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2-5

3학년2반 | 2022.03.02 07:01:54 댓글: 0 조회: 432 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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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2 권


제 7 장 호접곡의 괴의(愧醫)


장무기의 맥을 짚어 본 호청우는 이내 안색이 변했다. 그는 눈
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녀석이 당한 한독은 정말 해괴하군. 혹시 현명패천장이 아
닐까? 그 장법은 실전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아직도 그 장법
을 구사하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그는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중얼거렸다.

'만약 현명패천장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이렇게 음독한 장력은
더 없을 텐데..... 이 녀석이 여지껏 버티면서 죽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야. 참, 그렇군, 틀림없이 그 장삼봉 노도
가 심후한 공력으로 그를 연명시킨 거야. 지금 음독이 오장육부
까지 침투해 응결되었으니 신선이 아니고서야 살려낼 수 없을 거
야.....'

그는 장무기를 다시 초옥 안으로 안고 가 의자에 내려놓았다.

잠시 후 장무기는 께어났다. 이때 호청우는 맞은편 의자에 앉자
넋빠진 사람처럼 깊은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우춘은 문 밖 잡초더미 위에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호청우는 평생 동안 의술에 심혈을 기울여 어떠한 난치병이라
해도 완치시킬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의선(醫仙)이란 별호를 얻
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현명패천장으로 인한 한독은 아직 겪어본 적이 없었다.
더우기 이 극한 음독을 당하고도 수년 동안 죽지 않고 독이 오장
육부에 응결된 사례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원래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장무기를 치료해 주지 않기로 결
심했다. 한데, 이건 평생에 겪기 어려운 괴질임을 알게 되자 은
근히 구미가 당겼다.

호청우는 곰곰히 생각한 끝에 드디어 한 가지 묘책이 떠올랐다.

"음..... 맞았어! 이 녀석을 우선 완치시킨 후에 다시 죽여버리
면 되겠군."

그러나 오장육부에 응결된 음독을 몸 밖으로 배출시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호청우는 의자에 앉아 꼬박 두 시간을
심사한 끝에 열 두개의 가늘고 작은 동편(銅片)을 꺼내 와 내력
(內力)을 이용해 장무기의 단전 아랫 부위 중극혈(中極血), 목줄
기 아랫 부위 천돌혈(天突血), 어깨 부위 견정혈(肩井血), 등 열
두 군데 혈도에 꽂았다.

열 두 개의 동편을 꽂자 장무기 몸의 십이경상맥(十二經常脈)과
기경팔맥(奇經八脈) 이 즉시 단절되었다.

장무기의 몸에 상맥과 기경이 단절되자 오장육부에 침투돼 있던
독이 서로 작용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호청우는 곧 그의 어깨 부위 운문(雲門), 중부(中府) 두 군데
혈도를 뜸질했다.

이어 팔뚝에서 엄지까지의 천부(天府), 협백, 척택, 공최, 열
결, 경거, 대연, 어제, 소상 등 혈도를 뜸질했다. 이 열 두 군데
혈도는 수태음폐결(手太陰肺經)에 속하며, 장폐(臟肺) 깊숙이 침
투한 음독을 다소나마 감소시킬 수가 있었다.

이번에는 이열공한(以熱攻寒)이므로 장무기가 겪는 고초는 음독
이 발작할 때보다 몇 갑절 더 심한 것이다.

호청우는 장무기의 고통 따위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얼마 후 장무기의 몸은 온통 뜸질자국으로 얼룩졌다. 그런 장무
기는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내 입에서 신음이 나올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어림도 없을 것이
다.'

그는 오히려 태연하게 웃으며 호청우와 혈도경맥의 부위에 대해
논했다.

그는 비록 의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지만 의부인 사손으로부터
점혈, 해혈, 그리고 이혈 수법까지 들어, 배의 혈도 부위에 대해
서는 손바닥 보듯이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세부적인 심층까지 파고들면 이 절세의 신의 호청우와는
비교가 될 수 없지만 그런대로 대화가 통했다.

호청우는 뜸질을 하며 지루함을 달래는 듯 쉬지 않고 그와 얘기
를 나누었다.

장무기는 그의 심오한 의리(醫理)를 십중 팔구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무당파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살려 때로는 자신의 주
장을 내세워 강변을 벌이기도 했다. 호청우는 그의 그릇된 생각
을 납득시키기 위해 장황한 이론을 늘어놓아 끝내 잘못을 시인하
게끔 만들었다.

"네 녀석은 쥐뿔도 모르면서 멋대로 지껄이는구나."

이 한 마디가 바로 그가 얻은 만족이었다.

이곳은 심산유곡이므로 잡일과약을 달이는 일을 맡아 하는 몇
몇 동자 외에 호청우와 말벗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장무기를 맞이해 모처럼 자신의 심오한 강론을 털어놓게 되
자 제법 마음이 후련했다.

그가 뜸질을 마쳤을 때 날이 이미 어둑어둑해졌다. 동자는 식사
를 마련하고 별도로 국과 밥을 쟁반에 담아 문 밖 초지에 누워있
는 상우춘에게 갖다 주었다.

이날 밤 상우춘은 문 밖에서 자야만 했다. 장무기는 그의 혈도
를 풀어달라고 호청우에게 사정을 하지도 않고 스스로 상우춘의
곁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것은 고난을 함께 하겠다는 무언의 약조였다.

호청우는 그러한 행동을 아예 못 본 척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혀를 찼다.

'이 녀석은 과연 보통 애들과 다른 데가 있군.'

다음날 아침, 호청우는 다시 장무기를 위해 기경팔맥 각 혈도에
뜸질을 해 주었다.

반 나절이 지나자 장무기는 다시 십이경상맥이 물줄기처럼 순조
롭게 흐르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호청우는 다시 심혈을 기울여
약을 조제하여 그에게 복용시켰다. 장무기는 한결 정신이 맑아졌
다.

이날 오후 호청우는 새로이 뜸질을 했다.

장무기는 말로서 그의 비위를 긁어 상우춘의 상세를 치료해 주
게끔 격장지계를 썼지만 호청우는 막무가내였다.

"흥! 헛된 수작 부리지 말아라. 난 <접곡의선>이란 외호가 마음
에 들지 않는다. 누구든 나더러 <견사불구>라고 해야지만 기분이
좋다."

장무기는 은근히 그를 골려 주고 있었다.

"인체 중에 이 대맥(大脈)이 가장 기묘해요. 호 선생께서도 아
실지 모르겠지만 이 대맥이 없는 사람도 있다든데요."

호청우는 멍해지더니 이내 눈을 부라렸다.

"당치도 않은 말이야! 인체에 어떻게 대맥이 없을 수 있겠느
냐?"

호청우는 발끈했다. 그러더니 안채로 들어가 얄팍한 책자 한 권
을 갖고 나와 장무기에게 건네주었다.

장무기가 첫장을 넘겨보니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 십이경상매과 기경팔맥은 모두 상하로 번복하여 흐르지만
대맥은 아랫배 계협(季脇) 아래서 시작하여 전신을 순환하
여..... -----

장무기는 계속 읽어 내려갔다. 그곳에는 옛부터 전해져 내려오
는 의술의 그릇된 헛점을 많이 지적해 놓았다.

장무기는 읽어 내려가며 그 깊은 뜻을 선뜻 이해하기가 어려웠
지만 범상치 않은 의서(醫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옛
사람의 그릇된 점을 골라 가르침을 부탁했다.

호청우는 심히 흐뭇해 했다. 그는 침을 놓으며 해석을 해 주었
다.

그는 내실에서 다시 열 두 권이나 되는 의서를 갖고 나왔다.

호청우는 이 어린애가 의학에 대해 백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
다. 그러나 웬지 의기투합되는 느낌이 들었다.

장무기가 펼쳐 보니 깨알처럼 작은 글이 빽빽하게 적혀 있다.
혈도의 위치, 약제의 분량, 침을 놓는 심도(深度) 등 모든 의술
상식이 총망라돼 있었다.

장무기는 읽어 내려가며 문득 뇌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계속 읽어 내려가면 상대가의 상세를 치료해 줄 수 있는 방법
도 나오겠구나!'

아니나 다를까, 제 삼 권 속하편 중에 장상료법(掌傷療法)이 수
록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치료법이 완벽하게 수록돼 있었다.

그가 백 팔십여 종류의 장력을 보아 넘기자, 드디어 찾는 것이
나타났다. 절심장(截心掌)!

장무기는 뛸 듯이 기뻐했다. 곧 자세히 읽어 보니 절심장의 장
력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적혀 있지만 그 치료법은 지극히 간단하
게 적어놓았다.

알다시피, 중국의 의도는 변화무쌍하여 정규(正規)가 있을 수
없다. 장무기는 그 세세한 오묘함을 알 까닭이 없었다.

그는 이 치료법을 여러 번 읽어 뇌리에 기억해 두었다.

이 장상치료법의 마지막 항목이 바로 현명패천장(玄冥覇天掌)인
데, 증상 설명에 이어 치료법 아래 단 한 글자가 적혀 있을 뿐이
었다.

무(無)!

장무기는 의서를 덮어 공손하게 탁자 위에 올려놓고 진지하게
물었다.

"호 선생님의 이 자오침구경은 뜻이 너무나 심오하여 저의 우둔
한 머리로서는 태반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한 가지 가르침을
받고 싶은 것이 있는데 음양오행의 변화가 무엇입니까?"

호청우는 몇 마디 해석을 해 주다가 문득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
다.

"이제보니 상우춘을 치료할 방법을 묻는 모양인데. 흐흐.....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은 절대 말해 줄 수 없다."

장무기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스스로 의서를 파고들었다.
호청우는 그가 읽는 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장무기는 이날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침식을 잊은 채 의서를
파고드는데 전념했다. 그 덕분에 비단 호청우가 손수 지은 십여
종의 의서를 독파했을 뿐 아니라 황제내경(黃帝內經) 등 의학경
전도 섭렵했다.

물론 짧은 기간내에 정독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절심장 혹은
그와 유사한 장상을 치료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읽었다.

이렇게 하여 며칠이 지났다. 손꼽아 헤어보니 그가 호접곡에 들
어온 지도 닷세가 지나 오늘이 엿새째 되는 날이었다.

호청우는 상우춘의 상세를 이레 이내에 치료하지 않으면 설령
나중에 치료된다 해도 무공이 상실될 것이라 언급한 바가 있었
다.

그 동안 상우춘은 문 밖의 초지에 누워 닷새를 지냈다.

이날 하늘에 먹장구름이 깔리더니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
작했다. 호청우는 상우춘이 진흙땅에 누워있는 것을 빤히 지켜보
면서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밤이 되자 빗방울이 더욱 굵어졌다. 게다가 천둥번개마저 가세
했다. 장무기는 이를 악물며 한 가지 결심을 내렸다.

'설령 상대가의 상세를 잘못 치료해 불행한 결과를 낳는다 해도
지금으로선 용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구나!'

그는 곧 호청우의 약상자 속에서 금침 여덟 개를 꺼내 상우춘에
게 다가갔다.

"상대가, 요 며칠 동안 소제는 나름대로 호 선생의 의서를 읽어
비록 깨달음을 얻지 못했지만, 시일이 촉박하니 위험을 무릅쓰고
서라도 상대가께 침을 놓아야겠어요. 만약 불행한 결과가 생긴다
면 소제도 상대가의 뒤를따르겠어요."

상우춘은 호탕하게 대소를 터뜨렸다.

"장형제, 그게 무슨 당치도 않은 말인가? 아무 염려 말고 어서
침을 놓게. 만약 하늘의 도움을 입어 내가 완치될 수 있으면 견
사불구 호사백님께 그보다 더 통쾌한 일침을 가할순 없을 걸세.
그리고 설령 자네가 금침을 잘못 놓아 나를 죽인다 해도 이 진흙
땅에 누워 생고생을 겪는 것보다 훨씬 나을 걸세."

장무기는 그의 말에 용기를 얻어 조심스레 혈도를 겨냥해 금침
을 꽂았다.

그는 침술을 배우지 못했으므로 자연히 솜씨가 졸렬할 수 밖에
없었다. 단지 호청우가 매일 자기에게 침을 놓는 것을 유심히 살
펴두었다가 그대로 흉내내는 것에 불과했다.

호청우의 침은 부드러운 금으로 만든 것이므로 심후한 내력이
없으면 사용할 수가 없었다. 장무기가 약간 힘만 주어도 금침이
이내 휘어졌다. 그래도 그는 거듭하여 금침으로 관원혈(關元穴)
을 찔렀다.

자고로 혈도에 침을 놓아 피가 흐르는 경우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장무기가 어설프게 흉내를 내다 보니 상우춘의 관원혈에
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관원혈은 아랫배에 위치해 있으므로 인체 급소 중의 하나였다.
그곳에서 피가 흐르자 장무기는 더욱 당황해져 어찌할 바를 몰랐
다.

갑자기 등 뒤에서 광소가 들려온 것은 바로 이때였다.

장무기가 얼른 고개를 돌려보니 호청우가 뒷짐을 진 채 가소롭
다는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장무기는 다급하게 말했다.

"호 선생님, 상대가의 관원혈에서 계속 피가 흐르는데 어떻게
하면 졸겠어요?"

호청우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나야 물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 하지만 너한테 얘기
해 줄 필요가 있겠나?"

장무기는 굳건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다시 나의 목숨과 상대가의 목숨을 맞바꿀 테니 어서 상
대가를 치료해 주세요. 나는 즉시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겠어
요!"

호청우는 천천히 고개를 내둘렀다.

"치료해 주지 않겠다고 내 스스로 다짐을 했는데 어떻게 자신을
배반할 수가 있겠느냐? 그리고 너는 자신의 목숨으로 상우춘의
목숨과 맞바꾸겠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개소리인지 모르겠구나.
네가 죽는다고 해서 나한테 이익이 될 것이 있느냐? 그러니 장무
기가 열 번 죽는다 해도 난 상우춘을 구해 주지 않을 것이다."

장무기는 그와 더 이상 얘기해 보았자 우이독경이라는 것을 알
았다. 공연한 시간낭비일 뿐이다.

그는 생각을 달리했다. 금침이 너무 연해 자기의 힘으로선 사용
할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물색해야만 했다.

잠시 후 상우춘은 시꺼먼 피를 몇 모금 토해 냈다.

장무기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상우춘이 흑혈을 토한 것이 좋
은 현상인지, 아니면 상세가 더욱 악화된 것이지 알 도리가 없었
다. 그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호청우의 표정을 살폈다.

호청우는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눈동자에는 야간이
나마 칭찬의 빛이 서려 있었다.

장무기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곧 초옥 안으로
뛰쳐들어가 의서를 뒤적거리며 심사숙고한 끝에 처방을 내렸다.

그는 비록 의서에 의거하여 나름대로 약처방을 했지만, 생지(生
地), 자호(紫胡)가 어떻게 생겼으며 우황(牛黃), 웅담(熊膽) 무
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염치 불구하고
약처방을 약을 달이는 동자에게 슬쩍 내주었다.

"이대로 약 좀 달여 주게."

동자는 그 처방을 호청우에게 보여 주며 가부를 여쭈었다.

호청우는 연방 냉소를 날렸다.

"가소롭다! 가소롭다! 그대로 약을 달여 봐라. 그 약을 복용하
고 만약 죽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죽는 자가 하나도 없을 것이
다."

장무기는 황급히 처방을 빼앗아 약재의 분량을 절반으로 줄였
다. 동자는 처방에 따라 얼마 뒤에 사발에다 진한 약을 담아 왔
다.

장무기는 상우춘의 입에 약사발을 갖다 대며 눈물을 머금고 말
했다.

"상대가, 이 약이 과연 효험이 있는지는 소제도 알 수 없어요.
단지....."

상우춘은 너무나도 태연했다.

"정말 재미있네. 소 뒷걸음에 쥐잡는 수도 있고 개똥 먹고 삼
년 학질 뗐다는 말도있지 않는가!"

그는 주저없이 약사발을 뱃속에다 부어넣었다.

이날 밤 상우춘은 오장육부가 칼로 베이는 듯한 고통에 잠을 못
이루며 밤새 피를 토했다.

장무기는 천둥번개와 더불어 그의 곁에서 꼬박 밤을 세웠다.

다음 날 아침, 억수처럼 퍼붓던 비도 거짓말처럼 그치고 상우춘
도 각혈량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피의 색깔도 검붉은
색에서 진홍으로 변해 있었다. 상우춘은 훨씬 초췌해졌으나 정신
만은 예전보다 맑아진 것 같았다.

"장형제, 자네의 약을 먹고도 죽지 않았으니 선부께서 나의 이
름을 상우춘(常遇春)이라 잘 지어준 것 같네. 그것은 늘 상(常)
자에 만날 우(遇) 그리고 춘(春)은 죽은 자도 회춘(回春)시킬 수
있는 자네 같은 신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단지 약이 악간
진한 것 같아 마치 칼로 뱃속을 휘젓는 것 같았네."

장무기는 그저 기뻐하며 짜릿한 흥분마저 느꼈다.

"네, 네! 아무래도 약의 분량이 조금 과했던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해 어찌 <조금> 과했을 뿐이겠는가? 만약 상우춘이 강
인한 체질을 타고나지 않았다면 아마 견뎌내지 못하고 이미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

호청우는 뒤늦게 초옥 밖으로 나와 상우춘이 안색이 불그스름하
니 정신이 맑은 것을 보자 오히려 깜짝 놀랐다.

'음..... 한 녀석을 똑똑하고 대담하며 한 녀석은 건장한 체질
을 타고 났으니, 이 절심장의 장상도 머지 않아 완쾌되겠군.'

이날 장무기는 보양탕을 조제하여 몸에 좋다는 인삼, 녹용, 하
수오, 무령 등을 듬뿍 달여 상우춘에게 복용시켰다.

이렇게 하여 십여 일이 경과되자 상우춘은 상세가 완쾌되었을
뿐 아니라 무공도 종전처럼 회복되었다.

물론 그 동안에도 호청우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줄
곧 초지에서 노숙을 해왔다.

이날 상우춘은 장무기를 가까이 불렀다.

"장형제, 나는 이제 상세가 완쾌되었네. 나 때문에 자네까지도
매일 노숙을 해야 하니 우리 오늘로서 헤어지기로 하세."

장무기는 그와 한 달 남짓 고락을 함께 해오며 은연중에 생사지
교로 맺어졌다. 그런데 막상 헤어지게 되자 섭섭함을 금할 길 없
었다.

하지만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하듯이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수
는 없는 법, 장무기는 눈물을 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우춘은 그를 위로해 주었다.

"장형제, 너무 서운해 하지말게. 석 달 후면 다시 자네를 보러
올 걸세. 그 때쯤 자네 몸에 한독이 완전히 제거되면 무당산으로
데려가 주겠네."

그는 초옥 안으로 들어가 호청우에게 작별을 고했다.

"제자는 상세가 완쾌되었습니다. 비록 장형제가 치료를 해주었
지만 역시 사백님의 의서 덕분이며 또한 사백님의 귀중한 약재를
많이 축낸 결과입니다."

호청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극히 담담하게 말했다.

"그야 별게 아니지. 다만 너의 상세가 완쾌된 반면 수명이 사십
년 단축되었을 뿐이다."

상우춘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너의 타고난 체혼(體魂)으로 최소한 팔십 장수를 누릴 수 있었
는데, 저 녀석이 약을 함부로 쓰는 바람에 앞으로 날씨가 궂은
날이면 삭신이 쑤실 뿐 아니라 아마 마흔 살 되는 해에 염라대왕
을 만나게 될 것이다."
(註:명사(明史) 상우춘전(常遇春傳)에 의하면 상우춘이 급환으
로 세상을 떠난 해가 불과 나이 사십이라 기록돼 있다.)

상우춘은 일소에 부치며 앙연히 말했다.

"대장부로 태어나 제세보국의 뜻을 품고 공업(功業)을 세울 수
만 있다면 서른 살도 충분하거늘 구태여 사십까지 살 필요가 있
겠습니까? 흐리멍텅하게 일생을 살 바엔설령 백 세 장수를 누린
다 해도 식량을 축낼 뿐입니다."

호청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무기는 호접곡 입구까지 전송해 주었다.

상우춘이 거듭 돌아가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눈물로써
작별을 고했다. 떠나가는 상우춘의 마음은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
다.

장무기의 한독이 과연 말끔히 제거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지, 성품이 괴팍한 호사백과 과연 아무런 변고 없이 잘 견뎌
낼지 염려스러웠다.

한편, 장무기는 멀어져 가는 상우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
로 한가지 뜻을 세웠다.

'내가 어설픈 방법으로 상대가의 상세를 치료해 주었기 때문에
수명이 사십 년이나 줄어들었으니, 열심히 의술을 배워 그 손실
을 보상해 드리리라!'

호청우는 하루도 빠짐없이 무기에게 침을 놓고 약을 먹여 몸에
퍼진 음독을 제거해 주었다. 무기는 열심히 의서들을 읽고 약전
(藥典)을 탐독했다. 미심쩍은 것이 있으면 즉시 호청우에게 물었
다. 호청우는 무기가 질문하는 것을 아주 좋아하여 상세하게 알
려 주었다. 때로는 무기가 기상천외한 질문을 해서 호청우가 생
각지도 못한 것을 깨우치게 하는 겅우도 있었다. 처음에 호청우
는 무기를 낫게 해 준 뒤 즉시 죽이려 했으나 이제는 이 소년이
죽어 버리면 좋은 말벗을 잃는 셈이 되기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
게 되었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났다. 어느 날 호청우는 무기의 무명지 부위
에 있는 관충혈과 팔 위의 청냉연(淸冷淵). 눈썹 뒤의 사죽공(絲
竹空) 등의 혈도에 침을 놓았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느꼈
다. 이 혈도는 손의 소양삼초경에 속한다. 삼초는 상초, 중초,
하초로 오장육부의 하나인데 극히 오묘한 것으로서 손의 촉감으
로는 알아내기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청우는 여러 가지 방법을 다 써 보았으나 무기의 삼초에 스며
든 음독을 제거할 수가 없었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고심했는지
십여 일 사이에 그의 머리칼이 더욱 하얗게 세고 말았다.

무기는 그가 노심초사 하는것을 보고 내심 감격하면서도 한편으
로는 은근히 불안감을 느꼈다.

"호 선생님, 그만큼 전심전력하셨으면 됐어요. 세상에 안 죽는
사람이 있나요? 삼초에 스며든 음독이 풀리지 않는 것도 저의 운
명이니 너무 고심하지 마세요. 저를 구하시려다 오히려 선생님이
병들겠어요."

호청우는 코웃음을 치더니 차갑게 말했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안달이 난 줄 아느냐? 다만 네 병을 못 고
치면 이 접곡의선의 명예에 금이 갈까 봐 이러는 거다. 너를 다
낫게 한 되 다시 죽일 거니까."

무기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별것 아닌 것처럼 가볍게 한 말이
지만 그 계획은 절대 바꾸지 않을 것이 뻔했다.

무기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제 음독은 끝내 제거할 수 없을 것 같으니 그냥 놔 두세요. 제
가 죽으면 되죠."

호청우는 뜰 너머로 먼 하늘을 쳐다보며 고즈넉하게 말했다.

"난 어린 시절부터 의술을 공부하여 사람을 구하고 세상을 이롭
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게 잘못된 생각이었어. 내가 구해준
사람이 은혜를 원수로 갚더구나. 한 소년이 귀주의 묘강에서 금
잠고독(金蠶蠱毒)에 걸렸었다. 그것은 치명적인 극독인데 중독된
사람이 죽는 건 물론이고 죽을 때까지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겪
어야 하는 거야. 나는 사흘 밤낮을 꼬박 새며 애써서 그를 구해
주었고 서로 뜻이 맞아 의형제를 맺어 내 여동생을 짝지어 주기
까지 했다. 그런데 그 자는 후에 내 여동생을 모해하여 죽였다.
그런자가 지금 명문정파에서 이름을 날리는 인물이야."

무기는 그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자 측은한 생
각이 들었다.

'그런 일을 당해서 이 사람의 심성이 바뀌어져 스스로 견사불구
라고 칭하게 되었구나.'

무기가 넌지시 물었다.

"그 나쁜 사람이 누굽니까?"

호청우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그 자는..... 화산파의 장문인인 선우통(鮮于通)이다."

"그런데 왜 복수를 하지 않았나요?"

"전후 세 번이나 그를 찾아가 복수를 하려 했으나 모두 참패하
고 말았어. 마지막 세 번째는 목숨을 잃을 뻔했지. 그 자는 무공
이 대단하고 기지가 뛰어나 사람들이 그를 신기자(神機子)라고
부른다. 나는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더구나 우리 명교는 근
년에 내분이 일어나 교내의 고수들이 서로 싸우고 죽이느라 날
도와 줄 수가 없었어. 또 그런 일을 남에게 부탁하는 것은 내 스
스로 원치 않는다. 그저 복수하지 못한게 분할 뿐이다. 아.....
어려서 부모를 잃은 우리 오누이는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는
데..... 불쌍한 내 동생은....."

호청우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무기는 그를 바라보며 생
각했다.

'이 사람도 원래부터 냉혹하고 비정한 사람이 아니었구나.'

호청우가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이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마라! 만일 딴 사람에게 누설하면 죽
을 수도 살 수도 없이 만들어 놓을 테니까!"

무기는 몇 마디 쏘아부치고 싶었으나 마음이 약해져 그만 두었
다. 호청우가 당한 일은 자기가 당한 일보다 더 처참한 것 같기
때문이었다.

"아, 불쌍한 것....."

그는 휭하니 내실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호청우는 무기에게 재주를 다해 치료를 해도 삼초에 스며든 한
독을 제거할 수 없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기껏 해봤자 목숨을 몇 년 연장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무기를 생
각하는 마음이 변한 것이다. 그는 무기가 자기의 마음을 잘 헤아
리는 것을 보고 더욱 친근감을 느꼈다. 호청우는 매일 그에게 음
양오행의 변화와 맥을 지픈 법, 침술 등을 자세히 가르쳐 주었
다. 무기도 그것들을 힘껏 배웠다.

호청우는 무기가 명석하여 황제합마경(黃帝蛤마經), 서방자명당
구경(西方子明堂灸經),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 침구갑을경(鍼
灸甲乙經), 천금방(千金方) 등 의학을 쉽게 깨우치는 것을 보고
한탄을 금치 못했다.

"너의 타고난 총명에다가, 백 년에 한 번 만나기도 힘든 나 같
은 명사를 만났으니 스무 살도 안 되어 화타나 편작에 버금가는
명의가 되겠다만..... 아깝다! 아까와!"

그의 말 속에는 열심히 배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뜻이 담
겨 있었다. 그러나 무기는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그는
고명한 의술을 배워 상우춘의 수명을 원래대로 돌려 주고 싶었
다. 또 세째 사백 유대암이 남의 부축을 받지 않고 혼자 걸을 수
있도록 해줄 생각이었다. 이 두 가지 일만 할 수 있다면 자신이
금방 죽는다 해도 한이 없을 것 같았다.


----- 제 2 권 7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2 권


제 8 장 장무기와 요염(妖艶)한 중년부인(中年婦人)


세월은 덧없이 흘러 무기가 호접곡에 온 지도 이 년이 지났다.
이제 무기도 열 네 살이 되었다. 이 이 년 동안 상우춘은 여러
차례 찾아와 무당산과 호접곡을 잇는 역할을 해 주었다. 장삼봉
은 무기의 병세가 좋아진 것을 대단히 기뻐하며 상우춘을 통해
옷가지와 일용품들을 고루 갖춰 무기에게 보내 주었다. 그들은
무기가 보고 싶었으나 명교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직접 찾아오
지 못했다. 무기는 태사부와 여섯 분의 사백을 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매일 치료를 받았다.

상우춘은 올 때마다 강호의 소식도 전해 주었다. 근년 들어 몽
고인들의 횡포가 날로 심해져서 백성들의 의식(衣食)이 어려울
정도이며, 사방에서 도둑이 창궐하여 지금 천하는 말도 못하게
어지럽다고 했다.

무림에도 명문정파와 마교의 생투가 갈수록 격렬해져서 사상자
가 엄청나게 많이 생겼으며 원한 관계는 더욱 쌓이고 있다는 것
이다. 상우춘은 호접곡에 한 번 오면 며칠 안에 떠나곤 했다. 교
내의 일이 퍽 바쁜 모양이었다.

어느 날 저녁 무기는 왕호고(王好古)가 쓴 의학서적 <차사난지
(此事難知)>를 읽다가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피로가 몰려
오는 걸 느껴 즉시 잠을 잤다. 다음 날 일어나도 여전히 전신에
열이 많고 두통이 심했다. 그는 열을 내리는 약을 지어 먹으려고
대청으로 나갔다. 그런데 대청으로 나가 보니 벌써 해가 서산에
걸려 있는 게 아닌가! 오후까지 잤던 것이다. 무기는 깜짝 놀랐
다.

"이런, 오래도 잤군. 혹시 병이 난 건 아닐까?"

자신의 맥박을 짚어 보았으나 아무 이상이 없었다.

"혹시 음독이 발작한 걸까? 이제 내 목숨이 다했나?"

호청우의 방에 가 보니 방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가볍게 기침
을 하자 안에서 호청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기야, 내 몸이 불편하니 오늘은 너 혼자 독서나 하려무나."

"예."

그러나 무기는 호청우의 병세가 걱정되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의 몸을 살펴볼까요?"

그러나 호청우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필요없다. 내가 거울을 보고 살폈으나 별탈이 없어 우황지각산
을 복용했다."

이날 저녁 시동이 식사를 가져갈 때 무기도 따라 들어갔다. 호
청우는 힘없이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는 무기를 보자 손을 내저
으며 말했다.

"빨리 나가거라. 내 병은 천연두야."

무기가 보니 그의 얼굴과 손에 과연 붉은 반점이 나 있었다. 천
연두는 발작할 때가 위험해서 몸조리를 잘못하는 경우에는 목숨
을 잃거나 곰보가 된다. 워낙 의술이 정심한 호청우이므로 후환
은 없겠지만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호청우가 다시 말했다.

"무기야, 다시는 내 방에 들어오지 말아라. 내가 쓴 그릇과 젓
가락들은 끓는 물에 반드시 삶아야 하고 너와 시동도 무엇이든
내가 쓰던 것을 써선 안 된다."

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네가 호접곡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다. 그렇게 보름
만 있으면 천연두가 옮는 걸 막을 수 있을 게야."

무기는 급히 대답했다.

"아니에요. 선생님이 아프신데 제가 이곳을 떠나면 누가 시중을
들겠습니까? 두 시동보다는 어쨌든 제 의술이 낫지 않습니까?"

"그래도 떠나는 게 좋아."

무기는 호청우의 간곡한 권유를 듣지 않았다. 호청우의 성격이
괴팍하기는 하나 이 년 동안 두 사람은 은연중에 정이 깊이 들었
다. 더구나 어려움을 당해 피한다는 것은 무기의 성격에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호청우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좋다. 그럼 내 방에만 들어오지 말아라."

사흘이 지났다. 무기는 아침 저녁으로 방 밖에서 문안을 드렸
다. 호청우의 목소리가 약간 쉰 듯했으나 식사는 평소만큼 했다.
그리고 매일 자기가 먹을 약 이름과 분량을 지시하며 약동은 이
를 달여 갖다 주었다.

나흘째 오후, 무기는 초당에 앉아 <황제내경> 가운데 사기조신
대론(四氣調神大論)을 읽고 있었다.

이때, 멀리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후에 초당 밖에서
말발굽소리가 멎으며 외침소리가 들렸다.

"무림 동도가 의선을 뵈러 왔습니다! 어른의 치료를 부탁합니
다!"

무기가 나가 보니 얼굴이 가무잡잡한 사나이가 혼자서 세 필의
말고삐를 잡고 문 밖에 서 있었다. 두 필의 말 위에는 한 사람씩
엎드려 있는데 옷에 묻은 핏자국으로 보아 중상을 입은 모양이었
다. 고삐를 쥔 사나이의 머리에 동여맨 천에도 피가 배어나와 있
었다. 오른손을 붕대로 감아 목에 건 것이 역시 상처가 심해 보
였다.

무기가 말했다.

"공교롭게도 호 선생님이 병중이셔서 여러분을 도와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른 분을 찾아가 보십시오."

그러자 사나이가 대답했다.

"우리는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어 의선에 의지할 수밖에 없소이
다."

"호 선생님은 천연두에 걸리셨는데 병세가 극히 중합니다. 결코
여러분을 속이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중상을 입어 접곡의선께서 구해 주시지 않으면 곧 죽게
될 거여. 번거롭겠지만 소형제가 사정 이야기를 전해 주시오."

"여러분의 존함은....."

"우리들의 천한 이름을 밝혀서 뭣하겠소? 우리는 단지 화산파
선우장문인의 제자들이오."

여기까지 말한 그는 비틀거리며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 냈
다.

무기는 가슴이 철렁했다. 화산파의 선우통이라면 호 선생님의
원수가 아닌가. 그러나 혼자서 어떠한 결정을 내릴 수 없어 호청
우의 방으로 가서 아뢰었다.

:선생님, 지금 세 사람이 중상을 입고 찾아와 치료를 부탁하는
데 화산파 선우통의 제자랍니다."

그 즉시 호청우의 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쫓아 버려!"

"알겠습니다."

무기는 초당으로 돌아와 세 사람에게 말했다.

"호 선생은 병이 깊어 거동을 할 수 없으시답니다. 양해해 주십
시오."

사나이가 계속 간청을 하자 안정 위에 엎드려 있던 체구가 작은
사나이가 머리를 들며 무엇인가를 재빨리 던졌다. 순간 금빛이
번쩍이며 작은 암기가 초당 한가운데 있는 탁자에 꽂혔다.

"그 금화(金花)를 견사불구한테 보여 주게. 우린 모두 금화의
주인에게 당했다네. 그 사람이 지금 이곳으로 온다하니 견사불구
가 우리를 치료해 주면 우리 셋이 여기 남아 도와 주겠네. 우리
의 무공이 대단치는 않지만 한 몫 할 걸세."

무기는 탁자로 다가가 암기를 살펴보았다. 황금으로 만든 매화
는 실물 크기와 같았다. 무기는 손으로 빼내려 했으나 워낙 깊이
박힌 탓에 꿈쩍도 하지 않아 약칼로 그 부분을 도려내 겨우 빼냈
다.

'저 사나이의 무공도 보통은 넘는 것 같은데 금화 주인에게 저
토록 당했으니, 금화 주인이 이리 온다는 걸 속히 선생님에게 알
려야겠구나.'

그는 금화를 가지고 호청우의 방문 앞에 가서 사나이가 한 말을
들려 주었다.

"그걸 내게 보여 주게."

무기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컴컴했다.
천연두 환자는 바람과 빛을 피해야 하기 때문에 창문도 모두 가
려야 했다. 호청우는 얼굴에 청포를 쓴 채 두 눈만 드러내고 있
었다.

'청포 속의 얼굴이 많이 헐은 게 아닐까? 병이 나은 뒤에 혹시
곰보나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금화를 책상 위에 놓고 빨리 나가거라."

무기는 그의 말대로 금화를 놓고 밖으로 나왔다. 그가 발을 내
리고 방문을 닫기도 전에 호청우의 말이 들렸다.

"그 사람들의 생사는 나와 상관없다. 내가 죽든 살든 그것 역시
그들과 상관없는 일이야!"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금화가 대나무 발을 뚫고 날아와 땅에 떨
어졌다. 무기는 이 년 동안 그와 살았으나 그가 무공을 수련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무학의 고수였던 것이다.

무기는 금화를 주워 가지고 나와 사나이에게 돌려 주며 고개를
저었다.

"호 선생님은 너무 병이 깊어....."

이때 갑자기 말발굽소리와 함께 마차 한 대가 계곡으로 급히 달
려오고 있었다. 마차는 전속력으로 달려 금방 초당 밖에 다다랐
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청년이 마차 안의 대머리 노인을 부축해
내렸다.

"접곡의선 호 선생님은 계십니까? 공동파의 제자 성수가람(聖手
伽藍)이 불원천리 찾아와 치료를 부탁....."

말을 제대로 맺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더니 청년은 부축하고 있던
노인과 함께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마차를 끌던 두 필의 말도
기진맥진하여 흰 거품을 뿜고 무릎을 꺽으며 넘어졌다.

공동 문하라는 말을 듣자, 무기는 무당산에서 아버지를 괴롭힌
사람 가운데 공동파의 장로가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이 대머리
노인은 그날 무당산에 오지는 않았으나 역시 좋은 사람은 아닌
듯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산길 저편에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다리를 절고 있는 사람, 지팡이
를 짚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부축하며 걷는 것으로 보아 모두
상처를 입은 게 분명했다.

무기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들이 가까이 오기도 전에 소리쳤다.

"호 선생님은 천연두에 걸리셔서 거동처자 하기 힘든 상태니 여
러분들을 치료하실 수 없어요! 그러니 지체말고 다른 의원님을
찾아가세요!"

가까이 다가온 그들을 보니 모두 다섯 사람이었다. 몸에 상처를
입은 듯했다. 그들 중 키가 크고 뚱뚱한 사람은 성수가람과 그들
일행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세 사람 모두 씁쓸한 미소
를 짓는 걸로 봐서 서로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무기는 호기심이 생겨 물어 보았다.

"당신들도 금화 주인에게 당한 건가요?"

뚱뚱한 사람이 대답했다.

"그렇다네."

제일 먼저 도착해 선혈을 토했던 사나이가 무기에게 물었다.

"자네의 이름은 어떻게 되나? 호 선생과는 어떤 사이지?"

"저는 호 선생님의 환잡니다. 호 선생님은 한 번 치료하지 않는
다고 말씀하시면 절대 하지 않으세요. 그러니 여기 있어 봤자 소
용이 없어요."

그 사이에 또 네 사람이 몰려 왔다. 마차를 타고 오기도 하고
말을 타고 오기도 했는데 모두가 호청우에게 치료받기를 원했다.

무기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호접곡은 외딴 곳에 있어 명교 신도들이 아니면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이 사람들은 명교 신도들도 아닌데 모두 상처를 입
고 약속이나 한 듯 정확히 이곳으로 찾아오다니..... 금화 주인
이 그토록 대단하다면 이들을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았을 텐데 왜
중상만 입혔을까?'

이들 열 네 사람 중에 간곡하게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돌아갈 생각을 하는 사람
은 하나도 없었다.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자 초당안은 그 사람들
로 북적거렸다. 시동이 저녁밥을 가져 왔다. 무기는 그들에게 같
이 먹자는 소리도 하지 않고 혼자 식사를 했다. 식사를 끝낸 그
는 등잔불을 켜고 의학서적을 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있든 말
든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호 선생님에게 의술을 배웠으니 견사불구하는 수법도 배
워야지.'

밤이 깊어 사람들이 조용해지자 무기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중상자의 가느다란 신음소리만이 정적을 동반하고 있었다. 이때
멀리서 다가오는 두 사람의 발자국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들려왔
다. 발자국소리는 이들이 있는 초당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이윽고 맑은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저기 등불이 있어요. 다 왔나 봐요."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그 어머니인 듯한 목소리
가 대답했다.

"얘야, 힘들지 않니?"

"난 힘들지 않아요. 의원님이 치료해 주시면 어머닌 병이 낫겠
죠?"

"응, 그런데 의원님이 치료를 해 주실 지 모르겠구나."

무기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 목소리는 귀에 익은 것인데..... 혹시 기효부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아닐까?'

무기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가며 소리쳤다.

"기 아주머니십니까? 부상을 입었나요?"

달빛 아래에서 한 여인이 여자 아이를 안고 있었는데 바로 아미
파의 여협 기효부였다. 그녀가 무당산에서 무기를 보았을 때 무
기는 겨우 열 살이었다. 그러나 오 년이란 세월이 흘러 무기는
이제 어엿한 소년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어두운 밤이라 그녀는
무기를 알아보지 못했다.

"누구신지.....?"

"절 몰라보시겠어요? 장무깁니다. 무당산에서 어머니와 아버지
가 돌아가셨을 때 만났었죠."

"아!"

기효부는 이런 곳에서 무기를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
었다. 순간 그녀는 자신이 딸을 데리고 있는 것이 생각났다. 장
무기는 자기의 정혼자였던 은이정의 사질이 아닌가! 비록 나이
어린 무기 앞이었지만 그녀의 입장이 난처했다. 기효부는 부끄럽
고 창피하여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중상을 입은데다가 갑자기
충격을 받아 이내 쓰러지고 말았다. 어머니가 쓰러지자 어린아이
는 그녀를 부축하다 함께 쓰러졌다.

무기가 얼른 기효부를 부축하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 좀 쉬세요."

그는 그녀를 초당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등불 아래에서 살펴보
니 왼팔과 어깨에 큰 상처를 입고 있었다. 싸맨 붕대 밖으로 선
혈이 계속 배어나오고 있었다. 시만 기침까지 했다.

이 무렵 무기의 의술은 이미 명의의 수중에 올라 있었다. 그는
기효부가 기침하는 것을 보고 폐 부위에 중상을 입었음을 알수
있었다.

"태음폐맥을 다치셨군요."

그는 즉시 금침을 꺼내 어깨의 운문(雲門)과 가슴의 화개(華
蓋), 팔꿈치의 척택(尺澤)등 일곱 군데의 혈도를 찔렀다. 이제
그의 침술은 상우춘을 치료할 때와는 달라져 있었다. 이 년 동안
호청우에게 열심히 침술을 배워 호청우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
다. 다만 투약하는 것과 경험면에서만 서툴렀다. 기효부는 그가
금침을 꺼내 눈깜짝할 새에 일곱 개의 금침으로 자신의 혈도를
찔러 오자 깜짝 놀라면서도 한편으로 기뻤다. 모두 태음폐맥에
속하는 일곱 군데의 혈도에 침을 놓자 통증이 크게 가라앉았다.

"무기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어. 이렇게 좋은 기술도 배웠군."

그날 무당산에서 장취산과 은소소가 자결하는 것을 분 그녀는,
무기가 졸지에 고아가 된 것이 불쌍해서 따뜻하게 위로하며 자기
의 목걸이까지 주려 했었다. 그러나 무기는 비통에 잠긴데다 어
머니의 유언 때문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부모의 원수
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기효부에게 냉정하게 대하여 그녀를 난처
하게 만든 채 헤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기호부가 자신에게 보여
준 포근한 애정은 잊지 않고 있었다. 이 년 전에 상우춘과 함께
숲속에서 그녀가 팽화상을 구해 주는 것을 보고 기효부의 착한
마음씨에 더욱 감격하게 되었다. 다만 아직 미혼인 그녀가 아기
를 낳은 일이 마음에 걸렸으나 남녀간의 미묘한 일을 잘 모르는
지라 곧 잊어버렸던 것이다.

기효부의 딸은 참으로 예쁜 아이였다. 그녀는 검고 큰 눈에 호
기심을 가득 담고 무기를 쳐다보더니 어머니의 귀에 대고 속삭였
다.

"어머니, 저 사람이 의원님이세요? 이제 안 아파요?"

기효부는 무기앞에서 딸이 어머니라고 부르자 다시 얼굴이 붉어
졌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숨길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분은 장 오빠란다. 장 오빠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친구야."

이어 무기를 보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이 애는..... 불회(不悔)라고 해. 성은 양(楊)씨고."

무기가 웃으면서 말했다.

"좋은 이름이네요. 후회하지 않는다..... 내 이름과 비슷하군
요. 불회와 장무기."

기효부는 무기가 책망하는 빛없이 대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놓
였다.

"얘야, 무기 오빠의 의술이 참 훌륭하구나. 이제 어머니는 아프
지 않아."

양불회는 큰 눈을 깜빡깜빡하더니 돌연 무기를껴안고 그의 뺨
에 입을 맞추었다. 어머니를 안 아프게 해준 데 대한 감사의 표
시로 그렇게 한 것이다.

기효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못써요. 무기 오빠가 싫어하잖아."

양불회는 다신 눈을 깜빡이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장무기
에게 물었다.

"내가 한 짓이 싫어요?"

무기는 어쩔 수 없이 웃고 말았다.

"아니야, 나도 기분이 좋아."

무기도 야들야들한 볼에 살짝 입맞춤을 해 주었다. 양불회는 손
뼉을 치며 좋아했다.

"꼬마 의원님, 빨리 우리 어머니를 낫게 해 주세요. 그럼 내가
또 뽀뽀해 줄께."

무기는 천진난만한 양불회가 귀여웠다. 그가 지금까지 보아온
사람들은 모두 나이든 사숙과 사백들뿐이었다. 형과 아우로 지내
는 상우춘도 무려 여덟 살이나 위였다. 그와 배에서 만난 주지약
만이 같은 또래였는데 만난 지 하루 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내게도 이런 여동생이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기효부는 중상자들이 아직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혼자만
치료를 받는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무기, 나보다 먼저 오신 이분들을 치료해 주지. 난 이제 많이
좋아졌어."

무기가 대답했다.

"이분들은 호 선생님의 치료를 받으러 오셨는걸요. 그런데 선생
님은 지금 중병이라 치료하실 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이 분들은
돌아갈 생각을 않는군요. 기 아주머니는 호 선생님에게 치료를
받으려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이곳에 있으면서 의술을 약간 배
웠는데, 맡겨 주신다면 아주머니의 상처를 치료해 드리겠어요."

사실은 기효부 역시 호청우에게 치료를 받을 생각으로 왔었다.
그런데 무기의 말을 듣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니 호청우의 치료
를 받기는 힘들 것 같았다. 게다가 무기에게 맞은 침이 즉시 효
과가 있는 것을 보니 믿음직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고마와, 무기."

무기는 그녀를 객방으로 데리고 가서 상처를 살펴보니, 어깨와
팔에 세 군데의 칼자국이 나 있고 팔뼈가 으스러지기까지 했다.
이런 상태에서 뼈를 잇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 었으나 접곡
의선의 제자에겐 쉬운 일이었다. 그는 뼈를 잇고 약물을 발라 피
가 통하게 한 뒤 약방문을 지어 시동에게 달이게 했다.

"이제 한잠 푹 주무세요. 마취약 기운이 사라지면 통증이 심할
겁니다."

"고마와."

무기는 약실에 가서 대추와 살구를 가져다 양불회에게 주려 했
다. 그러나 먼길을 오느라 심신이 지친 그녀는 어머니곁에서 이
미 잠들어 있었다. 무기는 대추와 살구를 그녀의 주머니에 살짝
넣어주고 초당으로 돌아왔다.

각혈을 했던 화산파의 제자가 그를 보자 얼른 일어서서 읍을 한
뒤 말했다.

"호 선생이 병이 드셨다니, 소(小)선생께서 우리를 치료해 주신
다면 감사하겠소."

무기는 여지껏 상우춘과 기효부 이외의 사람에게는 의술을 시술
한 적이 없었다. 지금 이 사람들은 내장이 진상(震傷)되어 있거
나 사지가 절단되는 등 갖가지 중상이었다. 무기는 멋지게 치료
해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으나 호청우가 마음에 걸렸다.

"이곳은 호 선생님의 집입니다. 저도 그분의 환자인데 어떻게
주인의 허락없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화산파 제자는 무기가 진심으로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한 차례 치켜올려 주면 되겠거니 싶어 그는 다시 한
마디 덧붙였다.

"내가 알기로 명의는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인데, 소선생은 어린
나이에도 그처럼 의술이 뛰어나니 정말 세상에 보기드문 일이오.
그 솜씨를 한 번만 써주시오."

부유한 상인같이 생긴 뚱뚱보 양씨도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 열 네 명은 모두 강호에서 약간의 이름이 있는 사람들이
오. 소선생이 치료해 주기만 하면 소문이 퍼져 천하에 명성이 자
자해질 거요."

아직 나이가 어린 무기는 세상물정을 잘 알지 못했다. 사람들이
자기를 치켜올려 주니 우쭐해질 뿐이었다.

"천하에 이름을 날리는 것은 원치 않아요. 호 선생님이 손을 쓰
지 않으면 저로서도 방법이 없어요. 다만 여러분의 상처가 가볍
지 않은 듯싶으니 고통이나 좀 덜어드리지요."

그는 금창약을 꺼내 모두에게 고루 발라 주었다. 그런데 그 사
람들의 상처는 참으로 기이한 것이었다. 공격을 당한 수법도 모
두 제각기였다. 한 사람은 수십 개의 강침(鋼針)을 강제로 삼켰
는데 침에는 무서운 독이 묻어 있었다. 그런데 간장을 치료할 때
반드시 필요한 행간(行間), 중봉(中封), 음포(陰包), 오리(五里)
등의 요혈도 같이 상해 있었다. 어떤 사람은 두 손이 잘려 왼손
이 오른팔에 오른손은 왼팔에 붙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지네,
전갈 등 이 십 여 종의 독충에 물려 온몸이 푸르스름하게 부어
있었다. 그 상처를 살펴본 무기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
겼다.

'이 사람들의 상세가 이토록 해괴하니 나로서는 도저히 치료할
수 없겠어 누군지 모르지만 이들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의도적으
로 호 선생을 골탕먹이려는 게 분명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기 아주머니의 어깨 상처는 별게 아니잖아. 혹시 아주머니도
기이한 내상을 입었을지도 몰라. 아주머니만 예외일 리가 없잖
아!'

그는 급히 객방으로 뛰어가 기효부의 맥박을 짚어 보았다. 과연
그녀의 맥박은 빨리 뛰다 천천히 뛰고, 불규칙하여 내장에 이상
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왜 이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
지 무기는 알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상한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는 것을 무기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공동파 등 아버
지를 괴롭힌 문파의 자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죄과를 받는 것
이니 오히려 통쾌한 일이었다. 그러나 기효부의 상처만은 치료해
주고 싶었다. 그는 서둘러 호청우의 방문 앞으로 가서 낮은 목소
리로 말했다.

"선생님 주무십니까?"

"무슨 일이냐? 난 치료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는 사람들의 상처를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호청우는 발을 사
이에 두고 무기의 말을 자세히 들었다. 확실하지 않은 부분은 살
펴보고 와서 다시 설명하도록 했다. 무기는 오랜 시간에 걸쳐 열
다섯 사람의 상세를 자세히 알려 주었다.

한참 생각한 뒤 호청우가 입을 열었다.

"흥! 괴이한 상세지만 나한테는 어려울 것이 없다!"

그가 말을 다 마치자 무기의 등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호 선생, 그 금화의 주인은 세상에선 당신을 의선이라 부르지
만 이 열 다섯 가지 기이한 상처를 한 가지도 고칠 수 없을 거라
더군요. 과연 당신은 자신이 없어 병이 든 걸로 위장 하고 있군
요."

뒤를 돌아보니 공동파의 대머리 노인 성수가람이었다. 그의 머
리에는 머리카락이 한 오라기도 없었다. 무기는 그가 대머리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누군가 그의 머리에 독약을 발라 머리카락이 다
빠진 것이었다. 독약은 지금도 머리속으로 침투하고 있어 얼른
치료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이다. 지금 그의 두 손은 쇠사슬로
꽁꽁 묶여 있었다. 머리가 너무나 가려웠기 때문에 긁지 못하도
록 같이 온 사람이 그렇게 한 것이었다. 마구 긁었다간 두개골이
드러날 판이었다.

호청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가 치료를 할 수 있든 없든 자네를 치료하지 않을 걸세. 앞
으로 대엿새밖에 못 살 테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 처자의 얼굴이
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게. 여기서 얼쩡거려 봐야 이로울 게
하나 없네."

견딜 수 없이 머리가 가려운 성수가람은 담벼락에 머리를 연방
쳐박았다. 거기에 따라 손을 묶은 쇠사슬이 요란한 금속성을 냈
다.

그는 헉헉 거리며 말했다.

"호 선생, 그 금화 주인이 곧 이리로 올 거요. 당신도 곱게 죽
기는 어려울 테니 우리 모두 힘을 모아 그 자와 싸우는 게 드러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 낫지 않겠소?"

"자네들이 그 자를 이길수 있었다면 이곳까지 왔겠나? 난 자네
들 같은 멍텅구리들의 도움은 필요없네."

그는 호청우에게 애걸복걸했다. 그러나 호청우는 들은 척도 하
지 않았다. 송수가람은 마구 소리치기 시작했다.

"좋아! 어차피 모두 죽을 목숨들이니 당신의 집을 불살라 버리
겠다."

이때 밖에서 누군가가 걸어 들어왔다. 화산파의 제자였다. 그는
품에서 아마차 한 자루를 꺼내 성수가람의 가슴을 겨낭하며 냉랭
히 말했다.

"호 선생님께 그따위로 말하다니, 이 설가가 가만 있을 수 없
다. 만약 불을 지른다면 널 먼저 죽여 주마."

청수가람의 무공은 본디 그보다 한 수 위였지만 두 손을 묶인터
라 싸울 수가 없었다. 그저 두 눈을 부릅뜨며 씩씩댈 뿐이었다.

설가가 목청을 한층 돋궈 말했다.

"호 선배님, 후배는 설공원(薛公遠)이라 합니다. 화산파 선우
선생의 제자입니다. 선배님께 절을 올리겠습니다."

그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릎을 끓고 머리를 땅에 찧으며
연방 절을 해댔다. 설공원이 절을 해대는 광경을 바라 보면서 성
수가람은 한 가닥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호청우가 제아무리 거
만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지만 설가 녀석이 저렇게 신주대하듯 절
을 해대니 뭔가 될 것도 같았다.

설공원이 절을 마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호 선생님께서 마침 병이 드신 건 저희들이 복이 없는 탓입니
다. 그러나 이 소년 역시 의술이 고명하니 그가 치료하도록 허락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들의 상처는 모두가 괴이하여 접곡의선
의 제자가 아니면 천하에 그 누가 고칠 수 있겠습니까?"

호청우가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 아이는 이름이 장무기로 무당파의 제자였던 장취산의 아들
이지. 나 호청우는 명교의 교인으로 이 고상한 명문의 자제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야. 이 아이는 몸에 음독이 있어 나에게 치료
를 받으러 왔지만, 난 명교 교인이 아니면 절대 고쳐 주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의 생명을 구해 주지 않고 있어."

설공원은 마음이 착잡했다. 그는 무기가 호청우의 제자인 줄 알
았고, 그가 스승만은 못해도 호청우가 승낙만 하면 상처를 치료
해 줄 것으로 믿었는데, 알고 보니 그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환자일 줄이야!

호청우가 다시 말했다.

"자네들은 내 집에서 왜 꾸물거리고 있나? 흥, 내가 선심이나
쓸 줄 알고 그러는 건가? 소용없는 일이야. 저 아이에게 물어 보
게 내 집에 온지 얼마나 되는지 말이야."

설공원과 성수가람은 동시에 무기를 쳐다보았다. 무기는 손가락
두 개를 새워 보였다.

설공원이 물었다.

"이 십일?"

"아뇨, 꼭 이년 이개월 됐어요."

성수가람과 설공원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절망의 표정을 지었
다.

성수가람과 설공원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나
가려 했다. 그 때 호청우가 다시 말했다.

"이 무당파 소년은 의술을 조금 알지. 물론 무당파 의술은 우리
명교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사람을 엉터리로 치료해 죽이지는않
을 거야. 무당파인 이 아이가 자네들을 구해 줘도 좋고 견사불구
해도 좋네만, 그것은 우리 명교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이
야."

설공원은 잠시 생각했다. 그의 말 속에는 무기에게 의술을 베풀
라는 뜻이 담겨 있는 듯했다.

"호 선생님, 이 장소협이 손을 써준다면 우리들이 살아날 가망
이 있을까요?"

"그가 구하고 못 구하고는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라니
까. 무기야, 내 말을 명심해 듣거라. 내 집에서 의술을 펼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집 밖에 나가서 의술을 베푼다면 상관하지 않겠
다."

설공원과 성수가람은 희망에 부풀었다가 이건 또 무슨 뜻인가
하여 멍하니 서서 호청우의 말뜻을 되씹고 있었다.

무기는 이들보다 훨씬 총명했기 때문에 즉시 그 뜻을 알아 들었
다.

"호 선생님께서 지금 병중이시니 당신들은 시끄럽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자, 모두 나를 따라오십시오."

초당에 들어서 장무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러분, 제가 배운 의술은 보잘것없어 여러분의 괴이한 증세를
치료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께서 믿어 주신
다면 제가 온 힘을 다해 치료해 보겠습니다. 생사는 하늘에 맡길
수밖에없습니다."

이 무렵 사람들의 증세는 못 견디도록 가렵거나 마비되는 등 갈
수록 악화되어 잠시 고통을 면할수만 있다면 비상이라도 먹을 판
이었다. 그러니 무기의 말에 감지덕지 할 뿐이었다.

무기가 다시 말했다.

"호 선생님은 제가 그분의 집 안에서 의술을 하는 것을 싫어하
십니다. 그러니 모두 문 밖으로 나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상수가람이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머리가 간지러워 죽을 지경이야. 그러니 장소협, 나부터
먼저 치료해 주겠는가?"

그는 말을 마치고 쇠사슬을 철그렁거리며 성큼성큼 문 밖으로
나갔다.

무기는 잠시 생각하더니 약실에 가서 남성. 방풍, 백지, 천마,
강활, 백부자, 화예석 등 십 여 종의 약재를 골라 시동에게 약절
구에 넣고 찧게 한 뒤, 달인 술로 이겨 고약을 만들게 했다. 무
기는 이 고약을 성수가람의 머리에 붙여 주었다.

고약이 머리에 닿는 순간 성수가람은 비명을 지르며 펄쩍 펄쩍
뛰었다.

"아이구 앞, 나 주네! 아, 이렇게 아플 수가 있다니..... 하지
만 가려운 것보단 훨씬 낫군."

그는 길길이 소리를 지르며 풀밭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아, 이렇게 아프다니! 빌어먹을! 하지만 가렵지 않으니 살 것
같네. 이 성수가람은 자네한테 오직 감사할 뿐이네."

사람들은 성수가람의 가려움증이 금세 낫는 걸 보자 앞을 다투
어 무기에게 치료를 부탁했다. 이때 배를 움켜쥐고 뒹굴며 비명
을 지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강제로 삼 십여 마리의 거머리를
삼킨 사람이었다. 위에 들어간 거머리는 죽지 않고 위벽과 장벽
에 붙어 피를 빨아먹고 있었다. 무기는 의학서적에서 거머리가
꿀에 녹는다는 것을 본 것이 생각났다. 호접곡에는 꽃이 많았다.
그는 시동에게 꿀 한 잔을 가져 오게 하여 그 사람에게 먹게했
다.

새벽녘에 기효부와 그의 딸 양불회가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와
보니, 무기는 이때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기효부는 상처에 붕대를 감아 주고 약을 먹이기도 하며 그를 도
와 주었다. 어린 양불회는 대추와 살구를 오물오물 먹으며 나비
를 쫓아다니며 놀 뿐이었다.

오후가 되자 무기는 사람들의 상처를 대충 다 치료했다. 출혈을
막고 고통이 심한 자는 고통도 멎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상
세가 워낙 괴이했으므로 완치된 것은 아니었다. 무기는 방에 돌
아가 눈을 붙였다. 잠결에 심한 신음소리를 듣고 깨어보니 몇 사
람은 상세가 좋아졌으나 대부분이 오히려 악화되어 있었다. 장무
기는 속수무책인지라, 호청우한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호청우는 냉랭하게 말했다.

"그 사람들도 우리 명교 사람들이 아니니 죽든 살든 나는 상관
하지 않겠다."

무기는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

"만약 명교 제자 한 사람이 몸은 멀쩡한데 배 속에 응혈이 져
있고 얼굴이 불그죽죽하며 정신이 혼미하여 죽을 것 같으면 선생
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가 명교 제자라면, 나는 산갑, 귀미, 홍화, 생지, 영선, 도
선, 대황, 유향을 술에 넣고 끓인 뒤 동변(童便)과 함께 복용시
켜 설사를 하게 함으로써 응혈을 없애겠지."

무기가 다시 물었다.

"만약, 명교 제자 한 사람의 왼쪽 귀에 납물이 들어가고 오른쪽
귀에 수은이 들어간데다 눈에는 옻칠을 해서 통증이 극심해지고
앞을 볼 수 없게 됐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호청우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만약 그가 명교 제자라면 나는 수은을 왼쪽 귀에 넣어 줄 것이
다. 납이 수은에 녹아 나올 테니 말이다. 오른쪽 귀는 수은이 금
에 붙는 성질이 있으니 금침으로 조심스레 후벼내면 된다. 옻칠
이 묻은 눈에 방계를 찧어 즙을 내서 바르면 치료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무기는 어려운 치료법 하나하나를 명교 제자
를 빌어 알아냈다. 호청우도 무기의 속셈을 빤히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호청우의 치료법도 효과가 없는
수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무기는 다시 호청우에게 물었고, 호청
우는 다시 연구하여 다른 처방을 가르쳐 주곤 했다.

이렇게 오,육 일이 지났다. 사람들의 상세는 조금씩 나아갔다.
기효부가 입은 내상은 독에 중독된 것이었다. 무기는 자세히 진
단한뒤 용골, 소목, 오령지, 천금자, 합분 등을 복용시켜 해독
했다. 약을 복용한 뒤 맥박을 짚어보니 상세가 천천히 나아지고
있었다.

이 무렵 사람들은 초당 밖에 차양을 치고 땅에다 볏짚을 깐 뒤
거기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기효부는 이들과 몇 장 떨어진 곳에
작은 움막을 짓고 딸과 함께 지냈다. 움막은 무기의 분부에 따라
사람들이 지어준 것이다. 이 열 네 명은 원래 천하를 종횡하던
호걸들이었으나 지금은 무기의 손에 목숨이 달렸으니 무기의 분
부를 거역할 사람이 없었다. 무기는 이들을 치료하느라 바쁘고
고생스러웠으나, 이로 인해 호청우에게 기묘한 처방 수법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큰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환자들의 상세가 변화하여 거의 나아가는 듯하더니 갑자
기 악화되었다. 무기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어 호청우에게
다시 물었다.

호청우는 한 마디로 대답했다.

"그 사람들의 상세는 정말 보통이 아니야. 한 번 치료해서 나을
것이라면 구태여 호접곡까지 와서 부탁했겠느냐?"

이날 밤 무기는 침상에 누워 사색에 잠겼다.

'상세가 반복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열 다섯
사람의 상세가 모두 똑같이 반복해서 변하는 것은 정말 기괴한
일이야.'

삼경이 될 때까지 그는 이 생각 저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홀연히 창 밖에서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발소리를 죽이
며 살금살금 걷고 있었다. 무기는 호기심이 일어 창호지에 침을
발라 구멍을 낸 다음 내다보았다. 어떤 사람의 뒷모습이 느티나
무 뒤로 사라졌다. 옷차림새로 보아 틀림없는 호청우였다.

무기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호 선생이 뭘 하시는 거지? 천연두가 다 나으셨나?'

호청우는 다른 사람이 보는 걸 피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에 그
는 기효부 모녀가 기거하는 움막으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무기는
가슴이 철렁했다.

'기 아주머니를 욕보이려는 걸까? 내 비록 그의 적수는 못 되지
만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무기는 창을 뛰어넘어 발소리를 죽이고 호청우의 뒤를 따랐다.
호청우는 조용히 움막 안으로 들어갔다. 움막은 엉성하여 담도
문도 없이 그저 비바람만 피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
무나 쉽게 드나들 수 있었다.

무기는 움막 뒤로 돌아가 땅에 엎드려 안을 살폈다. 기효부 모
녀는 볏짚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호청우는 품에서 알약을 하
나 꺼내 기효부의 약그릇 속에 넣더니 즉시 밖으로 나왔다. 그는
푸른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천연두가 완전히 나았는지 어떤
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순간, 무기는 짚이는 게 있어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
렸다.

'그 동안 호 선생이 야밤에 몰래 나와 독약을 투약했구나. 그래
서 이 사람들이 계속 낫지 않는 거로군.'

는 다시 성수가람과 설공원 등이 있는 곳으로 가서 독약을 몰래
넣었다. 열 네 사람의 독약이 각기 다르기 때문인지 시간이 한참
걸렸다. 무기는 기효부가 자고 있는 움막으로 들어가 약그릇을
살펴보았다. 약그릇엔 팔선탕이 조제되어 아침 일찍 일어나는 즉
시 먹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약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
다. 이때 호청우가 침실로 돌아가는 기척이 들렸다. 무기는 약사
발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기효부를 깨웠다.

"기 아주머니, 기 아주머니."

기효부는 이목(耳目)이 민감해 깊은 잠에 빠졌다가도 조그만 소
리에 금방 깨어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무기가 여러 차례 불러
도 깨어나지 않았다. 무기가 어깨를 몇 번이나 흔들어서야 그녀
는 겨우 깨어났다.

기효부는 놀라서 물었다.

"누구세요?"

"무기예요. 아주머니 약에 어떤 사람이 독약을 넣었으니 개울에
다 몰래 버리시고 아무 내색도 하지 마세요. 내일 제가 자세한
것을 말씀드리겠어요."

기효부는 머리를 끄덕였다. 무기는 호청우한테 들킬까 봐 조심
스럽게 창을 넘어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식사가 끝나자 무기와 양불회는 나비를 쫓으며 멀
리 계곡 밖으로 나갔다. 기효부는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사람들
이 눈치채지 않게 무기를 따라갔다. 이 며칠동안 무기는 양불회
와 자주 놀아 주곤 했으므로 그들 셋이 멀리 가는 것을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참을 나가니 조그마한 언덕이 있었
다. 무기가 풀밭에 앉자 기효부가 딸에게 말했다.

"볼회야, 나비는 그만 쫓고 들꽃으로 화관을 세 개 만들어 하나
씩 머리에 쓰자꾸나."

양불회는 손뼉을 치고 기뻐하며 꽃을 따러 갔다.

무기는 간밤에 호청우가 사람들의 약에 몰래 독을 넣은 일을 이
야기해 주었다.

"제가 어제 아주머니의 팔선탕 냄새를 맡아 보니 철선초(鐵선
草)와 투골균(透骨菌)의 냄새가 나더군요. 이 두 가지 약은 상처
를 치료하는 특효약이지만 독성이 강하고 팔선탕의 여덟 가지성
분과는 상충되기 때문에 몸에 아주 나쁜 걸과를 가져 오죠."

"다른 사람들의 약에도 독약을 넣었다니 그것 참 이상하군."

"기 아주머니, 이 호접곡은 아주 외진 곳인데 어떻게 알고 오셨
나요? 그리고 금화 주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나와 관계가 없는
일이지만 까닭을 알 수 없어서 묻는 겁니다."

"무기가 내 생명을 구해 주었는데 뭘 속이겠어. 더군다나 나와
불회에게 이렇게 잘 대해 주니....."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이 년 전에 난 한 사저와 좋지 않은 사건이 있어서, 사부한테
도 못 가고 집에도 못....."

"그 정민군은 나쁜 여자예요. 하지만 그 여자를 두려워 할 것
없어요."

기효부는 이상해서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지?"

무기는 그날 밤 상우춘과 함께 숲에 숨어 그녀가 팽화상을 구해
주는 걸 보았다고 얘기해 주었다. 기효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남이 알아서 안 될 일이라면 애당초 행하지를 말라는 옛말이
맞군."

"기 아주머니, 저의 은사숙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결혼하지 않아
도 괜찮을 거예요.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요? 나중에 은사숙을
만나면 제가 아주머니를 탓하지말라고 이야기하겠어요."

"나는 무기의 사숙을 일부러 피한 것이 아니야. 어쩔 수 없어
그랬던 거야. 그러나 후회하지 않아."

그녀는 무기의 얼굴을 쳐다보며 혼자 생각했다.

'이 아이의 마음은 하얀 종이처럼 깨끗하구나. 남녀간의 복잡한
문제를 무기에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다. 더군다나 이 일은 그
것과 관계가 없으니까.'

그녀는 화제를 돌려 말했다.

"나는 정사저와 싸운 뒤 아미산에 돌아가지 않았어. 불회를 데
리고 여기서 서쪽으로 삼백 리 떨어진 순경산(舜耕山)에 은거하
며 이 년을 나무꾼이나 농사꾼과 어울려 참 즐겁게 살았어. 그런
데 보름 전에 불회의 옷을 사려고 조그만 진(鎭)에 나왔다가 담
장에 흰 분필로 그린 불광(佛光)과 검의 그림을 보았어. 분필의
흔적으로 보아 최근에 그린 거였지. 그 그림은 우리 아미파가 동
문을소집하는 암호야. 그림을 본 난 잠시 당황했어. 그러나 사
실 정사제와 싸우긴 했지만 내 잘못도 아니었고 사문에 죄지은
일도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 오히려 동문이 어려움을 만났는데도
도와주지 않는게 나쁘다는 생각이 들어 그 암호를 따라 봉양(鳳
陽) 까지 갔어....."

기효부는 말은 계속 되었다.

봉양성 안에서 또 암호를 보고 그녀는 불회를 데리고 임회각(臨
淮閣)이라는 주루에 갔었다. 주루에는 이미 칠,팔 명의 무림인들
이 와 있었다. 공동파의 성수가람, 화산파의 설공원과 세 명의
사형제도 그 속에 있었다. 그런데 아미파 동문은 보이지 않았다.

"나와 성수가람, 설공원은 전에 만난 적이 있었으므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그들도 동문의 암호를 보고 왔다는 거야.
무슨 일인지 아무도 모르더군. 그날 하루 종일 기다렸으나 도움
을 요청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어. 나중에 다른 파 사람들이 몇
명 더 왔지. 신권문과 개방 사람도 있었는데 역시 동문의 연락을
받고 임회각까지 왔다는 거였어. 다음날 또 몇 명이 왔는데 모두
가 암호를 보고 왔을 뿐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더군. 우린 의논
끝에 뭔가 이상하다는 결론을 내렸지. 어떤 적에게 우롱 당하는
건 아닌가 하고....."

장무기는 그녀의 말에 그저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임회각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열 다섯 명으로 아홉 개 문파 사
람들이었어. 이들 문파마다 암호가 다르고 비밀에 속하는 것이어
서 본문 사람이 아니면 그 뜻을 알 수 없게 돼 있는데, 만약 적
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면 어떻게 아홉 개 문파의 암호를 다 알아
냈을까? 나는 볼회를 데리고 있어 험한 일을 겪을 게 두려운데다
동문을 만나는 게 싫어서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층계 밑에서 쿵쿵
하는 하는 소리가 들리더군. 지팡이로 층계를 내리찍는 것 같았
어. 이윽고 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허리가 굽은 백발의 노파가 올
라왔어. 노파는 몇 걸음 걷다가 기침을 하곤 했는데 무척 고통스
러운 모양이더군, 옆에는 열 두세 살쯤 되는 소녀 하나가 노파의
팔을 잡고 따라 올라왔어. 노파는 오른손에 지팡이를 짚고 옷을
걸친 폼이 가난한 늙은이 같았는데 왼손에 금빛이 번쩍이는 염주
가 쥐어져 있더군. 이상해서 자세히 살펴 보았더니 염주 하나하
나가 모두 황금으로 만든 매화였어....."

무기는 여기까지 듣자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다.

"그 노파가 금화 주인인가요?"

"맞았어. 그러나 그 때는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그녀는 품에서 작은 황금 매화 한 송이를 꺼냈다. 무기가 보았
던 그 매화와 똑같았다. 무기는 며칠 동안 금화 주인이 누구인
무척 궁금했다. 보나마나 무섭고 흉악한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했
는데 기효부로부터 중병에 걸린 노파라는 말을 듣자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기효부가 말을 계속했다.

"그 노파는 주루에 올라오자 한바탕 기침을 하며 옆에 있던 소
녀에게 '얘야, 저자들에게 물어 봐라. 무당과 곤륜파 사람들은
안 왔느냐구?'했어. 노파가 올라올 때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
았는데, 그 소리를 듣자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노파를 쳐다
보았지. 그러자 소녀가 천연덕스럽게 말하더군. '우리 할머니께
서 너희들에게 물으신다. 무당파와 곤륜파 사람도 왔느냐구.' 하
도 기가 막혀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잠시 후에 공동
파의 성수가람이 말했지.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요?' 그 때 노파
가 허리를 구부리며 또 기침을 해냈는데 바로 그 순간 한 가닥
경풍이 내 가슴을 향해 날아왔어. 어디서 날아왔는지도 모르는
체 나는 엉겁결에장으로 받아쳤지. 돌연 가슴이 콱 막히며 기혈
이 솟아올라 버틸 수가 없었어. 나는 주루의 바닥에 쓰러져 선혈
을 쏟아냈어. 눈깜짝할 사이에 우리 열 다섯은 모두 한 대씩 얻
어맞고 쓰러졌지. 노파의 출수가 워낙 신출귀몰하여 우리들은 손
한 번 써보지 못한 체 내력에 의해 오장육부가 진상(震傷)당한
거야. 노파는 염주에 꿰었던 매화를 한 알씩 던져 열 다섯 사람
의 팔에 꽂더군. 그러더니 돌아서서 소녀의 부축을 받아 몸을 달
달 떨며 주루를 내려가더군. 지팡이 짚는 소리가 천천히 멀어져
갔는데 기침소리는 계속귓전에 맴돌았어."

기효부가 여가까지 말했을 때 양불회는 화관 하나를 만들어 가
지고 달려왔다.

"어머니, 이 화관을 머리에 써봐요."

그녀는 화관을 어머니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기효부는 즐겁게 웃으며 계속 말했다.

"당시 열 다섯 사람은 모두 부상을 당해 신음하는 사람, 숨을
헐떡이는 사람 등....."

"어미니, 그 나쁜 할망구 이야길 하는 거예요? 그 이야기는 하
지 말아요. 난 무서워."

"그래 불회야. 다시 가서 화관을 만들어 무기 오빠한테도 주어
야지."

양불회는 무기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떤 색깔을 좋아해요?"

"빨간 색. 음, 흰색이 섞어도 괜찮지. 그리고 크면 클수록 좋
아."

양불회는 두 손을 활짝 펴 보이며 말했다.

"이만큼?"

"그래, 그만큼."

양불회는 손뼉을 치며 깡총깡총 뛰어갔다.

"만들어 오면 꼭 써야 해!"

기효부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십 여 명의 사내들이 다가오는 게 보
였어. 모두 주루의 주보, 주인, 요리사들이더군. 그들은 우리를
주방으로 끌고 갔어. 그 때 불회는 놀라서 큰 소리로 울며 내 볕
에 있었지. 그 주인이란 자는 쪽지를 보고 성수가람을 가리키며
말하더군. '이 자의 머리에 이 고약을 발라라.' 그러자 주보는
준비해 두었던 고약을 성수가람의 머리에 발랐어. 주인은 또 쪽
지를 보더니 다른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지. '그 자의 오른손을
잘라 왼손에 붙여라.' 요리사가 부엌에서 칼을 가져다 명령대로
했어. 내 차례가 오자 다행히도 괴상한 극형을 가하지 않고 달착
지근한 약물을 먹이더군. 나는 극독일 거라고 생각했지. 그 때는
그들이 하는 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어..... 열 다섯 사람에게 괴
이한 혹형을 가한 뒤 그 주인이 다음과 같이 말했지. '당신들은
모두 불치의 상처를 입었소. 잎으로 열흘밖에 살지 못할 거요.
다만 금화의 주인께서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 한 가닥 살 길을
알려 주겠다고 하셨소. 즉 당신들은 빨리 여산호(女山湖)반에 있
는 호접곡으로 가서 접곡의선이란 의원에게 치료해 달라고 부탁
하면 된다 하셨소. 아울러 금화 주인이 머지않아 그를 찾아갈 것
이니 관을 준비하고 있으라고 전하시오!' 그 자는 이렇게 말한
뒤 호접곡으로 오는 길을 상세히 알려 주어서 모두 이리로 오게
된 것이야."

무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주루의 주인, 주보, 요리사들도 모두 그 나쁜 노파의
일당인가요?"

"노파의 부하들이겠지. 그런데 왜 우리에게 그렇게 가혹한 형을
가했는지 알 수가 없어. 노파는 어째서 이런 괴이한 일을 했을
까?"

무기는 한참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이 금화 노파가 호 선생님을 혼내 주러 온다면 호 선생님은 모
두를 치료해 준 다음 협력해서 그와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호
선생님은 터놓고 사람들을 구하지 않고 암암리에 저를 통해 치료
케 한 다음, 다시 야밤에 몰래 독약을 넣어 그들을 죽을 수도 살
수도 없이 만들려는 모양인데 정말 기이한 일이로군요."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생각해 보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양
불회가 큰 화관을 가지고 와서 무기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무기가 말했다.

"기 아주머니, 앞으로는 제가 직접 갖다 드리는 탕약 외에는 아
무것도 드시지 마세요. 밤에는 머리맡에 병기를 준비해서 외인의
침입에 방비하시구요. 제가 지은 약을 드시고 내상이 나은 뒤에
불회를 데리고 몰래 달아나세요."

기효부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기, 호 선생의 속셈을 헤아릴 수 없으면서 그와 함께 지내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차라리 우리 함께 이곳을 떠나자."

"호 선생님은 지금까지 저에게 잘해 주셨어요. 사실 선생님은
내 몸의 음독을 제거한 뒤에 죽이겠다고 했답니다. 다만 여지껏
낫지 않아 나를 죽일 필요가 없는 거죠. 지금 떠나는 게 제일 좋
긴 한데 아주머니의 내상을 고치는데 몇 가지 불확실한 것이 있
어요. 그것을 호 선생님에게 물어 봐야 해요."

"그가 독약으로 나를 헤치려 하는데 제대로 가르쳐 줄까?"

"그렇지 않아요. 호 선생님이 가르쳐 준 치료법만은 거짓이 아
니에요. 그 정도는 분별할 줄 알아요. 원래는 금화 주인이 호 선
생님이 병을 앓고 있는 중에 찾아온다기에 크게 염려 했는데 호
선생님의 병은 가짜인 것 같아요."

이날 저녁 무기는 신경을 곤두세워 잠을 자지 않았다. 삼경이
되자 또다시 살금살금 자기 방을 빠져 나온 호청우는 기효부의
움막으로 가서 그녀의 약에 독약을 넣는 것이었다.

이렇게 사흘이 지났다. 기효부는 독약을 먹지 않았으므로 병세
가 매우 좋아졌다. 그러나 성수가람, 설공원 등은 병세가 좋아졌
다가 재발하는 반복을 거듭했다. 성질이 급한 몇 사람은 원망을
하기 시작했다. 무기의 의술이 엉터리라는 것이다. 무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늘 밤만 지나면 기효부 모녀와 함께 멀리
떠날 생각이었다. 그는 자기 몸에 퍼진 음독은 어차피 제거하기
어려우므로 무당산으로 돌아가지 않고 심산유곡으로 들어가 혼자
조용히 살다 죽기로 결심했다.

이날 밤 무기는 내일 새벽에 이곳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왠지 처
량한 생각이 들었다. 호청우가 비록 괴팍한 사람이기는 하나 자
기한테는 잘해 주지 않았던가. 그 동안 같이 지내며 의술도 많이
배웠다. 호청우와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무기는 벌떡 일어나 호청우를 찾아갔다. 조만간 금화 노파가 찾
아올 텐데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은근히 걱정스러웠다.

"호 선생님, 이젠 호접곡이 싫지 않으십니까? 경치가 좋은 다른
곳으로 집을 옮겨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잠시 후에 호청우의 대답이 들려왔다.

"내 이렇게 병이 들었는데 어딜 간단 말이냐?"

"마차를 타고 가시면 되지요. 마차의 문과 창을 천으로 덮어 통
풍이 안 되게 하면 되잖아요. 호 선생님께서 가신다면 저도 따라
가겠습니다.

호청우는 깊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마음이 고맙구나. 그러나 천하가 아무리 크다 해도 어딜 가
나 마찬가지니라. 요즘 가슴에 무슨 이상은 없느냐?"

"한기는 날로 심합니다. 어차피 제 병은 고칠 수 없는 것 아닙
니까?"

호청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신통한 약방문을 하나 지어 주마. 당귀, 원지, 생지, 독
활, 방풍, 다섯 가지 약을 써서 이경 때쯤 천산갑과 함께 급히
복용하거라."

무기는 깜짝 놀랐다. 이 다섯 가지 약은 자기의 병과는 아무 상
관이 없는 것들이었다. 게다가 약성이 서로 상극되는 약제들을
천산갑과 같이 복용하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약의 분량은 어느 정도로 하나요?"

호청우는 갑자기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분량은 많을수록 좋다. 자, 이젠 빨리 물러나지 않고 뭘 꾸물
대는 거냐?"

이렇게 까닭도 없이 갑자기 꾸짖어 대니 무기는 더 이상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방으로 돌아왔다.

'자기를 걱정해서 멀리 피하라고 권했더니 오히려 이렇게 모욕
을 주다니. 그러고 그 엉터리 약방문은 뭔가?! 내가 그렇게 쉽게
넘어갈 줄 알구?'

그는 침상에 누워 호청우가 한 말들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
러다가 잠이 막 들려는데 문득 머리에 스치는 것이있었다.

'당귀, 원지.....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그런데..... 당귀(堂
歸)라는 말은 마땅히 돌아가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머지 뜻도 분명해졌다. 원지(遠志)는
뜻이 먼 곳에 있으니 당귀라는 말과 합쳐 멀리 도망하라는 뜻이
다. 생지(生地)는 살 곳을 말하는 것이고, 독활(獨活)은 혼자 살
라는 뜻이다. 방풍(防風)은 바람, 즉 풍문을 방비하라는 뜻이니
아무도 모르게 하라는 말이다. 또 이경에 천산갑(穿山甲)이란,
이경에 대로로 가지 말고 산길을 뚫고 가라는 암시가 아닌가. 그
리고 급히 복용하라는 것은 빨리 도망가라는 뜻임이 분명했다.

이렇게 풀이하고 보니 호청우가 약방문으로 알려 준 뜻이 명백
해졌다. 그러나 이해가 가지 않는 점도 있었다.

'호 선생님은 재앙이 임박해 있음을 알고 계셨구나. 그런데 아
직 적이 오지 않은 상황에서 왜 직접 말해 주지 않고 이렇게 어
렵고 불분명하게 이야기하실까? 만약 내가 그의 말뜻을 알아채지
못했다면 일을 그르치는 게 아닌가. 어쨌든 이미 이경이 지났으
니 빨리 피해야겠다.'

그는 호 선생이 이토록 어렵게 말해야 할 사연이 있으리라고 생
각했다. 그리고 그가 아직 도망가지 않은 것은 적을 퇴치할 묘책
을 생각해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호청우가 소문을 내지 말고 혼
자 가라고 했지만 기효부 모녀는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기
는 즉시 방을 나와 기효부에게 갔다. 가 보니 누군가가 허리를
구부리고 잠자는 기효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침 반달이 움막
틈새로 비쳐 무기는 그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푸른 천으로 얼굴
을 가린 것으로 보아 호청우가 분명했다. 호청우는 기효부를 잡
고 입을 벌려 억지로 알약을 먹이려 하고 있었다. 무기는 급히
뛰어 들며 소리쳤다.

"안 돼요!"

그 사람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 사이에 그의 손에서
빠져 나온 기효부는 그의 등을 항해 일장을 쳤다. 그는 이내 쓰
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얼굴을 가린 푸른 천이 풀어지면서 얼굴
이 드러났다.

무기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는 호청우가 아니
었던 것이다. 뜻밖에도 중년 부인이었다.

여인임을 확인한 장무기는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당신은 대체 누구요?"

여인은 기효부의 장력에 적중되어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말을
제대로 못했다.

기효부도 다그치듯 물었다.

"왜 자꾸 나를 해치려는 거죠?"

중년 부인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기효부는 장검을 뽑아 그녀의 심장을 겨냥했다.

"저는 호 선생님을 뵙고 올께요."

장무기는 호청우가 이미 이 부인에게 독수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숨에 호청우의 침실 앞으로 달려
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선생님! 어디 계십니까?"

주위는 칠흑처럼 어둡고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장무기
는 다급한 나머지 상에서 화섭자를 집어 횃불에 불을 붙였다. 침
상에 있어야 할 호청우가 보이지 않았다. 장무기는 호청우의 모
습이 보이지 않자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선생님께서 적에게 납치돼 갔다면 오히려 생명에는 지장이 없
을 것이다.'

그는 급히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했다. 갑자기 침대 밑에서 거칠
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얼른 허리를 굽혀 침대밑을 살펴보
았다. 호청우가 손발이 묶인 채 침대 밑에 누워 있었다. 그래서
대답을 못했던 것이다. 장무기는 그의 입에 물린 자갈을 빼고 나
서 손발을 묶을 밧줄도 풀어 주려고 했다.

그런데 호청우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 여인은?"

"그녀는 이미 기 아주머니에게 제압되어 도망가지 못할 겁니다.
혹시 불편하신 데라도 없으십니까?"

"밧줄은 있다가 풀고 우선 그녀부터 데려오게. 어서! 늦으면 큰
일나네."

"왜 그러십니까?"

"어서 그녀부터 데려오라니까! 아니, 우선 우황혈갈단(牛黃血竭
丹) 세 알을 꺼내 그녀에게 먹여라! 세 번째 서랍에 있다. 어서
서둘러라."

그는 뭐라고 말할 수 없이 화급했다.

우황혈갈단은 해독 영약으로서 갖은 진귀한 약물로 제조한 것이
라 한 알만 있어도 충분히 극독을 해독할 수 있는 데, 세 알까지
복용시키라고 하니 장무기는 그 부인의 중독 상태가 굉장히 지독
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해약을 꺼내 기효부의 움막으로 달
려가 부인에게 외쳤다.

"어서 이 약을 복용하시오!"

부인이 대뜸 호통을 쳤다.

"썩 꺼지거라! 누가 너의 호의를 받는다고 했느냐!"

"이건 호 선생님께서 주신 것이오."

"잔말 말고 썩 비키거라!"

장무기는 두 말 않고 그녀에게 다가가 강제로 알약을 먹였다.
그리고 기효부에게 말했다.

"이 여인을 호 선생님께 데려가죠."

기효부는 여인의 혈도를 찍고 장무기와 부축하여 호청우에게 데
려갔다.

호청우는 여전히 땅바닥에 누워 있다가 여인이 들어서자 급히
물었다.

"약을 복용시켰나?"

"네."

"옳지 그래야지."

호청우는 비로소 안심이 되는 듯했다. 장무기는 그의 밧줄을 풀
어 주었다. 호청우는 밧줄이 풀리기 무섭게 여인에게 다가가 그
녀의 눈을 살펴보고 완맥을 짚어보더니,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어찌 외상까지 입었소? 누가 그랬소?"

그의 음성은 경황스러우면서도 안타까움이 역력했다. 그 여인은
입을 삐쭉거리며 코웃음을 쳤다.

"당신의 제자에게 물어보면 알 게 아니에요?"

호청우는 고개를 돌려 장무기에게 물었다.

"자네가 그랬나?"

"그녀가....."

장무기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철썩! 철썩! 하고 호청우가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장무기는 졸지에 뺨을 맞아 눈앞에 불꽃이 튕기고 볼이 얼얼했
다.

기효부는 대뜸 장검을 뽑아들고 일갈을 질렀다.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호청우는 시퍼런 광채가 번뜩이는 장검을 보고도 전혀 아랑곳하
지 않고 그 부인에게 물었다."

"가슴은 어떻소? 배가 아프진 않소?"

그의 태도나 말투는 매우 근심스럽고도 끔찍한 정감이 듬뿍 담
겨 있었다. 평상시 견사불구의 차가운 태도와는 정반대였다. 그
러나 그 부인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호청우는 부인의 혈도를 풀어 주고 손발을 주물러 주었다. 그리
고 몇 가지 약을 꺼내 정성스레 복용시킨 후, 그녀를 안아다 침
상에 눕혀 이불까지 덮어 주었다. 장무기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떻게 이처럼 부드럽고 온화하게 대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장무
기는 잔뜩 부어오른 두 뺨을 어루만지면서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호청우는 애정어린 눈길로 부인을 한참 동안 주시하더니 부드럽
게 말했다.

"이번에는 독에다가 상처까지 입었으니, 만약에 내가 완치시키
면 앞으로 다신 쓸데없는 시합을 하지 않기로 약조 합시다."

그 부인은 냉랭히 웃었다.

"이까짓 외상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복용한 독약이 문제
죠. 만약에 정말로 나를 완치시킬 수 있다면 굴복하겠지만, 아마
이번만큼은 의선의 실력이 절대 독선(毒仙)을 따라가지 못할 거
예요."

장무기는 비록 남녀간의 미묘한 감정을 이해 못했지만 두 사람
이 서로 애정을 갖고 있다는 걸 간파했다.

호청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십 년 전에도 말했듯이 의선은 절대로 독선의상대가 될 수 없
소. 그런데 당신은 그걸 믿지 않고 오히려 자기 몸을 시험 대상
으로 삼을 게 뭐요? 이번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의선이 독선보
다 낫다는 것을 보여 주리다.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말이
오."

부인은 교태스러우면서도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만약에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중독시켰다면 결국 또 일부러 져주
려고 못 고치는 척했을 게 뻔해요. 하지만 이번만은 전력을 다하
지 않고는 못 배길걸요?"

호청우는 그녀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이 어디 그런 농담할 때요? 어서 입을 다물고 조용히 쉬기
나 하시오."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죠."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가에 달콤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줄곧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기효부와 장무
기는 뭐가 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 오리무중에 빠졌다.

요염하게 생긴 중년부인은 대관절 누구일까?


----- 제 2 권 8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2 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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