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04

3학년2반 | 2022.03.01 07:49:38 댓글: 0 조회: 389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2054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1 권


제 4 장 장취산(張翠山)의 억울한 누명(陋名)


장취산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슬픔을 억제할 수 없었다. 침상에
누워 아무리 몸을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도대금을 찾아가 분풀이라도 할 양으로 슬그머니 일어났
다. 행여나 대사형, 사사형에게 들켜 제지당할까 봐 조심스럽게
대청 쪽으로 옮겨갔다. 대청을 지나 곧장 뒷뜰로 달려갈 생각이
었다. 그런데 그가 대청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 뒷짐을 진 채 배
회하는 모습이 보였다. 주위는 어슴프레했지만 중압감을 주는 뒷
모습에 묵직한 걸음만 보아도 스승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취산은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당장
방으로 되돌아간다 해도 스승님께 발각될 우려가 있었다. 일단
스승님께서 문책하면 솔직히 대답드려야 하며 호된 훈계를 들어
야 할 게 뻔했다.

장취산은 그의 손놀림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장삼봉이 쓴 것은
상란(喪亂) 이란 두 글자였다. 장취산의 호가 은구철획(銀鉤鐵
劃)이듯, 왼손으로는 난은호두구(爛銀虎頭鉤)를 사용하고 오른손
으로는 빈철판관필(濱鐵判官筆)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호에 어울
리게 서예에도 깊은 조예를 갖고 있었다 하여, 기금 스승님의 필
차가 바로 왕희지(王羲之)의 상란체(喪亂體)라는 것을 금방 알수
있었다.

장취산도 이 년 전에 이 상란체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비록 필
체가 청강준발(淸剛峻拔)하지만 난정시서체(蘭亭時序體)만큼 장
엄숙목(莊嚴肅穆), 기상만천(氣象萬千)하지 못하다고 느꼈다. 지
금 허공에다 상란체를 써내려 가고 있는 스승님의 일필 잎획은
비분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취산은 비로소
왕희지가 왕년에 어떠한 심정으로 이 상란체를 썼는지 납득이 갔
다.

왕희지는 동진(東晋) 때 사람으로서 당시 중원은 극도로 혼란해
있었다. 호족(豪族)들이 서로 판도 다툼을 하고 오랑케들의 침략
이 그칠 날이 없었다. 왕희지는 오랑케들이 선인(先人)의 묘까지
파헤치는 만행을 보고 비통한 심정에서 이 상란체를 쓴 것이다.

장취산은 아직 나이가 젊고 패기 발랄하여, 예전에는 이 상란체
에 담긴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사형이 뜻하지
않은 큰 변을 당한 상태에서, 스승님이 상란체를 써내려 가는 필
치를 보고 비로소 뼈저리게 가슴에 와닿는 바가 있었다.

장삼봉은 한참 써내려 가다가 장탄식을 했다. 그는 다시 대청
안을 서성거리며 무엇인가 깊은 상념에 잠기는 듯하더니 다시 허
공에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번의 필체는 좀전과 달랐다. 장취
산이 그의 손놀림을 주의깊게 바라보니, 첫자는 무(武), 두 번째
자는 림(林)이었다.

장삼봉은 계속 써내려 가 삽시간에 스물 네 글자를 완성했으
니..... 바로 다음과 같았다.

------武林之尊, 寶刀屠龍, 號令天下, 莫敢不從, 倚天屠龍, 誰
與爭鋒------

장삼봉은 이 스물 네 글자가 유대암의 부상과 어떤 관계가 있는
지 깊이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의천검과 도룡도!

그 두 가지 전설의 신병이기(神兵利器)는 대관절 이번 일과 무
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장삼봉은 한 번 또 한 번 되풀이 하여
스물 네 글자를 허공에다 휘갈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거듭될
수록 필획이 길어지며 손놀림도 느려졌다. 나중에 이르러서는 마
치 장법을 전개하는 자세를 연상케 했다.

장취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일필 일획에 심취되었다. 얼
마 동안 시간이 흐르자, 장취산은 뇌리가 확연해지며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아 놀라움과 기쁨에 사로잡혔다. 스승님이 쓰고
있는 스물 네 글자를 연결해 보니, 분명 하나의 고명한 무공 초
식이었다. 한 굴자에 여러 가지 초식이 담겨 있으며 변화 또한
많았다. 용(龍)자와 봉(鋒)자의 획이 많고 도(刀)자와 하(下)자
의 획이 적지만, 많은 획수는 번거롭게 느껴지지 않고 적은 획수
는 전혀 단조로운 느낌을 주지 않았다. 그 획의 뻗고 거둠은 태
산처럼 무거운가 하면, 또한 낙엽처럼 가벼워 보이기도 했다. 아
울러 그 손놀림의 민첩함은 바람에 흩날리는 눈송이를 연상케 했
고, 때로는 웅후한 힘이 곁들여 코끼리 걸음을 방불케 했다.

장취산의 눈에서는 신광이 발해지며, 그 일필 일획은 가슴 깊이
새겼다. 이 스물 네 글자 중에 불(不)과 천(天)자가 모두 두 개
씩 있지만 제각기 형상만 같을 뿐 그 뜻은 달랐고, 그 기(氣)가
비슷하지만 그 속에 담긴 혼(魂)은 같지 않았다. 더우기 변화의
묘미는 제각기 독특했다.

근래에 와서 장삼봉은 좀처럼 무공을 직접 시범해 보이는 예가
드물었다. 은이정과 막성곡의 무공은 대부분 송원교와 유연주가
대신 전수해 준 것이다. 그래서 장취산은 비록 다섯 번째 제자지
만 사실은 장삼봉의 직접 가르침을 받은 마지막 제자, 즉 관문제
자(關門弟子)라 할 수 있었다. 예전에 장취산은 조예가 부족해
비록 스승님이 권검(拳劍)을 시전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그 속
에 담긴 박대 심오한 뜻을 깊이 헤아리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제
장취산의 무학은 큰 진전을 보았으므로, 이날 밤 비로소 스승님
과 의기상통, 청치합일(淸致合一)을 이룰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상란체의 비분을 공감했고, 스물 네 글자에서 새로운
무공의 경지를 간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장삼봉도 처음에는 스물 네 글자로 무공을 창출할 뜻이 없었고,
장취산이 가둥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게 된 것도 우연한 일에
불과했다. 사도 두 사람으 심신이 도취되어 무학과 서예의 새로
운 경지로 빠져들어 차음 망아지경(忘我之境)으로 돌입했다. 장
삼봉은 이 이십사자권볍(二十四字拳法)을 거듭하여 펼쳐나가니,
어느덧 달이 중천으로 떠올랐다.

돌연, 장삼봉의 입에서 맑은 기합이 토해지며 오른손을 위에서
부터 아래로 곧장 힘있게 그어내렸다. 그 기세는 실로 검광만발
(劍光萬發) 뇌전추월(雷電追月)에 비견되니, 바로 봉(峰)자의 마
지막 한 획이었다.

장삼봉은 하늘을 우러러 보더니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취산아, 이 서예를 어찌 생각하느냐?"

장취산은 흠칫 놀랐다. 스승님은 한 번도 고개를 돌린 적이 없
는데, 자기가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사실을 벌써 알고 있
었던 것이다.

그는 얼른 앞으로 걸어나갔다.

"제자는 우연히 스승님의 절예를 엇보게 되었습니다. 지금이라
도 가서 대사형 등을 볼러 와 함께 가르침을 받아도 되겠습니
까?"

장삼봉은 고개를 내둘렀다.

"난 이미 흥취가 사라졌으니 더이상 그런 좋은 글을 써내지 못
할 것 같다. 그리고 원교와 송계는 서예에 조예가 깊지 않기 때
문에, 설령 옆에서 지켜보아도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
이다."

말을 끝낸 스승은 승포 자락을 표연히 펼치며 내당으로 들어갔
다.

장취산은 행여나 조금 전에 보았던 절묘한 초식을 잊어먹을까
봐, 감히 취침을 못하고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한 획 한
획을 새롭게 뇌리에 심어두었다. 아울러 이따금씩 몸을 일으켜
직접 시전을 해보기도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장취산은 스물 네 자, 이백 십 오획의
변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뇌리에 새길 수가 있었다. 그는 벌떡 일
어나 처음부터 차근차근 시전해 나갔다. 순간, 낭파(浪波)헤치는
바다 제비인 양, 구름을 꿰 선는 독수리처럼 온 몸이 표연하니 흡
사 하늘을 날으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마지막으로 일획을
내리긋자 바람을 가르는 예리한 소리와 함께 자신의 옷자락을 손
바닥만큼이나 베어버렸다.

장취산은 뛸 듯이 기뻐했다.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덧 해
가 중천에 걸려 있었다. 장취산은 혹시 자기가 잘못 본 것이 아
닌가 해서 손등으로 눈을 비벼 보았으나, 이미 다음날 정오가 된
것이 분명했다. 그는 연공에 심취되어 이미 반나절이상이 경과
된 사실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장취산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곧장 유대암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장삼봉이 유대암의 가슴에 쌍장을 붙인 채 운공요상(運
功燎傷)을 해주고 있었다.

장취산은 송원교, 장송계, 은이정은 벌써 이른 새벽에 출발했다
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자기가 정좌묵상(正坐默想)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방해가 될까 봐 그냥 떠났다고 했다. 용문표국의 사람
들은 이미 하산을 한 뒤였다. 장취산은 온몸이 땀으로 축축히 젖
어 있었지만, 사형의 원한을 갚겠다는 마음이 앞서 미처 옷도 갈
아입지 않고 대충 옷가지와 무기를 챙겨 다시 유대암의 방으로
달려갔다.

"스승님, 제자는 분부대로 이만 떠날까 합니다."

장삼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이 웃었다.

유대암의 침상 가가이 다가가 장취산은 그의 아색이 잿빛으로
변해 송장처럼 누워 있는 것을 보자 다시 슬픔이 복받쳐 울먹겨
렸다.

"삼사형, 소제가 분신쇄골되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이 원한을
갚아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며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 큰절을 올리더니 이내 밖으
로 뛰쳐나갔다. 그는 총총마를 타고 곧장 하산하여 오십리 밖에
달리지 못했는데 이미 날이 어두워졌다. 그가 막 객점에 몸을 풀
자마자 짙은 먹장구름이 몰려오더니 곧이어 억수 같은 비기 쏟아
졌다. 빗줄기는 갈수록 굵어져 한밤중까지 그칠 줄을 몰랐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주위가 어스름하니 귓전에 비가 쏟아
지는 소리가 삭삭 들려왔다. 장취산은 도롱이와 삿갓을 구입해
배속을 뚫고 길을 재촉했다. 그가 노하구에 당도해 한수(漢水)를
건널 무렵, 강줄기가 불어나 수세(水勢)가 심히 흉험했다. 양번
(襄樊)을 지나자 하류의 둑이 뚫려 무수한 사람이 재해를 당했다
는 소문이 퍼졌다.

이날 그는 의성(宜城)으로 들어섰다. 도처에 수재를 당한 난민
들이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비에 흠뻑 젖은 그들의 모습은 실로 측은해 보였다.

장취산이 계속 길을 재촉하고 있는데, 앞쪽에 일행의 인마가 보
였다. 장취산은 즉시 눈에서 이상한 광채가 번뜩였다. 바로 용문
표국의 깃발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즉시 말을 재촉해 달려가 그
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도대금은 장취산이 나타난 것을 보자 내
심 크게 당황했다.

"장... 장오협이 웬일로.....!"

장취산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

"도총표두는 수재를 당한 난민들을 보았소?"

도대금은 그의 엉뚱한 물음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게 어쨌다는 거요?"

장취산은 냉소를 날렸다.

"덕을 베풀어 재민들을 도와줘야 되잖겠소?"

도대금은 안색이 변했다.

"우리 같이 행표를 하는 사람들은 칼날 위에서 목숨을 걸고 겨
우 끼니를 채우는데, 무슨 힘이 있어 재민들을 돕는단 말이오?"

장취산은 뚜렷하게 말했다.

"주머니 속에 있는 황금 이천 냥을 전부 내놓으시오!"

도대금은 본능적으로 손이 칼자루로 갔다.

"장오협, 끝까지 이렇게 나오기오?"

장취산은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렇소. 오늘 당신을 찍기로 작심했소!"

축표두와 사표두는 얼른 무기를 뽑아쥐고 도대금과 어깨를 나란
히 했다. 장취산은 여전히 빈 손인 채 입가에 냉소를 흘렸다.

"도총표두, 댓가를 받았으면 그 댓가에 상당하는일을 하는 게
당연하거늘, 그렇지 못하면서도 황금 이천 냥을 차지할 염치가
있소이까?"

도대금의 안색은 썩은 돼지 간처럼 변했다.

"유삼협은 이미 무당산에 당도해 있잖소!? 우리가 그를 인도받
기 전에 이미 중상을 입었으며, 지금도 죽은 건 아니잖소!"

장취산은 그의 변명에 노화가 치밀었다.

"쥐도 찍소리를 낼 줄 안다더니 이제 와서 억지를 부리는군! 그
럼 나의 삼사형이 임안을 떠날 때, 손발의 관절이 절단돼 있었단
말이오?"

도대금은 할 말을 잃었다.

사표두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장오협, 그래서 대관절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오!"

장취산은 감정이 복받쳐 살기 띤 음성으로 외쳤다.

"너희들의 손발 관절도 모두 부러뜨리고 말겠다!"

이 말을 내뱉자마자 잽싸게 앞으로 몸을 날렸다. 사표두는 즉시
곤봉을 번쩍 들어올려 공격 자세를 취했다. 순간, 장취산은 왼손
을 살짝 떨치며 새로 터득한 이십사자신공(二十四字神功)의 천
(天)자 초식을 펼쳤다.

팍!

사표두가 들어올린 곤봉은 멀리 날아가고, 그는 안장 위에서 떨
어졌다. 축표두는 질겁을 하며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때가 늦었
다. 장취산이 전개한 천(天)자의 마지막 획이 그의 옆구리에 적
중되었다.

펑!

축표두는 안장과 함께 일 장 밖으로 날아갔다. 축표두는 두 발
을 등자(燈子)에 단단히 끼고 있었는데, 장취산이 전개한 마지막
일획의 힘이 워낙 강맹하여 안장을 묶은 가죽끈이 함께 끊어진
것이다. 안장을 사타구니에 끼고 쓰러진 축표두는 좀처럼 일어나
지 못했다. 도대금은 그의 섬광처럼 민첩한 출수에 깜짝 놀라 곧
장 말을 몰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장취산은 대뜸 진기를 끌어올
려 좌권(左拳)을 뻗어냈으나, 바로 하(下)자의 첫 번째 획이었
다.

팍!

둔탁한 소리와 함께 권풍이 그의 등을 강타했다. 도대금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의 무공은 역시 두 표두보다 뛰어나 말에서 떨어
지지는 않았다. 그는 분노가 끓어올라 안장위에서 뛰어내려 한판
승부를 걸어 보려는데, 돌연 목구멍에서 단물이 넘어오며 울컥
한 모금의 신혈을 뿜어냈다. 그는 비칠거리며 한 모금의 진기를
들이켰으나 뜨거운 피가 다시 가슴으로 치밀어올랐다. 안간힘을
써서 버티려 했으나, 끝내 두 다리가 솜처럼 풀려 그 자리에 푹
석 주저앉았다. 나머지 열댓 명의 표사들은 놀라 눈이 휘둥그래
져 감히 앞으로 달려와 부축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장취산은 본디 노화가 충천하여 도대금 등의 손발 관절을 모조
리 절단시켜 버리려 했었다. 그래야지만 분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런데, 자기가 아무렇게나 전개한 일장 일권이 세 명의 표두를
이렇게 비참한 꼴로 만들자 스스로 놀랐다. 새로 배운 이십사자
신공이 이렇게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내심 기쁨이 샘솟아 더이상 신랄한 방법을 전개하고 싶지
않았다.

"도가야! 오늘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 이 정도로서 그치겠다. 그
대신 이천 냥의 황금을 모두 재민을 돕는데 쓰도록 해라. 너의
행동을 암중에서 지켜볼 테니, 만약 한 푼이라도 네가 착복하면
용문표국을 박살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멸문지화를 면치 못할
줄 알아라!"

도대금은 천천히 일어났다. 등골이 으스러지는 듯한 아픔을 느
끼며 다시 울컥 한 모금의 신혈을 토했다. 사표두는 가벼운 상처
를 입었을 뿐이다. 하지만 입심좋은 그도 장취산의 적수가 못 된
다는 것을 알고는 전처럼 감히 입을 함부로 놀리지 못했다.

"장오협, 우린 비록 표금을 받았지만, 이번 일에 차질이 생겨
다시 돌려줘야 할 판이오. 더우기 그 황금은 임안 표국에 있어
지금으로선 재민을 구제해 주고 싶어도 형편이 닿지 않소이다."

장취산은 냉소를 날렸다.

"내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애인 줄 아느냐? 이번 일로 너희 용문
표국은 모조리 출동했는데, 노약자들만 덩그러니 남은 집에다 황
금 이천 냥을 놔둘 리 있겠느냐?"

그는 표사 일행을 매섭게 뎔어보며 한 대의 마차 가까이 다가가
살짝 손을 떨쳤다.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한쪽 귀퉁이가 박
살나면서 십여 개의 금덩어리가 쏟아져 나왔다. 표사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마차 한귀퉁이에
금덩어리를 숨겨 은밀하게 판자로 가려놓았는데 장취산이 그것을
어떻게 알아냈을까?

장취산은 비록 나이가 젊지만 사형들과 자주 행협 강호하며 경
험을 많이 쌓았는데 그러하기에 이 마차의 바퀴 자국이 진흙땅에
유난히 깊이 패인 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느낀 바가 있었다. 게다
가 금덩어리 얘기가 나오자 몇몇 표사들이 본능적으로 이 마차를
호위하는 것을 보고 더욱 확신을 갖게 된것이다. 그는 진흙땅에
떨어져 있는 금덩어리를 쳐다보며 냉소를 몇 번 날리더니, 곧 말
에 올라 유유히 떠나갔다.

그는 다소나마 마음이 후련했다. 도대금은 가족들의 안위가 걱
정되어서라도 감히 이천 냥의 황금을 재민 돕는데 인색하지 못할
것이다.

장취산은 길을 재촉하면서 이십사자신공의 초식을 다시 한 획
한 획 되새겨 보았다. 그러자 더 깊은 변화를 깨우칠 수 있어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유대암의 위중함이 떠오르자 이내 울적해지
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비기 계속 내렸다. 청총마는 비록 다른 말에 비해 건
장했지만 연일 빗속을 달려오는 바람에 몹시 지쳐 있었다. 강서
성(江西城)으로 접어들 즈음 갑자기 흰 거품을 토하며 열병을 앓
기 시작했다. 장취산은 어쩔 수 없이 천천히 걷기로 했다. 이렇
게 되자 그가 임안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시월 말이 되어 있었
다. 장취산은 객점을 찾아 들어가 내심 생각을 굴렸다.

'도대금 등은 이미 표국으로 돌아왔을까? 이사형과 칠사제는 지
금쯤 어디에 있을까? 난 표국의 사람들과 이미 등을 졌으니 정식
으로 찾아가 물을 수도 없고....... 오늘 밤 암탐을 하는 도리밖
에.......'

그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난 후 용문표국이 서호(西湖)변에 있
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우선 새 옷과 접선(摺扇:부채)을 구입한 후 몸단장을 깨
끗이 했다. 졸지에 그는 영준한 귀공자로 둔갑했다. 그는 붓을
빌어 부채에다 시를 한 수 써내려 갔다. 바로 의천도룡(倚天屠
龍)에 관한 스물 네 글자였다. 일필 일획을 정성들여 쓰고 나서
넌지시 바라보고는스스로 만족해 했다.

'스승님의 그 새로운 권법을 배우고 나니 서예마저도 한 경지
높아진 것 같군.....'

그는 부채를 흔들며 느긋한 걸음으로 서호로 향했다.

송조(宋朝)가 몰락한 후로부터 임안부도 자연히 원(元)의 손아
귀에 들어갔다. 원을 세운 몽고인은 임안이 남송(南宋)의 도성
(都城)의 추종자들이 모반을 꾀할까 봐 유난히 많은 명사를 주둔
시켰다. 게다가 몽고 병사들은 기강을 바로 잡겠다는 명목하에
도처에서 잔학한 행위를 저질렀다. 그로 인해 성안의 무고한 백
성들은 학정에 견디다 못해 뿔뿔이 다른 고장으로 옮겨가, 예전
에 그 번영을 누렸던 임안부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장취
산은 길을 걸으며 도처에 폐옥이 방치 돼 있는 것을 보고 씁쓸한
감회에 젖었다.

날이 어두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집집마다 문을 굳게 닫
이 걸어 행인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간혹 몽고 병사들이
순라를 도는 모습이 눈에 띄일 따름이었다. 장취산은 공연한 소
란을 피하기 위해 될 수 있는 한 몽고 병사와 맞부딪치지 않았
다. 예전 같으면 서호에 등불이 휘황찬란하게 밝혀져 있을 텐데,
지금은 칠흑처럼 어두울 뿐 유람객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장취산은 객점에서 가르쳐 준 대로 용문표국을 찾아갔다. 용문
표국은 앞뒤가 모두 다섯 칸으로 연결돼 있었으며, 서호를 마주
보고 우뚝 숫은 문루(門樓)앞에 한 쌍의 돌사자가 웅크리고 있어
제법 기상이 웅위(雄威)하였다.

장취산은 용문표국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았다. 표국 앞
쪽 호변에는 뜻밖에도 유람선 한 척이 정박 돼 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뱃머리에는 벽사등롱(碧紗燈籠)을 밝혀놓고 한 사람이
유유자작하는 모습도 어렴풋이 보였다.

장취산 "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제법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군.....'

한편, 표국 앞에 걸려 있는 두 개의 커다란 등롱에는 불이 밝혀
져 있지 않고, 붉게 칠한 대문도 굳게 닫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모두들 이미 잠자리에 들어간 것 같았다. 장취산은 문 앞에 이르
러 내심 생각을 굴렸다.

'한 달 전에 삼사형을 이곳으로 보내 호송을 청탁한 자가 대관
절 누구일까?'

생각이 여기에 미쳤을 때 돌연 등 뒤에서 울적한 한숨소리가 들
려왔다. 어두운 한밤중에 들려온 한숨소리는 귀기마저 느끼게 하
였다. 장취산은 잽싸게 몸을 돌렸으나 등 뒤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살펴보니 호변 유람에 앉아있는 유객 외에는 사
람의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장취산은 다소 의아해 했다. 그는 뱃머리에 앉아 있는 유객을
새삼 유심히 살폈다. 그는 청색 장삼에 자기와 같은 문사(文士)
차림이었다. 주위가 어슴프레하여 얼굴을 똑똑히 볼 수는 없지
만, 안색이 매우 창백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조용히 뱃
머리에 앉아 한참 동안 소매자락만 바람에 날릴 뿐 움직일 줄 몰
랐다.

장취산은 원래 어둠을 틈타 담장을 뛰어넘을 생각이었다. 그러
나 유람선에 앉아 있는 사람을 의식해 차마 그런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마음을 굳게 먹고 직접 문을 두드
렀다.

쿵! 쿵! 쿵!

조용한 야밤인지라 문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잠시 기다렸으나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장취산은 다
시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좀전보다 소리가 더 켰다. 그러나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장취산은 이상하다고 느껴져 문을 살짝 밀
자 소리없이 열렸다. 안에서 빗장을 걸지 않았던 것이다. 장취산
은 성큼 안으로 들어서 낭랑한 음성으로 위쳤다.

"도총표두, 집에 있소이까?"

이어 대청을 향해 걸음을 떼어 놓았다.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져
주위는 어둡기만 했다.

이때였다.

꽝!

요란한 소리가 들리며 뜻밖에도 대문이 닫혀졌다. 장취산은 직
감적으로 느끼는 바가 있어 대문 쪽을 향해 날렵하게 몸을 날렸
다. 예측한 대로 대문에 빗장이 채워져 있었다. 장취산은 냉소를
날렸다.

'놈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두고 봐야겠군!'

그는 두려움도 없이 다시 성큼성큼 대청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대청 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전후좌우에서 예리한 바람이 일
며 네 사람이 동시에 그에게 덮쳐갔다. 장취산은 비스듬히 미끄
러지면서 피했다. 어둠 속에서 흰 광채가 번뜩였다. 네 사람은
모두 손에 무기를 쥐고 있었다. 장취산은 재빨리 걸음을 떼며 우
장(右掌)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수평이 되게 긋자 팍! 하는 소
리와 함께 한 사람의 태양혈을 격중시켰다. 그 자는 즉시 그 그
자리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이어 장취산은 왼손을 우상각(右上角)에서 비스듬히 아래로 굴
려내려 다른 한 사람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이 두 번의 공격은
바로 불(不)자의 두 획이었다. 이것이 성공을 거두자 좌우쌍권
을 동시에 떨쳐내 불(不)자를 완성시켰다. 거기에 따라 상대방
네 사람은 모두 쓰러졌다. 실로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
다. 장취산은 상대방의 정확한 정체를 몰랐기 때문에 출수를 엄
하게 하지는 않았다. 네 번째로 쓰러진 자는 대뜸 악을 쓰듯 소
리쳤다.

"이렇게 악랄한 수단을 전개하다니! 사내 대장부라면 정체를 밝
혀라!"

장취산은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내가 만약 정말로 악락한 수단을 전개했다면, 너희들은 벌써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 난 무당파의 장취산이다!"

"아니.....!"

상대방은 몹시 경악하는 것 같았다.

"네가 정말 무당파의 장오... 은구철획 장취산이란 말이냐? 혹
시 그의 이름을 도용하는 게 아니냐?"

장취산은 빙긋이 웃으며 허리에서 무기를 뽑았다. 왼손에는 난
은호투구, 오른손에는 빈철판관필! 이 두 가지 무기가 서로 맞부
딪치자 맑은 금속성과 함께 불꽃이 튕겼다. 그 순간, 장취산은
쓰러져 있는 네 사람이 모두 황색 승포를 입고 있는 것을 확인했
다. 그들은 모두 화상이었다. 네 명의 승인중에 둘은 그와 마주
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장취산은 두 승인의
얼굴이 피로 얼룩진 채 눈에서 원독(怨毒)의 불길이 뿜어지는 것
을 보고 의아해 하며 물었다.

"네 분 대사는 누구요?"

그러자 한 승인이 싸늘하게 소리쳤다.

"이 피맺힌 원한을 오늘 갚기는 들렸으니 일단 이곳을 떠나자!"

그의 외침에 따라 네 명의 승려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
다. 그 중 하나는 무척이나 심한 부상을 입은 듯 비틀거리며 몇
걸을 앞으로 달려나가다가 다시 쓰려졌다. 그러자 두 승인이 얼
른 되돌아와 그를 부축해 대청 밖으로 뛰쳐나갔다.

장취산은 얼른 소리쳤다.

"잠깐만! 피맺힌 원한이라니......?"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네 명의 승려는 담을 넘어 사라졌다.

장취산은 오늘 일이 심상치 않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아무리 생
각해도 뚜렷이 집히는 게 없었다. 어째서 네 명의 화상이 용문국
에 매복해 있다가 느닷없이 자기에게 기습을 전개한 것일까? 그
들은 피맺힌 원한 운운했는데, 그게 무슨 뜻일까?

'표국의 사람을 찾아내 물으면 모든 게 확연히 밝혀지겠지.'

장취산은 다시 소리높여 외쳤다.

"도총표두, 안에 있으면 대답하시오!"

그의 외침소리는 대청 안에 찌렁찌렁 울려퍼졌으나 아무도 대답
하는 자가 없었다.

'내가 두려워 모두 숨어버린 걸까? 아니면 화를 당할까봐 미리
달아난 걸까.....?'

장취산은 화석을 꺼내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촛대에 불을 달겼
다. 그촛불을 들고 조심스레 대청 뒤쪽으로 항하던 장취산은 갑
자기 멈칫했다. 대청 뒤쪽에 한 여인이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몸이 빳빳하게 굳은 것으로 봐서 이미 숨이 끊어진 게 분명했다.
그는 여인의 시체를 바로 뉘이고 촛불로 얼굴을 살피는 순간 하
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 여인의 얼굴은 웃음을 활짝 띄고
있었다. 그러나 근육은 굳어져 있어 죽은 지는 오래 된 것 같았
다. 어둠 속에서 웃는 얼굴의 여자 시체를 보았으니 그가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가 몸을 일으켜 보니 얼마 떨어지지 않
은 곳에 또 한 구의 시체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하
인 차림의 노인으로서 역시 헤벌쪽 웃는 낯으로 죽어 있었다.

장취산은 매우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그는 왼손으로 호두구를
뽑아 쥐고 오른손으로는 촛불을 높이 받쳐든 채, 주위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 결과, 주위 곳곳에 수십 명의 시체가 널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넓은 용문표국 안에 살아 있는 사람이라곤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뜻밖에도 용문표국은 멸문지화를
당한 것이다.

장취산은 선뜻 뇌링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도대금의 말에 의
하면, 그 유사형의 호송을 의뢰한 자가 만약 차질이 생길 시에는
멸문지화를 각오하라고 공언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실로 악랄하군. 선뜻 이천 냥의 황금을 내놓아 삼사형의 호송
을 부탁한 것으로 미루어 상당한 친분이 있는 사이인 것 같은데,
삼사형이 어째서 그런 수단이 악랄한 자와 친분을 맺게 되었을
까?'

장취산으로선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그는서쪽 대청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순가, 불빛 아래 두 황
의 승려가 담벽에 기대어 이빨을 드러낸 채 자기를 노려보며 징
그럽게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장취산은 절로 모골이 송연해
지며 급히 뒤로 두 걸음 물러나 일갈을 토했다.

"누구냐?!"

그러나 두 승인은 말뚝처럼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장취산은
리로소 긴장이 풀리며 두 승려 역시 죽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
다. 그런데, 그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전에 문득 뇌리에 떠오르
는 생각이 있어 가슴이 철렁했다.

'아뿔싸! 피맺힌 원한이라며.....'

달아난 네 명의 승인이 남긴 말을 되새겨보니, 자기를 흉수로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순간은 상대방의 내력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는데, 도대금이 소림의 속가제자인 것으로 미
루어 필시 용문표국이 도움을 청해 달려온 소림 제자들임에 들림
없었다.

그렇다면 유사형과 막사제는 어디로 간 것일까? 스승님은 그들
에게 용문표국의 가족을 지켜주라고 분부했는데, 어째서 이런 참
변을 당하게끔 방치했을까? 장취산은 곰곰 생각해 보았으나 뚜렷
한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소림 제자들이 필시 나를 찾아올 것이다. 하지
만 사필귀정이니 모든 게 명확히밝혀질 날이 있겠지. 소림과 무
당이 손을 잡으면 원흉을 찾아 내는 건 시간 문제다.'

장취산은 무엇보다도 이사형과 칠사제를 찾는 게 시급하다고 판
단하고는 곧 춧불을 끄고 담장 앞에 이르러 살짝 몸을 솟구쳤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난데없이 회오리 바람이 일며 어둠 속에서
기습을 가해 오는 자가 있었다.

"장취산, 목숨을 내놔라!"

장취산은 몸이 허공에 떠 있는 상태에서 피할 도리가 없었다.
적의 이 기습은 실로 맹렬하고도신속했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었
다. 장취산은 왼손으로 적의 무기를 살짝 누르며 그 힘을 빌어
물찬 제비처럼 사뿐히 담장 위로 뛰어올랐다. 이 일초는 무(武)
자의 과결(戈訣)이었다. 만약 장취산이 새로이 이십사자신공을
배우지 않았다면, 상대방의 이 무서운 기습에서 요행을 바라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답장 위에 내려서는 순간 오른손에 이미 판
관필을 꺼내 쥐었다. 상대방은 그가 여유있게 기습을 피한것을
보자 의외인 듯 놀란 외침을 발했다.

"아니.....제법이군!"

장취산은 좌구우필(左鉤右筆)로 가슴을 호위한 채 아래를 내려
다보았다. 담장 아래 두 명의 승인은 제각기 굵은 선장(禪杖)을
들고 좌우로 갈라져 서 있었다. 좌측의 승인이 선장으로 땅을 내
리찍으며 소리쳤다.

"장취산, 무당칠협이라면 강호에서 이름이 알려진 인물인데, 어
째서 사파의 무리들보다 더 수단이 악랄하느냐?"

장취산은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대사는 불문곡직하고 담 구석에 숨어 기습을 가했으니, 그 행
위야말로 소인배의 짓거리가 아니겠소? 소림의 무학이 대단하다
는 소문은 들었는데, 이제보니 암수를 전개하는 데도 일가견이
있구료!"

그 승인은 노한 일성 "르 토하며 다짜고짜 담장 위로 뛰어오르
며 선장을 내둘렀다.

장취산은 상대방이 가까이 덮쳐오기도 전에 벌써 선장의 끝이
가슴을 향해 З쳐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곧 호두구를
펼쳐 선장의 예봉을 봉쇄하며 판관필을 질풍처럼 찍어냈다.

창!

봇끝이 선장을 찍는 순간, 승인은 손목에 진통을 느끼며 담장
위에 제대로 몸을 고정시키지도 못하고 다시 땅으로 떨어졌다.
장취산도 팔뚝이 얼얼해 오는 것을 느꼈다.

"두 분은 누군지, 법호라도 밝혀야 하지 않소!"

오른쪽에 있는 승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빈승은 원음(圓音)이며, 이쪽은 나의 사제 원업(圓業)이외다."

장취산은 호두구와 판관필의 예봉을 내려놓고 공수의 예를 취했
다.

"소림 원(圓)자 항렬의 두 대사시군요. 만나뵙게 되어 반갑소이
다. 한데 무슨 가르침이 있으신지....."

원음은 숨을 몰아쉬며 심각하게 말했다.

"이번 일은 소림과 무당 문파간에 얽힌 일이니 항렬 낮은 빈승
으로선 뭐라고 확언할 수 없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묻고 싶소.
용문표국의 남녀 수십 명과 나의 두 사질이 모두 장오혀에 의해
목숨을잃었으니, 거기에 대해 책임을 어떻게 질건지 말해 보시
오!"

장취산은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쳤다.

"용문표국이 불행을 당한 것에 대하여 나 역시 의아함을 금치
못하는 바이오. 대사는 어디에 근거를 두고 나더러 독수를 전개
했다고 단언을 하시는지요. 직접 목격이라도 했다는 겁니까?"

원음은 대답하기에 앞서 뒤쪽을 향해 소리쳤다.

"혜풍(蕙風), 네가 직접 장오협과 대질을 해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뒤쪽 으슥한 곳에서 네 명의 황의 승인
이 걸어나왔다. 바로 조금 전의 그 승려들이었다. 법명이 혜풍이
라는 승인은 몸을 숙이며 대답했다.

"사벡께 아뢰옵니다. 용문 뇬의 그 많은 무고한 목숨과 혜통(蕙
通), 혜광(蕙光) 두 사제는 모두 이..... 장가에게 독수를 당했
습니다!"

원음은 신중하게 물었다.

"너희들이 직접 보았느냐?"

역시 혜풍이 대답했다.

"우리들이 직접 이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적시에 도망치
지 않았다면 우리 역시 변을 당했을 겁니다."

원음은 다시 한 번 확인을 하듯 정색을 하고 말했다.

"불문의 제자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더우기 이 일을 소림과
무당 문파간에 얽힌 일이니 절대 망언을 해서는 아니된다."

혜풍은 무릎을 꿇고 합장을 했다.

"부처님께 맹세를 합니다. 제자 혜풍의 말은 조금도 거짓이 없
는 사실입니다."

원음은 장취산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 길게 숨을 들이켰다.

"네가 목격한 것을 자세히 예기해 보아라."

여기까지 들은 장취산은 담장 위에서 사뿐히 뛰어내렸다.

원업은 장취산이 혜풍을 해치려는 줄 알고 대뜸 선장을 펼쳐 왔
다. 장취산은 살짝 고개를 숙여 앞으로 미끄러지면서 이미 혜풍
의 등 뒤로 바싹 달라붙었다. 원업은 더 이상 공격을 취할 수 없
었다.

"어쩔 작정이오?"

장취산은 힘주어 말했다.

"내가 어떻게 표국의 사람들을 죽였다고 꾸며 대는지 자세히 들
어볼 생각이외다."

혜풍은 장취산이 충분히 살수를 전개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
는 것을 알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원심(圓心)사숙께선 강북(江北)에서 도대금 사형의 구원을 청
하는 서찰을 받자, 곧 혜통과 혜광 두 사제를 시켜 밤세워 이곳
으로 달려오라고 했습니다. 그후 제자도 전갈을 받고 사제 셋과
함께 뒤따라 용문표국으로 달려왔습니다.혜광은 오늘 밤에 적이
습격을 해올지도 모르니 우리더러 동쪽 담벽아래 매복해 있으라
하고, 자기와 혜통은 후청(後廳)을 지키겠다고 했습니다....."

원음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혜풍은 눈에서 분노의 불길을 뿜으며 말을 게속했다.

"그런데, 날이 어두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청 쪽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혜통의 처절한 비명이......
제자가 급히 달려가 보니 혜통은 이미 숨이 끊어진 채였고 이 장
가는....."

여기까지 말한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켜 장취산에게 삿대질을 했
다.

"제자는 이 악적이 혜광사제를 벽으로 밀어붙여 죽이는 것을 똑
똑히 보았습니다. 제자는 이 악적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창 밖에 몸을 숨겼습니다. 이 악적은 곧장 뒷뜰로 달려나가
닥치는 대로 살인을 했고, 여덟 명의 표사가 달아나자 뒤쫓아가
일일이 지풍을 날려 죽였습니다. 그는 표국 안에 있는 모든 남녀
노소를 죽이고 나서 비로소 담장을 뛰어넘어 사라졌습니다."

이번에는 장취산이 직접 냉랭하게 물었다.

"그래서 나중에 어떻게 됐다는 거냐?"

혜풍은 분연하게 말했다.

"어떻게 돼는지 몰라서 묻느냐! 너는 곧바로 되돌아와 우리에게
출수했고, 스스로 장취산이라 이름을 밝히지 않았느냐?"

장취산은 기가 막혔다.

"내가 너희들에게 출수하고 이름을 밝힌 것은 사실이다. 하지
만, 그 이전에 일어난 살인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자,
똑똑히 보아라.....!"

이렇게 말하며 장취산은 화석을 밝혀 자신의 얼굴을 비쳤다.

"네가 본 것이 정말 이 얼굴이며 이러한 차림새였느냐?"

혜풍은 무섭게 그를 노려보며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래, 바로 장포에 방건이 차림새였다. 맞아! 그 당시 왼손에
쥐고 있던 부채는 지금 등 뒤에 꽂고 있겠지?!"

장취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상대방이 대관절 무슨 억
하 심정으로 자기를 모함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화석을 높이
쳐들고 앞으로 바싹 다가가 소리쳤다.

"다시 한 번 말해 보아라! 정말 이 장취산이가 살인자란 말이
냐?"

순간, 혜풍의 눈에서 기이한 광채가 번뜩였다.

"아니... 네가... 네가..."

그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갑작스레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원음과 원업은 동시에 놀란 외침을 토하며 달려와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러나 혜풍은 만면에 공포의 기색이 굳어진 채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원음은 싸늘하게 외쳤다.

"네가... 또 살수를...!"

이 순식간의 변화로 인해 원음과 원업은 놀라움과 분노가 엇갈
렸다. 더욱 놀란 것은 장취산이었다. 그로선 천만 뜻밖이었다.
그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보니 뒤쪽 수목이 우거진 곳에 뭔가 어
른거리는 게 보였다. 장취산은 대뜸 소리쳤다.

"누구냐?!"

그는 지체없이 몸을 솟구쳤다. 수목이 우거진 곳에 매복이 있다
는 것은 알면서도 장취산은 모험을 하지 않을 수 없어싸. 암기를
발출한 흉수를 잡지 못하면 영락없이 누명을 뒤집어쓰게 될 판이
었다.

그런데, 그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순간, 두 자루의 선장이
좌우 양쪽에서 번개처럼 기습해 왔다. 동시에 원업의 싸늘한 일
갈이 터졌다.

"달아날 생각 말아라!"

장취산은 필과 구를 아래로 긁어내 도(刀)자결을 펼치며 사뿐히
담장 위에 오를 수 있었다. 수목이 우거진 곳을 다시 바라보았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원업은 괴성을 연발하며 선장을
펼쳐 담장 위로 오르려고 안간힘을 썼다. 장취산은 마음이 조급
했다.

"원흉을 쫓는 일이 시급하니 제발 방해하지 마시오!"

원음은 씩씩 숨을 뿜어내며 악을 썼다.

"감히... 내가 보는 앞에서 살인을 하고도 부인할 작정이냐?"

장취산은 계속 호두구를 펼쳐 원업이 담장 위로 올라오려는 것
을 제지했다.

원음이 다시 소리쳤다.

"장취산, 아무리 부인해도 소용없으니 어서 무기를 버리고 우리
와 함께 소림으로 가자!"

장취산은 짜증스럽고 화가 치밀었다.

"당신네들 때문에 흉수를 놓쳤소! 대관절 내가 왜 당신네들을
따라 소림으로 가야 한단 말이오!"

원음은 자못 위엄있게 말했다.

"본파 장문인께서 직접 결정을 내릴 것이다. 너는 본파 제자를
셋이나 죽였으니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장취산은 코웃음을 쳤다.

"소림 원자 항렬의 고소가 이렇게도 형펴없을 줄이야, 정말 실
망했소! 흉수가 달아난 것도 느끼지 못했소?"

원음은 막무가내였다.

"발뺌하려고 하지만 어림없다!"

장취산은 아무리 변명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좋소이다! 실력이 있으면 날 잡아가 보시오!"

이때 원업은 선장으로 땅을 찍으며 그 힘을 빌어 허공으로 치솟
아올랐다. 장취산도 덩달아 담장 위에서 몸을 솟구쳐 흡사 독수
리가 먹이를 나꿔채듯 덮쳐내렸다. 그의 경공술은 워음보다 한
수 위였다. 두 줄기의 그림자는 즉시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팍!

원업의 선장이 허공을 가르며 장취산의 하반신을 노렸고, 장취
산은 호두구로 원을 그리며 그의 선장 사이로 빗겨가 어깨를 적
중시켰다.

"윽!"

원업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뱉어지며 그대로 땅에 떨어져내렸
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선혈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도 장취산이 사정을 봐줬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고
호두구를 약간만 위로 찍었더라면 원업은 목줄기에 구멍이 뚫려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원음이 황급히 외쳤다.

"원업사제, 괜찮겠나?"

원업은 성난 음성으로 그의 출수를 재촉했다.

"난 괜찮으니, 어서 출수하지 않고 뭘 꾸물댑니까?"

원음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선장을 휘둘러 공격을 전개했다.
원업은 성난 들소처럼 거칠었다. 그는 어깨의 상처를 동여맬 생
각도 않고 선장을 풍차처럼 휘둘러 원음과 더불어 협공을 펼쳤
다.

장취산은 이 두 승려의 힘이 대담하다는 것을 아록 있었다. 게
다가 그들이 무기로 사용하는 선장은 육중하여 정면대결을 벌이
면 불리했다. 하여, 그들이 담장 위로 뛰어오르지 못하도록 공격
보다 수비에 치중했다. 두 승려는 쉴새없이 맹공을 퍼 부었으나
좀처럼 기선을 잡지 못했다. 한편, 혜자 항렬의 승려 셋은 사숙
들이 사움의 실마리를 풀지 못하는 것을 보고 거들어 주고 싶었
으나, 어디서부터 끼어들어야 좋을지 몰랐다.

장취산은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다.

'오늘은 원흉을 찾아 내는 게 중요하니 여기서 계속 이들과 시
간을 낭비할 수 없다.....'

그는 일단 이곳을 벗어날 결심을 하고 맑은 기합을 토하며 막
몸을 솟구치려는데, 난데없이 청천벼락 같은 기합이 들리며 등
뒤에서 한 갈래의 노도와 같은 힘줄기가 뻗쳐왔다. 그 바람에 장
취산은 황급히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켜 담장 안쪽으로 떨어져내
렸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몸집이 우람한 승려가 담장을 뛰어넘어 다
짜고짜 쌍장을 뻗어내 그의 호두구와 판관필을 나꿔채려 했다.

어둠 속이라 상대방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없었지만, 열 손가
락을 갚퀴처럼 구부려 맨손으로 무기를 나꿔채 오는 수법으로 보
아 소림파의 독특한 호조공(虎爪功)임에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
까, 적시에 원업의 외침이 들려왔다.

"원심(圓心)사형, 절대 놈을 놓치면 안 됩니다!"

장취산은 강호 출도 이래 적수다운 적수를 만난 적이 없었다.
게다가 한 달 전에 이십사자신공을 새로 터득해 무공이 더욱 높
은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그는 소림 승려들의 공세가 대담히 위
맹스러운 것을 보자 은근히 호승심이 생겼다. 그는 즉시 호두구
와 판관필을 옆구리에 꽂고 소리쳤다.

"소림 고수 셋이 한꺼번에 덤벼도 이 장취산을 어떻게 하진 못
할 것이다!"

이 순간, 원심의 왼손이 ㉫쳐오는 것을 보고 질풍처럼 우장을
뻗어내 도중에서 손가락을 구부려 금나 수법으로 변화 시켰다.
그가 노린 것은 상대방의 손목이었다.

찍!

승포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원심의 소매가 그의 금나수법에
의해 한 귀퉁이가 찢겨나갔다. 원심은 그것을 개의치 않고 곧장
그의 어깨쭉지를 나꿔채려 했다. 바로 그 순간 장취산이 왼발을
날려 그의 무릎을 정확하게 걷어찼다. 상대방이 틀림없이 그 자
리에 무릎을 꿇리라 생각했는데, 그 생각은 빗나갔다.

원심의 하체는 뜻밖에도 무쇠처럼 단단했다. 무릎에 심한 일격
을 당했으면서도 단지 몸이 한 차례 비틀거렸을 뿐 쓰러지지 않
았다. 오히려 포효하며 잇따라 오른손을 뻗어냈다. 그와 동시에
원음과 원업의 선장이 옆구리와 무릎을 노리며 날아왔다. 원음은
심병을 앓고 있는지 숨소리가 거칠고 이따금 기침을 토했다. 그
러나 세 사람 중에 그의 무공이 가장 정확하게 전게하며 찍고 후
리고 베고 쓸어올리며 공수(攻守)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장취산은 이제야 비로소 호적수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우리 무당과 소림은 근래에 무림에서 똑같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번이야말로 서로의 무학을 비교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
이다!'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적수 공권으로 세 고승을 상대하며 좌
충우돌, 오히려 갈수록 우위를 차지했다. 소림과 무당의 무공은
제각기 장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무당파에는 불가일세한 기재(奇
才) 장삼봉이 버티고 있는 반면, 소림은 천 여년의 전통을 바탕
으로 하고 있어 결코 무학의 차원을 무시할수는 없었다. 하지만
장취산의 현 무학으로 보아 무당의 일류고수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반면, 원심 등 삼승(三僧)은 비록 그런 대로 상승 무학을
지니긴 했지만 역시 소림의 이류(二流) 고수임에 불과했다.

장취산은 시간이 흐를수록 생룡활호(生龍活虎)로 변해 갔다. 불
현듯 오른손을 펼쳐내 용(龍)자결의 절초(絶招)로 원업의 선장을
나꿔채 살짝 끌어당기며 원음의 선장을 향해 맞부딪쳐 갔다.

차력타력(借力打力)!

평!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이 들리는 가운데, 원업과 원음은 모두
극심한 진통에 의해 엄지와 식지의 중간 부위가 찢어져 피가 흘
러내렸다. 원음과 원업의 엄청난 완력에다 장취산의 경력(經力)
까지 합쳤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원심은 소스라치게 놀라 장취산
이 그들에게 더 이상 공격을 전개하지 못하게끔 양팔을 넓게 펼
치며 덮쳐왔다.

장취산은 승부가 뚜렷하게 가려졌다고 생각되어 더 이상 이곳에
남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날렵하게 뒤로 몸을 솟구치
며 냉소를 날렸다.

"나를 소림사로 잡아가려면 무공을 몇 년 더 연마해야 가능할
것다!"

그는 즉시 신법을 전개했다.

원심은 대뜸 뒤를 쫓아가며 소리쳤다.

"게 서지 못하겠느냐!"

이미 원음과 원업도 추격해 왔다. 장취산은 심사가 뒤틀렸으나
더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계속 붙잡고 늘어진다 해
서 살수(殺手)를 전개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장취산은 단전의 진기를 끌어올려 질풍처럼 달려나갔다. 원심
등은 고래고래 소리치며 뒤쫓아왔으나, 장취산의 경공술을 도저
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장취산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날쫓아오기엔 어림도 없다!'

이때, 갑자기 등 뒤에서 원심과 원업의 짤막한 비명이 동시에
들려왔다.

"앗!"

그와 거의 동시에,

"윽!"

하는 원음의 나직한 신음도 터졌다.

모두들 갑자기 독사에게라도 물린 것만 같았다. 장취산은 흠칫
놀라며 얼른 고개를 돌려 보니 삼승은 제각기 손으로 눈을 가리
고 있었다. 눈에 암기를 맞은 듯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원
업의 거칠은 외침이 들려왔다.

"장가야, 이 독종아! 차라리 나의 왼쪽 눈마저 멀게 해봐라!"

장취산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누가 그들의 오른쪽 눈을 멀게 만든 모양인데 누구일까? 혹
시.....'

그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소리쳤다.

"칠제! 칠제!....."

무당칠협 중의 막내인 막성곡의 암기 수법이 가장 뛰어났다. 그
래서 장취산은 자기가 쫓기는 것을 보고 칠제가 숨어서 암기를
날린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장취산은 주위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역시 아무도 발견
하지 못했다.

땋업은 한쪽 눈이 실명되자 더욱 성난 야수처럼 광포해져 목숨
을 도외시한 채 장취산과 생사 결단을 내려 했다. 그러나 원음이
얼른 그를 만류했다. 눈이 멀쩡한 상태에서도 셋이 장취산을 당
해내지 못했는데, 무슨 수로 그를 소림사로 데려갈 수 있단 말인
가? 오히려 더 큰 희생을 당하게 될 게 뻔했다.

"원업사제, 복수는 나중에 해도 늦진 않을 걸세. 설령 우리가
이대로 포기한다 해도 장문인과 두 분 사숙께서 가만히 있겠는
가?"


장취산은 삼승이 뒤쫓아오지 않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다시 의혹에 잠겼다. 암암리에 암기를 발출한 자는 대관절 누구
일까? 그는 더 이상 호변에서 서성거릴 수가 없어 객점으로 돌아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약 십여 장 가량 달려나갔을 때, 호
변 한쪽에 갈대가 흔들리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바람 한 점 없
는 상태에서 갈대가 움직인다는 것은 사람이 숨어 있다는 증거였
다. 장취산이 가까이 다가가 누구냐고 물으려는데, 난데없이 갈
대숲에서 한 사람이 숫구쳐 오르며 다짜고짜 그의 머리를 향해
칼을 휘두르는 게 아닌가!

"이놈아, 너 죽고 나 죽자!"

장취산은 잽싸게 옆으로 미끄러지며 상대방의 손목을 걷어찼다.
기습자의 강도(鋼刀)가 손에서 벗어나 포물선을 그리며 호변으로
날아갔다. 장취산은 비로소 상대방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
다. 승포에 대머리, 역시 소림승이었다.

장취산은 대뜸 호통을 쳤다.

"이게 대관절 무슨 짓이냐?"

순간, 그는 갈대밭에 세 사람이 누워 있는 거을 발견했다. 그들
은 꼼짝 않고 누워 있어 죽었는지 아니면 중상을 입었는지 알 수
없었다. 장취산은 방금 자기에게 기습을 전개한 소림승이 무공이
극히 평범하다는 것을 알고 거리낌없이 앞으로 몇 걸음 더 내디
뎌 자세히 살펴보았다. 뜻밖에도 갈대밭에 누워 있는 자들은 용
문표국의 도총표두와 축,사 두 표두였다. 장취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총표두, 이게... 어떻게 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대금의 몸이 용수철에 튕겨지 듯 뛰
어올라 장취산의 멱살을 잡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 악랄한 놈! 난 겨우 삼백냥의 황금을 남겼을 뿐인데, 이...
이... 복수를 전개하디니.....!"

"그게 무슨 소리요!?"

장취산은 놀라움보다 당황암이 앞섰다. 그가 상대방의 손을 뿌
리치려 했다. 순간, 그는 도대금의 눈가와 입가에서 선혈이 흘러
내리는 것을 발견했다. 주위가 비록 어두웠으나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니... 내상을 입었소?"

도대금은 그가 묻는 말에 대꾸하지 않고 왼쪽에 서 있는 소림승
에게 소리쳤다.

"사제, 똑똑히 보았나? 이놈이 바로 은구철필이라는 장취산이
다! 잔인무도한 살인마!..... 어서 달아나라! 어서.....!"

도대금은 갑작스레 장취산의 멱살을 힘껏 잡고는 얼굴을 향해
박치기를 해왔다. 같이 죽자는 심산이었다. 장취산은 황급히 쌍
장을 젖혀 그의 팔을 밀어냈다.

찍!

도대금은 그에게 밀려 뒤로 벌렁 나자빠졌고 장취산의 옷깃도
찢겨져 나갔다. 장취산은 비록 간담이 크지만 오늘 밤 거듭하여
해괴한일을 당하자 절로 가슴이 뛰었다. 가가 다시 도대금을 살
펴보았을 때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장취산은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도대금은 이미 심한 내상을
입고 있었는데 자기가 밀어뜨린 것으로 인해 숨이 끊어진 것이었
다. 한쪽에 서 있던 소림승이 기절초풍하며 소리쳤다.

"네가... 네가... 표사형까지 죽이다니.....!"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려 달아났다. 장취산은 귀신에게 홀린 기분
이었다. 그는 고개를 몇 차례 세차게 흔들더니 사표두와 축표두
를 살펴보았다. 그들은 호수에 팔을 담근체 벌써 숨이 끊어져있
었다. 세 구의 시체를 쳐다보며 장취산은 무상함을 느꼈다. 그의
귓전에 도대금의 마지막 울부짖음이 다시들려오는 것 같았다.

----- 난 단지 삼백 냥의 황금을 남겼을 뿐인데.....-----

자기가 도대금에게 황금 이천 냥을 전부 재민들을 구제하는데
쓰리고 했지만 도대금은 삼배 냥을 남긴 모양이다. 장취산은 그
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설령 알았다 해도 일소에 부칠
뿐 절대 그 꼬투리를 잡아 도대금에게 살수를 전개하진 않았을
것이다. 장취산은 절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 호수 한가
운데로부터 거문고를 뜯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을 뚫고 갑자기
들려온 금성은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느낌을 주었다. 장취산이
얼른 고개를 돌려 보니, 얼마전에 표국 앞에서 보았던 그 젊은
문사가 뱃머리에 앉아 거문고를 뜯고 있었다. 장취산은 이것에서
더 이상 지체하고 싶지 않아 막 떠나려는데, 홀연 금성이 끊이며
젊은 문사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노형께서 한밤중에 서호(西湖)의 야경을 감상할 고상한 취미를
갖고 있다면, 이 배에 잠깐 머물다 가지 않겠소.....?"

그가 손을 살짝 휘두르자 배 후미에 엎드려 있던 사공이 벌떡
일어나 힘차게 노를 저었다. 작은 배는 순식간에 갈대밭 쪽으로
미끄러져 왔다. 장취산은 엉거주춤하며 내심생각을 굴렸다.

'저 자가 줄곧 호수에 있었다면 무엇을 보았을지도 모르니, 한
번 물어봐야겠다.'

생각을 굳힌 그는 배가 가까이 오자 서슴없이 뱃 "리로 사뿐히
몸을 날렸다. 서생은 몸을 일으켜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띄운 채
공수의 예를 취했다. 그리고는 정중히 자리를 권했다.

백사등롱의 불빛을 빌어 장취산은 이 서생의 손이 백설처럼 희
다는 것을 느꼈다. 다시 그의 얼굴을 보니 갸름한 턱에 초승달
같은 눈썹, 오똑한 콧날, 미소와 더불어 양쪽 보조개가 엷게 패
여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는 풍류공자인줄 알았는데, 막
상 가까이 대하고 보니 여반남장을 한 절세가인이었다.

장취산은 늠름한 사내 대장부지만 엄한 문규에 따르다 보니 여
인과 접촉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지금, 상대방이 묘령의 여인이
라는 것을 알고는 흠칫 놀라며 이내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다음
생각을 굴릴 여유도 없이 곧장 육지로 몸을 솟구쳐 공수의 예를
갖추고 말했다.

"소생은 낭자가 남장을 한 사실을 몰랐소. 무례함이 있었다면
사과하겠소."

여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뒤이어 노젓는 소리가 들리며
편주가 천천히 호심으로 미끄러져 갔다. 아울러 여인은 금을 뜯
으며 노래를 했다.

"밤은 깊어 흥취가 사라지니, 내일 밤이 기다려지노라, 육보탑
(六寶塔) 아래 수양버들 세 그루, 일엽편주 띄워 임 기다려 볼까
하니, 임은 와주시려는지....."

배는 차츰 멀어져가고 노랫소리도 시나브로 어둠에 묻혔다. 장
취산은 제자리에 우뚝 서서 한동안 넋을 잃었다. 도광검영이 번
뜩이며 피비린내가 풍기는 상황에 이어 난데없이 춘풍명월과 같
이 부드러운 일을 겪게 되자, 장취산은 만감(萬感)에 사로잡혔
다. 콩알만하게 변한 벽사등롱이 호면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후에야 장취산은 상념을 떨 Т리고 객점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용문표국의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혈겁(大血劫)이
파다하게 퍼졌다. 장취산은 외모가 고상하여 비록 이 고장 사람
들에게는 낯선 얼굴이었지만 그를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 그는
오전서부터 오후까지 줄곧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사형과 칠사제의
행방을 찾았으나 헛수고였다. 아무 데서도 무당칠협이 서로 연락
을 위할 때 사용하는 기호를 발견할수가 없었다.

신시(申時) 무렵이 되자, 그 여인의 노랫소리가 다시 귓전에 맴
돌았다. 그 노래 속에는 오늘 밤 육보탑 아래서 기다리겠다는 뜻
이 담겨져 있었다. 장취산은 그 여인의 모습을 뇌리에서 지워버
리려고 애썼지만 그럴수록 더욱 뚜렸이 떠올랐다. 그는 그 여인
을 만나야 할 이유를 스스로 만들기에 이르렀다.

'깎듯이 예의를 갖추면 그녀를 못 만날 이유도 없지.....그리고
그녀 외에는 어젯밤에 일어난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물어볼 사람
이 없으니.....'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그는 전당강변에 위치한 육보탑으로 가기
로 결심했다.


----- 제 1 권 4 장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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