떨어졌
다.

나머지 마래시아 병사들은 장무기의 천신행공(?佚?囚)의 신비한
무공에 감히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다리만 부들부들 떨었다.

장무기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다시 허공으로 솟구치며 도룡도를
꺼내 적장에게 휘둘렀다. 적장의 나이는 대략 마흔이 넘어 보였다.
구레나룻이 짙게 드리우고 두 눈이 형형하여 용력이 대단해 보였다.
장무기가 도룡도를 휘두르자 보검으로 맞받아쳤다. '차창'하며 예
리한 소리가 뱃전을 울리면서 검광이 사방으로 튀었다. 적장은 두
어걸음 뒤로 물러나면서 깜짝 놀랐다.

'저자의 용력이 보통이 아니구나!'
장무기는 오른손으로 도룡도를 쥐고 왼손을 뻗어 적장의 혈도를
누르려 했다. 위기즉발의 순간에 마래시아 병사 한 명이 단모를 휘
두르며 장무기에게 달려들었다. 장무기는 뱀이 허물을 벗는 모양으
로 오른손을 비틀며 단모를 쥔 적병의 두 손을 비틀었다. 둔탁한
소리가 나면서 적병은 수어 장 날아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적장은 때를 놓치지 않고 보검을 휘두르며 장무기의 가슴을 겨냥
했다. 장무기는 재빨리 바닥에 몸을 누이고 오른발로 적장의 보검
을 차는 동시에 도룡도로 적장의 다리를 찔러 나갔다. 적장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서 장무기의 얼굴을 향해 보검을 힘차게 내질렀
다.

장무기는 얼굴을 왼쪽으로 돌리며 순간적으로 보검을 이빨로 움켜
쥐었다. 적장은 흠칫 놀라며 보검을 좌우로 돌리며 빼내려 시도했
다. 장무기의 구양신공은 이미 극성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내공을
이빨에 집중한 장무기는 보검에다 구양신공을 흘려보냈다. 적장은
두 손이 마비되면서 보검을 놓치고 말았다.

장무기는 재빨리 오른손을 쭉 뻗으며 적장의 기문혈(瑟??)을 찍
어 눌렀다. 적장은 전신이 오싹하면서 아무런 대항도 하지 못했다.

장무기가 적장을 사로잡아 선루에서 내려오는데 나머지 돛대가 우
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장무기는 오른손으로 적장의 팔을 뒤로
비틀어 제끼고 왼손으로는 허리를 감아 사오 장 밖으로 피신했다.

돛이 바람에 날리며 장무기에게 덮쳤다. 장무기는 왼손으로 도룡
도를 휘둘렀다. 도룡도가 빛을 발하자 천조각은 수천 수만 갈래로
나뉘면서 허공을 하얗게 덮어 버렸다.

장무기는 적장을 사로잡아 갑판으로 내려왔다. 선상의 마래시아
병사들은 자신의 장군이 장무기에게 사로잡히자 감히 경거망동을
하지 못했다. 장무기는 적장의 목줄기에 댄 도룡도에 힘을 가했다.
물러나라고 소리를 치라는 표시였다. 적장은 그래도 계속 머뭇거리
며 대항했다.

장무기는 더욱 힘을 가했다. 적장의 목줄기에 가느다란 핏물이 배
어 나왔다. 적장은 할 수 없다는 듯 마래시아 병사들에게 몇 마디
소리쳤다. 잠시 후 마래시아 병선은 서서히 해변가로 물러났다.

두 척의 병선만이 남아 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병사들은 구
하고 물러났다. 잠시 후 마래시아 병선은 모두 마육갑해협으로 퇴
각했다. 장무기는 그제서야 자신의 전선에 옮겨 타며 적장을 풀어
주었다. 무장이 해제된 적의 병선은 감히 장무기의 전선에 대항하
지 못하고 해변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장무기는 명령을 내려 신속
하게 인도양으로 배를 몰았다.

스물네 척의 마래시아 병선을 맞아 몽고 수병은 매우 용감하게 싸
웠으나 반 이상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만일 장무기가 적장을 사
로잡지 못했다면 이번 싸움에서 모두 바다의 원혼이 될 뻔했다. 그
들은 모두 바닥에 무릎을 굻고 장무기에게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몽고 수병들은 마래시아 수병이 무참하게 패하여 퇴각하자 더욱더
용기가 샘솟는 듯 힘차게 배를 몰았다. 어떤 폭풍과 파도도 이제는
무섭지 않았다. 멀리 창창대해에는 구름 한점 보이지 않았다.

마육갑해협은 원래 암초가 매우 많았다. 북대황(溶暗?:북만주 지
역)의 수풀에 삐죽삐죽 솟구친 침엽수처럼 암초들은 바닷속 여기저
기에서 날카로움을 뽐내고 있었다. 마육갑해협에서 인도양으로 빠
져나가는 길은 해적의 출몰보다도 더욱 어렵고 힘든 항로였다.

멀리 마육갑해협을 위로 하고 인도양으로 접어들려는 찰나에 '콰
쾅'하며 대포소리가 떼를 지어 뒤쫓아오고 있었다. 장무기는 그제
서야 '속았구나'하면서 분을 참지 못했다.

마래시아 병선은 암초의 사이를 잘도 피하면서 신속하게 접근해
왔다. 이미 쌍방의 거리는 대포의 사정권 내로 가까워졌다.

장무기는 병사들에게 명하여 최대한 빨리 암초지대를 벗어나도록
했다. 장무기의 전선은 이미 후미의 주포가 부서져 반격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십수 척의 마래시아 병선은 연신 대포를 쏘면서
무섭게 추격해 왔다. 자신들의 장군이 무참하게 치욕을 당한 보복
을 하려는 심산 같았다. 장무기의 전선 바로 뒤로는 수십 개의 물
기둥이 솟구치며 장관을 이루었다.

장무기는 정면으로 대항할 수 없다는 생각에 무조건 앞으로 전선
을 몰았다. 어쨌든 거리를 넓히는 게 상책이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명하여 선상에 있는 무거운 물걸들을 바다에 버리도록 했다. 단지
식수만 있으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에서 페르
시아까지는 삼 일 정도면 당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몽고 수병들은 일제히 전선에 있는 불필요한 물건들을 바닷속에
내던졌다. 바쁘게 도망가는 와중에 '콰광'하는 폭음이 울리면서 배
의 허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바닷물이 구멍을 통해 힘차게 쏟
아져 들어왔다.

갑판장은 신속하게 구멍을 틀어막으라는 명령을 내리고 양동이로
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이미 대다수 물건들이 바다에 버려져 가벼
워진 배는 더욱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구멍을 틀어막은 몽고 수
병들은 일제히 바닷물을 퍼냈다. 얼마 후 전선은 마래시아 병선의
흉흉한 대포의 사정권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마래시아 병선의 적장은 바다에 버려진 물품을 보면서 속으로 중
얼거렸다.

"바쁘게 도망가느라 물건들을 모두 바다에 버렸구나! 오래 버티지
못할 거다. 굶주림에 모두 죽게 되겠지. 하하하......."

앙천대소를 하던 적장은 기수를 돌려 마육갑해협으로 돌아갔다.
장무기는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바다에는 간간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몽고 수병들은 또다시 긴
장하기 시작했다. 폭풍이 불어올 징조였기 때문이다. 반 시각 전까
지만 해도 청명하던 하늘에는 언제부터인지 검은 구름이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바닷물이 힘차게 출렁거렸다.

갑판장은 수십 명의 수병들에게 돛을 내리도록 명했다. 거대한 돛
에 광풍이 몰아쳐 올 때마다 전선은 앞뒤로 더욱 요동했다. 몽고
수병들은 있는 힘을 다해 돛을 내리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내려지지
않았다.

또 한 차례 광풍이 몰아치면서 병사 한 명이 바람에 날려 바닷속
으로 잠겨들었다. 장무기는 도룡도를 꺼내 돛의 기둥을 힘차게 내
리쳤다. '뿌지직'하면서 기둥이 무너졌다. 돛은 바람에 날려 바닷
속으로 사라졌다.

중앙의 돛이 없어지자 배의 요동은 줄어들었으나 좌우측에 있는
돛은 여전히 광풍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이제는 앞뒤로 흔들리기보
다는 좌우로 요동쳤다. 장무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좌우측 돛도
모두 바람에 날려 보냈다. 배는 이제 어느 정도 평정을 찾은 듯했
다. 파도가 몰아치면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정처없이 떠다녔다.

집채만한 파도가 또다시 전선을 강타했다. '우지끈'하면서 후미의
갑판이 힘없이 무너져 내려앉았다. 마래시아 병선의 포탄 공격으로
부서진 후미의 갑판은 파도의 공격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바닷
물은 둑을 무너뜨리는 기세로 들이닥쳤다. 이제는 손으로 막아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배의 후미는 점점 바닷속으로 가자앉기 시작했다. 후미에 있던 십
수 명의 병사들은 밀려오는 바닷물에 허우적거리며 벗어나기에 급
급했다.

장무기는 죽음에 대해 그다지 두려움이 없었다. 단지 용맹한 몽고
수병들이 아무런 방비도 못 하고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이미 수십 명이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장무기는
'이제 끝이로구나. 병사들과 죽음을 같이 해야겠다'하고 체념을 하
는데 갑자기 바람이 멈추는 게 아닌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바로 전까지 그토록 흉맹했던 폭풍이 단 한순간에 멎은 것이다.

장무기는 바다의 신비막측한 변화에 넋을 잃고 말았다. 자연의 위
대함에 세삼 경외심이 일었다. 배의 후미는 계속 가라앉고 있었다.
살아남은 십수 명의 병사들은 선두에 몰려들어 멀리 하늘 끝을 바
라보았다.

장무기는 고개를 들어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망망해해에는 어떤
배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전선은 이미 반 이상 잠기고 있었다.

장무기와 몽고 수병들은 멍청하게 전선이 잠기고 있는 모습만 바
라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병사들은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
는 듯 망연자실하여 어쩔 줄 몰라했다. 이때 수병 한 명이 소리쳤
다.

"저기 배가 보인다!"
병사의 외침에 사람들은 모두 앞쪽 하늘 끝을 응시했다. 커다란
나무 기둥이 바닷속에서 솟구치면서 하얀 돛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
냈다. 범선이었다. 범선은 점점 모습을 크게 보이면서 다가왔다.
그 뒤로도 수척의 범선이 행렬을 지으며 다가왔다.

장무기는 그제서야 '이제 구원을 받을 수 있겠구나!'하면서 안도
의 숨을 내쉬었다. 장무기는 두 손으로 태극 무늬를 그리면서 단전
에 힘을 주고 큰소리로 외쳤다.

장무기의 사자후는 잔잔한 바닷물에 격랑을 일으키며 빠르게 퍼져
나갔다. 흰색의 돛에는 붉은 화염이 수놓아져 있었다. 페르시아 명
교(曄?)의 범선이었다.
장무기는 명교의 표식을 잘 알고 있었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일전에 페르시아의 명교 사자들이 자신에게 욕을 당하고
돌아간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자들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장무기가 속으로 걱정을 하고 있는 사이에 범선에서 작은 돛단배
를 두 척 내리고 빠르게 다가왔다. 장무기 일행은 가볍게 손을 모
아 감사를 표시하고 돛단배에 옮겨 탔다. 페르시아인들은 행색이
기괴했다.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바람에 흩날리는 복장을 하고 있
었다.

범선의 갑판에 우뚝 서 있는 사람은 여자였다. 중원인과 별로 생
김세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용모는 상당히 아름다워 보였으나, 입
술이 가늘고 눈꼬리가 치켜오른 것이 표독스러워 보였다. 장무기는
두 눈을 똘바로 뜨고 자세히 살폈다.

"아이쿠! 나에게 패한 바 있는 페르시아 사자로구나!"
그녀는 휘월사(學??)라고 하는 사자였다. 그녀도 장무기를 보더
니 알아보는 듯 흠칫 놀라며 표독스럽게 두 눈을 부라렸다. 장무기
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가볍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해난이 겪어 위태로운 때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오."
"흥! 장 교주께서는 어찌 중원에 있니 않고 이곳에 오셨나요?"
휘월사는 장무기에게 지난 번의 치욕을 앙갚음하고 싶었지만 속에
서 약간의 두려움이 일어났다. 비꼬는 투로 퉁명스럽게 말을 던진
그녀는 다른 범선을 슬쩍 보았다. 그곳에는 세 명의 사자 중 두 명
이 타고 있었다. 유운사(???)와 묘풍사(濊憚?)였다.

'저들과 합세하면 장 교주를 제압할 수 있을 텐데...... 어쩌지,
나 혼자 대적할 수는 없는데.'

그녀는 속으로 '하필이면 장 교주를 구하다니, 에이! 재수가 없으
려니.......'라고 중얼거리면서 투덜댔다.

장무기는 다른 범선에 누가 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페
르시아 명교의 운풍월(?憚?) 삼사자(寃?柱)는 늘 함께 행동하기
때문에 그곳에 있으리라는 것은 쉽게 예측 할 수 있었다.

장무기는 슬쩍 휘월사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이번 페르시아 명교에서 중원의 명교 교주를 구한 것은 천운이오.
총단에 이 사실을 알리고 싶소. 우리 중원의 명교로서는 매우 행운
이오."

장무기의 이 말은 휘월사의 방심을 유도했다. 휘월사는 장무기의
말에 반신반의하면서 아무 말도 못하고 굳게 입을 다물었다.

몽고 수병들은 깜짝 놀랐다. 그토록 존경하는 장 원수가 대원의
최대 적인 명교의 교주라니! 그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
니 장무기를 바라보았다. 장무기는 갑판장에게 말을 건냈다.

"모두들 들으시오! 내가 바로 명교의 교주인 장무기요. 원나리에
서는 나를 흉악한 죄인으로 보고 있으나 여러분들에게는 일체의해
가 없을 것이오. 염려를 놓으시오."

몽고 수병들은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 듯 저희들끼리 쑤근거렸다.
휘월사는 의문이 나는 듯 장무기에게 물었다.

"저자들은 몽고인이오? 그런데 어찌 장 교주의 진면목을 모른단
말이오?"
"그 연유는 나중에 알려 주겠소."
장무기는 휘월사의 물음에 짤막하게 대답하고 갑판장애게 다시 말
했다.

"그대들은 모두 안심하시오. 나는 원 순제를 꼬득여 일부러 페르
시아에 온 것이오. 그대들은 각자 편한 대로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
가시오."
"장 대협! 우리는 모두 그대를 존경하오. 허나 나는 중원에 가족
이 살고 있소. 돌아가고 싶소이다. 단지 우리 몽고 형제들의 생각
이 어떨런지 모르오."

갑판장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와 말했다. 다른 몽고 수병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중원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표시를 했다. 장
무기는 휘월사에게 말했다.

"감히 청을 하나 드릴까 하오. 귀선에 이들 몽고 수병들을 태우고
중원으로 돌려보냈으면 하오!"
"이런 일을 저 혼자 맘대로 정할 수 없어요. 유윤사와 묘풍사가
저쪽 배에 있으니 상의를 해야 돼요."
"좋소이다!"
얼마 후 유운사가 먼저 건너왔다. 그는 운풍월 삼사 중에서 제일
키가 컸다. 노란 머리에 푸른 눈을 하고 있는 그는 장무기를 보자
흠칫 놀라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유운사는 장무기의 무공을 한 차
례 견식을 했기 때문에 섣부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묘풍사는 페르시아 명교의 삼사 중에 용모가 가장 흉악했다. 누런
수염에 벌렁코를 하고 있었으며 담량이 제일 약했다.

장무기는 이들 삼사자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유운사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장무기의 요구에 응하기로
했다. 만일 요구에 응하지 않아 장무기가 손을 쓰면 최소한 자신은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삼사자는 휘월사가 타고 있는 범선의 수병을 모두 다른 범선으로
옮겨 타도록 명하고 장무기에게 약간의 금은보화를 건네주었다. 장
무기는 그것을 갑판장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 금은보화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평화롭게 살아가시오. 이
곳까지 나를 데려다 준 그대들의 은혜는 잊지 않겠소! 그리고 원
순제에게는 나의 신분을 절대로 발설하지 마시오. 만일 원 순제가
나의 행방을 물으면 바다의 고기밥이 되었다고 하시오. 부탁이오."

장무기의 말에 몽고 수병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삼
사자와 장무기는 작은 배에 옮겨 타고 몽고 수병들과 작별했다.

장무기는 몽고 수병이 타고 가는 범선이 작은 점으로 바뀌어 시야
에서 사라지자 몸을 돌려 삼사자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유운사가
얼른 말했다.

"장 교주! 선창으로 들어가시지요."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이고 삼사자의 뒤를 따라 선창으로 들어갔다.
둥근 탁자에 자리잡은 후 장무기는 먼저 입을 땠다.

"예전에 삼사자에게 많은 죄를 범했소이다. 이 자리를 빌어 용서
를 구하겠소."

유운사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장 교주! 지난 일은 지난 일일 뿐이오. 염두에 두지 마오."
유운사의 말에 묘풍사와 휘월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유운사가 다시 말을 꺼냈다.
"장 교주! 먼길에 고생하셨소. 쉬시는 게 어떻겠소?"

장무기는 삼사자가 자리를 뜨자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가볍게 운
기조식을 마쳤다. 장무기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촉각을 곤두세
웠다.

장무기가 이번에 페르시아 명교를 찾은 이유는 소소(蹂鍮) 떼문이
었다. 그녀만 잠깐 만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뜻밖에도 삼사자를
만나가 초조해졌다. 페르시아 명교에서는 교주인 소소를 제외하고
교주의 바로 아래 수하인 십이보수왕(?????)과 삼사자가 모두
장무기를 곱게 보지 않고 있었다. 장무기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그물 속으로 들어간 물고기 신세로구나."
페르시아 명교의 삼사자는 절대로 장무기의 적수가 못 되었다. 그
들은 결코 장무기에게 손을 쓸 수 없었다. 장무기는 호접곡에서
이미 의술과 독공을 익혔기 때문에 음식물에 독을 타더라도 쉽게
발각된다.
장무기는 '육지에 다다르면 이들과 헤어져 내가 집접 총단을 찾아
가야 한다. 소소만 만나면 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면서 잠이
들었다.

'철썩!' 꿈결에 들리는 소리 같았다. 장무기는 번쩍 눈을 뜨고 사
방을 둘러보았다. 이미 선창은 바닷물로 가득찼다.

허리까지 찬 바닷물은 빠르게 밀려왔다. 장무기는 수면으로 뛰어
오르면서 구양신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일진 장풍을 쏟으면서
선창의 문을 박살냈다. 재빨리 갑판으로 뛰쳐나온 장무기는 주위를
살폈다.

바람소리 하나 없이 조용한 가운데 페르시아 병사들은 한 명도 보
이지 않았다. 이미 서쪽 하늘은 붉은 노을로 핏빛을 이루고 있었다.
망망대해에 장무기는 혼자만이 버려진 것이다.

장무기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페르시아 병사에
게 구원을 받고 또다시 그들의 손에 의해 사지에 버려지다니'라고
중얼거리면서 하늘을 응시했다.

장무기는 허리에서 도룡도를 꺼내 갑판의 널판지를 뜯어냈다. 그
리고는 여기저기에서 못을 뽑아 작은 뗏목을 만들었다.

장무기는 어려서부터 빙화도(?飄隘)에서 살았기 때문에 바다에서
의 생활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뗏목을 바다에 띄운 장무기는 '추
엽낙지(秋栽新?)'의 신법으로 기볍게 뛰어내렸다. 투박한 막대기
를 깎아 만든 노를 저으며 서쪽 방향으로 뗏목의 방향을 틀었다.

장무기는 고개를 돌려 범선을 바라보았다. 이미 범선의 몸체는 바
닷속으로 빨려들어갔고 돛대의 꼭대기만이 외롭게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장무기는 빙화도에서 중원으로 떠나던 그때의 일을 생각했
다.

장무기는 용기가 샘솟는지 노를 저으며 소소에게 배운 노래를 흥
얼거렸다.


"흐흐는 물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누나!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그 누가 알리오?"
糧醬役?澎 ?醬憚
??太??澎 太遺?
이 노래는 이백여 년 전 페르시아의 유명한 시인 아묵연(?敖?)
이 지었다. 애적한 곡조는 허무한 삶을 표현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두 구절의 노래를 읊조리며 처연한 자신의 심정을 돌이켜 보았다.
생사를 알 수 없는데 어던 고통과 고뇌가 생기겠는가?

폭풍의 겁난을 피하니 해적의 습격이요, 페르시아 명교를 만나 구
원을 받으니 잠시 후 사지에 홀로 남았지 않은가! 곡조는 더욱 처
량하게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붉은 태양이 갑자기 바닷속으로 풀썩 뛰어들었다. 장무기는 오른쪽
왼쪽 번갈아 힘을 주고 노를 급히 저었다. 입가에서는 처량한 노래
가 계속 울렸다. 멀리서 보면 표표한 도인이 자연을 감상하며 유유
자적하는 모습 같았다.

x x x
바다는 다행히 조용했다. 장무기는 하늘에 외로이 떠있는 뭇 별들
을 벗삼아 서쪽으로 서쪽으로 뗏목을 몰았다. 여명이 서서히 동녘
에 솟아오를 때 장무기는 해안에 도착했다. 그는 긴 호흡을 들이키
고 일갈 사자후를 터뜨리며 하늘로 치솟아 가볍게 해안에 뛰어내렸
다.

장무기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해안을 따라 한동안 걸
어가자 멀리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곳 사람들은 키가 훤칠했
다. 중원인과 근본적으로 생김새가 달랐다. 장무기는 주점을 찾아
얼른 요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장무기는 페르시아 말을 전혀 할
수 없었고 알아듣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주고받는 말은 예전
에 소소와 페르시아인들이 나누던 말투와 비슷했다.

'아하! 이곳이 바로 페르시아이구나?'
장무기는 거리를 배회하다 주점을 발견하고 조용히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손님들은 대부분 이국 사람이었다. 페르시아인들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여러 나라의 상인들이 드나드는 항구였다.
다행이 아무도 장무기를 눈여겨 보지 않았다.

장무기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옆자리의 사람과 똑같은 음식을 손
짓으로 가리켰다. 점원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장무기가 음식을 입에 대려는 찰나 문 입구가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키가 훤칠한 장사 한 명이 성큼성큼 주점으로 들어왔다.

장무기는 음식을 입에 넣으며 슬쩍 바라보았다. 걸치고 있는 백포
(汪?)에는 수많은 불꽃이 수놓아져 있었다. 이 사나이도 페르시아
명교의 교인이었다. 장무기는 반가운 듯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가슴에 대면서 불꽃 모양을 했다. 이러한 표시는 중원의 명교 교인
들이 반가운 사람을 만났을 때 하는 교인의 표시였다. 페르시아 명
교도 이와 별반 다름 없는 인사를 하고 있었다.

상대방은 흠칫 놀라 장무기를 바라보고 곧바로 두 손을 들어 불꽃
모양으로 답례했다. 장무기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한어로 물었다.

"교우를 만나 반갑습니다. 청컨대 페르시아 명교의 총단을 알고
싶소이다."

상대방은 바로 유운사가 타고 있던 범선의 교인이었다. 처음에는
장무기를 못 알아보았으나 가까이에서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이자가 죽지 않고 살아오다니!'
페르싱 명교의 교인은 두려움을 감추며 물었다.
"친구는 무엇 때문에 총단을 찾으려는 게요?"
장무기는 상대방이 한어로 대답하자 의심을 풀고 대답했다.
"나는 중원의 명교 교주인 장무기라 하오. 귀교의 교주께 드릴 말
씀이 있소이다."

장무기는 이번 페르시아 출행은 중요한 일 때문이었다. 소소의 모
친인 대기사(殃屍?)는 원래 페르시아 명교의 삼성녀(寃濡?)의 하
나로 중원 명교의 발전에 지대한 공로를 끼쳤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회를 틈타 중원 명교에 비장되어 있는 '건곤대나이심법'을 빼내
려는 목적이 있었다.

'건곤대나이심법'은 근원이 페르시아 명교였다. 후에 명교가 중원
에 유입된 후 페르시아 명교에서는 안타깝게 이 심법이 실전되었다.
'건곤대나이심법'은 명교를 보호하는 호교대법(疱?暗擾)이었다.
총단에서는 중원 명교에 예를 갖추어 심법을 요청하는 것이 어떠냔
는 논의가 있었지만 모두 비굴한 짓이라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대
기사는 중원 명교에 파견된 후 총단이 있는 광명정의 교주 밀실에
서 몰래 '건곤대나이심법'을 빼내 수련을 하는 도중 사랑에 빠져
대공을 이루는 데 실패했다.

다행이 대기사의 딸인 소소가 심법의 구결(手?)을 외우고 있어
페르시아 명교에 커다란 공훈을 세웠다. 소소는 성녀인 모친이 정
절을 지키지 못하고 사랑에 빠져 자신을 낳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모친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성녀가 되기로 결심하
여 페르시아 명교의 교주의 자리에 올랐다.

장무기가 이번에 페르시아 명교의 총단에 온 사유는 중원에서 자
취를 감춘 사랑하는 연인 조민(??)을 찾지 못하여 쓸쓸한 마음에
소소를 만나보러 온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건곤대나이심법'에
부족한 부분이 있어 만일 어떤 사람이 계속 수련하게 된면 주화입
마(刹飄??)에 들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서였다.

'건곤대나이심법'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이야기는 오랜 시간을
거슬러 가는 일이었다. 장무기는 당시 소소와 함께 명교 총단의 비
도(澐?)에 갇혀 있을 때 명교의 호교대법인 이 심법을 얻었다. 장
무기는 소소의 권유에 못 이겨 심법을 수련했고 그녀는 이때 그 내
용을 암기했다.

장무기는 '건곤대나이심법'의 운용으로 구양진경에서 해독하지 못
한 오묘한 내공 묘리(濊衍)를 더욱 많이 깨우쳤을 뿐 아니라 몇 시
진도 걸리지 않아 심법을 일곱 단계까지 터득했다. 명교 수백 년의
역사에서 최고 수준에 이른 것은 사 단계였다. 하지만 모두 주화입
마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후로 명교에서는 모두들 심범의 삼 단계
가 최고의 수준으로 알게 되었다.

장무기는 최고 단계까지 수련을 마쳤으나 마지막 열아홉 마디는
외우지 못해 수련을 중단했다. 후에 장무기를 연모하는 소소가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그에게 알려주어 완전한 경문을 알게 되었다.

장무기는 그 후 교무를 집행하느라 바빠서 수련을 할 수 없었다.
조민이 떠난 후 그제서야 그녀를 찾아 다니면서 틈틈이 구결에 담
긴 뜻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일 열아홉 구절에 따라 내공
을 수련하면 반드시 주화입마에 빠진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죽지 않으면 바보가 되거나 전신 마비로 산송장이 될 것이 뻔했다.

이 단계까지 깨달은 장무기는 식은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비도에 갇혔을 때 '일영측 월만해(혜)식(?狙???澎引)'의
심법을 외워 수련을 했다면 자신은 반드시 폐인이 되거나 죽었을
것이 아닌가.

원래 '건곤대나이심법'을 창안한 선배 고인 스스로도 겨우 육 단
계까지 터득했을 뿐이다. 그 다음의 진전은 뛰어난 지혜를 가진 후
학에게 맡겼다. 장무기가 수련을 하지 않은 이 열아홉 마디가 바로
그 내용이었다.

장무기는 수차례 연구 끝에 불합리한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재
삼 생각 끝에 열아홉 마디는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가는 경문임을
확신했다. 그러자 장무기는 소소가 걱정되었다.

페르시아 명교 교인은 장무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장 교주께서 총단에 가신다니 잘됐습니다. 이 몸도 총단으로 가
려던 참이오.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집에 들러 작별을 고한 후 다
시 오겠소."

장무기는 고마움을 표시하고 자리에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페르
시아 명교 교인은 밖으로 나가 급히 골목길로 접어들어 운풍월 삼
사자가 묵고 있는 객잔에 당도했다. 묘풍사는 안색이 변하면서 휘
월사에게 원망했다.

"그가 죽지 않고 총단에 간다면 어쩌겠소?"
"그는 무공이 고강하여 총단으로 가는 길을 우리가 막기에는 역부
족이오. 대성 보수왕(暗濡???)으로 하여금 막게 한다면 어떻소?"

유운사의 말에 휘월사가 소리쳤다.
"흑사곡(閒?贖)!"
유운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곳이 안성맞춤이니 너는 장무기를 흑사곡으로 유인하거라."
명교 교인은 흑사곡이라는 말에 얼굴이 잿빛이 되어 울먹였다.
"소인은...... 돈돈 바라지...... 않고...... 또한......."
"너는 그자를 끌고 그곳까지만 유인하면 된다. 그 다음은 우리가
알아서 너를 구출해 주겠다."

명교 교인은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명교 교인의 말이 끝나자 휘월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빨리 떠나거라. 도중에 계획이 탄로 나면 목숨줄이 위태로운 줄
알거라."

명교 교인은 재빨리 객잔을 벗어나 두 필의 말을 끌고 장무기에게
로 달려왔다.

총단으로 향해 출발한 장무기는 그 명교 교인이 흑사골로 유인하
는 줄도 모르고 도중에 조금도 쉬지 않고 계속 앞으로 달렸다. 이
페르시아 명교 교인으 이름은 달로(阿?)였다. 달로는 비굴할 정도
로 굽신거리며 장무기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삼 일째 되는 날에 이들은 초원을 지나 사막에 들어섰다. 작열(舟
?-?=작렬)하는 태양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내리쬐었다. 살갗이 타는
더위가 지나며 온몸이 으스스 떨리는 추운 밤이 찾아왔다. 장무기
는 내공심법으로 추위를 이겨냈으나 달로는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간신히 참아냈다.

사막에 들어선 지 수일이 지나자 허옇던 장무기의 살갗도 검게 그
슬려갔다. 작열하는 태양빛을 헤치며 작은 모래 언덕에 오른 장무
기는 멀리 산처럼 보이는 물건을 보면서 달로에게 물었다.

"저기 보이는 것은 무엇이오?"
"그곳은 흑사곡이라 하오이다. 무공이 강한 사람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있지요."

장무기는 무공이 강한 사람이 살고 있다는 달로의 말에 '허허허'
웃으며 중얼거렸다.

"한번 부딪혀 볼 만한 사람일까? 궁금하구나!"
달로는 장무기의 호탕한 기개에 '에라! 죽으면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부딪혀 보자'라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
도 하지 않고 말을 달렸다. 두 시진 정도 달렸을까, 흑사곡의 위용
이 한눈에 들어왔다. 장무기는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서 흠칫 놀랐
다.

모래 언덕이 높이 솟아 올라 흡사 거대한 성채처럼 보였다. 계곡
의 사이에서는 거무틱틱한 음기가 기분 나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
다. 수어 장 밖의 거리는 흐릿해서 분별을 할 수 없었다. 달로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한 채 부들부들 온몸을 떨었다.

장무기는 긴 숨을 들이키고 계곡으로 들어갔다. 달로도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쫓아갔다. 계곡으로 들어 갈수록 음기는 더욱 스산하
게 느껴졌고 추위가 뼛속으로 점점 깊이 스며들었다. 모래 언덕은
그다지 높지는 않았으나 매우 가파르고 꼭대기는 평평했다. 그곳에
는 풀 한 포기 나지 않고 모래는 모두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어느 정도 들어갔을 때 장무기는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좀전까지
따라오던 달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모래 언덕을 몇 구비 돌아
달로의 종적을 찾아 헤맸으나(?=해) 보이지 않았다.

태양은 이미 모래 언덕의 서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으며 주위
는 붉은 빛과 검은 모래빛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했다.
장무기는 자신이 달로의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가슴
속에서 분노가 일어났다.

'감히 나를 죽음에 몰아넣다니. 페르시아 명고의 삼사자를 만나면
가만두지 않겠다.'

장무기는 사방을 둘러보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갔다. 등에서는
식은 땀이 줄줄 흘러 내렸다. 갑자기 모래 언덕에 이상한 기운이
일어났다. 음풍이 서서히 짙어지면서 어디선가 '사각사각' 모래를
밟아 오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왔다.

장무기는 눈을 부릅뜨고 앞쪽을 응시하면서 바짝 두 귀를 곤두세
운 채 내공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어느 방향인지는 모르지만 '사각
사각'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 왔고 음풍에 실린 모래가 시야
를 가로막았다.

장무기는 발 아래 모래가 스물스물 움직이는 모습에 아연실색하면
서 허공으로 삼 장 정도 솟구쳐 올랐다. 가볍게 바닥에 내려서는데
또다시 모래가 빙빙 회로리를 치면서 움직였다. 장무기는 연신 허
공으로 솟구치면서 앞쪽으로 십여 장 날아 올랐다.

장무기는 어떤 물체가 분명히 있는 듯한데 눈에 보이지 않자 심기
가 불안하여 심호흡을 길게 하면서 땅에 내려섰다. 검은 모래는 쉬
지 않고 움직였다. 주위는 이미 어둠에 묻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캄캄했다. 장무기는 진기를 줬대한 끌어올려 주위를
살폈다. 무공이 높은 장무기는 주위가 칠흑처럼 어두워도 어느 정
도 사물을 식별할 수 있었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음풍은 그리 강하지 않았고 변화도 심하지 않
았으나 모래 언덕을 스치며 점점 장무기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장무기는 이미 십이성의 공력을 끌어올렸다. 누군가 암습을 준비하
고 있지 않나 하는 불안이 끊이지 않았다.

사람의 심장을 더욱 불안하게 조이는 마력이 음풍에 배어 있는지,
아니면 '사각사각' 들리는 소리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장무기는
강호의 숱한 어려움을 맞으면서 살아왔지만 이런 불안은 경험해 보
지 못했다.

'적이라면 차라리 공격하는 게 나을 텐데......'라고 생각하면서
장무기는 오른손에 도룡도를 굳게 쥐고 왼손에 진기를 최대한 끌어
올렸다.

순간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자신을 이곳까지 이끌고 온
달로가 깜쪽같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출로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자연히 떠오른 것이다.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던 장
무기는 발 아래에 무엇인가 솟구치자 재빨리 뛰어오르며 도룡도를
내리쳤다.

'퍽'하면서 무언가 모래 바닥에 떨어졌다. 사람의 팔뚝이었다. 마
른 고기를 연상시키듯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검은 모래가 스물
스물 끓어 오르면서 사람의 시체를 뱉어냈다. 깊은 우물에서 물이
샘솟듯 모래구덩이 속에서 시체가 드러나 것이다. 피부색이 온통
하얗게 보였다.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주검이었다.

또다시 시체가 모래구덩이 속으로 스물스물 빨려 들었다. 장무기
는 '건곤대나이심법'을 운용하여 재빨리 '허공섭물(?囚??)'의
수법으로 시체를 끌어 올렸다. 죽은 사나이는 명교의 불꽃 무늬가
수놓아진 흰옷을 걸치고 있었다. 앞으로 다가가 시체를 살피다가
장무기는 혼비백산한 듯 석 장의 높이로 치솟았다.

시체의 옷 속에서 십여 마리의 사막 방울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장
무기에게 달려들었다. 방울뱀이 시체의 피를 빨아먹었던 것이다.
방울뱀은 피가 모자라는 듯 장무기의 숨소리를 따라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또아리를 풀고 불꽃이 일어나는 모양으로 일제히 공격을 감
행하기 시작했다.

장무기는 수어 장 뒤로 물러나 도룡도를 방울뱀에게 겨누었다. 어
디에서 나타나는지 뱀의 숫자는 점점 증가하기 시작했다. 방울뱀의
꼬리는 딱딱한 각질로 이루어져는지 한 번씩 요동치면 '퍽, 퍽'소
리가 징그럽게 울렸다.

사막의 방울뱀은 모래 바닥을 매우 빠르게 움직였다. 사막에는 그
다지 많은 생물이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그들(?=그를) 나
름대로의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장무기의 몸에서 신선한 피
냄새가 짙게 풍기자 주위에 있던 모든 뱀들이 모여든 모양이었다.

이곳 흑사곡은 페르시아에서 가장 무서운 모래 언덕이다. 모래 언
덕의 변화가 너무나 심하기 때문에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살아서 돌아오는 확률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는 일보
다도 적었다. 더욱이 방울뱀의 공격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방울뱀
에게 한 번 물리면 치료할 사이도 없이 사막의 고혼(巢幅)이 된는
것이다.

수십마리의 방울뱀은 휘돌아치는 검은 모래를 헤엄치듯 빠르게 움
직이며 장무기를 둘러싸고 혀를 날름거렸다. '퍽, 퍽, 퍽' 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뱀이 공격하면 한 차례는 공중으로 뛰어 피할 수
있었으나 주위가 온통 뱀으로 가득 차자 장무기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절세무공과 심후한 내공을 소유했어도 이런 사막에서는 한계가 있
는 법이다. 장무기는 도룡도에 내공을 주입하여 달려드는 방울뱀을
베였다. 세 마리의 뱀이 허리가 잘리면서 비릿한 피가 사방으로 뿜
어졌다. 장무기는 '독이구나!' 중얼거리면서 공중으로 솟구쳤다.

"안 되겠다. 독성이 이리도 강하다니......."
장무기는 곧바로 도룡도를 칼집에 갈무리하고 구양신공을 십이성
으로 끌어올리며 일갈 장풍을 쏟아냈다.

'퍼퍼퍽!'
수십 마리의 방울뱀들이 십여 장 밖으로 튕겨 나갔다. 구양신공은
가슴에서 파도가 끓듯 용솟음쳤다. 전혀 피로한 느낌이 들지 않았
다. 단전 부위가 따스해지면서 힘이 샘솟았다. 장무기는 방심하지
않고 수십 대의 장풍을 쏟아내어 방울뱀을 십여 장 밖으로 밀쳐냈
다.

장무기는 그제서야 가부좌를 틀고 기막(褶?)을 형성하기 시작했
다. 김처럼 모락모락 피오 오르는 기운이 정수리에서부터 발생하여
사방으로 퍼졌다. 방울뱀들은 꼬리를 모래 바닥에 치면서 서너 장
밖으로 물러났다.

얼마가 지났을까, 동북 방향에서 몇 사람의 칼 부딪치는 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장무기는 서서히 운공을 마치고 소리가 울리는
방향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분명히 흑사곡 안에서 싸우는 소리다.'
장무기는 중얼거리면서 주위를 살폈다.
'흑사곡에서 싸운다면 필시 호인은 아니다. 혹시 페르시아 명교의
삼사자가 아닐까?'

장무기는 싸우는 소리가 가까이 들리자 근처의 모래 언덕에 몸을
숨기고 앞쪽을 조용히 응시하다가 깜짝 놀랐다. 뗏목과 비슷한 대
여섯 새의 어떤 물체가 검은 모래 위에 떠 있었기 때문이다. 앞쪽
두 개의 뗏목 위에는 각기 한 사람씩 타고 있었는데 모두 불꽃 무
늬가 수놓아진 백포를 걸치고 있었다. 한 사람은 병기를 들고 있었
고 다른 사람은 노처럼 생긴 길다란 막대를 들고 있었다. 뗏목은
바다에서 미끄러지듯 앞으로 움직였다. 포위를 당하고 있는 사람은
단검을 쥐고 있었다. 이 자도 역시 명교의 교인이었다.

포위된 사람의 무공은 뗏목에서 공격하는 사람들보다 고수 같아
보였다. 그들은 휘돌아치고 있는 검은 모래 바닥 위에서 조금도 쉬
지 않고 공격과 방어를 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그 사람의 무공을 살피다가 누군지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 상승 보수왕(位彛???)이다'라고 작은 소리로 중
얼거렸다.

페르시아 명교에서는 교주 바로 아래에 십이보수왕(?????)이
있었다. 이들의 신분은 중원 명교의 사대호법과 같았다. 모두 문무
를 겸비한 용맹한 무사들로 구성되었다.

첫째가 대성(暗濡), 둘째가 지혜(?烹), 셋째가 바로 상승왕이고
넷째는 장화(雋飄), 다섯째는 근수(?懿), 여섯째는 평등(??),
일곱째는 신심(藺入), 여덟째는 진악(??), 아홉째는 정직(賑?),
열째는 공덕(殺鴦), 열한째는 제심(?入), 막내가 구명(?曄)이다.

상승왕은 열두 명의 보수왕 중에서 셋째에 해당하지만 무공으로는
최고의 수준이었다. 그런 상승왕이 포위를 당한 채 고전을 하고 있
었다.

나머지 다섯 뗏목 위에도 각기 한 명씩의 보수왕이 타고 있었다.
공격하는 보수왕은 장화, 근수, 평등, 신심, 공덕, 제심, 구명으로
모두 일곱 명이었다. 이 중에서 장화의 신분이 제일 높았다. 그는
나머지 여섯 명의 보수왕을 지휘하며 상승왕을 공격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이전부터 상승왕에 대해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렇지만 페르시아 명교의 사정에는 그다지 밝지 않았다. 장무기가
어떻게 도움을 줄까 고민하고 있을 때 장화 보수왕이 유창한 한어
로 소리쳤다.

장무기는 갑자기 장화왕이 한어로 소리치자 자신이 발각되었는가
싶어 깜짝 놀랐으나 장내를 바라보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장
화 보수왕은 페르시아 명교인들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일부러 한어
로 소리쳤던 것이다.

"상승왕 들어라! 지혜왕, 진악왕, 정직왕은 이미 대성왕의 명령을
듣지 않아 죽음을 당했다. 우리는 모두 대성왕을 따르기로 서약했
는데 유독 너만이 거역할 셈이냐?"
"닥쳐라, 네 이놈! 감히 교주를 배반하다니...... 교규(??)가
두렵지 않느냐?"
"하하하...... 네놈이 헛소리를 하는구나. 교주는 중원에서 온 계
집이다. 어찌 우리가 그 계집을 받들 수 있단 말이냐. 더욱이 실종
된 삼성녀의 하나인 살유륜(嫄提宴)은 처녀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대성왕께서 이번에 살유륜 성녀를 찾았으니 교주는 당연히
그녀가 되어야 한다."

장화왕은 더욱 호기가 나는지 상승왕을 향해 계속 소리쳤다.
"똑똑히 들어라! 녹사마(???) 서녀와 중원의 명교를 지원하러
간 대기사(殃屍?) 성녀는 제 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정절을 잃어보
렸다. 맹랑하게도 교주라는 계집이 또한 대기사의 딸이 아니더냐?"

상승왕은 그 말에 울그락불그락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흥! 너는 전임 교주의 유훈을 어길 셈이더냐? 유훈에 의하면 '건
곤대나이심법'을 찾아오는 사람이 교주가 된다고 했다. 삼성녀는
그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장화왕! 너는 보수왕의 네번째 신분으
로서 선대 교주의 유훈을 어길 셈이더냐?"

장화왕은 냉랭한 웃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상승왕! 잘 들어라. 교규에 보면 십이보수왕이 모두 찬동할 때
시 교주를 폐위할 수 있다고 했다. 너만 죽으면 반대를 할 보수왕
은 한 명도 없다."

모래 언덕에 숨어 이들의 대화를 엿들은 장무기는 전후 사정을 자
세히 알게 되었다. 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모양을 보니 소소는 아직
폐위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때 상승왕의 득의만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장화왕! 너희 일곱 보수왕이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하하...... 너를 생포할 수는 없지만 방울뱀이 사는 죽음의 계
곡으로 몰아넣을 수는 있지. 이곳의 생문(唯?)을 닫으면 절대로
빠져 나가지 못한다."
"대장부는 한 번 죽지 두 번 죽지 않는다. 어디 너희들의 간덩이
가 얼마나 부었는지 맛 좀 보자."

상승왕의 대장부 다운 기개에 장화왕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미친 놈이 죽을 때가 되었나 보군?"
"내가 이 자리에 죽는다고 치자. 너희들은 안전하게 흑사곡을 벗
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하하......."
"흥! 우리가 타고 있는 이 뗏목들은 웅황주(??僭)에 오랫 동안
담가 두었기 때문에 방울뱀이 감히 달려들지 못한다. 우리의 목숨
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상승왕은 장화왕의 대답에 쓴웃음을 지으며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묵묵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무기는 자신이 출수(出?)를 할
때라고 여기고 몸을 일으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멀리 세 장의
뗏목이 미끄러지듯 다가와 장화왕의 앞에 당도했다. 바로 삼사자였
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이제야 당도하느냐?"
장화왕이 화가 나는 듯 소리쳤다. 유운사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와 부복을 하면서 장무기와 만난 사실을 빠짐없이 보고했다. 곁
에서 가만히 서 있던 휘월사가 말했다.

"대왕! 장무기는 흑사곡에서 방울뱀에게 먹힌 게 틀림없습니다."
장화왕은 손을 내저으며 "그만!"하고 소리쳤다. 주위를 한차례 살
핀 장화왕은 "모두들 상승왕을 죽음의 계곡으로 몰아넣어라!" 하고
외치면서 두 손을 위로 번쩍 치켜 들었다. 동시에 뒷쪽의 모래 언
덕에서 검은 그림자가 솟구쳤다.

"장무기다!"
삼사자의 찢어질듯한 비명 소리가 언덕에 부딪혀 돌아오는 찰나에
이미 장무기의 신형(壬阪)은 장화왕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 노처럼
생긴 나무막대를 나꿔 챘다. 장무기는 노를 지렛대로 삼아 다시 허
공에 솟구치며 제일 앞에 있는 두 명의 보수왕을 향해 장풍을 쏟아
냈다. 두 명의 보수왕은 급작스런 공격에 방어를 하지 못하고 서너
걸음 뒤로 몸을 빼내려 했다. 장무기는 뗏목을 상승왕의 앞으로 힘
차게 밀쳤다.

"너희들은 나의 목숨이 필요하지 않느냐? 어서 덤벼라!"
상승왕은 장무기가 밀어준 뗏목에 사뿐히 올라 타면서 소리쳤다.
장화왕은 갑자기 나타난 장무기로 인해 전열이 흩어지자 움찔 놀랐
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상승왕은 십여 명의 사이로 뛰어들면서 단
검을 날카롭게 휘둘렀다.

장무기도 좌중을 뚫고 상승왕의 곁으로 몸을 날렸다. 상승왕의 보
검에서는 검기가 한 자 길이로 뻗쳐 있었다. 장무기는 얼른 상승왕
에게 손을 모아 예를 마치고 말했다.

"상승 보수왕! 교주의 안전을 지키는 게 급선무 같소. 이 자리를
빨리 피합시다."
"옳소이다!"
상승왕의 호쾌한 대답에 장무기는 얼른 신형을 날리며 소리쳤다.
"그럼 지금 떠납시다."
상승왕과 장무기는 말을 마치는 동시에 허공으로 치솟으며 포위망
을 뚫고 내닫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경공을 전개하자 하늘을 나는
비단 같이 뗏목이 발에 붙어 떨어지지 않고 두 사람의 신형은 이미
수십 장을 날아 계곡의 입구에 당도했다.

장무기는 방향을 물어볼 틈도 없이 상승왕을 쫓아 앞으로 내달렸
다. 상승왕은 열두 보수왕 중에서 셋째에 해당한다. 무공이 고강할
뿐 아니라 인품도 넉넉한 듯 사막을 벗어나 관도(??)에 이르자
많은 명교 교인들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음 날 오시 경에 이
르러 상승왕이 걸음을 멈추고 장무기에게 말을 건냈다.

"이 언덕만 지나면 바로 총단에 이르오."
장무기는 곧 소소와 만날 생각을 하니 가슴이 갑자기 쿵쿵 뛰었다.
막상 그녀를 만나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이들이 언덕
을 올라 마루에 이르렀을 때 '쿠르릉'하며 커다란 괴성이 울렸다.
그들은 '아이쿠! 이것 잘못 됐구나'하고 중얼거리며 공중으로 솟구
쳤다.

갑자기 땅이 꺼지면서 커다란 웅덩이가 드러났다. 워낙 너비가 거
대하여 단숨에 벗어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바닥으
로 떨어졌다. 웅덩이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돌출된
부분이 없어 속수무책 추락하고 있었다. 이대로 떨어지면 무공이
아무리 고강해도 온전할 수 없었다.

바닥에 삐쭉삐쭉 창날이 시퍼런 빛을 뿜어대며 날카로움을 드러냈
다. 상승왕은 장무기보다 무공이 낮아 이미 바닥에 떨어질 찰나였
다. 장무기는 '이크! 위험하고나. 내가 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고 중얼거리면서 재빠르게 구양신공을 십이성으로 끌어올려 창날에
사뿐이 내려섰다. 동시에 '건곤대나이심법'의 금나수법(?蝕?擾)
으로 상승왕을 끌어안았다.

두 눈을 감고 삶을 체념하고 있던 상승왕은 갑자기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지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상승왕! 어디 다치지 않았소?"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이오? 나는 이미 삶을 버렸는데......."
장무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발바닥을 가리켰다. 날카로운 창날
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투박한 자루만 드러나 있었다. 장무
기가 바닥에 내려서는 순간에 도룡도를 꺼내 창날을 순간적으로 제
거하고 그 위레 내려앉은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바닥에는 무사히
내려섰지만 구덩이 위로 드러나 있는 하늘이 아득하게 보였기 때문
이다. 잠시 후 구름이 끼는 듯 구덩이 위가 어두워지며 음흉한 사
람의 웃음이 들려왔다.

"대성 보수왕이로군!"
상승왕은 일순 그자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대성와! 네가 어떻게......?"
"상승왕! 흑사곡에서 빠져나온 일을 내가 어찌 알았는지 궁금하겠
지? 하하하......."

대성왕은 방만한 웃음을 흘리며 유창한 페르시아말로 말했다.
"구명 보수왕이 연락용 비둘기를 키운다는 사실을 잊었느냐?"
상승왕은 그제서야 '아차'했다. 흑사곡을 빠져 나왔다는 사실만
좋아라 달려왔지 구명 보수왕ㅇ이 비둘기 다리에 서찰을 꿰어 장무
기와 자신의 일을 알릴 것이라는 사실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저자가 미리 함정을 만들어 놓았구나. 나의 실책이다.'
장무기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상승왕
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모습에서 그의 낭패함을 읽어낼 수
있었다.

"상승왕! 그리 자책하지는 마시오. 우리 명교의 교인들이 어찌 삶
과 죽음에 그리 연연하겠소?"
"이 사람의 큰 실수로 장 교주께 너무 많은 위험을 안겨주었소."
장무기는 손을 들어 상승왕의 말을 끊으며 소소에게 배운 노래를
가늘게 읊조렸다.

"흐르는 물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누나!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그 누가 알리오!"
이 노래는 페르시아 시인이 지은 노래였다. 명교를 신앙하는 페르
시아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이 노래를 들으며 자랐다. 장무기는 대
장부 같은 생사관에 상승왕은 매우 감동했다. 은은한 곡조의 흐름
에는 삼 푼의 애절함과 칠 푼의 호탕함이 배어 있었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삶과 죽음의 두려움을 이 노래를 통해 극복해
왔다. 상승왕은 가슴 깊숙이 침전된 뜨거운 사나이의 눈물이 울컥
쏟아져 나오자 장무기의 손을 덥석 잡았다.

노래는 비록 두 구절에 불과 했지만 반복된수록 더욱 장중하고 처
연했다. 상승왕도 장무기의 가락에 맞추어 나직한 목소리로 읊었다.
구덩이 위에 서 있던 대성왕이 소래쳤다.

"중원 명교의 교주께서는 그동안 안녕하셨소?"
장무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노래를 계속 불렀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그제서야 장무기는 고개를 들어 대성왕에게
소리쳤다.

"대성 보수왕! 우리를 어찌 할 생각이오?"
"상승왕에게 들어 알 것이오. 나의 대답은 필요 없지 않소?"
"나와 상승왕을 해친다고 그대에게 무슨 득이 있겠소?"
"장 교주, 말이 필요 없소이다. 이 몸은 이미 선악을 초탈한 사람
이오."

대성왕은 구덩이의 입구에서 벗어나면서 소리쳤다.
"준비!"
그의 말이 떨어지자 수십 명의 페르시아 병사가 각기 창을 꼬나들
고 투척할 자세를 취했다. 대성왕의 음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장 교주! 어디 한번 받아 보시오."
"흥! 해 보시지."
장무기는 냉소를 흘히며 재빨리 바닥에 있는 진흙을 단단하게 뭉
쳤다. 구양신공을 끌어 올리며 탄지신공(娶?佚殺)의 수법으로 수
십개의 진흙덩이를 쏘아 올렸다. '쌩'하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사
방으로 퍼지면서 '으윽'하는 비명소리가 처참하게 울려퍼졌다.
대성왕은 혼비백산하여 수어 장 뒤로 물러났다. 그의 몸에는 적중
하지 않았으나 옷깃 여러 곳에는 이미 손가락 굵기만한 구멍이 여
러개 나 있었다. 대성왕은 일찍이 귀문관(???)에서 장무기에게
낭패를 당한 적이 있어 두려움이 파도치듯 몰려왔다.

십여 명의 병사들은 이마나 가슴이 뻥 뚫리면서 구덩이로 떨어졌
다. 공격을 피한 몇 명의 병사들은 일제히 창을 바닥에 내던졌다.
장무기는 도룡도를 휘둘러 창날을 모두 꺽어버렸다. 동시에 장무기
는 섭물신공으로 창날을 거둔 후 신속하게 적병을 향해 되돌려 쏟
아냈다.

"쏴아--"
"쌩--"
"퍽!"
"으윽!"
수명의 병사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대성왕은 간신히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소리쳤다.

"장 교주! 대단하오. 그때보다 무공이 더욱 높아진 듯 하오이다.
그렇다면 이번 공격은 어떤지 한번 맛을 보시오."

이번에는 방패를 앞세운 페르시아 병사들이 구덩이의 입구를 봉쇄
했다. 그들의 뒤에는 궁수대가 화살을 먹이고 쏠 준비를 마치고 준
비하고 있었다. 대성왕의 손짓에 따라 궁수대는 일제히 화살을 장
무기와 상승왕에게 쏠 기세였다.

"상승왕께서는 나의 뒷덜미를 힘껏 잡으시오!"
장무기는 상승왕에게 소리치면서 내공을 끌어올렸다. 상승왕은 머
뭇거리며 중얼거렸다.

"장 교주, 이 몸을 용서하시오. 내세에서 다시 만납시다."
"대장부로 이 세상에 태어나 떳떳하게 죽지 못한다면 얼마나 부끄
러운 일이오? 음흉한 대성왕을 징치하지 못하면 나는 눈을 감을
수 없소이다."
장무기의 기개 높은 말에 구덩이 위의 대성왕이 말했다.
"장 교주는 과연 영웅이오. 상승왕이 마음을 돌리면 중원 명교와
페르시아 명교는 어떠한 원한도 가질 게 없소이다."
"자세히 말해 보시오."
장무기는 좀더 시간을 벌겠다는 심산으로 대성왕에게 물었다.
"장 교주도 알고 있겠소만 소소 교주는 그대에게 마음이 기울어져
있소. 이역만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그대를 잊지 못하니 교주의 자
리를 어찌 지킬 수 있단 말이오? 나는 그래서 이번에 살유륜 성녀
를 교주로 앉히려는 것이오. 소소 교주가 그대를 따라 중원으로 돌
아가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소?"

장무기는 소소가 교주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아직까지 자신을 연
모하고 있다는 대성왕의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만일 그게 사실이
라면 더이상의 적대가 필요하지 않았다. 장무기는 순간 조민의 얼
굴이 떠올랐다.

'나는 민 누이와 평생을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만일 소소가
중원으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그녀에게 이를 설명해야 하는가? 민
누이가 소소를 인정하려 할까?'

장무기는 소소의 애절한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공자님, 저는 곁에서 평생 시중만 들어도 행복해요. 저는 질투도
하지 않고 첫째가 뻎 생각도 없어요. 그저 공자님 곁에만 있으면..
.....'하며 울먹이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장무기는 입을 굳게
다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니야! 위험을 벗어나기 위해 대성왕의 말에 대
답할 필요 없어. 대장부는 죽을 때 죽더라도 떳떳해야 돼.'

장무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소리쳤다.
"대성왕! 내가 이곳을 벗어날 계책이 없는 줄 아오?"
"장 교주께서 아무리 개세신공(船由佚殺)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비화살만큼은 피한 수 없소이다."
"대성왕! 나는 중원 명교의 교주로 페르시아 총단에 속한 교인이
오. 나는 같은 명교의 교인으로서 살상을 원치 않소이다. 대성왕은
나의 말을 이해 할 것이오."

대성왕은 장무기의 무공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장무기가 허튼
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장무기는 대성왕이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자 다시 소리쳤다.

"대성왕! 내 비록 비오듯 쏘아대는 화살을 영원히 막을 수는 없겠
으나, 일순간은 나를 어쩌지 못할 게요."
"장 교주! 그토록 뛰어난 무공이 있다 한들 지금은 무슨 소용이
있겠소이까?"
"대성왕은 페르시아 명교의 대학사로 박학다식하기에 내가 말하는
무공을 들은 적이 있을 거요."

장무기의 말에 대성왕은 바짝 긴장하며 되물었다.
"무슨 무공이오?"
"나는 대성왕과 초면이 아니오. 내가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처럼
보이오?"
"그렇게 말하니 궁금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소."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소. 내가 어떻게 이곳을 빠져 나가는지 보
기만 하시오."
대성왕은 장무기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장 교주는 시간을 끌어 외부에서 누가 도움을 주지 않나 기다리
는가 본데 일찌감치 꿈을 깨시오."
"내가 이 무공을 쓰게 되면 나와 상승왕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생
명을 보장하지 못하오. 섣불리 화살을 쏘지 말고 헤아려 생각해 보
시오."
"하하하...... 세상에 어디 그런 무공이 있단 말이오?"
"사(?)...... 자(侏)...... 후(披)......!"
"장 교주가 그 음공(釣殺)을 한단 말이오?"
"시험해 보면 알 수 있지 않소?"
대성왕은 자신만만한 장무기의 말에 갑자기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섣불리 화살 공격을 했다가 사자후를 터뜨리면 낭패를 당할
테고, 만일 거짓이라면.......'

대성왕은 마음의 결정을 한 듯 장무기에게 소리쳤다.
"장 교주! 우리의 생명을 걱정해 주니 감격해 마지 않소만, 사자
후가 어떤지 견식해 보고 싶소."

대성왕의 목소리가 구덩이의 사방 벽을 울렸다. 장무기는 서서히
내공을 끌어올려 사자후를 터뜨릴 준비를 했다.

"멈춰요!"
가늘고 아름다운 여인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구덩이 위에
있던 병사들은 모두 무릎을 꿇었다. 대성왕도 흠칫 놀라며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표표히 날아온 여인은 교주 소소였다.

"대성왕! 살유륜 성녀를 찾았으면서도 어찌 교주인 내게 보고하지
않았어요?"

대성왕이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하자 소소가 다시 입을 열었
다.

"성녀를 찾았다니 이는 우리 명교의 흥복이에요. 대성왕은 큰 공
을 세웠으니 그만 일어나세요."

대성왕은 소소의 어투에 갑자기 당황한 듯 무어라 대꾸하지 못하
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소는 계속해서 말했다.

"대성왕은 호교(疱?)의 공이 지대하므로 명교 호법왕(曄?疱擾?)
으로 임명하겠어요. 대성왕은 삼 일 이내에 살유륜 성녀를 정?궁
(跌?循)으로 모셔다가 명교의 예절을 다시 전수하시고 다음날 총
단 성화청(濡飄?)에서 교주를 배알토록 조처하세요."

대성왕은 소소의 교령(??)에 의아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호
법왕이 되었다는 삼 푼의 즐거움과 자신을 문책하지 않은 칠 푼의
의구심이 서로 교차했다. 소소는 그가 즉시 믿지 못하는 듯 머뭇거
리자 다시 입을 열었다.

"대성왕은 명교 호법왕으로서 즉시 호교신공인 '건곤대나이심법'
을 전수받으세요."

대성왕은 소소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곧바로 무릎을 꿇고
여덟 번 머리를 조아리며 무공을 전수받을 자세를 취했다. 소소는
품에서 '건곤대나이심법'이 씌어진 양피지(孱誕?)를 대성왕에게
건넸다. 소소는 구덩이에 갇힌 장무기를 힐끗 바라본 후 대성왕에
게 말했다.

"본 심법은 중원 명교 교주와 본 교주만이 그 내용을 알고 있어요."
소소는 나직이 말을 마친 후 고개를 돌려 자무기에게 소리쳤다.
"장 교주! 청컨대 '건곤대나이심법'의 구결을 읊조려 주시겠어요?"
장무기는 소소가 나타나자 가슴이 울렁거리며 당장에 안아주고 싶
은 심정이었으나 조용히 사태를 관망한 목소리로 구결을 읊기 시작
했다. 대성왕은 장무기가 말하는 구결과 양피지의 구결이 딱 들어
맞자 곧바로 소소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교주의 은혜 감사드립니다."
대성왕이 인사를 마치고 뒤로 물러나자 소소는 구덩이에 갇혀 있
는 상승왕에게 소리쳤다.

"상승왕은 교령을 들으세요."
"존명(?鹽)!"
"상승왕은 구덩이에서 나오는 즉시 각지의 명교 두령들에게 통지
하여 삼 일 이내에 총단에 집결토록 하세요. 새로운 교주의 하례식
이 있을 거예요. 두 사람은 이제 올라 오세요."

상승왕은 소소의 말에 난감했다. 자신의 무공으로는 도저히 올라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장무기는 빙그레 웃으며 상승왕의 허리를
껴안고 공중으로 내던졌다. 단숨에 칠 팔 장을 날아 오른 상승왕은
공중에서 한 차례 제비돌기를 한 후 사뿐히 땅에 내려섰다.

상승왕이 무사히 땅에 내려서자 장무기는 구양신공을 최대한 끌어
올려 서너 장을 단숨에 뛰어 올랐다. 그 신법은 제운종(???)이
었다. 구름 사다리를 밟아 오르는 기세로 서너 장을 뛰어 오른 장
무기는 가볍게 지면에 내려섰다.

페르시아 명교 병사들은 장무기의 신출한 신법에 넋을 잃고 멍청
하게 바라보았다. 대성왕조차도 속으로 그의 무공에 감탄을 했다.

소소는 온몸을 백사(汪?)로 두르고 머리에는 흰 망사를 걸쳐 얼
굴을 가렸다. 오른손에는 금빛이 나는 쇠몽둥이를 들고 있는데 중
원의 성화령과 비슷해 보였다. 장무기는 그녀가 들고 있는 신물이
교주를 상징하는 영패임을 알았다.

그녀의 좌우에 시립하고 있는 십여 명의 명교 소녀들은 비록 얼굴
은 보이지 않았으나 몸매가 수려하고 자태가 고아(俗?)했다. 가벼
이 부는 바람에 흩날리는 옷자락이 선녀를 방불케 했다.

소소에게서 풍기는 신성한 자태는 교주의 권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장무기는 페르시아 명교의 풍도가 중원과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느꼈다. 소소는 장무기의 곁에서 오랫동안 그의 시중을 들
었었다. 반가움이 샘솟았지만 그녀는 이제 일개 여인이 아니라 페
르시아 명교의 교주였기에 복받치는 기쁨을 억제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남녀의 사사로운 개인 관계를 떠나 중원 명교의 교인으
로서 총단의 교주에게 무릎을 꿇고 하례를 올렸다.

"중원 명교의 교도인 장무기가 총단 교주님을 배알합니다."
소소는 가벼이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먼길을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총단으로 가시지요."
소소는 장무기에게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곧바로 뗏목에 올라탔다.
십여 명의 소녀들도 일제히 그 뒤를 따랐다. 수레인 듯하면서도 아
니고 배인 듯하면서 아닌 뗏목은 여덟 필의 준마가 앞에서 끌었다.
장무기는 살며시 물었다.

"상승왕! 이것은 무어라고 합니까?"
"사막의 배라고 하지요."
상승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막의 배'는 십여 장 멀리 달아
나고 있었다. 상승왕은 장무기에게 몸을 돌리며 하직 인사를 했다.

"장 교주! 이 몸에게 중대한 교령이 내려져 이만 작별을 고할까
하오이다. 삼 일 후 총단에서 뵙도록 합시다."

장무기는 '어서 떠나시죠'라고 상승왕에게 권하면서 대성왕에게
말했다.

"우리에게 뗏목 두 개만 빌려줄 수 없겠소?"
대성왕은 좀전의 무례했던 행동에 매우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지 곧바로 두 개의 뗏목을 건네주었다. 상승왕은 장무기에게 작별
을 고했다. 장무기는 대성왕에게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자, 지난 일은 잊어버리고 우리도 총단으로 떠납시다."
장무기의 말에 대성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출발을 명했다. 장무기
는 그제서야 앙천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대성왕은 장무기의 심후한
내공에 깜짝 놀랐다.

장무기는 단전에 구양신공을 최대한 응축시킨 후 삼성의 공력으로
사자후를 터뜨렸다. 사실 장움기는 대성왕과 페르시아 명교 교인들
을 마을 속으로 이미 용서했다. 다만 중원 명교를 깔보는 듯한 그
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꾸어 놓으려고 은근히 무공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삼성의 공력이었으나 대성왕과 페르시아 명교인들의 기를 꺽
어 놓기에 충분했다. 대성왕은 속에서 울컥 솟는 핏덩이를 참느라
안색이 흉흉했다. 많은 병사들은 서너 걸음 휘청하며 몸을 가누기
못했다.

장무기의 웃음 소리가 약해지자 대성왕과 페르시아 명교인들은 이
마의 땀을 훔쳤다. 장무기는 '이쯤이면 이들이 감히 중원의 명교를
깔보지 않겠지'라고 생각하고 뗏목에 올라탔다.

대성왕은 장무기가 사자후를 터뜨렸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행히 장무기가 자신을 용서하자 가볍게 무릎을 꿇고 장무기의 대
하대산(暗泰暗雲)과 같은 아량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장 교주의 아량에 감사드리오."
"일어나시오. 대성왕! 이제 떠납시다."
대성왕은 장무기의 인품에 점점 빠져 들었다. 그때 구덩이에 갇힌
장무기에게 손을 쓰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는 안도의 한숨이 절
로 새어나왔다.

페르시아 명교의 역사는 수백 년이 넘었다. 그들은 무공으로 남을
굴복시키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는 종교 조직이었다.
교주의 아래로는 십이보수왕이 교의(?拙)를 수호하고 경전을 연구
했다. 그들이 모두 무공이 고강한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대성왕이
나머지 보수왕과 작당하여 교주인 소소를 폐위시키려는 음모를 꾸
민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런에 십이보수왕은 중원으로 출행하여 대기사 성녀를 영접했다.
그때 십이보수왕은 장무기에게 모두 패했으나 소소와 대기사가 중
제하여 더이상의 싸움은 피했다. 교의에 의하면 성녀가 정절을 잃
게 되면 불에 태워 죽이는 율법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교주의
어머니라 아직까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때마침 실종되었던 살유륜 성녀를 찾아낸 대성왕은 이전에 장무기
에 당한 패배의 설욕을 교주인 소소에게 돌리며 그녀를 교주의 직
에서 내쫓으려 획책했다. 이번 교주 폐위 사건은 페르시아 명교 수
립이래 처음 있었던 충격적인 일이었다. 두 패로 갈라져 피비린내
나는 교권 싸움이 일어나기 일보직전에 이를 알아챈 소소가 스스로
교주의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천명하면서 가까스로 피의 혈전을 막
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장무기와 대성왕은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며 어느덧 총단에 도착했
다. 대성왕은 장무기와 헤어져 의사청으로 향했다. 백의를 입은 소
녀가 장무기를 기세 웅장한 전각으로 안내했다.

장무기는 의관을 정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백의 소녀는 주렴을
걷고 가는 허리를 살랑거리면서 사뿐히 그 뒤를 따랐다.

실내은 온화한 기품이 넘쳐 흘렀다. 비단 자락으로 엮은 주렴이
고아한 자태를 뽐내고 실내의 중앙에 자리잡은 탁자는 매우 값나가
보였다. 소소는 백사를 걸치고 맑은 두 눈을 빵긋거리며 장무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망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며 곁에는
백의 소녀가 좌우로 시중을 들고 있었다.

장무기는 얼른 무릎을 꿇고 인사를 드렸다. 소소는 손을 들어 제
지하면서 말했다.

"공자! 예를 거두시고 이쪽으로 앉으셔서 차를 드세요."
장무기는 소소가 자신을 '공자'라고 호칭하자 그녀와 함께 했던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장무기를 안내한 백의 소녀는
차를 대령하여 장무기에게 바치고 조용히 물러났다. 나머지 백의
소녀들도 모두 실내에서 나갔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색하게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장무기가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뗐다.

"소소! 그동안 잘 있었소?"
소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공자께서는 어찌 이곳에 오셨습니까?"
장무기는 소소의 말에 긴 탄식을 내뱉으면서 일 년여 전 조민과
헤어져 한동안 찾아다닌 일을 얘기했다. 페르시아에 온 이유도 모
두 말했다. 조민의 행방을 찾아 오해의 실마리를 푸는 것 이외에
'건곤대나이심법'의 결점을 설명했다.

"공자! 건곤대나이심법에 그런 허점이 있었다니 누가 알았겠어요.
공자께서 알아내지 못했다면 칠 단계까지 연성할 수 있는 사람은
그 결점에서 영영 헤어나지 못하고 일패지도할 뻔 했네요."

소소는 장무기에게 그윽한 눈길을 보내면서 계속 말했다.
"이번에 교주의 자리를 물러나고자 하는 나의 마음은 변함이 없어
요."
"소소! 교주의 자리를 물러나면 어디로 갈 작정이오?"
"중원은 제가 태어난 곳이에요. 공자께서 버리지 않는다면 평생
모시고 살겠어요."
장무기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소소! 다시 한 번 생각하시오. 그대는 이곳의 교주이오. 어찌 보
잘 것 없는 나를 좇아 평생을 하겠다는 말이오?"
"저에게 어떤 바램도 공자와 함께 하는 일보다는 중요하지 않아요.
공자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장무기는 소소의 직설적인 구애에 당황하여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소소는 촉촉히 젖은 두 눈으로 우물쭈물하고 있는 장무기
를 바라보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공자의 민(?) 언니(에) 대한 진심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그
렇지만 만일 찾지 못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장무기는 흠칫 놀랐다. 이와 비슷한 질문을 주지약(蹉?煮)이 자
신에게 한 적이 있었다. 장무기는 남녀의 정에 대해서는 워낙 우유
부단하여 이제까지 확실한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장무기의 그러한 애매한 태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오해와 충돌이
빛어졌던가?

이번에 소소마저도 자신에게 그윽한 눈길로 또다시 구애를 청하자
다시 마음이 약해지면서 어떻게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소소
가 중원을 떠났을 때 장무기는 매우 가슴이 아팠다. 주지약과 다투
면서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조민임을 알았다. 만일 자신이
소소에게 확실한 대답을 주지 못한다면 떠나간 조민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하늘 끝까지라도 그녀를 찾아 다니겠소. 만일 찾지 못한다 해도.
......"
장무기는 허공에 나타나 방긋이 웃는 조민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견강(?惜)하게 말했다.

"만일, 만일 민 누이를 찾지 못한다면, 나는...... 나는 결코 혼
자 살고 싶은 생각이 없소."

소소는 장무기가 만일 조민을 찾지 못하면 은거하여 자진(株?)하
겠다는 말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있
던 망사를 걷어 올리면서 꾀꼬리 소리처럼 그윽하고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기 오라버니! 제가 누구인지 알겠어요?"
장무기는 눈을 감고 조민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소소의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소소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장난기 섞인 웃음을 띠며 장무기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백사
를 걸치고 긴 치마를 입은 여인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자태가 고아했다.

소소는 갑자기 어디로 사라지고 꿈에도 잊지 못하는 조민이 나타
나 앉아 있단 말인가? 장무기는 순간 할 말을 잊어버리고 멍청하게
조민을 바라보았다. 조민은 장무기가 바보처럼 자신을 바라보자
'피!' 하면서 말했다.

"바보! 벌써 나를 잊었단 말이에요?"
장무기는 조민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녀가 영양왕부(?暫?繞)의
천금옥녀(????)이고 자신의 가슴을 불태우고 있는 조민임을 알
았다. 그는 앞으로 뛰어가 조민을 뜨겁게 끌어 안았다. 조민은 살
포시 안기며 말했다.

"아이 더러워라! 몸에서 그렇게 냄새가 나면 이쁜 아가씨가 먼저
달아나겠다."

장무기는 조민의 농(?)에 두 손을 풀면서 말했다.
"민 누이! 페르시아에는 어떻게 왔소?"
"흥! 일국의 공주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주지약에게 일검을
당하게 한 죄는 어떤 중죄에 해당하지요?"
장무기는 조민이 주지약을 들먹이자 그녀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세차게 치면서 말했다.

"소인이 무능하여 공주마마께 큰 죄를 범했나이다. 용서하소서!"
장무기는 능청스럽게 용서를 구하면서 조민의 왼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또 한 차례 때렸다. 조민은 갑작스런 장무기의 행동에 두 발
을 동동거리며 소리쳤다.

"내 손으로 뺨을 때리면 죄가 더 가벼워질 줄 아세요?"
그녀의 말에 장무기는 얼굴을 붉히면서 뒤통수를 득득 긁었다. 이
때 실내의 안쪽에 있는 주렴이 걷으며 들어오는 사람의 낭낭한 목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어쩌면 그렇게도 연극을 재미있게 잘 하세요?"
장무기는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우며 들어오는 소소를 쳐다보았다.
소소는 장무기가 인사를 올리려는 자세를 취하자 오른손으로 제지
하면서 입을 열었다.

"공자! 어찌 시비(珥藕)가 인사를 받을 수 있겠어요? 더군다나 나
는 이제 명교의 교주가 아니에요."

장무기는 그제서야 조민과 소소가 이 일을 꾸며 자신을 골탕먹였
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조민이 워낙 비슷하게 소소의 목소리를 흉
내내는 바람에 장무기도 그만 깜빡 속아 넘어갔던 것이다.

세 사람은 오랫만에 만나 정담을 나누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흘렀을까, 내실로 한 사람의 아름다운 중년 여인이 들어왔다. 소소
의 어머니인 대기사 성녀였다.

그녀는 일찍이 페르시아 명교의 성녀로 중원 명교애 파견되어 사
대호법의 하나인 자삼용왕(朱源井?)이라 불렸다. 사랑에 빠진 죄
로 명교에서 축출당한 후 그녀는 한천엽(褪?栽)과 함께 영사도(這
?隘)에 은거하여 소소를 낳았다. 그녀는 성녀의 몸으로 정절을 버
린 자신을 페르시아 총단에서 추적할까 염려되어 매우 못난 노파로
변장을 하고 이름을 금화파팜(??打打)로 바꿨다. 장무기의 사촌
누이인 은리(肇涅)가 바로 그녀의 제자였다.

당시 중원 명교의 자삼용왕은 출중한 미모로 강호제일미(析弊??
?)라 칭송되었다.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배들의 칭찬이 명
불허전이 아님을 알았다. 그녀는 중년이 넘어섰는데도 아직 처녀
시절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중원인과 페르
시아인의 혼혈아였다. 머리와 눈동자가 검고 높은 코에 그윽한 눈
매를 간직했다. 날렵한 몸매는 맑은 시냇물에 푸릇푸릇한 가지를
뻗는 버드나무 같았다. 멀리서 보면 소소와 쌍동이 자매 같았다.

장무기는 한 걸을 앞으로 나가 한쪽 무플을 꿇으면서 강호의 관례
에 따라 후배의 예를 올렸다.

"후배 장무기가......."
그러나 장무기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소소의 어머니에다, 나
이로 따진다면 자신보다 위인 선배지만 그녀는 일찍이 명교의 사대
호법이었고 자신은 교주가 아니던가? 그녀는 장무기가 머뭇거리자
즉시 입을 열었다.

"장 대협! 일어나세요. 그대는 중원 명교의 교주로......."
"아닙니다. 저는 교주의 자리에서 물러난 지 오래 되었고, 더군다
나 의부와 같은 연배이시니 당연히 예를 올려야 합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일찍이 나에게 금화파파라고 부른 적이 있으니
앞으로는 그렇게 호칭해요."
"그렇지만......."
"장 대협께서는 나의 얼굴이 이렇게 젊은데 어찌 노파라고 부를
수 있느냐 걱정을 하시는 모양인데 상관없어요."

장무기는 그제서야 인사를 올렸다.
"후배 장무기가 선배 금화파파 어른을 뵈옵니다."
금화파파는 장무기의 인사에 가볍게 예의를 표한 후 그의 얼굴을
보다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니 장 대협! 얼굴이 어찌 그리 벌겋게 부었어요?"
장무기는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이 조민의 손을 끌
어다 뺨을 때렸으니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영리한 조민도 얼굴을 붉히며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소소가 웃
으며 금화파파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금화파파는 소소의 말에
화를 벌컥내며 소리쳤다.

"신랑관의 얼굴이 이렇게 망측해서야 어디 사람들을 대할 수 있을
까? 소소야, 너는 얼른 의원을 불러 장대협의 부기를 빼주도록 해
라. 삼 일 이내에도 얼굴의 부종이 빠지지 않으면 두 사람은 나에
게 혼이 날 줄 알아라."

소소는 빙그레 웃으며 밖으로 뛰어나갔고 조민은 고개를 돌려 부
끄러운 마음을 숨겼다. 장무기는 괴이한 듯 중얼거렸다.

"신랑관이 무엇이지......?"

제 6 장 : 행복 뒤에 숨은 광풍
조민은 강남의 어느 깊은 산중에서 하늘과 땅에 예를 올리고 장무
기와 혼인을 서약하던 그날, 갑자기 나타난 주지약의 방해로 팔에
상처를 입자 화가 나서 발길 닿는 대로 달아났다. 마음이 상한 그
녀는 어두운 산길을 마구 달렸다. 팔의 상철고 통증이 거세지자 그
녀는 노송 아래 자리를 잡고 상처를 돌보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달은 높이 떠 있었고 또한 교교해 보였
다. 그녀는 매우 상심하여 처량하게 달빛을 응시하면서 눈물을 하
염없이 흘리었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 사위가 어두어질 때 멀리서 그녀를 찾는 장무
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 누이!"
"민 누이!"
매우 다급하고 처연한 장무기의 목소리를 듣고서도 그녀는 화가
풀리지 않은 듯 '흥'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무기의 목소리가
더욱 가깝게 들려오자 그녀는 팔의 통증을 참으며 노송의 우거진
가지 사이로 몸을 숨겼다.

장무기가 노송을 지나쳐 멀리 사라지자 그녀는 한 생각이 떠오른
듯 나무집으로 달려갔다. 그때 나무집에서는 주지약이 장무기에게
일장을 맞은 후 땅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조민은 한눈에 그녀
의 상처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장무기가 자신을
찾으러 나섰다면 주지약 그녀만이 나무집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
겠구나 생각하고 급히 그곳으로 달려갔다.

조민은 몽고 여자였다. 성격이 강직한 면이 있는가 하면 삼 푼 정
도는 악락한 면이 있었다. 그녀는 나무집으로 달려가 주지약을 단
칼에 요절내려고 마음먹었다. 그녀만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우유
부단한 장무기의 마음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지 않겠다는 판단이
었다. 그녀의 가슴 속에는 질투와 분노의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
다.

나무집에 도착한 조민은 내실에서 불빛이 새어나오자 '주지약이
아직도 안에 있구나'라고 중얼러리면서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
다. 살금살금 문 앞으로 다가 간 그녀는 문을 박차면서 안으로 뛰
어 들었다.

주위를 휘둘러 보았으나 촛불만이 타고 있었고 주지약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붉은색의 옷자락만이 바닥에 널려져 있었다.

주지약은 장무기가 조민을 찾아 밖으로 뛰쳐 나가자 얼른 내력을
운용했다. 조민이 언제 들이닥쳐 자신은 해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상처는 이미 장무기가 어느 정도 치료를 해주어서 그런지 내공심법
을 운용하자 내력이 금방 솟구쳤다.

아직은 경공을 펼칠 수 없었어도 거동하기에는 충분했다. 조민이
나무집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주지약은 나무 위에 몸을 숨기고 있었
다.

조민은 나무집에서 주지약을 찾아내지 못하자 밖으로 나와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때 장무기가 조민을 찾는 외침이 산자락을 뒤
흔들었다. 조민은 다시 나무집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장무기는
나무집 입구에서 한동안 무슨 생각을 하는 듯 머뭇거리다가 발길을
돌렸다. 잠시 후에는 멀리 조민을 부르는 목소리만이 간간이 들리
기 시작했다.

장무기는 비록 뛰어난 무공을 가졌어도 지략에 있어서는 주지약과
조민을 당해내지 못했다. 그는 벌써 두 번이나 조민의 바로 옆에까
지 쫓아왔어도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조민은 나무집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장무기가 부르는 '민 누이!'
하는 처연한 목소리에 울먹이며 밖으로 뛰쳐 나갈 뻔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번에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지 않으면 또다시
여자 문제로 불상사가 일어날 것 같았다. 그녀는 울음을 꾹 참으며
장무기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나무집에서 몸을 숨겼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그녀는 나무집에서 나와 북쪽으로
길을 떠났다. 주지약도 조민이 나무집에서 나와 북쪽으로 떠나자
나무에서 내려와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다음 날 날이 밝자 그녀는 거리에서 말 한 필을 구입하여 대도(暗
?)를 향해 달렸다. 대도에 도착한 조민은 객점에 방 하나를 빌어
팔의 상처를 치료했다. 한 달이 지난 후 그녀는 야행복으로 갈아입
고 몰래 여양왕부로 침입해 들어갔다.

그녀는 아버지 찰한특목이(撤統墮靈?)와 오라버니 고고특목이가
소림사의 중원 협객들을 공격할 때 의가 상한 후 그들을 뵐 면목을
잃었다. 그녀가 가족들의 뜻을 버리고 사랑을 찾아 장무기에게 투
신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식으로 부친을 만나지 못하고 몰래 잠
입하여 얼굴이나 보려고 마음먹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여양왕부에서 자랐고 무공 익히기를 좋아하여
자주 밖으로 드나든 관계로 왕부의 길에 익숙했다. 더군다나 왕부
의 무사들은 모두 그녀의 옛 부하들이었기에 조민은 그들이 지키는
초소가 어디 어디인지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왕부에 다다
른 그녀는 제비가 공중으로 차고 오르는 듯한 날렵한 신법으로 담
장을 뛰어넘어 전각의 지붕 위로 날아 올랐다.

마치 다람쥐가 나뭇가지 사이로 몸을 움직이듯 민첩한 동작으로
그녀의 부친이 머물고 있는 침전으로 향했다. 그녀의 부친 찰한특
목이는 내실의 탁자에 앉아 오라버니 왕보보(???:고고특목이)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일순간 눈물이 핑 돌아 오른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처마 끝으로 몸을 날렸다.

살며시 침전으로 숨어 들어간 그녀는 부친의 영부(梓遼)를 찾아내
품에 갈무리하고 왕부를 떠나 객점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그녀는
장무기와 몇 차례 만났던 그때의 탁자에 앉아 그가 늘 앉았던 맞은
편의 자리를 비워두고 술과 몇 점의 야채를 시켰다. 그녀는 빈 잔
에 술을 따르면서 중얼거렸다.


"인연이 있으면 천리의 먼 곳에서도 만날 것이오,
인연이 없다면 가까이 있다 하여도 어찌 만나리!"
???咽?爲?
午?癌??爲?
그녀는 남장을 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노랫가락을 읊조렸다. 점원
은 남자의 목소리가 여자의 목소리처럼 가냘프게 흘러나오자 고개
를 갸우뚱했다. 조민은 장무기가 이곳에 반드시 들를 것으로 여기
고 일부러 이상스런 행적을 점원에게 흘린 것이다.

그녀는 주점을 빠져나와 해변가로 말을 몰았다. 조민은 천군만마
(?琡??)의 병마를 호령할 수 있는 여양왕부의 영패로 전선을 한
척 요구하여 페르시아로 떠났다. 그녀는 착찹한 심정으로 페르시아
명교의 소소에게 몸을 의탁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장무기가 중원에서 자신의 행적을 찾아내지 못하면 반드시
페르시아의 소소를 찾아올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x x x

장무기는 그녀에게 해상에서 당한 숱한 고난을 낱낱이 설명했다.
폭풍을 만난 일에서부터 해적선과의 싸움, 마래시아 수병을 맞아
겨우 험지를 벗어난 일 등을 들으면서 조민은 장무기가 더욱 믿음
직스럽게 느껴져 눈물을 흘렸다.

"바보! 나를 찾아 오려고 그 숱한 고난을 당하다니. 무기 오라버
니는 바보야!"

그녀는 장무기의 품으로 뛰어들면서 울먹였다. 장무기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지면서 어색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나는 민 누이보다 멍청하잖아!"
조민은 얼굴이 부어 오른 장무기의 뺨에 고약을 발라주면서 애교
섞인 말투로 속삭였다.

"아프지 않죠?"
장무기는 귀를 벌름거리면서 대답했다.
"괜찮아!"
장무기는 조민을 품에서 떼어내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궁금한
것이 있는 듯 물었다.

"민 누이! 금화파파 선배께서 말씀하신 '신랑관'이라는 게 무슨
뜻이야?"
조민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돌리며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조민은 페르시아에 도착하던 날 명교의 여자처럼 옷을 꾸미고 얼
굴은 망사로 가렸다. 그녀는 해변에 배를 정착시킨 후 곧바로 말
한 필을 그입하여 명교의 총단으로 향했다.

명교는 페르시아에 전파된 역사가 매우 깊었다. 어린아이들도 총
단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쉽게 총단을 찾
아 소소를 만났다.

소소는 조민을 매우 반갑게 맞아 들였다. 원나라 여양왕부의 군주
가 이곳 명교 총단에 와 있다는 사실은 오로지 소소만이 알았다.
소소는 중원에서 조민과 그리 친숙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이 연모하
는 장무기의 사랑하는 연인이기에 질투하지 않고 편안히 머물도록
허락했다.

소소는 조민을 만나자 마치 고향의 친고를 만난 듯 매우 다정하게
대했다. 소소는 중원에서 태어난 여자였다. 멀리 페르시아 명교에
와서 교주가 되었지만 마음은 늘 고향에 가 있었다. 조민은 그러한
그녀에게 고향의 체취를 느끼게 해주었다. 날이 지날수록 두 사람
은 더욱더 의기가 투합되어 친자매처럼 지냈다.

대성왕이 교주의 자리를 폐위하려고 획책할 때, 소소는 그 사실을
미리 알았다. 소소와 조민은 깊이 상의한 끝에 중원으로 돌아가기
로 마음을 굳혔다. 대성 보수왕이 몇 명의 보수왕과 짜고 지혜, 진
악, 정직 세 보수왕을 해치고 상승왕마저 해치려는 음모를 꾸밀 때
소소는 사람을 사방으로 보내 상승왕의 거처를 찾고 있었다.

상승왕은 페르시아 명교 교인 중에서 무공이 제일 고강했다. 교인
들은 모두 상승왕을 깊이 존경했고 소소마저 그에 대해서는 예의를
깍듯이 했다. 며칠 전 그녀는 상승왕이 흑사곡에서 장화왕에게 포
위되어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소식을 전해 온 자는 명교 교인인 달로였다. 그는 장무기를 흑사
곡에 떼어 놓고 겨우 출로를 찾아 흑사곡을 빠져 나왔다. 그는 삼
사자가 혹시 입막음을 위해서 자신을 해치지 않을까 의심이 들어
총단으로 달려갔다.

소소와 조민은 장무기와 상승왕이 흑사곡에서 위험에 빠져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매우 초조했다. 교인들에게 명하여 흑사곡으로 출발
하려는 찰라, 장무기와 상승왕이 흑사곡을 빠져 나왔다는 연락 비
둘기가 총단에 전해졌다. 이 전서구(?柚需)는 구명 보수왕의 것이
었다.

당시 구명 보수왕은 장무기와 상승왕이 흑사곡을 빠져 나갔다는
소식을 대성왕에게 전하기 위하여 두 마리의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
그 중 한 마리가 방향을 잃어 총단의 교주 침소에 날아들었고 때마
침 이를 발견한 시녀에 의해 소소에게 전달된 것이다.

소소와 조민은 장무기와 상승왕의 무공을 믿었으나 대성왕의 함정
을 염려했다. 즉시 조민을 시녀로 변장시킨 소소는 그녀와 함께 급
히 대성왕이 암습을 준비한 장소로 달려와 대량 살상을 막아낼 수
있었다.

소소는 장무기와 헤어져 총단으로 돌아와 대기사 성녀에게 이 사
실을 고했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장무기와 조민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네가 교주의 입장에서
그들을 맺어 주는 게 어떠냐?"
"어머니, 저는 나이가 아직 어려서 두 사람의 혼례를 주선할 수
없어요. 어머니께서 주선하시는 게......."

대기사는 소소의 손목을 꼬옥 잡으며 말했다.
"본교의 교인 중에는 나의 정절을 문제 삼으로는 사람이 많다. 대
성왕도 그 중의 하나인데 어찌 내가 공개적으로 얼굴을 드러낼 수
있겠느냐?"
"어머니! 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어요. 때문에 이번 기회를 통해
교주의 자리를 살유륜 성녀에게 넘기기로 결심했어요. 그런 후 어
머니와 함께 중원으로 돌아가려고 해요. 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하세
요?"

대기사 성녀는 당시 중원에서 한천엽과 사랑에 빠져 중원 명교를
배반했다. 그녀는 지금도 한천엽과 사랑의 보금자리를 꾸민 여사도
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그녀는 삼성녀의 하나로 정
절을 잃었기 때문에 교의에 의해 화형을 당해 죽어야 마땅했다. 다
행히 교주의 어머니인 관계로 누가 나서서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
을 뿐이다. 차제라도 이 문제가 거론될지 모른다.

때문에 대기사는 몇 차례 페르사아를 떠날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불쌍한 소소 혼자만 이곳에 남겨 놓고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다행히 소소가 중원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자 그녀는 고개
를 끄덕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어찌하여 한숨을(?=은) 내쉬세요?"
"얘야! 내가 어찌 너의 마음을 모르겠냐! 장무기와 조민이 부부의
연을 맺으면 너는 중원으로 돌아가 어떻게 살아가겠느냐?"
"어머니! 소녀는 단지 공자의 곁에서 시중만 들어도 만족해요. 더
이상 바랄 게 없어요."
대기사는 눈물을 떨구며 소소의 앞날을 생각했다.
'내가 처음에 중원에 갔을 때 사랑에 빠질 줄 누가 알았던가! 우
리 소소도 지금은 오로지 장무기만 생각하지만 중원의 영웅 호걸이
그 하나던가!'

그녀는 속으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면서 소소에게 말했다.
"알았다, 얘야! 어쨌든 혼인 문제는 조민에게 얘기하여 일을 마무
리 짓도록 하여라!"
"알겠어요. 주선은 어머니께서 해주셔야 돼요."
소소와 대기사 성녀는 즉시 혼례를 준비하기로 했다. 소소는 조민
을 찾아가 혼례에 관한 일을 말했다. 조민은 매우 부끄러운 둣 말
했다.

모든 일은 금화파파 선배의 말에 따르겠어."
조민은 사실 주지약이 매우 신경이 쓰였다. 중원으로 돌아가 혼인
을 하게 되면 언제 그녀가 또다시 나타나서 방해를 할지 모르기 때
문이었다. 조민은 비록 부끄러운 듯 말했지만 속에서 이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제 이곳에서 정식으로 장무기의 아내가 되
면 천하의 주지약도 어쩌지를 못할 게 아닌가?

그녀는 소소의 손목을 잡고 거듭 고마움을 표시했다. 소소는 그러
한 조민에게 중원으로 돌아가 평생 장무기의 시녀로 살겠다는 자신
의 결심을 표시했다. 조민은 깜짝 놀라 소소를 가엾다는 듯 바라보
았다. 그녀는 그동안 이곳 총단에서 소소와 함께 지내면서 소소의
인품에 감동하고 있었다. 조민은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소소! 그런 말하지마. 이제 소소는 나와 친자매이잖아. 우리는
모두 한 식구야. 다시는 시녀가 되겠다는 말을 하지 말아."

소소는 조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내 마음은 변함없이 공자를 받들고 모시며 살아갈 테야..
....."
x x x

장무기는 이제까지의 상황에 대해서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금화
파파가 나가면서 '무슨 신랑관'하자 장무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조민에게 물었다. 조민은 고개를 숙이고 모기만한 목소리로 대답했
다.

"무기 오라버니! 묻지 마시고 가만히 있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요.
먼저 얼굴의 부기나 빼도록 하세요."

장무기는 조민이 비록 하얀 망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나 얼굴
이 빨갛게 물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십
중팔구는 짐작을 하고 입을 열었다.

"민 누이......"
장무기는 말을 더듬거리면서 조민을 힘차게 끌어안았다. 조민은
그러한 장무기가 미워 보이는지 사랑스러워 보이는지 얼굴을 몇 차
례 도리질 치면서 그의 품에 안겼다.

장무기는 자신의 침실로 돌아와 내공을 운기하여 얼굴의 부기를
간단하게 빼냈다. 그는 구양신공을 최대한 끌어올려 전신에 골고루
퍼지게 한 다음 그동안 이해하지 못한 '건곤대나이심법'의 구결을
한 자 한 자 헤아리기 시작했다.

사흘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상승왕이 총단에 돌아왔다. 각지의 명
교 수령들도 속속 총단으로 모여들었다. 상승왕은 장무기의 거처로
찾아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공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두 사람
은 이전보다 더욱더 가까워졌다.

두 사람이 탁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백의를 입은 시녀
한 명이 들어와 장무기에게 혼례식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장무기
는 내실에 준비된 신랑복으로 갈아입고 상승왕과 함께 총단 성화청
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화청의 뜨락에는 이미 수백 개의 탁자가 놓여져 있었다. 장무기
가 들어서자 주위의 웅성거림이 점점 사라지면서 엄숙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상승왕이 앞으로 한 걸음 나가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형제들! 먼길을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소. 오늘 우리 명교에서는
두가지 커다란 행사가 있소이다. 첫번째는 중원 명교의 교주이신
장무기 대협과 대원 여양왕부의 군주이신 조민 여협과의 혼례식이
지요. 다른 하나는 다음 날 날이 밝아올 때 교주의 성전을 받는 일
이오."

상승왕의 외침이 끝나자 맑고 부드러운 음악이 울리면서 여덟 명
의 백의 소녀들이 조민을 인도하여 성화청으로 들어왔다. 신랑은
옥골선풍(?誦?憚)의 모습이요. 신부는 방금 하늘에서 하강한 선
녀처럼 고왔다.

"교모(?營)께서 도착하십니다!"
낭낭한 외침이 끝나는 동시에 아름다운 대기사 성녀가 모습을 드
러냈다. 대기사 성녀는 사뿐사뿐 성화청의 가운데서 걸음을 멈추었
다.

"교주께서 도착하십니다!"
이어서 소소의 모습이 성화청에 모습을 드러냈다. 때묻지 않은 아
름다운과 순결함을 간직하고 있는 성처녀만이 오로지 교주의 자리
에 오를 수 있는 것이 명교의 율법이다. 소소의 모습이 대청에 나
타나자 주위가 갑자기 밝아지면서 엄숙한 기운이 잔잔하게 흘러 넘
쳤다.

소소는 여덟 명의 소녀에게 둘러싸인 채 성화청의 가운데에 들어
섰다. 오른손에는 교주의 권위를 상징하는 영패를 들고 있었다. 대
기사 성녀는 소소가 자리에 앉자 조민과 장무기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대들은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부부로 인연을 맺기를 희망하느
냐?"
"예!"
조민과 장무기는 부끄러운 듯 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강호의 선배로서, 명교의 교모의 명예를 걸고 명존(曄?:명
교에서 숭배하는 지존)께 그대들의 행복을 간구하네. 부부로 맺어
져 화목하고 평화롭게 영원한 복록을 누리기를 기원하네."

페르시아 전통의 혼례곡이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소소사 자
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나는 페르시아 명교의 교주로서 그대들의 행복과 안녕을 명존께
기원해요."

소소의 기원이 끝나자 자리를 메운 명교 교인들이 일제히 외쳤다.
"명존께 두 사람의 행복을 기원하나이다."
그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가슴에 올리고 명존을 상징
하는 불꽃을 그리면서 장중한 목소리로 외쳤다.

"성화여! 이 몸을 태우니 이글이글 타올라라!
삶이 어찌 즐거우며 죽은 들 어찌 괴로우랴?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니 오직 광명의 길로 나아간다.
기쁨도, 즐거움도, 슬픔이나 근심도 모두가 하나의 먼지에 불과
하거늘,
세상 사람 불쌍함은 우환이 많음에서라!
세상 사람 불쌍함은 우환이 많음에서라!
명교 교인들의 삶과 죽음을 초탈한 가락이 끝나자 소소는 낭랑한
목소리로 명했다.

"모든 교인들은 마음껏 마시며 즐기기 바래요!"
여자 교인들은 교주의 명령이 떨어지자 신부 차림의 조민을 이끌
고 성화청을 빠져 나갔다. 대청 밖 뜨락에는 수만 명의 남자 교인
들이 장무기를 수석에 앉히고 일제히 잔을 권했다. 장무기는 자리
에서 일어나 잔을 높이 들고 통쾌하게 마셨다.

대성왕은 몇 명의 보수왕과 함께 교인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기분 좋은 듯 연신 술잔을 비웠다. 장무
기는 중원의 사나이다운 풍도를 잃지 않으려고 교인들이 건네는 술
잔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미 두 동이의 술이 뱃속에서 출렁거렸지
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수명의 보수왕들은 연달아 장무기에게 술을 권해 그를 취하게 하
려고 했으나 오히려 자신들이 취하여 얼굴이 불그스레 했다. 좌중
의 교인들은 장무기의 엄청난 주량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장무기는 계속 교인들이 건네는 술잔을 받았다. 그의 호탕한 기개
와 겸손은 페르시아 명교 교인들의 가슴 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상승왕은 장무기의 곁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교인들에게 그만 권하
도록 종용했으나 장무기는 빙그레 웃으며 그들의 잔을 거절하지 않
았다.

장무기는 페르시아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표정
을 읽고 있었다. 일부 교인들은 뜨락의 중앙에서 격렬하고 사내다
운 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의 춤은 빠르고 매우 힘이 있었다. 장무
기는 박수를 치면서 그들의 흥을 돋구었다.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공중뛰기나 제비돌기를 하는 사람,
칼춤을 추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다. 일부는 어깨씨름을 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흥에 도취되어 있을 때 한 사람이 상승왕을
향하여 큰소리로 무엇인가 외쳤다.

상승왕이 두 손을 내젓고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며 사절을 하는 모
양이 가관이었다. 장무기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페르시아 최고
의 용사인 상승왕의 무예를 보고 싶어하는 그들의 표정을 읽었다.
상승왕은 어쩔수 없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 두 자루의 단검을
허리춤에서 꺼냈다. 그는 장무기에게 가볍게 포권을 하면서 말했다.

"장 교주! 천박한 재주를 비웃지 말이 주십시오."
"상승왕께서는 지나치게 겸손하시오. 나의 견식을 한번 넓혀 주십
시오."

상승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좌중으로 날아들었다. 땅에 내
려서는 동시에 기마 자세를 취하고 쌍검을 수직으로 세웠다. 그의
모습은 세찬 파도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 바위 같았다.

상승왕은 키가 크고 몸은 삐쩍 말랐으며 높은 코에 깊은 눈을 가
진 전형적인 페르시아인이었다. 경전에도 조예가 깊고 무공도 뛰어
났으며, 학자풍이 풍기는 보기 드문 인재였다. 나이는 대략 스물여
덟 정도 되어 보였다.

상승왕은 단검을 공중으로 높이 던지면서 세 바퀴 몸을 회전하여
공중으로 치솟아 재차 단검을 잡아채고 사뿐히 땅에 내려앉았다.
그의 무공은 성화령에 있는 내공심법이었다.

장무기는 상승왕이 성화령의 무공을 두 단계 높게 연성했음을 알
아차렸다. 중원에서 한 번 부딪쳤을 때는 입문 단계의 기초적인 무
공을 구사했을 뿐이다. 이번에 보니 그는 삼 단계의 '건곤대나이심
법'을 연성했다. 소소가 그에게 심법을 전수했기 때문이다. 장무기
는 그의 무공을 응시하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건곤대나이심법의 일 단계는 오성이 뛰어나면 칠 년 안에 연성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십사 년이 걸린다. 이 단계 심법은 오성
이 뛰어나도 칠 년이 걸리고 그렇지 않으면 십사 년이 걸린다. 만
일 이십일 년이 지나도 진전이 없으면 삼 단계를 수련하지 못할 뿐
만 아니라 자칫 주화입마(刹飄??)에 빠지게 된다.'

상승왕은 이미 일 년여 동안 삼 단계까지 수련을 마쳤다. 페르시
아 청년 무사 중에서 가장 오성이 뛰어난 인재임이 틀림없었다. 장
무기가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을 때 우렁찬 박수 소리가 장내를 진
동시키며 상승왕의 자리로 돌아왔다. 상승왕은 좌중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교인 여러분! 나의 무공은 여기 장 교주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
니오. 형제들! 우리 모두 그를 청하여 그의 높은 무공을 견식하도
록 합시다."

장무기는 상승왕이 자신을 그보다 열 배 이상 뛰어난 무공을 가졌
다고 소개하자 손을 들어 몇 번씩 거절했다. 그러나 좌중의 환호와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자 장무기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
에서 일어나 좌중의 한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장무기는 갑자기 무공을 시연해 달라는 요구에 막상 뜨락에 내려
서긴 했으나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여 잠시 멍청하게 서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마침 거대한 무게를 자랑하는 돌탁자가 눈에 들어
왔다.

장무기는 술단지와 탁자를 양손으로 끌어올려 좌중의 한가운데에
옮겨 놓았다. 사람들은 그의 심후한 내공에 감탄하며 모두 조용히
바라만 보았다. 탁자의 무게는 이삼백 근이 넘어보였다. 십여 명이
들어도 들기 힘든 돌탁자를 한 손으로 간단하게 옮기는 게 어디 쉬
운 일인가? 장무기는 상승왕에게 걸어와 무언가 귀엣말로 속삭였다.
상승왕은 흠칫 놀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단검을 빼어들고 바닥에
페르시아 문자를 써내려갔다. 장무기는 기마 자세를 하면서 전신의
기를 양손에 집중하여 돌탁자를 이마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장무기는 돌탁자를 빙글빙글 돌리다 공중으로 던졌다. '와'하는
함성 소리가 좌중을 진동했다. 손에서 벗어난 돌탁자는 장무기의
내공에 의해 허공을 둥둥 떠다녔다. 이어서 장무기는 술단지의 술
을 복부에 빨아들인 후 돌탁자를 향해 쏟아냈다.

상승왕은 돌탁자에 새겨진 글자를 보자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
를 조아렸다.

"페르시아 명교 만세!"
선명한 페르시아 문자가 돌탁자에 아로 새겨졌다. 장무기는 상승
왕이 바닥에 써 놓은 글자를 돌탁자에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좌중의 교인들도 상승왕을 따라 돌탁자에 새겨진 글자에 머리를 조
아렸다.

"페르시아 명교 만세!"
장무기는 허공에 떠 있는 돌탁자를 조용히 내려놓고 자리로 돌아
왔다. 장무기의 무술 시범이 끝남과 동시에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
왔다. 중원의 사원에서 들은 종소리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교
인들이 교주를 배알하는 시간이었다. 교인들은 모두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잡고 대청 마당에 무릎을 꿇었다.

소소는 몇 명의 보수왕을 이끌고 대전의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얼마 후 대성 보수왕이 아름다운 페르시아 미녀를 모시고 소소 앞
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장무기는 그녀가 살유륜 성녀임
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소소는 페르시아 말로 몇 마디 외치고 곧바로 교주의 영패를 살유
륜 성녀에게 인계했다. 살유륜 성녀는 영패를 하늘 높이 들어올리
고 고인들을 향했다. 소소가 대청을 벗어나자 좌중의 교인들은 페
르시아 명교 경문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상승왕과 장무기도 총단의 대청을 벗어났다. 이미 총단의 입구에
는 세 대의 마차와 여덟 필의 준마가 놓여 있었다. 마차 옆에는 조
민과 소소, 그리고 대기사 성녀가 얼굴에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장무
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소와 대기사 성녀는 첫번째 마차에 올랐고 조민은 두번째 마차
에 올랐다. 상승왕이 말에 오르자 장무기는 조민의 곁에 자리를 잡
았다. 상승왕의 호령 소리가 떨어지자 일행은 모두 페르시아 명교
를 뒤로 하면서 중원으로 발길을 향했다.

x x x

장무기 일행은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 육로를 통해 중원으로
돌아가는 꿈에 젖었다. 덜컹덜컹 마차가 요동을 칠 때마다 꿈에서
깨어난 그들은 망망대해와 같은 초원을 바라보며 환호했다.

그들이 해로를 통해 돌아가지 않고 육로를 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
었다. 만일 해로를 통해 돌아간다면 또다시 해적의 공격을 받게 되
고 그렇게 되면 적은 인원으로는 막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명교는 매우 전파가 활발했다. 페르시아에서 동쪽으로
가는 관도에는 곳곳에 분교가 눈에 띄었다. 육로를 택한 또다른 이
유 중의 하나가 거기에 있었다. 상승왕은 장무기 일행보다 반나절
정도 앞서 내달리면서 명교의 분교에 들러 이들의 중원행을 도왔다.

세 대의 마차는 대기사 성녀가 직접 제작했다. 상자 모양으로 생
겨 문은 뒤쪽에 하나가 있었고 수레 안에서 하는 말은 일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장무기가 타고 있는 마차는 신혼부부를 위하여
특별히 제작했다. 바닥에는 페르시아 담요가 깔려 있고 아담란 침
상이 분홍빛으로 신혼부부를 유혹했다.

장무기는 조민의 손을 잡을 채 사흘 밤낮을 달렸다. 그저 손목만
잡고 있어도 행복했다. 대기사 성녀는 이 년 전부터 페르시아 명교
를 떠날 준비를 매우 주도면밀하게 진행시켜왔다. 더욱이 조민과
장무기가 뜻밖에 총단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게 되자 그녀는 이
들을 위해 긴급하게 마차의 내부를 개조했다.

덕분에 조민과 장무기는 아늑한 마차 안에서 둘만의 사랑을 달콤
하게 나눌 수 있었다.

그들이 페르시아를 떠난 지 어느덧 삼 개월이 지났다. 도중에 몇
차례 도적떼를 만났지만 그때마다 장무기의 놀라운 무공으로 위기
를 넘겼다. 상승왕의 무공은 장무기의 지도를 받아 나날이 상승했
다.

관도의 저녁 노을은 매우 아름다웠다. 초원을 불태우는 은은한 저
녁의 태양빛이 하늘과 땅이 맞붙는 초원의 끝에 잠기고 있었다. 조
민은 장무기의 품에 안겨 창문에 비치는 저녁 노을을 물끄러미 바
라보고 있었다.

상승왕은 장무기와 조민으로부터 강호의 지식이나 무공에 관한 이
야기를 틈틈히 배웠다. 그는 장무기가 전수하는 무공의 구결을 이
해하지 못하면 소소에게 물어 끝까지 푸는 집념을 보였다. 장무기
는 상승왕과 소소가 매우 어울리는 한쌍 같다는 생각을 문득문득
하게 되었다.

삼 개월의 시간이 흐르자 소소와 상승왕은 자주 어울리면서 무공
이나 강호의 일을 즐겁게 얘기하곤 했다. 장무기는 두 사람을 어떻
게든 맺어주기로 마음을 굳혔다.

어느 날 저녁 장무기는 상승왕이 수련하는 '건곤대나이심법'을 보
면서 소소가 어찌하여 그에게 그 심법을 전수해 주었는지 이유를
생각했다. 건곤대나이심법을 잘못 익히면 주화입마에 들어 위험하
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휴식을 취할 때 장무기는 나뭇가지를 꺽어
땅바닥에 몇 개의 곡선을 그렸다. 곁에 있던 상승왕이 물었다.

"장 형! 이 그림은 무엇이오?"
상승왕은 소소가 교주의 자리를 물러나자 그녀를 수행하기로 마음
을 먹었다. 소소는 몇 번이고 거절했으나 대기사 성녀가 의미심장
한 미소를 띄우며 승낙했다. 처음에 상승왕은 장무기를 '교주'라고
칭호했다. 장무기는 이런 호칭이 맘에 들지 않았고 나이를 헤아려
보니 상승왕이 자신보다 많았다. 이에 그는 상승왕을 '상 형'이라
부르고 상승왕이 자신을 '장 형'으로 부르기로 제안했다.

"상 형! 마침 잘 오셨소. 소제가 어느 무공을 연공하고 있는데 아
무래도 잘못된 구결같소. 상 형은 나보다 총명하니 나에게 풀어주
면 고맙겠소."

상승왕은 장무기의 무공이 자신보다 열 배는 강하다는 사실을 알
고 있었다. 그러한 장무기가 자신에게 무공 구결을 풀어달라고 요
청하자 두 손을 흔들며 말했다.

"나는 본시 우둔하여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오."
"상 형께서는 너무 겸손하오. 예전에 나에게 한 말을 잊었소? '남
의 산에 나는 돌이라도 쓸 데가 있다'라고 하지 않았소."
"나의 무공이 장 형에 비해 한참 뒤떨어지는데 장 형이 모르는 구
결을 어찌 풀어내겠소? 그런데 잘못됐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시게
되었소?"

장무기는 조용히 자리에 앉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인체의 오장육부(迹憎俎欲)에는 십이경락(???惹)이 서로 연결
되어 있소. 손(?)의 삼음(寃遭)은 장에서 손으로 달아나고, 손의
삼양(寃暫)은 손에서 머리로 달아나고, 발(?)의 삼양은 머리에서
발로 달아나고 발의 삼음은 발에서 장으로 달아나오. 이처럼 경락
은 쉬지않고 음에서 양으로, 양에서 음으로 순환하는가 하면 겉에
서 안으로, 안에서 겉으로,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끊임없이
들고 돈다오."

장무기는 땅바닥에 십이경락도를 그리면서 상승왕에게 방위별로
설명했다. 그는 상승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자
계속 말을 이었다.

"십이경락은 정경(賑?)이라 하며 그것들은 제각기 다른 길로 운
행하오. 음경(遭?)과 양경(暫?)이 교차하는 사이는 경락을 연결
하는 통로인데 내부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소. 이것을 경별(??)
이라 하오이다. 경별과 달리 피부를 순행하되 내장으로 들지 않으
면서 사지의 끝에서 일어나 팔꿈치, 팔뚝, 발꿈치, 다리 등을 운행
하는 것이 있소. 이것은 경근(??)이라 하오. 대다수 무인들은 십
이경락을 달통하고 경근에 내공을 주입하여 자유자재의 경지에 이
를 수 있소."

그는 상승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구절구절을 이해하고 있다고 여기
고 계속 설명해 나갔다.

"공격의 능력이 서로 차이가 나는 것은 바로 내공의 깊이에 기인
하오. 십이경락과 반대되는 개념으로는 기경팔맥(????)이 있소.
팔맥은 독맥(??), 임맥(??), 충맥(沖?), 대맥(闇?), 양맥(暫
?), 음맥(遭?), 양유맥(暫提?), 음유맥(遭提?)이오. 팔맥 중에
는 임맥과 독맥이 가장 중요하오. 그래서 사람들은 십이경락과 임
독양맥을 합하여 십사경(???)이라 한다오. 십사경락에 달통하면
내공의 깊이는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심후해지며 비로소 경별과
경근을 자유자재로 드나들게 되오. 소제는 이 단계에 이르고 있는
데......."

그는 상승왕의 얼굴에 자신을 경모하는 눈빛이 역력하게 나타나자
신이 나는 듯 계속 입을 뗐다.

"그런데 요 며칠간 행공을 하다가 경락의 마디에 통증을 느꼈소이
다. 상형께서는 저의 경험을 참고하시오."

상승왕의 경락 지식은 대부분 소소에서 기원했다. 소소는 장무기
에 비해 의학 수준이 낮았다. 상승왕은 장무기로부터 경락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이제까지 몰랐던 부분을 명료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중원 의학의 최고봉인 '경락학설(?惹澤?)'에 연신 감탄을
했다. 장무기는 상승왕이 대답없이 감탄만 연발하자 또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소제가 연공하는 내공의 이름은 구양신공이라 하오이다. 매번 수
행할 때는 내공을 가득 채운 후 서서히 운행시켜야 하오. 이와 같
이 혈도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공력이 쌓이고 주화입마를 막
을 수 있게 되어."

상승왕은 여기까지의 이치에 대해서는 막힘없이 이해를 했다. 그
는 장무기가 땅바닥에 그려 놓은 혈도 중에서 아홉 개는 확실히 분
별해 낼 수 있었다.

"아문혈(???), 신정혈(佚璡?), 기문혈(瑟??), 일월혈(??
?), 대모혈(暗煐?), 귀래혈(崇糧?), 노궁혈(?循?), 중충혈(猖
沖?), 양교혈(暫??)......."
상승왕은 손가락으로 혈도의 부위를 가리키면서 중얼거렸다. 수많
은 대가 고수들이 혈도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주화입마
에 들어 폐인(?=패인)이 된 사례를 들으면서 상승왕은 연신 고개
를 끄덕였다. 장무기는 중원 제일의 의학 고수이다. 그는 호접신의
(浦搢佚?) 호청우(怖?整)의 초막에서 수많은 의학 서적을 탐독했
다.

장무기는 풍부한 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건곤대나이심법을 얻었을
때 단숨에 삼 단계까지 연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 단계를 연공
했을 때 심법의 구결에 나타난 혈도의 위치가 잘못 되었음을 발견
했다. 장무기는 주화입마의 위기를 간신히 넘기며 원인을 찾아냈
다. 장무기는 계속 입을 열었다.

"아문혈은 睹침구갑을경(?粹薯調?)禱에 이르기를 머리 뒤통수의
계곳에 위치한다고 했으나 [황제내경(????)]의 <소문 골공론
(潤汚誦囚?)>편에는 목덜미 복골 아래에 있다고 했소. [동인유혈
침구경도(??提??粹?愛)]에는 목덜미 중앙에 위치한다고 씌어
있소. 睹십사경발휘(???烏遐)禱를 보면 풍부혈(憚繞?)의 뒤에
서 속으로 닷 푼 깊이에, 睹침구취영(?粹?苧)禱에는 풍부혈의 뒤
에서 일 촌(?寸) 깊이의 목덜미 중앙에 있다고 했소. 많은 사람들
이 이렇게 저마다 제각기 다르게 주장하고 있소이다. 소제는 그동
안 연구 끝에 몸에서 닷 푼 깊이, 풍부혈에서 닷 푼 깊이가 아문혈
임을 알았소. 상 형! 내 몸 뒤에서 소제의 요유혈(癲??)을 눌러
보시오."

장무기의 말에 상승왕은 몸을 일으켜 그의 요유혈을 세차게 눌렀
다. 장무기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상 형! 이제는 손을 놓아도 되오. 아문혈은 확실히 몸에서 닷 푼
깊이, 풍부혈의 뒤로부터 닷 푼 거리에 있소."
"장 형! 축하하오이다."
"아니오. 나머지 여덟 개의 혈도를 찾는 데에도 상형의 힘을 빌리
까 하오이다."

상승왕은 장무기의 말에 '언제든지 필요하면 도움을 주겠소'하면
서 그가 계속 얘기하기를 기다렸다. 장무기는 구양진경에 나타난
아홉 개의 혈도를 말하기 시작했다.

"기문혈은 睹침구갑을경禱에 두 번쩨 갈비뼈 끝, 불용혈(寓癤?)
의 옆을 일 촌 닷 푼의 거리에 있으며, 睹동인유혈침구도경禱에는
불용혈의 옆으로 일 촌 닷 푼의 거리, 직유의 첫번째 갈비뼈 끝에,
睹침구취영禱에는 직유법의 두번째 갈비뼈 끝, 불용혈에서 일 촌
닷 푼의 거리에, 睹침방육집(?瘟俎凄)禱에는 젖가슴 아래 두번째
갈비뼈 끝에, 睹침구봉원(?粹??)禱은 젖가슴에서 안쪽으로 일
촌 닷 푼 깊이가 유근혈이 있는 곳이라 했소. 기문혈은 인체대혈인
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잘못 알고 있소. 불용혈은 배꼽 위로
이 촌(?寸)이니 그곳에서 옆으로 일 촌 닷 푼의 거리에 기문혈이
위치하오. 상 형께서 소제의 기해혈을 누르면 확인할 수 있소이다."

상승왕은 기해혈을 눌러 보라는 장무기의 말에 깜짝 놀랐다. 자칫
잘못 누르면 기가 폐쇄되면서 장무기가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
다. 상승왕이 기해혈을 지그시 누르자 장무기는 빙그레 웃으며 고
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이렇게 하나 하나 혈도의 위치를 파악해 가면서 운공했
다. 대기서 성녀는 멀리 이 광경을 보다가 흥미가 일어났는지 이들
의 곁으로 다가왔다. 대기사 성녀가 입을 떼려는 찰나에 저녁 식사
가 준비되었다는 소소의 외침이 들려왔다. 장무기는 자리를 털면서
상승왕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상 형! 혈도의 위치를 교정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소이다."
"무슨 말씀이오. 우둔한 이 몸이 무슨 도움을 주었다고."
이들의 곁으로 다가온 소소가 상승왕에게 소리쳤다.
"상승왕! 얼른 장 대협께 고맙다고 인사를 올리지 않고 무얼해요!
경락의 얘기를 흘리며 심오한 내공의 도리를 깨우쳐 주었잖아요!"

상승왕은 소소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듯 얼른 포권 자세를
취하면서 장무기에게 말했다.

"장 형의 가르침에 감사를 드리오."
장무기는 겸연쩍어 상승왕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소소를 힐끗 바라
보았다. 해맑은 웃음에 가지런한 하얀 이빨이 더욱 빛나 보였다.
장무기는 그윽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소의 눈길을 외면했다.

탁자에 앉은 장무기는 조민이 자리에 없자 궁금한 듯 소소에게 물
었다.

"민 누이는 어찌 보이지 않소?"
"장 대협은 신의(佚?) 호청우의 제자이니 어디 한번 알아맞추어
보시게!"

금화파파가 장무기의 말을 받았다. 장무기는 영문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민 누이에게 병이 들었나요?"
장무기의 어리숙한 모습에 금화파파는 빙그레 웃음을 흘렸다. 그
는 조민이 아프다는 생각에 밥술을 뜨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멈추게!"
금화파파는 장무기의 발걸음을 제지하고 탁자에 놓인 과일을 그에
게 건네면서 말했다.

"부인께 가져다 드리게!"
장무기는 금화파파가 건네는 과일을 받아들었다. 매실같기도 한데
풍기는 냄새에 신맛이 배어나왔다. 금화파파는 장무기가 여전히 멍
청한 모습으로 서 있자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장 대협! 기뻐하시게, 부인께 상서로운 기운이 임했다네. 그곳에
바보처럼 서 있지 말고 얼른 가보게."

장무기는 조민의 몸에 상서로운 기운이 임했다는 금화파파의 말에
일갈의 사자후를 터뜨리면서 마차로 달려갔다. 소소도 조민이 아이
를 가졌다는 금화파파의 말에 기쁨을 참지 못하고 장무기를 따라
나섰다. 금화파파는 얼른 일어나 소소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어디를 그리 급히 가려느냐? 너는 천천히 가도 늦지 않다."
소소는 금화파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조
민과 장무기에게 둘만의 시간을 주려는 금화파파의 깊은 뜻을 알았
기 때문이다. 상승왕도 즐겁게 미소를 지으며 연거푸 술잔을 비웠
다.

소소도 연달아 몇 잔을 비웠다. 그녀의 두 볼은 잘 익은 복숭아
열매같이 발그스레해져 마치 선녀가 하강한 듯이 보였다. 상승왕은
바보처럼 소소에게 눈길을 주지 못하고 술만 연거푸 비웠다. 곁에
서 이들을 지켜보던 금화파파는 미묘한 웃음을 간간이 흘려보냈다.
얼마 후 장무기가 돌아왔다. 소소가 장무기에게 말했다.

"공자! 이번에는 제가 가보겠어요."
소소는 말을 마치자 장무기의 대답도 듣지 않고 조민에게 향했다.
장무기는 상승왕이 건네주는 술잔을 비우며 자신의 부모를 생각했
다. 장취산과 은소소는 장무기가 어렸을 때 무림인들의 핍박에 자
결을 했다. 그 생각이 나자 장무기는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금화파파는 조민이 임신을 하게 되자 그녀의 안위를 생각하여 한
곳에 머물기로 했다. 그녀는 눈물에 젖어있는 장무기에게 말을 건
넸다.

"장 공자! 너무 걱정하지 말게. 이곳에서 십여 일 정도만 가게 되
면 인도의 정반국(進?髓)에 도착하네 그곳은 경치가 수려하고 인
심이 좋아 한동안 머물고 간 수가 있다네. 그곳에서 부인이 출산하
면 그때 중원으로 떠나는 것이 어떻겠는가?"
"장 형! 염려 놓으시오. 내가 하루 먼저 떠나 그곳에 거처를 마련
하겠소."

장무기는 두 사람의 진솔한 우정에 감사를 드리고 연거푸 석 잔의
예주(籍僭)를 들이켰다.

세월은 화살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장무기 일행이 정반국에 머문
지 벌써 삼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장무기가 중원을 떠난 지는 이
미 오 년이 흘렀다. 장무기 일행은 드디어 행장을 꾸지고 중원을
향해 마차를 몰았다. 수십 일이 지난 어느 날 장무기 일행은 아담
하고 아늑한 녹류산장에 도착했다. 이곳은 장무기와 조민이 처음
만났던 그곳이었다. 이미 장원은 불에 타 없어지고 무너져 처연하
게 보이는 벽만이 쓸쓸히 이들을 맞이했다.

장무기는 고향이 그리웠다. 멀리 중원이 위치한 방향을 바라보던
장무기는 아이의 앙징스런 말소리에 눈길을 돌렸다.

"소소 이모! 이곳은 어디야?"
장무기가 고개를 돌리니 만으로 두 살이 된 깜찍한 계집아이가 소
소의 품에 안겨 방긋 웃고 있었다.

"귀여운 우리 아가야! 이곳은 말이다. 음...... 네 엄마가 어느
영웅에게 무릎을 꿇은 곳이란다."

조민이 곁에 다가와 장무기의 말에 입을 삐쭉이며 말햇다.
"아가야! 네 아빠 말은 다 거짓이란다. 엄마가 옛날 이곳에서 아
주 못된 무뢰한을 잡았단다. 저기 보이는 땅 속에 뇌옥이 있는데
엄마가 그곳에 무뢰한을 가두었단다."

조민은 아이를 하나 낳았는데도 처녀 시절과 달라진 데가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기상천외한 대꾸에 상승왕과 금화파파는 앙천대소
를 터뜨렸다.

조민은 소소로부터 아이를 건네받았다. 계집아이는 조민을 꼭 빼
닮았다. 두 눈에 드러나는 총기와 목소리는 조민을 그대로 보는 것
같았다. 칠 푼 정도 조민을 닮았다면 장무기의 자취는 삼 푼에 불
과했다. 계집아이는 조민의 말에 눈동자를 죄우로 굴리면서 못 알
아듣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장무기가 웃으며 말했다.

"민 누이! 아이에게 아직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는데 지금 퍼뜩 생
각이 났어. 내가 말하면 웃지 말아!"
"이름을 지었다면 얼른 말하세요. 우물쭈물하다가는 그 이름도 잊
어버리겠어요."
"나는 녹민(??)이라 하고 싶은데 어떻소?"
"너무 흔한 이름이에요. 핏!"
그녀는 피식 웃으며 장무기를 흘겨 보았다. 장무기는 조민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자 그녀에게 전심전력으로 설명하기 시작
했다. 조민은 슬그머니 그런 장무기의 모습에 웃음이 나는지 '공자
의 뜻대로 하세요. 소첩은 그냥 따르겠어요'라고 하면서 웃기 시작
했다.

계집아이도 방글방글 웃으며 말했다.
"아빠가 지어준 이름이 듣기에 좋아요. 앞으로 '귀여운 우리 아가
야'라고 하지 말아요."

금화파파는 앙징스런 녹민의 말에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아이고
귀여운 우리 아가야! 다음부터는 귀여운 우리 아가야 라고 하지 않
으마'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총명한 녹민의 모습에 즐거운 듯 흠뻑 웃음을 지었다.
녹민은 그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 보면서 조민에게 말했다.

"엄마! 무뢰한을 가두었다는 뇌옥을 구경하고 싶어요."
조민은 녹민의 말에 옛일을 회상하는 듯 먼 하늘을 응시했다. 그
녀는 녹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방은 이미 무너져 자취를 찾을 수 없어도 뇌옥은 강판으로 만들
었으니까 아직도 건재하겠지'

조민은 녹민을 안아 들고 그때의 뇌옥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떼었
다. 장무기는 바로 그 뒤를 쫓았다. 이들이 뇌옥의 근처에 다다랐
을 때 갑자기 '콰쾅'하는 소리와 함께 뇌옥의 강판 덮개가 벌어지
면서 검은 그림자가 위로 솟구쳤다. 검은 그림자는 곧바로 조민을
향해 달려들면서 두 손을 갈고리처럼 구부리고 녹민을 낚아채려 했
다.

장무기는 검은 그림자가 솟구치자 '앗! 위험하다'라고 중얼거리면
서 조민의 앞으로 달려갔다. 검은 그림자는 양손을 교차하면서 장
풍을 쏟아냈다. 장무기는 내공을 최대한 끌어올려 검은 그림자의
장풍을 맞받아쳤다. 검은 그림자의 장풍은 냉랭하면서도 뜨거운 열
기가 일어났다. 검은 그림자는 장무기가 장풍으로 맞받아치자 '이
크! 상황이 안좋구나'라고 외치면서 오히려 장무기의 장풍을 이용
하여 십여 장 높이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멀리 금화파파, 상승왕,
소소가 달려오는 모습이 눈에 띄자 몸을 돌려 멀리 달아나기 시작
했다. 장무기는 검은 그림자의 날렵한 경공신법에 혀를 내둘렀다.
천하에 경공으로 이름을 날리던 청익복왕(????) 위일소(??尹)
에 버금가는 경공술 이었다.

검은 그림자는 장풍이 스친 풀밭은 이미 새까맣게 변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식은땀을 훔치며 멀리 달아나는 검은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린 녹민이 조민에게 물었다.

"엄마! 엄마가 가두었다는 무뢰한이 저기 달아난 검은 그림자야?"
"그래, 아가야! 그런데 엄마가 만든 뇌옥이 고장이 났는가 보다.
다음에는 반드시 무뢰한을 다시 잡아다가 가두어 놓고야 말겠다."

조민은 녹민의 물음에 대답을 하면서 검은 그림자가 아이를 노리
고 달려든 광경이 퍼뜩 떠올랐다. 만일 장무기가 앞으로 몸을 던지
지 않았다면 자신과 녹민은 어찌 되었을까? 등골이 오싹해진 조민
은 장무기에게 얼굴을 돌렸다. 장무기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조민
을 응시했다. 소소가 끼어들면서 말했다.

"공자! 무사하지요?"
장무기는 그녀의 물음(?=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검은 그림자의
무공을 떠올렸다. 처음 접해 본 그자의 무공이 보통이 아님을 단번
에 느꼈다. 장무기는 구양신공을 육성 끌어올려 장풍을 날렸는데
검은 그림자는 오히려 그의 장풍을 타고 멀리 달아나지 않았는가?
더욱이 자신이 녹류산장에 올 것을 미리 알고 매복을 했다.

장무기는 비록 육 할의 공력 밖에는 사용하지 않았으나 그 위력을
받아낼 수 있는 무림인은 사실 드물었다. 장무기는 무공의 내력을
알아내려 곰곰이 생각했으나 전연 알 수가 없었다. 상승왕은 장무
기의 말을 들으면서 뇌옥의 안을 살피다가 깜짝 놀라 외쳤다.

"바닥에 사람이 있다."
상승왕은 말을 마치고 몸을 날려 바닥으로 뛰어 내려가려 했다.
조민이 이를 보고 '상 대형! 안 돼요!'라고 소리쳤다. 조민은 상승
왕이 걸음을 멈추자 두어 걸음 달려가 바닥에서 벽돌 하나를 더듬
어 찾아내 힘차게 뽑아냈다. '끼기깅' 소리가 나면서 뇌옥의 바닥
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장무기가 기이하다는 듯 조민에게 말했다.

"민 누이! 그때는 나에게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다고 했잖아?"
조민은 장무기의 물음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조민
은 사실 장무기와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아니? 은리(肇涅)야!"
금화파파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장무기는 사태
를 파악하고 조민과 녹민에게 말했다.

"민 누이! 아이를 데리고 마차로 돌아가 있어."
조민이 녹민을 안고 돌아서자 장무기는 바닥에 누워있는 여자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이글거리는 태양볕이 쏟아지고 있는데 죽었는
지 요지부동이었다. 얼굴은 온통 핏자국으로 범벅이 되어 었었다.
바로 장무기의 사촌누이이자 금화파파의 제자인 은리 낭자였다.

장무기는 은리의 손목을 들어 맥을 짚었다. 장무기는 처연한 표정
으로 금화파파를 향하여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숨이 넘어가고
있어서 구할 수가 없다는 장무기의 말에 금화파파는 고개를 돌려
울먹였다.

장무기는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손바닥을 은리의 아랫배에 가만히
대고 구양신공을 그녀에게 주입시켰다. 은리는 요동조차 하지 않았
다. 장무기는 더욱 내공을 끌어올려 은리의 신유혈(壹??)에 기를
쏟아냈다. 금화파파도 장무기의 뜻을 알아차리고 가부좌를 틀었다.
두 손을 들어 장무기의 등에 내력을 쏟기 시작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흐르자 은리는 가벼운 신음 소리를 내면서
살며시 눈을 떴다. 장무기가 급히 소리쳤다.

"은 누이! 나야 나, 장무기. 금화파파 선배님과 소소 낭자도 이곳
에 있어."
은리는 겨우 알아보는 듯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리버니! 이번에는...... 죽는 거지요. 냉면인은...... 가짜이
고...... 그자의...... 진면목은...... 아마도......."

은리는 더듬더듬 이곳까지 말하다 기력이 쇠잔했는지 고개를 옆으
로 돌리며 숨을 거두었다. 장무기는 내력을 더욱 그녀의 아랫배에
쏟으며 절규했다.

"은 누이! 은 누이! 그가 누구야? 그가 누구인지 말해. 그래야 복
수를 할 수 있단 말이야."

은리의 시체는 점점 온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금화파파는 손을 거
두고 장무기를 일으켜 세웠다.

"장 공자!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네. 흉수를 찾는 일이 더 급하다
네."

장무기는 통곡을 멈추지 않고 은리의 일생이 너무나 기구함에 오
열했다.

'아! 내가 두 차례나 그녀의 시체를 묻어주어야 하다니...... 어
찌 이리도 기구한 운명이란 말이냐......'

조민은 장무기의 울음이 그치지를 아니하자 녹민을 소소에게 맡기
고 장무기에게 다가왔다. 은리의 얼굴에는 그 엣날 빙화도에서 주
지약으로부터 당한 십여 줄의 상흔(轅轄)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그녀는 애절한 마음으로 은리의 두 눈을 감기우고 장무기를 부축해
일으켰다.

상승왕은 이미 주위의 하인들을 불러모아 무덤을 파도록 지시를
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은리의 시체를 바닥에 뉘이고 자신의 외투
로 그녀의 몸을 덮었다.

장무기는 손으로 그녀의 주검에 흙을 덮으며 오열했다. 이날 저녁
은리의 매장을 마친 장무기 일행은 날이 밝는 대로 떠나기로 했다.
조민은 주위에 사는 두 사람을 불러 은자를 넉넉히 쥐어주고 은리
의 무덤을 잘 보살펴 주도록 당부했다.

마차에 오른 장무기는 조민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민 누이! 누이는 총명하니 검은 그림자가 누구인지 알아맞출 수
있을 거야. 도대체 누구일까?"

조민은 총기가 넘쳐 흐르는 두 눈을 말똥말똥 뜨면서 아무런 대답
도 하지 않았다. 장무기는 다급한 듯 재촉했다.

"민 누이! 누구라도 의심이 가는 사람이 있다면 알려 줘."
조민은 장무기의 재촉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냉랭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주, 지,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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