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2-1

3학년2반 | 2022.03.02 06:57:00 댓글: 0 조회: 497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2237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2 권


제 1 장 빙화도(氷火島)의 사랑


장취산은 뼈를 에이는 듯한 한기를 느끼며 급히 은구를 뽑아 빙
산에 꽂고 다시 뛰어 올랐다.

은소소가 이미 사손의 손아귀에 걸려들었을 것으로 여겼는데,
뜻밖에도 사손이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두 눈을 감싸고 있는게
아닌가? 반면 은소소는 아무 탈 없이 빙판에 쓰러져 있었다.

장취산은 단숨에 달려가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은소소가 나직이 말했다.

"제가..... 제가 그의 눈을....."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사손이 성난 사자처럼 덮쳐왔다.

펑! 파르르르.....!

사손은 낭아봉으로 빙산을 마구 내리쳤다.

꽝! 꽝!......!

그런데 낭아봉을 내려놓더니, 백 근에 달하는 얼음 조각을 번쩍
들어 장취산과 은소소에게 던졌다.

은소소는 깜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피하려 했다. 장취산은 급히
그녀의 등을 누르고 잠자코 있으라고 손짓했다. 그들은 빙산의
움푹 파인 곳에 몸을 숨긴 채 숨소리조차 감히 내지 못했다.

꽝! 꽈르르르.....!

얼음 덩어리는 그들이 숨어 있는 바로 앞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되어 사방으로 튕겼다.

사손은 꼼짝도 않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의 은신처를
찾고 있는 듯했다. 그는 비록 두 눈은 멀었지만 청각이 매우 예
민하기 때문에, 조금만 소리를 내도 금방 위치를 알아내고 공격
해 올 것이었다. 다행히도 이때 파도가 치고 얼음 조각끼리 서로
부딪치는 소리에 묻혀 두 사람의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손은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풍랑소리 때문에 두 사람의 위치
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두 눈에 심한 통증이 엄습해 오
자 미친 듯이 얼음 조각을 집어던졌다.

꽝꽝꽝! 꽈르르르.....!

요동하는 듯한 굉음이 터지면서, 빙산은 삽시간에 얼음 파편으
로 뒤덮였다.

반 시간쯤 흘렀을까? 사손은 비로소 발광을 멈추었다. 이윽고
조용해진 사손이 극히 예의 바르게 말문을 열었다.

"장상공, 은낭자! 아까는 실수가 많았네. 부디 용서하기 바라
네."

말을 끝낸 그는 빙판에 앉아 회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장취산과
은소소는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사손은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빙판에서 일어나
한숨을 내쉬었다.

"두 분께서 굳이 내 잘못을 용서치 않겠다면 하는 수 없지."

그는 또다시 깊이 숨을 들여마셨다.

그런 사손의 태도를 살펴보던 장취산의 안색이 돌연 크게 변했
다. 얼마 전 왕반산도에서 정사파 군웅들을 정신 착란증에 빠지
도록 한 때도, 장소(長嘯)를 터뜨리기 직전에 이렇듯 한숨을 깊
이 들여마시지 않았던가? 옷깃을 찢어 귀를 틀어 막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그는 한시도 지체할 수 없어 은소소를 끌어안고 냅
다 바닷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사손의 장소
가 발출되었다. 장취산은 왼손으로 은구를 꺼내 빙산에다 꽂고
오른 손으로 은소소를 안은 채, 차디찬 바닷물 속으로 잠수했다.

한참 후 두 사람은 입만 물 밖으로 내밀어 숨을 돌렸다. 몰론
귀는 계속 수중에 잠겨 있었다. 이렇게 일곱 번인가 여덟 번을
거듭하고 나서야 사손은 비로소 장소를 멈추었다.

장취산과 은소소는 살짝 빙산으로 올라 바다사자 가죽에 달린
털을 뽑아 귀를 틀어막았다. 일단은 위험을 모면한 셈이었으나,
사손과 함께 빙산에 있는 한 언제 또 무슨 위기에 처하게 될지
실로 걱정이 태산 같았다.

석양은 여전히 서쪽 하늘에 걸린 채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그
것은 북극이 반 년 동안은 낮이고, 나머지 반은 밤으로만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신비한 우주의 조화를 모르는 두 사람은 어리
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온몸이 젖은 은소소는 추위를 견디다 못해 부르르 몸을 떨며 치
아가 서로 부딪쳤다. 사손은 이 소리를 듣고 번개처럼 낭아봉을
휘둘렀다. 길이가 일 장 남짓한 낭아봉은 그 위력이 사오 장 밖
까지 뻗쳐왔다. 장취산과 은소소는 계속 후퇴하면서 순식간에 빙
산 끝편까지 몰렸다.

장취산은 뒤편에서 자그마한 얼음 조각이 떠내려오는 것을 발견
했다. 그는 즉시 은소소를 끌어안고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그
리고 은구를 발출해 얼음 덩어리를 나꿔잡았다.

풍덩! 풍덩!

두 사람이 물 속에 떨어진 소리를 들은 사손은 얼음 조각을 마
구 던졌다.

장취산과 은소소가 몸을 의탁하고 있는 얼음 조각은 사손이 있
는 빙산과 점점 더 멀어져갔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에 사손이 타
고 있는 빙산은 한 점의 은빛으로만 보일 뿐 아득히 뒤떨어졌다.

장취산과 은소소가 매달려 있는 얼음조각은 다행히도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바닷물 속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었
다. 체온이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때, 양쪽에 그리 크지
않은 빙산 하나가나타났다. 두 사람은 재빨리 그 빙산으로 올라
갔다.

장취산은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이게 무슨 고생이람. 몸은 괜찮소?"

은소소는 물에 빠진 생쥐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바다사자 가죽을 좀 가져올 걸 그랬어요. 당신은 어떠세요?"

그들은 서로 동문서답했다. 서로 상대방의 말을 듣지 못한것 같
았다. 그들은 잠시 서로 의아해 하다가 급히 바다사자의 솜털을
귀에서 빼냈다. 도주하는데 급급하여 귀에 솜털을 틀어막은 것조
차 잊고 있었다.

장취산은 그윽한 눈길로 은소소를 보며 말했다.

"소소, 우리가 설령 이 빙산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해도 영원히
헤어지지 맙시다."

"상공, 물어볼 말이 있어요. 숨김없이 대답해 주세요."

"뭔지 말해 보시오."

"만약에 우리가 중원에 있다 치고, 제가 당신에게 청혼을 했다
면 받아주셨을까요?"

장취산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이렇게 빨리 친해지진 않았을 것이오. 그리고..... 장애도 많
았을 테고..... 우린 문파도 서로 틀리니....."

은소소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당신이 첫 번째로 사손과 격전
을 벌일 떼, 은침을 발사하지 않았던 거예요."

"맞아, 그 때 왜 은침을 발사하지 않았소? 혹시 잘못 발사했다
가 내가 상처라도 입을까 봐 그랬소?"

은소소는 나직이 말했다.

"아니예요. 만약에 그 때 사손을 죽였다면 우리는 중원으로 돌
아갔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당신은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예요."

"소소....."

"저를 나쁜 여자라고 욕해도 좋아요. 저는 오직 당신과 함께 무
인도로 가서 오래도록 살고 싶은 마음에 그만....."

장취산은 은소소의 뜨겁고 깊은 애정에 감복했다.

"아니오. 당신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소. 내가 너무 당신의 마
음을 모른 게 잘못이었소."

은소소는 살며시 그의 품안에 안겼다.

"우리들을 같이 있게 해주신 하늘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어요.
영원히 중원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중원으로
돌아가게 되면 당신의 사부님은 저를 싫어할 테고, 저의 아버지
는 심지어 당신을 죽이려고 할 거예요."

"당신의 아버지?"

"저의 아버지는 백미응왕 은천정이예요. 바로 천응교를 창시한
교주시죠."

"아, 그랬었군.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오. 당신의 부친께서 아무
리 흉포하다 해도 사위를 죽이진 못할 것이오."

사위라는 말에 은소소의 두 눈이 번쩍 뜨이면서 얼굴은 홍당무
처럼 빨개졌다.

"지금 진심으로 하신 말씀이세요?"

"지금 당장 부부의 예를 올리도록 합시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마주 보며 빙산에 꿇어앉았다.

장취산은 낭랑한 어조로 말했다.

"하늘에 계신 옥황상제께 맹세합니다. 소생 장취산은 오늘 은소
소와 부부의 인연을 맺고자 하니, 이를 어여삐 여기시어 축복해
주시기 바라나이다. 어떠한 고난이 닥치더라도 절대로 오늘의 이
언약을 저버리지 않겠나이다."

은소소도 성심을 다해 기도를 올렸다.

"우리 부부가 영원히 같이 있을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옵소서."

그녀는 잠시 숨을 돌리고 계속 이어나갔다.

"훗날 중원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개과천선하여 부군(夫君)
의 행선(行善)에 따라 절대로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지 않겠나이
다."

장취산은 크게 기뻐하며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다.

한참 후, 그들은 허기를 느꼈다. 장취산은 은구를 뽑아 고기를
잡았다. 이 일대의 고개들은 추위에 강하므로 살이 두껍고 지방
이 많아 무척 비릿했지만, 먹고 나자 힘이 용솟음치는 것 같았
다.

낮이 길고 밤은 짧아 도무지 날짜를 계산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저 빙산이 이끄는 대로 정처없이 흘러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이었다. 은소소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돌연 정북쪽에서 한 줄기
검은 연기가 솟아 오르는 것을 목격하고 대경실색했다.

"여보, 저것 좀 보세요!"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단 말인가?"

검은 연기는 바로 앞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것 같았으나 사실은
거리가 무척 멀었다. 원인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검은 연기는
점점 더 짙게 피어오르더니 나중에는 연기 속에 불꽃까지 섞여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저게 뭐죠?"

은소소의 질문에 장취산은 고개를 저였다.

"나도 잘 모르겠소."

은소소는 안색이 변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건 틀림없이 지옥문의 입구일 거예요. 우리도 이제
는 끝장이예요."

장취산도 놀라긴 마찬가지였으나 부드럽게 안심시켰다.

"아마도 산불이 난 모양이오."

"산불의 불기둥이 저렇게 높이 치솟을 수 있어요?"

장취산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모든 것은 운명에 맡깁시다."

두 사람이 타고 있는 빙산은 마치 강력한 흡인력에 빨려가듯 그
불기둥이 솟는 곳으로 표류해 갔다. 그것은 북극 부근에 있는 활
화산에서 분출된 화염이 산 가까이 있는 바닷물을 뜨겁게 만들기
때문에 복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빙산은 하루를 더 표류해서
야 활화산 기슭까지 이르렀다. 섬의 서쪽은 화산에서 뿜어져 나
온 용암으로 인해 기암괴석들이 우뚝 우뚝 솟아 있었다. 섬의 동
쪽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이곳
은 북극 가까이 위치해 있었으나 화산에서 사시사철 화염을 뿜고
있어 장백산이나 흑룡강 일대처럼 고산(高山)에는 만년 빙설이
쌓여 있고, 평야에는 항상 푸르른 녹음방초와 기화이수(奇花異
樹)가 자라고 있었다.

한참 동안 섬을 둘러보던 은소소는 펄쩍 뛰면서 장취산의 목을
끌어안았다.

"우리는 신선도에 도착한 거예요. 맞죠?"

장취산도 넘치는 기쁨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때마침 평야에는
꽃사슴들이 떼를 지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이때 빙산은 섬 가까이 흐르다가 갑자기 뜨거운 물에 밀려 다시
멀리 떠내려갔다.

은소소는 깜짝 놀라며 급히 외쳤다.

"앗! 빙산이 다시 밀려 나가고 있어요."

두 사람은 재빨리 물 속으로 뛰어들어 헤엄쳐 섬에 올랐다. 꽃
사슴들은 그들을 보고도 겁내기는커녕 오히려 신기한 듯 커다란
눈망울을 껌벅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은소소는 살며시 다가가 꽃사슴의 등을 쓰다듬었다.

"선학(仙鶴) 몇 마리만 있다면, 그야말로 남국의 선경(仙境)이
나 다를 바 없겠어요."

은소소는 갑자기 비틀거리더니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소소!"

장취산은 깜짝 놀라며 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그도 비틀거리더
니 쓰러지고 말았다.

우르르르! 우르르르!

화산이 다시 화염을 뿜으면서 섬 전체가 요동했다. 그들은 빙산
에 몸을 싣고 망망대해에서 수십 일을 표류하다가 육지에 올라서
자 발에 힘이 빠졌다. 지면이 약간 흔들렸을 뿐인데도 중심 잡기
가 힘들어 쓰러지고 만 것이다.

"하하.....!"

"호호.....!"

그들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날은 너무나 피곤하여 그냥
땅바닥에 누워 잠이 들어 버렸다. 그들이 깨어났을 때에도 해는
아직 기울지 않았다.

장취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나 한 번 둘러 봅시다."

은소소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고치고 장검을 집었다. 장취산은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 단단한 나뭇 가지 하나를 꺽어 들었다. 그
들은 경공술을 전개해 단숨에 십여 리를 달렸다. 그 동안 가끔
이름 모를 큰 새와 작은 짐승들이 놀라 뛰쳐나올 뿐 주위는 온통
기화이초가 만발했다.

이윽고, 그들은 울창한 숲을 끼고 있는 돌산 앞에 이르렀다. 돌
산 기슭에 석굴이 하나 뚫려 있었다.

은소소는 환호를 지르며 무작정 앞으로 달려나갔다.

"앗! 조심.....!"

장취산의 경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캭! 하는 괴음과 함께 흰 그
림자가 번뜩이더니, 동굴에서 거대한 흰곰이 덮쳐왔다. 흰곰은
사람처럼 몸을 일으켜 거대한 앞발로 은소소의 머리를 내리쳤다.
깜짝 놀란 은소소는 장검을 뽑아 곰의 어깨를 찔렀다. 그녀의 일
검은 정확하게 곰의 어깨를 찔렀지만 경미한 상처만 입혔다. 그
녀는 오랫 동안 바다를 표류한 탓으로 몸이 허약해져 힘이 없었
기 때문이다.

흰곰은 괴성을 지르며 은소소의 장검을 후려쳤다. 은소소는 힘
없이 장검을 놓치고 말았다. 순간 장취산이 번개처럼 몸을 날려,
나뭇 가지로 흰곰의 왼쪽 무릎을 후려쳤다.

팍! 우드득!

나뭇 가지가 꺾어지면서 곰의 왼발도 여지없이 절단되었다.

"크아앙.......!"

중상을 입은 곰은 천지가 진동하는 괴성을 지르며 장취산에게
덮쳐왔다. 장취산은 재빨리 허공으로 몸을 날려 은구를 발출했
다. 은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곰의 태양혈에 찍혔다.

"크아앙! 캭......!"

흰곰은 미친 듯이 발광했다. 그 힘이 어찌나 센지 장취산도 은
구를 놓치고 말았다. 곰은 고통스럽게 땅바닥을 뒹굴다가 끝내
사지를 쭉 뻗고 숨을 거두었다.

은소소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정말 기가 막힌 경공술과 구법(鉤法)이었어요."

순간, 장취산이 황급히 외쳤다.

"빨리 이쪽으로 피하시오!"

은소소는 흠칫하며 쏜살같이 장취산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어
느새 또 한 마리 곰이 그녀의 뒤에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장취
산은 무기가 없었다. 그는 급히 은소소를 끌어안고 뒤에 있는 소
나무로 솟구쳐 올랐다. 곰은 나무 밑에서 빙빙 돌며 미친 듯이
괴성을 질러 댔다.

장취산은 소나무 가지를 꺾어 곰의 오른쪽 눈을 향해 힘껏 격출
했다.

푹!

나뭇 가지가 정확하게 곰의 눈 속으로 파고들었다. 곰은 오른쪽
눈을 감싼 채 나무 위로 뛰어오르려 했다. 이때를 놓칠세라 장취
산은 은소소의 장검으로 곰의 머리를 향해 힘껏 내리찍었다. 곰
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괴성을 지르며 천천히 쓰러졌다.

죽음을 확인한 장취산은 혹시나 동굴에 또 다른 적이 있을까
봐, 우선 돌 몇 개를 집어 동굴 안으로 던졌다. 아무런 기척이
없자 장취산이 앞장서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에는 곰이 먹다 남은 음식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비
린내가 코를 찔렀다.

은소소는 코를 막았다.

"동굴은 넓고 좋은데 냄새가 너무 심해요."

"매일같이 깨끗하게 청소하면 차차 나아질 거요."

은소소는 앞으로 이 섬에서 장취산과 오래도록 살 일을 생각하
니 더없이 행복했다. 장취산은 나뭇 가지로 큰 빗자루를 엮어 와
서는 청소를 시작했다. 동굴은곧 깨끗해 졌으나 냄새만은 여전
했다.

"근처에 개울만 있으면 깨끗하게 씻고 닦을 수 있을 텐데....."

"내게 묘안이 있소."

장취산은 말을 끝내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가 거대한 얼음조각 몇
개를 운반해 왔다. 그리고는 얼음 조각을 동굴 높은 암석 위에
올려놓았다.

은소소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정말 좋은 생각이예요."

얼음조각이 천천히 녹으면서 물이 되어 동굴 밖으로 흘러 나갔
다. 자연히 동굴은 물로 청소한 듯이 깨끗해졌다.

은소소는 장검으로 곰의 가죽을 벗기고 살코기를 몇 동강으로
나눈 뒤 얼음으로 그것을 재어놓았다.

은소소는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불만 있으면 맛있는 곰요리를 먹을 수 있을텐데......"

장취산은 화산에서 분출되는 화염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불은 있지만 화염이 너무 커서 안 되겠고, 어쨌든 천천히 생각
해 봅시다."

이튿날, 은소소는 향긋한 내음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급히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멀지 않은 곳에 잡초더미가 있고 그 사이
사이에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정말 너무나도 향긋해요."

"그것보다 더 기쁜 일이 있소."

"더 기쁜 일이라뇨?"

"저 화산의 화염을 이용해서 불을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소."

"어떻게요?"

"화산의 화염이 너무 강렬해서 아마 수십 장 안으로만 접근해도
사람이 타 버리고 말 것이오. 그래서 나무 껍질로 긴 줄을 만들
어......"

은소소는 알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 긴 줄에 돌을 달아 화산 분화구에 던져, 화염이 줄을 타고
오도록 하려는 거죠?"

그들은 이틀에 걸쳐 백여 장에 달하는 긴 밧줄을 만든 후 화산
으로 향했다. 화산과의 거리는 사십여 리나 되었다. 화산에 접근
해 갈수록 목은 바싹바싹 말라가고 온몸에 비오듯 땀이 흘러내렸
다. 주위에는 나무는커녕 화초도 보이지 않고 오직 검은 암석뿐
이었다. 은소소는 화산의 열기 때문에 온몸이 축 늘어져 애처로
움마저 느끼게 했다.

장취산은 보다못해 말했다.

"당신은 여기서 기다리도록 하오. 나 혼자 올라갔다 오겠소."

"또 한번 그런 말을 하면 다시는 당신과 말도 하지 않겠어요."

은소소가 이렇게 말하며 토라지자 장취산은 아무 말 없이 빙그
레 웃기만 했다.

일 리 남짓 더 접근해 가자 내공이 심후한 장취산이었지만 눈앞
에 별똥이 튕기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더 이상 접근할 수가 없었
다.

"우리 여기서 줄을 던져 봅시다. 만약에 여기서도 불씨를 얻지
못한다면....."

"생고기와 선혈만 빨아멱는 야만인이 되겠죠."

은소소는 온몸이 타버릴 것 같은 열기 때문에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그녀는 급히 장취산의 어깨를 잡고 간신히 중심을 잡았
다. 장취산은 그녀를 부축해서 앉혔다. 그리고는 땅에서 돌을 주
워 밧줄 끝에 묶어 놓고 전력을 다해 던졌다. 밧줄은 시위를 벗
어난 화살처럼 백여 장에 달하는 밧줄이 전부 날아갔다. 그래도
분화구와는 굉장한 거리가 남아 있었다. 도무지 불씨를 끌어들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장취산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다른 방도를 강구해야 될 것 같소."

"원시인처럼 돌로 불꽃을 일으켜 불씨를 만들어 보는 게 어떻겠
어요?"

"그렇게 한 번 해봅시다."

장취산은 밧줄을 끌어당겼다. 밧줄은 화산의 열기로 인해 바싹
말라 있었다. 조그만 불씨만 있어도 금방 타 버릴 것 같았다. 화
산 부근에는 숫돌이 천지였다. 그는 숫돌 하나를 주워 장검으로
내리쳤다. 그 순간 불꽃이 튕기면서 밧줄에 닿았다. 그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내리쳤다. 마침내 밧줄에 불씨가 달라붙었다.

"야호! 야호.....!"

그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그들은 찌는
듯한 더위도 잊은 채 단숨에 석굴로 달려왔다. 은소소는 즉시 장
작과 풀을 준비하여 불을 피우고는 곰고기를 나무 꼬챙이에다 꽂
아놓고 불에 구웠다. 얼마만에 먹어보는 익은 음식인가!

이날 밤, 동굴엔 꽃향기가 그윽했고 모닥불을 피워 포근한 분위
기였다. 장취산과 은소소는 부부의 연(緣)을 맺은 이래 처음으로
환희의 순간을 맞이했다.

화촉동방.

그들은 태고의 모습으로 돌아가 무지개빛 나락으로 그들의 영혼
과 육신을 불태웠다.

다음날 새벽, 장취산은 동굴에서 나와 마음껏 기지개를 펴며 멀
리 해변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두 눈이 한 곳에 쏠리었다.
멀리 해변 암석 위에 당당한 체격을 가진 자가 버티고 서 있는게
아닌가!

그 자는 다름아닌 사손이었다. 장취산은 온몸이 목석처럼 빳빳
하게 굳어버렸다. 감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손은 장님이 된
후, 여지껏 굶어왔는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몇 걸음 걷지 못하고 휘청하더니 고목처럼 앞으로 꼬꾸라졌다.

장취산은 급히 동굴로 들어가 은소소에게 외쳤다.

"사손도 이 섬에 올라왔소!"

은소소는 일순 심장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당신을 봤나요?"

그녀는 곧 사손이 장님이란 것을 연상하고 마음이 약간 놓였다.

그들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헝겊으로 귀를 틀어막고 사손에
게로 갔다. 사손과 열 장의 간격을 유지한 채 장취산이 낭랑하게
외쳤다.

"사 선배님, 뭘 좀 드시겠습니까?"

사손은 사람의 목소리를 듣자,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러나,
곧 장취산의 음성임을 알아차리고 암울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만
에야 그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장취산은 어젯밤 먹다 남은 곰고기를 가져와 멀리서 던져 주었
다.

"받으십시오!"

사손은 예민한 청각을 이용해서 곰고기를 받아들고 천천히 먹었
다. 용호처럼 날고 뛰던 사손이 이렇듯 허약하게 전락해 버릴 줄
이야!

장취산은 동정심이 일었다. 이와 반대로 은소소는 엉뚱한 생각
을 하고 있었다.

'그냥 굶어 죽게 만들지 왜 먹을 것을 갖다 주고 그럴까? 나중
에 오히려 우리들이 그의 손에 죽게 될지도 모르는데.....'

사손은 곰고기를 반 쪽만 먹고 땅바닥에 엎어져 그대로 잠이 들
었다. 장취산은 그의 곁에 모닥불을 피워 주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사손은 깨어났다.

"여기가 어딘가?"

장취산이 대답했다.

"이곳은 북극의 무인도요."

"그럼 중원으로 돌아가기가 힘들겠군."

"그건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겠죠."

"망할 놈의 하늘, 빌어먹을 하늘!"

실컷 하늘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난 사손은 다시 곰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자네들은 나를 어떻게 할 셈인가?"

장취산은 잠시 망설였다.

"사 선배님, 우리 부부는....."

"뭐라고? 부부가 됐다고?"

"선배님을 장님으로 만든 것만큼은 뭐라고 사과의 말씀을 드려
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중원으로 돌아가기도 힘들것 같으
니, 앞으로 평생토록 선배님을 성심껏 모시고자 합니다."

사손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지었다.

"그토록 나를 생각해 주다니 정말 고맙군."

장취산은 사손에게 이 섬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사손이 입을 열었다.

"이 섬에 만년빙설과 영원불멸의 화산이 있다면, 빙화도(氷火
島)라고 부르지."

장취산 부부가 기거하고 있는 동굴과 약 반 리 가량 떨어진 곳
에 작은 동굴이 하나 더 있었다. 장취산 부부는 그 동굴을 깨끗
이 청소해서 사손에게 내주었다. 그리고 사냥을 하고 남은 시간
은 일상용품을 만드는데 전념했다. 사손은 종일토록 동굴에 틀어
박혀 오직 도룡도의 비밀을 캐기에 여념이 없었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렀다.

어느 날 장취산 부부는 섬 북쪽으로 나들이를 떠났다. 섬은 생
각보다 굉장히 컸다. 이십여 리쯤 가자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장취산은 숲속에 뭐가 있는지 호기심이 생겼다.

"숲속에 괴물이 살고 있을지도 모르니 그냥 돌아가요."

은소소의 말에 장취산은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요사이 왜 만사에 흥미를 잃어 가는 걸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돌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어디 불편한 게 아니오?"

은소소는 뜻밖에도 얼굴을 붉혔다.

"아니예요."

장취산은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들어 제차 캐묻자 은소소는 마지
못해 대답했다.

"우리가 너무 적적해 하니까 삼신할머니가 한 사람을 더 점지해
주셨어요."

장취산은 약간 어리둥절해 하더니 곧 뛸 듯이 환호했다.

"임신을 했단 말이오?"

"쉿! 조용히 하세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우리 둘밖에 없는데 듣기는 누가 듣는단 말이오?"

그들은 함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은소소는 날이 갈수록 몸이 점점 무거워져 아무 일도 할 수 없
었다. 만삭이 된 어느 날 밤, 장취산 부부는 동굴에 모닥불을 피
워놓고 예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보, 우리 애가 사내였으면 좋겠어요. 계집애였으면 좋겠어
요?"

"사내면 어떻고 계집애면 어떻소?"

"아니예요. 저는 기필코 당신을 닮은 사내애를 낳고 말겠어요.
이름은 뭘로 지을까요?"

장취산은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당신 도대체 요새 왜 그래요? 무슨 걱정이라도 있나요?"

"아.....아니오. 곧 아버지가 된다는 게 실감나지 않아서 그렇
소."

"거짓말 마세요. 제 눈은 절대로 속일 수 없어요."

장취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공연한 노파심 때문인지 몰라도, 며칠 전부터 사 선배님의 행
동이나 표정이 약간씩 변하고 있는 것 같소."

"아! 맞아요. 표정이 점점 흉악해지고 있었어요. 아무래도 또
발광할 것만 같아요,"

"혹시 도룡보도의 비밀을 캐내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오?"

은소소는 난데없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장취산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 애한테는 아무 탈도 없을 것이오.
만약에 그가 발광을 하면 그 때는 죽이는 수밖에 없소."

은소소는 전신에 경미한 진동이 일었다.

"꼭 죽일 필요는 없잖아요?"

"물론 발광만 하지 않으면 죽일 필요가 없겠지. 하지만 만사는
유비무환이라고 하지 않았소?"

"무슨 좋은 방법이라고 있나요?"

"내일부터는 동굴 안쪽에 가서 생활하고, 동굴 입구에 깊은 함
정을 파 놓읍시다."

"좋은 방법이긴 하나, 당신은 매일같이 사냥을 나가야 하는데
그가 만약 밖에서 당신을 노리면 어떡하죠?"

"험준한 절벽을 타고 도주하면 되오. 장님인 그가 설마 절벽까
지 쫓아오진 못할 거요."

이튿날 새벽부터 장취산은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삽이나 곡
괭이가 없이 나무로 파헤치자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사손은
점점 더 상식에 벗어난 행동만 일삼았다. 때로는 도룡보도를 미
친 듯이 휘둘러 댔다.

장취산은 구덩이를 오 장 깊이로 파놓고 밑바닥에 날카로운 나
무를 박은 후 사손이 구덩이에 빠졌을 때 투석(投石)을 하기 위
해 많은 돌까지도 준비해 놓을 계획이었다.

이날 오후, 사손은 동굴 밖에서 왔다갔다 하며 배회했다. 장취
산은 사손이 무슨 소리를 들을까 봐 감히 구덩이를 파지 못했다.
사냥도 못 가고 그저 동굴을 지키며 그의 동정을 살폈다. 사손은
자꾸 무엇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귀를 기울여 보니, 하늘에서
부터 시작하여 역대(歷代) 황제, 소림사의 달마대사 등 닥치는
대로 욕을 퍼부어 댔다. 나중에는 무당파의 개산조사(開山祖師)
장삼봉까지도 그의 욕설의 대상이 되었다. 장취산은 은근히 부아
가 치밀어 올랐다.

사손은 돌연 큰 소리로 외쳤다.

"장삼봉이 도둑놈인데 그의 제자인 장취산은 오죽하랴! 절대로
살려둘 수 없다."

사손은 다짜고짜 장취산을 스쳐 지나 동굴 안으로 돌진해 들어
갔다. 장취산은 급히 뒤따라 들어갔으나 사손은 이미 함정에 빠
진 후였다. 함정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지라, 사손은 약간 놀랐
을 뿐 전혀 상처를 입지 않았다. 사손은 함정에 떨어지기가 무섭
게 위로 솟구쳐 올랐다. 장취산은 다급한 나머지 함정을 파는데
썼던 나뭇 가지를 집어 사손의 머리를 내리쳤다. 사손은 나뭇 가
지의 파공음을 듣고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나뭇 가지를 나꿔챘
다. 그 바람에 사손은 다시 함정에 빠졌다.

이때, 은소소는 거의 해산할 때가 다 되어 반나절을 통증으로
시달려 왔었다. 그러나 사손이 갑작스레 발광을 하자, 뒤틀리는
복통을 참고 장취산에게 장검을 던져 주었다. 장취산은 장검을
받아들고신속하게 생각을 굴렸다.

'장님임에도 불구하고 내 무기를 뺐을 수 있었던 것은, 파공음
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사손이 다시 솟구쳐 올라왔다. 장취산은 사손의 머리를 겨
냥해서 검끝을 꼿꼿하게 밑으로 내렸다. 아무 파공음도 일지 않
았다. 사손은 자기 스스로 검끝을 향해 머리를 쳐박으러 오고 있
었다. 다음 순간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사손의 입에서 비명이 터
져 나왔다.

"악!"

장검은 이미 그의 머리를 한 치 남짓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의
임기웅변이 빨랐다. 검끝이 머리에 찔리자마자 뒤로 젖히면서 구
덩이로 내려섰다.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중상이었다. 얼굴은
온통 선혈이 낭자했고, 장검은 그의 머리에 꽂힌 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사손은 장검을 뽑고 옷자락으로 상처를 감쌌다.정신이 혼미했
다. 결코 경미한 상처가 아님을 그 자신도 직감했다. 그는 즉시
도룡보도를 뽑아 머리 위에다가 일장의 검막(劍幕)을 전개하고
재차 솟구쳐 올랐다. 함정에서 뛰쳐나온 사손은 더욱 살기등등하
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장취산은 한 발 한 발 물러섰다. 사손은
혹시라도 장취산 부부가 자기 옆으로 슬쩍 빠져 나갈까 봐 도룡
보도를 마구 휘둘렀다. 도무지 빠져 나갈 틈이 없었다.

일촉 즉발의 순간!

"으앙! 으앙.....!"

동굴 안쪽에서 돌연 갓난애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사손은 크
게 놀라며 즉시 걸음을 멈추었다. 갓난애의 울음소리는 끊임없이
들려왔다. 장취산 부부는 생사존망의 위기에 쳐해 있었으나 오히
려 침착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갓난애에게 집중되었다. 사내
애였다. 손발을 마구 내저으며 큰 소리로 울어 대고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갓난애가 울음을 터뜨리는 순
간, 사손의 광기가 씻은 듯이 사라지며 제정신을 차린 것이다.

사손은 급히 물었다.

"사내앤가, 계집앤가?"

장취산은 약간 어리둥절했으나 급히 대답했다.

"사내입니다."

"그래? 태(胎)는 잘랐나?"

"태를 잘라야 하나요? 아 참, 내 정신 좀 봐, 깜빡 잊었군."

사손이 장검을 내밀자 장취산은 장검을 받아 태를 잘랐다. 사손
은 가까이 다가왔지만, 전혀 공격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장취
산은 의아한 나머지 고개를 돌려 사손을 쳐다보았다. 사손은 무
척 근심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은소소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어디 좀 안아 봐야겠어요."

장취산은 갓난애를 안아 그녀의 품에 안겨 주었다.

사손이 다시 물었다.

"갓난애를 씻기려면 더운 물이 있어야 되는데 준비됐나?"

"아 참,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으니 이를 어쩐담!"

말을 끝낸 장취산은 곧장 달려나가려 했다. 사손은 갑자기 철탑
(鐵塔)처럼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자네는 여기 있게. 내가 가서 물을 끓여 오겠네."

그는 즉시 동굴 밖으로 몸을 날렸다.

얼마 후, 사손은 끓인 물을 들고 들어와 장취산과 함께 갓난애
를 깨끗이 씻겨 주었다.

"으앙! 으앙.....!"

울음소리가 우렁찼다. 사손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엄마를 닮았나? 아버지를 닮았나?"

"아무래도 엄마 쪽을 닮은 것 같습니다."

사손은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 애의 앞날에 행복만이 깃들어야 할 텐데....."

은소소는 은근히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사 선배님, 혹시 이 애의 관상이 좋지 않아서 그러세요?"

"아니네, 애가 그대를 닮았으면 너무 예쁘기 때문에, 나중에 쓸
데없이 여색에 빠지지나 않을까 해서 그렇다네."

장취산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건 너무 지나친 노파심이 아닐까요? 우리는 영원히 여기서
살게 될 텐데."

은소소가 급히 끼어들었다.

"안 돼요. 우리는 돌아가지 않아도 되지만, 이 애만은 절대로
이 무인도에서 한평생 지내게 할 수 없어요. 몇십 년 후, 우리들
이 모두 죽고나면 혼자 남게 될 것이고, 또 어디서 아내를 맞아
들이죠?"

이 지극한 모성애에 사손도 감복하여 한 마디 내뱉었다.

"장 부인의 말이 맞네. 우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애를 중원
으로 보내야 할 책임이 있네."

은소소는 크게 기뻐하며 억지로 일어났다. 장취산은 급히 그녀
를 부축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어서 눕도록 하시오."

"아니예요. 사 선배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겠어요."

사손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닐세. 그럴 필요없네. 그런데 애의 이름은 지어 놨나?"

"아직 못 지었습니다. 선배님께서 이름을 좀 지어 주십시오."

"음..... 어디 한 번 생각해 보세."

은소소는 나름대로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 자가 우리 애를 그렇게 좋아한다면, 아예 이 애를 자기의
친자식처럼 여기게 해야겠군. 그러면 나중에 설령 광기가 재발작
해도 이 애만은 무사할 수 있을 거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는 즉시 실천에 옮겼다.

"사 선배님, 이 애를 위해서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는데 들어
주시겠어요?"

"뭔가?"

"이 애를 양자로 삼아 주세요. 애가 성장하고 나면 선배님을 친
아버지처럼 모시게 하겠어요. 여보, 당신의 생각은 어떠세요?"

장취산은 은소소의 고충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정말 좋은 생각이오. 사 선배님, 우리 부부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 주십시오."

사손은 처절하리 만큼 장탄식을 토했다.

"내 친자식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나?"

사손의 어조에 다시 풍기(風紀)가 감도는 듯했다.

"만약에 내 아들이 살아 있었다면, 올해 나이 십팔 세가 되었을
걸세. 그리고 무공 역시 내 진전(眞傳)을 이어 받아 무당칠협에
못지 않았을 걸세."

그의 음성에는 울적함과 강한 자만심이 섞여 있었다.

장취산과 은소소는 은근히 후회가 생기기도 했다.

'애당초 그의 눈을 멀게 하지 않았던들 넷이서 아무 걱정 없이
이 섬에서 평화스럽게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세 사람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장취산이었다.

"사 선배님, 이 애를 양자로 삼겠다면, 선배님의 성을 따라 사
(謝)로 바꾸겠습니다."

사손은 뛸 듯이 기뻐하며 행여나 장취산의 마음이 달라질까 봐
다짐을 받듯 얼른 입을 열었다.

"그게 정말이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네. 나의 죽은 아들은
사무기(謝無忌)라고 했네"

장취산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만약 선배님이 원한다면 이 애의 이름을 사무기라 짓겠습니
다."

사손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애가 정말 나의 성을 따르면 자네들은 어떻게 하나?"

"애의 성이 사가 되는 장이 되든 우린 변함없이 사랑할 겁니다.
나중에 그가 성장하여 낳아준 부모에게 효도하고 의부를 존경하
고 사랑하면, 그보다 더 흐뭇하고 보람있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
까? 소소, 내 말이 맞지 않소?"

은소소는 약간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말이 맞아요. 한 사람이라도 이 애를 더 사랑해 줄 수
있다면 이 애에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사손은 갑자기 그 자리에서 허리를 꺽어 큰절을 올렸다.

"우선 자네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하네. 내 눈을 실명
시킨 원한도 말끔히 지워버리겠네. 나는 비록 친자식을 잃었지만
새로이 양자를 얻었으니 이보다 더 뜻깊은 일은 없을 걸세. 나중
에 사무기가 만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되면, 부모가 장취산과 은
소소이고, 의부가 금모사왕 사손이라는 것도 자연히 알려지게 될
걸세."

은소소는 사무기라는 이름이 다소 못마땅했으나, 아들의 장래를
위해 사소한 일은 문제삼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아기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애를 직접 안아 보시겠어요?"

어린애를 받아 안은 사손의 팔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너무나
기뻐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곧 어린애를 건네주었다.

"자..... 어서 엄마가 안게. 내 흉칙한 꼴을 보고 놀라면 어떻
게 하나?"

사실 갓난애가 그의 모습을 알아볼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말투에는 아기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들어 있었다.

은소소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선배님이 좋으시다면 좀더 안으세요. 나중에 걷게 되면 매일
데리고 놀도록 하세요."

"좋지. 좋고 말고....."

이때 어린애가 울음을 터뜨리자, 사손은 당황해 했다.

"애가 배가 고픈 모양이네. 어서 젖을 물리게. 난 밖으로 나가
겠네."

장취산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사 선배님......"

"우린 이제 한집안 식구가 됐는데 선배 후배를 따져서야 되겠
나? 참,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나? 우린 지금부터 결의형제를 맺
는 걸세. 그러면 나중에 애한테도 좋을 게 아니겠는가?"

장취산은 그의 간곡한 청을 거절할 수 없어 은소소의 산후 처리
가 끝나는 대로 결의형제와 의부(義父)를 섬기는 의식을 정식으
로 행하기로 했다.

이로부터-----

세 사람은 온갖 정성을 쏟아 어린애를 키웠다. 무기가 다섯 번
째 생일을 맞았을 때 장취산은 사손에게 한 가지 제의를 했다.

"형님, 애도 이제부터 무공을 배울 때가 됐으니, 형님께서 가리
치도록 하십시오."

사손은 뜻밖에도 고개를 내둘렀다.

"그건 안 돼네. 내 무공은 워낙 바탕이 깊어 어린애는 깨우칠
수가 없네. 역시 자네가 무당의 심법(心法)을 가르쳐주게. 그가
여덟 살이 되면 내가 가르치겠네. 약 이 년쯤 배우고 나서 자네
들은 돌아가야 할 게 아닌가?"

은소소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리가 돌아가다뇨? 중원으로 돌아간단 말입니까?"

사손이 진지하게 말했다.

"요 몇 년 동안 난 하루도 빠짐없이 이 섬의 풍향과 물살을 살
펴왔네. 매년 밤이 가장 길 때 언제나 북풍이 수십 일 쉬지 않고
불어왔네. 커다란 뗏목을 만들어 돛을 달고 그 북풍을 이용한다
면 계속해서 남쪽으로 갈 수 있을 걸세. 하늘이 방해하지 않는
한 자네들은 중원으로 돌아가게 될 걸세."

은소소는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자네들이라뇨! 그럼 아주머님은 우리와 함께 가지 않겠다는 뜻
인가요?"

"난 두 눈이 멀었는데 중원으로 돌아가 무엇을 하겠는가?'

"그럼 우리도 가지 않겠어요. 무기도 의부를 이곳에 남겨 두고
는 절대 떠나려 하지 않을 거예요."

"그 때가 되면 내가 무기를 십 년 간 보살펴 온 셈이니 그걸로
충분하네. 빌어먹을 하늘은 언젠가는 또다시 나에게 액운을 내릴
걸세. 그러니 이 애도 나하고 오랫 동안 함께 있으면 액운의 영
향을 받게 될 걸세."

이 말에 은소소는 소름이 오싹 끼쳤으나, 사손의 신세타령이려
니생각하고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무기가 여덟 살이 되자, 사손은 정말 그에게 자신의 무공을 전
수해 주기 시작했다.

어느새 또 일 년이 지났다. 무기가 태어난 후로부터, 사손은 더
이상 도룡도를 거들떠 보지 않았었다.

헌데-----

이날 밤, 장취산이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밖으로 나가 보
니, 달빛 아래 사손이 넓은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그 도
룡도를 받쳐들고 뭔가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장취산이 흠칫
놀라 비키려는데 사손은 이미 그의 발걸음소리를 듣고 입을 열었
다.

"오제(五第), 이 <무림지존 도룡보도>라는 여덟 글자는 아무래
도 터무니 없는 낭설인 것 같네."

장취산은 그에게 가까이 갔다.

"무림에서는 황당무계한 소문이 많기 마련입니다. 형님께선 지
혜가 깊으신데 왜 한사코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지 이해가 가
지 않습니다."

사손은 길게 숨을 들이키고 나서 심각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가 몰라서 그러네. 사실 난 소림파의 고승인 공견대사(空
見大師)로부터 이 얘기를 전해 들었네."

장취산은 다소 의아해 했다.

"앗! 공견대사라면 소림 장문인 공문대사(空聞大師)의 사형으로
서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네. 공견은 이미 죽었지. 내가 그를 때려 죽인 걸세."

장취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강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는 것이 퍼뜩 뇌리에 떠올랐다.

----- 소림신승(少林神僧), 견문지성(見聞智性)! -----

그것은 당금 소림에서 무학이 가장 뛰어난 네 명의 고승을 가리
키는 말이었다. 바로 공견, 공문, 공지(空智), 공성(空性). 오래
전에 공견대사는 병을 앓아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는데, 사손이
그를 죽였을 줄이야.....

사손은 탄식하면서 말했다.

"공견대사는 어찌나 왕고집인지 내가 때려도 시종 반격을 하지
않다가 결국 십 삼 장(掌)을 맞고 숨이 끊어졌네."

장취산은 더욱 놀랐다.

웬만한 고수도 사손의 일장을 맞으면 목숨을 잃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공견대사는 십 삼 장을 맞고서야 숨이 끊어졌으니, 그의
몸은 금강불괴(金剛不壞)에 가까왔다는 게 아닌가!

사손의 안색이 울적하게 변하며 매우 후회스러워 하는 것 같았
다. 아마도 그와 공견 사이에 범상치 않은 사연이 있는것 같았
다. 장취산은 궁금했으나 감히 묻지를 못했다.

사손이 짧은 침묵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평생 동안 가장 존경해 온 분이 바로 공견대사였네. 당시
그가 나에게 반격을 전개했다면 난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도 없었을 걸세."

"그 고승의 무학이 형님보다 더 심후했다는 뜻입니까?"

"어찌 나하고 비교가 되겠는가. 차이가 너무 많았네. 한마디로
말해 하늘과 땅이었네."

여지껏 어떠한 무림 인물을 거론해도 일소에 부쳤던 사손의 입
에서 이렇나 말이 나오자, 장취산은 의아해졌다.

사손은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내 말을 믿지 않는 모양이군. 좋네, 가서 무기를 불러오게. 오
늘 그 녀석에게 한 가지 옛날 이야기를 들려 줘야겠네."

장취산은 형님의 말을 감히 거역할 수 없어 곧 동굴로 들어가
아들을 깨웠다.

무기는 의부가 옛날 이야기를 해주겠다는 말을 듣자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그 바람에 은소소까지 깨어나 세 사람이 함께
나와 사손 곁에 둘러앉았다.

달빛 아래 사손의 모습은 마치 불상(佛像)처럼 진지했다. 그는
우선 무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애야, 머지 않아 넌 중원으로 돌아가게 될것이다."

무기는 어리둥절했다.

"중원이라뇨? 그게 무슨 말이죠?"

"우리가 엮은뗏목이 바다에 가라앉거나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
지만 않는다면, 틀림없이 중원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지금부
터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해 두어라. 만약 중원으로 돌아가게 되
면, 부모님을 제외하곤 아무도 믿지 말아야 한다.내가 네 나이
만했을 때 이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도....."

그는 말끝을 흐리더니 다시 이어갔다.

"내가 열 살이 되던 해에, 우연히 무공이 고강한 사람을 스승으
로 모시게 되었다. 나의 스승은 내 자질이 뛰어나다면서 심혈을
기울여 모든 무학을 전수해 주었다. 자연히 우린 부자이상으로
정이 두터웠다. 나는 스물 세 살이 되던 해에 사문을 떠나 멀리
서역으로 갔다. 그곳에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지....."

여기까지 말한 그는 은소소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매(五妹), 영존 백미응왕도 당시 서역에서 사귄 친구 중에
한 사람이라네. 나중에 난 아내를 맞이해 자식을 낳아 행복한 삶
을 누렸었네....."

사손은 당시를 회상하듯 주름진 얼굴에 환한 빛이 스쳐갔다. 그
는 무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계속했다.

"내가 스물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스승님이 찾아와 집에서 며칠
머물기로 했네. 나는 어린애처럼 기뻐하며 아내와 함께 모든 정
성을 기울여 스승을 대접했네. 한데, 그 스승이 인면수심(人面獸
心)일 줄이야. 어느 날 그는 술에 취해 갑자기 내 아내에게...."

장취산과 은소소는 동시에 놀란 외침을 토했다.

"앗! 그럴 수가....."

스승이 제자의 아내를 겁탈한 일은 무림에서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천인공노할 대악사(大惡事)였다.

사손의 눈가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나의 아내가 비명을 지르자 부친께서 그녀의 방으로 달려갔네.
스승은 추행이 발각되자 나의 부친을 죽이고 어머니도 죽였고,
심지어 돌도 채 안 지난 아들 사무기까지도....."

무기는 자기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무기요?"

장취산이 얼른 호통을 쳤다.

"의부께서 말씀하시는데 왜 끼어드느냐?"

사손은 무기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다. 내 친아들도 너와 똑같이 이름이 사무기였단다. 나의
스승은 그를 집어 던져 아예 핏덩어리로 만들었단다!"

무기가 다시 물었다.

"그럼..... 살아나지 못했겠네요?"

사손은 처연히 고개를 내둘렀다.

"살아나지 못했어! 살아날 수가 없었어....."

은소소는 얼른 아들에게 손짓을 하여 더 이상 의부에게 아무 말
도 묻지 말라고 했다.

사손은 다시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이었다.

"당시 난 그 광경을 보고 어찌 할 바를 몰랐네. 그 때, 내가 그
렇게도 존경해 오던 스승이 난데없이 나의 가슴을 강타했네. 난
피할 생각도 못하고 그의 일격을 맞아 그 자리에서 정신을 내가
다시 깨어났을 때 스승은 온데간데 없었네. 주위는 온통 시체로
덮여 있었지.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동생들, 하인들까지 모두 살
수를 당했네. 스승은 내가 일격을 맞고 죽은 줄 알고 더 이상의
독수를 전개하지 않았네."

장취산과 은소소는 이 불가사의한 비화(秘話)에 그저 넋을 잃을
뿐이었다.

"그 후 나는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 새로운 무공을 연마했네. 삼
년 뒤에 난 스승을 찾아가 겨루었지만 도저히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었네. 나는 다시 심산유곡을 찾아다니며 오직 스승을 꺾을 수
있는 무공을 연마하는데 전념했네. 한데, 스승의 공력도 훨씬 고
강해서 두 번째의 복수도 상처만 입은 채 수포로 돌아갔네......
난 상처를 치료한 지 얼마 후에 칠상장(七傷掌)의 비법을 얻게
됐네. 그 장법은 위력이 대단했네. 나는 다시 그 장법을 파고드
는데 이 년이란 세월을 허비했네. 난 천하에 제일가는 고수라도
능히 물리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겨 스승을 찾아갔네. 그런데 세
번째로 그를 찾아 갔을 때, 그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
네......"

사손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 그렇다고 해서 난 포기할 수 업었네. 난 격분한 나머지
도처에서 살인방화를 저질렀네. 그 때마다 난 그 현장에다 스승
의 이름을 남겼네."

"앗!"

"그럼....."

여기까지 들은 장취산과 은소소는 불현듯 생각나는 것이 있어
놀란 외침을 토했다.

"이쯤하면 나의 스승이 누군지 알겠나?"

은소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혼원벽력수(混元霹靂手)가 아닌가요?!"

한때, 무림에 갑자기 무서운 살겁의 회오리가 일었었다.

요동(僚東)에서 시작하여 영남(嶺南)까지 불과 반 년 사이에 연
속으로 삼십여 건(件)의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많은 무림의 고
수들이 영문도 모르게 피살되었다. 그리고 그 현장에는 언제나
<혼원벽력수>라는 이름이 남아 있었다. 피살된 자들 중에는 같은
문파의 장문인도 있었고, 강호에서 이름이 알려진 노영웅도 적지
않았다. 자연히 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
었다. 한 가지 사건만으로도 충분히 무림을 떠들썩하게 만들 수
있었는데 연달아 삼 십여 건이 터졌으니 강호는 그야말로 벌집을
쑤셔 놓은 꼴이었다.

잠시 무당칠협도 스승님의 명을 받들고 하산하여 이 사건의 진
상을 조사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
다. 강호인들은 누가 혼원벽력수의 이름을 빌어 저지른 사건이라
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혼원벽력수는 강호에서 덕망
이 놓은 인물인데다가, 피살자 중에는 그의 절친한 친구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무림인들은 흉수를 찾아 내지 못하자 그를 찾아나섰다.
그를 찾아 내야지만 이 사건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을거라 판단했
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원벽력수마저 연기처럼 사라졌다. 지금,
사손이 스스로 진상을 실토하지 않았다면, 장취산도 그 사건의
진상을 몰랐을 것이다.

사손은 아랫 입술을 깨물며 침통하게 말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앞세워 그 엄청난 일들을 저지른 것은, 그가
스스로 나서서 변명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힘을 빌어서라도
그의 행방을 찾아내는데 목적이 있었네."

너무나 엄청난 충격에 할 말을 잃고 있던 은소소가 입을 열었
다.

"그럼 나중에라도 혼원벽력수 성곤(成崑)을 찾아 냈습니까?"

사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찾아 내지 못했네. 나중에 난 낙양에서 송원교를 만나게 됐
지."

장취산은 흠칫 놀랐다.

"저의 대사형 송원교 말입니까?"

"그렇다네. 바로 무당칠협의 맏이인 송원교지. 당시 나는 보다
놀랄 만한 일을 저질러야겠다는 생각에 그날 밤 송원교를 죽이기
로 계획했네."

사손은 장취산을 잠시 바라보다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날 밤, 나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객점에서 운공조식을 했
네. 송원교가 무당칠협 중에 맏이니만큼 무공이 상당한 경지에
도달해 있을 걸로 생각했네. 만약 일격에 그를 죽이지 못하고 달
아나게 한다면 내 정체가 탄로나기 때문에 각별히 신중을 기했
네. 일단 내 정체가 탄로나면 스승을 강호로 끌어낼 계획이 수포
로 돌아갈 뿐 아니라, 모든 무림인의 공격 표적이 되어 원수도
갚기 전에 죽게 될 게 뻔했기 때문일세."

장취산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물었다.

"나의 대사형과 겨룬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저는 어째서
대사형께서 그 얘기를 거론하는걸 한 번도 듣지 못했을까요?"

"송원교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네. 아마 금모사왕 사손이
란 여섯 글자조차 들어본 적이 없을 걸세. 난 결국 그를 찾아가
지 않았기 때문이네."

장취산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늘에 감사를 드려야겠군요."

은소소가 빙긋이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빌어먹을 하늘에게 감사할 게 아니라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사
대가에게 감사를 드려야 옳죠."

장취산과 무기는 그녀의 퉁명스러운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
다.

밤은 계속 깊어만 갔다.



----- 제 2 권 1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2 권


제 2 장 십 년 만에 다시 중원(中原)으로


사손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날 저녁, 나는 객점 방 안에 앉아서 암중에 진기를 돋구며
칠상권을 하고 있었네. 자네는 나의 칠상권을 한 번도 보지 못했
지? 한 번 구경해 보고 싶지 않나?"

장취산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은소소가 먼저 말을 받았다.

"그것은 필히 신묘무비(神妙無比)하며 위맹절륜(威猛竊倫)할 거
예요. 그런 절예를 지녔으면서 왜 송대협을 찾아가지 않으셨어
요?"

사손은 은소소의 의중을 간파하고 빙긋이 웃었다.

"내가 칠상권을 시험하는 도중 자네의 남편을 다치게 할것이 염
려되는 모양이군. 이 권력(拳力)을 마음먹은 대로 조절하지 못한
다면 어떻게 칠상권이라 할 수 있겠느냐?"

말을 마친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한 그루 고목 옆으로 다가
갔다. 곧이어 외마디 기합소리와 함께 나무줄기를 향해 일권(一
拳)을 뻗어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고목은 손상을 입기는
커녕 나무 껍질조차도 파손되지 않았다.

'섬에서 구년 간 거주하는 동안 무공이 완전히 황폐되어 버렸구
나. 하기야 나는 그가 연공(鍊功)하는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
으니.....'

은소소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큰 소리로 갈채를 보냈다.

사손은 또 빙긋이 웃으며 은소소를 바라보았다.

"오매(五妹)는 마음에도 없는 갈채를 보내는 걸 보니, 나의 무
공이 옛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이런 궁핍하고 황량한 섬에 왕래하는 사람이라곤 우리 세 사람
뿐인데, 무슨 무공을 연마할 수 있겠어요?"

"오제는 내가 발출한 일권의 오묘함을 간파했는가?"

장취산은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형님께서 격출한 일권은 위세가 무척 위맹한 것 같은데, 나뭇
잎조차 흔들리지 않았으니 소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형님이
아닌 무기가 일권을 뻗어냈어도 나뭇 가지 정도는 흔들렸을 텐
데......"

"사흘 후면 나뭇잎이 모두 시들어 떨어지고 보름 후면 고목 전
체가 말라 죽을 것이네. 나의 이 일권에 고목은 맥락(脈絡)이 끊
어졌다네."

장취산과 은소소는 그의 말을 듣고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손은 말을 끝낸 후 도룡보도를 뽑아들더니 고목 줄기를 향해
한 차례 휘둘렀다. 순간 요란한 굉음과 함께 고목은 힘없이 바닥
에 쓰러졌다. 장취산 등 세 사람이 잘려진 고목 곁으로 나가가
살펴보니, 과연 물을 운반하는 나무의 근맥(筋脈)이 대부분 끊어
졌으며, 어떤 것은 비틀어지고 어떤 것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
을 정도로 가루로 변해 있었다.

장취산은 크게 탄복하며 입을 열었다.

"형님, 소제는 오늘 정말 좋은 구경을 했습니다."

사손은 만면에 득의의 빛을 가득 떠올렸다.

"나의 이 일권에는 일곱 줄기의 경력이 함유되어 있다네. 강맹
(剛猛), 음유(陰柔), 강중유유(剛中有柔), 유중유강(柔中有剛),
횡출(橫出), 직송(直送), 내축(內縮) 등의 경력이지. 적은 첫째
줄기의 경력은 감당해도 둘째 줄기의 경력은 막아내지 못하며,
설령 둘째 줄기의 경력까지는 감당해 낸다 해도 세째 줄기의 경
력을 막아내지 못한다네. 칠상권이란 이름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
지. 오제, 그날 자네와 내가 장력을 겨루었을 때 내가 칠상권을
시전했다면, 자네도 막아내지 못했을 것일세."

"그랬겠군요."

무기는 무슨 까닭으로 의부(義父)와 아버지가 장력을 겨루었는
지 묻고 싶었으나, 은소소가 고개를 저으며 제지하는지라 사손에
게 시선을 돌렸다.

"의부님, 칠상권을 내게도 가르쳐 주시지 않겠습니까?"

사손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돼!"

무기가 크게 실망하여 다시 사정하려 하자 은소소가 웃으며 말
을 받았다.

"무기야, 바보 같은 소리 그만 해. 너의 의부께서 익힌 무공은
너무 정묘하여 상승내공(上乘內功)을 지니지 않고선 익힐 수 없
어."

"그렇다면 상승내공부터 익힌 후 다시 의부께 부탁해야겠군요."

사손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 칠상권은 배우지 않는 것이 좋아. 사람의 체내에는 음양이
기(陰陽二氣)와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 오행(五行)이 있지. 심
(心) 즉 마음은 화(火)에 속하고 폐는 금(金)에 속하며 신장은
수(水)에 속한다. 그리고 허파와 간은 목(木)에 속하지. 이 칠상
권의 권공은 한 번씩 익힐 때마다 내장이 한 번의 손상을 입게
돼. 소위 칠상(七傷)이란 먼저 자신부터 해친 다음 적을 해친다
는 뜻이야. 내가 칠상권을 연마할 때 심맥(心脈)을 다치지 않았
다면, 때때로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광성(狂性) 발작을 일으키
지도 않지."

장취산과 은소소는 이 말을 듣고서야 그가 때때로 광성이 발작
되는 이유를 알았다.

사손이 가볍게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나의 내공이 공견대사나 무당 장진인(張眞人) 정도로 심후하고
견실해진 후에 이 칠상권을 연마했다면, 심맥이 이렇게 손상되지
는 않았을 걸세. 당시 나는 오직 복수를 해야겠다는 조급한 마음
에 온갖 심기(心機)를 다 동원하여 공동파의 수중에서 칠상권보
를 탈취하는데 성공했네. 그리고 권공을 연성하기도 전에 사부가
죽어 복수를 하지 못할 것이 염려되어, 서둘러 연공을 시작했지.
그 후 내장이 크게 손상되었음을 알았을 때는 이미 구제할 수 없
는 상황이었네. 오매는 칠상권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겠나?"

은소소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알 것 같아요. 아주버님의 사부가 익혔다는 무공과 비슷한 모
양이지요?"

"그렇다네. 내 사부의 혼원벽력수(混元霹靂手)라는 별명이 말해
주듯이 그의 장력에는 풍뢰(風雷)가 함유되어 있어 위력이 극히
놀랍지. 내가 그와 칠상권공으로 대적하여 권력이 그의 몸에 닿
는 순간,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피하려 할 때는 이미 때가 늦게
되지. 오제, 자네는 나의 심성이 음침하다고 꾸짖지 말게. 내 사
부는 비록 겉으로 보기엔 소박하지만 천하의 어느 누구보다 심계
(心計)가 뛰어난독랄한 사람이네. 그런 사람에겐 똑같이 음험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원수를 갚을 길이 없네. 그날 저녁 나는
칠상권공을 시험해 본 후 송원교를 찾아가려고 담을 뛰어넘었지.
바닥에 닿기도 전에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
리는 바람에 나는 대경실색했네. 나는 즉시 손을 뒤로 휘저었지
만, 바람만 잡았을 뿐이었고 일권을 반격한 것도 허사였었네. 그
래서 왼발을 바닥에 내딛기 무섭게 몸을 돌렸는데, 그 때 뒤에서
어떤 사람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고해(苦海)는 끝이 없고 고
개를 돌리는 곳이 바로 항구라고 말하더군."

무기는 크게 흥미를 느끼며 말했다.

"의부, 그 사람은 의부에게 장난을 친 모양이군요."

그러나 장취산과 은소소는 그 사람이 바로 공견대사임을 짐작했
다.

사손이 말을 이었다.

"당시 나는 너무 놀라 전신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지. 그런 강
한 무공으로 나를 죽이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나는 놀람과 농락을 당한 분노가 범벅이 된
채 재차 몸을 돌려 보니, 약 사장 밖에 한 분의 백의승인(白衣僧
人)이 서 있더군. 내가 몸을 돌리기 직전가지만 해도 그는 내 등
뒤에서 불과 두세 자 거리에 있었는데, 눈깜짝할 사이에 사장 밖
으로 물러났으니 그 신법이 얼마나 놀라운가! 내가 몸을 돌리자
그 백의승인은 자기가 공견이라고 말하더군. 나는 공견이라는 법
호(法號)를 듣는 순간, 강호에 널리 알려진 소림신승(少林神僧),
견문지성(見聞智性)이라는 말을 생각해 냈지. 그리고 그는 사대
신승(四大神僧) 중에서도 첫째이니, 무공이 이렇게 고강한 것도
무리가 아님을 알았네."

장취산은 그 후 공견대사가 사손의 십삼 권을 맞아 죽었음을 생
각하고, 마음 속으로 은근히 불안을 금치 못했다.

"당시 나와 그분과의 대화와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은 대략
이러했었네."

-----------------------------------------------------------

"소림사의 공견신승(空見神僧)이신가요?"

"신승이란 호칭은 감당하기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소림의 공견
임은 틀림없습니다."

"불초는 대사와 생면부지인데, 대사께선 어째서 불초를 희롱하
시는지요?"

"거사께선 오늘 밤 무당파의 송원교 대협을 죽이러 갈 생각이지
요?"

속셈을 간파당한 사손은 내심 크게 놀랐다.

공견대사는 사손이 대답을 하지 않자 다시 입을 열었다.

"거사께서는 또 한 차례 천하무림을 발칵 뒤집어 놓을 생각이지
요? 그래서 혼원벽력수 성곤으로 하여금 모습을 나타나게 하여,
당신의 일문(一門)을 살해한 원수를 갚을 생각이지요?"

그가 사부의 이름을 들먹이자 사손의 놀라움은 한층 더했다. 사
손은 혼원벽력수 성곤이 그의 일문을 몰살한 일을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았다. 또한 그의 사부 성곤도 이 일을 은폐하기에 급급해
다른 사람에게 말할 리가 만무했다.

사손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공견대사를 주시했다.

"대사께서 그의 소재를 알려 주신다면 이 사손은 평생 동안 대
사를 위해 몸을 바치겠습니다."

공견대사는 가볍게 탄식했다.

"성곤이 저지른 죄가 용서받기 어려울 정도로 지대한 것은 사실
입니다. 그러나 거사께서 격노한 나머지 이렇게 많은 무림인들을
살해한 죄악도 결코 작지는 않습니다."

사손은 그가 보인 무공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강했고, 또
지금은 그에게 부탁하는 입장인지라 분노를 꼭 참았다.

"그것은 성곤이 종적도 남기지 않고 어디론가 깊숙이 숨어 버렸
으니, 도저히 찾을 길이 없어....."

"나도 당신의 가슴속에 맺힌 원한을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송
대협은 무당파 장진인의 수제자(首弟子)이므로, 장신이 그를 해
친다는 것은 큰 화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나의 의도는 화를 저지르기 위함입니다. 저지르는 일이 클수록
성곤으로 하여금 모습을 나타내게 할 확률이 높으니까요."

"사 거사, 당신이 송대협을 죽인다면 당신이 바라던 대로 성곤
이 나서는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성곤은 지난
날의 성곤이 아닙니다. 당신의 무공 실력으로는 그의 적수가 되
지 못하므로 원한을 갚는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성곤은 나의 사부입니다. 때문에 그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내가 대사보다 더 잘 압니다."

"그는 다시 뛰어난 고수를 사부로 모셨기 때문에, 무공이 크게
진전되었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공동파의 칠상권을 연성했어도
여전히 그를 당해 내지는 못합니다."

사손의 놀라움은 매우 컸다.

사손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공견을 주시했다.

"대사께서는 그 일을 어떻게 아셨지요?"

"성곤이 내게 말해 주었습니다."

사손의 놀라움은 극에 달했다.

"그럼 그는 또 어떻게 알았지요?"

"최근 몇 년 동안 그는 시종 당신 곁을 따라다녔습니다. 다만
수시로 변장을 했기 때문에 당신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지
요."

"흥! 내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구요? 설령 그가 재로 변한다
해도 나는 그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사 거사, 당신은 오직 한시바삐 절예를 연성하여 복수를 하겠
다는 일념뿐이었는지라, 주위의 일을 마음 속에 두지 않았습니
다. 그래서 당신은 밝은 곳에 노출되어 있고 그는 어두운 곳에서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당신은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암암리에 나를 죽였으면 후환을 제거할 수 있
었을 텐데....."

"그가 당신을 해칠 마음이 있었다면, 아마 당신은 오래 전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 거사, 당신은 지난날에 두
차례나 그를 찾아가 복수하려 했지만 두 차례 모두 패했습니다.
그가 당신의 목숨을 뺏을 생각이 있었다면 그 때 왜 당신을 죽이
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당신이 칠상권보를 탈취하러 갔을 때
당신은 공동파의 삼대고수(三大高手)와 내공을 겨루었죠? 당시
공동오로중의 나머지 이로가 당신을 포위 공격하지 않았는지 아
십니까?"

사실상, 그 때 그는 공동 삼로에게 부상을 입힌 후 나머지 이로
도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 괴이한 일은
지금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는 터였다.

그는 공견대사가 이렇게 말하자 내심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그럼 공동파의 나머지 이로는 성곤에게 중상을 당했단 말입니
까?"

"공동 이로가 어떤 수법으로 부상을 당했는지 사 거사는 직접
살펴보지 않았습니까? 당시 그 두 사람의 얼굴빛이 어땠습니까?"

"대사의 말을 들어 보니, 당시 공동 이로는 성곤에게 부상을 당
한 것이 분명하군요."

당시 공동 이로의 얼굴엔 온통 붉은 반점이 얼룩져 있었다. 그
것은 혼원공의 음경(陰勁)에 의해 부상을 당했거나, 이질, 장티
푸스 등 악성 전염병에 걸렸을 때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렇다
면 공동 이로는 혼원공의 공격을 당했음이 분명했다. 또 당금 천
하에서 혼원공을 연성한 사람은 사부 성곤과 그 자신 두 사람뿐
인 것이다.

공견대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탄식했다.

"당신의 사부는 취중에 당신의 일문을 몰살한 것을 얼마나 후회
했는지 모릅니다. 때문에 당신이 복수를 하기 위해 두 차례나 그
를 찾아왔지만 당신을 죽이지 않은 것입니다. 심지어는 당신에게
부상을 입히는 것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두 차례 모
두 미친 듯이 그에게 덤벼들었습니다. 그는 당신에게 부상을 입
히지 않고서는 도저히 당신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갈 수가 없었지
요. 그 이후부터 그는 줄곧 당신의 뒤를 따라다니며 당신이 위기
를 당할 때마다 암암리에 당신을 구해 주었습니다."

사손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공동 오로와 싸운 일 외에도 세 건
의 수수께끼 같은 일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극도로 위급한 상황
에 처했을 때마다 적의 공세가 갑자기 느슨해지곤 했던 것이다.

공견대사가 또 가볍게 탄식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자기가 저지른 죄가 너무나 엄청난 것임을 잘 아는 지라,
당신에게 용서조차 빌 수 없어 당신이 그 일을 잊기만 바랬습니
다. 그런데 당신은 그 일을 잊기는커녕 오히려 일을 더욱 크게
벌렸습니다. 이런 마당에 이제 또 송원교 송대협을 살해한다면,
이 일은 도저히 수습할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대사께서 나의 사부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당신 사부는 당신을 만날 면목이 없고 또 당신을 만날 용기도
없습니다. 그리고당신은 그를 만난다 해도 아무 소용 없습니
다."

"대사, 어떻게 나의 피맺힌 원한을 이렇게 쉽게 포기하라는 말
입니까?"

"사 거사의 참혹한 심정을 저도 충분히 이해하고 마음 아픕니
다. 그러나 당신의 사부는 취중에 이성을 잃은 것이지 본래의 뜻
이 아니었습니다. 하물며 지금 그는 깊이 뉘우치고 있으니, 사
거사께선 지난날의 사제지정(師弟之情)을 생각하여 한 번만 너그
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사손은 주먹을 불끈 쥐며 고함을 질렀다.

"비록 그의 일장에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피맺힌 이 원한을
꼭 복수하고야 말겠습니다."

공견대사는 무엇인가 한참 동안 깊이 생각하더니 사손을 바라보
았다.

"사 거사, 영사(令師)의 무공은 지난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고강해졌습니다. 제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직접 저에
게 몇 권(拳)을 시험해 보십시오."

"대사와는 아무 원한도 없는데 어찌 대사를 해치겠습니까? 불초
의 무공은 비록 보잘것 없지만 칠상권은 아무나 쉽게 막아낼 수
있는 무공이 아닙니다."

"사 거사, 영사께서 당신의 일가족 열 세 명의 목숨을 살해 했
으니, 당신도 내게 십 삼 권을 공격하십시오. 그래서 제게 상처
를 입힌다면 저는 이 일에 더 이상 간섭하지 않을 것이며, 영사
께서도 스스로 모습을 나타내어 당신을 만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이 원한을 없었던 것으로 하십시오."

이 말에 사손은 얼른 대답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공견대사의 무공은 매우 고강하니, 칠상권이 아무리 위맹하다
해도 만약 그를 다치게 하지 못한다면 원수를 갚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공견대사는 그가 대답을 하지 않자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이 일에 개입한 이상 당신이 무고한 생명을 해치는 것을
더 이상수수방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선량한 마음으로
고쳐 먹고 여기서 손을 깨끗이 씻는다면 지난일도 없었던 것으로
하고 문제삼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계속 복수를 고집한다면, 당
신에게 살해된 사람의 자제나 그 제자들도 당신에게 복수하려 한
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좋습니다. 내가 십 삼 권을 공격할 테니 감당하기 어려우면 즉
시 손을 멈추라고 말하십시오. 그대신 당신은 약속대로 나의 사
부를 만나게 해줘야 합니다."

공견대사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손은 삼성(三成)의 공력만 돋구어 제일권을 그의 가슴에 가
격했다. 둔탁한 음향과 함께 공견대사는 몸을 휘청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내가 삼성의 공력만 사용했는데도 뒤로 한 걸음 밀려났으니,
칠상권을 펼쳐낸다면 삼 권만 가해도 극락객이 되어 버리겠군.'

사손은 이렇게 생각하며 제 이권에는 공력을 약간 증가시켰다.
그러나 공견대사는 이번에도 몸을 휘청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
섰다. 제 삼권에는 칠성의 공력을 돋구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
다. 사손은 그를 쓰러뜨리려면 전력을 다해야 함을 알았지만, 그
가 죽을 것이 염려되었다. 사손은 비록 지금까지 많은 악행을 저
질렀지만, 공견대사의 그 자비로운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존경심
이 일었다.

"대사, 당신은 얻어맞기만 하고 반격은 가하지 않으니 더 이상
공격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나의 삼 장을 받아냈으니 나도
송원교를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그럼 성곤과의 원한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손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계속했다.

"대사께서 이 일을 간섭하고 나섰으니, 나는 대사를 존경하는
뜻에서 앞으로 성곤과 그의 가족에게만 복수할 뿐 이 일과 관계
없는 무림인은 한 명도 해치지 않겠습니다."

"아미타불! 사 거사께서 그런 결심을 하셨다니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소승은 이 원한을 완전히 화해시키기로 결심했으니, 사
거사께선 나머지 십 권도 마저 공격하십시오."

'대사가 끝까지 고집을 피우니, 성곤을 끌어내려면 부득불 칠상
권을 사용하는 도리밖에 없겠군.'

여기까지 생각을 굴린 사손은 더 이상 양보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례를 범하겠습니다."

하며 제 사권을 격출했다. 그는 이번에는 칠상권으로 공격했다.
일 권이 공견대사의 몸에 적중되자 가슴이 안으로 약간 들어가는
가 싶더니,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딛
었다. 공견대사는 소림파의 금강불괴체신공(金剛不壞體神功)을
운기했던 것이다.

사손은 갑자기 한 줄기 반탄지력(反彈之力)에 의해 내심 크게
놀라며 오권을 음유지력(陰柔之力)으로 공격했다. 하지만 공견대
사는 이번에도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사손의 공격을 막았다.

공견대사가 백미(白眉)를 약간 치켜올렸다.

"사 거사의 칠상권 위력이 이토록 고강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
했습니다. 제가 공력을 되돌려보내지 않았다면, 당신의 칠상권을
감당해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손은 단숨에 나머지 칠상권을 연달아 공격했다. 그러나 공견
대사는 광풍 폭우와 같은 사 권을 차례차례 몸으로 받아냈으며
그 때마다 앞으로 한 걸음씩 내딛었다. 사손은 외마디 함성과 함
께 제 십권을 격출했다. 순간 공견대사는 고개를 약간 끄덕이더
니 권력이 몸에 닿기도 전에 재빨리 기선을 제압해 버렸다.

순식간에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제 십일권은 서둘러 공격하지 말고, 우선 마음부터 진정시킴
후 발출하십시오."

사손은 비록 호승심(好勝心)이 강한 사람이었지만,한동안은 제
십일권을 공격할 수가 없었다.

'아직 삼 권이 남았지만 이 대사는 사람됨이 인자하고 도량이
넓은데 이분에게 부상을 입힐 수는 없다. 하지만 사부를 나오게
하여 피맺힌 원한을 갚으려면 모험을 하지 않을 수 없지.....'

마음을 진정시킨 사손은 체내의 공력을 최대한으로 모아서 제
십일권을 공격했다. 그런데 공견대사가 몸을 공중으로 피했기 때
문에, 그의 가슴에 적중되어야 할 일 권이 아랫배에 적중되었다.
순간 공견대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몹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
다. 공견대사는 가슴으로 일 권을 받아내면 반탄력이 너무 강해
사손이 감당해 내지 못할 것이 염려되어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아랫배로 일 권을 받아낸 것이다.

사손은 놀람과 동시에 감격이 범벅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
다.

"나의 사부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했으니 죽어 마땅한데, 대
사께서는 어찌하여 금옥지체(金玉之體)로 그의 재앙을 막으려 하
십니까?"

공견대사는 한참 동안 호흡을 조절하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이 장만 더 받아내면 이 원한을 완만히 해결할 수 있게
되겠군요."

그가 말을 하는 동안은 호흡이 조절되지 않음을 발견한 사손은
급히 생각을 굴렸다.

'음, 금강불괴체신공을 운기할 때는 말을 하면 안 되는 모양이
구나. 그렇다면 나는 그에게 말을 시키면서 갑자기 일권을 공격
해야지.'

이렇게 생각한 사손은 겉으론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고 또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십 삼 권 이내에 당신에게 부상을 입힌다면, 당신은
정말 사부를 만나게 해주시겠습니까?"

"그건 그가 직접 내게 한 말이므로....."

사손은 바로 이때다 싶어 재빨리 그의 아랫배를 향해 일권을 공
격했다. 이 일권은 너무나 빨랐고 또 아랫배를 공격하기 때문에
공견대사로서는 호체신공(護體神功)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불문신공(佛門神功)은 생각만 해도 자연히 운기되는 지라
사손의 권경이 그의 아랫배에 닿는 순간, 그는 이미 신공을 돋구
어 전신을 보호했다. 순간, 사손은 하늘과 땅이 빙글빙글 돌고
심장이 파열되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여덟 걸음이나 후퇴하여 고
목에 부딪친 뒤에야 간신히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사손은 자신을 잃은 상태에서 갑자기 독랄한 생각이 떠올라 고
의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피맺힌 원한을 복수하긴 틀렸으니 이 세상에 살아 있을 가
치도 없게 되었습니다."

하고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천령개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그는
천령개를 내리쳐 자살을 기도할 때, 공견대사가 달려와 제지시키
면 그 틈을 이용해 독수를 펼칠 계획이었다. 사손은 자신도 목숨
을 건 모험이었다. 만약 공견대사가 그의 속셈을 간파하여 제지
시키지 않는다면, 어렵게 생각해 낸 계획이 수포가 되는 것이었
다.

"안 됩니다. 사 거사.....!"

사손의 갑작스러운 행위에 공견대사는 깜짝 놀라 고함을 지르며
덮쳐와 그의 오른쪽 손목을 붙잡았다. 사손은 이 절호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좌권에 전력을 운기하여 공견대사의 명치를 공격했
다. 완전 무방비 상태에서 일 권을 맞은 공견대사는 신공을 운기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순식간에 공견대사는 내장이 파열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일 권을 성공시킨 사손은 공견대사가 살아날
가망이 없음을 알고 갑자기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의 몸 위에 엎
드려 대성통곡했다. 공견대사는 그가 통곡을 하자 빙긋이 웃으며
오히려 그를 위로했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니 사 거사께선 너무 슬퍼
하지 마십시오. 그것보다 당신의 사부가 곧 나타날 테니, 당신은
마음을 진정시켜 다음 일에 대비하십시오."

이 말에 사손은 자기가 십 삼 권을 공걍扁쩜밗크게 소
모시켰으므로 강적이 나타날 시기에 통곡만 하고 있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을 하기 시작했
다. 하지만 긴 시간이 지나도 성곤은 모습을 나타낼 기미조차 보
이지 않았다. 그가 의혹의 눈빛으로 공견대사를 내려다보자, 공
견대사는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그는 약.....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닌데..... 어떤 사
람에게 갑자기 길을 제지당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군요."

사손은 대노하여 고함을 질렀다.

"나를 감쪽같이 속였군요. 그래서 당신을 죽이게 했으며....."

"사 거사, 결코 당신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속인
결과가 되고 말았으니 정말 미안합니다."

사손은 격노한 나머지 또 그를 나무라려다 말고 생각을 굴렸다.

'그가 나를 속여 자신을 죽이게 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오히려 그가 내게 사과하고 있으니.....'

사손은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생겨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
다.

"대사, 소원이 있으면 말씀해 보십시오. 불초가 힘 닿는데까지
노력하겠습니다."

공견대사는 비단 무공만 고결할 뿐 아니라 대지대혜(大智大慧)
하고 대자대비(大慈大悲)하여 사손의 심중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사손은 공견대사의 숨결이 점점 약해지자 손바닥을 그의 영대혈
에 올려 내력(內力)으로 그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시키려
고 안간힘을 썼다.

공견대사가 갑자기 숨을 길게 들이키며 물었다.

"당신의 사부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네!"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면 오지 않을 것입니다."

"대사,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는 앞으로 다시는 무고한 살생으
로 그를 나타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하늘 끝까지 가서라
도 그를 찾아 내고 말 것입니다."

"하.....하지만 다.....당신의 무공으로는 그의 적수가 되지 못
합니다. 혹.....혹시....."

공견대사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사손이 귀를 그의 입가에
바짝 갖다 대자, 그는 다시 실날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혹시 도룡도(屠龍刀)를 찾아 칼 속의 비........"

공견대사는 결국 말을 끝맺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

공견대사와 있었던 일의경과를 모두 이야기한 사손은 장취산을
바라보았다.

"오제, 그날 선상에서 자네가 나와 장력을 겨룰 때 내가 자네
의 목숨을 뺏지 않은 것은, 갑자기 공견대사의 말이 생각났기 때
문이었네."

장취산은 자기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 공견대사임을 알고 고
승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깊어졌다. 또한 사손이 도룡도의 비밀
을 알아내려고 온갖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와, 평소에는 그렇게
온순하고 예의바른 그가 광성(狂性)이 발작하면 야수처럼 변하는
까닭, 그리고 절세무공을 지녔으면서도 항상 수심이 가득한 이유
를 모두알게 되었다.

사손이 또 긴 한 숨을 내쉬었다.

"그 후 나는 도룡도의 소식을 듣고 왕반산도(王盤山島)로 칼을
탈취하러 달려갔었지. 오매 영존과 나는 죽마고우로 무척 절친했
으며, 응왕사왕(鷹王獅王)이라는 명호로 당세에 위명을 떨쳤지만
나중에는 서로 원수가 되었지. 그 가운데는 다른 사람이 개입되
었지만 말할 수는 없네. 나는 칼을 획득하기 전에는 성곤을 찾으
려고 혈안이 되었었지만, 도룡도를 획득하고부터는 오히려 그가
나를 찾아올 것을 두려워했지. 그래서 은밀한 장소를 찾아 칼 속
에 숨겨진 비밀을 찾아내기 시작했으며, 자네들이 나의 행적을
누설할 것이 염려되어 함께 이곳으로 데려온 게야. 그러나 십년
이 지난 오늘 날까지 아무 소득도 없으니....."

"공견대사께서 임종 전에 남긴 도룡도를 찾아 그 속의 비......
뭐라고 한 말은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닐까요?"

"지난 십년동안 그 비밀을 알아내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네. 칼
속에 큰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은 틀림없으나, 그 비림이 무엇인
지 알아낼 방도가 없으니....."

그날 밤의 긴 이야기가 있은 이후로 사손은 이 일을 두 번 다시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기를 독려하여 무공을 연마시키는 일
에는 한창 더 엄격해졌다. 무기는 이제 겨우 아홉 살밖에 되지
않았는지라, 아무리 총명하다 해도 단기간에 사손의 절세 무공을
깨닫기란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사손은 그를 때리고 꾸짖으며 휴
식을 취할 시간을 조금도 주지 않았다.

보다못한 은소소가 어느 날 사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주버님, 아주버님의 개세신공을 무기가 짧은 기간에 어떻게
모두 익힐 수 있겠어요?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 천천히 가르치
세요."

"나는 그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머리 속에 기
억하게 만드는 거야."

"그럼 지금까지 무기에게 무공을 가르치지 않았단 말인가요?"

"흠! 일초일식(一招一式)씩 가르쳐 언제 다 배울 수 있겠느냐?
나는 다만 그에게 머리 속에 영원히 잊지 않도록 기억시켜 주고
있을 뿐이다."

은소소는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그가 하는 일에는 언제
나 남다른 데가 있는지라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오히려 무기는 나이에 비해 영특하고 사리 판단을 잘하는 지라
모친을 위로했다.

"어머니, 의부께선 다 나를 위해 그러시는 거예요. 그분이 아프
게 매질을 할수록 나는 더욱 잘 기억할 수 있어요."

어느 날 아침, 사손이 갑자기 장취산 부부를 불렀다.

"오제, 오매, 앞으로 넉 달만 지나면 바람이 남쪽으로 불테니
오늘부터 뗏목을 만들자."

장취산은 크게 기뻐하며 물었다.

"뗏목을 만들어 중원으로 돌아갈 생각이십니까?"

"그것은 하늘에 달린 일이야."

처음에 은소소는 모험을 하면서까지 중원으로 돌아갈 것이 아니
라, 아무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섬에서 그냥 살자고 주장했다. 그
러나 무기의 장래를 생각해서 생각을 바꾸었다.

뗏목을 만들면서도 사손은 무기를 곁에 앉히고, 그간 배운 무공
에 대해 질문하고 또 새로운 것을 엄하게 가르쳤다. 심지어 사손
은 무기에게 각종 도법과 검법까지도 마치 사서삼경을 외우듯 머
리로 기억하게 했다. 사손이 무기에게 해석은 한 마디도 해주지
않고 각종 무공을 머리로만 기억하게 하자, 은소소는 무기가 불
쌍하게 생각되었다.

뗏목은 두 달이 걸려서야 가까스로 완성이 되었다. 그리고 돛대
를 세우는데 또 반 달이 걸렸다. 그 다음에는 짐승의 고기를 소
금에 절여 말리고 가죽으로 물주머니를 만들었다. 어렵게 어렵게
모든 준비를 끝냈으나 바람은 아직도 남쪽으로 불지 않았다. 그
들은 해변에 간단한 움막을 만들어 그곳에서 거주하면서 바람이
남쪽으로 불 때를 기다렸다.

어느 날 새벽, 드디어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북쪽에서 남쪽으로
불고 있었다.

장취산 부부는 뛸 듯이 기뻐하며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
했다. 모든 준비를 끝낸 세 사람은 뗏목을 바다로 밀어 놓은 후
무기와 은소소가 먼저 뗏목 위로 뛰어올랐다. 이어 장취산이 사
손의 손을 잡았다.

"형님, 여기서 뗏목까지의 거리는 여섯 자밖에 되지 않으니, 손
을 잡고 함께 뛰어 오릅시다."

"오제, 우리는 이제 영원히 작별하게 되었네. 부디 몸조심 하
게."

장취산은 영원한 작별이라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형.....형님은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형님은 우리와
함께 가지 않을 작정입니까?"

장취산은 불현듯 몇 년 전 사손이 자기 혼자 섬을 떠나지 않고
남겠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그 이후 이 일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거론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취산 부부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뗏목을 만드는 동안에도 사손은 전혀 그런 뜻을 비추지
않았었다.

"헝님 혼자 이 섬에 계시면 적적해서 견디기 어려울 테니, 함께
중원으로 돌아갑시다."

장취산이 이렇게 말하며 힘껏 당겼으나, 사손의 몸은 마치 거대
한 바위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장취산은 마음이 조급해진 나
머지 은소소를 불렀다.

"여보, 형님께서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는구료!"

이 말을 들은 은소소와 무기는 깜짝 놀라며 동시에 뗏목에서 뛰
어내렸다. 무기가 사손 곁으로 다가와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다.

"의부께선 왜 함께 가지 않으려고 하십니까? 의부께서 안 가시
면 저도 떠나지 않겠습니다."

사실 사손도 이들 세 사람과 헤어지기가 싫었다. 왜냐하면, 이
번에 헤어지면 다시 만날 기약도 없거니와 황량한 섬에 혼자 산
다는 것은 차라리 죽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장
취산, 은소소와 결의형제를 맺은 후부터는 그들을 자기 자신보다
더 이끼고 사랑했으며 의자(義子) 무기에 대한 사랑은 친자식을
능가할 정도였다. 하지만 자신은 일신에 많은 피빛을 지고 있는
지라, 강호의명문정파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물며 도룡도까지 이미 그의
수중에 있으므로, 그가 만인의 표적이 되어 있음은 의심할 여지
가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눈까지 멀어서 원수들의 포
위 공격을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가 중원에 나가 원수들의 포
위 공격을 받게 되면 장취산 부부가 수수방관할 리 만무하며, 그
렇게 되면 분쟁이 일어나 네 사람 모두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은
뻔한 일일 것이다 .사손은 이런 것들을 생각해서 혼자 이곳에 남
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무기를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

"무기야, 너는 착한 아이이니 의부의 말을 잘 듣겠지? 의부는
나이도 많고 눈까지 멀었기 때문에 중원에 가면 습관이 되지 않
아 여기보다 오히려 더 불편하단다."

"중원에 돌아가면 제가 항상 의부님 곁에서 시중을 들어드리겠
어요."

"아냐, 나는 아무래도 여기 남아 있는 게 편할 것 같아."

무기가 장취산과 은소소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우리 모두 여기서 의부님과 함께 살아요."

은소소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아주버님에게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면 우리 함께 대책을 세
워요.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아주버님만 여기에 남겨 두고 떠
날 수는 없었요."

사손은 급히 생각을 굴렸다.

'이들은 나와 깊이 정이 들어 절대 나를 두고 그들만 가지는 않
을 모양인데, 무슨 방법으로 그들을 떠나게 하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장취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형님은 적이 너무 많기 때문에 우리에게 누가 될 것을 염려하
시지요? 우리가 중원에 돌아가도 은밀한 장소를 찾아 외부와 왕
래를 하지 않으면 걱정할 게 없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무당산에
은둔하면 금모사왕이 무당산에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
할 것입니다."

사손이 얼굴에 오만한 빛을 떠올렸다.

"흥! 내가 아무리 눈이 멀고 쓸모없는 패물이 되었어도, 아직은
너의 사부 장진인의 비호를 받을 정도로 무능하진 않아."

장취산은 자기의 실언을 후회하며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형님의 무공은 가사(家師)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데, 그
분의 비호를 받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회강서장(回彊西藏),
관외대막(關外大漠) 등 우리 네 사람이 은거할 정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은밀한 장소로 말하자면 천하에서 여기를 능가하는 곳이 없다.
너희들은 도대체 떠날 작정이냐, 떠나지 않을 작정이야?"

"형님께서 함께 가시지 않는다면 우리도 가지 않겠습니다."

은소소와 무기도 장취산의 말에 찬성했다.

사손이 가벼운 탄식을 했다.

"좋다. 모두 여기 남아 있다가 내가 죽은 다음에 떠나도록 해
라."

"예, 형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기서 이미 십 년을 살았는데,
서둘러 중원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손이 갑자기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내가 죽고 나면 너희들은 이곳에 아무런 미련이 없겠지?"

하며 도룡도를 뽑아들더니 자기의 목을 베려 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사태에 장취산은 대경실색했다.

장취산은 사손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울먹이며 말했다.

"형님의 결심이 그러하시다면, 소제는 이만 작별의 인사를 올리
겠습니다."

하고 사손에게 작별의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어린 무기는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의부께서 가시지 않는다면 저도 가지 않겠습니다. 의부께서 자
진하면 저도 자진하겠습니다. 사나이 대장부는 한 번 한다면 합
니다. 의부께서 칼로 목을 베면 저도 칼로 목을 베겠습니다."

"이놈아, 무슨 당치도 않은 말을 지껄이느냐!"

사손은 고함을 지르며 무기의 뒷덜미를 붙잡아 뗏목 위로 던졌
다. 이어 장취산과 은소소마저 모두 뗏목 위로 던졌다.

"오제, 오매, 그리고 무기야, 아무쪼록 무사히 중원에 도착하기
를 빌겠다."

하고 무기에게 특별히 한 마디 더 당부했다.

"무기야, 중원에 돌아가서는 장무기라는 이름을 써야 한다. 사
무기 석 자는 마음 속에만 두어야지 절대 입 밖으로 발설해선 안
된다. 알겠느냐?"

무기가 울면서 외쳤다.

"의부.....! 의부.....!"

사손이 도룡도를 옆으로 비켜들며 고함을 질렀다.

"너희들이 또 이리로 내려오면 나는 우리들의 결의지정(結義之
情)을 단절해 버리겠다."

장취산과 은소소는 사손의 결심을 도저히 되돌리게 할 수 없음
을 알고 눈물을 뿌리며 작별을 고했다. 뗏목이 물결과 바람을 따
라 해변에서 점점 멀어지자 사손의 모습도 점점 작아졌다. 무기
는 모친의 품에 쓰러져 지칠 때까지 울더니 가까스로 잠이 들었
다.

바람이 줄곧 같은 방향으로만 불고 파도도 심하지 않아 뗏목은
순조롭게 남행을 계속했다. 한 가지 답답한 것은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분별하기가 어려운 점이었다. 그들은 해가 뜨고 지는 것
으로 방향을 구별하며 밤낮없이 남으로 남으로 항해를 계속했다.

항해를 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육지는 고사하고 지나가는 배
한 척도 보이지 않았다. 항해를 하는 동안 장취산은 무기에게 무
당파의 권법과 장법의 입문 공부를 가르쳤다. 그의 무공 전수 방
법은 사손보다 훨씬 고명했고 또 무당파 무공 기초가 어렵지 않
아 무기는 쉽게 익혔다. 끝없는 항해는 몇 달이 계속되었다. 이
날도 파도는 잔잔했으며, 뗏목의 크고 작은 두 개의 돛은 바람을
가득 안은 채 쏜살같이 물을 가르며 질주했다.

은소소가 이 광경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주버님은 비단 무공만 고절할 뿐 아니라 지리 풍수에도 깊은
조예를 지녔으니, 정말 기재(奇才) 중의 기재예요."

무기가 이때 느닷없는 말을 했다.

"바람이 반 년은 남쪽으로 불고 반 년은 북쪽으로 분다면, 우리
는 명년에 의부를 뵈러 빙화도로 갈 수 있겠군요."

이때 은소소가 갑자기 남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게 뭐죠?"

장취산이 고개를 돌려 보니, 멀리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곳에서
두 개의 흑점이 희미하게 보였다.

"고래인 모양인데 우리 뗏목을 받으면 야단이군요."

은소소가 자세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고개를 저었다.

"고래는 아니예요. 등에서 물을 뿜어내지 않는걸요."

세 사람은 잔뜩 긴장된 채 두 개의 흑점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한 시간 가량이 지나 쌍방의 거리가 가까와지자 은소소가 환호성
을 질렀다.

"아. 배예요!"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두 척의 거대한 배가 똑똑히 보았다.
은소소는 가까와지고 있는 두 척의 배를 한참 동안 살피더니, 갑
자기 얼굴빛이 크게 변하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무기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은소소는 입술만 몇 번 움직였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장취
산이 걱정스러운 듯 그녀의 손을 쥐어 주었다.

은소소가 가볍게 탄식했다.

"중원에 돌아오자마자 만나게 되었군요."

"뭘 말입니까?"

"저 배의 돛을 자세히 보세요."

장취산이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왼쪽의 범선 돛에 한 마리의
검은 독수리가 날개요. 우리 아버지의 천응교 깃발이예요."

이 순간 장취산의 마음 속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소소의 부친은 천응교 교주이며 이 사교(邪敎)는 온갖 악행을
자행하는 집단인데, 장인을 만나면 어떻게 대처하지? 그리고 은
사께서는 나의 혼사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실까?'

이때 장취산은 자기의 손 속에서 은소소의 손도 가늘게 떨고 있
음을 느끼고, 그녀 역시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여보, 우리 아이가 이렇게 컸으며 우리는 백년해로를 약속했는
데 무엇을 염려하오?"

"나로 인해 당신이 난처하게 될 것이 염려되어 그래요. 여보,
설사 불미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무기를 생각해서 참으세요."

뗏목과 두 척의 배는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장취산이 잠시 망설이다 나직이 물었다.

"배에 탄 사람을 불러 당신 부친의 안부를 물어보는 게 어떻겠
소?"

"그럴 필요 없어요. 중원에 도착한 후 우리 세 식구가 함께 아
버지를 만나러 가요."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구료."

그들이 두 척의 범선을 그냥 지나치려 할 때, 한 척의 선상에서
도광이 번뜩이며 너댓 명의 장한이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은소
소가 배 위를 쳐다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도 저기 계신지 모르겠군요."

"여기서 당신의 부친 배를 만났으니 가까이 가 봅시다."

그들은 돛의 방향을 약간 바꾸어 두 척의 배를 향해 천천히 접
근했다. 가까이 접근했을 때 천응교 선상에서 한 사내가 고개를
내밀며 고함을 질렀다.

"우리는 지금 정당한 대결을 하고 있는 중이니 이곳을 피해 가
시오!"

상대방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은소소가 선상을 향해 외쳤다.

"여기는 총타(總舵) 당주에요. 어느 단(壇)이 향을 피우고 횃불
을 들고 있나요?"

그녀는 천응교 사람들 사이에만 통하는 말을 했다. 그러자 선상
에 있던 사람의 태도가 갑자기 공손해졌다.

"천시당(天市堂) 이당주(李堂主)께서 청룡단(靑龍壇) 정단주(程
壇主), 신사단(神蛇壇) 봉단주(封壇主)와 함께 여기 계십니다.
천미당(天微堂) 은당주(殷堂主)께서 행차하셨습니까?"

"자미당(紫微堂) 당주예요."

자미당 당주라는 말이 떨어지자 선상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더
니 잠시 후 십여 명의 장한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은 낭자께서 돌아오셨다! 은 낭자께서 돌아오셨다!"

장취산은 은소소와 결혼한 지 십 년이 되었지만 그녀가 천응교
에 관한 일을 말하는 것을 한 번도 듣지 못했으며, 그도 묻지 않
아 천응교의 내막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대
화에서 장취산은 은소소가 천응교의 자미당 당주이며, 당주의 지
위가 단주보다 높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왕반산에서 현무와 주
작단 단주의 무공 실력을 친히 시험했기에 그들의 무공이 은소소
보다 고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은소소의 직위가 높은
것은 교주의 딸이기 때문이 분명했다.

잠시 후 맞은편 배의 선상에서 맑은 음성이 전해왔다.

"폐교 교주의 천금(千金) 은 낭자께서 돌아오셨다니, 싸움을 잠
시 멈추는 게 어떻겠소?"

이어 우렁찬 목소리가 대답했다.

"좋소이다. 모두 손을 멈추시오!"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멎고 쌍방의사
람들이 분분히 뒤로 물러섰다. 장취산은 맑고 우렁찬 목소리가
매우 귀에 익었음을 느끼고, 잠시 생각을 굴린 후 큰 소리로 물
었다.

"혹시 유연주(兪蓮舟) 유사형이 아니십니까?"

저쪽 배 선상의 맑고 우렁찬 목소리의 주인이 뗏목 쪽으로 고개
를 내밀었다.

"그렇소. 내가 바로 유연주..... 아니, 너.....너는.....!"

"소제 장취산입니다!"

그는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뗏목과 범선 간의 거리가 십 장 가
량 되자, 뗏목 위에서 나무 토막을 주워 공중으로 던지며 몸을
솟구쳐 상대방의 뱃머리에 사뿐히 내려섰다.

"둘째 사형!"

"오제!"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서로 손을 맞잡으며 기쁨
의 눈물만 흘렸다.

한편 저쪽 천응교 사람들도 은소소를 영접하느라 정신이 없었
다. 천응교 교주 백미응왕 은천정의 밑으로 내삼당(內三堂)과 외
오단(外五壇)으로 나뉘어져 각로(各路)의 교도들을 통괄하고 있
었다. 그리고 또 내삼당은 천미, 자미, 천서 삼당으로 나뉘어지
고 외오단은 청룡, 백호, 현무, 주작, 신사 등 오단으로 나뉘어
져 있다. 천미당 당주는 은천정의 장남 은야왕(殷野王)이고, 자
미당 당주는 은소소이며 천시당 당주는 은천정의 사제 이천환(李
天桓)이다.

이천환은 은소소가 남루한 옷을 입고 어린 아이까지 데리고 있
음을 보자 처음에는 약간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짓더니, 곧 만면
에 웃음을 가득 머금었다.

"내가 돌아오다니 정말 기쁘구나. 지난 십 년 동안 내 아버지가
너를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아느냐?"

은소소는 이천환에게 큰절을 했다.

"사숙, 그간 별고 없으셨어요?"

하고 무기를 둘아 보았다.

"빨리 사숙조님께 절을 해야지."

무기는 꿇어 엎드려 절을 하면서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천
환과 천응교도들을 쳐다보았다.

은소소는 두 범선의 갑판에 시체가 나뒹굴며 선혈이 낭자해 있
음을 보고 나직이 물었다.

"저들은 누구며 왜 싸웠나요?"

무당파와 곤륜파 사람들이요."

은소소는 남편 장취산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상대방 배 위
로 뛰어올라가 어떤 사람과 포옹하는 것을 보고 상대방 가운데
무당파의 사람이 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사숙, 가능하면 싸우지 말고 좋게 해결하세요."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이천환은 비록 그녀의 사숙이지만 천응교 직위로 말하자면 아래
였다.

이때 장취산이 맞은편 배의 갑판에서 큰 소리로 불렀다.

"여보, 빨리 무기를 데리고 이리로 건너와 나의 사형에게 인사
올리시오!"

은소소는 무기의 손을 잡고 상대방 배의 갑판으로 걸어갔다. 이
천환과 두 단주는 그녀의 뒤를 바짝 따르며 그녀를 경호했다. 상
대방 배의 갑판에는 칠팔 명의 장한이 있었으며, 그 중 마흔 살
남짓된 몸집이 깡마르고 키가 큰 남자가 장취산과 손을 맞잡은
채 서 있었다.

"여보, 이 분이 바로 내가 항상 말하던 유연주 둘째 사형이오.
형님, 이쪽은 형님의 제수와 조카 무기입니다."

유연주와 이천환은 이 말을 듣고 모두 크게 놀랐다. 지금 천응
교와 무당파는 목숨을 건 악투를 벌이고 있는데, 쌍방의 중요한
인물 한 사람이 서로 부부가 되었을 뿐 아니라 자식까지 낳았으
니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곤륜파의 서화자(西華子)가 대뜸 도전적인 어조로 물었다.

"장오협(張五俠), 그 늙은 악적 사손이 지금 어디 있는지 당신
은 알지요?"

장취산은 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두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첫째는 무당이 천응교 사람들과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고, 둘째는 곤륜파의 서화자가 첫마디에 사손의
행적을 묻는 점이었다. 그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서화자는 장취산이 자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자 눈썹을 치켜올
리며 고함을 질렀다.

"당신은 내가 물은 말을 못 들었소? 사손 그 늙은 악적이 지금
어디 있소?"

천응교 신사단의 봉단주는 사람됨이 음침하고 간교한 인물이다.
좀전의 싸움에서 두 명이 서화자의 검에 목숨을 잃어, 그렇지 않
아도 서화자에 대해 이를 갈고 있던 터라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차갑게 말을 받았다.

"장오협은 우리 교주의 사위이니 말 조심하십시오!"

"흥! 사교(邪敎)의 요녀가 어떻게 명문정파의 자재와 혼인을 할
수 있단 말이오. 이 혼사에는 필시 무슨 비밀이 있음이 분명하
오."

"우리 은교주께선 외손자까지 보았는데, 당신은 무슨 미친 소리
를 지껄이고 있는 거요?"

"이 요녀가.....!"

위사랑은 봉단주의 속셈이 곤륜과 무당 양파의 교분을 이간질시
키고, 이 기회에 장취산과 은소소에게 아첨하려는 의도임을 간파
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서화자가 그의 술수에 말려 더욱 듣
기 거북한 말을 할 것이 염려되어 급히 제지시켰다.

"사형, 이런 쓸데없는 자와 말다툼을 할 게 아니라, 유이협(兪
二俠)의 의견이나 듣기로 해요."

"유연주는 장취산과 은소소의 얼굴을 보며 잠시 망설이더니, 드
디어 입을 열었다.

"여러분,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선실로 들어가 의논합
시다."

여기선 천응교가 손님이었고, 현재 직위가 제일 높은 사람은 자
미당 당주인 은소소였다. 때문에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무기의
손을 잡고 앞장서서 선실로 들어갔다. 봉단주가 뒤를 이어 선실
로 들어가려고 발을 내딛는 순간, 그는 한 줄기 미풍이 옆구리를
엄습함을 느꼈다. 그는 비단 경험이 풍부할 뿐 아니라 음험하기
짝이 없는지라, 단번에 서화자의 짓임을 간파하고 막아내지 않은
채 앞으로 쓰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아앗! 비열하게 기습을 가하다니.....!"

그의 비명소리에 서화자는 흠칫하며 잽싸게 자신의 삼음수(三陰
手)를 회수했지만,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위사
랑이 나무라는 눈빛으로 사형을 쏘아보니, 서화자의 얼굴빛은 수
치심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서화자가 손님에게 기습을 가한 것은 명문정파의 고수 신분을
스스로 실추시킨 것이다.

일행은 선실에서 주인과 손님의 신분으로 분류하여 자리에 앉았
다. 자연 장취산과 은소소 부부도 서로 적대적인 자리에 앉게 되
었다.

모두 자리에 앉자 유연주는 속으로 생각을 굴렸다.

'오제는 실종된 후 십 년 동안에 천응교 교주의 딸과 부부가 되
었구나. 그러나 대중들 앞에서 신문할 것 같으면 입장이 난처해
내가 처리를 잘 해야겠구나.'

여기까지 생각을 굴린 유연주는 목청을 가다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림, 곤륜, 아미, 공동, 무당 오파와 신권(神拳), 오봉도(五
鳳刀)등 구문 해사(海沙), 거경(巨鯨) 등 칠방 도합 이십 일 개
문파방회(門波幇會)는 금모사왕 사손, 천응교 은 낭자, 그리고
불초의 사제 장취산 등 세 사람의 행방을 찾는 과정에서 천응교
와 오해가 발생했으며, 불행하게도 쌍방에 사상자까지 발생하여
십 년 동안 무림이 불안한 가운데 지났으나....."

그는 잠시 숨을 돌린 후 말을 이었다.

"다행히 은 낭자와 장사제가 이렇게 모습을 나타냈으니, 지금까
지 있었던 많은 의문의 진상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다만, 십
년 동안 발생한 사건들이 너무 많으므로 짧은 시간에 모두 설명
하기는 어렵소. 그러니 우선 모두 함께 중원으로 돌아가 은 낭자
는 귀교 교주에게 그간의 자초지종을 아뢰고, 장사제도 무당에
돌아가 가사께 아뢴 후 쌍방이 다시 시간과 장소를 정해 만나 시
비를 가리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해가 풀려 피차의 관계가
원만해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일이며....."

이때 서화자가 갑자기 고함을 질러 유연주의 말을 중단시켰다.

"그 늙은 악적 사손은 어디 있소? 우리가 찾는 사람은 사손 그
늙은 악적이오!"

장취산은 중원 무림의 이십 이 개 문파방회가 자기들 세 사람을
찾기 위해 십 년 동안 싸웠으며, 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말을 듣고 몹시 불안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화자가 사손의 행
방까지 추궁하니 처지가 매우 난처했다. 만약 사손의 행방을 말
한다면, 많은 무림 고수들이 복수를 하기 위해 빙화도로 찾아갈
것이 뻔한 일이고,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가만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가 난처해 하며 주저하고 있을 때, 은소소가 느닷없
이 말문을 열었다.

"온갖 만행을 자행하고 살인을 밥먹듯이 한 악적 사손은 이미
구 년 전에 죽었어요."

유연주, 서화자, 위사랑 등은 깜짝 놀라며 이구동성으로 외쳤
다.

"사손이 죽었다구요?"

"내가 이 아이를 분만하던 날 악적 사손은 광성이 발작하여 나
와 나의 남편을 죽이려 했으나,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더니 심병
(心病)이 발생하여 죽었어요."

장취산은 여기까지 듣고서야 은소소의 말뜻을 깨달았다. 사실
사손은 무기의 첫 번째 울음소리를 듣고 양심을 되찾아 개과천선
했다. 그리고 장취산 등 세 사람을 강제로 섬을 떠나게 한 행위
는 어느 누구도 쉽게 흉내낼 수 없는 자기 희생이었다. 그러므로
악행을 일삼고 살인을 밥먹듯이 하던 악적 사손이 이미 구 년 전
에 죽었다는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무기는여기 있는 가람들이 말끝마다 의부를 악적 사손이라 욕
하고 심지어 부친과 모친은 의부를 죽었다고까지 말하자, 치미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비록 총명하지만 강호에 얽히고 설킨
일들을 알 까닭이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
뜨리며 외쳤다.

"의부는 악적이 아니예요. 의부는 죽지 않았어요!"

그의 갑작스러운 외침소리에 선실 안의 사람들은 일제히 그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은소소는 다급한 나머지 무기의 따귀를 후려쳤다.

"닥쳐!"

"어머니는 왜 의부가 죽었다고 말씀하십니까. 그분은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지 않습니까?"

은소소가 성난 목소리로 무기를 꾸짖었다.

"어른들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아이가 버릇없이 끼어들다니!
우리는 악적 사손을 욕하고 있을 뿐, 네 의부를 헐뜯은 게 아
냐!"

무기는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곤혹스러워 했지만 감
히 더 이상 입은 열지 않았다.

서화자가 냉랭히 웃으며 무기에게 물었다.

"얘야, 사손은 네 의부지? 그는 지금 어디있느냐?"

무기는 부모의 얼굴빛에서 그들이 지금까지 나눈 대화가 매우
중요한 일임을 눈치채고 서화자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그의 이 말은 사손이 죽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는 결과나
다름 없었다.

서화자가 장취산을 노려보며 물었다.

"장오협, 이분 천응교의 은 낭자는 정말 당신의 부인입니까?"

"그렇소. 그녀는 나의 부인이오."

"그렇다면 우리 곤륜파의 제자 두 명이 당신 부인의 독수에 의
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이 빚은 어떻게 청산
하겠소?"

은소소가 그의 말을 듣고 눈썹을 높이 치켜올렸다.

"당치도 않는 소리 하지 마세요!"

장취산도 은근히 화가 났지만, 역시 수양이 깊은 무당제자인지
라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당신은 오해를 하고 있군요. 우리 부부는 십 년 동안 중원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는데, 어떻게 귀파의 제자를 해칠 수 있었겠
소?"

"십 년 전이 일이라면 어쩌겠소? 고칙성(高則成)과 장도(張濤)
가 피해를 입은 것도 이미 십 년이 지났군요."

은소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고칙성과 장도가 누구지요?"

"부인은 그 두 사람을 벌써 잊었소? 하기야 당신은 사람을 무수
히 해쳤으니 그들을 기억하고 있을 리 만무하지요."

"그 두 사람이 어떻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리고당산은 무슨 근
거로 내가 그들을 해쳤다고 억지를 부리세요?"

"내가 억지를 부린다구? 그들 두 사람이 비록 백치로 변했지만
한 가지 일은 기억하고 있으며 한 사람의 이름은 말 할 수 있소.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만든 사람은 은소소라는 것도 잘 알고 있
소."

서화자의 말투와 눈빛에는 독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이때 지금까지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천응교 봉단주가 끼
어들었다.

"본교 자미당 당주의 존명(尊名)을 당신 같은 출가한 노도가 함
부로 부르도록 지은 것인 줄 아시오? 무림의 계율조차 지키지 않
는 늙은이가 무림 선배 행세를 하는 걸 보면 구역질이 난다니까!
정현제, 자네는 세상의 부끄러운 일 중에 이보다 더한 일이 있다
고 생각하는가?"

정단주가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대답했다.

"없지요. 명문 정파에서 이런 미친 도배가 나오다니 정말 우스
운 일이군요."

서화자는 치미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너희 둘은 누가 몰염치하고 우습다고 비웃고 있는 거냐?"

봉단주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서화자의 화기를 돋
구었다.

봉단주와 정단주가 서화자를 격노시킨 것은 은소소를 궁지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외에 그들은 또 장취산과 은소소
가 부부가 된 이상 무당파와 천응교의 관계도 크게 달라졌으므로
유연주와 장취산이 천응교는 도울지언정 곤륜파는 도우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므로 천응교의 현재 인원으로 몇 명 되지
않는 곤륜파 사람을 제압하기는 식은죽 먹기나 마찬가지라고 계
산하고 있었다.

위사랑도 그들의 속셈을 간파하고 은근한 말로 서화자의 경솔한
행위를 제지했다.

"사형, 우리 배에 올라온 이상 그들은 손님이예요. 그러니 서두
르지 말고 유이협의 분부에 따르기로 해요."

그러나 멍청한 서화자는 그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고함을 질
렀다.

"무당파는 이미 천응교와 사돈 관계를 맺어 한통속이 되었는데,
그의 입에서 공정한 말이 나올 것 같으나?"

유연주는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 감정을 얼굴에 쉽게 나타내지
않았다. 때문에 서화자의 말을 듣고도 침묵만 지켰다.

위사랑은 내심 몹시 안타까워 하며 서화자를 나무랐다.

"사형은 무슨 그런 당치도 않은 말을 하세요. 무당파는 우리 곤
륜파와 같은 뜻을 지니고 십 년 간 함께 적과 맞서 싸웠을 뿐 아
니라, 유이협은 장부 중의 장부로 강호에 영명이 자자하며 존경
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 사람이 편견을 가지고 일을 처리
할 것 같으세요?"

"편견을 가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도 없지."

위사랑은 자기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형의 우둔함에 속이
탔다.

"사형이 아무 이유도 없이 자꾸 무당오협을 헐뜯으니, 나중에
사부님과 장문사숙께서 문책하시면 나는 사형을 두둔하지 않을
거예요."

서화자는 그녀가 사부와 장문사숙을 들먹이자 비로소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유연주는 구제서야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이것은 천하 무림의 모든 문파방회와 관련된 일이므로 덕이 없
고 무능한 불초로서는 혼자 결정지을 수 없습니다. 이 일은 이미
십 년 간이나 강호를 시끄럽게 만들었으니, 뒤로 조금 더 미루어
해결하다 해도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불초는
우선 장사제와 함께 무당으로 돌아가 은사님과 대사형께 자초지
종을 아뢴 후 은사님의 뜻에 따를 생각입니다."

서화자가 비웃는 투로 말했다.

"직접적인 답변을 피하고 얼버무리는 유이협의 실력은 천하의
어느 누구보다 고명하시군요."

수양이 깊고 인내심이 강한 유연주였지만, 대중들 앞에서 노골
적인 수모를 당하자 눈에서 신광을 발산하며 서화자를 노려보았
다. 그러나 역시 강호의 명문 정파 제자인지라 곧 신광을 거두고
침착해졌다.

유연주는 신광을 회수한 후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서화도형에게 고견이 있으면 불초도 귀를 씻고 들을 테니 말씀
해 보시오."

유연주의 예리한 눈빛에 이미 기가 꺾인 서화자는 더 이상 감히
오만하게 굴지 못하고 위사랑을 돌아보았다.

"사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본문의 제자 두 명의 빚을 이
대로 포기할 생각은 아니겠지?"

위사랑은 미처 대답을 하기 전에, 갑자기 남쪽 해상에서 긴 호
각소리가 울리며 뒤이어 곤륜파 제자 한 명이 선실로 뛰어들어와
아뢰었다.

"공동파와 아미파가 우리를 도우러 왔습니다."

서화자와 위사랑의 얼굴에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위사랑이 유
연주에게 말했다.

"유이협, 아무래도 우리가 결정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공동파와 아미파의 고견을 듣기로 합시다."

천응교의 이천환과 정단주, 봉단주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모두 얼굴빛이 조금씩 변했다.

장취산은 재빨리 생각을 굴렸다.

'아미파는 크게 걱정할 바는 아니지만 공동파는 형님과 갚은 원
한을 맺었다. 형님은 공동 오로에게 중상을 입히고 공동파의 칠
상권보까지 탈취했으니, 그들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지.'

은소소도 장취산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기가 아까 말참견만 하지 않았어도 일을 훨씬 쉽게 처리할
수 있었는데..... 하지만 무기는 거짓말을 못하고 사손에 대한
정이 깊기 때문이니 이 아이를 나무랄 수가 없는 노릇이지.'

이렇게 생각하며 맞은 뺨이 빨갛게 부어 오른 무기를 꼭 끌어않
았다. 무기는 아직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입을 모친의 귓가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어머니, 의부께서 죽지 않았지요?"

은소소도 그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죽지 않았어. 나는 그들에게 거짓말을 한 거야. 이들은 모두
너의 의부를 해치려 하고 있어."

무기는 그제야 영문을 알았다는 듯이 사람들의 얼굴을 차례로
노려보았다.

그는 모친에게 맞아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어루만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일 장은 비록 어머니가 때렸지만, 실제로 눈앞의 악당들이
때린 것이나 다름 없어.....'


----- 제 2 권 2 장 끝 -----



추천 (0) 선물 (0명)
IP: ♡.221.♡.68
23,518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더좋은래일
2023-10-26
2
276
뉘썬2뉘썬2
2023-10-26
0
262
뉘썬2뉘썬2
2023-10-26
0
277
더좋은래일
2023-10-25
4
907
더좋은래일
2023-10-25
3
301
더좋은래일
2023-10-24
4
312
더좋은래일
2023-10-24
4
221
뉘썬2뉘썬2
2023-10-24
0
247
뉘썬2뉘썬2
2023-10-24
1
286
더좋은래일
2023-10-23
2
295
더좋은래일
2023-10-23
4
256
더좋은래일
2023-10-23
4
275
더좋은래일
2023-10-22
3
277
더좋은래일
2023-10-22
3
312
뉘썬2뉘썬2
2023-10-22
1
303
더좋은래일
2023-10-21
3
301
더좋은래일
2023-10-21
3
341
뉘썬2뉘썬2
2023-10-21
0
439
더좋은래일
2023-10-20
2
250
더좋은래일
2023-10-20
3
252
더좋은래일
2023-10-20
4
352
더좋은래일
2023-10-19
4
368
더좋은래일
2023-10-19
4
315
더좋은래일
2023-10-18
4
312
더좋은래일
2023-10-18
4
327
더좋은래일
2023-10-17
4
315
더좋은래일
2023-10-17
4
292
더좋은래일
2023-10-16
4
348
더좋은래일
2023-10-16
4
285
더좋은래일
2023-10-15
4
263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