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03

3학년2반 | 2022.03.01 07:47:29 댓글: 0 조회: 403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2052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1 권


제 3 장 도룡보도(屠龍寶刀)의 출현


꽃은 피고 지고, 다시 지고 피니..... 무상한 것 세월이라 했던
가!!

가는 세월은 막을 길 없어 홍안의 소년이 어느덧 하얀 백발로
변했다.

때는 원(元) 순제(順帝) 2년. 송조(宋朝)가 패망한 지도 어언
오십 년이 지났다.

햇살도 화사한 춘 삼월의 강남(江南).

멀리 바다가 굽어보이는 관도(官道) 위에 서른 살 가량의 건장
한 사나이가 짚신을 신고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어느덧 해가 뉘엇뉘엇 서산마루로 기울어져 갔다. 관도 양쪽으
로 복사꽃이 만개하여 완연한 봄기운과 더불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했지만, 사나이는 전혀 감상할 생각없이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그는 속으로 묵묵히 손을 꼽아 보았다.

'오늘이 삼월 스무 나흘이니 사월 초아흐레까지는 아직 열 나흘
이 남았구나. 길을 빨리 재촉해야지만 때맞추어 마당산에 당도해
은사님의 구십 회 생신을 축하해 드릴 수 있을 텐데.....'

이 사나이의 이름은 유대암(兪垈巖). 바로 무당파의 조사이신
장삼봉의 세 번째 제자였다.

연초에 그는 스승님의 분부를 받들어 복건성(福建省)에서 양민
을 해치는 잔악무오한 거도(巨盜)를 죽이기 위해 강호로 나온 것
이다. 그 거도는 미리 풍문을 전해 듣고 잠적해 버리는 바람에,
유대암은 두 달이 넘어서야 겨우 그의 비밀 소굴을 찾아내 사문
의 현허도법(玄虛刀法)으로 십일 초 만에 그를 죽일 수 있었다.
원래 열흘이면 일을 마무리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두 달 남짓을 허비하게 된 것이다. 일을 끝내고 손꼽아 보니 스
승님의 구십회 생신이 눈앞에 다가와 서둘러 길을 재촉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날, 그는 절강성(浙江省) 동쪽에위치한 전당강(錢塘江) 남쪽
기슭에 당도했다. 관도에서 벗어나 오른쪽 바다 가까이 넓은 염
전(鹽田)이 보였다.

한창 길을 걷고 있는데 서편 샛길로부터 이십여 명의 사나이들
이 틀가락을 어깨에 메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틀가락 양쪽 끝 목
도중에 제각기 커다란 나무통이 메달려 있는데 그 속에는 소금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청색 짧은 바지 차림에
챙이 짧은 삿갓을 쓰고 있었다. 당시 나라에서는 폭정(暴政)으로
소금의 세금을 과중하게 거두었기 때문에, 설령 바잣가에 사는
백성이라 할지라도 관염(官鹽)을 먹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사염
(私鹽)을 판매하는 암조직이 많았다. 그들은 모두 행동이 거칠고
몸이 단단했다. 일반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염효(鹽梟)라 했
다.

유대암은 그들을 보는 순간부터 이상한 점을 느꼈다. 어깨에 메
고 있는 틀가락은 대(竹)도 나무도 아니고 거무튀튀한게 전혀 탄
력성이 없었다. 아마도 쇠로 된 틀가락 같았다. 그들은 각자 이
백 근 상당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걸으면서도 걸음걸이가 매우
가벼웠다.

유대암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염효들은 모두 무공을 지니고 있군. 들은 바에 의하면, 강
남 해사파(海沙派)의 사염(私鹽) 판매 조직이 가장 세력이 크고
무공 고수들도 많이 확보하고 있다는데..... 하지만, 이십여 명
의 고수들이 떼지어 소금을 팔러 다닐 리는 없을 것이다.'

만약 갈 길이 바쁘지 않았다면 뒤쫓아가 내막을 밝히고 싶었다.
하지만 한시가 급한지라 유대암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저녁 무렵에, 그는 여요현(餘姚縣)의 암동진(庵東鎭)으로 들어
섰다. 이곳에서 전당강을 건너면 바로 임안(臨安)에 닿을 수 있
고, 다시 서북으로 길을 택해 강서와 호남성을 거쳐야지만 비로
소 호북의 무당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날 밤, 강을 건널 뱃길이 끊겨 그는 부득이 암동진에서 작은
객점을 찻아 유숙하게 되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침상에 누워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왁자지걸한 소리가 들려왔다. 투숙객이
떼지어 몰려온 모양이었다. 그들의 말투는 절강(浙江) 사투리가
섞여 있었지만, 기(氣)가 충배되어 있어 무공을 연마한 자들임이
분명했다.

유대암이 창문을 통해 살펴보니, 바로 도중에서 만났던 그 염효
떼거리들이었다. 츄대암은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가부좌
를 틀고 앉아, 운기행공(運氣行功)을 세 번하고 나서 잠을 청했
다.

삼경(三更)쯤 되었을까. 옆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유대암은
이내 깨어났다. 곧 한 사람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모두들 조용히 떠나도록 해라. 옆방 손님을 깨우게 되면 공연
히 귀찮아진다."

나머지 사람들은 살며시 문을 열고 뜨락으로 나갔다. 유대암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창문 틈으로 살펴보니 염효들이 틀가락을 짊
어지고 잽싸게 대문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유대암은 내심 생각을 굴렸다.

'저 염효들의 수상한 행동으로 미루어 무슨 일을 저지르려는 게
분명하다.내가 그것을 안 이상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
가? 뒤쫓아가 보면 죄없는 몇 사람을 구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차피 날이 밝기 전에는 강을 건널 수 없으므로, 그는 곧 무기
와 암기(暗器)가 들어 있는 봇짐을 어깨에 매고 담을 넘어 객정
을 빠져 나갔다. 귀를 기울여 보니 염효 떼거리들은 동북쪽으로
향하고 있어, 즉시 경공술을 전개해 은밀히 뒤쫓아갔다.

이날 다라 하늘에 먹구름이 깔려 주위는 어두침침했다. 이 십여
명의 염효들은 어둠을 뚫고 민첩하게 달려나갔다. 반 시간도 채
못 돼서 염효들은 이십리 밖으로 벗어났다. 유대암은 경공술이
뛰어나 시종 그들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바다가 가가와져 철석거
리는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홀연, 앞장서 가던 자가 무엇을 발견
한 듯 손을 번쩍 들어올리자 나머지 사람들은 일제히 걸음을 멈
추었다. 앞장서 있는 자는 곧 나직하게 외쳤다.

"누구냐?"

그러자 어둠 속에서 걸쭉한 음성이 들려왔다.

"삼수변(三水邊)의 친구들인가?"

앞장서 있는 자가 경계스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소. 귀하는 누구요?"

유대암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삼수변의 친구라니? 그게 대관절 무엇일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내 깨달은 바가 있었다.

'맞아. 과연 해사파의 사람들이군. 해사파(海沙派) 세 글자가
모두 삼수변이니까....."

걸쭉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미리 충고를 하겠는데, 도룡도(屠龍刀)에 관한 일에는 곁다리
끼지 않는 게 신상에 좋을걸!"

앞장서 있는 자의 음성이 냉랭하게 변했다.

"귀하도 역시 도룡도 때문에 왔소?"

걸쭉한 음성은 징그럽게 웃었다.

"흐흐흣...!"

그의 웃음소리는 듣는 이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는 단
지 음흉하게 웃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유대암이 해변의 암석 뒤에 몸을 숨긴 채 바라보니, 키가 훤칠
한 자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어둠 속이라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흰 장포를 입고 있었다. 야행인이면서 흰 옷
을 입고 있다는 것은 무공에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해사파의 앞장서 있는 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도룡도는 이미 우리의 소유가 되었는데, 놈들이 훔쳐 갔소. 그
러니 되찾아오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백의인은 다시 징그럽게 웃으며 버젓이 깊을 막고 서 있었다.
그러자 해사파 염효 중의 한 사람이 참다 못해싸늘하게 외쳤다.

"어서 비켜라! 죽고 싶어 환장을.....!"

그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갑자기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쓰
러졌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다. 순간,
어둠 속에서 백포자락이 펄럭이는가 싶더니 백의인은 어느새 흔
적도 없이 사라졌다. 해사파의 쓰러진 자는 몸이 뒤틀리더니 이
내 숨이 끊어졌다. 그것을 지켜본 동료들은 분노와 놀라움이 겹
쳐, 떼지어 백의인이 사라진 방향으로 쫓아갔으나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유대암은 내심 생각을 굴렸다.

'백의객의 출수는 정말 빠르군. 그가 전개한 초식은 소림파의
대력금강조(大力金剛조) 같은데, 어두워서 내가 잘못 본 것일까?
그의 말투를 들어 보념 서북(西北) 새외(塞外)에서 온 것 같은
데, 어떻게 해서 강남 해사파의 원한을 맺게 된 것일까...?'

유대암은 갯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해사파의
염효들에게 발가되면 공연한 회오리에 말려들게 될 것이기 때문
이다.

해사파의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
었다.

"넷째의 시체를 우선 한쪽으로 치워라. 나중에 돌아오는 길에
옴의 정체를 밝혀 보자!"

일행은 일제히 대답하고 다시 틀가락을 메고 앞으로 달려갔다.

유대암은 그들이 멀어져 가자 비로소 가까이 다가가 시체를 살
펴보았다. 죽은 자의 목에 두 개의 작은 구멈이 뚫려 계속 선혈
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생각했던 대로 대력금강조에 의한 치명상
인 것 같았다. 유대암은 심상치 않은 예감이 뇌리를 스치자, 얼
른 신법을 펼쳐 염효들의 뒤를 쫓아갔다.

일행이 다시 몇 리 밖으로 달려나갔을 때였다. 우두머리인 듯한
자의 손짓에 따라 이십여 명은 사방으로 흩어져 동북쪽에 보이는
커다란 목옥(木屋)을 향해 천천히 접근해 갔다.

유대암은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저들이 말하던 도룡도가 바로 저 집 안에 있단 말인가?'

목옥의 굴뚝에선 계속 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염효들은 목도
줄에 연결된 통을 내려놓더니, 커다란 주걱 같은 물건을 꺼내 통
속에서 무엇을 퍼내 사방에다 뿌렸다. 유대암은 그들이 뿌리고
있는 것이 소금이라고 생각했다.

'왜 사방에다 소금을 뿌리는 것일까?'

그로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자세히 보니, 염
효들은 행여나 소금이 옷에 묻을세라 매우 조심스럽게 뿌리고 있
는 게 아닌가!

유대암은 비로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지금 그들이 뿌리고 있는
소금은 독이 묻은 독염(毒鹽)으로서 목옥 안에 있는 사람을 해치
려는 게 분명했다.

유대암은 목옥 안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이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야겠다느 생각으로 살며시 목옥 뒤쪽으로
빙 돌아가 담장을 사뿐히 뛰어넘었다. 목옥 가까이 접근해 가자
화끈한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살펴보니 목옥 한쪽에 커다란 화
로가 있고, 바로 그곳에서 거센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화로
옆에는 세 사람이 서서 번갈아가며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들
은 모두 육순의 노인으로서 한결같이 청색 장포를 입고 있었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화로에 불을 지폈다.

유대암의 시선은 한 곳에 쏠려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회로불
위에 뜻밖에도 넉 자 가량 되는 한 자루의 거무스름한 단도(單
刀)가 결려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대암이 목옥 밖에서
화끈한 열기를 느낄 수 있는 화로불에도 그 단도는 빨갛게 달구
어지지 않고 시종 거무스름한 색깔을 띠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지붕 위에서 갑자기 걸쭉한 음성이 들려왔다.

"보검을 손상시키면 천벌을받는다. 어서 손을 거두지 못하겠느
나!?"

유대암은 그 걸쭉한 음성의 주인공이 바로 좀전에 만났던 그 백
의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세 명의 청의 노인은 그의 외침을 아예
듣지도 못한 듯 계속해서 부채질만 하고 있었다. 곧이어 냉소와
함께 들창이 열리며 백의인이 바람처럼 목옥안에 나타났다. 화로
의 빨갛게 달아오른 불길로 해서, 유대암은 비로소 백의인의 모
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의 나이는 사십 안팎으로 안색이
창백하고 아무런 무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냉랭하게 말했다.

"장백삼금(長白三禽)! 너희들이 도룡보도를 탐내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 보물을 훼손하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며 앞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세 명의 노인 중에 서쪽에 서 있는 자가 대뜸 왼손을 З쳐내 백
의인의 얼굴을 내리쳤다. 맥의인은 살짝 피하며 앞으로 한 걸음
미끄러져 갔다. 동쪽에 서 있는 노인은 그가 가까이 접근해 오
자, 화로 옆에 놓여 있는 커다란 쇠망치를 집어 다짜고짜 백으인
의 머리를 향해 후려쳐 내렸다. 백의인이 다시 절묘한 신법으로
피하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쇠망치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 즉시
불꽃이 사방으로 튕겼다. 바닥에 깔려있는 것은 보통 벽돌이 아
니라 견고하기 이를데 없는 화강석이었다. 서쪽에 있는 노인은
협공을 전개해, 쌍장을 갈퀴처럼 구부려 상하를 비무하며 공세가
신랄했다.

유대암은 이들이 싸우는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백의인이
전새하는 무공의 바탕은 소림 무학임에 분명했다. 그런데 그의
악랄한 출수는 소림파의 강맹 정대한 명문 수법과는 판이하게 달
랐다. 몇 회합을 거루자 철추(鐵錘)를 사용하는 노인이 분노가
서린 음성으로 다그쳤다.

"네늠은 누구냐? 이 보도를 빼앗아 가려면 이름이라도 남겨야
할 게 아니냐?"

백의인은 냉소만 날릴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가 전광
석화같이 몸을 회전시키며 반격을 전개하자, 서쪽 노인의 입에서
나작한 신음이 토해졌다.

"윽.....!"

그의 양쪽 손목이 일제히 부러진 것이다. 이와 동시에, 동쪽 노
인의 철추가 손에서 벗어나 곧장 천장으로 날아갔다.

평!!

천정에 구명이 선리며 철추는 곧 뜨락에 떨어져내렸다. 이 노인
은 얼른 쇠집게로 화로 속에 있는 단도를 집으려 했다.

한편, 남쪽에 서 있는 노인은 손에 암기를 움켜쥐고 계속 기회
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백의인의 신법이 워낙 빨라 좀처럼 기
회를 포착 못하고 있다가, 동쪽 노인이 집게로 단도를 집는 것을
보자 갑자기 손을 화로 속에 넣어 먼저 칼자루를 잡았다. 순간,
한 갈래의 흰 연기와 함께 짙은 노린내가 풍겼다. 보도는 여전히
거무스름한 빛깔을 띠고 있었지만, 오랫 동안 염화 속에 달구어
졌으니 맨손이 성해 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보도를 놓을
생각을 않고 곧장 뒤로 솟구쳤다. 이어서 손이 타들어가는 고통
과 육중한 무게에 눌린듯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고종시켰다.
하지만 보도의 무게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무거워, 그 무게에 부
담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래도 보도를 꼭 쥐고 있자, 살이 타
들어가는 소리가 더욱 요란하게 들렸다.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자지러지게 놀라 표정이 굳어
졌다. 그 틈을 타서 노인은 두 손에 보도를 받쳐들고 냅다 밖으
로 뛰쳐나갔다. 백의인은 냉소를 날렸다.

"어림없다!"

그는 질풍처럼 노인의 등을 나꿔챘다.

노인은 등 뒤에서 뻗쳐오는 바람소리를 의식하며 본능적으로 보
도를 뒤로 휘둘렀다. 순가, 화끈한 열기가 뻗치자 백의인은 눈썹
과 머리카락이 도르르 말렸다. 그는 감히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
고 노인의 몸을 보도와 함께 화로 속으로 집어던졌다.

유대암은 쌍방의 행동이 모두 흉악하여 어느 편을 들지도 않았
다. 하지만 이 노인의 몸이 화로 속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호공에서 노인의 몸을 나꿔채 사뿐히 화덕
곁에 떨어져 내렸다. 실로 불가사의할 정도로 빠른 신법이었다.
백의인과 장백삼금도 사실 벌써부터 그를 발견했다. 단지 그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가 절세 신법을 펼친
것을 보자, 백의인이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다그쳤다.

"지금 전개한 신법이 바로 천하에 알려진 제운종(梯雲縱)이냐?"

유대암은 상대방이 대번에 자신의 겅공술의 내력을 알아내자 처
음엔 좀 놀랐으나 곧 의기양양해 했다.

'우리 무당파의 무학도 이젠 강호에 널리 알려졌구나......'

그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귀하 같은 고인에게 보잘것없는 경공술 따위가 눈에 차겠소이
까?"

백의인의 얼굴에선 아무런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당의 무학에 과연 쓸 만한 것도 있군,"

그의 말투는 매우 거만했다. 유대암은 내심 화가 났으나 내색하
지 않았다.

"귀하가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해사파의 고수를 죽인 그 무공이
야말로 신출 귀몰하여,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소."

백의인은 흠칫했다.

'저놈이 모든 것을 보았구나, 대관절 어디에 숨어 있었길래 난
놈을 발견하지 못했지?'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다. 내 무학은 고심막측하여 좀처럼 내력을 알아볼 수 없
지. 너뿐만 아니라 설령 무당파의 장문인 장삼봉이라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유대암은 백의인에게서 스승님을 모독하는 언사를 듣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무당파의 제자들은 수심양성(修心養性)
이 깊어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줄 알았다.

'저 자가 일부러 내 비위를 긁는 것은 모종의 속셈이 있을 것이
다. 몇 마디 무례한 말로 인해 저 무공이 괴이한 자와 원한을 ⅸ
을 필요는 없다.....'

그는 곧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천하의 무학은 무궁무진하여 정파와 사파를 망라하여 수천 수
만의 무학이 있지만, 그 중에 무당은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일
엽편주에 불과하오. 귀하의 무공은 소림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
으니, 실로 종잡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오."

그는 비록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백의인의 무공을 사이
비라 빗댄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백의인은 그의 말에 처음으로
안색이 변했다.

두 사람이 서로 뼈 있는 말을 주고 받는 사이에, 맨손으로 그
보도를 쥐고 있는 노인은 갈수록 표정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이제 거의 뼈속까지 타들어간 것 같았다.

동쪽과 서쪽에 있는 두 노인은 모두 보도를 빼앗기 위해 호시탐
탐 기회를 노렸다. 돌연, 보도를 쥐고 있는 노인의 입에서 싸늘
한 기합소리가 터졌다.

"얍!!"

그는 다짜고짜 보도를 휘두르며 미친 들소처럼 밖으로 뛰쳐나갔
다. 그는 누구 한 사람을 겨냥해 보도를 휘두른 게 아니었기 때
문에,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유대암이 먼저 당하게 되었다. 유대
암으로서는 실로 뜻밖이었다. 자기를 구해 준 사람에게도 마구잡
이로 칼을 휘두르다니, 유대암은 황급히 몸을 솟구쳐 칼날을 피
했다. 노인은 두 손으로 칼자루를 쥔 채, 발광하듯 보도를 휘두
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백의인과 나머지 두 노인은 그 거친 기
세에 정면으로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황급히 피했다가 뒤쫓아
나갔다.

보도를 가진 노인은 비실비실 대문 밖으로 뛰쳐나갔으나, 갑자
기 돌뿌리에 채인 듯 앞으로 고꾸라졌다. 동시에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중상을 입은 듯 싶었다. 백의인과 나머지 두 노인이 일
제히 달려가 보도를 나꿔채려다가, 흡사 독사에게 물린 듯 모두
잘막한 외마디를 토했다. 백의인은 곤두박질을 한 번 하더니 이
내 솟구쳐 일어나 황급히 밖으로 달려나갔지만, 두 노인은 앞서
쓰러진 노인과 마찬가지로 고꾸라진 채 계속 뒹굴며 일어나지 못
했다. 실로 뜻하지 않은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으앗...!"

"앗...!"

그들의 입에선 계속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유대암은 이런 처절한 광경을 보고 얼른 달려가 구해 주려다가,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주춤했다. 해사파가 목옥 밖에 독
염을 뿌린 일이 생각난 것이다. 지금 목옥 밖은 온통 독염으로
깔려 있을 것이다. 유대암은 그 자신도 꼼짝없이 갇히게 된 사실
을 깨달았다.

주위를 두러보니 대문 안쪽 좌우에 제각기 긴 걸상이 하나씩 놓
여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유대암은 지체없이 그 두 개의 걸상을
높이 세워 그 위로 몸을 솟구쳤다. 그는 두 발을 제각기 걸상에
얽어 걸고 마치 긴 목발을 발밑에 붙인 듯이 하고는 성큼성큼 밖
으로 걸어나갔다. 세 명의 노인은 여전히 비명을 지르며 땅에서
딩굴고 있었다.

유대암은 옷자락을 찢어 손을 감더니, 그 보도를 품에 안고 있
는 노인의 등을 나꿔올려 곧장 동쪽으로 향했다. 그의 이렇나 임
기웅변은 해사파의 예측에 크게 벗어난 것이었다. 목적을 달성하
기 일보 직전에 엉뚱한 자가 도룡도를 가로채자, 그들은 일제히
뛰쳐나와 암기를 날렸다. 삽시간에 십여 종의 암기가 벌떼처럼
유대암을 향해 날아왔다. 유대암이 두 발에 걸상을 얽어 걸은 채
살짝 솟구쳐 앞으로 일 장(丈)남짓 밀려나자 암기들은 모조리 빗
나갔다. 걸상의 길이는 다섯 자 남짓 되어 그가 앞으로 대어섯
번 정도 솟구치며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해사파의 염효들을 멀리
떼어놓을 수 있었다. 염효들은 제각기 고함을 지르며 뒤쫓아왔
다.

유대암은 일단 독염 범의 안에서 벗어나자, 노인을 잡은 채 허
공으로 치솟아오르면서 냅다 두 발을 뒤로 걷어차냈다. 그러자,
발에 얽어 있던 걸상이 예리한 바람소리를 내며 뒤로 날아갔다.
그 즉시 뒤쪽에서 연달아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걸상에 몇
몇이 적중된 것 같았다. 이 틈을 타서 유대암은 이미 십여 장 밖
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비록 한 사람을 들고 있지만, 경공
술이 뛰어나 시간이 경과될수록 해사파 염효들의 추격을 멀리 뿌
리칠 수 있었다.

얼마 동안 달렸을까, 유대암의 귓전에 거센 파도소리가 들려왔
다. 이제 더 이상 쫓아올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비로소
노인에게 물었다.

"몸은 어떻소?"

노인은 코웃음을 칠 뿐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어 고통스럽게
신음을 계속했다.

유대암은 우선 그의 몸에 묻은 독염부터 씻어 주기로 마음 먹었
다. 그래서 해변을 달려가 노인을 얕은 물에 담그였다. 보도는
아직도 불에 달아 있어 바닷물에 닿자 치지지 소리가 나며 흰 연
기가 피어올랐다.

노인은 거의 혼수 상태에 놓여 있었다. 얼마 동안 바닷물 속에
잠겨져 있었는데도 그는 정신을 못 차렸다. 유대암이 그를 끌어
안고 일으키려는데, 마침 큰 파도가 밀려와 노인을 모래 사장으
로 밀어냈다. 유대암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이제는 위험에서 벗어났소. 난 급한 일이 있기 때문에 이만 떠
나야겠소."

노인은 안간힘을 써서 몸을 일으켰다.

"너... 너는 왜... 왜 보도를 빼앗지 않느냐!"

유대암은 담담하게 웃었다.

"보도가 비록 좋지만 내 것이 아닌데 어떻게 무력으로 빼앗을
수 있겠소?"

노인은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너... 너 도대체 무슨 꿍꿍이 속이야? 나를 어떻게 괴롭히려
고..."

유대암은 어이가 없었다.

"당신과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왜 괴롭히겠소? 난 오늘밤 이곳
을 지나다가 우연히 당신을 발견하고 도와준 것뿐이오."

노인은 고개를 내두르며 싸늘하게 외쳤다.

"내 목숨은 네 손에 달려 있으니, 죽이든 말든 맘대로 해라! 하
지만 죽어서 귀신이 되어서라도 이 원한을 갚고야 말겠다!"

유대암은 그가 심한 부상을 입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무슨 말을 들든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가 담담하게
웃으며 막 떠나려는데, 또 한 차례 큰 파도가 밀려왔다. 노인은
바닷물에 잠겨 신음을 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유대암은 그
를 이대로 방치하고 떠날 수가 없었다. 그냥 떠난다면 바다 속에
빠져 죽게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노인을 번적 들어올려 가까운
언덕 위로 올라가 사방을 둘러 보니, 동북쪽 작은 산중턱에 낡은
암자가 있는게 보였다. 그는 노인을 안고 달려갔다. 과연 생각했
던 대로 낡은 암자였다.

-----해신묘(海神廟)-----

현판에 적혀 있는 글씨를 어렴풋이나마 알아볼 수 있었다. 암자
안은 군데군데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유대암은 노인을 신상(神
像) 앞에 내려놓고 화석(火石)을 찾아 반 토막밖에 남지 않은 초
에 불을 붙였다. 불빛을 빌려 노인의 얼굴을 살펴보니, 독이 이
미 깊이 펴져서 푸르스름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대암은 품 속에서 천심해독단(天心解毒丹)을 꺼냈다.

"어서 이 해독단을 먹으시오."

노인은 눈을 감고 있다가 그이 말에 눈을 번쩍 떴다.

"어림없다! 절대 그 독약을 먹지 않을 거댜!"

유대암의 수심이 제아무리 깊다 해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누군지 아시오? 무당파의 문하가 독을 사용하는 따위의
비겁한 짓을 할 것 같소?! 이해독단으로 당신 몸에 퍼진 독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소. 단지 목숨을 사흘 더 연장해 줄 뿐이
오. 그러니 일찌감치 보도를 해사파에게 내주여 해약과 바꾸도록
하시오."

노인은 불현듯 몸을 벌떡 일으켜 소리쳤다.

"안 돼! 안 돼! 누구도 내 도룡도를 빼앗아 가지 못할거야!"

유대암은 측은한 생각마져 들었다.

"목숨까지 져버리면서 그 도룡도를 갖고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
겠소?"

노인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목숨을 내줄 수는 있어도 절대 도룡도를 내줄 수는 없다!"

이렇게 소리치며 보도를 꼭 껴안고 볼을 도룡도에 붙인 체 이루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애착을 드러냈다. 그러더니 유대암이 건
네준 천심해독단을 삼켜 버렸다.

유대암은 호기심이 생겨 이 도룡도가 대관절 무슨 보도인지 묻
고 싶었다. 그러나 노인의 눈에 탐욕의 빛이 이글거리는 것을 보
고 크게 혐오감이 생겨 곧 암자 밖으로 걸어나갔다. 순간, 등 뒤
에서 노인의 싸늘한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멈춰라! 어디로 가려는 거냐?"

유대암은 어이없게 웃었다.

"내가 어디로 가든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소?"

말을 마친 그는 다시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가 몇걸음 떼어놓
기도 전에 갑자기 노인이 방성통곡을 했다. 유대암은 고개를 돌
려 물었다.

"무엇 때문에 우는 거요?"

노인은 울먹이며 말했다.

"천신만고 끝에 이 보도를 수중에 넣었는데, 곧 죽게 된다니 이
보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유대암은 턱을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러니 어서 해사파를 찾아가 독문(毒門)해약과 바꾸시오. 그
방법밖에 없소!"

노인은 여전히 울면서 말했다.

"싫어, 싫어! 아까와서 내줄 수 없어!"

그의 태도와 표정은 실로 가증스러우면서도 우스꽝스러웠다.

유대암은 하마터면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참았다.

"무림인이라면 자신의 실력을 바탕으로 하여 적을 제압하고 협
의를 행해야 하거늘, 보도보검(寶刀寶劍) 따위는 단지 한낱 부속
물에 불과하오. 있어도 그뿐 없어도 그뿐이니, 노인장께서도 그
보도에 지나치게 연연할 필요는 없소."

노인은 버럭 화를 냈다.

"<무림지존(武林之尊). 보도도룡(寶刀屠龍), 호령천하(號令天
下), 막감불종(莫敢不從)>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유대암은 끝내 아연실소를 금치 못했다.

"물론 그 말을 들은 적이 있소. 그 다음에 두 마디가 더 있잖
소? 뭐라고 하더라..... 맞아 <의천도룡(倚天屠龍) 수여쟁봉(誰
與爭鋒)?>이오. 그 말들은 수십 년 전 무림에서 있었던 경천동지
할 큰일을 뜻하는 것이지, 당신이 생각하는 그 보도와는 아무 상
관이 없소."

노인은 다그치듯이 물었다.

"그 경천동지할 일이 무엇이었단 말인가?"

유대암은 아는 대로 대답해 주었다.

"그것은 왕년에 신주대협 양과가 몽고 황제를 죽여 한인(漢人)
의 긍지를 새롭게 해준 일이었소. 그후로부터 양대협이 호령하면
천하 어느 누가 따르지 않겠느냐는 즉, 호령천하 막감불종이란
말이 생겨났던 것이오. 그리고 용(龍)은 몽고 황제를 가리키는
것이고, 도룡(屠龍)은 바로 그 몽고 황제를 죽였다는 뜻이오. 다
시 말해, 도룡은 상징적인 말일 뿐 진짜 그런 이름을 가진 보도
는 없소이다."

노인은 냉소를 날렸다.

"그럼 묻겠는데, 의천불출 수여쟁봉은 무엇을 뜻하는가?"

유대암은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그건 잘 모르겠소. 의천(倚天)은 어쩌면 한 사람을 말하는 것
인지도 모르오. 양대협이 그의 아내로부터 무공을 배웠다던데,
의천이 그의 아내이거나 아니면 양양을 사수한 곽정 곽대협일 수
도 있겠죠!"

노인은 비꼬듯이 말했다.

"아, 그래? 모르면 솔직히 모른다고 할 것이지..... 잘도 꾸며
대는군! 똑똑히 들어라. 도룡은 칼의 이름이며 바로 이 도룡도
다. 그리고 의천은 한 자루의 검으로서 의천검(倚天劍)이라 한
다. 그 여섯마디의 뜻은 무림의 지존(至尊)이 바로 도룡도이며,
누구든 그를 얻으면 천하를 호령할 수 있고, 모든 영웅 호걸들이
그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마지막 두 마디는 의천검이 나
타나지 않는 한 도룡도와 쟁패할 것이 없다는 뜻이지!"

유대암이 그의 말이 그럴듯하여 반신반의했다.

"그 칼이 대관절 뭐가 신기한지 한 번 구경이나 합시다."

노인은 단도를 더욱 품안에 꼭 껴안고 코웃음을 쳤다.

"내가 세 살 먹은 어린애인 줄 아느냐? 내 보도를 강탈해 가려
하지만 어림도 없다! 윽....."

그는 중독된 후 거의 죽어가는 상태에서 유대암이 준 해독단을
먹고 겨우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단도를 품안에 꼭 껴안으려고
힘을 쓰더니 다시 신음을 토했다.

유대암은 쓴웃음을 지었다.

"보여 주고 싶지 않으면 그만두시오. 당신은 비록 도룡도를 얻
었지만 무슨 수로 천하를 호령하겠소? 그렇게 도룡도만 품에 품
고 있으면 모두들 당신한테 벌벌 기어야 하겠군요? 자, 이젠 당
신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알겠소?"

노인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부드럽게 말했다.

"젊은이, 우리 한 가지 약속을 하지 않겠나? 자네가 내 목숨을
구해 주면 나도 도룡보도의 잇점을 절반 나누어 주겠네."

유대암은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노인장, 우리 무당파를 너무 과소 평가하고 있는 것 같소. 약
한 자를 돕는 것은 무림인의 본분이거늘 내가 거기에 대한 대사
를 바랄 것 같소? 게다가 당신이 당한 독은 오직 해사파의 독문
해약이여야만이 제거할 수 있으니 그들을 찾아가 사정해 보도록
하시오."

"내가 그들에게서 이 도룡보도를 빼앗아 왔는데 그들이 날 살려
줄 것 같은가?"

"칼을 돌려주겠다는 조건을 내걸면 자연히 해약을 줄 게 아니겠
소?"

노인은 다시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엉뚱한 제의를 했다.

"자네의 무공이 상당히 뛰어난 것 같은데, 직접 해사파를 찾아
가 해약을 빼앗아 와 나를 구해 주지 않겠나?"

유대암은 단호히 거절했다.

"나는 급한 일이 있어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몸이오. 설령 여
유가 있다 해도 애당초 당신이 그들에게서 빼앗아 온 단도인데,
내 어찌 당신을 위해 다시 그릇된 일을 저지를 수 있겠소?"

노인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젊은이, 자네의 성은 유(兪)인가, 아니면 장(張)인가?"

유대암은 약간 의아해 했다.

"나의 성은 유인데 노인장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소?"

노인은 교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당파의 장진인(張眞人)께서 제자 일곱을 거두어들인 것을 누
가 모르겠는가? 그들 무당칠협(武堂七俠)중에 맏이인 송대협(宋
大俠)의 나이는 사십 줄이 넘었고, 그 아래로 둘째와 세째의 성
은 유이며 네째와 다섯째가 장이란 걸 모르는 자가 없을 걸세.
이제 보니 유삼협(兪三俠)이군, 어쩐지 무공이 대단하다고 생각
했는데..... 무당칠협의 명성이 천하를 진동시킨다더니 오늘에서
야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걸 알았네."

유대암은 비록 나이가 많지 않았지만 강호의 경험은 풍부했다.
그는 상대방의 아첨을 듣자 오히려 혐오감이 생겼다.

"노인장의 존성대명은 무엇이요?"

"노부의 성은 덕(德)이며 이름은 외자로서 성(成)이라 하네. 요
동(遼東)지방에선 나에게 해동청(海東靑)이란 외호를 붙여주었
지."

해동청은 요동지방에서 볼 수 있는 몸집이 큼 독수리로서, 천성
이 흉폭하여 작은 들짐승을 잡아먹는, 관외(關外)에서 유명한 날
짐승이었다.

유대암은 공수의 예를 취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외다."

그는 곧 하늘색을 살펴보았다. 해동청 덕성은 그가 떠나려한다
는 것을 알고 얼른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자네는 <호령천하 막감불종>이란 말을 우습게 생각하는 모양인
데, 사실은 거기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대암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며 재빨
리 촛불을 끄고 나직이 말했다.

"누가 이리로 오고 있소!"

해동청의 내공은 그에게 훨씬 뒤떨어져 미처 이상한 소리를 듣
지 못했다. 그가 의아해 하며 자세한 것을 물으려는 데 멀리서
휘파람소리가 서로 신호를 하듯 들려왔다. 한두 명이 아닌 듯 싶
었다. 해동청은 기겁을 했다.

"놈들이 쫓아온 모양인데, 우린 어서 뒤쪽으로 달아나세."

"뒤쪽에서도 누가 접근해 오고 있소."

"그럴 리가......!"

"해사파가 쫓아온 모양인데 마침 잘된 것 같소. 그들에게 해약
을 달라고 하시오. 난 이번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소."

해동청은 불현듯 손을 뻗어내어 유대암의 손목을 나꿔잡았다.
그리고 떨리는 음성을 말했다.

"유삼협, 제발 날 버리고 가지 말게. 제발 부탁이니....."

유대암은 그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것을 느끼며 반사적으로
손목을 젖혀 구전단성(九轉丹成)의 초식을 전개해 이내 그의 손
을 뿌리칠 수 있었다.

이때 해사파 염효들의 뛰어오는 소리가 가까이 들리는가 싶더
니, 곧이어 펑하는 소리와 함께 암자의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
에 미세한 물체가 빗발치듯 어둠을 뚫고 날아왔다. 유대암은 잽
싸게 해신보살(海神菩薩)의 신상 뒤로 몸을 숨겼다.

"으악....!"

순간 해동청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졌다. 미세한 물체
가 계속해서 날아들어와 해동청의 몸에 적중됐다가 다시 바닥에
떨어지곤 했다.

유대암은 그것이 해사파의 독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때, 암자
지붕 위에서 기왓장을 뜯어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천정이
뚫리고, 그곳에서 무수한 독염이 쏟아져 내렸다. 유대암은 독염
을 가볍게 생각할 수 없었다. 장백삼금이 당한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무공이 뛰어난 백의인도 독염이 닿자 마자 모든 것을 팽개치
고 달아나지 않았던가!

유대암은 다급해졌다. 독염이 마구 뿌러지니 영락없이 몸에 닿
게 될 것이다. 그는 번뜩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해신보
살상의 등 쪽을 주먹으로 깨고 잽싸게 그 안으로 뚫고 들어갔다.
마치 두꺼운 흙으로 만든 겉옷을 입은 격이니, 제아무리 많은 독
염이 뿌려져도 피해를 입을 리는 없었다.

잠시 후 밖에서 해사파 염효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조용한 것을 보니 쓰러진 모양이야."

"그 젊은 녀석은 보통내기가 아니니 서두룰 필요없이 잠시 더
기다려 보자."

"혹시 놈이 달아나 해신묘 안에 없는 게 아닐까요?"

"이봐! 네놈은 완전히 포위됐으니 살고 싶으면 순순히 나와 항
복해라!"

해사파의 염효들이 한창 소란을 피우고 있는데, 갑자기 멀리서
말굽소리가 들려오더니, 삽시간에십여 필의 준마가 어둠을 가르
고 가까이 달려왔다. 말굽소리와 더불어 한 사람의 낭랑한 외침
이 터졌다.

"일월광조(日月光照), 응왕전시(鷹王展시)!"

해신묘 밖에 서 있던 해사파의 염효들은 흡사 찬물 세례를 받은
듯 조용해졌다.

잠시 후 한 사람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천..... 천응교(天應敎)다! 어서 달아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요란한 말굽소리가 해신묘 밖에서 멎
었다.

해사파의 또 한 사람이 나직하게 말했다.

"이미 때가 늦었어!"

곧이어 발자국소리가 들리며 몇몇 사람이 해신묘 안으로 들어왔
다. 유대암은 신상 속에 숨어 있으면서도 불 빛을 볼수 있었다.
상대방은 횃불을 들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한 사람이 물었다.

"여러분들은 우리가 누군지 아시오?"

해사파의 몇몇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네, 네!"

앞서 그 자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이 분이 바로 천응교 천시당(天市堂)의 이당주(李堂主)올시다.
이당주 어르신네께선 좀처럼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데, 오늘 여러분들이 이렇게 직접 그 어르신네를 뵙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해야 하오. 이당주께서 알고 싶은 것은 그
도룡도의 행방이오. 순순히 내놓으며 이당주게서 자비를 베풀어
여러분들을 살려줄 수도 있을 것이오."

해사파의 한 사람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 이 자가 빼앗아갔기에 우리가 뒤쫓아온 것인데....."

그는 한쪽에 쓰러져 있는 해동청을 가리키는 모양이었다.

천응교의 사람이 즉시 다그쳤다.

"그럼 도룡도는 어디 있느냐?"

"저... 저 자가....."

"놈은 이미 죽은 모양인데 그의 몸을 뒤져 보아라!"

곧이어 몸을 수색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천응교의 그 자가 보고
를 했다.

"당주께 아뢰옵니다.이 자의 몸에는 아무 물건이 없습니다."

해사파의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떨리는 음성으로 얼른 변명했
다.

"이... 이당주, 그 도룡도를 분명 이 자가 갖고 도망쳤으며 우
리 곧장 뒤쫓아온 것입니다. 절대 거짓이 아닙니다....."

그의 음성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마 이당주의 눈빛을 접하
자 혼비백산한 모양이다.

유대암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해동청이 분명 그 칼을 쥐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천응교 사람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그게 사실이라면 어째 도룡도가 보이지 않느냐? 틀림없이 네놈
들이 숨겼을 것이다. 그럼 이렇게 하지. 누가 먼저 진상을 털어
놓으며 이당주께서 그만은 살려줄 것이다. 자,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뿐이야! 늦으며 기회가 없으니 어서 말해 보아
라!"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드디어 해사파의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입을 열었다.

"이당주, 우린 정말 모릅니다. 천응교가 원하는 물건인데 우리
가 어찌 감히 숨길 수 있겠습니까.....?"

이당주는 냉소만 날릴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부하
가 다시 해사파에게 다그쳤다.

"자, 누구든 살고 싶으면 어서 진상을 털어놓아라!"

그는 기다렸으나 해사파 중에서는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었다.
갑자기 한 사람이 소리쳤다.

"우린 도룡도를 되찾기 위해 이곳까지 쫓아왔지만 해신묘 안으
로 먼저 발을 들여놓은 것은 천응교요! 그런데 도룡도가 어디로
갔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소? 우리가 아무리 사실대로 말해도
믿지 않으니. 어차피 죽을 바엔 차라리....."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목슴
을 잃은 게 분명했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얼마 전에 서른 살 가량의 녀석이 이 늙은이를 구해 갔습니
다. 그 녀석은 경공솔이 뛰어났는데, 지금 보이지 않으니, 틀림
없이 녀석이 그 도룡도를 갖고 갔을 겁니다."

이당주라는 자의 냉랭한 음성이 비로소 들려왔다.

"이들의 몸을 샅샅이 뒤져 보아라!"

곧이어 몸을 뒤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후에 이당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녀석이 갖고 간 게 틀림없는 모양이다.
자, 이만 떠나자!"

다시 발자국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천응교의 사람들이 밖으로
나갔다. 이어 말굽소리가 들리며 차츰 동북쪽으로 멀어져 갔다.

유대암은 이 공연한 다툼에 말려들고 싶지 않아 해사파의 염효
까지 모두 떠난 후에야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들이 떠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흡사 그들은 갑자기 땅 속
으로 꺼진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유대암이 신상 뒤에서
살짝 내다보니, 이십여 명의 염효들은 모두 말뚝처럼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모두 혈도가 찍힌 모양이었다.

유대암은 신상 속에서 나왔다. 천응교 사람들이 버리고 간 횃불
이 있어 주위를 환하게 비쳐 주었다. 해사파의 염효들은 한결같
이 표정이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유대암은 내심 생각했다.

'그 천응교는 대관절 어떠한 파일까? 전에는 들어보지 못했는
데..... 이 악랄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해사파가 쩔쩔매는 것으
로 보아 더욱 무서운 존재임은 분명한데.....'

유대암은 천응교의 정체를 물어보기 위해 가까이 있는 한 염효
의 화개혈(華蓋穴)을 살짝 눌렀다. 혈도를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순간, 손에 닿는 감촉이 차디찼다. 흠칫하며 자세히 살펴보니 이
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사혈(死穴)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놀랍
게도 이십여 명이 모두 마찬가지로 사혈이 찍혀 있었다.

유대암은 이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천응교의 사람들은
사혈을 찍으면서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으니, 그 수법이야말
로 악랄하고도 괴이했다. 유대암은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을 필
요가 없었다. 주위에 독염이 뿌려져 있는 것을 보고 행여나 나중
에 죄없는 사람이 다칠까 봐 이 해신묘를 불지르기로 했다. 이렇
게 결심하자 한쪽에 쓰러져 죽어 있는 해동청이 측은하게 느껴졌
다. 한낱 쇠붙이를 탐하다가 목숨마저 잃게 된 것이다. 시체나마
묻어 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한데 유대암이 그의 시체를
들어올리는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시체가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기 때문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목줄기 아래 커다란 상구
(傷口)가 나 있었고, 그 상구 주위는 선지피로 얼룩져 있었다.

유대암은 선뜻 느끼는 바가 있어 그 상구 속으로 손을 넣었다.
즉시 차가운 느낌이 손끝에 전해 오며 한 자루의 칼을 끄집어냈
다. 칼의 무게는 최소한 백 근 남짓 될 것 같았다. 바로 많은 사
람의 목숨을 앗아간 그 도룡보도였다. 해동청은 도조히 살아서
이곳을 벗어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도룡도로서 자
신의 목줄기 아랫 부분을 찌른 것이다. 워낙 칼의 무게가 무거운
데다가 그가 뜻한 바가 있어, 도룡도는 목줄기 아랫 부분에서부
터 곧장 뱃속 깊숙이 파고 들어간 것이다. 자루까지 몸 속으로
뚫고 들어갔으니 조금 전에 천응교의 사람이 그의 몸을 뒤졌지만
도룡도를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유대암은 칼을 쥔 채 우뚝 서서 생각했다.

'이 칼이 정말 무림지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불길한 물건임에는
틀림없다. 벌써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으니..... 일
단 이것을 사문으로 갖고 가 스승님의 분부에 따라 처리해야겠
다.'

그는 해신묘 곳곳에 불을 붙이 후 해동청의 시체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해동청의 시체를 들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빌어 도룡
도를 다시 유심히 살펴보았다. 도신(刀身)자체는 검은 유기가 흐
르는 것이 어떠한 금속인지 알 수 없었다. 아뭏든 열화에도 아무
런 손상을 입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이물(異物)임에는 분명했다.
유대암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렇게 무거운 칼을 어떻게 사용하려고 만들었을까? 관운장(關
雲長)의 청룡도(靑龍刀)도 팔십 근에 불과했는데.....'

그는 칼을 봇짐에 싸고 나서 해동청이 묻힌 곳을 향해 나직이
축원을 했다.

'이제 부디 편안히 잠드시오. 내가 이 칼을 차지하려는 것은 아
니오. 더 이상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해 스승님께 갖고 가려는 것
뿐이오. 그 어르신네께서 필히 선처를 내리실 것이오.'

유대암은 봇짐을 쓩어지고 북쪽으로 달려갔다. 반 시간도 채 못
되어서 그는 강변에 다다를 수 있었다. 희미한 별빛이 뿌려지는
가운데 주위를 뎔어보니 배가 보이지 않았다. 유대암이 강줄기를
따라 동쪽으로 얼마쯤 내려갔을 때 강물 위에 불빛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몇 척의 고기배가 조업을 하고 있었다.

유대암은 소리 높여 외쳤다.

"여보시오! 뱃삯은 두둑히 줄 테니 강 좀 건넙시다!"

배와의 거리가 워낙 멀어 어부들은 그의 외침을 듣지 못한 모양
이었다. 유대암은 한 모금의 진기를 끌어올려 다시 소리를 치려
는데, 상류 쪽에서 작은 배 한 척이 미끄러져 내려왔다. 뱃머리
에서 노를 젖고 있는 사공이 먼저 그에게 물었다.

"손님, 강을 건너시겠습니까?"

유대암은 얼른 대답했다.

"그렇소. 수고스럽지만 편의 좀 봐주시오."

유대암은 몸을 솟구쳐 뱃머리에 내려서는 순간, 배가 기우뚱했
다.

사공은 깜짝 놀랐다.

"상당한 무겐데... 손님, 봇짐 속에 무엇이 들었습니까?"

유대암은 담담하게 웃었다.

"벌것 아니오. 워낙 몸이 둔해서..... 자, 어서 강을 건넙시
다."

사공은 돛을 달고 물살 따라 바람 따라 비스듬히 동북쪽으로 미
끄러져 갔다.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약 일 리 가량 벗어났을 때
갑자기 멀리서 천둥치는 듯한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며 물살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유대암은 사공에게 물었다.

"사공, 혹시 비가 쏟아지려는 게 아니오?"

사공은 빙긋이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이것은 전당강의 야조(夜潮)입니다. 물살이 거세졌지만 그 물
살을 따라가면 속도가 훨씬 더 빨라질 겁니다."

유대암이 동쪽을 바라보니, 하늘과 맞닿는 곳으로부터 한줄기의
거센 파도가 도도하게 용솟음쳐 왔다. 그 파도가 가까와질수록
흡사 천군만마가 달리는 듯한 장관을 이루었다.

바로 이때였다. 한 척의 범선이 파도를 뚫고 쏜살같이 미끄러져
왔다. 돛대에는 한 마리의 거대한 독수리가 그려져 있어, 바람에
펄럭일 때마다 마치 그 거대한 독수리가 날개짓을 하며 덮쳐오는
것 같았다. 유대암은 대뜸 천응교가 떠올라 경각심을 높였다.

그런데, 사공이 갑자기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눈깜짝할 사이에
자취를 감추어버리는 게 아닌가? 노를 젖는 사람이 없자 배는 중
심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유대암은 황급히 배 뒷전으로 달려가
노를 잡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평하는 소리가 들리며 어느새
접근한 범선(帆船)이 좌현을 들이받았다. 범선 뱃머리에 단단한
쇠를 부착한 듯 충돌하자마자 작은 배에 구멍이 뻥 뚫렸다. 그
즉시 거센 강물이 용솟음쳐 들어왔다.유대암은 놀라면서도 분노
를 금치 못했다.

'이 교활한 천응교의 놈들, 이제 보니 사공도 한패였구나.....'

그는 더 이상 작은 나룻배에 머물 수가 없어 몸을 숫구쳐 범선
뱃머리에 내려섰다. 순간 거센 파도가 밀려와, 범선은 그 파도에
밀려 허공으로 삼 장 가량 치솟아올랐다. 유대암은 몸의 중심을
잡기도 전에 황급히 단전의 진기를 끌어올려 양팔을 펼치며 제운
종(梯雲縱)신법을 전개해 다시 사뿐히 뱃머리에 내려섰다. 선창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주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유대암은 소리높여 외쳤다.

"천응교의 친구들인가?!"

그가 거듭 두 번이나 소리쳤지만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선창 문을 밀었다. 순간 차가운 감촉이 손에 전해져 왔다. 뜻밖
에도 선창 문은 쇠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가 힘주어 밀어도 열리
지 않았다. 유대암은 공력을 양팔에 모아 대갈일성과 함께 쌍장
을 뻗어냈다.

펑!

철문이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선창과 철문의 연결 부
분이 그의 장력에 의해 떨어져 나갔다. 이제 일장을 더 가하기만
해도 열릴 것이다. 그제서야 선창 안에서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려
왔다.

"무당파의 제운중 신법과진산장(震山掌)의 장령은 과연 듣던대
로 대단하군. 유삼협, 등에 지고 있는 도룡도만 내준다면 우리가
무사히 강을 건너드리겠소."

말뜻은 겸손한 것 같았으나, 그 말투는 건방지고 위협의 냄새가
짙게 풍겼다.

유대암은 눈쌀을 가볍게 찌푸렸다.

'저들이 내 정체를 어떻게 알았을까?'

상대방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유삼협, 우리가 이름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한 모양이구료.
사실 이상할 게 하나도 없소. 무당파의 고수를 제외하고 당금 상
호에서 제운종 신법과 진산장을 그렇게 출신입화(出神入化)할 경
지로 전개할 사람이 또 누가 있겠소? 유삼협이 모처럼 강남으로
왔는데, 우리 천응교는 주인된 입장에서 대접도 제대로 못했으니
송구스러울 뿐이오."

유대암은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귀하의 존성대명은 무엇이오? 정녕 주인으로 자처한다면 모습
을 드러내 얘기를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소?"

"천응교는 귀파와 친분도 없고 원한도 없으니 서로 대면하지 않
는 게 좋을 것 같소. 유삼협, 어서 도룡도를 뱃머리에 내려놓으
시오. 그럼 편안하게 목적지까지 모셔드리리다."

유대암은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이 도룡도가 귀교의 물건이외까?"

"그건 아니오. 단지 그 칼이 무림지존이기 때문에, 무림인으로
서 수중에 넣고 싶은 것뿐이오."

"그렇다면 내 손에 들어온 이상 일단은 나의 소유가 된 게 아니
겠소? 나는 사문으로 돌아가 스승님의 분부에 따라 이 검을 처리
할 생각이니 그리 아시오!"

상대방은 뭐라고 몇 마디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워낙 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유대암은 갑갑하여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소?"

선창 안에서 다시 모기만한 소리가 들려왔다. 유대암이 들을 수
있는 것은, 유삼협... 도룡도 등 한 두 마디뿐이었다. 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가 반문했다.

"뭐라고 했소?"

이대 마침 파도가 밀려와 범선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고, 유대암
은 별로 개의치 않고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귀교는 ㅋ 한 자루를 얻기 위해, 해신묘에서 이십 명이나 넘는
목숨을 죽였소. 그 수단이 너무 악랄하다고 생각되지 않소?"

선창 안에 있는 자는 여유만만했다.

"천응교는 언제나 경우에 따라 수단을 전개해 왔소. 악인에게는
악랄한 수법을 쓰지만 유삼협에게야 그럴 수가 있겠소? 목숨까지
는 노리고 싶지 않으니 그 도룡도만 건네준다면당장 문수침(吻
鬚針)의 해약을 내드리겠소!"

유대암은 <문수침>이란 말에 가슴이 철렁하여 얼른 가슴을 만져
보니, 조금 전 모기에게 물린 듯한 허벅지의 부위가 은근히 아팠
다.

그는 비로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순순히 도룡도를 내주든지 아니면 모종의 행동
을 취해야만 했다. 그는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일단 상대방을
제압하면 해약은 자연히 내줄 것이다.

그는 곧 좌장으로 얼굴을 호위하고 우장으로 가슴을 호위한 채,
몸을 솟구쳐 선창 안으로 뚫고 들어갔다. 그의 발이 선창 안에
떨어지기도 전에 어둠을 뚫고 한 갈래의 경풍이 뻗쳐왔다. 유대
암은 즉시 우장을 격출했다. 그는 극도로 분노한 상황에서 이 일
장에 십 성의 공력을 주입시켰다. 쌍방의 장풍이 맞부딪치자 펑
하는 굉음이 터지며 선창 안에 있던 사람은 곧장 뒤로 날아갔다.
요란한 소리가 잇따라 들린 것으로 미루어 탁자나 의자 따위가
박살난 모양이었다.

유대암은 따끔한 통증을 느꼈다. 방금 일장을 교환하면서 또 암
수를 당한 것이다. 상대방은 장심에 암기를 숨기고 있다가 쌍장
이 교차되는 순간 암기가 그의 장심을 파고든 것이다. 상대방은
비록 그의 웅후한 장력에 부상을 입었겠지만, 어둠 속에 얼마나
많은 적이 도사리고 있는지 예측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유대암
은 감히 경솔한 행동을 하지 못하고 즉시 뱃머리로 다시 뛰쳐나
왔다.

선창 안에서 그 자가 기침을 몇 번 하더니 소리쳤다.

"유삼협의 장력은 과연 놀랍군. 하지만 내가 전개한 칠성정(七
星釘)도 빗나기지 않았으니, 이번 회합은 막상 막하라 할수 있을
것이오!"

유대암은 얼른 천심해독단을 몇 알 먹고 나서 봇짐을 풀어 도룡
도를 꺼냈다. 그 즉시 도룡도를 펼치며 선창으로 덮쳐갔다.

창!

도룡도가 닿자 그 육중한 철문이 나무판자처럼 두 쪽으로 쪼개
졌다. 과연 예리하기 이를데 없는 도룡보도였다. 유대암은 그 예
봉을 시험이라도 하듯 연거푸 도룡도를 펼치자 쇠로된 선창이 지
푸라기처럼 베어져 나갔다. 선창 안에 있던 자는 자지러지게 놀
라 뒤쪽으로 몸을 솟구치며 소리쳤다.

"너는 연거푸 두 번씩이나 중독됐는데 그래도.....!"

유대암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룡도를 펼치며 덮쳐갔다.
그 자는 황급히 쇠닻을 집어 막았다.

창!

금속성이 들리는 가운데 쇠닻은 영락없이 잘려져 나갔다. 그 자
는 옆으로 피하며 다시 소리쳤다.

"목숨보다 보도가 더 중요하냐?!"

유대암은 공격을 멈추었다.

"좋다! 해약을 내주면 이 칼을 주겠다!"

이때, 그는 문수침을 맞은 다리 부분으로부터 통증이 밀려 오는
것을 느끼며, 천심해독단으로선 도저히 그 독을 제거할 수 없다
는 걸 알았다. 어차피 이 도룡보도는 우연한 기회에 얻은 것이므
로 별로 중요시할 게 없었다. 그 자는 크게 기뻐하며 도룡도를
집어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 자는 달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
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보도에만 정신이 팔려 있을 뿐
해약을 내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대암은 장심의 통증이 극심해져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어서 해약을 내 놓아라!"

그러자 상대방은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하핫.....!"

유대암은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해약을 달라는데 뭐가 그렇게 우습느냐?"

상대방은 그의 얼굴을 겨냥해 삿대질을 하며 교활하게 말했다.

"흐흐.....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내가 해약을 내주기도 전에
먼저 보도를 건네주다니....."

유대암은 발끈했다.

"남아일언중천금이거늘, 그럼 이제와서 약속을 저버리겠단 말이
냐?"

"네 손에 보도가 쥐어져 있을 때는 도저히 널 당해 낼 수 없었
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런데 뭐가 아쉬워 너에게 해약
을 내주겠느냐?"

유대암은 그의 말에 마치 물벼락을 맞은 듯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너무 경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대암은
우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물었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상대방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나는 단지 천응교의 일개 무명 소졸에 불과하다. 무당파가 복
수를 하겠다면 본교의 교주와 여러 당주가 나서서상대해 줄 것
이니, 굳이 나의 이름을 알 필요는 없다. 더우기 오늘 밤 유삼협
이 쥐도 새도 모르개 죽으면 제아무리 신통한 능력을 기진 장삼
봉이라 해도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모를 것이다."

유대암은 더 이상 얘기해 보았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잘려져
나간 쇠닻을 집었다.

'오늘 이곳에서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과 죽음을 함께
하리라!'

마음을 굳힌 그는 상대방이 양양해 있는 틈을 타서 다짜고짜 덮
쳐가, 왼손으로 쇠닻을 휘두르며 오른손으로 웅후한 장풍을 뻗어
냈다. 사나이는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도룡보도를 휘둘러
막으려 했다. 그러나 도룡도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무거워 동작
이 머뭇거려졌다. 그 순간에 쇠닻이 Ð날아왔다. 그 위맹한 기세
를 도저히 막아낼 재간이 없자 사나이는 발끝으로 바닥을 걷어차
며 강물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비록 아슬아슬하게 쇠닻을 피
했지만, 유대암이 오른손으로 전개한 장풍이 등에 적중되었다.
사나이는 오장육뷰가 뒤틀리는 것을 느끼며 비명을 지를 새도 없
이 풍덩 강물 속에 빠져 정신을 잃었다.

유대암은 길게 숨을 들이켰다. 상대방은 강물 속에 빠지면서도
그 도룡도를 놓지 않았다.

'보도를 얻었지만 물귀신이 됐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냐.....?'

유대암은 내심 한탄하고 있는데, 갑자기 흰 광채가 번뜩이며 한
줄기의 가느다란 사슬이 강물 속으로 떨어진 사나이의 허리를 휘
감았다. 이어 칼을 쥐고 있는 사나이의 몸이 사슬에 감긴 채 선
창 위로 튕겨져 올라왔다.

유대암은 흠칫 놀라 흰 사슬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
에 훤칠한 청의인이 사슬을 쥔 채 서 있었다. 유대암은 즉시 그
를 향해 ㅍ쳐가려 했으나, 독성이 발작해 눈앞이 캄캄해지며 그
자리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유대암은 몽롱한 의식속에서 눈을 떴다. 맨 먼저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비단잉어가 수놓아진 작은 깃발이었다. 유대암은 눈
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여전히 그 작은 깃발이 눈에 선명했다.
그 깃발은 청화(靑花)가 조각된 자기병 속에 꽃혀 있었다. 비단
잉어 살아서 낭파를 헤집고 다니듯 생생했다.

유대암은 내심 이상하게 느껴졌다.

'저것은 임안부(臨安付) 용문표국(龍門標局)의 깃발이 아닌가?
대관절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는 머리가 어지럽고 지근지근거려 생각이 잘떠오르지 않았
다. 아뭏든 그가 지금 들것 위에 누워 있고 어느 대청에 와 있다
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는 좌우를 둘러보려고 했으나 목이 뻣뻣하여 도저히 불가능했
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들것에서 뛰어내리려 했지만, 사지가
솜처럼 풀려 전혀 힘을 쓸 수 없었다. 비로소 그는 전당강에서
칠성정과 문수침을 맞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때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귀하의 성함을 밝혀줄 수 있겠소?"

한 사람이 묻자 다른 한 사람이 그의 말을 받았다.

"내 이름을 물을 필요는 없어요. 단지 이번 거래를 수락할 건지
의 여부만 확실하게 대답해 주세요."

그 음성은 간드러진 여자였다.

우렁찬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우리 용문표국은 일이 밀려 있소이다. 귀하가 정녕 신분을 밝
히지 않겠다면 거래를 할 수 없으니 다른 표국을 찾아가는 게 좋
겠소."

간드러진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임안부에서 용문표국 외에는 제대로 실력을 갖춘 표국이 없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온 것이예요. 만약 당신이 결정을 내릴 수 없
다면 속히 가서 총표두(總標頭)를 불러오세요."

그 말투는 매우 무례했다. 상대방은 기분이 상한 듯 퉁명스레
말했다.

"내가 바로 총표두요. 다른 볼일이 있어 이만 실례하야겠소."

간드러진 음성은 다소 의외인 듯했다.

"아..... 당신이 바로 다비웅(多臂熊) 도대금(都大錦)이란 말예
요.....?"

그녀는 말끝을 약간 흐리며 다시 말했다.

"도총표두, 오래 전부터 명성은 들어왔어요. 나의 성은 은(殷)
이라 해요."

도대금은 언짢았던 기분이 다소 누그러진 것 같았다.

"당신은 무슨 일로 오셨소?"

"그 전에 우선 다짐받고 싶은 게 있어요. 이번에 호송을 부탁할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므로 추호의 착오가 생겨서는 않돼요!"

도대금의 음성이 다시 높아졌다.

"우리 용문표국은 개설된 지 이십 년 동안 큰 거래를 숱하게 해
왔지만, 아직 한 번도 실수를 한 예가 없소이다!"

유대암도 도대금의 명성을 들은 바 있었다. 그는 소림파의 속가
제자로서 무공이 상당한 경지에 도달해 있고, 특히 연주강표(連
珠鋼標) 암기 수법이 뛰어나 단숨에 사십 구 매의 강표를 발출해
낼 수 있었다. 그로 인해 강호에서 그를 일컬어 다비웅, 즉 팔이
많은 곰이란 외호를 붙여 주게 된 것이다.

그가 개설한 용문표국은 강남 일대에서 제법 알려져 있었다. 단
지 무당과 소림의 제자들은 서로 왕래가 없으므로 이름만 전해
들었을 뿐 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다.

은씨 성을 가진 여자가 당당하게 웃으며 말했다.

"용문표국의 명성을 들어서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찾아왔다고
하잖았어요? 도총표두, 호송할 것을 맡기기 전에 세가지 조건을
제시하겠어요."

도대금이 먼저 단호하게 말했다.

"말썽이 생길 소지가 있는 것은 받지 않소. 그리고 출처가 불투
명한 물건도, 은자 오만 냥 이하의 물건도 받지 않소이다."

그는 상대방이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겠다는 말을 듣자 먼저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은씨 성을 가진 여자는 느긋하게 말했다.

"내가 의뢰할 표화(標貨)는 미안하지만 말썽의 소지를 전혀 배
제할 순 없어요. 동시에 출처도 불투명해요. 마지막으로 댓가가
어느 정도인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도 없어요. 그리고 내가 요구
하는 세 가지 조건도 결코 쉬운 게 아니예요. 첫째, 도총표두 당
신이 직접 호송을 해야 돼요. 둘째, 임안에서 호북 양양부(襄陽
府)까지 밤낮을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해 열흘 이내에 목적지에 당
도해야 하며, 세째, 만약 조금이라도 착오가 생길시엔...... 흥!
도총표두 당신의 목숨은 물론이거니와 용문표국의 살아 숨쉬는
것은 모조리 마지막이 될 거예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꽝! 하는 소리가 들렸으니, 아마 도대금
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친 모양이었다.

"지금 밥 먹고 할 짓이 없어 용문표국을 찾아와 장난을 하는 거
냐?! 허우대라도 좋았다면 당장 따끔한 맛을 보여 줬을 것이다!"

은씨 성을 가진 여자가 냉소를 날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시끄러
운 금속성이 연달아 들렸다. 무거운 물건을 탁자 위에 쏟아놓는
것 같은 소리였다. 이어서 그 여자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건 황금 이천냥이니 우선 수고비로 받아주세요!"

유대암은 이 말에 깜짝 놀랐다.

"황금 이천 냥이면 수만 냥의 은자가 될 텐데....."

사실 이천 냥의 황금이라면 표국을 경영하는 자가 몇 년을 벌어
도 만져볼 수 없는 큰 액수었다. 움직일 수가 없는 유대암은, 눈
을 떠보았자 단지 화병에 꽃혀 있는 깃발밖에 볼 수 없었다.

이때, 대청 안은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파리가 윙
윙거리며 나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아니, 도대금의 가쁜
숨소리도 들려왔다.

유대암은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지만 능히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
었다. 틀림없이 입이 딱 벌어진 채, 탁자 위에 쏟아놓은 눈부신
금덩어리를 응시하며 넋을 잃고 있을 게 뻔했다. 비록 표국을 운
영해 오면서 많은 양의 금은보화를 보아 왔지만 그것은 언제나
남의 소유였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가 고개만 한
번 끄덕이면 황금 이천 냥을 수중에 넣게 된다. 어찌 마음이 동
요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참 후에 도대금이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은 나으리, 호송할 게 무엇입니까?"

은씨 성을 가진 여자는 다짐부터 받으려 했다.

"우선 묻겠는데, 내가 제시한 세 가지 조건을 받아들이겠어요?"

도대금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자신의 허벅지를 탁 내리쳤다.

"좋소이다. 은 나으리께서 이렇게 후한 댓가를 치르니 목슴을
바쳐서라도 협력하겠소. 보물을 언제쯤 보내올 겁니까?"

은씨 성을 가진 여자는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당신이 호송할 것은 바로 저 들것에 누워 있는 어르신네예요."

"아니....!"

도대금은 크게놀랐다. 그러나 더욱 놀란 것은 유대암이었다.
그는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입만 벌려질 뿐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도대금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따.

"이..... 이 어르신네를.....?"

"맞아요! 당신이 직접 호송하세요. 도중에서 말을 바꾸어 탈 수
는 있지만 사람은 갈아서는 안 돼요. 열흘 이내에 틀림없이 호북
양양부 무당산에 당도해 무당파의 장문인 장삼봉 진인에게 건네
줘야 해요."

여기가지 들은 유대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도대금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무당파.....? 우리 소림 제자들은 비록 무당과 연짢은 일은 없
지만, 아무 내왕이 없었기 때문에 좀....."

은씨 성을 가진 여자가 냉랭하게 말했다.

"이 어르신네는 중상을 입고 있어 한시도지체할 수 없는 입장이
예요. 그러니 이번 일을 맡든 안 맡든 얼른 결정을 내리세요. 대
장부일언중천금인데 왜 이랬다 저랬다 하죠?"

도대금은 단호하게 말했다.

"좋소! 은 나으리의 체면을 봐서라도 이번 거래를 맡겠소이다!"

은씨 성을 가진 여자는 가볍게 웃었다.

"좋아요. 오늘이 삼월 스무 아흐렛 날이니 사월 초아흐렛 날까
지 만약 저 어르신네를 무사히 무당산으로 호송해 주지 못한다
면, 약속대로 용문표국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테니 명심하
세요!"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리한 파공음이 들리며 십여 개의 작
은 바늘이 뻗쳐와 깃발이 꽂혀 있는 자기 병에 적중되었다.

창!

맑은 음향이 들리는 곳에 자기병이 수십 조각으로 갈라져 사방
으로 흩날렸다. 실로 놀라운 암기 수법이었다.

"앗!"

도대금은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비명을 내질렀다. 유대암도 가
슴이 섬뜩했다.

은씨 성을 가진 여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가자!"

그러자 들것을 앞뒤에서 들고 왔던 두 사람은 일제히 대답하며
들것을 내려놓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한참 후에야 도대금이 유대암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

"형씨의 존성대명은 무엇이오? 무당파의 제자요?"

유대암은 그를 멀건히 쳐다볼 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비로소 도대금 총표두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나
이는 오십 줄이며 허우대가 건장하고 팔의 근육이 뱀처럼 엉켜
있었다. 첫눈에 외공(外功) 고수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도대금은 다시 물었다.

"방금 그 은 나으리는 청수하게 생겼는데, 그런 놀라운 무공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정말 뜻밖이오. 그는 대관절 어느 집안 어느
문파의 제자요?"

그가 계속 물어오자 유대암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도대금은 다비웅이란 외호가 말해 주듯이 암기의 명수였지만,
그 은씨 성을 가진 젊은 여자가 전개한 암기 수법에 혀를 내둘렀
다. 자신의 실력이 도저히 그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을 시인하
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금은 이십여 년 동안 표국을 운영해 오
며 해괴한 일을 많이 겪었다. 그러나 황금 이천 냥으로 한 사람
을 목적지까지 호송해 달라는 청탁은 처음받아 보는 것이다. 전
에는 이러한 예를 아예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는 곧 황금을 챙기고 유대암을 방 안으로 옮기게 해 휴식을
취하도록 분부했다. 이어 표국의 각 표두들을 불러 모아 모든 채
비를 갖추어 즉시 출발하기로 합의했다.

----- 용문리삼약(龍門鯉三躍), 어아화위룡(魚兒化爲龍) -----

(용문의 잉어가 세 번 뛰면 용이 되어 승천한다.)

용문표국의 깃발이 펼쳐져 바람에 나부꼈다.

유대암은 표차 안에 누워 감회에 젖었다.

'나 유대암은 여지껏 강호에서 종횡해 오묘 표국을 안중에도 두
지 않았는데, 오늘 이런 어려움을 당해 그들의 호송을 받아 사문
으로 돌아가게 될 줄이야.....'

그의 생각은 이어졌다.

'나를 구해 준 그 은씨 성을 가진 자는 누구일까? 음성만 들어
선 여자 같은데 됴총표두의 말투로 미루어선 젊은 남자 같기도
하고.....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으니, 만약 죽지 않고 다
시 강호에서 활약할 수 있다면 이 은혜를 꼭 갚아야지.....'

말굽소리도 요란하게 일행은 서쪽을 향해 진발했다. 도대금은
사실 우려가 없지는 않았다. 필시 도중에서 적지 않은 싸움이 벌
어질 것이라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절강(浙江)을 떠나 안휘(安
徽)를 거쳐 호북성까지 들어올 때까지 아무런 불상사도 생기지
않았다. 이날 태평점(太平店), 선인도(仙人渡)를 지나 다시 한수
(漢水)를 건너 노하구(老河口)에 당도했다. 이곳에서 무당산까지
는 하루 거리면 충분했다.

드음날 정오 무렵에 예정대로 쌍정자(雙井子)에 다다랐다. 이제
무당산은 불과 십 리 밖에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비록
길을 재촉하느라고 고생도 많았지만, 약속을 어기지 않고 사월
초 아흐렛 날을 맞추어 무당산에 당도하게 된 것이다. 그 동안
모두들 긴장에 싸여 있었지만, 이제는 안도의 숨을내쉴 수 있게
되었다. 도대금은 여유 있게 말을 몰며 채찍으로 구름에 가려진
채 우뚝 솟아 있는 천주봉을 가리켰다.

"축삼제(祝三第), 무당파의 명성이 비록 우리 소림만은 못하지
만, 그래에 널리 알려진 것으로 보아 무당칠협의 실력도 만만치
는 않은 모양이다."

축표두가 그의 말을 받았다.

"무당의 명성이 그래에 널리 알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기
초가 얕아 천여 년을 이어온 우리 소림과는 비교도 할수 없죠.
다른 것은 고사하고 단지 총표두의 이십 사수 항마장(降魔掌)과
사십 구 매의 연주장표만 하더라도, 아마 무당파의 어느 누구도
따르지 못할 겁니다."

그의 곁에 있던 사표두(史標頭)가 한 마디 거들었다.

"맞습니다. 강호의 소문을 어떻게 그대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무당필협의 명성이 알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우리 중에 본 사람이 없잖아요. 아마 일반 촌부들이
그들의 실력을 과대 평가하여 소문을 퍼뜨린 모양입니다."

도대금은 빙긋이 웃었다. 그는 두 표두보다 견식이 높았다. 그
래서 무당칠협의 명성이 결코 우연히 얻어진 것이 아니라 그럴만
한 실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
십여 년 동안 험악한 강호에서 행표(行標)를 해오면서 아직 적수
를 만나지 못한 자신의 무학에 대해서도 적이 자부심을 갖고 있
었다.

다시 일단의 거리를 가자 산길이 좁아져 세 필의 준마가 나란히
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사표두는 말고삐를 늦추어 뒤로 쳐졌다.
축표두가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했다.

"총표두, 잠시 후 무당파의 장삼봉을 만나면 인사를 어떻게 해
야 마땅하죠?"

도대금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서로 동문이 아니니 원래는 동배(同裴)의 예를 행해야겠지. 하
지만 장노도인은 나이가 구십 줄로서 당금 무림에선 찾아보기 드
문 고령이니, 무림 선배로 받들어 큰절을 올려도 무방할 걸세."

축표두가 교활하게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 생각 같아선 그냥 몸을 숙여 인사를 하면서 <장진인, 후배
들이 큰절을 올리겠습니다.>하고 말하면 틀림없이 만류할 테니,
그렇게 되면 못 이기는 척하고 큰절을 생략해 보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도대금은 빙긋이 웃었다. 그는 마차 안에 누워 있는 자의 내력
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그 동안 말도 없고 움직이지도 않
아 표사들이 번갈아가며 음식 시중을 들어왔다. 도대금은 표사들
과 여러 번 논의를 했지만, 결국 그의 정확한 신분을 알아내지
못했다. 대관절 무당파의 제자 쑨 친구인지, 아니면 적인지 종잡
을 수가 없었다.

이제 무당산이 가까와질수록 도대금의 의문은 더욱 짙어갔다.
어쨌든 이제 곧 장삼봉을 만나게 될 거고, 의문도 풀리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을 굳히고 있는데, 갑자기 서쪽 산길로부터
몇 필의 준마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축표두가 얼른 앞으로 말을
몰고 나가 살펴보았다. 눈깜짝 할 사이에 여섯 필의 준마가 가까
이 달려와 앞에 멎었다. 앞뒤로 세 필씩 표차의 길을 가로막는
꼴이 되었다.

도대금은 다소 긴장되었다.

'이제 무당산에 다 당도하여 말썽이 생가는 게 아닐까?'

그는 나직이 사표두에게 말했다.

"표차를 잘 호위하게."

이어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갔다. 그와 동시에 표사들이 표기(標
旗)를 말았다 떨쳤다 하며 인사를 하는 표시를 했다. 동시에 소
리를 높여 외쳤다.

"임안부의 용문표국이 귀지(貴地)를 지나게 됐으니, 예의에 어
긋나는 점이 있으면 너그럽게 양해해 주십시오."

도대금은 길을 가로막고 있는 여섯 명을 살펴보았다. 그들중에
둘은 도관(道冠)을 쓴 도사이며 나머지 넷은 속가 차림이었다.
한결같이 무기를 휴대하고 눈빛이 형형한 것으로 미루어 무공이
상당한 경지에 달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도대금은 나름대로 짐작을 해보았다.

'이들이 바로 무당칠협 중에 여섯명이 아닐까?'

그는 가까이로 말을 몰고가 포권의 예를 취했다.

"나는 임안부 용문표국의 도대금이오. 여러분들의 존성대명을
알고 싶소이다."

앞쪽에 서 있는 세명 중에, 키가 가장 크고 왼쪽 볼에 콩알 만
한 사마귀가 붙어 있는 자가 냉랭하게 입을열었다.

"도형은 무엇하러 무당산에 왔소?"

도대금은 기분이 언짢았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우린 부탁을 받아 한 중상자를 귀산까지 호송해 왔소. 귀파의
장문 장진인을 뵙고자 하니 전해 주시오."

사마귀가 붙어 있는 자가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중상을 입은 자를.....? 그게 누구요?"

도대금은 또렷하게 말했다.

"우리는 은씨 성을 가진 손님의 부탁을 받아 이 중상을 입은 어
른을 무당산까지 호송해 온 것뿐이오. 이 어르신이 누구이며 어
떻게 해서 부상을 입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하오. 용문표국은 남
의 부탁을 받아 그 부탁을 충실히 이행할 뿐, 그 외에 손님의 사
사로운 일은 전혀 물을 수가 없게끔 되어 있소."

그는 강호에서 수십 년간 생활해 왔으며, 또한 하는 일이 표국
인지라 일을 처리하는 요령이 비상했다. 지금도 단 몇마디로서
모두 책임을 끼끗이 회피해 버렸다. 유대암이 무당의 친구이든
적이든 간에, 자기와 결부시키지 못하도록 미리 조치를 취해 놓
은 것이다.

사마귀가 붙어 있는 자가 곁에 있는 자와 눈짓을 한 번 교환하
더니 물었다.

"은씨 성을 가진 손님은 어떻게 생겼소?"

도대금은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고상하게 생긴 젊은이였소. 그리고 암기 수법이 매우 뛰어났
소."

사마귀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그와 직접 싸워 보았소?"

도대금은 얼른 고개를 내둘렀다.

"그게 아니라 그가 스스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사마귀 옆에 있는 대머리가
다그치듯이 물었다.

"그 도룡도는 누구 손에 있소?"

도대금은 멍해졌다.

"도룡도라니.....? 바로 그 소문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무리지
존 도룡보도를 말하는 겁니까?"

대머리는 성질이 매우 급한 듯,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안장위에
서 뛰어내려 마차 앞으로 달려와 다짜고짜 천막을 제치고 안을
살펴보았다.

도대금은 그가 안장에서 뛰어내리는 것부터 마차를 제쳐 살피기
까지 전개한 날렵한 신법이 눈에 익은 것 같아 내심 중얼거렸다.

'무당파의 조사인 장삼봉이 한때 우리 소림사에 머룰렀다는데,
과연 그들의 무공도 우리 소림 무공의 범주 안에서 크게 벗어나
지 못하는구나. 일부에선 장삼봉이 무공을 스스로 만들어 냈다고
하지만 그렇지가 못하군.'

그는 상대방이 무당 제자라고 더욱 믿게 되었다.

"여러분들이 바로 강호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무당칠협이오? 어
느 분이 송대협(宋大俠)이오? 소제는 오래 전부터 그의 영명을
듣고 흠모해 왔소."

얼굴에 사마귀가 있는 자가 그의 말을 받았다.

"그까짓 허명(虛明)을 입에 올릴 팰요가 있겠소? 도형은 너무
겸허한 것 같소."

대머리가 다시 돌아와 안장에 오르며 말했다.

"상처가 심해 시간을 지체할수록 위험하니 우리가 먼저 인계 받
읍시다."

사마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도대금에게 포권의 예를 취했
다.

"도형, 먼길을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소. 소제가 본파를 대신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겠소."

도대금도 공수로서 답례했다.

"원 별말씀을......"

"저 사람의 상처가 워낙 심해 우리가 인계해 빨리 손을 써야 할
것 같소."

도대금은 그렇지 않아도 일찌감치 중상자를 넘겨 주어 속 시원
히 책임을 벗을 생각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우린 이곳에서 이 사람을 무당파에게 넘겨 주
겠소."

"도형, 안심하시오. 모든 걸 내가 책임지겠소."

사마귀가 이렇게 말하고 나서 품 속에서 이십 냥 가량 되는 금
덩어리를 꺼내 도대금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이것은 작은 성의이니 받아 주시오."

도대금은 사양했다.

"우리 이미 황금 이천 냥을 표금으로 받았소. 어찌 더 이상 받
을 수 있겠소?"

"음.....! 왕금 이천 냥을!"

사마귀의 곁에 있던 두 사람이 곧 말을 몰고 와 마차를 인수해
갔다. 얼굴에 사마귀가 있는 자는 손에 쥐고 있는 금덩어리를 살
짝 도대금에게 던져 주었다.

"도형, 우리의 성의를 무시하지 마시오. 이젠 편히 임안으로 돌
아가돌고 하시오."

도대금은 날아오는 금덩어리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다시
들려주려고 했을 때, 상대방은 이미 말머리를 돌려 질풍처럼 마
차 뒤를 쫓아갔다. 이어 산모퉁이를 꺾어 돌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도대금은 씁쓸한 표정으로 금덩어리를 내려다 보았다. 순간, 그
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십 냥 가량 되는 금덩어리에 손자국이
깊이 패여 있는 게 아닌가! 물론 순금이 다른 금속에 비해 부드
럽기는 하지만 이렇나 지력(指力)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도대금은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
다.

'무당칠협의 명성은 과연 헛소문이 아니군. 우리 소림파에서도
이미 몇몇 금강지력(金剛指力)을 달통한 사백 사숙 외에는 이런
엄청난 지력을 지닌 자가 없을 거야.....'

축표두는 그가 금덩어리에 찍힌 손자국을 쳐다보며 넋을 잃고
있는 것을 보더니 몹시 못마땅한 투로 입을 열었다.

"총표두, 무당파의 제자들은 너무 예의가 없군요. 자기네 이름
을 밝히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불원천리 이곳까지 달려온 우리
에게 차 한 잔도 대접하지 않으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무림은
모두 일맥(一脈)이라는데 정말 너무 째째한 것 같습니다."

도대금은 벌써부터 불만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당당하게 웃
었다.

"공연한 걸음을 생략하게 됐으니 오히려 잘 된 일이 아니가? 소
림 제자가 무당 도관(道觀)에 들어가는 것도 사실은 어색한 일이
네. 자, 어서 돌아가도록 하세."

이번 행표는 비록 이렇다 할 말썽이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기
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특히 무당칠협에게 무시를 당한 듯한 느
낌을 좀처럼 떨쳐버릴 수 없었다. 도대금은 나중에 기회가 있으
면 앙갚음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되돌아가는 길에 도대금을 제외
하고 다른 표두와 표사들은 모두 기분이 좋았다. 열흘 밤낮을 고
생하여 이천 냥의 황금을 벌었으니 기분이 나쁠 리가 없었다.

이날 밤.

쌍정자를 떠난 지 십여 리에 이르렀을 때까지도 도대금이 계속
우울해 하는 것을 보고 축표두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총표두, 비록 오늘 우리가 다소의 무시는 당했지만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세월이 흐르다 보면 언젠가는 강호에서 그
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그 때 가서 무당칠협의 콧대를 납
작하게 만들면 되잖습니까?"

도대금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가지 심히 후회되는 일이 있네."

축표두가 물었다.

"그게 무슨 일입니까?"

이때, 뒤쪽에서 말굽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차츰 가까이 들
려오는 속도가 이상하리 만큼 빨랐다. 모두는 고개를 돌려 보고
나서 비로소 그 이유를 알았다. 그 말의 다리는 보통 말에 비해
한 자 가량이나 더 길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말보다 느릿하
게 걸어도 속도가 더 빠른 게 당연했다. 그 말은 잡털을 찾아볼
수 없는 청총이었다. 축표두는 절로 찬사를 보냈다.

"좋은 말이군!"

이어 도대금에게 물었다.

"축표두, 우리가 잘못한 건 없잖습니까?"

도대금은 울적하게 말했다.

"난 지금 이십 오 년 전의 일을 얘기하는 걸세. 당시 소림사에
서 무학을 터득해 하산하려는데, 스승님께서 나더러 오년을 더
머물면서 대위타장(大韋陀掌)을 완성하라고 권했다. 그런데, 난
젊은 혈기에 당시 배운 무학만으로도 능히 강호를 종횡할 수 있
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냥 하산해 버렸네. 그 때 오 년을 더 연마
했다면 무당칠협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을 텐데....."

그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그 청충마가 곁을 스쳐갔다. 말을 타
고 있는 자는 곁눈질로 도대금과 축표두를 힐끗 쳐다보며 좀 의
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금은 낮선 자가 지나가자 하던 말을 중
단했다.

청총마를 타고 있는 자는 스물 두 살 가량의 젊은이로서, 용모
가 준수하고 비록 체격은 마른 편이지만 인상이 강인해 보였다.
그 젊은이는 주춤거리다가 말머리를 돌려 포권의 예를 취했다.

"혹시 임안부의 용문표국이 아니십니까?"

축표두가 그의 말을 받았다.

"그렇소."

젊은이는 표기를 한 번 바라복 나서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다시
물었다.

"여러분들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십니까? 귀국 축표두께선 편
안하시죠?"

축표두는 그가 비록 예의바르게 나왔지만, 강호의 풍운은 예측
하기 어려운지라 선뜻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았다.

"나의 성은 축이라 하오. 친구의 성함은 무엇이오. 그리고 본국
의 총표두와는 잘 아는 사이요?"

젊은이는 안장에서 내려왔다.

"나의 성은 장(張)이라 하며 이름은 취산(翠山)이라 합니다. 귀
국 총표두의 대명은 들어서 익히 알고 있지만 아직 인연이 닿지
않아 뵙지는 못했습니다."

도대금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내가 바로 도대금이외다. 귀하가 바로 강호에서 은구철획(銀鉤
鐵劃)이라 불리는 장오협이란 말이오?"

젊은이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대답했다.

"협자는 과분한 칭호입니다. 여러분들께선 멀리 이곳 무당까지
오셨는데 어찌 본문에 들리시지도 않았습니까? 오늘이 바로 저의
스승님의 구십 회 생신이니 일에 지장이 없으시다면 술이라도 한
잔 드시고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도대금은 그의 성의있는 태도를 보고 내심 생각을 굴렸다.

'무당칠협 중에 여섯 명은 건방지기 이를데 없더니 어찌 이 장
오협은 그들과 판이하게 틀리지.....?'

그는 곧 말에서 내려 웃으며 말했다.

"만약 영사형과 영사제들도 장오협처럼 이렇게 친구를 좋아하는
활달한성품이었다면, 우린 아마 지금쯤 무당산에 올라가 있었을
것이오."

장취산은 멍해졌다.

"아니.....? 총표두께선 저의 사형을 만나보셨습니까? 어느 분
이죠?"

도대금은 내심 코웃음을 쳤다.

"흥! 이 장오협도 마찬가지로 엉큼하군. 분명히 알면서도 시치
미를 떼니......"

그는 비꼬듯이 대답했다.

"오늘은 운이 좋아 하룻 사이에 무당칠협을 전부 만났소이다."

"네?!"

장취산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매우 의아해 했다.

"저의 세째 형님도 보셨단 말입니까?"

도대금은 눈꼬리를 살짝 치켜올렸다.

"유대암 유삼협말이오? 난 어느 분이 유대협인지는 몰라도 아뭏
든 무당육협이 함께 있는 것을 보았으니 유삼협도 그 속에 끼어
있었겠죠!"

장취산은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여섯이라뇨? 그것 참 이상하군요. 어느 여섯 사람을 말하는 건
지......?"

도대금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들이 존성대명을 안 밝히니 누가 누군지 어떻게 알겠소? 귀
하가 정녕 장오협이라면 그들 여섯 분은 자연히 송대협에서 막
(莫)칠협까지 여섯 분이겠죠!"

그는 일부러 <협>자를 길게 끌어 비꼬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장취산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다시 물었
다.

"도총표두, 정말 저의 사형과 사제를 모두 보았단 말입니까?"

"비단 나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똑똑히 보
았소이다."

장취산은 고개를 세차게 내둘렀다.

"절데 그럴 리가 없습니다. 송대협등은 오늘 줄곧 자소궁(紫宵
宮)에서 스승님의 시중을 들며 한 발짝도 하산한 일이 없습니다.
단지 저만이 세째 사형이 돌아오지 않아 혹시 늦게라도 오시지
않을까 해서 이렇게 마중나온 겁니다."

도대금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얼굴에 큰 사마귀가 있는 분이 바로 송대협이 아니오?"

장취산은 다시 멍해졌다.

"우리 사형제 중에는 사마귀가 있는 자가 없습니다."

이 몇 마디에 도대금은 직감적으로 느끼는 게 있어 등골이 오싹
해졌다.

"그 여섯 사람은 자칭 무당육협이라 하며 무당산에서 내려 왔
소. 그 중 두 사람은 도관을 쓴 도인이며....."

장취산이 그의 말에 끼어들었다.

"저의 스승님은 비록 도인이지만 제자들은 모두 속가 제자입니
다. 그 여섯 사람이 자칭 무당육협이라 했단 말입니까?"

도대금은 얼마 전의 일을 되새기며 내심 아뿔싸를 토했다. 단지
자기가 스스로 그들을 무당육협으로 단정했을 뿐, 그들이 신분에
대해 언급한 바는 한 마디도 없었다. 도대금은 절로 두 표두와
경악의 표정을 교환하고 나서 침통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렇다면, 그 여섯 사람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어서 쫓아가
세!"

그는 즉시 안장에 뛰어올라 앞장서 달리기 시작했다. 장취산은
청총마에 올랐다. 그는 여유 있게 도대금의 말을 쫓아갔다. 그는
자세한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뒤쫓아가며 물었다.

"그 여섯 사람이 실없이 남의 이름을 도용한 모양인데, 피해가
없으면 내버려두시지요."

도대감은 숨을 할딱거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우린 부탁을 받고 한 사람을 무당산 장
진인께 인도하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오. 한데 그 여섯 명이
무당육협으로 가장해 중간에서 가로채 갔으니, 아마..... 일이
심상치 않은 것 같소."

장취산은 안색이 변하며 물었다.

"누구의 부탁을 받았습니까? 그리고 그 어섯 명이 가로채 간 사
람은 누구입니까?"

도대금은 계속 말을 재촉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을 대충 얘기
해 주었다.

장취산은 그의 설명을 듣고 나서 몹시 의아해 했다.

"그 부상당한 자의 이름이 뭐며, 어떻게 생겼습니까?"

"그의 이름은 알 수 없소. 부상이 심해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
였소. 나이는 서른 살 정도로......"

이어 유대암의 생김새를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장취산은 이내
낯빛이 크게 변했다.

"그..... 그렇다면 바로 저의 세째 사형입니다!"

그는 비록 당황하였으나 이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왼손
을 잽싸게 뻗어서 도대금의 말고삐를 잡았다. 전력을 다해 달리
던 말은 즉시 멎어서 앞으로 한 발짝도 더 내딛지 못했다. 장취
산이 갑자기 고삐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길게 울부짖으며 입가에
서는 선혈이 흘러내렸다. 도대금은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흠칫
하며 비스듬히 안장에서 뛰어내려 본능적으로 단도를 뽑아 쥐었
다.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문약해 보이는 장취산이 달리
던 말을 간단히 멈추게 한 완력(腕力)은실로 믿어지지 않을 정도
였다.

장취산은 얼른 정색을 하고 말했다.

"도총표두, 오해하지 마십시오. 불원천리 저의 삼사형을 이곳까
지 호송해 주신데 대하여 그저 고맙게 느낄 뿐입니다."

도대금은 단도를 칼집에 넣었지만 손에는 여전히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장취산은 다급하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저의 삼사형은 어떻게 해서 부상을 당했습니까? 그 상대는 누
구이며, 누가 그를 이곳으로 호송해 달라고 부탁했습니까?"

도대금은 그의 세 가지 질문을 단 한 가지도 대답할 수 없었다.

장취산은 눈쌀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저의 삼사형을 가로채 간 자들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이때 뒤쫓아온 사표두가 앞을 아투어 설명해 주었다. 장취산은
한 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소제가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도권의 예를 취하더니 이내 말을 몰고 앞으로 질주해 갔
다. 청총마는 실로 그 속도가 쏜살같이 빨랐다.

무당칠협은 형육 이상으로 정이 두터웠다. 장취산은 세째 사형
의 안위가 염려되어 청총마에 날개가 달리지 않은 게 한스러울
뿐이었다. 그는 단숨에 삼 리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곳은 삼거리
로서 한쪽 길은 무당으로 통하고, 한쪽 길은 동북 방향으로 뻗쳐
신양(新陽)까지 연결되었다.

장취산은 잽싸게 생각을 굴렸다.

'그 여섯 사람이 삼사형을 사문으로 호송해 줄 생각이었다면,
내가 하산하는 길에 마주쳤을 것이다.'

그는 곧장 동북쪽을 향해 말을 몰았다. 약 반 시진 가량 달렸을
까. 제아무리 청총마라해도 쉬지 않고 달려왔기 때문에 몹시 지
쳐 있었다.

어느덧 날이 차츰 어두어졌다. 이 일대에는 인적이 드물어 누구
에게 물어 볼 수도 없었다. 장취산은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
다.

'삼사형의 무공은 강호에서 적수를 찾아보기 어려울 텐데, 대관
절 누구에게 중상을 입은 걸까? 도대금 등의 표정을 보아 거짓도
아닌 것 같고....'

이제 곧 십안진(十雁鎭)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이때 장취산은
길 옆에 마차 한 대가 잡초더미 한가운데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
했다. 즉시 앞으로 달려가 보니 마차를 몰고 온 말은 두개골이
박살난 채 죽어 있었다.장취산은 황급히 안장에서 뛰어내려 마차
안을 살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얼른 주위를 둘러보니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잡초더미 속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이미 숨이 끊어졌는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장취산은 가슴이
철렁했다. 얼른 달려가 일으켜 보니 예측했던 대로 세째 사형이
었다. 유대암은 눈을 감은 채 안색이 파르스름하게 변해 있어 공
포스럽기까지 했다. 장취산은 울먹이며 자신의 얼굴을 그의 얼굴
에다 갖다 댔다. 뜻밖에도 약간의 온기가 전해져 왔다. 장취산은
기뻐하며 재빨리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아직도 천천
히 뛰고 있었다. 단지 뛰었다가 다시 멎으며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았다.

장취산은 울먹이며 소리쳤다.

"삼사형,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저는 오제(五第)예요. 오제란
말입니다."

그는 유대암을 안고 천천히 일어났다. 순가, 유대암의 팔다리가
모두 아래로 축 늘어졌다. 장취산이 깜짝 놀라 살펴보니 사지의
골절이 모두 절단된 상태였다. 지골(指骨), 완골(腕骨), 비골(碑
骨), 퇴골(腿骨), 골절마다 선혈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적이 독수를 전개한 지는 얼마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적은 한꺼번에 독수를 전개한 것이 아니라, 하나씩 골절을 부러
뜨린 게 분명했다. 그 악랄한 수법은 실로 목불인견이었을 것이
다. 장취산은 노화가 치밀어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적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청총마를
타고 뒤쫓아가면 능히 추격을 수도 있었지만 그럴 처지가 못 되
었따.

'사형의 생명이 위독하니 복수를 나중에 미루고, 우선 스승님께
달려가야겠다!'

그는 지체 않고 조심스럽게 유대암을 품안에 안은 채 질풍처럼
경공술을 전개했다.



이날, 무당파의 창파사조인 장삼봉의 구십 회 생신을 맞아, 자
소궁(紫宵宮)은 이른 아침부터 제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경축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송대교(宋大橋)를 위시해 여섯 제자들은
일일이 스승님께 배수(拜壽)를 했다. 일곱 제자 중에 단지 유대
암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 장삼봉과 제자들은 그가 아무리 늦
어도 오늘 이내로 당도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정오가 넘도록
그가 돌아오지 않자 모두는 은근히 짜증이 났고, 장취산은 기다
리다 못해 직접 하산하여 마중하겠다고 했다.

헌데, 그자머 쩌난 지 오래 됐는데 캄캄 무소식이었다. 그는 청
총마를 타고 갔기 때문에 설령 노하구(老河口)까지 마중 나갔다
해도 벌써 돌아와야 했다. 모두는 차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특
히 여섯째 은이정(殷利亭)과 일곱째 막성곡(莫聲谷)은 안절부절
못하여 자소궁 문 밖까지 몇 번씩이나 들락거렸다.

장삼봉은 제자들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유대암은
침착하고 대범해 큰일을 해낼 수 있고, 장취산은 총명하고 칸단
력이 빨라 매사에 정확했다. 그런데 두 사람 다 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장삼봉은 틀림없이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한 것이라 생각했
다. 그는 다른 제자를 다시 내보내 볼까 하고도 생각해 보았다.

이때, 송원교와 둘째 제자 유연주(兪蓮舟)가 일제히 대청밖으로
뛰쳐나가며 소리쳤다.

"삼제(三第)인가?"

그러자 장취산의 대답이 들려왔다.

"접니다!"

울먹이는 음성이었다.

곧이어 그는 피투성이가 된 한 사라 섯 " 안고 대청 안으로 뛰쳐
들어와 장삼봉 앞에 무릎을 꿇으며 통곡을 터뜨렸다.

"스승님!..... 삼...삼사형이 암습을 당했습니다.....!"

모두들 소스라치게 놀라는 순간, 장취산은 비틀거리더니 뒤로
벌렁 쓰러졌다. 그는 쉬지 않고 단숨에 이곳까지 달려온데다가
극도의 비통함이 복받쳐 끝내 정신을 잃고 만 것이다. 송원교와
유연주는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몸을 번뜩여 유대암을 안아 일
으켰다. 유대암은 곧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장삼봉은 사랑하는 제자가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중상
을 입은 걸 보자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세한 것을 물을 겨
를도 없이 내당으로 뛰어 들어가 백호탈명단(白虎奪命丹) 한 병
을 꺼내 왔다.

약병은 원래 납으로 봉해져 있었는데, 장삼봉은 납을 뜯을 겨를
도 없이 순가락으로 병을 깨 백호탈명단 세 알을 유대암의 입 안
에 넣어 주었다. 그러나 유대암은 이미 정신을 잃어 그 단약을
삼킬 리가 업었다. 장삼봉은 양손 식지와 엄지를 구부려 학구경
(鶴口經)의 자세를 취했다. 이어 식지로 유대암 귀 끝 부위 세
군데 용약규(龍躍窺)를 찍어 내력을 끌어올리며 천천히 움직였
다.

그의 이와 같은 공력으로서 이 학구경점용약규(鶴口經點龍躍窺)
를 전개하면, 설령 갓 숨이 넘어간 사람도 짧은 시간 안에 반혼
(返魂)시킬 수 있었다. 한데 그의 손가락이 이십여 차례나 움직
였으나 유대암은 여전히 나무토막처럼 윰직일 줄 몰랐다.

장삼봉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그는 쌍장으로 검결
(劍訣)을 꼽으며 장심(掌心)을 아래쪽으로 향하며 유대암의 협차
혈(頰車穴)을 취했다. 그 협차혈은 바로 턱 위 아관(牙關)이 결
합되는 부위에 있었다. 장삼봉은 장심을 아래로 하여 음수(陰手)
를 펼치다가 다시 장심을 위로 하여 양수(陽手)로 바꾸며 거듭
열 두 번째 음양을 교차시켰다. 그제서야 드디어 유대암은 입을
벌렸고 입 안에 있던 단약이 천천히 목구멍으로 흘러들어갔다.
은이정과 막성곡은 잔뜩 긴장된 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앗! 하고 소리를 내지렀다.

한편, 유대암은 후두의 근 빰이 뻣뻣하게 굳어 단약이 목구멍으
로 들어갔지만 좀처럼 뱃속까지 미치지 못했다. 장송계(張松溪)
가 얼른 나서서 그의 후두를 안마해 주었다. 장삼봉은 얼른 유대
암의 결분(訣盆), 유부(兪府), 양관(陽關), 명문(命門)등 혈도를
찍었다. 그가 깨어나는 즉시 사지에 전해오는 극심한 통증으로
인해 다시 기절할까 봐 미리 취한 조치였다.

송원교와 유연주는 스승님이 평소 어떤 어려운 일을 직면해도
시종 태연자약해 온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양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삼사제의 상태가 얼마나 절망
적인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장취산이 유유히 깨어나 대뜸 장삼봉에게 소리쳤다.

"스승님! 세째 사형을 살려낼 수 있으십니까?"

장삼봉은 직접적인 대답을 피했다.

"취산아, 세상에 죽지 않는 사람이 있더냐?"

이때, 어린 도동(道童)이 들어와 아뢰었다.

"관 밖에 한 무리의 표객들이 찾아와 조사님을 빕겠답니다. 그
중 한 분은 임안 용문표국의 도대금이라고 성함을 밝혔습니다."

장취산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눈에 살기를 띤 채 소리쳤다.

"바로 그놈이다!"

그는 다짜고짜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즉시 밖에서요란한 소리
가 들렸다. 십여 자루의 무기가 연거푸 땅에 떨어지는 소리 같았
다. 은이정과 막성곡이 막 뛰쳐나가사형을 도우려는데, 장취산이
이미 한 사나이의 뒷덜미를 번쩍 들어올린 채 들어와 한쪽에 팽
개치며 외쳤다.

"모두 이놈 때문에 생긴 불상사입니다!"

막성곡은 이 자가 바로 세째 사형에게 중상을 입힌 장본인인 줄
알고 대뜸 달려가 발로 걷어차려는 것을 송원교가 제지했다.

"잠깐!"

막성곡은 즉시 발을 거두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대청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위 명문이란 무당파가 이럴 수 있는 거요! 우린 일부러 뵙기
위해 찾아왔는데 이렇게 무례한 짓을 할수 있소!"

송원교는 눈쌀을 가볍게 찌 덩리며 도대금의 어깨와 등을 몇 번
두드려 장취산이 찍은 혈도를 풀어 주었다.

"밖에 있는 손님들은 조용히 하시오. 잠시만 기다려 주면 옳고
그른 것이 가려질 것이오!"

이 몇 마디는 내력이 충배하고 위엄이 있었다. 축표두와 사표두
는 이내 위압감을 느껴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장삼봉이 직접 외
친 걸로남 알았다.

송원교는 장취산에게 물었다.

"오제, 삼제가 어떻게 해서 부상을 입었는지 서둘지 말고 차근
차근 얘기해 보아라."

장취산은 도대금을 한 번 노려보고 나서, 용문표국이 유대암의
호송을 청탁받아 무당산까지 오게 된 것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여
섯 놈에게 당한 일을 간략하게 얘기해 주었다.

송원교는 도대금의 무공으로서는 도저히 유대암을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없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더우기 상대방은 스스
로 찾아오지 않았던가! 송원교는 곧 웃는 낯으로 도대금에게 상
세한 경위를 물었다. 도대금은 모든 것을 솔직이 털어놓고 나서
참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송대협, 나의 불찰로 인해 유삼협이 이 모양이 됐으니 죽어도
할 말이 없소. 단지 임안 표국에 남아 있는 가족이 지금쯤 제대
로 목숨이 붙어 있을지 모르겠군요."

장삼봉은 줄곧 쌍장을 유대암의 신장(神藏), 영대(靈臺) 두 혈
도에 붙인 채 내력을 체내에 주입시켜 주고 있었다.

그는 도대금의 말을 듣자 갑자기 입을 열었다.

"연주, 넌 성곡을 데리고 즉시 임안으로 달려가 용문표국의 가
족을 보호하도록 해라."

유연주는 얼른 대답을 했지만 내심 멍해졌다. 그는 스승님의 자
비로움과 협의지심을 잘 알고 있었다. 스승님은 도대금을 탓하거
나 원망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를 도우려고 했다.

장취산이 분연한 표정으로 나섰다.

"스승님, 이 도가의 잘못으로 인해 삼사형이 이 모양이 된건데,
어찌 책임을 추궁하시지 않고 오히려 도와주려고 하십니까?"

송원교가 대신 입을 열었다.

"오제, 자넨 어찌 그다지도 속이 좁은가? 도총표두가 불원천리
이곳까지 누굴 위해 왔겠는가?"

장취산은 냉소를 날렸다.

"그 이천 낭의 황금 때문이지 진심으로 삼사형을 위해 온 것은
아니잖습니까?"

도대금은 이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솔직히 말해서 그 황금 이
천 냥때문에 이번 일을 맡은 게 사실이었다.

송원교가 대뜸 호통을 쳤다.

"오제! 손님에게 무례를 범해선 아니 되네. 자넨 몹시 지쳤으니
일찍 들어가 쉬도록 하게."

무당 문중에서 송원교의 사람됨이 가장 단엄(端嚴)하여 모두를
그를 존경했다. 장취산은 그의 호통을 듣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유대암의 상태가 걱정되어 쉬러 가지는 않
았다.

송원교는 다시 유연주에게 말했다.

"이제, 스승님의 분부이시니 어서 칠사제와 함께 길을 떠나게.
화급을 다투는 일이니 절대 도중에서 지체해서는 안되네."

유연주와 막성곡은 대답을 하고 제각기 돌아가 옷가지와 무기를
챙겼다.

도대금은 유,막 두 사람이 자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임안으로
떠나려는 걸 보자, 아루 말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는
곧 장삼봉에게 포권의 예를 취했다.

"장진인, 후배의 일로 인해 유대협과 막소협에게까지 폐를 끼칠
수 없으니 이만 작별을 고할까 합니다."

송원교가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여러분들은 오늘 이곳애서 유숙하십시오. 몇 가지 기르침을 받
을 일이 있소."

그의 음성은 담담했지만 겨역할 수 업는 힘이 들어 있었다. 도
대금은 어쩔 수 없이 묵묵히 한쪽에 앉아 있었다.

유연주와 막성곡은 스승님께 큰절을 올리고 나서 못내 아쉬운
듯 유대암을 바라보더니 곧 하산하였다. 이번 헤어짐이 어쩌면
유대암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제 대청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단지 장삼봉의 진기를
들이키는 소리와 그 진기를 다시 토해내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들
릴 뿐이었다. 차츰 그의 머리 위에 백기(白氣)가 피오올라 운무
를 형성했다. 약 반 시간이 경과되었을까.

돌연, 유대암의 입에서 짤막한 비명이 터졌다.

"으앗!"

그 비명으로 인해 기왓장마저 들썩거리는 것 같았다. 도대금은
화들짝 놀라 조심스럽게 장삼봉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장삼봉
의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나타나 있지 않아 유대암의 갑작스런
비명이 길조인지 흉조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장삼봉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송계와 이정은 대암을 안으로 들고가 편히 쉬도록 해줘라."

장송계와 은이정은 유대암을 내당으로 들고 들어가 편히 누이고
는 다시 대청으로 나왔다. 은이정이 견딜 수 없어 물었다.

"스승님, 삼사형의 무공은 회복될 수 있겠습니까?"

장삼봉은 장탄식을 했다.

"그가 과연 목숨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한 달 후에나 확실한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끊어진 손발의 관절은 이을 수가 없구나. 그
는 평생 동안.....평생동안....."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장삼봉은 고개를 설래설래 내둘렀다.
은이정은 갑자기 통곡을 터뜨렸다. 장취산은 펄쩍 뛰어 다짜고짜
도대금의 뺨을 후려쳤다.

찰싹!

그의 출수는 전광석화 같아 도대금이 막으려 했을 때는 이미 늦
었다. 그의 뺨에 즉시 붉은 순자국이 찍혔다. 장취산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그의 허리를 향해 걷어차려 했다. 이 공격
도 지극히 빨랐다. 그러나 장송계가 적시에 손을 뻗어내 장취산
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그 바람에 장취산의 공격이 아슬아슬하
게 빗나갔고, 도대금은 질겁을 하며 뒤로 급히 피했다. 순간, 품
안에 있던 금덩어리가 떨어졌다. 장취산은 발끝을 살짝 치켜세워
금덩어리를 받았다.

"흥! 돈에 눈이 어두워 죄 없는 사람의 신세를 망쳐놓았으니,
이....."

마을 끝내기도 전에 갑자기 안색이 급변하더니, 금덩어리에 패
여 있는 손자국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대사형, 이.....이건 소림파의 금강대력지공(金剛大力之功)이
아닙니까?"

송원교는 얼른 금덩어리를 받아 살펴보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스승님께 건네 주었다. 장삼봉도 금덩어리를 이리저리 유심히 살
펴보더니, 송원교와 마주 보며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장취산이 큰소리로 말했다.

"스승님, 이것은 소림의 금강대력지공입니다. 소림을 제외하고
는 천하에 이러한 지공을 하는 문파가 없습니다. 제자의 말이 맞
죠?"

그 순간, 장삼봉은 어렸을 때 소림사에서 각원선사와 함께 지낸
일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금덩어리에 패인 손자
국으로 보아 틀림없는 소림의 금강지법이었다. 장취산의 말대로
당금 무림에서 소림을 제외하고 이렇나 지법을 터득한 문파는 절
대 있을 수 없었다. 무당파만 하더라도 심후한 내공을 바탕으로
한 무공으로서 장력, 권력, 벽력, 퇴력 등은 독특한 경지를 개척
했지만, 지력만큼은 이러한 조예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장취산은 스승님이 침묵을 지키자, 자신의 생각이 적중한 것을
알고 다시 물었다.

"스승님, 무림의 어떤 기인이사가 스스로 이런 금강지력을 연성
(鍊成)할 수 있습니까?"

장삼봉은 계속 대답을 회피할 수만은 없어 천천히 고개를 내두
르며 입을 열었다.

"소림은 천 년의 전통을 면면이 이어와 비로소 이러한 절예를
달성할 수 있 ㉦던 것이다. 절대 짧은 세월에 이룩할 수 없는 금
강지법이다. 그리고 제아무리 자질이 뛰어난 자라 할지라도 스스
로의 노력으론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말끝을 멈칫하더니 다시 이었다.

"왕년에 나는 소림사에 얼마 동안 기거한 적이 있었지만, 아직
도 사람의 손으로 어떻게 그런 지력을 터득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송원교의 눈에서 갑자기 이상한 광채가 번뜩였다.

"삼제의 관절과 심줄은 모두 이 금강지력에 의해 절단된 것입니
다!"

은이정은 앗! 하고 일성을 토하며 이내 눈물을 글썽거렸다. 도
대금은 유대암을 해친 자가 소림 제자라는 말을 듣자 더욱 놀라
고 당황해 했다. 그는 입이 딱 벌어진 채 한참 후에야 세차게 고
개를 저으며 말했다.

"절대.....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나도 소림사에서 십여년간
무예를 배웠지만, 그렇게 얼굴에 큰 사마귀가 있는 자는 보지 못
했습니다!"

송원교는 그의 두 눈을 응시하며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은이정
에게 분부했다.

"육제, 네가 도총표두 일행을 뒷뜰로 모셔 편히 쉬시도록 도와
줘라. 그리고 주방에 분부하여 술과 요리를 마련해 멀리서 오신
손님을 대접케 해라. 절대 소홀함이 있어선 아니 된다."

은이정은 대답하고 나서 도대금 일행을 뒷뜰로 안내했다. 도대
금은 몇 마디 더 변명을 늘어놓고 싶었지만, 이런 분위기에서는
한 마디도 더 나오지 않았다.

은이정은 표사들을 안내한후 다시 유대암의 방으로 갔다. 유대
암은 눈을 멀건히 뜬 채 백치처럼 누워 있었다. 은이정은 절로
콧등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얼굴을 가리며 뛰쳐
나와 곧장 대청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송원교등이 모두 스승님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도
순서대로 장취산 곁에 자리잡고 앉았다. 장삼봉은 한참동안 천장
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입을 열었
다.

"이번 일은 정말 어렵군. 송계, 너의 의견을 어떻느냐?"

무당 칠제자 중에 장송계의 지모가 가장 뛰어났다. 그는 평상시
엔 별로 말수가 없었다. 그러나 매사에 판단이 정확하고 생각이
깊었다. 이번에도 장취산이 유대암을 안고 돌아온 순간부터, 그
는 쓴록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졸곧 자초지종에 대해 속
으로 헤아려 보았었다. 그런 터라 스승님이 묻자 망설임없이 입
을 열었다.

"제자의 생각으로는, 원흉은 소림이 아니라 도룡도인 것 같습니
다."

장취산과 은이정은 동시에 놀란 외침을 토했다.

"앗!"

송원교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사제, 틀림없이 깊은 생각을 거쳐 그런 결론을 얻은 것 같은데
자세한 것을 스승님께 말씀드리게."

장송계는 또박또박 말했다.

"삼사형은 매사에 침착하고 대인 관계가 원만하여 절대 경솔하
게 누구와 원한을 맺지 않습니다. 그가 강남으로 가서 죽인 거도
는 형편없는 패류(敗流)이므로 무림인의 지탄을 받아왔기 때문
에, 소림이 그를 위해 삼사형에게 이런 악랄한 수단을 전개하진
않았을 겁니다."

장삼봉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송계는 말을 계속했다.

"삼사형의 관절이 절단된 것은 모두 외상(外傷)입니다. 그러나
절강 임안부에서 이미 독상을 입었습니다. 제자의 생각으로는 우
선 임안으로 가서 삼사형이 어떻게 중독됐으며, 누가 독수를 전
개했는지부터 알아보는 게 순서인 것 같습니다."

장삼봉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대암이 당한 독은 매우 괴이하여 난 아직까지도그게 무슨 독
이지 알아내지 못했다. 대암의 장심에 일곱 개의 작은 구멍이 뚫
려 있고, 허리와 허벅지에도 몇 군데 바늘 구멍이 있다. 강호에
서 어느 고수가 이런 악랄한 암기를 사용하는지 아직 들어본 적
이 없다."

송원교가 그의 말을 받았다.

"이 일은 정말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아마도 삼사제가 피하지
못할 정도라면 상대방의 암기 수법은 필시 일류 고수였을 겁니
다. 하지만 진짜 일류 고수라면 왜 구태여 암기에다 독을 묻혔는
지....."

그는 말끝을 흐렸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침묵을 지킨 체 생각
을 굴렸다. 대관절 어느 문파의 어느 인물이 이러한 암기를 사용
할까? 그들은 서로 얼굴만 마주 볼 뿐 어느 누구도 이렇다 할 단
서를 제시하지 못했다.

장송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얼굴에 사마귀가 있는 자가 왜 삼사형의 관절을 절단시켰겠
습니까? 만약 그 자가 삼사형과 원한이 있었다면, 충분히 살수를
전개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보다 많은 고통을 줄 생각이었
다면 척추, 혹은 갈비뼈를 손상시켰을 겁니다. 이 점으로 미루
어, 그는 삼사형에게서 무엇을 알아내려고 협바 고문을 한게 분
명합니다. 제자의 추측으로는, 그들이 알고자 하는 것이 바로 도
룡도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도대금의 말을 빌리면 그 여섯 사람
중에 하나가 대뜸 도룡도의 행방을 물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은이정이 눈쌀을 찌푸렸다.

"무림지존(武林之尊) 보도도룡(寶刀屠龍) 호령천하(號令天下),
막감불종(莫敢不從) 의천도룡(倚天屠龍) 수여쟁봉(誰與爭鋒)....
이 말은 기백 년 전부터 강호에 떠돈 것 같은데 정말 그 도룡도
가 세상에 나타났단 말입니까?

장삼봉이 입을 열었다.

"기백 년 전이 아니라 길어야 칠, 팔십 년부터 나돈 소문일 거
다.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그런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장취산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사사형의 말이 맞습니다. 삼사형을 해친 원흉이 틀림없이 강남
일대에 있을 테니 즉시 가서 찾도록 합시다. 그리고 그 소림파의
악적이 이렇게 악랄한 수단을 전개했으니, 그도 절대 살려둘 수
가 없습니다."

장삼봉은 송원교의 의견을 물었다.

"원교, 지금으로선 어떻게 하는 것이 좋느지 너의 의견을 발해
보아라."

근래에 와서 장삼봉은 무당의 제반 일들을 모두 송원교에게 맡
겼다. 송원교는 그 동안 일을 깔끔하게 처리해 장삼봉은 별로 신
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송원교는 몸을 일으켜 공송하게 말했
다.

"스승님, 이번 일은 삼사제의 복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본파
의 명예에도 관계되므로, 만약 조금이라도 대책 방법이 빗나가면
무림에 일대 풍파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없지 않으니 스승님의 분
부를 기다릴 뿐입니다."

장삼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너와 송계, 이정은 내 서찰을 가족 숭산 소림사로 가서,
장문인 공문선사(空聞禪師)를 뵙고 이번 일을 소상히 알린 다음
지시를 청해라. 이번 일에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소림은 문규가
엄하고 또한 공문선사의 덕망이 높아 필시 적당한 선처가 있을
것이다."

장송계는 내심 생각했다.

'만약 단순히 서찰을 보내는 일이라면 육제 혼자서도 충분히 해
낼 수 있을 텐데, 스승님께서 나와 대사형까지 함께 보내는 것은
필시 깊은 뜻이 있다. 아마 소림이 일방적으로 제자들을 감싸며
부인할 시엔 우리더러 상황에 따라 행동을 취하라는 뜻일 게다.'

과연 장삼봉은 그의 생각대로 다음 말을 이었다.

"본파와 소림의 사이는 매우 특수하다. 나는 한때 소림에 몸을
기탁하고 있었으며, 그들로부터 반도(返徒)로 낙인 찍히기도 했
다. 이젠 많은 세월이 흘러 그들은 더 이상 무당산으로 날 잡으
러 오진 않겠지만, 아뭏든 불편한 사이임엔 분명하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너희들은 소림으로 가서 공문박장에게 공손해야 함은 물론이
고, 본문의 명성을 추락시켜서도 안 된다."

세 명의 제자는 일제히 대답을 했다. 장삼봉은 다시 장취산에게
말했다.

"위산, 넌 내일 강남으로 떠나도록 해라. 자세한 내막을 알아내
야 하며 이사형과 회합하여 그의 분부에 따르도록 해라."

장취산은 숙연히 대답했다.

장삼봉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밤 수주(壽酒)는 더 이상 마시지 않겠다. 한 달 후에 모
두 이것에 모여야 한다. 대암이 만약 불행을 당하게 되면 너희들
과 마지막 대면을 해야 하니까....."

그는 말끝을 흐리며 태연함을 금치 못했다. 무림에서 수 십 년
간 위명을 떨쳐온 그가, 구십 회 생일을 맞아 뜻밖에도 사랑하는
제자의 불행을 보게 될 줄이야.....

은이정은 원래 마음이 약해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흐느꼈다. 장
삼봉은 소매를 펼치며 말했다.

"모두들 가서 잠을 청하도록 해라."

송원교는 안타깝게 입을 열었다.

"스승님, 삼사제는일생 동안 협의를 바탕삼아 후한 공덕을 쌓아
왔습니다. 하늘은 길인(吉人)을 돕는다는데 설마 삼사제를......
삼사제를......"

그도 눈물을 흘리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스승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려다 오히려 슬픔을 가중시킨 것 같
은 죄스러움에, 얼른 사제들을 이끌고 대청을 빠져 나갔다.


** 註 : 고서(古書)에 장삼봉에게 일곱 제자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들의 이름은 순서대로 송원교, 유연주, 유대암, 장송계,
장취산, 은이형(殷利亨), 막성곡이다. 본책에서는 단지 은이형을
은이정(殷利亭)으로 고쳤다.


----- 제 1 권 3 장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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