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02

3학년2반 | 2022.03.01 07:43:58 댓글: 0 조회: 482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2051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1 권


제 2 장 무당산(武堂山)의 불세출(不世出) 기인(奇人)


두 사람은 천천히 산에 올랐다. 사문(寺門) 밖까지 이틀 동안
소림사 제자의 모습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별건가는 걸음을
멈추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도 들어가고 싶지 않으니 그 화상을 불러내 말을 전해 줘야
지."

그는 곧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곤륜산의 별건가가 한 말씀 전할 것이 있어 소림을 찾아 왔소
이다!"

그의 외침 떨어지자마자 사내 십여 곳 종루(鐘褸)에서 일제히
종소리가 울려펴졌다.

땡 ! 땡 ! 땡 !.........

우렁찬 종소리가 온 산을 진동시키며, 멀리멀리 메아리쳐 펴졌
다. 그러자, 사문이 활짝 열리며 좌우 양쪽에서 회색 승포를 입
은 승인들이 걸어나왔다. 왼쪽 쉰 네 명, 오른쪽 쉰 네 명 모두
백 팔 명으로 나한당(羅漢堂)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을 가리켜 백
팔나한(百八羅漢)이라 했다. 그 뒤를 이어 열 여덟 명의 승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회색 승포 뒤에 담황색 가시를 걸쳤으며, 나한
당 제자들보다 비교적 나이가 많아 보였다. 그들은 한 항렬이 높
은 달마당(達摩堂)의 제자였다.

잠시 후 큼지막한 네모 조각을 이은 승포를 입은 일곱 명의 노
승이 걸어나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깊이 패어 적어도
칠십 세에서 구십 세에 이르는 고령이었다. 그들이 바로 심선당
(心禪堂)의 칠장노(七長老)였다. 이어서 천명선사가 천천히 걸어
나왔고, 그의 왼쪽에는 달마당의 수좌 무상선사, 오른쪽에는 나
한당의 수좌 무색선사가 따르고 있었다. 반천경, 방천로, 위천망
은 그 뒤에서 걸어나왔고, 맨 뒤에는 칠팔십 명의 소림 속가 제
자들이 줄을 이었다. 그날 별건가가 나한당으로 잠입해 들어가
쥐도 새도 모르게서찰을 남긴 것을, 장문인 이하 무색, 무상 등
은 예사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반천경 등이 서역에서 달려와 곤륜삼성과 겨
루기로 약속했다는 것을 예기하자 사내의 고승들은 더욱 경각심
을 높였다.

서역 일파는 워낙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수십 년 동안 중원
소림사와 서로 소식을 내왕하는 예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사
내의 고승들은 왕년에 서역으로 가서 지파(支派)를 창설한 사숙
조 고혜선사(苦彗禪師)의 무공이 걸출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
었다. 그의 무공을 이어받은 후대 제자라면, 역시 무학이 비범할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여, 반천경등이 곤륜삼성에 대해 퍽
높이 평가하는 것을 듣고 더욱 경계를 했다. 더우기 장문인께선
오백 리 이내의 속가제자들로 하여금 모두 사내에 모이도록 명을
내렸다.

한편, 반천경 일행은 이번 일이 자기들로 하여 비롯된 것이니만
큼 스스로 매듭짓겠다는 생각으로, 매일 말을 타고 산길을 오르
내리며 순시를 돈 것이다. 그 금기검삼성(琴棋劍三聖)이란 자를
도중에 가로막아, 아예 산문 가까이 접근하기도 전에 코를 납작
하게 만들어 곤륜으로 다시 쫓아버릴 계획이었던 것이다. 서역
소림의 무학이 중원 소림을 능가한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과시할
속셈도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한데, 석정에서 치른 일전에 세
사람은 민망할 정도로 대패를 당한 것이다.

천명선사는 뒤늦게 그들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고, 오늘 일전이
어쩌면 소림의 흥망성쇠의 관문이 될지도 모른다는 판단 아래 삼
선당의 칠장노까지 모셔낸 것이다. 칠장노는 이미 수십 년 전부
터 뒷전으로 물러나 앉았기 때문에, 그들의 무학이 어느 정도이
며, 과연 소림이 위기에 처하게 되면 곤륜삼성을 상대하여 일익
을 담당할 수 있을는지 의문스러웠다. 심지어 천명선사와 무상,
무색까지도 정확히 단언을 내릴 수 없었다.

장문인 천명선사는 별건가와 곽양을 보자 합장하며 입을 열었
다.

"이 분이 바로 금검기삼성으로 일컫는 별거사(別居士)인 모양인
데, 노승이 미처 마중나가지 못한 것을 널리 양해해 주시오."

별건가는 몸을 숙여 정중히 답례를 했다.

"후생은 별건가라 하며 비록 삼성이란 허명(虛名)이 붙었지만
그게 별건가요?! 오늘 귀사를 소란케 하여 심히 불안한 마음 금
치 못하는데, 이렇게 많은 고승들을 대동해 영접까지 해주시니
실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천명선사는 내심 생각을 굴렸다.

'이 광생(狂生)은 말투로 보아 광인 같지 않은데, 이렇게 벎은
나이에 어떻게 반천경 등 세 사람을 일시에 격패시켰을까?'

천명선사는 반천경 등의 무공을 과대 평가하고 있는 게 분명했
다. 그는 곧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별거사, 너무 겸허하구료. 이렇게 먼 길을 찾아 주었으니 안으
로 들어거 차라도 한 잔 나눕시다. 헌데, 이 여 보살은........"

그는 말끝을 흐리며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별건가는 그가 곽양의 입사(入寺)를 거절하는 눈치를 보이자 이
내 광성(狂性)이 발작되어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노방장, 후생이 귀사를 찾아온 것은 본디 한 사람의 부탁을 받
아 말을 전해 주는 게 목적이외다. 그런데 귀사는 여자를 경시하
는 묘한 규칙이 있는 것 같군요. 그 점이 마음에 거슬립니다. 내
가 알기로 불법(佛法)은 끝이 없으며 중생(衆生)은 모두 똑같거
늘, 어찌 일방적으로 남녀를 차별 대우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습
니다."

천명은 득도한 고승으로서 선심(禪心)이 명천하고 관용지덕을
지녀 별건가의 말에 미소로 답했다.

"별거사의 귀띔을 고맙게 받아들이겠소. 우리 소림이 남녀지분
(男女之分)을 고집한다면 옹졸하다는 핀잔을 받게 될지도 모르
니, 곽 낭자도 함께 사내로 모셔 차를 대접하겠소."

이렇게 말하고 나서 한쪽으로 비켜서며 별건가와 곽양으로 하여
금 앞장서라는 손짓을 했다. 천명 왼쪽에 있던 깡마른 노승이 앞
으로 한 걸음 내닫으며 냉랭하게 말했다.

"벌거사의 한 마디로서 본사가 천 년 동안 지켜온 규율을 파기
하는 것도 좋지만, 과연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추었는지 한 수 가
르침을 받고 싶소. 그래야지만 대외적으로도 명분이 설 게 아니
겠소?!"

이 자는 바로 달마당의 수좌 무상선사였다. 그의 음성이 카랑카
랑하여 주위를 진동시키는 것으로 보아, 내력이 퍽 심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천경 등 세 사람은 이 말에 모두 안색이
변했다. 무상선사의 말 속에는 자기네들 세 사람을 무시하는 뜻
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별건가가 비록 자기네 세 사람을 격
파했지만, 진정한 실력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뜻이 아닌가!

곽양은 무상선사의 난처해 하는 표정을 보고, 얼른 나서서 낭랑
한 음성으로 말했다.

"별대협, 우린 꼭 소림사 안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잖아요. 말만
전해 주고 곧 떠나도록 해요."

그녀는 쌍방이 서로 싸우는 것을 원치 않았다. 소림사가 패하든
별건가가 패하든 모두 그녀가 바라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어 그녀는 무색선사에게 눈길을 주며 말을 계속했다.

"무색선사는 나와 친분이 있으니 서로 화기(和氣)가 손상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별건가는 멍해졌다.

"앗! 그랬었구료."

이어 천명선사를 향해 말했다.

"노방장, 귀사의 각원선사는 어느 분입니까? 부탁받은 일이 있
어 그에게 몇 마디 전해 줄까 합니다."

천명선사는 나직이 뇌까렸다.

"각원선사......?"

직위가 낮은 각원은 수십 년 동안 장경각에서 은신해 왔기 때문
에 별로 이름이 알려 있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이름 뒤에다<선
사>라는 두 글자를 붙이자 천명은 선뜻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잠시 명해져 있다가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앗, 바로 그 능가경을 분실한 자를 말하는 거요? 벌거사가 그
를 찾는 것은 혹시 능가경과 관련이 있소?"

"나도 모르겠습니다."

천명이 곧 제자 한 사람에게 분부했다.

"가서 각원을 불러 오라."

분부를 받은 제자는 총총히 사내로 달려갔다.

무상산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별거사가 금검기삼성으로 자처하는 것으로 보아 각 방면에 빼
어난 조예를 지니고 있는 게 분명한데, 오늘 이렇게 어려운 걸음
을 한 감에 한 수 보여 주지 않고 그냥 떠나실 수가 있겠소?"

별건가는 여전히 고개를 내둘렀다.

"이 곽 낭자가 말했듯이, 우린 서로 화기를 손상시키지 않는 것
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무상선사는 그가 계속 거절하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가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상대방은 분명 도전의 기미가
짙은 서찰을 미리 보내오지 않았던가! 어째서, 막상 한판 승부를
눈앞에 둔 이 순간에 이르러 점잖을 빼는 것일까? 무상선사는 희
롱을 당한 기분이었다. 천 년 이래 그 누가 감히 소림사에 이런
무례를 범한 예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반천경 등이 패했으니,
이 사실이 강호에 알려진다면 명실 공히 검성(劍聖)이란 호가 더
욱 굳건해질 게 아니겠는가!

무상선사는 기필코 소림의 위신을 만회하겠다는 일념에서 끈질
기게 상대방의 출수를 유도했다.

"무학을 겨루는 것은 서로의 실력을 측량하는 것으로서 화기에
손상되지는 않을 것이외다."

그는 상대방이 뭐라고 발뺌하기도 전에 고개를 돌려 달마당 제
자들에게 소리쳤다.

"검을 갖고 오라! 오늘 이 기회에 <검성>의 검솔이 어느 정도로
성스러운지 가르침을 받아 보자!"

사내에는 각종 무기가 이미 준비돼 있었다. 단지 예의상 주(主)
된 입장에서 객(客)이 무기를 전개하기 전에 먼저 무기를 전개하
지 않는 것뿐이었다.

무상선사의 분부를 듣자 제자들은 이내 사내로 들어가, 대여섯
자루의 장검을 갖고 와 두 손에 받쳐들고 별건가에게 보이며 말
했다.

"별건가께선 자신이 갖고 온 보검을 사용할 겁니까? 아니면 본
사의 평범한 겸을 사용할 겁니까?"

별건가는 아무 대꾸없이 몸을 굽혀 모서리가 뾰족한 돌을 줍고
는, 갑자기 사문 앞 청석판(靑石板)에다 종횡으로 금을 긋기 시
작했다. 삽시간에 종횡 열 아홉 줄이 되는 커다란 바독판이 완성
되었다. 한 줄 한 줄이 마치 자로 잰 듯 반듯하며, 모두 고르게
청석판에 반 치 가량 패어 들어갔다. 이 석판은 소실산에서 나는
청석으로서 견고하기가 무쇠에 버금갔다. 소백 년 동안 숱한 사
람이 밟고 다녔지만 전혀 닳은 흔적이 없었다.

그런데, 별건가가 아무렇게나 돌로 그어 깊이 패이게 했으니,
실로 놀라운 내력이 아닐 수 없었다.

별건가는 여유있게 웃으며 말했다.

"검을 겨루다 보면 본의 아니게 불상사가 생길 우려도 있으니,
바둑으로서 한 판 승부를 겨루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가 펼친 놀라운 절기에 천명,무색, 칠장노는 모두 서로 마주
보며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천명선사는 사내에서 이 자의
웅후한 내력을 당해 낼 자가 없음을 간파하고 솔직히 패배를 시
인하려는데, 홀연 사슬이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각원화상이 그 큼직한 철통을 짊어지고 가까이 걸어왔다. 그의
뒤에는 나이 어린 소년이 따랐다. 각원은 왼손으로 지게를 잡은
채,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들어올려 천명께 정중히 인사를 올렸
다.

"장문인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천명은 별건가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 거사께서 너에게 전할 말이 있다고 한다."

각원은 몸을 돌려 별건가를 쳐다보았다. 그를 알 리가 없었다.

"소승이 각원인데, 거사께선 무슨 분부가 있습니까?"

별건가는 바둑판을 완성했으므로 기흥(棋興)이 일어 다소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전할 말은 나중에 천천히 해도 늦지 않소. 어느 대사께서 먼저
소생과 바둑을 한 판 두시겠소?"

그가 일부러 무공을 과시하기 위해 이러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금검기에 대해 광적으로 좋아하기 때문에, 일단 흥이 나면 하늘
이 무너져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오직 바둑
에만 몰두해 다른 일을 모두 뒷전으로 미룬 것이다.

천명선사가 정색을 하고 그의 말을 받았다.

"별거사가 펼친 화석위극(畵石爲克)의 신공은, 노승이 난생 처
음 보는 것으로 본사 중승이 도저히 따를 수 없음을 시인하오."

각원은 천명선사의 말을 듣고 다시 청석판에 그려진 바둑판을
보자, 상대방이 무공을 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여, 그
는 철통을 짊어진 채 한 모금의 진기를 들이키더니, 평생 동안
닦은 공력을 전부 두 다리에 주입시켜 바둑판 위를 천천히 걸어
다녔다. 그가 사슬을 끌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청석판에 다섯 치
가량의 깊은 발자국이 찍혔다. 그로 인해 별건가가 그린 줄이 지
워졌다. 중승은 그것을 보자 절로 갈채를 보냈다. 천명, 무색,
무상 등은 더욱 놀라움과 기쁨을 금치 못했다. 어수룩하게 생긴
각원이 이런 심후한 내력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그와 수십 년
동안 한 울타리 안에서 생활해 오면서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천명선사는 한 사람의 내공이 제아무리 심후하다 해도, 청석판
에 다섯 치 가량 패이는 발자국을 남기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각원은 한 쌍의 커다란 철통을 짊어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속에 물이 가득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자체의
무게만 해도 사백 근이 넘었다. 그 중량의 힘과 자신의 내력을
합쳐 비로소 가능한 일이었다.그렇다 하더라도 보기 드문 절세
신공임에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별건가는 그가 바둑판의 줄을 다 지워버리기도 전에 소리 높히
외쳤다.

"대화상, 소생은 그 심후한 내공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음을 시
인합니다."

각원은 단전의 진기가 성해질수록 두 다리가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상대방의 외침을 듣자 이내 걸음을 멈추며 입가
에 미소를 띄고 말했다.

"송구스럽소."

별건가는 각원에 대해 대단한 흥미를 갖게 되었다.

"바둑은 내가 패했으니, 이번에는 검법을 가르침 받고 싶소이
다!"

그는 곧 등에 맨 칠현금 바닥 밑에서 한 자루의 장검을 뽑아 검
끝으로 자신의 가슴을 겨냥하며 검자루를 비스듬히 바깥쪽으로
뻗어냈다. 마치 검을 돌려 자결하는 것과 같으니,실로 괴이한 기
수식(起手式)이었다. 천하 검법 중에 이런 엉뚱한 일초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각원은 몹시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노승은 평생 염불만 외고 책을 손질하며 청소하는 일만 해왔을
뿐, 무공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소이다."

별건가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스쳐가는 순가, 장검이 휘어지면서 튕겨나가 곧장 각원의 가슴을
향하였다. 어느 검법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신속했다. 이 일 초
는 일단 검신에 진력을 주입시켜 그 진력을 이용해 튕겨 내는 것
이었다.

한편, 각원대사의 내력은 이미 이심제동(以心制動)의 경지에 이
르러 있었다. 심신합일(心身合一)! 별건가의 검이 비록 빨랐지만
각원의 심념(心念)은 더욱 빨랐다. 뇌리에 스치는 생각에 따라
몸이 움직인 것이다. 순간 지게 양쪽에 매달려 있는 철통이 자연
스럽게 그네처럼 흔들려 그의 앞을 막아 주었다.

챙!!

날카로운 금속성이 들리는 가운데 검 끝이 철통에 찔렸다. 부드
러운 검신(劍身)은 반원을 그리며 휘어졌다. 별건가가 즉시 초식
을 변화시켜, 두 번째 공격을 시도하자 각원은 역시 철통으로 막
아냈다.

별건가는 내심 생각해 보았다.

'무공이 제아무리 고강해도, 저렇게 육중한 철통으로 나의 쾌속
한 검을 막진 못할 것이다.'

그가 손가락으로 검신을 살짝 튕기자 용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
가 메아리 쳐 퍼졌다.

"대화상, 조심하시오!"

그는 전후좌우로 순식간에 십 육초식을 펼쳐냈다. 거기에 따라
요란한 금속성이 연거푸 열 여섯 번 울려 퍼졌다. 뜻밖에도, 별
건가가 전개한 열 여섯 초식 신뢰검(迅雷劍)이 전부 철통에 적중
된 것이다. 주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
이 손에 식은땀을 쥐었다. 각원의 몸놀림이 너무나 위대해 보였
기 때문이다. 그는 당황해 하며 단지 본능적으로 몸을 피할 뿐,
정말 무공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의 상황이
오죽이나 아슬아슬해 보였겠는가! 그런데도 그의 둔해 보이면서
도 우스꽝스러운 몸놀림에 따라 별건가의 절묘무쌍한 검법이 모
조리 봉쇄당한 것이다.

무색, 무상선사등은 차마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어 약속이나 한
듯 소리쳤다.

"벌거사, 그만 손을 거두시오!"

곽양도 소리쳤다.

"그만 하세요!"

모두들 각원이 무공을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지 직접
공격을 전개하고 있는 별건가만이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뿐이
다. 전력을 다해 공격을 시전해도, 상대방의 옷자락조차 건드리
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은근히 오기가 생겨, 갑자기
대갈일성하며 한광(寒光)이 뿌려지는 가운데 각원의 아랫배를 향
해 곧장 찔러갔다. 각원은 놀라 짤막한 비명을 질렸다.

"앗!"

아울러 반사적으로 철통 두 개를 가운데로 모았다.

창!

순간, 거창한 금속성이 터지며 두 개의 철통이 서로 맞부딪치더
니 상대방의 장검을 사이에 끼웠다. 별건가는 즉시 손목에 진력
을 주입시켜 검을 거두려고 했지만, 뿌리가 박힌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임기웅변은 실로 신속 정확했다. 그는 검에서 오른손을 떼
며 쌍장을 일제히 밀어냈다. 순간, 한 갈래의 산을 무너뜨릴 듯
한 장력이 각원의 얼굴을 향해 휘몰아쳐 갔다. 각원이 철통에서
손을 떼 그 장풍을 막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위기일발의 순간
이었다. 이때 한쪽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장군보는, 생각
을 굴릴 겨를도 없이 앞으로 몸을 솟구쳐 예전에 양과로부터 배
운 사통팔달의 초식으로서 비스듬히 별건가의 어깨를 강타해 갔
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각원의 내력이 철통속으로 연결돼 두 줄
기의 물기둥이 별건가의 얼굴을 향해 쏜살같이 뻗쳐나갔다.

장력과 물기둥이 서로 허공에서 맞부딪치자 불꽃이 사방으로 튕
겨 두 사람 모두 물벼락을 맞은 꼴이 되었다. 어쨌든 별건가의
웅후한 장력은 이로써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 반면, 별
건가는 미처 장군보의 기습을 피할 새가 없이 어깻죽지에 일장을
맞았다. 장군보는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장법이 기이하고 내력
(內力) 또한 믿어지지 않을 만큼심후해, 별건가는 비틀거리며
비스듬히 세 걸음이나 물러나 겨우 몸을 고정시켰다.

각원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미타불.....아미타불..... 별거사, 노승을 살려 주시구료.
가슴이 두근거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소이다."

별건가는 우롱당한 기분이었다. 그는 성난 음성으로 외쳤다.

"소림사가 와호장룡(臥虎藏龍)한 곳이라더니 과연 사실이구료.
일개 어린 소년까지 이런 비범한 무공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오!
이놈, 네가 나의 십 초식을 받아낸다면, 다시는 살아 생전 중원
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

무색, 무상 등은 장군보가 장경각에서 자일을 돕는 애일 뿐 무
공을 전혀 배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아무렇게나 일장을 전개해, 우연히 별건가에게 충격을 준 것이라
생각했다. 만약 정말로 별건가와 겨루게 된다면, 십 초식이 아니
라 단 일 초도 받아내지 못하고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무상선사는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별거사, 그건 당치도 않은 말이오! 곤륜삼성이라 자처하는 자
가 어찌 일개 잡일을 하는 어린 것과 무공을 겨루겠다는 거요!
정녕 원한다면 빈승이 대신 십 초를 받아보겠소!"

별건가는 고개를 내둘렀다.

"난 여지껏 이런 낭패를 당한 적이 없소. 이 일장의 빚은 기어
코 갚고야 말겠소! 자, 이놈아! 각오를 단단히 해라!"

말을 내뱉기 무섭게 장군보의 가슴을 향해 일장을 뻗어냈다. 신
속한 출수였다. 장군보는 그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무
색, 무상 등이 구원의 손길을 뻗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주위
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가슴이 철렁했다.

순간, 장군보는 제자리에 서서 발끝을 살짝 왼쪽으로 트는 동시
몸을 오른쪽 방향으로 돌려 우인전보(右引箭步)로서 절묘하게 그
의 일장을 피했다. 뿐만 아니라, 잇따라 왼손으로 주먹을 쥐어
허리를 호위하고, 오른손을 칼날처럼 세워 격출하니..... 이것은
바로 소림파의 기본 장법인 우천화수(右穿花手)가 아닌가! 이 일
초에 담긴 진기는 태산 같고, 장세(掌勢)는 황하(黃河)의 물줄기
같았다. 도저히 어린 한 소년의 솜씨로는 믿어지지 않았다.

별건가는 직접 일장을 맞아 보았기 때문에, 이 소년의 내력이
반천경 등 세 사람보다 훨씬 심후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일 초식 이내에 이 소년을 격패시킬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소년이 전개한 우천화수는, 비록 소림의 가장 기초적인 초식이지
만 그 웅후한 힘과 온건한 자세는 실로 반격을 가할 수 있는 틈
이 없었다.

별건가는 자신도 모르게 갈채를 보냈다.

"훌륭한 장법이군!

무상은 문득 느끼는 바가 있어 무색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
다.

"사형, 축하합니다. 언제 저런 훌륭한 제자를 거두었습니까?"

무색은 고개를 내둘렀다.

"아니..... 난....."

그가 말을 잇기도 전에 장군보는 이보랍궁(移步拉弓), 단봉조양
(單鳳朝陽) 이랑담삼(二郞擔衫), 세 초식을 연거푸 전개했다. 그
엄한법도의 강맹한 힘은 소림파 일류 고수에 비해 추호도 손색
이 없었다. 천명, 무색, 무상과 칠장노는 장군보가 소림의 초식
을 이렇게 멋드러지게 전개하는 것을 보자, 모두 눈이 휘둥그래
질 뿐이었다.

무상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장법의 법도가 이렇게 엄한 것은 고사하고 저 내력은 도저
히....."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별건가는 여섯 번째 초식을 펼쳤다.
그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 어린애도 당해 내지 못하면서 소림사에 도전장을 보냈으니,
천하 무림인의 웃음거리가 될 게 아니겠는가!'

그는 갑작스레 몸을 회전시켜 천산설표(天山雪瓢)의 초식을 전
개했다. 순간, 장영이 난비하며 장군보의 사면팔방을 모두 감싸
버렸다. 장군보는 화산 절정에서 양과로부터 네 초식을 가르침
받은 것 외에는 누구에게도 무공을 전수받은 일이 없었다. 한데,
이렇게 현묘무쌍한 상승 장법을 어떻게 와해시킬 수 있단 말인
가? 위급한 상황 아래서 그는 상반신을 좌측으로 돌려 한계세(寒
鷄勢)를 취하고, 쌍장을 이마 위로 올려 왼손 호구와 오른손 호
구가 멀리 마주 보게 만들었으니..... 바로 소림권법 중에 한 초
식인 쌍권수(雙拳手)였다. 이 일 초를 펼친 장군보의 늠름한 자
세는 대웅전에 모셔놓은 금동불상을 연상시킬 만큼 중압감이 있
었다. 별건가가 어느 방위에서 진격해 오든 모두 그의 쌍권수 아
래 감싸 여질 것이다.

달마당과 나한당 제자들의 입에서 절로 우뢰와 같은 갈채가 터
졌다. 그들은 장군보에게 진심으로 탄복했다. 그는 소림의 가장
평범한 권초로서 상대방의 가장 오묘하고 복잡한 초식을 와해 시
킨 것이다.

갈채가 터지는 가운데 별건가는 맑은 기합을 토하며 장군보의
가슴을 향해 일권을 격출해 냈다. 그 일권은 그가 임기웅변으로
변화시킨 것이지만 위력이 엄청났다. 장군보는 거기에 대항하여
쌍장으로 편화칠성(偏花七星)이란 초식을 밀어냈다.

평!!

권풍과 장풍이 격돌되자 일성 굉음이 터지며 별건가는 몸이 휘
청거렸고, 장군보는 뒤로 세 걸음 밀려났다.

"흥!"

별건가는 냉소를 날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내딛는 동시에, 똑같은
권법을 구사했다. 장군보도 앞서와 마찬가지로 편화칠성을 수평
으로 밀어냈다. 또다시 굉음이 터지며 이번에는 장군보가 다섯
걸음이나 물러났다.

별건가는 하마터면 뒤로 한 걸음 밀려날 뻔했기 때문에 안색이
크게 변했다.

"이제 한 초식밖에 남지 않았으니 각별히 조심해라!"

그는 앞으로 세 걸음 내딛어 자세를 굳건히 하더니, 일권을 천
천히 격출했다.

이때, 소림사 앞에 모인 수백 명은 모두 숨을 죽였다. 그들은
별건가의 마지막 일격이 어느 정도 위력을 지니고 있는 지 짐작
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 일격은, 그가 평생 동안 쌓아올린
명성이 좌우될 것이다.

장군보는 세 번째로 편화칠성 초식을 전개했다. 이번에도 장
(掌)과 권(拳)이 맞부딪쳤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갑자기 얼어붙은 듯,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제각
기 모든 내력을 끌어올려 대치했다. 무공의 기교로 따진다면 별
건가가 장군보보다 백 배는 더 앞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
내력을 겨룸에 있어서는 상황이 달랐다. 장군보는 구양진경(九陽
眞經)의 심법(心法)을 배워 체내의 내력이 도도한 물줄기처럼 팽
배했다.

별건가는 즉시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도저히 장군보의 내력
을 당해 낼 자신이 없음을 간파하고, 곧장 몸을 솟구쳐 장군보의
장력이 허공에 분산되게 만들었다. 동시에 민첩한 신법을 펼쳐
장군보의 등을 살짝 밀었다. 장군보는 그 바람에 땅에 쓰러져 약
간의 충격을 받은 듯 금새 일어나지 못했다.

별건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자탄하듯
중얼거렸다.

"별건가야, 정말 별게 아니었구나!"

그는 천명선사를 향해 턱이 땅에 닿도록 큰절을 올렸다.

"천 년 동안 명성을 떨쳐온 소림의 무공은 정말 대단하군요. 오
늘에서야 소림의 명성이 명실상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진심으로 승복합니다."

말을 끝낸 그는 곧 몸을 돌려 발끝으로 살짝 땅을 찍어 수장 밖
으로 표연히 날아갔다. 곧 사뿐히 땅에 내려선 그는 각원대사에
게 말했다.

"각원대사, 대사께 말을 전해 주라는 사람이 있었소. 경서가 기
름 속에 있다고 했습니다!"

말을 끝낸 그는 다시 몸을 솟구쳐 눈깜짝할 사이에 시야에서 사
라졌다. 혀를 내두를 만큼 신속 절륜한 신법이었다.

장군보는 비로소 천천히 꿈틀대며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온통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비록 별건가에 의해 쓰러졌지만
주위에 있는 고수들은 내력 대결에서 장군보가 한수 위였음을 알
고 있었다.

심선당 칠장노 중에 한 사람이 갑자기 소리쳤다.

"저제자의 무공은 누가 전수해 주었느냐?"

그의 음성은 지극히 냉랭하여 엄동설한에 밤까마귀가 울어대는
것 같았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절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한기
를 느꼈다.

천명, 무색, 무상도 벌써부터 똑같은 의문을 갖고 있었기 때문
에, 일제히 각원과 장군보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각원과 장군
보는 멀건히 서서 선뜻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천명이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각원은 비록 내력이 심후하지만 권법은 배우지 않았다. 한데
저 애의 소림권은 누구로부터 전수받은 것이지?"

달마당과 나한당의 제자들도 자못 궁금했다. 오늘 소림이 봉착
한 위기를 해결해 준 장본인이 일개 잡일을 하는 어린애일 줄이
야. 실로 뜻밖이었다. 만약 그에게 무공을 전수해 준 사부가 나
선다면, 장문인께서 필시 후한 상을 내릴 것이라 생각했다.

칠장노 중의 노승은 장군보가 멀건히 서 있는 것을 보자, 눈꼬
리를 치켜세우며 만면에 살기를 띄었다.

"너에게 묻질 않았느냐! 대관절 누가 너에게 나한권을 가르쳐
주었느냐?"

장군보는 품 속에서 그 곽양이 준 한 쌍의 철나한을 꺼냈다.

"제자는 이 철나한의 흉내를 내서 혼자 몇 수 연습했을 뿐, 어
느 누구에게도 무공을 전수받은 일이 없사옵니다."

노승은 성큼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음성을 낮추었다.

"다시 한 번 똑똑히 말해 보아라! 너의 나한권을 본사의 어느
사부로부터 전수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운 것이란 말이냐?"

그는 비록 음성을 낮추었지만, 그 음성 속에는 짙은 살기가 풍
겼다.

장군보는 잘못한 일이 없으므로, 노승의 살기등등한 모습에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낭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제자는 단지 장경각에서 차를 끓이고 청소를 하며 각원 사부님
의시중을 들어왔습니다. 본사의 어느 사부님도 제자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지 않았습니다. 나한권은 제자가 스스로 배운 것입니
다. 만약 틀린 데가 있으면, 노사부님께서 지도를 해주십시오."

노승의 눈에선 갈수록 짙은 살기가 뿜어지며, 한참 동안 꼼짝도
않고 장군보만 노려보았다.

각원대사는 이 심선당의 노승이 장문인의 사숙으로서 항렬이 자
뭇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 때문에 장군보를 살기
띤 눈으로 노려보는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곧 뇌리
에 전광석화처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어느 해였는지 기억이 없지만, 장경각에서 우연히 한 권의 작은
책자를 훑어본 적이 있었다. 그 얄팍한 책은 수초본(手抄本)으로
서 소림의 한 가지 중대 사건이 기록돼 있었다.


-------- 약 칠십 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 소림의 장문인은 고승
선사(苦乘禪師)로서 바로 천명선사의 사조였다.

그 해 가을이 무르익어 갈 무렵, 사내의 연례 행사로 달마당대
교(達摩棠大校)가 거행되었다. 그것은 달마당과 나한당의 두 수
좌가 제자들의 무공이 일 년 동안 얼마 만큼의 진전이 있었는지
평가하는 행사였다. 제자들이 모두 무공을 펼쳐 보인 후, 달마당
의 수좌인 고지선사(苦智禪師)가 평을 하기 위해 단상에 올랐다.
그 순가, 머리를 기른 두타(頭陀)하나가 앞으로 뛰쳐나와 고지선
사에게 삿대질을 하며 무공도 제대로 모르면서 건방지게 달마당
수좌 행세를 한다고 폭언을 서슴치 않았다.

중승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 자를 자세히 보니, 바로 사내
주방에서 잡일을 하는 화공두타(火工頭陀)였다. 달마당의 제자들
은 사부가입을 열기도 전에 다투어 호통을 쳤다.

그 화공두타는 코웃음을 날렸다.

"스승이란 작자가 흐리멍텅하니 제자들은 더욱 형편이없군!"

그는 즉시 한가운데로 나섰다. 달마당의 제자들은 그를 혼내주
기 위해 한 명씩 나섰다. 그러나, 모두 그와 몇 초식을 겨뤄 보
지도 못한 채 비참한 패배를 당했다. 원래 동문끼리 비무(比武)
할 때는 적당한 정도에서 승패를 판가름 지을 뿐 불상사를 빚는
일이 없었다. 한데, 이 화공두타의 출수는 지극히 악랄하여 달마
당의 구대제자(九代弟子)를 연패시켰을 뿐 아니라 모두에게 중상
을 입혔다.

수좌인 고지선사는 놀라움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이 화공두타
가 전개한 무공은 모두 본사의 정통 권법이었으므로, 그는 노기
를 억제하고 누구에게 무공을 전수 받았느냐고 다그쳤다.

그 화공두타의 대답은 간단했다.

"아무도 나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 스스로
배웠다!"

알고 보니, 그 화공두타가 소속되어 있는 선당(膳堂)의 일을 감
독하는 승인의 성격이 매우 거칠어, 걸핏하면 아랫사람들에게 주
먹질을 했다. 그 화공두타는 삼 년간 숱하게 얻어 맞아 피를 토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자연히 그의 가슴에 원한이 응어리져
은밀히 무공을 훔쳐 배우기로 결심했다. 소림의 제자들은 모두
무공을 알고 있으므로,권법 초식을 훔쳐 배울 기회는 많았다.

그는 본래 지혜가 탁월한데다가 앙심을 품었기 때문에, 이십 년
간의 피나는 각고 끝에 최상승의 무공을 터득할 수 있었다. 그러
나 그는 겉으로 전혀 내색하지 않고 꾸준히 주방에서 온갖 잡일
을 도맡아 했다. 그 선당을 감독하는 승인이 주먹으로 구타해도
전혀 반격을 하거나 피하지 않았다. 이미 심후한 내공을 쌓았기
때문에 더 이상 부상을 입는 일은 없었다. 이 화공두타는 천성이
음흉하여 자신의 무공이 소림의 모든 승려를 젖힐 수 있다는 판
단이 선 후에야 비로소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쌓
아온 원한이 일시에 폭발하자, 그 기세는 걷잡을 길이 없었다.

고지선사는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냉소를 날렸다.

"너의 각고는 실로 대단하구나!"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화공두타와 직접 겨루기에 이르렀다.
고지선사는 당시 소림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고수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워낙 고령인데다가 자비심이 두터워 출수
하는 데도 관용을 베풀었다. 그 반면, 화공두타는 시종일관 살수
를 전개했다. 그리하여 오백여 회합이 경과도어서야 고지선사가
겨우 확고한 승산을 잡을 수 있었다.

마침 두 사람은 대연사(大連絲)의 초식으로 맞서고 있었는데,
서로 팔을 감은 상태에서 고지선사의 쌍장은 이미 상대방 가슴
부위 사혈(死穴)을 누르고 있었다. 그가 내력을 발출시키면 화공
두타는 즉시 목숨을 잃게 될 것이었다. 화공두타의 입장에선 도
저히 이 죽음의 고비를 모면할 여지가 없었다.

고지선사는 그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소림의 무학을 이렇게 높은
경지로 터득한 것을 가상히 여겨, 차마 목숨을 끊을 수 없었다.

"물러나라!"

그는 짤막하게 일성을 토하며 쌍장을 좌우 양쪽으로 갈랐다. 그
러나 화공두타는, 그의 진의를 오해해 신장팔타(神掌八打) 중에
한 초식을 전개한 것으로 알았다. 이 신장팔타는 소림 절학 중의
하나로서, 그는 달마당의 제자가 이 초식을 전개해 굵은 통나무
를 절단시키는 걸 본 적이 있던 터라, 그 위력이 엄청나다는 것
도 알고 있었다.

화공두타는 비록 무공이 고강하지만 어디까지나 훔쳐 배운 것이
므로, 소림 무학의 심오한 바탕까지 통달할 수는 없었다. 고지선
사의 이 초식은 사실 분해장(分解掌)으로서 쌍방이 동시에 뒤로
물러나 싸움을 중단하자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화공두타
는 그것을 신장팔타 중의 여섯 번째 초식인 열심장(裂心掌)으로
생각했다.

'나를 죽이려 하지만 어림없다!'

그는 속으로 울부짖으며 재빨리 앞을 향해 덮쳐가며 쌍권을 일
제히 격출해 냈다. 순간, 그의 배산도해(排山倒海)할 듯한 권풍
이 휘몰아쳐 오자 고지선사는 흠칫 놀라 황급히 쌍장으로 대항했
다. 하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뿌드득------

그의 왼쪽 팔뼈와 가슴 앞 갈비뼈 네 개가 즉시 부러졌다. 중승
들은 대경실색하여 그에게 달려가 호위했다. 고지선사는 숨을 미
약하게 내쉬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극심한 내상까지 입은
것이다. 중승이 다시 화공두타에게 눈길을 돌렸을때, 그는 이미
혼란을 틈타 어디론가 달아나버렸다.

그날 밤, 고지선사는 세상을 떠났다. 사내가 슬픔으로 뒤덮여
있을 때 그 화공두타가 다시 잠입해 들어와, 주방 일을 감독해
온 승인을 비롯해 평상시 자기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승인 다섯
을 죽였다. 이 일로 해서 소림사 전체는 발칵 뒤집혔고 수십 명
의 고수들을 내보내 추적을 벌였지만, 아무리 대강(大江)남북을
샅샅이 뒤져도 화공두타를 찾아 내지 못했다.

사내에서는 항렬이 높은 승려들이 이 일을 놓고 서로 논쟁을 벌
이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나한당의 수좌인 고혜선사(苦慧禪師)
가 대노하여 멀리 서역으로 떠나 소림의 서역 지파를 창설한 것
이다.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소림의 무학은 수십 년이나 후퇴하
게 되었다.

그 후로 새로운 사규를 정해, 스승으로부터 직접무공을 전수받
지 않고 몰래 배운 자가 발각될 때는 전신의 근맥(筋脈)을 잘라
폐인으로 만들거나 죽이기로 했다. 수십 년 이래 사내의 규율이
워낙 엄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공을 훔쳐 배우는 자가 생겨나지
않았다. 아울러 그 새로 정했던 사규는 승려들의 뇌리에서 잊혀
져 갔던 것이다.

이 삼선당의 노승은 바로 그 고지선사의 수제자였으므로, 은사
의 참사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 장군보가 또다시 스승을 통하지 않고 스스로 무공을 배
웠다는 것을 듣고는 옛일이 되살아나 비분이 교차된 것이다.

각원은 심선당의 노승이 장군보를 화공두타에 비유한다는 사실
을 깨닫자, 이내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황급히 소리쳤다.

"노사부님, 이..... 이건 군보의 잘못이 아니라....."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달마당의 수좌 무상선사의 추상같
은 호령이 떨어졌다.

"달마당의 제자는 모두 힘을 합해 저 녀석을 잡아라!"

달마당의 십팔 제자가 즉시 앞으로 뛰쳐나와 각원과 장군보를
사면팔방으로 포위했다. 그들이 구축한 포위망은 워낙 넓어 곽양
까지 포위망에 포함시켰다.

심선당의 노승이 싸늘하게 외쳤다.

"나한당의 제자들도 어서 행동 개시를 하지 않고 뭘 꾸물대느
냐!"

나한당의 백팔 제자들은 우뢰 같이 대답을 했다.

"예!"

그들은 달마당 십팔 제자의 바깥쪽에다 다시 세 겹의 포위망을
구축했다. 장군보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자기가
나서서 별건가를 쫓아버린 것이 사규에 어긋난 줄로만 알고 스승
님에게 구원의 눈길을 던졌다.

"스승님, 저는......!"

각원은 그와 십여 년간 생활을 같이 해오며 부자 이상의 정을
쏟아왔다. 지금 상태에서 장군보가 붙잡히면 목숨을 잃거나 폐인
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상선사의 불호령이 다시 떨어졌다.

"어서 행동 개시해라!"

달마당의 십팔 제자는 일제히 불호를 외치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음을 옮겨 갔다. 각원은 더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한시
도 지체할 수 없이 즉시 몸을 한 바퀴 회전시켰다. 두 개의 철통
이 허공에 떨쳐졌다.

중승은 한 갈래의 강맹한 힘줄기가 뻗쳐오자, 섣불리 더이상 앞
으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각원이 다시 한 번 몸을 회전시키자,
철통 안에 들어 있던 물이 모조리 주위에 뿌려진다. 그러는 가운
데 각원은 좌측 철통에 곽양을 담고, 우측 철통 속에 장군보를
담았다. 그가 연거푸 칠팔 번의 원을 그리자, 두 개의 철통이 흡
사 유성추(流星鎚)처럼 허공을 휘저었다. 그 천 근이 넘는 힘을
천하에 어느 누가 당해 낼 수 있단 말인가?!

달마당의 제자들은 분분히 뒤로 물러났다. 각원은 날을 듯이 걸
음을 재촉해 곽양과 장군보를 철통 속에 넣은 상태로 하산했다.
중승들은 고함을 지르며 뒤쫓아왔지만 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차
츰 멀어져갔다. 소림사의 규율은 극히 엄해, 달마당 수좌가 장군
보를 잡으라고 명령을 내린 이상 어느 누구도 감히 거역할 수 없
었다. 중승들은 도저히 쫓아갈 수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신법을
최고 경지로 전개해 계속 추적했다. 승려들의 신법은 모두 차이
가 있어 차츰많은 사람들이 뒤떨어지게 되었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에는, 단지 달마당의 오대 제자만이 앞장에
남게 되었다. 그들은 벌써 여러 군데 갈림길을 지나왔다. 이젠
각원이 어느 방향으로 달아났는지조차 종잡을 수 없었다. 설령
그를 쫓아간들 자기네 다섯 명의 무공으로선 각원과 장군보의 적
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풀이 죽은 채로 소
림사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각원은 곧장 수십 리 길을 달려 비로소 철통을 내려놓았다. 주
위를 둘러보니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어느덧 날은 저물
고 까마귀가 삼삼오오 때를 지어 둥우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각
원의 내력이 제아무리 타인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더라도, 단숨에
육중한 철통을 짊어지고 수십 리 길을 달려왔기 때문에 기진맥진
해 있었다.

장군보와 곽양은 철통 속에서 뛰쳐나왔다. 장군보는 기진맥진해
있는 스승님의 모습이 안타까와 콧등이 시큰했다.

"스승님, 편히 쉬십시오. 제가 가서 먹을 것을 찾아 오겠습니
다."

이런 황산절지(荒山絶地)에서 먹을 것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
이 아니었다. 한참 후에야 장군보는 산딸기를 한아름 갖고 왔다.
세 사람은 대충 요기를 채우고 바윗돌에 기대어 휴식을 취했다.

곽양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화상, 정말 어처구니가 없죠? 물에 빠진 것을 건져 주니 보
따리 내놓으라는 격이예요! 내가 보기에 소림사의 화상들 중에서
당신과 무색선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괴팍하고 엉뚱한 일면을 지
니고 있는 것 같아요."

각원은 턱을 한번 끄덕여 보일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곽양은 분해 죽겠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만약 대화상 사도(師徒)가 아니었다면 소림사는 오늘 그 곤륜
삼성에게 혼줄이 났을 거예요. 그들은 대화상에게 백 번 감사를
드려도 부족할 텐데, 오히려 적반하장 격으로 장 형제를 잡으려
하니 세상에 이런 경우 없는 일이 어디 또 있겠어요!"

각원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장문인과 무상사형만 나무랄 일도 아니지. 소림사에 엄한 사규
가 한 가지 있는데......"

여기까지 말한 그는 숨이 막히는지 기침을 계속했다.

곽양은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너무 지쳤어요. 얘기는 내일 해도 늦지 않으니, 우선 눈이나
붙이세요."

각원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너무 지쳤어."

장군보는 곧 나무를 주워 불을 피우고는 곽양과 함께 옷을 말리
고 나서 나무아래 누워 잠이 들었다.

얼마동안의 시간이 흘렀을까. 곽양은 잠결에 어렴풋이 염불 외
는 듯한 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과연 각원대사가 무엇인가 읊조
리고 있었다.

"........피지력방침아지피모(被之力方侵我之皮毛), 아지의이입
피골리(我之意已入被骨裏)........"

---------상대의 힘이 나의 살갖에 닿는 순간, 나의 마음은 이
미 상대의 뼈 속으로 들어가고----------

그의 읊조리는 소리는 계속되었다.

"........두 손으로 지탱하여 단숨에 관통할지어다. 좌(左)에
치중하면, 우(右)에 허가 생기고, 우에 치중하면 좌에 허(虛)가
생기니........"

곽양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건 그 무슨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의 불경
이 아니잖아! 좌중우허(左中右虛) 우중좌허(右中左虛)라..... 무
학 권경(拳經) 같기도 하고.......'

각원은 멈칫하더니 다시 읊조려 나갔다.

"........기(氣)는 수레바퀴와 같으니 몸이 거기에 따라야 하
며, 따르지 않을 시에는 몸이 흐트러지니........"

여기까지 들은 곽양은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지금 각
원이 읊조리고 있는 것은 무공구결(無功口訣)임이 분명했다. 곽
양은 절로 깨닫는 바가 있었다. 각원은 정말 무공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단지 고질적으로 책 읽는 것을 즐겨 일단 무슨 책이든
손에 쥐기만 하면 달달 외어 버린다.

왕년에 화산에서 그와 처음 만났을 때, 분명 장마조사가 남긴
능가경 행간 사이에 다시 한 부의 구양진경(九陽眞經)이 수록되
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각원은 그것을 강신지술(强身之
術)로 생각해, 틈나는 대로 그 구양진경에 적힌 구절대로 연마를
했다. 동시에 제자인 장군보에게도 가금 한두귀절씩 귀띔해 주었
다. 그로 인하여 사도 두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천
하 제일 고수의 경지를 터득하게 된 것이다.

그 날, 소상자가 그에게 일장을 건재했지만 멀쩡했다. 오히려
장풍을 전개한 소상자가 반탄지력(反彈之力)에 의해 중상을 입지
않았던가!

그러한 신공(神功)은 곽정과 양과라 할지라도 불가능했다. 오늘
이들 사도가 별건가를 격패한 것도 이 구양진경의 공로임에 분명
했다.

곽양은 내심 생각했다.

'그가 지금 중얼거리며 읽고 있는 게, 혹시 그 구양진경의 귀절
이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행여나 기회를 놓칠세라, 조용히 일어나
앉아 경문(經文)에 귀를 기울이며 뇌리에 암기해 두었다.

'만약 정말 구양진경의 귀절이라면 오묘무쌍하여 짧은 시간 내
에 이해하진 못할 것이다. 그러니 우선 뇌리에 기억해 두었다가
내일 다시 자세한 것을 물어야지......'

각원의 읊조림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곽양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귀절 속에 빠져들었다.

이때, 희미한 달빛 아래 장군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역시 귀
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각원의 읊조림은 이제 간간이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리고 가끔 능가경의 경문이 섞여
나왔다. 능가경은 본디 천축문(天竺文)으로 적혀 있었다. 각원은
그것을 역문(譯文)으로 읽었지만 듣는 사람을 헛갈리게 만들었
다. 곽양은 영특하여, 오분의 일 정도는 뇌리에 기억할 수 있었
다.

어느덧 달이 서산마루로 기울고, 사람의 그림자가 더욱 길게 드
리워졌다. 각원의 읊조리는 소리도 점차 미약해져 알아 듣지 못
하는 대목이 많아졌다.

곽양은 안타까왔다.

"대화상, 이제 그만두시고 다시 잠을 청하세요."

각원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듯 계속 읊어나갔다.

"......역종인차(力從人借), 기유척발(氣由脊發)......"

-------힘은 상대방으로부터 빌려야 하며 기는 등성마루로부터
비롯된다. 기가 아래로 내려가 양어깨에서 등뼈로 흡수되어 허리
로 집결된다. 이렇게 기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일컬어
합(合)이라 한다. 등골로 뻗쳐, 다시 양팔로 퍼져 손가락으로 전
개한다. 이렇듯 기가 아래서 위로 향하는 것을 소위 개(開)라 한
다.--------

"......합위시수(合爲是收), 개위시방(開爲是放), 능해개합(能
解開合), 편지음양(便知陰陽)......"

-------합은 거두는 것이며, 개는 푸는 것을 뜻한다. 개와 합을
이해하면 음과 양을 알게 된다-------

각원의 음성이 차츰 낮아지더니, 드디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
았다. 이미 깊은 잠에 빠진 듯했다.

별이 자리를 옮김에 따라 달이 서산 너머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
다. 홀연 먹장구름이 깔리듯 대지가 칠흑에 덮였다. 다시 한 식
경이 지나자 동녘 하늘에 서광이 밝아왔다.

각원은 어느새 일어났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 정좌한 채 움직이
지 않았다. 그러나 아침 햇살을 받은 그의 얼굴에는 미미한 웃음
이 드리워져 있었다.

장군보는 홀연 이상한 예감이 들어 고개를 획 돌렸다. 멀리 떨
어지지 않은 나무 뒤에서 한 줄기의 사람 그림자가 번뜩였다. 그
는 황색 가사의 자락을 언뜻 보고는 흠칫하며 소리쳤다.

"누구세요?"

그러자, 나무 뒤에서 몸집이 훤칠한 노승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바로 나한당의 수좌 무색선사였다.

곽양은 놀라움과 반가움이 엇갈렸다.

"대화상, 못내 아쉬움이 남아 뒤쫓아 왔나요? 아니면 이들 사도
를 기필코 잡아가기 위해 왔나요?"

무색선사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부처님의 자비로세. 만약 노승이 어떤 행동을취할 생각이었다
면, 삼경(三更)에 이곳에 당도해 지금까지 기다리지는 않았을 걸
세. 이 노승이 시시비비도 분간 못하는 흐리멍텅한 사람 같은가?
각원사제, 무상사제는 달마다의 제자들을 이끌고 동으로 추격해
갔네. 그러니 어서 서쪽으로 달아나게나."

그는 각원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나 각원은 여전히 눈
을 감은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본 장군보가
스승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스승님, 이젠 눈을 좀 뜨십시오. 나한당의 수좌께서 오셨습니
다."

각원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장군보는 당황해져 조
심스럽게 그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순간, 얼음장처럼 차가운 감
촉이 손에 전해져 왔다. 각원이 원적(圓寂)한 지 이미 오래였다.

장군보는 하늘이 무너질 듯 슬픔이 복받쳐 통곡을 하며 소리쳤
다.

"스승님! 스승님.....!"

그러나 깨어날 리 만무였다. 무색선사는 조용히 합장했다.

"아미타불..... 팔방의 구름이 걷히니 사면이 청명하고 미풍에
향기가 실려오니 군산(郡山)이 조용할지어다. 무우무욕(無憂無
慾)할 지언데, 이보다 더 큰 경축이 있을손가?"

말을 끝낸 그는 표연히 떠나갔다.

장군보는 스승님 시신 앞에 쓰러져 통곡을 하였다. 곽양도 하염
없이 눈물을 뿌렸다.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어차피 빈
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 아니던가!

소림사의 승려들이 숨을 거두면 모두 화장을 치르는 게 상례였
다. 두 사람은 곧 마른 나뭇 가지를 주워 모아 각원의 법신(法
身)을 범화(梵火)했다.

곽양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장 형제, 소림사의 승려들이 끝내 자네의 행방을 쫓을 테니,
여러 모로 조심해야 하네. 우리 다시 만날 기약을 하고 이만 헤
어져야겠네."

장군보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곽 낭자, 낭자는 어디로 가실 겁니까? 그리고 이 몸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입니까?"

곽양은 그가 자기의 갈 곳을 물어오자 마음이 울적해졌다.

"하늘 끝 바다 저편까지 발길 닿는 대로 정처없이 떠돌아 다닐
것이니, 나도 내가 갈 곳이 어딘지 알 수가 없네. 장 형제, 자네
는 나이도 어리고 강호의 경험도 없으니 이렇게 하도록 하지."

그녀는 금팔찌 하나를 뽑아 장군보에게 건네주었다.

"이 팔찌를 갖고 곧장 양양으로 가서 나의 부모님을 만나보게.
자네를 잘 보살펴 줄 거야. 나의 부모님과 함께 있으면 소림사의
승려가 제아무리 악랄하다 하더라도 자네를 괴롭히지 못할 걸
세."

장군보는 눈물을 흘리며 팔찌를 받았다.

곽양이 다시 말했다.

"나의 부모님을 만나면 나는 잘 있다고 안부난 전해 주게. 나의
아버님은 소년 영웅을 가장 좋아하기 때문에 자네 같은 인재를
보면 제자로 삼을지도 모르네. 내 남자 동생은 무던하여 틀림없
이 자네와 원만하게 지낼 거야. 단지 언니의 성질이 고약해 자기
의 비위에 뒤틀리면 남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도 서슴치 않
으니, 자네가 될 수 있는 대로 참게. 그러면 큰 문제는 없을 걸
세."

그녀는 당부를 끝내고 곧 몸을 돌려 어디론가 떠나갔다.

장군보는 외톨이가 되었다. 천지간이 끝없이 넓거늘 그의 안식
처는 한 곳도 없었다. 그는 스승님의 유골 앞에서 반나절 동안
말뚝처럼 서 있었다. 어디론가 가야만 했다. 자기는 쫓기는 몸이
아니던가!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놓았다. 약 십여 장 정도 걸
어나가다가 홀연 숨을 돌려 되돌아와, 스승님이 남긴 그 육중한
철통을 짊어지고 휘청휘청 다시 걸음을 떼어놓았다. 아무리 돌아
보아도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황산절령(荒山絶嶺). 깡마른
소년은 자기 몸집보다 큰 철통을 짊어지고 묵묵히 서쪽으로 향해
걸어갔다. 이따금 이름을 모르는 산새가 허공을 가로질러 어디론
가 날아갈 뿐.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장군보! 그는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다. 육중한 철통이
그의 육신을 짓눌러 왔지만 마음은 그보다 몇 갑절이나 더 무거
웠다.

그로부터 보름 후, 장군보는 호북(湖北) 경내로 들어섰다. 이제
양양도 멀지 않았다. 소림사의 승려들은 결국 그를 찾아내지 못
했다. 무색선사가 암중에 그를 위해 중승들을 동쪽으로 따돌린
것이다. 자연히 쌍방이 거리가 갈수록 멀어질 수 밖에.

이날 오수, 장군보는 큰 산 앞에 이르렀다. 울울창창 둘러 싸인
산세가 매우 웅위했다. 장군보는 길 가는 나무꾼에게 물어 비로
소 이 산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무당산(武堂山)!!

그는 산기슭 바윗돌에 기대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때마침 한
쌍의 남녀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산길을 지나갔다. 농부 차림을
한 두 사람은 다정한 모습으로 무엇인가 불평을 털어놓는 것 같
았고, 남편은 고개를 떨군 채 잠자코 있었다. 곧 이어 부인이 다
음과 같이 말하는 게 들려왔다.

"당신은 사내 대장부로서 왜 스스로 앞날을 개척하려 하지 않
고, 한사코 언니와 형부를 의지하려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요.
우린 아직 젊고 손발이 멀쩡하니 얼마든지 자립을 할 수 있어요.
겉보리를 삶아 먹더라도 그게 마음이 편하잖아요? 제발 마음을
단단하게 가지세요."

남편은 묵묵히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부인이 다시 말했다.

"옛날에도 <죽음 외에 큰일이 없다>고 했잖아요? 굳이 남에게
의탁할 필요가 있나요?"

남편은 한 마디도 반발하지 못하며 얼굴을 붉혔다.

한편, 장군보는 부인의 말이 구구절절 가슴을 파고 들었다.

-----사내 대장부가 스스로 앞날을 개척할 생각은 않고......옛
날에도 <죽음 외엔 큰일이 없다>고 하잖았어요? 굳이 남에게 의
탁할 필요가 있나요? -----

그는 이들 부부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동안 굳어
있었다. 아무리 되풀이해서 생각해 보아도 그 촌부의 말이 백 번
지당했다. 멀리서 두 부부의 웃음소리가 바람결에 실려왔다. 남
편이 부인의 권유에 따라 뜻을 결정한게 분명했다.

장군보는 다시 생각을 굴렸다.

'곽 낭자께서는 언니의 성격이좋지 않으니 설령 자존심을 건드
리는 말을 해도 나더러 참으라고 했다. 나도 사내 대장부이거늘
어찌 일시적인 편안을 구하기 위해 남에게 고개를 숙일 수 있겠
는가? 저 한 쌍의 평범한 부부도 스스로 앞날을 개척하는데 이
장군보가 남의 눈치밥을 먹으면서 어떻게 청운의 뜻을 펼 수 있
갰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한 가지 결심을 하고 철통을 짊어
진 채 무당산을 올랐다. 그는 곧 은밀한 동굴을 찾았다. 그곳에
서 목이 마르면 옹달샘의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열매로 허기
를 채웠다. 그리고 끊임없이 각원으로부터 전수받은 구양진경을
연마해 나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그로부터 몇 년 후, 장군보는 깨달은 바가 있었다.

----- 달마조사는 천축 사람이므로 설령 중화(中華)의 문자를
안다 해도 매끄럽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뜻이 심오한 구양진경
을 스스로 쓰진 못했을 게 뻔하다. 틀림없이 후세의 중원인(中原
人)이 만들었을 것이며, 소림 고승 중에 한 사람일 가능성이 짙
었다. 그 고인이 달마조사의 이름을 빌어 천축문으로 된 능가경
새 중간에 수록해 놓았을 것이다. -----

물론, 이것은 장군보의 추측일 뿐 확실한 고증(考證)에 의한 것
은 아니었다. 장군보는 오랫동안 각원과 생활해 오며 구양진경을
절반 가량 외고 있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다시 십여 년간
스스로 연마한 결과 내력이 크게 증진 되었다. 그 후로 장군보는
도경(道經)과 도가(道家)의 연기지술(練氣之術)에 심취하여, 더
욱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어느 날, 장군보는 심산유곡을 노닐다가 뜬구름을 바라보고 흐
르는 물줄기를 굽어보다가 불현듯 가슴에 와닿는 충격이 있었다.
그는 곧 자신을 동굴에 가두어 칠일(七一) 밤나을 심사(深思)하
여 확연히 얻은 게있었으니..... 바로 이유극강(以柔克剛)이었
다. 큰 깨달음을 얻은 그는 벅찬 환희를 억제할 수 없어 앙천장
소를 터뜨렸다. 그 장소(長笑)가 전무후무한 무학의 일대종사(一
代宗師)를 탄생시켰다.

그는 스스로 깨우친 권리(拳理)와 도가의 이유극강 원리, 그리
고 구양진경에 수록된 내공을 바탕으로 하여 쳔세(千世)에 빛날
무당파(武堂派)를 창출한 것이다.

나중에 북쪽으로 보명(寶鳴)을 유람하다가 세 개의 산봉우리가
운해(雲海)에 우뚝 서 있는 것을 보고, 또한 무학의 새로운 장
(章)을 깨달았다. 그리고 스스로 삼봉(三奉)이란 호(號)를 지었
으니..... 그가 바로 중국(中國) 무학사(武學史)에 불세출(不世
出)의 기인 장삼봉(張三奉)이다.


----- 제 1 권 2 장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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