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2-4

3학년2반 | 2022.03.02 07:00:49 댓글: 0 조회: 598 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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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2 권


제 6 장 눈물겨운 우의(友誼)


장삼봉은 장무기를 데리고 소실산에서 내려왔다. 이제는 장무기
를 치료해야겠다는 마지막 일념마저 산산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
다.다만 그와 농담을 나누며 서로의 근심을 덜어줄 뿐이었다.

이날, 그들은 한수(漢水)에 도착했다.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빌려 탔다. 배가 중류에 다다르자 강물이 심하게 요동했다. 자그
마한 배도 따라서 흔들렸다. 뿐만 아니라, 장삼봉의 마음 역시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착잡했다.

이를 보다못한 장무기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태사부님, 너무 그렇게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죽으면 꿈
에도 그리던 부모님을 만날 수 있으니 그것보다 더 좋은게 어디
있습니까?"

장삼봉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소리 말아라. 이 태사부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너를
살려주마."

"만약에 제가 소림파의 구양신공(九陽神功)만 배울 수 있었다
면, 당장 세째 사백님께 달려가서 가르쳐 드리고 싶었어요."

"왜?"

"사백님이 무당파와 소림파의 신공을 터득하면 불구의 몸이 완
치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네 사백이 입은 상처는 근골외상(筋骨外傷)이라 제아무리 내공
이 고강해도 완치될 수 없느니라."

장삼봉은 장무기의 갸륵한 생각에 감동되어 코끝이 시큰했다.

'자기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는 지금 오히려 남을 생각해 주다
니 과연 협의심이 대단하군,'

바로 이때, 돌연 우렁찬 외침이 전해 왔다.

"썩 배를 멈추고 그 애를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쩌렁쩌렁 울리는 것이 보통 내공이 강한 자의 외침이 아니었다.

장삼봉은 냉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누가 감히 겁도 없이 애를 내놓으라는 걸까?'

그는 외침이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리 강심에서 두 척의 배가 나르듯이 미끄러져 오고 있었다.
앞서가는 작은 배의 선미에는 덥석부리 장한이 양손으로 힘껏 노
를 젓고 있었다. 선실에는 소년소녀가 앉아 있었다. 뒤에는 비교
적 큰 배가 따르고 있었다. 그 배에는 네 명의 범승과 칠 팔 명
의 몽고 무관(蒙古武官)이 타고 있었다.

덥석부리 장한은 팔힘이 대단했다. 노를 한 번 저을 때마다 일
장 남짓 미끄러져 나갔다. 그러나 뒤따라오는 배에는 사람이 많
아 제아무리 빨리 노를 저어도 두 배의 간격은 점점 더 가까와졌
다. 잠깐 사이에 두 배는 나란히 서게 되었다. 몽고 무관들과 범
승들은 저마다 활을 들고 일제히 장한에게 화살을 쏘아 댔다.

슉! 슉! 슉.....!

장삼봉은 비로소 어찌된 영문인지 알았다. 그러나 그는 몽고병
들이 한인(漢人)을 죽이는 것을 가장 못마땅하게 여겨온터러 지
체하지 않고 도와주려고 했다. 이때, 덥석부리 장한은 왼손으로
노를 저으면서 오른손에 든 노를 휘둘러 날아드는 화살을 모두
막아냈다. 민첩하기 이를데 없는 수법이었다.

장삼봉은 즉시 사공에게 외쳤다.

"사공, 배를 저쪽으로 갖다 대시오!"

사공은 기겁을 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도.....도장님, 농.....농담을 하시는 거겠죠?"

장삼봉은 다급한 나머지 다짜고짜 노를 뺏어 들고 뱃머리를 돌
려 그쪽으로 몰았다.

순간, 악! 하는 비명과 함께 선실에 있는 남자애가 등에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덥석부리 장한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급히 앞으
로 달려가 살폈다. 그 바람에 어깨와 등 부위에 무차별하게 화살
이 적중되었다.

"윽.....!"

그가 노를 놓치자 배마저 멈추었다. 칠,팔 명의 몽고 무관과 범
승들이 일제히 작은 배로뛰어내렸다. 덥석부리 장한은 결코 굴
복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맞섰다. 그러나 상처를 입은 몸이라 금
방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장삼봉은 그들 배와 간격이 좁아지자 즉시 허공으로 몸을 솟구
쳤다.

"이놈들! 썩 물러나지 못하겠느냐!"

두 몽고 무관이 장삼봉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장삼봉은 허공에 뜬 채 도포소매를 가볍게 흔들어 화살을 멀리
날려버렸다. 이어 배에 사뿐이 내리면서 왼손을 격출하자 두 범
승의 몸이 허공을 가로질러 풍덩 강물에 빠지고 말았다. 실로 하
늘에서 하강한 비장군(飛將軍) 같았다.

우두머리 격인 무관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외쳤다.

"도장은 대체 누군데 남의 일에 참견이오?"

장삼봉은 대뜸 호통을 쳤다.

"어디서 감히 양민을 살해하고 그러느냐! 썩 꺼지거라!"

"이 자가 누군지 아시오? 바로 천하에 체포령이 떨어진 원주(袁
州) 마교(魔敎)의 반역자 잔당들이오!"

장삼봉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럼 주자왕(周子王)의 부하란 말인가?'

그는 즉시 덥석부리 장한에게 다르쳤다.

"그게 정말인가?"

덥석부리 장한은 전신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채 왼손으로 남자
애를 안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소주공(小主公)..... 소주공께서 화살에 맞아 운명하셨습니
다."

자기의 신분을 시인하는 한 마디가 되었다.

장삼봉은 더욱 놀랐다.

"그럼 이 애는 주자왕의 아들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소주공을 안전하게 모시지 못했으니 이 목숨도 소
주공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그는 남자애를 바닥에 내려놓고 무작정 무관에게 덮쳤다. 그러
나 어깨와 등에 맞은 화살의 독이 발작하기 시작했는지 몸을 솟
구치자마자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한편, 여자애는 선실에서 남자 시체를 부둥켜 안고 통곡을 터뜨
리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그 남자 시체는 사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장삼봉은 마음이 약간 내키지 않았다.

'마교의 인물인 줄 알았다면 이 일에 끼어들지 않는 건데, 그러
나 기왕에 끼어든 이상 그냥 물러설 순 없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장삼봉은 무관에게 외쳤다.

"이 애는 이미 죽었고, 저 자도 독화살에 격중되어 금방 죽게
될 테니 이제 그만 가봐라!"

"그럴 순 없소. 저 두 놈의 수급을 갖고 가야 하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않느냐?"

"도장은 대체 누구길래 이 일에 끼어든 것이오?"

"무림인이 무림의 일을 간섭하겠다는데 누가 감히 뭐라고 그러
느냐!"

"뭐라고!"

다짜고짜 두 몽고 무관이 그의 어깨를 향해 장도를 내리쳤다.
도세(刀勢)가 쾌속한 데다가 쌍방의 간격이 워낙 가까와서 도무
지 피할 틈이 없었다. 장삼봉은 슬쩍 몸을 돌렸을 뿐인데 이미
날아드는 장도를 교묘하게 피했다. 이와 동시에 쌍장을 격출했
다. 팽! 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두 무관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올라 자기네들이 타고 온 배에 나동그라졌다.

우두머리 격인 무관은 대경실색했다.

"당.....당신은..... 혹.....혹시.....!"

"몽고놈들만 죽이는 저승사자다!"

장삼봉은 도포의 소맷자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다음 순간, 무관
과 범승들은 하나같이 숨이 막혀 질식해 죽을 것만 같았다. 한참
만에야 장삼봉은 떨쳐든 소매를 멈추었다. 무관과 범승들은 안색
이 하얗게 질린 채 서로 앞을 다투어 자기네 배로 탈주했다. 물
에 빠진 범승들을 건져내어 허겁지겁 배를 몰고 도주했다.

장삼봉은 단약을 꺼내 덥석부리 장한에게 복용시켰다. 그는 작
은 배를 자기들이 타고 온 배로 몰고갔다. 그리고 덥석부리 장한
을 부축해서 배를 옮겨 태우려고 했다. 그런데 장한은 거절했다.

덥석부리 장한은 한 손에 남자애 시체를, 한 손에 여자애를 안
고 가볍게 몸을 날려 배을 옮겨탔다.

장삼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견해 했다.

'중상을 입은 몸인데도 저토록 어린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다니,
참으로 대단한 기백이군. 이런 자는 마땅히 살려놔야한다.'

그는 배로 돌아간 후, 장한의 독화살을 뽑아주고 독을 제거해
주는 약을 발라 주었다.

그 소녀는 부친의 시신이 있는 작은 배가 멀어져 감에 따라, 더
욱 구슬프게 울어 댔다.

장삼봉은 신속히 뇌리를 굴리고 있었다.

'현재론 무기도 걸어다닐 수 없는데, 만약에 노하구(老河口)에
가서 투숙하면 현상범인 이 자까지 보살펴야 하지 않은가? 노하
구보다 더 안전한 곳이 없을까?'

그는 돌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사공에게 은자 세 냥을 건네
주었다.

"사공, 수고스럽겠지만 우리들 태평점(太平店)으로 태워다 주시
오."

장삼봉이 몽고 무관들을 추풍낙엽처럼 쓸어버린 광경을 목격한
사공은 무한한 경의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은자까
지 주자, 연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사공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배를 동쪽으로 몰았다.

이때, 장한이 선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소인 상우춘(常遇春)의 절을 받으십시오."

장삼봉은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상대협, 이렇듯 대례까지 올릴 필요 없소. 어서 일어나시오."

그의 손이 상우춘의 몸에 닿는 순간 얼음장같이 차가운 감촉이
전해왔다.

"혹시 내상을 입었소?"

"소주공을 모시고 신양(信陽)서부터 이곳까지 호송해 오는 동안
오랑캐들이 파견한 추격대와 네 차례에 걸쳐 접전을 벌였습니다.
그 바람에 가슴과 등에 장력을 맞았습니다."

장삼봉은 그의 완맥을 짚어보았다. 맥박이 미약하게 뛰고 있었
다. 그의 옷을 벗기고 상처를 보더니 더욱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장력에 적중된 부위가 많이 부어올라 있었다. 상세가 결코 가법
지 않았다. 만약에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장삼
봉은 더 이상 그에게 말을 시키지 않고 선실에 눕혀 안정을 취하
도록 조치했다.

그 여자애는 열 살 정도밖에 안 됐으며 누더기 옷에 맨발 이었
지만, 용모만은 수려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 애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어 장삼봉은 그 계집애를 불쌍하게 여기며 물었다.

"애야, 네 이름이 뭐냐?"

"주지약(周芷若)이에요."

"집은 어디에 있으며, 집에 누가 있느냐? 내가 집까지 바래다
주마."

주지약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대답했다.

"저는 아버지와 단 둘이 배에서 살아왔어요."

장삼봉은 지그시 눈을 감고 내심 중얼거렸다.

'그야말로 천애고아가 되지 않았나? 쯧쯧.... 이를 어쩐다...!'

상우춘이 그의 상념을 깨뜨렸다.

"소인은 여지껏 한 번도 도장님처럼 무공이 고강하신 분을 뵙지
못했습니다. 감히 도장님의 법호를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장삼봉은 미소를 지었다.

"장삼봉이라고 하오."

상우춘은 대경실색하며 벌떡 일어났다.

"무당산 장진인이셨군요. 오늘 이렇듯 선장(仙長)님을 뵙게 되
었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장삼봉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저었다.

"노도는 단지 다른 사람보다 몇 살 더 산 것뿐인데 무슨 선장으
로까지 칭호받을 자격이 있겠소? 상처가 아물지 않았으니 어서
누우시오."

그는 상우춘의 호기에 호감이 갔으나, 마교의 수하인지라 더 이
상 말을 깊이 나누고 싶지 않아 그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상처가 심하니 되도록 말을 삼가시오."

장삼봉은 천성적으로 도량이 넓어, 정사(正邪)에 대해어느 쪽
에도 편견을 두지 않았다. 때문에 장취산에게도 항상 다음과 같
이 당부하곤 했다.

----- 정과 사는 본시 구분하기가 힘들다. 정파의 제자라도 마
음이 똑바르지 않으면 사도(邪道)가 되는 것이오. 사파일지라도
마음만 선량하면 정인군자(正人君子)가 되느니라. -----

뿐만 아니라 천응교주 은천정은 비록 성격이 괴팍하고 격한 편
이지만 광명정대한 사람이니 이런 친구들을 사귀라고 당부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장취산이 자결하자 이 모든 것이 천응교로 인해 벌어졌
으므로 그들을 증오하지 않을 수가없었다. 나중에 간신히 은천
정에 대한 복수심을 억눌렀으니 사마(邪魔)라는 두 글자만 들어
도 치를 떨었다.

주자왕은 바로 여러 마교에서도 명교(明敎)에 속한 미륵종(彌勒
宗) 대제자로서 수년 전에 강서 원주에서 거사를 일으켜 스스로
제왕이 되어 국호를 주(周)로 칭했다. 그러나 곧 원군(元軍)에
의해 섬멸당하고 주자왕도 잡혀 참수를 당했다.

미륵종과 천응교는 비록 일파가 아니었으나 같은 명교의 지파
(支波)로서 상호간에 연원(淵源)이 무척 깊었다. 주자왕이 거사
를 일으킬 때도 은천정이 절강(浙江)에서 원조를 해줬다. 장삼봉
이 상우춘을 구하게 된 동기도 일시적인 협의심에서 우러나온 것
뿐이지, 사전에 그의 신분을 알았다면 결코 돕지 않았을지도 모
른다.

이날 밤 이경(二更)이 넘어서야 태평점에 도착했다. 장삼봉은
사공으로 하여금 고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다 배를 정박하라고
지시했다. 사공은 고을에 가서 먹을 음식을 사다가 선실에다 음
식상을 차렸다. 장삼봉은 상우춘과 주지약을 먼저 먹게 하고, 자
기는 장무기에게 다가가 음식을 먹여 주었다. 상우춘이 그 원인
을 물어보는 바람에 장삼봉은 장무기의 목숨을 잠시 지연시키기
위해 혈도를 제압했다고 상세히 말해 주었다. 장무기는 마음이
찢어질 듯이 괴로워 음식마저 넘어가지 않았다. 장삼봉이 계속
먹이려 했으나 그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주지약이 보다못해 장삼봉에게서 음식을 받아들었다.

"도장님, 먼저 드세요. 제가 상공에게 먹이겠어요."

장무기는 단호히 고개를 내둘렀다.

"배불러서 더 이상 먹을 수 없어요."

"상공이 정녕 음식을 드시지 않으면 도장님께서도 식사를 못하
시잖아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주지약이 다시 음식을 입가에 갖다 대자
장무기는 지체하지 않고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주지약은 생선가
시, 닭뼈 등을 세심하게 발려 정성스레 음식을 먹였다. 장무기는
조금도 싫다는 기색없이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장삼봉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여의고 이런 중병까지 얻었으니 참으로 기
구한 운명이로고.... 세심한 여인의 시중을 받아야 하거늘.....'

상우춘은 생선이나 고기 종류는 전혀 건드리지 않고 단지 야채
만 깨끗이 비웠다. 그는 비록 중상을 입고 있었으나 밥을 네 그
릇이나 먹었다. 장삼봉은 육류나 생선을 개의치 않고 먹기 때문
에 상우춘에게도 권했다.

상우춘은 고개를 저었다.

"장진인, 소인은 보살을 모시는 몸이라 육류나 생선을 먹을 수
없습니다."

"아! 내가 깜빡 잊었군요."

장삼봉은 비로소 마교는 당조(唐祖)이래 줄곧 채식(菜食)만 먹
어왔음을 새삼 상기시켰다.

북송(北宋) 말년에 명교의 대수령인 방엽이 절동(浙東)에서 거
사를 일으켰을 때, 당시 관민들은 그를 식채사마교(食菜事魔敎)
로 칭했다. 채식을 섭취하고 마왕을 받드는 것이 마교의 양대 규
율로서 수백 년을 전해 왔다. 그런데 송조(宋祖)가 망하자 관부
(官府)에서는 마교의 교도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기 시작했고,
무림인들도 그들을 멸시하기에 이르렀다. 마교 교도들은 차츰 은
밀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고, 채식을 섭취하는 것은 부처님을
신봉하기 때문이라고 거짓말했다.

상우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장진인께선 저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인 동시에 저의 내력까지
알고 계시니 솔직이 털어놓겠습니다. 소인은 명교의 사람으로서
조정 관리들은 우리를 극악무도한 무리로 여기고, 무림정파의 협
의지사들이 우리를 멸시하는 것 모두 참을수 있지만, 살인방화를
일삼는흑도도 우리를 요괴마귀(妖怪魔鬼)로 몰아부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까? 어르신네께서는 저의 신분을
알면서도 구해 주셨으니 이 은혜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
다."

장삼봉은 마교의 내력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었다. 마교가 받드
는 대마왕은 마니(魔尼)라는 사람으로서 교도들은 그를 명존(名
尊)으로 칭했다. 마교는 당나라 헌종(憲宗) 원화년(元和年)에 중
원으로 들어왔다. 당시에는 마니교, 또는 대운광명교(大雲光明
敎)로 불리어졌고, 교도들은 명교로 칭했다.

장삼봉은 약간 망설이다가 말문을 열었다.

"상대협....."

상우춘이 급히 말을 가로챘다.

"도장님, 앞으로는 소인을 그냥 우춘이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우춘, 자네 지금 몇 살인가?"

"스물입니다."

그는 비록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나 행동거지가 무척
젊어 보여서 장삼봉이 물어본 것이다. 장삼봉은 고개를 끄덕였
다.

"자네는 비록 마교에 투신했으나 나이가 젊어 아직은 마음을 돌
이킬 수 있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들어 주겠나?"

"어찌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

"오늘부터 세심혁면(洗心革面)하고 사교를 버리게. 그러면 자네
를 내 수제자인 송원교의 제자로 들어가게 해주겠네. 어떤가?"

송원교는 칠협의 첫째로서 그 명성이 천하를 진동하고 있는 동
시에 보통 무림인들은 그를 한 번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려웠다. 이러한 영웅을 사부로 삼을 수만 있다면 실로 크나큰
복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상우춘은 낭랑한 음성으로 대답했
다.

"소인을 그토록 어여삐 봐주셔서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
르겠습니다. 그러나 소인은 이미 명교에 투신한 이상, 종신토록
배교(背敎)할 수 없습니다."

장삼봉은 재삼 권했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여자애는....."

상우춘은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하십시오. 이 애는 저로 인해 아버지를
잃었으니 소인이 책임지겠습니다."

"알았네. 그러나 절대로 귀교에 투신시켜서는 안 되네."

"어찌하여 우리를 그토록 나쁘게만 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
지만 도장의 분부대로 절대 이 애를 본교에 투신시키지 않겠습니
다."

장삼봉은 장무기를 품에 안으면서 작별을 고했다.

"그럼 우린 여기서 헤어지기로 하세."

그는 더 이상 마교 교도들과 인연을 맺기 싫었다. 따라서 인연
이 있으면 다시 만나자는 얘기를 입밖에 내지 않았다.

상우춘은 정중한 대례로서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

주지약이 장무기에게 다정스레 말했다.

"상공, 도장님 걱정하시지 않도록 매일같이 식사를 잘해야 돼
요."

장무기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호의는 고마우나..... 내가 밥 먹을 수 있는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장삼봉은 말할 수 없이 가슴이 아팠다. 그는 소매를 들어 장무
기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주지약은 장무기의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뭐라고요.....? 무엇 때문에.....?"

장삼봉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애야, 앞으로 정도만 향해 가기를 바란다."

"알았어요. 그런데 저 상공께서 왜 그런 이상한 말을 하시는 거
죠?"

장삼봉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상우춘도 의아하게 여기고 물었다.

"어르신네께선 내공이 심후하고 신통력이 광대하셔서 중독된 것
쯤은 충분히 해독시킬 수 있겠죠?"

"물론이지."

장삼봉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무기가 눈치채지 못하게 왼손을 가
볍게 흔들었다. 완쾌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상우춘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소인도 내상이 가볍지 않아 신의(神醫) 한 분을 찾아가 치료를
받을까 하는데 같이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장삼봉은 고개를 저었다.

"이 애는 한독(寒毒)이 내장까지 침투되었기 때문에 평범한 약
물로 완치시킬 수 없네. 다만..... 다만 자연스럽게 독을 제거해
야 되네."

"하지만 그 신의는 정말로 기사회생시킬 능력이 있습니다."

장삼봉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돌연 한 사람을 떠 올렸
다.

"혹시 접곡의선(蝶谷醫仙)을 마하는 게 아닌가?"

"맞습니다. 어르신네께서도 저의 호사백님을 알고 계시군요."

장삼봉은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접곡의선 호청우(胡靑牛)는 비록 고명한의술을 갖고 있지만,
마교의 사람으로서 모든 무림인들을 원수 대하듯 하지. 더우기
성격이 괴팍하여 마교 교도가 아닌 사람은 절대로 치료해 주지
않는다고 들었네. 그래서 견사불구(見死不救)라는 칭호까지 붙었
다는데....."

상우춘은 장삼봉의 고충을 이해했다.

"장진인, 저의 호사백님께선 비록 외인에게 치료를 해주지 않지
만, 소인을 살려 주신 장진인이라고 하면 반드시 도와주실 겁니
다. 만약에 정말 치료해 주지 않는다면 제가 가만 있지 않겠습니
다."

"설령 치료해 준다 해도 무기의 한독을 제거하기엔 힘이
좀....."

상우춘은 가슴이 답답한지 큰 소리로 외쳤다.

"이 공자는 어차피 죽을 건데 뭘 그리 망설이십니까?"

그는 성격이 괄괄하여 생각나는 대로 무조건 털어놓았다.

장삼봉은 할 말을 잃었다.

'옳은 말이다. 어차피 한 달 남짓밖에 살지 못하지 않은가!"

그는 비록 잃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흉악한 마교 제자에게 무기
를 맡기기가 꺼림칙했다.

상우춘은 장삼봉의 마음을 꿰뚫어보듯 했다.

"장진인께서 저의 호사백님을 만나기 싫어하는 것도 잘 알고 있
습니다. 게다가 호사백님은 성격이 괴팍하여 장진인께 무례한 언
사를 퍼부을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제가 단독으로 장소제를 데리
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은 저한테 맡겨 주십시오. 절대
로 장소제에게 해되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정히 그렇다면 자네만 믿겠네. 하지만 내 미리 말해 둘 것이
있네."

"뭡니까?"

"무기를 강제로 입교(入校) 시켜선 안 돼네."

상우춘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잘 좀 보살펴 주게."

"전심전력 하겠습니다."

"그럼 이 여자애는 내가 무당산으로 데리고 가겠네."

상우춘은 강변에 있는 한 고목으로 다가가 구덩이를 팠다. 그리
고 주공자의 시신에서 옷을 전부 벗기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매장했다. 이러한 나장(裸葬)은 명교의 규칙 중의 하
나로서 태어날 때 발가벗은 채로 왔으니 이승을 떠날 때도 알몸
이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장삼봉은 그러한 이유도 모르
고 오직 이 자들의 행동이 하나같이 요사스럽게 느껴졌다.

이튿날, 날이 밝자 장삼봉은 주지약을 데리고 떠났다. 장무기는
친조부님과 같은 장삼봉이 홀연히 떠나자 눈물이 샘솟듯 흘러나
왔다.

이를 보다못한 상우춘은 미간을 찌푸렸다.

"장소제, 자네 지금 몇 살인가?"

장무기는 울음섞인 음성으로 대답했다.

"열 두 살입니다."

"열 두 살이며 어린애도 아닌데 그렇게 울고불고 하면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사내 대장부라면 적어도 피는 흘릴망정 눈물만은
흘리지 말아야지. 계속해서 그렇게 울면 혼날 줄 알아!"

"나는 태사부님과 헤어지기 싫어서 운 거지, 결코 누가 때린다
고 해서 울지 않아요. 만약에 오늘 나를 때린다면 훗날 열 배로
갚아 주겠어요."

상우춘은 약간 어리둥절하더니 앙천대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
리고 한결 친숙한 말투로 말했다.

"옳지, 사내 대장부라면 그만한 오기가 있어야지. 그렇게 무시
무시하게 나오는데 내 어찌 감히 너를 때릴 수 있겠느냐?"

"나는 움직일 수도 없는 몸인데, 왜 때리지 못하는 거죠?"

"오늘 너를 때렸다가 훗날 네가 네 태사부님에게 무공을 전수받
아서 나를 때리면 내 힘으로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느냐?"

장무기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상우춘은 곧 배를 빌려서 한구(漢九)로 향했다. 한구에 도착한
후 다시 장강으로 가는 배를 갈아타고 동쪽으로 내려갔다. 그 접
곡의선 호청우가 은거하고 있는 호접곡은 완북(碗北) 여산호반에
있었다. 이 년 전, 장무기는 강줄기를 따라 북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부모님과 동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행하는 도중
에 상당히 즐거웠었다. 오늘은 양친을 모두 잃은 상태에서 치료
를 받기 위해 동하(東下)하고 있으니, 그의 기분은 예전과 비교
해서 실로 천양지차가 있었다. 마음이 찢어질 듯이 괴로왔다. 그
러나 상우춘이 화낼까봐 감히 울지도 못했다. 더우기 장삼봉이
봉쇄했던 혈도가 스스로 풀리면서 한독이 발작할 때마다 이를 악
물고 참았다. 그 바람에 그의 입술은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그리고 한독은 하루하루 심하게 엄습해 왔다.

장강 하류인 집경(集慶)에 도착하자 상우춘은 하선하여 마차를
빌려서 북으로 치달렸다. 수일 후, 그들은 봉양(鳳陽) 동쪽에 자
리잡은 명광(名光)에 도달했다. 접곡의선 호청우는 자기의 은거
처를 남이 아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때문에 상우춘은 여산호
반의 호접곡과 이십여 리쯤 떨어진 것에서 마차를 보내고 장무기
를 업고 걸어서 갔다.

그의 생각 같아선 이십여 리 정도는 단숨에 달릴수 있을 것 같
았다. 그런데 범승에게 당한 내상이 심해선지 일 리밖에 걷지 않
았는데 전신의 근골이 쑤시고 아파서 걸음조차 옮겨놓기가 힘들
었다.

장무기는 몹시 미안해 했다.

"상대형, 이제부터는 혼자 걷겠어요. 이러다간 상대형의 몸마저
큰일 나겠어요."

상우춘은 은근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평상시엔 단숨에 백 리를 왔다갔다 해도 끄덕없었는데, 그까짓
범승에게 맞은 장력이 나를 꼼짝 못하게 하다니 정말 어처구니
없었다."

그는 오기가 발동했다. 하여 더욱 속력을 내서 달렸다. 그러나
내상이 심한데다가 억지로 힘을 내자 수십 장도 못 가서 사지백
해의 관절이 모두 산산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장무
기를 내려놓지 않았을 뿐더러 앉아서 쉬지도 않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너무나도 느린 걸음이었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걸었는데 반도 채 가지 못했다. 산길마저
험준하여 점점 더 걷기 힘들었다. 결국은 한 숲에 도달하여 상우
춘은 장무기를 내려놓고 벌렁 드러누웠다. 한 발자국도 더 이상
옮겨 놓을 수가 없었다. 장무기는 일단 숲속에서 하룻밤을 쉬고
내일 떠나자고 권했다. 상우춘도 지칠대로 지쳤기 때문에 그의
말대로 따랐다. 그들은 한 고목에 기대어 잠을 청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심야에 장무기
는 한독이 다시 발작하면서 전신을 심하게 떨었다. 그는 상우춘
이 깨어날까 봐 감히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억지로 참았다.

바로 이때였다. 멀리서 병기가 부딪치는 금속성이 들려왔다.

"어딜 도망가려고 그러느냐?"

"동쪽을 봉쇄하고 숲속으로 몰아라!"

일련의 외침이 울리더니 어지러운 발자국소리와 함께 숲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상우춘은 깜짝 놀라 깨어나면서 오른손에 단도를 뽑아들고 왼손
으론 장무기를 안은 채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장무기는 나직이 말했다.

"우리에게 덤비는 것 같지 않은데요."

상우춘도 고개를 끄덕이며 고목 뒤에 몸을 숨기고 살펴보았다.
칠흑같은 어둠이 깔린 가운데 칠,팔 명이 한 명을 포위해서 협공
을 가하고 있었다. 협공을 당하고 있는 자는 적수공권이었으나
쌍장을 난무하는 가운데, 그 누구의 접근도 허락치 않았다. 한참
동안 격전을 벌이자, 포위망이 차츰 좁혀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초승달이 구름 사이로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주위가 약
간 환해졌다. 협공을 당하고 있는 자는 백색 승포를 입고 있는
사십여 세의 키가 크고 깡마른 화상이었다. 협공을 하고 있는 자
들 중에는 도인, 속가차림의 장한, 그리고 두 여인까지 끼어 있
었다. 모두 여덟 명이었다.

두 회의승인 중 하나는 선장을, 또 하나는 계도를 들고 있었다.
선장과 계도가 한 번씩 휘둘러질 때마다 굉장한 질풍이 일면서
숲속의 낙엽이 사면팔방으로 난비했다. 한 명의 도인은 무수한
검광을 펼치고 있었다. 왜소한 체격의 사나이는 쌍도를 쥔 채,
땅바닥을 이리저리 뒹굴면서 지당도법(地堂刀法)으로 백의화상의
하체를 공격했다.

두 여인은 각자 장검을 무기로 하여 쾌속무비하게 검법을 전개
했다. 그런데 격투를 벌이던 한 여인이 몸을 돌리는 순간 얼굴이
달빛에 비쳤다. 이를 본 장무기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 여인은 다름아닌 은이정의 정혼녀인 기효부였다. 장무기는 처
음에 여덟 명이 화상 한 명을 협공하는 것을 보고 비열하다고 여
겼다. 동시에 그 백의화상이 포위망을 뚫고 빠져 나가기를 바랬
다. 그러나 막상 기효부를 알아보자 백의화상이 악인임에 틀림없
다고 단정내렸다.

이때, 갑자기 한 장한의 외침이 울렸다.

"암기를 사용합시다!"

그 즉시 장한 한 명과 도인 한 명이 좌우로 흩어지면서 소매를
휘둘렀다. 파공음과 함께 탄환과 비도가 끊임없이 백의화상에게
날아갔다. 이쯤되자 백의화상은 버티기가 힘들었다.

검을 쥔 긴 수엽의 도인도 외쳤다.

"팽화상(彭和尙), 우리는 당신을 죽이려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목숨을 걸고 버티는 것이오? 백구수만 내놓으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 아니오?"

이 말을 들은 상우춘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하고 나직히 중얼거
렸다.

"저분이 팽화상이란 말인가?"

장무기는 부모님에게서 왕반산의 일과 천응교가 각파와 원한을
맺게 된 동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때문에 백구수가 왕반산에
서 유일하게 생환(生還)한 천응교의 현무단 단주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최근 각 방파가 천응교와 끊임없이 격전을 벌이는 이유
도 바로 백구수로 하여금 사손의 행적을 실토케 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장무기는 신속히 생각을 굴렸다.

'혹시 이 팽화상도 내 어머니와 같은 천응교의 인물이 아닐까?'

이때, 팽화상의 낭랑한 외침이 들려왔다.

"백단주는 이미 너희들 손에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고 있다.
그런 자를 어찌 내놓을 수 있겠느냐?"

긴 수염의 도인이 말했다.

"우린그를 죽이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한 사람의 행방을 알
고자 할 뿐이다."

"사손의 행방을 알고자 함이면 소림사 방장을 찾아가면 되지 않
느냐!"

"당치않은 소리 작작해라! 방장님이 사손의 행방을 어찌 알 수
있느냐! 이건 순전히 천응교의 요녀 은소소가 우리 소림사를 궁
지에 몰아넣기 위해 꾸며낸 흉계다."

장무기는 회의승인이 망모(亡母)의 이름을 들먹이자 어깨가 으
쓱해지는 한편 가슴이 아팠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지 이 년이 됐는데도 저들을 아직도 혼란에
빠지게 만들 수 있다니.....'

돌연 바깥쪽에서협공하고 있던 도인이 짤막하게 외쳤다.

"모두 엎드리시오!"

나머지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즉시 땅바닥에 납작하게 엎드
렸다. 순간, 섬광이 번뜩이며 다섯 자루의 비도가 팽화상의 가슴
을 향해 질풍처럼 날아갔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무기가 흠칫 하
는 순간, 화상의 몸이 용수철에 의해 튕겨지 듯 허공으로 솟아올
랐다. 다섯 자루의 비수가 아슬아슬하게 그의 발밑을 스치고 지
나갔다. 그러나 위기를 완전히 모면한 것은 아니었다. 비도는 피
했으나 소림승의 선장과 계도 그리고 도인의 장검이 제각기 다리
를 향해 뻗쳐왔다.

팽화상은 몸이 허공에 떠 있는 상태이므로 다시 신공을 구사해
피할 재간이 없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회전시키는 동시 왼
손을 쭉 З어냈다.

팍!

그가 노린 것은 소림승의 정수리였다. 소림승의 정수리에 정확
히 이장을 내리친 그는 오른손을 펼쳐 상대방의 손에서 계도를
빼앗아 그 계도로 선장을 막았다.

쳉!

정수리에 일장을 맞은 소림승은 그 자리에서 두개골이 파열돼
목숨을 잃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성난 듯 고함을 지르며 추격해
갔다. 선장을 사용하는 소림승은 성난 야수와 같이 선장을떨치
며 소리쳤다.

"팽화상! 내 사제를 죽였으니 오늘 네놈과 생사결단을 내겠다!"

도인도 살기띤 음성으로 외쳤다.

"네놈은 다리에 갈미침(蝎尾針)을 맞았으니 곧 독이 발작해 죽
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팽화상은 다리가 풀려 비틀거리며 제대로 몸의
중심을 잡지 못했다.

상우춘은 안타까왔다.

'그는 우리 명교의 큰 인물인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야 한
다.....'

그는 심한 부상을 입고 있으면서도 앞으로 달려나가기 위해 억
지로 진기를 끌어올렸다. 순간, 내상이 격발되어 온몸이 으스러
지는 고통이 한꺼번에 엄습해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이때 팽화상은 일 장 밖으로 다시 몸을 솟구쳤으나 쓰러지고 말
았다. 체내의 독이 발작한 게 분명했다. 상우춘은 눈을 크게 뜬
체 상황 변화를 지켜보았다. 팽화상을 협공하는 일곱 명은 선뜻
팽화상에게 가까이 접근해 가지 못했다. 팽화상은 쓰러져 있지만
역시 그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수염이 긴 도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허사제, 자네가 먼저 비도 두 자루를 날려 시험해 보게."

비도를 쓰는 도인은 즉시 오른손을 떨치자 두 자루의 비도가 파
공음을 내며 날아갔다. 한 자루는 팽화상의 오른쪽 어깨를 노렸
고, 한 자루는 왼쪽다리를 노렸다. 팽화상은 땅에 쓰러진 채 꿈
쩍도 하지 않았다. 이미 죽은 듯 싶었다. 두 자루의 비도는 정확
하게 목표물에 꽂혔다. 그래도 팽화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수염이 긴 도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둘렀다.

"이미 죽은 모양이야. 정말 아깝게 됐군. 저놈이 백구수를 어디
에다 숨겼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일곱 명은 동시에 앞으로 달려나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펑! 펑! 펑! 펑! 펑!

요란한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다섯 명이 동시에 뒤로 벌렁 나자
빠졌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팽화상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그의
어깨와 다리에 여전히 비도가 꽂혀 있었다. 그는 독이 묻은 갈미
침을 맞아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고 적을 가까이 유
인하기 위해 일부러 죽은 척한 것이다. 그리고 계획대로 그들이
가까이 접근해 오자 대풍비운장(大風飛雲掌)을 전개한 것이다.

그가 노렸던 다섯 명은 아미파의 두 여제자를 제외한 남자 다섯
이었다. 그들은 제각기 가슴에 일장을 맞았다. 팽화상은 땅에 쓰
러져 줄곧 공력을 끌어모으고 있었으며 또한 죽음을 각오한 마지
막 일격을 전개한 것이므로 그 위력이 엄청났다.

기효부와 정민군은 소스라치게 놀라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땅
에 쓰러져 있는 다섯 명을 살펴보니, 한결같이 입에서 선혈을 토
해 내며 처절한 신음을 연발했다. 그러나 팽화상 역시 진력이 탈
진되어 휘청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이것을 본 긴 수염의 도
장이 얼른 소리쳤다.

"두 분 낭자, 어서 검으로 놈을 해치시오!"

정민군은 속으로 냉소를 날렸다.

'흥! 네가 뭔데 나더러 이래라 저래라는 거냐!'

그녀는 장검을 떨쳐 팽화상의 발목을 향해 베러 갔다. 팽화상은
장탄식을 하며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그로서는 죽음을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생사일발의 순간,

창!

날카로운 금속성이 들리며 정민군의 검을 가로막는 또 한 자루
의 검이 있었다. 뜻밖에도 기효부가 정민군의 검을 가로막은 것
이다.

정민군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입이 벌어졌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야?"

"사저(師姐), 팽화상은 우리에게만은 기습을 전개하지 않았어
요. 우리도 그를 죽일 순 없잖아요!"

"뭐라고? 그가 일부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냐? 그는 단지
우리까지 손상시킬 힘이 없었던 것뿐이다!"

정민군은 팽화상에게 앙칼지게 다그쳤다.

"팽화상, 나의 사매가 자비를 베풀어 너의 목숨만은 살려 주라
고 하니 너도 이젠 백구수가 있는 곳을 순순히 털어놓아라!"

팽화상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정낭자, 나 팽영옥(彭營玉)을 우습게 생각하는 모
양이군. 무당파의 장취산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까지 의형의
거처를 입 밖에 내지 않았는데, 나 팽영옥은 비록 그와 비교해
보잘것 없는 존재지만 그를 본받을 자격은 갖추고 있다!"

여기까지 말한 그는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 내며 그 자리
에 주저앉았다. 정민군은 잽싸게 앞으로 다가가 다시는 움직일
수 없게끔 허리를 찍은 것이다.

정민군은 냉소를 날렸다.

"장취산은 눈이 멀어 사교의 요녀와 결합하여 결국 헛되게 죽음
을 당했는데 뭐가 본받을 게 있단 말이냐?그들 무당파는....."

기효부가 얼른 그녀의 말을 제지했다.

'사저.....!"

"은육협까지 들춰내지 않을 테니 안심해라!"

정민군은 수중의 장검을 살짝 떨쳐 팽화상의 오른쪽 눈을 겨냥
하며 한 자 한 자 뚜렷하게 내뱉었다.

"네가 만약 실토하지 않으면, 우선 오른쪽 눈을 찌르고 나서 다
시 왼쪽 눈을 찌르겠다. 그래도 입을 열지 않으면 귀와 코, 순서
대로 베어 버리겠다!"

그녀의 검 끝이 팽화상의 눈에서 불과 반 치밖에 떨어지지 않았
다. 그 검 끝에서 싸늘한 검광이 뿌려졌다.

팽화상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냉랭하게 맞섰다.

기효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매우 난처해 했다.

"사저, 동문의 우애를 생각해서라도 제발....."

"닥쳐라! 찌르지 않겠다는 거냐!"

"사저, 안심하세요. 사부님이 저를 의발전인으로 지목해도 저는
절대 그 뜻을 받아들이지 못해요."

"흥! 네 말을 듣고 보니 마치 내가 질투를 느끼는 걸로 오해하
는 모양인데, 내가 너만 못한 게 뭐가 있다고 질투를 하겠느냐?
여러 말 말고 찌를 건지, 아니면 내 입에서 모든 얘기가 나오길
바라는지, 어서 선택하라!"

기효부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소매가 무슨 잘못을저질렀으면 사저의 처벌을 달게 받겠어요.
제발 다른 문파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저를 궁지로 몰지
마세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정민군은 막무가내였다.

"흥! 그렇게 가련한 꼴을 꾸며낸다고 해서 내 마음이 달라질 줄
아느냐! 넌 눈물을 흘리면서도 속으론 날 욕하고 있겠지! 그러니
까 사 년 전이었을까, 삼 년 전이었을까? 아무튼 너는 잘 기억하
고 있겠지. 그해 감주에서 너는 정말 병이 생겼느냐? 흥! 생기긴
생겼지. 병이 생긴 게 아니라 어린애가 생긴 게 아니었느냐?"

여기까지 들은 기효부는 이내 몸을 돌려 뛰어나갔다.

정민군은 그녀가 달아날 것을 예측하고 있던 차라 잽싸게 신법
을 전개해 장검을 쥔 채 앞을 가로막았다.

"내 말대로 순순히 팽화상의 눈을 찔러라! 그렇지 않으면 그 어
린애의 부친이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명문정파의 제자로서 마교
의 요승을 감싸주는지 밝혀라!"

기효부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이.....이대로 떠나도록 내버려 둬요!"

정민군은 장검으로 그녀의 가슴을 겨냥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애를 어디서 키우고 있느냐? 너는 무당파 은이정의 정혼녀
이거늘 어째서 다른 사람의 애를 낳았느냐?"

정민군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크
게 의아해 했다.

기효부는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져 질풍같이 앞으로 달려나
갔다.

그 순간 정민군이 장검을 떨쳐 그녀의 오른팔에 검상을 입혔다.

기효부는 심한 부상을 입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왼손으로 검
을 뽑아쥐었다.

"사저, 계속 나를 궁지로 몰아넣는다면 나 역시 당하고만 있을
수가 없어요!"

정민군은 자기가 기효부의 극비를 들추어내면 그녀가 틀림없이
살인멸구를 할 것이라 생각했다.

막상생사투가 벌어지면, 자기는 기효부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는 것을 잘 알고 선수를 쳐서 검상을 입힌 것이다.

지금 기효부의 입에서 극단적인 말이 내뱉어지자 즉시 월락서산
(月落西山)의 초식으로 그녀의 아랫배를 찌르려 했다.

기효부는 오른팔에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사저가 악랄한
살수를 펼처오자 본능적으로 왼손으로 검을 전개해 막아야만 했
다.

그들은 동문에서 검법을 익혔으므로 서로의 초식과 장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싸움을 벌이자 일초 일식이 주조면밀
하여 더욱 아슬아슬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중상을 입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므로 누구를 도와줄 수도 없었다. 단지 눈을 멀뚱멀뚱 뜨
고 싸움을 지켜볼 뿐이었다.

기효부의 팔에서 계속 피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정민군을 뿌리
치고 속히 이곳을 떠나고 싶었으나 부상을 입은데다가, 왼손으로
검을 사용하는 것이 습관이 되지 않아 시종 수세에 몰렸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정민군이 늘 기효부의 무공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므로 감히 지나치게 접근해 오지 못했다. 단지 외곽에서
쉴새없는 공격을 펼칠 뿐이었다. 시간을 끌수록 기효부는 피를
많이 흘려 제풀에 지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계획은 과연 적중되었다. 기효부는 갈수록 자세가 흐트
러지며 검법도 느슨해졌다. 정민군은 그 틈을 타서 두 초식을 성
공시켰다. 기효부는 오른쪽 어깨에 다시 이검(二劍)을 맞자 한쪽
옷이 선혈로 물들었다.

이때 팽화상이 갑자기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정낭자! 어서 이리 와서 나의 왼쪽 눈마저 찔러라!"

그는 기효부가 고마왔다. 더군다나 정민군이 그녀를 위협하는데
무기로 삼고 있는 약점이, 여자가 생명보다 더 중요시 하는 절개
가 아닌가!

팽화상은 기효부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만 없었
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돕고 싶었다. 팽화상은 정민군의
초식이 갈수록 악랄해지자 욕을 퍼부었다.

"정민군! 이 더러운 계집아! 강호에서 너를 독수야초(毒手野草)
라 부르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과연 마음이 독사같고, 생김새
가 잡초 같구나. 세상 여자가 모두 너 같이 구역질날 정도로 추
악하게 생겼다면 모든 남자가 절간으로 들어가 중이 되었을 것이
다. 이 호박 덩어리 같은 독수야초야! 제발 내 앞에서 얼씬거리
지 말아라. 아니면 그 추악한 꼬락서니가 안 보이게끔 어서 왼쪽
눈마저 찔러라! 부탁이다!"

사실 정민군은 비록 미녀가 아니지만 이목구비가 수려한 편이었
다. 그러나 팽화상은 그녀가 추하게 생겼다고 소리칠 뿐 아니라
제멋대로 독수야초라는 별호까지 붙여 주었다.

그는 세정(世情)에 통달하여, 어떠한 여자라 할지라도 용모가
추하다고 하면 자존심이 크게 손상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
민군이 자기의 말에 발끈하여 달려온다면 기효부는 이곳에서 벗
어날 수 있을 것이다. 팽화상이 노린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정민군은 그의 격장지계에 선뜻 넘어가지 않았다. 일단
기효부를 처치하고 나서 얼마든지 그에게 능욕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며 모독적인 욕을 못 들은 척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팽화상이 아니었다. 그는 더욱 목청
을 높여 외쳤다.

"기여협이 절세미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독
수야초 정민군이 자기의 분수도 모르고 무당파의 은이정을 유혹
하려고 꼬리를 치니 가소롭구나! 은이정이 너를 거들떠보지 않으
니까 이번엔 기여협을 모함해 죽이려는구나! 하하..... 너는 광
대뼈가 너무 높고 입이 하마 같을 뿐 아니라, 안색이 고양이 똥
처럼 누르퉁퉁하다! 집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거울에 그 상판때
기를 비추어 보고 나서 꼬리를 치든, 추파를 던지든지 해라!"

정민군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성난 야수처럼 팽화상
에게 달려와 장검으로 입을 찌르려 했다.

정민군의 광대뼈가 약간 높은 것은 사실이었다. 입도 앵두같이
작은 입이 아니며 피부색도 백옥처럼 희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
서 아주 보기 흉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 자신은 가끔 그러한 것이 흠이라고 느껴지기는 했지만
주위 사람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한데,팽화상의 보는 눈이 예민하여 비단 그 약점을 쪽집개처럼
집어냈을 뿐 아니라 과장시켜 떠들어 대자 정민군이 어찌 오장육
부가 뒤틀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그녀는 아직 은이정
을 만나 본 적도 없는데 고리를 친다느니, 추파를 던졌다고 운운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녀가 막 일검을 내뻗는 순간 숲 속에서 난데없이 한 사람이
뛰쳐나와 대갈일성을 하며 팽화상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 사람의 출현은 실로 뜻밖이었다. 정민군은 미처 검을 거둘
새도 없이 그 자의 아랫배에 일검을 찔렀다.

꼭 전광석화와 같았다. 순간 그 자는 장풍을 펼쳐내 정민군의
가슴을 적중시켰다.

펑!

정민군은 심한 충격과 함께 대여섯 자 뒤로 밀려나 땅에 쓰러지
며 입에서 선혈을 뿜어냈다.

한편, 느닷없이 나타난 자는 배에 장검이 깊숙이 꽂힌 채 고목
처럼 쓰러졌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곤륜파의 수염을 길게 기른 도인이 대뜸 놀
란 외침을 토했다.

"백구수다! 백구수!"

그는 중상을 입은 후 팽화상이 자기를 감싸주기 위해 소림, 곤
륜, 아미, 해사파의 고수들에게 협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내, 있는 힘을 다해 달려와 팽화상을 위해 마지막 일검을 받은
것이다.

그의 장력이 워낙 웅후하여 숨이 끊어지면서 펼쳐낸 일장에 정
민군은 갈비뼈가 여러 개 부러졌다.

기효부는 겨우 숨을 돌려 옷자락을 찢어 상처를 동여매더니 팽
화상에 찍힌 혈도를 풀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떠나가려 했다.

팽화상이 얼른 소리쳤다.

"잠깐만! 기낭자, 이 팽화상의 큰절을 받으시오."

그는 즉시 절을 올렸으나 기효부는 왼쪽으로 몸을 돌려 피해 그
의 절을 받지 않았다.

팽화상은 곤륜 도장이 떨어뜨린 장검을 주웠다.

"이 정민군은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려 기낭자의 절개를 더럽혔
으니 살려둘 수가 없소."

이렇게 말하며 정민군의 목을 향해 찌르려 했다.

기효부가 얼른 그를 만류했다.

"그녀는 나의 동문 사저예요. 그녀는 나를 무정하게 대했지만
나는 그에게 정의를 저버리는 행동을 할 수 없어요."

팽화상은 눈살을 찌푸렸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만약 그녀를 죽이지 않으면 차후에 기낭
자에게 더욱 불리한 행동을 할 것이오."

기효부의 양볼을 타고 소리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불길한 계집이니 모든 것을운명
으로 받아들이겠어요. 팽대사, 나의 사저만은 상하게 마세요."

팽화상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기여협의 분부인데 내 어찌 거역할 수 있겠소?"

기효부는 나직이 정민군에게 말했다.

"사저, 부디 몸 보증하세요."

이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모습은 숲 속으로 사라졌다.

팽화상은 중상을 입은 체 땅에 쓰러져 있는 다섯 명에게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 팽화상은 너희들과 아무런 원한이 없다. 그래서 처음엔 너
희들을 꼭 죽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 저 말대가리처럼 생
긴 계집이 기여협을 모독하는 말을 너희들도 들었기 때문에, 그
헛소문을 강호에 퍼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입
을 영원히 다물게 해야겠으니 저승에 가서라도 날 원망하진 말아
라."

그는 말을 하면서 곤륜파의 두 도인과 소림승, 그리고 해사파의
두 고수를 차례로 죽여 버렸다.

이어 정민군의 어깨에 검을 갖다 댔다. 정민군은 혼비백산했다.
그러나 중상을 입은 몸이라 저항할 수도 없어 욕을 터뜨렸다.

"이 더러운 땡중아! 어서 날 죽여라!"

팽화상은 이빨을 드러내어 징그럽게 웃었다.

"흐흐..... 너같은 추녀도 남자의 손길이 두렵느냐? 솔직이 말
해서 너를 죽일 용기가 없다. 너 같은 추녀가 지옥으로 들어가면
지옥의 악귀들이 모두 놀라 인간 세상으로 뛰쳐나올 것이며, 염
라대왕마저 저의 상판때기에 놀라 구역질을 한다면 나중에 내가
지옥에 가더라도 지장이 있다. 하하핫....."

그는 광소를 날리더니 장검을 버리고 백구수의 시체를 안아 다
시 통곡을 하고 나서야 유유히 떠나갔다.

정민군은 한참 후에야 검집으로 몸을 지탱하여 비틀비틀 숲을
빠져나갔다.

이 경심동백(驚心動魄)할 싸움을 장무기와 상우춘은 처음서 부
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둘은 정민군이 떠나간 후에야 길게 숨을
내쉴수가 있었다.

무기는 한 가지 가장 궁금한 것이 있었다.

"상대가, 기낭자는 저의 은육숙의 정혼녀인데 그 정씨 성을 가
진 여인의 말을 들어보면..... 다른 사람과 애를 낳았다는데 그
게 정말일까요?"

"그 여자가 꾸며낸 말이니 믿지 말아라."

"맞아요. 나중에 은육숙을 만나면 그 여자를 단단히 혼내 주리
고 해야겠어요."

"아니야. 너의 은육숙에게 그 말을 하면 안 된다. 알겠느냐?"

"왜 그러죠?"

"그런 듣기 거북한 얘기는 될 수 있는 한 입 밖에 내지 않는 게
좋아."

장무기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잠시 후에 갑자기 물었다.

"상대가, 혹시 그 일이 사실일까봐 그러는 게 아니예요?"

상우춘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모르겠다."

날이 밝자 상우춘은 몸을 일으켜 장무기를 업고 걸음을 떼어놓
았다. 간밤에 휴식을 취해서인지 그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몇 리쯤 가서 이들은 관도로 들어갔다. 상우춘은 주위를 살피며
고개를 갸우뚱 했다.

"호사백이 은거하고 있는 호접곡은 매우 황폐한 곳일 텐데, 어
찌 관도로 들어섰지? 혹시 길을 잘못 택한 게 아닐까?"

그는 행인을 찾아 길을 자세히 물으려 했다.

이때 말굽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네 명의 몽고 병졸이 장도를
휘두르며 달려왔다.

"빨리 걸어라! 빨리!"

그들은 상우춘 뒤까지 달려와 마치 짐승을 우리로 몰 듯이 앞으
로 가라고 재촉하며 장도를 휘둘렀다.

상우춘은 내심 암담했다.

'오늘 다시 호랑이 굴로 떨어져 장형제의 목숨마저 잃게 되는
것이 아닐까?'

지금 그는 무공이 완전히 상실되어 평범한 몽고 병졸도 당해 낼
수 없어 그들이 모는 대로 앞으로 걸어갔다.

얼마 동안 걷자 관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그
들도 원병(元兵)에 의해 짐승 몰듯하여 끌려 온 것이다.

'보아하니 나를 잡는 게 목적이 아니고 선량한 백성들을 괴롭히
려는 모양이군.....'

그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삼거리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 말을
탄 몽고 군관이 육, 칠 십여 명의 병졸을 대동한 채 거드름을 피
우고 있었다.

백성들은 그 군관앞을 지날 때마다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한인(漢人) 하나가 군관 옆에 붙어서서 다그치듯 물었다.

"성이 뭐냐?"

백성이 대답하면 한 몽고 병졸이 냅다 엉덩이를 걷어차거나 뺨
을 후려쳤다. 그 백성은 허겁지겁 지나갔다.

이런 식으로 일일이 신문을 하다가 성이 장(張)이라고 대는 사
람이 있으면 멱살을 잡아 한쪽으로 끌어모았다.

그런데 한 사람은 새로 사온 부엌칼이 발견되는 바람에 역시 한
쪽으로 분리시켰다.

장무기는 상황이 심상치 않자 얼른 상우춘의 귀에 대고 속삭이
듯 말했다.

"어서 일부러 넘어져 풀밭에다 칼을 버리세요."

상우춘은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잡초가 무성한 곳을 택해 일부
러 넘어지는 척하며 칼을 풀고 엉금엉금 기어 일어났다. 그리고
뒤뚝거리며 군관 앞으로 걸어갔다.

그 한인 통역관이 우악스럽게 호통을 쳤다.

"이런 육시랄 놈! 대인께 어서 무릎을 꿇지 못하겠느냐?"

상우춘은 주인으로 모시던 주자왕 일가족이 몽고병에 의해 참변
을 당한 것이 떠오르자 죽는 한이 있어도 무릎을 꿇을 수 없었
다.

이때 마침 한 몽고 병졸이 그의 빳빳한 자세가 눈에 거슬렸는지
냅다 무릎 안쪽 오목한 곳을 걷어차자 그 자리에 꺾이듯이 엎어
졌다.

한인 통역관이 다시 다그쳤다.

"성이 뭐냐?"

장무기가 앞을 다투어 대답했다.

"성은 사(謝)예요. 그는 저의 큰 형님이예요."

원병이 상우춘의 엉덩이를 냅다 걷어차며 소리쳤다.

"어서 꺼져라!"

상우춘은 끓어오르는 분노로 인해 관자놀이가 웅실거렸다. 그는
일어나며 속으로 피를 토하듯 자신에게 다짐했다.

'내 생애에 오랑캐들을 막북(幕北)으로 몰아내지 못한다면 성을
갈고 말겠다!'

그의 이 맹세가 중국 대륙의 판도를 바꾸어 놓게 될 줄이
야.....

상우춘은 장무기를 데리고 성큼성큼 북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이
어느 정도 걸어나갔을 때 등뒤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한쪽으로 격리되었던 십여 명이 모두 목
이 잘라진 채 쓰려져 있었다.

알고 보니 당시 조정의 학정에 반기를 높이 쳐든 사람들이 많았
다. 몽고 대신들은 한인을 뿌리째 뽑고 싶었지만 그것은 불가능
한 일이었다. 결국, 태사(太師) 관직에 있는 파연(巴延)이 한 가
지 학살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천하에
장(張), 왕(王), 유(兪), 이(李), 조(趙) 이 다섯 성씨를 가진
한인을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모조리 죽이라는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학살령이었다.

한인 중에 장, 왕, 유, 이 네 가지 성을 가진 자가 가장 많았
다. 그리고 조씨 성은 송조(宋祖)의 황족이므로 이 다섯 성씨의
씨족을 몰살하면, 한인의 원기가 크게 손상할 것이라는 게 그 학
살령의 취지였다.

나중에, 이 다섯 성씨를 가진 자들 중에서도 원(元)에 굴복하여
죽지 않은 사람이 벼슬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몽고 대신이 황제
께 상소하여 비로소 그 학살령을 철회했다.

상우춘은 걸음을 재촉해 황폐하고 한적한 골짜기만 찾아다녔다.
좀처럼 인적이 닿지 않는 야산이지만, 곳곳에 울긋불긋 꽃이 만
발하니 화사한 봄기운으로 충만돼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아름다운 경치에 속 편하게 눈길을 줄 마
음의 여유가 없었다. 이때 나비떼가 꽃밭 사이에서 한가로이 날
으는 것을 보고 장무기가 소리쳤다.

"그곳이 정녕 호접곡이라면 저 나비떼를 따라가 보는 게 어떻겠
어요?"

상우춘은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

"좋아....."

두 사람은 곧 꽃밭 사이로 뚫고 들어갔다. 꽃밭 깊숙이 들어가
자 작은 길이 나왔다. 그리고 나비가 더욱 많아졌다. 꽃밭 사이
에 뚫려 있는 작은 길은 산모퉁이를 끼고 돌자 녹음이 우거진 골
짜기로 연결되었다.

상우춘은 주위의 지세와 나비떼의 한가롭게 노니는 상황을 종합
하여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자 가벼운 흥분마저 느꼈다.

장무기는 줄곧 그의 등에 업혀 있었다.

"이젠 내려주세요. 혼자서 천천히 걸을 께요."

상우춘이 그를 내려놓았다.

골짜기 안으로 접어들어 한참 가자 해가 중천으로 자리바꿈을
했다. 이때, 맑은 계곡물을 끼고 대여섯 칸의 초옥이 세워져 있
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초옥 뒤켠에는 형형색색의 화초가 심어
져 있었다.

상우춘은 환성을 질렀다.

"여기다! 저것이 바로 호사백님이 약재를 심는 약포(藥圃)다."

그는 성큼성큼 초옥 앞으로 걸어가 공손히 낭랑한 음성으로 말
했다.

"제자 상우춘이 호사백님을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잠시 후 어린 동자가 초옥 안에서 걸어나왔다.

"안으로 들어오시랍니다."

상우춘은 장무기의 손을 잡고 초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대청 옆에 제법 청수하게 생긴 중년인이 한 어린 동자가 약을 달
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청 안은 온통 약초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상우춘은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호사백님, 그 동안 편안하셨습니까?"

장무기는 내심 이 중년인이 접곡의선 호청우라고 생각해 따라서
큰절을 올렸다.

호청우는 상우춘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문을 열었다.

"주자왕에 관한 일은 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그 모든 것이
운명이니라. 보아하니 오랑캐들의 운기(運氣)가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니, 본교가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줄 날도 그만큼 늦어질
모양이다."

그는 묻지도 않고 상우춘의 맥을 짚어보더니 옷을 풀어 헤쳐 가
슴을 살펴보았다.

"응..... 너는 철심장(鐵心掌)에 당했구나. 원래 대수롭지 않은
것인데, 네가 힘을 너무 많이 쓰는 바람에 한독이 가슴으로 파고
들어 치료하기가 약간 까다롭게 됐다."

그는 장무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애는 누구냐?"

상우춘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사백님, 그는 장무기라 하며 바로 무당파 장오협의 아들입니
다."

호청우는 멍해지더니 이내 성난 표정으로 변했다.

"그가 무당파라고? 왜 이곳으로 데려 왔느냐?"

그러자 상우춘은 주자왕의 아들을 보호해 달아나다가 몽고병을
만나게 되어 장삼봉에게 구원을 받은 경위를 일일이 얘기해 주고
나서, 마지막으로 간곡하게 부탁했다.

"제자는 그의 태사부님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으니, 사백님께
서도 이번 한 번만은 그의 생명을 구해 주십시오."

호청우는 냉랭하게 말했다.

"넌 정말 통도 크고 인정도 많구나. 흥! 장삼봉이 구한 것은 너
지 내가 아니다. 그리고 넌 내가 파례적으로 무엇을 할 사람으로
생각했느냐?"

상우춘은 땅에 무릎을 꿇고 연방 큰절을 올렸다.

"사백님, 이 장형제의 부친은 친구를 배반할 수 없어 스스로 목
숨을 끊은 대장부 중에 대장부입니다."

호청우는 다시 냉소를 날렸다.

"대장부라고? 천하에 대장부는 헤아릴 수 없을 만치 많다. 그게
뭐가 대수롭다는 거냐? 그가 무당파가 아니라면 몰라도, 정녕 명
문정파의 인물이라 자부한다면 왜 나 같은 사파의 사람에게 도움
을 청하러 왔느냐?"

"자형제의 모친은 바로 백미응왕 은교주의 딸이니, 그도 절반은
본교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들은 호청우는 마음이 약간 동요되는 듯 고개를 끄덕
였다.

"음..... 일어나라. 그가 천응교주의 외손자라면 생각을 달리
할 수도 있지."

그는 장무기 앞으로 다가가 부드럽게 말했다.

"얘야, 나에게 한 가지 철칙이 있단다. 명문정파로 자처하는 사
람에게는 절대 병을 치료해 주지 않는다. 너의 모친이 정녕 우리
교의 사람이라면 너의 병을 치료해 주어도 철칙에 위배되는 일이
아니지. 너의 외조부 백미응왕도 원래는 명교의 사대호법 중에
한 사람이었다. 나중에 그가 스스로 천응교를 창립한 것은 교내
의 형제와 불화가 생겼기 때문이지, 명교를 배반한 게 아니다.
다시 말해 천응교도 명교의 한 지파라 할 수 있다. 너의 상세를
치료해 주기 전에 우선 나하고 한 가지 약조를 해야 한다. 다름
이 아니라 상세가 완치된 후에 곧장 너의 외조부를 찾아가 앞으
로 영원히 명교에 투신해야 하며, 무당파는 인연을 끊어야 한
다."

장무기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상우춘이 입을 열었다.

"사백님, 그것은 안 됩니다. 장삼봉 장진인께서 미리 못박은 말
이 있습니다. 장형제를 절대 억지로 명교에 가입시키지 말라고
하셨고, 저도 그의 뜻에 따르기로 약조를 했습니다."

호청우는 대뜸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장삼봉이 대관절 뭐냐? 그가 우리 명교를 업신여기는데 우리가
왜 그를 도와야 한단 말이야? 애야, 너의 생각은 어떠냐?"

장무기는 자신의 오장육부가 모두 한독에 침투돼 있어, 심지어
태사부님 같은 공력이 심후한 사람도 속수무책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기가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이 신의에게 치료를 받는 것이다. 하지만 태사부님께선 절대 명
교에 가입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지 않았던가?!

장무기는 명교가 왜 나쁘며, 태사부와 사백사숙들이 무엇 때문
에 명교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갖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태사부님을 누구보다 존경하고 있으므로 그분의 말이라면 틀림없
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를 치료해 주지 않겠다면, 설령 독이 발작해 죽는 한이 있더
라도 태사부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

생각이 여기에 미친 장무기는 당당하게 말했다.

"호 선생님, 저의 모친이 천응교의 당주였으니 제 생각에 천응
교도 좋은 문파인 것 같아요. 하지만 태사부님께서 저더러 절대
명교에 투신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저도 약조를 했으니 치료를
해 주시지 않겠다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만약 제가죽음이 두려
워 명교에 가입한다면 상세가 완치되더라도 신의를 저버린 졸부
로 낙인 찍힐 것입니다."

호청우는 가소롭단 듯이 코웃음을 쳤다.

"쥐새끼만한 녀석이 영웅호걸의 흉내를 내는 꼴이란 정말 못 봐
주겠구나! 두고보자! 조만간 나한테 무릎을 꿇고 애걸복걸하게
될 테니까!"

여기까지 말한 그는 상우춘에게 잘라 말했다.

"그가 우리 교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것이 확고한 것 같으니 어
서 밖으로 끌어내라! 이 호청우의 집에 병들어 죽은 놈이 있어서
야 말이 되겠느냐?"

상우춘은 이 사백의 옹고집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입밖에 내
뱉은 말은 절대 번복을 하지 않으니 이젠 통사정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소형제, 명교는 비록 명문정파로 인정받아 오지 못했지만, 당
조(唐祖) 때부터 세세대대 그 명맥을 이어오며 많은 영웅호걸을
배출했네. 더군다나 자네의 외조부는 천응교의 교주시며 모친이
천응교의 당주였으니 여러 생각 말고 나의 호사백님이 원하시는
대로 명교에 가입하게, 후일 장진인에게는 내가 모든 책임을 지
겠네."

장무기는 몸을 일으키며 의연하게 말했다.

"상대가께선 이미 있는 최선을 다 하셨으니, 저의 태사부님께서
도 절대 나무라지 않을 거예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당당하게 밖으로 걸어나갔다.

상우춘은 흠칫 안색이 변했다.

"어디로 가는 건가?"

"제가 만약 호접곡에서 죽게 되면 접곡의선의 명성에 누를 끼치
게 될 게 아니겠습니까?"

그는 곧장 초옥 밖으로 걸어나갔다.

호청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흥! 견사불구(見死不救) 호청우의 악명을 아직 모르고 있는 모
양인데, 호접곡 밖에서 죽은 시체가 너뿐인 줄 아느냐?'

건사불구(見死不救)!

죽음을 지켜보면서도 구제하지 않는 신의 호청우, 그는 과연 괴
팍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이었다.

상우춘은 황급히 뒤쫓아가 장무기를 잡아 다시 호청우 앞으로
데리고 왔다. 그의 얼굴에는 비장한 각오가 서려 있었다.

"호사백님, 정말 이 장형제를 구해 주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호청우는 입가에 야멸찬 미소가 띠었다.

"내가 견사불구라는 것을 너는 잘 알면서도 그런 어리석은 질문
을 하느냐?"

"저의 상세는 치료해 주시겠죠?"

"그야 물론이지."

"좋습니다. 제자는 이 장형제를 완치시키겠다고 장진인께 약조
했으니 제자 대신 이 장형제를 치료해 주십시오. 제자와 장형제
를 서로 맞바꾸는 것이니 사백님께서는 전혀 손해가 없으실 겁니
다."

호청우는 정색을 했다.

"너는 절심장을 당해 곧 나의 치료를 받는다면 완쾌될 수가 있
다. 하지만 이레가 지나면 요행히 목숨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몰라
도 무공은 상실될 것이다. 그리고 열 나흘이 경과되면 도저히 구
제할 길이 없다."

상우춘은 신의를 지키기 위해 죽음마저 불사했다.

"그것이 바로 사백님의 명성을 더욱 빛낸 견사불구이니 제자는
죽더라도 사백님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이때 장무기가 호청우에게 소리쳤다.

"저는 당신의 도움을 받지 않겠어요!"

이어 상우춘에게 고개를 돌렸다.

"상대가, 나 장무기가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남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비겁한 소인배인 줄 아십니까? 그런 방법으로 목숨을
유지하려면 차라리 죽는 게 속 편해요."

상우춘은 그의 고집을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띠를 풀어 강제로
그를 의자에 꽁꽁 묶었다.

장무기는 다급해졌다.

"어서 나를 풀어 주세요! 풀어 주지 않으면 욕을 하겠어요!"

상우춘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호청
우에게 욕을 퍼부었다.

"견사불구 호청우! 정말 소처럼 미련하군요! 아니 짐승만도 못
해요!"

호청우는 그의 욕설을 들으면서도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상우춘은 정중히 몸을 숙였다.

"호사백님! 저는 이미 작별을 고해야겠습니다. 다른 의원을 찾
아갈 생각입니다."

호청우의 음성은 눈빛만큼이나 차가왔다.

"야생마처럼 날뛰어도 넌 이레 동안에 이곳 안휘성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상우춘은 초연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견사불구의 사백님 밑에 필사막구(必死莫救)의 사질
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는 즉시 몸을 돌려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나갔다.

호청우는 코털을 뽑아 후 하고 불며 상우춘의 뒷통수에 대고 태
연자약하게 말했다.

"너는 네 자신 목숨과 이 녀석의 목숨과 바꾼다고 했지만, 내가
언제 그 제의에 승락했느냐? 둘 다 구하지 않겠다!"

이어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반 토막의 녹용을 집어 살짝 던지자
정확하게 상우춘의 무릎 안쪽 혈도에 적중되었다.

상우춘은 그 자리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호청우는 장무기
를 풀어 주고 나서 뒷덜미를 잡아 냅다 문 밖으로 던져 버렸다.
장무기는 상우춘이 쓰러져 있는 옆에 떨어졌다.

그는 악을 쓰듯 소리쳤다.

"이 지독한....."

순간, 한독이 격발되어 정신이 흐릿해졌다.

정신을 잃어가는 그의 귓전에 호청우의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
다.

"너희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생자멸(自生自滅)해라!"


----- 제 2 권 6 장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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