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01

3학년2반 | 2022.03.01 07:41:32 댓글: 0 조회: 565 추천: 0
분류엽기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2050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1 권


----- 머리말

이 소설<대륙의 영웅(大陸의 英雄)>은 현존의 중국 최대
작가로 알려진 김용(金庸)의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1
부를 변역한 것이다.
[대륙의 영웅]은 원(元)나라 말기에서 명(明)나라 건국까
지의 혼란기를 다룬 소설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 나오는 인
물들은 후에 명나라를 세우는 주역들로서 중원과 사막을 가
로지르며, 몽고와 서역(西域) 등을 넘나드는 웅장한 스케일
을 보여, 감히 다른 소설에서 그 유래를 찾기가 어렵다. 장
무기가 나약한 몸으로 태사부 장삼봉과 함께 소림사로 가던
도중 배에서 알게 된 상우춘도 주원장을 도와 명나라를 세
우는 데 공이 큰 명장이다.
김용의 소설이 널리 애독되는 까닭은 그의 소설 속에 실존
인물과 가공 인물들이 두루 섞여 나오되, 한결같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는 점이 아닌가 한다.
이는 김용이 뛰어난 작가이기도 하지만, 노자와 장자의 철
학은 물론, 불경과 유가의 경전에도 통달한 학구파라는 데
서도 연유하는 탓이라고 본다.
김용의 원명은 사용량(査鏞良), 1924년 중국 절강성 해령
(海寧)에서 태어났다.
상해 동오법과대학을 나온 후, 미국 버클리대학과 일본 교
토대학에서 교환교수로 강의를 받으며, 현재는 홍콩에서 발
간되는 월간 <명보(明報)>의 사장 겸 주필을 맡고 있다.
그의 소설의 또 하나 특징은 역사소설이면서 실존 인물과
사실에 충실을 기한다는점과, 당시(唐詩)와 송사(宋詞) 등
이 군데군데 인용되어 작품의 품격을 한층 드높여 주고 있
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김용의 12부작 중 하나인 <의천도룡기>를 번역
했다는 것은 앞에서도 밝혔거니와. <사조영웅전>과 <신조협
려>는 이미 국내에서 선을 보인 바 있으며, 그 후편에 해당
하는 이 <대륙의 영웅>은 그 가운데에서 백미편이라는 정평
이 나 있다.
이 소설은 한번 손에 쥐면 마치 전기에 감전되듯 읽는이
를 매료시키고 몰아의 경지로 몰고가는 흥미와 감동을 주기
에, 감히 필독을 권하는 바이다.




제 1장 묘령(妙齡)의 낭자와 곤륜삼성(崑崙三聖)


화창한 봄날

해마다 맞는 한식(寒食)

배꽃의 계절이어라.

흰 비단결처럼 활짝 핀 저 꽃은 진정 향기롭거니와

잎새 무성함은 백설과 같도다.

조용한 밤.

차가운 달빛에 젖어

그 찬란한 빛을 뿌리니

속세의 천상이 따로 있을소냐.


그 수려한 자태

고결한 기질은 가히 천자이어라.

많은 꽃 속에 섞여

더욱 돋보이는 우아함이여

그 드높은 기상 어디에다 견주랴.


이것은 남송말년 무학명가인 구처기(丘處耭)가 지은 무속념(無
俗念)의 한 귀절이다.

구처기의 도호는 장춘자(張春子)라 하며, 전진칠자(全眞七子)중
의 한 사람이며 전진교에서 가장 빼어난 인물 중의 하나였다.

그가 지은 이 사는 배꽃을 읊조린 것 같지만 사실은 흰옷을 입
은 미모의 소녀를 찬미한 것이다.

<고결한 기질>, <만화속에 섞여 더욱 돋보이는 우아함>이라고
그가 찬송한 절세미인은 바로 고묘파(古墓派)의 제자인 소용녀
(小龍女)였다.

그녀는 늘 흰 옷을 즐겨 입었으며 고결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장춘자 구처기는 종남산에서 그녀와 이웃해 살면서 단 한 번
보고 이 사(詞)를 지은 것이다.

구처기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고, 소용녀도 이미 신주대협
양과(揚過)의 아내가 되었다. 한데, 하남 소실산으로 뻗은 산길
에서 한 소녀가 이 사를 읊조리고 있지 않은가.

소녀의 나이는 줄잡아 열 아홉, 담황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나귀를 타고 천천히 산길을 따라 오르며 깊은 생각에 잠
겼다.

'용언니 같은 인물이어야만이 그분과 짝지을 자격이 있지.....'

그녀가 말한 '그'는 바로 신주대협 양과였다.

그녀는 고삐도 잡지 않은 채 나귀가 이끄는 대로 느릿느릿 산길
을 거슬러 올라갔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중얼거리듯 나직이 읊조렸다.

"만남의 기쁨은 짧고 헤어짐의 고통은 길어라. 누가 알랴, 여인
의 일편단심을. 불러도 님은 대답없고 구름 저 만리 겹겹 산중
을 헤매며, 외로운 그림자 누구에게 향하는 걸까?"

그녀의 허리에는 단검이 걸려 있고, 여독이 가시지 않은것으로
미루어 먼 길을 온 게 분명했다.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꽃다운 나이건만 그녀의 얼굴엔
우수가 드리워져 있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이 소녀의 성은 곽(郭), 이름은 외자 양(襄)으로서 바로 대협
곽정(郭靖)과 여협 황용(黃蓉)의 차녀였다. 그리고 외호는 소동
사(小東邪).

그녀가 홀로 나귀를 타고 심산대천을 유랑하는 것은 울적한 심
정을 털어 버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울적함은 날이 갈수록 더
짙어질 뿐이었다.

하남 소실산은 산세가 가파르지만 넓은 돌계단이 구불구불 이
어져 있다. 그 돌계단의 공정은 엄청난 것으로서 당조때 고종이
소림사로 어림(御臨)하기 위해 일부러 닦은 길이며, 그 길이가
팔리(八里)에 이르렀다.

곽양은 나귀를 타고 계속 울창한 숲길을 올랐다.

맞은편에서 떨어져내리는 폭포는 일대장관을 이루고, 멀리는 구
름에 어렴풋이 가려진 산봉우리들이 병풍을 이루고 있었다. 산
길을 따라 모퉁이를 꺾어 돌자 멀리 황색 담장에 싸인 커다란 사
원이 시야에 들어왔다.

곽양은 끝없이 이어진 사원의 지붕을 바라보며 잠시 넋을 잃다
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소림사는 천하 무학의 발원지인데, 어째서 화산에서 두 번 열
린 논검대회(論劍大會)에서 오절중에 소림사의 고승이 없었을까?
자신이 없어서 행여나 명성에 손상이 갈까 봐 참석을 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무공이 비록 높다 하지만 명리를 다투기 싫어서
였을까?"

그녀는 나귀에서 내려 천천히 소림사를 향해 걸음을 옮겨 갔다.

하늘을 뒤덮을 듯 울창한 숲길, 그 사이 곳곳에 돌비석이 세워
져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돌비석에 새겨진 글은 오랜 세
월 풍파에 시달려 거의 흐릿하게 마멸돼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곽양의 마음에 새로운 감회가 어렸다.

'돌에 새긴 글도 오랜 세월이 흐르면 지워지기 마련인데, 어찌
내 가슴 속에 새겨진 것은 날이 갈수록 더욱 뚜렷해지는 걸까?'

문득, 커다란 석패에 당태종이 소림사 승려들에게 직접 시사한
어묵(御墨)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 가허소림사승입공평란(嘉許小林寺僧立功平亂) ------

비문에는 당태종이 당시 진왕(秦王)의 신분으로 왕세충(王世忠)
을 토벌할 때 소림 승려들이 종군하여 공을 세운 업적이 수록돼
있었다.

당시 이름이 알려진 고승은 모두 열 세 명이었는데, 단지 운종
만이 대장군으로 봉해졌고 나머지 열 두명은 벼슬을 원치 않아
당태종이 그들 각자에게 자라가사(紫羅袈裟) 한 벌씩을 시사했다
고 한다.

곽양은 속으로 생각했다.

'수당때에 소림사의 무공은 이미 천하에 그 명성을 떨쳤으니,
그후 수백 년이 흐른 지금은 더욱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을 것
이다.'

와호장용(臥虎藏龍)의 소림사!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속세를 등진 채 이 속에서 불학과 무공을
연마하고 있을까!

곽양은 소림사에 대해 새롭게 경의를 느꼈다.

그녀는 양과,소용녀 부부와 화산(華山)에서 헤어진 후, 삼년이
넘도록 그들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곽양은 그들이 그리워졌다. 이번에 강호를 돌아보고 오겠다는
구실로 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집을 떠났지만, 사실은 양과의 소
식을 알아보는게 목적이 었다. 그들 부부와 꼭 대면을 하지 않아
도 좋았다. 다만 양과의 소식을 얻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
다.

이날, 곽양은 하남으로 들어서 문득, 소림사의 무색선사(無色禪
師)가 양과와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는 생각이 되살아났다. 자
기가 열 여섯 번째 생일을 맞았을 때, 무색선사가 양과의 체면
을 생각해 사람을 시켜 한 가지 선물을 보내왔었다. 비록 직접
무색선사를 만나본 적은 없지만, 혹시 양과의 행적을 알고 있을
것 같아 이렇게 소림사를 찾아온 것이다.

그녀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쇠사슬을 질질 끄는
소리에 이어 낭랑한 염불소리가 들려왔다.

".......무량백천만억대중지중(無量百千萬億大衆之中) 설승묘
가타왈(說勝妙伽他曰), 유애고생우(由愛故生憂), 우애고생포(由
愛故生怖) 약이어애자(若離於愛者) 무우역무포(無憂亦無
怖)......."

곽양은 그 소리에 넋 나간사람처럼 멍해지며 중얼거렸다.

'사랑함으로써 근심이 생기고(由愛故生憂), 사랑함으로써 두려
움이 생기니(由愛故生怖), 만약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若離
於愛者) 근심도 두려움도 없으리(無憂亦無怖).......'

사슬 끄는 소리와 더불어 염불소리가 차츰 멀어져 갔다.

곽양은 아랫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떻게 해야지만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지만
근심과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지 그에게 물어봐야겠다!'

그녀는 나귀를 아무렇게나 나무에 묶고 뒤쫓아갔다.

숲속 뒤편에 산 위로 뻗친 작은 오솔길이 있는데 한 스님이 작
대기 양쪽에 커다란 통을 대롱대롱 매달아 짊어지고 천천히 걸어
가고 있었다.

급히 뒤쫓아간 곽양은 절로 눈이 휘둥그래졌다. 작대기 양쪽에
매달려 있는 통은 보통 물통보다 두 배 가량 더 컸다. 뿐만 아
니라 스님의 목과 손발에는 굵은 사슬이 감겨져 있어 걸음을 옮
길 때마다 요란한 소리를 냈다. 철통의 무게만 하더라도 최소한
삼백근은 넘을것이다. 게다가 물이 가득 찼으니 실로 엄청난 무
게였다.

곽양은 얼른 소리쳤다.

"대화상(大和尙), 여쭈어 볼 말이 있으니 잠깐만 기다려 주세
요."

스님은 고개를 돌렸다.

순간, 두 사람은 모두 멍해지고 말았다. 뜻밖에도 그 스님은 각
원(覺遠)이 아닌가!

삼 년 전에 두 사람은 화산 절정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각원은 비록 성격은 괴팍하지만 공력이 심후하여 당금무림 중
어느 고수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곽양은
반색을 했다.

"이제 보니 각원대사였군요. 그런데 왜 이 모양으로 변했죠?"

각원은 소리없이 웃으며 합장을 했다. 한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대꾸없이 이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겨가는 게 아닌가.

곽양은 약간 당황해 하며 소리쳤다.

"각원대사, 저를 모르겠어요? 저는 곽양이예요!"

각원은 고개를 돌려 빙긋이 웃으며 턱을 끄덕여 보였으나 걸음
을 멈추지는 않았다.

곽양은 다시 소리쳤다.

"누가 이렇게 대사를 쇠사슬로 묶어 학대를 하는 거죠?"

각원대사는 등 뒤를 향해 손을 흔들며 더 이상 묻지 말라고 했
다.

곽양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해졌다. 게다가 무시를 당한
듯한 느낌에 오기가 뻗쳤다. 그녀는 각원대사의 앞을 가로막고
따지기 위해 재빨리 쫓아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각원대사는 온몸이 쇠사슬로 감겨져 있
고, 또한 육중한 철통을 짊어진 상황이거늘 아무리 곽양이 소리
를 내어 뛰어가도 그를 앞지를 수가 없었다.

곽양은 더욱 오기가 뻗쳤다.

이번에는 가전비학인 경신술을 전개해 허공을 가로지르며 몸을
날렸다. 아쉬운 대로 우선 철통이라도 낚아잡을 생각이었다. 그
러나 결과는 매 마찬가지. 곧 손에 잡힐 것 같으면서도 시종 석
자 남짓의 간격이 떨어졌다. 남달리 자존심이 강한 곽양은 아랫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대화상, 꼭 붙잡고야 말겠어요!"

각원대사는 계속 일정한 속도로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사슬
에서 나는 금속성과 더불어 그는 오솔길을 따라 뒷산 쪽으로 향
했다.

곽양은 계속 경신술을 쓰며 뒤쫓아가다가 제풀에 지쳐 숨을 씩
씩 몰아쉬었다. 이제 그녀는 오기보다도 감탄이 앞섰다.

"아버님과 어머님이 화산에서는 이 대화상의 무공이 비범하다고
말씀하신 것을 당시엔 별로 믿지 않았는데, 오늘 직접 대해 보니
과연사실이군...."

곽양은 그를 붙잡겠다는 생각을 포기한 채 여유를 갖고 뒤 따랐
다.

얼마 후, 각원대사는 작은 집 안으로 들어가 철통의 물을 모두
뜨락에 있는 우물 속에다 부었다.

곽양은 어리둥절해져 소리쳤다.

"대화상, 혹시 미친 게 아니예요? 왜 애써 물을 길어 우물에다
붓죠?"

각원대사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두를 뿐이었다.

곽양은 문득 느끼는 바가 있었다.

"음....., 이제보니 고매한 무공을 연마하는 중이군요?"

각원대사는 대꾸없이 고개만 또 내둘렀다.

곽양은 은근히 화가 났다.

"조금 전에 분명히 염불을 하는 걸 들었는데, 벙어리가 아니면
서 왜 말을 하지 않는 거죠?"

각원대사는 합장을 하며 미안해 하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철통
을 짊어지고 산을 내려갔다.

곽양은 얼른 우물로 달려갔다. 우물은 바닥이 환히 보일정도로
맑았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별다른 것은 없었다. 그녀는 멀어져
가는 각원대사의 뒷모습을 멀건히 바라보며 의혹만 짙어갔다.
뒤쫓아간들 소용없다는 것을 안 곽양은 아예 우물 둘레의 난간에
걸터앉아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소실산이 하늘을 찌르듯 우뚝 솟아 있고, 그 주위에 면면히 이
어진 붕우리가 엷은 안개에 싸여 병풍을 이루고 있었다. 이제는
광활한 소림사가 발 아래로 내려다 보였다. 그곳으로부터 종소리
가 바람결에 실려 은은하게 들려오니, 실로 세속을 벗어난 아늑
함이었다.

곽양은 턱을 괴고 혼자 생각에 잠겼다.

'그 대화상의 제자는 어디에 있을까? 대화상이 도무지 입을 열
지 않으니 그를 찾아 내 물어 봐야지.....'

그녀는 각원대사의 나이 어린 제자인 장군보(張君寶)를 찾아 연
유를 물을 생각으로 천천히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얼마 동안 걸
어 내려가자 홀연 사슬이끌리는 소리가 들리며 각원대사가 다시
물을 길어서 올라오는 모습이 멀리 보였다.

곽양은 얼른 나무 뒤로 몸을 숨기며 중얼거렸다.

'대관절 무슨 꿍꿍이 속인지 몰래 지켜봐야지.....'

사슬소리가 가까이 들려옴에 따라 물통을 짊어진 각원대사가 손
에 책을 들고 열심히 섕조리는 모습이 시야에 뚜렷이 들어왔다.

곽양은 그가 자기 곁에까지 걸어노자 난데없이 뛰쳐나가 소리쳤
다.

"대화상, 무슨 책을 읽죠?"

각원대사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고 말았다.

"아니?!..... 낭자가....."

곽양은 이제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이젠 벙어리 흉내를 내지 못하겠죠? 왜 말을 하지 않는거죠?"

각원은 다소 두려운 표정으로 좌우를 두리번 살피며 연신 손을
흔들었다.

곽양은 눈쌀을 가볍게 찌푸렸다.

"뭘 두려워하는 겨예요?"

각원대사가 뭐라고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갑자기 숲속에서 키
가 훤칠하고 작달막한 두 회의(灰衣) 스님이 걸어나왔다. 그 훤
칠한 스님이 대뜸 호퉁을 쳤다.

"각원, 계법(戒法)을 어기고 스스로 입을 여는 것도 용서못할
일인데, 더구나 젊은 여시주(女施主)와 대화를 하다니! 여서 우
리를 따라 계율당(戒律堂) 수좌(首座)에게 가자!"

각원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변명도 못하고 두 스
님의 뒤를 따랐다.

이것을 본 곽양은 크게 노했다.

"세상에 말을 못하게 하는 엉터리 계율이 어디 있어여! 나는 저
대사와 잘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말을 걸었는데, 당신네들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예요?"

훤칠한 스님은 이내 눈을 부라렸다.

"분사는 천 년 동안 여시주의 출입을 금해 왔소. 낭자는 더 이
상 말썽을 부리지 말고 속히 하산하도록 하시오!"

곽양은 더욱 화가 나서 대꾸했다.

"여자가 어쨌다는 거예요? 여자는 사람이 아닌가요? 그리고 무
엇 때문에 이 각원대사를 사슬로 묶고 말도 못하게 괴롭히는 거
예요?"

스님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설령 황제라 해도 본사의 일을 간섭하지 못하는데 낭자가 무엇
때문에 나서는 거요?"

곽양은 성난 음성으로 따졌다.

"이 각원대사는 충짓하고 선량한 사람이예요! 당신네들은 그가
착하다고 해서 멋대로 괴롭혀도 되는 거예요? 흥! 천명선사(天鳴
禪師)는 어디에 있죠? 그리고 무색화상과 무상화상(無相和尙)은
어디에 있어요? 그들에게 직접 따지겠으니 어서 불러오세요!"

두 스님은 모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놀랐다.

천명선사는 소림사의 장문인(掌門人)이고, 무색선사는 나한당
(羅漢堂)의 수좌, 무상선사는 달마당(達摩堂)의 수좌로서, 모두
무림 천하에 그 법명이 널리 알려진 덕망 높은 고승들이었다. 본
사내의 승려들은 항상 장문인, 나한당 소좌, 달마당 소좌로만 칭
할 뿐, 감히 직접 법명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런데, 한낱 젊
은 낭자가 산에 나타나 멋대로 이름을 부르다니,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두 스님은 모두 계율당 수좌의 제자로서 스승님의 명에 따라 각
원을 감시하고 있던 중이었다.

곽양의 무례한 말에 훤칠한 스님이 대뜸 호통을 쳤다.

"여시주, 다시 불문성지(佛門聖地)를 욕되게 하는 언동을 하면
용서치 않을 것이오!"

곽양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그런다고 해서 내가 겁먹을 줄 아나요? 어서 각원대사의 몸에
묶은 사슬을 풀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당장 천명 노화상을 찾
아가 따지겠어요!"

키 작은 스님은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그녀의 허리에 단
검이 있는 것을 보고 홀연 입을 열었다.

"여시주와 공연히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 무기를 버리고
어서 하산을 하시오!"

곽양은 순순히 단검을 풀어 두 손으로 받쳐든 채 냉소를 날렸
다.

"좋아요, 원한다면 분부에 따르죠."

어릴 적에 소림사의 불문에 입적한 키 작은 스님은 윗 사람들로
부터 소림사가 천하무학의 발원지이며, 제 아무리 명망이 높거나
무공이 고매한 무림 고수라 할지라도 감히 무기를 갖고 입산하지
못한다는 말을 누누히 들어 왔었다. 이 젊은 낭자는 비록 사문
(寺門) 안으로 걸음을 들여놓지는 않았지만, 소림사 경내에서 검
을 휴대하고 있자 따끔하게 일침을 놓은 것이다.

그녀가 순순히 검을 풀자 겁을 먹은 걸로 생각한 스님은, 느긋
하게 손을 내밀어 검을 받으려 했다.

그런데----------

그의 손이 검집에 닿는 순간, 갑자기 손목에 심한 충격을 느끼
며 한 갈래의 힘줄기가 단검으로부터 뻗쳐 나왔다. 그러자 그는
비틀거리며 이내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그는 비탈길에 서 있었
는데, 쓰러지자 데굴데굴 아래로 굴러내려가 간신히 몸을 가누었
다.

훤칠한 스님은 놀라움과 분노가 엇갈려 냅다 호통을 쳤다.

"감히 소림사에서 행패를 부리다니, 호랑이 간(肝)이라도 먹은
모양이군."

그 스님은 호통을 치기 무섭게 앞으로 한 걸음 내닫으며 왼손을
오른쪽 손등에 붙여 쌍장을 쭉 З어냈다. 바로 소림의 절학인 츰
소림의 스물 여덟번째 초식인 번신벽격(飜身劈擊)의 자세였다.

곽양은 검을 쥔 채 검집으로 스님의 어깨를 후려쳤다. 그러자
스님은 어깨를 살짝 번뜩이며 손으로 허공에 반원을 그리듯 검집
을 낚아챘다.

한쪽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각원대사는 다급해졌다.

"어서 손을 거두시오!"

스님이 이렇게 말하며 검집을 나꿔챈 순간, 손목에 심한 진통을
느꼈다.

'아뿔사!'

그가 내심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을 때는, 곽양의 왼발이 이미
가슴을 강타했다. 그도 비탈길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가 받은
충격은 좀전 키 작은 스님보다 더 심해, 얼굴에 찰과상을 입어
피가 흘러내렸다.

곽양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양대협의 소식을 물으러 왔다가 공연히 싸움만 벌였군.'

그녀는 각원이 울상이 되어 한쪽에 서 있는 것을 보자, 이내 단
검을 뽑아 사슬을 끊어 주었다. 이 단검은 절세기보(絶世奇寶)는
아니지만, 지극히 예리해 요란한 금속성을 내며 사슬을 여러 토
막으로 잘라 버렸다.

각원은 크게 당황해 하며 소리쳤다.

"낭자, 이러면 아니 되오!"

곽양은 아랑곳하지 않고,

"뭐가 안 된다는 거예요!"

하고 한 마디 쏘아 붙이더니, 사내(寺內)를 향해 달려가는 두
스님을 바라보며 다음 말을 이었다.

"저 못된 화상들이 가서 고자질하면 일이 귀찮게 될 테니, 우린
어서 달아나요! 참 대사의 제자는 어디에 있죠?"

각원은 그저 손을 좌우로 흔들 뿐이었다.

이때 등 뒤에서 갑자기 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염려해 주어서 고마워요. 저는 여기 있어요!"

곽양이 고개를 돌려보니, 열 대여섯 살 가량된 소년이 서 있었
다. 짙은 눈썹에 초롱초롱한 눈동자, 몸집은 비록 크지만 얼굴에
는 천진난만한 티가 남아 있었다. 바로 삼 년 전, 화산에서 본
적이 있는 장군보(張君寶)였다.

곽양은 무척 반가왔다.

"이곳의 못된 화상들이 너의 사부를 업신여기니, 어서 떠나도록
하자!"

장군보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의 사부님을 업신여기는 사람은 없어요."

곽양은 각원대사를 가리키며 따졌다.

"너의 사부님을 저렇게 사슬로 묶고 말 한 마디 못하게 하는 것
이 괴롭히는 게 아니고 뭣이냐?"

각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 이상 일을 확대시키지 말고 속히
하산하라는 뜻으로 연신 산 아래쪽을 가리켰다.

곽양은 더 이상 꾸물댈 수 없었다. 소림사의 고수들이 몰려오면
불리해질 것이 뻔했다.

그녀는 다짜고짜 장군보와 각원대사의 손을 잡고 재촉했다.

"어서가요! 자세한 얘기는 이곳을 벗어난 다음에 하기로 해요!"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 사이에 비탈길 아래 사원쪽으로
부터 칠팔 명의 승려가 손에 곤봉을 들고 달려오면서 소리쳤다.

"어디서 온 못된 것이 감히 소림사에서 행패를 부리느냐?"

장군보가 얼른 목청을 높여 외쳤다.

"여러 사형들, 고정하십시요! 이 분은....."

곽양이 이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내 이름을 밝히지 마!"

그녀는 오늘 일이 크게 벌어질지 모르므로, 될수 있는 한 부모
님을 연루 시키지 않으려 했다.

그녀는 다시 재촉했다.

"어서 산을 내려가요! 절대 우리 부모님의 신분을 밝히지 말아
요!"

이때 그들의 뒤쪽 산 위에서도 대여섯 명의 승려가 달려왔다.

곽양은 눈살을 찌푸리며 더욱 다급하게 재촉했다.

"사내 대장부가 왜 이다지도 용단이 없죠? 대관절 떠날 거예요,
안 떠날 거예요?"

장군보는 각원대사의 눈치를 살폈다.

"스승님, 곽 낭자는 우리를 위해....."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아래쪽에서 또 네 명의 황의 승인이 뛰쳐
나와 날렵한 신법으로 비탈길 위로 달려왔다. 그들은 모두 무기
는 갖지 않았지만, 비범한 신법으로 미루어 무공이 상당한 경지
에 있는 것 같았다.

곽양은 주위의 상황이 이젠 혼자서 달아나기에도 때가 늦었음을
알고, 길게 숨을 들이쉬며 다음 변화를 기다렸다.

앞장서 달려온 승인이 그녀와 사 장(丈)의 간격을 두고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한당 수좌의 명을 전하는 바이니, 불청객은 속히 무기를 내
려놓고 산 아래 일위정(一韋亭)으로 내려가 다음 분부를 받들도
록 하시오!"

곽양은 냉소를 날렸다.

"소림사의 대화상이 벼슬아치의 못된 말투를 흉내내는군요. 속
세를 떠나 염불이나 하는 대화상들이 대송(大宋) 황제의 관원이
라도 된단 말인가요? 아니면, 몽고(蒙古) 황제의 신하라도 된단
말입니까?"

이 무렵--------

송조(宋朝)의 국토는 이미 함락되어 소림사의 소재지는 벌써 몽
고관할에 들어갔다.

다만, 몽고 대군이 몇 년째 양양(襄陽)을 함락시키겨다 실패하
는 바람에 소림사까지 그 힘이 미치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소
림사는 예전과 변함없는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승인은 곽양의 비웃는 듯한 말을 듣자 얼굴이 좀 붉어졌다. 자
신이 생각하기에도 사내 제자가 아닌 외부 사람에게 지나치게 명
령투로 말했다는 것을 깨닫고, 이번에는 합장을 하며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

"여시주께서 무슨 일로 폐사를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무
기를 내려놓으시고 일위정으로 가서 기다려 주십시오. 따끈한 차
라도 대접해 올리겠습니다."

곽양은 상대방의 말투가 부드러워지자 이를 기회삼아 일을 마무
리 지으려했다.

"사내로 들어기지 못하게 한다면 그만두죠. 흥! 혹시 소림사안
에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될 보물 단지라도 있나요!"

이에 장군보에게 눈짓을 하며 나직이 물었다.

"같이 떠나지 않겠어?"

장군보는 고개를 내두르며 스승님을 모셔야 한다는 뜻으로 살짝
턱으로 각원대사를 가르켰다.

곽양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좋아, 나 혼자 떠나는 수밖에 없겠군!"

그녀는 비탈길 아래로 달려내려갔다.

첫번째 황의 승인이 옆으로 길을 비켜 주었다. 그러나 두 번째
승인과 세 번째 승려가 동시에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만! 무기를 내려놓고 가시오!"

곽양은 대뜸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검을 쥐었다.

첫 번째 승인이 입을 열었다.

"여시주께서 산 아래로 내려가시면, 우린 즉시 보검을 돌려드릴
겨요. 이것은 소림사가 천 년 동안 엄수해 온 규칙이니 양해해
주십시오."

곽양은 그가 예의를 갖추고 정중하게 말하자 내심 망설여 졌다.

'만약 단검을 내놓지 않으면 틀림없이 싸움이 벌어질 텐데, 나
혼자서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을 당해 낼 수 있단 말인가? 그렇
다고 해서 단검을 풀어놓으면 부모님과 여러 사람들의 체면이 손
상될 게 뻔한데........'

그녀가 망설이며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갑자
기 눈앞에 황영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차가운 호통이 들려왔다.

"검을 하고 소림사에 나타나 사람까지 다치게 했으니, 이런 법
이 어디 있나?"

이어 경풍(勁風)이 일며 곽양의 검을 나꿔채려 했다.

이 승인이 서둘러 출수만 하지 않았더라도, 곽양은 스스로 검을
풀어 놓았을 것이다. 그녀는 언니인 곽부(郭芙)와 성격이 달라
비록 호방한 면은 있지만 경솔하지는 않았다. 당장 자신이 처한
상황이 불리하므로, 모든 것을 꾹 참았다가 나중에 웃어른들과
상의 해 체면을 만회할 생각이었다. 한데, 상대방이 갑자기 기습
을 가해 오자 오기가 생겼다.

이 승인의 금나수법(檎拿手法)은 날카로우면서도 절묘했다. 그
는 기습을 가하기 전부터 단단히 각오가 되어 있었다. 속세를 떠
난 승려가 감을 한 자루 가운데 두고 젊은 여자와 함께 서로 끌
고 당기는 것은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므로, 단 일격에 검을 빼
앗아 오려고 했다. 하여, 검집을 나꿔쥐는 동시, 왼손으로 곽양
의 어깨를 향해 장풍(掌風)을 뻗어 냈다. 곽양이 스스로 검을 포
기하고 물러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순순히 검을 빼앗길 곽양이 아니었다. 그녀는 상대방의
장풍을 피해 뒤로 물러나면서 검을 뽑았다. 다시 말해, 상대방이
쥐고 있는 검집은 포기한 채 검만 뽑은 것이다. 순간, 그녀의 검
은 허공에 싸은 "한 광채를 뿌렸다. 그와 동시에 검집을 나꿔쥔
승인은, 왼손 두 손가락이 절단되며 그 고통으로 인해 검집을 떨
어뜨리고 황급히 옆으로 물러났다. 승인들은 동문(同門)이 부상
을 당한것을 보자, 격노하며 일제히 곤봉을 휘둘러 공격해 왔
다.

그녀는 곧 가전비학인 낙영검법(落影劍法)을 펼치며 산 아래로
뚫고 내려갔다. 승인들은 삼열로 나누어 그녀의 앞을 막았다.

낙영검법은 바로 황약사(黃藥師)의 낙영장법((落影掌法)에서변
화시킨 것으로, 비록 옥소검법(玉篠劍法)만큼 절묘하지는 못해도
도화도(桃花島)의 절학임에 틀림없었다.

삽시간에 주위는 무수한 검화(劍花)로 뒤덮혔다. 눈깜짝할 사이
에 다시 두 명의 승려가 부상을 입었다. 뒤쪽에서 지켜 보고 있
던 승려들도 달려와 협공을 펼쳤다.

상례로 보아, 곽양은 중과부적으로 이십여 명이나 되는 소림 승
려들의 협공을 당해 낼 수 없었다. 하지남, 소림 승려들은 자비
(慈悲)를 근본으로 삼고 있는 만큼 그녀의 생명을 손상시키고 싶
지 않았다. 살수(殺手)를 피해, 단지 그녀를 쓰러뜨려 무기를 빼
앗고 훈계를 하여 쫓아버리는 게 목적이었다.

어런 상황아래 곽양의 검법이 뜻밖에도 절묘하여 승려들은 좀처
럼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승려들은 처음엔 상대가 한낱 묘령
의 여인이므로,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검법이 정교한 것을 보고 비로소 그녀가 범상치 않은 내
력을 지녔다는 것을 깨닫고 뒷일을 생각해 도욱 지나친 공격을
펼치지 못했다.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한 사람을 시켜 나한당 수
좌인 무색선사에게 이 사실을 알리도록 했다.

잠시 후--------

한창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키가 훤칠하고 깡마른 노승
이 느긋한 걸음으로 가까이 걸어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싸움을
지켜보았다.

두 명의 승인이 얼른 그에게 다가가 나직이 아뢰었다.

곽양은 이미 지쳐 있었다. 따라서 검법도 흩어져 아슬아슬하게
몸을 피하며 소리쳤다.

"무학의 발상지라더니, 열댓 명의 화상이 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소림의 무학이란 말이냐?"

노승은 바로 나한당의 수좌인 무색선사였다. 그는 곽양의 외침
을 듣자 이내 명령을 했다.

"모두 손을 거두어라!"

승인들은 즉시 손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무색선사는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낭자의 이름은 무엇이며 영존(令尊)과 영사(令師)는 어느분인
가? 그리고 무슨일로 소림사에 왔는지 밝혀줄 수 있겠나?"

곽양은 속으로 잽싸게 생각을 굴렸다.

'부모님의 이름을 밝힐 순 없다. 양대협의 소식을 얻기 위해 이
곳에 왔다는 것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털어 놓을 수 없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부모님이 아시면 틀림없이 나를 나무랄 테니 시
치미를 떼고 일단 이곳을 벗어나고 봐야겠다.........'

그녀는 곧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나의 이름을 밝힐 수는 없어요. 난 다만 산 위의 경치가 아름
다워 감상하기 위해 올라온 것뿐이예요. 소림사가 황궁보다 더
무서운 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 무엇 때문에 아무 이유 없
이 남의 무기를 몰수하려는 거죠? 내가 귀사 산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라도 했나요? 내가 알기로는, 애당초 달마조사가 무예를
전수한 것은 승려들의 튼튼한 몸을 단련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어
요. 한데 소림은 세월이 흐를수록 그 무예를 발전시켜 마치 무림
의 군주처럼 행세하는군요! 좋아요! 무기를 몰수하겠다면 기꺼이
드리죠. 나를 죽이지 않는 한 오늘 당한 이 억울한 일을 온 강호
에 알리겠어요!"

곽양은 본디 말에 재치가 있었다. 게다가 오늘 일은 그녀의 일
방적인 잘못도 아니었다. 무색선사는 그녀의 장황한 말을 듣고
나서 할말을 잃었다.

곽양은 내심 득의 만만해 하며 냉소를 짓더니 단검을 땅에 팽개
치고 곧장 앞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무색선사가 앞으로 비스듬히 걸음을 떼어 승포 소맷자락을 살짝
떨치자, 단검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는 단검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입을 열었다.

"낭자가 정녕 가문과 사문의 내력을 밝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면, 이 보검을 다시 거두게. 노승이 직접 산 아래까지 모셔다 주
겠네."

곽양은 생긋이 웃었다.
"역시 노화상께선 수양이 깊고 사리 판단이 바르시군요. 이것이
바로 명문의 풍도(風度)가 아니겠어요?"

그녀는 상대방 노승을 승복시켰다는 생각에 칭찬까지 아끼지 않
았다. 그러나 검을 받으려는 순간 흠칫 놀라고 말았다. 상대방의
손에서 한 갈래의 흡인력(吸引力)이 뻗쳐나와 검을 자기 쪽으로
가져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하여 연거푸 세
번을 시도해 보았으나, 단검은 무색선사의 손에 뿌리가 박힌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그녀는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좋아요! 공력이 심후하다는 걸 자랑하는 모양인데........"

그녀는 말을 내뱉으며 상대방의 왼쪽 목 부위 천정(天鼎), 거골
(巨骨) 두 군데 혈도를 향해 잽싸게 지풍을 나렸다. 무색은 흠칫
하며 얼른 몸을 비스듬히 피했다. 순간, 그가 전새했던 흡인력이
약간 흐트러졌고, 곽양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단검을 빼
앗아 왔다.

무색선사는 껄껄 웃었다.

"정말 멋진 난화불혈(蘭花拂穴) 수법이군. 낭자는 도화도주를
어떻게 칭호하는가?"

곽앙은 빙긋이 웃었다.

"도화도주 말인가요? 나는 그를 노동사(老東邪)라고 불러요!"

도화도주 동사 황약사는 곽양의 외조부로서, 성품이 괴팍하여
평생 예법을 무시하며 살아 다. 그는 자신의 외손녀를 소동사
(小東邪)라 불렀고, 곽양은 그를 노동사로 부렀다. 황약사는 그
럴 때마다 나무라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기뻐했다.

무색선사는 젊었을 때 녹림(綠林)에 몸담은 바가 있어, 비록 불
문에 귀의하여 수십년간 참수(參修)를 해왔지만 예전의 호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렇지않고서야 어떻게 양과와 친한 친분을
맺을 수 있었겠는가!

지금 눈앞에 있는 깜찍한 낭자가 한사코 사문을 숨기려 하자 무
슨 수를 써서라도 밝혀낼 생각으로 낭랑하게 웃으며 말했다.

"열 초식만 교환하면 낭자의 사문 내력을 알아낼 수 있을텐
데........."

곽양이 그의 말을 받았다.

"만약 열 추식 이내에 알아내지 못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무색 선사는 다시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낭자가 만약 노승의 열 초식을 받아낸다면, 무슨 요구든 응해
줄 용의가 있네."

곽양은 각원을 가리켰다.

"나는 이 대사님과 왕년에 일면지연(一面之緣)이 있어요. 그래
서 그를 대신해 한 가지 청을 드리고 싶어요. 만약 열 초식을
받아낸 후에도 나의 사문 내력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다시는 이
대사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무색선사는 심히 이상했다. 각원은 흐리명텅한 사람이고, 또한
수십 년간 오직 장경각에서 책만 관리해 왔을 뿐 외부 사람과 내
황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해서 이 낭자를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곧 정색을 하고 말했다.

"우리가 그를 괴롭힌 일은 없네. 본사의 승려들은 누구를 막론
하고, 계율을 어기면 벌을 받게 되어 있네. 그게 괴롭히는 거라
고는 할 수 없지."

곽양은 입을 삐쭉거리며 냉소를 날렸다.

"흥! 그렇다면 나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인가요?"

무색선사는 어이가 없든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낭자의 요구대로 하지. 만약, 노승이 지면 각원을 대
신하여 물을 삼천 백 팔 번을 길겠네. 자, 이제부터 출수를 할
테니 조심하게!"

곽양은 그와 얘기를 나눌 때, 이미 속으로 결정한 것이 있었다.

'이 노화상의 기(氣)가 태산처럼 온중한 것을 보니 무공이 대단
한 것 같다. 만약 그가 먼저 출수를 하면 난 전력을 다해 방어해
야 하므로, 부득이 부모님의 무학을 펼쳐야만 한다. 그러니, 내
가 먼저 기선을 잡아 십 초식을 전개해야지......'

하여, 곽양은 상대방이 공격을 전개하기도 전에 단검을 가슴에
세워 곧장 뻗어냈다. 바로 낙영검법 중에 만자천홍(萬紫千紅)이
란 초식이었다. 이것은 검 끝을 파르르 떨리게 하여 상대방이 어
느 부위를 겨냥하는지 종잡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무색선사는 허실(虛實)을 점칠 수 없어 일단 정면 대결을 피하
며 옆으로 미끄러졌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곽양의 외침이 터졌
다.

"제 이 초식이예요!"

단검이 원을 그리는 듯하며 이번에는 아래서 위로 찔러 올라갔
다. 이 검초는 전진파(全眞派)의 천신도현(天神到懸)이란 초식이
었다.

무색의 입에서 짤막한 일성이 뱉어졌다.

"멋진 전진검법이군!"

곽양이 쏘아붙이듯 한 마디 응수했다.

"과찬은 아직 일러요!"

그녀의 일검이 빗나가지 무색선사는 수세에서 공세로 바꾸며 손
목을 나꿔채 왔다.

곽양은 흠칫 놀랐다.

'역시 대단하군. 이런 예리한 검초하에서 적수공권(赤手空拳)으
로 반격을 해오다니.......'

그의 손끝이 가까이 뻗쳐오자 단검을 질풍처럼 펼쳐, 뜻밖에도
타구봉법(打拘棒法) 중에 한 초식인 악견난로(惡犬爛路)를 시권
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개방 전임 방주였던 노유각(盧有脚)과 친분
을 맺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예를 가르쳐 달라고 때를 썼었
다. 개방은 법규가 엄했고, 게다가 타구봉법은 개방의 상징적인
진방비학(鎭幇秘學)이므로, 방주 계승인이 아니면 전수받지 못하
게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생떼에 못 이겨 몇 번 얼버무리는 동
작에서, 곽양은 한두 초식을 훔쳐 배울수가 있었다.

더군다나 선임 방주인 황용(黃龍)은 그녀의 어머니고, 현임 방
주 야율제(耶律齊)는 형부이므로 타구봉법을 여러번 접할 기회가
있었다. 비록 초식 속에 담겨져 있는 오묘한 변화를 모두 알 수
는 없지만, 수박 곁핥기식으로 전개한 것만으로도 위력이 대단했
다.

무색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목에 닿으려는 순간, 갑자기 백광이
번뜩이며 검날의 방향에 절묘한 변화가 일어, 하마터면 다섯 손
가락이 잘라질 뻔했다. 다행히도 무색선사는 무공이 탁월해 신속
하게 초식을 변화시켜 그 긴박한 상황에서 두 걸음 물러났다. 간
신히 위기를 모면했지만, 무색선사의 왼쪽 소매가 단검에 의해
찢겨져 나갔다. 무색선사는 아연실색하며 등에 식은땀이 배었다.

곽양은 득의 양양해 하며 입가에 미소를 띄고 물었다.

"이게 무슨 검법인지 아세요?"

사실 천하 무림에도 이러한 검법은 없었다. 단지 그녀가 훔쳐
배운 타구봉법을 검법으로 응용했을 뿐이다. 타구봉법은 워낙 현
묘하여, 곽양이 사이비로 전개했는데도 이 명성이 쟁쟁한 소림의
고승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무색선사는 입이 딱 벌어진
채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곽양은 무척이나 안타까왔다.

'계속 타구봉법을 전개하면 틀림없이 이 노화상을 격파시킬 수
있을 텐데, 더 이상 제대로 아는 것이 없으니.......'

그녀는 무색선사가 숨을 돌리기도 전에 앞으로 표연히 미끄러져
가며, 수중의 단검을 경쾌하레 떨쳤다. 이러한 자세는 흡사 선녀
하볍을 연상케 했으며, 검날이 노린것은 무색선사의 하반신이었
다.

이것은 소용네에게서 배운 옥녀검법중에 소원예국(小園藝菊)이
란 초식이었다. 옥녀검법은 왕녕에 임조영(林朝英) 여협이 창안
한 것으로서, 비단 검초가 매서울 뿐 아니라 탈속한 자세와 우아
한 손놀림에 중점을 두었다.

주위에 있는 승려들은, 난생 처음 보는 절미(絶美)한 검법에 넋
을 잃은 듯 눈이 휘둥그래졌다. 소림파의 달마검법(達摩劍法)과,
나한검법(羅漢劍法)은 모두 강맹한 것이 특징이었다. 하지만, 옥
녀검법은 그와는 정반대이며 강호에 선보인 적이 많지 않았다.
사실 검법의 경지로 따진다면, 옥녀검법이 꼭 소림의 각종 검법
을 능가한다고는 단언할 수 없었다. 단지 옆에서 보기에 절로 감
탄이 나올 정도로 멋드러진 검법일 뿐 이었다. 무색선사는 이렇
게 아름다운 검법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 옆으로 살짝 미끄러
지며 몸을 피했다. 그러나 곽양의 검법은 이내 변하여 동서로 번
갈아 번뜩였다.

한쪽에서 넋을잃고 바라보던 장군보의 입에서 갑자기 짤막한 경
탕이 터져 나왔다.

"앗 ? !"

곽양의 이 초식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이라 하여, 바로 삼년 전
에 양과가 화산에서 장군보에게 전수해 준 장법이 아닌가! 당시
곽양은 옆에서 지켜보았는데 지금 검법으로 변화시켜 시전한 것
이다. 비록 그 위력은 감소됐지만 상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기에는 충분했다.

곽양이 이미 다섯 초식을 펼쳤는데도, 무색선사는 아무런 실마
리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는 젊었을 때 강호를 종횡하며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게다가 십여 년 전부터 나한당 수좌직을 맡아오
면서, 소림사의 무학을 보다 더 보강시키기 위해 각문파의 무하
을 연구해 왔다. 그래서 자신있게 열 초식 이내에 사문 내력을
알아내겠다고 곽양과 약속을 한 것이었다. 한데,곽양의 부모와
사문의 사람들이 모두 당대의 일류 고수이며, 그녀가 그들의 무
공 중에서 자기 멋대로 변화시킨 초식만 전개할 줄이야 어찌 생
각이나 했겠는가! 무색선사는 갈수록 어리둥절해질 뿐이었다.

사통팔달의 초식이 끝나자, 무색선사는 내심 느끼는 바가있었
다.

'그녀가 먼저 출초하도록 내버려두면, 십 초식이 아니라 백 초
식이 지나도 확실한 것을 알아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내
가 주동이 되어 맹렬한 공격을 퍼부면 어쩔 수 없이 본문의 무학
을 펼치게 되겠지.....!'

그의 생각은 즉시 행동으로 옮겨져, 상반신을 왼쪽으로 돌리며
일초 쌍관수(雙貫手)를 펼쳐냈다. 쌍장의 호구(虎口)를 곁붙여
손가락을 부채살 모양으로 펼쳐 밀어낸 것이다. 순간, 엄청난 힘
줄기가 성난 파도인 양 곽양에게 휘몰아쳐 갔다.곽양은 정면 대
결할 엄두가 나지 않아, 몸을 절묘하게 비틀며 힘줄기 사이로 미
끄러져 갔다. 그녀는 왕년에 흑룡담(黑龍潭)에서 영고(瑛姑)각
양과와 싸우다가 불리해지자, 니추공(泥鰍功)을 전개해 교묘히
빠져 나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대로 흉내를 낸 것이다. 그녀
의 무공과 신법은 물론 영고와 비교가 될 수 없지만, 무색선사에
겐 그녀에게 살술르 전개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가볍게
빠져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무색선사는 저절로 갈채를 보냈다.

"훌륭한 신법이군, 다시 일초를 받아라!"

외침과 함께 왼손으로 원을 그려 팔꿈치를 가슴에 붙이고 호구
를 위로 했으니, 바로 소림권(小林拳)중에 황앵낙가(黃鶯落架)였
다.

그는 소림의 무학대사(武學大師)로서 비록 다른 문파의 무학에
대해 곽양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지만, 일초 일식이 모두 순수한
본문 무공이었다.

소림권법은 단단한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겉보기에는
평범하지만 일단 심오한 경지로 연마하면 그 위력이 무공무진했
다. 그가 왼손으로 원을 그리는 순간, 곽양은 이미 상반신이 전
부 그의 장력 범위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얼른 검의 손잡이를 거꾸로 돌려, 검으로서 손가락을 대신하여
무수문(武修門)으로부터 배운 일양지(一陽指)를 전개했다. 그녀
가 노린 것은 무색선사의 손목 부위 완골(腕骨), 양곡(陽谷), 양
노(養老) 세 구네 혈도였다. 그녀가 배운 일양지의 점혈수법은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불과했다. 그러나 단 한 번에 세 군데 혈
도를 노렸으니, 이게 바로 일양지의 정수였다.

일등대사(一燈大師)의 일양지는 만천하에 명성이 알려져 있어,
무색선사는 이내 간파하고 깜짝 놀라며 황급히 손을 거두어 초식
을 변화시켰다.

만약에 무색선사가 손을 거두지 않았다면, 곽양이 전개한 일양
지가 빈껍데기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곽양은 생긋이 웃으며 말했다.

"노화상께서도 일양지의 위력을 잘 알고 있군요!"

무색선사는 냉소를 날리며 단봉조양(單鳳朝陽)의 초식을 격출해
냈다. 이 일초는 쌍장을 넓게 벌려 큰 원을 그리며 밀어내는 것
으로, 그 힘줄기가 미치는 범위가 매우 넓었다. 곽양은 도저히
피할 수 없어 손에 쥐고 있는 단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녀는
상대방이 자기에게 악랄한 살수를 전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별로 당황하지 않고 쌍권을 교차시켜, 늙은 개구장
이 주백통(周伯通)의 걸작인 칠십이로 공명권(七十二路 空明拳)
중에 오십 사 초식인 묘수공공(妙手空空)을 펼쳐 냈다.

이 권법은 주백통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으로 아직 강호에 전
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제아무리 견식이 넓은 무색선사라 해도
알아볼 리가 없었다.

무색은 곧 쌍장으로 다시 원을 그리며, 편화칠성(偏花七星)이란
초식을 펼쳐 전광석화같이 곽양의 손을 추려쳤다. 곽양이 만약
내력을 끌어올려 그와 정면 대결을 하지 않으면, 손목이 뒤로 젖
혀져 뼈가 꺾이게 될 것이다. 소림의 기본 무학인 이 편화칠성은
겉보기에 느린 것 같지만 사실은 빠르고, 언뜻 보아 가벼운 것
같지만 실은 엄청난 힘이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비록 츰소림의
자세지만,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내력은 신화소림의 정수에서 비
롯된 것이다.

곽양은 위기의 상황에서 잽싸게 생각을 굴렸다.

'설마 정말로 내 손목뼈를 부러뜨리진 않겠지!'

그녀는 창졸간에 초식을 변화시켜 철포선수(鐵葡扇手)인 장풍대
장풍으로 반격해 갔다. 이 초식은 그녀가 무수문의 아내 완안평
(完顔萍)으로부터 배운 것으로서, 왕년에 철장수상표(鐵掌水上
飄) 구천인(求千刃)이 남긴 심법에 근거를 둔것이다. 이 철장공
(鐵掌功)은 모든 장법 중 강맹한 면에서 으뜸으로 꼽았다.

무색선사는 십수 년간 장법을 연구해 왔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 젊은 낭자가 난데없이 이 철장방(鐵掌幇)의 진방비학
을 전개하는 것을 보자 깜작 놀랐다. 정면대결을 하자니 상대방
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고, 또한 철장공에 대해 어느 정도 경원
심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세히 생각을 굴릴 겨를도 없이, 얼른
손을 거두고 뒤로 다섯 자 가량 물러났다.

곽양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여유있는 미소를 지었다.

"이번이 마지막 초식이니 내가 어느 문파인지 자세히 보세요."

그녀는 왼손을 펼치며 앞으로 미끄러져가는 동시에, 오른손으로
무색선사의 턱을 노렸다. 무색과 옆에서 관전하고 있는 모든 사
람의 입에서 놀람의 외침이 터진 것도 바로 이때였다. 곽양이 마
지막으로 펼친 초식은 고해회두(苦海回頭)로 바로 소림파 정통
무예인 나한권법 중의 한 초식이 아닌가! 다른 문파에 절대 있을
수 없는 초식이었다.

이 초식의 묘미는 왼손으로 상대방의 머리를 누르고, 오른손으
로 턱을 받쳐 비트는 데 있었다. 일단 이 초식이 성공을 거두면,
심할 경우 상대의 목이 부러지고, 약한 경우는 관절이 빠지는 실
로 무서운 살초(殺招)였다.

무색선사는 그녀가 이 초식을 펼치자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공자 앞에서 효경읽기요, 하마 앞에서 입 크다고 으스대는 것이
아닌가!

무색선사는 은근히 화가 치밀면서도 한편으론 웃음이 나왔다.
그는 수십 년 전에 이미 이 권법을 익혀 손바닥 보듯이 훤해, 설
령 잠들어 있는 상태에서 누가 이 권법으로 공격해 온다 해도 가
볍게 와해시킬 수 있었다.

그는 곧 바람에 돛단배 가듯 지극히 자연스럽게 비스듬히 걸음
을 떼어, 왼손으로 수평을 그리며 살짝 손목을 젖혀 곽양의 오른
쪽 어깨를 나꿔잡고 오른손을 전공석화처럼 그녀의 뒷덜미로 뻗
어냈다. 이 초식은 협산초해(挾山超海)라 하며, 고해회두를 파괴
하는 오직 하나의 수법이었다.

다음 순간, 무색선사가 쌍장에 힘을 주자 곽양의 몸이 지면에서
한 자 가량 번쩍 들려졌다. 곽양이 잽싸게 팔꿈치로 상대방의 손
목을 공격하면, 위기를 모면하는 동시에 도리어 상대방을 제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색선사의 이 일초가 불가사의할 정도로
빨라 그녀의발끝이 이미 지면에서 벗어났으니, 더 이상 초식을
전개할 수 없었다. 자연히 곽양이 패한 것이다.

무색선사는 손쉽게 그녀를 제압시켰으나, 문득 뇌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뿔사! 제압하는 데만 신경을 쓰다 보니 사문 내력을 알아내
는 원래 목적을 소홀히 했구나! 그녀가 전개한 열 초식은 모두
다른 열 문파의 무학이니 뭐라고 단언을 해야 된단 말인가? 소림
파라고 할 수동 없는 노릇이고.......'

곽양은 몸을 뒤츨며 소리쳤다.

"어서 손을 놔요!"

이때, 그녀의 몸에서 한 가지 물건이 떨어졌다.

곽양은 다시 소리쳤다.

"노화상, 어서 손을 놓지 못하겠어요!"

무색선사는 이미 남녀유별을 초월한 고승이므로,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노승의 나이는 낭자의 할아버지 뻘인데, 무엇을 두려워 하는
가?"

이렇게 말하며 손을 살짝 밀어내, 그녀를 이장 밖으로 던져 버
렸다.

이번 싸움은 비록 곽양이 마지막에 제압당했지만, 열 초식 이내
에 그녀의 사문 내력을 알아내지 못했으니 무색선사는 약속한 대
로 패배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막 패배를 시인하려는
데, 문득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거무튀튀한 물체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쇠로 만든 한 쌍의 작은 나한(羅漢)이었다.

곽양은 사뿐히 땅에 내려서면서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대화상, 패배를 시인하겠죠?"

무색은 만면에 웃음을 띠우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노승이 어째서 패했다는 겉가? 난 영존이 대협 곽정이며 영당
이 여협 황용, 그리고 도화도주가 낭자의 외조부라는 사실을 알
고 있네, 그리고 낭자의 이름은 양양(襄陽)의 양(襄)자를 땄으
며, 영준이 강남칠괴(江南七怪), 도화도, 구지신개(九指神개),
전진파의 비학을 한몸에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

이 말을 들은 곽양은 그만 눈이 휘둥그래지며 입이 딱 벌어져,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상한 생각이 스쳤다.

'이 노화상은 정말 귀신 같군. 내가 열 초식을 제멋대로 전개했
는데도 용케 내력을 알아내다니.....'

무색선사는 그녀가 망연자실해 있는 것을 보자 히죽 웃으며, 그
한 쌍의 작은 철나한을 집어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 놓았다.

"곽 낭자, 이 노승이 어찌 거짓말을 할 수 있겠는가? 사실은 이
철나한을 보고 낭자의 내력을 알아낸 걸세. 양대협은 편안하신
가?"

곽양은 명해졌다가 이내 깨달은 바가 있었다.

"앗! 그럼 무색선사시군요? 이 철나한은 선사께서 저의 생일 선
물로 주신 것이니 저의 내력을 알아낸 게 당연하죠. 제가 이곳에
온 것도 양대협 부부의 소식을 묻기 위함이었는데, 선사께서도
그들을 보지 못한 모양이군요?"

무색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몇 년 전에, 양대협은 폐사에 와서 며칠 머물며 나와 많은 얘
기를 나누었네. 나중에 그가 양양에서 적과 싸운다는 소식을 듣
고 노승도 달려가 미력이나마 보탰네. 한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
지 전혀 알 수가 없네."

곽양은 잠시 멍해 있다가 입을 열었다.

"역시 양대협의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무공이 그렇게 고강하셨
군요. 참, 저에게 생일 선물을 주셨는데 아직 인사를 드리지 못
했어요. 오늘 이 자리를 빌어 정식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겠
어요."

"싸워야 서로 알게 된다더니, 우리가 바로 그 꼴이군. 나중에
양대협을 만나면 이 노화상이 후배를 괴롭혔다고 고해 바치진 말
게."

곽양은 먼산을 바로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언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곽양이 열 여섯 번째 생일을 맞던 날, 양과는 갑자기 기발한 착
상을 하고는 강호 친구들에게 청첩을 띄워, 그들로 하여금 양양
아로 달려와 곽양의 생일을 축하해 주었던 것이다. 당시 흑백양
도(黑白兩道)의 무수한 고수들이 양과의 체면을 행각해 앞을 다
투어 양양으로 몰려들었다. 설령 틈을 낼 수 없는 사람이라 할지
라도, 대신 인편으로 진귀한 선물을 보내 왔었다. 무색선사가 인
편으로 보내 온 생일 선물이 바로 이 한 쌍의 철나한이었다.

이 철나한의 뱃속에는 절묘한 기관 장치가 되어 있어, 태엽을
감으면 그것이 소림 나한권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삼백 년전
소림사의 한 기승(奇僧)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것으로, 실로 졍교
하기 이를데 없었다. 곽양은 갖고 놀기가 재미있기 때문에 늘 몸
에 지녀 왔는데, 오늘 뜻하지 않게 품 속에서 떨어져 무색선사로
하여금 자신의 내력을 알아차리게 한 것이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펼친 소림권법도 바로 이 철나한을 통해 배운 것이다.

무색선사는 자상하게 웃으며 말했다.

"본사는 역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사규(寺規) 때문에 곽 낭자를
안으로 모셔 대접할 수 없으니, 실로 유감이라 생각하네."

곽양은 이곳에서도 양과의 소식을 알아내지 못하자 시무룩해져
있었다.

"괜찮아요. 물으려 한 것은 이미 다 물었는걸요."

무색선사는 각원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저 사제(師弟)에 관한 일은 나중에 천천히 설명해 주겠네. 이
제 이 노화상이 낭자를 모시고 하산하여 한 턱 두둑하게 내고 싶
은데, 낭자의 생각은 어떤가?"

무색선사는 소림사에서 직위가 대단히 높은 고승인데 한낱 젊은
낭자에게 이렇게후한 대접을 베풀다니, 중승들은 그저 어리둥절
할 따름이었다.

곽양은 정중히 사양했다.

"저는 그런 과분한 대접을 받을 수 없어요. 조금 전에 제가 경
솔한 탓으로 몇 분 대사를 노하게 했으니, 대신 사과의 뜻을 전
해 주세요.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뵙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작별을 고할까 해요."

이렇게 말하며 공손히 예를 올리고, 곧 몸을 돌려 비탈길 아래
로 내려갔다.

무색선사는 그녀의 뒤를 쫓아가며 웃는 낯으로 말했다.

"이 노화상더러 전송하지 말라고 해도 전송을 해야겠네. 그 해,
노화상은 양대협의 분부를 받들어 남양(南陽)의 몽고대군(蒙古大
軍) 식량 창고와 무기 창고를 불지른 후 곧장 사내로 돌아오는
바람에 미쳐 낭자의 생일 축하연에 참석하지 못했네. 그 일이 늘
가슴에 걸렸는데 오늘 직접 본사를 찾아준 이 마당에, 내 삼십
리를 전송해 주지 않고서야 어찌 귀빈을 대한 예라 할 수 있겠는
가?"

곽양은 그의 성의와 호탕한 말투가 맘에 들어 망년지교(忘年之
交)를 맺기로 작심하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두 사람은 곧 어깨를 나란히 하고 비탈길을 따라 내려갔다. 그
들이 일위정을 막 지나쳤을 때 등 뒤에서 발걸음소리가 들려와
돌아보니, 장군보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서 뒤따라오는
것이었다.

곽양은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장 형제도 나를 바래다 주로 오는 건가?"

장군보는 얼굴을 약간 붉히며 대답했다.

"네!"

바로 이때였다. 산문 쪽에서 한 승인이 질풍 같은 신법을 전개
해 내려왔다. 무색은 눈쌀을 가볍게 찌푸렸다.

"무슨 일인데, 저리 수선인가?"

승인은 이내 가까이 달려와 정중히 인사를 하더니, 나직이 몇
마디를 아뢰었다. 그러자 무색선사의 안색이 대뜸 변하며 다르치
듯 물었다.

"그게 사실이란 말이냐?"

승인은 몸을 숙이며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장문인께서 급히 수좌를 모셔오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곽양은 무색선사가 난처해 하는 것을 보자 얼른 입을 열었다.

"노선사, 친구를 사귐에 있어 서로의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
지 형식에 얽매일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급한 잎이 생기신 모양
인데 어서 돌아가세요.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강호에서 만나 서
로 회포를 풀어도 되잖아요?"

무색선사는 매우 기뻐했다.

"양대협이 낭자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를 알 것 같네. 낭자야말
로 인중영협(人中英挾)이며 여중장부(女中丈夫)일세. 앞으로 진
정한 친구가 되고 싶네."

곽양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노선사는양대협의 친구이시니 일찌기 저의 친구였던 셈이에
요."

두 사람은 곧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무색은 산문 쪽으로 몸을
날렸다. 곽양은 계속 산길을 따라 하산했다. 장군보는 시종 그녀
와 감히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하고 대여섯 걸음의 간격을 두고
뒤따랐다.

곽양이 걸으면서 물었다.

"장 형제, 그들은 무엇 때문에 자네 스승님을 괴롭히는 거지?
자네 스승님은 그 심후한 내공으로 굳이 그들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을 텐데........"

장군보는 앞으로 두 걸음 더 나아가며 대답했다.

"사내의 규율이 엄해 누굴 막론하고 잘못을 저지르면 벌을 받게
돼 있어요. 그들이 일부러 스승님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에요."

곽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네의 스승님 같은 정인군자는 세상에 둘도 없을 텐데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거지?"

장군보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낭자께서도 알고 있는 일입니다. 바로 그 능가경(稜伽經)
때문이죠."

"아니?..... 그 소상자(簫湘子)와 윤극서(尹克西) 두 녀석이 훔
쳐간 경서 말인가?"

"그래요. 그날 화산 절정에서 소인은 양과대협의 지시에 따라
직접 그 두 사람의 몸을 뒤져보았습니다. 화산에서 내려온 뒤 다
시는 그들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어요. 스승님과 저는 어쩔 수
없이 사내로 돌아와 장문인께 사실대로 보고했어요. 그 능가경은
달마조사께서 직접 쓰신 것으로 계율당의 수좌께서 스승님의 불
찰로 그 귀중한 경서를 잃었다면서 마땅한 중벌을 내리신 겁니
다.

듣고 난 곽양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땅한 벌이 아니라 화풀이를 하는 걸세."

그녀는 장군보보다 몇 살 위지만 누나로 자처하며 다시 물었다.

"그 일 때문에 자네의 스승님께 말을 못하게 하는 중벌을 내렸
단 말인가?"

장군보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그것은 사내에서 역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규율이에요. 사슬에
묶인 채 물알 기도고 말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죠. 사내의 노선사
들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는데, 그것이 비록 벌이긴 하지만
벌받는 사람에게도 이득이 있대요.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정신적
인 수양을 닦는 거며, 물을 긷는 것은 신체적인 단련을 하는 거
래요."

곽양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자네 스승님은 벌을 받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무
공을 연마하고 있는 중인데, 내가 공연히 방해를 한 셈이군.

장군보는 얼른 그녀의 말을 받았다.

"낭자의 깊은 호의를 스승님과 저는 모두 가슴 속에 새기고 있
어요. 아마 영원히 잊지 않을 겁니다."

곽양은 길게 숨을 들이쉬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나를 벌써 깨끗이 잊은 모양이야.....'

이때, 숲속에서 나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귀는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곽양은 장군보에게,

"장 형제, 이제 그만 돌아가."

라고 말하더니 휘파람을 불어 나귀를 가까이 불렀다.

장군보는 못내 이별을 아쉬워했으나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곽양은 손에 쥐고 있는 한 쌍의 철나한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걸 줄께."

장군보는 머뭇거리며 선뜻 받지 못했다.

"그..... 그건......."

"그냥 주고 싶어서 그래. 어서 받아둬."

"나..... 나는......."

곽양은 철나한을 그의 손에 쥐어 주고는 이내 몸을 날려 나귀
등에 오랐다.

갑자기------ 언덕 너머 돌계단 위쪽에서 한 사람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곽 낭자! 잠깐만 기다려 주게."

바로 무색선사가 다시 사문 안에서 뛰어왔다. 곽양은 내심 혀를
찼다.

"나를 끝까지 전송할 모양인데, 정말 고집이 대단한 노화상이시
군......"

무색선사는 신법이 뛰어나 눈깜짝할 사이에 앞으로 가까이 달려
왔다. 그는 먼저 장군보에게 위엄있게 말했다.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어서 사내로 돌아가라!"

장군보는 공손히 몸을 숙여 대답한 후 산위로 올라갔다.

무색선사는 그가 떠나가자, 비로소 품 속에서 서찰 한 장을 꺼
내 곽양을 똑바로 주시하며 물었다.

"곽 낭자, 누가 써보낸 건지 알겠나?"

곽양은 나귀에서 내려 서찰을 받았다. 그곳에는 두 줄의 글월이
적혀 있었다.

------소림파의 무학이 중원과 서역(西域)에서 옰 동안 웅림(雄
臨)해 온 것을 알고 있소. 열흘 후 곤륜삼성(崑崙三聖)이 직접
찾아와 가르침을 받으리라.-------

필체가 빼어나고 웅후한 힘이 곁들여 있었다. 곽양은 고개를 갸
우뚱했다.

"곤륜삼성이 누구죠? 이 세 사람의 말투는 대단한 것 같은데
요."

"낭자도 역시 이들을 모르는 모양이군."

"전혀 몰라요. 곤륜삼성이란 이름은 부모님에게서도 들어본 적
이 없어요."

무색은 눈쌀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렇다면 이상하군."

곽양은 얼른 반문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예요?"

무색선사의 표정이 심히 달라졌다.

"낭자는 이 노화상과 친구이니 솔직히 말해야겠군. 이 서찰이
어떻게 우리 수중에 들어왔는지 아는가?"

곽양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곤륜삼성이 사람을 시켜 보내온 것이겠죠!"

무색선사는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만약 사람을 시켜 보내온 것이라면 조금도 이상할 게 없지. 가
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 소림사는 부
색 년 동안 무학의 발상지로 알려져 왔기 때문에 계속해서 많은
고수들이 무학을 겨루기 위해 도전해 왔네. 그 때마다 우린 찾아
온 무림인들을 깍듯이 대접했고, 무공을 겨루는 일에 대해선 한
사코 사절을 해왔네. 알다시피, 우린속세를 떠난 사람들이 아닌
가? 무쟁(無爭)을 근본으로 삼아야 할 우리가 일일이 그들을 받
아들여 싸움질이나 한다면 어찌 불문 제자라 할 수 있겠는가?"

곽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보니 그렇군요."

무색은 다시 말했다.

"하지만 대단한 각오를 하고 찾아온 고수들인데, 우리가 한 수
펼쳐 보이기 전에 순순히 돌아갈 리가 있겠는가? 소림사의 나한
당은 바로 그러한 외래 고수들을 접대하는 일을 맡고 있네."

곽양은 빙긋이 웃었다.

"알고 보니 대화상의 직책은 전적으로 남들과 싸우는 거군요!"

무색선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일반 고수들의 무공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본당의 제자들이
능히 상대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이 노화상이 나설 필요는 없
네. 오늘은 낭자의 솜씨가 너무 비범했기 때문에 모처럼 직접 나
선 것뿐이네."

곽양은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처음부터 나를 높이 평가해 주셨군요."

무색선사는 그녀의 말에 껄껄 웃다가 무엇이 생각난 듯, 얼른
정색을 했다.

"늙으면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더니........ 엉뚱한 말만 늘어놓
고 있었군.솔직히 말해, 이 서찰은 나한당 항룡나한불상(降龍羅
漢佛像)의 손에서 발견된 것이네."

곽양은 이상하다고 느꼈다.

"누가 그 높은 불상의 손에다 서찰을 갖다 놓았죠?"

무색선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글쎄.....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사내의 승려가 수백 명이나
있는데, 만약 누가 잠입해 들어오면 모를 리가 있겠는가? 더우기
나한당에는 여덟 명의 제자가 밤낮으로 교대해 지키고 있었네.
조금 전에서야 이 서찰이 발견돼 급히 장문인께 보고를 울리게
되었고, 모두들 납득이 가지 않아 비로소 이 노화상을 급히 사내
로 불러들인 걸세."

여기까지 들은 곽양은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제가 그 곤륜삼성과 내통했다고 의심하는 모양이군요. 내가 일
부러 산문 밖에서 소란을 피우고 그 틈늘 타서 곤륜삼성이 나한
당으로 잠입해 들어가 서찰을 남겼다..... 이런 말이 아닌가요?"

무색은 숨김없이 얘기했다.

"이 노화상은 낭자를 절대 의심하지 않지만, 일이 묘하게도 우
연의 일치가 되어 낭자가 떠나자마자 나한당에서 이 서찰이 발견
되었네. 그러니 장문인과 무상(無相) 사제 등이 낭자를 의심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지."

곽양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는 그 세 녀석을 전혀 몰라요. 대화상, 뭐가 겁나나요? 열흘
후 그들이 정말 찾아온다 해도 따끔하게 혼을 내주면 되잖아요!"

무색은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물론 두려워할 거야 없지. 낭자가 그들과 관련이 없다면, 이
노화상은 아무 걱정도 하지 않네."

곽양은 그의 호의를 알수 있었다. 혹시 곤륜삼성이 자기와 아는
사이라면 노화상의 입장이 난처해지기 때문이다.

"노화상, 그들의 글월을 보니 광기가 대단한 것 같은데, 이번
기회에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세요."

여기가지 말한 그녀는 홀연 뇌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사내에서 누가 그들과 내통하여 미리 서찰을 갖다 놓은
것이 아닐까요?"

무색선사는 고개를 내둘렀다.

"그 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지만 절대 가능성이 없네. 황룡
나한불상의 손은 지면에서 백 자가 넘어, 평상시 청소를 할 때는
높은 사다리를 연결해 딛고 올라가야만 했네. 그 정도 높이를 단
숨에 날아오를 수 있는 자라면, 실로 찾아보기 드문 절세신법의
소유자일 걸세. 설령, 사내에 반도(叛徒)가 있다 해도 그 정도의
실력을 지녔을 리 만무하네."

곽양은 은근히 호기심이 생겼다. 곤륜삼성이 어떠한 인물이며,
소림을 찾아와 무공을 겨루게 되면 과연 승부가 어떻게 판가름날
지 자못 궁금했다. 하지만, 여인은 소림사로 들어갈 수 없으니
이 흥미진진한 구경을 직접 보지는 못할 것이다.

무색선사는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소림을 위해
대책을 강구 중인 것으로 알고 얼른 입을 열었다.

"소림은 천 년 동안 숱한 풍파를 겪어 왔네. 곤륜삼성이 제아무
리 뛰어난 무공을 지녔다 해도, 소림이란 천년고송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걸세. 보름 수쯤 강호의 풍문을 귀담아 들어보면 자연히
알게 될 걸세."

곽양은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노화상게서 장담하시니 틀림없겠죠. 좋아요, 보름 후에 기분
좋은 풍문이 나돌기를 바라겠어요."

그녀는 곧 나귀에 올라탔고, 두 사람은 마주 보며 마음과 마음
으로 미소를 나누었다.

곽양은 나귀를 몰고 하산하며 이미 속으로 한 가지 결정을 내렸
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흥미있는 구경을 놓치지 않겠다고!

그녀는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열흘 후에 무슨 방법으로 소림사에 잠입해 들어갈 수 있을까?'

뾰족한 수가 선뜻 떠오르지 않자 다음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 곤륜삼성의 실력이 평범하다면 별로 재미가 없을 텐데.....
하지만 할아버님이나 아버님, 그리고 양대협의 절반 정도의 실력
만 갖추었더라도 볼 만하겠군.......'

양과의 생각이 떠오르자 그녀는 다시 울적해졌다. 삼 년동안 방
방곡곡을 찾아헤맸건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적막과 공허뿐이
었다. 곽양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듯 읊조렸다.

"종남산고묘장폐(綜南山古墓長閉), 만화요화락무성(萬花拗花落
無聲), 절정곡공산적적(絶情谷空山寂寂), 풍릉도냉월명명(風陵渡
冷月冥冥)........"

------종남산의 고묘는 영원히 폐쇄되고, 만화요의 꽃은 소리없
이 떨어지니, 절정곡은 텅 비어 적막함에 잠기어 퐁릉도의 달빛
만이 차갑구나......-----

그녀의 입에서 다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를 찾아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상념만 더욱 깊어지고, 번
뇌만 늘어날 게 아니겠는가? 그가 조용히 멀리 떠난것도 나를 위
함이 아니었던가? 그 모든 것이 경화수월(鏡花水月)처럼 허망된
것임을 알면서도 못내 이 상념의 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구
나.....'

그녀는 나귀가 이끄는 대로 소실산을 만유(漫遊)하며 서쪽으로
향했다.

어느덧 그녀는 숭산(嵩山)으로 접어들었다. 멀리 바라다보이는
소실산의 동쪽 봉우리가 창림(蒼林)에 둘러싸여, 우뚝 솟은 것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했다. 이렇게 며칠동안 산 속을노닐
다가 삼휴대(三休坮)에 당도했다. 곽양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세 번 쉬었다 가라는 뜻에서 삼휴라 이름지었거늘, 인간만사기
천휴(人間萬事幾千休)라....... 어찌 삼휴뿐이겠는가......?'

북쪽으로 길을 꺾어 산봉우리 하나를 넘어서자, 앞에 펼쳐진 경
치가 놀랄 만했다. 수백 그루의 고송이 창공을 배경으로 하여 무
리를 이루고 있으며, 멋드러지게 휘어진 가지위에 백로가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어 세외도원(世外桃源)을 연상케 했다.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1 권


----- 머리말

이 소설<대륙의 영웅(大陸의 英雄)>은 현존의 중국 최대
작가로 알려진 김용(金庸)의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1
부를 변역한 것이다.
[대륙의 영웅]은 원(元)나라 말기에서 명(明)나라 건국까
지의 혼란기를 다룬 소설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 나오는 인
물들은 후에 명나라를 세우는 주역들로서 중원과 사막을 가
로지르며, 몽고와 서역(西域) 등을 넘나드는 웅장한 스케일
을 보여, 감히 다른 소설에서 그 유래를 찾기가 어렵다. 장
무기가 나약한 몸으로 태사부 장삼봉과 함께 소림사로 가던
도중 배에서 알게 된 상우춘도 주원장을 도와 명나라를 세
우는 데 공이 큰 명장이다.
김용의 소설이 널리 애독되는 까닭은 그의 소설 속에 실존
인물과 가공 인물들이 두루 섞여 나오되, 한결같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는 점이 아닌가 한다.
이는 김용이 뛰어난 작가이기도 하지만, 노자와 장자의 철
학은 물론, 불경과 유가의 경전에도 통달한 학구파라는 데
서도 연유하는 탓이라고 본다.
김용의 원명은 사용량(査鏞良), 1924년 중국 절강성 해령
(海寧)에서 태어났다.
상해 동오법과대학을 나온 후, 미국 버클리대학과 일본 교
토대학에서 교환교수로 강의를 받으며, 현재는 홍콩에서 발
간되는 월간 <명보(明報)>의 사장 겸 주필을 맡고 있다.
그의 소설의 또 하나 특징은 역사소설이면서 실존 인물과
사실에 충실을 기한다는점과, 당시(唐詩)와 송사(宋詞) 등
이 군데군데 인용되어 작품의 품격을 한층 드높여 주고 있
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김용의 12부작 중 하나인 <의천도룡기>를 번역
했다는 것은 앞에서도 밝혔거니와. <사조영웅전>과 <신조협
려>는 이미 국내에서 선을 보인 바 있으며, 그 후편에 해당
하는 이 <대륙의 영웅>은 그 가운데에서 백미편이라는 정평
이 나 있다.
이 소설은 한번 손에 쥐면 마치 전기에 감전되듯 읽는이
를 매료시키고 몰아의 경지로 몰고가는 흥미와 감동을 주기
에, 감히 필독을 권하는 바이다.




제 1장 묘령(妙齡)의 낭자와 곤륜삼성(崑崙三聖)


화창한 봄날

해마다 맞는 한식(寒食)

배꽃의 계절이어라.

흰 비단결처럼 활짝 핀 저 꽃은 진정 향기롭거니와

잎새 무성함은 백설과 같도다.

조용한 밤.

차가운 달빛에 젖어

그 찬란한 빛을 뿌리니

속세의 천상이 따로 있을소냐.


그 수려한 자태

고결한 기질은 가히 천자이어라.

많은 꽃 속에 섞여

더욱 돋보이는 우아함이여

그 드높은 기상 어디에다 견주랴.


이것은 남송말년 무학명가인 구처기(丘處耭)가 지은 무속념(無
俗念)의 한 귀절이다.

구처기의 도호는 장춘자(張春子)라 하며, 전진칠자(全眞七子)중
의 한 사람이며 전진교에서 가장 빼어난 인물 중의 하나였다.

그가 지은 이 사는 배꽃을 읊조린 것 같지만 사실은 흰옷을 입
은 미모의 소녀를 찬미한 것이다.

<고결한 기질>, <만화속에 섞여 더욱 돋보이는 우아함>이라고
그가 찬송한 절세미인은 바로 고묘파(古墓派)의 제자인 소용녀
(小龍女)였다.

그녀는 늘 흰 옷을 즐겨 입었으며 고결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장춘자 구처기는 종남산에서 그녀와 이웃해 살면서 단 한 번
보고 이 사(詞)를 지은 것이다.

구처기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고, 소용녀도 이미 신주대협
양과(揚過)의 아내가 되었다. 한데, 하남 소실산으로 뻗은 산길
에서 한 소녀가 이 사를 읊조리고 있지 않은가.

소녀의 나이는 줄잡아 열 아홉, 담황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나귀를 타고 천천히 산길을 따라 오르며 깊은 생각에 잠
겼다.

'용언니 같은 인물이어야만이 그분과 짝지을 자격이 있지.....'

그녀가 말한 '그'는 바로 신주대협 양과였다.

그녀는 고삐도 잡지 않은 채 나귀가 이끄는 대로 느릿느릿 산길
을 거슬러 올라갔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중얼거리듯 나직이 읊조렸다.

"만남의 기쁨은 짧고 헤어짐의 고통은 길어라. 누가 알랴, 여인
의 일편단심을. 불러도 님은 대답없고 구름 저 만리 겹겹 산중
을 헤매며, 외로운 그림자 누구에게 향하는 걸까?"

그녀의 허리에는 단검이 걸려 있고, 여독이 가시지 않은것으로
미루어 먼 길을 온 게 분명했다.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꽃다운 나이건만 그녀의 얼굴엔
우수가 드리워져 있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이 소녀의 성은 곽(郭), 이름은 외자 양(襄)으로서 바로 대협
곽정(郭靖)과 여협 황용(黃蓉)의 차녀였다. 그리고 외호는 소동
사(小東邪).

그녀가 홀로 나귀를 타고 심산대천을 유랑하는 것은 울적한 심
정을 털어 버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울적함은 날이 갈수록 더
짙어질 뿐이었다.

하남 소실산은 산세가 가파르지만 넓은 돌계단이 구불구불 이
어져 있다. 그 돌계단의 공정은 엄청난 것으로서 당조때 고종이
소림사로 어림(御臨)하기 위해 일부러 닦은 길이며, 그 길이가
팔리(八里)에 이르렀다.

곽양은 나귀를 타고 계속 울창한 숲길을 올랐다.

맞은편에서 떨어져내리는 폭포는 일대장관을 이루고, 멀리는 구
름에 어렴풋이 가려진 산봉우리들이 병풍을 이루고 있었다. 산
길을 따라 모퉁이를 꺾어 돌자 멀리 황색 담장에 싸인 커다란 사
원이 시야에 들어왔다.

곽양은 끝없이 이어진 사원의 지붕을 바라보며 잠시 넋을 잃다
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소림사는 천하 무학의 발원지인데, 어째서 화산에서 두 번 열
린 논검대회(論劍大會)에서 오절중에 소림사의 고승이 없었을까?
자신이 없어서 행여나 명성에 손상이 갈까 봐 참석을 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무공이 비록 높다 하지만 명리를 다투기 싫어서
였을까?"

그녀는 나귀에서 내려 천천히 소림사를 향해 걸음을 옮겨 갔다.

하늘을 뒤덮을 듯 울창한 숲길, 그 사이 곳곳에 돌비석이 세워
져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돌비석에 새겨진 글은 오랜 세
월 풍파에 시달려 거의 흐릿하게 마멸돼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곽양의 마음에 새로운 감회가 어렸다.

'돌에 새긴 글도 오랜 세월이 흐르면 지워지기 마련인데, 어찌
내 가슴 속에 새겨진 것은 날이 갈수록 더욱 뚜렷해지는 걸까?'

문득, 커다란 석패에 당태종이 소림사 승려들에게 직접 시사한
어묵(御墨)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 가허소림사승입공평란(嘉許小林寺僧立功平亂) ------

비문에는 당태종이 당시 진왕(秦王)의 신분으로 왕세충(王世忠)
을 토벌할 때 소림 승려들이 종군하여 공을 세운 업적이 수록돼
있었다.

당시 이름이 알려진 고승은 모두 열 세 명이었는데, 단지 운종
만이 대장군으로 봉해졌고 나머지 열 두명은 벼슬을 원치 않아
당태종이 그들 각자에게 자라가사(紫羅袈裟) 한 벌씩을 시사했다
고 한다.

곽양은 속으로 생각했다.

'수당때에 소림사의 무공은 이미 천하에 그 명성을 떨쳤으니,
그후 수백 년이 흐른 지금은 더욱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을 것
이다.'

와호장용(臥虎藏龍)의 소림사!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속세를 등진 채 이 속에서 불학과 무공을
연마하고 있을까!

곽양은 소림사에 대해 새롭게 경의를 느꼈다.

그녀는 양과,소용녀 부부와 화산(華山)에서 헤어진 후, 삼년이
넘도록 그들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곽양은 그들이 그리워졌다. 이번에 강호를 돌아보고 오겠다는
구실로 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집을 떠났지만, 사실은 양과의 소
식을 알아보는게 목적이 었다. 그들 부부와 꼭 대면을 하지 않아
도 좋았다. 다만 양과의 소식을 얻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
다.

이날, 곽양은 하남으로 들어서 문득, 소림사의 무색선사(無色禪
師)가 양과와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는 생각이 되살아났다. 자
기가 열 여섯 번째 생일을 맞았을 때, 무색선사가 양과의 체면
을 생각해 사람을 시켜 한 가지 선물을 보내왔었다. 비록 직접
무색선사를 만나본 적은 없지만, 혹시 양과의 행적을 알고 있을
것 같아 이렇게 소림사를 찾아온 것이다.

그녀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쇠사슬을 질질 끄는
소리에 이어 낭랑한 염불소리가 들려왔다.

".......무량백천만억대중지중(無量百千萬億大衆之中) 설승묘
가타왈(說勝妙伽他曰), 유애고생우(由愛故生憂), 우애고생포(由
愛故生怖) 약이어애자(若離於愛者) 무우역무포(無憂亦無
怖)......."

곽양은 그 소리에 넋 나간사람처럼 멍해지며 중얼거렸다.

'사랑함으로써 근심이 생기고(由愛故生憂), 사랑함으로써 두려
움이 생기니(由愛故生怖), 만약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若離
於愛者) 근심도 두려움도 없으리(無憂亦無怖).......'

사슬 끄는 소리와 더불어 염불소리가 차츰 멀어져 갔다.

곽양은 아랫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떻게 해야지만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지만
근심과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지 그에게 물어봐야겠다!'

그녀는 나귀를 아무렇게나 나무에 묶고 뒤쫓아갔다.

숲속 뒤편에 산 위로 뻗친 작은 오솔길이 있는데 한 스님이 작
대기 양쪽에 커다란 통을 대롱대롱 매달아 짊어지고 천천히 걸어
가고 있었다.

급히 뒤쫓아간 곽양은 절로 눈이 휘둥그래졌다. 작대기 양쪽에
매달려 있는 통은 보통 물통보다 두 배 가량 더 컸다. 뿐만 아
니라 스님의 목과 손발에는 굵은 사슬이 감겨져 있어 걸음을 옮
길 때마다 요란한 소리를 냈다. 철통의 무게만 하더라도 최소한
삼백근은 넘을것이다. 게다가 물이 가득 찼으니 실로 엄청난 무
게였다.

곽양은 얼른 소리쳤다.

"대화상(大和尙), 여쭈어 볼 말이 있으니 잠깐만 기다려 주세
요."

스님은 고개를 돌렸다.

순간, 두 사람은 모두 멍해지고 말았다. 뜻밖에도 그 스님은 각
원(覺遠)이 아닌가!

삼 년 전에 두 사람은 화산 절정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각원은 비록 성격은 괴팍하지만 공력이 심후하여 당금무림 중
어느 고수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곽양은
반색을 했다.

"이제 보니 각원대사였군요. 그런데 왜 이 모양으로 변했죠?"

각원은 소리없이 웃으며 합장을 했다. 한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대꾸없이 이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겨가는 게 아닌가.

곽양은 약간 당황해 하며 소리쳤다.

"각원대사, 저를 모르겠어요? 저는 곽양이예요!"

각원은 고개를 돌려 빙긋이 웃으며 턱을 끄덕여 보였으나 걸음
을 멈추지는 않았다.

곽양은 다시 소리쳤다.

"누가 이렇게 대사를 쇠사슬로 묶어 학대를 하는 거죠?"

각원대사는 등 뒤를 향해 손을 흔들며 더 이상 묻지 말라고 했
다.

곽양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해졌다. 게다가 무시를 당한
듯한 느낌에 오기가 뻗쳤다. 그녀는 각원대사의 앞을 가로막고
따지기 위해 재빨리 쫓아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각원대사는 온몸이 쇠사슬로 감겨져 있
고, 또한 육중한 철통을 짊어진 상황이거늘 아무리 곽양이 소리
를 내어 뛰어가도 그를 앞지를 수가 없었다.

곽양은 더욱 오기가 뻗쳤다.

이번에는 가전비학인 경신술을 전개해 허공을 가로지르며 몸을
날렸다. 아쉬운 대로 우선 철통이라도 낚아잡을 생각이었다. 그
러나 결과는 매 마찬가지. 곧 손에 잡힐 것 같으면서도 시종 석
자 남짓의 간격이 떨어졌다. 남달리 자존심이 강한 곽양은 아랫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대화상, 꼭 붙잡고야 말겠어요!"

각원대사는 계속 일정한 속도로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사슬
에서 나는 금속성과 더불어 그는 오솔길을 따라 뒷산 쪽으로 향
했다.

곽양은 계속 경신술을 쓰며 뒤쫓아가다가 제풀에 지쳐 숨을 씩
씩 몰아쉬었다. 이제 그녀는 오기보다도 감탄이 앞섰다.

"아버님과 어머님이 화산에서는 이 대화상의 무공이 비범하다고
말씀하신 것을 당시엔 별로 믿지 않았는데, 오늘 직접 대해 보니
과연사실이군...."

곽양은 그를 붙잡겠다는 생각을 포기한 채 여유를 갖고 뒤 따랐
다.

얼마 후, 각원대사는 작은 집 안으로 들어가 철통의 물을 모두
뜨락에 있는 우물 속에다 부었다.

곽양은 어리둥절해져 소리쳤다.

"대화상, 혹시 미친 게 아니예요? 왜 애써 물을 길어 우물에다
붓죠?"

각원대사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두를 뿐이었다.

곽양은 문득 느끼는 바가 있었다.

"음....., 이제보니 고매한 무공을 연마하는 중이군요?"

각원대사는 대꾸없이 고개만 또 내둘렀다.

곽양은 은근히 화가 났다.

"조금 전에 분명히 염불을 하는 걸 들었는데, 벙어리가 아니면
서 왜 말을 하지 않는 거죠?"

각원대사는 합장을 하며 미안해 하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철통
을 짊어지고 산을 내려갔다.

곽양은 얼른 우물로 달려갔다. 우물은 바닥이 환히 보일정도로
맑았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별다른 것은 없었다. 그녀는 멀어져
가는 각원대사의 뒷모습을 멀건히 바라보며 의혹만 짙어갔다.
뒤쫓아간들 소용없다는 것을 안 곽양은 아예 우물 둘레의 난간에
걸터앉아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소실산이 하늘을 찌르듯 우뚝 솟아 있고, 그 주위에 면면히 이
어진 붕우리가 엷은 안개에 싸여 병풍을 이루고 있었다. 이제는
광활한 소림사가 발 아래로 내려다 보였다. 그곳으로부터 종소리
가 바람결에 실려 은은하게 들려오니, 실로 세속을 벗어난 아늑
함이었다.

곽양은 턱을 괴고 혼자 생각에 잠겼다.

'그 대화상의 제자는 어디에 있을까? 대화상이 도무지 입을 열
지 않으니 그를 찾아 내 물어 봐야지.....'

그녀는 각원대사의 나이 어린 제자인 장군보(張君寶)를 찾아 연
유를 물을 생각으로 천천히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얼마 동안 걸
어 내려가자 홀연 사슬이끌리는 소리가 들리며 각원대사가 다시
물을 길어서 올라오는 모습이 멀리 보였다.

곽양은 얼른 나무 뒤로 몸을 숨기며 중얼거렸다.

'대관절 무슨 꿍꿍이 속인지 몰래 지켜봐야지.....'

사슬소리가 가까이 들려옴에 따라 물통을 짊어진 각원대사가 손
에 책을 들고 열심히 섕조리는 모습이 시야에 뚜렷이 들어왔다.

곽양은 그가 자기 곁에까지 걸어노자 난데없이 뛰쳐나가 소리쳤
다.

"대화상, 무슨 책을 읽죠?"

각원대사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고 말았다.

"아니?!..... 낭자가....."

곽양은 이제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이젠 벙어리 흉내를 내지 못하겠죠? 왜 말을 하지 않는거죠?"

각원은 다소 두려운 표정으로 좌우를 두리번 살피며 연신 손을
흔들었다.

곽양은 눈쌀을 가볍게 찌푸렸다.

"뭘 두려워하는 겨예요?"

각원대사가 뭐라고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갑자기 숲속에서 키
가 훤칠하고 작달막한 두 회의(灰衣) 스님이 걸어나왔다. 그 훤
칠한 스님이 대뜸 호퉁을 쳤다.

"각원, 계법(戒法)을 어기고 스스로 입을 여는 것도 용서못할
일인데, 더구나 젊은 여시주(女施主)와 대화를 하다니! 여서 우
리를 따라 계율당(戒律堂) 수좌(首座)에게 가자!"

각원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변명도 못하고 두 스
님의 뒤를 따랐다.

이것을 본 곽양은 크게 노했다.

"세상에 말을 못하게 하는 엉터리 계율이 어디 있어여! 나는 저
대사와 잘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말을 걸었는데, 당신네들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예요?"

훤칠한 스님은 이내 눈을 부라렸다.

"분사는 천 년 동안 여시주의 출입을 금해 왔소. 낭자는 더 이
상 말썽을 부리지 말고 속히 하산하도록 하시오!"

곽양은 더욱 화가 나서 대꾸했다.

"여자가 어쨌다는 거예요? 여자는 사람이 아닌가요? 그리고 무
엇 때문에 이 각원대사를 사슬로 묶고 말도 못하게 괴롭히는 거
예요?"

스님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설령 황제라 해도 본사의 일을 간섭하지 못하는데 낭자가 무엇
때문에 나서는 거요?"

곽양은 성난 음성으로 따졌다.

"이 각원대사는 충짓하고 선량한 사람이예요! 당신네들은 그가
착하다고 해서 멋대로 괴롭혀도 되는 거예요? 흥! 천명선사(天鳴
禪師)는 어디에 있죠? 그리고 무색화상과 무상화상(無相和尙)은
어디에 있어요? 그들에게 직접 따지겠으니 어서 불러오세요!"

두 스님은 모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놀랐다.

천명선사는 소림사의 장문인(掌門人)이고, 무색선사는 나한당
(羅漢堂)의 수좌, 무상선사는 달마당(達摩堂)의 수좌로서, 모두
무림 천하에 그 법명이 널리 알려진 덕망 높은 고승들이었다. 본
사내의 승려들은 항상 장문인, 나한당 소좌, 달마당 소좌로만 칭
할 뿐, 감히 직접 법명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런데, 한낱 젊
은 낭자가 산에 나타나 멋대로 이름을 부르다니,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두 스님은 모두 계율당 수좌의 제자로서 스승님의 명에 따라 각
원을 감시하고 있던 중이었다.

곽양의 무례한 말에 훤칠한 스님이 대뜸 호통을 쳤다.

"여시주, 다시 불문성지(佛門聖地)를 욕되게 하는 언동을 하면
용서치 않을 것이오!"

곽양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그런다고 해서 내가 겁먹을 줄 아나요? 어서 각원대사의 몸에
묶은 사슬을 풀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당장 천명 노화상을 찾
아가 따지겠어요!"

키 작은 스님은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그녀의 허리에 단
검이 있는 것을 보고 홀연 입을 열었다.

"여시주와 공연히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 무기를 버리고
어서 하산을 하시오!"

곽양은 순순히 단검을 풀어 두 손으로 받쳐든 채 냉소를 날렸
다.

"좋아요, 원한다면 분부에 따르죠."

어릴 적에 소림사의 불문에 입적한 키 작은 스님은 윗 사람들로
부터 소림사가 천하무학의 발원지이며, 제 아무리 명망이 높거나
무공이 고매한 무림 고수라 할지라도 감히 무기를 갖고 입산하지
못한다는 말을 누누히 들어 왔었다. 이 젊은 낭자는 비록 사문
(寺門) 안으로 걸음을 들여놓지는 않았지만, 소림사 경내에서 검
을 휴대하고 있자 따끔하게 일침을 놓은 것이다.

그녀가 순순히 검을 풀자 겁을 먹은 걸로 생각한 스님은, 느긋
하게 손을 내밀어 검을 받으려 했다.

그런데----------

그의 손이 검집에 닿는 순간, 갑자기 손목에 심한 충격을 느끼
며 한 갈래의 힘줄기가 단검으로부터 뻗쳐 나왔다. 그러자 그는
비틀거리며 이내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그는 비탈길에 서 있었
는데, 쓰러지자 데굴데굴 아래로 굴러내려가 간신히 몸을 가누었
다.

훤칠한 스님은 놀라움과 분노가 엇갈려 냅다 호통을 쳤다.

"감히 소림사에서 행패를 부리다니, 호랑이 간(肝)이라도 먹은
모양이군."

그 스님은 호통을 치기 무섭게 앞으로 한 걸음 내닫으며 왼손을
오른쪽 손등에 붙여 쌍장을 쭉 З어냈다. 바로 소림의 절학인 츰
소림의 스물 여덟번째 초식인 번신벽격(飜身劈擊)의 자세였다.

곽양은 검을 쥔 채 검집으로 스님의 어깨를 후려쳤다. 그러자
스님은 어깨를 살짝 번뜩이며 손으로 허공에 반원을 그리듯 검집
을 낚아챘다.

한쪽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각원대사는 다급해졌다.

"어서 손을 거두시오!"

스님이 이렇게 말하며 검집을 나꿔챈 순간, 손목에 심한 진통을
느꼈다.

'아뿔사!'

그가 내심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을 때는, 곽양의 왼발이 이미
가슴을 강타했다. 그도 비탈길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가 받은
충격은 좀전 키 작은 스님보다 더 심해, 얼굴에 찰과상을 입어
피가 흘러내렸다.

곽양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양대협의 소식을 물으러 왔다가 공연히 싸움만 벌였군.'

그녀는 각원이 울상이 되어 한쪽에 서 있는 것을 보자, 이내 단
검을 뽑아 사슬을 끊어 주었다. 이 단검은 절세기보(絶世奇寶)는
아니지만, 지극히 예리해 요란한 금속성을 내며 사슬을 여러 토
막으로 잘라 버렸다.

각원은 크게 당황해 하며 소리쳤다.

"낭자, 이러면 아니 되오!"

곽양은 아랑곳하지 않고,

"뭐가 안 된다는 거예요!"

하고 한 마디 쏘아 붙이더니, 사내(寺內)를 향해 달려가는 두
스님을 바라보며 다음 말을 이었다.

"저 못된 화상들이 가서 고자질하면 일이 귀찮게 될 테니, 우린
어서 달아나요! 참 대사의 제자는 어디에 있죠?"

각원은 그저 손을 좌우로 흔들 뿐이었다.

이때 등 뒤에서 갑자기 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염려해 주어서 고마워요. 저는 여기 있어요!"

곽양이 고개를 돌려보니, 열 대여섯 살 가량된 소년이 서 있었
다. 짙은 눈썹에 초롱초롱한 눈동자, 몸집은 비록 크지만 얼굴에
는 천진난만한 티가 남아 있었다. 바로 삼 년 전, 화산에서 본
적이 있는 장군보(張君寶)였다.

곽양은 무척 반가왔다.

"이곳의 못된 화상들이 너의 사부를 업신여기니, 어서 떠나도록
하자!"

장군보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의 사부님을 업신여기는 사람은 없어요."

곽양은 각원대사를 가리키며 따졌다.

"너의 사부님을 저렇게 사슬로 묶고 말 한 마디 못하게 하는 것
이 괴롭히는 게 아니고 뭣이냐?"

각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 이상 일을 확대시키지 말고 속히
하산하라는 뜻으로 연신 산 아래쪽을 가리켰다.

곽양은 더 이상 꾸물댈 수 없었다. 소림사의 고수들이 몰려오면
불리해질 것이 뻔했다.

그녀는 다짜고짜 장군보와 각원대사의 손을 잡고 재촉했다.

"어서가요! 자세한 얘기는 이곳을 벗어난 다음에 하기로 해요!"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 사이에 비탈길 아래 사원쪽으로
부터 칠팔 명의 승려가 손에 곤봉을 들고 달려오면서 소리쳤다.

"어디서 온 못된 것이 감히 소림사에서 행패를 부리느냐?"

장군보가 얼른 목청을 높여 외쳤다.

"여러 사형들, 고정하십시요! 이 분은....."

곽양이 이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내 이름을 밝히지 마!"

그녀는 오늘 일이 크게 벌어질지 모르므로, 될수 있는 한 부모
님을 연루 시키지 않으려 했다.

그녀는 다시 재촉했다.

"어서 산을 내려가요! 절대 우리 부모님의 신분을 밝히지 말아
요!"

이때 그들의 뒤쪽 산 위에서도 대여섯 명의 승려가 달려왔다.

곽양은 눈살을 찌푸리며 더욱 다급하게 재촉했다.

"사내 대장부가 왜 이다지도 용단이 없죠? 대관절 떠날 거예요,
안 떠날 거예요?"

장군보는 각원대사의 눈치를 살폈다.

"스승님, 곽 낭자는 우리를 위해....."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아래쪽에서 또 네 명의 황의 승인이 뛰쳐
나와 날렵한 신법으로 비탈길 위로 달려왔다. 그들은 모두 무기
는 갖지 않았지만, 비범한 신법으로 미루어 무공이 상당한 경지
에 있는 것 같았다.

곽양은 주위의 상황이 이젠 혼자서 달아나기에도 때가 늦었음을
알고, 길게 숨을 들이쉬며 다음 변화를 기다렸다.

앞장서 달려온 승인이 그녀와 사 장(丈)의 간격을 두고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한당 수좌의 명을 전하는 바이니, 불청객은 속히 무기를 내
려놓고 산 아래 일위정(一韋亭)으로 내려가 다음 분부를 받들도
록 하시오!"

곽양은 냉소를 날렸다.

"소림사의 대화상이 벼슬아치의 못된 말투를 흉내내는군요. 속
세를 떠나 염불이나 하는 대화상들이 대송(大宋) 황제의 관원이
라도 된단 말인가요? 아니면, 몽고(蒙古) 황제의 신하라도 된단
말입니까?"

이 무렵--------

송조(宋朝)의 국토는 이미 함락되어 소림사의 소재지는 벌써 몽
고관할에 들어갔다.

다만, 몽고 대군이 몇 년째 양양(襄陽)을 함락시키겨다 실패하
는 바람에 소림사까지 그 힘이 미치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소
림사는 예전과 변함없는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승인은 곽양의 비웃는 듯한 말을 듣자 얼굴이 좀 붉어졌다. 자
신이 생각하기에도 사내 제자가 아닌 외부 사람에게 지나치게 명
령투로 말했다는 것을 깨닫고, 이번에는 합장을 하며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

"여시주께서 무슨 일로 폐사를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무
기를 내려놓으시고 일위정으로 가서 기다려 주십시오. 따끈한 차
라도 대접해 올리겠습니다."

곽양은 상대방의 말투가 부드러워지자 이를 기회삼아 일을 마무
리 지으려했다.

"사내로 들어기지 못하게 한다면 그만두죠. 흥! 혹시 소림사안
에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될 보물 단지라도 있나요!"

이에 장군보에게 눈짓을 하며 나직이 물었다.

"같이 떠나지 않겠어?"

장군보는 고개를 내두르며 스승님을 모셔야 한다는 뜻으로 살짝
턱으로 각원대사를 가르켰다.

곽양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좋아, 나 혼자 떠나는 수밖에 없겠군!"

그녀는 비탈길 아래로 달려내려갔다.

첫번째 황의 승인이 옆으로 길을 비켜 주었다. 그러나 두 번째
승인과 세 번째 승려가 동시에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만! 무기를 내려놓고 가시오!"

곽양은 대뜸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검을 쥐었다.

첫 번째 승인이 입을 열었다.

"여시주께서 산 아래로 내려가시면, 우린 즉시 보검을 돌려드릴
겨요. 이것은 소림사가 천 년 동안 엄수해 온 규칙이니 양해해
주십시오."

곽양은 그가 예의를 갖추고 정중하게 말하자 내심 망설여 졌다.

'만약 단검을 내놓지 않으면 틀림없이 싸움이 벌어질 텐데, 나
혼자서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을 당해 낼 수 있단 말인가? 그렇
다고 해서 단검을 풀어놓으면 부모님과 여러 사람들의 체면이 손
상될 게 뻔한데........'

그녀가 망설이며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갑자
기 눈앞에 황영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차가운 호통이 들려왔다.

"검을 하고 소림사에 나타나 사람까지 다치게 했으니, 이런 법
이 어디 있나?"

이어 경풍(勁風)이 일며 곽양의 검을 나꿔채려 했다.

이 승인이 서둘러 출수만 하지 않았더라도, 곽양은 스스로 검을
풀어 놓았을 것이다. 그녀는 언니인 곽부(郭芙)와 성격이 달라
비록 호방한 면은 있지만 경솔하지는 않았다. 당장 자신이 처한
상황이 불리하므로, 모든 것을 꾹 참았다가 나중에 웃어른들과
상의 해 체면을 만회할 생각이었다. 한데, 상대방이 갑자기 기습
을 가해 오자 오기가 생겼다.

이 승인의 금나수법(檎拿手法)은 날카로우면서도 절묘했다. 그
는 기습을 가하기 전부터 단단히 각오가 되어 있었다. 속세를 떠
난 승려가 감을 한 자루 가운데 두고 젊은 여자와 함께 서로 끌
고 당기는 것은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므로, 단 일격에 검을 빼
앗아 오려고 했다. 하여, 검집을 나꿔쥐는 동시, 왼손으로 곽양
의 어깨를 향해 장풍(掌風)을 뻗어 냈다. 곽양이 스스로 검을 포
기하고 물러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순순히 검을 빼앗길 곽양이 아니었다. 그녀는 상대방의
장풍을 피해 뒤로 물러나면서 검을 뽑았다. 다시 말해, 상대방이
쥐고 있는 검집은 포기한 채 검만 뽑은 것이다. 순간, 그녀의 검
은 허공에 싸은 "한 광채를 뿌렸다. 그와 동시에 검집을 나꿔쥔
승인은, 왼손 두 손가락이 절단되며 그 고통으로 인해 검집을 떨
어뜨리고 황급히 옆으로 물러났다. 승인들은 동문(同門)이 부상
을 당한것을 보자, 격노하며 일제히 곤봉을 휘둘러 공격해 왔
다.

그녀는 곧 가전비학인 낙영검법(落影劍法)을 펼치며 산 아래로
뚫고 내려갔다. 승인들은 삼열로 나누어 그녀의 앞을 막았다.

낙영검법은 바로 황약사(黃藥師)의 낙영장법((落影掌法)에서변
화시킨 것으로, 비록 옥소검법(玉篠劍法)만큼 절묘하지는 못해도
도화도(桃花島)의 절학임에 틀림없었다.

삽시간에 주위는 무수한 검화(劍花)로 뒤덮혔다. 눈깜짝할 사이
에 다시 두 명의 승려가 부상을 입었다. 뒤쪽에서 지켜 보고 있
던 승려들도 달려와 협공을 펼쳤다.

상례로 보아, 곽양은 중과부적으로 이십여 명이나 되는 소림 승
려들의 협공을 당해 낼 수 없었다. 하지남, 소림 승려들은 자비
(慈悲)를 근본으로 삼고 있는 만큼 그녀의 생명을 손상시키고 싶
지 않았다. 살수(殺手)를 피해, 단지 그녀를 쓰러뜨려 무기를 빼
앗고 훈계를 하여 쫓아버리는 게 목적이었다.

어런 상황아래 곽양의 검법이 뜻밖에도 절묘하여 승려들은 좀처
럼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승려들은 처음엔 상대가 한낱 묘령
의 여인이므로,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검법이 정교한 것을 보고 비로소 그녀가 범상치 않은 내
력을 지녔다는 것을 깨닫고 뒷일을 생각해 도욱 지나친 공격을
펼치지 못했다.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한 사람을 시켜 나한당 수
좌인 무색선사에게 이 사실을 알리도록 했다.

잠시 후--------

한창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키가 훤칠하고 깡마른 노승
이 느긋한 걸음으로 가까이 걸어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싸움을
지켜보았다.

두 명의 승인이 얼른 그에게 다가가 나직이 아뢰었다.

곽양은 이미 지쳐 있었다. 따라서 검법도 흩어져 아슬아슬하게
몸을 피하며 소리쳤다.

"무학의 발상지라더니, 열댓 명의 화상이 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소림의 무학이란 말이냐?"

노승은 바로 나한당의 수좌인 무색선사였다. 그는 곽양의 외침
을 듣자 이내 명령을 했다.

"모두 손을 거두어라!"

승인들은 즉시 손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무색선사는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낭자의 이름은 무엇이며 영존(令尊)과 영사(令師)는 어느분인
가? 그리고 무슨일로 소림사에 왔는지 밝혀줄 수 있겠나?"

곽양은 속으로 잽싸게 생각을 굴렸다.

'부모님의 이름을 밝힐 순 없다. 양대협의 소식을 얻기 위해 이
곳에 왔다는 것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털어 놓을 수 없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부모님이 아시면 틀림없이 나를 나무랄 테니 시
치미를 떼고 일단 이곳을 벗어나고 봐야겠다.........'

그녀는 곧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나의 이름을 밝힐 수는 없어요. 난 다만 산 위의 경치가 아름
다워 감상하기 위해 올라온 것뿐이예요. 소림사가 황궁보다 더
무서운 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 무엇 때문에 아무 이유 없
이 남의 무기를 몰수하려는 거죠? 내가 귀사 산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라도 했나요? 내가 알기로는, 애당초 달마조사가 무예를
전수한 것은 승려들의 튼튼한 몸을 단련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어
요. 한데 소림은 세월이 흐를수록 그 무예를 발전시켜 마치 무림
의 군주처럼 행세하는군요! 좋아요! 무기를 몰수하겠다면 기꺼이
드리죠. 나를 죽이지 않는 한 오늘 당한 이 억울한 일을 온 강호
에 알리겠어요!"

곽양은 본디 말에 재치가 있었다. 게다가 오늘 일은 그녀의 일
방적인 잘못도 아니었다. 무색선사는 그녀의 장황한 말을 듣고
나서 할말을 잃었다.

곽양은 내심 득의 만만해 하며 냉소를 짓더니 단검을 땅에 팽개
치고 곧장 앞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무색선사가 앞으로 비스듬히 걸음을 떼어 승포 소맷자락을 살짝
떨치자, 단검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는 단검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입을 열었다.

"낭자가 정녕 가문과 사문의 내력을 밝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면, 이 보검을 다시 거두게. 노승이 직접 산 아래까지 모셔다 주
겠네."

곽양은 생긋이 웃었다.
곽양이 이 아름다운 경관에 도치해 있는데, 홀연 산비탈길 움푹
패인 응달 뒤쪽에서 웬 거문고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곽양
은 내심 의아해 했다.

'이런 깊은 산중에서 거문고 뜯는 고인야사(高人倻士)가 있다
니......'

그녀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로부터 금기서화(琴棋書畵)를 배워
왔다. 비록 어느 분야도 남들에게 내세울 만큼 높은 경지를 터득
하지는 못했지만, 워낙 총명하고 엉뚱한 데가 있어 어머니와 논
금(論琴) 담서(談書)할 때 곧잘 남들이 생각해 내지 못하는 독특
한의견을 내놓곤 했었다. 그런 곽양인지라 거문고 소리를 듣자
호기심이 생겨, 곧 나귀에서 내려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겨갔다.

약 십여 장 정도 갔을까, 거문고 소리 속에 무수한 새들의 지저
귀는 소리가 한데 어울려 들려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자세히 들어보니 거문고 소리와 새소리가 서로
응답을 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곽양은 몸을 숨긴 채 거문고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세 그루의 소나무가 나란히 서 있는 곳에 흰옷을 입은 남자가 등
진 채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리를 틀고 앉아 있는 그의 무
릎 위에 초미금(焦尾琴)이 놓여 있고, 손을 절묘하게 움직여 거
문고를 뜯고 있는 중이었다. 그 둘레 나무 위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뭇새들로 가득했다. 새들은 제각기 지저귀며 거문고 소리와
일문일답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서로 어울려 합창을 하는 것 같기
도 했다.

곽양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어머님께서는 금조(琴調)중에 이미 실전된지 오래된 공산조어
(空山鳥語)라는 신곡(神曲)이 있다고 하였는데, 혹시 바로 그 곡
이 아닐까?'

잠시 귀를 기울여 보니 거문고소리는 차츰 높아졌다. 하지만 높
아질수록 흐름이 더욱 온화해지며 결코 소란스럽지가 않았다.

그러자------

새떼들은 어 이상 지저귀지 않았다. 단지 허공에서 날개짓하는
소리가 크게 일며 동서남북으로부터 무수한 새들이 떼지어 날아
와 나뭇 가지에 내려 앉거나 원을 그리며 호공을 맴도았다. 새
들의 날개는 햇살을 받아 오색찬연한 빛이 발해지며 일대 기관
(奇觀)을 이루었다.

거문고 음률이 계속 들려오며 온 우주를 그 음률 속에 감싸버릴
듯했다. 곽양의 놀라움과 호기심은 갈수록 짙어졌다.

'거문고소리로 새떼를 끌어모을 수 있다면, 혹시 이 곡이 바로
백조조봉(百鳥朝鳳)이 아닐까?'

그녀는 외조부님이 이곳에 계시지 않는것을 애석하게 생각했다.
외조부의 천하무쌍한 옥소와 함께 어우러진다면 가히 병세쌍절이
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흰 옷의 사나이는 우아한 손놀림으로 "랍은 음을 몇 번 튕기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었다.

"무장검(撫長劍), 일양미(一揚眉), 청수백석하리리(淸水白石何
離離)? 세간무지음(世間無知音), 종활천재(縱活千載), 역복하익
(亦復何益)?.........."

--------검을 어루만지며 눈썹을 휘날려 물줄기 따라 어디메로
흘러가는고? 세상에 이 소리를 아는자없으니 천 년을 산들 무슨
낙이 있으랴?-------

여기까지 읊조린 그는 거문고 아래서 한 자루의 장검을 뽑았다.
순간, 시퍼런 검광이 주위에 뿌려졌다. 곽양은 호기심어린 눈으
로 그의 동작을 지켜보았다.

'이제보니 문무(文武)를 겸비한 사람이군. 검법은 과연 어느 정
도일까?'

그는 고송 앞 공지로 천천히 걸어 나오더니, 검 끝으로 땅을 가
리키며 한 획 한 획 그어 나가기 시작했다. 곽양은 몹시 이상하
게 느껴졌다.

'세상에 저런 괴이한 검법이 있나? 검 끝으로 땅에 획을 그린다
고 해서 적을 제압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종잡을 수 없는 괴인
이군..........'

곽양이 은밀히 그의 검초를 세어보니 가로로 모두 열 아홈초를
그었다. 이어 검초가 세로로 바뀌어 역시 열 아홉 획을 그었다.
그의 검초는 종횡을 막론하고 시종 일직선으로 그어 내리기만 할
뿐, 변화가 없었다.

곽양은 그의 검세(劍勢)에 따라 손 끝으로 땅에다 그려보더니,
이내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가 전개한 것은 괴이한 검법이
아니라 검 끝으로 땅에다 종횡 열 아홉 줄의 바둑판을 그린 것이
다. 그는 바둑판을 그리고 나서 검 끝으로 좌상을 그린 것이다.
그는바둑판을 그리고 나서 검 끝으로 좌상각(左上角)과 우하각
(右下角)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어 우상각과 우하각에다
×표를 그렸다. 이번에는 곽양은 작은 동그라미와 ×표의 의미를
곧 알 수 있었다. 동그라미는 흰돌이며 ×표는 검은 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계속 그려나가다가 열 아홉 수에 이르자, 그는 갑자기
고개를 숙인 체 깊은 생각에 잠겼다. 대마를 이을 것인지 아니면
변(邊)을 취할 것인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곽양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사람은 나하고 마찬가지로 적막한가 보지. 아무도 없는 산
속에서 거문고를 튕겨 새를 불러 모으고, 상대도 없이 홀로 바둑
을 두고 있으니.........'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흰 돌을 좌상각에 놓으며 검은 돌과
치열한 다툼을 벌여 나갔다. 삽시간에 묘수가 백출되었다. 북에
서 남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중원(中原)을 차지하기 위한 혈투가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나갔다.

곽양은 속출되는 모수에 빨려들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차츰
차츰 가까이 접근해 갔다. 흰 돌의 포진은 시종 열세에 처해 있
어, 아흔 세 수째에 패가 되자 백세(白勢)가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여전히 억지로 버텨나갔다. 당국자미(當局者迷) 방관자
청(傍觀者淸)이란 말이 있듯이, 곽양은 비록 바둑 실력이 상댑다
뛰어나지 못하지만 전세를 보다 정확하게 짚을 수 있었다. 흰 돌
이 만약 대마를 계속 물고 늘어지면 불계패를 당할 게 뻔했다.

곽양은 안타까와 자신도 모르게 한 마디 토했다.

"중원을 포기하고 서역(西域)을 취하세요!"

그는 멍해졌다. 바둑판 서쪽 귀퉁이는 아직 허허 벌판인 상태이
므로, 패를 이용해 집을 확보해 나간다면 설령 복판을 전부 내준
다 해도 한판 승부를 걸어볼 만했다.

그는 곽양의 한 마디 귀띔을 듣자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좋은 생각이야!"

그는 곧 일사천리로 국세(局勢)를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문득,
누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생각난 듯 장검을 한쪽에 버리며 몸을
돌렸다.

"어느 고인인지는 몰라도 가르침을 주어 고맙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곽양이 몸을 숨기고 있는 쪽을 향해 포권의 예를
취했다.

곽양은 비로소 상대방 "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얼굴은
길쭉한 편이며, 패인 두 눈에선 날카로운 광채가 번뜩였다. 몸집
은 깡마른데다 나이는 서른 정도로 보였다.

곽양은 본디 성격이 호방하며 남녀유별을 무시한 채 당당히 앞
으로 걸어나가 입가에 미소를 띄고 말했다.

"조금 전에 귀하의 신곡에 이끌려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데, 또
다시 흑백교전(黑白交戰)에 넋을 빼앗겨 무례하게도 훈수를 두게
되었으니 너그러이 양해해 주십시요."

그는 상대가 묘령의 소녀라는 것을 보자 약간 의아해 했다. 그
러나 곧 만면에 미소를 띄고 낭랑하게 말했다.

"낭자께서도 거문고에 대해 조예가 깊은 것 같은데, 무례가 되
지 않는다면 한 곡 들려 주시겠소?"

곽양은 역시 곽양이었다. 그녀는 주저없이 기꺼이 상대방의 청
을 받아 들였다.

"저의 어머님으로부터 탄금(彈琴)을 배웠지만, 귀하의 신기(神
技)와는 거리가 멀어요. 하지만 귀하의 묘곡(妙曲)을 들었으니
한 곡 답례를 하지 않을 수 없군요. 한 곡 뜯을 테니 흉보지나
마세요."

"내 어찌 감히......"

그는 거문고를 두 손으로 받쳐들어 곽양에게 건네주었다. 거문
고는 고색찬연하여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 같았다. 곽양은 금현
(琴絃)을 한 번 어루만지고 나서 뜯기 시작했다. 그녀가 뜯는 곡
은 고반(考槃)이었다. 그녀의 주법은 별로걸출하지 못했다. 하
지만 백의인의 얼굴에는 환희의 빛이 피어 올랐다. 그는 금성에
따라 나직이 읊어나갔다.

"고반재간(考槃在澗) 석인지관(碩人之寬) 독매오언(獨寐寤言)
영시물훤(永示勿萱)........"

-----즐겁게 심산유곡을 노니느니 님의 마음 너그러워라, 자연
을 벗삼아 홀로 잠들고 홀로 말하니, 님이여 영원히 잊지 않으
리.-----

이 사(詞)는 시경(詩經)에서 발췌한 것으로 은거지사(隱居之士)
를 노래한 것이다. 대장부가 심산유곡을 홀몸으로 유랑하며 비록
적막하고 안색이 초췌하지만, 그 높은 기상은 영원히 변치 않는
다는 뜻이다.

백의인은 이 금성에 뼈 속 깊이 와닿는 것이 있어 크게 감격해
했다. 탄금이 끝났는데도 그는넋을 잃고 제자리에 서서 움직일
줄 몰랐다.

곽양은 거문고를 가볍게 내려놓고 송림을 빠져 나가며 낭랑한
음성으로 노래했다.

"즐겁도다 송림 우거진 곳에 님의 마음 유유하리라. 자나 깨나
외로운 몸 이 마음 알리지 말지어다......"

그녀는 나귀에 올라타 다시 울울창창한 숲숙으로 향했다.

삼 년의 유랑 생활.

그녀가 겪고 보아온 기특한 일들은 너무 많았다. 백의인의 새떼
를 모으는 신기의 곡조, 검 한 자루로 혼자 바둑을 두는 괴벽 따
위는 한낱 허공을 스치는 연기에 불과했다. 바람따라 흩어지며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다시 이틀이 지났다.

손꼽아 보니 소림사의 흥미있는 구경거리가 눈앞에 다가왔다.
곽양은 아직도 소림사로 잠입해 들어갈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머님은 어떤 어려운 일도 척척 묘책을 생각해냈는데, 난 왜
이다지도 우둔할까? 좋다. 어쨌든 소림사로 가고 보자. 궁하면
통한다고, 무슨 수가 있겠지!'

그녀는 간단히 요기를 채우고 나귀를 몰아 소림사로 향했다.

소림사에서 약 십여 리 떨어진 지점에 이르렀을 때였다. 홀연
말굽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왼편 산기슭으로부터 세필의 준마가
질풍을 몰며 달려왔다.

그들은 삽시간에 곽양의 곁을 스쳐지나며 소림사 쪽으로 질주
해 갔다. 말을 탄 사람은 모두 쉰 살 가량의 노인으로써, 정장
차림에 무기를 휴대하고 있었다. 곽양은 직감적으로 느끼는 바가
있었다.

'셋이서 무기를 갖고 소림사로 향하는 것을 보니 곤륜삼성임이
분명하다. 조금만 늦었다면 재미있는 구경을 놓칠 뻔했군.'

그녀는 대뜸 나귀의 뒷볼기를 내리쳤다.

"히히힝....!"

나귀는 길게 울부짖으며 세 필의 준마를 뒤쫓기 시작했다. 그나
도저히 세 필의 준마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쌍
방의 간격이 멀리 벌어졌다. 앞서 달리는 세 노인 중에 한 사람
이 문득 뒤돌아보며 뭔가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곽양이
다시 이삼 리를 쫓아가지 세 필의 준마는 시야에 보이지 않을 정
도로 멀어졌다. 곽양은 약이 올라 호통을 쳤다.

"이 쓸모없는 나귀야! 평상시는 투정을 부리느라고 쓸데없이 힘
을 남용하더니, 막상 내가 필요할 때는 황소걸음도 제대로 못 따
라 가는구나!"

나귀를 더 재촉해 본들 소용없음을 알고, 곽양은 아예 길옆 석
정에서 쉬기로 작심했다. 나귀는 그녀의 눈치를 보듯 눈을 껌벅
거리며 석정을 끼고 흐르는 개울물을 마셨다.

이렇게 잠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홀연 말굽소리가 들
리며 세 필의 준마가 산모퉁이를 휘돌아 달려왔다. 바로 조금전
에 소림사쪽으로 질주해 가던 그들이었다. 곽양은 절론 눈쌀을
찌푸렸다.

'왜 금방 되돌아오지? 단 일격도 받아내지 못할 만큼 형편없는
존재였단 말인가?'

세 필의 준마는 곧장 석정 앞까지 달려와 멎더니 세 사람이 동
시에 안장 위에서 뛰어내렸다.

곽양은 비로소 세 사람의 모습을 똑똑히 살펴볼 수 있었다. 한
사람은 몸집이 왜소하며, 얼굴은 마치 주사를 칠해 놓은 듯 붉었
다. 그러나 더욱 붉은 것은, 얼굴 한복판에 붙어 있는 유난히 큰
주먹코였다. 그 코는 주독이 올라 빨갛게 타오르고 있는 것 같았
다. 코와는 달리 눈은 하현달처럼 가늘어 가만히 있어도 웃는 낯
이었다. 제법 자상한 인상을 풍기는 노인이었다. 두 번째 노인
은, 몸집이대나무를 연상케 하며 일년 내내 햇살을 받지 못한
사람처럼 얼굴에 푸른 기운이 감돌았다. 이 사람의 몸집과 용모
는 첫 번째 노인과 극히 대조적이었다. 세 번째 노인의 외모는
평범했다. 단지 병자처럼 안색이 누르스름했다.

곽양은 또 버릇처럼 호기심이 생겨 넌지시 물었다.

"세 분은 소림사까지 갔다오셨나요? 어째 이렇게 빨리 돌아왔
죠?"

대나무처럼 깡마른 노인이 그녀의 말이 몹시 못마땅한 듯 눈을
브라렸다. 그러나 딸기코 노인은 헤벌쭉 웃으며 오히려 반문했
다.

"낭자는 우리가 소림사에 간 것을 어떻게 알지?"

곽양은 입을 삐쭉거리며 대답했다.

"이곳에서 곧장 올라갔으니 소림사로 간 게 당연하잖아요!"

역시 딸기코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 말도 일리가 있군. 낭자는 어디로 가는 길인가?"

"세 분이 소림사로 갔으니 저도 소림사로 가는 길이죠!"

이번에는 깡마른 노인이 입을 열었다.

"소림사는 예로부터 여자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더우기 무기를
휴대하고 들어간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다."

그의 말투는 매우 거만했다. 그리고 워낙 크기도 했지만, 시선
을 곽양의 머리 위로 준 채 아예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곽
양은 무시당한 기분이 들어 자연히 말투가 도전적으로 변했다.

"그럼 당신네들은 왜 무기를 갖고 있죠? 안장에 걸려 있는 길쭉
한 봇짐은 무기가 아닌가요?"

깡마른 노인의 음성은 더욱 냉랭하게 변했다.

"네가 어찌 우리와 비교가 되겠느냐?"

곽양은 냉소를 날렸다.

"당신네들이 더 잘난 것도 없죠! 곤륜삼성이 소림사의 노화상들
과 제대로 싸워보기라도 했나요? 싸운 결과가 어떻게 됐죠?"

세 노인은 그녀의 말에 거의 동시에 안색이 변했다. 딸기코 노
인이 다그치듯이 물었다.

"낭자는 곤륜삼성의 일을 어떻게 알고 있지?"

곽양은 짤막하게 대꾸했다.

"아는 수가 있죠!"

깡마른 노인은 대뜸 앞으로 한 걸음 내닫었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며 누구의 제자냐? 그리고 무엇하러 소림사
에 왔느냐?"

곽양은 그의 위험에 순순히 굴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턱을
치켜올리며 차갑게 쏘아 부쳤다.

"그걸 당신이 상관할 필요가 있나뇨!?"

깡마른 노인은 성질이 매우 거칠고 급한 듯, 손을 떨쳐 그녀의
빰을 후려칠 기세였다. 그러나 자신의 신분을 생각해 아랫 입술
을 깨물며 참았다. 대신, 잽싸게 수법을 변화시켜 전공석화 같은
동작으로 몸을 번뜩이는가 싶더니, 어느 새 곽양의 검을 빼앗아
갔다. 실로 뜻밖의 기습이었다. 여지껏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곽
양이 이런 낭패를 당하기는 처음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녀의 무
공과 견식으로서 험악한 강호를 휘젓고 다니기에는 역부족이었
다.

무림에서는 그녀가 황용의 딸이라는 사실을 십중팔구 알고 있기
때문에, 행동하기가 편리했을 뿐이다. 특히 그녀의 생일 때 곽양
이 무림 각처에 청첩을 보냈으므로, 흑도(黑道)의 인물들까지도
거의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설령 곽정 황용의
체면을 무시한다 하더라도, 양과의 체면을 봐서라도 그녀의 비위
를 건드리는 짓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곽양 자신이 빼어난 용모
를 지녔고, 성격 또한 쾌활하여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은 게 사
실이었다. 하여 여지껏 강호에서 비록 적지 않은 퐁파를 겪었지
만 언제나 순조롭게 그 고비를 넘기곤 했다.

그런데, 창졸간에 깡마른 노인에게 검을 빼앗기자 곽양은 당황
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정면 대결을 하여 빼앗아 오자니 자신의
실력으로선 도저히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깡마른 노인은 왼손 중지(中指)와 식지(食指)로 단검을 집은 채
냉랭하게 말했다.

"이 검을 내가 당분간 보관하겠다. 네가 감히 웃어른들에게 이
렇게 무례한 것을 보니, 부모님의 가르침이 아직까지 부족했던
게 분명하다. 검을 찾고 싶으면 부모를 데리고 오라. 그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해줘야겠다!"

이 말을 들은 곽양은 화가 치밀어 얼굴이 푸르락붉으락했다. 그
녀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좋다! 나의 부모님까지 들먹여 모욕을 주다니, 네가 뭘 믿고
이렇게 건방진지 두고 보자!'

그녀는 억지로 화를 참으려는 듯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당신의 이름이 뭐죠?"

깡마른 노인은 코방귀를 날렸다.

"흥! 이른이 뭐냐고? 역시 버릇이 없구나. 내가 가르쳐줄 테니
똑똑히 들어라. 어른에게 물을 때는 [존성대명이 어떻게 되십니
까?]해야 하느니라!"

곽양은 앙칼지게 말했다.

"그 따위 어설픈 훈계는 듣고 싶지 않아요! 내가 묻는 것은 순
수한 당신의 이름뿐이예요! 이름을 밝히기 싫으면 그만두세요.
그 검이 탐나면 기꺼이 줄 용의가 있어요!"

말을 끝낸 그녀는 곧 몸을 돌려 석정 밖으러 걸어나갔다.

"다 큰 계집애의 성격이 그렇게 고약해서야 어느 누가 색시감으
로 데려가겠는가? 그렇게도 궁금하다면 내가 우리의 신분을 밝혀
주겠네. 우린 며칠 전에 불원천리(不願千里) 서역에서 이곳 중원
까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곽양은 입을 삐죽거리며 쏘아 붙였
다.

"얘기하지 않아도 알아요. 우리 중원에는 당신네들 같은 외호
(外號)를 가진 사람이 없어요!"

세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딸기코 노인이 물었다.

"낭자, 사부님은 어느 분인가?"

곽양은 소림사에서 부모의 이름을 밝히려 하지 않았지만, 지금
은 오기가 치밀어 당당하게 말했다.

"나의 아버님은 성이 곽이며 함자는 정이라 해요. 그리고 어머
님의 성을 황이며 함자는 용이에요! 스승은 없고 단지 부노님에
게 몇 가지 잔재주를 배웠을 뿐이에요!"

세 사람은 다시 서로 마주 보더니 깡마른 노인이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중얼거렸다.

"곽정? 황용?...... 그들이 어느 문파며 누구의 제자지......?"

이렇게 되자 곽양은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았다. 부모님의 명성은
이미 만천하에 알려죠, 설령 무림인이 아닌 일반 백성이라 해도
양양을 끝까지 지킨 곽대협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한데, 이
세 사람은 모른다고 하니..... 그들의 표정으로 미루어 거짓이
아닌 성 싶었다. 잠시 생각을 굴린 곽양은 이내 깨달았다.

'이들 곤륜삼성은 틀림없이 줄곧 서역 심산유곡에서 무공을 닦
아 왔으며 바깥 세상의 일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모양이군.....'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화가 풀렸다. 그녀는 본디 작은 일을 미
투리꼬투리 따지는 옹졸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나의 이름은 곽양이라고 해요. 내 이름을 밝혔으니, 이제 세
분도 존성대명을 밝히셔야죠!"

딸기코 노인은 헤벌쭉 웃었다.

"뉘 집 딸인지 똑똑하군, 한 번 가프쳐 주니까 금방 말투가 공
손해졌단 말야! 웃어른에게 그렇게 깍듯이 대하는 게 도리지."

그는 안색이 누르스름한 노인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쪽은 우리의 큰 형님이신 반천경(潘天耕) 어른이시다."

이어 자신의 주먹만한 딸기코를 엄지로 가리켰다.

"나는 둘째인 방천로(方天勞)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대나무처럼 깡마른 노인을 소개했다.

"이 분은 세째인 위천망(衛天望)이다. 우리 사형제의 이름은 모
두 천(天)자 돌림이지."

곽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이름을 속으로 한 번 외고 나
서 물었다.

"당신네들은 소림사까지 갔다 왔나요? 그 노화상들과 싸워 승부
가 어떻게 판가름났죠?"

깡마른 위천망의 눈에서 빛이 번뜩였다.

"넌 어째 무엇이든 다 알고 있지? 우리가 소림의 화상들과 무예
를 겨룬 일을 아는 사람이 없는데, 네가 어떻게 알았지? 어서 이
실직고 해봐라!"

이렇게 다그치면서 흡사 금방이라도 무력을 행사할 듯이 주먹을
움켜쥔 채 눈을 무섭게 부라렸다.

곽양은 속으로 코웃음쳤다.

"흥! 고분고분하게 묻는다면 솔직히 대답해 줄 수도 있지만, 그
런 투로는 어림도 없지! 내가 그 따위 위협에 넘어갈 성 싶으
나?"

그녀도 상대방에게 눈을 부라리며 차갑게 말했다.

"당신의 이름은 좋지 않아요. 차라리 천악(天惡)이라고 고치는
게 어때요?"

위천망은 버럭 화를 냈다.

"뭣이?!"

곽양은 한 발자국도 양보를 하지 않았다.

"당신같이 흉악무도한 사람은 눈을 씻고도 찾아보기가 어려워
요! 내 물건을 빼앗아 가고서도 그렇게 태도가 흉악하니 하늘에
서 떨어진 악성(惡星), 즉 천악이 아니고 뭐겠어요!"

위천망의 목에서 이내 야수의 신음 같은 괴성이 토해지면 가슴
이 갑자기 배로 팽창되고, 머리카락과 심지어 눈썹마저 곤두서는
것 같았다. 딸기코 노인 방천로가 황급히 만류를 했다.

"삼제(三弟), 제발 참게!"

그는 얼른 곽양의 손묵을 잡아 쥐고 끌어당기면서, 두 사람 사
이에 가로막고 섰다. 곽양은 위천망의 노기충만한 모습을 보자
은근히 겁이 나기도 했다. 위천망은 분풀이를 하듯 검집에서 검
을 뽑아 두 손가락으로 검신(劍身)을 집어 살짝 힘을 주자, 맑은
금속성이 들리며 검이 두 동강이로 부러졌다. 이어 반 토막의 단
검을 검집에 다시 밀어넣고 퉁명스럽게 한 마디 내뱉었다.

"이런 쓸모없는 검을 누가 갖는다고 했느냐?"

곽양은 그가 두 손가락으로 검을 부러뜨린 것을 보자 더욱 놀랐
다. 위천망은 그녀의 표정을 지켜보면 심히 득의해 앙천광소를
날렸다. 그 웃음소리는 고막을 찢을 듯 주이에 울려 퍼지며, 석
정의 기왓장마저 바스스 진동이 일었다.

그런데 석정 지붕이 뚫리며 커다란 물체가 떨어져 내린 것은 바
로 이때였다. 모두들 흠칫 놀랐다. 심지어 위천망 자신도 의아해
했다. 사실, 그가 내공을 끌어올려 광소를 터뜨린것은, 자신의
심후한 공력을 과시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래서 기왓장이 들썩거
린 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지만 천장이 뚫린 것은 실로 예외였
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력이 증진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바닥에 떨어진 물체를 확인한 순간, 더욱 놀라고 말았다.
흰 옷을 입은 중년 사나이가 거문고를 가슴에 안은 채 눈을 감고
그것에 누워 있는 게 아닌가!

곽양은 이내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앗! 여기에 있었군요!"

바닥에 떨어져 누워 있는 자는, 바로 며칠 전에 보았던 그 괴팍
한 탄금의 명수였던 것이다.

그 자는 곽양의 음성을 듣자 벌떡 일어났다.

"낭자, 낭자를 찾아헤맸는데 여기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정말 뜻밖이요."

곽양은 무슨 소린가 싶어 의아해졌다.

"왜 날 찾았죠?"

그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낭자의 존성대명을 묻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오."

곽양은 눈을 곱게 흘겼다.

"존성대명이 뭐예요? 그런 고상한 말투는 듣기가 거북해요."

백의인은 약간 쑥스러워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뎠은 말이오. 말투가 고상할수록 겉만 번드르르할뿐
숙이 텅 비었죠.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런 사람을 우러러 보는 자
는 없을 것이오."

이렇게 말한 그는,한쪽에 서 있는 위천망을 힐끗 쳐다보며 입
가에 냉솔르 띄었다. 곽양은 그의 말을 듣자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린 듯 속이 후련했다. 그와 반대로 위천망은 눈에서 독기가 뿜
어지며, 그렇지 않아도 파르스름하던 안색이 더욱 푸르죽죽해졌
다.

"당신은 누구요?!"

백의인은 위천망의 묻는 말에 아예 대꾸할 생각도 않고 곽양에
게 정중히 물었다.

"낭잔 이름이 무엇이요?"

곽양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곽양이라고 해요."

백의인은 대듬 손뼉을 쳤다.

"엇! 눈앞에 태산을 두고도 몰라 본다더니, 이제 보니 그 이름
도 유명한 곽양 낭자였군! 영준 곽정 곽대협과 영당 황용 황여협
의 명성은, 사해(四海)에 널리 알려져 몇몇 무식한 망나니를 제
외하고 모르는 자가 어디 있겠소? 그 두분이야말로 문무를 겸비
한 고금쌍절(古今雙絶)이오!"

곽양은 가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석정 지붕위에서 내가 이 세 사람과 예기하는 것을 전부 엿들
은 모양이군.'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띈 채 물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죠?"

백의인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의 성은 별(別), 이름은 건가(建家)요."

곽양은 그의 이름을 한 번 뇌까려 보더니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
랐다.

"별건가! 벌거 아니란 뜻인가요? 이름 속에 겸허의 뜻이 담겨
있군요."

별건가는 즉시 그녀의 말을 받았다.

"이름에 하늘(天)을 내세워 스스로 존귀한 양 우쭐대는 족속들
보다야 썩은 냄새가 덜 나는 이름이죠."

별건가는 줄곧 위천망 등을 겨냥해 비꼬았다. 세 사람은 그가
지붕을 뚫고 천신(天神)처럼 떨어진 사실을 예사스럽게 넘길 수
가 없어 벨이 꼴리는 것을 꾹 참고 있었다. 이 백의괴객의 정확
한 정체부터 파악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계속 자기네들을 빗대놓고 말로 몰아붙이자, 위천망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다짜고짜 그의 얼굴을 향해 일장을 날렸
다. 별건가는 살짝 고개를 숙여 그의 일장을 피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위천망은 왼쪽 손목에 따뜻한 느낌이 전해짐과 동시에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이 사라졌다.

위천망이 놀라며 홀연 정신을 차렸을 때, 단검은 이미 별건가의
손에 옮겨져 있음을 확인했다. 별건가가 전개한 신법이 어찌나
빠른지 눈으로 분간하기는 어려울 지경이었다. 위천망은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즉시 손가락을 갈
퀴처럼 구부려 상대방의 어깨죽지를 나꿔채 갔다. 역시 별건가는
비스듬히 옆으로 미끄러지면서 그의 공격을 피했다. 이째, 반천
경과 방천로는 갑자기 석정 밖으로 몸을 솟구쳤다. 위천망은 좌
권우장(左拳右掌)으로 삽시간에 십여 초식을 전개했다.

일순간, 석정안은 무서운 회오리에 휩싸였다 별건가는 두 손에
단검을 받쳐든 채 여유있게 피하며 전혀 반격할 생각을 하지 않
았다.

곽양은 비록 나이의 한계 때문에 무공이 심후하지는 못하지만,
당세 일류 고수들 틈바구니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견식은 매우 높
았다. 그녀는 별건가의 여유있으면서도 절묘한 신법을 보자 절로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별건가의 신법 무공은 독특하여 중원 각
문파에 알려진 무학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위천망은 삼십여 초식을 펼쳤는데도 상대방의 옷자락조차 건드
리지 못하자, 돌연 나직이 기합을 토하며 권법을 변화시켰다. 이
제는 출초하는 속도가 느려졌다. 그러나 힘은 좀전보다 배가 되
었다. 곽양은 팽배되는 권풍에 밀려 한 걸음씩 정자 밖으로 물러
났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별건가도 더 이상 수세만 취할 수 없
는 모양인지, 두 손에 받쳐들고 있던단검을 허리에 차고낭랑한
일성을 토했다.

"정면 승부라면 기꺼이 응해 주겠소!"

위천망의 쌍장이 뻗쳐오자, 그는 재빨리 왼손으로 일장을 밀어냈
다.

펑!!

묵직한 굉음이 터지는 가운데 위천망은 비틀거리며 뒤로 두 걸
을 물러났다. 반면 별건가는 제자리에 뿌리가 박힌 듯 전혀 움직
이지 않았다.

위천망은 자신의 심후한 내력(內力)에 대해 늘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한데, 자기보다 이십 년 정도 연하인 별건가와 정면으로
내력 대결을 하여 뒷걸음질치게 되자 놀랍기도 하고, 오기가 뻗
치기도 했다. 그는 한 모금의 진기를 끌어 올려 재차 쌍장을 뻗
어냈다. 별건가도 종전과 마찬가지로 제자리에 우뚝 서서 일장을
밀어냈다. 그 즉시 천둥치는 소리가 들리며 뚫린 천장을 통해 기
왓장의 파편이 우수수 떨어졌다.

이번에 위천망은 뒤로 네 걸음 물러나서야 겨우 몸을 고정 시켰
다. 그러자, 그의 모습이 갑자기 가공스럽게 봉두난발이 되었다.
그리고 두 손을 단전에 모아 심호흡을 ㉩ 번 하자, 가슴이 움푹
패이며 배가 두꺼비처럼 불어났다. 뿐만 아니라, 전신의 뼈마디
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천천히 별건가를 향해 다가왔다.

별건가는 그의 이러한 형상을 보자 감히 경솔하게 대할 수 없
어, 자기를 고루 조절하며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위천망이 다
섯 자 가량 간격을 두고 출수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쌍장을
펼쳐내 상대방의 목줄기와 아랫배를 동시에 노린다. 쌍장을 상하
로 교차시켜 뻗어낸 것은, 상대방의 공력을 분산시키는데 그 목
적이 있었다. 실로 예측 불허의 매서운 장세(場勢)였다.

별건가도 마찬가지로 동시에 쌍장을 교차시키며 뻗어내 왼손은
상대방의 왼손에, 오른손은 상대방의 오른손에 맞부딪쳤다. 게다
가 그의 장력은 강(剛)과 유(柔)로 나누어졌다.

위천망은 그 즉시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상대방의 아
랫배를 노린 장력은 망망대해에 빠진 바늘인 양 자취도 없이 사
라지고, 목줄기를 노렸던 오른손은 흡사 철벽에 부딪친 것 같았
으니........

그가 다음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광풍노도와도 같은 힘줄기에
휘말려 몸뚱아리가 곧장 정자 밖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강(剛)대
강(剛), 역(力)대 역(力)의 정면 대결이므로 결과는 단 한 가지
뿐이었다. 약자필상(弱者必傷)! 위천망이 정자밖으로 날아가 쓰
러지든, 신법을 전개해 사뿐히 내려서든 내샹을 입을 게 뻔한 사
실이었다.

이 순간, 반천경과 방천로의 입에서 동시에 짤막한 기합이 터지
며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몸을 솟구쳐 좌우 양쪽에서 위천망의
팔을 잡아 사뿐히 지면에 내려섰다. 그 바람에 강맹한 장력이 많
이 누그러졌다. 위천망은 비록 부상을 입지 않았지만, 오장육부
가 뒤틀리며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딸기코 방천로는 사제가 당
한 것에 저으기 놀랐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히죽히죽 웃으며 말
했다.

"귀하의 장력은 실로 대단하군. 진심으로 탄복하는 바이네."

이 말에 곽양은 속을 코웃음을 쳤다.

'흥! 장벽의 웅후함으로 따진다면, 아버님의 항룡십팔장(降龍十
八掌)을 따라갈 게 없지! 너희들 곤륜삼성은 그야말로 우물 안의
개구리 격이니 언젠가는 더욱 따끔한 맛을 보게 될 거다!'

생각이 여기에 미친 곽양은, 불현듯 양과의 모습이 뇌리를 스치
고 지나갔다. 양과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틀림없이 자기를 위해
건방진 곤륜삼성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었을텐데...... 이때
방천군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나는 비록 보잘것없는 실력이네만, 귀하의 검법을 한 번 견식
하고 싶네."

별건가는 한쪽에 서 있는 곽양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 입을 열었
다.

"방형은 곽 낭자에게 무례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적대시하고 싶지 않소. 그러니, 서로 겨루는 것을 피하도록 합시
다."

곽양은 명해졌다.

'저 사람이 위천망을 혼내 준 것은 나 때문이었단 말인가?'

방천로는 자기가 타고 온 말로 걸어가 길쭉한 봇짐 속에서 검
자루를 꺼냈다. 검술을 겨루기로 작심한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내 검집에서 검을 뽑아 손가락으로 검신(劍身)을
살짝 튕겼다.

차--- 잉---

맑은 금속성이 길게 울려퍼졌다. 방천로의 얼굴에선 이제 웃음
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왼손으로 검결(劍訣)을 꼽으며 수평
으로 밀어내는 동시, 오른손에 쥔 검 끝을 하늘로 향하게 하여
부동자세를 취했다.

선인지로(仙人之路)! 방천로가 취한 첫 번째 검초(劍招)의 기수
식(起手式)이었다. 별건가는 여유만만했다.

"방형이 정녕 겨루기를 고집한다면 난 곽 낭자의 단검으로 상대
해 주겠소."

이렇게 말하며 반 토막으로 부러진 단검을 뽑았다. 단검의 원래
길이는 두 자 가량인데, 지금은 겨우칠팔 치밖에 남지 않았다.
더군다나 검 끝이 뭉뚝하여 비수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왼손으로 검집을 쥔 채 잽싸게 선제 공격을 취했다. 실로
쾌속한 출수였다. 방천로가 눈앞에 흰 인영이 번뜩이는 것을 느
끼는 순간, 별건가는 이미 연거푸 삼초를 공격했다. 비록 단검이
너무 짧아 상대방에게 직접적인 부상을 입히기는 어렵지만 기를
꺾게 하기엔 충분했다.

방천로는 내심 흠칫했다.

'검초가 너무 빨라 막기가 어렵구나. 한데, 이게 도대체 무슨
검법이지! 녀석의 손에 만약 장검이 쥐어져 있었다면, 난 이미
피를 흘리며 쓰러졌을 것이다......'

별건가는 삼 초를 전개한 후, 곧 옆으로 물러나 움직이지 않았
다. 이번에는 방천로가 검법을 전개했다. 수비를 겸비한 공격을
계속 펼쳐나갔다.

별건가는 몸을 번뜩여 피하며 반격을 하지 않다가, 난데없이 신
속하게 삼 초를 펼쳐 방천로를 당황하게 만들고는 또다시 옆으로
물러났다.

방천로는 안전히 조롱을 당한 기분이었다. 그는 전력을 다해 검
초를 건개해 나갔다. 그의 장검이 허공을 수놓는 가운데 흰 빛이
난무했다.

곽양은 그의 검법을 지켜보며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저 늙은이의 검법은 신랄하고 강맹하여 위천망의 장법과 같은
노선을 띠고 있다. 단지 그보다 더 영활하고 힘이 강한게......'

그녀의 생각이 여기에 미쳤을 때, 별건가의 일갈이 들려왔다.

"조심하시오!"

일갈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는 왼손에 쥐고 있는 검집으로 방천
로의 검 끝을 빨아들이듯 봉쇄하며, 오른손의 단검으로 곧장 그
의 목줄기를 노렸다. 방천로의 장검은 상대방의 검집속으로 빨려
들어갔기 때문에 제대로 검초를 구사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단검
이 목줄기를 뻗쳐오자, 장검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뒹굴어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였다. 그가 몸
을 튕겨 일어서기도 전에 그림자가 번뜩이며 반천경이 이미 날아
와 장검의 손잡이를 나꿔잡았다. 다음 순간, 별건가의 검집으로
빨려들어갔던 장검이 뽑혀졌다. 별건가와 곽양의 입에서 동시에
갈채가 터졌다.

"멋진 신법!!"

시종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 안색이 누르스름한 노인의 무공이
세 사람 중에 으뜸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셈이다. 별건가는 다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귀하의 무공에 대해 감탄했소!"

이어 곽양에게 고개를 돌려 엉뚱한 말을 했다.

"곽 낭자, 얼마 전에 낭자의 빼어난 탄금 솜씨를 듣고 새로운
곡을 만든게 있소. 한 번 들어보시겠소?"

곽양은 그가 또 무슨 심산으로 갑자기 탄금 얘기를 끄집어 내는
지 자뭇 궁긍했다.

"그게 무슨 곡이죠?"

별건가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거문고를 무릎 위에 올
려놓으며, 곧 한 곡조 뜯을 자세였다. 반천경은 눈꼬리를 치켜올
렸다.

"귀하는 나의 사제들을 연거푸 В패시켰으니, 이번엔 내가 한
수 가르침을 받겠네!"

별건가는 손을 내둘렸다.

"무공은 이미 겨루었으니 더 이상 흥미가 없소. 이제부터 내가
새로 난든 곡을 곽 낭자에게 들려줄 테니, 세 분도 듣고 싶으면
자릴 잡고 앉든지 아니면 그냥 돌아가도록 하시오."

그는 상대방의 대답도 듣지 않고, 왼손으로 현을 절도 있게 누
르며, 오른손으로 거문고를 뜯기 시작했다. 몇 소절을 들은 곽양
은 절로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감격했다. 이 곡조의 일부분은
자기가 얼마 전에 연주했던 고반이고, 다른 일부분은 진풍(秦風)
에 속한 겸가(兼假)였다. 두 곡은 완연하게 다른 가락이지만, 그
가 심혈을 기울여 한데 혼합하자 일응일답(一應一答)하며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고반재간(考槃在澗) 석인지관(碩人之寬) 겸가창창(兼苛蒼
蒼), 백로위상(白露爲霜), 소위이인(所謂伊人) 제천일방(在千一
方).....석인지관(碩人之寬).....소회종지(遡廻縱之) 도조차장
(道阻且長) 소유종지(遡遊縱之) 완재수중앙(完在水中央).....독
매오언(獨寐寤言), 영시물훤(永示勿萱) 영시물훤(永示勿萱).....

-----즐겁게 심산유곡을 노니느니 님의 마음 너그러워라. 갈대
가 우거지고 아침이슬 어느덧 서리가 되었네, 사랑하는 그 사람
은 하늘 저쪽에 산다네,.....님의 마음 너그러워라. 님의 마음
너그러워라.....거슬러 올라가면 험한 길 멀기도 하여라. 물줄기
따라 올라가면, 험한 길 멀기도 하여라. 물줄기 따라 올라가면,
그 줄기 한가운데 있는 듯하니.....홀로 잠들고 홀로 말하니, 영
원히 잊지 않으리라, 영원히 잊지 않으리라.....

곽양은 가슴에 와닿는 것이 있었다.

'그가 거문고를 빌어 말하는 이인(伊人)은 혹시 내가 아닐까?
이 곡은 어이해 이다지도 사모의 정으로 가득 차 있는걸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자신도 모르게 열굴이 도화빛으로 물들었
다. 곡은 갈수록 절묘하게 흘러갔다. 고반고 겸가 두 곡조의 원
래 가락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어
응답하며 극치를 향해 치달았다. 곽양은 여지껏 이런 절묘한 곡
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한편, 반천경 등 세 사람은 그 묘미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들은 별건가의 광인(狂人)기질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참 치열
한 싸움을 벌이다가 난데없이 한 계집을 위해 거문고를 튕기기
시작했으니..... 반천경 등으로선 미친 짓으로밖에 간주할 수 없
었다. 아니, 무시를 당한 기분에 올화가 치밀기도 했다. 반천경
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장검으로 별건가의 어깨를 살짝 찍으며
소리쳤다.

"어서 일어나라! 너하고 승부를 겨뤄 보고 싶다!"

별건가는 스스로 금성(거문고소리)에 도취해 있었다. 아울러,
아리따운 소녀가 수평선 위에 서서 생긋이 미소지으며 자기에게
손짓하는 환상이 뇌리에 펼쳐졌다.

한데, 어깨에 따끔한 느낌이 전해져 오자 깜짝 놀라 환상에서
깨어났다. 비로소 그는 반천경이 검으로 자기를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자기가 방어를 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더
무서운 공격을 해올 것이다. 그렇다고 거문고를 다 뜯기 전에 탄
금을 중단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반 토막의 단검을 뽑
아 반천경의 장검을 뿌리치면서 오른손으로는 여전히 거문고를
뜯어나갔다.

이렇게 되자, 별건가는 드디어 자신이 평생 동안 닦은 절기(絶
技)를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른손으로 거문고를 뜯고 왼손으
로 검을 전개해야 하므로 더 이상 현을 누를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단전의 진기를 끌어올려 다섯 번 번 쪽의 금현을 향해 진기
를 불어낸 것이다. 그러자, 마치 손으로 누른 것과 같이 현이 아
래로 눌려졌다. 다시 말해, 반천경의 날카로운 검초의 공세를 받
으면서도 한 손으로는여전히 거문고를 튕겨나갔다.

반천경의 공격은 모두 빗나갔다. 별건가는 그와 맞서 싸우면서
도 두 눈은 계속 금현을 주시했다. 불어내는 진기의 방향이 달라
져 행여나 곡조를 망치게 할까 봐 매우 진지한 표정이었다. 반천
경은 더욱 울화가 치밀 수밖에! 그는 보다 신속 신랄하게 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그의 장검이 어느 방향으로 뻗쳐가든 별건가는
가볍게 막아 내렸다.

곽양은 아름다운 선율에 이끌려 반천경의 맹렬한 공격에 대해
그다지 기의치 않았다. 반천경은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다.
그는 돌연 검법을 변화시켜 쾌공(快功)을 시도했다. 순간, 장검
과 단검의 비딪치는 금속성이 쉴새없이 울려퍼지며 주위에 빽빽
한 검막(劍幕)이 조송되었다. 그것은 부드러운 거문고의 음률과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다. 별건가의 눈꼬리가 살짝 치켜올려진 것
은 바로 이때였다. 동시에 단검을 쥔 왼쪽 손목에 진기를 집중시
켰다.

창!!

날카로운 금속성이 들리는 가운데 반천경의 장검이 두 동강이로
잘라지고, 그와 때를 같이하여 칠현금(거문고)의 다섯 번째 줄도
끊어졌다. 반천경은 안색이 잿빛으로 변해 아무 말없이 정자 밖
으로 걸어갔다.

세 사람은 곧 말에 올라 질풍처럼 산 위로 치달렸다. 그들이 달
리는 방향을 바라보며 곽양은 심히 이상하다고 느꼈다.

'아니...... 저들은 패했으면 하산을 해야지 어째 다시 소림사
로 달려가는 걸까?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는 심산인가?'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별건가는 현이 끊어진 거문고를 어루만
지며 몹시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곽양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금현 한 줄이 끊어진 걸 갖고 과연 저렇게 심각해 할 필요가
있을까?'

그녀는 거문고를 받아 섀어진 현을 다시 길게 풀어 새로 묶고는
음을 조절했다. 별건가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탄성을 울렸
다.

"여지껏 무학을 닦아오면서 심정(心靜)의 경지를이룩하지 못하
더니..... 왼손으로 그의 장검을 부러뜨리면서, 오른손의 진기를
안배 못해 금현도 끊어진 것이오."

곽양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무공이 아직 고도의 경
지에 이르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곽양은 입가에 미소를 띈 채 그를 위로해 주었다.

"당신처럼 왼손으로 강적을 상대하며 오른손으로 느긋하게 거문
고를 뜯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것은 분심이용지법(分心二用之
法)으로서, 현재 무림에서 그것을 실수없이 해낼 사람은 단 셋밖
에 없어요. 당신은 비록 그 경지까지는 터득하지 못했지만 아주
훌륭했어요. 조금도 자신을 한탄할 필요가 없어요."

별건가는 눈동자가 빛났다.

"그 세 사람은 누구요?"

곽양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첫째는 노완동(老頑童) 주백통이고, 두 번째는 나의 아버님이
고, 세 번째는 양부인 소용녀예요. 그들 세 사람을 제외하고는
설령 나의 외조부이신 도화도주나 나의 어머님, 신주대협 양과
등도해낼 수가 없어요."

별건가는 흥분했다.

"세상에 그러한기인이 있다니 언제쯤 그들을 소개해 주겠소?"

곽양은 울적하게 말했다.

"나의 아버님을 뵙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나머지 두 사람은 어
디에 있는지 찾을 길이 없어요."

별건가는 이내 망연한 표정으로 변했다.

고가양은 그를 다시 위로해 주었다.

"당신이 여유있게 곤륜삼성을 격파한 것만 보아도 무공으로서
능히 오시강호(傲視江湖)할 수 있을 거예요."

별건가는 이 말에 깜짝 놀랐다.

"아니, 곤륜삼성이라니.....? 뭐라고 했소? 낭자가 어떻게 알고
있소?"

곽양은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방금 떠난 그 세 사람은 서역(西域)에서 왔으니 당연히 곤륜삼
성이겠죠. 그들의 무공은 확실히 독특한 데가 있지만, 소림에게
도전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아요....."

별건가의 놀란 표정이 갈수록 깊어지자, 곽양은 절로 눈쌀을 찌
푸리며 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는 거죠?"

별건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곤륜삼성이라....... 곤륜삼성 별건가는 바로 난데......"

이번에는 곽양이 깜짝 놀랐다.

"당신이 곤륜삼성이라고요? 그럼 나머지 두 사람은 어디 있죠?"

별건가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곤륜삼성은 나 혼자뿐이오. 나는 서역에서 약간의 명성을 얻었
소. 그곳 친구들은 나의 금(琴), 검(劍), 기(棋)를 높이 평가해
주어 금성(琴聖), 검성(劍聖), 기성(棋聖)으로 불러 주었소. 그
리고 난 줄곧 곤륜산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곤륜삼성이란 별호를
붙여 준 것이오. 하지만 나 스스로는 성(聖)의 칭호를 쑴을 자격
이 없다고 생각하오. 그렇다고 해서 날 삼성(三聖)이라 부르는
친구들을 일일이 찾아가 싸울수도 없는 노릇이라 아예 이름을
건가(建家)로 바꾸었소. 별호와 연결해서 부르면 [곤륜삼성 별건
가]가 되기 때문에, 듣는 사람도 내가 스스로 건방떤다고는 말하
지 않을 것이오."

곽양은 재미가 있어 박수를 쳤다.

"그랬었군요! 난 곤륜삼성이라 해서 세 사람인 줄만 알았어요.
그럼 조금 전에 그 세 노인은 누구죠?"

곽양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소림 제자란 말인가요? 음.....그들의 무공은
과연 강맹한 힘을 위주로 하던데.....맞아요! 그 얼굴이 불그스
름한 노인의 검법은 바로 달마검법이었잖아요? 그래요! 마지막으
로 그 병색이 짙은 노인이 전개한 검법은 위타항마검법(韋陀降魔
劍法)이었어요. 단지 많은 부분을 변화시켰기 때문에 선뜻 알아
보지 못한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어째 서역에서 왔죠?"

별건가가 차분한 음성으로 설명해 주었다.

"자세한 것을 예기하자면 사연이 길지요. 작년 봄, 내가 곤륜산
경신봉(驚神峯)에서 탄금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초옥(草屋) 밖에
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와 나가 보니, 두 사람이 이미 치명적인
중상을 입은 채 마지막 힘을 다해 싸우고 있었소. 그들에게 싸움
을 중단하라고 외쳤지만 듣지 않길래 억지로 떼어 놓았소. 그 중
한 사람은 그 즉시 숨을 거두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겨우 숨만
붙어 있어 초옥으로 데려가 소양단(少陽丹)을 복용시켰지만, 워
낙 기운이 쇠해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었소. 그는 죽기 직전에
윤극서(尹克西)라고 이름을 밝히며......"

여기가지 들은 곽양은,

"앗!"

하고 짤막한 신음소리를 토했다.

"그의 상대는 혹시 소상자(瀟湘子)라는 사람이 이니었나요? 몸
집이 깡마르고 얼굴이 마치 송장처럼 생기지 않았나요?"

이번에는 별건가가 의아해했다.

"맞소, 한데 그것을 어떻게 알았소?"

"나도 그들을 만난 적이 있어요. 그 한쌍의 앙숙이 끝내 서로
싸우다 모두 죽음을 당하게 됐군요."

"그 윤극서는 자신이 평생 나쁜 일만 해왔다면서 임종을 앞두고
참회를 했소. 그의 말을 빌리면, 소상자가 소림에서 경서(經書)
한 권을 훔쳐 내었는데, 그 후로부터 두 사람은 경서에 수록된
무공을 보다 많이 배워 상대방을 해치고 그 경서를 독차지하려고
했었소. 그러니 두 사람은 침식을 같이 하면서 상대방을 서로 감
시하기 위해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소. 식사를 할 때는 행여나 상
대방이 독을 넣었을까봐 경계했고, 잠 잘 때는 혹시나 기습을 전
개하지않을까 전전긍긍했다고 하오. 게다가 소림사의 추적이두
려워 결국 멀리 서역까지 달아나게 된 것이오. 그들이 경신봉에
당도했을 때는 모두 기진맥진해 있었소....."

별건가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그런 샹황이 계속되면 둘 다 지쳐 죽게 될 것을 예측하고, 드
디어 마지막 생가 대결을 벌이게 된 것이오. 윤극서의 말로는 소
상자의 무공이 원래 한 수 위라고 했소. 그런데 막상 싸움이 벌
어지자 자기가 약간 우세했다는 거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 소상
자는 화산에서 부상을 입은 게 아직 완치가 되지 않은 생태임을
알았다는 거요. 어쨌든 둘은 양패구상(兩敗俱傷)하고 말았소."

곽양은 그들이 그 동안 가슴 조이며 서로 좌불 안석해 온 생각
을 하니 절로 측은한 마음이 들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경서 한 권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별건가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윤극서가 그러한 얘기를 끝냈을 때는 이미 숨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소. 그는 마지막으로, 나더러 소림사를 찾아가 각원화상에게
그 무슨 경서가 기름 속에 있다는 말을 꼭 전해 달라고 부탁했
소.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소. 경서가 기름 속에 있다
니..... 다시 자세한 것을 물으려고 했을 때 그는 더 이상 버티
지 못하고 기절해 버렸소. 나는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리면 물어
보려고 했지만 영영 깨어나지 않았소. 나는 그 경서가 기름종이
에 싸여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두 사람의 몸을 뒤져
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소. 임종을 앞도고 한 부탁인지
라 거절할 수 없어 난생 처음으로 이렇게 중원 땅을 밟게 된 것
이오."

곽양은 그를 똑바로 주시햐며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소림사로 도전장을 보내게 되었죠?"

별건가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바로 조금 전에 떠난 그 세 사람 때문에 비롯된 거이
오. 그들은 서역 소림파의 속가제자(俗家弟子)요.서역 무림 사람
들의 말을 빌리면, 그들은 천(天)자 항렬로서 소림사의 장문인
천명선사와 향렬이 같다는 거요. 모름지기 그들의 시조는 오래
전에 소림사에세 사형제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멀리 서역으로 떠
나 소림사의 서역 지파(支派)를 창설한 모양이오. 원래 소림의
무공을 달마조사가 서역으로부터 전해 온 것이므로, 중원에서 서
역으로 뻗어간 것은 당연지사일지도 모르오. 그세 사람은 나의
별호를 듣고 한 번 겨루자고 찾아와, 말끝마다 소림의 무공이 천
하 제일이며 나도러 금성, 기성이란 호는 지니고 있어도 좋지만,
검성이란 호는 당장 지워버리라고 억지를 부렸소. 어차피 소림사
로 가야 하므로,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치르기 위해 그들에게
소림사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이렇게 중원으로 들어온 것이오.
그 세 사람은 생각보다 빨리 내 뒤를 쫓아 중원으로 들어왔소.

곽양은 비로소 모든 것을 납득하게 되었다.

"그랬었군요. 그들 세 사람이 지금쯤 소림사로 돌아갔을텐데 뭐
라고 말할까요?"

별건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는 본디 소림사의 화상들과 하등의 원한이 없소. 그래서 처
음부터 열흘 후에 겨루어 보자고 청했던 것이오. 그 세 사람이
당도한 연후에 서로 무공 대결을 하기 위해서였소. 이제 그들과
겨루어 보았으니, 함께 올라가 그 각원화상에게 말만 전해 주고
곧장 하산합시다.

곽양은 눈썹을 찌푸렸다.

"화상들의 규칙이 엄해 여자들은 사내로 들어갈 수 없어요."

별건가는 코웃음을 날렸다.

"흥! 웬놈의 규칙이 그렇게 까다롭다는 겁니까? 설마 낭자를 죽
이지는 않을 테니까 같이 올라가 보도록 합시다."

곽양은 일을 벌리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무색선사와
이미 교분을 맺었기 때문에 소림사와 적대시하고 싶지 않아 고개
를 고개를 내둘렀다.

"아니예요. 나는 산문 밖에서 기다릴 테니, 혼자 들어가 말을
전하고 나오세요."

별건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합시다. 조금 전에 그 곡을 끝까지 뜯지 못했으니 돌아
와 다시 들려 주겠소."


------ 제 1 권 1 장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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