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2-2

3학년2반 | 2022.03.02 06:58:15 댓글: 0 조회: 440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2238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2 권


제 3 장 장취산(張翠山) 부자(父子)의 고초(苦楚)


아미파 공동 양파의 사람들이 선실로 들어와 유연주, 서화자,
위사랑 등과 인사를 나누었다. 공동파의 우두머리는 비쩍 말라
뼈만 앙상한 갈의노인이었으며, 아미파의 우두머리는 중년 니고
(中年尼姑)였다. 그들은 천응교의 이천환등이 선실에 앉아 있는
것을 보더니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마자 서화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당삼야(唐三耶), 정허사태(靜虛師太), 무당파는 천응교와 손을
잡았소. 이번에 우리는 큰 피해를 입게 되었소."

키가 작고 깡마른 갈의 노인 당문량(唐文亮)은 공동 오로 중의
한 사람이며, 중년 니고 정허사태는 아미파의 제 사대 수제자로
모두 무림에서 명망이 제법 높은 고수였다. 두 사람은 서화자의
말을 듣고 다소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호사태는 마음이 세
심하고 서화자의 평소 성격을 잘 아는지라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당문량은 눈알을 뒤집으며 유연주를 노려보았다.

"유이협, 그 말이 사실이오?"

유연주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서화자가 또 고함을 질렀다.

"무당파는 이미 천응교와 사돈 관계를 맺었소. 장취산이 은천정
의 사위가 되었지요."

당문량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서화자를 돌아보았다.

"실종된 지 십 년이 지난 장오협이 모습을 나타냈단 말입니까?"

유연주가 장취산을 가리켰다.

"이 사람은 나의 오제 장취산이고, 이분은 공동파의 선배 고인
당문량 당삼야이시네."

서화자가 또 입을 열었다.

"장취산과 그의 마누라는 금모사왕 사손의 행방을 알고 있으면
서 사실을 말하지 않고 있소."

당문량은 금모사왕 사손의 이름을 듣는 순간, 눈에서 무서운 살
염을발산했다.

"그는 지금 어디 있소?"

장취산이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 일은 가사께 먼저 아뢰어야 하니 말씀드리지 못하는 고충을
용서해 주십시오."

당문량은 눈에서 불이라도 뿜어낼 듯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 늙은 악적 사손은 지금 어디 있소? 그가 있는 곳을 말하지
않겠소?"

그의 마지막 몇 마디는 거의 협박에 가까왔으며, 예의라곤 조금
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은소소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차갑게 말을 받았다.

"보아하니 귀하는 공동파에서 나이만 몇 살 많은 인물에 불과한
것 같은데, 무슨 자격으로 장오협을 이렇게 다그칩니까? 당신이
무림지존이라도 됩니까? 아니면 무당파의 장문 장진인이라도 됩
니까?"

당문량은 대노하여 열 손가락을 벌려 은소소를 덮치려 했다.
그러나 곧 무림에서의 자신의 위명을 생각하고 치미는 노기를 억
지로 참으며 장취산에게 물었다.

"이분은 누굽니까?"

"불초의 부인입니다."

서화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끼어들었다.

"또한 천응교 은교주의 딸이기도 하지요. 흥! 사교의 요녀치고
사람다운 사람이 있겠소?"

백미응왕 은천정의 무공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심(精深)
하여, 오늘날까지 그와 실력을 겨룬 무림 고수 중 그의 십초 이
상을 받아낸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당문량은 면전의 젊은 부인
이 은천정의 딸이라는 말을 듣자, 감히 더 이상 무례한 언동을
하지 못했다.

이때 줄곧 침묵만 지키고 있던 정허사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일의 자초지종이 어떤 것인지 유이협께서 설명해 주십시
오."

"이 일은 관련된 범위가 넓고 또 십 년이란 긴 시간 동안 끌어
왔는지라 한두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석 달 후 폐
파가 무창의 황학루에 연회석을 마련하여, 이 일과 관련이 있는
각 문파방회를 모두 초청한 가운데 시비곡절을 분명히 밝히겠습
니다. 여러분의 의향은 어떠십니까?"

정허사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문량이 말을 받았다.

"시비곡절은 석 달 후에 거론해도 무방하지만, 사손 그 늙은 악
적이 어디 숨어 있는지는 장오협이 지금 말해 주시오."

장취산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말할 수 없소."

당문량은 비록 못마땅했지만 무당파가 천응교와 손을 잡은 이상
섣불리 건드릴 수 없음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의 예를 올
렸다.

"그렇다면, 석 달 후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먼저 실례하겠습니
다."

서화자가 얼른 뒤따라 일어섰다.

"당삼야, 우리도 당신의 배를 타고 가도 괜찮겠습니까?"

"좋을 대로 하시구려."

"사매, 우리도 돌아가지."

서화자 일행은 본래 유연주의 배를 타고 왔었는데 갑자기 공동
파의 배로 돌아가겠다는 것은, 무당파를 적으로 간주하겠다는 뜻
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연주는 조금도 불쾌한 내색을 하지
않고 친히 뱃머리까지 나와 전송했다.

"우리는 무당에 돌아가 사존께 아뢴 후, 여러분에게 영웅연의
청첩장을 보내겠습니다."

서화자가 막 선실 밖으로 나가려 할 때 은소소가 갑자기 불러세
웠다.

"서화도장에게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어요."

서화자는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냐?"

"도장께선 말끝마다 나를 사교 요녀라 했는데, 무슨 요녀짓을
했는지 분명히 밝히고 가세요."

"사마외도(邪魔外道)와 호미요음(狐媚妖陰)하면 그것으로 충분
할 텐데, 내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 그렇지 않고
서야 명문 정파인 무당의 장오협이 너의 꾐에 빠질 리 만무하지.
흐흐흐.....!"

"알려줘서 고마와요."

서화자는 자기의 모욕적인 언사에도 그녀가 아무 대꾸를 하지
못하자 득의만면하여 선실에서 나가 공동파의 선상으로 건너가기
위해 널빤지 위에 올라섰다.

은소소는 그의 무례한 언동이 괘씸하여, 다른 사람이 공동파의
선상으로 건너갈 때 정단주와 봉단주에게 계략을 꾸며 두라고 분
부해서 널빤지를 부러뜨려 서화자를 바닷물에 빠지게 했다. 순간
천응교의 선상에서 갈채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와 서화자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분노가 극에 달한 서화자는 위사랑의 허리춤에
서 장검을 뽑아들고 덮쳐가 사생결단을 내려 했다. 그러나두 범
선의 거리가 이미 꽤 멀어졌는지라, 손가락질을 하며 욕설을 퍼
붓는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은소소가 서화자를 농락하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본
유연주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 여자는 정말 성격이 요사하여 오제의 배필로는 적당하지 못
하군.'

그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수고스럽지만, 은당주와 이당주께서 은교주에게 석 달 후의 무
창 황학루 연회에 꼭 참석해 주셨으면 고맙겠다고 전해 주십시
오. 그럼 오늘은 이만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오제는 나와 함께
은사를 뵈러 가겠지?"

"네!"

은소소는 유연주가 자기 부부를 떼어놓으려는 의도를 지녔음을
알고 갑자기 표정이 침울하게 변했다. 장취산도 아내와 자식을
떼어놓고 혼자서는 무당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유연주에게 동
의를 구했다.

"둘째 사형, 나는 부인과 아이를 데리고 가 먼저 은사님을 만나
그 어른의 승낙을 받고 싶습니다. 그 다음에 장인 어른을 뵈러
갔으면 하는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유연주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부부와 부자 간에 생이별 하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좋도록 하려무나."

은소소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며 이천환에게 당부했
다.

"사숙, 수고스럽지만 아버님을 만나면 불효 여식이 수일 내로
총타에 돌아가 아버님께 문안 여쭙겠다고 전해 주세요."

"그러마, 교주님께 아뢰고 너희 두 부부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
리고 있을 테니 가능하면 빨리 와야 한다."

그들은 서로 포권의 예를 취한 후 작별을 고했다.

장취산은 천응교 교도들이 떠나자마자 즉시 유연주에게 물었다.

"둘째 사형, 세째 사형의 상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유연주는 한참 동안 허공만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장탄식을
했다.

"세째는 아직 살아 있지만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네. 수족도 움
직이지 못하는 폐인이 되었으니..... 유대암 유삼협이란 이름은
강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거나 진배없네."

장취산은 세째 사형이 살아 있다니 다소 위안이 되긴 했지만,
영풍협골(英風俠骨)의 사형이 이런 비참한 처지가 된 것을 생각
하니 절로 눈물이 쏟아졌다.

"그를 해친 원수가 누군지 알아냈습니까?"

유연주는 장취산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갑자기 눈에서 예
리한 섬광을 발산하며 은소소를 쏘아보았다.

"은 낭자는 나의 유삼제를 해친 사람이 누군지 압니까?"

은소소는 그의 예리한 눈빛에 흠칫했다.

"유삼협의 수족 근골은 소림파의 금강지력(金剛指力)에 의해 끊
어졌다고 들었어요."

"그렇소. 은 낭자는 금강지력을 펼친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
소?"

"몰라요."

유연주는 은소소를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장취산을 돌아보았
다.

"오제, 소림파에서는 네가 임안부(臨安府) 용문표국(龍門標局)
의 사람을 몰살하고 또 몇 명의 소림 화상까지 사살했다는데 그
게 사실이냐?"

"그...그건.....!"

장취산이 말을 더듬거리자 은소소가 끼어들었다.

"이 일은 그와 아무 상관 없어요. 모두 내가 살해했어요."

유연주는 또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눈에서 살기어린 원한의 빛
을 발산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으며 다시 원래의 평온한
표정을 회복했다.

"나는 오제가 무모한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지. 이 일
때문에 소림사에서는 세 차례나 무당산으로 사람을 보내어 따졌
었네. 하지만 오제가 갑자기 실종된 사실은 천하가 아는 일인지
라 대질할 사람이 없어 지금까지 결론을 짓지 못했네. 당시 우리
들은 소림파에서 세째를 해쳤다고 주장했고, 소림파는 오제가 그
들 사람을 수십 명이나 죽였다고 고집을 부리더군. 다행히 소림
파 장문인 공문대사는 사람됨이 신중하고 은사님을 존경하기 때
문에, 문하 제자들이 더 이상 일을 저지르지 못하게 엄격히 단속
한 탓으로 십 년 동안 큰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네."

은소소가 가볍게 한숨을 내뿜었다.

"모두 당시 내가 어린 탓으로 철이 없어 그런 일을 저질렸으나,
지금은 무척 후회하고 있어요.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우리
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잡아떼는 도리밖에 없어요."

유연주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장취산을 힐끔 돌아보
았다.

'장오제가 어떻게 이런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는지 모르겠구나.'

은소소는 유연주가 시종 자기를 차갑게 대하고 호칭도 제수씨라
칭하지 않고 은 낭자라고만 부르므로 오래전부터 화가 치밀어 있
었다.

"자기가 한 일은 자기가 감당해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이 일로
절대 당신들 무당파에 누를 끼치지 않을 테니, 소림파더러 천응
교에 찾아와 따지라고 말하세요."

"강호에선 무슨 일이든지 이치를 벗어날 순 없소. 무슨 일이든
원리 원칙에 입각하여 일을 처리해야지 세력을믿고 괴롭혀선 안
되오."

은소소는 그의 말에 화가 치밀었지만, 남편인 장취산이 유연주
에게 시종 공손히 대하는지라 남편의 사형에게 감히 무례한 행동
을 할 수 없었다.

'내게는 그런 인의도덕(仁義道德)이 먹히지 않아, 하지만 내가
대들면 남편의 입장이 난처해지기 때문에 양보하는 도리밖에 없
군.'

이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무기의 손을 잡고 선미(船尾) 쪽으로
나갔다.

"무기야, 이렇게 큰 배를 한 번도 보지 못했을 테니 내가 이 배
의 구석구석을 구경시켜 주마."

은소소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다음에야장취산은 비로소 조
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둘째 사형, 지난 십 년 동안 소제는....."

유년주가 손을 저어 그의 말을 제지시켰다.

"오제, 우리 두 사람의 우에는 친형제를 능가하므로, 네가 아무
리 큰 사고를 저질렀다 해도 나는 너와 생사를 같이 하겠다. 그
러니 네 부부의 일은 여기서 내게 말할 것이 아니라, 무당에 돌
아가 은사님의 분부를 기다리기로 하자. 그래서 만약 은사님께서
질책을 하시면 우리 칠형제가 모두 꿇어앉아 그분께 사정하겠네.
아이가 이렇게 컸는데 사부님이 너희 부부와 부자를 떼어놓기야
하시겠느냐?"

장취산은 크게 기뻐하며 유연주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고맙습니다. 둘째 사형."

유연주는 내유외강(內柔外剛)하여 무당칠협 중에서 제일 농담을
싫어하고 엄격한지라 사제들은 큰사형 송원교보다 오히려 그를
더 두려워했다. 그러나 사형제들에 대한 정은 누구보다 깊고 두
터워, 장취산이 갑자기 실종되자 더없이 가슴 아파하며 그의 행
방을 찾기 위해 방방곡곡 돌아다니지 않은 데가 없었다. 그가 제
일 염려되는 것은 은소소가 많은 소림 제자를 사살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어도 사제 일가의
평안과 행복을 보호하리라 결심하고 있었다.

장취산이 또 물었다.

"둘째 사형, 우리가 천응교와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도 소제 부
부 때문입니까? 그들과 싸우는 것을 보니 소제는 무척 불안합니
다."

유연주는 대답하기 전에 먼저 반문했다.

"오제, 왕반산지회(王盤山之會)는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장취산은 임안에서 심야에 용문표국에 가서 천응교가 무위(無
威)를 떨치는 데 참여한 일, 그리고 금모사왕 사손이 일대 도륙
을 벌이고 도룡도를 탈취한 일, 은소소와 자기가 사손에게 섬으
로 끌려간 일들을 숨김없이 모두 얘기했다.

"그랬었구나. 네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복잡하게 얽힌 은밀한
일들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았을 거야."

"그렇군요. 둘째 사형, 사손은 원래 흉악무도한 사람이 아니었
습니다. 그가 그렇게 변한 것은 엄청난 참사를 당했기 때문이었
습니다. 소제는 이미 그와 결의형제를 맺었습니다."

유연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은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이 또한 매우 골치 아픈 일이구나.'

장취산이 말을 이었다.

"나의 의형이 질러낸 한 차례 사자후(獅子吼)에 왕반산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신지(神智)를 상실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사람들은 죽지 않았으면 모두 백치가 될 거라고 했습니다. 그
렇게 한 것은, 그가 도룡도를 취득한 비밀이 누설되는 것을 방지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사손의 행위는 악랄하기 짝이 없지만 기남자(奇男子)임에는 틀
림없어. 하지만, 그는 모든 일을 철저하게 처리했지만 한 사람을
잊었던 게 실수였다."

"그 사람이 누굽니까?"

"백구수(白龜壽)야."

"천응교의 현무단 단주 말입니까?"

"그렇네. 당시 왕반산에 있었던 사람 중 백구수의 내공이 제일
심후했지. 그는 사손의 주전(酒箭)에 맞아 기절했으며, 사손은
그 다음에 사자후를 외쳤지. 그 때 백구수가 기절하지 않았다면,
그 역시 사손의 사자후를 감당해 내지 못했을 거야."

"그렇습니다. 그 무렵 백구수는 기절하여 깨어나지 않아 사손의
사자후를 듣지 못했으므로 신지를 상실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의
형은 비록 세심한 사람이지만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
요."

"왕반산에서 생환한 사람 중 신지를 상실하지 않은 사람은 아마
백구수 한 명뿐일 거야. 곤륜파의 내공은 비록 독특한 점이 있지
만 고칙성과 장도는공력이 심후하지 못해 그날 이후 폐인이 되
었지. 사람들이 그들에게 누구의 짓이냐고 물으면 장도는 고개만
저을 뿐 대답하지 않는데, 고칙성은 물을 때마다, 은소소의 이름
만 되풀이했지."

유연주는 가볍게 탄식하며 말을 이었다.

"이제야 나는 그 이유를 알았네. 원래 고칙성은 제수씨를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야. 흥! 서화자가 다음에 또 불손한 말을 함
부로 지껄이면 내가 따끔한 맛을 보여 주겠어. 그의 곤륜 제자들
이 행실을 단정히 하지 않고선 남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다
니....."

"백구수가 신지를 상실하지 않았다면 그는 모든 내막을 잘 알고
있을 게 아닙니까?"

"하지만 그는 끝까지 말하려 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느냐?"

장취산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겠습니다. 도룡도를 탈취하려 했던 비밀을 보존하려면
왕반산의 일을 말하지 않는 방법밖에 없군요."

"오늘날의 무림 분쟁은 그 일로 인해 발생했지. 곤륜파는 은소
소가 고칙성과 장도를 폐인으로 만들었다고 말했고, 우리 사형제
도 네가 천응교의 독수에 죽음을 당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

"소제가 왕반산에 간 일은 백구수가 말했습니까?"

"아니야.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나와 사제(四弟), 육제
(六弟)가 함께 왕반산에 답사차 갔다가 네가 철필로 산벽에 적어
둔 글을 보고 알았지. 우리 세 사람은 왕반산에서의 너의 행적을
찾지 못해 백구수에게 물어 보려고 갔었다. 하지만 불손한 언동
때문에 싸움이 벌어졌고 나의 일장에 그는 부상을 당했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곤륜파에서도 백구수를 찾아갔으나, 오히려 천
응교 교도에게 두명이 살해되었어. 그 때부터 십 년이라는 세월
이 흐르는 동안 쌍방의 원한은 점점 깊어졌어."

"소제 부부 때문에 무림의 각 문파 제자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
다니, 무림 동도들을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 소제는 은사님을 뵌
후 각 문파를 찾아가 그 간의 오해를 해명하고 기꺼이 죄의 댓가
를 받겠습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우연히 발생한 것이므로 너를 탓할 수 없다.
그날 나와 칠제(七弟)는 사부님의 분부를 받아 용문표국을 보호
하기 위해 임안으로 떠났지만, 강서(江西)에서 한 가지 불의한
일을 목격하여 십여 명의 무고한 생명을 구하느라 며칠간 늦었
지. 우리가 임안에 도착해 보니 용문표국의 사건은 이미 발생했
더군. 그리고 너희들 부부 두 사람 때문에 발생한 문제도 곤륜파
무당파, 천응교 간의 분쟁일 뿐 타파와는 관계가 없어. 그러나
천응교는 도룡도를 탈취할 목적으로 사손의 이름을 입 밖에도 내
지 않아, 거경방, 해사파, 신권문 등의 방화문파는 방주와 장문
인의 피맺힌 원한을 천응교에게 씻으려 했고, 결국 천응교는 각
방화문파의 표적이 되었지."

"도룡도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하지도 않는데, 나의
장인께선 왜 그렇게 차지하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너의 장인 어른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그가 천응
교 교도들을 인솔하여 천하 군웅들과 맞서 싸우는 박력과 기개에
는 탄복하고 있지."

"소림, 아미, 공동 등의 문파는 왕반산지회에 참여하지 않았는
데, 어째서 그들도 천응교와 원한을 맺게 되었습니까?"

"그건 너의 의형 사손 때문이지. 천응교는 도룡도를 획득하기
위해 수십 차례나 배를 타고 각처의 섬을 돌아다니며 사손의 행
방을 수소문했지. 속담에 종이는 불을 싸지 못한다고, 백구수의
입이 제아무리 무거워도 이 소식은 결국 누설되고 말았지. 지난
날 너의 의형이 혼원벽력수 성곤이라 행세하며 주로 남북에서 삼
십여 차례나 사건을 일으켰으며, 각문각파의 고수들이 그의 손에
수없이 살해된 일을 너도 알고 있느냐?"

장취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긴 탄식을 했다.

"무림 군웅들은 그것이 그의 소행임을 결국 알아냈군요."

"그는 매번 살인을 할 때마다 벽에 혼원벽력수 성곤이라는 이름
을 남겼었지. 당시 우리는 사명(師命)을 받아 사건을 조사했지만
진짜 흉수가 누군지 알아내지 못했으며, 성곤도 끝까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지. 그러나 천응교가 사손의 행방을 알아냈다는 소
문이 펴지자 각문각파의 지모(智謀)가 뛰어난 사람들은, 사손이
본래는 성곤의 유일한 제자였던 사실과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
르지만 그들 두 사제가 원수로 변한 사실을 생각해 내고 성곤의
이름을 빌어 살인을 자행하는 사람은 사손일 가능성이 많다고 단
정지었지. 사손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네. 소림파의 공견대사까지 그의 손에 살해
되었으니 그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나의 의형은 비록 이미 개과천선했지만, 양손에 그렇게 많은
피를 묻혔으니..... 둘째 사형, 이 일은 소제도 어떻게 해야 좋
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사형제는 너 때문에 천응교를 찾아갔고, 곤륜파는 고칙성
과 장도 때문에 천응교를 찾아갔지. 그리고 거경방 등은 그들의
방주가 참살당한 복수를 하기 위해 천응교를 찾아갔고, 소림파를
비롯한 흑백양도의 많은 인물들은 사손의 행방을 알려고 천응교
를 찾아갔었다. 그 동안 쌍방의 조그만 싸움은 헤아릴 수도 없고
큰 싸움만도 다섯 번이나 치루었어. 천응교는 비록 매번 싸울 때
마다 열세에 몰렸지만, 너의 장인 어른은 군웅들의 포위 공격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쓰러지지 않고 버텼으니 대단한 인물이라 아
니할 수 없지. 물론 소림, 무당, 아미 등 명문 정파는 사건의 진
상이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았고 천응교가 진짜 흉수가 아닌 것
같기에 싸울 때마다 상대방에게 후퇴할 여지를 남겨 주었지만,
일반 강호 인물들은 인정사정없이 처음부터 살수를 펼치지. 이번
에도 우리는 천응교의 천시당 이당주가 배를 타고 사손의 행방을
찾아나선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몰래 그들을 미행했던 거야. 그러
나 이당주가 그것을 눈치채고 따라오지 못하게 하여 곤륜파와 싸
움이 벌어진 거지. 만약 너희들 부부의 뗏목이 그 때 나타나지
않았다면, 쌍방의 고수가 또 얼마나 희생되었을지 모르지."

장취산은 십 년 사이에 유연주의 모습이 많이 늙었음을 발견하
고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둘째 사형, 그 동안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군요. 소제는 구사
일생하여 사형을 다시 만나 뵐 수 있게는 되었지만....."

유연주는 그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음을 보고 그의 어깨를 가볍
게 두드려 주었다.

"무당칠협이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은 더없이 기쁜일이야.
세째가 부상을 당하고 또 내가 실종되고부터 강호상에선 우리를
무당오협이라 바꾸어 불렀는데, 오늘부터 칠협이 다시 위명을 떨
치게 되었으니....."

여기까지 말한 그는 유대암을 생각했다. 비록 칠협이 한 자리에
모였지만, 지난날처럼 함께 강호를 행협(行俠)할 수 없음을 생각
하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일행은 십수일의 향해 끝에 양자강 입구에 도착하여 배를 바꾸
어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장취산 부부가 남루한 가죽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니, 준
수하고 아름다운 용모는 십 년 전에 비해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
다. 무기도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머리를 땋아 붉은 천으로 묶어
주니 더 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유연주는 무기를 장취산보다
더 귀여워했다. 다만 그는 성격이 엄숙하고 말수가 적어 곁으로
차갑게 보일 뿐이었다. 무기는 황량한 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만
자랐기 때문에 육지의 사물은 무엇이든 신기하게 느껴졌다. 유연
주는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고 그와 함께 뱃머리에 앉아 강변의
풍물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날 저녁 무렵, 배는 안위(安衛) 동릉(銅陵)의 동관산(銅官山)
기슭의 조그만 마을에 정박했다. 선주는 술과 고기를 사기 위해
뭍으로 올라가고 장취산 부부와 유연주는 선실에서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뱃머리에서 혼자 놀던 무기는, 강변에서 웬 늙은 거지가 땅바닥
에 앉아 뱀을 다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거지는 목에 청사(靑
蛇)를 한 마리 감고 손으로는 검은 바탕에 흰 점이 박힌 흑사(黑
蛇)를 다루고 있었다. 흑사는 거지의 머리 위로 올라가 또아리를
트는가하면 다시 등을 타고 내려와 혀를 날름거리며 허리를 감기
도 했다. 무기는 빙화도에서 뱀을 본 적이 없는지라 넋을 잃고
구경했다. 늙은 거지는 그를 보더니 빙긋이 웃으며 손가락을 가
볍게 튕겼다. 그러자 뱀은 공궁으로 치솟아 허공에서 두어 바퀴
회전한 다음 아래로 떨어져 늙은 거지의 목과 가슴을 칭칭 감았
다. 무기는 뱀의 묘기에 도취되어 그것에만 온정신을 집중시켰
다.

늙은 거지가 그에게 손짓을 하고 또 뱀을 가리켰다. 그것은 무
기가 강변으로 내려오면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것을 보여 주겠다는
뜻이었다. 천진난만한 무기는 크게 기뻐하며 널빤지를 밟고 강변
으로 내려갔다. 늙은 거지는 무기가 가까이 오자 등에서 포대를
하나 꺼내더니 주둥이를 벌리며 말했다.

"이 속에 재미있는 물건이 많으니 이리 와 보아라."

"무슨 물건인데요?"

무기가 고개를 내밀고 포대안을 살폈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
아 똑똑히 보려고 목을 더 길게 뺐다. 이때 늙은 거지는 번개처
럼 포대로 무기의 머리를 뒤집어씌웠다.

"악!"

무기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자 늙은 거지는 잽싸게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고 번쩍 들어올렸다.

무기의 비명은 포대 속에서 지른 것이기 때문에 소리가 작았다.
하지만 유연주와 장취산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선
실에 있으면서도 그 비명소리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갑판 위로
달려나갔다. 무기가 늙은 거지에게 붙잡힌 것을 보고 두 사람은
막 몸을 솟구쳐 강변으로 날아가려 한 순간, 늙은 거지가 날카롭
게 외쳤다.

"이 아이의 목숨을 보존하고 싶으면 꼼짝하지 마시오!"

하고 무기의 등 뒤 옷을 찢더니, 뱀머리를 그의 배심(背心)에
갖다 댔다.

이때 은소소도 갑판으로 뛰어나와 아들이 잡혀 있는 것을 보고
다급한 나머지 멀리서 은침을 던지려 했다. 유연주가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며 급히 제지시켰다.

"안 됩니다!"

유연주는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짙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
었다.

"귀하가 이 어린 아이를 붙잡아 위협하는 저의가 뭐요?"

"선주에게 닻을 올리고 배를 강변에서 육 장(六丈) 가량 떨어지
게 하라고 하시오. 그런 다음 나의 목적을 말해 주겠소."

유연주는 배를 강변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면 무기를 구출하기
더욱 어렵다는 것을 알았지만, 무기가 상대방의 손에 붙잡혀 있
는지라 상대방의 요구대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닻
줄을 잡아 팔을 가볍게 떨쳤다. 순간, 무게가 오 십 근이 넘는
닻은 마치 무 뽑히듯 수면 위로 끌려 올라왔다.

늙은 거지는 유연주의 심후한 공력을 보더니 두려움으로 얼굴빛
이 약간 변했다. 이어 장취산이 대나무 장대로 배를 강물중앙으
로 밀었다.

"좀더 멀리 떨어지시오."

"당신이 강변에서 육 장 가량만 떨어지라고 하지 않았소?"

"유이협이 닻을 끌어올리는 무공을 보니, 육 장 정도의 거리로
도 불초는 마음을 놓을 수 없소."

장취산은 하는 수 없이 배를 강물 중앙으로 몇 장 더 물렸다.

유연주가 포권의 예를 올리며 물었다.

"귀하의 존성대명(尊姓大名)은 무엇이요?"

"불초는 개방의 무명 소졸이므로, 이름을 밝혀 유이협의 귀가
더러워질 것이 염려되는구료."

유연주가 자세히 살펴보니 늙은 거지의 찢어진 옷자락에 여섯
개의 매듭이 묶여져 있었다.

'이 사람은 개방의 육결제자(六結弟子)이구나. 육결제자라면 매
우 높은 신분인데 어째서 이런 비열한 짓을 하지? 하물며 개방은
협의(俠義)만 행하며 방주 사화룡(史火龍)은 장부 중의 장부인
데,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구나.'

이렇게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 은소소가 갑자기 외쳤다.

"동천(東川)의 무산방(巫山幇)이 개방에 합병되었나요? 내가 알
기에 개방에는 귀하 같은 인물이 없는데....."

늙은 거지가 깜짝 놀라며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은소소가 말을
이었다.

"하노삼(賀老三),당신은 지금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예요?
당신이 내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다치게 하는 날이면, 나는
당신들의 매석견(梅石堅)을 폐허로 만들어 버릴 테니 내 말을 잘
기억해 두세요."

늙은 거지는 재차 깜짝 놀라며 얼굴빛이 크게 변했다.

"나 하노삼을 첫눈에 알아보다니 은 낭자의 안력(眼力)은 과연
대단하군요. 사실 불초는 매방주(梅幇主)의 심부름으로 아드님을
모시려 왔습니다."

은소소가 주먹을 불끈 쥐며 노성을 질렀다.

"빨리 독사를 치우세요! 일개 조그만 방회에 불과한 무산방이
겁도 없이 천응교에 시비를 걸어오다니....."

"은 낭자께서 한 마디만 대답해 주시면 나 하노삼은 당장 아드
님을 되돌려 드릴 뿐 아니라, 수일 내로 매방주께서 친히 방문하
여 오늘의 무례함을 사죄드릴 것입니다."

"나더러 무슨 말을 하라는 거예요?"

"우리 매방주의 독자가 사손의 손에 살해된 사실은 은 낭자도
오래 전에 소문을 들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매 방주께서 장
오협과 은 낭자.....아니 장부인에게 특별히 부탁드리고자 하는
것은, 악적 사손의 행방을 말씀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은소소는 눈썹을 치켜뜨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린 몰라요."

"그렇다면 두 분에게 그 악적의 행방을 수소문해 달라고 부탁드
리는 길밖에 없군요. 물론 그 동안 아드님은 우리가 잘 돌볼 테
니, 사손의 행방을 알아내는 대로 연락을 주십시오."

은소소는 독사의 예리한 이빨이 사랑하는 아들의 배심에서 한
치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음을 보고, 빙화도의 위치를 말할까 하
다 남편을 돌아보았다. 그는 얼굴에 굳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장취산과 십 년간 부부생활을 하면서 남편이 무엇보다 의
리를 중시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만약 자식을 구하고자 하는마
음에 사손의 행방을 말하여 사손이 죽음을 당하면, 부부관계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은소소는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을 다시 꿀꺽 삼켰다.

장취산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장부로 태어나 어떻게 친구를 배반할 수 있겠소. 단신은 우
리 무당칠협을 너무 과소 평가했소. 내 아들을 데려 가려면 마음
대로 데려 가시오."

하노삼은 무기만 인질로 붙잡으면 장취산 부부가 사손의 행방을
말하지 않고 못 배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장취산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 못하더니,
가까스로 유연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이협, 사손이 백 번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유이협도 잘 알고
계실 테니 당신이 두 분을 타일러 주십시오."

"이 일에 대해서는 무당에 돌아가 은사께 아뢴 후, 그 분의 뜻
에 따라 처리할 생각이오. 무창 황학루의 영웅연에 귀방 방주와
귀하도 참석하시면, 그 때 시비곡절을 분명히 밝힐 태니, 이제
그 아이를 내려놓으시오."

유연주는 강변에서 칠 장이나 떨어진 거리에서 진기(眞氣)도 운
기하지않고 말했는데, 하노삼의 귀에는 이마를 맞대고 얘기하는
것처럼 똑똑히 들렸다.

'무당칠협이 천하에 위명을 떨친 것은 역시 허풍이 아니었구
나. 이번에 우리 무산방이 무당파와 천응교에게 어떤 일을 저지
른 것은 큰 불찰인지는 모르겠으나, 방주의 독자가 살해된 원한
을 복수하지 않을 수 없으니.....'

여기까지 생각한 하노삼은 허리를 굽혔다.

"그렇다면 소인은 죄가 되는 줄 알지만, 아드님을 동천으로 모
셔가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이때 은소소가 갑자기 뱃머리에 서 있는 한 선원의 등을 밀치고
발길로 다른 한 명을 걷어찼다. 두 선원은 무방비 상태에서 기습
을 당하자 비명을 지르며 물 속으로 떨어졌다.

이어 은소소가 고함을 질렀다.

"아얏! 여보, 왜 나를 때리세요?"

하고 뱃머리에서 이리저리 뛰며 난동을 부렸다. 유연주와 장취
산은 그녀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몰라,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강
변의 하노삼 역시 무슨 일인지 몰라 곤혹스러운 눈빛으로 물끄러
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유연주는 곧 은소소의 의도를 깨닫고, 하노삼이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장검을 뽑아 힘껏 던졌다. 한
차례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유연주가 던진 장검은 칠리성
독사의 목을 베었을 뿐 아니라 독사를 쥐고 있던 하노삼의 손가
락 네 개까지 싹뚝 잘라 버렸다. 유연주가 장검을 던지는 순간,
장취산은 바닥을 힘껏 굴러 강변의 허공에 떠올라 왼손을 뻗어
하노삼을 삼 장 밖으로 날려보내고, 오른손으로는 무기를 붙잡
아, 품 속에 안았다. 등에 일 장을 가격당한 하노삼은 땅바닥에
쓰러진 채 일어나질 못했다.

강변으로 헤엄쳐 나간 두 명의 선원은 은소소가 왜 격노했는지
이유를 몰라 감히 배로 돌아가지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은소소가 웃음을 가득 머금으며 그들을 불렀다.

"두 분께선 두려워 말고 이리로 올라오세요. 방금 무례를 범한
죄의 보상을 두 분께 은자 한 냥씩 드리겠어요."

그들의 탄 배는 다시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이날 따라 바람이
맞은 편에서 불어 속도는 거북이 걸음보다 느렸다. 장취산은 사
부를 비롯한 사형제들과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 안
경(安慶)에 도착한 후 육로(陸路)를 이용하자고 제의했다. 그러
나 유연주는 그의 의견에 반대했다.

"오제, 배를 이용하는 것이 좋아. 물론 시간상으로는 며칠이 더
걸리겠지만, 선실에 앉아 있으면 불필요한 충돌을 피할 수 있지.
지금 강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네 의형의 행방을 찾기 위
해....."

은소소가 얼른 말을 가로챘다.

"우리가 둘째 사형과 동행하는데도 감히 길을 가로막는 자가 있
단 말인가요?"

"우리 사형제 일곱 사람이 연합한다면 아무도 우리를 당해 내지
못하겠지만, 나와 오제 두 사람만으로는 끊임없이 몰려오는 고수
들을 당해 내기 어렵소. 그리고 이 일을 원만히 해결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니, 쓸데없이 강호인들과 원한을 맺을 필요가 없지
요."

장취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드디어 호북성(湖北省)의 무혈(武穴)에 들어섰다. 이날 저녁 무
렵, 부지구(富池口)에 도착하여 밤을 지내기 위해 강변의 부두에
정박했다. 유연주는 갑작스러운 말발굽소리를 듣고 창문을 통해
강변을 내다보았다. 두 필의 말이 짙은 먼지를 일으키며 마을 쪽
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마상의 인물은 등만 보였지만 옷차림과
날렵한 행동으로 보아 무림인이 분명한 것 같았다. 유연주는 걱
정스러운 표정을 장취산을 돌아보았다.

"여기 머물었다간 시비가 벌어질 것 같으니, 저녁 식사를 끝내
는 대로 떠나는 게 좋겠다."

최근 들어 유연주의 위명은 더욱 자자해져 곤륜과 공동등 명문
정파 장문인의 명성도 그를 따르지 못했다. 그런 그가 두 무명
소졸의 뒷모습을 보고 부지구에 오래 머물지 않으려고 한 것은,
모두 사제 장취산 일가족 세 식구를 위해서였다.

이날 밤따라 달이 유난히 밝고 바람도 잔잔했다. 무기가 잠이
들자 유연주와 장취산 부부는 뱃머리에 앉아 달구경을 하며 술잔
을 기울였다.

장취산이 감개무량한 어조로 먼저 입을 열었다.

"은사님의 백 주년 생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소제가 참석할
수 있음을 생각하니 기쁘기 한량 없습니다."

은소소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렇지만, 상황이 급박하여 그 어른의 생일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으니 어쩌죠?"

유연주가 은소소를 돌아보며 물었다.

"제수씨는 우리 은사님이 일곱 명의 제자 중 누굴 제일 좋아하
시는지 압니까?"

"그야 물론 무당파의 명성을 위해 헌신하신 둘째 아주버님이겠
지요."

"제수씨는 알고 있으면서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는군요. 사
부님께서 항상 마음에 두고 계시는 제자는 바로 영준하기 짝이
없는 제수씨의 부군입니다."

은소소는 날아갈 듯이 기뻤지만 장취산은 너무 감격한 나머지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었다.

"그러나 이제 오제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은사님의 생일 선물치
고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까지 말했을 때 갑자기 강변 쪽에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
다. 깊은 야밤에 네 필의 말이 질주해 오는 것은 십중팔구 그들
세 사람과 관련이 있음이 분명했다. 그들은 말발굽소리를 개의하
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번에 내가 하산할 때은사님께선 폐관청수(閉關청修) 중이셨
는데, 우리가 도착할 무렵에는 그 어른께서 폐관청수를 끝냈으면
좋으련만....."

은소소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가친께서 식년에 내게 말씀하시길, 일생 중 진정으로 존경하는
사람은 두 분뿐인데, 한 분은 이미 작고하신 명교(明敎)의 양교
주(陽敎主)이고, 다른 한 분은 영사이신 장진인이라 했어요. 소
림사의 견문지성(見聞智性) 사대고승(四大高僧)까지도 가친께선
별로 존경하지 않았어요. 장진인은 올해 백세 고령으로 수양이
깊으심은 당대에선 필적할 사람이 없을 텐데 아직도 폐관을 하신
다니, 혹시 장생불로지술(長生不老之術)을 수련하시는 게 아니세
요?"

"아닙니다. 은사께서는 무공을 연구 중이십니다."

은소소가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어른의 무공은 이미 가늠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을 텐데,
또 무슨 무공을 연구하신다는 거예요? 당금 무림에 그 어른의 적
수라도 있단 말인가요?"

"은사께선 아흔 다섯 살 때부터 매년 구 개월 씩 폐관하셨습니
다. 그 어른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 무당파의 무공은 대부분 구양
진경(九陽眞經)에서 얻은 것이라더군요. 그러나 은사님이 각원조
사(覺遠祖師)에게서 진경을 전수받을 때는 나이가 너무 어려 무
공을 전혀 모른 탓도 있지만, 각원조사 또한 꼭 전수하겠다는 마
음도 없어 그저 마음내킬 때만 조금씩 가르쳤기 때문에, 지금의
본문 무공에 결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각원조사께선 구양진경이
달마노조(達摩老祖)때부터 물려내려온 것이라 했지만, 은사께선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의 첫째는, 진
경에 기록된 비기(秘技)가 소림파 무공과는 크게 다르며 오히려
중원의 도가무학(道家武學)에 가깝고, 둘째, 구양진경은 범문(梵
文)이 아니고 중국 문자가 범문으로 된 약가경의 행간에 적혀 있
다는 점입니다. 달마노조께서 아무리 선리(禪理)를 참오(參悟)하
시고 무학이 깊으시다 하지만, 천축(天竺)에서 오신 분이므로 중
국 문자는 정통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심오한 무
경(武經)을 저술하시려면, 깨달은 깨끗한 종이에 기록하지 않고
약가경의 행간에 적었겠습니까?"

장취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렇다면 은사님께선 구양진경을 만든 사람이 누구라고 추측하
고 계십니까?"

"은사님께서도 정확하게는 단정지으시지 못하고,어쩌면 소림파
후세의 어떤 고승께서 지으시고 달마노조께서 만드신 것처럼 꾸
몄을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은사님께서는 구양진경에
기록된 무학이 완전하지 못한 것을, 당신더러 보충하라는 뜻이
아닌가 생각하시고 새로운 무학을 창조해 내기 위해 매년 폐관하
시는 거란다."

장취산과 은소소는 이 말을 듣고 사부님의 지칠 줄 모르는 노익
장과 탐구 정신에 숙연히 고개가 숙여졌다.

"당시 각원조사에게서 구양진경을 전수받은 사람은 모두 세 분
이었지. 한 분은 은사님이고 한 분은 소림파의 무색대사이며, 또
한 분 은 여잔데, 바로 아미파의 창파조사(創波祖師) 곽양 곽여
협이다."

은소소가 눈썹을 악간 치켜올렸다.

"지난날 가친께 들은 말인데, 곽대협은 쟁쟁한 가문에서 태어난
인물로 부친은 곽정(郭靖) 곽대협이고 모친은 개방의 황방주 황
용(黃蓉)인데, 두 분 모두 당시 양양성이 함락될 때 함께 순직하
셨다더군요."

"그렇습니다. 우리 은사님께선 오래 전 화산 절정에서 곽대협
부부를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 그들 두 분의 국가와 민족을 위
한 인풍협골(仁風俠骨)을 무예를 연마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귀감
으로 삼고그분들의 뜻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연주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당시 구양진경을 전수받은 세 분은 오성(悟性)이 제각기 다르
고, 무학의 기초도 많은 차이가 있었지. 무공은 무색대사가 제일
고강했고, 곽여협은 곽대협과 황방주의 따님인지라 배운 것이 제
일 많았으며, 은사님께서는 무공 기초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은사님은 제일 정순(精純)한 무공을 배울
수 있었지. 그 결과 소림, 아미, 무당 삼파 중 하나는 무공의 고
강함을, 하나는 무공의 광범위함을, 하나는 무공의 정순함을 물
려받아 제각기 장점을 하나씩 지니게 되었지만 또한 제각기 단점
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

"그렇다면, 각원조사의 무공은 천하에 적수가 없을 정도로 고절
했겠군요."

"아닙니다. 각원조사께선 무공을 못했습니다. 그 어른은 소림사
장경각에서 장경을 감독하는 동안 읽지 않은 경서(經書)가 없고
달달 외지 못하는 경서가 없었습니다. 그 어른께선 우연한 기회
에 구양진경을 발견하여 마치 금당경, 법화경을 익히듯이 머리
속에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기재된 정심박대(精深博大)한 무학은 그 어른도 깨닫기는 했지
만, 익힌 것은 내공뿐이며 무술은 조금도 못했습니다."

이어 유연주는 구양진경을 분실하게 된 경위를 은소소에게 자세
히 들려 주었다.

은소소는 크게 흥미를 느끼며 물었다.

"이제 보니 아미파의 사조와 무당파 사이에는 이런 관계가 있었
군요. 그렇다면, 곽양 곽여협은 왜 장진인과 결합하지 않았지
요?"

장취산이 웃으며 은소소를 꾸짖었다.

"은사님은 곽여협과 소실산 아래에서 헤어진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은사님의 말씀에 의하면, 곽여협이 마음 속에 두고
있는 사람은 양양성 밖에서 비석(碑石)을 던져 몽고군을 때려 죽
인 신조대협(神조大俠) 양과(楊過)입니다. 곽여협은 방방곡곡을
샅샅이 뒤져도 양대협을 찾지 못하자 마흔 살에 출가하여 니고
(尼姑)가 되었으며, 그 후 아미파를 창설했지요."

은소소는 곽양의 오직 한 사람에게만 향한 진실된 마음에 존경
과 함께 연민을 느끼며 장취산을 힐끔 돌아보았다. 장취산도 그
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연주는 은소소와 십여 일을 함께 지내는 동안, 그녀의 본성은
나쁘지 않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유연주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의 좋지 않던 인상이 점차 사라지고, 그녀의 솔직하고 진심된
마음은 명문 정파의 위선을 가장한 몇몇 인사들보다 훨씬 뛰어났
음을 알았다.

이때 동쪽 강변에서 또 말발굽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가 싶더
니, 그들이 탄 배 앞을 지나 서쪽으로 질주했다. 장취산은 말발
굽소리엔 개의하지 않고 유연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둘째 사형, 은사님께서 소림과 아미 양파의 고수들을 초빙하여
함께 연구 토론하면, 삼 파의 무공이 모두 진보할 게 아닙니까?"

유연주는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탁 쳤다.

"그렇구나! 사부님께서 바로 네가 앞으로 그 어른의 의발을 이
어받을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
이구나."

"은사님께선 소제가 곁에 있지 않아 보고 싶어 그런 말씀을 하
신 것뿐입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곁에서 효성을 다하는 자식보다
오랫 동안 집을 떠나 멀리 있는 아들을 더 보고 싶어하는 이치와
똑같은 것이지요. 사실 지금의 소제는 모든 면에서 큰 사형, 둘
째 사형, 네째 사형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섯째, 일곱째 사제보다
훨씬 못합니다."

유연주가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그렇지 않아. 무공만 논할 것 같으면 네가 나를 따르지 못하는
건 사실이야. 그러나 은사님의 의발전인은 무학을 널리 발전 보
급시키는 막중한 임무를 짊어져야 해. 때때로 은사님께선 혼잣말
로 천하는 끝없이 넓으니, 무당일파의 영욕(榮辱)은 마음에 둘
바 아니지만 정인군자의 무공은 사악한 소인배가 평생을 공부해
도 익히지 못하므로 신중을 기해 의발전인을 선택해야 한다고 하
셨어, 그러므로 은사님의 의발전인은 심술(心術)과 오성(悟性)을
두루 갖춘 사람이라야 되지. 심술면에 있어선 우리 칠형제가 모
두 비슷하지만, 오성면을 말하자면 네가 제일이라고 은사님께서
말씀하셨지."

"그건 은사님께서 소제를 너무 보고 싶어한 나머지 사실과 다르
게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그리고 설사 은사님께서 정말 그런 뜻
을 지니고 계신다 해도 소제는 감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유연주가 빙긋이 웃으며 은소소에게 화제를 바꾸어 말했다.

"제수씨는 사셔서 무기가 놀라지 않게 보호하십시오. 바깥일은
나와 오제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은소소가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아 망설
이고 있을 때 유연주가 또 입을 열었다.

"강변의 관목과 갈대밭 속에서 도광이 번뜩이는 것으로 보아,
적이 매복해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사방은 쥐죽은 듯이 조용하기만 했다.

유연주는 술을 한 잔 들이킨 후, 어두운 허공을 향해 낭랑한 목
소리로 외쳤다.

"무당산의 유이(兪二)와 장오(張五)가 당신들의 구역을 지나면
서 인사를 드리지 못해 미안하오. 어느 분이든지 흥미가 있으면
이리로 올라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면 어떻겠소?"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전면의 갈대밭 속에서 물을 가르는 소
리가 일며, 여섯 척의 소선(小船)이 강물 중앙으로 나와 한 줄로
배열했다. 이어 한 척의 소선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일으키
며 향전(響箭)을 발사하자 남쪽 강변의 관목 속에서 십여 명의
장한들이 나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흑의를 입고 손에는 병장기를
들었으며 얼굴은 흑건으로 복면을 하고 있었다.

은소소는 적이 모습을 나타내자 유연주의 예리한 이목(耳目)에
감탄하며 급히 선실로 들어가 보니 무기도 놀라 깨어 있었다. 그
녀는 무기에게 옷을 입히며 나직이 말했다.

"무기야, 조금도 무서워할 것 없다."

이때 유연주가 또 고함을 질렀다.

"전면의 친구 중 어느 분이 우두머리요?"

그러나 여섯 척의 소선에선 각각 한 명씩 선미에서 노만 젓고
있을 뿐, 아무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답변하는 사람도 없
었다.

'아차!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군.'

유연주는 갑자기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물
가에서 자랐기 때문에 헤엄을 물고기보다 잘 쳤다. 물 속에 잠수
하여 살펴보니 네 명의 장한이 각각 손에 뾰족한 창을 쥔 채 이
쪽으로 헤엄쳐 오고 있었다. 그들은 배 밑창에 구멍을 뚫어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생포할 의도인 것 같았다.

유연주는 배 옆에 몸을 바짝 붙인 채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
다. 연달아 손가락을 튕겨 두 사람의 혈도를 제압하고, 세 번째
사람은 발길질로 허리의 지실혈(志室穴)을 찍었다. 네 번째 사람
이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 도주하려 하자 유연주는 왼손으로
그 사람의 발목을 붙잡아 배 위로 던졌다. 이어 그는 혈도를 찍
힌 세 사람을 그대로 두면 익사할 것 같아 한 병씩 붙잡아 배 위
로 던진 후 자기도 뒤따라 올라갔다.

맨 먼저 배 위로 던져진 장한은 갑판 위에서 몇 바퀴 뒹굴더니
벌떡 일어나 창끝으로 장취산의 가슴을 찔러왔다. 장취산은 상대
방의 무공이 평범한 것을 보고 피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갑자기
왼손을 뻗어 상대방의 손목을 붙잡아 당기며 오른팔 팔꿈치로 그
의 앞가슴 혈도를 가격하자, 그 장한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
닥에 고꾸라졌다.

유연주가 장취산에게 나직이 말했다.

"강변에는 고수가 몇 명 있는 모양이다. 우리가 취할 도리는 다
했으니 상관하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가자."

장취산은 고개를 끄덕이고 선주에게 계속 노를 저으라고 분부했
다. 여섯 척의 소선 가까이 접근했을 때, 유연주는 네 장한의 혈
도를 풀어 준 다음, 한 명씩 소선 위로 던졌다. 그러나 이상하게
도 상대방 소선에선 여전히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으며, 강변의
흑의인 십여 명도 마치 벙어리가 된 것처럼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유연주 일행이 탄 배가 여섯 척의 소선 옆을 막 지나치려 할
때, 그 중 노를 젓던 한 명이 오른손을 휘젓자 요란한 폭음이 울
리며 나무 조각이 사방으로 날았다. 유연주가 고개를 돌려 보니,
이미 선미의 선타(船舵)가 산산조각나고 선체는 방향을 잃어 강
물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 장한이 던진 것은 어부가
물고기를 잡을 때 사용하는 어포(漁泡)였으나, 화약을 많이 넣어
특별히 제작했기 때문에 위력이 매우 강했던 것이다.

유연주는 아무 내색을 하지 않고 가볍게 몸을 솟구쳐 상대방의
소선에 내려섰다. 그 소선의 장한은 앞을 바라보며 노만 저을
뿐, 이쪽으로 건너 온 유연주를 본 체도 하지 않았다.

"어포를 던진 자가 누구요?"

유연주가 고함을 질렀지만 그 장한은 여전히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유연주가 선실로 들어가 보니 그곳에는 두 명의 장한이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그들 역시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적을 상대할 태도도 취하지 않았다. 유연주는 그 중 한
명의 뒷덜미를 잡아 들어올리며 고함을 질렀다.

"당신들의 두목은 어디 있소?"

그 장한은 대답대신 눈을 감아 버렸다. 유연주는 무림의 일류
고수 신분으로 그들에게 무력을 사용하고 싶지 않아 그 장한을
바닥에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장취산과 은소소도 무기
를 안고 소선으로 건너와 있었다.

유연주가 상대방의 손에서 노를 빼앗아 상류를 향해 저어나가려
할 때, 은소소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악적들이 배 밑창에 구멍을 뚫었어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배 밑바닥에서 강물이 솟아올랐
다. 유연주가 옆의 소선으로 건너가 보았지만 거기도 마찬가지였
다.

"오제, 우리들이 뭍으로 올라가지 않는 한 그들도 포위하지 않
을 모양인, 그렇다면 올라가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보세."

세 사람은 무기를 안고 뭍으로 뛰어올라갔다.

강변에는 복면을 한 십여 명의 장한이 반원형으로 그들 네 사람
을 포위했다. 이들이 소지하고 있는 병장기는 대부분 장검이었으
나 쌍도(雙刀)와 연편(軟鞭)을 든 사람도 몇 명 있었다.

유연주는 팔짱을 끼고 선 채 복면의 흑의 장한들을 왼쪽에서 오
른쪽으로둘러보기만 했을 뿐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 중 한 명
이 손짓을 하자 그들은 양옆으로 갈라지더니 병장기 끝을 아래를
향하게 한 채, 포권의 예를 올리며 길을 터주었다. 유연주도 포
권의 답례를 하고 그들 앞을 지나갔다. 그들은 유연주가 지나가
자 다시 길을 막고 장취산등 세 사람을 포위하더니 일제히 병장
기를 들어올렸다.

장취산이 이 광경을 보고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이제 보니 당신들은 이 장취산을 영접하러 왔군요. 하지만 나
는 결코 당신들의 이런 진세(陳勢)를 두려워할 졸부가 아니오."

중앙에 있던흑의인이 잠시 주저하더니 검끝을 아래로 내리며
다시 길을 터주었다.

장취산이 은소소에게 나직이 말했다.

"여보, 당신이 먼저 가시오."

은소소가 무기를 안고 막 그들 앞을 지나가려는 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세차게 울리며 다섯 자루의 장검이 일제히 무기를
겨냥했다. 은소소가 깜짝 놀라며 황급히 뒤로 물러섰으나, 다섯
명의 흑의인이 따라와 여전히 검끝으로 무기의 전신요혈을 겨냥
했다. 이 광경을 본 유연주가 발끝으로 땅을 굴러 그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포위망 안으로 날아들어와 양손을 번개같이 휘둘
렀다. 그러자 무기를 겨냥하고 있던 다섯 자루 장검 중 네 자루
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의 동작이 얼마나 빨랐던지 장검 네 자
루가 마치 동시에 날아가는 것 같았다. 이어 그는 왼손을 뒤집어
금나술(檎拿術)로 다섯 번째 사람의 장검을 쥔 손목을 움켜쥐며
중지(中指)로 그 사람의 손목 혈도를 찍었다.

다섯 명이 장검을 놓치고 뒤로 물러서자, 달빛 아래에 섬광이
번뜩이며 또 두 자루의 장검이 다가왔다. 그들은 검날을 눕혀 좌
우를 향하게 하여 똑같이 대막평사(大漠平沙) 초식을 펼쳤지만,
검세가 예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사람을 해칠 뜻은 없는 것 같
았다.

'곤륜검법! 이제 보니 이들은 곤륜파 제자였구나.'

유연주는 이렇게 생각을 굴리며 검 끝이 가슴 앞 세 치 거리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가슴을 안으로 오므리고 양팔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좌우 양손의 식지로 동시에 두 자루 장검의 검면(劍面)을
찍었다. 그 순간, 검면에서 한 줄기 유연한 경기(經氣)가 발출하
여 그의 지력(指力)을 절반이나 감소시켰을 뿐 아니라 상대방은
장검을 놓치지도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국 그의 지력을 감
당해 내지 못하고 세 걸음이나 후퇴하더니 한 명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또 한 명은 비명을 지르며 입에서 선혈을 한모금 토해
냈다. 그 비명소리는 밝고 부드러운 여자의 음성이었다. 중앙의
그 흑의인이 왼손으로 신호를 하자, 십여 명의 흑의인은 눈 깜짝
할 사이에 관목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러나 그들의 몸
매가 하나같이 가냘픈 것으로 보아 남장을 한 여자들임이 분명했
다. 유연주가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유이, 장오 두 사형제는 기회가 있으면 철금선생(鐵琴先生)을
친히 찾아 뵙고, 오늘의 무례함을 시죄드린다고 전해 주시오!"

흑의인들은 대답대신 가볍게 웃기만 했는데, 그 또한 여자의 목
소리였다.

은소소는 무기를 땅에 내려놓고 손을 꼭 쥐었다.

"그들은 대부분 여자였어요. 아주버님, 그녀들은 모두 곤륜파
제자인가요?"

"아닙니다. 아미파 제자들입니다."

"아미파 제자라구요? 그런데 아주버님께선 왜 철금선생을 찾아
뵙는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들이 시종일관 소리를 내지 않고 또 얼굴을 흑건으로 가린
것은 정체를 밝히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아까 다섯 자루의 장검
이 무기를 겨냥한 것은 곤륜파의 한매검진(寒梅劍陣)이었으며,
두 사람이 검으로 나를 찌른 것도 곤륜파의 대막평사 초식이었습
니다. 그녀들이 곤륜파 제자 행세를 하기에, 나도 그들의 신분을
간파하고 싶지 않아 곤륜파 장문인 철금선생 하태곤(何太坤)의
이름을 들먹였을 뿐입니다."

"둘째 아주버님은 그녀들이 아미파의 제자라는 것을 어떻게 아
셨어요?"

"그녀들의 공격이 깊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당금의 아미파 장문
인 멸절사태(滅絶師太)의 도손(徒孫)이든지 아니면 소제자(小弟
子)들일 것으로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녀들이 부드러운
무공으로 나의 지력을 약화시킨 것은 아미 심법이 분명했습니다.
다른 문파의 초식과 진식을 배우는 건 어렵지 않지만, 내경(內
經)은 아무도 쉽게 흉내내지 못하지요."

장취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둘째 사형께서 지력으로 검신을 가격했을 때 즉시 그녀들이 검
을 철회했다면 가벼운 내상도 입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미파의
내공은 매우 심후하지만, 상당한 경지에 이르기 전에 섣불리 사
용하면 큰 봉변을 당할 우려가 있지요. 둘째 사형께서 그녀들을
정말 적으로 간주했다면, 그 두 여자는 지금쯤 싸늘한 시체가 되
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 사형께선 그녀들에게 왜 따끔한 맛
을 보여 주지 않고 자비를 베풀었습니까?"

"은사님께서 소년 시절에 아미파의 개파조사(開波祖師) 곽양 여
협의 신세를 진 일이 있기 때문이네. 그 어른께선 기회 있을 때
마다 우리들에게 아미파 제자를 만나면 가능한 한 양보하라고 당
부하셨지. 아까 내가 지력으로 검을 가격했을 때 상대방의 내공
이 심후하지 못함을 발견하고 철회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
아 두 사람을 다치게 했지. 비록 실수이긴 하지만 은사님의 훈시
를 어겨 마음이 몹시 걸리는 구나."

은소소가 웃으며 유연주를 위로했다.

"그러나 아주버님께선 마지막에 철금선생에게 사죄드린다고 말
씀하셨으니, 직접적으로 아미파에 죄를 범한 것은 아니예요,"

이 무렵 그들이 타고 왔던 배는 이미 하류로 돌아가 종적도 보
이지 않았다. 여섯 척의 소선 역시 모두 침몰하여 노를 젓던 사
람들은 전신이 젖은 체 강변으로 기어올라오고 있었다.

은소소가 나직이 물었다.

"저들도 모두 아미파의 제자들인가요?"

"아닙니다."

은소소가 아미파 제자들이 떨어뜨리고 간 장검을 주워 살펴보려
하자, 유연주가 제지했다.

"그녀들의 병장기에 손대지 마십시오. 검에 이름이라도 새겨 두
었다면 후일 우리는 몰랐다고 잡아뗄 수 없게 됩니다."

은소소는 유연주의 세심함에 내심 탄복을 금치 못하며, 무기의
손을 잡고 강변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관목이 울창한 수림을 막
지났을 때, 거대한 버드나무 가지에 세 필의 말이 매어져 있었
다. 무기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저기 말이 있어요,"

네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 보니, 나무줄기에 종이쪽지가 한 장
꽂혀 있었다.

<배를 파손시킨 죄로 말을 세 필 드립니다.>

탄필(炭筆)로 적은 글씨는 시간에 쫓긴 탓인지 갈겨 썼지만 여
자의 필체임이 틀림없었다. 은소소가 웃으며 말했다.

"아미파 낭자들은 눈썹을 그리는 탄필로 무당대협에게 쪽지를
남겼군요."

그들은 나뭇 가지에서 말을 풀어 한 필씩 나누어 탔다. 무기는
은소소 앞에 앉아 무척 좋아했다.

장취산이 말등에 올라타며 입을 열었다.

"둘째 사형, 우리들은 어차피 행적이 노출되었으니 배를 타나
말을 타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군. 무당산까지 도착하는 동안 여러 차례 파문이 일 거야.
그러나 만부득이하지 않는 이상 살수를 펼쳐 내선 안 된다."

유연주는 본의 아니게 아미파 제자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 아무
래도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둘째 아주버님은 다만 상대방을 물러나게 하려다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혔는데도 이렇게 후회하고 불안해 하는데, 지난날 나는
일시적인 감정으로 소림 제자를 그렇게 많이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니..... 앞으로는 둘째 아주버님을 번거롭게 만
들지 말아야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는 유연주를 돌아보았다.

"둘째 아주버님, 지금까지 나타난 사람들은 모두 우리 부부를
목적으로 삼았을 뿐 둘째 아주버님에게는 무척 공손했어요. 만약
앞으로 또 제지를 당하면 제가 해결할 테니, 아주버님은 개입하
지 마세요."

"그 무슨 서운한 말입니까? 형제라면 마땅히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어야지, 동생의 어려움을 보고 모른체 한다면 그
건 금수보다 못한 짓입니다."

은소소는 유연주가 이렇게 말하자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화제
를 바꾸어 물었다.

"그들은 둘째 아주버님이 우리 부부와 함께 있다는 것을 잘 알
고 있을 텐데, 왜 경험도 부족한 어린 제자들만 파견 했을까요?"

"시간에 쫓겨 고수들을 파견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겠죠."

장취산은 아까 아미파 제자들의 행위로 보아 그녀들의 목적도
사손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한 것이라 짐작했다.

"둘째 사형, 의형은 아미파와도 원한을 맺은 모양이군요. 하지
만 아미파와 원한을 맺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아미파는 규칙이 엄격하고 또 제자들이 대부분 여자인지라 멸
절사태는 제자들이 강호를 주행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지.
그런 아미파도 천응교를 적대시하기에 처음에는 무슨 까닭인지
몰라 의아스러워했는데, 최근에 와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지.
원래 하남성 난봉(蘭封)의 금조추(金爪錘) 방평(方評) 방노영웅
이 어느 날 갑자기 살해되고 벽에 혼원벽력수 성곤의 소행이라는
혈서가 적혀 있었지."

은소소가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방평은 아미파 사람인가요?"

"아닙니다. 멸절사태의 속가(俗家)로 성이 방씨이며, 방노영웅
은 바로 멸절사태의 친오빠이지요."

장취산과 은소소는 그제야 아미파가 사손의 행방을 찾으려는 이
유를 알고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무기가 갑자기 유연주에게 물었다.

"둘째 사백, 방노영웅은 좋은 사람인가요, 나쁜 사람인가요?"

"방노영웅은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아무와도 왕래하지 않았으
니 나쁜 사람이라 할 수 없지."

"의부께서 선악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살인을 자행한 건
정말 옳지 않아요."

유연주는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은소소의 품에서 무기를
안아 받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무기야, 네가 함부로 살인하면 안 되는 것을 알다니 매우 기특
하구나.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므로 아무리 죄
가 많고 극악무도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일 것이 아니라 개과천
선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참! 둘째 사백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
다."

"무슨 부탁이냐?"

"설령 그들이 의부를 찾아 낸다 해도 둘째 사백께서 그들이 의
부를 죽이지 못하게 해주세요. 의부는 앞을 보지 못해 그들을 당
해내지 못해요."

유연주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부탁은 승낙할 수 없구나. 하지만 나는 절대 그를 죽이지
않는다고 약속하겠다."

무기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숙였다.

날이 밝을 무렵, 그들은 조그만 마을에 도착했다. 객점에서 잠
깐 휴식을 취한 후 다시 길을 재촉했다.

며칠간의 여행끝에 무한(武漢)을 지나 이날 오후 안륙(安陸)에
거의 도착했은 때, 갑자기 앞에서 십여 명의 상인들이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유연주 일행 곁을 지나치며 조
급한 어조로 외쳤다.

"빨리 되돌아가시오! 저쪽 앞에서 달자병(達子兵:몽고병)들이
살인 약탈을 자행하고 있소."

또 한 사람은 은소소에게 손짓을 했다.

"당신같이 젊고 아름다운 부인이 달자병에게 잡히면 어떻게 되
는지 아시오?"

"달자병의 수가 얼마나 됩니까?"

"십여 명인데 하나같이 흉악하기가 늑대 같아요."

그들은 말을 끝내기 무섭게 동쪽으로 도망쳐 갔다.

무당칠협이 제일 미워하는 것은 선량한 백성을 해치는 원병(元
兵)이었다. 장삼봉도 평소에 문인들을 엄격히 다스려 싸움질을
하면 추호도 용서하지 않았지만, 원병이 만행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 가차없이 살수를 펼쳤다.

약 삼 리 가량 달려나아갔을 때 처절한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
다. 장취산이 앞장서서 달려가 보니 십여 명의 원병이 손에 손에
강도장모(鋼刀長矛)를 휘두르며 수십 명의 백성들에게 대살육을
자행하고 있었으며 선혈이 낭자한 바닥에는 이미 목없는 시체가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이때 한 명의 원병이 이제 겨우 서너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를 잡아채더니 발길질로 공중 높이
차올렸다. 어린 아이가 허공에서 비명을 지르며 떨어지자 이번에
는 다른 원병이 발길질을 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장취산은
말에서 곧장 몸을 뽑아올려 발끝이 땅에 닿기도 전에 일권으로
한 원병의 가슴을 가격했다. 그 원병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고
꾸라지자 다른 한 명의 원병이 장모를 휘두르며 장취산의 배심
(背心)을 찌르려 했다.

무기가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며 고함을 질렀다.

"아버지, 조심하세요!"

장취산은 뒤로 돌아서며 빙긋이 웃었다.

"무기야, 이 아비가 달자병을 어떻게 요리하는지 잘 보아 두거
라."

장모가 가슴 앞 반 치 거리에 도착했을 때 장취산은 왼손을 교
묘하게 뒤집어 장모를 붙잡아 앞으로 힘껏 밀쳤다. 장모의 손잡
이 끝이 그 원병의 명치에 정확하게 적중하였다.

"으악!"

그 원병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스러져 몇 번 바둥거
리더니 곧 잠잠해졌다. 이 광경을 목격한 나머지 십여 명의 원병
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장취산을 포위 공격했다. 뒤따라 도착
한 은소소가 말에서 뛰어내려 원병의 손에서 장도(長刀)를 빼앗
아 두 명을 살해했다. 나머지 원병들은 정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워낙 흉악한
지라 도주하면서도 칼을 휘둘러 백성을 살육했다. 유연주가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달자병을 한 놈도 놓치지 말고 모두 제거해라!"

하며 서쪽으로 몸을 날려 도주하는 네 명의 원병을 붙잡았다.
장취산과 은소소도 좌우로 흩어져 원병을 뒤쫓았다. 장취산 등은
원병이 비록 흉악하지만 무공은 보잘 것 없으며 오히려 무기가
그들보다 고강하다고 생각하고는 무기를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
다.

무기는 말등에서 뛰어내려 유연주와 부모가 원병들을 제거하는
것을 보고 손뼉을 치며 응원했다. 이때 좀전에 장취산이 되찌른
장모의 손잡이 끝에 명치를 맞아 쓰러졌던 원병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무기의 허리를 덥석 안고 말에 뛰어올라 쏜살같이 질
주했다.

유연주와 장취산 부부는 대경실색하며 거의 동시에 그 원병을
추격했다. 유연주는 몇 번 몸을 솟구치지 않아 바로 뒤까지 추격
하여 왼손을 뻗어 그 원병의 배심을 향해 일장을 가격했다. 그러
나 그 원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만 뒤집어 일장을 반격했다.
경미한 음향과 함께 쌍방의 손바닥이 부딪치는 순간, 유연주는
상대방의 장력에 비틀거리며 뒤로 세걸음 밀려났다. 하지만 그
원병이 타고 있던 말은 유연주가 뻗어낸 일장의 위력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원병은 말이 쓰러지자 무기
를 안은 채 이 장 밖으로 몸을 날리더니 경신술(經身術)을 시전
하여 순식간에 십여 장 밖까지 날아갔다. 장취산이 도착해 보니
유연주는 엄중한 내상을 입고 얼굴빛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져 있
었다.

한편 은소소는 사랑하는 아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사력을 다해
뒤쫓았지만, 그 원병의 경신술이 워낙 뛰어나 쌍방의 거리가 점
점 멀어져 결국 그 원병의 모습을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은소소
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미친 듯이 뒤쫓았다. 그녀는 그 원병이
유연주까지 격상시킨 것으로 보아 설사 상대방을 붙잡는다 해도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알지만 그런 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
다.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무기만은 구하고 말겠다.'

유연주가 숨을 가늘게 몰아쉬며 간신히 말했다.

"빨리 제수씨를 불러 차분히 계획을 세우자."

장취산은 장모를 뻗어 또 두 명의 원병을 찔러 죽인 후 물었다.

"상세가 엄중합니까?"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 빨.....빨리 제수씨부터 돌아오라고 해
라."

장취산은 자기가 없는 사이에 나머지 원병들이 유연주를 해칠것
이 염려되어 한 명씩 추격하여 모두 제가한 후 말등에 뛰어올라
은소소가 사라진 방향으로 치달렸다.

얼마를 달리니 은소소가 앞에서 혼자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었
으나 이미 기진맥진하여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장취산이
그녀를 안아 말등에 앉히자 그녀는 울면서 앞을 가리켰다.

"그 놈이 보이지 않아요. 이제 다 틀렸어요."

라고 말을 마치자마자 기절해 버렸다.

장취산은 무기보다 유연주의 안위가 더욱 걱정되었다.

'먼저 둘째 사형부터 보살핀 다음 무기를 찾을 방도를 강구해야
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말머리를 돌려 돌아와 보니, 유연주는 땅바닥
에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 눈을 감은 채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린 은소소가 또 미친 사람처럼 외쳤다.

"무기야.....! 무기야.....!"

유연주의 창백했던 얼굴에 점차 홍조가 감돌며 눈을 떴다.

"대단한 장력이구나!"

장취산은 유연주가 입을 열자 생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고 다
소 마음을 놓았다.

"둘째 아주버님. 이.....이제 어떡하면 좋죠?"

"제수씨, 무기에게 별다른 일은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
시오. 그 사람은 무공이 무척 고강했으니 절대 어린 아이는 해치
지 않을 것입니다."

"하.....하지만 그.....그는 무기를 납치해 갔어요."

유연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왼손으로 장취산의 어깨를 붙잡고 눈
을 감은 채 한참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가볍게 탄식했다.

"그 사람이 어느 문파의 제자인지 모르겠으니, 무당에 돌아가
은사님께 여쭈어 보자."

은소소는 이 말을 듣고 몹시 조급해 했다.

"둘째 아주버님, 어떤 수를 써서라도 무기부터 먼저 구해야지
요. 그 사람이어느 문파의 제자인지는 천천히 여쭈어 보아도 늦
지 않잖아요."

유연주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자 장취산이 은소소를 타일렀다.

"여보, 지금 둘째 사형께선 중상을 입었고, 또 그 사람의 무공
이 상당히 고강하므로 그를 찾는다 해도 속수무책이오."

"그.....그러면 무기를 포기하잔 말인가요?"

"우리가 그 사람을 찾아가지 않아도 그 사람이 우리를 찾아올
것이오."

은소소는 남편의 말을 듣고 다시 이성을 회복했다. 그 사람의
무공이 유연주까지 일장에 중상을 입힐 정도로 고강한 것을 보아
진짜 원병이 아니라 원병으로 변장한 것이 분명했다. 그가 유연
주에게 중상을 입힌 후 장취산 부부를 살해할 마음만 먹었다면,
지금쯤 두 사람은 싸늘한 시체로 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
은 무기만 납치해 갔으니, 그 의도는 사손의 행방을 말하게 하려
는 것임이 분명했다. 장취산은 유연주를 안아 말등에 앉히고 자
기도 말등에 올라탄 후 천천히 말을 몰았다.

안륙에 도착한 후 조그만 적객에 투숙한 장취산은 또 원병을 남
나 시비가 벌어질 것이 염려되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식사도 방
안에서 했다. 유연주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공을 운기하여 전
신 혈도로 유전(流轉)시키며 상세를 치료했다. 자정이 되었을 무
렵 유연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제, 나는 일생을 통해 은사님을 제외하고는 그 같은 고수를
만나기는 이번이 처음이야."

은소소의 마음 속에는 오직 무기 생각뿐이었다.

"그 사람이 무기를 납치한 목적은 의형의 행방을 묻기 위한 것
이 분명한데, 무기가 말을 하지 않을까 모르겠군요."

장취산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무기가 만약 순순히 말한다면 우리들의 자식이라 할 수 있겠
소?"

"그래요. 절대 말하지 않을 거예요."

말을 마친 은소소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왜 그러오?"

"무기가 순순히 말하지 않으면 그 악적이 무기에게 독형(毒刑)
을 가할지도 몰라요."

"구슬도 깎아야 보배가 되듯이 그 아이도 어려움을 겪어야지만
진정한 장부로 성장할 수 있소."

장취산은 입으론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사랑하는 자식이 고문을
당하고 있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무기가 편안히 잠들어 있다면 그것은 사손의 행방을 말했음을 증
명하는 것인, 이런 배은망덕한 행위는 무기가 독형을 당하는 것
보다 더욱 장취산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아이가 당장 죽음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배은망덕한
소인이 되는 것은 원치 않아.'

장취산이 이렇게 생각하며 은소소를 돌아보니 그녀는 만면에 애
원의 빛을 가득 띄고 있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은근히 걱정하며 유연주에게 물었다.

"둘째 사형, 상세는 좀 어떻습니까?"

유연주는 그들 부부의 얼굴 표정에서 장취산의 의도를 간파했
다.

"그래.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무당에 도
착하자."

세 사람은 어둠을 이용하여 황량하고 인적이 없는 길만 택해 걸
었다. 그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그 사람이 뒤 쫓아와 그들을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는 앞에서 참혹하고 잔인한 수
법으로 무기에게 고문을 가하는 것이었다.


----- 제 2 권 3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2 권


제 4 장 무당칠협(武當七俠)의 재회(再會)


그들은 낮에는 쉬고 밤에만 길을 떠났다. 은소소는 밤낮없이 아
들 걱정만 하고, 거기다 밤이슬과 밤바람을 쐰 탓인지 병이 났
다. 장취산은 마차를 한 대 빌려 유연주와 은소소를 마차에 태우
고 자기는 말을 타고 갔다. 이날 그들은 양양을 지나 태평점(太
平店)의 객점에 투숙했다.

장취산이 유연주의 잠자리를 보살펴주고 막 자기 방으로 돌아가
려 할 때였다. 갑자기 웬 사내 하나가 주렴(竹廉)을 들치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 장한은 청포단삼을 입고 손에는 채찍을 들
어 차림새로 보아 마차를 모는 마부 같았다. 그는 방 안에 들어
와 유연주와 장취산을 향해 차가운 코웃음을 치고는 곧 밖으로
나갔다. 장취산은 그 장한이 밖으로 나가는 순간, 내공을 주입시
켜 왼손으로 주렴을 나꿔채어 던졌다. 난데없이 기습을 당한 그
장한은 머리를 쳐박으며 앞으로 고꾸라지더니 간신히 일어나 고
함을 질렀다.

"무당파 도배야, 죽음이 눈앞에 이르렀는데도 행패를 부리느
냐?"

이렇게 말한 그는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밖으로 도망치듯 나
갔다.

유연주는 이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안해진 장취산은 유연주에게 제의했다.

"둘째 사형, 지금 떠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니야,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 새벽에 떠나기로 하자."

장취산은 유연주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
다.

"그렇군요. 여기서 무당산까지는 이틀 거리밖에 되지 않으니,
우리 사형제가 아무리 무능하다 해도 사문의 위명을 실추시킬 순
없지요. 무당산 기슭에서조차 낮엔 숨고 야밤을 이용해 도망치듯
길을 간대서야 말이 아니지요."

"어차피 행적은 이미 노출되었으니, 어디 두고 보자꾸나."

두 사람은 장취산의 방으로 옮겨 나란히 앉아 함께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이날 밤, 창문 밖과 지붕 위에서 칠팔 명에 가까운 장
한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방 안을 기웃거렸지만 감히 안으로 난입
하진 못했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식사를 끝내자마자 떠날 준비를 했다. 마
차에 올라앉은 유연주는 마부에게 마차에 둘러쳐진 포장을 모두
걷으라고 분부했다.태평점 마을을 나와 오리 가량 왔을 때, 동쪽
에서 세 필의 기마가 나타나더니 마차와 십여 장의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또 얼마를 가자 길옆에서 말을 탄 네 명의 장한이 기
다리고 있었다. 유연주 일행이 그곳을 지나가자 그들은 처음 세
사람과 합류하여 마차의 뒤를 따랐다. 얼마를 더 달려 다시 오후
가 되자 그들의 인원은 스물 한 명으로 늘어났다. 개중에 몇 명
은 채찍을 휘두르며 가까이 접근하기도 했지만, 삼 장 이내로 들
어오지는 않았다. 유연주는 마차에 앉아 눈을 감고 운기 조식을
할 뿐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저녁 무렵, 맞은편에서 두 필의 기마가 달려왔다. 그 중 한 명
의 말에는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타고 있었는데 병장기는 지
니지 않은 것 같았다. 또 한 필의 말에는 요염하게 옷을 차려 입
은 젊은 부인이 왼손에 한 쌍의 쌍도(雙刀)를 들고 있었다. 두
필의 기마는 대로 중앙에 멈추어 길을 막아섰다.

장취산은 치솟는 분노를 억제하며 말등에 앉은 채 포권의 예를
올렸다.

"무당산의 유이, 장오가 인사드립니다. 귀하의 존성대명(尊姓大
名)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그 노인은 장취산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기분 나쁘게 웃었
다.

"금모사왕 사손은 어디 있소? 당신이 그의 은신처를 말한다면
우리는절대 당신들을 괴롭히지 않겠소."

"이 일은 불초 혼자 결정할 수 없으며 은사님의 뜻을 먼저 여쭈
어 봐야 합니다."

"유이는 부상을 당해 장오는 외톨이가 되었소. 당신 혼자서는
이렇게 많은 우리들의 적수가 되지 못하오."

하며 노인은 허리춤에서 한 쌍의 판관필을 꺼내었다. 그 판관필
끝은 뱀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은구철획(銀鉤鐵劃)이라는 장취산의 별명이 말해 주듯이, 그는
오른손으로 판관필을 사용하므로 무림에서 판관필을 사영하는 점
혈명가(點穴名家)중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한 쌍의
뱀머리 판관필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언젠가 사
부는 고려(高麗)에 판관필을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문파가 있다는
말을 했다. 판관필 끝을 뱀머리 모양으로 조각하여 초식과 점혈
수법이 중원 인사와 크게 다를 뿐 아니라, 독사의 음유하면서 독
랄한 성격을 본받아 미끄럽고 매섭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들은 적
이 있었다. 그 문파의 이름은 청룡파(靑龍波)이며 우두머리의 성
이 천(泉)가라는 것만 알 뿐 이름이 무엇인지는 사부도 모른다고
했었다. 장취산은 재차 포권의 예를 올렸다.

"선배님은 고려 청룡파 사람이십니까? 천노야(泉老爺)와는 어떤
관계이신지요?"

노인은 내심 흠칫 놀랐다.

'이 젊은이는 나이가 서른도 채 안 된 것 같은데 나의 내력을
알고 있다니 견문이 매우 넓구나.'

이 노인이 바로 고려 청룡파의 장문인 천건남(泉建男)이었다.
그는 영남(嶺南) 삼강방(三江幇) 방주 비사(鼻詞)의 특별 초청을
받아 중원에 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중원에 도착한 후 한 번도
솜씨를 펼쳐보인 적이 없는데, 의외로 장취산이 첫대면에 출신
내력을 알아보자 사두쌍필(蛇頭雙筆)을 가슴 앞으로 들어올렸다.

"노부가 바로 천건남이오."

"고려의 청룡방은 중원 무림과 왕래가 없는 줄 알고 있는데, 우
리 무당파가 천노영웅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분명히 말씀
해 주십시오."

천건남이 또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노부는 귀하와 아무 원한이 없소. 우리 고려 사람도 중원에 무
당파라는 문파가 있고, 무당칠협은 협의심이 강한 대장부들이라
는 것을 익히 알고 있소. 노부는 귀하에게 한 마디만 묻겠는데,
금모사왕 사손은 지금 어디 숨어 있소?"

그의 이 말은 비록 무례하진 않지만 강요하는 의미가 충분했다.
그가 판관필을 가슴 앞까지 들어올리자 마차 뒤를 따라왔던 장한
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마차를 포위했다. 그들의 이런 태도는 만
약 사손의 행방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다면 무력을 사용하겠다
는 뜻이었다.

장취산이 짙은 눈썹을 높이 치켜올렸다.

"만약 불초가 말을 하지 않는다면 어떡하겠소?"

"장오협은 무예가 대단하니, 우리는 비록 인원수가 많지만 당신
을 어떻게 하지는 못하오. 그러나 유이협은 부상을 당했으며 영
부인도 병중이오. 우리는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들
두 분을 머물게 할 테니, 장오협은 혼자 돌아가시오."

장취산은 상대방이 위기에 처한 기회를 이용하겠다고 노골적으
로 말하자, 화가 왈칵 치밀었다.

"좋소. 그렇다면 불초는 고려의 무학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직접
가르침을 받아보겠소. 그러나 천노영웅께서 실수를 하여 불초에
게 패하시게 되면 어떻게 하시겠소?"

"만약 내가 패한다면 여기 있는 사람이 일제히 덤빌 것이오. 우
리는 원래부터 강호의 규칙 같은 것은 따지지 않소. 그러니 당신
도 가능한 다수의 힘을 이용하시요. 옛날 중국의 수양제, 당태
종, 당고종 등이 우리 고려를 침략할 때도 언제나 수십만 대군으
로 우리를 공격했지요. 예나 지금이나 싸움에는 인원수가 많은
쪽이 유리하지요."

장취산은 지금의 상황에서는 천건남을 생포하여 그의 부하들에
게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위협하는 방법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고 판단했다. 그는 뛰어내리기 무섭게 왼손에는 난은호두구(欄銀
虎頭鉤) 오른손에는 빈철판관필(빈鐵判官筆)을 뽑아들었다.

"당신은 손님이니 당신이 먼저 공격하시오."

천건남도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우필(右筆)로 허공을 찍고 좌필
(左筆)은 내밀지도 않은 채 번개처럼 장취산의 좌측으로 돌아갔
다.

'오늘 나는 의형의 안전을 위해 싸우기 때문에 설사 목숨을 잃
는다 해도 그만이지만, 둘째 사형은 의형과 알지도 못하는 관계
이다. 의형 때문에 둘째 사형에게 치욕을 당하게 해선 절대 안
되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장취산은, 천건남이 오른손의 사두필로
찍어오자 이성(二成)의 공격만 사용하여 호두구를 휘둘러 막아냈
다. 쌍방의 병장기가 부딪치는 순간 그는 상체를 약간 휘청거렸
다. 이 광경을 보고 용기백배한 천건남은 뒤이어 좌필로 연달아
삼초를 공격했다. 장취산은 우구좌필(右鉤左筆)로 반격을 가했지
만 그 역시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오늘 내가 무당칠협중의 장오협만 요리하면, 중원무림에 일약
명성을 떨칠 수 있겠구나.'

천건남은 중원에서 명성을 떨치겠다는 욕심에 쌍필을 난무하며
장취산의 치명 요혈만 골라 공격했다.

장취산은 빈틈없이 엄중히 전신 요혈을 모호한 채 상대방의 초
식을 자세히 관찰했다. 천건남의 초식을 가볍고 날렵하면서도 상
당한 위력이 내포되어 있었다. 상대방의 공격 수법을 완전히 간
파한 장취산은 은구철획을 상하로 휘둘렀지만 그것은 속임수에
불과했다. 사실은 독맥의 여러 혈도와 족소양담경제혈만 보호할
뿐 다른 혈도는 상관하지 않았다. 천건남은 싸울수록 사기 충천
하여 기합까지 넣어가며 맹공을 퍼부었다.

장취산은 갑자기 왼손의 은고로 용자결(龍字訣) 중의 일구(一
鉤)를 시전하여 천건남의 오른쪽 다리 풍시혈(風市穴)을 긁었다.
순간 천건남이 비명을 지르며 오른쪽 무릎을 꿇자, 장취산은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우필로 전광석화처럼 그의 영대혈(靈大穴)
에서부터 아래로 찍어내리기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봉자결(鋒字
訣)의 일필(一筆)로 장강혈(長强穴)을 찍었다. 순식간에 독맥의
여러 혈도를 제압당한 천건남은 마치 굳어 버린 석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장취산이 찍은 혈도는 천건남이 평생을 두고 연구
하여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던 혈도인지
라, 그는 자신의 무공에 대해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장취산은 은구 끝으로 천건남의 인후혈(咽喉穴)을 겨냥한 채 고
함을 질렀다.

"모두들 물러 서시요! 불초는 천노영웅을 무당산 기슭까지 데려
간 후 혈도를 풀고 석방해 주겠소!"

그는 이들이 천건남의 부하인 이상 천건남만 제압하며 감히 경
거망동하지 못하고 순순히 물러나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의외
로 이때 염장소부(艶裝少婦)가 쌍도를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모두 덤벼 마차를 압류해라!"

장취산은 깜짝 놀라며 외쳤다.

"누구든지 움직이기만 하면 이 사람부터 먼저 죽여 버리겠소."

"빨리 포위 공격하지 않고 무엇들 하느냐!"

염장소부의 호령에 장한들은 천건남의 생사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탄 채 칼을 휘두르며 덮쳐왔다. 원래 이 염장소부는
삼강방의 타주이며 그들이 이번에 대거 출동한 목적은 유연주와
은소소를 생포하여 사손의 행방을 말하게 하는 것이었다. 천건남
은 삼강방이 초청한 손님에 불과한지라 삼강방에 도움이 되지 않
는 이상 상대방의 손에 죽든 말든 그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이때 육칠 명의 장한은 은소소를 포위하고 다른 육칠 명은 유연
주를 포위했다. 나머지 몇 명의 염장소부와 함께 장취산을 둘러
쌌다.

'내가 천건남을 죽인다 해도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 뻔한 일이니 어떡하면 좋을까?'

장취산이 망설이고 있을 때, 유연주가 갑자기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육제(六弟), 빨리 나와 이들을 수습하지 않고 뭘 하느냐!"

장취산이 어리둥절하여 유연주를 돌아보았다.

'둘째 사형께선 공성지계(空城之計)를 사용하시나?'

그가 미처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허공에서 맑은 외침소리가 대
답했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다섯째 사형, 무사하셨군요. 소제는
다섯째 사형이 미치도록 보고 싶었습니다."

말소리와 함께 나뭇잎이 울창한 오 장 밖의 고목 위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뛰어내리더니 장검을 흔들며 앞으로 걸어왔다. 장취산
이 고개를 돌려 보니, 그 사람은 육협 은이정이 틀림없었다.

"육제, 그 동안 잘 있었나?"

이때 삼강방의 장한 몇 명이 쏜살같이 달려가 은이정을 포위했
다. 그러나 그들은 미처 전세를 가다듬지도 못하고 비명을 지르
며 차례로 병장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들은 이미 모두 은이
정의 장검에 손목의 신문혈(神門穴)을 적중당한 것이다. 신문혈
은 손바닥 바로 상단에 위치해 있어 적중 당하기만 하면 손바닥
은 힘을 쓰지 못하게 된다. 은이정은 천천히 걸어오며 상대방이
덮쳐와 제지하면 장검으로 상대방의 신문혈을 찔러 병장기를 떨
어뜨려 버렸다.

이 광경을 본 염장소부는 놀람과 두려움으로 얼굴빛이 하얗게
변했다.

"당신은 무당.....!"

그러나 그녀 역시 들고 있던 쌍도를 힘없이 바닥에 떨어뜨렸다.

장취산은 크게 기뻐하며 고함을 질렀다.

"사부님께선 드디어 신문십삼검(神門十三劍)을 연창(硏創)해 내
셨구나!"

원래 이 신문십삼검은 모두 십삼 초로 매 초식마다 성질이 각각
다르지만, 찌르는 위치는 모두 상대방 손목의 신문혈이다. 장취
산이 십 년 전 무당산을 떠날 때 장삼봉은 신문십삼검을 연창해
야겠다는 뜻을 품고 제자들과 몇 차례 상의했지만, 여러 가지 어
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뒤로 미루어 두었던 것이다. 그 절
예를 은이정이 펼쳐냈으니 삼강방 제자들이 막아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사실 은이정이 찔러낸 검초는 하나같이 정묘절륜(精妙
絶倫)하여 신문십삼검을 절반도 시전하지 않아 삼강방 제자들은
십여 명이나 손목을 찔리고 병장기를 놓쳐버렸다.

염장소부가 손목을 움켜쥔 채 고함을 질렀다.

"모두 철수하라!"

삼강방 제자들은 명령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분분히 삼십
육계 줄행랑을 쳤다. 장취산은 천건남의 혈도를 풀고 사두쌍필을
주워 그의 허리춤에 꽂아주었다. 천건남은 수치심으로 얼굴을 일
그러뜨린 채 도주했지만 삼강방 제자들과 동행하진 않았다.

은이정이 장검을 검집에 꽂고 장취산의 손을 덥석 잡았다.

"다섯째 사형,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여섯째, 그 동안 많이 컸구나."

그들이 헤어질 무렵 은이정은 열 여덟 살에 불과했는데, 십 년
사이에 그는 훤칠하고 영준한 청년으로 변모해 있었다. 장취산은
은이정의 손을 잡은 채 아내 은소소를 소개했다.

은소소는 병중인지라 거동이 불편하여 마차에 비스듬히 기댄 채
고개만 약간 끄덕여 보였다.

"여섯째 도련님, 만나게 되어 반가와요."

"다섯째 형수님도 성이 은가라니 잘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비
단 나의 형수님일 뿐 아니라 나의 누님도 되기 때문이지요."

장취산이 감탄의 눈빛으로 유연주를 돌아보았다.

"둘째 사형은 역시 대단하셔. 네가 고목 위에 숨어 있는 것을
나는 눈치도 채지 못했는데, 둘째 사형은 처음부터 알고 계셨으
니 말이야. 육제, 너는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느
냐?"

은이정은 이곳으로 마중오게 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며칠 전 사협 장송계가 사부의 생신 백 주년 잔치 때 사용할 음
식을 장만하려고 하산했다가, 행동이 수상쩍은 두 명의 강호 인
물을 만나 암암리에 미행하던 중 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그래서 행방불명이 되었던 장취산이 돌아와 유연주를 만났다는
것과 삼강방과 오봉도(五鳳刀) 무리들이 그들을 제지하여 사손의
행방을 알아내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장송계는 크게 기뻐하며
총총히 돌아갔다. 그리고 혼자 있던 은이정과 함께 유연주 일행
을 찾아나섰다. 그들은 유연주와 장취산의 무공을 염려해서가 아
니라 한시라도 빨리 장취산과 만나고 싶어 하산했을 뿐이었다.
당시 유연주가 부상을 당한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아 정송
계는 오봉도 문중에서 파견한 두 고수를 쫓으러 갔고, 은이정은
삼강방 제자들을 쫓기 위해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전후 경위를 들은 유연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째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우리 무당파는 큰 망
신을 당할 뻔했구나."

장취산도 부끄러움을 금치 못했다.

"소제 혼자의 힘으론 사실 둘째 사형을 보호할 수 없었습니다.
십 년간 사부님 곁을 떠나 있었으므로 무공이 여러 사형과 사제
들에 비해 훨씬 뒤떨어졌음을 이번에 절실히 느꼈습니다."

은이정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다섯째 사형께선 겸손을 부리는 버릇이 여전하시군요. 소제가
출수하지 않아도 삼강방 도배들 정도는 다섯째 사형 혼자서도 충
분히 요리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둘째 사형과 다섯째 형수님의
안위를 염려하여 출수를 망설였을 뿐입니다. 아까 고려국의 늙은
이를 제압하던 무공도 사부님께선 다섯째 사형에게만 전수하셨는
걸요. 이번에 돌아가면 사부님께선 너무 기쁜 나머지 다섯째 사
형에게 정묘한 무예를 수없이 전수해 주실 것입니다."

그들 사형제는 원래부터 우애가 두터운지라, 나란히 걸으면서
잠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

그날 밤 네 사람은 선인도(仙人渡) 객점에 투숙하였다. 은이정
과 장취산은 한침대에서 잤다. 장취산은 옛날부터 은이정을 남달
리 좋아했는지라 지금은 청년으로 성장했는데도 여전히 어린 아
이처럼 느껴졌다.

유연주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제는 육제를 십 년 전과 마찬가지로 어린애 취급하면 안 된
다. 왜냐하면, 이번에 사부님의 생신술을 마신 후 뒤이어 육제의
혼례술을 마시게 되기 때문이다."

장취산은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소제가 이 시기에 돌아오길 정말 잘했군요. 신부는 어느 명문
의 규수입니까?"

은이정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유연주가 수줍어하는 은이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부감은 한양금편(漢陽金鞭) 기노영웅(紀老英雄)의 따님이
야."

장취산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혀를 내돌렀다.

"육제는 사위 노릇을 잘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금편이 네 머리
위에 떨어질 거야."

유연주가 빙긋이 웃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기 낭자가 그날 강변의 복면 여자 중에 없었던 것은 정말 다행
이야."

"아니, 그렇다면 기 낭자는 아미파 제자란 말입니까?"

유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 밖에서 점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이협, 몇 분의 나으리께서 유이협을 뵙고자 합니다."

"누구라고 하더냐?"

"모두 여섯 분인데, 오봉도 문하제자들이라 했습니다."

유연주 등 사형제 세 사람은 모두 바짝 긴장했다.

'장송계가 오봉도 사람들을 쫓으러 갔는데, 어째서 그들이 여기
까지 우리를 찾아왔지? 혹시 장송계에게 무슨 불행이라도.....'

장취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제가 그들을 만나보겠습니다."

그는 상세가 완쾌되지 않은 유연주의 안위가 걱정되어 싸우더라
도 밖에서 싸울 작정이었다. 그러나 유연주가 손을 저어 제지하
고 문 밖의 점원에게 분부했다.

"그들을 이리로 모셔오너라."

잠시 후 다섯 명의 장한과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젊은 부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장취산과 은이정은 유연주의 좌우에서 만약
의 사태에 대비했다. 이들 여섯 사람은 하나같이 기가 죽어 있었
으며, 병장기도 지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시비를 걸려고 찾아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의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공손히 포권의
예를 올렸다.

"세 분은 무당의 유이협, 장오협, 은육협이시지요? 불초 오봉도
의 문하제자 맹정홍(孟正鴻)이 세 분께 인사올립니다."

유연주 등 세 사람은 포권의 답례를 하면서도 마음 속으로 몹시
의아해 했다.

"맹대협, 그리고 여러분,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맹정홍은 앉지 않고 선 채로 말했다.

"저희들 문파는 하동(河東)에 협소하게 자리잡고 있으면서 무당
산의 장진인과 칠협의 위명을 귀가 따갑도록 듣기만 했을 뿐, 직
접 배알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어렵게 무당산 기슭
까지 오게 되어 마땅히 장진인을 찾아 뵙고 문안 여쭙는 것이 도
리인 줄 알지만, 장진인께선 백 세 고령으로 조용한 것을 좋아하
신다기에 우리 같은 소인들이 그 어른의 청정(淸淨)을 방해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지라, 여기서 걸음을 멈출까 합니다. 그러니 세
분께선 돌아가시면 산서 오봉도 문하제자가 그 어른의 만수무강
을 기원하더라고 전해 주십시오."

유연주는 상세가 완쾌되지 않아 의자에 앉아 있었으나, 상대방
이 사부에 대해 언급하자 얼른 은이정의 어깨를 붙잡고 일어섰
다.

"그렇게까지 가사의 건강을 염려해 주시니 뭐라고 감사의 말씀
을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맹정홍이 말을 계속했다.

"산간벽지에 사는 저희들은 우물 안 개구리인지라 견문도 좁은
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감히 귀파의 영역을 침범 했습니다. 오
늘 무당대협들의 넓으신 도량에 용서를 받았을 뿐 아니라 위험에
서 구출받는 은혜까지 입어 감사도 드리고 사과도 할 겸 이렇게
찾아왔으니, 세 분 대인께서는 소인의 잘못을 마음에 두시지 않
길 바랍니다."

하며 바닥에 꿇어 엎드려 큰절을 하려 했다.

"맹대협께선 이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맹정홍이 무슨 말인가 하려 했지만 감히 입을 열지 못하자 유연
주가 물었다.

"맹대협께선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유이협께서 저희들을 탓하지 않겠다고 한 마디만 해주시면, 저
희들도 안심하고 돌아가겠습니다."

"여러분께서 멀리 산서에서 여기까지 오신 것은 금모사왕 사손
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위해서인 것 같은데, 귀파는 금모사왕과
무슨 원한이 있으신지요?"

"가형 맹정붕(孟正鵬)이 사손의 손에 살해되었습니다."

유연주는 매우 유감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저희들은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 금모사왕의 행방을 말씀드리지
못하니, 이 점 맹대협께서 너그럽게 양해해 주십시오. 그리고 여
러분이 여기까지 오신 일에 대해선 불문에 부칠 테니, 조금도 걱
정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불초 등은 안심하고 돌아가겠습니다. 혹시 차후에 무
당파에서 저희들에게 분부를 내리실 일이 있으면, 오봉도 문하제
자들은 무슨 일이든 기꺼이 뛰어들 테니 연락만 주십시오."

하고 나머지 다섯 사람과 함께 포권의 예를 올린 후 밖으로 나
갔다.

그들 중 젊은 부인이 나가다 말고 갑자기 되돌아와 바닥에 무릎
을 꿇었다.

"미흡한 여인이 청절(淸節)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무당대
협의 도움 덕분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하례와 같은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유연주 등은 내막을 몰라 궁금해 했지만 그녀가 부녀자의 청절
에 대해 언급하는지라 질문하기가 곤란하여 얼버무렸다. 젊은 여
인은 절을 열 번 더 하고서야 밖으로 나갔다.

오봉도 문인들이 막 돌아갔을 때, 방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
어오더니 번개같이 덮쳐와 장취산을 와락 끌어안았다.

"네째 사형!"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아닌 장송계였다. 장취산도 장송
계를 얼싸안았다.

"네째사형께서 오봉도 문하를 친구로 만든 지략은 정말 대단하
십니다."

"그것은 공교롭게 기연이 닿았기 때문일 뿐이지,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네."

장송계는 그간에 있었던 일을 유연주 등에게 들려 주었다.

그 미모의 젊은 부인은 성이 오(烏)가며 오봉도 장문인의 둘째
딸리자 맹정홍의 아내였다. 이번에 여섯 사람은 사손의 행방을
탐문하기 위해 산서에서 멀리 호북(湖北)까지 오는 도중, 삼강방
의 타주(舵主)를 만나 그에게서 무당파 장취산이 사손의 행방을
알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자 오씨 부인이 흉계를 꾸며 장취
산을 생포하여 사손의 행방을 알아내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무당 제자들의 무공은 하나같이 고강하니까, 우선 깎듯이 예의를
지키며 도움을 요청했다가 상대방이 거절하면 다른 대책을 강구
하자고 했다. 그러자 오씨 부인이 버럭 화를 내며 고함을 질렀
다.

"기회란 항상 있는 것이 아니예요. 만약 장취산이 무당으로 돌
아가 그들 사형제가 합류해 버리면 장삼봉까지 곁에 있는데 어떻
게 그를 생포하여 사손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겠어요?"

두 사람은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무엇이
든 양보하던 남편 맹정홍이 끝까지 고집을 부리자 오씨 부인의
노화가 드디어 폭발했다.

"이 겁장이야, 당신 형님의 복수를 하려는 것이지 내 오빠의 한
을 풀어드리자는 건가요? 흥! 그래도 사나이 대장부라 할 수 있
으세요? 차라리 그것을 떼어 버리세요. 당신 같은 담력이라면 장
취산이 사손의 행방을 알려줘도 아마 그를 찾아갈 용기가 없을
거예요. 당신 같은 겁장이에게 시집온 내 팔자도 뻔해요!"

맹정홍은 아내에게 양보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는지라 이번에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남편이 고분고분해지자 오씨 부
인은 객점에 투숙한 장취산 부부에게 마취제를 사용하자고 했다.
다른 방법이면 몰라도 이런 비열한 방법은 절대 사용할 수 없다
고 맹정홍이 완강히 반대했다. 이에 또 격노한 오씨 부인은 심야
에 남편이 잠든 틈을 이용하여 몰래 빠져 나갔다.

그녀는 혼자서 자기의 계획대로 진행하여 사손의 행방을 알아내
어 남편의 콧대를 꺾어 놓을 심산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삼강방의 타주가 처음부터 끝까지 암중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
다. 그는 오씨 부인의 미모에 흑심이 발생하여 그녀의 뒤를 몰래
따라갔다. 그리하여 장취산 부부에게 마취약을 사용하려 했던 그
녀는 오히려 자기가 마취약에 당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바로 그 때, 줄곧 오보도 문인들의 동정을 감시하고 있던 장송
계는 재빨리 모습을 나타내어 그녀를 위험에서 구하고 삼강방 타
주를 혼내어 쫓아버렸다. 그런 다음 장송계는 자기의 이름을 밝
히지 않고 다만 무당파 무당제자라고만 말했다. 오씨 부인은 놀
람과 부끄러움을 안은 채 객점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그간의 경위
를 이야기했다. 이로 말미암아 무당파는 그들의 은인이 되었으
며, 그들은 유연주 등을 찾아와 고마움을 표시하기에 이르렀다.
장송계가 그들이 돌아간 후 나타난 것은 오씨 부인에게 수치심을
안겨주기 싫어서였다.

이야기를 다 들은 장취산은 존경어린 눈빛으로 장송계를 바라보
았다.

이날 밤 사형제 네 사람은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 꽃을
피웠다. 장송계는 비록 기지가 출중하고 견문이 넓지만, 원병으
로 변장하여 무기를 납치하고 유연주에게 중상을 입힌 고수의 내
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도 알아내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장송계와 은소소가 상견례를 하고 다섯 사람은 곧
길을 떠났다. 하룻밤을 더 객점 신세를 진 다음에야 무당산에 도
착할 수 있었다. 십 년 만에 무당산으로 돌아온 장취산은, 비록
자식과 생이별하고 아내마저 병이 들었지만 사부를 비롯하여 큰
사형, 세째 사형, 막내 사제 등과 만난다는 생각을 하니 다소 위
안이 되었다.

산문 입구에 도착해 보니, 한쪽 앞의 나뭇 가지에 여덟 필의 말
이 묶여 있었다. 안장이 화려한 것으로 보아 무당의 마필이 아님
이 분명했다. 장취산은 은소소를 부축하여 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관중(觀中)의 도인들과 일꾼들은 장취산이 무사히 돌
아오자 서로 부둥켜 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장취산은 한시
바삐 사부를 만나뵙고 싶었지만 아직도 폐관 중이라는 도동의 말
에 어쩔 수없이 사부가 폐관하는 문 밖에서 절만하고 세째 사형
유대암을 만나러 갔다.

방문 앞에 이르자, 유대암을 시중 드는 도동이 나직이 말했다.

"세째 사백께선 방금 잠이 드셨는데 깨울까요?"

장취산은 손을 가로젓고 소리없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
다. 잠이 든 유대암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으며, 양볼이 움
푹 들어가 십 년 전 용맹스럽고 건장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
다. 이런 세째 사형을 보고 있자니 장취산은 너무나 안스러워 눈
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는 유대암의 뼈만 앙상한 몰골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눈물을 닦고 밖으로 나와 어린 도동에게 물었다.

"너의 큰 사백과 막내 사숙은 어디 계시느냐?"

"대청(大廳)에서 손님을 만나고 계십니다."

장취산은 후당(後堂)으로 나가 큰 사형과 막내 사제를 기다렸
다. 그러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손님은 도무지 돌아갈 기미
가 보이지 않았다. 장취산은 참다못해 차를 나르는 도인에게 물
었다.

"어떤 손님이냐?"

"표물을 호송하는 사람들인 것 같았습니다."

장취산과 떨어지기 싫어 다시 찾아왔다가 손님의 내력을 묻는
소리를 들은 은이정이 대신 대답했다.

"세 명의 총표두인데, 금릉(金陵) 호거표국(虎踞標局)의 총표두
기천표(祁天彪), 태원(太原) 진양표국(晋陽標局)의 총표두 운학
(雲鶴), 그리고 경사(京師) 연운표국(然雲標局)의 총표두 궁구가
(宮九佳)입니다."

장취산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무슨 중대한 일이 있기에 세 사람이 함께 찾아왔지?"

장취산은 어질고 착한 큰사형의 모습이 그간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여 당장 보고 싶었다.

"육제, 병풍 뒤로 가서 큰사형과 칠사제의 모습을 보는 것은 실
례가 되지 않겠지?"

하고 병풍 뒤로 다가가 대청 안을 몰래 살펴보았다.

대청 안에서 송원교와 막성곡이 나란히 앉아 손님과 얘기를 나
누고 있었다. 송원교는 도장(道裝)을 했는데, 어질고 평화로운
얼굴 모습은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었다. 다만 귓
가에 흰 머리가 희끗희끗 보이고 중년의 나이 탓으로 살이 좀 찐
것 같았다. 송원교는 출가(出家)하진 않았으나 사부가 도사이고
또 도관에서 생활하는 까닭에, 무당산에 있을 때는 도가 차림을
즐겨하고 하산할 때만 속세의 차림으로 바꾸었다. 막성곡은 이미
기골이 장대해졌으며, 겨우 스무 살 남짓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얼굴이 온통 수염으로 뒤덮여 장취산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았
다.

이때 막성곡이 목청을 돋구었다.

"우리 큰사형이 하나라면 하나고 둘이라면 둘이오. 송원교 이름
석 자만으로도 세 분은 믿지 못하겠단 말입니까?"

장취산은 대청 안을 기웃거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칠제의 호방하면서 난폭한 성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구나. 그
런데 무슨 일로 저렇게 다투고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며 막성곡의 맞은편에 앉은 세 사람을 살펴보았
다. 나이는 모두 오십 남짓 되어 보였으나 한 명은 기도(氣度)가
위맹하고 한 명은 깡마른 몸집에 키가 커 보였고 뒤에 앉아 있는
사람은 마치 병자 같았다. 그들 뒤로 제자인 듯한 다섯 명이 부
동자세로 서 있었다. 체격이 깡마른 사람이 입을 열었다.

"송대협이 이렇게 말한 이상 우리가 어찌 믿지 않겠소. 그건 그
렇고 장오협이 언제쯤 돌아오는지 정확한 날짜를 알려 주면 고맙
겠소."

장취산은 내심 흠칫 놀랐다.

'이들은 나를 만나러 왔구나. 이들도 의형의 행방을.....'

미처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막성곡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울 사형제 일곱 사람은 비록무공이 보잘것없지만 정의를 위한
일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소. 그 결과 우리는 이미 무
당칠협이란 명호를 얻었고, 또 위로는 은사님의 엄격한 훈시가
계셨는지라 어떤 일이든 한치의 착오도 범하지 않소. 장취산은
우리 무당 칠형제 중의 한 사람이며 우리 칠형제 중에서도 성격
이 제일 온순하고 인내심이 많은 분이오. 그런 분이 용문표국의
모든 사람들을 살해했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시비를 걸기 위
한 구실에 불과하오."

장취산은 가슴이 철렁했다.

기도가 위맹한 장한이 마을 받았다.

"무당칠협의명성을 무림에서 우러러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막칠협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오래 전부터 귀가 따갑도
록 들어왔소."

막성곡은 그의 조롱섞인 말투에 얼굴빛이 확 변했다.

"기 총표두의 저의가 무엇인지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히시오."

바로 이 기도가 위맹한 장한이 바로 호기표국의 총표두 기천표
였다.

"무당칠협의 말만 하나면 하나고 소림파 고승들은 거짓말만 한
단 말이오? 소림 화상들은 임안 용문표국의 상하대소 모두가 장
오협의 손에 살해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소."

그는 장오협의 협자를 일부러 길게 뽑아 경멸하고 있음을 표시
했다. 은이정은 그가 장취산을 모독하자 치솟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 쥐며 대청 안으로 뛰쳐 들어가려 했다. 이에
장취산이 급히 그의 팔을 붙잡아 제지했다.

막성곡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고함을 질렀다.

"나의 다섯째 사형께서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지만, 설사 이미
돌아오셨다 해도 할 말은 이것뿐이오. 나는 장취산과 생사를 같
이 할 것이며 그분의 일은 곧 내 일이오. 세 분은 흑백을 분명히
구분하지도 않고 나의 다섯째 사형에게 용문표국 사람을 살해한
죄를 뒤집어씌우는데, 그렇다면 좋소! 그 모든 일은 나 막성곡이
한 것으로 할 테니, 세 분이 용문표국의 복수를 할 의향이 있으
면 내게 하시오. 나의 다섯째 사형이 여기 없는 이상 나 막성곡
이 곧 장취산이고 장취산이 곧 막성곡이오. 한 가지 분명한 사실
은, 무공이나 지략면에 있어서 나 막성곡이 다섯째 사형을 따라
가려면 십 년은 더 배워야 하오. 그러므로 당신들이 나를 찾아온
것은 당신들의 운이 좋은 셈이오."

기천표도 대노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 기천표가 오늘 무당산에 가서 소란을 피울 것이라 하니, 무
림 동도들은 모두 내가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뛴다
고 비웃었소. 하지만 도대금 도형제의 일가가 몰살당한 지 십 년
이 되도록 원한을 갚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나는 도저
히 울분을 참을 수 없었소. 무당파는 이미 용문표국 칠십여 명의
목숨을 살해했으니, 기천표 한 사람을 더 죽인다고 해서 죄의식
을 느낄 리 만무하며, 금릉 호거표국의 구십여 인명을 더 죽인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오. 나 기천표가 오늘 무당산에
서 피를 뿌리고 죽음을 당한다면, 더없이 좋은 명당자리를 선택
했다고 생각하오. 우리는 무당산으로 올라올 때 장진인의 높은
덕망을 존중하여 병장기를 휴대하지 않았으므로 막칠협의 권각
(拳脚)에 나 피천표는 죽음을 당하고 싶소."

하고는 대청 중앙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줄곧 침묵만 지키고 있던 송원교는, 두 사람이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자 손을 뻗어 막성곡을 제지하며 빙긋이 웃었다.

"세 분은 이곳에 찾아와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불초의 다섯째 사
제가 임안 용문표국의 칠십여 인명을 살해했다고 고집을 부리는
데, 그가 돌아오면 모든 사실이 백일하에 밝혀질 테니 잠시만 더
참고 기다렸다 그를 만나 시비를 가리는 게 어떻겠소?"

그러자 마치 병자처럼 생긴 연운표국 총표두 궁구가가 말을 받
았다.

"기 총표두, 흥분하지 말고 앉으시오. 장오협이 돌아오지 않은
이상 이 일은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으니, 차라리 장진인을 배
견하여 그 어른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장진인은 당금 무림의 태
산북두이고 천하의 영웅호걸이라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설마 그런 어른이 흑백을 분별하지 못하고 제자만 두둔할 리는
없겠지요."

그의 몇 마디는 비록 겸손했지만, 그 속에 내포된 뜻은 무당파
전체를 모독하는 것이었다. 그의 의도를 알아듣지 못할 막성곡이
아닌지라 짙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차갑게 대꾸했다.

가사께서는 지금 폐관정수 중이오. 그리고 최근들어 우리 무당
문중의 일은 모두 큰사형께서 처리하고 있소. 때문에 무림의 진
정한 고인이 아니면 가사께선 접견하지 않소."

이 말은 그들의 신분으로는 장진인을 접견할 자격이 없다는 뜻
이었다. 체격이 깡마르고 키가 큰 진양표국 총표두 운학이 차갑
게 코웃음을 쳤다.

"흥! 우리가 도착하자 장진인이 폐관에 들어갔다니 세상에는 정
말 공교로운 일도 많군요. 그러나 분명히 밝혀 두겠는데, 용문표
국 칠십여 인명을 폐관한다고 해서 모면할 수 있는 일이 아니
오."

막성곡은 치솟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당신의 말은 가사께선 일이 두려워 폐관하셨다는 뜻이오?"

운학은 냉랭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송원교도 비록 수양은 깊은 사람이었지만, 상대방이 은사를 모
독하자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무당칠협 면전에서 장삼봉에게
불경한 언사를 쓴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는
다소 격앙된 어조로 천천히 말했다.

"세 분은 손님이니 우리는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소. 그러니
이만 돌아가 주시오."

하고소맷자락을 가볍게 휘젓자 한 줄기 질풍이 몰아쳤다. 그러
자 기천표, 운학, 궁구가 등 세 사람의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찻
잔이 갑자기 바람에 휘말려 날아오르더니 송원교의 탁자 위에 떨
어졌다. 그러나 찻잔이 바람에 말려 올라 탁자 위에 떨어질 때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 방울의 차도 쏟아지지
않았다.

기천표 등 세 사람은 송원교가 소맷자락을 휘두를 때 발출된 강
맹무비한 바람에 의해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아 황급히 내공을
운기하여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소맷바람이 소리없이 왔다가 소
리없이 사라져 내공을 돋구느라 헛고생만 한 결과가 되고 말았
다. 만약 이때 송원교가 왼쪽 소맷자락으로 두 번째 바람을 일으
켜 그들이 운기한 내공을 역행시켰다면, 그들은 중상을 면치 못
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자 세 명의 총표두는 비로소 면전의 겸손
하고 온화한 송원교가, 실제로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후한
절예를 지녔음을 깨달았다. 병풍 뒤의 장취산도 은소소가 용문표
국의 칠십여 인명을 살해한 일을 생각하고 무척이나 난감해 하던
중, 송원교가 소맷자락으로 시전한 심후한 공력을 보고 경악과
탄복을 금치 못했다.

이때 기천표가 포권의 예를 올리며 작별을 고했다. 송원교와 막
성곡은 그들을 적수첨(適水詹:처마밑)까지 전소해 주었다. 기천
표는 송원교가 절세 무공을 지녔으면서도 교만한 언동을 조금도
취하지 않자, 마음 깊이 감동되어 처음 찾아왔을 때 지녔던 나쁜
감정이 크게 누그러졌다.

그 때 문 밖에서 몸집이 작달막하지만 단단하고 만면에 영기(英
氣)가 충만한 중년 장한이 총총걸음으로 들어왔다. 송원교가 그
사람에게 기천표 등을 가리켰다.

"네째 사제, 이리 와서 세 분 대협에 인사드려라."

기천표 등과 인사를 나눈 장송계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세 분께선 마침 잘 오셨습니다. 불초는 여러분에게 드릴 물건
이 있습니다."

하고 세 사람에게 각각 조그만 보따리를 하나씩 건네주었다. 기
천표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게 뭡니까?"

"여기서 풀어 보면 난처하니 하산하신 후에 풀어보십시오."

사형제 세 사람은 그들을 관문 밖까지 전송해 주었다. 그들이
돌아가기 무섭게 막성곡이 장송계에게 물었다.

"네째 사형, 다섯째 사형께선 도착하셨습니까?"

장송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들어가 오제를 만나보아라. 나는 큰사형과 함께 대청에서
방금 그 사람들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겠다."

"다섯째 사형이 안에 계십니까? 그들 세 사람이 무슨 일로 되돌
아옵니까?"

막성곡은 이렇게 물었지만 빨리 장취산과 만나고 싶어 장송계의
대답도 듣지 않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막성곡이 내당으로 막
들어갔을 때 예측한 대로 기천표 등 세 사람이 총총히 되돌아와
송원교와 장송계 앞에 엎드려 큰절을 했다. 두 사람이 급히 답례
하자 운학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무당파의 하해와 같은 은덕을 불초는 지금에야 알았습니다. 좀
전의 불초의 소행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며 양손바닥으로 자기의 양볼을 퉁퉁 붓도록 때렸다. 송원교
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얼른 손을 내밀어 제지했다.

장송계가 존경의 눈빛으로 운학을 바라보았다.

"운 총표두야말로 의지가 대단하신 진짜 장부입니다. 적을 쫓아
내고 우리의 강산을 되찾고 싶어하는 소원은 한민족이라면 누구
나 지니고 있지요. 불초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운
총표두께선 조금도 고마와하실 것 없습니다."

"불초의 일가족 목숨은 무당파 대협들께서 새로이 내려 주신 거
나 다름없는데, 불초는 멍청하게 그 사실을 오 년 동안이나 모르
고 있었습니다. 아까의 불손한 언동에 대해 두 분께서 불초를 호
되게 매질함으로 다소나마 죄를 씻을까 합니다."

"이미 지나간 일은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합시다. 운 총표두
가 하신 말씀을 설사 가사께서 친히 들으셨다 해도 운 총표두의
행적을 아신다면 결코 마음에 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운학은 자신의 불찰을 꾸짖으며 계속 용서를 빌었다. 송
원교는 내막을 자세히 몰라 몇 마디 겸손의 말로 상황을 얼버무
렸다. 그들이 돌아간 후 장송계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 세 사람은 비록 우리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지만, 용
문표국 사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거론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은혜는 은혜고 원한은 원한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음이 분명합니
다."

송원교가 그들이 다시 찾아와 고마와하는 연유를 물으려할 때
장취산이 내당에서 달려나와 바닥에 꿇어 엎드렸다.

"큰사형,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송원교는 만면에 기쁨의 빛을 가득 떠올리며 그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오제, 무사히 돌아와 주었구나!"

장취산이 사형제들과 헤어진 후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하자,
성격이 급한 막성곡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다섯째 사형, 아까 그 세 사람은 다섯째 사형이 임안 용문표국
의 칠십여 인명을 살해했다고 떼를 썼습니다. 왜 나오셔서 그들
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버릇을 고쳐 주지 않았습니까?"

장취산은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거기에 얽힌 우여곡절은 한 마디로 말할 수 없구나. 당시의 상
황을 상세히 보고한 후 사형과 사제에게 좋은 대책을 부탁할 생
각이다."

은이정이 옆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다섯째 사형께선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용문표국이 호송
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세째 사형께서 불구의 몸이 되었으므
로, 설사 다섯째 사형이 정말 용문표국의 칠십여 인명을 살해했
다 해도 그것은 형제지간의 우애가 너무 깊어 일시적인 의분을
참지 못해........"

유연주가 눈을 부릅뜨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육제, 그 무슨 당치 않는 소리냐? 그 말을 은사님께서 들아셨
으면 너는 한 달 동안 독방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일가의
남녀노소를 몰살하는 잔인한 짓을 무림의 정의를 위한다는 우리
가 할 수 있단 말이야?"

장취산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용문표국의 사람을 나는 한 명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은
사님의 교훈을 잠시도 잊지 않았으며 사형제의 성덕에 누를 끼치
는 것도 원치 않는데,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 있겠
습니까?"

송원교 등은 이제야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들은 물론
장취산이 그런 잔인하고 악랄한 일을 저지를 사람이라고 믿지 않
았다. 하지만 소림파 화상들이 이구동성으로 그의 소행이라 말했
을 뿐 아니라 직접 목격했다고 했고, 세 명의 총표두가 따지러
왔을 때도 그는 시종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는지라 얼마간의 의혹
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사형제들은 용문
표국의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막성곡은 한 가지 의문
이 풀리자 이번에는 기천표 등 세 사람이 되돌아온 이유를 물었
다.

"네째 사형, 그들은 무슨 일로 되돌아왔습니까?"

장송계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아까 그 세 사람 중 무례한 언동을 거침없이 해댄 운학의 인품
이 제일 좋지. 그는 진섬일대(晋陝一帶)에서 명망이 매우 높으며
암암리에 산서(山西), 섬서(陝西) 지역의 호걸들과 혈맹을 맺어
몽고 달자병에게 반항하는 거사를 일으키려 했었지."

"그 사람이 보기와 달리 그런 개개를 지녔다니 정말 존경 받아
마땅한 인물이군요. 네째 사형, 소제는 잠깐 다녀올 데가 있으니
그 때까지 이야기를 보류해 주십시오."

막성곡은 말을 끝내기 무섭게 질풍처럼 밖으로 달려나갔다.

장송계는 막성곡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장취산에게 빙
화도의 풍물에 대해 물었다. 장취산이 빙화도의 여러 가지 기이
한 현상과 사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막성곡이 돌아왔다.

"운 총표두를 뒤쫓아가 아까 나의 무례함을 사과하고 그의 장부
다운 기질을 존경한다고 말해 주고 왔습니다."

은이정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칠제, 너는 무엇이든 마음 속에 간직해 두지 못하는 성격이 탈
이야. 네째 사형께선 너를 기다리느라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다섯째 사형이 더 재미있는 빙화도의 여러가지 괴사를 들려 주셨
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렇다면 빙화도의 괴사를 제게도 들려 주셔
야지요."

막성곡은 장취산에게서 빙화도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서야 장송
계에게 재촉했다.

"운학은 모든 준비를 끝내고 약속한 날짜에 태원(太原), 대동
(大同), 분양(分陽) 등 세 지역에서 동시에 거사를 일으키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혈맹에 가입한 사람 중 배반자가 나타나,
거사 사흘 전에 가맹한 사람들의 명단과 운학이 만든 거사 계획
서를 훔쳐 몽고병에게 밀고해 버렸지."

막성곡이 여기까지 듣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 무렵 나는 태원에 있었지."

"네째 형님이 무슨 일로 그곳에.....?"

"어떤 일로 태원부 부윤(府尹)에게 화풀이할 일이 있어 그날 밤
몰래 태원부에 잠입했다가, 부윤과 그 배반자가 조정에 보고하는
방법과 원병을 파견하여 거사를 일으킨 사람들을 일망타진하는
방법 등을 상의하는 장면을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지. 당시 나는
잠시도 시간을 지체할 수 없음을 알고 안으로 뛰어들어가 부윤과
그 배반자를 샬해하고 명단과 거사 계획서를 탈취하여 남방(南
方)으로 돌아갔지. 한편, 운학 등은 거사가 탄로나자 자기들이
멸문의 화를 당하는 것은 어쩔 도리 없지만, 다른 지역의 인의지
사(仁義之士)들까지 피해를 입을 것을 가슴 아파하며 체포되기만
기다렸지. 하지만 가슴을 죄며 며칠을 기다렸으나 아무도 체포하
러 오지 않았고 결국 그 사건은 흐지부지 되었지. 그 후 운학 등
은 배반자가 태원부에서 부윤과 함께 살해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누군가가 그들을 도왔음을 알았지만, 그 사람이 나라는 것을 꿈
에도 생각지 못했지."

"아까 네째 형님이 그에게 건네준 물건이 바로 가맹한 사람의
명단과 거사 계획서였습니까?"

"그렇다네."

"네째 형님, 그럼 궁구가에게는 무엇을 도와주셨습니까?"

"궁구가는 무공은 고강하지만 인품면에선 운 총표두와 비교조차
할 수 없지. 육 년 전 그는 표물을 운남(雲南)까지 호송했다가
곤명(昆明)에서 어떤 보석상의 부탁을 받고 많은 양의 보석을 암
암리에 대도시로 운반하게 되었지. 그러나 파양호 호반에서 파양
사의 삼의에게 보석을 모두 탈취당하고 말았다. 궁지에 몰린 궁
구가는 객점에 누워 머리를 싸매고 방법을 강구했으나 뾰족한 수
가 생각나지 않자, 결국 자진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
하기에 이르렀어."

사형제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
가 한참이 지나도록 입을 열지 않자 막성곡이 또 큰 소리로 물었
다.

"파양사의는 녹림대도(綠林大盜)가 아닌데, 무슨 까닭으로 그
보석을 탈취했습니까?"

"파양사의 중의 첫째가 사고를 저질러 남창부(南昌府)의 사형수
감옥에 수감되어 곧 처형당할 입장이었지. 삼의가 그간 두 차례
나 그를 탈옥시키려고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파양삼
의는 궁리끝에 관리들이 재물에 약하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보석
을 탈취하여 관리에게 뇌물로 주어 첫째의 죄를 탕감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지. 나는 파양사의의 깊은 우애에 감동되어 내가 첫째
를 구출해 낼 테니 보석을 궁구가에게 되돌려 주라고 했던 거
지."

언제나 궁금증이 많은 막성곡이 또 물었다.

"네째 사형이 기천표에게 건네 준 물건은 무엇입니까?"

"그건 아홉 개의 단혼오공표(斷魂蜈蚣標)야."

다섯 사람은 단혼오공표라는 말에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
다. 왜냐하면, 그것은 강호상에 제법 명성을 떨친 양주대호(凉州
大豪) 오일망의 암기(暗器)이기 때문이다.

"그 일은 내가 너무 겁없이 덤볐었지. 당시 기천표는 표물을 호
송하며 동관(憧關)을 지나던 중, 본의 아니게 오일망의 제자에게
잘못을 저질러 두 사람이 싸우게 되었는데 기천표가 그 사람에게
장력으로 중상을 입혔지. 기천표는 상대방에게 중상을 입힌 다음
에야 큰일을 저질렀음을 깨달았으나 이미 늦고 말았어. 그가 호
송을 끝내고 막 낙양(洛陽)에 도착하자 오일망이 뒤쫓아와 두 사
람은 다음날 낙양 서문 밖에서 무예를 겨루기로 약속하게 되었
지."

"오일망의 무공은 무척 고강한데, 기천표가 어떻게 그를 당해
낼 수 있습니까?"

"물론 기천표 자신도 자기의 실력으로는 오일망의 일표(一標)도
막아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지. 그래서 그는 궁리끝에 암기의
명수인 낙양의 교씨 형제(喬氏兄弟)에게 도움을 청했네. 그런데
이튿날 아침 기천표가 적을 무찌를 방법을 상의하기 위해 교씨
형제를 찾아갔더니, 그들 형제는 갑자기 급히 해결해야 할 일이
발생하여 강남(江南)에 갔다지 뭔가. 기천표는 배은망덕하게도
교씨 형제가 입으로만 승낙하고 도주해 버리자 처지가 난감하게
되었지. 오일망의 수법이 악랄하다는 사실은 잘 알지만 약속을
어길 형편도 못 되어 기천표는 생각다 못해 객점에서 후사를 부
탁한다는 유서를 한 통 적어 표사에게 맡기고 혼자서 약속 장소
로 향했네."

장송계는 목이 마른지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말을 이었다.

"마침 그날 나는 거지로 변장하여 서문 밖의 고목 아래에 누워
쉬고 있었는데, 마침 오일망과 기천표가 싸움을 시작하더군. 두
사람은 몇 번을 주고 받는가 싶더니 오일망이 갑자기 단혼오공표
를 던졌지. 기천표가 피하지 못하고 당황하기에 나는 보고 있을
수만 없어 잽싸게 몸을 날려 단혼오공표를 손으로 받았지. 그러
자 놀란 오일망이 단숨에 단혼오공표를 여덟 개나 던지더군. 비
록 모두 받아내긴 했지만 그의 성명암기(成明暗器)는 역시 위력
이 대단하여 하마터면 일곱 번째 독표에 적중당할 뻔했지. 오일
망은그제야 강적을 만났음을 깨닫고 수치와 분노를 억제하지 못
한 채 양주로 돌아가 지금까지도 두문불출하고 있지."

막성곡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네째 사형, 물론 오일망도 선량한 도배가 아니지만 기천표 역
시 정도(正道)의 인물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기천표를 도우
려고 모험을 한 것은 아무 가치 없는 짓입니다."

"칠제,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너도 그런 상황에 처했으면 가만
히 구경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묵묵히 듣고 있던 장취산은 먼 앞을 내다보는 그의 긴 안목에
내심 고마움과 탄복을 금치 못했다. 장송계가 그렇듯 위험을 무
릅쓰고 기천표를 도운 목적은, 용문표국의 일문을 몰살한 원한을
해소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는 호거표국이 강남 일대의 모든 표국
을 지배하고 하북, 산동 지역의 표국 우두머리는 연운표국이며
서북 각성은 진양표국이 관할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용문
표국의 일이 문제가 되면 이들 세 표국이 앞장서서 복수를 하려
는 것도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전에 그들에게 은혜를 한
가지씩 베풀었던 것이다. 이 세 가지 일이 보기에는 우연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장송계가 이런 기회를 기다리느라 얼마나 많은 심
혈과 시간을 소모했는지 모른다.

장취산은 너무 감격하여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째 사형, 우리는 동심일체나 다름 없는 사형제이므로 고맙다
는 말은 생략하겠습니다. 그 사건은 당시 소제의 안 사람이 성격
이 과격한 탓으로 저지른 일입니다."

이어 그는 은소소가 자기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용문표국에 침입
하여 칠십여 인명을 살해한 경위를 설명했다.

"네째 사형,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으면 좋을지 수습책을 강
구해 주십시오."

장송계는 한참 동안 심사숙고하더니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 일은 일단 은사님께 아뢰어 그 어른의 분부에 따를 도리밖
에 없다. 하지만 내가 생각컨대 사람은 한 번 죽으면 살아날 수
없다. 또 제수씨도 이미 개과천선하여 지난 날의 제수씨가 아니
다.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일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느
냐? 큰사형, 그렇지 않습니까?"

송원교가 수십명의 인명과 관계되는 이 일을 쉽게 결정짓지 못
하고 머뭇거리자, 유연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신 대답했다.

"네째 사형의 말이 옳네."

은이정은 여러 사형 중에서도 제일 엄격한 둘째 사형인 유연주
가 장송계의 말에 동의하자 뛸 듯이 기뻐했다.

"그렇습니다. 소제도 네째 사형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물으면 다섯째 사형께선 그들을 죽이지 않았
다고만 말씀하십시오."

송원교가 못마땅한 눈빛으로 은이정을 쏘아보았다.

"그런 식으로 잡아떼기만 한다면, 오제의 마음이 어찌 편할 수
있으며 또 협명(俠名)을 지니고 있다는 우리들의 마음이 어떻게
편하겠느냐?"

"그렇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내 생각으로는, 사부님의 백 주년 생신 연회를 치룬 후 오제의
자식부터 먼저 찾고 황학루 영웅연에서 금모사왕 사손의 일을 처
리한 다음, 우리 사형제 여섯 사람과 다섯째 제수씨가 함께 강남
으로 내려가 삼 년 안으로 한 사람당 의로운 일을 열 가지씩 행
하는 것이다."

장송계가 손뼉을 치며 찬성했다.

"그건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용문표국의 칠십여 인명이 억울하
게 죽었지만, 우리가 각자 의로운 일을 열 가지씩 행한다면 죄값
을 치루게 되는 셈입니다."

유연주도 동의했다.

"큰사형의 적절한 의견에 은사님께서도 틀림없이 승낙하실 것입
니다. 그렇지 않고 칠십여 인명을 죽인 죄로 다섯째 제수씨의 목
숨을 뺏어보았자, 귀중한 목숨만 하나 더 잃을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장취산은 이 일로 줄곧 번민하고 있었는데, 큰사형 송원교가 이
렇게 제안하자 천근같이 무겁던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소제는 당장 가서 그녀에게 전하겠습니다."

하고 은소소의 방으로 달려가 송원교가 제시한 의견을 전해 주
었다.

은소소는 남편의 말을 듣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아픈 몸도
씻은 듯이 낫는 것 같았다. 무당육협의 명성이나 무공 실력으로
무기를 찾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일처럼 쉽기 때문이었다.

장취산은 아내의 방에서 나와 세째 사형 유대암을 만나려 갔다.


----- 제 2 권 4 장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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