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05

3학년2반 | 2022.03.01 07:56:15 댓글: 0 조회: 541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2055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1 권


제 5 장 신비(神秘)의 절세미녀(絶世美女)


전당강은 육보탑 아래 이르러 크게 휘어져 곧장 동쪽으로 흘렀
다. 이곳은 임안부의 성(城)과는 상당한 거리가 떨어졌다.

장취산은 비록 걸음이 빠르지만 육보탑 아래 이르렀을 때는 이
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탑 동쪽 세 그루의 수양버들이 나란히
늘어진 곳에 과연 배 한 척이 정박돼 있었다.

전당강에 띄워 있는 배들은 대부분 돛을 달았고, 서호의 유람선
보다 규모가 컸다. 그러나 장취산은 어젯밤에 보았던 그 벽사등
롱을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웬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길게 숨을 들이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가까이 가보니 그
여인이 홀로 뱃머리에 앉아 있었다. 몸에 엷은 녹색 치마를 입고
있어 어제와 같은 남장이 아니었다. 장취산은 마음을 굳게 먹고
찾아왔지만, 막상 그녀가 여자 차림을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자
다시 망설여졌다.

이때, 여인의 꾀꼬리같이 고운 음성이 들려왔다.

"무릎에 턱을 괴고 뱃머리에 홀로 앉아, 오실 님을 기다리니,
미풍에 물결이 살랑, 이 내 마음 띄워볼까....."

장취산은 그녀의 마음을 엿보는 듯한 당혹감에 얼른 낭랑한 음
성으로 입을 열었다.

"소생 장취산은 여쭤볼 일이 있어 이렇게 무례함을 무릅쓰고 찾
아왔소."

여인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어서 배에 올라오세요."

장취산은 사뿐히 뱃머리로 뛰어내렸다.

여인은 스스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젯밤은 먹구름이 하늘을 가려 달빛을 찾아볼 수 없었는데,
오늘은 달빛도 곱군요."

그녀의 음성은 은쟁반에 옥구슬을 굴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
선을 하늘에 두고 장취산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장취산은 입술에 침을 바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낭자의 존성을 물어도 좋을지 모르겠군요?"

여인은 홀연 고개를 돌려 샛별처럼 맑은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
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장취산은 그녀의 눈빛과 접하자 감
전된 듯 갑자기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하늘에서 하범(下凡)한
선녀인 듯, 그녀의 아름다움에 눈이 부셨다. 장취산은 야릇한 감
정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자신을 읫기하며 크게 당황하고는,
황급히 강변으로 다시 뛰어올라 도망치듯 앞으로 달려갔다. 약
십여 장쯤 달려나가서야 비로소 걸음을 멈추었다. 아직도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는 자신의 당혹함을 책망하듯 고개를 몇 차례 세
차게 흔들었다.

'장취산아, 이 쑥맥 같은 장취산아! 넌 칠척장구의 사내 대장부
로서 거침없이 강호행도를 해오지 않았더냐?! 어찌 일개 젊은 낭
자 앞에 움츠러드느냐.....'

고개를 돌려 보니 여인을 태운 배가 물줄기를 따라 천천히 하류
쪽으로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장취산은 수면에 비친 벽사등롱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강뚝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았
다. 한 사람은 강둑을 걸으며 한 사람은 배를 타고, 같은 속도로
하류 쪽을 향해 내려갔다. 소녀는 여전히 무릎을 끌어안은 채 하
늘에 걸려 있는 초생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동안 걷던 장취산도 절로 그녀의 눈길을 따라 하늘을 우러
러보았다. 때마침 동북 방향에서 시꺼먼 먹구름이 때를 지어 몰
려왔다. 하늘의 풍운(風雲)만큼 예측하기 어려운 게 없다는데,
거짓말처럼 먹구름이 몰려와 아내 달빛을 삼켜 버렸다. 한 차례
바람이 전당강을 훑고 지나가자 가는 빗방울이 떨어졌다. 강변은
확 트인 평야이므로 비를 피할 만한 곳이 없었다. 장취산은 착잡
한 심정에 사로잡혀 비를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비록 실비가
뿌려지고 있지만 그의 몸은 곧 축축하게 젖었다. 그런데 여인은
여전히 뱃머리에 비를 맞고 앉아 있었다.

장취산은 공연스레 무너져오는 안타까움에 자신도 모르게 소리
쳤다.

"낭자, 어서 비를 피해 선창 안으로 들어가시오!"

그녀는 깜짝 놀란 듯 벌떡 일어나 장취산이 서 있는 쪽을 바라
보았다.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여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스
쳤다.

"당신은 비를 맞아도 되나요?"

그녀는 곧 선창 안으로 들어거더니 우산을 들고 나와 강뚝으로
던져 주었다. 장취산이 우산을 받아 펼쳐보니 우산 속에 한 푹의
산수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일곱 글자가 적혀 있었다.

----- 사풍세우불회귀(斜風細雨不回歸) -----

----- 찬바람 이슬비에 돌아가지 말지어다 -----

우산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은 흔히 볼 수 있었다. 그 그림은
장인(匠人)의 솜씨니만큼 강서(江西)의 도자기처럼 투박한 먼이
없지 않았다. 한데, 이 우산에 그러진 산수화는 심히 정교했고
일곱 글자 또한 규수의 손에 의해 씌여진 듯 청려탈속(淸麗脫俗)
하였다.

장취산은 우산의 서화를 보며 걷다가 작은 도랑에 발을 헛딛였
다. 보통 사람 같으면 영락없이 고꾸라졌을 텐데, 장취산은 변초
(變招)가 빨라 이내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라 물찬 제비처럼 사
뿐히 도랑을 뛰어넘었다. 순간, 배에서 갈채가 들려왔다.

"멋져요!"

장취산이 고개를 돌려보니 여인이 어느새 죽립(竹笠)을 쓰고 뱃
머리에 서 있었다. 비바람 속에 옷자락을 날리며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능파선자(凌波仙子)를 연상케 했다.

여인이 다소곳이 물었다.

"우산의 서화가 장상공의 눈에 차는지 모르겠어요?"

장취산은 그림에 대해 관심이 없어 서예에 중점을 두고 말했다.

"이것은 위부인(緯夫人) 명희체(明姬體)의 서법인데, 글자체에
서 그윽한 국화 향기가 풍기는 것 같습니다."

여인은 그가 자기의 서체를 대번에 알아보자 내심 매우 기뻐했
다.

"그 일곱 자 중에 불(不)자가 가장 잘못 쓰여졌죠?"

장취산은 자시 응시하고 나서 고개를 내둘렀다.

"불자는 아주 자연스럽군요. 단지 함축이 부족한 게 옥에 티지
만 다른 여섯 자와 어울려 졸졸 흐르는 시냇물과 같으니, 보는
이로 하여금 시원한 느낌이 들게 하는군요."

"맞아요. 그 불자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었지
만, 그 결점이 무엇인지 집어낼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상공의
말씀을 듣고 비로소 확연히 깨달았어요."

소녀는 배를 타고 장취산은 여전히 강물을 따라 걸으며 두 사람
은 서법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
덧 일 리 밖까지 내려갔다.

이 무렵 날은 더욱 어두워져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없었다. 여인은 갑자기 작별을 고했다.

"상공과의 대화에서 실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어요. 오늘 일
은 결코 잊지 못할 겨예요."

그녀가 손을 살짝 떨쳐 보이자 후미에 있던 사공이 돛을 올렸
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돛단배는 쏜살처럼 빨라졌다.
장취산은 차츰 멀어져 가는 돛단배를 바라보며 무엇을 잃은 듯
허전함에 사로잡혔다.

"저의 성은 은(殷)..... 나중에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거예
요....."

장취산은 그녀의 성이 은(殷)이라는 것을 듣자 대뜸 뇌리에 떠
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날 도대금에게 삼사형을 호송해 달라고 청탁한 자가 은씨 성
을 가진 준수한 서생이었다는데 혹시 이 낭자가 남장한 게 아니
었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곧장 경공술을 전개해 쫓아갔다. 돛단배
의 속도가 빨랐지만 장취산은 곧 따라잡을 수가 있었다.

그는 낭랑한 음성을 외쳤다.

"은 낭자, 혹시 나의 삼사형 유대암을 알고 있소?"

그녀는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않았다. 장취산은 그
녀의 나직한 한숨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소리쳤다.

"난 지금 많은 의문을 갖고 있소. 낭자가 확실하게 대답을 해줬
으면 좋겠소!"

소녀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것을 꼭 물어야 하나요?"

"용문표국에 나의 삼사형을 호송해 달라고 청탁한 장본인이 바
로 낭자요? 그게 사실이라면 은덕을 갚아야 하기 때문이오."

"은은원원(恩恩怨怨).....그게 그렇게도 중요한가요?"

"나의 삼사형이 무당산 아래서 다시 독수를 당한 사실을 알고
있소?"

"그 일로 가슴이 아파요. 그리고 죄스럽기도 하고요."

두 사람이 일문일답하는 사이에 바람이 거세져 배의 속도가 갈
수록 빨라졌다. 장취산은 내력이 심후하여 시종 돛단배와 보조를
맞출 수 있었다.

전당강은 하류로 내려갈수록 강폭이 넓어졌다. 게다가 가늘게
뿌려지던 빗줄기도 어느덧 폭우로 변했다. 장취산은 단전의 진기
를 끌어올려 큰 소리로 물었다.

"어젯밤 용문표국의 멀문지화를 당했는데, 낭자는 혹시 누가 독
수를 전개했는지 알고 있소?"

여인은 아까부터 묻는 말에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도대금에게 미리 약속을 받은 게 있었어요....."

"도중에서 차질이 생기면 멸문지화를 각오하라고....."

"맞아요. 그들은 유대협을 보호하지 못했으니 그 약속한 댓가를
받은 거예요."

장취산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표국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모두..... 모두 낭자가.....!"

"모두 내가 죽인 거예요!"

장취산은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심한 충격을 받았다. 이
꽃처럼 아름다운 낭자가 잔인무도한 살인 흉수라고는 도저히 믿
어지지가 않았다. 그는 잠시 망연자실해 있다가 다시 물었다.

"그..... 소림사의 화상들은....."

"역시 내가 죽인 거예요. 원래는 소림과 원한을 맺을 생각은 없
었어요. 하지만 그들이 먼저 악랄한 암기로 나에게 상처를 입혔
기 때문에 그 앙갚음을 한 것뿐이예요."

"한데..... 그들은 어째서 나를 흉수로 생각하는지....."

여인은 갑자기 까르르 웃었다.

"그것은 내가 일부러 꾸민 일이예요."

장취산은 다시 심한 충격을 받았다.

"낭자가 일부러 나에게 누명을 씌웠단 말이오?"

"그래요."

그녀의 태연한 대답에 장취산은 울화가 치밀었다.

"낭자는 나하고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했소?"

여인은 더이상 대답을 하고 싶지 않은 듯 선창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장취산은 이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배는 강변에서 멀
리 떨어져 도저히 뛰어오를 수가 없었다. 장취산은 끓어오르는
분노로 인해 대뜸 한 그루의 단풍나무를 향해 장풍을 펼쳐냈다.

우지끈!

장취산은 굵은 나뭇가지 두 개를 꺾어 그 중 하나를 강물에 던
지더니 이내 몸을 솟구쳤다. 그는 강심에 떠 있는 나뭇가지를 살
짝 발끝으로 찍는 동시에 두 번째 나뭇가지를 던지며 재차 몸을
솟구쳤다. 이렇게 하여 뱃머리에 오를 수 있었다.

"낭자, 무슨 수로 날 함정에 빠뜨렸소?"

선창 안은 캄캄하니 조용하기만 했다. 장취산은 분노가 치민 상
태에서도 자제력을 잃지는 않았다. 그는 함부로 아녀자의 선창
안으로 뛰어들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엉거주춤
하고 있는데 선창 안에 촛불이 밝혀졌다. 이어 여인의 음성이 들
렸다.

"들어오세요."

장취산은 옷매무새를 바로 하며 선창 안으로 들어가자 이내 멍
해졌다. 선창 안에 앉아 있는 자는청색 장삼에 방건을 머리에
쓰고, 손에 부채를 쥔 젊은 서생이었다. 그녀는 삽시간에 남장으
로 갈아입은 것이다. 언뜻 보아 그녀의 남장한 모습은 장취산과
흡사했다. 장취산은 그녀가 무슨 방법으로 자기에게 누명을 씌웠
는지 다그쳤는데, 그녀의 차림새를 보니 절로 해답을 얻을 수 있
었다. 어슴프레한 곳에서는 누군들 두 사람을 동일인으로 착각하
기 십상일 것이다. 소림승 혜풍과 도대금이 한결같이 자기가 독
수를 전개한 원흉이라고 물고 늘어지는 이유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여인은 맞은편 자리를 부채로 가리키며 자리를 권했다.

"장오협, 앉으세요."

그녀는 작은 앉은뱅이 탁상에 놓여 있는 찻잔에다 차를 따라 장
취산 앞으로 건네주며 말했다.

"귀한 손님이 찾아 주셨는데, 배 안에 술이 없으니 차로 대신하
는 수밖에 없군요."

그녀가 이렇게 다소곳이 차를 권하자 장취산은 끓어오르는 분노
를 차마 쏟아낼 수가 없었다.

"고맙소."

소녀는 그의 옷이 축축하게 젖은 것을 보자 부드럽게 말했다.

"배 안에 옷이 있어요. 비를 맞은 후엔 오한을 앓을 염려가 있
으니 후미로 가서 갈아입는 게 어때요?"

장취산은 고개를 내둘렀다.

"그럴 필요는 없소."

그는 곧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단전으로부터 한 갈래의 뜨
거운 기운이 피어올라 온몸으로 퍼졌다. 그러자 옷의 수분이 차
츰 증발되었다.

소녀는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의 내공은 천하 으뜸이라는데, 내가 부질없이 장오협에게
옷을 갈아입으라는 청을 했군요."

장취산은 그녀의 말을 흘려보내며 물었다.

"낭자는 어느 문파인지 밝혀줄 수 있겠소?"

여인은 이 물음에 이내 시선을 선창 밖으로 돌리며 양미간에 우
수가 피어올랐다. 장취산은 그녀에게 말 못할 사연이 있다는 것
을 알고 더이상 문파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중요한 일부터 물었다.

"누가 나의 삼사형을 상하게 했는지 말해 줄 수 있겠소?"

여인은 엉뚱한 말을 했다.

"무당칠협이 영준비범하다는 걸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신중을
기하는데는 좀 부족한 것 같아요....."

장취산은 그녀가 동문서답하며 자기를 앞에 앉혀 놓고 영준비범
을 운운하자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다. 어쨌든 그녀가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지 저의를 알 수 없었다. 여인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더니 별안간 소매를 걷어 붙여 야들야들한 팔을 드러냈다.
장취산은 당황하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의 귓전에 여인의 음
성이 들려왔다.

"이 암기를 아시겠어요?"

장취산은 고개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비로소 그녀의 왼
팔에 작은 흑색 강표(鋼標) 세 개가 박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살결은 백설처럼 희지만, 암기를 맞은 부위는 먹물을 뿌
린 듯 시꺼멓게 변해 있었다. 강표의 꼬리 부분은 모두 매화 모
양으로 되어 있었다.

장취산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소림의 매화표(梅花標)가 아니니까? 어... 어째서 검은
색이지.....?"

"맞아요. 소림의매화표인데 독을 먹였어요."

장취산은 눈살을 찌푸렸다.

"소림은 명문 정파로서 절대 암기에 독을 묻힐 리가 없소. 하지
만 이 매화표는 다른 문파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독문암기(獨
門暗器)이니..... 한데, 암기를 당한 지 얼마나 되었소? 서둘러
그 독을 제거해야 될 거요."

여인은 그가 염려하는 것을 지켜보며 눈동자에 야릇한 광채가
스쳤다.

"벌써 이십 일이 넘었어요. 독성을 한 곳에 응결시켜 당분간은
확산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강표를 뽑을 엄두를 내지 못하겠
어요. 강표가 뽑히면 독이 금방 전신으로 퍼질 것 같아서....."

"독표를 당한 지 이십 일이 넘도록 뽑지 않으면 나중에 완치가
된다 해도..... 흉터가 생길 우려가 있소."

여인은 이내 눈물을 글썽이며 울적한표정이 되었다.

"난 이미 모든 방법을 써보았어요. 어젯밤에 그 소림승의 몸도
뒤져 보았지만 해약을 찾아 내지 못했어요. 아무래도 이 팔을 못
쓰게 될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며 천천히 소매를 내렸다.

장취산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뜨거운 감정이 용솟음쳐 올랐다.

"은 낭자, 나를 믿을 수 있겠소? 소생은 비록 내력이 미천하지
만 낭자를 도와 그 독기를 밀어낼 자신이 있소."

여인은 보조개를 드러내며 생긋이 웃었다. 그녀는 내심 매우 좋
아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미소를 거두고 조심스럽게 말했
다.

"물론 장오협을 믿을 수 있어요. 하지만 장오협은 나에 대해 많
은 의문을 갖고 있으니, 치료해 준 후에 혹시 후회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서는군요."

장취산은 단호하게 말했다.

"병을 치료하고 사람을 구하는 것이 바로 우리 무림인의 본분이
거늘 내 어찌 후회할 수 있겠소?"

여인은 그의 다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하지만 이십 일도 견뎌 왔으니 서둘 필요는 없어요.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보세요. 그날 난 유삼협을 용문표국에
맡긴 후 바로 표차 행렬을 뒤따라갔어요. 도중에서 과연 몇몇 무
리들이 유삼협에게 손을 쓰려는 것을 내가 암중에서 모두 처리했
어요. 도대금은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죠."

장취산은 얼른 공수의 예를 취했다.

"소생이 무당 제자를 대신해 낭자의 대은대덕에 감사를 드리겠
소."

여인의 음성이 갑자기 차갑게 변했다.

"고마와할 것 없어요. 잠시 후면 나를 원망하게 될 테니까요."

장취산은 그녀의 진의를 몰라 멀쑥해졌다.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도중에 나는 수시로 차림을 바꾸어 때로는 농부, 때로는 상인
으로 둔갑해 멀리서 표차 행렬을 따랐어요. 한데 무당산에 다 이
르러 불상사가 생기리라곤 정말 뜻밖이었어요."

장취산은 아랫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낭자는 혹시 그여섯 명의 흉수를 똑똑히 보았소? 도대금은 흐
리멍텅하여 그들의 내력을 전혀 설명하지 못했소."

여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비단 그들을 보았을 뿐 아니라 직접 싸우기까지 했어요. 그
러나 나 역시 흐리멍텅하여 그들의 내력을 알아내지 못했어요."

그녀는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그날 난 그 여섯 사람이 무당산 방향에서 내려오는 것을 멀리
서 지켜보았어요. 도대금이 그들을 무당육협으로 단정짓는 것도
들었죠. 난 그들이 도대금으로부터 유삼협을 인도받아 떠난 후에
야 갑자기 심상치 않은 생각이 들었어요. 무당칠협은 친형제 이
상으로 정이 두텁다고 들었는데, 그들은 유삼협이 중상을 입었다
는 말을 듣고서도 우르르 달려와 상세를 살피기는 커녕 오히려
몇몇은 좋아하는 눈치였던 것을 상기하고는 황급히 말을 몰아 뒤
쫓아갔어요."

"낭자는 세심하여 정확하게 짚었소."

"그들은 나하고 옥신각신하게 되었고, 급기야 싸움이 벌어졌어
요. 한데 그들 중에 서른 살 가량 된 빼빼 마른 자가 갑자기 왼
손을 떨치자 난 팔이 저려오는 것을 느끼며 몽롱한 상태에서 매
화표를 맞게 된 거예요. 그 빼빼 마른 자는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하며 나를 사로잡으려 하기에 나는 은침(銀針) 삼 매를 날려 겨
우 달아날 수 있었어요."

장취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 매화표를 왼손으로 발출했다면..... 소림파 제자중에 그런
패류(敗流)가 있다는 게 납득이가지 않는군요. 그런데 왜....."

"무슨 말을 물으려는지 알아요. 왜 즉시 무당산으로 올라가 모
든 걸 설명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려는 거죠? 난 무당산에 오를 수
가 없는 입장이예요. 내가 직접 나설 수만 있다면, 왜 그렇게 번
거롭게 도대금에게 청탁을 했겠어요? 나는 속수무책이 되어 힘없
이 길을 가다가 당신이 도대금 등과 얘기를 나누는 걸 보았어요.
그리고 당신이 유삼협을 찾아 떠나는 것을 보고 일단은 마음이
놓였어요. 사실 그 당시 내가 당신의 뒤를 쫓아가 도우려는 생각
도 없지 않았지만, 실력이 모자라 별로도움이 도리 것 같지 않
았어요. 더군다나 난 급히 독을 제거하려는 생각에 곧장 동쪽으
로 향했어요. 그건 그렇고 유삼협은 나중에 어떻게 됐죠?"

장취산은 유대암이 당한 일을 얘기해 주었다. 여인은 장탄식을
하며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하늘의 도움을 받아 유삼협이 완쾌되길 진심으로 바라는 바예
요. 만약... 만약 그렇지 못하면....."

그녀의 음성은 촉촉하게 젖어오며 제대로 말을잇지 못했다. 장
취산은 그녀의 진지한 태도에 감격했다.

"나의 삼사형을 그렇게도 생각해 주시니 정말 고맙소."

여인은 고개를 내두르며 하던 말을 계속했다.

"내가 강남으로 돌아와 알아본 결과, 이 매화표는 소림의 독문
암기로서 소림의 해약이 아니면 독성을 제거하기가 어렵다는 사
실을 알아냈어요. 임안부에는 용문표국을 제외하곤 소림파가 없
기 때문에 야밤을 틈타 표국 안으로 잠입해 해약을 빼앗아낼 생
각으로 들어갔어요. 그 그런데 해약 얘기를 비치기도 전에, 그들
은 어두운 곳에 사람을 매복시켰다가 불문곡직하고 나에게 독수
를 저개했던 거예요."

장취산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굴리는 듯 하더
니 불쑥 입을 열었다.

"낭자는 일부러 날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똑같은 차림을 한 모
양인데..... 그 이유가 무엇이오?"

여인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어 손톱을 만지작거
리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 그날 당신이 옷가게에서 새 옷과 방
건을 구해 갈아입은 것을 보니 너무... 너무 멋있어서 나도 따라
서 똑같은 차림을 한 거예요."

장취산은 어이가 없기도 하고, 울화통이 터질 것 같기도 했다.

그녀 때문에 자기는 영락없이 소림 제자들에게 잔악무도한 흉수
로 낙인이 찍혔다. 장취산은감정이 폭발한 듯 자연히 언성을 높
였다.

"그건 그렇다 치고, 무엇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에게까지 살수를
전개했소? 그들은 낭자와 아무런 원한도 없을 텐데, 그렇게 악랄
한 수단을 쓰다니 너무 지나쳤다고 느껴지지 않소?!"

여인은 그가 언성을 높이자 처음에는 당황하는 것 같더니 곧 안
색이 차갑게 변하며 냉소를 날렸다.

"흥! 지금 날 훈계하는 건가요? 난 열 아홉 살이 되도록 살아오
면서 누구의 훈계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렇게도 대자대비를
앞세우는 장오협인 줄은 미처 몰랐군요. 나 같이 수단이 악랄한
무리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을 테니 어서 떠나도록 하세요!"

장취산은 그녀가 축객령을 내리자 얼굴이 빨갛게 상기돼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막 선창 밖으로 걸음을 떼어놓다가 문득 그녀의 독상을 치
료해 주겠다고 한 약속이 떠올라 주춤했다.

"낭자, 소매를 걷으시오."

여인은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날 마치 독사나 전갈같이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런 사
람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아요."

장취산은 숨을 들이키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낭자, 치료를 계속 늦춘다면 독이 발작하여 어쩌면..... 어쩌
면..... 치료하기 어렵게 될 거요!"

그는 최악의 경우 팔을 잃게 된다는 말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
했다.

"목숨을 잃게 된다면 차라리 속이 시원하겠어요. 어쨌든 당신이
날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까요!"

장취산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소림파의 악인이 낭자에게 독표를 발출한 건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요!"

여인은 눈을 흘기며 암팡지게 말했다.

"만약 내가 당신의 삼사형을 불원천리 무당산까지 호송하지 않
았다면 그 여섯 명의 악적을 만날 리 있겠어요?! 그리고 그 여섯
사람이 당신의 삼사형을 가로채든 말든, 내가 만약 수수방관했다
면 독표를 당했겠어요? 더군다나 당신이 만약 한 발 일찍 달려와
나를 도와줬더라면, 내가 부상을 입었을 리가 있었겠어요?!"

맨 마지막 말은 억지였다. 그러나 다른 말은 일리가 없지 않았
다.

장취산은 공수의 예를 취했다.

"옳은 말이오. 소생이 그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낭자의 독상을
치료해 드리겠소!"

여인은 곁눈질로 그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이젠 당신의 잘못을 시인하겠죠?"

장취산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대관절 무엇을 잘못했다는 거요?"

"당신은 나더러 수단이 악랄하다고 했잖아요! 그 말은 틀렸어
요. 그 소림의 화상들과 도대금의 졸개들은 죽어 마땅한 자들이
예요!"

장취산은 고개를 내둘렀다.

"낭자는 비록 팔에 독상을 입었지만 완치될 수 있소. 그리고 나
의 삼사형은 중상을 입었지만 아직 죽진 않았소. 설령 불행한 일
이 생긴다. 해도 흉수만 찾아내 해결해야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외다."

여인은 다시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흥! 내가 사람을 잘못 죽였다는 건가요? 이 매화표를 발출해
날 죽이려한 게 소림파의 소행이 아니란 말예요?!"

장취산은 진지하게 그녀를 설득했다.

"소림의 제자는 천하 도처에 산재해 있소. 낭자는 그 매화표를
맞았다고 해서 그들을 일일이 찾아가 모두 죽일 수는 없는 노릇
이 아니겠소?"

여인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말로서는 도저히 장취산을 당해
내지 못할 것 같자 갑자기 오른손을 번쩍 들어올려 매화표가 꽃
혀 있는 부위를 냅다 내리쳤다. 그 바람에 매화표가 살 속 깊이
박혀 상세가 더욱 심해졌다.

장취산은 그녀의 성깔리 이렇게 고약한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
다. 자신의성깔을 주체하지 못해 자해 행위를 서슴지 않는 여자
이니, 살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게 당연했다.

장취산이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어 다급하게
소리쳤다.

"낭자! 이러면....."

그녀의 소매가 벌써 검붉은 피로 물들었다. 그 동안 자신의 내
력으로 응결시켰던 독형이 터진 것이다. 이 상태로 방치하면 목
숨을 잃게 될 우려도 있었다. 장취산은 생각을 돌릴 겨를도 없이
대뜸 그녀의 왼팔을 나꿔잡아 소매를 찢으려 했다.

이때, 난데없이 등 뒤에서 호통이 들려왔다.

"어서 낭자의 몸에서 손을 떼지못하겠느냐!"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한 자루의 강도가 등을 향해 찍어 왔
다. 장취산은 상대방이 뱃사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화급을 다투는 상황인지라 자세히 설명할 여유가 없어, 냅다 뒤
로 발을 날려 사공을 선창 밖으로 걷어찼다.

여인이 다시 앙칼지게 소리쳤다.

"당신의 도움은 필요없어요. 내가 죽는 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죠!"

그녀는 악을 쓰고 소리치면서 잽싸게 손을 펼쳐냈다.

찰싹!

장취산은 순식간에 뺨을 얻어맞고 말았다. 장취산은 사전에 전
혀 방비가 없었다. 게다가 여인의출수가 전공석화처럼 빨랐기
때문에 어처구니없게도 뺨을 얻어맞은 것이다.

여인의 안색은 얼음장처럼 차가왔다.

"어서 떠나세요! 다시는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요!"

장취산은 난생 처음으로 당한 수모에 발끈했다.

"좋소! 낭자처럼 이렇게 방자하고 무례한 여자는 세상에 다시
없을 것이오!"

그는 성큼 뱃머리로 걸어나갔다. 여인의 냉소가 그의 뒤통수를
때렸다.

"흥! 이제 내가 어떤 계집이라는 걸 알아챘죠!"

장취산은 널판지 하나를 강물에 던졌다. 그것을 발판삼아 육지
로 오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신법을 막 전개하려는 순간, 다시
망설여졌다.

'내가 이대로 떠나면 그녀는 영락없이 목숨을 잃게 될 텐
데....."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짓누르며 다시 선창 안으로 들어갔다.

"낭자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니 어서 소매를 걷으시오.
목숨을 살리고 봐야 되잖겠소?"

여인은 입을 삐쭉거리며 토라진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내 목숨을 내가 버리겠다는데 당신이 웬 참견이죠?"

"낭장는 불원천리 나의 삼사형을 호송해 주었소. 그 은혜를 어
찌 갚지 않을 수 있겠소."

"흥! 이제 보니 단순히 그 보답을 하기 위해 날 도와주려는 것
뿐이군요. 만약 내가 당신의 삼사형을 호송해 주지 않았다면, 더
심한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거들떠보지 않겠군요."

장취산은 절로 멍해졌다.

"꼭 그렇지만은 않소."

여인은 갑자기 몸을 한 차례 오싹하더니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
다. 독성이 전신으로 퍼지기 시작한 게 분명했다.

"어서 소매를 걷으시오! 자신의 목숨을 갖고 부질없이 고집을
부려서야 되겠소!"

여인은 정말 고집불통이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도리질을 했
다.

"싫어요! 당신이 잘못을 시인하기 전에는 도움을 받지 않겠어
요!"

암팡지게 토라진 그녀의 모습은 요염스럽기까지 했다.

장취산은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소. 내가 잘못했다고 합시다. 낭자는 사람을 잘못 죽인 게
아니오."

여인은 한술 더 떴다.

"안 돼요. <잘못했다고 합시다>가 뭐예요! 게다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잘못을 시인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그것만 봐도 당신은
진심으로 잘못을 시인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어요!"

장취산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한시가 급했다. 그녀와 쓸데없는
입씨름을 벌일 여유가 없었다.

"좋소이다. 하늘을 두고 맹세컨대, 나 장취산은 진심으로 은...
은..."

그가 말끝을 멈칫거리자 여인이 얼른 이었다.

"은소소(殷素素)예요."

장취산은 하던 말을 미무리 지었다.

"은소소 낭자에게 잘못을 시인하는 바이오!"

은소소는 크게 기뻐하며 오뉴월의 장미꽃처럼 활짝 웃었다. 그
리고는 으스러지게 의자에 주저앉았다.

장취산은 얼른 품속에서 약병을 꺼내 천심해독단(天心解毒丹)
한 알을 쏟아내 그녀에게 복용시키고는 소매를 걷어 붙였다. 그
녀의 팔똑은 이미 거무죽죽하게 변색돼 있었다. 독이 급속도로
번지고 있는 증거였다. 장취산은 손을 뻗어 그녀의 팔뚝 양쪽을
움켜쥐었다.

"낭자, 느낌이 어떻소?"

은소소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가슴이 갑갑해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아요. 왜 좀더 일찍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죠? 만약 내가 죽게 된다면 그건 당신 책임이예
요!"

장취산은 그녀의 비위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부드럽게 말했다.

"아무 일 없을 테니 안심히시오. 몸의 힘을 풀고 마치 잠자는
것처럼 해보시오."

은소소는 다시 눈을 흘겼다.

"내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면 간단하잖아요?"

장취산은 속으로 투덜겨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생떼를 쓰니 장차 어느 남자가 색시로 데려갈
건지 몰라도 평생 고생께나 하겠군.'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는 행여나 은소소가 자신의 마음을 읽을까 봐, 흡
사 죄를 짓다가 들킨 사람처럼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순간, 그
녀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창백하던 양볼이
도화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눈빛이 마주치자 약속이나
한 듯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은소소가 갑자기 속삭이듯 나직이 말했다.

"장가가(張歌歌), 저의 말이 지나쳤죠? 그리고 손찌검까지 했으
니..... 용서해 주시겠죠?"

그녀가 갑자기 칭호를 장가가로 바꾸자, 장취산은 더욱 가슴이
뛰었다. 그는 황급히 숨을 들이켜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혔다.
이어 단전의 진기를 끌어올려 양팔에 집결시켰다. 잠시 후 장취
산의 머리 위에서 백기(白氣)가 스물스물 피어올라 운막(雲幕)을
형성했다. 그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내력을 전부 발동시킨 것이
다.

은소소는 내심 감격했다. 지금이 중요한 순간임을 알고 행여나
그의 집중력이 분산될까 봐 눈을 꼭 감은 체 입을 열지 않았다.

홀연 팍! 미미한 소리가 들리며 팔에 꽃혀 있는 매화표 하나가
튕겨져 나왔다. 잇따라 한 갈래의 검붉은 피가 치솟았다. 그 검
붉은 피가 차츰 빨갛게 변해 가는 사이에 두 번째 매화표도 장취
산의 내력에 의해 뽑혀졌다.

바로 이때, 갑자기 강물 위에서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은 낭자, 여기에 있습니까? 주작단(朱雀壇)의 단주가 뵙고자
합니다."

장취산은 다소 이상하게 느껴졌으나 내력을 운용(運用)하는 긴
박한 상황인자라 신경을 쓰지 않았다. 상대방이 다시 소리를 치
자 돛단배에서 그 사공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곳에 엉뚱한 자가 은 낭자를 헤치려 하니, 상(常) 단주께서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상대방은 우악스럽게 소리쳤다.

"웬놈이냐? 만약 은 낭자의 솜털 하나만 상하게 해도 내놈은 살
아 남지 못할 것이다!"

그 외침소리는 마치 거종(巨鐘)과 같아 듣는 이의 고막을 진동
시켰다. 은소소는 눈을 떠 장취산에게 은은한 미소를 지어보였
다. 오해가 생긴 데 대하여 미안하다는 뜻을 표하는 것 같았다.
세번째 매화표는, 좀전에 은소소가 자해 행위를 하는 바람에 살
속 깊이 막혀 좀처럼 뽑혀지지 않았다.

이즈음, 노 젓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상대방의 배가
빠른 속도로 접근해 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곧이어 돛단배가 한
차례 기우뚱 하더니 상대방이 이미 뱃머리에 올라섰다.

장취산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최후 수단을 쓰기로 결정했
다. 그 결정이 듯시 행동으로 옮겨져 그는 거침없이 은소소의 팔
에 입술을 대었다. 이빨로 마지막 매화표를 뽑아낼 심산이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한 사람이 선창 안으로 뛰쳐들어왔다. 그는
장취산이 애무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걸 보자, 다짜고짜 등을
향해 일장을 내리찍으며 대갈했다.

"이놈! 손을 놓지 못하겠느냐!"

장취산은 반격하거나 피할 입장이 못 되었다. 그는 한 모금의
진기를 끌어올리며 상대방의 일장을 감수했다.

펑!

웅후한 장풍이 정확하게 그의 등마루에 떨어졌다. 은 무당의 내
공 정요(精要)를 깊이 터득하여 몸을 움직이지 않은 상태에서 차
력어력(借力御力)을 이용해 이빨로 독표를 뽑아냈다.그 순간 은
소소의 팔에서 검붉은 피화살이 치솟아 선창 뒷부분을 붉게 물들
였다. 장풍을 전개한 자는 잇따라 두 번째 공격을 펼치려다가 이
렇나 상황을 확인하자 황급히 도중에서 손을 멈추었다.

"은 낭자! 저... 괜찮습니까?"

그는 은소소의 팔에서 검붉은 피가 흐르는 것을 보는 순간, 자
신이 출수를 잘못했다는 걸 이내 알아차릴 정도로 강호의 견식이
넓었다. 그래서 가슴이 철렁했다. 자기의 일장을 맞은 자는 영락
없이 오장육뷰가 파열돼 목숨을 잃게 될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
다. 그는 황급히 품속에서 내상약을 꺼내 장취산에게 복용시키려
했다. 그러나 장취산은 입에 물고 있는 독표를 뱉어내며 고개를
내돌렸다. 이어 은소소의 팔에서 붉은 피가 흐르는 것을 확인한
후에 비로소 손을 풀었다.

그는 좀전에 은소소의 팔에 입술을 갖다 댄 일로 인해 감히 그
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사나이에게 고개를 돌려 어색하게
웃었다.

"정말 대단한 장력이더군요."

사나이는 깜작 놀랐다.

"아니... 이게.....!"

그는 믿어지지 않는 듯 장취산의 안색을 유심히 살피며 맥을 짚
어 보았다.

장취산은 그를 더욱 놀라게 하려고 선뜻 내력을 끌어올려 복막
(腹膜)을 위로 밀어붙이자 이내 심장의 박동이 멎어졌다. 사나이
는 그의 맥이 끊긴 것을 확인하자 놀라움이 더 컸다.

장취산은 이렇게 장난을 치고 나니 다소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
아 은소소가 건네주는 손수건으로 그녀의 상처난 곳을 동여매 주
고 나서 넌지시 말했다.

"독소가 이미 피와 함께 유출됐으니, 앞으로 며칠간 보통 해독
단만 복용해도 완쾌될 것이오."

은소소는 야릇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사의를 표했다.

"정말 고마와요."

이어 안색이 차갑게 번해 있는 사나이에게 말했다.

"상단주, 어서 무당파의 장오협께 인사를 드리세요."

사나이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정중히 몸을 꺽었다.

"무당칠협의 장오협이었군요. 어쩐지 내력이 그렇게 심후한가
했더니만..... 소인은 상금붕(常金鵬)이라고 합니다. 좀전에 경
솔했던 행동을 용서해 주십시오."

장취산은 답례를 하며 상금붕을 살펴보았다. 그의 나이는 오십
전후이며 얼굴과 손등에 근육이 울퉁불퉁하게 엉켜 있어 매우 거
친 느낌을 주었다. 상금붕은 장취산과 인사를 나누고 나서 곧이
어 은소소에게 공손히 절을 올렸다. 은소소는 거침없이 그의 절
을 받으며 단지 고개만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장취산은 이들이
어떤 관계인지 자뭇 궁금했으나 맞대놓고 물을 수가 없었다. 상
금붕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현무단(玄武壇)의 백(白)단주는 이미 해사파, 거경방(巨鯨幇),
그리고 신권문(神拳門)의 사람들과 내일 아침 전당강 강구에 위
치한 왕반산도(王盤山島)에서 만나 칼의 위력을 보여 주기로 약
속했습니다. 낭자께서는 몸이 불편하시니 소인이 직접 임안부로
모셔드리겠습니다. 왕반산도의 일은 백단주 혼자서도 충분히 처
리할 수 있을 겁니다."

은소소는 코웃음을 날렸다.

"해사파, 거경방, 신권문이라..... 음, 신권문의 장문인 과삼권
(過三拳)도 간다고 했나요?"

"듣자 하니 그는 열 두 명의 제자를 이끌고 갈 것이라 하더군
요."

"흥, 과삼권의 명성은 비록 많이 알려져 있지만 백단주의 적수
가 못 되죠! 그 외에 또 어느 고수들이 있나요?"

상금붕은 약간 엉거주춤하더니 입을 열었다.

"소문에 의하면 곤륜파(崑崙派)의 두 젊은 검객도 올 것이라 합
니다. 그들은 도... 도..."

그는 옆에 있는 장취산을 곁눈질로 한 번 훑으며 말끝을 흐렸
다.

은소소가 차가운 음성으로 거침없이 그의 말을 받았다.

"도룡보도의 위력을 직접 확인해 보겠다고 하던가요? 어쩌면 엉
뚱한 속셈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죠....."

장취산은 <도룡도>란 세 글자를 듣자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

은소소의 말이 계속되었다.

"음..... 곤륜파의 제자라면 과소평가할 수 없죠. 내 팔의 부상
은 별것 아니니 함께 가겠어요. 필요에 따라 백단주를 도울 수도
있으니까요."

이어 그녀는 장취산에게 고개를 돌렸다.

"장오협, 우린 이만 헤어져야겠어요. 저는 상단주의 배를 타고
갈 테니 내 배를 타고 임안으로 돌아가세요. 당신은 무당파의 제
자이니 이번 일에 끼어들 필요가 없어요."

"나의 삼사형께서 부상을 당한 것은 도룡도와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아는 대로 말씀해 주시겠소?"

은소소는 대답을 회피했다.

"그 중간에는 복잡 미묘한 곡절이 얽혀 있어 저도 자세한 것을
말씀드릴 수 없어요. 나중에 직접 당사자에게 물어 보세요."

장취산은 그녀의 애매모호한 태도에서 더 이상 물어도 소용없다
는 걸 알았다.

'삼사형을 해친 자는 도룡보도를 노리고 있었을 가능성이 짙다.
상단주의 말을 들어 보면 도룡도가 이들의 수중에 있는 것 같은
데, 그 악적이 만약 소식을 들으면 필시 달려올 것이다.'

그는 곧 조심스럽게 물었다.

"은 낭자, 이 매화표를 발출한 자들이 혹시 왕반산도에 나타나
지 않을까요?"

은소소는 히죽 웃더니 그가 묻는 말엔 대답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꼭 나하고 함께 가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이어 장취산이 태도를 결정하기도 전에 상금붕에게 말했다.

"상단주가 앞장 서세요."

"네!"

상금붕은 공손히 대답하고 물러났다. 그는 흡사 하인이 주인을
대하듯 은소소에게 공손했다. 상금붕이 물러가자 은소소는 장취
산의 장포를 기리키며 부드럽게 말했다.

"헤진 데를 기워드릴 테니 어서 옷을 벗으세요."

살펴보니, 조금 전에 상금붕에게 장풍을 맞은 부위가 찢어져 있
었다. 장취산이얼른 사양했다.

"괜찮소!"

"제 바느질 솜씨가 못미더워선가요?"

"아니오."

장취산은 짤막하게 대꾸하고 나서 침묵을 지켰다.

어젯밤부터 그녀가 용문표국의 많은 무고한 생명을 죽인 일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다. 자기는 본디 이런 잔악무도한 흉수를
거침없이 Ð치해야 하는데 지금은 한 배에 타고 있을 뿐 아니라
독상까지 치료해주지 않았던가! 게다가 팔뚝에 입술까지 갖다
댔으니..... 물론, 부득이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들이지만 장취산
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는 왕반산도의 일을 마치는 즉시 그녀
와 헤어져야 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은소소는 그의 표정을 읽으며 짚이는 게 있는지 냉소를 날렸다.

"도대금과 표국의 사람들, 그리고 두 소림승을 죽인 것도 나지
만 그 혜풍이란 화상을 죽인 것도 역시 나예요!"

장취산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낭자의 짓이라고 이미 예측하고 있었소. 한데, 어떤 방법으
로....."

"간단해요. 나는 갈대밭에서 가까이 떨어진 물 속에 숨어 당신
네들의 대화를 전부 엿들었어요. 그 혜풍은 나중에 당신의 얼굴
이 내 얼굴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막 입을 열려고 하기에, 입
속에다 은침(銀針)을 발출한 거예요."

"그렇게 되자 소림파는 더욱 나를 흉수로 단정하게 됐소! 은 낭
자, 정말 대단히 똑똑하고, 대단히 수단이 좋구료!"

그의 음성이 격분이 가득 차 있었다. 은소소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생긋이 웃었다.

"그건 장오협의 과찬이예요."

장취산은 도조히 참을 수 없어 버럭 소리쳤다.

"난 낭자와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왜 모함을 하는 거요?"

은소소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띄우는 여유를 보였다.

"당신을 모함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어요. 단지 무림의 양대 산
맥이라 일컬어지는 소림과 무당이 서로 맞붙게 되면 어느 쪽이
이길 건지 시험해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장취산은 아연실색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스스로 억제하고 경
각심을 높였다.

'이제 보니 나 한 사람을 겨냥한 게 아니라 더 큰 음모가 도사
리고 있었군. 정말 그녀가 꾸민 대로 소림과 무당이 정면대결을
하게 된다면, 필시 양패구상되어 무림의 일대겁난(一大劫亂)을
불러 일으킬 텐데.....'

은소소는 부채를 흔들거리며 여유만만했다.

"장오협, 당신 부채에도 서화가 있을 텐데 좀 보여주시겠어요?"

장취산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앞쪽에서 상금붕의 그 카랑카
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거경방의 배가 아니오? 어느 분이 배에 있소이까?"

상대방의 대꾸가 강의 우측에서 들려왔다.

"거경방의 소방주께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왕반산도로 가는 중
이외다!"

상금붕이 다시 소리쳤다.

"천응교(天應敎) 은 낭자와 주작단 단주가 이곳에 있으니 배를
뒤쪽으로 돌려줬으면 고맙겠소."

상대방의 음성이 거칠게 변했다.

"만약 귀공의 교주라면 당연히 양보하겠지만, 다른 사람에게까
지 그런 예우를 베풀고 싶지 않소이다."

장취산은 이내 생각을 굴렸다.

'천응교? 뭐하는 사교(邪敎)지? 한 번도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
는데 아마 최근에 생겨난 방파인 모양이군. 우린 강남에서 활동
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기도 할 거야..... 거경방은 전에도
들은 적이 있지만 가히 좋은 평을 받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는 선창 문을 밀어 밖을 내다보았다. 과연 강줄기 우측에 거
대한 배가 보였다. 이 배의 머리 부분은 고래 모양을 하고 있으
며, 수십 자루의 칼을 가지런히 세워 고래의 이빨을 연상케 했
다. 그리고 후미가 고래 꼬리처럼 생긴 것이 특징이었다. 이 거
경선(巨鯨船)은 상금붕이 몰고 있는 배보다 길고 돛대도 훨씬 커
속도가 한결 빠른 것 같았다. 상금붕은 뱃머리에 서서 소리쳤다.

"맥(麥)소방주, 은 낭자가 이곳에 있으니 그녀의 체면을 생각해
줘야 되잖겠소?"

거경선 선창 안에서 이내 황의 청년이 뛰쳐나와 냉소를 날렸다.

"육지에서는 당신네들 천응방이 엄지손가락이지만, 물에서는 우
리 거경방을 꼽아야 하오. 그런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뱃길마저
천응방에게 양보해야 한단 말이오?!"

장취산은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강면이 이렇게 넓어 수백 척의 배도 한꺼번에 통과할 수 있을
텐데, 왜 한사코 길을 비키라고 고집하는지..... 천응방도 너무
경우가 없군."

이때 거경선에 또 하나의 돛대가 올려졌다. 자연히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삽시간에 쌍방의 거리가 멀어져 상금붕의 배가 도저히
쫓아갈 수 없게 되었다. 상금붕은 콧방귀를 날리더니 멀리 미끄
러져가는 배를 향해 소리쳤다.

"거경방..... 도룡도..... 그리고 도룡도가.....!"

바람이 거세고 쌍방의 간격이 멀리 떨어져 무슨 말인가 자세히
들리지 않았다. 거경방의 소방주는단지 도룡도라는 말만 어렴풋
이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되어
얼른 부하들을 시켜 배를 가까이 하라고 했다. 상금붕의 배는 곧
거경선을 쫓아올 수 있었다. 거경방의 소방주는 거리가 가까와지
자 소리 높여 물었다.

"상단주, 방금 뭐라고 했소이까?"

상금붕은 손짓을 해가며 외쳤다.

"맥 소방주...! 우리 현무단의 백단주가... 그 도룡도는... 그
러니까... 바로..."

장취산은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상금붕의 말이 중간에서 토막토
막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도 역시 무슨 말인지 한 마디도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이 사이에 거경선과 상금붕의 배는 더욱 가까와졌다. 상금붕이
갑자기 육 뻗한 닻을 지어 냅다 거경선을 향해 던졌다. ㅊ에 연결
된 쇠사슬에서 요란한 금속성이 들리며 곧이어 처절한 비명이 터
졌다. 상금붕이 던진 쇠닻에 거경선의 수수(水手)들이 크게 다쳤
다.

맥 소방주가 깜작 놀라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오?!"

상금붕은 아무 대꾸없이 또 하나의 육중한 쇠닻을 거경선으로
던졌다.

"으악!"

이번에는 한 수수의 머리 위에 쇠닻이 떨어져 두개골이 박살나
며 그 자리에서 숨졌다.

상금붕은 두 개의 쇠닻을 연거푸 던져 거경선의 수수 셋을 살상
기키고, 두 척의 배를 한꺼번에 묶어놓게 되었다. 맥 소방주는
즉시 뱃머리로 달려가 갑판에 꽃힌 쇠닻을 뽑으려 했다. 순간 상
금붕의 오른손이 떨쳐짐에 따라 사슬에 연결된 커다란 수작 덩어
리가 거경선으로 날아갔다.

펑!

그 커다란 수박 덩어리가 정확히 거경선 돛대에 적중되었다. 장
취산은 비로소 그 커다란 수박이 상금붕의 무기라는 사실을 알았
다. 순전히 강철로 만든 그것은 짙은 녹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그려 있어 언뜻 보아 영락없는 수박이었다. 그 쇠수박은 모두 한
쌍으로서 사슬로 연결되어 있어 유성추(流星錘)와도 같았다. 단
지 유성추보다 무게가 훨씬 무거워 최소한 쇠수박 하나에 오십
근이 넘어갈 것 같았다. 놀랄만한 팔힘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그
무기를 사용할 수 없었다.

상금붕이 두 개의 쇠수박을 번갈아 던지며 거경선의 돛대를 강
타하자 곧 우지끈 하는 소리가 들리며 그 굵은 돛대가 두 동강이
로 부러졌다. 거경선의 사람들은 자지러지게 놀라며 비명을 질렀
다.

상금붕은 이번에는 두 개의 쇠수박을 동시에 날려 뒤쪽 돛대를
강타했다. 후미의 돛대는 약해 단 일격에 박살이 났다. 이때, 쌍
방의 간격은 이 장 남짓에 불과했다. 맥 소방주는 두 개의 돛대
가 부러지는 것을 빤히 지켜보면서도 속수무책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목청을 높여 욕을 퍼붓는 게 고작이었다.

상금붕은 한바탕 위력을 괴사하고 나서 싸늘하게 소리쳤다.

"천응교가 이곳에 있는 한 물에서도 너의 거경방이 멋대로 행동
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가 오른팔을 떨치자 쇠수박이 다시 예리한 파공음을 대동한
채 날아갔다. 이번에 그가 노린 것은 뱃전이었다.

꽝!

뱃전 한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강물이 용솟음쳐 들어갔다. 수
수들은 다시 소리를 지르며 혼란을 빚었다.

맥 소방주는 분수아미자(分水峨眉刺)를 뽑아 움켜쥐고는 발끝으
로 살짝 갑판을 찍자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라 곧장 상금붕의 뱃
머리로 덮쳐갔다. 상금붕은 그의 몸이 가장 높이 치솟아 오른 순
간에 왼손의 쇠수박을 정면으로 날렸다. 이 일격은 실로 악랄했
다. 쇠수박이 날아왔을 즈음 맥 소방주의 몸은 떨어지는 순간이
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허공에서 진기를 끌어올려 신법을 변화
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내심아뿔싸를 토하며 한 쌍의
아미자로 쇠수박을 맞이했다. 그는 본디 아미자로 쇠수박을 찍어
그 힘을 빌려 신법을 다시 구사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미
자가 쇠수박에 닿는 순간 엄청난 반탄지력에 가슴팍이 빠개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순간 그는 눈앞이 캄캄해지며 뒤로 밀려
쿵하고 거경선 갑판위에 떨어졌다.

상금붕이 쉬지 않고 쌍과(雙瓜)를 떨쳐내자 삽시간에 대여 섯
군데나 큰 구멍이 뚫렸다. 이어 닻줄을 힘껏 끌어당기자 우지끈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거경선의 갑판이 갈라지기 시작했
다. 천응교의 수수들은 상금붕의 분부가 떨어지기도 전에 닻을
올려 앞을 향해 배를 전속력으로 몰았다.

장취산은 상금붕이 거경선을 격파시킨 위세를 직접 지켜보며 내
심 흠칫했다. 만약 스승님으로부터 차력어력지법(借力御力之法)
을 배우지 않았다면, 그의 일장을 맞아 벌써 등골이 부러졌을 것
이다. 상금붕은 비단 무공만 뛰어날 뿐 아니라 심계가 깊고 수단
이 악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취산이 은소소를 살펴보니, 그녀는 이와 유사한 일을 많이 겪
어 대수롭지 않은 듯 그저 태연자약했다. 이때, 천둥치는 듯한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전당강의 야조(夜潮)가 밀어 닥칠 시
간이 된 모양이다. 거경방의 수수들은 비록 모두 헤엄 솜씨까 뛰
어 났지만, 지금은 강과 바다가 이어지는 지점에 이르러 강변의
폭이 수십리로 넓어졌다. 게다가 야조가 밀려오자 모두들 살려달
라고 소리쳤다.

상금붕과 은소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동쪽으로 배를 몰았
다. 장취산이 뒤쪽을 바라보니 그 거경선은 거의 절반 가량이 침
몰되어, 이제 곧 조수가 밀려오면 영락없이 박살나고 말 것이었
다. 그의 귓전에는 살려달라는 처절한 아비규환이 계속 들려왔
다. 실로 안타까왔다. 그러나 은소소와 상금붕은 모두 악랄한 무
리들이라 도와주라고 청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입술을 굳게
다문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소소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빙긋이 웃더니 이내 소리 높여 외
쳤다.

"상단주! 우리의 귀빈이신 장오협께서 대자비를 베풀길 원하시
니, 어서 거경선의 녀석들을 구해 주세요!"

장취산으로선 실로 뜻밖이었다.

앞쪽에서 상금붕의 대답이 들려왔다.

"귀빈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그는 뱃머리를 돌리게 하여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곧이어 상
금붕의 외침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거경방의 애들은 잘 들어라! 무당파의 장오협께서 너희들의 목
숨을 구해 주라는 분부가 계셨다. 살고 싶으면 어서 헤엄쳐 오
라!"

거경방의 부하들은 즉시 물살을 따라 하류로 헤엄쳐 왔다. 상금
붕도 배를 역류로 하여 밀고 올라가 조수 속에 묻혀 있는 맥 소
방주를 비롯해 이십여 명을 구해 주었다. 하지만 팔 구 명은 어
쩔 수 없이 거센 조수에 묻혀 익사하거나 실종되었다.

장취산은 마치 무거운 짐을 덜어놓은 기분이었다.

"낭자, 고맙소."

은소소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거경방은 살인을 일삼는 무리들이예요. 오늘 살아난 녀석치고
손에 피비린내를 묻히지 않은 자가 없어요. 그런데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들을 구해 줬죠?"

장취산은 망연자실하며 대답할 말을 잃었다. 거경방은 수상(水
上) 사대 악방 중의 하나로서, 그 악명이 드높다는 것을 장취산
도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따금한 맛을 보여 주어도 부족할 텐데, 오늘 오히려 그들
을 구해 준 것이다.

은소소는 곁눈질로 그의 표정을 읽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흥! 만약 그들을 구해 주지 않았다면 장오협께선 속으로 또 욕
하셨겠죠? <젊은 계집이 독사처럼 악랄하군. 애당초 독상을 치료
해 주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하고 투덜거리며 후회 막급했
겠죠?!"

그녀는 족집게처럼 장취산의 마음을 꿰뚫어보았다.

장취산은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낭자와 입씨름을 벌이고 싶진 않소. 저들을 구한 것은 낭자 스
스로 공덕을 쌓은 것이니,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소."

이때 천둥치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동시에 장취산과 은소소
를 태운 배가 파도에 실려 허공으로 높이 떠올랐다. 장취산이 창
밖을 보니 수십 길이 되는 거센 파도가 온 천지를 집어삼킬 듯
밀어닥치고 있었다. 거경방의 사람들을 배에 태우지 않았다면 지
금쯤 모두 물귀신이 되었을 것이다.

은소소는 뒤편 선창으로 들어가 잠시 후 여장으로 갈아입고 나
왔다. 그녀는 장취산에게 자포를 벗으라는 손짓을 했다. 장취산
은 더 이상 거절하기도 쑥스러워 장포를 벗어 주었다. 은소소가
헤진 데를 기워 줄 것으로만 생각했다. 한데 뜻밖에도 그녀가 조
금 전에 입었던 남장을 던져 주며 갈아입으라고 하느 게 아닌가!

장취산은 어쩔 수 없이 은소소의 남장으로 갈아입었다. 장취산
은 그녀보다 몸집이 훨씬 컸지만 장포가 워낙 헐렁하여 벌로 불
편함이없었다. 장취산은 한 갈래의 담담한 유향(幽香)을 느끼며
가슴에 야릇한 파문이 일었다.

그는 감히 은소소에게 시선을 주지 못하고 멀쑥하니 앉아, 일부
러 선창 벽판에 있는 그림을 감상하는 척했다. 그러나 가슴 속에
거센 회오리가 일어 도무지 그림이 뇌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은
소소가 지금 어떠한 표정, 어떠한 생각으로 자기를 쳐다보고 있
는지 알 수 없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때 갑자기 큰 파도가
밀려와 배가 기우뚱하더니 선창 안에 밝혀놓은 촛불이 꺼졌다.
장취산으 더욱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젊은 남녀가 어두운 선창 안에 단 둘이 앉아 있으면 은낭자의
청명(淸名)에 누를 끼칠 수도 있지.....'

장취산은 곧 선창 문을 밀고 후미로 나가 사공이 익숙한 솜씨로
노를 젓는 것을 지켜보았다. 파도의 성난 포효가 뱃전에 부서졌
다. 하지만 그 거센 파도도 그의 상념을 지워비릴 수 없었다.

반 시진 남짓 지났을까, 위로 용솟음쳐 밀려오던 조수도 이젠
바다 쪽을 향해 되돌아가며 물살이 잔잔해졌다. 순풍의 돛단배는
물살 따라 쏜살같이 미끄러져 갔다.

동녘 하늘에 동이 틀 무렵, 배는 왕반산도에 접근했다. 왕반산
도는 전당강이 시작되는 동해(東海)에 위치한 황량한 작은 섬이
었다. 섬에는 깎아지른 듯한 기암산석(奇岩山石)이 군데군데 솟
아 있을 뿐 사람이 살지는 않았다. 두 척의 배가 섬 남쪽으로 접
근해 가자 섬에서 호각소리가 길게 여운을 끌며 들려왔다. 이어
연안에 두 사람이 제각기 거대한 깃발을 흔들어 신호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배가 차츰 육지와 가까와질수록 깃발마다 거대한 독수리가 수놓
아져 있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날개를 활짝 펼친 독수리
는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아 살아서 움직이듯 위풍당당했다.

두 깃발 사이에 한 노인이 서 있었다. 곧 그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현무단 백구수(白龜壽)는 은 낭자께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의 외침소리는 도도한 물결인 양 허공에 메아리지면서 뚜렷하
게 들려왔다. 심후한 내력이 담긴 음성이었다. 삽시간에 배가 연
안에 닿았다. 백구수가 직접 널을 배에 연결시켰다.

은소소는 장취산을 앞장세워 연안에 발을 딛자 곧 백구수를 소
개 시켰다. 백구수는 은소소가 장취산을 대하는 정중한 태도에서
이미 감을 잡은 게 있었다. 이어 그가 무당칠협 중에 장오협이라
는 것을 듣자 안색이 약간 변했다.

"무당칠협의 대명을 일찌기 전해듣고 흠모해 왔는데, 오늘 이렇
게 만나보게 되어 실로 더없는 영광이외다."

장취산도 몇 마디 겸손의 말을 늘어놓았다.

한쪽에 서 있던 은소소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그들 사이에 기
어들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형식적으로 늘어놓지 말고 속 시원히 진심
을 털언 으세요. 한 사람은 속으로 <아뿔싸! 무당파의 사람도
왔구나! 도룡보도를 빼앗으려는 고수가 또 한 명 들어난 셈이
군.> 하고 중얼거렸을 거고, 또 한 사람은 <너희들같은 사파의
인물과 친분을 맺고 싶진 않다!>하고 내심 부르짖었을 게 아니겠
어요? 그러니 이제부터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솔직하게 털어
놓으세요!"

백구수는 호탕하게 웃었다. 장취산도 얼른 정색을 하고 말했다.

"백단주께서 격해전음(隔海傳音)을 전개한 심후한 내공에 대해
진심으로 탄복하는 바이오. 그리고 소생은 단지 은 낭자를 모시
고 구경만 하러 왔을 뿐 도룡도에 전혀 뜻이 없다는 걸 미리 밝
혀두는 바입니다."

은소소는 그의 이러한 말을 듣자 백합처럼 활짝 웃었다. 매우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백구수는 은소소의 차가운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지
껏 누구를 안중에 둔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장취산에게만은
태도가 판이하게 달랐다. 장취산이 그녀의 마음속에 상당한 비중
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이내 눈치챌 수 있었다. 게다가 장취산
이 자기의 내공을 칭찬해 주고 도룡도를 탐할 뜻이 없다는 걸 밝
히자 경계심을 완전히 풀었다.

"은 낭자, 해사파와 거경방, 신권문의 조무라기들이 벌써 당도
해 있습니다. 그리고 곤륜파의 두 젊은 검객도 와 있는데, 어찌
나 건방을 떠는지 눈꼴이 사나와 못 봐줄 지경이오. 우리 장오협
은 이렇게도 의젓하고 겸허한데..... 그들과 비교하면 정말 하늘
과 땅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등 뒤에서 차가운 외침이 들려왔다.

"등 뒤에서 함부로 남을 모함해도 되는 겁니까?!"

이 외침과 함께 암석 되에서 두사람이 걸어나왔다. 그들은 모두
청색 장포를 입고 등에 비스듬히 장검을 메고 있었다. 나이는 이
십 대 후반으로 보이며, 눈동자를 날카롭게 굴리는 것으로 미루
어 성깔이 꽤나 있을 것 같았다.

백구수는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자, 이리 오시오. 내가 소개해 줄
테니까....."

곤륜파의 두 젊은 검객은 원래 한바탕 성질을 부릴 생각이었는
데, 불현듯 은솟의 빼어난 미모를 접하자 입이 딱 벌어지며 넋을
빼앗겼다. 한 사람은 아예 주위의 이목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
의 얼굴에 시선을 못박았고, 나머지 한 사람은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곁눈질로 그녀를 훔쳐보았다.

백구수는 은소소를 넋 잃고 쳐다보는 자를 기리키며,

"이쪽은 고칙성(高則成) 대협이고....." 하고 소개하더니 다시
그의 동료를 가리켰다.

"이쪽은 장도(蔣濤)라는 대검객이오. 두 분은 모두 곤륜파의 무
학 고수들로서 서역(西域)에 쟁쟁한 명성을 떨쳐온 걸로 믿어지
오. 이번에 무처럼 중원으로 들어왔으니, 틀림없이 곤륜의 비장
한 무학을 우리에게 보여 그 대명(大名)을 중원 천지에까지 드날
리게 될 것이오."

그의 이러한 말은 비고는 의미가 다분히 풍겼다.

장취산은 곤륜 제자들이 설령 당장 무력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말로써라도 반박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언중
유골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그저 홍야항야 하며고개를 끄덕일 뿐
이었다. 이상하다 느껴져 다시 그들의 표정을 살펴보자,비로소
납득이 가며 내심 웃음을 금치 못했다.

'곤륜파는 천하에 이름이 알려졌고 특히 검술에 일가견을 지녔
다고 들었는데, 문중 제자가 이렇게 실 없는 행동을 할 줄이
야....."

장취산은 내심 혀를 끌끌 내찼다. 백구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쪽은 무당파의 장취산 장상공이고, 이쪽은 은소소 은낭자,
이 분은 본교의 상금붕 상단주요."

그는 세 사람을 극히 간략하게 소개했다. 심지어 장취산을 장상
공으로 칭하며 장오협이란 보다 정확한 명칭도 생갹해 버렸다.
그것은 미치 장취산을 자기네 사람에 포함시켜 소개한 느낌마저
주었다. 은소소는 거기에 맞장구라도 치겠다는 듯이 장취산에게
추파를 던지며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띄었다.

고칙성은 은소소가 장취산에게 친근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자,
영문을 알 수 없는 노화가 치밀어 장취산을 한 차례 무섭게 노려
보았다. 이어 장도에게 냉랭한 말투로 말했다.

"장사제, 우리가 서역에 있을 때 무당파가 중원 무림에서는 그
래도 정파에 속한다고 들었는데....."

장도가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나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죠."

고칙성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런데,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맞군."

"아, 그래요? 하기야 강호의 소문은 십중팔구가 믿을 만한 게
못 되죠. 한데, 무당파가 어찌됐다는 겁니까?"

"명문 정파의 제자라면 어째서 사파의 인물과 어울려 다니겠는
가? 스스로 타락했다면 모르지만....."

두 사람은 한 마디씩 주거니 받거니 장단을 맞추며 장취산에게
화살을 겨냥했다. 그들은 은소소도 천응교의 인물이라는 것을 모
르고 있었다. 사교라 한 것은 백구수와 상금봉을 기리킨 말이었
다.

장취산은 그들이 공연히 시비를 걸어 오자 즉시 본떼를 모여 주
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자기는 단순히 삼사형을 가해한 흉수를
찾기 위해 이곳 왕반산도에 왔을 뿐이다. 게다가 상대방은 비록
자기보다 나이는 약간 위지만 중원 강호에 첫발을 갓 들여놓은
풋나기가 아닌가! 굳이 일시적인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들과
같은 부류가 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자기가 천응교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만은 확실히 밝히고 싶었다. 그리하여 담담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도 두 분 형씨와 마찬가지로 천응교와 이 몇몇 분과는 초면
일 뿐이요."

이 말을 들은 주위 사람들은 모두 안색이 약간씩 변했다. 천응
교의 두 단주는 그가 은소소와 두터운 정분을 맺고 있는 걸로 알
았는데, 알고 보니 역시 초면이었다. 은소소는 내심 분노가 치밀
었다. 장취산의 이 말은 천응교를 멸시하는 뜻이 다분히 내포되
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곤륜파의 제자들은 서로 마주 보며 냉소를 띄었다. 그들
은 공통된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겁장이 같은 녀석, 우리 곤룬파의 명성을 듣고 벌써부터 우리
를 두려워하는군.'

백구수는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얼른 나섰다.

"여러 귀빈들께서 다 당도했는데, 단지 거경방의 소방주만 빠진
것 같구료. 그를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 같소. 모두들
마음 내키는 대로 섬을 구경하시다가 정오 무렵에 저쪽 골짜기에
모이도록 하시오. 푸짐한 술상을 마련해 놓을 테니, 즐겁게 한
잔씩 마시며 보도의 위력을 구경해 봅시다."

상금붕이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거경방의 맥 소방주는 이곳가지 오는 도중 배가 침몰되는 바람
에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장상공이 사람을 시켜 구해 주었소.
지금 선창안에 있으니 나중에 술좌석에 모시도록 합시다."

장취산은 천응교의 두 단주가 자기에게 깍듯이 대하는 것과, 은
소소의 은근한 눈길이 부담스러워 될 수 있는 한 그들을 멀리하
기로 작심했다.

"소제는 혼자서 섬 안을 거닐 생각이니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대답도 듣지 않고 돋 동쪽 숲이 우거지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겨 놓았다.

왕반산도는 작은 섬이었다. 산석과 수목도 별로 빼어난 데가 없
었다. 섬 동남족에 십여 척의 돛단배가 정박돼 있는 것이 보였
다. 아마 거경방, 해사파 사람들이 타고 온 배인 모양이다.

장취산은 해변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은소소의 잔
인한 수단과 무엇이든 자기 멋대로 하려는 것에 대하여 심히 못
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녀의 생각이 계속 뇌리
를 맴돌며 덜쳐버리려고 하면 할수록 그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확대됐다.

'그 은 낭자는 천응교에서 상당히 존귀한 위치에 있는 것 같은
데..... 상금붕과 백구수가 그녀를 마치 공주대하듯 하지만, 분
명 교주는 아닌 것 같다. 대관절 그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의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천응교가 이 섬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룡도를 구경시키는 것
은 자파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속셈이다. 상대방 해사파와 신권
문, 거경방은 모두 핵심인물을 보내온 데 반해 천응교는 단지 두
단주를 내세워 이 일을 주관케 했다. 이것만 보아도 그들이 상대
방을 전혀 안중에 두고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현무단
백단주의 기파(氣派)로 보아 무공이 주작단 상단주보다 한 수 위
인 것 같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천응교는 이미 무림에서 막대
한 세력을 확보한 게 분명하다. 어쩌면 장차 무림의 큰 화근으로
부각될지도 모르니, 오늘 이 기회에 그들의 정체를 파악해 둘 필
요가 있다. 장차 우리 무당파와도적대 관계가 될 테니까.....'

장취산이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홀연 숲 밖에서
무기가 서로 부딪치는 금속성이 들려왔다. 그는 은근히 호기심이
생겨 금속성이 들려오는 쪽으로 접근해 갔다. 과연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곳에서 곤륜파의 두 검객이 제각기 장검을 쥔 채 검술
연습을 하고 있었고, 그 옆에 은소소가 만면에 화사한 웃음을 띄
우고 지켜보고 있었다.

장취산은 선뜻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스승님께서는 곤륜파의 검술이 독특한 일면이 있다고 가끔 말
씀하셨다. 그 어르신네도 젊으셨을 때 검성(劍聖)이라 불리워지
는 곤륜과 겨룬 경험이 있다고 하셨는데, 이번 기회에 견식을 넓
히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얼른 고개를 내둘렀다. 무림인은 무
공 연마를 엿보는 것을 금기로 삼고 있었다. 장취산은 그 사실을
떠올리며 곧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한데 은소소가 어느새 그를
발견했는지 손짓을 하며 소리쳤다.

"장가가, 이리 오세요!"

그녀는 가장 친근한 칭호로 바꾸어 불렀다.

장취산이 만약 이대로 돌아선다면, 오히려 연검을 엿보았다는
오해를 사게 될 것이다.

"두 분 형씨께서 검법을 연마하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린 방해하
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갑시다."

은소소가 뭐라고 대답히기도 전에 백광(白光)이 번뜩이며 나직
한 신음이 들려왔다. 알고 보니 장도가 전개한 일검이 고칙성의
왼팔에 적중되어 선혈이 쏟아졌다.

이것을 본 장취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장도가 실수
한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생각이 사실과 다르다는 게
이내 드러났다. 고칙성은 냉소를 날리며 안색이 붉그락 푸르락해
지더니 연거푸 전광석화같이 삼검(三劍)을 전개했다. 이 삼검은
신랄할 뿐 아니라 뜻밖에도 모두 장도의 급소를 노렸다. 장취산
은 두 사람이 검법을 연마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진자로 싸움을 벌
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소소가 생긋생긋 웃으며 한 마디 내뱉었다.

"이제 보니 사형이 사제만큼 실력이 뛰어나지 못하군요. 장대협
의 검법은 정말 멋져요!"

고칙성은 이 말을 듣자 이를아굴며 몸을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백장비폭(百丈飛瀑)이란 초식을 전개해 성난 독수리처럼 덮쳐내
렸다.

장취산은 절로 갈채를 보냈다.

"훌륭한 검법이오!"

장도는 황급히 뒤로 피하려 했다. 그러나 고칙성은 중도에서 검
초를 변화시켜 짤막한 기합과 함께 장도의 왼쪽 허벅지에 일검을
찍었다. 그 즉시 은소소가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알고보니 사형도 대단하군요. 장대협은 이제 패배를 시인해야
겠군요."

장도는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냉랭하게 말했다.

"아직 승부가 나지 않았소이다!"

그는 대뜸 검초를 변화기켜 비스듬히 검끝을 떨치며 우중비화
(雨中飛花)의 검법을 구사했다. 이 검법은 실초(實招)보다 허초
(虛招)가 많아 상대방으로 하여금 허허실실을 종잡지 못하게 했
다. 하지만 고칙성은 이 본문 검법에 대해 손바닥보듯 잘 알고
있어, 일사천리로 분쇄시키며 빈틈을 정확히 간파해 여지없이 반
격을 가했다.

장도는 오기가 뻗쳐 도중에서 검법을 임의로 변화시켜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든 후에 여러 군데 상처를 입혔다. 삽시간에 이들은
얼굴, 팔, 가슴, 어깨, 허벅지 등에 상처를 입어 비록 급소는 아
니지만 입고 있던 옷이 붉게 물들어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 사형제간의 싸움은 치열해져 나중에는 목
숨까지 걸고 생사투를 벌이는 것 같았다. 은소소는 옆에서 계속
이간질을 했다. 때로는 고칙성을 칭찬하고 때로는 장도에게 갈채
를 보냈다. 두 사람은 그녀의 충동질에 말려들어, 단숨에 상대방
을 스러뜨려 그녀의 칭찬과 환심을 독차지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것 같았다.

장취산은 어이가 없었다. 은소소는 조금 전에 그들 사형제가 천
응교를 멸시한 언사를 했기 때문에 앙갚음을 하고 있는게 분명했
다. 이 상태로 사움이 계속된다면 어느 한쪽이 죽기 전에는 싸움
이 중단될 것 같지않았다. 두 사람의 검법은 비록 정묘(精妙)한
게 사실이지만, 변화가 명확하지 못하고 내력의 뒷받침도 부족해
원래 검법이 지니고 있는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은소소는 손뼉을 치며 매우 재미있어 했다.

"장가가, 곤륜 검법이 어떻다고 생각하세요?"

그녀는 계속 싸움을 지켜보며 불쑥 질문을 던졌는데, 한참을 기
다려도 장취산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 절로 고개를 돌렸다. 순
간, 장취산이 눈쌀을 찌푸린 채 얼굴에 혐오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자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아무리 지켜봐도 더 이상 신통한게 없군요. 우리 저쪽으로 가
서 해변 풍경이나 감상해요."

이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장취산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에서 따스한 기운이 젼해져 오자 장취산은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는 은소소가 곤륜 제자들을 격노시키기
위해 일부러 이러는지 알면서도, 선뜻 그녀의 손을 뿌리 칠수가
없어 그녀가 이끄는 대로 해변으로 향했다. 은소소는 일망무변
(一望無邊)의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잠시 깊은 사색에 잠겼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장자(莊子) 추수편(秋水篇)에 이런 말이 있어요. <천하지수(天
下之水) 막대어해(莫大於海) 만천귀지(萬川歸之) 부지하시지이불
영(不知何時止而不盈)>... 하늘 아래 물은 바다보다 더 넓은 것
이 없고 온갖 물줄기에 합쳐지니, 언제 멈출 것이며 언제 넘칠
건지 알 길이 없도다..... 그런데 바다는 조금도 우쭐대지 않고
이렇게 말했데요. <오재어천지지간(五在於天地之間) 유소석소목
지재대산야(猶小石小木之在大山也)>... 즉, 내가 하늘과 땅 사이
에 있는 것은 작은 돌과 작은 나무가 튼 산에 있는 것과 같다고
했대요. 그런 넓은 흉금을 지닌 장자니까 후인의 존경을 받게 된
것이겠죠?"

장취산은 그녀가 곤륜 제자들을 이간질시켜 혈투를 벌이게 만들
고는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었다. 한데,
그녀가 갑자기 이런 감상적인 말을 하자 절로 멍해졌다.

장자는 도가(道家)에서 수심(修心)을 쌓는데 꼭 읽어야 할 책이
므로 장삼봉은 늘 제자들에게 강해(講解)를 해주었다. 그런데 살
인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이 은소소의 입에서 갑자기 이런
고상한 말이 흘러나왔으니, 장취산으로선 뜻밖이 아닐 수 없었
다.

장취산은 잠시 멍해져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소. <부천리지원(부천리지원) 부족이거기대(不足以擧其大)
천장지고(千丈之高) 부족이기심(不足以其深)>이라 하듯이 진리인
들 그의 큰뜻에 비견될 수 없고, 천 길 높이인들 그의 깊음에 따
르지 못하겠죠."

은소소는 그가 <장자, 추수편>으로 상답(相答)하여 얼굴에 존경
과 흠모의 표정이 역력히 지어지는 것을 보고 이내 짚이는 바가
있었다.

"당신은 지금 스승님을 생각하고 계시죠?"

장취산은 이 물음에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다른 손을
덥석 잡았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소!"

장취산이 무당에서 사형들과 <장자, 추수편>을 함께 읽을 때 유
대암이 이렇게 말한 것이 있었다.

"우리들이 스승님으로부터 할예를 배우고 있지만, 배울수록 스
승님과 차이가 많이 벌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장자 추수
편의 망망대해로만이 그 어르신네의 고심막측, 무궁무진한 학식
과 무공을 비유해야 옳을 겁니다."

당신 송원교와 장취산 등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었
다. 지금, 은소소와 함께 <장자, 추수편>을 상답하면서 자연히
스승님을 떠올린 것이다.

은소소는 깜찍하게 말했다.

"당신의 그 진지한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어요. <천리지원부족
이거기대>라 함은 당금 무림에서 장삼봉 진인을 제외하고 또 누
가 있겠어요."

장취산은 심히 기뻐했다.

"낭자는 정말 총명하구료."

그는 너무나 감격한 상태에서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의 손을 잡
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황급히 손을 풀며 얼굴을 붉혔다.

은소소는 정감어린눈망울로 그를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영사의 무학이 도대체 어느 정도로 출신입화(出神入化)한지 좀
들려줄 수 있어요?"

장취산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무학은 그 어르신네가 지니고 계신 극히 일부분의 학문에 불과
하오. 그 심오하고 광대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료
....."

은소소는 엉뚱하면서도 깜찍한 일면을 갖고 있어, 장취산이 좋
아하는 방향으로 자꾸만 화제를 끌고 갔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갯바위에 걸터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
기꽃을 피웠다.

어느덧 해가 중천으로 자리바꿈을 했다. 홀연 멀리서 육중한 발
자국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헛기침과 한 사람의 낭랑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장상공, 은 낭자, 정오가 됐으니 어서 주연에 참석하시오!"

장취산이 고개를 돌려 보니, 상금붕이 십여 장쯤 떨어진 곳에
서있는 게 보였다. 그의 표정은 비록 정중했지만 입가에 묘한 미
소가 얼룩져 있었다. 흡사 자상한 윗사람이 젊은 한 쌍의 정인
(情人)을 지긋한 눈길로 쳐다보는 것 같았다. 은소소는 줄곧 그
를 아랫사람 대하듯 교만을 부렸지만, 이 순간만큼은 양볼이 도
화빛으로 물들어 수줍어하며 고개를 숙였다. 장취산은 하늘을 우
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지만, 두 사람의 신색을 보자 덩달아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졌다.

상금붕은 곧 몸을 돌려 앞장 서 걷기 시작했다.

은소소는 속삭이듯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먼저 갈 테니 바싹 뒤따라오진 마세요."

장취산은 다시 멍해졌다.

'이 낭자가 왜 갑자기 수즙음을 타게 됐지.....'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은소소는 걸음을 재촉해 상금붕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장취산은 그들의 마모습을 바라보며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들의 모습이 수목 뒤로 사라지자 비로소
천천한 걸음을 옮겨 골짜기 쪽으로 향했다.

골짜기 안으로 들어거자 잔디가 깔린 넓은 공지에 이미 칠 팔
개의 상이 놓여져 있었다. 제일 상좌로 꼽는 동쪽 탁상을 제외하
고 거의 모든 상이 꽉 차 있었다.

상금붕은 그가 나타난 것을 보자 우렁찬 음성으로 외쳤다.

"무당파의 장오협께서 당도했습니다!"

그의 외침이 골짝기에 찌렁찌렁 울려퍼졌다.

그는 곧 백구수와 함께 성큼성큼 장취산을 맞이해 갔다. 그들의
뒤에는 제각기 다섯 명의 타주(舵主)들아 따랐다. 열두 명은 골
짜기 입구에 이르러 양쪽으로 갈라서며 공손히 몸을 굽혔다. 그
리고 백구수가 정중하게 말했다.

"천응교 은 교주의 부하 현무단 백구수와 주작단 상금붕이, 장
오협의 왕림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은소소는 비록 그들과 함께 골짜기 입구로 영접나오지 않았지만
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장취산은 <은 교주>라는 세 글자를 듣는 순간 대뜸 가슴에 와닿
는 것이 있었다.

'음... 생각했던 대로 교주의 성이 은(殷)이었군.'

그는 곧 공수의 답례를 취했다.

"보잘것 없는 소생을 이렇게 영접해 주니 송구스러울 따름입니
다."

그는 걸음을 옮겨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면서 주위를 보니, 모두
분연한 표정을 하고 있어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별로 개의
치 않았다.

그는 한 가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앞서
해서파, 거경방, 신권문의 수뇌 인물이 나타났을 때는 천응교가
단지 타주 한 사람을 내세워 맞이했을 뿐이다. 지금 장취산을 영
접한 분위기와는 천양지차가 있었다. 해사파등이 멸시당한 느낌
에 분연함을 금치 못하는 게 당연했다.

백구수는 장취산을 동쪽 제일 상좌의 제일 상석으로 안내했다.
장취산은 얼른 사양했다.

"소생은 무림 후진으로서 감히 이 상좌에 앉을 수 없습니다."

백구수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무당파는 당금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이며 장오협은 천하
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데, 이 자리를 사양하면 누가 감히 앉겠습
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로 옆 탁상에 앉아 있던 고칙성과
장도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장도가 홀연 자기의 의자를 허
공으로 던졌다. 그 의자는 허공을 가로질러 백구수가 장취산에게
권하는 좌석 바로 옆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마치 원래부터 그 자
리에 놓여 있었던 것처럼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웬만한 사람
이 흉내낼 수 없는 솜씨였다.

장도가 의자를 던져내자 고칙성이 곧 거만하게 소리쳤다.

"흐흐... 태산북두라고.....? 누가 받드는 태산북두인지 모르겠
군! 장가가 감히 앉을 용기가 없다면 우리 형제가 대신 앉겠소이
다!"

두 사람은 질퐁처럼 신법을 펼쳐 의자 옆으로 달려왔다.

얼마전에, 은소소는 그들 두 사람을 불러 누구의 무공이 더 높
냐고 물으며 곤륜파의 검법을 구경해 보고 싶다고 이간질의 포석
을 깔았었다. 두 사람은 전혀 망설임이 없이 서로 검법을 펼쳐
보였다. 처음에는 단지 상대방을 눌러 자신을 돋보이게 할 심산
이었으나, 갈수록 은소소의 충동질에 말려 결국 생사투로 발전된
것이다. 나중에 은소소가 장취산과 다정히 손을 잡고 떠나가자
비로소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검을 거두고 서
로 상처를 치료해 주며, 감히 은소소에게 분풀이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가 엉뚱한 장취산에게 분노와 질투의 화살을 던졌다.
지금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장취산을 망신시키
려 하는 것이다. 이때 상금붕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잠깐만!"

한편, 장취산은 그들과 싸울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두 분이 여기에 나란히 앉으면 어울릴 것이오. 나는 다른 자리
를 찾아 보겠소."

그는 상대방의 반응도 기다리지 않고 앞으로 걸어나가자 은소소
가 갑자기 그에게 손짓을 하며 소리쳤다.

"장가가! 이쪽으로 오세요!"

장취산은 그녀가 자기에게 할 말이 있는 것으로 알고 곧 다가갔
다. 그런데 은소소는 의자 하나를 끌어당겨 자기 옆에 붙이며 미
소를 머금고 말했다.

"여기 앉으세요."

장취산은 그녀가 군호들 앞에서 이렇게 거리낌없이 친근하게 하
는 것이 너무 뜻밖인지라 엉거주춤했다. 그녀와 나란히 앉자니
너무 친밀한 느낌을 줄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외면하면 은소소
의 자존심이 손상될 게 뻔했다.

은소소는 얼른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장취산은 그녀의 표정이 진지해서 거절할 수 없었다. 그가 자리
에 앉자, 은소소는 다시 만면에 미소를 띄고 그에게 술을 권했
다.

한편, 구칙성과 장도는 비록 상석을 차지했지만, 이러한 광경을
보자 더욱 울화통이 터졌다.

백구수는 소매로 의자의 먼지를 털 듯 몇번 쓸더니 웃으며 말
했다.

"곤륜파의 대검객들께서 상좌에 앉을 자격이 있다고 자부하니
어서 앉으십시오."

말을 끝낸 그는 상금붕, 열 명의 타주들과 함께 자기네 좌석으
로 돌아가 앉았다. 고칙성과 장도는 장취산이 죽이고 싶도록 미
웠다.

'겁장이 녀석, 자리를 빼앗기고서도 싸울 생각을 하지 않으니
우리 곤륜파의 위풍에 단단히 눌린 모양이군.....'

둘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거침없이 의자에 앉았다.

순간 -----

우지끈!

폭삭!

의자 다리가 절단되면서 두 사람은 일제히 뒤로 벌렁 나자빠졌
다. 다행히도 엉덩방아를 찧지 않고 적시에 손으로 땅을 짚어 일
어나긴 했지만 낭패스럽기 이를데 없었다. 주위에 있는 군호는
모두 홍소를 터뜨렸다.

장도와 고칙성은 조금 전에 백구수가 소매로 의자를 닦는 척하
며 꾸민 수작임을 빤히 알면서도, 감히 따지지를 못했다. 자기네
들 실력으로선 도저히 이 음력(陰力)을 당해 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본문 검술에 대해 상당히 자부하
며, 천응교를 하찮은 사교로 여겨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왕반산도에서 안하무인격으로 거드름을 피웠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백구수가 펼친 상승무공을 보자 예기(銳氣)가 크게
꺾였다.

이때 백구수의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곤륜파의 무학이 대단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왜
그 죄없는 의자를 박살내 가면서 과시하려는지 모르겠구료. 솔직
히 말해 그 정도의 공력쯤은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을 것이오."

여기까지 말한 그는 뒤쪽에 앉아 있는 타주 열 명에게 외쳤다.

"너희들도 가능한지 한 번 해보아라!"

다음 순간, 우지끈 하는 소리가 연달아 요란하게 들리며 의자
열 개가 박살났다. 열 명의 타주는 미리 준비된 상태에서 행동을
취한 것이므로 의자를 박살내고도 만면에 웃음을 띄고 태연한 자
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곤륜 제자의 낭패한 모습과
는 극히 대조적이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백구수가 일부러 그들을 망신주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광경이 재미있고도 우스워 절로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웃음바다를 이룬 가운데 천응교의 두 타주
가 제각기 커다란 바윗돌을 들고 상좌 앞으로 걸어가, 그 박살난
의자를 걷어차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무 의자는 너무 약해 두 분의 귀하신 몸을 감당해 내지 못한
것 같으니, 이 바위에 앉도록 하십시오."

두 사람은 천응교에서 가장 힘이 좋다고 알려진 대역사(大力士)
였다. 비록 무공은 평범하지만 타고난 신력(神力)을 지녔다. 지
금 들고 있는 바윗돌은 최소한 사백 근은 넘을 것이었다. 그들은
이 바윗돌을 고칙성과 장도에게 건네주려 했다. 장도와 고칙성은
비록 검법에 조예가 있기는 했지만 이 거대한 바윗돌을 받을 재
간이 만무했다.

고칙성은 눈쌀을 찌푸렸다.

"어서 내려놓으시오!"

그러나 두 대역사는 일제히 기합을 토하며 바윗돌을 번쩍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자, 받으시오!"

이렇게 되자 고칙성과 장도는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사백
근이 넘는 바위 덩어리가 날아오면 영락없이 변을 당하게 될 것
이었다.

이때 백구수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곤륜 검객들이 상석을 굳이 사양하시겠다니, 역시 장상공께서
앉는 것이 어울릴 것 같소."

장취산은 은소소 곁에 앉아 그녀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유향(幽
香)에 취해 무지개빛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을 즈음, 홀연 백구수
의 외침을 듣자 흩어진 마음을 얼른 바로잡았다.

'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마(魔)의 수렁으로 빠져들어선 아니
된다. 이 마녀의 달콤한 속삭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나갔다.

백구수는 상금붕이 장취산의 무공을 칭찬하는 것을 들었지만 직
접 보지 못해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었다. 하여, 바윗돌을 높이
쳐들고 있는 두 타주에게 눈짓을 보냈다. 두 타주는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장취산이 가까이 오자 일제히 외쳤다.

"장상공, 조심해서 받으시오!"

대갈일성과 함께 무릎을 굽혔다 펴며 두 개의 바윗돌을 동시에
장취산의 머리 위로 던져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이 아슬아
슬한 광경을 보자 절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백구수는 본디
장취산의 무공을 시험해 보고 싶었을 뿐 절대 악의가 없었다. 그
런데 두 타주가 이렇게 거침없이 바윗돌을 머리 위로 던져내린
것은 뜻밖이라 내심 아뿔싸를 토했다. 장취산은 명문 제자로서
물론 바윗돌에 깔려 부상을 당하게 될 리는 없겠지만, 창졸간에
몸을 피하면서 낭패한 꼴을 보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장취
산의 원망을 사게 될 뿐 아니라 은소소의 비위를 건드리게 될 것
이 분명했다.

한편, 장취산은 거대한 바윗돌이 떨어져내리자 처음엔 흠칫 놀
랐다. 만약 몸을 피한다면 곤륜 제자와 같은 꼴이 되어 사문의
위명을 손상시킬 것이었다. 그는 자세히 생각을 굴릴 겨를이 없
었다. 무공이 어느 경지에 달한 사람이 만약 긴박한 순간을 당하
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적절한 대응수를 펼치게 되기 마
련이다.

장취산은 반사적으로 왼손으로서 무(武) 자결을 펼쳐 왼쪽에서
떨어지는 바윗돌을 겨냥하고, 오른손으론 도(刀) 자결을 꼽아 오
른쪽으로 떨어져내려 오는 바윗돌을 받았다. 두 개의 바윗돌은
자체의 무게만 해도 사백 근이 넘는데다가 허공으로 던져져 다시
가속으로 떨어지니 그 무게는 엄청났다. 장취산의 힘으로 그 무
게를 감당해 내기란 벅찼다. 하지만 장삼풍으로부터 새로 배운
이십사자신공은 실로 신기한 묘미를 지니고 있었다. 알다시피 무
당파의 무공은 외적인 힘을 빌려 바윗돌의 방향을 살짝 변화시킨
것뿐이었다. 그리고 손이 소매 속에 가려져, 다른 사람이 보기에
는 흡사 소매로 바윗돌을 허공으로 던져낸 것 같았다.

두 개의 바윗돌이 떨어져 내리자 장취산은 표연히 몸을 솟구쳐
비교적 높이 떠오른 바윗돌 위에 사뿐히 주저앉았다. 다음 순간,
쿵하는 소리와 함께 첫 번째 바윗돌이 땅에 떨어져 절반 이상이
움푹 땅 속에 패이며 잇따라 두 번째 바윗돌이 첫 번째 바윗돌
위에 떨어져 불꽃이 튕겼다.

장취산은 태연하게 바윗돌 위에 앉아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말
했다.

"두 분 타주의 신력(神力)은 정말 대단하군요."

두 타주는 놀란 나머지 눈이 황소 불알만하게 휘둥그래져 한 마
디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삽시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골짜기
안이 조용해졌다. 잠시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에야 우뢰 같
은 갈채가 터졌다.

은소소는 백구수에게 눈을 곱게 흘기며 활짝 웃었다. 백구수도
내심 기뻐했다. 하마터면 자기가 실술르 저지를 뻔했는데, 장취
산의 놀라운 무공으로 인해 오히려 은 낭자의 환심을 사게 된 것
이다. 하여, 얼른 장취산에게 다가가 술을 가득 따르며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오래 전부터 무당칠협의 명성을 들어 왔는데, 오늘 장오협의
무공에 완전히 탄복했소. 자, 존경의 뜻으로 한 잔 올리겠습니
다."

그는 단숨에 술을 비워 버렸고, 장취산도 겸허한 말과 함께 잔
을 비웠다. 좌중은 장취산과 무당칠협에 관한 얘기로 잠시 술렁
거렸다.

좌중의 분위가가 가라앉자 백구수가 정색을 하고 낭랑하게 말했
다.

"본교는 최근에 보도 한 자루를 얻었는데, 도룡도라고 하오. 일
설에 무림지존 도룡보도 호령천하 막감불종이란 말이 있소!"

여기서 그는 말끝을 멈칫하며 좌중을 훑어보았다. 그는 몸집이
크지 않았지만 음성이 우렁차고 눈빛이 칼날처럼 에리해, 좌중을
압도하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본교의 은교주께서는 본디 천하의 영웅들을 모두 천응산(天應
山)으로 모셔 보도의 진면목을 보일 계획이었으나 사정상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소. 그대신 본교가 보도를 얻었다는 사실을
천하에 알리기 위해 가까운 강남 각 방파의 여러 친구분들을 이
자리에 모시게 된 것이외다."

여기까지 말한 그가 손을 흔들어 보이자, 여덟 명의 제자가 일
제히 몸을 숙여 인사를 올리더니 서쪽에 선려 있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그들이 보도를 꺼내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
런데, 여덟 명의 제자가 다시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는 모두 웃
통을 벗어 버린 체 커다란 철로(鐵爐)를 들고 나오는 게 아닌가!
철로에서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불꽃이 높이 솟는 가운
데 여덟 명은 철 "에 연결된 긴 철주(鐵柱)를 어깨에 메고 영차
영차 소리를 지르며 공터 한북판에 철로를 내려놓았다. 사람들은
И로에서 뻗어오는 화끈한 열이 쇠를 달구어 두드릴 때 받침쇠로
쓰는 육중한 철침을 들고 나왔으며, 다른 두 사람은 제각기 큰
쇠망치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백구수가 다시 낭랑한 음성으로 외쳤다.

"상단주, 칼의 위력을 보여 주십시오!"

상금붕은 알았노라고 대답하고 나서 곧 몸을 돌려 분부를 내렸
다.

"칼을 갖고 오라!"

조금 전에 바윗돌을 집어 던졌던 두 타주가 동굴 안으로 들어가
더니, 한 사람은 황색 비단에 싼 길쭉한 물건을 들고 한 사람은
그 물건을 호위하는 양 당당한 걸음으로 걸어나왔다. 그 타주는
비단에 싸인 물건을 상금붕에게 건네주고 좌우 양쪽으로 갈라섰
다.

상금붕이 황색 비단을 풀자 한 자루의 단도가 드러났다. 그는
단도를 높이 쳐들고 사람들을 한차례 둘러보더니 날렵하게 칼을
뽑았다.

"이것이 바로 무림지존 도룡보도이니 자세히 보십시오!"

두 손으로 단도를 높이 받쳐든 그의 표정이 매우 숙연했다.

군호들은 도룡보도의 이름은 들었지만, 거무죽죽한 것이 별로
신통한 데가 없는 것 같아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게 정말 도룡보도란 말인가.....?"

상금붕은 칼을 조심스럽게 좌측에 서 있는 타주에게 건네 주었
다.

"쇠망치로 시험해 보여라!"

타주는 단도를 받아 받침쇠 위에 올려놓으며 칼날을위로 세웠
다. 다른 한 타주가 쇠망치를 들어 올려 힘껏 칼날을 내리쳤다.

팍!

다음 순간, 쇠망치의 묵직한 머릿 부분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군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단금절옥(斷金切玉)의 보검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알
고 있었다. 그 중 그그소수는 그러한 보검을 직접 보았을지도 모
른다. 하지만 망치머리를 두부 베듯 하며, 심지어 금속성조차 내
지 않는 보도(寶刀)가 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혹시 자기가 잘못 본 게 아닐까 하는 의혹을 느꼈다. 아니면 천
응교가 속임수를 쓴 것이라 생각되기도 했다. 곧 신궈눈과 거경
방에서 제각기 한 사람이 나와 그 반쪽으로 쪼개진 망치머리를
주워 유심히 살폈다. 방금 쪼개진 것이 틀림없었다. 타주는 그들
에게 다시 확인이라도 시키듯, 지켜보는 앞에서 다른 쇠망치로
살짝 칼날을 내리쳤다.

팍!

결과는 앞서와 마찬가지였다.

그제서야 군호들의 박수갈채가 터졌다. 장취산도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보도는 정말 듣지도 보지도 못했는데.....'

상금붕이 보도를 들고 상보벽산(上步劈山)의 초식을 전개하자,
그 육중한 받침쇠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

이번에는 다시 주위에 있는 십여 그루의 굵은 소나무를 겨냥해
잽싸게 보도를 내리쳤다. 그가 원을 한 바퀴 그리며 다시 제자리
로 돌아올 때까지 소나무들은 멀쩡했다. 군호들이 이해가 가지
않아 눈쌀을 찌푸리는 순간, 상금붕이 소매를 가볍게 떨쳐냈다.
거기에 따라 십여 그루의 소나무가 차례로 뒤쪽을 향해 쓰러졌
다. 상금붕이 앞서 원을 그리며 보도를 떨쳐냈을 때 임 베어져
있었던 것이다. 단지 칼날이 너무 예리하고 상금붕이 전개한 균
형있는 힘과 순간적인 쾌속(快速)으로 인해 위아래가 멀쩡하게
붙어 있었던 것뿐이다. 나중에 소매로 장풍을 뻗쳐내자 비로소
쓰러진 것이다. 상금붕은 광소를 터뜨리며 손을 살짝 떨쳐, 이번
에는 도룡보도를 그 지글지글 타오르는 커다란 화로 속에 던져
버렸다.

이때 멀리서 우지끈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흡사 멀리서
도 누가 나무를 쓰러뜨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백구수와 상금붕은 모두 흠칫 하며 그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
보았다. 순간 그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도저히 눈으로는 믿을
수 없었다. 해변에 정박되어 있는 배의 돛대가 연달아 꺾여지고
있는 게 아닌가! 돛대 위에는 모두 깃발이 걸려 있었다. 천응교,
거경방, 해사파, 신권문 모두는 자기네 깃발이 걸려 있는 돛대가
차례로 꺾여지는 것을 보자 소스라치게 놀라, 제각기 부하들을
시켜 달려가 원인을 알아오라고 했다.

펑!

꽝! 쿵!

요란한 소리가 계속 들리는 가운데 삽시간에 돛대란 돛대는 모
조리 박살나 버렸다. 흡사 바다 속에서 갑자기 괴물이 나타나 한
바탕 소란을 피우고 있는 것 같았다. 골짜기에 모인 군호들은 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아연실색하여 입이 딱 벌어져 한동안 아무 말
도 하지 못했다. 처음에 군호들은 천응교의 음모라고 생각했는
데, 천응교의 배도 조난을 당했으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앞서 해변으로 달려갔던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자 다시 십여 명
이 달려갔다. 해변과 골짜기의 거리는 별로 멀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두 번째로 달려간 사람들도 돌아오지 않았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마주 보며 불안한
기색이 짙어갔다.

백구수가 한 타주에게 분부했다.

"네가 직접 가봐라!"

타주는 즉시 대답을 하고 달려갔다. 백구수는 억지로 태연한 척
하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아마 바다에 무슨 연고가 생긴 모양인데 염려할 것 없소이다.
설령 배가 디 침몰된다 해도 뗏목을 만들어 돌아갈 수도 있을 테
니, 자, 한 잔씩 건배합시다."

군호들은 내심 불안했으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연약한 모습을
보리고 싶지 않아 일제히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술잔을 입
에 갖다 대기도 전에 해변 쪽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백구수와 상금붕은 그 비명을 지른 자가 바로 방금 떠난 타주라
는 것을 알고 이내 표정이 굳어갔다.

이때 한 사람이 비칠거리며 달려오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 자가 차츰 가까이 달려옴에 따라 사람들은 비로소 한 혈인(血
人)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조금 전에 떠났던 그 타주
였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며 손가락 새에서 계속 선
혈이 흘러내렸다. 자세히 보니 두피가 찢어졌고 가슴과 등, 허벅
지, 팔뚝, 옷이 갈기갈기 찢겨져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그는 울부짖듯 소리쳤다.

"금모사왕(金毛獅王)! 금모사왕!"

백구수는 눈꼬리를 세우며 물었다.

"사자가 나타났단 말이냐?"

정말 사자가 나타났다면 오히려 안심이 됐다. 한데, 타주는 세
차게 고개를 내둘렀다.

"아니오! 사람이오! 모두 그에게 긁혀 죽었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백구수는 더 이상 태연한 척할 수 없었다.

"내가 가보겠소."

상금붕도 앞으로 나섰다.

"나도 함께 가겠소."

백구수는 그를 만류했다.

"상단주는 은 낭자를 보호하시오."

그는 상대방이 예사 고수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수 있
었다.

상금붕은 그의 만류를 받아들였다.

"알았소."

이때 갑자기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콜록..... 금모사왕은 이미 이곳에 와 있다!"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순간, 고목 뒤에서 한 사람이 느릿하
게 걸어나왔다. 이 자의 몸집은 철탑처럼 우람하고 어깨까지 헝
클어져 내려온 머리카락은 황금빛이며, 파란 눈과 손에는 열 다
섯 자 가량되는 양두랑아봉(兩頭狼牙棒)을 쥐고 있었다. 불쑥 나
타나 군호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그의 모습은 흡사 천신천장(天神
天將) 같았다.

장취산은 내심 생각을 굴렸다.

'금모사왕이라.....? 아마 머리카락이 사자처럼 황금빛을 띤 것
에서 유래된 외호인 것 같은데 누구일까? 스승님에게 들어본 적
이 없는데.....'

백구수는 앞으로 몇 걸음 나서서 형식적이나마 포권의 예를 취
했다.

"귀하의 존성대명을 밝혀줄 수 있겠소?"

천신 같은 사나이는 생각보다 훨씬 의젓하게 말했다.

"나의 성은 사(謝)라하며 이름은 외자로서 손(遜)이오. 내 꼬락
서니를 보아서 알겠지만 외호가 금모사왕이라 하외다."

백구수는 그의 말투가 정중한 것을 듣자 다소 안심이 되었다.

"사 선생이시군요. 한데, 귀하는 우리와 금시초면이거늘, 어째
섬에 나타나자마자 배를 파괴하고 살인을 행하였소?"

사손은 히죽 웃었다. 하지만 그의 가지런한 이빨에서 빛이 반짝
였다.

"여러분들은무슨 일로 이것에 모였소?"

백구수는 그를 속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무
공이 제아무리 고강해도 단신 홀몸이다. 상금붕과 힘을 합치고
다시 장취산과 은낭자의 도움을 받으면 능히 제거할수 있을 것이
라 믿었다.

백구수는 곧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 천응교는 근래 한 자루의 보도를 얻게 되어, 그 위력을
강호 여러 친구들과 같이 음미하기 위해 이곳에 모인 것이오."

사손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그 철로 석에서 열화(烈火)에 달구
어지고 있는 도룡도를 뚫어지게 주시하더니 곧 성큼성큼 다가갔
다.

상금붕은 그가 칼을 잡으려는 것을 보자 즉시 일갈을 토했다.

"잠깐!"

사손은 고개를 돌려 당당하게 웃었다.

"왜 그러시오?"

상금붕은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으나 말투는 예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 칼은 본교의 소유이니 사 친구가 구경하는 것은 좋지만 손
을 대진 마시오."

"이 칼을 당신네들이 만들었소? 아니면 돈을 주고 사왔소?"

사손이 다시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당신네들도 남의 손에서 빼앗아 왔으니, 내가 다시 당신네들
손에서 빼앗아 가는 것은 지극히 공평하고 당연한 일이 아니겠
소?"

이렇게 말하며 몸을 돌려 다시 맨손으로 칼을 집으려 했다. 순
간,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상금붕이 허리에서 그 한쌍의 철과(鐵
瓜)를 풀었다.

"사 친구. 손을 거두지 않으면 나도 더 이상 예의로 대할수 없
을 것이오!"

그는 경고하는 투로 말을 내뱉었지만, 사실은 왼손의 철과를 이
미 사손의 등마루를 향해 떨쳐냈다. 악랄한 기습이었다. 하지만
사손은 아예 고개도 돌리지 않고 랑아봉을 자연스럽게 뒤쪽으로
떨쳐냈다.

창!

날아오던 철과는 랑아봉에 맞부딪치자 더욱 빠른 속도로 뒤를
향해 튕겨져 나갔다. 상금붕은 소스라치게 놀라 황급히 오른손의
철과를 떨쳐냈다. 이번에든 두 개의 철과가 허공에서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상금붕은 앞서 튕겨져 오는 철과를 충분히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사손의
신력(神力)은 그의 상상르 훨씬 초월하여 쌍과가 허공에서 부딪
치며 동시에 상금붕의 가슴으로 날아온 것이다.

팍!

으악!

쌍과가 가슴에 적중된 상금붕은 그 엄청난 충격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 가슴뼈가 모조리 으스러진 채 횡사하고
말았다. 전당강에서 거경방의 소방주를 샹대해서는 그렇게도 위
풍당당하던 그가, 사손의 일격도 받아내지 못하고 영원히 불귀의
객이 된 것이다.

주작단의 다섯 타주는 대경실색하며 달려와, 둘은 상금붕을 부
축해 일으키고 나버지 셋으 칼을 뽑아 목숨따위는 도외사한 체
사손에게 덮쳐갔다. 사손은 이미 왼손으로 도룡도를 움켜쥐었다.
그런데도 그의 손은 멀쩡하였다.그는 오른손에 쥐고 있는 랑아봉
으로 그 육중한 화로를 살짝 긁어올리자, 수백 근이나 되는 철로
가 허공으로 붕 떠올라 타주 세 명을 동시에 압시시켰다. 화로는
계속 앞으로 굴러가, 상금붕의 시체를 부축하고 있는 두 타주마
저 깔아 뭉갰다.다섯 타주와 상금붕의 시체에 모두 불씨가 떨어
져 옷이 일제히 타 올랐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혼비백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취산은 강호에서 활동해 오면서 많은 고수들과 대면했지만,
사손 같이 초인적인 신력과 무공을 지닌 자는 보지 못했다. 그는
자기가 도저히 사손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설령
대사형과 이사형이라 해도 그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스승님께
서 직접 하산하신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그를 꺾지
못할 것이다.

사손이 맨손으로 도룡도를 맑 채 손가락으로 살짝 도신(刀身)을
튕기자, 금속성이 아닌 묵직한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퍼졌다.

그는 스스로 턱을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음..... 무성무색(無聲無色)이라, 과연 보도로군....."

그는 한쪽 탁자 위에 칼집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대뜸 백
구수에게 명령투로 말했다.

"저것이 도룡도의 칼집인 것 같은데 이리 갖고 오라!"

좀전의 점잖은 말투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백구수는 오늘 도저
히 살아서 돌아갈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당하게 맞섰
다.

"죽이려면 어서 죽여라! 하지만 칼집은 내줄 수 없다!"

"흐흐... 제법 배짱이 좋구나! 천응교에 과연 인물다운 자가 몇
명 있는 모양이구나!"

이렇게 말하며 다짜고짜 도룡도를 백구수에게 던졌다.

백구수는 감히 정면 대결을 벌일 엄두를 내지 못하고 황급히 옆
으로 피했다. 순간, 날아오던 도룡도가 비스듬히 방향을 틀며 탁
자 위에 놓여 있는 칼집 속으로 정확히 파고들어갔다. 워낙엄청
난 힘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칼집에 꽂히고서도 도룡도는 계속
허공으로 날아갔다. 사손의 우람한 몸이 허공에 번뜩인 것은바
로 그때였다.

착!

그는 도룡도를 나꿔채 허공에서 한 차례 곤두박질하며 사쁜히
제자리에 떨어졌다. 그가 방금 전개한 칼집을 탈취하는 수법과
신법은 실로 불가사의 할 정도였다.

그는 군호를 한 차례 훑고 나서 목청을 높여 외쳤다.

"이 도룡도를 내가 갖고 가겠다! 불만 있는 자가 있느냐!"

그가 연거푸 두 번씩이나 물었지만 감히 찍소리 하는 자가 없었
다.

홀연 해사파 석상에서 한 사람이 일어났다.

"사 선배님은 덕망이 높고 사해(四海)에 명성을 떨치고 있으니,
그 도룡도를 차지하는 게 당연합니다. 우리 모두 쌍수를 들어 찬
성합니다."

사손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네가 바로 해사파의 총타주 원광파(元廣波)냐?"

"그렇습니다."

원광파는 상대방이 자기의 이름을 알고 있자 한편으로는 기뻐하
고, 한편으로는 당황했다.

사손은 그에게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너는 나의 사부가 누구이며, 어느 문파인지, 그리고 내가 무슨
훌륭한 일을 했는지 알고 있느냐?"

원광파는 우물쭈물했다.

"저..... 사 선배님은....."

사실 그는 쥐뿔도 아는 게 없었다.

사손이 다시 냉랭하게 말했다.

"그것도 모르면서 나더러 덕망이 높다느니, 사해에 명성을 떨친
다고 멋대로 지껄일 수가 있느냐? 난 아첨하는 녀석을 가장 싫어
한다. 네놈이 바로 그런 놈이야! 원광파, 이리 와 봐라!"

맨 나중에 내뱉은 한 마디는 청천벽력 같았다.

원광파는 감히 거역할 수없어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앞으로 걸어
갔으나, 벌써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사손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너희 해사파의 무공은 형편없다. 단지 독염으로 사람을 해칠
뿐이다. 작년에 여요(餘姚)에서 장등운(張燈運)일가를 죽였고,
이번 달 초순에 설부련이 해문(海門)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그
게 모두 너희들이 한 짓이지?"

원광파의 눈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그가 생각하기로는 쥐
도 새도 모르게 일을 해치웠는데, 사손이 어떻게 알았을까?

사손이 갑자기 음성을 높였다.

"너희 부하더러 독염 두 사발을 갖고 오라고 해라. 독염이 어떻
게 생겼는지 구경 좀 해봐야겠다."

해사파의 사람들은 모두 독염을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 원광파
는 감히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부하들을 시켜 독염을 두 사
발 담아 갖고 오게 했다. 사손은 그 중 한 사발을 집어 냄새를
맡아 보더니 엉뚱한 제의를 했다.

"우리 서로 한 사발씩 먹자!"

그는 랑아봉을 힘껏 땅에 찍어 꽂고 나서, 다짜고짜 원광파의
뒷덜미를 잡아 우악스럽게 턱주가리를 잡아당겼다.

삐걱!

그의 턱주가리가 관절에서 벗어나 축 늘어져 입을 다물 수 없게
됐다. 그러자 사손은 독염 한 사발을 몽땅 그의 뱃속에다 쏟아넣
었다. 여요에서 장등운 일가가 하룻밤 사이에 멸문지화를 당한
것과 해문에서 설부련이 객점에서 기습을 받아 목숨을 잃은 사건
은 근래 무림의 이대(二大) 수수께끼였다. 그들은 모두 정파의
인물인데 뜻밖에도 해사파에 의해 독살된 것임이 밝혀졌다.

장취산은 사손이 독염을 원광파의 입 안에다가 쏟아넣는 것을
지켜보며 통쾌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한데 사손은 독염이 가득
들어 있는 또 하나의 사발을 집어들었다.

"나 사손은 매사에 공정을 기한다. 네가 한 사발을 먹었으니 나
도 한 사발을 먹겠다."

그는 즉시 입을 크게 벌려 독염 한 사발을 모조리 털어 넣었다.
이것은 실로 뜻밖의 일이었다.

장취산은 그의 행동이 비록 거칠고 악랄하지만 양미간에 정기
(正氣)가 서려 있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게다가 그가 죽인
것은 모두 흉악무도한 무리들이므로 자뭇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사손이 스스로 독염을 먹는 것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소리
쳤다.

"사 선배님! 어서 해독단을 복용하십시오!"

사손은 대뜸 고개를 돌려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장취산은 입
가에 담담한 미소를 띄운 채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사손은 냉랭하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후배는 무당파의 장취산입니다."

"음..... 네가 바로 무당의 장오협이군. 너도 도룡도를 쟁탈하
기 위해 이곳에 왔느냐?"

"후배는 삼사형이 부상을 당하게 된 원인을 캐기 위해 왔을 뿐
입니다. 만약 사 선배님께서 그 내막을 아시면 자세히 들려 주십
시오."

사손이 대답하기도 전에 원광파가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땅에
서 데굴데굴 딩굴더니 곧 달팽이처럼 몸이 움츠려진 채 시체로
변했다.

장취산이 다시 소리쳤다.

"사 선배님, 어서 해약을 복용해야 될 겁니다!"

사손은 코웃음을 쳤다.

"해약은 무슨 얼어 죽을 해약이냐? 술을 갖고 오라!"

천응교의 손님을 접대하던 졸개 하나가 얼른 술단지를 갖다 주
었다. 사손은 술단지를 받쳐놓고 꿀꺽꿀꺽 들이켰다. 약 이십 근
이나 되는 독주를 단숨에 바닥낸 그는 불룩해진 배를 몇 번 쓰다
듬더니 갑자기 입을 벌려 한 줄기의 술줄기를 뿜어냈다. 그 주전
(酒箭)은 전광석화 같이 백구수의 몸으로 날아갔다. 백구수는 아
예 몸을 피할 겨를도 없었다. 그는 백 근이 넘는 쇠뭉치로 온몸
을 얻어 맞은 듯 심한 충격에 신음과 함께 몸을 뒤틀더니, 그 자
리에 기절해 버렸다.

사손은 다시 고개를 돌려 허공을 향해 술화살을 뿜어냈다. 그
술화살은 순식간에 빗발치듯 거경방 사람들의 몸에 뿌려졌다. 방
주인 맥경(麥鯨)을 위시해 모두들 비 맞은 생쥐처럼 축축하게 젖
었다. 그들은 비릿한 냄새에 역겨움을 견디지 못해, 공력이 약한
자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알고 보니, 사손은 술로서 뱃속에 있는 독염을 말끔히 씻어 다
시 내력으로 뿜어낸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뿜어낸 것은 모두
독주(毒酒)였다.

거경방주 맥경은 이런 모욕을 당하자 발끈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나 감히 대적을 하지 못하고 다시 의자에 주저 앉
았다.

사손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맥 방주, 오월 중순께 넌 민강(悶江)에서 원양 어선 한 척을
턴 일이 있느냐?"

맥경의 안색이 이내 잿빛으로 변했다.

"그..... 그렇소만....."

"너는 바다에서 해적 노릇을 생업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일을
문제삼진 않겠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십여 명의 상인을 모조리
바다속에 쳐놓은 것도 그런대로 용서하겠다. 하지만 일곱 명의
부녀자를 잔인한 방법으로 윤간하여 죽인 것은 천벌을 받아 마땅
하지 않겠느냐?"

"그건..... 그건..... 제자들이 한 짓이지 나하고는..... 관계
가 없소!"

"흐흐..... 이제 와서 변명하기엔 너무 늦었다. 내 손에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맥경은 도저히 요행을 바랄 수 없다고 판단해 대뜸 칼을 뽑아쥐
고 성난 야수처럼 그에게 덮쳐갔다.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에 공세가 용맹했다. 그러나 상대는 그와의 공력 차가 너무
나도 현저했다. 사손은 여유있게 옆으로 미끄러지면서 그의 등을
강타했다.

빠드득!

맥경은 자신의 등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 자리에 떨
어져 뼈없는 해삼처럼 축 늘어졌다.

"으윽.....!"

고통스러운 신음이 그의 벌어진 입을 통해 새어나왔다. 거경방
의 제자 셋이 그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허사였다.

사손이 칼집에 들어 있는 도룡도를 허공에 떨치는 순간,

"으악!"

"앗!"

"으으악.....!"

단말마의 비명이 줄을 이으며 모두들 두개골이 박살나 피를 흘
리며 쓰러졌다. 이제 더 이상 감히 덤비는 자가 없었다.

사손은 축 늘어져 있는 맥경에게 다가갔다.

"네놈은 원래 물 속에서 활개를 쳐왔기 때문에 이대로 죽기가
억울하겠지? 그러니 기회를 한 번 주겠다. 원래는 물속에 쳐박아
숨을 수지 않고 오래 버티면 살려 줄 생각이었는데, 이 자리에선
그럴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쓰겠다."

이렇게 말을 끝낸 그는 땅에서 진흙을 한 줌 집어 술을 쏟아 찐
득하게 버무려 찰싹 얼굴에다 붙였다. 이렇게 되자 맥경은 코와
입이 봉해져 숨을 쉴 수 없게 되었다. 중인은 이 광경이 우스꽝
스럽게 느껴졌으나 아무도 웃는 자가 없었다.

사손은 이번엔 신권문의 장문인 과삼권에게 걸어갔다. 과삼권은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신권문을 관장하면서 평생 배운 것이 권법뿐이니 몇수 가
르침을 받겠소!"

그는 사손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냅다 그의 아랫배를 향해 일
권을 뻗어내며 잇따라 이권을 떨쳐냈다. 강호에서 웬만한 사람은
그의 삼권을 받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과삼권(過三拳)이라 불리
게 됐으며, 그 별호가 널리 알려지는 바람에 그의 원래 이름을
기억하는 자가 별로 없었다.

사손은 그의 이권을 여유있게 와해시켰다. 과삼권은 상대방의
공력이 생각만큼 고강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대갈일성을 토했다.

"제삼권!"

그의 이 제삼권은 그럴싸한 명칭이 있었다.

----- 횡소천군 직추만마(橫掃千軍 直追萬馬) -----

바로 그가 평생동안 연마한 권법 중에 가장 위력있는 일초였다.
이 일초에 숱한 강호의 고수들이 패배의 쓴잔을 마셔야만 했다.

한편, 맥경은 눈알이 빨갛게 충혈되어 이마에서 구슬 같은 땀방
울이 흘러내렸다. 더 이상 숨을 안 쉬고는 견딜 수 없는 모양이
었다.

맥 소방주는 안타까움에 지켜볼 수가 없었다. 사손이 마침 과삼
권과 맞붙어 있는 것을 보고 번득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옆에 있는 여타주의 머리에서 은비녀를 뽑아 뾰족한 앞부분을 끊
어 부친의 입을 봉한 진흙을 겨냥해 튕겨내려했다. 물론 부친의
입 안을 상하게 할 우려가 없지도 않았지만, 진흙에 구멍이 뚫리
면 살아날 가망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모험을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었다.

그런데 그가 비녀 토막을 튕겨내는 순간, 사손이 잽싸게 작은
돌맹이 하나를 걷어찼다. 작은 돌맹이는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정확하게 그 비녀 토막에 적중되었다. 순간 비녀 토막이 급회전
하여 맥 소방주에게 날아갔다.

"으앗!"

처절한 비명이 터지는 가운데 맥 소방주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의 손은 이내 붉은 피로 물들여졌다. 비녀가 눈에 꽂힌 것이
다.

맥경이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진 뎃을 뜯어내려 하는데, 사손이
다시 돌맹이를 연거푸 걷어차 그의 양쪽 어깨를 적중시켰다. 맥
경은 좌우 어깨뼈가 으스러져 팔을 움직일 수 없게 됐다.

바로 이때 과삼권의 제삼권이 사손의 아랫배를 강타했다. 이 일
장의 기세는 풍뢰와 같았다. 과삼권은 상대방이 몸을 피하지 않
고 자기의 제삼장을 정면으로 받아드릴 줄이야, 실로 뜻밖이었
다. 그는 내심 기뻐했다. 하지만 그의 주먹이 사손의 배에 적중
되는 순간, 흡사 강철판을 강타한 듯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아뿔싸!

그가 심상치 않음을 알았을 땐 이미 늦었다. 어마어마한 반탄지
력에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벌렁 뒤로 나자빠져 생의 종지부
를 찍었다. 사손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맥경은 이미 눈을 하
얗게 치뜨고 죽어 있었다.

사손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 네놈들은 오늘에서야 당연한 죄값을 치른 것이
다!"

그는 갑자기 눈에서 광이 번쩍이더니 곤륜파의 두 검객을 노려
보았다. 고칙성와 장도는 그의 눈빛을 접하자 안색이 백짓장처럼
변했다. 그러나 분연히 검을 뽑아쥐고 역시 그를 노려 보았다.

장취산은 사손이 순식간에 사대방파의 수뇌를 죽이고 이어 곤륜
의 제자에게까지 살수를 전개하려는 것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났
다.

"사 선배님, 방금 죽인 몇몇 사람은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선배님이 만약 불문곡직하고 닥치는 대
로 계속 살수를 전개한다면, 저들과 드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사손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날렸다.

"뭐가 다를 게 있냐고? 흥! 있고 말고! 난 무공이 고강하고 그
들은 무공이 약하다. 약육강식, 그게 바로 다른 점이다!"

"사람과 짐승이 다르다는 것은 옳고 그릇됨을 판별할 능력이 있
기 때문입니다. 만약 힘을 앞세워 약한 자를 누르려 한다면 짐승
과 다를 바가 뭐 있겠습니까?"

사손은 다시 광소를 터뜨렸다.

"이 세상에 진짜 옳고 그릇됨이 뚜렷한 일이 어디 있느냐? 알다
시피, 지금은 몽고 오랑캐가 황제 보좌에 앉아 죽이고 싶은 만큼
우리 한인(漢人)을 죽이고 있는데, 그들이 언제 너에게 옳고 그
릇됨을 내세웠더냐? 그들은 한인의 재산을 빼앗고 싶으면 빼앗고
한인 아녀자를 겁탈하고 싶으면 거침없이 겁탈해 왔다. 한인이
거기에 대항하면 두말 않고 죽여 버린다. 어제 너에게 옳고 그릇
됨을 논한 적이 있더냐?"

장취산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몽고인의 잔안무도함을 가리켜 금수라고 하지 않습니
까? 뜻있는 자들이 힘을 합쳐 언젠가는 오랑캐를 몰아내고 강산
을 다시 되찾게 될 겁니다!"

"예전에 우리 한인도 옳고 그릇됨을 분별한 줄 아느냐? 악비(岳
飛)같은 대충신이 왜 몽고종(蒙高宗)에게 죽어야 했으며, 진회
(秦檜)같은 천고의 간신이 무엇 때문에 높은 벼슬에 올라 부귀영
화를 누려야 했느냐?"

"남송(南宋)의 여러 황제가 간신을 중용하고 충신을 살해했기
때문에 끝내 우리의 금수강산을 오랑캐 손에 넘겨 주게 된 것이
아닙니까? 나쁜 씨앗을 뿌렸기에 나쁜 결과를 거둔 것입니다.
즉, 옳고 그릇됨을 분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핫... 선유선보(善有善報) 악유악보(惡有惡報) 이 말이렸다.
흐흐... 당치도 않은 소리야! 네가 말해 보아라. 당금 무림에 정
말로 선유선보 악유악보가 성립된다고 생각하느냐?!"

장취산은문득 삼사형의 경우가 뇌리에 떠올랐다. 삼사형은 일
생 동안 선덕을 베풀어 왔는데 결국 지금의 상황은 선보와 거리
가 멀지 않던가!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의 풍운을 예측할 수 없듯이 인간사를 점치기도 어렵습니
다. 우리가 단지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의 원칙하에 최선
을 다한다면 마음의 편안할 겁니다. 그 결과가 복이 되든 화가
되든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사손은 고개를 절래절래 내둘렀다.

"소문에 듣기로 장삼봉 선생의 무공이 당세 으뜸이라기에 꼭 한
번 뵙고 싶었는데, 그의 제자인 네가 이다지도 생각하는 바가 고
리타분 하니 장삼봉도 별게 아닌 모양이다."

장취산은 그가 스승님을 모독하는 언사를 내뱉자 발끈했다.

"나의 은사께선 학예(學藝)가 천인(天人)이거늘, 어찌 당신과
같은 범부(凡夫)가 넘볼 수 있겠소!"

은소소는 얼른 그의 소매를 잡아끌며 참으라고 했다. 그러나 장
취산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대장부가 죽는 건 두렵지 않다. 하지만 스승님을 모독하는 것
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한데, 사손은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장삼봉 선생이 스스로 문파를 창시한 것으로 미루어, 필시 무
궁무진한것인 내가 영사만 못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겠지.
어쨌든 언젠가는 무당산으로 찾아가 한 수 가르침을 받을 날이
있을 것이다. 자, 그 전에 우선 네가 어떤 무공에 가장 자부심을
갖고 있는지 한 번 구경을 하고 싶다!"

드디어 그는 장취산에게 도전을 해온 것이다.

은소소는 사손이 장취산에게 도전을 해오자 경악을 금치 못했
다. 장취산의 무공도 물론 고강하지만, 사손과 격전을 벌인 자들
이 너나 할 것없이 모두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던가? 하
여, 장취산 역시 사손의 적수가 아님을 은소소는 누구보다 잘 아
고 있는 터라 얼른 나섰다.

"사 선배님, 도룡도는 이미 손아귀에 넣으셨는데 뭘 또 원하시
는 겨죠.....?"

사손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표정으로 뜻밖에 질문을 던져왔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이 도룡도에 관한 전설을 알고 있느냐?"

"말로만 들었을 뿐이예요."

"이 도룡도는 무림지존(武林之尊)으로서 일단 이 도를 소지한
자는 천하를 호령할 수 있다는데, 대관절 이 칼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이 무엇이길래....."

"저 역시 그 비밀을 알고 싶어하던 참이었어요. 선배님께서는
견문도 넓으시니 어디 한 번 말슴해 주세요."

"유감스럽지만, 나 역시 그 비밀을 모른다. 때문에 이제부터 조
용한 곳을 찾아가 그 비밀을 캐고자 한다."

"사 선배님같이 견식이 넓으신 분이라면 쉽사리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 줄로 믿어요."

"흐흐..... 물론 무공으로 따진다면 당금 무림에서 나를 능가하
는 사람이 극히 드물지. 하지만, 소림파의 장문인 공문(空聞)대
사와....."

그는 갑자기 말꼬리를 흐리면서 순간적으로 암울한 표정을 지었
다.

"..... 소림사의 공지(空智), 공성(空性) 두 분 대사, 무당파의
장삼봉 도장, 그리고 아미파와 곤륜파의 장문인 등등 한결같이
광세의 절학을 지니지 않으신 분이 또 어디 있겠느냐? 심지어 멀
리 서강에 있는 청해파와 명교의 좌우광명사자(左右光明使者)
들..... 흐흐, 모두가 일세(一世)를 호령할 수 있는 고수들이지.
그리고 낭자가 몸담고 있는 천응교의 백미응왕(白眉鷹王) 은 교
주도 나를 능가하는 광세의 고수지."

은소소는 즉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사손은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 만약 백미응왕 은 교주가 여기에 있었다면 난 절대로 오
지 않았을 것이다."

사손은 이어 장취산과 은소소를 번갈아 둘러보더니 장탄식을 토
했다.

"문무(文武)와 수려한 용모를 겸비한 너희들을 죽인다는 것은
마치 천하의 둘도 없는 진귀한 보물을 없애는 것과 같이 아까운
일이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죽이지 않을 수가 없구나!"

은소소는 등골이 오싹했다.

"상황이 어때서요?"

"흐흐..... 이 몸이 도룡도를 손아귀에 거머쥐었다는 사실이 세
상에 알려져 살신지화(殺身之禍)를 초래할 것을 미연에 방지하겠
다는 것이다!"

여지껏 듣고만 있던 장취산은 끓어오르는 분노로 인해 전신에
심한 경련이 일었다.

"살인멸구(殺人滅口)를 하겠다는 말이군요."

"그렇다. 흐흐....."

사손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죽어도 여한이 없게 하기 위해 우리가 서로 공평하게
무공을 겨룰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뿐만 아니라 너희들이 원하
는 방법에 따라 주겠네. 무기, 내공, 암기, 경공, 어느 것이든
좋다."

은소소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흥, 굉장히 자신만만 하시군요. 어떤 방법을 제시해도 다 상대
해 주시겠다니 말이예요."

그녀는 비록 당당하게 쏘아붙였으나 눈앞이 캄캄했다. 무공으로
사손을 제압한다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손은 냉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자신이 있다. 자 서론은 그만 두고 본론으로 들어가서 우
리 단판 승부로 승패를 결정짓기로 하자. 물론 너희들이 지면 자
결을 해야 한다."

은소소는 이마를 찌푸렸다.

"그럼 승패에 따라 당신도 자결하는 거겠죠?"

사손은 여유만만했다.

"흐흐..... 그 문제라면 아무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몸은 절대로
질 리가 없을 테니까."

"누가 또 알아요? 명문대가의 제자이신 장오협께서 당신을 제압
할 수 있는 무공 한 가지를 구비하고 있을지."

"그의 연륜으로 보아 제아무리 초절한 무공을 터득했다 해도,
공력만큼은 내 적수가 될 수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 상대가 안
된다는 거다."

장취산은 그들 두 사람이 입씨름을 하고 있는 동안 신속하게 머
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와 무승부라도 이룰 수 있는 무공이 없을까? 경공술? 아니,
새로 터득한 이십사자신공.....?'

다음 순간, 번개처럼 뇌리를 스쳐지나는 영기(靈杞)가 있었다.

"사 선배님께서 정히 저와 겨루시겠다면 하는 수 없죠. 하지만,
요행히도 제가 무승부를 이룬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손은 고개를 저었다.

"무승부는 있을 수 없다. 승부가 날 때까지 계속 겨루어야 하니
까."

"좋습니다. 그대신 제가 만약 선배님을 이기면 저의 부탁 한 가
지만 들어주시겠습니까?"

"알겠다. 그렇게 하마."

은소소는 크게 걱정되어 나직이 장취산에게 물었다.

"뭘 겨루겨는지 몰라도 자신 있으세요?"

장취산도 나직이 대답했다.

"지금으로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하는 수밖
에......"

"만약에 안 될 것 같으면 일찌감치 도망가기로 해요."

장취산은 씁쓸히 웃으며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내심 중얼거렸
다.

'배가 한 척도 남김없이 모두 파괴되었는데, 이 자그마한 섬에
서 도망가 봤자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는 곧 옷매무새를 바로 고치고 허리춤에서 쇠로 된 판관필을
뽑아 쥐었다.

사손은 약간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니, 너의 주무기인 호두구를 뽑지 않고 어찌하여 판관필을
꺼내는 거냐?"

장취산은 낭랑하게 웃었다.

"선배님과 무기를 겨루겠다는 것이 아니라 글로서 승부를 내고
자 함입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좌측 산봉우리 앞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바위 앞으로 걸어갔다.

다음 순간, 장취산은맑은 기합과 함께 온몸이 용수철에 튕기듯
허공을 솟구쳐 올랐다. 일 장(丈) 남짓 더 솟구쳐 오르는 동시
에, 손에 쥔 판관필로 바위에다 글을 새기기 시작했다.

"팍! 팍! 팍! 팍!......!"

암석이 깨져나가는 굉음이 들리는 가운데 순식가네 무(武)자를
새겼다. 한 글자를 새기고 나자 몸은 자연히 밑으로 가라앉기 시
작했다. 그는 번개처럼 은구(銀句)를 꺼내 바위 틈 바구니에 꽂
음으로서 몸을 지탱한 채 다시 림(林) 자를 새겼다. 무림(武林)
이라는 두 글자의 일필일획(一筆一劃)은 그야말로 용이 날고 봉
항이 춤추듯 웅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두 글자에 이어 지존(至
尊)이라는 두 글자도 새겼다. 그의 필속(筆速)은 갈수록 빨라지
면서 나중에는 속회가루가 허공을 난무하는 것만 보일 뿐 그의
형체마저 흐릿해졌다. 순식간에 스물 네 글자 중 봉(鋒)자의 마
지막 획을 마치고, 마치 솜털처럼 극히 경교(輕巧)한 신법으로
은소소 곁에 사뿐히 내려섰다.

사손은 바위에 새겨진 글을 주시했다.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있
던 그는 마침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대단한 필력(筆力)이군. 내가 졌다."

바위에 새겨진 스물 네 글자의 일획들은 장삼봉의 신령(神靈)이
깃들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필일획에 무당파의 가장 정묘(精
妙)한 무공을 가미시켰던 것이다. 장삼봉의 진전(進展)을 이어받
은 장취산이니 그 필력이 어찌 출신입화(出神入化)의 경지에 이
르니 않았겠는가?

사손은 거기가지 미처 생각지 못하고, 다만 눈앞에서 전개 되었
던 도룡보도(屠龍寶刀)의 쟁탈전으로 인해 장취산이 무림의 오래
된 전언(傳言)을 몇 자 적어 본 걸로만 알았다. 만약, 장취산으
로 하여금 다른 글을 암석에 세기라고 했더라면 그 필력의 경지
가 과연 지금 것만 했을까? 천만에 말이다. 아마 반도 따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은소소는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선배님께서 지셨으니 설마 딴소리를 하진 않겠죠?"

사손은 장취산을 넌지시 바라보며 말투가 좀전보다 부드러워졌
다.

"그래, 내게 부탁하고자 하는 일이 뭔가?"

"섬이 있는 모든 사람의 목숨을 살려달라는 겁니다. 그 대신 선
배님이 도룡도를 가져 갔다는 비밀은 절대 누설하지 않겠다고 다
짐을 받아가시면 죄지 않겠습니까?"

"흐흐..... 내가 다짐 따위만 받고 떠날 바보로 보이는가?"

은소소가 앙칼지게 끼어들었다.

"그럼 약속을 어기시겠단 말인가요?'

"흐흐..... 내가 어기겠다는데 누가 감히 뭐라 한단 말이냐?"

그러나 아무래도 경우에 어긋나는 것 같아 말머리를 돌렸다.

"물론 너희 두사람의 목숨만은 살려줄 수 있지. 그 밖의 사람은
절대로 안 된다."

장취산은 급히 말을 이었다.

"곤륜파의 두 검사는 명문대가의 제자로서 평생 악행(惡行) 한
번 저지른 적이 없는데....."

사손은 대뜸 말을 가로챘다.

"악행이고 선행이고 간에 나와는 상관 없으니, 너희들은 어서
옷자락을 찢어 귀를 틀어막고 두 손으로 귀를 꼭 누르고 있어라.
생사가 걸린 일이니 어서 서둘러라!"

행여나 누가 들을까 봐 음성은 극히 나직했다.

장취산과 은소소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급히 그의 말대로 귀를
틀어막았다.

다음 순간, 사손이 입을 크게 벌렸다. 무슨 장소(長嘯)를 토하
고 있는 듯 싶었다. 두 사람 "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나
돌연 약속이라도 한 듯이 온몸에 심한 경련이 일었다. 순간, 아!
천응교, 거경방, 해사파, 신권문 등 각 문파의 사람들은 하나같
이 입을 벌린 채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게 아닌가! 마치 온
몸에 심한 고문을 당하듯.....

순식간에 모든 문파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며 온몸을 뒤
틀며 몸부림쳤다. 일각이 지날 즈음에서야 사손은 입을 다물고
장소를 멈추었다.

장취산과 은소소는 비로소 귀를 틀어막은 헝겊을 뺐다. 사손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들은 내 사자후(獅子吼)에 모두 정신 착란증을 일으켜 다시
는 과거지사를 기억하지 못할 거다. 어떤가? 이만하면 자네의 부
탁대로 모두 살려준 셈이지?"

장취산은 소름이 오싹 끼쳤다.

'이건 죽이는 것보다 더욱 잔인하지 않은가?'

한편으로는 사손의 위력적인 사자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손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이제 그만 가세."

"어디로 가는 겁니까?"

"돌아가야 할 게 아닌가? 모든 일이 해결됐는데."

장취산과 은소소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힐끗 보며 똑같은
생각에 잠겼다.

'같은 배를 타고 가는 동안에 또 무슨 변고를 당할지.....'

이윽고, 그들은 섬 서쪽에 있는 한 작은 산 뒤에 도착했다. 돛
이 세 개 달린 배 한 척이 해변에 정박해 있었다. 사손은 배 가
까이 다가가더니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말하는 게 아닌가!

"먼저 승선을 하시지요."

실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은소소는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흥! 갑자기 왜 그렇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시죠?"

"내 배에 오른 손님인데 어찌 소홀함이 있을 수 있겠소?"

사손의 언동은 광인(狂人)처럼 시시각각으로 변해 실로 종잡을
수 없었다. 그들이 배에 오르자 사손은 즉시 배를 촐발 시키라고
손짓했다. 배에는 모두 열 일곱 명의 타수가 있었다. 그런데 타
(舵)를 잡고 있는 노인에게 명령을 내릴 때마다 사손은 시종 손
짓발짓만 할 뿐 벙어리처럼 한 마디도 내뱉지 않는게 아닌가!

은소소는 즉시 뭔가 알아차리고 비꼬듯이 한 마디 내뱉었다.

"귀머거리와 벙어리들만 골라서 배를 태우다니 정말 재주도 좋
군요."

사손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야 간단하지. 글을 모르는 타수들만 골라서 그들의 귀를 멀
게하고 다시 벙어리가 되는 아약(啞藥)을 먹이면 간단하게 되는
일 아닌가?"

사손의 잔인성에 장취산은 절로 치가 떨렸다. 배는 파도를 가르
며 미끄러지듯 바다로 항진했다.

장취산은 자신의 지금 처지가 너무 어처구니없다는 걸 절감했
다. 그도 그럴 것이, 강호 무림에서 그 누구도 감히 얕잡아보지
못한 무당칠협 중의 한 명인 그가 오늘날에 와서 남의 손에 의해
이리저리 조종되고 있으니 어찌 통탄할 노릇이 아니겠는가? 장취
산은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하고 울화가 치밀어 미칠 것만 같았
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장취산은 다소 마음이 가라앉으면
서 창 밖에 펼쳐 있는 망망대해를 바라보았다. 때마침 석양이 기
울면서 수면은 온통 황금빛 물결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순간 장
취산은 깜짝 놀랐다.

'아니, 석양이 왜 배의 후미로 기울지?'

그는 즉시 고개를 돌려 사손에게 물었다.

"혹시 방향을 잘못 잡으신 게 아니오? 배가 동쪽을 향하고 있습
니다."

사손은 알고 있다는 듯 침착하게 대꾸했다.

"천만에, 이 배는 처음붙 동쪽을 향하고 있었네."

이 말에 더욱 놀란 것은 은소소였다.

"동쪽이라면 망망대해뿐인데 대체 어디로 가겠다는 거예요? 어
서 뱃머리를 돌리라고 하세요."

"좀전에 그 섬에서도 말했듯이 이 도룡보도가 간직하고 있는 비
밀을 캐내기 위해 조용한 곳을 찾아가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러자면 망망대해에서 인적이 닿지 않는 작은 섬을찾아나설 수밖
에 더 있겠는가?"

"그럼 우선 우리를 중원으로 보내줘야 되잖아요?"

"흐흐..... 자네들이 중원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나의 행적이 금
방 누설될 게 아닌가?"

장취산은 벌떡 일어서며 다그쳤다.

"그렇다면 대관절 우리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오?"

"미안하지만 나와 함께 가야겠네."

"도룡보도의 비밀을 캐낼 때까지 말이오?"

"흐흐..... 그야 물론이지."

"평생이 걸리지도 모르지 않소?"

"그럼 평생도록 나와 함께 있어야지. 그러나 자네들은 아무 걱
정할 필요가 없을 걸세. 그곳에서 혼례를 올리고애를 낳고 오손
도손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을 테니까 말일세. 불쌍하고 고독
한 건 오로지 나뿐이지....."

"닥치지 못하겠소!"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장취산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한편 은소소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르고 있었
다. 우연치 않게 그녀의 표정을 읽게 된 장취산은 내심 뜨끔했
다. 은소소 같은 절세의 미모를 갖춘 여인과 오래 있다 보면 마
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손 같은 강적까지 목전에 두고 있는 급박한 상황이 아닌가? 그
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을 빠져 나가야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일단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사 선배님, 내 하늘을 두고 맹세컨데 절대로 선배님의 행적으
누설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장오협의 협명(俠名)은 일찌기 들어서 알고 있는 바일세. 하지
만 나도 스물 여덟 살 되던 해에 하늘을 두고 맹세한 적이 한 번
있었지. 이 손가락 좀 보게나."

그는 왼손을 내밀었다. 새끼손가락이 없었다. 사손은 암울하면
서도 옛 기억을 더듬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 해에 나는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있는 사람에게 속아 부
모님은 물론, 처잣기까지 모두 살해당했었지. 그로 인해 다시는
사람을 믿지 않기로 맹세한 것이네. 그리고 십 삼년이 흐르는 동
안 짐승을 믿었으면 믿었지. 절대로 사람은 믿지 않았네."

장취산은 비로소 사손이 정사(正邪) 군웅을 막론하고 모두 증오
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동정심
마저 일었다.

"그럼, 피맺힌 원한을 갚으셨습니까?"

"아직 갚지 못했네. 내 실력으로는 도무지 그의 적수가 될수 없
기 때문이네."

"네?"

장취산과 은소소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선배님보다 더 고강한 무공을 지닌 자가 누굽니까?"

"흐흐..... 내 자존심에 관한 일이라 말해 줄 수가 없네. 만약
에 피맺힌 원한만 아니었다면, 도룡보도를 탈취하려고 이 고생도
하지 않았을 걸세."

그는 말을 끝내는가 싶더니 장취산을 보며 다시 이어 나갔다.

"장소협, 내 자네를 처음 대면하는 순간부터 웬지 모르게 죽이
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네.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는 도룡보
도의 비밀이 밝혀지는 그 날 어쩔 수 없이 자네를 처치해야겠네.
그 때 가서 너무 나를 원망하지 말게나. 나는 기필코 원한을 갚
아야만 되니까..... 자, 이제 그만 자세."

말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오장육부마저 토해 버릴 것 같은 고
통과 절망에 찬 장탄식을 했다. 이윽고, 촛불이 꺼지면서 사위가
온통 칠흑 같은 어둠속에 파묻혔다. 간간이 파도 소리만 들려올
뿐.....

바닷바람이 제법 쌀쌀하게 불어닥쳤다. 은소소는 옷을 얇게 입
어 매서운 바닷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약간씩 움츠리는 것 같았
다. 이를 보다못한 장취산이 나직이 물었다.

"춥소?"

"괜찮아요."

장취산은 넌지시 장포를 벗었다.

"몸에 걸치고 있으면 한결 나을 거요."

은소소는 고마와 어쩔 줄을 몰랐다.

"당신도 추울 텐데....."

"나는 괜찮으니 어서 걸치도록 하시오."

은소소는 마지못해 장포를 받아들고 어깨에 걸쳤다. 장취산의
은은한 채취와 따스한 체온이 한꺼번에 가슴에 안겨오는 것 같았
다. 그녀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장취산은
오직 이곳을 빠져 나가야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이 궁리 저 궁
리 하다가, 결국 극단적인 결단을 내리기에 이르렸다.

'사손을 죽이지 않는 한, 절대로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사손은 잠이 깊이 들었는지 규칙적
으로 코를 골고 있었다.

'누구도 믿지 않는다는 그가 이렇듯 편안하게 잠을 청할 수 있
을까? 혹시 위장술이 아닐까? 다소 위험 부담이 있지만 지금으로
서는 모험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생각이 여기에 이른 장취산은 천천히 은소소에게 다가가 귀속말
로 이 일을 상의하려고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은소소 역시
때마침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자연히 두 사람의
간격이 좁혀지면서 장취산의 입술이 그녀의 오른쪽 뺨에 맞춰졌
다.

장취산은 크게 당황하여 어떻게 해명을 해야 될지, 몸둘바를 몰
랐다. 은소소는 장취산의 당황함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짜릿한
환히에 젖어 슬며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지금 심정 같
아서는 망망대해가 아니라 하늘끝이라도 장취산과 함께라면 만사
를 제쳐놓고 따라갈 용의가 있었다.

이때, 그녀의 귓가에 장취산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은 낭자, 방금 내가 실수한 걸 나무라지 않으시겠죠?"

은소소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앵두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당신만 좋다면 저는 무엇이든지 해드릴 수 있어요."

은소소는 평소 살인을 밥먹듯이 즐기는 여마(女魔)였으나 막상
남녀지간의 애정 문제에 봉착하게 되자, 어느 요조숙녀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었다.

이쯤되자 당황한 쪽은 오히려 장취산이었다. 사과하는 의미에서
내뱉은 한 마디가 오히려 상대방의 열정을 유발하게 만들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장취산도 혈기 왕성한 젊은이인지
라, 그녀의 적극적인 태도에 차츰 동요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우기 지금 이 순간 은소소의 부드러우면서도 감미로운 체취가 코
끝을 자극하자 장취산의 가슴에 야릇한 격랑을 일으키게 했다.
장취산은 걷잡을 수 없는 격정에 휘말려 자신도 모르게 은소소의
뜨거운 몸을 왈칵 끌어 안았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은소소는
더욱 깊숙이 그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영원히, 아주 영원히....."

"......."

장취산은 은소소의 도발적인 열정에 도취되어 할 말을 잊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장취산은 마치 예리한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이 정신을 번쩍 차렸다.

'취산아! 어찌하여 이리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느 것이냐? 사부
님께서 가르치신 교훈도 모두 잊었단 말이냐? 어서 정신을 차려
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장취산은 즉시 자세를 바로잡고 나직이
은소소에게 속삭였다.

"우리가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저 자부터 처치해야 하
오."

황홀경에 도취해 있던 은소소는 이 한 마디에 넋을 잃고 말았
다.

"뭐라고 하셨죠?"

"저 자를 처치해야 된단 말이오. 그렇다고 잠자고 있는 자를 기
습 공격할 수도 없고 하니, 내가 깨워서 정면 대결을 할 때 낭자
는 기회를 봐서 은침(銀針)을 발사해 주기 바라오. 지금으로서는
그 길만이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오."

바로 이때, 돌연 뒤편에서 우뢰와 같은 광소가 터졌다.

"으핫핫핫......! 내가 잠들어 있을 때 기습을 가했다면 몰라도
이제는 틀렸네. 명문 정파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기습을
가하지 않은 것부터가 큰 실수였네."

말이 끝나는 것과 함께 사손의 거대한 몸이 허공을 가르며 장취
산에게 덮쳐왔다.

장취산은 일찌감치 진기를 끌어모아 방어를 하고 있었기 때문
에, 즉시 사문의 절기인 면장(綿掌)으로 대응했다.

"파지직.....!"

전류가 흐르듯 굉음이 울리면서 사손의 장력이 태산처럼 압도해
왔다. 장취산은 애당초 상대방의 적수가 될 수 없음을 직감하고
오직 수비를 펼치기로 작정했다. 무당파의 무공은 면밀하기로 정
평이 나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무공 차이가 판이한 데도 불
구하고 사손은 장취산을 금방 궁지로 몰아놓을 수가 없었다.

사손은 오기가 뻗쳐 집요하게 공격을 펼쳤다. 순식간에 배안은
온통 소용돌이치는 기운으로 인해 질식할 것만 같았다. 장취산은
방어하는데 급급하여 전신에 비오듯 땀이 흘러내렸다. 자연히 사
간이 흐를수록 더욱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왜 낭자는 은침을 발사하지 않는 걸까?설령 적중시키지 못한다
해도, 일단 은침만 발사하면 사손이 공격을 멈추고 방어 자세를
취할 것이고, 그 순간을 이용하여 그를 제압해야 하는데.....'

바로 이때, 은소소가 황급히 외쳤다.

"사 선배님, 어디든 따라가겠으니 제발 좀 공격을 멈추세요. 앞
으로 다시는 딴 생각하지 않을께요."

사손은 조금도 공격을 늦추지 않고 장취산에게 다그쳤다.

"장소협, 자네는 어떻게 하겠나?"

장취산은 결코 승복할 수 없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 내심 외
쳤다.

'은 낭자! 어서 은침을 발사하시오! 지금이 바로 절호의 기회인
데, 어찌 쓸데없이 말만 늘어놓는 거요?'

그는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이를 보다못한 은소소는
눈물을 글썽이며 외쳤다.

"사 선배님, 제발 부탁이니 어서 공격을 멈추세요. 선배님이 시
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어요. 어서요!"

"흐흐..... 그게 정말인가?"

"물론이예요. 제발....."

"좋아! 장오협에 대한 은 낭자의 절실한 마음을 봐서라도 이번
만은 용서해 주지."

사손은 광소를 터뜨리며 장력을 거두었다.

장취산은 기진맥진하여 간신히 창가에 기댄 채 버티고 서 있었
다. 은소소는 급히 화석을 밝혀 장취산에게 다가갔다. 장취산의
안색은백지장같이 창백했다. 은소소는 내심 움찔하며 황급히 장
취산을 부축해 주었다.

사손은 냉소를 흘렸다.

"과연 무당파의 제자답게 끈질긴 면이 있군."

장취산은 다소나마 긴장이 풀려선지 갑자기 눈앞이 아찔해 지면
서 온몸이 축 늘어졌다. 이를 보다못한 은소소는 다짜고짜 사손
에게 덮쳐갔다.

"살인마! 목숨을 걸고서라도 당신을 죽이고 말겠어요!"

장취산은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순간, 장취산의 몸이 기
우뚱하더니 뒤로 나딩굴었다.

이와 거의 동시에-----

"앗!"

"악!"

사손과 은소소가 번갈아 경악의 외침을 토했다. 어디 그뿐인가?
때마침 광풍이 휘몰아치고 거센 파도가 뱃전을 강타했다.

후우우우----- 콰르르르..... 꽝!

장취산의 온몸이 갑자기 차가운 물에 잠기면서 코와 입 속으로
짜디짠 바닷물이 스며들었다. 혼미해 가던 장취산은 반사적으로
정신을 차렸다.

'혹시 배가 침몰한 게 아닐까?'

장취산은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광풍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몸 주위는 온통 성난 파도가 용트
림하고 있었다.

이때, 사손의 다급한 일갈이 들려왔다.

"장소협! 빨리 선미(船尾)로 가서 타(舵)를 잡아주게나!"

다급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갈은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장취산은 지체하지 않고 선미로 몸을 날렸다.

이 무렵, 배에 동승했던 타수들은 하나같이 거센 파도에 휩쓸려
성난 바다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그러나 장취산은 달랐다. 제
아무리 집채만한 파도가 휘몰아치고 배가 요동해도 그의 몸은 마
치 배에 말뚝이 박힌 듯이 끄떡도 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그는
선미로 돌아가 타를 움켜잡았다.

콰르르르, 쾅쾅!

요란한 굉음이 터지면서 세 개의 돛대 중 중앙에 있는 것과 전
방에 있는 것이 뚝! 부러지며 파도에 의해 삽시간에 흔적도 없이
삼켜버렸다. 이어, 낭아봉(浪牙棒)을 움켜쥔 사손의 모습이 파도
사이로 드러났다. 돛대 역시 사손이 절단시킨 것이다. 폭풍의 영
향을 덜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손은 번개처럼 뒤편에 있는 돛대로 다가가 돛을 거두려고 했
으나 그것마저 광풍 폭우로 인해 찢겨져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사손은 어쩔 수 없이 후미의 돛대마저 부러뜨리고 말았다. 돛대
가 모두 없어지자 그야말로 폭풍과 파도가 이끄는 대로 흘러갔
다.

장취산은 비로소 은소소가 보이지 않음을 발견하고 큰소리로 외
쳤다.

"은 낭자! 은 낭자!"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으나 외침소리 가운데 간간이 곡성이
섞여 있는 듯했다. 돌연, 누군가 장취산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때마침 거대한 풍랑이 휘몰아쳐 왔다.

쏴아.....

장취산은 재빨리 중심을 잡고 풍랑이 물러가기를 기다렸다. 갑
자기 나약하면서도 부드러운 손길이 뒤에서 장취산의 목을 휘어
감으며 간드러지게 말했다.

"장상공, 그렇게도 제가 걱정스러웠나요?"

바로 은소소의 목소리였다. 장취산은 은소소에게 아무 탈도 없
자 크게 기뻐하며 즉시 왼손으로 그녀를 꼭 껴안았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은소소는 장취산의 깊은 관심에 한없이 행복감에 젖었다.

"장상공, 죽더라도 우리 같이 죽어요."

"물론이오."

그들이 이렇듯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동안에도 폭풍을 동반한
파도가 태산이 압도해 오듯 줄줄이 엄습해 왔다. 장취산도 오직
은소소를 보호해야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제아무리 좌우에서 노
도가 휘몰아쳐도 타를 굳게 움켜잡은 체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 무렵, 배에 탔던 귀머거리와 벙어리 타수들은 이미 모두 해
일에 휘말려 바다 깊숙이 가라앉고 말았다. 아무런 조짐도 없이
갑자기 광풍 폭우가 휘몰아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해저에서
돌연 지진이 발생하는 것과 동시에 기류가 소용돌이 치면서 해일
이 돌발한 것이었다. 만약에 사손과 장취산이 초절한 무공을 지
니지 않았다면 역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상당히 견
고했던 배는 아예 이미 풍지박산이 되어 초라하기 이를데 없었
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에 먹구름이 짙게 깔리고 폭우까지 몰아치
고 있으니 도무지 방향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아니, 설령 방향
을 간파했다. 하더라도 돛대를 모두 부러뜨렸으니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배를 몰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사손은 무심하게 요동
하는 선체(船體)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흔들림이 없이 선미로
걸어왔다.

"장소협, 정말 잘했네. 이제부터 내가 조종할 테니 자네들은 선
실로 들어가서 좀 쉬게나."

장취산은 은소소를 부축하고 조심스럽게 선실로 들어갔다.

배는 거센 파도로 인해 하늘 높이 치솟는가 하면 금새 또 끝없
이 깊은 계곡으로 빠져들 듯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장취산
과 은소소는 아까 그 절대절명의 위기도 넘긴 몸들이라 결코 대
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은소소는 장취산의 품안에 안긴 채 나직
이 속삭였다.

"우리들이 죽지 않고 살아날 수만 있다면 영원히 당신과 헤어지
지 않겠어요."

"나 역시 동감이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말이오."

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으며 오히려 오늘 이 무서운 해일이
일어난 것을 감사했다. 해일은 세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비로소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먹구름도 천천히 걷히면서 명월(明月)
이 새하얀 얼굴을 드러냈다. 장취산은 선실에서 나와 선미로 갔
다.

"사 선배님, 이제 좀 쉬시지요."

사손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닐세. 이제부터 우리의 목숨은 저 망
할 놈의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네."

신성한 하늘을 망할 놈의 하늘이라고 욕할 정도로 사손은 세상
모든 것을 증오하고 있었다. 사손은 곧 장탄식을 토하더니 장취
산에게 타를 넘겨 주고 선실로 들어가 쉬었다.

은소소는 장취산 곁에 앉아 밤하늘의 은하수를 올려다보았다.
북극성이 보였다. 그리고 배도 해류를 따라 북으로 향하고 있었
다.

"상공, 이 배는 쉬지 않고 북으로 흐르고 있는데요."

"그러게 말이오. 서쪽으로만 돌일 수 있다면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은소소는 잠시 무슨 생각엔가 잠기더니 물었다.

"만약에 이 배가 끊임없이 동쪽으로 향한다면 어디에 도착하게
될까요?"

"끝없는 망망대해뿐이겠지. 그건 그렇고, 앞으로 칠팔 일만 이
대로 떠내려가다가는 마실 물까지 떨어지게 생겼는데....."

은소소는 난생 처음으로 사랑이 뭔지 알게 된지라 자질 구레한
일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오직 행복한 앞날만을 설계하고 있
었다.

"옛 선인들의 말에 의하면, 동해 바다에 장생불로의 신선들이
살고 있는 신선도(神仙島)가 있다는데, 어쩌면 우리가 그 신선도
에 닿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은하를 우러러보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또 은하계까지 흘러들어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만
나는 광경도 목격하게 될지 누가 알아요?"

장취산은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 그리고 우리가 이 배를 견우에게 주면, 꼭 칠석날
이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직녀를 만나러 갈 수 있을 게 아니오?"

"견우에게 배를 줘 버리면 우리가 만날 때는 뭘 타고 만나죠?"

"하하.....! 우리는 언제까지나 같이 있을 텐데, 그까짓 배가
있어봤자 무슨 쓸모가 있겠소?"

"아, 정말 그렇겠군요."

은소소는 한 송이 해당화처럼 얼굴을 붉히며 장취산의 손을 어
루만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실 그들 사이에는 말이 필요없었다. 눈
빛만으로도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
런데 은소소는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며 암울한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가!

"아니, 갑자기 왜 그러시오?"

은소소는 침통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승에서는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지만, 저승에 가게 되면 당
신은 천당에 가겠지만, 저는..... 저는..... 지옥에 떨어지고 말
거예요."

"당치 않은 소리!"

"아니예요. 제가 저지른 죄는 저 자신이 더 잘 알아요. 무고한
사람을 수도 없이 많이 죽였거든요."

장취산은 비로소 은소소의 본바탕은 그리 악랄하지 않음을 깨달
았다.

"옛말에도 있듯이, 잘못을 알고 뉘우칠 줄만 안다면 어떠한 죄
과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했소. 앞으로 개과천선하여 공덕을 많
이 쌓기만 하면 되오."

이때 난데없이 사손의 냉소가 들려왔다.

"흐흐.....! 그야말로 하늘이 정해 준 선남선녀의 뜨거운 만남
같군. 그러다가 두 사람 몸에 불이라도 붙는 날에는 어쩔려고 그
리 가까이 붙어 있소. 하하하.....!"

은소소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면서 외쳤다.

"도둑 고양이처럼 훔쳐 보기예요?"

"자네들이 스스로 내게 보여 주었지, 언제 내가 훔쳐 봤단 말인
가?"

은소소와 장취산은 서로 얼굴을 붉히며 할 말을 잃었다.

다음날 여명이 틀 무렵, 사손은 낭아봉으로 열네 근짜리 고기
한 마리를 잡았다. 낭아봉에는 갈쿠리 같은 가시가 달려있었기
때문에 고기를 잡기에는 안성마춤이었다. 살아 있는 생선이라 몹
시 비릿했지만, 이틀을 꼬박 굶은 그들이라 이것저것 가릴형편
이 아니었다. 허겁지겁 먹다 보니 순식간에 생선 한 마리가 가시
밖에 남지 않았다.

해류는 계속해서 북으로 흘렀다. 밤에는 항상 앞쪽에서 북극성
이 반짝거렸고, 해는 우측에서 떠올라 배의 좌측으로 기울었다.

어느덧 십여 일이 흘러가고, 배는 변함없이 계속 북으로 향했
다. 날씨는 하루가 다르게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사손과 장취산
은 내공이 심후하여 어느 정도 견디어 냈으나, 은소소는 갈수록
수척해졌다. 장취산과 사손은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입혔으나 역
시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며칠만 더 북쪽으로 흘러갔다가는 얼어
죽기 십상이었다. 그래도 은소소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억지
로 웃음을 지으며 혹한을 견디어 냈다. 장취산은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 날 구멍이 있다지 않은가.

이날, 어디선가 갑자기 한 무리의 바다사자들이 배로 몰려왔다.
사손은 두 눈이 반짝 빛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낭아봉을 휘둘러
바다사자 몇 마리를 잡았다. 그리고 바다사자들의 가죽을 벗겨
냈다. 삽시간에 훌륭한 가죽 외투가 완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바
다사자의 살코기는 맛 또한 일품이라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이날 밤, 포식을 하고 세 사람은 선실에 앉아 한가로이 잡담을
나누었다. 은소소는 함박꽃처럼 활짝 웃으며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짐승이 뭐죠?"

장취산과 사손은 이구동성으로 대꾸했다.

"그야 물론 바다사자지."

바로 이때,

딩동! 딩동.....!

아주 맑고 청아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일순간 모두 넋을
잃고 귀를 기울였다.

딩동! 딩동.....!

"아! 이건 얼음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네."

사손은 안색이 크게 변하면서 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낭아봉
으로 바닷물을 한 번 휘저어 보니 과연 딱딱한 얼음 조각들이 부
딪혔다. 그들은 하나같이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대로 계속 북쪽
을 향해 흘러간다면, 나중에는 얼음조각이 아니라 거대한 빙산이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밤은 딩
동! 딩동! 하는 소리에 잠 한숨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상오가 되자 주먹만한 얼음조각들이 뱃전에 부딪히기 시
작했다. 사손은 조만간 바다 전체가 얼음으로 꽁꽁 얼어붙어 끝
내는 배마저 움직이지 못하게 될 것임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는 몹시 씁쓸히 웃었다.

"도룡보도의 비밀을 캐려다가 오히려 내가 먼저 죽고 말겠군."

사손은 갑자기 도룡도를 번쩍 들면서 한 맺힌 음성으로 외쳤다.

"에라! 너도 용궁으로 들어가 영원히 잠들거라!"

그는 냅다 도룡보도를 바다 속으로 던져 버리려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아쉬운지 장탄식을 토하더니 결국 도룡보도를 내려놓고
말았다.

다시 나흘이 흘러갔다. 집채만한 얼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제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최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
로 이날 밤, 돌연 쿵! 하는 굉음과 함께 선체가 심하게 진동했
다. 사손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기어이 빙산에 충돌하고 말았군."

장취산과 은소소는 서로를 꼭 껴안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뼈
를 애는 듯한 바닷물이 발밑으로부터 천천히 침투해 들어오기 시
작했다. 순식간에 발목까지 차 올았다. 배 밑부분에 구멍이 뚫린
게 틀림없었다.

사손이 급히 외쳤다.

"어서 빙산으로 뛰어 오르게! 죽을 때 죽더라도 최선을 다해 봐
야 할 게 아닌가!"

장취산과 은소소는 즉시 뱃머리로 나갔다. 앞쪽에 거대한 빙산
이 하나 놓여 있었다. 달빛을 받은 빙산은 온통 시퍼런 빛이 반
사되고 있어 스산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사손은 이미 빙산 한 귀
퉁이에 서 있었다. 은소소와 장취산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빙
산으로 뛰어올랐다. 배는 순식간에 침몰하고 말았다.

빙산은 작은 동산만했다. 길이가 이십여 장, 너비가 열 장 정도
되어 그들이 타고 온 배보다 훨씬 컸다. 사손은 허공을 향해 마
음껏 소리를 한 번 지르고 나서 말했다.

"오랫 동안 그 좁은 배에만 있다가 넓은 빙산에 나오니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군."

그는 산책이라도 하듯 유유자적하게 거닐었다. 빙산은 거울처럼
미끄러웠으나 사손의 걸음걸이는 평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빙산은 풍향과 수류에 따라 계속 해서 북으로 표
류해 갔다.

다시 칠팔 일이 흘러갔다. 낮에는 강렬한 햇빛이 빙산에 반사되
어 그들은 하나같이 까맣게 그을렸다. 심지어 눈까지도 그 반사
되는 빛에 의해 아리고 쑤셨다. 이리하여 그들은 밤과 낮을 거꾸
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낮에는 바다사자의 가죽을 뒤집어 쓰고
자다가, 밤이 되면 일어나 생선을 잡아 굶주린 배를 채우며 활동
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북으로 갈수록 낮이 점점 길어지
고 밤이 짧아졌다. 나중에는 매일같이 열 한 시진이 낮이고, 밤
은 단 한 시진밖에 안 됐다. 자연히 활동할 시간이 그만치 줄어
들 수밖에 없었다. 장취산과 은소소는 차츰 수척해지면서 지칠
대로 지쳤다. 이와 반면에 사손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뿐
만 아니라 날이 갈수록 그의 두 눈에선 이상 야릇한 광채가 강하
게 번뜩이며 하늘을 향해 오만가지 욕설을 퍼부어 댔다. 심중의
원독(怨毒)이 극에 달한 듯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바다사자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자던 장취산
은 비몽사몽 간에 홀연 은소소의 경악에 찬 외침을 들었다.

"제발 놔주세요! 제발이요.....!"

장취산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빙산 저 편에
서 사손이 은소소의 허리를 끌어안고 욕정에 굶주린 음마처럼 마
구 입을 덮치려 하고 있었다. 장취산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벼락
같은 호통을 쳤다.

"썩 그손을 떼지 못하겠소?"

사손은 음산하게 외쳤다.

"이 간악한 놈아! 네놈이 내 처와 자식을 죽였으니 나도 오늘
네 처를 목 졸라 죽이겠다."

말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왼손으로 은소소의 목을 조르려 했다.

"앗!"

은소소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면서 비명을 질렀다.

장취산 역시 대경실색했다.

"나는 당신의 원수가 아닐 뿐더러 당신의 처를 죽이지도 않았
소! 사 선배님, 제발 정신 좀 차리십시오. 나는 무당파의 장취산
이지, 원수가 아니란 말입니다."

사손은 약간 멈칫하더니 다그쳤다.

"그럼 이 여인은 누구냐? 네 마누라가 아니냐?"

"그녀는 은 낭자요."

사손은 돌연 두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그가 누구든 간에 내 아내와 어머님이 피살당한 댓가로 이 세
상 여인들을 모두 죽여 버리겠다!"

그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다시 은소소의 목을 졸랐다. 은소
소는 즉시 호흡 장애를 느끼며 외마디 신음조차 낼 수 없었다.
장취산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전광석화처럼 몸을 날려 사손의 등
을 공격했다. 사손은 기다렸다는 듯이 왼손으로 일장을 응수했
다.

펑! 우르르.....!

두 가닥의 장력이 충돌하면서 장취산의 몸이 약간 뒤로 밀렸다.
워낙 빙판이 미끄러워 장취산은 발끝이 삐끗하면서 그대로 넘어
지고 말았다. 사손은 조금도 공격을 늦추지 않고 오른발을 뻗어
왔다. 장취산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빙판을 짚
고 몸을 일으키는 동시에 사손의 무릎쪽 혈도를 찍어갔다. 그러
자 사손은 돌연 오른발을 거두면서 오른손으로 장취산의 머리를
내리쳤다.

이때를 놓칠새라, 은소소는 몸을 돌려 왼손으로 사손의 뒤통수
를 후려쳤다. 사손은 은소소의 기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장취산의 머리를 향해 장력을 집중시켰다. 장취산은 다급한 나머
지 쌍장으로 맞부딪쳐 갔다.

펑.....!

빙산이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장취산은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났
다. 진기마저 끌어모을 수 없을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때, 은소소의 일장이 정확하게 사손의 뒤통수를 적중시켰다.
그러나 사손은 끄떡도 하지 않고 오히려 은소소의 몸이 튕겨져
나갔다. 사손은 두 눈이 붉게 충혈되면서 살기등등하게 은소소를
노려보았다. 은소소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엉금엉금 기면서 다시
뒤로 물러섰다.

바로 이때, 눈앞이 번쩍 하며 북쪽에서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기
이한 광채가 발산되었다. 황금빛 한 줄기 엷은 자색이 뒤섞인 신
비스러운 광채였다. 돌연, 그 자색이 점점 짙어지면서 길어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자색에서 금광(金光), 남광(藍光), 녹광(綠
光), 홍광(紅光)들이 한 줄기씩 뻗쳐나왔다.

"아니.....!"

사손은 두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은소소를 제쳐두고 그 찬란한
광채에 넋이 빠지고 말았다. 알고 보니, 그들은 어느덧 북극에
가까이 도달해 있었고, 이 광채는 바로 북극의 기경(奇景)인 북
극광(北極光)이었다. 장취산은 때를 놓칠세라 재빨리 몸을 날려
은소소를 구출해 냈다. 이날 밤, 사손은 북극광에 정신이 팔려
더 이상 아무런 발광도 하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이 되자 사손은 예전처럼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어
젯밤에 발광한 사실조차 잊었는지 언행(言行)이 무척 부드럽고
자상했다.

장취산과 은소소는 똑같은 생각에 잠겼다.

'부모님과 처자를 모두 살해당했으니 충격도 컸겠지. 그런데 그
의 원수가 대체 누굴까?'

그들은 생각만으로 끝냈다. 자칫 그얘기를 잘못 들춰냈다가 또
다시 발광하는 날에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며칠 동안은 아무 탈없이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피빛 석양이 서해 수평선에 걸린 채 전혀 기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를 보다못한 사손이 벌떡 자리를 박차
고 일어나 석양을 향해 삿대질하며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석양까지 나를 놀리다니, 에잇! 이 망할 놈의 석
양아!"

그는 돌연 빙산에서 주먹만한 얼음 조각을 깨뜨려 손에 집어들
고 석양을 향해 힘껏 던졌다. 얼음 조각은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
럼 슥! 하고 이십여 장쯤 날아가더니 바다에 떨어졌다.

장취산과 은소소는 사손의 엄청난 완력에 새삼 경악을 금치 못
했다.

'정말 대단한 팔 힘이군. 우리 같았으면 반도 못 던졌을 텐
데.....'

사손은 하나를 던지고 나서 연달아 칠십여 개를 더 던졌으나 날
아가는 속도는 처음과 비교하여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아
무리 얼음 조각을 던져도 석양과 엄청난 간격을 두고 바다에 떨
어지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나머지 발로 빙산을 마구 찼다.
그의 발이 닿는 빙산마다 얼음조각이 산산조각이 나며 사면 팔방
으로 흩날렸다.

은소소는 급히 만류했다.

"사 선배님, 그까짓 석양에 신경쓰지 마시고 좀 쉬세요."

사손은 쓱 고개를 돌려 은소소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온통
피빛으로 충혈되어 있었다. 은소소는 내심 움찔하며 억지로 웃음
을 지어보였다. 돌연, 사손이 미친 듯이 괴성을 지르며 번개처럼
몸을 날려 단번에 은소소를 부둥켜잡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죽어라! 이놈아! 내 부모와 처자를 죽인 댓가다!"

장취산은 급히 앞으로 다가가 사손의 팔을 풀려고 했으나 꼼짝
도 하지 않았다. 은소소는 이미 혀를 길게 늘어뜨린 채 절명 직
전까지 다달아 있었다.

장취산은 다급한 나머지 다짜고짜 사손의 등마루 정중앙에 위치
한 신도혈(神道穴)을 내리쳤다. 한데, 이 일장은 마치 철석(鐵
石)에 적중된 듯 튕겨져 나오는 게 아닌가? 사손은 오히려 더 세
게 은소소의 목을 졸랐다. 장취산은 즉시 판관필을 꺼내 사손의
왼손 소해혈(小海穴)을 찍었다. 사손은 심한 통증을 느끼면서 비
로소 손을 풀게 되었다.

은소소는 숨 돌릴 사이도 없이 급히 사손의 품에서 벗어났다.
사손은 왼손으로 장취산의 목을 치는 한편, 오른손으로 은소소의
어깨를 나꿔잡으려고 뻗쳤다. 장취산은 사손의 공격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만약에 그가 피했다가는 은소소
가 결국 다시 잡힐 게 뻔했기 때문이다.

장취산은 지체하지 않고 면장(綿掌) 중의 일초인 자재비화(自在
飛花)를 전개해 사손의 장력을 다소나마 둔화시킬 의도였다. 그
런데 장취산의 장력이 사손의 장력과 충돌하는 순간, 굉장히 강
력한 흡인력에 빨려들어 선뜻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장취산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그와 손이 맞부딪친 채 전력을 다
해 버티었다. 사손은 냅다 그의 몸을 끌어당기며 다시 은소소에
게 덮쳐갔다. 은소소는 대경실색하여 재빨리 몸을 돌려 벗어나려
고 했다. 순간, 사손은 음흉하게 냉소를 흘리더니 빙판을 걷어찼
다. 빙판이 깨져나가면서 얼음 조각이 송두리째 은소소의 오른발
에 적중 되었다.

"앗.....!"

외마디 신음과 함께 은소소는 빙판에 나딩굴었다. 그와 동시에
사손은 흡인력을 변화시켜 장취산의 몸을 수 장 밖으로 날려 버
렸다.

풍덩!

장취산은 빙산 가장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허공을 가로질러 바닷
물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 제 1 권 5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1 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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